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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989 불지경론(佛地經論) 5권

by Kay/케이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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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경론(佛地經論) 5

 

불지경론 제5권

친광 지음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또 원경이 두루 밝으면 그 면(面)이 모든 곳에서 온갖 영상이 두루 일어나는 의지(依)와 반연(緣)이 된다. 이와 같이 여래의 대원경지도 끊임없고 한량없는 온갖 행으로 잘 닦여져서 모든 지혜의 영상이 두루 일어나는 의지와 반연이 되니, 이른바 성문승의 모든 지혜의 영상과 독일각승(獨一覺乘)의 지혜의 영상과 위없는 대승의 모든 지혜의 영상이다. 모든 성문승 사람으로 하여금 성문승에 의지하여 벗어나 여의게 하려하고, 독일각승 사람은 독각승에 의지하여 벗어나 여의게 하려하고, 대승의 사람들은 무상승(無上乘)에 의지하여 벗어나 여의게 하려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하나의 지혜가 일체시에 능히 3승의 일체지 등의 모든 법의 영상을 낳는다는 것인가?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말한다.
‘또 원경이 두루 밝으면 그 면이 등등’은 세간의 원경이 두루하여 표면 등에 모든 영상을 나타내기 위하여 갖가지 가행(加行)으로써 그 표면의 전후와 양 둘레를 잘 닦으면 일체처에서 능히 연(緣)이 되어서 두루 모든 영상을 나타내는 것처럼 경지(鏡智) 또한 그러하다.모든 여래가 보살이었을 때 비록 종성(種性)은 있지만 장애에 뒤덮여 있는 탓에 아직 그 속에서 3승의 일체지 등의 모든 법의 영상을 능히 일으켜 낳지 못하지만, 정근(精勤)하고 수습(修習)하여 한량없는 온갖 행을 잘 닦는 것을 끊이지 않으면 금강유정이 바로 현재 앞에 나타날 때에 모든 장애를 떠나서 청정하고 원만해지며, 두루 능히 3승의 지혜 등의 일체 영상을 끊임없이 일으키나니, 분(分)에 대해서는 분의 한계가 없기 때문에 한량없고 시(時)에 대해서는 한량없는 시간이다.이것은 인위(因位)가 일체처에 두루하매 한량없는 때에 부지런히 온갖 행을 닦아 장애를 없애고 대원경지를 잘 닦아서 능히 3승의 지혜 등의 영상을 낳는 것을 말한다.또 경지(鏡智)가 처소에 두루하여 항상 모든 티끌의 더러움을 여의고, 갖가지 행과 덕이 원만하고, 장엄이 지극히 원만하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모든 곳, 온갖 때에 능히 모든 영상을 일으키나니, 마치 뛰어난 금강유정이 모든 장애를 끊고서 여래의 대원경지를 증득하자 갖가지 공덕이 원만해지면서 일체처를 장엄하고 나아가 한량없는 때에 3승의 모든 영상을 능히 일으킨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여기서의 뜻은 각각 개별적인 선근이 차별적으로 성숙되면서 뛰어난 도[勝道]가 생겨날 때에 대원경지는 가깝거나 멀거나 그 응하는 바에 따라 강한 연(緣)이 되어주는데, 결정종성(決定種性)은 각자 자신의 승(乘)에 의거하여 출리(出離)를 얻고, 부정종성(不定種性)은 대승에 의지하거나 혹은 다른 승에 의지하여 출리를 얻는다.출리란 것은 열반이다. 모든 3승인이 자기 종성을 사용하여 인연으로 삼고 여래의 경지를 증상연으로 삼아 부지런히 정진하고 방편을 닦고 자량을 모아서 성도(聖道)를 끌어내고 번뇌장과 소지장을 없애서 그 응하는 바에 따라 각자 열반을 증득한다. 결정종성인 성문과 독각은 무학위(無學位)에 머물러 적멸을 즐기니, 업을 일으키고 윤생(潤生)케 하는 모든 번뇌장을 영원히 없앴기 때문이다.그리고 몸과 마음에 감응했던 선업(先業)은 저절로 멸하여 다시는 생을 받지 않는데, 의지할 바가 없기 때문에 유루ㆍ무루와 유위의 모든 행의 종자가 모조리 따라서 없어져 버린다. 오직 무희론상(無戲論相)을 전의(轉依)하여 티끌을 여읜 진여청정법계의 해탈의 몸이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여의반열반계(無餘依涅槃界)라고 한다.상주하면서 안락하고 구경(究竟)의 적멸이라서 온갖 수[衆數]에 떨어지지 않으며 불가사의함이 모든 여래와 같다. 다만 유위의 무루공덕으로 장엄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유정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한 일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것은 여래와 같지 않다.부정종성인 성문과 독각은 무학위에 머물러서 비록 번뇌가 없더라도 보리를 즐기기 때문에 정원력(定願力)을 말미암아 몸의 상속을 남겨서 대승행을 수행하고 나아가 금강유정을 얻기에 이른다. 모든 장애를 멸하고 부처님의 세 가지 몸을 증득하여 비록 유위의 무루공덕이 있다고 할지라도 유루의 몸과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여의대열반계를 증득한다.의(依)란 삼계의 유루의 몸과 마음을 일컫는다. 만약 모든 보살이 두 가지 장애를 끊어서 불과(佛果)를 얻을 때에는 곧 무여의대열반계를 증득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2승(乘)은 유여의열반계(有餘依涅槃界)에 먼저 들어가고 무여의열반계에는 나중에 들어간다.보살은 여래지(如來地)를 처음으로 증득할 때 두 가지 대열반계를 단박에 증득하여 모든 유루의 몸과 마음이 다하기 때문에 무여의라고 이름하고, 여전히 변화가 있어서 흡사 유루의 모습인 몸과 마음이 있는 듯하기 때문에 유여의라고 이름하며, 비지(悲智)가 끊임없이 증득되기 때문에 또한 이름하여 무주대열반계(無住大涅槃界)라고 한다. 열반은 곧 진여체 상에서 장애가 영원히 멸하였다는 뜻이다. 무루혜(無漏慧)로 진리를 간택함을 말미암아서 모든 잡스러운 물듦이 끊어진 것을 증득하기 때문에 또한 이름하여 택멸(擇滅)이라고도 한다.이와 같이 택멸은 진여 위에서 가명으로 시설하여 존재하는 것이며, 달리 실물(實物) 없이 구경위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열반이라고 하니, 취향해 가는 바도 없기 때문에, 악취의 더러움도 없기 때문에, 편직(編織)을 여의었기 때문에, 빽빽한 숲도 여의었기 때문에 이름하여 열반이라고 한다.성문과 독각은 소지장의 습기가 아직 멸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구경열반을 증득하는 것인가? 소지장의 습기는 바로 무지(無知)이기 때문이지 염오(染汚)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리과를 장애하지만 열반을 장애하지 않으며, 번뇌가 아니기 때문에 능히 생명을 윤택케 하지 않는다. 만약 마음을 돌려 대승으로 취향해 갈 원력이 없다면, 무학위에 이르러 그 수명이 다해서 끝내 영원히 적멸한다.
