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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988 불지경론(佛地經論) 4권

by Kay/케이 2025. 5.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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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지경론(佛地經論) 4

 

불지경론 제4권

친광 지음현장 한역
이미령 번역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도 이 허공에는 생하거나 멸함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온갖 지(智)의 변화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지만 정법계에는 생멸이 없다.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모든 소지경계(所知境界:인식대상의 영역)에 두루 존재하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며 한결같이 수전(隨轉)1)한다면, 그렇다면 법계에도 생멸이 있을 것이다. 만약 생멸이 없다면 소지경계에 두루 존재하면서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도 않을 것이며 한결같이 수전하지도 않을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네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설한다.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생함이나 멸함이 나타나도 등등’이라는 것은 이런 뜻을 말하고 있다. 마치 태허공에는 여러 색이 두루 존재하며 색상을 수용하되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고 한결같이 수전하는데, 여러 색이 비록 생멸을 나타내도 허공의 성품에는 생멸함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는 모든 경계에 두루하여 일체지가 변화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을 포용하되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며 한결같이 수전하니, 지혜 등은 비록 생했다 멸했다 하지만 정법계에는 생멸이 없는 것이다.여기에는 밀의(密意)가 있어서 계경 중에서 “만수실리여, 생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것을 이름하여 여래라고 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라고 말하였다.승의제(勝義諦)에서는 색 등의 법들도 또한 생멸함이 없지만, 세속제(世俗諦)에서는 생멸을 시설하기 때문에 나타난다고 말한다. 이 뜻은 세속상(世俗相)에 대해서는 생멸함이 있음을 나타내지만, 승의의 본체에는 실제로 생멸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정법계 중에 온갖 지혜가 변화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 또한 이와 같다.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이 허공에는 증가나 감소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여래의 감로인 성스러운 가르침[甘露聖敎]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정법계에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다.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에 두루 존재하여 서로 버리거나 여의지 않는데,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현재에는 증가함이 있다가 후에는 마땅히 감소하여 없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면, 법계도 그와 똑같아서 반드시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법계는 청정하지 못할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섯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말하는 것이다.
‘또 허공 중에 갖가지 색상의 증가나 감소가 나타나지만 등등’은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이 온갖 외도들과 일체 세간의 그릇되고 저열한 가르침들에 비해 가장 진실하고 뛰어나고 청정해서 마치 제호(醍醐)와도 같고 감로와도 같다는 것이니, 열반을 얻어서 영원토록 죽음을 없게 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성스러운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고 증성(證聖)하면 무학과(無學果)를 얻는다. 불멸후 천 년 이전에는 많은 부분들이 존재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설하신 정법이 다만 천 년을 경과했다고 말하는 것이지, 부처님의 가르침이 다만 천 세(千歲) 동안만 머문다고 말하지는 않는다.또 성문장(聲聞藏)은 부처님께서 떠나신 지 겨우 백 년이 지난 후에 여러 부파로 나뉘었다. 그러나 보살장은 천 년 이전에는 청정하여 한 가지 맛이었으며 서로 어긋나거나 말다툼이 있지 않았다. 천 년 이후에 이르러 공(空)과 유(有)의 서로 다른 두 가지 논의가 일어났으니, 이 때문에 여래의 정법은 다만 천 년을 경과했을 뿐이라고 말한다.‘그렇지만 정법계에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다’라는 것은 여래의 성스러운 가르침은 세속의 이치로 말하면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지만, 이는 승의의 뜻에 입각한 것이 아니니 법계가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는 것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 색 등도 마찬가지라서 법계는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없음을 성품으로 삼으니, 승의의 이치에 입각한다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상이 없다. 그러므로 ‘나타낸다’라고 말하여 세속제의 측면에서 식 등이 변현(變現)하여 증가하거나 감소함이 있는 듯하다[似有]고 한 것이지 참다운 성품(眞性:즉 승의)에 입각한 것이 아니니, 정법계 중의 색 등의 모든 법은 다 희론과 분별상을 여의었기 때문이다.
 또 허공 중에 있는 시방의 색상(色相)처럼 가없고 다함도 없는 것이 바로 허공계의 가없고 다함없기 때문이지만, 이 허공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법계 중에 시방의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케 하는 일을 건립하여 갖가지로 작용하되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청정법계도 가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법계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轉] 것이 없다.
 다시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여래가 법계를 체로 삼는다면 여래가 일체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베풀면서 가거나 올 때 법계가 그와 더불어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나머지 법에서도 당연히 오고 감이 있고 생겨남 등이 있을 것이다. 만약 그렇다면 법계는 청정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법계가 오고 가는 등의 일이 없다면 시방의 모든 유정들에게 이익과 안락을 주는 일도 없을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여섯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 중에 있는 시방의 색상은 가없고 다함도 없으니 등등’은 마치 허공계가 가없고 다함이 없는 것처럼 시방세계 또한 가없고 다함이 없으니, 이 때문에 그 속의 갖가지 색상 또한 가없고 다함이 없다는 것이다. 한 방향의 가[邊]가 없고 온갖 방향의 다함[盡]이 없어서 때와 장소를 성취하므로 말하기를 ‘가없고 끝이 없다’고 한다.‘이 허공에는 오고 감도 없고 움직이거나 구르는 것이 없다’라는 것은 태허공이 일체를 포용하며 일체에 두루하는 까닭이고 작용이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 중에 시방의 일체 중생들을 건립한다’ 등은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작용이 가없고 끝이 없다는 것이니, 뜻은 앞에서와 같다.‘청정법계도 가없고 다함이 없는 것이다’라는 것은 정법계가 가없고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비록 행하거나 움직임이 없어도 증상력으로 인하여 능히 시방의 가없는 세계의 가없는 유정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굴린다.
‘정법계는 오고 감 등등이 없다’라는 것은 이쪽을 버리고 저쪽으로 나아가는 것을 ‘간다’라고 하고, 저쪽을 버리고 이쪽으로 오는 것을 ‘온다’라고 하는 것이다. 움직임도 없고 구름[轉]도 없다는 것은 처음 것은 표(標)이고 나중 것은 석(釋)이다.‘법계가 없다’라는 것은 변제(邊際)가 없기 때문이며 형태와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변제와 형태와 장애가 있다면 모든 법은 가히 다른 방향으로 오고가며 움직이고 구른다고 말할 수 있어서 변제와 형태와 장애가 없는 것이 아니다. 법계는 허공과 동등해서 오고 감과 움직이고 구르는 일이나 업을 짓는다고 말할 수 있다.이 총체적인 뜻을 말하면 청정법계란 바로 모든 여래의 승의(勝義) 자체이다. 법계가 모든 유정들의 상속 속에서 두루 존재하고 저 모든 유정들은 스스로 선한 종자를 성숙케 하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정법계의 증상연력(增上緣力)을 말미암아 그 식이 생할 때에 이와 같은 작용이 변현하여 구르니[轉], 여래는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을 짓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 작용을 제외하면 증상연력은 다시 여래법신이 모든 중생들을 이익되고 안락하게 하는 일의 작용을 짓지 않는다.계경에서 “선남자여, 여래는 도무지 오고 감 등의 일이 없지만, 여래의 오고감 등을 말한다면 이것은 수용신과 변화신에 대해서 하는 말이라서 서로 어긋나는 허물이 없다”고 설한 바와 같다.
