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985 불지경론(佛地經論) 1권

by Kay/케이 2025. 5. 8.
728x90
반응형

 

 

불지경론(佛地經論) 1

 

불지경론(佛地經論) 제1권

친광(親光) 지음현장(玄奘) 한역
이미령 번역

더 이상 위가 없는 훌륭한 복전(福田)이신
3신(身)ㆍ2제(諦)ㆍ1승(乘)의 승가에 머리 조아립니다.
제가 이제 힘껏 이 논을 짓는 것은
법이 오래도록 머물러 중생을 제도하기 위함입니다.
두루 큰 스님들의 뜻을 살펴서 제가 이미 청정해졌지만
나머지 지혜가 하열한 이들이 이치를 통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그들로 하여금 저 정토에 태어나는 뛰어난 덕을 얻게 하고자
제가 모니지(牟尼地)를 간략하게 풀어서 밝힙니다.

『불지경(佛地經)』이란 일체지(一切智)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갖추고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여의어서 일체법과 일체종상(一切種相)을 능히 스스로 열어 깨닫는 것이며, 또한 모든 유정(有情)을 능히 열어 깨닫는 것이니, 마치 꿈꾸는 상태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고 연꽃이 피어나는 것과 같아서 불지(佛地)라고 이름한다.이른바 의지하시는 바이고 행하시는 바이며 거두시는 바로서 바로 마땅히 설하신 바인 청정법계(淸淨法界)이니, 대원경지(大圓鏡智)와 평등성지(平等性智)와 묘관찰지(妙觀察智)와 성소작지(成所作智)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맛의 일이 평등하다. 이것이 부처님께서 의지하시는 바이고 행하시는 바이며 거두시는 바이기 때문에 불지라고 이름한다.능히 꿰뚫고 능히 거두므로 이름하여 경(經)이라고 한다.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으로 꿰뚫고 거두어서 교설의 뜻으로 응하고 중생을 교화하는 바이니, 여기에서는 불지가 유정을 이익되게 한다는 것을 널리 선포해 설하였음을 알아야 한다. 언전(言詮)된 뜻에 입각하여 『불지경』이라고 이름하니,『연기경(緣起經)』과 같고『집보론(集寶論)』과 같다.이 경에 담긴 뜻을 간략히 설명하면, 세존 불국토의 원만함과 공덕의 원만함과 권속의 원만함을 드러내서 불지(佛地)를 안립하는 것이며, 다섯 가지 법의 총별(總別)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가지 맛의 사지[一味事智]로 청정법계에 의지하여 모든 공덕과 3신(身)의 차별을 갖추는 것이다. 이것들을 차례로 나타내 보이면서 여래께서 이와 같은 곳에 머무시며, 이와 같은 덕을 갖추시고, 이와 같은 무리들과 함께 안립하시고, 이와 같이 지(地)의 뜻이 차별 된다.이와 같은 곳이란 이른바 부처님의 정토로서 곧 열여덟 가지가 원만하게 장엄된 광대한 궁전이다. 이와 같은 덕이란 이른바 불세존의 스물한 가지 특별하고 훌륭한 공덕이다. 이와 같은 무리란 이른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대성문(大聲聞)과 마하살(摩訶薩)의 무리로서 갖가지 미묘한 공덕을 성취한 자들이다. 지(地)의 뜻의 차별이란 이른바 대각지(大覺地)가 다섯 가지 법의 총별로 수용하고 화합해서 한 가지 맛의 일이 평등한 것을 말한다. 나중에 가서 자세하게 설명하겠다.이 경은 전체적으로 세 부분으로 나뉜다. 첫째는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분[敎起因緣分]이고, 둘째는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부분[聖敎所說分]이고, 셋째는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행하는 부분[依敎奉行分]이다.전체적으로는 내가 들은 것과 가르침이 일어날 때를 나타내고, 개별적으로는 가르침의 주인과 가르침이 일어나는 장소, 그리고 가르침의 은혜를 입는 유정중생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因)과 연(緣)이 되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르침이 일어나는 인연의 부분’이라고 한다.또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법문의 품류의 차별을 올바로 나타내므로 이름하여 ‘성스러운 가르침을 설하시는 부분’이라고 한다.당시 대중들이 부처님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듣고 환희하며 받들어 행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가르침에 의지하여 받들어 행하는 부분’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박가범께서.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는 자기가 들었음을 전체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가 “이와 같은 일을 내가 옛날에 이와 같이 들은 적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전체적인 말은 네 가지 뜻에 의거해 굴러간다. 첫째는 비유에 의거함이고, 둘째는 가르침과 훈계에 의거함이며, 셋째는 문답에 의거함이고, 넷째는 허가(인가ㆍ인정)에 의거함이다.‘비유에 의거함’이란 가령 “이와 같은 부귀함은 마치 비사문(毘沙門:북방의 다문천왕)과 같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훈계에 의거함’이란 마치 “너는 반드시 이와 같이 경과 논을 독송해야 한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문답에 의거함’이란 마치 “나는 이와 같이 널리 설하는 것을 들었다”고 설명해서 말하는 것과 같다.
