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
강승회(康僧會)1) 서문[序]
안반(安般)2)이라는 것은 여러 부처님들의 큰 가르침[大乘]으로, 세속에서 표류하는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다. 안반의 선법에는 여섯 가지가 있는데, 이것으로 6정[六情]을 다스린다. 정(情)에는 안[內]과 바깥[外]이 있는데, 눈[眼]⋅귀[耳]⋅코[鼻]⋅혀[舌]⋅몸[身]⋅마음[心]은 안이고, 색(色)⋅성(聲)⋅향(香)⋅미(味)⋅촉감[細滑]⋅사념(邪念)은 바깥이라 한다. 경(經)에서 “여러 바다의 12가지 현상[事]”이라고 한 것은, 안과 바깥의 6정이 삿된 행위를 받아들이는 것이 마치 바다가 온 세상의 흐르는 물을 받아들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굶주린 사람이 꿈에서도 밥을 먹는 것은 대개 만족하지 못했기 때문이니, 마음이 이렇게 만족을 모르고 이리저리 요동치는 것은, 마음의 아주 작은 것에도 6정이 작용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모습은 너무나 흐릿하고 어렴풋하며, 그 작용은 끊임없이 이루어져서, 보아도 그것을 그릴 수 없고, 들어도 소리로 나타낼 수 없으며, 이것을 맞닥뜨려 알려 해도 그 앞에 아무 것도 없고, 이것을 좇아서 탐구해도 뒤에 남는 것이 없으니, 지극히 은밀하고 너무나 오묘하여 그 모습을 터럭만큼도 형용할 수 없다. 그래서 범천[梵]·제석[釋]·신선[仙]·성자[聖]도 6정의 실체를 밝힐 수 없었으니,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게 마음에 심어져 고요히 생겨난 것이다.
육정의 이런 모습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이것을 ‘음[陰]’이라고 하니, 마치 그늘진 곳에 농부[種夫]가 땅을 깊게 파서 손수 씨앗을 덮어주면 씨앗이 셀 수 없을 만큼 열매를 맺으나,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도 그 이루어진 과정을 알 수 없고, 씨를 뿌린 사람도 그 수(數)를 알지 못하는 것과 같다. 아래에서 하나가 썩어도 위에서는 만 가지가 생겨나고, 손가락을 한 번 튕기는 짧은 시간에도 마음은 960번을 변하게 되어, 하루 밤낮이면 13억의 생각[意]이 생겨나게 된다. 생각마다 하나의 몸통[一身]이 있으나 마음[心]은 제 스스로 알 수 없으니, 저 씨 뿌리는 농부와 같은 것이다.
이 때문에 마음의 움직임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이 날뛰지 않게 꽉 붙잡고 호흡을 시작하여 하나부터 열까지 센다. 열을 셀 때까지 잘못되지 않으면 생각이 고요한 상태가 되어 제 자리를 찾은 것이다. 짧은 입정[小定]3)은 3일을 하고, 긴 입정[大定]은 7일을 하는데, 고요히 다른 생각[念]은 없어지고 죽은 듯이 생각이 맑아지니, 이것을 첫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선(禪)은 버린다는 뜻이니, 13억의 더러운 생각을 버린다는 것이다. 이미 수를 세어 생각을 고요히 했고, 뜻[念]을 바꿔서 부처님의 법을 그대로 따르니, 더러운 생각은 열에 여덟이 제거되고 바로 두 가지 생각[二意]만 남게 된다.
