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지경론(佛地經論) 3권
불지경론 제3권
친광 지음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經 이때 세존께서 묘생보살에게 이르셨다.
“묘생이여, 마땅히 알아라. 다섯 가지 법이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하나니, 어떤 것이 다섯 가지인가? 청정법계(淸淨法界)ㆍ대원경지(大圓鏡智)ㆍ평등성지(平等性智)ㆍ묘관찰지(妙觀察智)ㆍ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
論 이와 같이 교기인연분(敎起因緣分)을 이미 설명하였고, 다음에는 성교소설분(聖敎所說分)을 나타내고자 한다.오직 묘생보살 한 사람에게만 이르셨다는 것은 묘생보살이 가장 뛰어난 가르침을 받은 것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찌하여 성문의 무리에게는 이르시지 않았는가? 모든 보살들이 오롯한 의지로 일체지(一切智)를 간절하게 바라기 때문이며, 이와 같은 법을 듣고서 뛰어난 앎을 일으켰기 때문이며, 뛰어난 앎을 일으킨 뒤에는 능히 그곳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며, 그곳으로 들어간 뒤에는 능히 올바르게 수행하기 때문이며, 올바르게 수행한 뒤에는 빨리 이루기 때문이다.성문은 능히 일체지를 구하지 못하나니, 비록 능히 구하는 자가 있다고 해도 이와 같은 법을 듣고서 뛰어난 앎을 일으키지 못하며, 비록 뛰어난 앎을 일으킨다고 하여도 능히 올바르게 행하지 않으며, 비록 능히 올바르게 행한다고 해도 빨리 이루지 못하니,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르시지 않는 것이다.만약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경을 설할 때에 온갖 무리들이 모여들었다고 하는가? 당시의 무리가 가장 높고 위대함을 나타내기 위해서 이 유정들을 화작(化作)하였으니, 보리에 회향하는 성문으로 하여금 대승으로 나아가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대중 속으로 들어오도록 이끈 것이다. 혹은 모든 보살이 이 이름을 나타내서 지었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간략하게 말하면 4상(相)을 말미암아서 불지(佛地)를 안립하니, 첫째는 숫자를 말미암고, 둘째는 섭수함을 말미암고, 셋째는 이름을 말미암고, 넷째는 결택차별(決擇差別)의 뜻을 말미암는다. 여기에서는 다만 숫자와 섭수함과 이름과 차별을 설한다.첫째, 숫자를 말미암는다는 것은 소위 ‘다섯 가지 법이 있는’ 것이니, 나중에 자상(自相)을 설하면 그 숫자가 저절로 드러날 것이다. 어찌하여 숫자를 말하는가? 결정(決定)하기 위함이다. 오직 다섯 가지 법만이 있을 뿐 늘거나 줄지 않는다. 법이란 곧 자상을 지니는 뜻이지 사랑할 만한 과보의 이숙(異熟)의 뜻은 아니다.둘째, 섭수함을 말미암는다는 것은 소위 ‘대각지(大覺地)를 포섭한다’라고 한 것이다. 대각이란 바로 부처로서 세 가지 몸을 갖추었으니, 첫째는 자성신(自性身)이요, 둘째는 수용신(受用身)이요, 셋째는 변화신(變化身)이다. 나중에 자세히 설명할 것이다.지(地)란 이른바 대각이 의지하는 바이자 섭수하는 바이자 행하는 바의 경계로서 자상과 소연(所緣)의 차별을 안립하나니 일체법을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 소연을 안립함은 일체를 포섭하는 걸 말하고, 자상을 안립함은 오직 자체를 거두어서 하나로 합하기 때문이다.
대각지에는 가없는 공덕이 있는데 간략하게 말하면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유위(有爲)이고 둘째는 무위(無爲)이다.무위공덕은 정법계에 포섭된다. 정법계란 바로 진여의 무위공덕이다. 모두가 바로 진여의 체상(體相)이 차별된 것이다. 유위공덕은 4지(智)에 포섭된다. 무루위(無漏位) 중에서 지(智)의 용(用)이 강하기 때문에 지(智)로써 이름을 나타내니, 일체종(一切種)의 심(心)과 심소유법(心所有法)과 그 품류(品類)이다.
만약 진실한 뜻에 대해서 말한다면 하나하나의 지품(智品)은 모든 공덕법문을 두루 포섭한다.만약 거친 모양[麤相]에 대해서 말한다면 묘관찰지는 4념주(念住)를 포섭하나니, 모든 몸 등의 법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평등성지는 4정단(正斷)과 4무량(無量)을 포섭하나니, 4정단이 비록 정진을 그 자성으로 삼는다고 하더라도 여래의 평등성지에 섭수되는 바이기 때문에 높고 낮은 모양의 차별이 없다. 4무량이란 평등하게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혜에 포섭되는 것이다.4여의족(如意足)은 삼마지를 자성으로 삼기 때문에 관찰지에 포섭되는데, 모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을 임지(任持)한다고 아래의 경에서 설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 나머지 정려ㆍ해탈ㆍ등지(等持)1)ㆍ등지(等至)2)ㆍ다라니문ㆍ삼마지문ㆍ무쟁(無諍)ㆍ원지(願智)3)ㆍ통무애해(通無礙解)ㆍ여래의 열여덟 가지 불공불법(不共佛法)과 역무외(力無畏) 등 많은 부분이 묘관찰지에 포섭된다.신경지통(神境智通)의 많은 부분은 성소작지에 포섭된다.누진지통(漏盡智通)과 누진지력(漏盡智力)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누진의 상속 중에 네 가지 지혜에 포섭되는 바가 있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그것이 누(漏)가 다한 열반을 연한다면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고 한다.제7 변행(遍行)과 행지력(行智力)은 네 가지 지혜에 포섭된다.
혜(慧) 등의 근(根)들과 혜 등의 역(力)들은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 각지(覺支)와 도지(道支)는 많은 부분이 평등성지에 포섭된다. 괴로움 등의 10지(智)4)와 진무루(眞無漏)5)는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와 평등성지에 포섭된다.무망실법(無忘失法)은 많은 부분이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일체 습기(習氣)의 상속을 영원히 끊는 것은 많은 부분이 청정법계와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바라밀다는 만일 이것이 무루이거나 또는 유루와 비슷하다면 많은 부분이 뒤의 두 가지 지혜(청정법계와 대원경지)에 포섭된다.
온갖 상(相)의 수호(隨好)는 많은 부분이 성소작지에 포섭된다.나머지 부처님 법은 그 응하는 바에 따라 상응하여 포섭된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지혜는 모든 불지(佛地)에 고루 포섭된다.
