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경론(佛地經論) 7권
불지경론 제7권
친광 지음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經 이때 세존께서 게송으로 설하셨다.
論 이제부터는 4송(頌)을 설하여 위의 뜻을 총체적으로 섭수하고자 한다. 간략하게 불지의 청정한 법계의 모양을 나타내니, 여래지 중에서 일체 유위와 무위의 공덕은 모두 청정법계가 섭수하여 지니므로 이 모두는 바로 청정한 법계의 모양이다. 소상(所相)과 능상(能相)이 모두 다 그것의 명상(名相)이기 때문이다.4송 중에서 앞의 3송과 절반은 그 상(相)을 별개로 나타낸 것이고, 뒤의 절반은 전체적으로 결론지은 것이다. 별도로 상을 나타낸 것 중에서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 처음의 반은 청정법계를 나타내 보였고, 다음의 반은 대원경지를 나타내 보였고, 다음의 반은 평등성지를 나타내 보였고, 다음의 반은 묘관찰지를 나타내 보였고, 다음의 반은 성소작지를 나타내 보였고, 다음의 반은 4지(智)가 거둔 권속의 공덕을 나타내 보였으며, 뒤의 반은 5법(法)에 의해 이루어진 3신(身)의 차별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말한다.또 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청정법계에 여섯 가지 상이 있어서 모든 불지의 공덕을 전체적으로 포섭함을 나타내 보이니, 이른바 자성상(自性相)ㆍ인상(因相)ㆍ과상(果相)ㆍ작업상(作業相)ㆍ상응상(相應相)ㆍ차별상(差別相)이라고 말한다. 이와 같은 차례로 처음에 한 개의 게송이 있고 나머지는 각각 절반의 게송이다.
經 일체법은 모두가 진여이지만[一切法眞如]두 가지 장애가 청정의 상을 가리웠도다.
論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이것은 청정법계를 나타낸 것이니, 이른바 모든 법공(法空)과 무아(無我)의 성품이 드러낸 진여가 두 가지 장애를 영원히 여의어서 본성이 청정한 것이다. 지금 다시 물듦을 여의고 능히 모든 착한 법의 소의가 되기 때문에 청정법계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일체법이란 것은 이른바 세간과 출세간의 유루와 무루와 온과 계와 처 등이다. 진여란 것은 이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과 뒤바뀌지 않은 성품이다. 일체법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라서 본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일 뿐이다.상분(相分)의 많음을 따라 두 종류를 설하기도 하니, 이른바 생공무아(生空無我)와 법공무아(法空無我)이다. 진여는 실재해서 공하거나 무아가 아니니, 성품이 분별을 여의었기 때문이고 회론을 끊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무아관을 닦고 익힘으로써 진여를 가리는 나와 내 것이라는 집착을 멸하고 깨달음을 증득하기 때문에 공무아라고 이름한다.혹은 세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선(善)과 불선(不善)과 무기(無記)이다. 진여는 이 세 가지 법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혹은 네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삼계의 매임과 매이지 않음[繫不繫]이다. 진여는 이 네 가지 법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혹은 다섯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심진여(心眞如)와 나아가 무위진여(無爲眞如)이다. 역시 이 다섯 가지 법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
혹은 여섯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색진여(色眞如)와 나아가 무위진여이다. 5온과 무위의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이다.혹은 일곱 종류를 설한다. 첫째는 유전진여(流轉眞如)로서 이른바 모든 행은 무시이래로 유전하여온 참다운 성품이다. 둘째는 실상진여(實相眞如)로서 이른바 일체법의 2공무아(空無我)가 나타낸 참다운 성품이다. 셋째는 유식진여(唯識眞如)로서 이른바 일체법은 오직 식의 참다운 성품이다. 넷째는 안립진여(安立眞如)로서 이른바 유루법인 고제(苦諦)의 참다운 성품이다. 다섯째는 사행진여(邪行眞如)로서 이른바 업의 번뇌인 집제(集諦)의 참다운 성품이다. 여섯째는 청정진여(淸淨眞如)로서 이른바 훌륭한 무위(無爲)인 멸제(滅諦)의 참다운 성품이다. 일곱째는 정행진여(正行眞如)로서 이른바 모든 유위의 무루 선법(善法)인 도제(道諦)의 참다운 성품이다.혹은 여덟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생함이 없고, 멸함이 없으며, 끊어짐도 없고, 항상함도 없으며,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고, 온 것도 아니고, 간 것도 아닌 여덟 가지 견상문(遣相門:모습을 버리는 법문)에 의해 드러나는 진여이다.
혹은 아홉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9품(品)의 장애를 없앤 9품도(品道)가 드러내는 진여이다.
혹은 열 종류를 설하니 이른바 10지(地)에서 열 가지의 무명을 없앰으로써 드러내는 진여이니, 즉 10법계(法界)이다.『섭대승론』에서 그 이름과 모습을 자세히 설한 것과 같다.이와 같이 숫자를 늘려나가면 끝이 없으니, 모든 법문은 전부 이 진여의 차별상이지만 진여의 본체는 하나도 아니고 많은 것도 아니다. 분별하여 말하자면 그 전부를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모든 허망하게 뒤바뀐 생각을 여의었으므로 가명으로 진여라고 하며, 능히 모든 선한 법의 소의가 되므로 가명으로 법계라고 한다. 손감(損減)하는 비방을 여의었으므로 가명으로 실유(實有)라고 하고, 증익의 비방을 여의었으므로 가명으로 공무(空無)라고 한다. 모든 법의 허망하고 거짓된 것을 분석 추구하여 극에 이르지만, 여기에서 다시 헤아릴 수 없어서 오직 이 진(眞)뿐이므로 가명으로 실제(實際)라고 한다. 이 무분별은 가장 훌륭하고 성스러운 지혜로 증득되는 경계이므로 가명으로 승의(勝義)라고 한다. 이와 같이 자세하게 설한다.두 가지 장애라는 것은, 첫째는 번뇌장이고, 둘째는 소지장이다. 몸과 마음을 어지럽혀서 고요하게 쉬지 못하게 하므로 번뇌장이라 하고, 소지경(所知境)의 뒤바뀜이 없는 성품을 가려서 드러나지 못하게 하므로 소지장이라고 한다.번뇌장이란, 이른바 실아(實我)의 살가야견(薩迦耶見)에 집착하는 것을 우두머리로 하여 백스물여덟 가지 근본번뇌와 수번뇌(隨煩惱)로서 업을 일으키는 것이든 과보를 얻는 것이든 모두 이 속에 거두어져 있으니, 이 모두가 번뇌를 근본으로 하기 때문이다.소지장이란, 변계소집한 모든 법의 살가야견에 집착하는 것을 우두머리로 하여 모든 무명법(無明法)과 사랑이나 성냄 등의 여러 심(心)과 심법(心法)과 업을 일으킨 것과 과보를 얻은 것이 모두 이 속에 거두어지니, 모두가 법집(法執)과 무명 등을 근본으로 삼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법집과 무명 등은 모든 선과 악과 무기에 두루 있으니, 유루심품과 2승(乘)의 무루심품이 모두 법무아(法無我)를 환히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며, 이는 모두가 유사한 상분과 견분을 일으키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오직 불선과 무기의 유루심품에 있다고 말한다.『유가사지론』에서 “모든 무명에 오직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불선이요 둘째는 무기이다”라고 말하였으며, 또다시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염오(染汚)이고 둘째는 불염오라고 말하여 선(善)이 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선 아닌 것이 선심(善心)과 상응한다고 해서는 안 되니, 성품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또 선심품(善心品)은 반드시 무치선근(無痴善根)과 상응하며, 치(痴)는 곧 무명으로서 한 마음에 치와 무치(無痴), 탐(貪)과 무탐(無貪), 진(瞋)과 무진(無瞋)이 나란히 있을 수 없으니 상응하지 않기 때문이다.
