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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5590 불설오무반복경(佛說五無反復經)

by Kay/케이 2025.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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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설오무반복경(佛說五無反復經)

 

불설오무반복경(佛說五無反復經)


송(宋) 저거경성(沮渠京聲) 한역
김성구 번역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에 1,250명의 비구와 함께 계셨다.
그때 어떤 바라문[梵志]이 나열기국(羅閱祇國)에서 오다가 사위국 사람들이 자비하고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기고, 경을 받들어 도를 닦으며, 공경히 삼보(三寶)를 섬긴다는 말을 들었다.
곧 사위국으로 와서 한 부자(父子)가 밭을 가는 것을 보았다. 독사가 그 아들을 물어 죽였는데, 아버지는 편안하게 밭을 갈면서 아들을 보지도 않고 울지도 않았다. 바라문이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의 아들이오?”
밭을 갈던 사람이 대답하였다.
“나의 아들입니다.”
바라문이 물었다.
“이 아이가 그대의 아들이라면 어찌 울지도 않고 편안하게 밭을 가는 겁니까?”
“사람이 나면 죽음이 있고, 물건이 생기면 무너짐이 있으며, 착한 사람에게는 좋은 과보가 있고, 악한 이에게 그에 어울리는 대가가 있는 법입니다. 근심에 빠져 즐기지도 않고, 슬프게 울면서 괴로워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대가 지금 성안에 들어가거든 나의 집이 어디어디에 있으니, 지나는 길에 말하여, 우리 아들이 죽었으니 한 사람의 끼니만 가지고 오라고 전해 주시구려.”
바라문은 생각하였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반응[返復]이 없는가. 자식이 죽어서 앞에 있는데 슬퍼하는 감정도 없이 도리어 음식만을 찾는가. 이 사람은 자비롭지 못하니 이에 견줄 사람이 없겠구나.’
바라문이 성에 들어가서 밭을 갈던 사람의 집에 가서 죽은 아이의 어미를 보고 말하였다.
“그대의 아들이 죽었소. 그런데 그 아버지가 소식을 전하라는데 한 사람의 끼니만 가지고 오라 하니, 어찌 이렇게도 자식을 생각지 않을 수 있소?”
아들의 어머니는 곧 비유로써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아이가 와서 의탁해 태어난 것이니 내가 부른 것도 아닙니다. 이제 스스로 가니 내가 머무르게 할 수도 없습니다. 비유하자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주인의 집을 잠시 다녀갔는데, 나그네가 지금 스스로 떠난다면 어떻게 말리겠습니까. 우리들 모자(母子)도 이와 같아 가고 오며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나의 힘이 아니고 그의 본래의 행에 따르는 것입니다. 만류할 수 없는 것을 근심하고 통곡한들 어찌 죽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다시 그의 누이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동생이 죽었는데 어찌 통곡하지 않는가?”
누이는 다시 바라문에게 비유로써 대답하였다.
“우리 형제는 마치 공교로운 사람이 산에 들어가서 나무를 베어 큰 뗏목[㭖]을 만들어 물에 띄웠다가 홀연히 바람을 만나 뗏목이 나부끼며 흩어지면 물을 따라 흘러가버려 앞뒤로 갈라져 서로 바라보지 못하는 것과 같습니다. 나의 동생도 그러하여 인연이 모여 한 집에 태어났지만 명의 길고 짧음에 따라 나고 죽는 일도 무상(無常)합니다. 모인 것은 헤어짐이 있으니, 나의 동생의 목숨이 다한 것은 그의 본래의 행을 따르는 것으로 만류할 수 없습니다. 슬퍼하고 통곡한들 어찌 죽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겠습니까.”
다시 그 부인에게 말하였다.
“그대의 남편이 죽었거늘 어찌하여 울지 않는 거요?”
부인은 또 바라문에게 비유로써 대답하였다.