 원경에는 커다란 영상을 얻을 수 있으니 이른바 대지와 큰 산과 큰 나무와 큰 궁전이나 집의 영상이다. 그렇지만 이 원경은 그것들의 양과 동등하지 않은 것처럼 여래의 원경지에도 극희지(極喜地)로부터 나아가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지혜의 영상을 얻을 수 있으며, 그리고 온갖 세간과 출세간법의 지혜의 영상도 얻을 수 있지만, 원경지는 그것들의 분량은 아니다.
 만약 원경지가 능히 지혜의 영상을 일으킨다면 반드시 그것의 양과 똑같은 차별상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풀이한다.
‘원경에는 커다란 영상을 얻을 수 있으니 이른바 대지 등등’이라고 한 것은 세간의 원경은 비록 능히 연이 되어서 땅 등의 영상을 일으키지만 이 원경은 그것들의 양과는 동등하지 않으니, 하나의 작은 거울 속에도 많은 산 등의 커다란 영상을 얻을 수 있으며, 하나의 커다란 거울 속에도 수많은 돌 등과 같은 작은 영상을 얻을 수 있다. 비록 형태와 장애[礙:공간을 장애한다는 의미]가 있다고 할지라도 영상의 크고 작은 수량은 같지 않다.경지(鏡智) 또한 마찬가지라서 비록 여러 지(地)의 세간과 출세간의 온갖 지혜의 영상을 일으킨다 해도 형태와 장애가 없기 때문에 그 모든 지혜의 영상의 크고 작은 수량은 같지 않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모든 부처님의 대원경지를 대지장(大智藏)이라고 이름한다. 세간과 출세간의 지혜의 근본이기 때문이니, “세존께서는 대지장의 경지를 이루어서 능히 일체지를 낳기 때문이니, 여기에서는 지혜를 일체 공덕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이 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을 말미암아 모든 자리이타 공덕의 종자를 갖추어 능히 인연을 이루니, 자기 몸속에서 지혜 등의 영상을 낳으며, 증상연이 되어서 남의 몸 속에서 지혜 등의 영상을 낳는다. 이 경지를 말미암아 능히 몸을 변하여 나투어서 지혜의 설법을 일으켜 다른 지혜 등의 영상을 전전(展轉)하여 낳기 때문이며, 혹은 비원력(悲願力)으로 훈습하여 닦아서 자유자재함을 이루어 다른 지혜 등의 선법의 증상연이 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의 몸속에서 지혜 등의 선법이 쉽게 생장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경에서 ‘모든 중생들이 갖고 있는 선법과 나아가 수승한 과보는 모두 여래의 자비원력의 증상(增上)이 일으킨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또 원경이 장질(障質)의 영상이 일으키는 연(緣)에 처하지 않는 것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나쁜 벗에게 포섭되어 옳지 못한 법을 듣고서 중생을 장애하는 지혜의 영상이 일으키는 인연이 되지 않나니, 그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원경지가 3승으로 하여금 출리를 얻을 수 있게 하기 위해 모든 지혜의 영상을 낳고, 또 비원력으로 훈습하여 닦아 이루어진 바가 증상연이 되어서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지혜의 영상을 낳는다면, 어째서 세간의 모든 외도 등은 바른 지혜를 낳지 못하는가? 능히 인연을 낳아서 항상 화합하기 때문에 모든 외도들에게는 반드시 전도(顚倒)됨이 없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설명한다.
‘또 원경이 장질의 영상이 일으키는 연에 처하지 않는 것처럼 등등’이라고 한 것은 세상의 원경은 비록 능히 연이 되어 모든 영상을 나타내지만 벽과 같은 장애에 처하면 물질[質]의 영상을 일으키는 연이 되지 못하는 것처럼 여래의 경지 또한 이와 같다.비록 능히 연이 되어서 지혜의 영상을 낳는다고 할지라도 옳지 못한 악지식에 포섭되어서 그릇된 법의 장애를 즐겨 듣게 된다면, 지혜의 영상을 생하는 연이 그에게 주어져도 그는 가피(加被)의 그릇[器]이 될 수도 없고 정법(正法)을 듣는 그릇이 될 수도 없다. 그러므로 외도는 성도(聖道)에 나지 않으며 항상 뒤바뀐 생각을 품으니, 선한 법의 종자가 손상을 입거나 항복하기 때문이고, 악한 법의 종자가 생기는 연(緣)을 만나기 때문이다. 모든 중생들은 무시이래로 선을 닦는 경우는 적고 악을 짓는 경우는 많다. 그러므로 선한 법이 강한 연을 만나도 또한 자라나기가 어렵고, 악한 법은 비록 외연(外緣)을 아주 조금 만나도 곧 치성해진다.