이처럼 생각이 고요해지고 뜻이 부처님의 법을 따르게 된 것은, 수를 세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도다. 그래서 모든 더러운 것들이 씻겨나가고 마음이 점점 맑아지게 되니, 이를 일러 두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다시 그 나머지 하나를 제거하는 것은, 코끝[鼻頭]에 생각을 집중하는 것이니, 이것을 일러 지(止)라고 한다. 이렇게 생각을 한 곳에 집중하는 지(止)의 선법을 얻으면 삼독(三毒)4)、사주(四走)5)、오음(五陰)6)、육명(六冥)7) 등의 모든 더러운 것이 소멸하게 되어, 찬란하게 빛나는 마음의 밝은 빛이 명월주(明月珠)의 빛보다 더 밝을 것이다. 음탕하고 거짓된 더러운 마음은 거울이 아주 더러운 진흙탕에 놓인 것과 같으니, 눕히면 하늘을 비출 것이고 엎어두면 땅만 마주할 것이다. 그러나 총명하고 지혜롭고 성스러우며 이치에 통달한 마음은 온 세상을 비출 것이다. 하늘과 땅이 광대하여 평범한 사람은 엿볼 수 없다고 하지만, 그러한 까닭은 오직 그 마음이 더러움에 물들어 혼탁해졌기 때문이니, 온갖 더러움에 물든 마음은 저 진흙탕에 놓인 거울보다 더 심한 것이 있는 것이다.
만약 좋은 스승을 얻어 더러운 것을 깎아내고 마음을 잘 닦아내면, 마음에 남아 있던 적은 흠과 아주 작은 얼룩도 시원하게 씻기어 남은 것이 없게 되고, 이런 마음을 들어서 온 세상을 비춘다면 터럭과 머리카락 같은 아주 작은 이치까지 조금이라도 살피지 못하는 것이 없을 것이니, 마음에 묻은 흠이 없어지고 밝은 마음만이 남아서 그렇게 된 것이다. 정(情)은 생각[意]을 요동치게 하고 뜻[念]을 어지럽게 하여, 만 가지 이치 중에 하나라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마치 시장에서 마음을 놓아버리고 제멋대로 듣는다면 많은 소리들을 들으나, 집으로 돌아와 들은 것을 생각해보면 한 사람의 말도 제대로 알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마음이 풀어지고 생각[意]이 흩어지면 그 총명함이 흐려지고 어둡게 된다. 만약 스스로 조용한 곳에 머물며 마음과 생각을 고요하게 한다면, 뜻[志]에 거짓된 욕망이 없게 되고, 귀를 기울여 고요히 듣게 되어서, 들은 불법의 모든 구절[萬句]을 조금도 잃지 않으며, 부처님의 한 마디 말씀[片言]도 분명하게 깨우치니, 마음[心]이 고요해지고 생각[意]이 맑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고요하게 생각을 모아서 코끝에 집중하는 것, 이것을 세 번째 선(禪)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그 몸을 관찰하여, 머리부터 발끝까지를 반복하여 세밀히 살피면, 몸 안의 더러운 농과 빽빽하게 곤두선 머리털을 마치 눈물이나 고름처럼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하늘[天]과 땅[地] 그리고 사람[人]과 사물[物]을 모두 관찰한다면, 그 흥성함은 쇠망함과 같고, 존재하는 것은 쇠망하지 않는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어, 부처님의 삼보(三寶)를 믿게 되고, 모든 어둠[冥]은 전부 밝아질 것이니, 이를 일러 네 번째 선(禪)이라고 한다.
마음을 다잡아 고요히 하고 바른 뜻[念]으로 돌아간다면, 모든 6정의 음(陰)이 다 소멸하게 되니, 이것을 환(還)이라고 한다. 그리고 더러운 욕심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 그 마음은 곧바로 대상을 구분하는 의식작용(想)8)이 없어지게 되니, 이것을 정(淨)이라고 한다. 안반의 선법을 얻은 사람은 그 마음이 곧장 밝아지고,