‘허가에 의거함’이란 마치 “내가 마땅히 너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고, 이와 같이 짓고, 이와 같이 설한다”고 설명해서 말하거나, 혹은 “이 일은 이와 같다”고 허가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오직 허가에 의거할 뿐이라고 하니, 이른바 결집할 때에 모든 보살의 무리가 함께 청하면서 ‘당신이 들은 바와 같이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하셨습니다’라고 말하면, 전법(傳法) 보살은 문득 그 말을 인정하면서 ‘이와 같이 마땅히 설하셨으니, 내가 들은 바와 같다’고 말한다. 또 이와 같은 말이 믿을 수 있는지 심사하여 정하니, 이른바 ‘이와 같은 법은 내가 일찍이 들은 적이 있으니, 이 일은 이와 같이 여래께서 설하신 말씀과 가지런해서 결정코 다름이 없다’고 한다.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또한 문답에 의지한다고 하니, 이른바 누군가 묻기를 ‘그대가 그 설하신 바를 옛날에 정녕코 들었는가?’하면, 이에 답하여 말하기를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한다.어떤 사람은 여기에서는 통틀어 네 종류에 의지한다고 하니, 비유(여기서는 비유량의 의미)에 의한다는 것은 이른바 ‘마땅히 설해진 이와 같은 문구는 내가 옛날에 들은 것과 같다’고 하는 것이다. 가르침과 꾸짖음에 의한다는 것은 이른바 당시의 대중에게 고할 때에 ‘이와 같이 내가 옛날에 들은 것을 마땅히 들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나머지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나’라는 것은 모든 온(蘊)으로서 세속법의 가짜[假]이고, ‘들었다’는 것은 이근(耳根)이 인식작용을 일으켜서 받아 듣는 것이다. 개별적인 것을 폐하고 총체적인 것에 나아가므로 “나는 들었다”라고 말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여래의 자비와 본원의 증상연의 힘으로 듣는 자의 식(識) 위에 경문의 뜻의 모양[文義相]이 생긴다고 하니, 이 경문의 뜻의 모양은 비록 자기 선근의 힘이 일어나는 것에 직접적으로 의지한다고 하더라도 강력한 연에 나아가므로 이름하여 ‘불설(佛說)’이라고 하는 것이며, 이근의 힘을 통해 자기 마음이 변하여 나타나기 때문에 이름하여 “나는 들었다“고 하는 것이다.어떤 사람은 듣는 자의 선근과 본원의 증상연의 힘으로 여래의 식(識) 위에 경문의 뜻의 모양이 생기는 것이니, 이 경문의 뜻의 모양이 바로 부처님의 이타(利他)적인 선근이 일어난 것이므로 이름하여 ‘불설’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듣는 자의 식심(識心)이 비록 취득하지 않았어도 그 모양과 비슷한 것이 분명하게 드러나므로 “나는 들었다”고 이름하는 것이다.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말하는 것은 늘리거나 줄이거나 다른 부분이 첨가되는 허물을 피하고자 하는 것이니, 이른바 “이와 같은 법을 내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었고 달리 전전(展轉)하지 않았다”는 것이다.‘들음을 나타내 보인다’는 것은 감능(堪能)하는 바가 있어서 온갖 들은 것이 모두 늘리거나 줄이거나 다른 부분을 첨가하는 허물을 떠나 있으니, 어리석은 범부가 감능하는 바가 없어서 온갖 들은 것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혹은 다른 부분을 첨가하는 허물이 있는 것과는 같지 않다.법을 결집할 때에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여래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이런 말을 처음에 함으로서 중생들로 하여금 공경하고 신수(信受)하게 하고자 하니, “이와 같은 법을 나는 부처님으로부터 들었으며, 경문의 뜻은 결정코 늘어났거나 줄어든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듣는 자는 응당 올바로 듣고 난 뒤에 이치대로 사유하여 부지런히 수행하고 배우는 것이다.‘한때[一時]’라는 말은 설법을 들은 때이다. 이것은 찰나에 나아가 상속하며 끊어짐이 없어서 설법을 듣는 것이 구경(究竟)이므로 전체적으로 ‘한때’라고 이름한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글자ㆍ이름ㆍ구절 등의 설법을 들은 때의 시간이 다를 것이다.무엇을 ‘한[一]’이라고 하는가? 혹은 설하는 자가 다라니를 능히 얻어서 한 글자 속 한 찰나 경에 모든 법문을 능히 설하고 능히 지니는 것이며, 혹은 듣는 자가 깨끗한 이근을 얻어서 한 찰나 경에 한 글자를 들을 때에 나머지 모든 것에 걸림 없이 모두 능히 받아들이는 까닭에 ‘한때’라고 이름한다.혹은 서로 모여서 만나는 시분(時分)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이름하여 ‘한 때’라고 한다. 즉 이 설함과 들음이 함께 동일한 시각에 만난다는 뜻이다.‘때[時]’란 바로 유위법에서 거짓으로 세워진 분위(分位)이다. 혹은 이 마음 위에서 분위의 영상(影像)은 색심(色心) 등에 의지하여 총체적으로 거짓으로 세워졌기 때문에 이것은 불상응행온(不相應行蘊)에 포섭된다.어찌하여 아래의 처소처럼 개별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단지 ‘한때’라고만 말하는가? 낮밤 등의 시분이나 방향들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설하지 않았다. 또 뜻이 일정하지 않으니 혹은 한 찰나이기도 하고 혹은 거듭 상속하기도 해서 일정하게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총상(總相)으로서 다만 ‘한때’라고만 말한 것이다.‘박가범’이란, 이른바 박가(薄伽)라는 소리는 여섯 가지 뜻에 의거하여 변전한다. 첫째는 자재(自在)의 뜻이고, 둘째는 치성(熾盛)하다는 뜻이고, 셋째는 단엄(端嚴)하다는 뜻이고, 넷째는 명칭(名稱)이라는 뜻이고, 다섯째는 길상하다는 뜻이고, 여섯째는 존귀(尊貴)하다는 뜻이니, 게송에서 말하는 것과 같다.
자재함과 치성함과 존엄함
명칭과 길상함과 존귀함
이 여섯 가지 뜻의 차별은
총체적인 명칭[總名]을 박가(薄伽)로 삼음을 알라.
이와 같이 모든 여래는 일체종(一切種)을 갖추고 있어서 서로 여의지 않으니, 이런 까닭에 여래를 박가범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그 뜻은 무엇인가? 이른바 모든 여래는 영원히 온갖 번뇌에 계박되거나 속해있지 않기 때문에 자재의 뜻을 갖추었고, 지혜의 불길이 맹렬하게 타올라서 태우고 단련하므로 치성의 뜻을 갖추었고, 미묘한 32상 등으로 장엄되었으므로 단엄의 뜻을 갖추었고, 온갖 뛰어난 공덕이 원만하여 알지 못함이 없으므로 명칭의 뜻을 갖추었고, 온 세상이 가까이하면서 공양하고 함께 찬탄하므로 길상(吉祥)의 뜻을 갖추었고, 온갖 덕을 갖추고 항상 방편의 이익을 일으켜서 모든 유정을 안락하게 하되 게으르거나 그만두지 않으므로 존귀(尊貴)의 뜻을 갖추었다.혹은 능히 네 가지 마원(魔怨)을 쳐부수는 까닭에 박가범이라고 이름한다. 어떤 것이 네 가지 마원인가? 번뇌마(煩惱魔)ㆍ온마(蘊魔)ㆍ사마(死魔)ㆍ자재천마(自在天魔)이다.부처님께서는 열 가지 공덕의 명호를 갖추셨는데, 어찌하여 여래의 가르침을 전하는 자는 모든 경의 첫머리에 오로지 이와 같이 박가범이라는 이름만을 두는 것인가? 그것은 이 하나의 이름을 세상이 함께 존중하기 때문이다. 모든 외도들은 다 같이 본사(本師)를 일컬어 박가범이라고 한다. 또 이 하나의 이름은 온갖 덕을 총체적으로 거두지만 다른 이름은 그렇지 않으므로 경의 첫머리에는 모두 이 이름을 올리는 것이다. 박가범의 덕에 관해서는 나중에 자세하게 설명한다.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한 곳에 계시면서 커다란 광명으로 모든 가없는 세계를 두루 비추시니, 한량없는 방위와 처소가 미묘하게 장식되어 줄지었고 둥근 둘레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려웠다. 삼계의 행해지는 곳을 초월하고 출세간의 선근이 일어난 것보다 뛰어났고 지극히 자재한 정식(淨識)을 여래가 머무는 곳의 상(相)으로 삼았다.모든 대보살의 무리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는데, 한량없는 하늘과 용과 사람이거나 사람 아닌 무리들이 언제나 좌우에서 따랐으며, 광대한 법의 맛과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채 모든 중생의 온갖 의리(義利)를 지어서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과 속박의 티끌을 멸하였고, 온갖 악마를 멀리 여의고 모든 장엄을 뛰어넘었다. 여래의 장엄을 의지처로 삼고, 큰 염혜행(念慧行)을 여행길로 삼고, 커다란 지(止)와 미묘한 관(觀)을 탈것으로 삼고, 큰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고, 한량없는 공덕의 무리를 장엄으로 삼아서 대보화왕(大寶花王)의 무리가 세운 커다란 궁전에 머물고 있었다.