 또 원경이 암질(闇質)의 영상이 일으키는 연에 처하지 못하듯이, 여래의 대원경지도 악을 좋아하는 우매한 중생을 만나면 지혜의 영상을 일으키는 연이 되지 못하나니, 그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외연이 지혜의 영상이 생겨나지 못하도록 장애하는 것처럼 내연(內緣)도 지난 세상에 악과 무명의 어둠을 즐기는 것을 익히면 지혜의 영상이 일어나지 못한다.악을 즐긴다는 것은 비록 탐욕과 성냄 등 온갖 번뇌가 모두 치성하더라도 어리석음의 편중으로 선악의 인과의 수승하고 하열한 일을 환히 알지 못하기 때문에 세간에 모든 부처님의 바른 법을 나타내서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며, 3보의 선량한 밭에서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한량없는 복덩어리를 생장시키는 것을 듣고서 받아들이려 하지도 않고 기꺼이 귀의하지도 않으며, 도리어 이익도 없고 즐거움도 없는 외도의 그릇된 법을 듣고서 받아들이고는 귀의하고 생장시켜서 능히 온갖 고통에 감응하는 것이니, 한량없는 악업과 갖가지 삿된 신(神)이 어찌 무명의 어리석음이 장애한 힘이 아니겠는가?그러므로 선을 가리는 장애로는 무명이 가장 무겁다. 마땅히 지혜의 광명을 부지런히 닦고 익혀야 하리니, 무명이 무거운 자는 좋은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원경이 원질(遠質)의 영상이 일으키는 연에 처하지 않듯이, 여래의 대원경지도 청정치 못해서 숨겨진 법의 업에 감응한 믿지 못하는 중생의 지혜의 영상이 일으키는 연에는 처하지 않는다. 그는 그릇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안과 밖의 두 가지 연(緣)을 장애하는 힘은 지혜의 영상을 생겨나지 못하게 한다.
첫째는 지난 세간에 숨겨진 법의 업을 감응하여 많은 시간 동안에 정법을 듣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른바 전생에 정법을 비방하였으니, 이 업장으로 인해 무량겁이 지나도록 부처님의 법을 듣지 못하는 것이다.즉, 이 모든 부처님의 정법을 듣지 못하는 것은 바로 그의 업과의 장애이니, 이는 그의 지혜의 영상을 생겨나지 못하게 해서 정법을 듣지 못하게 한다. 그 본체가 없는데 어떻게 정법을 비방한 과보라고 이름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능히 지혜의 영상이 생겨나는 것을 장애하는가? 즉, 그가 정법을 듣지 못하는 것을 과보나 장애라고 할 수 없지 않은가? 그러나 그가 숨겨진 업을 얻음으로 인해 정법을 듣고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근이 갖추어지지 않는 등 어리석고 둔한 몸과 마음이 과보이며 장애라고 설한다.둘째는 믿지 않는 것을 말미암는다. 이른바 종성(種性)도 없고 열반법도 없어서 열반을 즐거워하지 않고 출세간의 성도의 종자도 없는지라 진여를 증득할 때에 끝내 장애가 있다. 출세간의 법을 들어도 도무지 믿고 받아들이지 않아서 끝내 3승의 열반을 얻지 못한다. 이와 같이 모든 몸과 마음의 상속이 청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스러운 법의 그릇이 아니다. 잠시라도 출세간 공덕의 지혜의 영상을 일으키지 않으니, 마치 흐리고 더러운 물이 달의 영상을 능히 일으킬 수 없는 것과 같다.
대원경지 또한 마찬가지라서 그에게 능히 지혜의 영상을 일으킬 수가 없다.이와 같이 대원경지에는 아홉 가지 뛰어난 상이 존재함을 간략히 설하였다. 나머지 지(智)는 이른바 훈사상(訓詞相), 무분별의 상[無分別相], 장애가 청정한 상[障淸淨相], 의지와 인연으로 지혜의 영상을 낳는 상[依止因緣生智影相], 내 것이 있지 않고 섭수함이 없는 상[無有我所無攝受相), 모든 소지경계를 잊지 않는 상[不忘一切所知境相], 모든 곳에서 언제나 지혜의 영상을 낳는 상[遍處恒時生智影相], 능히 일체지의 근본을 낳는 상[能生一切智根本相], 법의 그릇이 아닌 것에 대해 능히 낳지 않는 상[於非法器不能生相]이다.여기에 세 가지 성스러운 법의 그릇이 아닌 것이 있으니, 첫째는 불선지식(不善知識)과 친근한 탓에 바르지 못한 법을 듣고서 잠시라도 장애가 있다면 성스러운 법의 그릇이 아니며, 둘째는 번뇌와 어리석음의 장애에 가려지면 성스러운 법의 그릇이 아니며, 셋째는 지극히 무거운 업의 장애에 가려지고 나아가 출세간의 성스러운 길의 종자가 없는 것이 오래되었을 때 끝내 성스러운 법의 그릇이 아니니, 이와 같은 세 가지를 통틀어 이름하여 아홉 번째 법의 그릇이 아닌 것에 대해서는 능히 낳지 않는 상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한 묘생이여, 평등성지란 열 가지 상이 원만히 성취됨에서 비롯된다.
 ‘평등성지는 열 가지 상이 원만히 성취됨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바로 10지(地)를 닦는 과보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하나하나의 지위[地]에서 간략히 말한다면, 각각 하나의 평등성을 증득하여 원만히 닦고 익혀서 불지(佛地)의 평등성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등성지란 열 가지 상이 원만히 성취됨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만약 자세하게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지위 중에서 각각 무량한 평등법성을 증득하고 원만하게 닦고 익혀서 불지의 평등성지를 성취하는 것이다.