무루심과 심법(心法)이 구유법(俱有法)6)이거나 품류의 차별을 변현(變現)한 것이라면 청정법계는 진여 위 모든 상(相)의 공덕(功德)을 포섭한다. 그러므로 다섯 가지 법은 모든 불지의 공덕을 고루 포섭한다.셋째는 이름을 말미암는 것이다. 이른바 청정법계와 나아가 성소작지까지 자세히 설하고 있다. 청정법계는 이른바 모든 번뇌나 소지(所知)의 객진장구(客塵障垢)를 여의고 온갖 유위ㆍ무위 등의 법이 뒤바뀌지 않는 참다운 성품으로서 모든 성스러운 법이 생장하는 의인(依因:의거하는 요인)이다.모든 여래의 진실(眞實) 자체는 무시이래로 자성이 청정해서 시방계의 극미진수보다 많은 성품과 상(相)의 공덕을 가지가지 갖추고 있고, 생하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 허공과도 같아서 모든 법과 모든 유정에 두루하며 평등하게 공유하고, 모든 법과 더불어 하나도 아니고 다른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모든 상과 모든 분별과 모든 명언(名言)을 여의고 있어서 모두가 능히 얻을 수 없다.오직 이 청정한 성지(聖智)가 증득하는 이공무아(二空無我)에 의해 현양된 진여(眞如)를 그 자성으로 삼는데, 모든 성현은 일부분만을 깨닫지만 모든 부처님께서는 원만히 깨달으신다. 이와 같은 것을 청정법계라고 이름한다.‘대원경지(大圓鏡智)’란, 이른바 모든 아(我)와 아소(我所)에 대한 집착과 모든 소취(所取)와 능취(能取)에 대한 분별을 여의는 것이다. 반연된 행상(行相)은 요달해 알 수 없지만 어리석지도 않고 잊지도 않으니, 모든 경계는 분별로는 알 수 없다.경상(境相)의 차별은 어느 때 어느 곳에서나 짬이나 끊어짐이 없으며, 모든 번뇌의 장애나 더러움의 유루종자를 영원히 여의어서 모든 청정한 무루공덕 종자의 원만함을 성취하며, 온갖 경계의 모든 지(智)의 영상(影像)을 능히 나투고 능히 낳으며, 모든 신토(身土)7)의 영상이 의지하는 바이며, 온갖 불지의 공덕을 지니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끓어지거나 다함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대원경지라고 한다.‘평등성지(平等性智)’란 이른바 자타 모두를 평등하게 관하여 대자대비와 언제나 함께 상응한다.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이 불지의 무주열반(無住涅槃)을 건립하며, 모든 유정들이 즐거워하는 바에 따라서 수용하는 신토(身土)의 갖가지 영상을 나타내 보인다. 이는 묘관찰지와는 의지하는(인식대상으로 삼는) 바를 공유하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평등성지라고 한다.‘묘관찰지(妙觀察智)’란, 이른바 모든 경계의 차별을 관하되 언제나 장애가 없으며, 온갖 다라니문과 삼마지문과 모든 미묘한 선정 등을 섭수하여 갈무리한다. 대중의 모임에서 능히 온갖 자재한 작용을 나투면서 모든 의심을 끊고 대법우(大法雨)를 내리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묘관찰지라고 한다.‘성소작지(成所作智)’란 이른바 능히 모든 세계에 두루하면서 교화해야 할 바를 따라 중생을 성숙시키며, 갖가지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불가사의한 부처님의 변화사(變化事)를 나타내 보인다. 방편으로 모든 유정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되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으니,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성소작지라고 한다.다시 이와 같은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나니, 인(因)이기 때문이고 과(果)이기 때문이고 과차별(果差別)이기 때문이다.‘인’이란 바로 청정법계이니, 이것은 성스러운 법을 능히 낳고 기르는 인이기 때문이다. ‘과’란 성스러운 지혜이니, 그것을 반연하여 생하고 그것에 의지하기 때문이다. 이 성스러운 지혜의 과의 차별에 네 가지가 있다. 일어남을 따라 건립하는 것이 이른바 법계를 반연함이니, 일체를 임지(任持)하여 들은 법을 따르기 때문이고, 모든 유정들을 관하여 자타의 평등성을 증득하였기 때문이고, 올바른 법과 뛰어난 방편을 열어 보이기 때문이고, 남을 이롭게 하는 인(因)이기 때문이다.다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나니, 부처님 자체이기 때문이고 인이기 때문이고 과이기 때문이다.
‘부처님 자체’란 것은 청정진여를 체상(體相)으로 삼기 때문이고, 나아가 이 경계를 반연하는 무분별지를 체상으로 삼기 때문이다. ‘인’이란 모든 유정들에게 영원히 짬이나 끊어짐이 없는 한량없는 평등성지(平等性智)이다. ‘과’란 이른바 일체 유정들을 이익케 하는 두 가지 수승한 지혜이니, 교화할 만하거나 교화할 만하지 못한 유정을 관찰하는 묘관찰지(妙觀察智)와 그 마땅함을 따르는 성소작지(成所作智)이다.다시 이와 같이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하니, 이른바 불지 과위(果位)의 차별을 말하는 것이니, 즉 지단(智斷)8)의 과는 불지의 체가 된다. 단과(斷果)는 바로 청정법계이니 온갖 장애를 영원히 여의기 때문이다. 지과(智果)에 네 종류가 있으니 대원경지 등이다. 불과지(佛果地)에서 모든 심(心)ㆍ심법(心法)의 분위(分位)가 나타내는 모든 공덕 중에 지(智)가 가장 훌륭하므로 지로써 이름을 삼으니 온갖 유위의 덕을 모두 포섭하기 때문이다.다시 이와 같이 설한 법문은 다섯 가지 법을 건립한다. 불지(佛地)와 모든 불법을 전부 포섭하고 무위의 온갖 공덕을 다 거두기 때문이고, 들어서 훈습된 것[聞熏習)을 성숙시켜 일체 불지가 거둔 모든 공덕을 임지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에게 언제나 부처님의 이익과 안락과 평등한 일을 나타내고 일으키기 때문이고, 다라니문과 삼마지문과 가없고 한량없는 복과 지혜의 장엄이 끝까지 따르기 때문이며, 능히 온갖 유정들을 위한 이익과 안락함의 변화사(變化事)를 이루기 때문이다.다시 이와 같이 설한 네 가지 지혜는 어떤 법을 전(轉)하여 얻는가?『섭대승』의 설에 의하면, 식온(識蘊)을 전하여 얻는다고 한다. 어찌하여 심(心)을 전하여 심법(心法)을 얻거나 심법을 얻지 않는 것인가? 네 가지 무루심은 지혜와 상응하기 때문에 임시로 이름하여 지(智)라고 하는 것이다.그러므로 논(論)의 설명에서 “정지(正智)는 실유(實有)라고 말해야 하는가, 가유(假有)라고 말해야 하는가?”라고 물으니, “둘 다 있다고 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여기서의 지(智)란 바로 실유이고, 지의 권속인 온갖 심(心)ㆍ심법(心法)도 지라고 이름하지만 가(假)라고 설명하기 때문에 두 종류가 있는 것이다.여기에서 무루심ㆍ심법 등은 지(智)를 주체로 삼기 때문에 모두 지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식온에 의지함을 전변해서 네 가지 무루지상응심을 얻는 것을 대원경심(大圓鏡心)이라고 하고 나아가 성소작심(成所作心)이라고 한다.제8식을 전하여 대원경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온갖 공덕의 종자를 지니고 모든 신토(身土)와 지(智)의 영상(影像)을 능히 나투고 낳는다.