 또 허공 중에는 삼천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짐을 나타내지만 허공계에는 무너지고 이루어짐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무량한 상을 나투고 등정각을 이루시거나 혹은 다시 대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나타내 보이시지만 정법계에서는 등정각을 이룸도 없고 적멸에 드심도 없다.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오고 감 등을 여의어 있다면 어떻게 방향과 처소[方所]를 오고 가서 정각(正覺)을 얻고 반열반(般涅槃)하는 등의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오고 감이 있다면 도리어 앞서 한 말이 허물을 얻을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곱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든 것이다.
‘또 허공 중에는 삼천세계가 등등’이란 것은 이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비유하면 세계가 무너지고 이루어지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지만 허공계는 이루어지고 무너짐이 없기 때문이다. 정법계 중에서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정각을 이루시고 반열반하는 모습 등을 나투심이 있다고 하여도 정법계에는 진실로 등정각을 이룬다거나 열반 등의 일이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이런 일이 존재한다면, 그렇게 할 수 있기 때문에 오고 감 등이 있다. 허공중에 모든 세계의 멸괴와 생성이 나타난다는 것은 세속의 이치로 설한 것이지 진실한 뜻[眞實義:즉 승의]은 아니다. 그것은 태허의 성품이 모두 공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청정법계도 등정각(等正覺)을 이루거나 혹은 다시 반열반하는 등의 한량없는 모습을 나타내지만, 이 또한 세속의 이치로 말미암는 것이지 진실한 뜻은 아니다. 정각을 이룬다는 것과 열반에 드는 것 모두가 있지 않기 때문이며, 여러 온(蘊)이 반연하여 생긴 탓에 나[我]의 성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만약 정법계의 진실한 뜻에 대해서 말한다면 이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은 당연히 진실이 아니다. 왜냐하면 진실한 법은 자상(自相)을 버리고 다른 상을 취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계가 정각 아닌 것을 버리고 등정각을 이루는 것을 인정하고, 열반 아닌 것을 버리고 반열반 얻는 것을 인정한다면 이것은 진실이 아니다.어떤 사람은 “바로 이런 뜻으로 인하여 진실하다고 하는 것이다. 등정각이란 것은 일찍이 있지 않았을 때에는 등정각이 아니었고, 반열반이란 것도 일찍이 있지 않았을 때에는 반열반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진실하다”라고 말한다.만약 그렇다면 나머지 일 또한 반드시 그와 같아야 한다. 괴겁(壞劫)은 항상 무너지기만 해서 무너지지 않을 때가 없고, 성겁(成劫)은 항상 이루어지기만 해서 이루어지지 않을 때가 없다. 병(甁) 등이 없을 때에는 이것을 병 등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일들은 모두 진실해야 한다.만약 그렇다면 관행(觀行)을 닦지 않는 자는 불이 치성하게 타올라 가득 찬 세계를 건너 다른 세계로 갈 때 반드시 그 속에서 불에 탈 것이며, 증상의 뛰어난 이해력을 얻은 자는 그 지위 등에서 반드시 자재하게 전변하여 작용하지 못할 것이다. 뛰어난 선정의 자재력을 얻지 못한 자는 등정각이 나타나도 등정각이 아니고 반열반이 나타나도 반열반이 아니다. 그러므로 비록 전에는 정각위(正覺位)에 있었고 지금은 열반위(涅槃位)에 있다고 하지만, 정진여(淨眞如)는 자상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정법계는 정등각을 이루지도 않고 열반에 들지도 않는다.여기에서 두 종류는 모두 증익으로서 자상을 삼기 때문에 진실유(眞實有)가 아니다. 작자(作者)와 작용(作用)은 모두 바로 변계소집상인 까닭에 함께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체법을 수순하여 깨닫기 때문에 보리라고 말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출세간의 무분별지로서 등정각을 이루는 것이기 때문이다.여기에서 또한 진여를 반연하는 지(智)는 두 가지(즉 정등각과 반열반)의 분별을 현행하지 않는 까닭에 등정각도 아니고 반열반도 아니다. 즉, 이와 같은 것에 의지하여 밀의(密意)로써 “천자여, 마땅히 알아라. 일체법이 모두 생함이 없으므로 모든 부처님께서 생함을 나타내는 것도 얻을 수 없고 증명할 수 없다. 나아가 자세히 설한다”고 설하였다.변계소집이 있지 않기 때문에 생함 등의 분별 또한 있지 않다. 세속의 이치를 말미암아 두 가지를 시설하고 변화신을 말미암아 두 가지를 나타내나니, 교화할 유정의 마음[意]에 수순하기 때문에 여래께서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일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다. 또 두 가지를 예로 들어서 그것들과 비슷한 종류의 일체를 나타내 보인 것이다. 또 허공을 의지하여 갖가지 색상이 무너져 문드러지거나 불에 타 마르면서 변이(變異)할 수는 있지만, 허공계는 그것에 의해 변하는 바가 없고 또한 피로함이 없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면 중생계 안의 갖가지 학처(學處:계율)는 몸과 말과 뜻의 업으로 훼손하거나 범할 수 있지만, 정법계는 그것에 의해 변하거나 달라지지 않으며 또한 피로함이 없다.
 다시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모든 유정들의 부류에 따라 두루 존재한다면, 어떻게 유정이 훼손하거나 범하는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법계 속에는 온갖 훼손하거나 범하는 일이 존재하지 않으니, 성품이 청정하기 때문이다. 학처를 제정하고 세우는 일 또한 가치 없는 일일 것이니, 모든 유정들은 훼손하거나 범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훼손하거나 범함이 있다면 반드시 피로함이 있을 것이니, 당연히 2승(乘)의 지극히 청정하지 못함과 같을 것이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여덟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든 것이다.
