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하권
불설대안반수의경 하권
후한 안식 안세고 한역
김달진 번역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깨닫고 날숨과 들숨을 스스로 아니, 바로 그 때가 각(覺)이 되고 그 다음이 지(知)가 된다. 각(覺)은 숨의 길고 짧음을 깨닫는 것이요, 지(知)는 숨의 생기고 소멸함과, 거칠고 미세함과, 더디고 빠름을 아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진(盡)과 지(止)를 깨닫는다는 것은, 이른바 날숨과 들숨을 깨달아 때를 맞추려고 하는 것은 진(盡)이 되고, 또한 만물과 몸이 생겨났다가 다시 멸함을 헤아리는 마음은 의지(意止)가 된다.
공(空)을 보고 관(觀)한다는 것은, 도를 행하여 관(觀)을 얻어서 다시 몸을 보지 않아 문득 공(空)과 무소유(無所有)에 떨어지는 것이니, 이른바 뜻에 집착한 바가 없는 것이다. 뜻에 집착한 바가 있으면 이로 인하여 소유(所有)가 있으니, 6입(入)을 끊으면 문득 현명(賢明)을 얻을 것이다. 현(賢)은 몸을 말하고, 명(明)은 도를 말한다.
어느 곳에서 나오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비유컨대 돌을 생각하다가 돌에서 나와 나무에 들어가면 돌은 곧 소멸하듯이 5음(陰)도 또한 그러하여, 색에서 나와 통양(痛痒)에 들어가고, 통양에서 나와 사상(思想)에 들어가며, 사상에서 나와 생사에 들어가고, 생사에서 나와 식(識)에 들어가니, 이미 이것을 분별한다면 마침내 『37품경』을 따를 것이다.
무엇이 무위도(無爲道)를 사유(思惟)함인가? 사(思)는 헤아리는 것이고, 유(惟)는 듣는 것이며,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설한 대로 행하는 것이며, 도(道)는 얻음이 되기 때문에, 무위도(無爲道)를 사유한다고 말한 것이다.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흑백(黑白)을 분별함이 되며, 흑(黑)은 생사가 되고, 백(白)은 도가 되며, 도는 소유가 없는 것이니, 이미 소유가 없음을 분별했다면 곧 소유가 없는 까닭에 무위도를 사유한다고 말하지만, 만일 소위(所爲)와 집착한 바가 있다고 계교(計校)한다면, 사유가 아니다. 사(思)는 또한 물(物)이 되고 유(惟)는 뜻을 이해함이 되니, 뜻을 이해하면 문득 12인연의 일을 알게 된다. 또한 사(思)는 염(念)이 되고, 유(惟)는 헤아림이 된다.
생사를 끊고 신족(神足)을 얻는다는 것은, 이른바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생(生)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사(死)가 되니, 신족(神足)을 얻은 이는 능히 날아다닐 수 있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끊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다.
신족을 얻음에 다섯 가지 뜻이 있으니, 첫째는 희(喜), 둘째는 신(信), 셋째는 정진,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통(通)이다. 4신족에서 염력(念力)이 다하지 않으면 5통(通)을 얻고, 염력이 다하여 자재(自在)로우면 6통으로 향하니, 도인(道人)으로서 4신족을 한다면 5통을 얻고, 뜻을 없앤다면 가히 6통을 얻을 것이다. 뜻을 없앤다는 것은, 이른바 만물을 뜻으로 원하지 않는 것이다. 첫째는 신(信), 둘째는 정진(精進), 셋째는 의(意), 넷째는 정(定), 다섯째는 지혜[黠]이니, 이 다섯 가지가 4신족이 되고, 생각이 힘이 되는 것은 여섯 가지 일이다.
신(信)을 따르는 것은 4신족념(神足念)에 속하며, 희(喜)를 따르고 정진을 따르고 정을 따르고 지혜를 따르는 것은 5근(根)에 속한다. 희정(喜定)에 따름을 도를 믿는다고 하고, 역정(力定)을 따름을 정진이라고 하며, 의정(意定)을 따름을 의념정(意念定)이라 하고, 시정(施定)을 따름을 도를 행한다고 한다. 종자가 되기 때문에 뿌리가 있으니, 함이 있는 것은 모두 악이 되므로 문득 상(想)이 생긴다.
능히 이기지 못한다고 하는 것은, 이른바 선(禪)을 얻음은 바로 인(因)이 힘이 되며, 또한 악이 능히 선한 뜻을 이기지 못함을 말한다. 소멸했다가 다시 일어나기 때문에 힘이 되니, 역정(力定)이란 악한 뜻이 오려고 해도 능히 선한 뜻을 파괴할 수 없기 때문에 역정이 되는 것이다.
도인이 도를 행하여 아직 관(觀)을 얻지 못했으면 마땅히 관을 얻기를 계교(計校)할 것이니, 있는 곳에서 뜻을 관하되 다시 굴리지 않는 것이 관을 얻음이 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좌선(坐禪)하여 두 가지 법을 관하니, 때로는 몸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뜻을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헐떡거리는 숨을 관하기도 하고, 때로는 유(有)를 관하기도 하며, 때로는 무(無)를 관하기도 하니, 인연이 있는 곳에서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고 두 가지 법을 관하면, 악은 이미 없어졌다.
멈추어 관한다는 것은, 도를 관하는 것이니, 악이 아직 다하지 않았으면 도를 보지 못하며,
악이 이미 없어져야 마침내 도를 관함을 얻는다.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춤이 악을 앎이 되니, 일체를 능히 제어하여 뜻에 집착하지 않음이 멈춤이 되며, 또한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된다. 숨을 세어 서로 따라서 멈춤이 바로 악한 한 가지 법을 멈추는 것이 되니, 악이 이미 멈추면 문득 관(觀)을 얻기 때문에 두 가지 법을 관함이 되며, 4제(諦)를 얻음이 되며, 정(淨)을 행함이 된다.
마땅히 다시 정(淨)을 지어야한다는 것은, 고(苦)를 알아 습(習)을 버리고 진(盡)을 알아 도를 행하는 것이니, 마치 해가 돋을 때에 청정함이 12문(門)에서 굴러 나옴과 같기 때문에 경(經)에서 도(道)를 좇아 해탈을 얻는다고 말했다. 어둠을 버리고 밝음을 보는 것이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으니, 비유컨대 해가 돋으면 보이는 것이 많아서 모든 어둠을 쓸어버리는 것과 같다.
어둠이 고(苦)가 되니, 어떻게 고가 됨을 아는가? 걸리는[罣礙] 바가 많기 때문에 고(苦)가 됨을 아는 것이다.
무엇이 습(習)을 버림이 되는가? 이른바 일을 짓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증득함을 다함이 되는가? 이른바 소유가 없는 것이니, 도(道)는 고(苦)를 분명하게 인식하여 습(習)을 끊고 증득함을 다하여 도를 생각하는 것이다.