그 밝음으로 온 세상을 관찰한다면 아무리 깊이 감추어진 것도 관찰하지 못할 것이 없다. 지나온 셀 수 없는 겁(劫)의 시간, 현재와 미래의 일들, 사람[人]과 사물[物]의 변화, 현재 존재하는 방방곡곡의 모든 세상[諸刹], 그리고 그 가운데 있는 것들을 모두 알 수 있다. 또한 세존(世尊)의 가르침과 교화, 그리고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외고 학습하는 것도, 아무리 멀리 떨어져도 보지 못함이 없고, 그 소리를 듣지 못함이 없게 되어, 6정의 흐릿하고 어렴풋한 모습도, 존재와 소멸의 시작과 그 이유도 깨닫게 된다. 그래서 커지면 온 세상[八極]에 두루 미치게 되고, 가늘어지면 머리카락보다 가는 것[毛釐]도 꿸 수 있으며, 하늘과 땅을 바로잡고, 수명(壽命)을 주관하며, 거룩한 덕[神德]을 발휘하고, 천병(天兵)9)도 무너뜨리며, 삼천대천세계를 진동시키고, 세상의 방방곡곡을 옮겨 다닌다. 이 여덟 가지 불가사의는 범천[梵]도 측량할 수 없는 것이니, 이런 신묘한 덕의 무한함은 안반의 여섯 가지 선법[六行]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세존께서 처음 이 경전을 말씀하려고 할 때, 큰 진동(震動)이 있어, 사람과 천신이 얼굴색을 바꾸어 이 말씀을 공손히 받아들였고. 세존께서는 3일 동안 안반(安般)의 선법을 하시고 바로잡을 것[質]10)이 없게 되었다. 이 때 세존께서 변화되어 두 몸이 되었는데, 하나는 하등(何等)이라고 불렸고, 다른 하나는 존주(尊主)라고 불렸으니, 이 당시의 일에서 그 뜻이 나온 것이다. 그리하여 대사(大士), 상인(上人), 육쌍(六雙), 십이배(十二輩)11) 모두 안반의 선법을 굳게 행하였다.
이름이 안청(安清)인 보살이 있었는데, 자(字)는 세고(世高)이고 안식왕(安息王)12)의 정실 왕후의 자식이다. 그는 나라를 숙부에게 양보하고 고국을 떠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살펴보다가13) 드디어 경사(京師)에 머무르게 되었다. 또한 그는 널리 배우고 아는 것이 아주 많았으며. 신묘한 모사[神摸]⋅천체의 운행[七正]14)⋅세상의 변화[盈縮]15)⋅풍기(風氣)⋅길흉(吉凶)⋅산사태[山崩]⋅지진[地動]⋅침놓기[鍼䘑] 등의 여러 기술에 통달했다. 낯빛을 보면 병을 알았고, 새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듣고도 어떤 짐승인지 알 수 있었다. 또한 하늘과 땅[二儀]16)처럼 넓고 어진 마음을 지니고 있어서 백성들의 완고함과 어리석음을 걱정하여. 먼저 자신의 귀를 세우고 자신의 눈을 열어서, 백성들의 모든 것을 잘 보고 들으려고 하였다. 그러고 나서 천천히 백성들에게 석가모니 부처님[正眞]의 6도[六度]17)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고, 안반의 비밀스럽고 오묘한 뜻을 번역해 주었다. 그리하여 배우는 자들이 크게 늘어났고, 그들의 더럽고 탁한 생각이 모두 없어졌으며, 맑고 깨끗한 덕을 이루는 사람들이 되었다.
나는 말세에 태어나 땔감을 짊어 질 수 있는 나이가 되자, 부모님을 여의었고 세 분의 스승도 모두 돌아가셨다. 구름과 해를 우러러보았지만 슬프게도 질정을 받을 곳이 없게 되었고, 머리를 돌려 바라보아도 눈물만이 주르륵 흐를 뿐이다.18) 오랫동안 쌓아온 복이 다 없어지지 않아서,
남양(南陽)의 한림(韓林) 선생님, 영천(潁川)의 피업(皮業) 선생님, 회계(會稽)의 진혜(陳慧)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다. 이 세 분의 현자(賢者)들은 독실하고 철저하게 불도를 믿으셨고, 넓고 바른 덕을 지니고 계셨다. 또한 끊임없이 정진하셨으며 불도에 뜻을 두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으셨다. 내가 이 분들을 좇아 물음을 청하면, 세 분의 대답은 모두 진리에 딱 들어맞았고 그 의미도 서로 어긋남이 없으셨다. 그리고 지혜를 베푸시고 불법의 의미를 해석해주셔서 내가 불도를 따져서 헤아릴 수 있도록 도와주셨으니, 제 스스로는 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말이 비루한 데가 많고, 부처님의 뜻을 궁구하지도 못하였기에, 삼가 명철한 많은 현인들께서 함께 꼼꼼히 살펴봐주시고, 불법의 의미에도 군더더기가 많이 있으니, 성인들께서 군더더기를 깎아내고 다듬어서 감춰졌던 부처님의 신묘한 뜻을 드러내 주시길 간절히 바랍니다.