‘또 허공을 의지하여 갖가지 색상 등등’이란 것은 이런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에 의지하여 온갖 초목 등의 갖가지 색상이 무너지는 등 다양한 변이가 생기지만 정허공(淨虛空)은 그런 사물에 변이되는 바가 없다. 비록 그 속에 있다고 하더라도 변이되는 일이 없고 피로함이 없으니, 무너지는 등의 괴로움에 의해 핍박받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여래의 정계에 의지하여 중생계 안은 비록 갖가지 훼손하거나 범함이 있게 되지만, 정법계는 변하거나 달라짐이 없고 또한 피로함이 없다. 비록 정법계 속에서 유정이 스스로 분별을 일으켜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두 가지 훼손이나 범함을 나타내 보인다고 하더라도, 즉 이른바 재가인은 부모를 해치는 등 갖가지 선하지 않은 일을 범한다.출가자는 그 응하는 바에 따라서 또한 갖가지 범함을 짓더라도 그것을 막기 위하여 갖가지 학처를 제정하고 세우게 되는데, 이것은 모두 세속의 어기고 범하는 것일 뿐 정법계는 그런 어기고 범하는 일에 의해 변이하지 않으니 다른 성품[異性]이 없기 때문이고, 또한 피로함이 없으니 핍박받지 않기 때문이다.만약 괴로움의 핍박을 받아서 감내하지 못한다면 곧 피로함이 있을 것이니, 성문 등은 정법계가 아니어서 능히 온갖 괴로움의 핍박을 감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피로함이 없음은 마치 허공과도 같다. 또한 허공 속에 있는 색 등의 여러 법처럼 비록 무너지는 일 등이 있어도 이것은 다만 세속의 이치이지 진실한 이치가 아니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법계 중에는 비록 훼손하고 범함이 있어서 학처를 세우고 제정하여도 이것은 다만 거짓으로 안립하는 것이지 설제로 있는 것은 아니다.왜냐하면 몸 등의 세 가지 업이 불선(不善)하다는 등의 성품은 모두가 이들과 상응하는 발기세력(發起勢力)을 말미암아 거짓 이름을 세우는 것이지 자성으로 말미암는 것은 아니다. 돌멩이 등은 발기의 힘으로 말미암아 실제로 건립될 수 있어서 불선 등이 되지는 않는다.몸의 업 또한 그와 같으니 땅 등이 화합하여 이루어진 성품이기 때문이다. 입의 업 또한 마치 종치는 소리 등이 불선이 아닌 것과 같다. 여러 무표업(無表業)은 오직 부작(不作)을 그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뜻의 업 또한 상응하는 세력을 말미암아 불선 등을 세우니, 만약 다른 것과 상응하면 역시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다. 인(因)이 이미 실답지 않으니 과(果) 역시 반드시 그러하다. 그러므로 법계 중의 업이나 과보나 일체는 모두 분별에 의해 일으켜진 것으로서 세속의 식 등이 변현하여 생겨난 것이다. 변현상(變現相)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이 건립된 것은 모두가 진실이 아니다.
 또 허공에 의지하여 대지와 큰 산과 광명과 물과 불과 제석천과 권속, 나아가 해와 달에 이르기까지 갖가지를 얻을 수 있어도 허공계에는 그 모든 상이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여 계온(戒蘊)과 정온(定蘊)과 혜온(慧蘊)과 해탈(解脫)과 해탈지견(解脫智見)의 여러 온을 얻을 수 있지만 정법계에는 그 모든 상이 없다.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정법계가 일체법에 두루 존재한다면 반드시 계(戒) 등의 무루온상(無漏蘊相)이 없어서 서로 여의지 않기 때문에 응당 법계와 같아서 온의 성품이 아니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아홉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에 의지하여 대지와 큰 산과 광명과 물과 불 등’이란 것은 이 의문은 그렇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허공에 의지하여 땅 등을 얻을 수 있지만 땅 등과 더불어 상응하기 때문에 허공이 온의 성품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여래의 정계(淨界)에 의지하여 비록 계(戒) 등의 여러 온을 얻을 수 있다고는 하지만 정법계는 계 등의 온이 아니다.마땅히 알아라. 이 중에서 무루정계(無漏淨戒)를 이름하여 계온(戒蘊)이라고 하고, 무루정혜(無漏定慧)를 이름하여 정혜온(定慧蘊)이라 하고, 무학승해(無學勝解)를 이름하여 해탈온(解脫蘊)이라 하고, 무학정견(無學正見)을 이름하여 해탈지견온(解脫智見蘊)이라고 한다. 앞의 셋은 인이고 뒤의 둘은 과보이다.어떤 사람은 “일체가 모두 무학이니 해탈혜(解脫慧)를 반연하는 것을 이름하여 해탈지견이라고 하고, 나머지 혜(慧)는 ‘혜(慧)’라고 이름한다”라고 말한다.
어떤 사람은 “일체가 학(學)과 무학(無學)에 통해 있으며, 학위(學位)는 단계적으로 나누어 얻지만 무학은 원만하다. 모든 불ㆍ보살들은 모두 다섯 가지를 구족하고 있다”고 말한다.이와 같이 5온은 비록 법계에 의지하고 있지만 정법계는 5온의 상과 같지 않으며 5온 또한 5온의 자상을 잃지 않는다. 여기에서 또한 마땅히 5취온을 설하나니, 계(戒) 등의 무루는 법계와 같기 때문이다. 또한 정법계 중에는 비록 계 등의 여러 일의 공덕은 없으나 진리공덕의 법문은 존재한다고 간략하게 설하신 것이다.저 증상연이 모든 유위공덕을 생장하는 것이 허공법계의 진리공덕 법문과 같지 않은 것은 바로 무위이기 때문에 온에 포섭되지 않고 그것에 의지하여 모든 공덕을 생장하는 것이다. 유위생멸은 바로 온에 포섭되어서 끊어지거나 다함이 없기 때문에 또한 항상한다고 이름한다. 그 법은 영원하거나 멸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서 생한 것은 반드시 멸함으로 돌아가나니, 일향기(一向記)이며 온에 포섭되는 바이기 때문에 무위법이 아니다. 연려(緣慮) 등의 작용의 뜻이 있기 때문이자 그 작용이 훌륭하기 때문에 또한 5온의 법계는 실로 이 모든 3승의 공덕이 의지하는 바라고 설하는 것이다.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인연이 전전하여 생기하면서 삼천대천의 무량한 세계가 두루 굴러갈 수 있어도 허공계는 기작(起作)하는 바가 없는 것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도 무량한 상을 구족하여 모든 부처님께서 대중의 모임에서 두루 법을 윤전하실 수 있지만 정법계는 기작하는 바가 없다.
 또 이런 의문이 있다. 만약 모든 부처님께서 법계를 체로 삼으면 반드시 저것과 이것을 수용하는 차별이 없을 것인데, 어떻게 대중의 모임이 같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수용하는 바에 차별이 있다면, 어떻게 모든 부처님의 법계가 청정할 수 있단 말인가?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열 번째 태허공의 비유를 드는 것이다.