 이것은 여래께서 머무시는 곳의 원만함을 나타낸 것이니, 이른바 부처님의 정토가 이와 같다. 정토는 다시 열여덟 가지 원만한 일을 말미암기 때문에 원만하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즉 현색(顯色)이 원만하고, 형색(形色)이 원만하며, 분량(分量)이 원만하고 방소(方所)가 원만하고, 원인[因]이 원만하고, 과보[果]가 원만하고, 주(主)가 원만하고, 보필[輔翼)하는 것이 원만하고, 권속이 원만하고, 주지(住持)가 원만하고, 사업(事業)이 원만하고, 섭익(攝益)이 원만하고, 두려움 없음이 원만하고, 머무는 곳[住處]이 원만하고, 길[路]이 원만하고, 탈것[乘]이 원만하고, 문(門)이 원만하고, 의지(依持)가 원만하다.열아홉 구절의 이와 같은 차례로 말미암아 이와 같은 열여덟 가지 원만함을 나타내 보이니, 곧 이 원만하게 장식된 궁전을 이름하여 부처님의 정토라고 이름하며,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은 커다란 궁전에 머무시면서 이 계경(契經)을 설하신다.수용(受用)과 변화(變化)의 두 가지 부처님 국토 가운데 지금의 이 정토는 어느 국토에 속할까? 그리고 이 경에서의 부처님은 어떤 몸을 말하는 것일까?어떤 사람은 이 국토는 변화토(變化土)에 속한다고 하며, 이 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바로 변화신(變化身)이라고 한다. 성문 등의 무리가 이 국토에 머물면서 여래를 마주 대한 채 이 경을 설하시는 것을 듣고서 환희하고 믿어 받들며 봉행하기 때문에 이는 부처님의 마음이 변현한 것이다. 그래서 삼계를 벗어나는 정식(淨識)을 상(相)으로 삼아서 뛰어난 법을 설하는 것이다.이 지(地) 이전의 모든 유정들을 교화하여 그 인(因)을 기쁘고 즐겁게 수행토록 하기 위하여 잠시 청정한 불국토를 화작(化作)해서 뛰어나고 미묘한 화신의 신통력을 대중들에게 가피하여 그들로 하여금 잠시 볼 수 있게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성문 등의 무리는 마땅히 모두 보지 못할 것이다.어떤 사람은 이 국토는 수용토(受用土)에 속한다고 하고, 이 경에서 말하는 부처님은 바로 수용신(受用身)이라고 한다. 이 정토의 양은 한없기 때문이며, 길과 탈것과 문 등이 바로 참다운 덕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를 수용하여 한결같이 깨끗하고 미묘하며, 한결같이 안락하고, 한결같이 죄가 없고, 한결같이 자재하여 다른 곳에서도 설하기 때문이며,『해심밀(解深密)』의 설에서는 3지(地) 이상은 곧 태어날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며, 이 경에서 설하는 부처님은 나중에 설명하게 될 스물한 가지 참다운 공덕을 모두 갖추었기 때문이며, 다른 경을 설할 때는 이와 같은 부처님의 공덕을 열거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만약 잠시 이와 같은 정토와 이와 같은 미묘한 몸을 화작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보게 한다면 응당 다른 경에서와 같이 분명하게 나타내 설명할 것이다. 그런데 설하지 않았으므로 이 수용토와 수용신과 성문 등의 무리는 부처님의 화작인 것이다.혹자는 모든 보살이 이 몸과 불국토의 장엄과 법을 설하는 모임을 만들어 나타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바로 이 지상(地上) 보살은 응당 보고 듣는 바일 텐데, 어찌하여 이 화불토(化佛土) 중에 결집하고 유포하고 법을 전하는 보살이 있는가?일체지자(一切智者) 및 머무는 곳이 모든 세간법을 뛰어넘어 있다는 것을 나타내 보이고자 함이니, 이와 같이 나타내 보이는 것은 교화 받는 중생들을 기쁘고 즐겁게 하고자 하는 것이고, 다음 생에 이와 같은 청정한 불국토에서 태어나 이와 같은 부처님을 뵙고 이와 같은 법을 듣고 그 인을 수행하고자 발원시키도록 하기 위함이고, 또 광대한 승해(勝解)를 낳게 해서 유정과 모든 보살이 뛰어나게 환희하도록 하기 위함이고, 증상의요승해(增上意樂勝解)의 경계를 더욱 견고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에 결집하고 유포하는 것이다.또 이 법은 뛰어나서 여기서 마땅히 들어야 하는데, 그러나 그 처소가 뛰어나지 않으면 화신(化身)은 그 모습이 거칠어서 법을 널리 설할 수 없다. 그러므로 수용신이 수용토에 머물러 초지(初地) 이상의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설해서 법을 전하는 자로 하여금 결집하고 유통하게 하는 것이다.만일 그렇다면 어찌하여 여래께서 설한 법만을 설하지 않는가? 만약 설하는 곳이나 능히 설하는 자가 없다면 이 법을 어느 곳에서 누가 설하였는지 알지 못할 것이다. 모든 것에서 의심이 일어나므로 모름지기 갖추어 설한 것이다.참다운 뜻[實義]은 석가모니께서 이 경을 설하실 때에 지전(地前)의 대중들은 변화신이 이 예토에 머무시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보지만, 지상(地上)의 대중들은 수용신이 부처님의 정토에 머무시면서 자신들을 위하여 설법하신다고 본다. 듣는 것은 비록 같지만 보는 것은 각각 다르다. 비록 함께 환희하고 믿고 받아서 봉행하지만 이해하는 데에는 깊고 얕음의 차이가 있고 행하는 바도 각각 다르다.그런데 법을 전하는 사람은 중생들로 하여금 이 뛰어난 법을 듣고 염원을 발해서 그 인(因)을 닦아 다음 생에 정토에 태어나 부처님의 공덕을 증득케 하고자 하기 때문에 뛰어남에 나아간 자가 본 결집은 “박가범께서 가장 뛰어난 등등에 머무신다”고 말하면서 나아가 여래의 공덕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한 곳’이란 것은 거대한 궁전이 가장 훌륭하게 빛나는 7보로 장엄되었다는 것이다. 혹은 거대한 궁전이 7보로 장엄되어있으므로 가장 훌륭하게 빛난다고 하기도 한다.‘7보’라는 것은 첫째는 금, 둘째는 은, 셋째는 폐유리(吠瑠璃), 넷째는 모파락게파(牟婆洛揭婆), 다섯째는 갈습마게파(遏濕摩揭婆), 여섯째는 붉은 진주인데 붉은 벌레에서 나왔으므로 붉은 진주라고 하며, 혹은 구슬의 몸체가 붉기 때문에 붉은 진주라고도 한다. 일곱째는 갈계달락가(羯雞怛諾迦)이다.