법집은 치와 함께 하지 않으면 안 되나니, 만약 무명이 없으면 뒤바뀐 집착[倒執]이 없기 때문이다. 참다운 내가 있다고 집착하는 것은 반드시 무명과 함께하는 것이니, 이것 또한 반드시 그러하다.또 모든 선심은 성품에 미혹의 집착이 없으니, 모두 신(信) 등이 함께 하면서 이해를 수순하여 2공관(空觀)과 더불어 앞의 방편이 된다. 법집은 법공관을 이끌 수 없으며, 아집은 일찍이 이런 일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루와 무루의 선심은 결정코 두 가지 집착과 무명이나 사랑 등과 상응하지 않는다. 가르침의 이치에 어긋나기 때문이다.모든 이숙무기(異熟無記)의 심품 또한 법집과 무명 등이 없으니, 분별력이 저열하여 능히 집착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만약 뒤바꿔 집착이 있으면 법견(法見)과 아견(我見)을 이루어 무명 등이 있게 된다. 아뢰야식이 반드시 오직 5법과만 상응해서는 안 되니, 무명 등이 혜(慧) 등에 포섭된다고 보기 때문이다.또 만약 이 식이 법집이 있다면 훈습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생각마다 잃을 것이니, 모름지기 대치하지 않으면 이내 커다란 허물을 이루게 될 것이다. 번뇌장 속에는 이런 일이 없기 때문이다.또 법공관이 처음 현전할 때에는 이 식은 반드시 끊기니, 장애와 대치는 서로 어긋나서 함께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나머지 유루종자는 당연히 의지할 바가 없게 되어서 닦은 공덕도 당연히 훈습하지 않게 되니, 훈습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훈습이라고 말할 수 없다.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은 무기가 아니기 때문이며, 아직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뢰야식이 이미 법집이 없게 되고 나머지 전식(轉識) 중의 이숙과도 또한 마찬가지이니, 성품의 종류가 같기 때문이다. 5식 중에도 또한 법집이 없으니, 사납고 예리한 분별작용이 없기 때문이며, 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섭대승론』에서 “능변계(能遍計)의 마음이 오직 의식(意識)뿐이다”라고 설하였으니, 5식은 변계소집의 자성을 반연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분별함이 없고 추구하는 견해도 없으면 능히 나라고 헤아릴 수 없으므로 또한 모든 법을 계탁(計度)할 수 없다.그런데 의식이 나를 헤아리고 법을 헤아려서 사랑과 성냄 등을 일으킴으로 말미암아 5식 중에서 비견(非見)에 포섭된 사랑과 성냄 등을 이끌어 일으킨다. 비록 견(見)이 없어도 사랑이나 성냄, 무명 등의 법은 두 가지 장애에 포섭되는 바이므로 두 가지 집착의 분별추구는 오직 제6 의식과 제7 의식에 있다. 만약 사랑과 성냄 등이 비견에 섭수되는 것이라면 추구하지 않는 것은 5식에 있다. 모든 아집 등의 번뇌장의 본체는 오직 불선(不善)과 유부무기(有覆無記) 두 마음속에 존재한다.만약 법집 등의 소지장의 본체가 무부무기의 마음 중에 있다면 2승과 무학(無學)에서는 또한 현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학위 중에는 불선과 유부무기는 있지 않으니, 이것이 2승에 나아가서는 무부(無覆)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만약 보살을 바란다면 이것은 염오(染汚)이기 때문에 또한 유부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소지장은 또한 무부라고도 하고 유부라고도 한다.하나의 본체에 이름이 두 개 있는 것은 바라는 바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며, 번뇌장 속에 소지장이 있음은 바로 소의(所依)이기 때문이며, 반드시 어떤 법에 집착하여서 나를 계교하기 때문이다. 본체가 비록 둘은 아니지만 쓰임에는 차별이 있으니, 하나의 식체(識體)가 경계를 취하여 쓰임이 많은 것처럼 이 훈습하여 낳음을 말미암아 한 종자의 본체도 역시 쓰임이 많다. 일어날 때에는 비록 함께한다고 하더라도 점차로 끊어지니, 성도(聖道)의 세력에는 분제가 있기 때문이다.만약 소지장을 2승에 나아가 말한다면 무부무기인데, 4무기(無記) 가운데 어떤 무기에 포섭되는가? 이숙생(異熟生)에 포섭된다. 이숙식(異熟識)으로부터 생겨나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무엇이 이숙생이 아닌가? 증상연이 나머지에 포섭되지 않으면 모두 이것에 포섭되니, 위의(威儀) 등 마음이 견고하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자 널리 두루하지 않기 때문에 두 가지 장애의 본체는 없다.만약 선의 무부무기 마음 중에 법집이 없다면, 왜 능히 법공을 요달하지 못하는가? 또한 아집이 없다면 왜 능히 생공(生空)을 요달하지 못하는가? 이것은 이미 제7식 중의 아집(我執)과 더불어 함께하기 때문에 생공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반드시 제7식 중의 법집과 더불어 함께하기 때문에 법공(法空)을 요달하지 못하는 것이다.이미 유사한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이 일어났는데, 어찌하여 법집에 포섭되는 바라고 이름하지 않는가? 모든 불보살의 무루지 등 또한 두 가지 구분이 있는데, 어째서 집착함이 아닌가? 그래서 연생(緣生)인 상분과 견분은 의타기성에 포섭된다. 만약 이 위에서 마음 밖에 일정한 성품이 있다는 것을 헛되이 계탁하면 바야흐로 집착이라고 이름한다. 그러므로 소지장이 제7식에 있다면 6식과 더불어 3성심(性心)을 두루 함께하는 것이니, 비상응품의 자세한 논쟁은 그만두고 본문을 해석하기로 하자.청정상이란 이른바 진여의 본래 성품이 청정한 것인데 두 가지 장애에 덮였으니, 마치 맑은 허공이 구름 등의 장애로 가려져 깨끗하지 않은 것과 비슷하다. 출세간의 진여의 도(道)를 증득해서 두 가지 장애의 모든 종자를 점차로 없애니, 마치 큰 바람이 구름 등을 날려버리는 것과 같다. 금강유정이 현재 바로 나타날 때에 모든 장애의 종자를 다 멸해서 여의고 정법계를 얻어서 궁극적으로 전변하여 의지하니[轉依]하니, 이것을 청정상이라고 이름한다.이와 같이 이미 앞의 5법 중에서 청정한 법계를 모두 나타내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은 자성의 한 부분인 법계의 청정상을 나타낸 것이라고 하니, 즉 6상(相) 가운데 자성의 일부분으로서 문장은 앞에서 풀이한 바와 같다.