증득함을 다한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다 마땅히 늙고 병들고 죽는 줄을 알아 증득하는 것이며, 만물도 모두 마땅히 없어지는 줄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증득함을 다함이 된다. 비유컨대 해가 돋아 네 가지 일을 지음과 같다. 첫째는 어둠을 파괴함이니, 지혜(慧)가 능히 어리석음[癡]을 파괴함을 말하고, 둘째는 소견이 밝음이니, 어리석음을 없애면 홀로 지혜만 있음을 말하며, 셋째는 만물의 색을 봄이니, 몸에 소유한 모든 악로(惡露)를 보는 것이요, 넷째는 만물을 성숙(成熟)함이니, 만일 해와 달이 없으면 만물이 성숙하지 못하듯이 사람도 지혜와 어리석음이 없으면 뜻이 또한 성숙하지 못한다.
위의 행을 다 행한 이는 행할 바의 일이 이미 행하여졌으므로 분별하여 설하지 않으니, 이른바 5직성(直聲)을 행하여 몸과 마음이 아울러 행을 얻은 것이다.
제(諦)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고, 제를 좇아 법을 생각하여 뜻이 생각하는 바에 붙어 있으면, 이것이 문득 생겨나 생사를 구하고, 생사를 얻어 도를 구하며, 도를 얻어 안과 밖으로 행을 따라 뜻을 일으키니, 이것이 바로 법을 생각하여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4제(諦)를 좇아 저절로 뜻이 생겨남을 안다면, 이것은 마땅히 태어나지 않고 얻을 수 없음을 얻은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곧바로 뜻을 제거하여 두려워서 감히 범하지 못하는 것이고, 행하는 바와 생각하는 바가 항상 도에 있으므로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음이 된다. 이것을 법정(法正)이라고 하니, 제(諦)의 근본을 좇아 근본을 일으켜 뜻에 붙어 있는 것이다.
법정(法正)이란 도법(道法)을 말하고, 제(諦)를 따른다는 것은 4제의 근본에서 일어남을 말하며, 뜻에 붙어 있다는 것은 향하는 바의 생사와 온갖 일이 모두 본래 뜻을 좇아 일어남을 말한다.
뜻에 붙어 있으면 곧바로 5음(陰)이 생기므로 일으킨 바의 뜻을 마땅히 끊어야 하니, 근본을 끊으면 5음도 끊어지며, 때로는 저절로 끊어져 생각하지 않는다. 뜻이 저절로 일어나면 죄가 되고, 다시 도에 있지 않으면 죄가 되니,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제(諦)의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면 외법(外法) 가운데 떨어지게 되고, 뜻으로 만물을 생각하지 않으면 도법 가운데 떨어지게 된다.
5음(陰)은 생사법이 되고, 『37품경』은 도법(道法)이 되니,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다는 것은, 이른바 5음을 제어하여 범하지 않는 것이고, 또한 항상 도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뜻이 법 가운데 붙어 있는 것이다.
본래 바른 곳이라는 것은, 밖에 있으면 물(物)의 근본이 되고 복(福)이 되며 안에 있으면 모두 『37품경』이 되니, 도를 행함은 한 때의 실마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근본으로 한 바라고 말한 것은, 이른바 『37품경』의 법을 행하여 만약 차례대로 행을 따르면, 뜻이 사(邪)에 들어가지 않음이 바름이 되기 때문에 본래 바른 곳이라고 한 것이다. 본래 바른 곳은 각자 행이 다르니, 무위(無爲)로써 근본을 대(對)하고, 구하지 않음으로써 정(正)을 대하며, 무위(無爲)를 일삼음으로써 무위를 대하고, 영원하지 않음으로써 도(道)를 대하며, 무유위(無有爲)로써 대하니, 또한 소유도 없고, 근본도 없으며, 바름도 없는 것이 무소유(無所有)가 된다. 정각(定覺)으로 몸에 이와 같은 법을 받아들인다.
도설(道說)은 이른바 법정(法定)이니, 도설이라는 것은 좇아 온 바의 인연을 설하여 도를 얻음을 말한다.
음(陰)을 보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5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들어감이 있다는 것은 5음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며, 인하여 생사음(生死陰)이 있다는 것은 정(正)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정(正)은 도가 스스로 바른 것이니 다만 스스로 마음을 바르게 할뿐이다.
사람들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숨을 세는 것을 얻고, 서로 따름을 얻고, 멈춤[止]을 얻어 문득 환희하지만, 이 네 가지는 비유컨대 나무를 비비면 연기는 날지라도 물(物)을 익힐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무엇을 얻었다고 기뻐할 것인가? 아직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안반수의에 열여덟 가지 번뇌가 있어 사람으로 하여금 도를 따르지 못하게 하니, 첫째는 애욕(愛欲), 둘째는 성냄[瞋恚], 셋째는 어리석음[愚癡], 넷째는 재미와 즐거움[戱樂], 다섯째는 아만(我慢), 여섯째는 의심, 일곱째는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不受行相], 여덟째는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 아홉째는 생각하지 않음이다.
열째는 엉뚱한 생각, 열한째는 불만스런 생각, 열두째는 과도한 정진, 열셋째는 미급한 정진, 열넷째는 놀래고 두려워함, 열다섯째는 뜻을 강제함, 열여섯째는 걱정, 열일곱째는 조급하게 서두름, 열여덟째는 뜻을 헤아리지 않고 행하는 사랑, 이것이 바로 열여덟 가지 번뇌이다. 이 열여덟 가지 인연을 호지(護持)하지 않으면 도를 얻지 못하니, 호지함으로써 문득 도를 얻는다.
받아 행하지 않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32가지 물(物)을 관(觀)하지 않고, 『37품경』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받아서 행하지 않는 모습이다.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열 번째 숨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서로 따름[相隨]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엉뚱한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들이쉴 때 내쉬는 숨을 생각하고 내쉴 때는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엉뚱한 생각이다.
불만스런 생각이라는 것은, 이른바 아직 첫 번째 선(禪)을 얻지 못하였는데 곧바로 두 번째 선을 생각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불만스런 생각이다.
뜻을 강제한다는 것은, 이른바 앉았을 때 뜻이 어지러워 숨을 얻지 못하면 마땅히 경행(經行)과 경을 읽어 어지러움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뜻을 강제하는 것이다.
정진으로 지혜를 삼아 이 여섯 가지 일 가운데서 달릴 것이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이것이 바로 여섯 가지이다.
무엇이 빠른 숨이고, 무엇이 느린 숨이며, 무엇이 기운이고, 무엇이 힘이며, 무엇이 바람인가? 제어하는 것이 뜻이 되고, 숨은 명궁(命宮)이 되고, 기운은 보고 듣는 것이 되며, 바람은 능히 말하는 것이 되니 도(道)를 좇아 굽혔다 펴지며, 힘은 능히 무거운 성냄[瞋恚]을 들어 올릴 수 있다.
반드시 수의(守意)를 좇아 도를 얻을 것이니, 무슨 연(緣)으로 수의를 얻는가? 세는 것으로부터 굴려서 숨을 얻고, 숨을 굴려서 서로 따름을 얻으며,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도 또한 그렇다.