‘또 허공 가운데 갖가지 인연이 전전하여 생기하면서 등등’은 이런 의문은 그러하지 않으니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허공 가운데 인연이 생기하여 삼천계(三千界) 등을 빙 둘러 풍륜(風輪)이 둘러쌀 수 있는 것과 같다.허공이 비록 내 것이라는 차별이나 분별이나 사려 등이 없을지라도 능히 갖가지 차별 세계를 수용하여 두루 굴러갈 수 있나니, 이처럼 여래의 정법계 중에서도 자업(自業)의 증상(增上)이 일으키는 갖가지 온갖 상이 원만하여 일체지를 얻고 관정보살(灌項菩薩)의 동일한 집회에서 두루 굴러감을 얻을 수 있다.갖가지 별도의 인연으로 생기하는 것은 한 부처님의 대중 모임의 인연과는 같지 않으니, 제2, 제3 또한 이와 같다. 다른 계경 중에서는 이것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부처님 정토를 가지가지로 얻을 수 있다고 설하며,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의 가지가지를 얻을 수 있다고 설한다. 그렇지만 정법계는 나와 내 것이라고 수용하는 차별과 나아가 능취(能取)와 소취(所取)의 분별을 조작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총체적인 뜻을 말한다면, 여래의 법신은 비록 차별이나 희론이나 색상(色像)이 없지만, 수용신과 변화신은 본원력과 스스로의 뛰어난 힘의 행[勝行力]을 말미암아 갖가지의 상들이 원만한 모든 부처님의 정토를 일으켜서 모든 부처님의 대중 모임에서 다양하고 차별적인 모습을 얻을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두는 정식(淨識)이 이와 같이 변현한 것이므로 갖가지 차별은 진실하게 있는 것이 아니다.마치 전륜왕이 지난 세상의 원력을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뛰어난 행[勝行]을 지어서 여보(女寶) 등의 여러 미묘한 즐거움을 주는 갖가지 차별을 갖추는 것과 같다. 모든 부처님 또한 마찬가지라서 모든 유정들을 요익하게 하기 위하여 뛰어난 행을 짓고, 자업(自業)의 증상(增上)으로 갖가지 깨끗한 국토를 생기하고, 온갖 모임이 법의 즐거움을 수용하도록 온갖 차별을 갖추지만, 다만 무분별한 것은 앞의 경우와 다르다.또한 다시 이와 같이 이미 설하였으니, 법계의 여러 상(相)들은 참으로 깊고 깊으며, 업용(業用) 또한 깊고 깊으며, 처소도 깊고 깊다.
상이 깊고 깊다는 것은 이른바 열 가지 청정하지 못한 허물을 여의는 것이니, 마땅히 알라, 이것이 바로 열 가지 청정상(淸淨相)이다. 청정하지 못한 허물에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차별의 허물이고, 둘째는 더러움에 물드는 허물이고, 셋째는 유행(有行)의 허물이고, 넷째는 유위(有爲)의 허물이고, 다섯째는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허물이고, 여섯째는 행동의 허물이고, 일곱째는 단상(斷常)의 허물이고, 여덟째는 피로함의 허물이고, 아홉째는 업을 쌓는 허물이고, 열째는 섭중(攝衆)의 허물이다.열 가지 청정상이란 이른바 차별이 없는 상,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상, 유행이 아닌 상, 유위가 아닌 상, 증가하거나 감소하지 않는 상, 행동이 아닌 상, 단상이 아닌 상, 피로함이 없는 상, 업을 쌓지 않는 상, 내 것이 없다는 상의 차례이다. 업용이 참으로 깊고 깊은 것은 바로 변화 등의 업임을 알아야 한다.처소의 깊고 깊음은 행동이 없이도 온갖 상이 모든 여래 정토의 대중들의 모임을 원만하게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일체처에서 모두가 허공으로 비유를 삼은 것은 법계의 모든 거친 상[麤相]이 허공과 같음을 나타내기 위함이다.계경에서 “나아가 모든 시설(施設)과 비유로써 모든 여래의 계(戒) 등의 공덕을 설하는 것은 모두 바로 여래를 비방하는 것이나, 오직 하나의 비유만은 제외하나니 이른바 허공의 비유이다. 여래의 계 등의 무량한 공덕은 허공과 같기 때문이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라고 설한 것과 같다.
 또한 묘생이여, 대원경지(大圓鏡智)란 마치 원만한 거울에 의지하여 온갖 형상들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여래의 지혜라는 거울에 의지하여 모든 처(處)와 경(境)과 식(識)의 온갖 형상들의 영상이 나타난다. 오직 원만한 거울로써 비유를 삼은 것은 원만한 거울과 여래의 지혜라는 거울은 평등하고 평등하나니, 그러므로 지혜라는 거울을 이름하여 원경지(圓鏡智)라고 한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단(斷)을 이미 건립하였으니, 이제 지(智)를 건립해야 한다. 이에 의지하는 까닭에 말한다.
‘또한 묘생이여, 대원경지 등등’이란 여기에서는 비유로써 대원경지가 바로 모든 법의 영상을 평등하게 낳는 인연을 나타낸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른바 모든 여래의 제8 정식(第八淨識)이 능히 지 등의 영상을 낳아서 나투는 것이 대원경이 능히 세간의 모든 영상을 나타내는 것과 같으니, 지(智)가 상응하기 때문에 가명(假名)으로 지(智)라고 한다.‘모든 처(處)’라는 것은 이른바 내6처(內六處)이니 곧 눈 등이고, ‘모든 경(境)’이라는 것은 이른바 외6처(外六處)이니 곧 색 등이다. 이 내6처와 외6처가 바로 12처(處)이니, 이 12처를 반연하여 3지품(智品:평등성지와 묘관찰지와 성소작지)의 심(心)과 심법(心法)이 생겨나는 것이다.식(識)을 주인으로 삼기 때문에 통틀어 ‘모든 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인데, 이 모든 식을 온갖 영상이라고 이름하나니 갖가지 행상(行相)의 차별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 뒤의 경에서 “대원경지는 일체시(一切時)에 모든 연에 의지하는 까닭에 갖가지 지의 영상과 모양이 생기한다”라고 말하였으니, 이러한 문구에서 모두 설하였다.능히 지혜의 영상이 생겨나는 인[生因]이 되기 때문에 경지(鏡智)라고 이름한다. 평등성지는 중생의 일을 반연하여 원경지 등을 경계로 삼으며, 묘관찰지는 일체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을 경계로 삼고, 성소작지 또한 그와 같음을 알아야 한다.이와 같이 3지상응심품(智相應心品)은 내6처와 외6의 경계인 모든 소연(所緣)과 소취(所取)의 경계에서 모든 자상과 공상이 변현하는 듯[變似] 갖가지 영상이 명확하게 나타난다. 이와 같은 영상은 모두가 여래의 대원경지를 인하여 생기한 것인데, 분명하게 드러나는 까닭에 ‘나타난다[現]’라고 이름한다.이것은 오직 여래지 등이 나타나는 바이니, 여래의 과위(果位)는 평등지 등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지(智) 등이 생기할 때에는 마치 스스로 소유한 행상의 차별을 모두 능히 증지(證知)하는 것과 같다. 오직 여래의 각혜(覺慧)만이 그 모양을 분석하여 설명해 보이니, 나머지는 이런 능력이 없다.대원경지를 능현(能現)이라고 이름한다. 이 지혜를 반연함을 말미암아 저 영상을 생하는 것이 마치 밝은 거울에 모든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또한 처(處)와 경(境)과 식(識)의 세 가지가 각각 다르니, 처는 6근(根)이고, 경은 6진(塵)이며, 식은 6식(識)으로서 이른바 18계(界)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 이 온갖 영상은 그것이 응하는 3지품을 따라 나타나는데, 묘관찰지 등은 진소유성(盡所有性)2)과 여소유성(如所有性)3) 등을 모두 능현하기 때문이다.여래경지(如來鏡智)가 상응하는 정식(淨識)을 반연하여 이 세 가지 지혜의 영상을 낳는 까닭에 ‘현(現)’이라고 이름한다.