이렇게 소중한 것을 칠보라고 말하는데, 참다운 정토는 한량없는 미묘한 보배들이 아름답게 장식되고 장엄되어 있어서 세간에서 알 수 있는 바가 아니다.‘큰 광명으로 모든 가없는 세계를 두루 비춘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이 커다란 빛을 놓아서 널리 모든 가없는 세계를 비추는 것을 말한다. 또는 거대한 궁전의 본체가 가없는 세계에 두루 가득하기 때문에 큰 광명을 놓아서 일체를 두루 비춘다는 말이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부처님의 정토가 색상을 드러냄이 원만함[顯色圓滿]을 나타내는 것이니, 이와 같이 정토는 색상을 드러냄이 원만하다.그렇다면 형체와 양은 어떤가? ‘한량없는 방소(方所)는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고’는 이른바 거대한 궁전의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는 것이 방향이나 장소가 한량없다는 말이다. 또는 대궁전의 한량없는 미묘한 장식이 방향과 처소 사이에 줄지어 있다는 말이다.‘한량없다’는 것은 숫자가 한량없다는 것이기도 하고, 장소가 한량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마치 혜(慧)를 앞세워서 보기 좋게 장식을 늘어놓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미묘한 장식이 줄지어 있다고 설한 것이다.어떻게 불국토는 깨끗한 마음을 모양[相]으로 삼는가? 외적인 공구(工具)를 쓰는 세속의 장인(匠人)이 이룬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여여한 지혜를 앞세워서 보기 좋게 장식을 늘어놓은 것은 이른바 불세존이 옛날 보살이었을 때에 선교방편혜(善巧方便慧)를 일으켜서 이렇게 이렇게[如是如是] 가행(加行)하고 서원(誓願)하여 불국토를 장엄한 것이다. 가행과 서원의 세력을 앞세운 탓에 과위(果位) 중에서 비록 옛날과 같은 희론각혜(戲論覺慧)는 없어도 부처님의 정식(淨識)이 이와 같이 변현하였고, 또한 보살의 식(識)도 이와 같이 변현케 하였기 때문에 서로 어긋남이 없다. 나머지 곳 또한 이런 이치에 의하여 설해야 한다.이와 같이 정토는 형색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분량은 어떠한가?’
‘둥근 둘레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그 양의 둘레가 가없어서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고, 또는 거대한 궁전의 그 양은 가없어서 둘레를 헤아리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또한 동쪽 등의 분제(分齊)가 없으므로 길고 짧음 등의 모양을 측량하기가 어렵다.어떤 사람은 여래의 수용신토(受用身土)는 교화를 받을 중생의 마땅한 바를 따라서 나타나는데, 혹은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여 그 양이 일정하지 않다고 말한다. 비록 광대하게 나투신다고 해도 또한 변제(邊際)가 있지만, 그러나 지전(地前) 보살의 지(智) 등에 나아가서는 가없어서 그 양을 헤아리기가 어렵다고 말한다.어떤 사람은 여래의 수용신토는 3무수겁 동안 닦은 가없는 선근이 감응한 주변 법계라서 지상(地上) 보살과 모든 여래도 능히 그 양의 변제(한계:가장자리)를 헤아릴 수 없으며, 가없기 때문에 비롯함이 없는 때와도 같다고 말한다.참다운 뜻에서 수용신토에는 대략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자수용(自受用)이다.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3무수겁 동안 닦은 가없는 선근이 감응한 주변 법계를 자수용의 커다란 법의 즐거움으로 삼기 때문에 처음 부처를 이룬 때부터 미래세가 다하도록 서로 이어져 변함이 없음이 모든 공덕과 같고, 모든 대보살 또한 능히 볼 수 없으나 다만 들을 수는 있다. 이와 같이 정토는 한량없는 까닭에 모든 부처가 비록 보아도 또한 능히 그 양의 변제를 헤아리지 못하는 것이다.둘째는 타수용(他受用)이다. 이른바 모든 여래께서 지상(地上)의 모든 보살들이 커다란 법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도록 훌륭한 행에 나아가 닦아서 마땅함에 따라 나투시니, 혹은 빼어난 모습이거나 하천한 모습이거나 혹은 커다란 모습이거나 작은 모습으로 바꾸어 나투시며 일정하지 않은 것이 마치 변화토(變化土)와도 같다. 이와 같은 정토는 변제가 있으므로 지상 보살과 여러 여래가 모두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있다. 다만 지전(地前) 보살에 대해서는 나투시는 모습과 처소가 일정치 않아 헤아릴 수 없다고 말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 차별로 말미암기 때문에 둥근 둘레가 가없어 그 양을 헤아릴 수가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이와 같이 정토의 분량이 원만함은 삼계에 처한 것인가, 그렇지 않은 것인가? ‘삼계가 행해지는 곳을 훨씬 넘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의 처소와 방위와 구역이 삼계가 행해지는 곳을 넘어 있다는 말로서 삼계 자체 경지의 모든 갈애[愛]를 자기의 소유로 삼아서 집착하는 것과는 같지 않다. 소연(所緣)과 상응의 두 가지 속박[縛]이 점점 더 늘어나면 바로 저 삼계의 이숙과(異熟果)와 증상과(證上果)이다.이와 같이 정토는 삼계의 갈애가 집착해 받아들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 가지 속박을 여의었으며, 그래서 저 삼계의 이숙과와 증상과가 아니기 때문에 열반 등이 삼계의 이숙과지(異熟果地)를 넘어서 있는 것과 같다.만약 그렇다면 정토는 삼계에 소속되지 않으므로 곧 무루(無漏)이다. 만약 무루가 유위에 거두어지면 이는 바로 도제(道諦)로서 곧 선한 성품일 텐데, 어떻게 색과 소리와 냄새 등을 그 체성(體性)으로 삼겠는가? 18계(界)와 15유루(有漏)와 8무기(無記) 등을 다른 곳에서 설하였기 때문이다.어떤 사람은 18계는 유루와 무루에 통하며 모두가 선한 성품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2승(乘)의 경계에 의거하면 거친 모양[麤相]과 비슷해서 18계 가운데 15유루와 8무기 등이 있다고 말한다.어떤 사람은 정토는 정심(定心)이 변한 바이니, 비록 색 등은 10계(界)의 모습과 닮았지만 10계에 거두어지지 않으며, 여러 세간의 5식(識)으로 증득할 수 있는 경계가 아니라고 말한다. 