도를 행함은 뜻을 멈추려고 하는 것이니, 마땅히 세 가지 일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먼저 몸이 본래 어디로부터 왔는가를 관하고 생각하되 다만 5음(陰)의 행으로부터 왔다면 5음을 끊어 다시 생겨나지 않게 하니, 비유컨대 잠깐 동안 맡겨놓은 듯이 할 뿐이요, 뜻으로 풀지 않고 아홉 가지 도를 생각함으로써 스스로 증지(證知)한다. 둘째는 마땅히 스스로 마음을 내관(內觀)하여 숨의 나고 듦을 따름이요, 셋째는 숨을 내쉬고 들이쉬다가 생각이 사라졌을 때 숨의 나고 듦이 조금 가벼운 것이다.
생각이 사라졌을 때, 어떻게 소유(所有)가 없다는 것을 아는가? 뜻이 정(定)하면 문득 공(空)을 알게 되니, 공을 알면 곧바로 소유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쉬는가? 쉬지 않으면 곧바로 죽기 때문이다. 몸은 다만 기(氣)가 지은 바임을 알아야 할 것이니, 기가 없어지면 공(空)이 되고, 공을 깨달으면 도(道)에 떨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도를 행하는데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함이요, 둘째는 한 마음을 생각함이요, 셋째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함이다. 다시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몸의 통양(痛痒)을 멈춤이요, 둘째는 입의 소리를 멈춤이요, 셋째는 뜻의 염행(念行)을 멈춤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서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경(經)을 의거하여 말하건대 한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가까이 생각함을 몸을 헤아린다고 이르며, 많은 생각을 한 마음이라 이르고, 생각을 여의지 않음을 생각을 여의지 않는다고 이르니, 몸소 이 네 가지를 행한다면 재빨리 숨을 얻게 된다.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즉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복(福)이요, 마침내 안온하여 어지럽지 않음이 바로 미래의 복이며, 더욱 오래되어 계속 다시 안정된 것이 바로 과거의 복이 된다.
좌선하면서 숨을 세어 뜻을 정하지 못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죄요, 마침내 안온하지 못하여 어지러운 뜻이 일어나는 것은 바로 미래의 죄며, 좌선하여 더욱 오래되었으나 마침내 안정하지 못한 것은 바로 과거의 죄가 된다.
또한 몸의 잘못과 뜻의 잘못이 있으니, 몸은 바르되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뜻의 잘못이요, 몸이 굽어서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이것은 몸의 잘못이 된다.
좌선하여 스스로 깨달아 뜻을 정(定)할 수 있으니, 뜻으로 기뻐하면 뜻을 어지럽히고, 기뻐하지 않으면 도의 뜻이 된다.
좌선하여 생각과 숨이 이미 멈추면 곧바로 관(觀)하고, 관하여 멈추면 다시 숨을 행하니, 사람이 도(道)를 행하되 마땅히 이것으로 떳떳한 법[常法]을 삼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5신(信)을 설하셨으니, 첫째는 부처님이 계시고 경이 있음을 믿음이요, 둘째는 집을 떠나 머리를 깎고 도(道)를 구함이요, 셋째는 앉아서 도를 행함이요, 넷째는 숨을 얻음이요, 다섯째는 뜻을 정(定)함이니, 생각할 바를 생각하지 않음도 공(空)이 되고 어려움[難]을 생각하지 않음도 공이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생각하는가? 숨에는 5색(色)과 탐음ㆍ진에ㆍ우치ㆍ애욕이 없으니 이것이 또한 공(空)이 되기 때문이다.
몸 가운데 뜻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은, 이른바 뜻을 몸에 두어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몸 가운데 뜻을 사람이 능히 제어하지 못하기 때문에 숨을 헤아리게 해서 지혜로써 능히 뜻을 제어하고 다시 숨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무엇이 스스로 아는 것이며, 무엇이 스스로 증득하는 것인가? 5음(陰)을 능히 분별하는 것이 바로 스스로 아는 것이고, 도를 의심하지 않는 것이 바로 스스로 증득하는 것이다.
무엇이 무위(無爲)인가? 무위에 두 가지가 있으니, 밖의 무위가 있고 안의 무위가 있다. 눈으로 색을 보지 않고, 귀로 소리를 듣지 않으며, 코로 냄새를 맡지 않고, 입으로 맛을 맛들이지 않으며, 몸으로 매끄러움을 탐내지 않고, 뜻으로 망령된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밖의 무위가 되고,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止] 관(觀)하며 돌이키고[還] 정(淨)하는 것이 바로 안의 무위가 된다.
현재 생각하는 바가 있는데 어찌 무위가 되는가? 몸과 입으로 계(戒)를 삼고 뜻으로 도행(道行)을 향한다면, 아무리 생각하는 바가 있더라도 본래
무위로 나아가게 된다.
무엇을 무(無)라고 하며, 무엇을 위(爲)라고 하는가? 무(無)는 만물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고, 위(爲)는 경을 따라 행하는 것이니, 일을 가르쳐 이름을 붙였기 때문에 무위(無爲)라고 한다.
만약 숙명(宿命)의 대(對)가 당도한다면 무엇으로 물리치는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춤과 관(觀)과 돌이킴과 정(淨)을 행하며, 『37품경』을 염하여 능히 어려움을 물리칠 수 있으니, 숙명의 대를 물리칠 수 없다면 숨을 세고 『37품경』을 행한다.
어떻게 해서 능히 물리칠 수 있는가? 도를 생각하기 때문에 악이 소멸하니, 만약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觀)하고 돌이키고 정(淨)하여 능히 악을 소멸하지 못한다면, 세간 사람들이 모두 도를 얻을 수 없겠지만, 악을 소멸하기 때문에 도를 얻는다.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며 돌이키고 정(淨)하며, 『37품경』을 행한다면, 오히려 부처도 될 것인데 하물며 죄대(罪對)이겠는가? 시방에 산처럼 쌓였을지라도 정진하여 도를 행하면 죄와 만나지 않을 것이다.
경(經)에서 무슨 까닭에 만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가? 이것을 짓기 때문이니, 숨을 세면 12품에 떨어지게 된다. 무엇이 12품인가? 숨을 셀 때는 4의지(意止)에 떨어지고, 숨이 어지럽지 않을 때는 4의념단(意念斷)에 떨어지며, 열 번째 숨을 얻으면 4신족(神足)에 떨어지게 되니, 이것이 바로 12품에 떨어지는 것이다.
무엇이 『37품경』을 생각함이 되는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며 돌이키고 정(淨)하는 행이 바로 여섯 가지 일이며, 이것이 바로 『37품경』을 생각하는 것이다. 숨을 세기를 행하는 것은 또한 『37품경』을 행하기 위함이다.
무슨 까닭에 『37품경』을 행함이 되는가? 숨을 세면 4의지(意止)에 떨어지게 된다.
무슨 까닭에 4의지가 되고, 또한 4의단(意斷)에 떨어지는가?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4의단이 되고, 또한 4신족(神足)에 떨어지며, 신(信)을 따르기 때문에 4신족이 되는 것이다.
숨을 세면
신근(信根)에 떨어지게 되니, 부처님을 믿어서 뜻으로 기뻐하는 까닭에 신근이 생기며, 또한 능근(能根)에도 떨어지니, 앉아서 근(根)을 행하는 까닭에 능근에 떨어지게 되며, 또한 식근(識根)에도 떨어지니, 제(諦)를 아는 까닭에 식근이 되며, 또한 정근(定根)에도 떨어지니, 뜻이 편안한 까닭에 정근이 되며, 또한 혜근(慧根)에도 떨어지니, 어리석은 뜻을 여의고 묶임[結]을 푸는 까닭에 혜근이 되는 것이다.