제7식을 전하여 평등성지상응심을 얻으니, 2집(執)9)의 자타분별을 멀리 여의어서 일체의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다.제6식을 전하여 묘관찰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일체를 관하되 모두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5현식(現識)을 전하여 성소작지상응심을 얻으니, 능히 바깥의 이루어야 할 일을 모두 이루어 나투기 때문이다.또 어떤 사람은 제6식을 전하여 성소작지를 얻고, 5현식을 전하여 묘관찰지를 얻는다고 하는데, 이것은 그렇지 않으니 차제가 아니기 때문이며, 법을 설하여 의심을 없애며 두루 관찰하는 것은 5식(識)의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생사위(生死位) 가운데 네 가지 상응품(相應品)의 심(心)과 심법(心法)을 전거(轉去)하여서 불과(佛果)의 네 가지 상응품의 심과 심법을 전득(轉得)하나니, 이 모두를 지(智)라고 말한다.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智)의 상응심품은 무엇을 소연(所緣)으로 삼는가?대원경지상응심품은 만약 1상(相)을 말한다면, 오직 진여의 무분별지를 반연할 뿐 후득지에 반연되지 않나니, 그 반연된 행상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구상(具相)을 말한다면 일체법을 반연하나니,『장엄론(莊嚴論)』에 의하면 대원경지는 일체의 소지경계(所知境界)에서 보편적으로 어리석거나 혼미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이 경에서 “둥근 거울을 의지하여 온갖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였으니, 이와 같이 여래의 지혜 거울에 의지(依止)하여 모든 처(處)와 경계와 식(識)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여기에서 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고, 경계[境]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이며, 식은 여섯 가지의 식별이다. 이와 같이 지 위에 18계(界)의 온갖 영상이 나타나기 때문에 이 대원경지가 일체법을 반연한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 대원경지를 말미암아 일체시(一切時)에서 일체법을 반연하기 때문에 여래가 일체지를 갖추었다고 말하는 것이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나머지 지는 일체법을 아는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여래는 일체지라고 이름할 수가 없다. 이와 같이 대원경지는 안으로는 자체공덕의 종자를 반연하고 밖으로는 일체를 반연한다.
진(眞)이거나 속(俗)이거나 소지경계(所知境界)와 신토(身土) 등의 일체 그림자를 나투는데, 진의(眞義)의 가장자리를 반연하면 무분별지라고 이름하고, 속의(俗義)의 가장자리를 반연하면 후득지라고 이름한다.비록 일체를 반연하더라도 행상(行相)이 미세하여 환히 알 수 없으니, 아라야처럼 비록 세 가지 경계[三境]를 반연하더라도 미세하기 때문이며, 또한 경계를 반연한다고 말하니 환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대원경지는 불가료지(不可了知)로써 증득할 수는 없는 것이고 오직 진여의 무분별지를 반연하지 후득지가 아니다.모든 심(心)과 심법(心法)의 본체[體]는 비록 하나의 뜻이지만 그 작용[用]은 많다. 작용의 차별을 따라 두 개의 지[二智]로 나누어도 또한 허물이 없으니, 요컨대 진(眞)의 이치에 도달하려면 오히려 세속의 일을 요달해야 한다. 그러므로 두 가지 지(智)는 일심(一心)의 뜻에 소속되지만 그 선후(先後)를 설한 것이니, 마치 나중에 얻는 것과 비슷해서 후득지라고 이름하기도 하니 나머지 또한 마찬가지다.평등성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오직 대원경지를 반연하니 마치 물들고 오염되는[染汚] 뜻처럼 아라야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오직 진여실제를 반연하니 평등성(平等性)을 반연하여 경계로 삼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참다운 뜻은 이 평등성지 역시 일체를 반연하여 경계로 삼나니, 일체의 평등성을 두루 반연하기 때문이다.『장엄론』에 의하면 평등성지는 모든 유정들을 반연하나니, 나와 남이 평등하기 때문이며, 모든 유정들의 뛰어난 앎을 따라서 부처의 영상을 나타내 보이기 때문이라고 설한다. 이 경에서는 10상(相)의 평등성을 증득하기 때문이니, 이 평등성은 진속(眞俗)에 통하므로 일체를 반연하여도 또한 과실이 없다고 설한다.만약 속(俗)을 반연하지 않는다면, 곧 모든 유정들의 뛰어난 앎에 따라 모든 부처님의 영상을 나투지 못할 것이라서 또한 물들여 더러워지는 말나[染汚末那]의 감응이 평등지의 부류가 아니라 오직 대원경지만을 반연할 뿐이니, 범부와 성현이 다르기 때문이고 성스러운 가르침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나머지와는 유사하지 않기 때문이다.묘관찰지상응심품은 널리 일체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관하되 모두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일체 소지경계를 반연한다.
성소작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오직 다섯 가지 현전의 경계[現境]를 반연한다고 말한다.『장엄론』에서는 “여래의 5근(根) 하나하나는 모두 5경(境)에서 전전한 것이다”라고 설하였다.
참다운 뜻은 성소작지 또한 일체를 반연하는데, 모든 경계에서 다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장엄론』에 의하면 “성소작지는 일체계(一切界)에서 갖가지 변화를 일으키는데 헤아릴 수 없고 불가사의하면서도 모든 유정들의 온갖 의리(義利)를 짓는다”고 설한다. 이 경에서 “성소작지는 세 가지 업의 여러 변화사(變化事)를 일으켜 지으면서 중생의 8만 4천 가지 심행(心行)의 차별을 결택한다”고 설하였으며,『사기론(四記論)』10)을 지어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 등의 뜻을 수령(受領)하여 대치할 것을 널리 설하였다. 만약 일체 경계를 두루 반연하지 않으면 이런 공능이 없다.또 부처님의 마음은 장애가 없고 자재해서 하나하나가 능히 모든 경계를 비추는데, 다만 작의(作意)의 힘으로써 한 법을 반연하기도 하고 혹은 일체를 반연하기도 한다고 설한다. 또 5근(根)이 5경(境)에서 전변한다고 설하는데, 오직 그렇다고만 말하지 못하는 까닭에 증득을 성취할 수 없다.『집량론』에서 모든 심(心)ㆍ심법(心法)이 자체를 증득하는 것을 현량(現量)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한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본 적이 없어서 응당 억념(憶念)할 수도 없는 것과 같으니, 이런 까닭에 사지상응심품(四智相應心品)은 하나하나가 또한 자체를 환히 비추어 아는데 어떻게 세간법과 차이가 없겠는가? 칼은 스스로를 다치게 하지 못하고, 손가락 끝은 손가락 끝을 능히 만지지 못하기 때문이다.등불이 능히 스스로 비추는 것을 보지 못하였는가?