經 법지(法智)가 그것을 반연하나니 자재하고 다함없는 모습이라네.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은 대원경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한다. 법이란 것은 바로 의타기성이니, 법을 반연한 대원경지를 법지라고 이름한다. 대원경지 또한 세속의 의타기성을 반연하니, 그 영상을 나투기 때문이요, 그것에 미혹되지 않기 때문이다.‘피소연(彼所緣:그것을 반연하나니)’에서 그것[彼]이란 이른바 진여이지 저 법지가 아니다. 비록 다시 문구를 장애하더라도 뜻의 세력이 상응하므로 허물이 있는 것은 아니다.법지가 그것으로써 반연을 삼기 때문에 피소연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지, 법지가 그것의 소연(所緣)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대원경지는 또한 승의(勝義)의 원성실성을 반연하여 생사의 경계를 다하니, 안으로 그것을 증득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대원경지가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반연하는 것을 말하니,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이 함께 경계가 되기 때문이다.변계소집성은 다만 범부가 망령된 마음으로 계교해 집착하는 것이라서 성현의 지혜 경계가 아니므로 반연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논(論)에서 변계소집은 오직 범부의 지혜의 경계이고, 원성실성은 오직 성현의 지혜의 경계이며, 의타기성은 범부의 지혜의 경계이기도 하고 성현의 지혜의 경계이기도 하다고 말한 것과 같다.변계소집은 본체가 없기 때문에 성현이 증득하는 바가 아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현의 지혜는 일체를 알지 못할 터인데, 그가 이미 지혜가 없다면 무엇을 알겠는가? 만약 있다고 안다면 곧 뒤바뀐 생각을 이루게 되고, 만약 없다고 안다면 곧 변계소집이 아닐 것이다. 자성의 마음이 나타내는 바는 의타기에 포섭되지 않고, 진여의 이치는 원성실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성현의 지혜는 비록 있고 없음을 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반연하여 변계소집의 자성을 경계로 삼지 않는다.자재라고 말한 것은 대원경지가 6도피안을 닦아서 이루었기 때문이니, 열 가지 자재한 묘용(妙用)이 무애(無礙)함을 갖추었다.
무진상(無盡相:다함없는 모습)이란 것은 생사의 경계를 다해서 짬도 없고 끊어짐도 없이 상속하며 항상하기 때문이다. 상이란 것은 소상(所相)이기도 하고 또한 능상(能相)이기도 하니, 자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앞의 5법 가운데 대원경지를 전체적으로 나타내었다.어떤 사람은 이것은 자성의 일부분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불과사지(佛果四智)는 바로 6상(相) 가운데 자성의 일부분이다. 유위공덕법은 바로 대원경지이니, 대치의 힘을 말미암아 모든 거칠고 무거운 번뇌를 전변해버려서 소의(所依)인 아뢰야식이 청정한 의타기성을 전변해 증득한다. 일체 마음과 사려의 분별을 멀리 여의어서 소연과 능연이 평등하고 평등하여 마땅히 설할 수 없다.연생법(緣生法)의 성품은 늘거나 줄지 않으며, 안으로 증득한 행상(行相)은 능히 모든 법의 영상을 나타내는데, 일체 경계에 대해 두루 환하게 비출 수 있으니 분별이 없기 때문이다.전체적으로 말해서 법지(法智)라고 이름하는 것은 바로 평등성지이다. 대치의 힘을 말미암아 중생과 법에 대한 집착을 전변해버려서 제7 말나식이 청정한 의타기성을 전변해 증득하니, 대원경지 등 및 정법계의 평등을 반연하여 평등하게 행상을 안으로 증득하므로 지(智)라고 이름한다.피소연(彼所緣)이란 나머지 두 가지 지혜이다. 세간의 분별을 전변해 제거해서 6식이 청정한 의타기성을 전변해 증득하고, 출세간이든 세간과 출세간이든 그의 후소득지(後所得智)가 위의 진여와 법지 등을 반연하며 의타기성을 경계로 삼는다.유사한 소연의 경계를 집착해 분별하지 않고, 스스로 안으로 소증(所證)과 능증(能證)의 작용을 나타내 분별한다. 저 위에서 설한 진여의 법지를 소연으로 삼기 때문에 피소연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4지의 미묘한 쓰임은 걸림이 없으므로 자재라고 이름하고, 생사의 경계를 다하여 항상 쓰이되 쉼이 없기 때문에 무진이라고 이름한다.대원경지와 평등성지는 항상하여 짬이나 끊어짐이 없기 때문에 무진이라고 이름한다. 묘관찰지와 성소작지는 비록 짬이 있고 끊어짐이 있지만, 그래도 잠시 작의(作意)하면 곧 능히 현전해서 자주 일어나 무궁하므로 또한 무진이라고 이름한다. 상은 체상(體相)이니, 모두가 연을 따라 생겨나서 청정 의타기성이라고 이름하고, 모두가 뒤바뀜이 없으므로 청정 원성실성이라고 설하고, 모두가 안으로 증득하여 경계를 비추는 작용이 있는 것이 흡사 경계가 현현(顯現)하는 듯해서 지(智)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은 뜻으로 능히 자체(自體)를 나타내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한다.
經 널리 두루하는 진여의 지혜로닦아 익혀서 원만함을 증득하리라.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은 평등성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초지(初地) 중에서 처음으로 현관(現觀)할 때에 이 평등무분별지를 얻어서 진여 등 일체의 평등을 관하며, 뒤의 모든 지위에서 점차 닦고 익혀서 더욱 훌륭해지고 더욱 청정해진다. 나아가 불지에 이르러 원만함을 증득하고 완전하게 청정해져서 법계 등 일체의 이사(理事)가 모두 다 평등하다는 것을 증득한다. 이와 같이 앞의 5법 가운데 평등성지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어떤 사람은 이것은 6상 가운데 인상(因相)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초지 중의 무분별지가 처음으로 법계를 관하여 견도의 세 가지 마음1)으로 견도에서 끊어야 할 112가지 근본번뇌와 수번뇌를 끊고, 견도에서 끊어야 할 불염무명(不染無明)의 분별법집(分別法執)의 가장 거친 일분(一分)을 멸하여 처음으로 법계의 지혜 종자가 늘어나는 것을 나타낸다.이로부터 이후에는 모든 지위에서 수도위(修道位) 중의 무분별지가 나머지 법계의 여여함을 관하여 일체 법문에서 문사수(聞思修) 등과 가행지(加行智) 등과 방편 등의 지위를 점차로 닦고 익히며, 이처럼 그 응하는 바를 따라서 점차로 수도에서 끊어야 할 16가지 번뇌와 수번뇌를 조복한다.그리고 응하는 바를 따라서 점차 수도에서 끊어야 할 불염무명의 구생법집(俱生法執)을 멸하고 나머지 모든 부분도 멸해서 나머지 법계의 지혜 종자가 늘어남을 나타낸다.