 모든 상(相)의 증상희애(增上喜愛)를 증득하여 평등법성을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모든 상’이란 것은 이른바 모든 보살의 상[大士相]과 나아가 모든 수호상(隨好相)의 차별이니, 이 모두를 상(相)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모든 상이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여읜 것을 이름하여 평등이라고 하나니, 계경에서 모든 보살의 상을 여래께서는 곧 상이 아니라고 하시면서 이 때문에 보살의 상이라고 이름한다고 말씀하셨다.‘증상’이라는 것은 이른바 부유하고 귀하고 자재한 것이다. 색 등의 온(蘊)들은 각각 별개여서 모두가 부유하거나 귀하거나 자재한 것이 아니다. 화합 또한 부유하거나 귀하거나 자재한 것이 아니니, 즉 별개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모든 법이 합할 때에는 자성을 버리지 않지만, 이것을 여의면 실제의 보특가라(補特伽羅)는 없으니, 그러므로 일체의 부귀하고 자재함은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여의므로 평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따라서 계경에서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환하게 이해하였습니다. 일체는 무아(無我)이기 때문에 탐착할 것도 없고 부유한 것도 없습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희애’라는 것은 모든 기쁨과 사랑이 변계의 힘에서 말미암으니, 그 법에 순응할 때에는 환희가 생겨나고 그 법에 어긋날 때에는 근심과 슬픔이 생겨난다. 변계소집의 모든 법은 없기 때문에 그 모든 것에서 변계소집의 기쁨과 사랑 또한 없음을 이름하여 평등하게 환히 이해한다고 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설한 모든 상의 증상희애는 평등법성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초지(初地)를 증득하였다고 한다. 보살이 처음으로 증득한 뒤에 그 다음다음의 지에서 차츰 방편을 닦아 증장하게 되면 마지막에는 불지(佛地)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여기서부터는 다시 증장되는 것이 없으니, 이 증득의 원만한 성취를 말미암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히 성취된다.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여기에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세 번째 곳에서 다섯 번째의 전(轉)을 말하여 일체가 반드시 원만히 성취됨을 말미암는다고 설하는 것이다. 뜻이 비슷하고 말이 편리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설하는 것이다.
 일체의 이해해 받아들이는 연기[領受緣起]를 증득하여 평등법성을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연기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안과 밖이다. 안의 연기[內緣起]란 것은 무명 등의 12지(支)이며, 밖의 연기[外緣起]란 것은 씨앗이나 싹 등의 온갖 바깥 사물들이다.안이란 것은 반드시 잡염(雜染)과 청정(淸淨)의 둘로 나뉜 행상[二分行相]을 역순으로 관찰해야 하며, 밖이란 것은 반드시 이것이 있음으로써 저것이 있고 이것이 생함으로써 저것이 생하는 행상을 관찰해야 하는 것이니, 이른바 씨앗 등이 있음으로써 씨앗 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고 싹 등이 있음으로써 싹 등이 생겨날 수 있는 것이다.이 두 가지 연기는 모두 인(因)이 있음으로써 과(果)가 있으며, 인이 생함으로써 과가 생하는 것이다. 무작용(無作用)의 뜻이 바로 연기의 뜻이고, 공하여 무아(無我)라는 뜻과 실재하는 보특가라가 없다는 뜻이 바로 연기의 뜻이다. 이와 같은 뜻이 연기의 자상(自相)이고, 이를 이해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이해해 받아들임[領受]이라고 한다. 혹은 거짓으로 유정이 이해해 받아들이기 때문에 이름하여 이해해 받아들임이라고도 한다.연기의 모든 법은 바로 이해해 받아들이는 것이니, 이처럼 모든 이해해 받아들이는 연기는 작용이 없기 때문에, 공하여 무아이기 때문에, 실재하는 보특가라가 없기 때문에 변계소집자성을 멀리 여의었으므로 이름하여 평등을 환하게 깨달았다고 한다.이와 같이 설한 모든 이해해 받아들이는 연기는 평등법성이기 때문에 증득이라고 이름한다. 이 증득을 말미암아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히 성취된다.이와 같이 연기의 평등법성은 곧 일체법의 평등법성이니, ‘범지여, 일체 법성이 바로 연생연기법성(緣生緣起法性)이니, 이것을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보리라고 이름한다. 부처님께서 보신 것처럼 일체 법성은 이와 같이 곧 연기법성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또 계경에서 사소한 법이라도 연기의 성품을 여읜 것을 볼 수 없으니, 여기에서 연기의 평등법성을 이름하여 연기의 성품이라고 한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이 비밀한 뜻의 교설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말하나니, 만약 연기를 보면 이는 곧 법의 성품을 보는 것이고, 만약 법의 성품을 본다면 이는 곧 모든 부처님을 보는 것이니, 연기의 참다운 성품이 바로 승의법(勝義法)이고 승의불(勝義佛)이기 때문이다. 평등법성은 일체처에서 모두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렇게 설하는 것이다.
 이상(異相)이나 비상(非相)을 멀리 여읨을 증득하여 평등법성이 원만하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색 등의 법들은 변하거나 무너지는 상이 비슷하지 않기 때문에 이상이라고 이름하는데, 이와 같이 각각 별개의 이상을 멀리 여의는 것이 바로 공상(共相)이다.
이와 같은 공상은 무엇을 상으로 삼는가? 비상을 상으로 삼는다. 계경에서 ‘일체법의 성품은 오직 하나의 상을 가지고 있으니, 이른바 비상이다’라고 한 것과 같다. 비상은 바로 평등법성이니, 이와 같이 변계소집을 환히 이해하면 일체법의 성품은 끝내 영원히 없어서 평등법성이므로 증득이라고 이름한다. 이런 증득을 말미암아서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이상을 멀리 여의는 것은 무유상(無有相)이고, 비상을 멀리 떠나는 것은 무무상(無無相)이다. 무유와 무무를 이름하여 평등성이라고 한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
 대자(大慈)로 널리 구제하여 평등법성을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이다.
 자(慈)에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유정을 반연한 것이고, 둘째는 법을 반연한 것이고, 셋째는 반연이 없는[無緣] 것이다.