불설대안반수의경(佛說大安般守意經) 상권19)
후한(後漢) 안식(安息) 안세고(安世高) 한역
김달진 번역
부처님께서 월지국(越祗國)의 기수정사(羈瘦精舍)에 계셨는데, 월지국은 다른 이름으로 차닉가라국(遮匿迦羅國)이라고도 하였다.
이때에 부처님께서 90일 동안 앉아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시고 부처님께서 다시 홀로 90일 동안 앉아 사유(思惟)하고 헤아리신 것은, 시방 사람 및 꿈틀거리고 날고 기고 움직이는 무리들을 도탈(度脫)시키려 하신 것이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90일 동안 안반수의를 행한 것은, 안반수의로 자재한 자념(慈念)의 뜻을 얻고 돌이켜서 안반수의를 행한 다음, 다시 뜻을 거두어 행함을 생각한 것이다.
안(安)은 몸이고, 반(般)은 숨[息]이며,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수(守)는 금함[禁]이고, 또한 계(戒)를 범하지 않음을 말한다. 금(禁)은 또한 보호함[護]이니, 호(護)는 일체를 두루 보호하여 범하는 바가 없는 것이다. 의(意)는 숨[息]이요, 또한 도(道)가 된다.
안(安)은 생겨남[生]이고, 반(般)은 멸함[滅]이며, 의(意)는 인연이 되고, 수(守)는 도가 된다.
안(安)은 셈[數]이고, 반(般)은 서로 따름[相隨]이며, 수의(守意)는 그침[止]이 된다.
안(安)은 도를 생각하는 것이고, 반(般)은 묶인 것을 푸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죄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안(安)은 죄를 피하는 것이고, 반(盤)은 죄에 들지 않는 것이고, 수의(守意)는 도(道)가 된다.
안(安)은 정(定)이고, 반(般)은 흔들리지 않게 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뜻을 어지럽히지 않는 것이다.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뜻을 다루어 무위(無爲)에 이르는 것이다.
안(安)은 유(有)이고, 반(般)은 무(無)가 되니, 뜻으로 유(有)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고, 뜻으로 무(無)를 생각해도 도를 얻지 못하며, 또한 유(有)를 생각하지도 않고 무(無)를 생각하지도 않음이 바로 공정(空定)의 뜻과 도를 따르는 행에 응하는 것이다. 유(有)는 만 가지 물건을 말하고, 무(無)는 의(疑) 또는 공(空)이 된다.
안(安)은 본래의 인연이고, 반(般)은 처소가 없음이니, 도인(道人)은 본래 온 바가 없음을 알고 또한 멸함의 처소가 없음을 아는 것이 바로 이 수의(守意)가 된다.
안(安)은 청(淸)이고, 반(般)은 정(淨)이며, 수(守)는 무(無)가 되고, 의(意)는 위(爲)라 이름하니, 이것이 바로 청정하여 함이 없는 것이다. 무(無)는 활(活)이라 하고, 위(爲)는 생(生)이라 하니, 다시 고(苦)를 얻지 않기 때문에 활(活)이 되는 것이다.
안(安)은 미(未)이고, 반은 기(起)이다.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문득 뜻을 지킬[守意] 수 있지만, 만약 이미 뜻이 일어났다면 곧바로 뜻을 지켜야 하니, 만일 이미 뜻을 일으켰다면 곧 달아나서 지키지 못하므로 마땅히 돌이켜야 하는 까닭에 부처님께서 안반수의(安般守意)를 설하셨다.
안(安)은 5음(陰)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반(般)은 5음을 제거하는 것이며, 수의(守意)는 인연을 깨달아 몸과 입과 뜻을 따라가지 않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집착하는 바가 없음이 곧 수의이니, 집착하는 바가 있다면 수의가 되지 못한다. 왜냐하면,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멸하기 때문이니, 뜻이 다시 일어나지 않음이 도(道)가 되고,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되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뜻이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니 생김[生]으로 인하여 죽음[死]이 있으므로 뜻을 지킬 수 없으며, 뜻이 죽지 않게 하는 것이니 죽음이 있음으로 인하여 생김이 있으므로 뜻이 또한 죽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도(道)가 된다.