숨을 세면 또한 신력(信力)에도 떨어지니 의심하지 않는 까닭에 신력이 되며, 또한 진력(進力)에도 떨어지니 정진하는 까닭에 진력이 되며, 또한 염력(念力)에도 떨어지니 유여한 뜻이 능히 쇠하지 않는 까닭에 염력이 되며, 또한 정력(定力)에도 떨어지니 마음이 한결같은 까닭에 정력이 되며, 또한 혜력(慧力)에도 떨어지니 앞에서 말한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을 분별하는 까닭에 혜력이 되는 것이다.
숨을 세면 또한 각의(覺意)에도 떨어지니 고(苦)를 인식하는 까닭에 각의가 되며, 또한 법식각의(法識覺意)에도 떨어지니 도의 인연을 아는 까닭에 법각의(法覺意)가 되며, 또한 역각의(力覺意)에도 떨어지니 악을 버리는 까닭에 역각의가 되며, 또한 애각의(愛覺意)에도 떨어지니 도를 탐내고 좋아하는 까닭에 애각의가 되며, 또한 식각의(息覺意)에도 떨어지니 뜻을 멈추는 까닭에 식각의가 되며, 또한 정각의(定覺意)에도 떨어지니 생각하지 않는 까닭에 정각의가 되며, 또한 수각의(守覺意)에도 떨어지니 행을 여의지 않는 까닭에 수각의가 되는 것이다.
숨을 세면 또한 8행(行)에도 떨어진다. 뜻이 바른 까닭에 8행에 들어가니, 정의(定意)와 자심(慈心)과 정념(正念)과 정법(凈法)은 바른 몸이 되고 지성스러운 말과 부드러운 말과 곧은 말과 돌이키지 않는 말은 바른 입이 된다. 지혜에 뜻을 두며, 믿음에 뜻을 두며, 인욕에 뜻을 두는 것은, 바른 마음이 되니, 이른바 소리와 숨에서 기인한다. 이것이 10선(善)으로 도행(道行)에 떨어짐이 된다.
숨을 세면 또한 바른 소견에 떨어지니 자세히 관하는 까닭에 바른 소견이 되며, 또한 바른 행에 떨어지니 도를 향하는 까닭에 바른 행이 되며, 또한 바른 대치(對治)에 떨어지니
『37품경』을 행하는 까닭에 바른 대치가 되며, 또한 바른 뜻에 떨어지니 제(諦)를 생각하는 까닭에 바른 뜻이 되며, 또한 바른 정(定)에 떨어지니 뜻이 청백하여 마구니 떼를 파괴하는 까닭에 바른 정이 된다. 이것이 바로 8행이다.
무엇이 마구니 떼인가?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이 바로 마구니 떼이며, 이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마구니 떼를 파괴함이 되니, 37품으로 응당 거둬 묶어야 한다.
만약 스스로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면, 탐음을 멈추고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나머지 뜻도 멈추며,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통양을 관하면 성냄[瞋恚]을 멈추며, 스스로 뜻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뜻을 관하면 어리석음[愚癡]을 멈추며, 스스로 법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법을 관하면 도를 얻으니, 이것을 4의지(意止)라 한다.
몸을 피하는 것은 경계를 피함이 되며, 통양(痛痒)을 피하는 것은 5락(樂)을 피함이 되며, 뜻을 피하는 것은 생각을 피하고 법을 피함이 되며, 원업(願業)에 떨어지지 않는 것은 생겨남을 대치함이니, 이것을 4의념단(意念斷)이라고 한다.
고(苦)를 인식한다는 것은 본래 고이기 때문이며, 고가 된다는 것은 몸이 있기 때문이며, 고를 좇아 인연이 일어난다는 것은 보는 바의 만물이 고(苦)이기 때문이다. 습(習)이라는 것은, 본래 고(苦)가 되기 때문에 고를 좇아 인연이 생기게 된다. 진(盡)이라는 것은, 만물이 모두 파괴되어 고(苦)와 습(習)을 늘리기 때문에 다시 8도(道) 가운데 떨어지는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 8도를 생각해야 하니, 이것을 4위(爲)와 4수고(收苦)라고 하며, 4신족념(神足念)을 얻는다.
부처님을 믿어 뜻으로 기뻐하는 것을 신근(信根)이라고 하니 스스로 지키고 행하는 법이 되며, 제(諦)를 좇아 몸과 뜻으로 받아들이는 것을 능근(能根)이라고 하니 정진이 되며, 제(諦)를 좇아 생각하여 제를 이루는 것을 제근(諦根)이라고 하니 수의(守意)가 되며, 제를 좇아 뜻을 한결같이 하고 제를 좇아 한 뜻에 멈추는 것을 정근(定根)이라고 하니 정의(正意)가 되며, 제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혜근(慧根)이라고 하니 도의(道意)가 된다. 이것이 바로 5근(根)이다.
제(諦)를 좇아 믿어 다시 의심하지 않는 것을 신력(信力)이라고 하니 탐(貪)을 버리고 도를 행하며, 제를 좇아 스스로 정진하여 나쁜 뜻이 능히 정진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진력(進力)이라고 하니 나쁜 뜻이 일어나려고 하다가 즉시 없어지며, 제를 좇아 뜻을 옳게 하여 그 뜻을 능히 파괴할 수 없는 것을 염력(念力)이라고 하니 안과 밖을 관(觀)하며, 제를 좇아 정(定)하여 나쁜 뜻이 능히 좋은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정력(定力)이라고 하니 4선(禪)을 생각하며, 제를 좇아 지혜를 얻어 나쁜 뜻이 능히 지혜의 뜻을 파괴하지 못하는 것을 혜력(慧力)이라고 하니 나고 들며 없어졌다가 다시 생겨남을 생각한다. 이것을 5력(力)이라 한다.
제(諦)를 좇아 제를 염하는 것을 각의(覺意)라고 하니 도의 뜻을 얻으며, 제를 좇아 제를 관하는 것을 법식각의(法識覺意)라고 하니 생사의 뜻을 얻으며, 제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역각의(力覺意)라고 하니 도를 지녀 잃지 않아서 힘이 되며, 제를 좇아 희제(喜諦)를 구족하는 것을 애각의(愛覺意)라고 하니 도법(道法)을 탐내어 도행(道行)과 도법을 행하며, 제를 좇아 뜻이 쉼을 얻는 것을 식각의(息覺意)라고 하니 이미 쉬어 안온하며, 제를 좇아 생각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정각의(定覺意)라고 하니 스스로 뜻을 알아서 안정하며, 제를 좇아 뜻을 자재하고 행하는 바를 좇아 관하는 것을 이 수의각(守意覺)이라고 한다. 이렇게 4제를 좇아 뜻을 관하는 것을 7각의(覺意)라고 한다.