이것이 인(因)이 됨을 말미암아서 나아가 불지(佛地)에 이르기까지 법계의 4지(智)가 원만함을 증득한다.
經 중생에게 두 가지를 안립(安立)하니모든 종자가 다함없는 과보라네.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은 묘관찰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이 묘관찰지는 능히 중생을 위하여 미묘한 법 등을 설하여 중생의 이익과 안락함을 세우므로 두 가지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 두 종류에 많은 품류(品類)가 있으므로 모든 종자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처럼 두 가지 일이 생사의 경계를 다하여 언제나 짓되 끊임이 없으므로 무진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곧 과보라고 이름하니 바로 지혜의 과보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앞의 5법 가운데 묘관찰지를 나타내 보였다.어떤 사람은 이것은 6상 가운데 과상(果相)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정법계와 네 가지 묘지(妙智)는 모두 능히 일체 중생들의 이익과 안락을 세우나니, 선인(善因)을 닦게 하므로 이익이라고 이름하고, 즐거운 과보를 얻게 하므로 안락이라고 이름한다.또 악을 떠나게 하므로 이익이라고 이름하고, 그 선을 거두게 하므로 안락이라고 이름한다. 또 괴로움을 없애므로 이익이라고 이름하고, 그 즐거움을 주므로 안락이라고 이름한다. 이 세상과 저 세상의 세간과 출세간 등도 또한 그러함을 알아야 한다. 품류가 많기 때문에 모든 종자라고 이름하였고, 미래세상을 다하기 때문에 다함없다고 하였다. 이처럼 두 가지 일의 모든 종자가 다함이 없으니, 정법계와 네 가지 지혜의 과보는 이것을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
經 몸과 말과 마음으로 교화하는 것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의 업이니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은 성소작지를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이른바 지혜가 능히 몸과 말과 마음의 교화를 일으켜서 근기의 마땅함을 수순하므로 선교(善巧)라고 이름하고, 가행이 끊이지 않으므로 방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이 바로 이름하여 업이다. 혹은 다시 이 지혜의 선교방편이 능히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화업(化業)을 일으킨다고 한다. 이와 같이 앞의 5법 가운데 성소작지를 나타내 보였다.어떤 사람은 이것은 6상 가운데 업상(業相)을 나타내 보인 것이라고 이름하는데, 이른바 정법계와 네 가지 묘한 지혜가 능히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화업과 선교와 방편의 업을 일으키는 것이니, 성소작지가 몸과 말과 마음의 세 가지 화업을 일으키고 묘관찰지가 선교의 업을 일으켜서 근기의 마땅함을 관(觀)하여 지극히 교묘하게 방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 두 가지 지혜와 정법계는 방편의 업을 일으키니, 능히 자연스럽게 모든 업과 더불어 방편이 되기 때문이다.몸의 변화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신에게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자기의 몸을 전륜성왕 등의 갖가지 형체와 중생으로 변화시켜 갖가지 여러 본생의 일을 나타낸다. 둘째는 타인에게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마왕을 부처님의 몸 등으로 변화시키고 사리자를 변화시켜 천녀로 만드는 것 등이니, 다른 이의 몸에 의지하여 갖가지 형태와 종류를 변화시켜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셋째는 몸 아닌 것에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대지를 7보 등으로 나타내거나 혹은 한량없는 부처님의 화신 등을 나타내거나 혹은 광명을 놓아 가없는 세계를 비추는 것이다.이와 같은 종류는 자타(自他)의 몸을 여의어서 정(情)과 비정(非情)의 색으로서 갖가지 형태의 종류를 화작(化作)하여 땅을 움직이고 빛을 놓고 바람이 불고 향기를 내는 등의 일을 나타내니, 이 모든 것은 유정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함이다. 이 모든 것을 전부 부처님의 화신업(化身業)이라고 이름한다.이와 같이 말의 변화에도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신에게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 자신이 범음(梵音)을 화현하여 가없는 모든 세계 등에 널리 고하는 갖가지 말의 업이다.둘째는 타인에게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성문의 대제자들로 하여금 부처님의 범음으로써 대승의 깊고 깊은 법 등을 연설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문과 모든 보살들의 설법은 자신들의 깊고 깊은 미묘한 법이 아니라 모두가 바로 여래께서 변화하여 지어내신 것이니, 그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다.셋째는 몸 아닌 것에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산이나 바다나 초목 등의 종류와 나아가 허공에 이르기까지 그들을 변화시켜서 대승법 등을 연설하는 소리를 내게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모든 것을 변화어업(變化語業)이라고 이름한다.마음의 변화에는 오직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신에게 상응하는 것으로서 이른바 자기 마음에 갖가지 심(心)과 심법(心法)의 영상의 차별을 화현하는 것이다. 둘째는 타인에게 상응하는 것이니, 이른바 다른 이들의 마음으로 하여금 갖가지 심과 심법의 영상의 차별을 나타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상분(相分)이 흡사 견분(見分)을 나타내는 듯하다.어떤 사람은 정력(定力)이 능히 자기 마음으로 하여금 비분법(非分法)을 이해하게 하는 것을 자기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름하며, 유정을 가피하여 우매한 자는 깊고 미세한 법을 이해하게 하고 생각을 잃은[念失] 자는 올바른 억념(憶念)을 얻게 하는 것을 다른 이의 마음을 변화하게 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고 말한다.그런데 마음은 변화가 없고 형태와 질(質)이 없으니, 논에서 ‘마음은 형태가 없기 때문에 변화할 수가 없다’고 한 것과 같다. 또 ‘화신(化身)은 심과 심법이 없다’고 설하였는데, 이것은 2승과 모든 이생(異生)의 정력(定力)에 대해서 말한 것이다. 그들의 정력은 저열하여서 능히 형태와 질이 없는 법을 화현할 수 없지만, 모든 불보살의 부사의정(不思議定)은 모두 능히 화현할 수 있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래께서 탐욕과 성냄 등을 나타낼 수가 있겠으며, 어떻게 성문과 축생 등이 여래의 마음을 알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경에서 무량한 종류로 하여금 모두 마음이 있게 한다고 설하겠는가? 그리고 어떻게 위에서의 모든 화현된 의업(意業)을 말하겠는가? 또 어떻게 경에서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의지한다고 말하겠는가?단지 모든 화현된 색[化色]은 실제의 색과 같은 작용이 있으나, 화현된 근[化根]과 마음은 다만 상의 나타남이 있을 뿐이지 실제의 쓰임과 똑같은 것은 아니다.또 하류(下類)에 나아가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어떻게 비정(非情)이 마음으로 하여금 상(相)을 나타내도록 화하지 않겠는가? 비정은 이미 이 마음 등의 상분이니, 어떻게 다시 마음으로 하여금 상을 나타나게 하겠는가? 만약 심상(心相)이 나타나면 이것은 곧 유정이라고 이름할 것이니, 비정(非情)에 포섭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현된 마음[化心]은 다만 두 종류만을 설한 것이다.앞에서 이미 설한 것처럼 묘관찰지는 능히 다라니문과 삼마지 등을 관하여 스스로 증득하였고, 능히 유정의 근(根)과 욕(欲)과 성(性) 등을 관하였으므로 미묘한 법의 약을 설하니, 이것을 선교의 업이라고 한다. 그 나머지 두 가지 지혜와 정법계는 모든 공덕과 더불어 묘관찰지가 의지할 곳이 되며, 능히 갖가지 유정들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일으키므로 방편의 업이라고 이름한다.