안반수의(安般守意)에 열 가지 지혜가 있으니, 숨을 세고[數息] 서로 따름[相隨]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과 4제(諦)를 말한다. 이것이 열 가지 지혜를 이루니, 이른바 『37품경(三十七品經)』을 합하여 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비유컨대 등불과 같아서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 어둠을 부수며, 둘째 밝음을 보이는 것처럼, 수의(守意)도 첫째 어리석음[愚癡]을 부수고, 둘째 지혜를 보이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뜻이 인연을 좇아 생겨나서 마땅히 인연을 반연(攀緣)하여 집착함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수의가 된다.
수의(守意)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지켜서 생겨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요, 둘째는 이미 생긴 것은 마땅히 빨리 소멸하는 것이요, 셋째는 이미 행한 일은 마땅히 뒤에 뉘우쳐서 억만겁이 지나도 다시 하지 않는 것이다.
수(守)와 의(意)는 각기 다르다. 시방의 일체를 보호하여 대경(對境)을 범하지 않음을 깨달음이 바로 수(守)가 되고, 저 무위(無爲)를 깨달음이 바로 의(意)가 되니, 이것이 수의이다.
수의(守意) 가운데 네 가지 즐거움[樂]이 있으니, 첫째는 요체(要體)를 아는 즐거움이요, 둘째는 법(法)을 아는 즐거움이요, 셋째는 위[上]를 아는 즐거움이요, 넷째는 옳음[可]을 아는 즐거움이 바로 네 가지 즐거움이다. 법(法)은 행(行)이 되고, 얻음[得]은 도(道)가 된다.
수의(守意)의 여섯 가지 일에 안과 밖이 있다. 숨을 셈[數息]과 서로 따름[相隨]과 멈춤[止]은 밖[外]이 되고,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안[內]이 되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왜냐하면, 숨을 생각함과 서로 따름과 지(止)와 관(觀)과 환(還)과 정(淨)은 뜻을 익혀서 도(道)에 가까워지려고 하기 때문이니, 이 여섯 가지 일을 여의면 곧바로 세간을 따르게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음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뜻을 거둠이 되며, 지(止)는 뜻을 정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여읨이 되고, 환(還)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정(淨)은 뜻을 지킴이 되니, 사람이 능히 뜻을 절제할 수 없기 때문에 이 여섯 가지 일을 행할 뿐이다.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뜻이 어지럽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얻지 못하는가?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선(禪)을 얻지 못하는가? 습(習)을 다 버리며 도(道)를 증득하여 행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숨을 세는 것은 땅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보습이 되며, 지(止)는 멍에가 되고, 관(觀)은 씨앗이 되며, 환(還)은 비가 되고, 정(淨)은 행함이 되니, 이와 같은 여섯 가지 일로 마침내 도를 따르는 것이다.
숨을 세어서 바깥을 끊고, 서로 따라서 안을 끓으며, 지(止)는 죄를 멈추는 것이고, 관(觀)을 행하여 뜻을 제거하며, 세간을 받아들이지 않음은 환(還)이 되고, 생각이 끊어짐은 정(淨)이 된다.
뜻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뜻을 정하려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뜻을 끊으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도의 뜻을 얻으려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5음(陰)을 향하지 않으려면
마땅히 돌이킬[還] 것이요, 소유가 없으려면 마땅히 청정[淨]해야 할 것이다.
일이 많으면 마땅히 숨을 셀 것이요, 일이 적으면 마땅히 서로 따를 것이며, 가가(家家)의 뜻을 다하려면 마땅히 멈춤[止]을 행할 것이요, 세간을 두려워하면 마땅히 관(觀)할 것이며, 세간을 달갑게 여기지 않으면 환(還)이 되며, 생각이 끊어지면 정(淨)이 된다.