제(諦)를 좇아 제를 지키는 것을 바른 신도(信道)라고 하며, 제를 좇아 바르게 제를 행하는 것을 이 바른 염도(念道)라고 하며, 제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을 바른 치법(治法)이라고 하니, 네 가지 악에 이른바 4전도(顚倒)에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이며, 제를 좇아 제를 생각하는 것을 바른 뜻이라 하고,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다고 하며, 제를 좇아 마음과 뜻을 한결같이 하는 것을 바른 정(定)이라고 한다.
한 마음으로 우두머리를 삼아 세 가지 법의(法意)의 행을 지을 것이니, 소리와 몸과 마음의 행을 갖춘다면 이와 같은 것이 불제자(佛弟子)의 8행이다. 이를 4선(禪)이라 하며, 4의단(意斷)이 되는 것이다.
첫 번째 행은 바른 생각이니 마음에 속하여 항상 도를 생각하는 것이요, 두 번째
행은 바른 말이니 입에 속하여 4의(意)를 끊음이요, 세 번째 행은 바른 관(觀)이니 몸에 속하여 몸의 안팎을 관함이요, 네 번째 행은 바른 소견이니 도를 믿음이요, 다섯 번째 행은 바른 행이니 네 가지 악인 이른바 4전도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섯 번째 행은 바른 대치(對治)이니 나머지 뜻을 끊음이요, 일곱 번째 행은 바른 뜻이니 탐욕에 떨어지지 않음이요, 여덟 번째 행은 바른 정(定)이니 마음을 바르게 함이다. 이것이 여덟 가지 행이니, 벽지불과 아라한은 행하지 않는 바이다.
첫 번째 행인 바른 생각이란 무엇이 바른 생각이 되는가? 이른바 만물을 생각하지 않아서 뜻이 그 가운데 떨어지지 않음이 바로 바른 생각이요, 만물을 생각하여 뜻이 그 가운데 떨어진다면 이것은 바른 생각이 아니다.
4의지(意止)란, 첫 번째 의지는 몸과 생각을 쉬는 것이요, 두 번째 의지는 통양(痛痒)을 생각하는 것이요, 세 번째 의지는 숨의 나고 듦을 생각하는 것이요, 네 번째 의지는 법의 인연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바로 4의지가 된다. 도인은 마땅히 이 4의지를 생각할 것이니, 첫째는 내가 전생에 몸을 사랑했던 까닭에 해탈을 얻지 못하였으며, 둘째는 지금 극심한 원수가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삶에 애착하는 것이니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바깥 몸을 관하여 멈춰야 한다.
4의지(意止)에서 뜻을 멈춘다는 것은, 뜻을 몸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며, 뜻을 뜻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뜻을 법에 두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지만, 뜻이 색(色)과 식(識)을 따라서 곧바로 생겨나면 이것은 멈추지 않음이 된다.
사람이 어떻게 4의지에 떨어지지 않는가?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4의지에 떨어지지 않는다. 만일 사람이 뜻으로 늘 고와 공과 비신과 부정을 생각하여 도를 행한다면, 늘 이 네 가지를 생각하여 여의지 않으므로, 문득 빠르게 4의지를 얻는다.
무엇이 몸의 의지(意止)가 되는가? 이른바 늙고 병들고 죽음을 생각함이니, 이것이
몸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통양(痛痒)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옳지 못한 뜻이니, 이것이 통양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뜻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이미 생각하고 다시 생각함이니, 이것이 뜻의 의지가 된다.
무엇이 법의 의지가 되는가? 이른바 갈 때는 행(行)이 되고 돌아올 때는 법이 되며, 또한 이것을 지어 이것을 얻음을 말하니, 이것이 법의 의지가 된다.
4의지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무상(無常)을 생각하는 의지요, 둘째는 고(苦)와 몸[身]을 생각하는 의지요, 셋째는 공(空)과 유(有)를 생각하는 의지요, 넷째는 부정(不淨)과 낙(樂)을 생각하는 의지이니, 이것이 4의지가 된다.
일체 천하의 일은 모두 몸의 통양(痛痒)에 떨어지고 법에 떨어지니, 모두 합쳐도 이 네 가지 일에 불과하다.
4의지란, 첫째는 다만 숨을 생각하여 뜻을 삿되게 하지 않음이요, 둘째는 다만 선을 생각하고 악을 생각하지 않음이요, 셋째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몸도 아소(我所)가 아니며, 만물도 모두 아소가 아니다’라고 하여 다시는 향하지 않음이요, 넷째는 눈으로 색(色)을 보지 않아서 뜻을 법 가운데 둠이니, 이것을 4의지라 한다.
도인은 마땅히 4의지를 행할 것이니, 첫째는 눈으로 마땅히 몸 가운데 악로(惡露)를 헤아릴 것이요, 둘째는 뜻으로 기뻐하여 즐거움을 생각함에 마땅히 통양(痛痒)의 고(苦)를 생각할 것이요, 셋째는 나의 뜻이 성나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성내고 나의 뜻이 구르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구르므로 다시는 뜻을 굴리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나의 뜻이 질투하면 다른 사람의 뜻도 또한 질투하고 내가 다른 사람의 악을 생각하면 다른 사람도 또한 나의 악을 생각함으로 다시는 생각하지 않으니, 이것이 법이 된다.
몸의 의지(意止)라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는 것이다. 무엇이 몸이 되는가? 통양(痛痒)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통양은 수(數)가 있지 않으며, 뜻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과거의 뜻과 미래의 뜻이 있으므로 또한 몸이 아니며, 법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과거와 미래의 법이 있으므로 또 한 몸이 아니며, 행이 바로 몸이라고 말하려 하면 행은 형용이 없으므로
몸이 아닌 줄을 아니, 이렇게 헤아려야 4의지가 된다.
뜻이 색(色)에 떨어지지 않으면 염식(念識)도 또한 생겨나지 않으며, 귀ㆍ코ㆍ입ㆍ몸도 또한 그러하다. 뜻을 몸에 두지 않으면 멈춤[止]이 되고, 뜻을 통양(痛痒)에 두지 않으며 뜻을 생각에 두지 않으며 뜻을 법에 두지 않으면 멈춤이 된다.
누가 몸과 뜻과 통양을 주장하여 아는가? 몸이 있어서 몸의 뜻이 알고, 통양이 있어서 통양의 뜻이 알고, 뜻의 뜻이 있어서 뜻의 뜻이 알고, 굶주림이 있어서 굶주림의 뜻이 알고, 목마름이 있어서 목마름의 뜻이 알고, 추움이 있어서 추움의 뜻이 알고, 더움이 있어서 더움의 뜻이 아니, 이것으로써 분별하여 안다.
몸의 뜻이 몸의 뜻을 일으키고, 통양의 뜻이 통양의 뜻을 일으키고, 뜻의 뜻이 뜻의 뜻을 일으키고, 법의 뜻이 법의 뜻을 일으키므로, 4의지는 이른바 뜻으로 악을 생각함을 제어하여 일으키지 않도록 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止]이다.
4의지는 또한 4선(禪)을 따르며 4의지를 따르니, 4의지를 따르면 도에 가까워져 악을 짓지 않고 곧바로 선한 뜻이 생긴다. 4선(禪)은 4의정(意定)도 되고, 4의지도 된다.