經 선정과 아울러 다라니문이가없는 두 가지를 성취하리라.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은 네 가지 지혜가 포섭되는 권속의 공덕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이 6상 중에서 상응지상(相應之相)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정문(定門)은 8만 4천 가지의 삼마지문이고, 총지문(總持門)은 8만 4천 가지 다라니문이다. 이처럼 두 종류가 모든 유위공덕과 모든 무위공덕을 함께 나타내며, 모든 신통력으로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일을 작용하는 것을 함께 이끌기 때문에 문(門)이라고 이름한다.‘가없는 두 가지’라는 것은 복덕과 지혜의 두 종류 장엄으로서 그 속에는 무량한 종류의 차별이 있다. 8만 4천 복덕과 지혜를 한량없는 겁 동안 닦아서 이룬 바이기 때문에 가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앞의 다섯 가지 바라밀다를 복덕이라고 이름하며, 뒤의 다섯 가지 바라밀다를 지혜라고 이름한다. 혹은 응하는 바에 따라서 자성의 권속 하나하나가 두 가지를 갖추니, 이와 같이 2문(門)이 두 가지로 장엄하는 것이다. 4지품(智品) 가운데 하나하나를 구족하여 항상 함께 상응하며 또한 다시 청정법계를 의지하니, 청정법계와 더불어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기 때문에 성취라고 이름한다.
經 자성법의 수용과변화는 차별되게 구른다.
論 어떤 사람은 이것이 5법이 이룬 3신(身)의 차별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하고, 어떤 사람은 이것은 6상 가운데 차별지상(差別之相)을 나타낸 것이라고 말한다. 비록 모든 여래가 의지한 청정법계의 체성(體性)에 차별이 없다고 할지라도 3신의 갖가지 상이한 전변은 똑같지 않기 때문에 차별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자성법이란 것은 바로 여래의 최초의 자성신체(自性身體)가 항상하여 변함이 없으므로 자성이라고 이름한다. 10력과 무외(無畏) 등 모든 공덕법의 의지하는 바가 되기 때문에 또한 법신이라고 이름한다. 수용은 바로 다음의 수용신(受用身)이니, 능히 자기와 남으로 하여금 갖가지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게 하기 때문이다. 변화는 이 뒤의 변화신(變化身)이니, 중생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고자 갖가지 변화의 일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다. 체(體)의 의의와 의거함(依)의 의의와 온갖 덕의 덩어리(衆德聚)의 의의를 전체적으로 몸[身]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3신의 이름의 뜻을 간략하게 설하였다.또 법신이란 구경전의(究竟轉依)의 진여를 모습으로 삼는데, 모든 부처님의 법이 평등하게 의지하는 바로서 능히 모든 자재한 작용을 일으키고 모든 착한 법의 증상(增上)을 나타내는 것이다. 모든 여래의 평등한 자성은 미묘하여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모든 분별을 멸하였고 모든 희론을 끊었다. 그러므로 계경에서 “모든 부처님의 법신은 사유 분별로 찾지 말아야 하니, 사유 분별의 경계가 아니고 모든 사유 분별이나 희론을 넘어서 있다”고 말한 것과 같다.수용신이란 모든 공덕의 원만함을 모습으로 삼는데, 모든 불법이 함께 모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능히 모든 자재한 작용을 일으키고 모든 착한 법의 증상(增上)을 일으키는 것이다. 모든 여래의 각각 다른 자체는 미묘하여 헤아리기가 어려워서 순수한 정토에만 머무시며 운(運)에 맡겨 담연하다. 미래세가 다하도록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으시고, 갖가지 형태를 나타내고 갖가지 법을 설하여서 대보살로 하여금 또한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한다.변화신이란 모든 신통변화의 원만함을 모습으로 삼는데, 모든 화현된 작용[化用]이 함께 모여 이루어지는 것으로서 모든 자재한 작용을 나타내 보이고 모든 착한 법의 증상이 이끌리는 바이다. 모든 여래의 각기 다른 화현된 작용은 미묘하여 헤아리기가 어려우니, 예토와 정토에 머무시면서 갖가지 형태로 나투시어 갖가지 법을 설하시는데, 하위의 보살과 2승과 이생(異生)의 무리들을 성숙시켜서 그들을 대지(大地)에 들게 하고 삼계를 멀리 여의게 하고 온갖 악한 갈래를 여의게 한다. 이와 같이 3신의 모습과 쓰임을 간략하게 말하였다.또 앞의 다섯 가지 법이 3신(身)에 포섭된다고 한 것을 어떤 사람은 앞의 두 가지는 자성신에 포섭되고 가운데의 두 종류는 수용신에 포섭되며 성소작지는 변화신에 포섭된다고 말한다. 경에서 ‘진여는 법신이다’라고 설하였기 때문이며, 논에서 ‘아뢰야식을 전거(轉去)하여 자성신을 얻으니, 대원경지는 제8식을 전거하여 얻는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의 두 가지는 자성신에 포섭됨을 알아야 한다.이 경에서 ‘성소작지는 여러 화현된 업을 일으킨다’고 설하였고,『장엄론』에서는 ‘성소작지가 모든 세계에서 갖가지 한량없고 헤아리기 어려운 여러 가지 변화사를 일으킨다’고 설하였으므로 뒤의 하나는 변화신에 포섭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평등성지는 다른 논에서 설한 것과 같으니, ‘능히 정토에서 모든 보살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 갖가지 부처님의 몸을 나타내 보인다’고 하였다. 묘관찰지 또한 논에서 설한 바와 같으니, ‘큰 모임에서 능히 모든 자재한 작용을 나타내서 법을 설하여 의심을 끊어준다’고 한 것과 같다.또 전거를 말한 것은 온갖 전식(轉識) 때문이며 수용신을 얻기 때문이니, 가운데의 두 가지는 수용신에 포섭됨을 알아야 한다. 또 부처님의 3신은 모두가 열 가지 뜻 가운데 지혜의 훌륭함에 포섭되므로 모든 3신은 지혜가 있는 상태를 얻는다고 알아야 한다.어떤 사람은 처음의 하나는 자성신에 포섭되고 4지(智)는 자성에 상응하여 공유(共有)하며, 나아가 지상(地上) 보살을 위하여 나타나는 부분은 미세한 모습으로 수용신에 포섭되고, 지전(地前)의 모든 보살들을 위한 부분은 거친 모습의 화현된 작용으로 변화신에 포섭된다고 말하는데, 여러 경에서는 모두 ‘청정진여를 법신으로 삼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찬불론(讚佛論)』에서는 ‘여래의 법신은 생멸하지 않는다’고 말하기 때문이며,『장엄론』에서는 ‘부처님의 자성신은 본래 성품이 항상한다’라고 말하기 때문이며,『능단금강반야론(能斷金剛般若論)』에서는 ‘그 경을 받아 지니고 널리 설하는 공덕은 부처님의 법신을 증득하는 인(因)이 되며, 나머지 두 몸의 생인(生因)이 된다’고 말하기 때문이다.