어떻게 등불 등이 스스로 비추는 것을 알 수 있는가? 어둠이 없음을 현견(現見)해서 분명하게 드러나니, 만약 스스로 비추지 못하면 응당 어둠의 장애가 있으며 응당 현견하지 못한다. 이를 말미암기 때문에 등불 등이 스스로 비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등불 등이 어둡지 않은데 무엇 때문에 반드시 비춰야 하는가?가령 병이나 옷 등과 같은 본체에는 비록 어둠이 없다고 하더라도 등불 등이 주변을 비춰주지 않으면 어둠의 장애가 있어서 현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등불 등이 비출 때 저쪽의 어둠을 없애서 현견하게 하는데, 이것을 비춤이라고 이름한다. 등불 등도 또한 마찬가지다. 자체가 생겨날 때에 주변의 어둠의 장애를 없애서 현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스스로 비춤이라고 이름한다.모든 심ㆍ심법은 비록 뛰어나거나 열등함이 있더라도 능히 외연(外緣)을 이루며, 안으로 자체를 증득하는 것은 마치 광명이 이미 능히 다른 것을 비추면서도 능히 스스로를 비추는 것과 같다. 칼 등의 법들과 같지 않아서 법이(法爾)는 가히 한 종류일 수 없다. 이것은 모든 심ㆍ심법의 거친 상[麤相]에 각각 상분(相分)과 견분(見分)의 두 가지 부분이 있는 것에 대해서 설한 것이다.『집량론』에서는 심ㆍ심법을 설명하는데 모두 세 가지 부분이 있다고 하니, 첫째는 소취분(所取分)이고, 둘째는 능취분(能取分)이고, 셋째는 자증분(自證分)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분은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니, 첫 번째는 소량(所量)이고, 두 번째는 능량(能量)이고, 세 번째는 양과(量果)이다. 만약 자세하게 분별한다면 네 가지 부분이 있는데, 그 뜻을 설명하자면 세 가지 부분은 앞서와 같고 거기에 다시 네 번째 증자증분(證自證分)이 있는 것이다.처음의 두 가지는 밖이고 나중의 두 가지는 안이다. 첫 번째 부분은 오직 소지(所知:인식대상)이고, 나머지는 두 종류에 통한다. 이른바 두 번째 부분은 오직 첫 번째를 아는 것이니, 양(量)과 비량(非量)이거나 현량(現量)이거나 비량(比量)이다. 세 번째 자증분은 능히 두 번째와 네 번째를 증득한다. 네 번째 증자증분은 능히 세 번째를 증득한다. 세 번째와 네 번째는 모두가 현량(現量)에 포섭된다. 이런 도리를 말미암아 비록 하나의 체(體)라도 많은 부분이 합해 이루어지면서 상즉(相卽)도 아니고 상리(相離)도 아니니, 안과 밖을 나란히 알아서 무궁과(無窮過)11)가 없다.그러므로 경에서 말한다.
중생 마음의 두 가지 성품은
안과 밖의 모든 분수가
소취와 능취의 얽매임이라서
갖가지 차별을 본다.
이 게송의 뜻을 말하자면, 중생의 마음의 성품은 두 가지 부분이 합하여 안이나 밖을 이루어서 모두가 소취와 능취의 전(纏)에 얽매여 있으니, 양과 비량(非量)이거나 혹은 현량(現量)이거나 혹은 비량(比量) 등으로 많은 부분의 차별이 있음을 본다. 4지심품(智心品)이 비록 많은 부분을 가지고 있어도 모두 무루현량(無漏現量)에 포섭된다. 이 뜻의 자세한 내용은 다른 곳에서 분별한 것과 같다. 뜻의 쓰임[義用]은 여러 가지로 많지만 본체에는 다름이 있지 않으니, 하나의 법에서 괴로움과 덧없음 등 갖가지 뜻의 차별이 있지만 본체는 하나이다.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상응심품(智相應心品)은 상분(相分)과 견분(見分) 등이 있는가?반드시 있으니 견분은 비추어야 할 경계를 비추고, 자증분은 견분과 증자증분을 함께 비추고, 증자증분은 자증분을 비춘다. 또한 반드시 있으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부분의 차별이 없다면 마땅히 소연(所緣)이 없어서 지(智)라고 이름하지 못할 것이다.상분은 일정하지 않은데, 어떤 사람은 “진실한 무루심품은 장애가 없기 때문에 앞의 경계를 직접 비추되 마음의 변화를 쫓아다니지 않아서[無逐心變] 앞의 경계의 모습과 유사하다. 하지만 무루심으로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하나니 무분별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또 연경(緣境:경계를 반연함)이 부사의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또 어떤 사람은 “진실한 무루심품은 또한 상분이 있어서 모든 심ㆍ심법이 법 그대로[法爾] 유사한 경계[似境]를 현현하는 것을 이름하여 연(緣)이라고 한다. 이는 갈고리 등이 움직여서 사물을 취하는 것이나 등불 등이 빛을 펼쳐서 사물을 환히 비추는 것과 같지는 않다. 마치 밝은 거울 등에 사물을 비춰서 모습을 나투는 것과 같다. 유사한 경계가 나타남으로 말미암아 분명하게 비추어내므로 이름하여 장애가 없다고 하고, 집착하지도 않고 헤아리지도 않으므로 무상(無相)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분별이 없고 묘용(妙用)이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이므로 부사의라고 이름하니, 영상을 나투지 않음이 없다.무상이라고 말한 것은 곧 무상분(無相分)이고 무분별이라고 말한 것은 무견분(無見分)이다. 무상견은 허공과 같거나 혹은 토끼의 뿔과 같아서 마땅히 지(智)라고 이름하지 않나니, 집착의 계교(計較)가 없기 때문에 능취와 소취 등의 상이 없다고 말하지만 유사 경계의 연을 비추는[緣照] 이치와 작용은 없지도 않다. 만약 무루심이 오로지 무상분이라면 모든 부처는 몸이나 국토 등의 갖가지 영상을 나타내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곳곳마다 경론이 다르다.색온의(色蘊依)를 전(轉)하여 색(色)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은 4온의를 전해도 마땅히 식(識) 등이 없다는 것이니, 이것은 곧 커다란 오류가 된다.어떤 사람은 “무루무분별지상응심품(無漏無分別智相應心品)이라면 무분별이기 때문이며, 소연(所緣)의 진여가 체를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 마치 자체를 비출 뿐 따로 상분이 없는 것과 같다”고 말한다.만약 후득지상응심품(後得智相應心品)이라면 분별이 있기 때문이며, 소연인 경계가 체를 여의기 때문이니, 마치 유루심이 유사 경계의 모습[相]을 나타내서 분명하게 반연하여 비추는 것과 같다. 만약 무루심이 본체와 경계를 반연함을 여의고 그 상과 유사함이 없더라도 반연을 얻는다면, 이는『관소연론』에서 응당 5식 위에서는 유사한 극미(極微)의 모습이 없기 때문에 소연(所緣)이 아니라고 말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다.이와 같이 경상(境相)은 무루심과 무루종이 함께 일어나므로 비록 유루법과 상사함이 있을지라도 유루가 아니다. 마치 유루심이 무루상과 비슷하여도 무루가 아닌 것과 같기 때문이다. 자세한 논의는 그만둔다.