또한 오직 여래지(如來智) 등만이 나타내는 것을 널리 설하고, 나아가 오직 여래의 각혜(覺慧)만이 그 모양을 분석하여 설명해 보이니, 나머지는 앞에서 설한 것과 같다.또한 18계는 모두 여래의 대원경지가 상응하는 심품이 영상을 현현한 것이니, 모든 여래의 경지(鏡智)가 생길 때에 능히 일체 경계를 비추기 때문이다. 모든 처와 경과 식은 마치 영상과 같아서 이 지(智) 중에 있으면서 분명하게 현현한다.이 대원경지는 그 상을 섭수하여 생하기 때문에 대원경지에는 비록 소취와 능취, 동일성과 차이성의 분별이 없지만 모든 소지(所知)의 영상이 나타나는 것이 마치 대원경과 같다. 이 지혜가 생할 때에는 이와 같은 행상(行相)이 자성이 되기 때문이다.여래는 비록 소취와 능취, 동일성과 차이성의 분별이 없지만, 자심(自心)이 나타낸 자상과 공상의 모든 법의 영상을 능히 현증(現證)하며, 증지(證知)를 말미암기 때문에 능히 뒤바뀌지 않으면서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설한다. 이 영상을 말미암아 여래는 무망실법(無忘失法)을 성취하니, 모든 소지경계의 영상은 일체시에 경지(鏡智) 위에서 분명하게 현현하여 망실되지 않기 때문이다.만약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여래를 일체지라고 이름하겠는가? 경지 등이 없으면 언제나 일체법의 자상과 공상을 나타내 증지(證知)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른바 상속4)이 감당할 능력이 있기 때문에 일체지라고 이름한다면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상속이 감당할 능력이 있으니
불[火]이 일체를 삼키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일체지는
단박에 일체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다만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타심지(他心智) 등은 한 가지 일을 취할 때에 다른 일을 취하지 않고 나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일체지가 아니다. 그 상속의 측면에서는 또한 현재를 취하여 알 수 없기 때문에 너의 종파는 일념(一念)에 다만 모든 법의 공상을 1분(分)만 알 뿐이다.만약 그렇다면 여래는 반드시 가명(假名)으로 일체지라고 설한 것이지, 일체지가 아닌 것을 가명으로 일체지라고 설한 것은 아니다. 이는 곧 진실한 일체지를 이룬다는 것이다.또 여래의 경지(鏡智)가 반연이 되고 나머지 상속 중에서 세간과 출세간의 선(善)과 여러 처와 경과 식의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은 만약 경지가 없다면 모두 생겨날 수 없으니, 그 법이 생겨날 때에 모두 이 힘을 말미암아서 또한 능히 증지한다.이 뜻을 말한다면 여래 경지의 증상연력(增上緣力)으로 모든 세간과 출세간의 선과 모든 처와 경과 식이 모두 생기할 수 있다. 마치 맑은 거울 속에 온갖 영상이 나타나는 것처럼 비록 모든 유정들이 각각 인(因)의 힘을 가지고 있지만 경지가 증상연이 됨으로써 바야흐로 생기하게 된다.그런데 비록 씨앗이 있다고 할지라도 땅이 없으면 박 등이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비록 형체가 있어도 거울이 없다면 온갖 영상 등이 나타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반드시 망견(妄見)과 똑같을 터이니, 자재천 등이 세간의 인(因)이 되어서 세간의 모든 과를 생하는 평등한 인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허물은 없다. 그것이 생겨날 때에 오직 능히 증상연을 짓기 때문이며, 짓는 자[作者]가 아니기 때문이며, 덧없기[無常] 때문이며, 무량한 겁 동안에 복과 지혜의 두 가지 자량을 닦고 모아서 생겨난 바이기 때문이다.모든 중생들의 선(善)과 선의 연[善緣]은 이것을 말미암아 생겨나게 된다. 외도의 허망한 견해는 자재천 등이 모든 세간을 능히 짓는 자가 되어서 그 성품이 상주한다고 하기 때문에 대원경지를 반연하여 증상연으로 삼는 것과는 같지 않다.만약 실재하지 않는 영상이 원경 속에 생겨난다면 어떻게 비유되겠는가? 질(質)이 있고 거울이 있어서 서로 화합하여 연이 되니, 이와 같이 모습이 나타나기 때문에 비유가 될 수 있는 것이다.이른바 모든 유정들의 뒤바뀜과 집착에 의한 영상은 훈습의 성숙력 때문에 마치 거울의 표면[鏡面]이 연이 되어서 스스로의 식[自識]이 변이하여 흡사 거울의 표면에 영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 세간은 증상만(增上慢)을 일으킴을 말미암아서 소위 내가 거울 속에서 그 표면의 영상을 보는데, 별도의 영상이 거울 속에 나타나지 않기 때문에 경에서는 단지 온갖 영상이 나타난다고 말하였지 생기한다고는 말하지 않았다.이처럼 모든 경계의 모습[境相]은 모두 스스로의 식(識)이 변이하여 현현했을 뿐 별개의 실체가 있지 않다는 걸 알아야 한다. 식이 뛰어나기 때문에 다만 유식(唯識)이라고 말하는 것이지 심법(心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한 오직 하나의 식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니, 모든 유정들에게는 각기 8식과 심법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색 등은 비록 각각 다른 종류가 있을지라도 이 모두는 스스로의 식이 변이한 것으로 훈습식(熏習識) 위의 공능의 차별을 성품으로 삼기 때문에 변현할 때 도리어 식을 여의지 않는다.세속제의 측면에서는 별도로 심법이 있다고 말하였지만 이는 진실한 뜻이 아니고, 승의제의 측면에서 말한다면 모든 법은 다 정해지거나 개별적인 성품이 없다. 나아가 진여에 이르기까지 비록 식이 변한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또한 식을 여의지 않나니, 식은 참다운 성품[實性]이기 때문이며, 식상(識上)에서 2공무아(空無我)의 공상(共相)이 현시하는 바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유식(唯識)이라고 말한다.다만 어리석은 범부가 제멋대로 헤아려 모든 심ㆍ심법 밖에 일정한 성품의 색 등이 있다고 변계소집함으로서 모든 심ㆍ심법 및 색 등의 온갖 법을 버리지 않고 여의지 않는다. 의타기성과 원성실성은 없지 않기 때문이며 평등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에 이 둘은 평등하니, 그러므로 평등하고 평등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세간의 원경(圓鏡)과 여래지경(如來智鏡)은 둘 다 분별함이 없어서 모두가 능히 영상을 나투되 차별이 없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원경지(圓鏡智)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대원경(大圓鏡)을 어떤 복 있고 즐거움을 누리는 사람이 높고 훌륭한 곳에 흔들리지 않게 내걸면, 오고 가는 무량한 중생들이 이 거울로 자신의 득과 잘못을 관찰하여 득은 있게 하고 여러 잘못은 버리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는 원경지를 내걸고서 깨끗한 법계에 처해 짬이나 끊임이 없기 때문에 흔들림 없이 무량하고 무수한 중생들로 하여금 깨끗하거나 더러움을 관하게 해서 깨끗한 것은 취하고 온갖 더러움은 버리게 한다.