변처(遍處)1) 등의 소연(所緣)인 청(靑) 등과 같이 모두 자재함으로 생겨난 색(色)인 까닭에 법계가 거두는 바이다. 그러므로 정토는 비록 색 등을 그 체성으로 삼고 있지만, 이것은 무루선(無漏善)과 또한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고 말한다.만약 그렇다면 보살의 5식은 수용토를 인식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는 말인가? 비록 그 힘에 의거하여 스스로의 식이 변이한다고 해도 모양의 거칠고 미묘함은 서로 닮지 않는다. 다섯 가지 경계가 여래의 5식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반연할 수 없는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일[事]과 마음에 반연하는 작용이 서로 비슷해서 거짓으로 5식이라고 이름하지만, 실제로는 5식이 아니니 항상 선정에 있기 때문이다. 이는 다른 곳에서 널리 설하셨다. 5식의 체는 바로 스스로의 성품이 어지럽고 흐트러져 있는 것이니 선정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만약 그렇다면 5근(根)으로부터 생겨나지 않는다는 말인가? 여래의 5근과 색ㆍ소리 등은 서로 동일한 근(根)의 경계라서 거짓으로 5근이라고 이름한다. 나아가 색 등의 경계는 정심(定心)이 변한 것으로서 실제로는 법계로서 자재하게 색을 낳는다.만약 그렇다면 4지(智)2)는 마땅히 동시(同時)가 아니다. 일시에 한 중생에게 많은 식(識)이 한 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 인정한다면 또 어떤 과실이 있는가?진정한 뜻은 이렇다. 여래의 몸과 국토는 너무나 깊고 미묘해서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며, 유루인 것도 아니고 또한 무루인 것도 아니며,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고 무기(無記)도 아니며, 온(蘊)이나 계(界)와 같은 법문에 포섭되는 바도 아니며, 다만 마땅한 바에 따라서 갖가지 다른 설이 있을 뿐이다.다른 곳에서 설한 것은 이렇다. 18계 가운데 15유루와 8무기 등이 있는데, 다만 2승과 범부 등의 경계에 나아가 거친 상(相)으로 분별했을 뿐 모든 부처나 모든 대보살의 깊고 깊은 경계에 나아가 말한 것이 아니므로 다른 곳에서는 여래는 실제로 온과 계와 처에 포섭된 것이 아니면서 모든 선(善) 등을 다 바로 나타내 보인다.……(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이와 같은 정토는 삼계와 동일한 곳에 있는가? 아니면 각각 별개의 곳에 있는가?
어떤 사람은 각각 별개라고 말하니, 어떤 곳에서는 정거천(淨居天) 위에 머문다고 말하고, 어떤 곳에서는 서방(西方) 등에 머문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같은 곳이라고 하니, 정토의 둘레는 변제가 없고 법계에 두루하기 때문이다.참다운 뜻은 이렇다. 실제의 수용토는 법계에 두루 가득하여 있지 않은 곳이 없어서 삼계의 장소를 여의었다고 말할 수도 없고 또한 삼계의 처소에 즉(卽)했다고도 말할 수 없다. 만약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서 나타난다고 한다면, 색계의 정거천 위에 있기도 하고 혹은 서방 등의 처소에 있기도 하여 일정하지 않다.이와 같이 정토의 방소(方所)가 원만하여 이미 삼계의 이숙과지(異熟果地)를 넘어서 있으니, 마치 열반 등에 응당 인(因)이 없는 것과 같다. 만약 인이란 것이 있다면 응당 삼계에 포섭될 것이다.만일 정토가 삼계를 멀리 뛰어넘는다고 말한다면 또한 삼계법인(三界法因)을 멀리 뛰어넘는 것이니, 이것이 응당 그 모양을 설한 것이라면 어떻게 ‘출세간의 선근으로 일어난 것보다 뛰어나다’고 할 수 있는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지(後得智)의 선근을 인(因)으로 하여 생기(生起)할 수 있는데, 이것은 인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자재천 등을 인으로 삼는 것은 아니다.어떻게 정토는 삼계를 멀리 뛰어넘으면서도 출세간의 무분별지와 후득지와 세간의 정법(淨法)을 이숙인(異熟因)으로 삼는가? 그것을 이숙인으로 삼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나머지 인으로 그것이 생기할 수 있는 것이니, 마치 고법지인품(苦法智忍品)의 제일법(第一法)을 인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것은 무분별지와 후득무루선법종자(後得無漏善法種子)를 사용하여 3무수겁 동안 증광(增廣)시켜 닦아서 이 정토가 변현하여 생기게 하는 원인을 삼은 것이다.무분별지(無分別智)는 출세간이라고 이름한다. 후득지는 무분별지보다 뛰어나서 승용(勝用)이라고 이름하는데, 출세간의 무루선근보다 뛰어난 것을 이 생인(生因)으로 삼는다. 혹은 모든 성문과 독각의 성도(聖道)를 출세간이라고 이름한다. 여래의 선근은 그들 이름의 뛰어남을 능가하니, 이 부처님의 정토는 여래식(如來識) 가운데 무루의 선근을 인으로 삼아서 생겨난다.어떤 사람은 이것은 다만 증상연(增上緣)이니 외법(外法)으로 생겨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한 어떤 사람은 이것은 인연으로 생겨났으니 몸소 능히 생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응당 인연이 없다. 외법은 상망(相望)하여서 인연이 아니기 때문에 모든 외법은 전부 내법(內法)의 훈습을 인으로 삼는다.만약 그렇다면 외법도 이미 함께 있는 것인데, 어떻게 유정이 각각 별개의 종자를 공통의 인연으로 삼아서 하나의 과보를 합하여 낳는다는 것인가?작은 마음으로 큰 법을 헤아리지 말아야 하니, 외부의 사물이 어찌 극미의 합성(合成)으로 실다운 체성이 있어서 많은 인에 공통으로 감응하겠는가? 단지 이것은 유정의 서로 다른 식(識)이 각기 변하면서 같은 장소에서 서로 비슷해도 서로 장애가 되지 않으니, 마치 여러 등불이 비추는 것과 같고 많은 사람이 꿈꾸는 것과 같다. 인류(因類)는 같고 과상(果相)은 비슷한데다 처소가 별개의 것이 아니라서 거짓 이름으로 공통[共]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각각 차이가 있다.모든 부처님의 정토 또한 이와 같다. 각각 별개의 식이 변하여 모두 법계에 두루한데, 동일한 처소에서 비슷한 것을 이름하여 공통이라고 한다.이와 같이 정토의 인상(因相)은 원만하다. 그렇다면 과상(果相)은 어떠한가?