이와 같은 분별은 다만 세속의 언설과 도리에 입각한 것일 뿐 승의(勝義)에 입각한 것은 아니다. 만약 승의의 입장인 말과 연려(緣慮)를 여읜 경계에서 말한다면 이미 상견(相見)이 없어서 심과 심법 등을 가히 말할 수 없으니, 모든 희론을 여의어서 불가사의하다.또 이와 같이 설한 사지상응심품은 몇 가지의 심법과 함께 상응하는가?
스물한 가지가 있다. 이른바 5변행(遍行)12)과 5각별경(各別境)13)과 11유선(唯善)14)이다.온갖 곳에 언제나 두루 행하기 때문이며, 여래가 항상 즐거이 소지(所知)의 경계를 환히 알아서 욕심에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경계를 인지하는[印境] 승해(勝解)가 항상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일찍이 받은 경계를 환히 알되 기억에 줄어듦이 없기 때문이며, 여래는 부정심(不定心)이 있지 않기 때문이며, 항상 결택하기 때문이며, 지극히 깨끗한 믿음 등이 항상 상응하기 때문이며, 더러움에 물들지 않기 때문이며, 졸음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며, 악을 짓지 않기 때문이며, 일체 거칠거나 미세한 생각이 없음을 현재 증득하기 때문이다.유루심품은 뛰어나거나 열등함이 일정하지 않고 소연(所緣)에 구애되어서 심법이 상응하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지만, 무루심품은 자재하고 걸림이 없어서 심법이 평등하고 서로 장애되지 않는다.또다시 이와 같이 설한 4지상응심품은 어떤 지위에서 처음으로 얻고 어떤 지위에서 현행하는가?
무루종성은 무시이래로 본유(本有)인데 이숙식(異熟識)에 의해 생멸이 상속하며, 발심하고 난 뒤에는 외부의 훈습으로 말미암아 점점 증장한다.대원경지상응심품은 금강유정이 바로 앞에 현존할 때에 모든 유루종자의 이숙식 등이 전(轉)하여 소멸한다. 이때 비로소 최초로 모든 불과(佛果)의 무루종자가 현행하게 되는데, 원만하게 의지하고 기대어서 미래세가 다하도록 언제나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다.평등성지상응심품은 보살의 초지에서 처음으로 현관(現觀)할 때에 최초로 현행하며, 이로부터 이후에는 다음다음의 지위 중에 닦아서 더욱 증장시켜 깨끗하고 원만하게 한다. 무루관(無漏觀) 등이 바로 앞에 나타날 때에 항상 현행하지만, 만약 유루심이 바로 앞에 나타날 때에는 곧 다시 사이가 끊어진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10지에 이른다. 최후심(最後心)일 때에 이로부터 이후에는 미래세가 다하도록 항상 사이가 끊어지지 않는다.유루위(有漏位)의 아라야식이 항상 말나(末那)라는 하나의 식과 함께 일어나듯이 무루위(無漏位) 중의 대원경지 또한 언제나 항상 평등성지와 함께 한꺼번에 일어나기 때문에 평등성지 또한 사이가 끊어짐이 없다.묘관찰지상응심품 또한 초지에서 처음으로 현관(現觀)15)할 때에 최초로 현행하며 여기서부터 점점 닦아서 증장한다. 만약 유루심이 바로 현전할 때에나 혹은 무심(無心)일 때에는 곧 다시 사이가 끊어진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불과(佛果)에 이르는데, 만약 멸진정에 들면 또한 현행하지 않는다.성소작지상응심품에 대해서 어떤 사람은 “초지 이상의 여러 지위에서 모두 현행을 얻으니, 법의 흐름에 떨어지기 때문이다”라고 말한다.
진실한 뜻은 이러하다. 불과가 바야흐로 일어나서 10지 중의 이숙식이 변현한 5근(根)은 무루가 아니므로 능의(能依)인 5식(識) 또한 무루가 아니다. 유루의 5근이 무루식을 발하는 것을 일찍이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과 위에서는 이 지혜 역시 언제나 바로 앞에 나타나지 않으니 작의를 일으키기 때문에 자주자주 사이가 끊어진다.이와 같이 4지상응심품의 종자는 본유이자 무시이래로 법 그대로[法爾]라서 훈습으로부터 생기지 않으니, 이를 이름하여 본성에 머무는 종성이라고 한다. 발심한 이후에는 외연(外緣)의 훈습이 발해서 점점 증장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훈습으로 이루어진 종성[習所種性]이라고 한다.초지 이상은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바로 현전하여 일어날 수 있고, 자주 반복적으로 훈습해서 더욱 불어나고 더욱 뛰어나서 금강유정을 증득하는 데까지 이른다. 이 이후로는 비록 여러 번 현행하더라도 다시는 훈습하지 않는다. 이미 공덕을 원만하게 증장케 하여 다시는 불어날 수 없기 때문이며, 종자의 청정한 식[種淨識]을 지닌지라 이미 무기(無記)가 아니라서 훈습할 수 없기 때문이며, 과거세의 부처나 미래세 부처의 공덕이 다소 허물을 이루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4지상응심품은 한결같이 선이며 한결같이 무루의 도제(道諦)에 포섭된다. 모든 부처는 일체 유루종자법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니, 비록 다시 생사의 몸으로 화작하여 업과 번뇌 등의 유사한 고제와 집제를 나툰다고 하여도 실제로 이것은 무루도제에 포섭된다.또 세속의 상(相)을 따르므로 50ㆍ20ㆍ8온(蘊) 등의 이름이 있지만,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온ㆍ처ㆍ계에 포섭되지 않으니, 희론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모든 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5법은 모두가 거짓과 진실에 통하지만 명언(名言)을 기대하지 않으니, 이 나머지 근과 경은 모두가 실유(實有)이기 때문이다.만약 명언을 의지한다면 이 나머지 근과 경은 모두 가유(假有)이다. 또 청정법계는 진여를 체로 삼는데 이는 실유(實有)이고, 진(眞)에 의지하여 택멸(擇滅) 등의 상을 세우는 것은 가유이다. 모든 심지(心智) 등이나 청색, 황색 등은 모두 실유이고, 불방일(不放逸) 등이나 길고 짧은 색 등은 가유이다.자세한 논의는 그만두고 본문을 해석하기로 한다.