초발심위에 있는 보살들은 유정을 반연하여 자비를 많이 닦고 익히는데, 이것은 유루가 많은 것으로서 세속의 유위(有爲)를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정행위(正行位)를 수행하는 보살들은 법을 반연한 자비를 많이 닦고 익히는데, 이 또한 유루가 많으니 대승의 가르침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무생인을 얻은 보살들은 무연의 자비를 많이 닦고 익히는데, 비록 반연한 바[所緣]가 있어도 법계를 반연하기 때문에, 비유하면 눈 등의 이숙(異熟)의 법들이 분별이 없어 가행(加行)을 짓지 않으면서도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것처럼, 이를 이름하여 무연이라고 한다. 평등성지는 대자(大慈)와 상응한다. 어떤 사람은 “오직 법계를 반연하니 소연(所緣)의 분별이 영원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며, 유정과 모든 법을 반연하지 않기 때문에 무연의 자비이다”라고 말한다.또 어떤 사람은 모든 법을 반연한다고 말한다.
참다운 뜻은 역시 유정을 반연하지만 분별없는 평등한 행상으로 일체가 거짓으로 세워진 것임을 환히 아는 것이다. 유정의 성품이 평등하고, 연생(緣生) 등 법의 성품이 평등하며, 무아의 진여 성품이 평등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평등지라고 하는 것이다.이 지혜가 소연의 경계에 나아가 상응하면 세 가지의 자비를 함께 얻지만, 다만 분별하지 않고 평등하게 행하기 때문에 이름하여 무연이라고 한다. 여래지 중에서 평등성지는 대자에 상응해서 온갖 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며 항상 현행하나니, 여래는 이미 무연대자(無緣大慈)가 있고 나머지 둘은 자연히 성취되므로 설하지 않는다.여래가 이 세 가지 자비를 반연하기 때문에 평등하게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나니, 그들에게 약간의 즐거움을 줄 뿐만 아니라 널리 모든 유정들에게 일체 법은 무아라는 진여의 평등한 성품을 굴려서 항상 현행하여 일체를 구제하기 때문에 대자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성문이나 이생(異生)들이 잠시 동안 약간의 즐거움을 주는 행을 굴려서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지 못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모든 성문들보다 뛰어나고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는데다 오랫동안 복과 지혜의 자량을 쌓고 모아서 원만하게 이루었기 때문에 널리 구제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설한 대자(大慈)로 일체처에 두루하여 널리 구제하되 차별 없이 구르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 평등을 법의 성품이라고도 이름한다. 혹은 설한 ‘대자로 널리 구제하는 평등법성’을 소연(所緣)으로 삼기 때문에 경계에 대하여 평등법성이라고 이름하며, 이 대자로 말미암아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대비(大悲)를 기다리지 않고 평등법성을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이다.
 성문 등의 비(悲)는 모든 유정들을 구제할 수 없으며 오직 욕계의 적은부분의 행상을 반연하여 잠시 구를 뿐이다. 그런데 여래의 대비는 두루 능히 일체 유정들을 구제할 수 있으니, 삼계에 두루 가득 찬 행상을 통틀어 반연하여 항상 구른다.‘기다리지 않는다’는 것은 바라보고 기다리는 바가 없이 항상 구제하여 버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른바 기다리는 바 없이 그 감응에 따라서 세 가지 괴로움을 없애고 구제하는 것이니, 괴로움을 받는 유정을 언제나 버리지 않는 것이 마치 장자가 외아들을 지극히 사랑하는 것과 같아서 모든 유정들에게 평등하게 구른다. 유정계가 가없기 때문에 유정을 성숙시킬 때에는 잠시도 그만두지 않으며 유정을 성숙시키는 일을 일찍이 지나친 때가 없었다. 여래는 언제나 대비와 상응하므로 잠시 일어나고 잠시 구른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경에서 “선남자여, 모든 불세존의 온갖 대비가 모든 유정들에게 잠깐 일어나고 잠시 구른다고 말해서는 안 되나니, 왜냐하면 항상 구르기 때문이다. 모든 불세존에서 대비에 이르기까지 근본 없이 세워지지 않으면 끝내 무상보리를 증득하지 않는다. 여래께서 대보리를 증득하고 나서 항상 ‘나는 마땅히 모든 유정들의 온갖 선의 근본을 안립(安立)할 것이니, 만약 일체법을 아직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면 내가 마땅히 열어서 깨우쳐 주리라’고 생각한다. 여래께서 이와 같이 모든 유정들에게 항상 대비를 일으킨다. 나아가 자세히 설한다”고 말한 것과 같다.계경에서의 가르침처럼 여래께서 밤낮의 여섯 때에 항상 세간을 관찰한다면, 어떻게 지금 대비가 항상 구른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여섯 때로 상속이 항상하여 끊어짐이 없는 작용을 설한 것이니 어긋나지 않는다.대자대비는 성냄도 없고 해침도 없고 어리석음도 없는 선근을 자성으로 삼는다. 즐거움을 주고 괴로움을 없애주는 행상에는 차이가 있는데, 모두가 세 가지 유정의 반연[有情緣] 등이 있다. 자(慈)는 성냄이 없음이고, 비(悲)는 해치지 않음이다. 자는 즐거움의 욕망이 없음을 반연하면서 그 즐거움을 주는 것이고, 비는 괴로움의 욕망이 있음을 반연하여 그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다. 대비는 기다리지 않고 차별 없이 구르기 때문에 평등이라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바로 법의 성품으로서 혹은 평등법성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도 한다. 이 대비로 말미암아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성취하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모든 중생들이 즐거워하는 바를 따라서 나타내 보이는 평등법성을 원만하게 성취하기 때문이다.