‘지극히 자재한 정식(淨識)을 상(相)으로 삼는다’고 한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지극히 자재한 부처님의 무루심(無漏心)을 체상(體相)으로 삼는다는 것이니 오직 식일 뿐이기 때문이다. 식을 떠나서 달리 보물 등이 있지 않으니, 곧 부처님의 깨끗한 마음이 이와 같이 변화해 나타나서 흡사 온갖 보물들과 같은 것은 앞에서 이미 말했듯이 경계상(境界相)이기 때문이다. 마치 청(靑) 등에 들어가는 변처정(遍處定)은 식이 나타낸 상인 것과 같으니, 이는 바로 여래의 대원경지에 상응하는 정식(淨識)이다.옛날에 닦은 자리(自利)의 무루정토종자의 인연력(因緣力)을 말미암기 때문에 언제 어디서나 두루하면서 작의(作意)를 기다리지 않고 운(運)에 맡겨 변현할 수 있으며, 온갖 보배로 장엄한 수용불토(受用佛土)와 자수용신(自受用身)이 의지처가 된다.그리고 이타(利他)의 무루정토종자의 인연력 때문에 다른 지상(地上)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 정토를 변현하되, 그 정토는 크기도 하고 작기도 하고 열등하기도 하고 뛰어나기도 하면서 타수용신(他受用身)의 의지처가 되니, 이른바 초지 보살의 마땅한 바를 따라 작고 열등한 모습을 나타낸다. 이와 같이 전전하여 나아가 10지까지 이르면 지(地)와 지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훌륭하니, 처음과 가운데와 나중 등도 이와 마찬가지다.이처럼 정토의 과상(果相)은 원만하다. 그렇다면 그 주(主)는 어떠한가? 궁전은 반드시 주인이 있어서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여래께서 머무시는 곳[如來所都]’이 이른바 대궁전이다. 모든 불세존께서 주가 될 뿐 나머지는 그처럼 수승하지 않기 때문에 오직 여래께만 속할 뿐이며, 혹은 오직 세존만이 주지하고 섭수할 뿐이지 나머지는 능한 자가 없다. 자수용토는 비록 법계에 두루하여도 하나하나가 스스로 변하여 각자가 주가 되므로 서로 걸림이 없다. 타수용토는 비록 모든 부처님께서 변현한 것이지만, 그러나 일합상(一合相)3)이고 또한 일상신(一相身)4)이라서 섭수하는 것이 주가 되므로 서로 걸림이 없다.이와 같이 정토의 주가 이미 원만하면 마땅히 보필하는 자가 있나니, 주(主)는 반드시 보필하는 자를 섭수하기 때문이다.
‘모든 대보살의 무리가 구름처럼 몰려들다’라는 것은 이른바 거대한 궁전에는 언제나 한량없는 대보살의 무리가 구름처럼 모여 있다는 말이다. 이른바 궁전의 조정에 들어온 자는 반드시 보필이 되나니, 이미 무수한 대보살의 승려가 언제나 와서 보필하므로 원수의 적이 능히 해치지 못하는 것이다.그러나 모든 성문의 무리들에게는 이런 일이 없으며, 이른바 초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들도 비록 모든 부처님의 자리수용정토에 모일 수는 없지만 모든 부처님의 이타수용정토에는 능히 모일 수 있다. 모든 부처님의 자비는 스스로의 식(識) 위에서 보살들의 마땅함을 따라 거칠거나 미묘한 국토를 나타내신다. 보살은 자신의 선근과 원력을 따라 스스로의 식 위에서 흡사 부처님께서 태어나신 정토의 모습과 비슷하게 나타낸다.비록 그 스스로의 마음이 각각 개별적으로 변현하였지만 동일한 곳이고 형상도 비슷하니, 이른바 한 국토가 되어서 공통으로 그 안에 모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지상 보살의 정토는 유루이기도 하고 무루이기도 하다.어떤 사람은 무루라고 하는데, 이른바 제 마음속 후득무루정토종자(後得無漏淨土種子)의 원력이 밑천이기 때문에 정토에 변생(變生)하여 그 속에서 대승법의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초지 이상의 모든 보살의 무리가 진여의 이치를 증득함으로써 참다운 무루처에 참다운 법의 흐름을 얻고 참다운 정토에 머물며 언제나 모든 부처님을 친견한다. 그러므로 변현하는 국토는 바로 참다운 무루도제(無漏道諦)에 섭수된다.어떤 사람은 유루라고 하는데, 이른바 자기 마음속 가행유루정토종자(加行有漏淨土種子)의 원력이 밑천이기 때문에 정토에 변생하여 그 속에서 대승법의 즐거움을 받아들인다. 그 보살은 비록 진여를 증득하고 참다운 무루를 얻으나 7지(地)에 와서는 번뇌를 현기(現起)하며, 나아가 10지에 이르기까지도 가히 닦아 끊어야 할 번뇌종자와 소지장이 있으니, 제8식의 본체가 능히 그것을 지니기 때문이며 당장 받아서 훈습하기 때문이다.그런데 이것은 오히려 유루무기의 성품에 포섭되며 유위무루도제(有爲無漏道諦)에 포섭되는 바라서 결정코 선하다. 만약 10지 가운데서 제8식의 본체가 바로 무루의 선(善)이라면 응당 불지(佛地)처럼 유루종자를 집지(執持)할 수 없어야 해서 훈습을 받을 수 없어야 한다. 제8식의 체가 이미 유루무기성에 포섭되는데, 변현된 정토가 어떻게 무루선성(無漏善性)에 포섭되겠는가?나아가 하나의 유정에게는 두 개의 실다운 몸이 없으니, 그 몸이 당시 이미 유루인데 의지하는 정토가 어떻게 무루이겠는가? 그러므로 10지 보살의 정토는 바로 미묘한 유루고제(有漏苦諦)에 포섭된다.실다운 뜻이란 것은 10지 보살의 제 마음이 변현한 정토에 두 가지가 있는 것이다. 만약 제8식이 변현한 정토라면, 이것은 유루식상분(有漏識相分)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유루의 몸이 의지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비록 무루의 선한 힘이 자량하고 훈습해서 그 모양은 깨끗하고 미묘하더라도 이것은 유루고제에 포섭되는 바이며, 가행(加行) 등에 따라서 나타난 것도 마찬가지다. 만약 후득무루심(後得無漏心)에 따라서 변현한 정토의 영상이라면 곧 무루식상분(無漏識相分)에 포섭되기 때문이며, 무루의 선한 종자로부터 생하였기 때문에 그 체(體)는 바로 무루도제에 포섭된다.이와 같이 정토의 보필이 원만하면 반드시 권속이 있기 때문에 그 다음에 “한량없는 하늘과 용과 사람이거나 사람 아닌 자 등이 언제나 옆에서 모신다”고 하는 것이다. 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오직 하늘 등의 권속이 에워싸고 있지 그 밖의 다른 중생 등은 있지 않다. ‘등’이란 야차와 건달바와 아수라와 가루라와 긴나라와 마호라가 등이며, 마호라가는 곧 커다란 이무기에 속한다.그런데 어떻게 정토가 삼계의 소행처를 멀리 초월해 있으면서 하늘 등을 권속으로 삼는가? 하늘 등은 모두 삼계에 포섭되어 있기 때문이다. 정식(淨識)은 이와 같이 섭수하여 변현하면서 정토를 장엄하기 때문에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혹은 교화될 중생들을 성숙케 하기 위하여 이와 같은 변화의 종류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마치 겁비나왕(劫比拏王)을 조복시키기 위해서 한량없는 전륜성왕 무리를 권속들이 위요(圍繞)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과 같다. 