여러 경과 논에서 ‘구경전의(究竟轉依)를 법신으로 삼으며, 전의는 곧 청정진여로서 대치도(對治道)가 아니다’라고 설하였으니, 그러므로 법신은 오직 청정법계의 진여를 성품으로 삼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장엄론』에서 ‘대원경지는 수용불(受用佛)이다’라고 설하였으며,『섭대승론』에서는 ‘모든 전식(轉識)을 굴려서 수용신을 얻는다’고 설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아뢰야식을 버리고 법신을 얻는다는 것은 제8식 중의 두 가지 장애의 종자를 전거해서 청정전의(淸淨轉依)의 법신을 얻음을 나타낸 것이지 대원경지를 설한 것이 아니다. 대원경지는 바로 수용(受用)임을 설하기 때문이다.또 수용신에 간략하게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수용(自受用)이니 3무수겁동안 닦아서 이룬 바이고, 둘째는 타수용(他受用)이니 모든 보살로 하여금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4지가 상응하여 공유하는데 일부분은 화하여 수용신이 된다. 경론에서 모두 ‘화신은 지전(地前)의 중생을 교화하기 위하여 갖가지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미 이것은 지전 중생의 경계이다’라고 설하였으니, 이 때문에 이것은 진실한 공덕이 아니라 단지 화현된 작용[化用]임을 알아야 한다.경론에서는 오직 성소작지만이 능히 화현된 업을 일으키나 이것은 화신이 아니라고 말한다. 비록 세 가지 몸이 지혜의 훌륭함에 포섭된다고 하더라도 법신은 지혜가 그것을 의지하여 증득하는 바이며, 화신은 지혜가 일으키는 작용인 바이기 때문이다. 유사한 지혜가 나타나는 까닭에 거짓으로 지혜라고 설하는 것이므로 또한 허물이 아니다.이와 같이 3신의 수용신과 변화신에는 이미 생하고 멸함이 있는데, 어찌하여 경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몸이 항상하다고 말하는가? 두 가지가 의지하는 법신이 항상하기 때문이다. 또 수용신과 변화신이 비록 생하고 멸함이 있다고 하더라도 언제나 갖가지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는데 쉬거나 그만두는 일이 없기 때문이며, 시방세계에서 자주자주 나타나 교화하심이 단절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항상 즐거움을 받는다든가, 항상 음식을 베푼다는 것과 같으므로 ‘항상’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장엄론』에서 설하기를, “항상에는 세 종류가 있다. 첫째는 본래 성품이 항상한 것으로서 이른바 자성신이니, 이 몸의 본래 성품이 항상 머물기 때문이다. 둘째는 끊이지 않고 항상한 것으로서 이른바 수용신이니, 항상 법의 즐거움을 받되 사이가 벌어지거나 끊어짐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는 서로 이어지며 항상한 것으로서 이른바 변화신이니, 사라진 다음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서 교화가 가없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법신이 비록 모든 분별과 희론을 떠났다고 하더라도 생하고 멸함이 없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며, 서로 이어지기 때문에 항상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경에서 ‘여래의 색(色)과 수(受) 등의 법은 모두가 항상 머문다’고 설하였으니, 이런 이치에 의거하면 생하고 멸함이 없는 것도 아니다. 무루종자가 닦고 익히며 증장해서 생기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한다는 것은 일향기(一向記)이니, 색심(色心)은 모두가 무상한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며, 색심이 언제나 머문다는 것을 일찍이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3신은 어떤 형태와 양[形量]인가? 법신이 청정진여를 본체로 삼으면 진여가 바로 모든 법의 참다운 성품이니, 법은 가없으며 법신 또한 그러하다. 일체법에 두루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마치 허공과 같은데, 그 형태와 분량의 크고 작은 것을 말할 수는 없지만 모양에 대해서 말한다면 모든 곳에 두루한다.수용신에는 색(色)과 비색(非色)이 있으니, 비색의 모든 법은 형태나 질이 없기 때문에 역시 그 형태와 양의 크고 작음을 말할 수 없다. 만약 의신(依身)과 소지경(所知境)에 대해서 말한다면 역시 모든 곳에 두루하다고 말할 수 있다. 색에는 두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실색(實色)이고, 둘째는 화색(化色)이다.실색이란 것은 3무수겁 동안 색신의 상호(相好) 등의 업을 닦고 감응하여 5근(根) 등의 유루색신(有漏色身)을 전변하여 부처님의 무루오근(無漏五根) 등의 색을 얻은 것이니, 상호의 장엄이 한량없고 그 몸이 법계에 두루 가득해서 참다운 정토[實淨土]라고 불린다.생사 중에서는 업의 분한(分限)이 있으며, 아뢰야식이 변한 몸의 형태의 크고 작음이 일정하지 않다. 이 세계는 그만두고 섬부주 사람의 선업은 가장 낮아서 그들이 얻은 색신은 가장 긴 것이 4주(肘)이고, 동승신주(東勝身洲)의 선업이 그 다음으로 훌륭하니 몸의 길이가 8주이다.이와 같이 선업이 더욱 훌륭해지는데, 그들이 얻은 색신의 형태와 양도 점점 커진다. 그리하여 색계의 색구경천에 이르면 색업(色業) 중에 감응한 것이 가장 훌륭하니, 그들이 얻은 색신은 1만 6천 유선나의 양(量)이다. 10지 보살이 무루선근을 자량으로 삼아 훈습한 바이기 때문에 몸의 형태도 점점 커지니, 경에서 자세하게 설한 바와 같다.금강유정(金剛喩定)이 현전할 때에 일체의 장애를 멸해서 선근의 세력이 그 양이 가없으므로 그들이 얻은 색신은 법계에 충만하여 참다운 정토에 두루하니,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이 변화시킨 신토(身土)는 한량없기 때문이다. 모든 부처님의 식이 같은 곳에서 동시에 변하여 그 모양이 서로 비슷하지만 서로 걸림이 없고 미래세가 다하도록 짬도 없고 끊어짐도 없으니, 이것에 의지하여 능히 모든 부처님으로 하여금 광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수용하게 한다. 그러므로 수용신토라고 이름하는 것이다.이와 같은 몸과 국토는 오직 부처님만이 알 수 있을 뿐 모든 보살의 5근으로는 증득할 바가 아니니, 하나하나의 색근이 능히 모든 받아들인 경계를 증득하게 되는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의 견(見)이 없는 정상(頂相:머리 위에 있는 肉髻)과 가없는 법음(法音)과 모든 색근은 작용이 한이 없으니, 보편적으로 원만하기 때문이다.화현된 색[化色]이라 말한 것은 비원력(悲願力)으로 말미암아 모든 보살의 무리들을 대지(大地)에 들게 하여 갖가지 몸과 갖가지 상호와 갖가지 음성과 갖가지 국토에 의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형태와 양은 일정하지 않다.