 모든 유정들이 즐겨 보는 여래 색신의 차별을 수순하여 여래께서 이와 같은 색신을 나타내 보이신다. 여래께서 비록 희론이 없는 지위에 머물러 있다고 할지라도 평등지의 증상력을 말미암기 때문에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은 유리 등의 미묘한 색신을 나타내어서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선근을 성숙케 하고 스스로의 마음이 이와 같은 신근(身根)을 변사(變似)하나니, 이른바 스스로의 마음 밖에서 여래의 몸을 보는 것이다.이는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모든 여래는 자(慈)의 선근력을 말미암아서 나타내 보이는 것이 있으니, 천인(天人)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을 변이하게 해서 마치 금색 등과 같은 여래의 몸을 보게 한다.”또 경에서 “만약 교화되어야 할 무량한 유정들이 마땅히 유리나 마니 보배색[寶色]을 보면, 여래는 즉시 능히 갖가지 유리와 마니보색을 걸림 없이 나타내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마음을 또한 이와 같이 변하게 한다”고 말한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와 같이 모든 여래의 형상이 평등한 것을 나타내 보이니, 이와 같은 평등이 바로 법성이다. 그러므로 평등법성이라고 설한다. 모든 여래는 똑같이 교화해야 할 유정이 보고 싶어 하는 색신의 형상을 수순하여 즉시 저마다 같은 곳에 동시에 같은 종류의 형상을 나타내 보여서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마음으로 이와 같이 이익되고 즐거운 일을 변현하여 짓게 한다. 마치 모든 유정들의 아뢰야식의 공상종자(共相種子)가 성숙하여 각각 세계 등의 상(相)을 변현하되 같은 곳에서 비슷하여 서로 방해를 하지 않는 것처럼 이 또한 마찬가지다.색신의 상과 같이 나머지 일도 또한 그러하다. 이렇게 나타내 보임을 말미암아서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성취되는 것이다.
 모든 중생들이 공경히 설하신 바를 받아들여서 평등법성을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은 종류의 어업(語業)이 있어서 능히 유정들의 선근을 성숙시켜서 그들이 듣고 환희심을 내고 깨끗한 믿음의 즐거움을 얻는다면, 여래께서는 다시 이와 같은 어업을 나투시어 그들로 하여금 듣게 한다. 여래께서 비록 희론이나 분별이 없다고 하더라도 비원력(悲願力)으로 이와 같이 나타내 보이시니, 교화되는 유정은 스스로의 뛰어난 이해력으로 이와 같이 변이(變異)한다. 이른바 자신의 마음 밖에서 부처님의 음성을 듣나니, 여래가 설하시는 모든 말씀은 근기에 두루 적합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나 천상 등이 다 거스르지 않으므로 공경하게 받든다고 이름한다.만약 근기에 맞지 않으면 곧 나타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허황되어서 버릴 것이 없음을 설하신다. 비록 어떤 중생이 부처님의 말씀을 따르지 않고서 ‘이것은 바로 화작(化作)이라서 어쩌면 장차 이익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여도 후에는 반드시 믿고 받을 것이다.전체적으로 이야기한다면, ‘일체가 설하신 것을 공경하게 받아들인다’고 한 것은 이 같은 말이 앞의 도리를 말미암아서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나투시기 때문에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평등은 바로 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이렇게 나타내 보임으로써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간과 적정(寂靜)이 모두가 동일한 맛으로서 평등법성을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이다.
 유루의 5온을 세간이라고 이름하나니, 생각마다 두 종류의 무너짐을 대치하기 때문이다. 즉 그것이 쉬어서 멸함을 바로 적정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을 말미암아 이것에서 적정한 까닭에 바로 성도(聖道)이고 열반이다. 의타기성은 세간과 적정이 똑같이 진여에 돌아가고, 원성실성이므로 한 가지 맛이라고 이름한다.또 세간이라는 것은 변계소집인데, 이것의 성품이 본래 없는 것을 이름하여 적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적정은 나타내어진 진여와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한 가지 맛이라고 하니, 이것을 바로 평등법성이라고 이름한다. 이 한 가지 맛을 말미암아서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히 성취된다.
 세간의 모든 법이 괴로움과 즐거움이 한 가지 맛으로서 평등법성을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세간의 모든 법에는 간략하게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이로움이고, 둘째는 잃음[衰]이고, 셋째는 무너짐[毁]이고, 넷째는 드날림[譽]이고, 다섯째는 칭찬이고, 여섯째는 혐오이고, 일곱째는 괴로움이고, 여덟째는 즐거움이다.뜻한 대로 일을 얻은 것을 이로움이라고 하고, 뜻한 바를 잃은 것을 잃음이라고 한다. 앞에서 비방하거나 폐하지 않는 것을 무너짐이라고 하고, 앞에서 칭찬하고 찬미하지 않는 것을 드날림이라고 한다. 앞에서 찬미하는 것을 칭찬이라고 하고, 앞에서 비방하고 폐하는 것을 혐오라고 한다. 몸과 마음을 괴롭히는 것을 괴로움이라고 하고, 몸과 마음이 유쾌해지는 것을 즐거움이라고 한다.이와 같은 여덟 종류는 전체적으로 두 가지 품으로 나뉜다. 즉 네 가지의 어긋남을 괴로움이라고 이름하고, 네 가지의 순조로움을 즐거움이라고 이름하나니, 기쁨과 슬픔을 낳기 때문이다.
혹은 또 다시 이 가운데에서 간략히 설한다면, 마지막의 괴로움과 즐거움의 한 쌍[一對]이다. 성스러운 사람이 머무는 가운데에서 항상 한 가지 맛으로서 이익을 얻어도 거만하지 않고 쇠락함을 만나도 비열해지지 않으니, 이와 같이 나아가 즐거움을 애착하지도 않고 괴로움에 화를 내지도 않는다.이는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성스러운 곳과 세간은 평등하여 한 가지 맛이니 마치 허공과도 같다.”
범부는 세상에 있으면서 집착하여 차별한다. 그가 변계소집을 멀리 여읨을 말미암아서 세간의 여덟 가지 법은 일체처에서 모두 동일한 맛이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평등법성이라고 한다. 이 한 가지 맛을 말미암아서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한량없는 공덕을 닦고 심어서 구경(究竟)에 평등법성을 원만히 이루기 때문이다.