 ‘높고 훌륭한 곳’이란 이른바 높은 깃대이거나 혹은 다른 훌륭한 곳이다. ‘깨끗한 법계’란 티끌 없는 진여이다. ‘처한다’는 것은 편안히 처한다[安處]는 의미이니, 의지하거나 반연하는 것이 사이가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흔들림이 없다’는 것은 이 경지(鏡智)를 말미암아 법계에 의지해 반연해서 생사제(生死際)가 다하도록 항상 뒤따르면서 상속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다.이 말이 뜻하는 것은 대원경지는 온갖 분별과 동요를 영원히 여의어서 한번 얻으면 미래세가 다하도록 상속하며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 나머지 3지(智)는 비록 허망한 계교가 없다고 할지라도 무집작의분별(無執作意分別)이 있어서 증득한 이후에 행하기도 하고 행하지 않기도 하므로 동요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은 “멸정(滅定)의 평등성지 역시 현행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멸정은 제7식이 없기 때문이다”라고 논하여 말한다.또 “역시 1분(分)의 항상 행(行)하는 심ㆍ심법을 멸했기 때문이다”라고 설한다. 만약 그렇게 3위(位) 중에는 모두 제7식이 없다고 설한다면, 이는 곧 초지(初地) 이상에서 무루현관행(無漏現觀行)을 할 때와 나아가 여래지(如來地)에서는 응당 이런 지혜가 없게 될 것이니 곧 커다란 허물이 된다. 경론에 어긋나기 때문이다.그런데 없다고 말하는 자의 뜻은 염오(染汚)의 제7식이 없으면 일체가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설한다. 아직 법이 공하여 무아(無我)라는 지혜(智)를 얻지 못해서 법을 분별하는 집착[分別法執]이 항상 이를 의지하여 나타나기 때문이다. 보특가라가 공하여 무아라는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면 그 집착은 항상 현행한다.이 식에 의지하기 때문에 「결택분(決擇分)」에서는 아뢰야식(阿賴耶識)이 반드시 말나(末那)라는 하나의 식과 함께 구른다(여기서는 전변의 작용을 일으킨다는 의미)고 설한다. 만약 의식(意識)이 일어나면 반드시 두 개의 식(아뢰야식과 말나식)과 함께 일시에 구른다. 만약 5식(識) 중에서 하나의 식이 따라서 일어나면 반드시 세 개의 식(아뢰야식, 말나식, 의식)과 함께 일시에 구르고, 나아가 만약 일시에 5식이 일어나면 반드시 일곱 개의 식과 함께 일시에 구른다.그러므로 성도(聖道)와 멸정(滅定)과 무학(無學)에도 역시 물듦이 없다는 걸 안다. 법을 분별하는 집착과 평등성지는 둘 다 제7식 등의 행상이 미세하기 때문에 멸정과 어긋나지 않으니, 이 멸정을 말미암아 무루도가 인발(引發)하기 때문이다. 본체가 무루이기 때문에 염오의(染汚意)와 더불어 나의 집착은 서로 어긋난다.이는 일부분이 멸하는 것이지 일체가 멸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평등성지는 불과(佛果)에서는 비록 항상 현행하지만 10지(地)에서 증득한 이후 번뇌의 유루심이 일어날 경우에는 일어나지 않으니, 짬이나 끊어짐이 있기 때문이라서 동요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저 나머지 두 개의 지(智)도 불과 위에서 또한 항상 현행하지 않기 때문에 동요함이 없는 것은 아니다.어찌하여 대원경지를 정법계에 안정되게 처해 두는가? 무량하고 무수한 중생들로 하여금 물들거나 깨끗함을 보게 하기 위함이다.
어찌하여 그들로 하여금 관찰하게 하는가? 깨끗한 것은 취하고 물든 것은 버리게 하기 위함이다. 물듦이란 이른바 번뇌와 업이 생성한 상(相)이다. 버린다는 것은 이른바 끊고 항복받는 것이니, 세간도와 출세간도를 통해서 잠깐 동안에 그것을 완전히 조복 받고 끊기 때문이다. 깨끗함이란 이른바 모든 선(善)이니 능히 중생의 마음을 청정하게 하기 때문이다. 취한다는 것은 임지(任持)하여 안립함을 말하나니, 종자를 오래 길러 성숙시켜서 원하고 바라는 바에 따라 해탈을 증득하기 때문이다.이 가운데의 뜻을 말한다. 모든 여래가 과거 보살의 지위에 계실 때 모든 유정들의 온갖 종상(種相)의 이익되고 즐거운 일을 판별해서 모든 유정들의 이익과 안락함의 의요(意樂)를 이루고자 항상 정법계에 따라 의지하면서 닦아 모은 복덕과 지혜의 자량에 따라 대원경지를 상속하기를 회향해 구하였다. 그리하여 방편의 선교(善巧)를 부지런히 닦아 익혔기 때문에 이 지혜를 증득해서 연법계(緣法界)를 의지해 상속하면서도 움직임이 없었다.비록 작의(作意)와 분별과 희론이 없다고 하여도 상속의 구름[轉]이 증상연이 되어서 모든 유정들로 하여금 구하고 원하는 바에 따라서 무량한 선근종자를 안립하고 크게 길러서 성숙케 하며 세간의 즐거움과 출세간의 해탈을 얻게 하였다. 이것은 여래의 대원경지를 말미암아 화하여 낳는 작용을 일으킨 것이니, 모든 유정들을 위하여 널리 법의 요체를 설하여 물들고 깨끗함을 알게 함으로서 깨끗함은 취하고 물듦은 버리도록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유정을 이익되고 즐겁게 하는 근본이다.