네 번째 결택차별의 뜻을 말미암음 중에는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다섯 가지 법의 차별을 결택한다. 둘째는 일미사지(一味事智)의 수용화합을 결택한다. 셋째는 전체적인 게송으로서 정법계(淨法界)의 상(相)이 모든 공덕을 갖춘 것이다.
3신(身)의 차별과 5법의 차별 중에 이와 같은 차례로 하나하나를 결택한다.
經 묘생이여, 마땅히 알아라. 청정법계란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비록 여러 색의 갖가지 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체(體)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는 비록 갖가지 상(相)의 부류와 소지(所知)의 경계(境界)에 두루하지만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論 다음에는 정법계의 상을 나타내 보인다. 법계의 차별을 결택하여 의문을 풀이한다. 이른바 의심하여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만일 모든 여래는 법계를 성품으로 삼고, 법계는 진여를 체로 삼으며, 진여는 바로 모든 법의 공상(共相)이며, 모든 법은 이미 갖가지 차별이 있다면, 그것을 수순하는 법계에 어떻게 갖가지 차별이 없다는 것인가? 법계에 만일 갖가지 차별이 있다면 어떻게 청정하겠는가? 파저가(頗胝迦:수정)가 갖가지 의지(依止)와 함께 상응하는 까닭에 갖가지 상(相)이 없는 것과는 다르다.”이런 의문을 풀기 위해서 처음에 태허공(太虛空)의 비유를 말한 것이다.
‘비유하면 허공과 같아서 비록 여러 색의 갖가지 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라는 것은 세간의 허공이 비록 형애색(形礙色)16)의 같은 종류와 다른 종류의 차별상 속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품류가 차별되어 있으므로 ‘갖가지[種種]’라고 이름한다. 스스로의 체(體)가 모여 있어서 각혜(覺慧)의 균등함 위에 분명하게 현현하므로 이름하여 상이라고 하니, 이것이 바로 행상(行相)이다.’그렇더라도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다’라는 것은, 그렇지만 이 허공이 여러 가지 형체나 장애의 갖가지 색상을 지니고 있다고 널리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니, 이 허공의 성품은 스스로 그러한 까닭에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되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다.또는 능히 설할 수 없으므로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 허공은 그 성품이 이와 같아서 갖가지 능표색상(能表色相)을 지니고 있다고 널리 설할 수도 없고 또한 그 갖가지 소표색상(所表色相)을 지니고 있다고 설할 수도 없다. 그런데 허공을 보면 갖가지 상이 있고 아울러 갖가지 상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허공 속의 갖가지 색상을 본 것이지 허공을 본 것이 아니며, 아울러 청황(靑黃) 등이나 길고 짧음 등과 같은 갖가지 색상이 있다고 거짓으로 설한 것은 실답지 않으면서 있는 것이다. 거짓이 아니면서 있다고 말한다면 실다운 일이 있는 것인데, 어떻게 일체 색 중에 편재하면서 갖가지 상이 없겠는가?‘체는 오직 한 가지 맛이다’라는 것은 이 허공이 갖가지 색과 더불어 상응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갖가지 상을 이루면서도 자성을 버리지 않는다. 체는 오직 하나로서 장애가 없는 맛이니 다른 모양[異相]이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 등’이란 것은 마치 세간의 허공이 체가 있거나 체가 없거나 비록 일체 형애색(形礙色) 중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형체나 장애의 차별을 따라 성립하지 않는다. 또한 여러 색상이 있다고 말할 수 없으니, 비록 있다고 말하더라도 오직 거짓으로 있는 것이며 실답지 않다. 이 허공을 말미암아 자상(自相)을 버리지 않고 타상(他相)을 취하기 때문이다.비록 거짓으로 허공, 허공이라고 말하지만 이 허공의 성품은 실제로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와 같이 청정법계 또한 비록 진공(眞空), 진공(眞空)이라고 거짓으로 말하지만 진공의 성품은 실제로 말할 수 없다.이 허공은 앞에서 설해진 인(因)이 갖가지 의지(依止)와 함께 상응하는 것을 말미암기 때문에 파저가(수정)와 같다. 법계에 마땅히 갖가지 차별이 있다는 것은 부정과(不定過)17)이다.현재 허공을 볼 때 비록 갖가지 색상과 상응하더라도 여러 색의 갖가지 상은 없기 때문에 마치 연기나 안개 등과 같으며, 함께 상응하기 때문에 어떤 때는 허공에 갖가지 상이 있다고 보지만 그것은 자신의 허망한 분별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다만 연기 등의 갖가지 상이 있는 것을 보는 것일 뿐 허공을 본 것이 아니니, 허공의 성품은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허망한 분별이 따로 늘어나는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다만 색 등의 갖가지 상이 있는 것을 볼 뿐 정법계를 본 것이 아니다.정법계 중에는 비록 진실한 갖가지 경계와 언설(言說)과 법의 가르침이 없지만, 갖가지 경계와 법의 가르침의 차별상이 전변[轉]하는 작용이 있다. 정법계는 갖가지 상이 있음을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또한 법계로 하여금 갖가지 상이 있게 하나니, 정법계는 이름이나 말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온갖 이름과 말은 모두 분별을 일으키는 것으로써 경계를 삼는데, 그러나 모든 법의 가르침이 황당하지 않은 것은 법계를 증득하여 전전(展轉)하는 인이기 때문이다. 이는 서책을 보고 가르침의 뜻을 이해하는 것과 같다.이 법의 가르침을 말미암는 것이 바로 모든 여래의 대비가 흐르는 것으로서 능히 전전하여 언설을 여읜 뜻을 설한다. 마치 여러 가지 색깔로 허공을 칠하는 것이 참으로 희유한 것과 같아서 만약 언설로써 말을 여읜 뜻을 설한다면 허공을 칠하는 것보다 더 희유하다.마치 “해혜(海慧)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색(色)도 없고 볼 수 없고 상대[對]도 없고 표상도 없는 허공을 갖가지 색깔로 칠하는 것을 마치 담에 색깔을 칠하는 것처럼 한다면 이것은 참으로 희유한 일이다. 모든 불세존께서 깊고 깊은 언설을 여읜 법을 증득하시고 능히 언설로써 모든 유정들과 보특가라를 위하여 널리 설하여 열어 보이심은 그보다 더욱 어려운 일이다”라고 널리 설하는 것과 같다.또 파저가(수정)도 법계를 성품으로 삼아서 또한 청정하기 때문에 동일한 법의 비유가 아니다. 따라서 그것에 의해 건립된 인의(因義)는 하나를 따라도 성립되지 않고 함께하는 것[俱]을 따라도 성립되지 않는다.
經 또 마치 허공이 여러 색에 두루하며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것(색)의 허물로 물들여 더러워지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비록 일체 중생의 심성에 두루하면서 진실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
論 또 이렇게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 소지경계에 두루 있다면 또한 탐욕 등의 여러 번뇌의 티끌과 함께 상응하기 때문인데, 어찌하여 다른 유루심심법품과 마찬가지로 불청정(不淸淨)을 이루지 않는가?이런 의심을 풀기 위하여 두 번째의 태허공의 비유를 설하였다.