 공덕은 바로 보리분 등의 모든 공덕법이니, 종자를 훈습하여 오래 길러서 성숙시켜 해탈하는 것을 이름하여 닦고 심는다고 한다. 평등성지가 비록 분별함이 없다고 하더라도 불보살 지혜의 증상력을 말미암아 여의주처럼 다른 몸속에 공덕을 생장시키고 성숙시켜서 해탈하게 한다.구경이란 능히 3승이 반열반을 얻는 것이니, 따라서 이미 해탈케 하였고 세상의 즐거움을 얻게 했으므로 스스로의 성취를 설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지혜를 이름하여 평등법성이라고 하는데, 이 공덕을 말미암아서 앞에서처럼 닦고 익혀서 원만하게 이루기 때문에 평등성지가 원만하게 이루어진다.
 또한 묘생이여, 묘관찰지(妙觀察智)라는 것은,
 열 가지 인(因)에 의거해서 묘관찰지를 분별함을 알아야 한다. 열 가지 인이란 첫째는 건립인(建立因)이고, 둘째는 생기인(生起因)이고, 셋째는 환희인(歡喜困)이고, 넷째는 분별인(分別因)이고, 다섯째는 수용인(受用因)이고, 여섯째는 취차별인(趣差別因)이고, 일곱째는 계차별인(界差別因)이고, 여덟째는 우대법우인(雨大法雨因)이고, 아홉째는 항복원적인(降伏怨敵因)이고, 열째는 단일체의인(斷一切疑因)이다. 비유하면 세계가 중생계를 갖고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맡아 지니고 있어서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법을 걸림 없이 설한다.
 여기에서는 건립인의 상을 나타내 보인다.
‘비유하면 마치 세계가 중생계를 갖고 있는 것과 같이’라는 것은 마치 모든 유정들의 자기 마음이 변한 아래의 풍륜(風輪) 등 여러 세계상이 자기 마음이 변한 눈[眼] 등의 여러 유정계를 능히 지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능히 일체 다라니문을 지니고(자세히 설하며) 나아가 온갖 부처님의 미묘한 법을 지니면서 그것과 상응하고 능히 이끌기 때문이다.다라니라는 것은 증상(增上)의 염혜(念慧)가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을 능히 총체적으로 임지(任持)해서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것이다. 하나의 법속에 일체법을 지니고, 하나의 문장 속에 일체 문장을 지니며, 하나의 뜻 속에 일체의 뜻을 지니니, 무량한 온갖 공덕을 거두어 품고 있으므로 이름하여 무진장이라고 한다.이 다라니를 간략하게 말하면 네 종류가 있다. 첫째는 법(法)다라니이고, 둘째는 의(義)다라니이며, 셋째는 주(呪)다라니이고, 넷째는 능득보살인(能得菩薩忍)다라니이니,『유가론』에서 그 모양을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어떻게 오직 하나의 법 속에서 두루 능히 일체법을 지닐 수 있는가? 이른바 불보살의 증상의 염혜가 부사의한 힘으로 자기 마음의 상분(相分)의 하나의 법상 속에 일체법이 나타나니, 글의 뜻 또한 그러하다.또 능히 무량하고 무진한 공덕의 법문을 나타내 보이니, 견분(見分) 자체(自體)가 또한 가없는 뛰어난 공능을 갖추었기 때문에 일체를 지니고 있어서 잃어버리지 않게 한다. 이와 같이 염혜의 불가사의한 힘을 이름하여 다라니라고 한다.삼마지라는 것은 이른바 증상정(增上定)이니, 즉 모든 삼마지를 굳건하게 행하는 것이다. 일체 세간과 출세간의 모든 삼마지를 능히 뛰어넘나니, 다른 것은 이것보다 뛰어나지 않기 때문에 굳건하게 행한다[健行]라고 이름한다.오직 제10지 보살과 부처님만이 이 선정을 얻을 뿐 다른 지는 경에서 설한 바에 따라 그 이름을 해석해야 하니, 곧 다라니와 삼마지는 둘 다 문(門)이라고 이름한다. 공(空)과 무원(無願)과 무상(無相)의 세 가지 문처럼 한량없는 동류(同類)와 이류(異類)의 공덕을 능히 통생(通生)하기 때문이다.걸림 없는 변설이란 곧 4무애(無礙)이니, 법(法)과 의(義)와 사(詞)와 변(辯)이다. 이 네 가지를 말미암아 능히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하기 때문에 변설이라고 이름한다.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법은 바로 이 여래의 힘과 두려움 없음[無畏] 등인데,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 일체의 말씀을 낱낱이 반드시 설한다. 묘관찰지가 의식(意識)을 전(轉)하여 작용의 넉넉하고 넓음[寬廣]을 얻기 때문이다. 능히 일체 공덕을 지닐 수 있으니, 이 지혜에 상응하는 제6 의식은 널리 일체 공덕과 더불어 상응하며 나아가 능히 모든 공덕을 일으키므로 능히 임지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또 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단박에 일체의 갖가지 한량없는 상식인연(相識因緣)을 일으키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능히 일체 소지무애(所知無礙)의 미묘한 지혜의 갖가지 한량없는 상식인연을 일으킨다.
 여기에서는 생기인상(生起因相)을 현시한다.
묘관찰지가 일체의 소지상식(所知相識)의 인(因)을 능히 지어서 단박에 일으키기 때문이다. 세계는 바로 모든 기세간(器世間)이다. 마치 기세간이 능히 중생에게 갖가지 지(地)와 한량없는 공(空) 속에서 상식생인(相識生因:모습을 알아채는 알음알이를 낳는 원인)이 되듯이, 여래의 묘관찰지도 일시에 단박 모든 경계에서 허공과 같아져서 능히 무애함을 요달하여 능히 일체의 갖가지 세간과 한량없는 출세간이 반연된 경계[所緣境界]의 상식생인(相識生因)이 된다.이 뜻을 말하면, 일체 여래의 묘관찰지는 일체의 경계를 단박에 깨달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유사한 소지경계에는 여러 많은 상(相)이 존재하는데, 이는 마치 그림을 그리는 색에 갖가지 모양[相]이 있는 것과 같다. 견분인 지(智)의 본체는 이와 같이 상식생인(相識生因)이 된다.이것이 능히 저것을 나타내는 것을 생인(生因)이라고 하지만, 친생인(親生因:직접적인 생인)은 아니니 종자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는 곧 연인(緣因)인데 이름하여 인연(因緣)이라고 한다. 견(見)을 말미암아 상(相)을 일으키거나 체(體)가 용(用)을 일으키기 때문에 비록 체는 다르지 않아도 하나가 아님[不一]을 말미암기 때문에 또한 인(因)이 될 수 있다. 가령 상분(相分)으로부터 견분(見分) 등이 생겨나는 등도 이와 마찬가지다.