 또 원경(圓鏡)이 지극히 잘 닦인지라 맑고[鑒] 깨끗하고[淨] 티끌[垢]이 없어서 광명이 널리 비추는 것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그와 같아서 불지(佛智) 위에서 모든 번뇌장과 소지장의 티끌을 영원히 벗어나고 여의었기 때문에 지극히 잘 닦이고 맑아서 의지정(依止定)에 의해 섭지(攝持)되어 있다. 그래서 밝고 깨끗하고 티끌이 없이 모든 중생들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에 광명이 널리 비춘다.
 ‘맑음’이란 이른바 자성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깨끗함[淨]’이란 이른바 객진(客塵)을 차별하여 여의는 것이다. ‘티끌이 없다’는 것은 통틀어서 앞의 두 가지가 두루 원만히 티끌을 여의어 지극히 청정한 것이다.
빛[光]은 맑음[鑒]을 말미암고 밝음[明]은 깨끗함[淨]을 말미암으며, ‘널리 비춘다’는 것은 티끌이 없음을 말미암는다.‘불지(佛智) 위에서 등등’은 곧 번뇌장과 소지장을 함께 이름하여 티끌이라고 하는데, 궁극적으로 끊기 때문에 ‘영원히 벗어난다’고 한다. 모든 장애와 티끌을 영원히 벗어난다는 뜻을 말미암기 때문에 경지(鏡智)가 ‘지극히 잘 닦여서 맑다’고 하는 것이다.또 번뇌란 이른바 탐욕과 성냄 등 모든 번뇌와 전(纏)은 수면위(隨眠位)에서 행하든 행하지 않든 모두가 세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니, 성도(聖道)에 태어나는 것을 장애하고 열반을 얻는 것을 장애하며 심신을 어지럽히기 때문에 번뇌장이라고 한다. 소지장(所知障)이란 소지경계에 대하여 물들지는 않으나 무지(無知)해서 일체지를 장애하지만 열반을 장애하지는 않는다. 비록 이런 장애가 있어도 성문 등이 열반을 얻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이 두 가지 장애는 또 구애(垢礙)라고 이름한다. 청정지를 생겨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며, 정지(淨智)를 물들이기 때문이다. 객진장구(客塵障垢)를 대치할 수 있음으로 인해 필경 생겨나지 않는 것을 ‘영원히 벗어나 여읜다’고 이름한다. 영원히 장애를 여의어 대원경지가 언제나 지극히 청정하니, 이런 까닭에 ‘지극히 잘 닦여서 맑다’고 한다.‘의지정(依支定)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은 의지하는 바가 되므로 의지라고 이름하는데, 대원경지가 이것에 의지하여 생겨나기 때문이다. 의지가 곧 정(定)이므로 의지정이라고 이름하고, 혹은 지(智)가 정에 의지하므로 의지정이라고 이름한다. 이로부터 무간해탈도가 생겨나니 지극히 청정하기 때문이다. 이 소의정(所依定)은 바로 수승한 금강유정(金剛喩定)이니, 그 선정의 힘으로 인해 장애를 영원히 끊기 때문에 이 지는 그것을 의지한다.선정의 힘에 의해 섭지되는 바이기 때문에 ‘섭지’라고 이름하는데, 그 선정이 끊임없이 이 지를 낳기 때문이다. 그 선정의 힘으로 인해 지극히 청정하여 모든 분별을 여의어서 분별함이 없다. 경지를 낳기 때문에 이 지가 이미 의지하는 바가 되니, 선정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맑고[鑒] 깨끗하고[淨] 티끌[垢]이 없다’라는 것은 자체가 청정하기 때문에 맑고 밝다고 이름하고, 번뇌장을 여읜 것을 깨끗함이라고 이름하며, 소지장을 여읜 것을 티끌이 없다고 이름한다.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짓기 때문이다.‘광명이 두루 비춘다[光明遍照]’라는 것은 이 지(智)가 선정에 의해 섭지되기 때문이다. 또한 능히 모든 유정들의 온갖 이롭고 즐거운 일을 일으키고 지으니, 이것을 지음으로 인해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이다. 자성이 청정하고 맑은 것을 이름하여 빛[光]이라고 하며, 번뇌장과 소지장을 여읜 이와 같은 차제(次第)를 밝음[明]이 두루 비춘다고 한다.여기에서의 뜻을 설한다면, 대원경이 지극히 잘 닦인지라 맑고 밝고 깨끗하여 티끌이 없어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거울의 표면을 통해 깨끗한 행위와 잘못된 행위를 보게 함으로서 이익되는 일을 하게 하는 것과 같으니, 이런 까닭으로 광명이 두루 비춘다고 하는 것이다. 대원경지는 자성이 청정하여 두 가지 장애를 멀리 여의어서 맑고 깨끗하며 티끌이 없다. 비록 볼 수 없지만 수용신과 변화신을 일으켜서 능히 모든 지(智)를 낳아 중생의 온갖 이로운 일을 이루어내는 것이니, 이런 까닭으로 광명이 두루 비춘다고 하는 것이다.
 또 원경(圓鏡)이 본질(本質)에 의거하고 반연해서 갖가지 영상의 모습을 생기하는 것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마찬가지로 일체시에 여러 연(緣)에 의지하는 까닭에 갖가지 지혜의 영상의 모습을 생기하는 것이다.
 만약 원경지가 바로 모든 유정들의 일체지 등이 영상을 생하는 인(因)이라면, 어떻게 영상의 모습에는 차별이 있고, 어떻게 이 지의 본체[智體]에는 차별이 없는가? 또 일체시에 항상 능히 인이 된다면, 어찌하여 일체 중생과 자지(自智) 등의 영상이 항상 단박에 생겨나지 않는가?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말한다.
‘또 원경(圓鏡)이 본질에 의거하고 반연해서 갖가지 영상의 모습을 생기한다’라는 것은 영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이지 거울의 본체에 차별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항상 단박에 생하지 않는 것은 온갖 연을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경지는 일체시에 온갖 연을 기다리기 때문에 지(智)를 생하는 등의 영상에는 갖가지 차별이 있는 것이며, 그것과 다르지 않은 까닭에 지(智)가 청(靑) 등의 갖가지 본체의 차별을 이루는 것이다. 또한 일체 중생 및 자성지[自智] 등의 영상을 항상 단박에 생기하는 것이 아니며 때를 기다리고 연을 기다려야 비로소 능히 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서의 뜻을 설한다면, 대원경지상응정식(大圓鏡智相應淨識)에 두 종류의 용(用)이 있다.