도를 행하는 데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몸을 멈춤이요, 둘째는 통양을 멈춤이요, 셋째는 뜻을 멈춤이요, 넷째는 법을 멈춤이다. 몸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색(色)을 보고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통양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 잘난 체 하지 않는 것이요, 뜻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멈춰서 성내서 않는 것이요, 법을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의심하지 않는 것이다. 도인은 4의지를 행하여서 뜻이 일어나고 생각이 생겨나면 즉시 대(對)를 인식하고 약을 쓸 것이니, 한 의지(意止)만 얻으면 곧바로 네 의지를 얻게 된다.
4의정(意定)이란, 첫째는 스스로 몸을 관(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둘째는 스스로 통양(痛痒)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통양도 관하며, 셋째는 스스로 마음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마음도 관하며, 넷째는 스스로 법의 인연을 관하고 또한 다시 다른 사람의 법의 인연도 관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의 몸에서 안팎의 인연과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일을 관하여 마땅히 나의 몸도 또한
이루어지고 어그러지는 줄 생각해야 하니, 이것이 바로 4의정이 된다.
사람이 4의(意)를 멈추고자 하면, 버리는 것으로 밖을 삼고, 거두는 것으로 안을 삼으며, 이미 거두어들인 뜻으로 밖을 삼고 버리는 것으로 안을 삼기도 한다.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스스로 몸을 관하여 뜻을 여의지 않고 곧바로 다른 사람 몸의 괴로움을 관하여, 다른 사람의 몸이 통양이 아님을 관하는 것이니, 뜻과 법도 또한 그러하다. 스스로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며 다른 사람의 몸을 생각하고 곧바로 스스로 몸을 관하니, 이것이 4의지(意止)가 된다.
뜻으로 행하는 것을 보아서 어떻게 멈추는가? 뜻으로 자기가 몸을 탐하는 것을 관(觀)한다면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도록 하니, 뜻을 탐하는 것으로부터 굴렸기 때문에 응당 멈추며, 만약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탐한다면 마땅히 돌이켜 자기의 몸을 관한다.
때로는 자신을 관하고 다른 사람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자신의 몸은 관하지 않으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며, 때로는 자기의 몸도 관하지 않고 또한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하지 않으니, 자기의 몸을 관하는 이는 계교하여 다른 사람의 몸도 관해야 한다.
뜻이 멈추지 않으면 모름지기 자기 몸에 비추어 생각하다가 곧바로 다른 사람의 몸으로 굴려서 비추어 다른 사람 몸의 살찐 몸뚱이와 하얀 살갗과 검은 눈썹과 빨간 입술을 관할 것이니, 살찐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불룩함을 생각하고, 하얀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뼈다귀를 생각하고, 눈썹의 검은 것을 보고는 마땅히 죽은 사람의 아주 검음을 생각하고, 붉은 입술을 보고는 마땅히 붉은 피를 생각해야 한다. 몸에 있는 모든 것을 계교하여 이런 뜻을 얻어 곧바로 굴린다면, 다시는 몸을 애착하지 않을 것이다.
관(觀)에 안과 밖이 있으니, 질투(嫉妬)ㆍ성냄[瞋恚]ㆍ어리석음[愚癡]은 안을 관하는 것에 해당되고, 탐음(貪婬)은 밖을 관하는 것에 해당한다. 탐(貪)한다면 마땅히 무상하여 어그러짐을 생각하고, 음(婬)하다면 마땅히 소유한 악로(惡露)를 생각할 것이니, 만약 자기의 몸을 관하여 음(婬)하다면 마땅히 4의단(意斷)을 생각해야 한다.
관(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을 관함이요, 둘째는 안을 관함이다. 몸을 관하는 데 36가지가 있으니, 일체
대(對)가 있는 것은 모두 밖을 관함에 속하고, 소유가 없는 것은 도가 됨으로 이것은 안을 관함이 된다.
관(觀)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의 검고 파랗고 빨갛고 하얀 네 가지 빛깔을 관함이요, 둘째는 생사를 관함이요, 셋째는 9도(道)를 관함이다. 하얀 것을 관하여 검은 것으로 본다면 부정(不淨)이 되니, 마땅히 전례를 들어서 다음을 배운다면 도를 얻을 것이요, 아직 도를 얻지 못하여 듣기를 힘쓴다면 각별히 지혜를 증득할 것이다.
관(觀)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몸을 관하는 것이요, 둘째는 뜻을 관하는 것이요, 셋째는 행을 관하는 것이요, 넷째는 도를 관하는 것이 바로 네 가지 관이 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물건을 지키다가 도적이 온다면 곧바로 물건을 놓아버리고 도적을 보듯이, 이미 관을 얻었다면 곧바로 몸을 놓아버리고 물(物)을 관하는 것이다.
관(觀)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밖의 모든 소유한 색을 관함이요, 둘째는 안의 무소유를 관함이다. 공(空)을 관하여 이미 4선(禪)을 얻었다면 공하여 소유가 없음을 관하니, 뜻이 있거나 뜻이 없거나 간에 소유가 없는 것이 바로 공이 되며, 또한 네 가지를 버려서 4선(禪)을 얻는다고 한다.
세간의 일을 끊으려면 마땅히 4의지(意止)를 행하고, 4의지를 제거하려면 마땅히 4의단(意斷)을 행할 것이니, 사람이 탐욕에 떨어져 탐욕을 행하기 때문이다. 4신족(神足)을 행하여 날아다니되, 다만 5근(根)만 있고 5력(力)이 없으면 능히 제어하지 못하며, 다만 5력만 있고 5근이 없으면 능히 4신족을 얻지 못한다. 오히려 5력을 굴리면 능히 상차(上次)의 12품 4의단(意斷)을 제어할 수 있으니, 현재의 죄를 짓지 않고 다만 옛 죄를 마치는 것이 바로 4의단이 된다.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4의지(意止)가 되며,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그치는 것이 4의단(意斷)이 되며, 옛 것을 마치고 새 것을 끊는 것이 4신족(神足)이 된다. 족함을 알아서 다시 구하지 않는 것이 수의(守意)이니, 수의는 마침이 되고, 생겨남은 새 것이 되며, 늙음은 옛것이 되며, 죽는 것은 신체가 되고, 파괴되는 것은 다함[盡]이 된다.
4의단(意斷)이란, 늘 도를 생각하여 선한 생각이 생겨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끊어지는 까닭에 악도(惡道)를 끊게 되고, 선한 생각이 그치면 곧바로 악한 생각이 생겨나는 까닭에 악을 끊지 못하게 된다.
4의단(意斷)이라는 것은, 뜻이 스스로 악으로 향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바로 단(斷)이 되고, 또한 죄를 생각하지 않음을 단(斷)이라고 한다.
4신족(神足)이란, 첫째는 몸의 신족, 둘째는 입의 신족, 셋째는 뜻의 신족, 넷째는 도의 신족이니, 날음[飛]을 생각하여 소멸하려 하지 않음을 생각한다면, 도를 따르지 못한다.