혹은 모든 보살들이 한량없는 하늘이나 용 등의 몸으로 화작(化作)하여서 정토에 머물며 부처님을 공양하는 모습을 나타내거나, 혹은 스스로 몸을 변화하여[自化身] 하늘이나 용 등이 되어서 여래를 보필하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이와 같이 정토의 권속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여기에 머무르려면 어떻게 임지(任持)하여야 하는가? ‘광대한 법의 맛인 기쁨과 즐거움을 지니는 것’이란 이른바 여기에서는 대승법의 맛인 기쁨과 즐거움을 지닌 바로서 음식으로 먹으며 능히 머물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임지의 뜻이다. 앞서 정토가 삼계의 소행처를 멀리 뛰어넘는다고 말하였는데, 어떻게 음식이 있다는 말인가? 또한 무루법을 음식이라 이름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음식은 능히 3유(有)의 중생을 길이 길러내지만 이 무루법은 존재[有]를 끊는 것이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이는 임지(任持)의 인(因)이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니, 만약 그대의 일가[宗]가 색계 등에 태어나서 무루정(無漏定)에 들어간다면 이것 또한 음식이라 이름해야 하는 것과 같다. 과거의 음식은 응당 음식이라고 이름해서는 안 되나니 과거는 없기 때문이다. 이것 또한 당연히 마찬가지라서 바로 임지의 인이므로 음식이라고 말하는 것이다.가령 유루법이 비록 무루를 장애한다고 해도 유루를 가지므로 음식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니, 무루 또한 마찬가지라서 비록 유루를 끊어도 무루를 지니는데, 어떻게 음식이라고 이름하지 않겠는가?이 정토 가운데에서 모든 불보살의 후득(後得)의 무루는 대승법의 맛을 능히 말하고 능히 받아들여서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킨다. 또 정체지(正體智:根本無分別智)는 진여의 맛을 받아들여서 커다란 기쁨과 즐거움을 일으키며, 능히 몸을 임지하여 무너지거나 끊어지지 않게 함으로서 선법을 길이 길러내기 때문에 음식이라고 이름한다.이와 같이 정토는 임지가 원만한데 어떤 사업(事業)을 짓는가?
‘모든 중생의 온갖 의리(義利)를 짓는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스스로 능히 모든 유정의 온갖 의리를 짓거나, 혹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스스로 모든 의리를 짓게 하는 것이다. 현재의 이익을 의(義)라고 이름하고 미래의 이익을 이(利)라고 이름하며, 세간을 의라고 이름하고 출세간을 이라고 이름하며, 악함을 여의는 것을 의라고 이름하고 착함을 거두는 것을 이라고 이름하며, 복덕을 의라고 이름하고 지혜를 이라고 이름한다.이와 같은 차이는 비록 적정(寂定)에 있다고 하더라도 먼저 닦은 가행(加行)과 원력을 말미암아 운(運)에 맡겨서 능히 모든 유정의 온갖 의리를 짓는 것이다.이와 같이 정토의 사업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어떤 섭익(攝益:거두어들이는 이익)이 있는가? ‘모든 번뇌와 재앙과 횡액과 전(纏)과 구(垢)를 멸하였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모든 번뇌인 전과 구와 나아가 온갖 재난과 횡액을 멀리 여읜 것이다.
즉 모든 번뇌를 이름하여 전과 구라고 하는데, 이와 같은 것을 곧 온갖 재난과 횡액의 원인이라고 이름한다. 번뇌인 전과 구가 정토 안에 없기 때문에 지은 바 재난과 횡액도 이 정토 안에 없다.또한 번뇌란 이른바 백스물여덟 가지의 근본번뇌이다. 전(纏)이란 바로 참괴(慙愧) 등이 없는 것이다. 때란 바로 아첨[諂]과 속임[誑]과 교만 등이다. 재난과 횡액은 곧 그가 일으킨 업 및 얻어진 과보이다.소지장(所知障)이나 온갖 수면(隨眠)을 번뇌라고 이름하는데, 그것이 현전해 일어나면 전과 구라고 이름한다. 본혹(本惑)5)은 전이고 수혹(隨惑)6)은 구(垢)이다. 소지장 등은 재난과 횡액이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서 어떤 법을 섭익(攝益)이라고 하는가? 바로 번뇌인 재난과 횡액과 전과 구를 여의는 것을 섭익이라고 이름한다.
가령 세속의 영지의 주인[封主]이 비록 섭수하지 않더라도 다만 재난만 없으면 소작인은 또한 “주인이 나를 거두어 이익[攝益]되게 한다”고 말하는데, 이것 또한 마찬가지다.또한 번뇌와 재난과 횡액과 전과 구로부터 해탈해서 뛰어난 복과 지혜를 증득함을 나타내기 때문에 이름하여 섭익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정토는 내적인 재난과 횡액을 여의고 섭수한 이익이 원만해서 응당 외적인 두려움의 원인도 없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무외(無畏)의 원만을 나타내는 것이다.‘온갖 악마들을 멀리 여읜다’는 이른바 여기에서 모든 번뇌와 온(蘊)과 죽음과 하늘의 악마까지도 멀리 여의는 것이며, 혹은 능히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네 가지 악마를 멀리 여의게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네 가지 악마가 바로 두려움의 원인이니, 이를 말미암아 능히 온갖 두려움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여기에서는 그것들이 없으므로 곧 두려움이 없다.번뇌마(煩惱魔)는 이른바 백스물여덟 번뇌와 수번뇌(隨煩惱)이다. 온마(蘊魔)는 5취온(取蘊)이다. 사마(死魔)는 유루내법(有漏內法)으로서 온갖 덧없는 모습이다. 천마(天魔)는 욕계의 여섯 번째 하늘인 자재천자(自在天子)이다. 이 네 가지는 모두 능히 온갖 선한 법을 무너뜨리기 때문에 악마라고 한다.이러한 네 가지 악마로 말미암아 온갖 두려움이 생기지만, 여래는 영원히 네 가지 악마를 여의었으므로 두려움이 없다. 초지 이상의 대보살들은 정토에 머물면서 네 가지 악마를 여의고 다섯 가지 두려움이 없다. 이와 같이 정토는 무외가 원만해서 그 머무는 곳도 응당 훌륭하기 때문에 이어서 다시 머무는 곳의 원만함을 설명한다.‘여래께서 의지하는 곳의 장엄은 온갖 장엄보다 뛰어나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부처님께서 머무시는 곳의 훌륭함은 일체 보살이나 다른 장엄된 머무는 곳[住處]보다 더 뛰어나다는 것이다. 오직 여래만이 미묘하게 꾸며진 장엄을 머무는 곳으로 삼는다. 온갖 장엄된 머무는 곳보다 뛰어남을 말미암으니, 이 때문에 머무는 곳이 원만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정토는 머무는 곳이 원만하다. 그렇다면 어떤 길이 있어서 왕래하는가?‘큰 생각과 지혜와 행이 노니는 길[遊路]이 된다’는 것은 이른바 여기에서 큰 생각과 큰 지혜와 큰 행이 거니는 길이 되고 노닐며 밟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길에 다른 이름이 있다. 