‘또 마치 허공이 여러 색에 두루하여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라는 것은 다른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내행(內行)에 두루 존재하고 밖으로 벗어남을 볼 수 없기 때문이니, 이미 내행에 있고 밖으로 벗어남을 볼 수 없어서 이것을 동일하다거나 다르다고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 만약 다른 곳에 있다면 곧 허공에는 형태의 장애가 있게 되고 응당 항상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그것(색)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혀지지 않는다’라는 것은 마치 태허공이 비록 온갖 형태의 장애를 지닌 색 안에 두루한다고 하더라도 색의 허물에 물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색의 허물이란 이른바 탐욕과 성냄 등을 길러내는 인(因)을 일컫는 말이니, 여기서는 청황(靑黃) 등의 갖가지 다른 모양[異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공중에 있는 구름이나 안개나 검은 그림자의 색 등은 능히 태허(太虛)로 하여금 깨끗한 상을 버리게 하기 때문에, 그리고 깨끗한 견(見)이 생기는 것을 장애하기 때문에 이것을 이름하여 색의 허물이라고 한다.또 마음에서 늘어난 경계의 상[境相]을 이름하여 색의 허물이라고 하니 다른 사람의 뜻을 따르기 때문이다. 앞에서 태허공은 저 여러 색의 허물로 물들거나 더러워지지 않는다고 말하였으니 자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비록 일체 중생의 심성에 두루하면서 진실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그들의 허물로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는 것은 마치 부처 스스로의 마음이 진실하고 청정해서 본성이 빛나고 청결한 것과 같으니,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의 심성 또한 그러해서 본성이 진실하고 청정하다.마음의 본성이란 것은 바로 진여이며, 모든 중생들의 마음은 평등한 성품이다. “무엇을 말미암아서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는가? 공성(空性)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음이 평등하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널리 설한다”라고 설한 것과 같다. 마음의 본성이란 것은 바로 마음의 법성(法性)이니, 모든 중생들의 심성에 두루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의 평등성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마음의 법성을 판별하기 위함이다.‘진실을 말미암아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고 말한 것은, 이 유정은 본래 깨끗한 마음의 성품을 말미암아서 비록 본성은 깨끗하지만, 다시 오늘날 객진(客塵)의 장애나 때[垢]로 더럽게 물드는 것을 멀리 여읨을 말미암기 때문이다. 여래의 진심청정(眞心淸淨)을 안립하는 것과 또 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평등성이 바로 진실이니 원성실의 자성에 포섭되기 때문이다.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평등성이 진실상임을 말미암기 때문에 모든 유정들의 마음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음을 드러낸다. 또 이 마음의 성품은 진실상이므로 모든 유정들의 마음의 성품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서도 구르는[轉] 것이니, 이 뜻을 말하면 두루 구름[遍轉]을 말미암아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다는 것이다.‘그들의 허물이 물들여 더럽히지 못한다’라는 것은 본성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허물이란 탐욕 등이니 능히 마음의 상으로 하여금 허물을 이루게 하기 때문이고 티끌로 물들게 하기 때문이다. 비록 객진분별(客塵分別)이 구르는 것이지만 그 체(體)는 아니기 때문에 완전히 버릴 수 없고 청정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밀의설(密意說)에 의하여 이와 같이 설하나니, 이 마음의 본성은 청정하고 빛나고 깨끗하다.마음의 법성(法性)을 마음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마음의 법성을 여의고는 다른 성품의 청정한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유정의 마음에 탐욕 등이 있는가? 스스로 분별하는 힘이 임지(任持)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뒤바뀜은 아직 영원히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며, 이 무명의 힘을 말미암아 일어나기 때문이다.이 뜻의 내용을 말하자면, 마치 허공의 본성은 비록 깨끗하다고 하더라도 어지럼증이 나거나 눈에 백태가 끼어 육안(肉眼)을 다치면 뒤바뀐 상이 나타나서 청정하지 못한 듯하니, 이와 같이 법계의 본성은 비록 깨끗하여도 스스로의 분별로 일어난 탐욕 등의 온갖 인연의 힘을 말미암아 무명의 어지럼증이나 백태가 끼어서 혜안(慧眼)을 다치기 때문에 뒤바뀐 상이 나타나서 청정하지 못한 듯하다.만약 온갖 종류의 청정한 혜안이 더러움을 보지 않거나 또한 정법계가 만약 차별이 없다면, 온갖 종류의 깨끗함은 곧 모든 여래의 법신이라고 이름할 것이며, 또한 여래의 진실한 체성이라고 이름하나니, 어느 때라도 항상하며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이 법계를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의 심상속(心相續) 중에 평등함이 있으므로 “모든 유정들은 바로 여래장(如來藏)이다. 모든 유정들은 한결같이 부처의 성품을 지녔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으니, 부정종성(不定種性)의 유정을 이끌어서 그 마음으로 하여금 반드시 대승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여래종성의 유정에 대해서는 “모든 유정들은 장차 부처가 될 것이다”라고 말한다.만약 “모든 것은 덧없고 괴롭다”라고 설하는 것이 있다면 이와 같은 말은 모든 것의 일부분이지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다시 설한 바와 어긋날 것이니, 다섯 가지 종성의 모든 부처님 공덕은 다함이 있어서 제도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곧 설한 바와 어긋나게 된다. 하지만 여래의 공덕은 항상하여 끊어짐이나 다함이 없어서 이익이 되지 않는 것이 없으니, 언제나 세간에 머물러 본래부터 중생을 제도할 것을 소망하여 부처의 과위[佛果]를 구하기 때문이다.이 정법계는 비록 모든 것에 두루 평등하게 있으나 스스로가 지닌 장애의 힘을 말미암기 때문에 선천적인 장님이 해와 달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게송에서 이렇게 말한다.
중생의 죄로 나타나지 않는 것이
마치 깨어진 그릇 속의 달과 같지만
법의 빛은 태양과 같기 때문에
모든 세간에 두루 가득 차 있네.
이런 도리에 의하면, 앞에서 말한 “또한 탐욕 등 모든 번뇌의 티끌이 함께 상응하는 까닭에 나머지 유루의 심(心)ㆍ심법품(心法品)과 같이 청정법계는 깨끗하지 않다”라는 것은 부정과(不定過)이다. 허공이 비록 색의 티끌과 더불어 상응해도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심ㆍ심법품이 비록 탐욕 등의 번뇌와 상응한다고 하여도 청정법계를 성품으로 삼아서 깨끗하지 않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동법유(同法喩)가 아니다.만약 “의요(意樂)가 깨끗하지 않다”라고 말한다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보고 그에 따라서 또한 법계가 깨끗하지 못하다고 말하는 것이니, 깨끗한 상이 현현하지 않기 때문이다.의요가 깨끗한 자는 탐욕 등의 티끌과 상응하여도 마음의 그 본래 성품은 깨끗해서 때나 더러움이 없음을 보기 때문에 법계는 언제나 깨끗하며 그것이 건립하는 인(因)18)은 앞에서와 같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 법계는 모든 것에 두루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마치 허공과 같아서 모든 유정들의 허물로 더럽게 물들지 않는다. 이렇게 법계가 모든 것에 두루하다고 말하는 것은 소집법(所執法)은 공하면서도 두루 널리 모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계는 인(因)을 전제로 하지 않고도 성립한다.