변화신이란 또한 비원력을 말미암아 지전(地前)의 모든 유정들을 교화하기 위하여 변화신을 나투니, 색과 비색에 통한다. 비색은 곧 변화의업(變化意業)으로서 힘과 두려움 없음 등 여러 공덕의 모양인데, 형질이 없기 때문에 형량이 있지 않다. 색은 변화신어업(變化身語業) 등이니, 때와 장소와 대중들의 마땅한 바를 따라서 몸을 나타내며 그 형태나 양은 일정하지 않다. 경에서 자세하게 설한 것과 같다.이와 같이 3신은 모든 여래에게 차별이 있는 것인가, 차별이 없는 것인가? 법신의 참다운 성품을 모든 여래가 다 함께 지니고 있기 때문에 차별이 있지 않지만, 능히 증득하는 인[能證因]에 나아가서는 차별이 존재하기 때문에 거짓으로 차별을 설한다.그 나머지 두 몸도 각각 개별적인 인(因)의 감응이니, 각각 개별적인 자성이라서 실제로 차별이 있지만 다만 별도의 집착이 없는 것이다. 똑같은 곳에서 비슷한 이락(利樂)과 의요(意樂)의 사업이 평등해서 차별 없음을 설하니, 이 때문에 모든 부처님께서는 의요사업(意樂事業)에 의지(依止)하는 바를 말미암아서 세 가지 몸을 그와 같은 차례로 차별 없음을 설하셨는데, 의지하는 법계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요, 이락(利樂)과 의요가 차별이 없기 때문이요, 함께 사업을 지음에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은 3신은 각각 별도로 모든 공덕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여래의 법신은 청정진여의 전의(轉依)를 모습으로 삼아서 진실하고 선하니, 본성이 청정해서 모든 잡염법(雜染法)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공덕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모든 공덕이 진실한 성품이기 때문에 모든 공덕을 갖추었다고 설하는 것이라서 색심의 차별공덕이 있지 않다.부처님의 수용신은 모든 색심의 동등한 법의 진실한 공덕을 갖추었고, 아울러 다른 사람을 위하여 화현된 모습의 공덕[化相功德]을 나타내고 있다. 부처님의 변화신은 오직 모든 색심 등의 화현된 모습의 공덕을 나타냄을 갖추고 있다. 그러므로 3신이 모두 극가사 수량을 초과하는 공덕을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모든 여래께서는 교화를 받는 유정과 공(共)인가, 불공(不共)인가? 어떤 사람은 모두 공이라고 한다. 각각의 부처님께서 모두 능히 일체 유정들을 교화하고 제도할 수 있어서 복덕과 지혜가 모두 평등하고 3무수겁 동안 행원(行願)을 부지런히 닦아서 똑같이 모든 유정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보리를 구하기 때문이다. 마치 한 부처님께서 교화를 받는 유정이 곧 모든 부처님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어떤 사람은 불공이라고 말한다.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모든 유정들의 종류가 본래 서로 속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래께서 저사불(底沙佛) 때에 일찍이 자씨(慈氏)와 함께 제자가 되었는데, 부처님께서 석가의 유정을 교화할 선근이 먼저 무르익고 자씨의 유정을 교화할 선근이 후에 무르익을 것임을 관하시고, 또 자씨의 인행(因行)이 먼저 원만하고 석가는 나중에 원만함을 관하셨다. 마침내 어떤 곳에서 화광정(火光定)에 드시어 석가로 하여금 7일 낮 7일 밤 동안 한 발도 떼지 않고 하나의 게송으로 찬탄하심을 보게 하시고, 또 자씨보다 먼저 앞서 성불하게 하셨다.또 부처님께서 장차 열반에 드시려 하실 때 말씀하시기를, “나는 제도해야 할 이를 모두 다 제도하여 마쳤다”고 하셨다.또 계경에서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실 때 하나의 교화할 사람을 관하시어 지금은 비상비비상처에 있지만 마땅히 이 세간에 태어나 부처님의 교화를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래서 하나의 화신을 남겨두어 이 세계에 잠복해 머물게 하고 먼저 받은 몸으로는 열반을 나타내셨다. 그가 비상비비상처로부터 사라져 이 세간에 태어나자, 부처님께서 남기신 화신이 그를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하여서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때 화신이 홀연히 사라져 나타나지 않았다”고 설하였다. 또 여러 경에서 곳곳마다 널리 “능화(能化)와 소화(所化)가 서로 속하면서 결정되었다”고 설하였으니, 그러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교화하시는 바를 불공이라고 말하는 것이다.참다운 뜻이란 공과 불공이 있다는 것이다. 무시이래로 종자의 성품은 법이 그러해서 다시 서로 묶이고 속하니, 어떤 때는 많은 것이 하나에 속하고, 어떤 때는 하나가 많은 것에 속한다. 보살이 수행의 인(因)을 지을 때 유정이 성숙하는 것 또한 결정되지 않았으니, 공이거나 불공이기 때문에 이미 부처를 이루고서 함께 교화하여 제도하기도 하고 혹은 별도로 교화하여 제도하기도 한다.만약 화생된 바가 오로지 공(共)이라면 많은 부처님이 무슨 필요가 있겠는가? 한 부처가 능히 모든 중생들을 교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직 하나의 부처가 세간에 항상 머물며 중생을 교화할 뿐이고, 나머지 부처는 모두 반드시 영원히 적멸에 들어야만 한다. 부처님 역시 반드시 나머지 중생들을 교화하여 대승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아야 하니, 쓸모가 없기 때문이다. 다만 그들을 교화하여 3승을 얻게 하고 영원히 적멸에 들게 하면 되니, 얻기가 쉽기 때문이다. 어떤 지혜로운 자가 쉬운 것을 버리고 어려운 것을 취하겠는가? 그런데 등불이 태양을 돕는 것이므로 교화하는 바는 오로지 공(共)은 아니다.만약 교화되어야 할 중생이 오로지 불공(不共)이라면, 보살은 서원을 발하고 모든 부처님을 내리 모시면서 대승의 소달나(蘇達那:경전) 등을 수학하지 말아야 하며, 또한 많은 선지식과 모든 부처님을 모시지 말아야 하며, 자기가 교화할 바를 뒤의 부처님께 부촉하지 말아야 한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가 서로 어긋나니, 이 때문에 오로지 불공이라고 해서는 안 된다.비록 낱낱의 부처님께서 일체 유정들을 교화하는 공능이 있다고 하더라도 모든 유정들은 부처님의 인연이 없는 곳에서는 교화를 받을 수 없고, 또한 보거나 듣지도 못한다. 비록 낱낱의 부처님께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항상 세간에 머물러 한량없는 중생들을 교화한다고 할지라도 마땅한 바를 따라서 갖가지로 화하나니, 어떤 때는 등각(等覺)을 나타내기도 하고, 어떤 때는 열반을 나타내기도 하며, 어떤 때는 석가라고 이름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자씨 등으로 이름하기도 한다. 하나의 화현된 상(相)을 따라서 제도되는 유정의 말은 모두가 제도하여 마쳤다.