들어서 이루어진 지혜[聞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생각이라고 하나니, 듣고 난 뒤에 기억해 지녀서 뒤바뀜이 없는 뜻이기 때문이다. 생각으로 이루어진 지혜[思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지혜라고 하나니, 이치에 의지하여 살피고 생각해서 결정(決定)을 얻기 때문이다. 수행으로 이루어진 지혜[修所成慧]를 이름하여 큰 행이라고 하나니, 닦고 익히는 힘을 말미암아 진리로 나아가기 때문이다.‘크다’는 것은 생각[念] 등이 대승법을 인연하여서 생기하기 때문이며, 대승법의 과이기 때문이며, 대승법에 섭수되기 때문이다. 세 가지 미묘한 지혜7)를 밟고 정토로 가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은 보살이 세 가지 미묘한 지혜를 인연하여 정토에 들어가게 되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이름한다.만약 모든 여래의 큰 생각[大念]이 곧 무분별지이니, 생각[念]이 진여의 이치에 안주함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다. 큰 지혜는 곧 후소득지(後所得智)이니, 온갖 법의 진속(眞俗)의 모습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 정토의 증상업용(增上業用)을 짓기 때문에 함께 행이라고 이름한다. 이 두 가지 지혜를 통하여 정토에 나게 되므로 이름하여 노니는 길이라고 한다.또는 큰 생각의 행은 자기에게 이익되는 행이니, 안으로 기별을 거두기 때문이다. 큰 지혜의 행은 남을 이롭게 하는 행이니, 밖으로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차례를 통하여 여래의 두 종류의 정토에 나기 때문에 노니는 길이라고 한다.이와 같이 정토의 길이 이미 원만하다면 응당 탈것이 있어서 그 탈것에 올라타서 이 길을 지나야 한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큰 지(止)와 미묘한 관(觀)을 탈것으로 삼는다”고 말하고 있다. 지는 소위 삼마지(三摩地)이고, 관은 소위 반라야(般羅若)이다. ‘크다’는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를 함께 실어 나르므로 ‘탈것’이라고 이름한다. 지와 관에 올라타고 그 감응에 따라서 앞의 길로 나아가는데, 길이란 총제적인 지위[總位]로서 위(位) 가운데 지와 관은 개별적인 이름의 탈것이다.이와 같이 정토의 탈것이 이미 원만해졌다면 응당 들어가는 문[入門]이 있어야 하며, 그 들어가는 문을 따라서 이 탈것을 타고 들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에서 “큰 공(空)과 무상(無相)과 무원(無願)의 해탈을 들어가는 문으로 삼는다”고 말한다.이른바 거대한 궁전은 세 가지 해탈의 문을 들어가는 곳으로 삼는다. 해탈은 곧 벗어나 여의는 열반[出離涅槃]으로서 대공(大空) 등을 해탈문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문을 따라서 정토에 들어간다. 변계소집(遍計所執)으로 생겨난 법은 참다운 나[我]가 없다는 것을 설하여 공이라고 이름하는데, 이 삼마지를 연하는 것을 공해탈문(空解脫門)이라고 한다.상(相)에는 열 가지 모양이 있으니, 첫째는 색(色), 둘째는 소리, 셋째는 냄새, 넷째는 맛, 다섯째는 촉감, 여섯째는 남자, 일곱째는 여자, 여덟째는 태어남, 아홉째는 늙음, 열째는 죽음이다. 이 열반에는 이런 상이 없으므로 이름하여 무상(無相)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삼마지를 반연하므로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라고 한다.원(願)이란 구하고 원하는 것이다. 삼계는 괴롭기 때문에 구하고 원할 것이 없다고 관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무원이라고 이름한다. 이 삼마지를 반연하므로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이라고 한다.
이 공(空) 등의 세 가지 해탈문을 말미암아서 정토에 들어가게 되므로 문(門)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크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 정토 중에도 일이 있으니, 길과 탈것과 문 등은 중생들로 하여금 참다운 덕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게 하기 때문에 행에 나아가 설한다.이와 같이 정토의 문이 이미 원만해졌으면, 나머지 궁전도 의지할 바가 있어야하기 때문에 그 다음으로 다시 의지(依持)의 원만함을 설한다. ‘한량없는 공덕의 무리로 장엄되었고 커다란 보배 화왕(花王)의 무리들이 건립한 바이다’란, 이른바 대지 등이 풍륜(風輪) 등에 의지하거나 세간의 궁전이 대지에 의지한 것처럼 정토는 한량없는 덕의 무리로 장엄되었고 큰 보배인 홍련화왕의 무리로 세워졌으니, 이른바 홍련화의 큰 보배로 이루어진 것이다.이와 같은 큰 보배는 한량없는 공덕과 뭇 선(善)이 일으킨 바라서 온갖 보배 중에서도 뛰어나므로 크다고 이름하며, 이 보배 홍련은 모든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이름하여 꽃의 왕이라고 한다. 혹은 이 보배 꽃은 모든 보살의 선근이 일으킨 바라서 모든 홍련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크다고 이름하며, 부처님이 이 법왕이다. 이 부처님은 가장 뛰어난 선근이 일으킨 바라서 꽃의 왕이라고 한다.또 이 보배 꽃은 지극히 얻기 어려우므로 크다고 이름하고, 보배 꽃 중에서도 가장 뛰어나므로 꽃의 왕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꽃은 하나가 아니거나 꽃잎이 많으므로 무리라고 이름한다.
세존께서는 이 꽃의 무리 위에 세워진 커다란 궁전에 머무셔서 이 계경(契經)을 설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궁전 안에’라고 하는 것이다.만일 여래의 실제 수용신이 의지하는 정토를 대궁전이라고 이름한다면 그 양(量)은 법계와 같은데, 그 속에서 하나하나의 부처님의 수용신이 바로 근본을 설하시므로 이 경을 설한다고 이름한다.만약 여래께서 보살들의 의당함을 따라 나타내신 수용신이 의지하는 정토를 이름하여 대궁전이라고 한다면 그 양은 일정하지 않은데, 그 속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똑같이 하나의 몸을 나투시어 바로 이 경을 설하시기 때문에 이 궁전의 분량과 방소(方所)는 일정하게 말할 수 없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