4이제발(伊提鉢)이란, 4는 숫자가 되고 이제는 멈춤[止]이 되고 발은 신족이 되며, 날려고 하면 문득 날고 때로는 정진하여 7일 동안 앉는다면, 문득 얻으니 혹은 7개월 혹은 7년이 되기도 한다.
4신족을 얻으면 세간에 오래 있을 수 있어서 죽지 않는 약이 있으니, 첫째는 뜻이 구르지 않음이요, 둘째는 믿음이요, 셋째는 생각함이요, 넷째는 제(諦)가 있음이요, 다섯째는 지혜가 있음이니, 이것이 신족의 약이 된다.
4신족을 얻어 세간에 오랫동안 있지 않는 것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그 몸의 나쁜 냄새를 싫어하기 때문에 가며, 둘째는 사람이 능히 경도(經道)를 받음을 좇는 이가 없기 때문에 가며, 셋째는 나쁜 사람이 비방하여 죄를 얻을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신족에 아홉 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수레와 말을 타거나 그냥 걷거나 빠르게 달리는 것도 또한 신족이요, 밖으로 계(戒)가 견고함도 또한 신족이요, 지성스러움도 또한 신족이요, 인욕함도 또한 신족이니, 신족을 행함은 마땅히 날아다닌다는 뜻이다.
무엇이 날아다닌다는 뜻인가?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믿음이요, 둘째는 정진이요, 셋째는 정(定)이요, 넷째는 구르지 않는 뜻이다.
무엇이 믿음의 비행(飛行)이며, 무엇이 정진의 비행이며, 무엇이 정의 비행이며, 무엇이 구르지 않는 뜻의 비행인가? 이른바 날아다니는 것에 집착하여 뜻을 굴리지 않는 것이다. 몸은 도를 행하려고 하지 않을 지라도 뜻이 행하려고 한다면 문득 행하여지니, 신족이란 이와 같이 뜻으로 날고자 하면 즉시 날 수 있다.
5근(根)이란, 비유컨대 물(物)을 심은 것이 견고해야 마침내 뿌리가 나며, 견고하지 않으면 뿌리가 있지 않은 것과 같으니,
신(信)은 빗물이 되고, 구르지 않는 뜻은 힘이 되고, 보는 바의 만물은 뿌리가 되며, 뜻을 제어함도 힘이 된다.
신근(信根) 가운데 3음(陰)이 있으니, 첫째는 통양(痛痒)이요, 둘째는 사상(思想)이요, 셋째는 식음(識陰)이며, 정근(定根) 가운데도 1음이 있으니, 식음(識陰)을 말한다.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에는 1음(陰)이 있기도 하고 2음이 있기도 하며 3음이 있기도 하고 4음이 있기도 하여 모두 음이 있다.
이 도행(道行)은 무슨 연(緣)으로 음이 있는가? 니원(泥洹)은 음이 없지만 나머지는 모두 음이 있으니, 7각의도 위의 셋은 입에 속하고 가운데 셋은 몸에 속하고 아래의 하나는 뜻에 속한다.
무엇이 각(覺)인가? 생각 생각이 각이 되고, 생각 생각이 얻음[得]이 되니, 이 뜻을 깨달아 얻으면 곧바로 도를 따르게 된다. 밖의 7각의는 생사에 떨어지고, 안의 7각의는 도를 따르게 되니, 안의 7각의는 『37품경』을 말하고, 밖의 7각의는 만물을 말한다. 각(覺)이라는 것은, 일을 인식하여 문득 각의(覺意)를 따르는 것이다. 어떤 각의는 도각(道覺)을 따르고, 어떤 각의는 죄각(罪覺)에 떨어지니, 『37품경』은 곧 바른 뜻이므로 이것은 도각을 따름이 되고, 악한 뜻은 죄각에 떨어지게 된다.
무엇이 제(諦)를 좇아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인가? 이른바 몸은 7계(戒)를 지니고, 뜻은 3계를 지니니, 이것이 몸과 뜻을 지니는 것이다. 제(諦)의 뜻을 좇아 휴식(休息)을 얻고, 4제(諦)의 뜻을 좇아 인연이 쉬니, 쉰다는 것[休]은 멈추는 것이요, 쉰다는 것[息]은 생각하는 것이며, 도를 얻음은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도법을 탐내고 좋아하여 마땅히 도를 행하는 것은 애각의(愛覺意)가 되고, 도를 지녀 잃어버리지 않음은 역각의(力覺意)가 되고, 이미 열 번째 숨을 얻어 몸이 안온한 것은 식각의(息覺意)가 되고, 이미 편안함을 저절로 아는 것은 정각의(定覺意)가 된다.
몸과 뜻을 지녀 뜻이 달아나지 않음이 지님[持]이 되니, 제(諦)를 좇아 자재하여 뜻이
행할 바에 있으면 이른바 4제(諦)를 얻은 것이며, 또한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생각할 수 있으니, 이것이 자재한 뜻이 행하는 데 있어 제를 좇음이 된다.
관(觀)은 『37품경』의 요체(要體)를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수의(守意)가 되고, 각(覺)은 이른바 제(諦)를 깨달아 다시는 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다.
8행(行)에 안과 밖이 있으니, 몸은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이 되고, 소리는 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가 되고, 뜻은 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가 되니, 이것은 앞머리의 3법(法)으로 열 가지 일이 되며 밖에 있는 것이고, 5직(直)은 안에 있다.
제(諦)를 좇아 제(諦)가 따름을 지키는 것은 신(神)이 되고, 지키는 것은 호(護)가 되니, 이른바 법(法)이 죄를 범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제(諦)는 도(道)가 된다.
무상(無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과 부정(不淨)을 아는 것은 바른 소견이 된다.
무상을 사람이 상(常)으로 계교하며, 고를 생각하여 낙(樂)으로 삼고, 공을 헤아려 유(有)로 삼으며, 비신으로써 몸을 짓고, 부정을 계교하여 정(淨)으로 삼는 것은 바로 바르지 못한 소견이 된다.
무엇이 바른 소견인가? 본래의 인연을 믿으며, 숙명(宿命)을 좇아 있음을 아는 것이, 바로 바른 소견이다.
무엇이 바른 대치(對治)인가? 분별하고 사유하여 능히 선한 뜻을 이루는 것이, 바로 바른 대치가 된다.
무엇이 바른 말인가? 선한 말을 지키고 법을 범하지 않아서 응하는 대로 말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바른 말이다.
무엇이 바른 업(業)인가? 몸소 행에 응하여 행을 범하지 않는 것을 바른 업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치행(治行)인가? 도를 얻은 이를 따라 계행(戒行)을 가르치는 것을 바른 치행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정진인가? 행하고 행하되 한다고 하는 생각이 없으며, 밤낮을 가리지 않아 중단하지 않고, 방편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진의 방편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생각인가? 늘 경(經)과 계(戒)를 향하는 것을 바른 생각이라고 한다.
무엇이 바른 정(定)인가? 뜻이 미혹되지 않고 또한 행을 버리지 않는 것을 바른 정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행으로 현자(賢者)로 하여금
8업행(業行)을 구족하게 하니, 이미 구족하였다면 곧바로 도를 행한다.