비상(非想)으로 태어나는 자는 마땅히 석가모니의 화상(化相)을 보고 제도되므로 화신을 남겨서 기다리는 것도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만약 모든 여래가 동일하게 교화한다면 어떤 부처님께서 현전하여 그들을 제도하겠는가?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두가 비원력(悲願力)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만 교화하고 나머지는 모두 그만두고 쉴 수 없다. 다만 부처님과 인연이 있어서 동일한 곳, 같은 시간에 후득지 상에 저마다 하나의 화신을 나타내나니, 그 모양이 비슷하여 서로 장애가 되지 않는다. 다시 모양이 서로 섞여 증상연이 되어서 교화를 받을 중생의 식(識)으로 하여금 이와 같이 변하게 한다. 이른바 한 부처님께서 신통을 나타내기도 하고 정법을 설하기도 하는 것을 보는데, 이와 같은 일은 불가사의하여 유식의 도리가 아니면 이해할 수가 없다.또 자성신의 적멸안락은 자기 이익의 공덕에 포섭되는 바에 올바로 속하여 증상연이 됨으로서 중생을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겸하여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에 속한다. 또 두 가지 신(身)과 함께 이익이 되는 공덕을 소의(所依)로 삼기 때문에 두 가지 이익에 섭수되는 것이다.수용신이란 두 부분을 갖추고 있다. 첫째는 스스로 법의 즐거움을 받는 부분이니, 이른바 3무수겁 동안 자기를 이롭게 하는 행을 만족하게 닦아 색(色) 등의 참다운 몸을 증득한 바로서 스스로 미묘한 기쁨과 즐거움을 수용하게 하는 것이다. 둘째는 다른 이로 하여금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하는 부분이니, 이른바 3무수겁 동안 이타행을 만족하게 닦아 색 등의 화신을 증득한 바로서 모든 보살의 무리를 대지(大地)에 들게 하고 갖가지 형태를 시현하고 갖가지 법을 설하여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대법락을 감수하게 하는 것이다.이 두 가지를 말미암아 어떤 때는 이 몸이 오직 자기의 이익에만 포섭된다고 설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이 몸이 오직 다른 이의 이익에만 포섭된다고 설하기도 하며, 어떤 때는 함께 포섭되기도 한다고 설하기도 하는데, 모두가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변화신이란 오직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여 모든 변화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타(利他)에 포섭된다.이와 같이 3신에는 네 가지 구분이 있기 때문에 네 가지의 구절이 된다. 첫째는 수용신이고 변화신이 아닌 것이니, 이른바 자기 이익[自利]의 부분인 실제의 수용신이다. 둘째는 변화신이고 수용신이 아닌 것이니, 이른바 변화신이 지전의 여러 중생들을 교화하기 때문에 거칠기도 하고 미묘하기도 하고 환희하게 하기도 하고 두려움을 느끼게 하기도 하면서 거듭 구르는데 일정하지 않다. 그런데 변화신이라고 이름하고 수용신이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은 반드시 현재 법(法)의 즐거움을 받게 하지는 않기 때문이다.셋째는 수용신이기도 하고 변화신이기도 한 것이니, 이른바 지상 보살(地上菩薩)을 위하여 갖가지 화신을 나타내서 모든 보살들로 하여금 법의 즐거움을 받게 하기 때문이다. 때를 따르면서 다시 구르는데 일정하지 않다. 넷째는 수용신도 아니고 변화신도 아닌 것이니, 이른바 자성신을 일컫는다.어떤 곳에서는 법을 설하시는 부처님께는 두 종류의 몸이 있다고 하는데, 첫째는 생신(生身)이고 둘째는 법신(法身)이다. 자성신이나 실제의 수용[實受用]은 모두 법신이라고 이름하니, 모든 공덕법의 의지처가 되기 때문이요, 모든 공덕법이 모여 이루어지는 바이기 때문이다. 변화신이나 타수용(他受用)은 생신이라고 이름하니, 중생의 마땅함을 따라서 자주 생(生)을 나타내기 때문이다.또 다른 경에서 “열 종류의 부처가 있다. 첫째는 현등각불(現等覺佛)이고, 둘째는 홍서원불(弘誓願佛)이고, 셋째는 업이숙불(業異熟佛)이고, 넷째는 주지불(住持佛)이고, 다섯째는 변화불(變化佛)이고, 여섯째는 법계불(法界佛)이고, 일곱째는 심불(心佛)이고, 여덟째는 정불(定佛)이고, 아홉째는 본성불(本性佛)이고, 열째는 수락불(隨樂佛)이다. 앞의 다섯 가지는 세속의 뜻이고, 뒤의 다섯 가지는 승의(勝義)이다”라고 설하였으니,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3신에 포섭된다. 이와 같은 종류를 모양에 따라서 알아야 한다.
經 이와 같은 청정한 법계는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이네.
論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를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설하셨다. 불지(佛地)의 다섯 가지 공덕과 3신의 차별을 구족하셨고, 혹은 자성 등 여섯 구절의 상(相)을 구족하셨다. 이 4게송으로 불지의 모든 공덕을 간략하게 설하였으며 앞에서도 자세하게 설하였으니, 성스러운 가르침이 설하신 바라고 총체적으로 명명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經 이때 박가범께서 이 경을 설하시고 나자 묘생보살마하살 등과 모든 대성문과 세간의 천상, 인간, 아수라들과 모든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크게 환희하면서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였다.
論 여기에서는 법을 들은 대중들이 가르침에 의거하여 받들어 행함을 나타내 보였다. 부처님의 정식(淨識)과 비원(悲願)이 이끄는 바를 말미암아 계경(契經)의 증상연력(增上緣力)을 비슷하게 변현해서 당시 대중들의 자기 마음에 선근의 성숙함이 저 상견(相見)을 닮았으니, 이른바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환희심을 내면서 믿고 받아들이고 받들어 행하는 것이다. 모든 성문들은 혹은 화작(化作)을 나타내든 혹은 진실이든 수용과 변화 두 국토의 같은 곳에서 법을 들은 무리들은 비록 들은 것은 같다 해도 본 것은 각각 달라서 서로 장애되지 않는다. 위에서는 또한 아래를 볼 수 있으나 아래에서는 위를 보지 못하니, 각각 이익이 되면서 안락한 일이 이루어진다.
불지(佛地)의 깊고 깊은 모든 구절의 뜻을
제가 이제 분수껏 간략하게 풀이하였습니다.
이 공덕이 모든 중생들에게 두루 베풀어져서
원하건대 속히 위없는 과보를 동등하게 이루소서.
모든 서사(書寫)로 생겨난 복은
이후에도 훌륭하고 선하여 원인과 같은 과보를 이루니
원하건대 이것이 서로 이어져 미래세가 다하도록
모든 함식(含識:중생)을 이롭게 하고 안락케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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