 세간에는 갖가지 놀거리[可玩]인 동산이나 숲이나 연못 등으로 장엄된 것이 매우 사랑스럽고 즐길 만하듯이, 여래의 묘관찰지에도 갖가지 놀거리인 바라밀다ㆍ보리분법ㆍ10력ㆍ4무외ㆍ18불공법으로 장엄된 것이 아주 사랑스럽고 즐길 만하다.
 여기에서는 환희인상(歡喜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기세간에서는 갖가지 놀거리인 동산이나 숲이나 연못 등이 나란히 줄지어서 위엄 있게 빛나고 무성해서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환희하고 사랑하며 즐기게 한다.이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도 갖가지 놀거리인 바라밀다ㆍ보리분(菩提分) 등이 나란히 줄지어 장엄되어 있고 위광이 찬란하게 빛나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환희하고 사랑하고 즐기게 한다. 바라밀다를 간략하게 말하면 여섯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보시 등이다. 혹은 자세히 말하면 열 가지가 되나니, 방편선교 등의 네 가지를 더 보탠 것이다. 혹은 더 자세히 말하면 8만 4천 가지가 되니 경에서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 만약 달리 분별하면 그 수가 무량하다.보리분법에는 간략하게 서른일곱 가지가 있다. 자세하게 말한다면 또한 무량하다. 10력(力)이란 이른바 처(處)와 비처(非處) 등을 아는 지혜의 힘 등으로 여래 몸속의 혜근(慧根)에 섭수되고 아울러 지근(知根)을 갖추고 있다.두려움 없음이란 이른바 네 가지 무외(無畏)를 말한다. 5근(根)1)에 포섭되며 아울러 지근을 갖추고 있으니, 즉 믿음 등의 다섯 가지이다.
불공불법(不共佛法)에는 열여덟 가지가 있으니, 경에서 자세하게 설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은 공덕의 많은 부분이 이 지혜에 포섭되어 있어서 상응하고 능히 이끌어내서 발하니, 이 때문에 일체가 이 지혜를 장엄하는 것이다.
 또 세계의 섬ㆍ궁전ㆍ해ㆍ달ㆍ사천왕천ㆍ삼십삼천ㆍ야마천ㆍ도사다천ㆍ낙변화천ㆍ타화자재천ㆍ범신천 등이 미묘하게 장식되어 나란히 줄지어 있는 것처럼 여래의 묘관찰지는 세간과 출세간의 성쇠(盛衰)와 인과(因果)를 성문과 독각과 보살이 원만히 증득해서 남김없이 관찰함이 미묘하게 장식되어 줄지어 있다.
 여기에서는 분별인상(分別因相)을 나타내 보인다.
기세간의 한량없는 섬 등이 미묘하게 장식되어 나란히 줄지어 있어도 서로 뒤섞이거나 어지러움이 없는 것과 같다.
섬이란 이른바 4대주(犬洲)이니, 즉 섬부주(贍部洲) 등이다. 궁전이란 이른바 8소저(小渚)이니, 즉 차마라(遮末囉) 등이다. 간략하게 해와 달을 든 것은 모든 성수(星宿)를 포섭한다.사천왕천이란 이른바 묘고산(妙高山)의 네 번째 층의 사면에 각각 머물고 있다. 삼십삼천이란 이 산 정상의 사면에 각각 8대 천왕이 있으며, 제석이 그 속에 머물고 있기 때문에 이 숫자가 된다.야마천이란 이른바 이 하늘에서 때에 따라 즐거움을 받기 때문에 이름하여 시분(時分)이라 한다. 도사다천이란 후신(後身) 보살이 여기에서 교화하여 희족(喜足)을 많이 닦기 때문에 희족이라고 이름한다.낙변화천이란 즐거이 스스로 변화하여 여러 오락거리를 만들어 내서 스스로 즐기기 때문이다. 타화자재는 다른 사람을 변화시켜 여러 오락거리를 짓는 걸 즐기고 자기를 나타냄이 자재하다.범신천이란 탐욕을 떠나서 적정하기 때문에 범(梵)이라고 한다. 신(身)이란 무리[衆]이다. ‘등(等)’이라고 한 것은 이 세계상에 있는 여러 하늘을 나란히 든 것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묘관찰지는 두루 능히 세간과 출세간의 성쇠와 인과를 관찰하니, 3승의 원증(圓證)이 미묘하게 장식되어 나란히 줄지어 있되 서로 뒤섞이거나 엇갈림이 없다.악한 갈래의 인과를 이름하여 세간쇠(世間衰)라고 하고, 선한 갈래의 인과를 이름하여 세간성(世間盛)이라고 한다. 또 세간쇠와 세간성은 이와 같이 차례로 성쇠라고 이름한다. 또 줄어들어서 없어지는 것을 쇠(衰)라고 이름하고, 불어나는 것을 성(盛)이라고 이름한다.2승(乘)의 인과를 출세쇠(出世衰)라고 이름하고, 대승의 인과를 출세성(出世盛)이라고 이름한다. 또 물러남을 쇠라고 이름하고, 나아감을 성이라고 이름한다.원증이라고 함은 오직 부처님의 과위를 설함이니, 묘관찰지로 이 모든 법과 법이 서로 다름을 관하기 때문이다. 묘관찰지도 그러한 경계와 마찬가지로 행상이 서로 뒤섞이지 않고 분명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미묘하게 장식되어 서로 줄지어 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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