經 또 허공이 모든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두루 포용하지만, 이 허공에 기작(起作)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여래의 청정법계도 이와 같아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하지만 청정법계는 기작함이 있지 않다.
論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일 모든 여래의 청정법계가 진여를 체로 삼는다면 곧 희론도 없고 기작도 없을 텐데, 그렇다면 어떻게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의 인연이 되는 지혜가 생겨나서 포용할 수 있다는 것인가? 만약 지혜가 생겨나서 포용한다면 곧 기작이 있을 것인데, 어떻게 여래가 진여를 상으로 삼는가?”이런 의문을 풀어주기 위하여 세 번째의 태허공의 비유를 말한다.
‘또 마치 허공이 모든 몸과 입과 뜻의 업을 두루 포용한다’라는 것은 태허공이 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유정의 세 가지 업을 수용하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몸과 입의 두 업은 형태와 장애가 있기 때문에 반드시 수용할 수 있지만, 뜻의 업은 어떠한가? 형태와 질량이 없으며 유대애(有對礙)19)가 아니기 때문에 모름지기 달리 수용하는 것이니, 곧 이 일로써 수용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른바 그것이 생겨날 때에는 장애가 되지 않으며 유대애물(有對礙物) 또한 생겨날 때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허공이 받아들이는 바와 같다”라고 말하였는데, 이 법 또한 그와 같다. 생겨날 때에는 장애가 없어서 생겨날 수 있기 때문에 또한 허공이 수용한다고 말할 수 있다. 또 유대물(有對物)이 무대애(無對礙)일 때에는 다른 물질을 받아들여서 왕래할 수 있으므로 이 법에 의지해서 거짓으로 허공을 세운 것이다. 뜻의 업 또한 그러하여 장차 멸하려 할 때에 다른 물질을 받아들여서 생기하게 하는데, 어떻게 그러하지 못하겠는가? 이 법에 의지하여 거짓으로 허공을 세운 것이다.만약 이와 다르다면 실유(實有)의 허공이 일체처에 두루한 것인데,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만약 본체가 실제로 있는데도 장애가 없기 때문에 다른 법을 생할 수 있는 것을 수용이라 이름한다면, 일체의 색은 없으나 실제로 체가 있는 법은 모두가 장애가 없어서 능히 수용한다고 할 수 있으므로 응당 허공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다른 곳에서 “오직 색이 없기 때문에 허공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한 것은 세간의 공통된 지식으로 거친 상을 분별하여 설한 것이다. 그러므로 허공이 세 가지 업을 두루 받아들인다고 하여도 또한 허물이 없다.‘이 허공에는 기작이 있지 않다’는 이 허공은 이와 같이 분별하여 “나는 이것을 받아들인다, 나는 저것은 받아들이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는 것이다.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받아들이니, 해와 달과 등불의 온갖 광명 또한 이와 같다. 비록 피차를 분별하는 작의는 없어도 법 그대로[法爾] 생할 때에는 능히 모든 색을 비춘다.
여의보주 또한 이와 같다. 비록 작의는 없어도 능히 중생의 소망을 만족시켜 준다. 나머지 역시 그러하니, 또한 허공 등이 일체를 현현할 수 있다는 예를 들었다.‘여래의 청정법계도 이와 같아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한다’라는 것은 이른바 모든 여래의 청정법계가 성품에 맡겨 머물면서 작의 없이 중생을 이롭게 하는 모든 일을 안립하는 것이다.‘일체지’라는 것은 대원경지(大圓鏡智) 등이다. ‘변화하여’라는 것은 몸과 입과 뜻이 변화한 것을 말한다.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이란 이른바 능히 모든 유정들의 뛰어나게 이롭고 즐거운 일을 모두 이루는 것이다. 청정법계는 모두 능히 수용한다. 그 법이 생겨날 때에는 그것들이 조인(助因)이 되기 때문이다.‘청정법계는 기작이 없다’에서 작의를 이름하여 기(起)라고 한다. 능히 그 마음으로 하여금 여타의 경계를 버리고 여타의 연으로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마음이 움직이는 것을 이름하여 작(作)이라고 한다.
심려가 동요하면 짓는 바가 있기 때문에 이른바 정법계는 비록 작의가 없다하더라도 심려(心慮)가 동요하여 능히 모든 지(智)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수용한다.다시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수용한다’라는 것은 이른바 정법계는 일체 수용신과 변화신의 두 몸을 수용하여 유정을 이롭게 하는 일을 짓는 인(因)이 무궁무진하기 때문이요, 지극히 광대하기 때문이며 무대애(無對礙)이기 때문이다. 비록 분별하지 않아도 증상력으로 능히 그것을 생하기 때문이다.이 전체적인 뜻은 마치 허공 등이 색을 수용하여 생하는 등의 작용이 있는 때처럼 비록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작의와 희론의 분별이 있지 않아도 법이(法爾)의 힘이 널리 일체의 차별작용을 짓는다. 이와 같이 여래는 무루계에 머물러 비록 일체의 나라든가 나의 것이라는 등의 작의와 희론이나 갖가지 분별은 없어도 먼저 닦은 대원력을 말미암아 능히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일으킨다.이와 같이 여래는 가장 사유하기 어려움에 안주하는 법신[第一難思安住法身]이니, 앞서의 원력이 임지하는 바를 말미암기 때문에 일체의 상호와 공덕의 장엄이 생사의 끝을 다하도록 겁량(劫量)이 상속해서 비록 분별함이 없어도 일체지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익케 하는 일을 짓는다. 여래가 비록 “나는 이와 같고 이와 같은 사업(事業)을 마땅히 짓거나 짓지 않는다”라는 분별은 하지 않지만 본원력으로 일체를 능히 짓나니, 앞서의 발원(發願)과 같다.혹은 수면에 들거나 혹은 멸진정에 들더라도 비록 작의하지 않고 필요한 시기에 따라서 각오(覺悟)20)가 선정으로부터 나오니, 마치『해혜경(海慧經)』에서 이렇게 설하는 것과 같다.
“모든 비구들이 종소리를 기해서 멸정(滅定)에 들어가고 종소리를 듣지 않아도 또한 분별이 없으니, 필요한 시기의 힘(力)을 말미암아서 마땅한 때에 선정으로부터 나온다.”
이와 같이 널리 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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