여덟 가지 바름[直]은 대치(對治)가 있고 행(行)이 있으니, 여덟 가지 바름을 행하여 마침내 뛰어난 요체(要體)를 얻어서 몸이 계(戒)를 범하지 않음이 바로 바른 대치가 된다. 혜(慧)와 신(信)과 인욕(忍辱)은 행하는 몸이 된다. 뜻을 지님을 바른 대치라고 하니, 이른바 생각하는 바가 없음이 바름[直]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음이 바르지 않음[不直]이 된다.
12부경(部經)은 모두 다 『37품경』을 따르니, 비유컨대 온갖 냇물과 사방의 흐름이 모두 큰 바다로 돌아가는 것과 같다. 『37품경』은 바깥이 되고, 사유(思惟)는 안이 되니, 사유하여 도(道)를 낳기 때문에 안이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행하여 『37품경』을 분별하는 것이 바로 부처님께 예배함이 된다. 『37품경』은 세간을 따르기도 하고 또한 도를 따르기도 하니, 경을 외워 입으로 설하는 것은 세간을 위함이요, 뜻으로 생각하는 것은 도에 응함이며, 계를 지니는 것은 몸을 제어하기 위함이요, 선(禪)은 뜻을 흩어버리기 위함이다.
행(行)은 원(願)을 따르고, 원은 또한 행을 따르니, 도를 행하여 향하는 곳을 뜻이 여의지 않아서, 뜻이 부처님께 이르러 뜻을 돌이키지 않는다. 차례를 따라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고, 또한 차례를 따르지 않고 행하여 도를 얻기도 하니, 이른바 4의지(意止)와 4의단(意斷)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하는 것이 차례를 따르는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고 몸이 편한 것을 싫어하여 한 생각으로 이것을 좇아 도를 얻는 것은 차례를 따르지 않는 것이다.
도인이 능히 37품의 행의 뜻을 얻을 수 있다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름과 멈춤[止]을 순종(順從)하지 않아도 되니, 몸과 입에 일곱 가지가 있고 마음과 뜻과 식(識)에 각각 열 가지씩 있기 때문에 37품이 된다.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은 밖에 속하고, 5근과 5력은 안에 속하며, 7각의와 8행은 도를 얻은 것이다.
니원법에 40가지가 있으니, 이른바 『37품경』과 아울러 3향(向)을 말한다. 이 40가지가 모두 니원법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니원법인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는 것은 코끝에 뜻을 멈추는 것이니, 집착한 곳이 있으므로 니원법이 되지 않는다.
니원법은 유(有)가 되는가? 니원법은 무유(無有)가 되니, 다만 고(苦)를 멸하며, 일명 뜻이 다했다고도 한다.
니원법은 소멸함이 되는가? 다만 선과 악이 소멸할 뿐이다.
행을 아는 이는 때로는 4의지(意止)를 행할 수 있고, 때로는 4의단(意斷)을 행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4신족(神足)을 행할 수도 있고, 때로는 5근(根)과 5력(力)과 7각의(覺意)와 8행(行)을 행할 수도 있다. 제(諦)라는 것은 어지러움을 정(定)할 줄 아는 것이니, 정하면 행을 알고, 어지러우면 행을 알지 못한다.
무슨 까닭에 5근과 5력과 7각의와 8행이 있는가? 사람에게 5근이 있으므로 도에도 5근이 있고, 사람에게 5력이 있으므로 도에도 5력이 있으며, 사람에게 7사(使)가 있으므로 도에 7각의가 있고, 행에 8직(直)이 있으므로 도의 여덟 가지에 응하니, 병에 따라 약을 설한 것이며, 인연이 서로 응한 것이다.
눈은 색(色)을 받아들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입은 맛보려하고, 몸은 매끄러움을 탐하니, 이것이 바로 5근(根)이 되는데, 무슨 까닭에 근이라고 하는가? 이미 받아들였다면 마땅히 다시 낳는 까닭에 근이라고 한다.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을 받아들이지 않음이 바로 역(力)이 되고, 7사(使)에 떨어지지 않음이 각의(覺意)가 되고, 8직(直)은 도행(道行)에 응함이 된다. 5근(根)은 견고한 뜻이 되고, 5력(力)은 구르지 않는 뜻이 되며, 7각의(覺意)는 뜻을 멈춤이 되고, 8행은 바른 뜻이 된다.
무엇이 선한 뜻이 되고, 무엇이 도의 뜻이 되는가? 4의지와 4의단과 4신족과 5근과 5력은 선한 뜻이 되고, 7각의와 8행은 도의 뜻이 된다. 도의 선함도 있고 세간의 선함도 있으니, 4의지로부터 5근과 5력까지는 바로 도의 선함이 되고, 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탐(貪)ㆍ진(瞋)ㆍ치(癡)를 하지 않는 것은 세간의 선함이 된다.
자세히 본다는 것은, 만물이 모두 마땅히 소멸함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자세히 보는 것이며, 만물은
무너져 어그러지고 몸도 마땅히 죽음을 걱정하지 않는 것은 자세히 관(觀)함이 된다.
뜻이 날뛰거나 달아나면 곧바로 꾸짖어 대치(對治)하여 제어하는 것은 죄를 제거함이 되며, 모든 몰려드는 악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은 선(禪)이 된다.
안에 있는 열두 가지 일은, 첫째는 마음, 둘째로부터 여섯째까지는 지혜, 일곱째는 셈[數], 여덟째는 서로 따름[相隨], 아홉째는 멈춤[止], 열째는 관(觀), 열한째는 돌이킴[還], 열두째는 정(淨)이니, 이것이 안의 열두 가지가 된다.
밖에 다시 열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눈, 둘째는 색(色), 셋째는 귀, 넷째는 소리, 다섯째는 코, 여섯째는 냄새, 일곱째는 입, 여덟째는 맛, 아홉째는 몸, 열째는 매끄러움, 열한째는 뜻, 열두째는 욕심을 받아들임이니, 이것이 밖의 열두 가지가 된다.
술사(術闍)라는 것은 지(智)가 되니, 대체로 세 가지 지(智)가 있다. 첫째는 수없는 전세(前世) 적 부모와 형제와 처자를 아는 것이요, 둘째는 수없는 전세의 흑백(黑白)과 장단(長短)을 알고 또한 다른 사람이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는 것이요, 셋째는 독(毒)이 이미 끊어진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이다.
사라태타(沙羅惰怠)는 6통(通)의 지(智)가 되니, 첫째는 신족(神足)이요, 둘째는 환히 들음이요, 셋째는 다른 사람의 뜻을 앎이요, 넷째는 본래 온 곳을 아는 것이요, 다섯째는 어느 곳에 왕생(往生)할 것인지를 아는 것이요, 여섯째는 본래 누(漏)가 다한 줄을 아는 것이 바로 여섯 가지가 된다.”
이 경의 첫머리에 나오는 서문과 경문(經文)을 살펴보면, 이 책에 착오가 있는 듯한데, 경(經)과 주석[注]이 구분이 되지 않고 이어져서 쓰여 있다. 불법의 의미에는 마디가 있어 이것을 해석하는데, 때때로 구분되지 않는 곳이 많이 있다. 그래도 함부로 마디 짓지 않았으니, 뒤에 있을 현자(賢者)에게 맡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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