첫째는 인연용(因緣用)이다. 이른바 정식(淨識) 중에는 모든 능현능생(能現能生)의 신토경지(身土境智)의 정법종자(淨法種子)가 갖추어져 있어서 만약 외연(外緣)을 우연히 만나면 곧 신토경계의 갖가지 영상을 변현한다. 그리고 평등지 등의 상응심품의 행상차별을 능히 생기한다.둘째는 증상연용(增上緣用)이다. 이른바 부처님의 정식은 선근과 원력에 의해 생기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중생들이 스스로 인연을 갖춘다면, 이때 정식이 문득 자량(資糧)하고 도와서 능히 장애 없이 자라나 원만히 이루어지게 한다. 그런 까닭에 경지(鏡智)의 본체는 비록 하나이지만 모든 법의 영상을 능히 나투고 낳으며, 외연을 기다리는 까닭에 단박에 현기(現起)하는 것은 아니다.
 원경 상에서 하나가 아닌 많은 영상들이 일어나지만 원경 상에는 모든 영상이 없고 이 원경도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는 것처럼, 이와 같이 여래의 원경지 상에도 하나가 아닌 수많은 온갖 지(智)의 영상이 일어나지만 원경지 상에는 온갖 지의 영상이 없으며, 그러면서도 이 지경(智鏡)에는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다.
 만약 온갖 지의 영상이 경지 상에서 이미 본체를 가지고 있다면, 어떻게 경지가 연이 되어 생겨난다는 말인가? 만약 먼저 본체가 없다면 어떻게 온갖 지의 영상을 생하고도 움직임이나 지음이 없다는 것인가? 도사(陶師:옹기장이)가 움직이거나 짓는 일 없이 먼저 없었던 항아리 등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볼 수 없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 말한다.
‘원경 상에서 하나가 아닌 많은 영상들이 일어난다 등등’은 대원경이 능히 온갖 영상을 일으킬 때 같은 종류의 수가 많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였으며, 다른 종류가 무수하기 때문에 ‘많다’고 한 것이다. 같은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해서 하나의 종류를 선택하였으므로 하나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며, 다른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했을 때 무수하게 나타나는 까닭에 많다고 말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거울에서는 비록 먼저의 영상이 없지만 많은 영상을 일으키며, 그러면서도 사려분별의 동작이 없다. 경지(鏡智) 또한 그러하여 비록 먼저의 지(智) 등의 영상이 없지만, 그러면서도 능히 지 등의 갖가지 모든 법의 영상을 일으킨다. 같은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함으로써 ‘하나가 아니다’라고 말하고, 다른 종류에 의존하여 관찰함으로써 ‘수많다’고 말하는 것이다. 비록 이와 같이 지 등의 영상을 일으키지만 사려분별의 동작은 없다.여기서의 뜻으로 말한다면, 마치 대원경이 비록 분별함이 없다고 하여도 능히 갖가지 영상을 일으키는 것처럼 경지도 그러해서 비록 아집이나 아소집의 소취와 능취와 작의분별이 없지만 능히 갖가지 지 등의 모든 법의 영상을 일으키는 것이다.
 또 원경은 온갖 영상과 합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자 그 연(緣)들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여래의 대원경지도 이와 같아서 온갖 지의 영상과 더불어 합한 것도 아니고 여읜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며 흩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원경지(圓鏡智)가 온갖 지 등의 영상과 화합한다면 어떻게 그것들로 말미암는 차별이 없겠는가? 따라서 이것은 차별을 이룬다. 만약 화합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인이 되겠는가? 씨앗 등이 여러 싹의 열매와 화합하지 않으면서도 능히 인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였고, 햇빛 등은 석회(石灰) 등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으면서도 모습을 비추어 드러낸다.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하여 말한다.
‘또 원경은 온갖 영상과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는다 등등’은 마치 세간의 원경이 비록 능히 인(因)이 되어서 온갖 영상을 일으키지만 그 영상과 더불어 화합하지 않으니, 그것이 생겨나기 전에는 일찍이 본체가 있지 않았으므로 쌓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그것과 함께 있든 있지 않든지 간에 가히 화합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원경이 영상과 더불어 또한 서로 여의지 않으면서 그 연을 나타내기 때문에 곧 이런 뜻으로 인해 화합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이것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비록 이것은 영상과 더불어 현생인(現生因)이 되지만 영상에 차별이 있다고 해서 거울이 차별을 이루는 것은 아니다.대원경지 또한 이와 같다. 비록 능히 인이 되어서 지(智) 등의 영상을 낳지만 지와 더불어 합하는 것도 아니고 여의는 것도 아니니, 쌓아 모으지 않기 때문이고 흩어져 없어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합하는 것도 아니라 함은 그것이 아직 생겨나기 전에는 일찍이 본체가 있지 않아서 쌓아 모으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의는 것도 아니라 함은 요컨대 경지가 있어서 지 등의 영상이 생기고, 없다면 생기지 못했을 것이다.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함은 여의고 무너져서 있지 않은 것을 흩어져 없어진다고 이름하고, 그것에 위배되는 것을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이름하나니 그것을 거두어 생하기 때문이다. 혹은 소연경상(所緣境相)을 망실하지 않는 것을 이름하여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경지 가운데 일체 소지상(所知相)이 현현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3세지(世智) 등과 모든 중생들이 경지(鏡智)의 불생(不生)을 두루 알지 못한다고 해도 요컨대 일체는 이 지혜가 낳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이 지는 모든 소연경상을 잊지 않기 때문에 이름하여 흩어져 없어지지 않는다고 하는 것이다.흩어져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여의지 않는 것이니, 비록 능히 인을 이루어지 등의 영상을 일으켜도 그것을 말미암아 차별이 있지 않기 때문에 이것이 차별을 이룬다. 이는 마치 대원경이 차별 없이 작용하는 것과 같다.여기서의 뜻을 설한다면, 마치 세간의 원경이 비록 능히 인이 되어서 온갖 영상을 일으키지만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아서 영상의 차별이 원경을 저촉하지 않는 것처럼, 경지 또한 마찬가지라서 비록 능히 인을 이루어 지 등의 영상을 일으키지만 합하지도 않고 여의지도 않아서 그 영상의 차별이 원경지를 저촉하지 않는다.씨앗 등이 비록 능히 싹의 인이 되지만 합한다거나 여읜다거나 하는 것을 둘 다 말할 수 없다. 광명의 미세한 부분 역시 색(色) 등과 공상(共相)으로 화합하여 함께 존재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 식(識) 상에서 흡사 색 등과 더불어 화합하고 상생함으로써 세간의 모든 인과를 나타내 보여주는 것처럼 한다. 비록 합하거나 여의지 않아도 능히 인이 되므로 인과의 두 가지 상이 결코 화합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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