“우리들 부부는 마치 나는 새가 저녁 때 높은 나무에 앉아서 같이 자다가 잠깐 사이에 날이 밝으면 일찍 일어나서 각각 제대로 날아가서 음식을 구하러 다니는데, 인연이 있으면 모이고 인연이 없으면 여의는 것과 같이 우리들 부부도 그러합니다. 가고 오고 움직이고 멈추는 것이 나의 힘이 아니고 본래의 행을 따르는 것으로 머물라고 말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근심하고 통곡한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다시 그의 하인[奴]에게 말하였다.
“주인이 이미 죽었는데 어찌 울지 않는가?”
하인이 대답하였다.
“나와 주인은 인연으로 모였는데, 송아지가 큰 소를 따르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이 큰 소를 죽이면 송아지는 곁에 있으면서도 큰 소의 목숨을 건지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 근심하고 슬퍼하여 통곡한들 죽은 사람에게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바라문은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아득하고 눈이 캄캄하여 동서를 분간하지 못하면서 생각하였다.
‘내가 들으니, 이 나라 사람이 효성스럽게 부모를 섬기고 삼보(三寶)를 공경한다 하기에 멀리서 와서 배우고자 하였는데, 지금 와서 보니 이로울 것이 없겠구나.’
다시 길 가는 사람에게 물었다.
“부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가서 여쭙고자 합니다.”
행인이 대답하였다.
“가까이 기원정사[祇柦精舍]에 계십니다.”
바라문은 곧 부처님께 이르러 머리를 숙여 예배하고 한쪽에 서서 머리를 숙이고 묵묵히 말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그 뜻을 아시고 바라문에게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머리를 숙이고 근심스럽게 있느냐?”
바라문이 대답하였다.
“소원을 이루지도 못하고 저의 본마음을 어긴 까닭에 즐겁지 않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물으셨다.
“무엇을 잊었기에 근심스러워하고 즐기지도 못하느냐?”
바라문이 대답하였다.
“제가 나열기국에서 올 때에는 학문을 얻고자 하였사온데 와서 보니 다섯 가지 반응[返復]이 없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다섯 가지 반응이 없다 하느냐?”
바라문이 대답하였다.
“제가 보니 부자(父子) 두 사람이 밭을 갈고 씨를 심었사온데 아들이 죽어서 땅에 누웠는데도 슬퍼하는 인정은 없고 도리어 끼니만 찾았사오며, 같은 집안의 위아래 식구들도 역시 근심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는 큰 패륜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너의 말이 옳지 못하느니라. 이 다섯 사람은 제대로 반응을 보인 것이니, 몸은 덧없고 재물은 내 것이 아닌 줄 알았느니라. 옛날부터 성인(聖人)들도 이 근심을 면하지 못하였거늘, 하물며 범부가 크게 울거나 적게 통곡한들 어찌 죽은 사람에게 이익이 되겠느냐. 세간의 속인들은 헤아릴 수 없는 겁 동안 생사에 헤매면서 정신은 옮겨져도 없어지지 않는 것이니, 죽었다가 다시 나기를 수레바퀴와 같이 쉬지 않느니라. 죽음을 등지고 생명을 향하는 것은 근심과 슬픔으로 미칠 바가 아니니라.”
바라문이 듣고 마음과 뜻이 열리어 다시는 슬픔과 근심이 없게 되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제가 부처님의 말씀을 들으니, 병든 사람이 나은 듯, 소경이 눈을 뜬 듯, 어두운 곳에서 광명을 얻은 듯하옵니다.”
이때에 바라문은 곧 도의 지위[道跡]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시었다.
“온갖 죽은 사람에 대하여 슬퍼하거나 울지 말고 죽은 사람을 위하여 부처님과 스님들을 모셔다가 향을 사르고 공양하며 경전을 외우도록 하여라. 날마다 예배하고 다시 지극한 마음으로 삼보에 귀의할지니, 이것이 가장 요긴한 일이니라.”
이때에 바라문은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 가르침을 받고 물러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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