무슨 까닭에 숨을 세는가? 5음(陰)을 따르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서로 따르는가? 5음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지(止)하는가? 5음을 관(觀)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5음을 관하는가?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몸의 근본을 알려고 하는가? 고(苦)를 버리려고 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환(還)하는가? 생사를 싫어하기 때문이다. 무슨 까닭에 정(淨)하는가? 5음(陰)을 분별하여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다.
곧바로 지혜를 따르면 여덟 가지 도(道)를 얻고 따로 소원을 얻으니, 숨을 행할 때는 세는 것을 따르며, 서로 따를 때는 생각을 따르며, 멈출[止] 때는 정(定)을 따르며, 관(觀)할 때는 정(淨)을 따르며, 돌이킬[還] 때는 뜻을 따르며, 정(淨)할 때는 도(道)를 따르고 또한 행(行)을 따른다.
숨을 세는 것은 4의지(意止)가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4의단(意斷)이 되며, 멈춤[止]은 4신족념(神足念)이 되고, 관(觀)은 5근(根)과 5력(力)이 되며, 돌이킴[還]은 7각의(覺意)가 되고, 정(淨)은 8행(行)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을 얻고도 서로 따르지 않으면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얻고도 멈추지[止]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멈춤을 얻고도 관(觀)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고, 관(觀)을 얻고도 돌이키지[還]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며, 돌이킴을 얻고도 청정하지 않으면 수의가 되지 못하니, 청정함을 얻고 다시 청정해야 마침내 수의가 된다.
이미 숨을 생각하여 악(惡)이 생겨나지 않는데도 다시 세는 것은 함께 뜻을 막아 6쇠(衰)를 따르지 않기 때문이며, 서로 따름을 행하는 것은 6쇠의 행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고, 멈춤[止]은 6쇠의 행을 제거하려는 것이며, 관(觀)은 6쇠의 행을 끊으려는 것이고, 돌이킴[還]은 6쇠의 행을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것이며, 청정함[淨]은 6쇠를 멸하려고 하는 것이니, 이미 소멸하여 다하고 나면 문득 도(道)를 따르게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막으려고 하는 것인데, 숨 가운데는 길고 짧음이 있으니, 마땅히 다시 이 길고 짧은 뜻을 막아야만 한다. 왜냐하면, 수의(守意)는 악(惡)을 멈추고자 하기 때문이니, 악은 또한 가히 지킬 수도 있고 또한 지키지 않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악이 이미 다하면 마땅히 다시 지킬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숨을 세는 것에 세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것이요, 둘째는 색(色)을 보고 마땅히 비상(非常)과 부정(不淨)을 생각하는 것이요, 셋째는 마땅히 성냄ㆍ의심ㆍ질투함을 분명히 알고 과거를 생각하는 것이다.
숨을 셈[數息]이 어지러운 것은 마땅히 인연을 좇아 일어난 바임을 알아야만 하고, 이것은 안의 뜻[內意]임을 알아야만 한다. 첫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바깥 뜻[外意]의 허물이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오기 때문이요, 두 번째 숨이 어지러운 것은 바로 안의 뜻의 허물이니, 숨이 가운데로부터 나오기 때문이요, 3ㆍ5ㆍ7ㆍ9번째는 바깥 뜻에 속하고, 4ㆍ6ㆍ8ㆍ10번째는 안의 뜻에 속한다. 질투ㆍ성냄ㆍ의심의 세 가지 뜻은 안에 있고, 살생(殺生)ㆍ투도(偸盜)ㆍ사음(邪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의 일곱 가지 뜻과 나머지는 밖에 속한다.
숨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밖이 되고, 숨을 얻을 수 없는 것은 안이 된다. 숨은 뜻을 좇아 생기므로 생각과 숨을 합쳐 하나라고 세는데, 숨이 다 하면 하나를 세기도 하고 또한 하나를 세지 않기도 하는 것은, 뜻은 밖에 있는 채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비유컨대 돈을 세면서 뜻은 다섯 번째에 있는데 세기는 하나라고 하는 것과 같다. 숨을 셈[數息]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이유는, 밖에는 7악(惡)이 있고 안에는 3악(惡)이 있으므로 적은 것이 능히 많은 것을 이길 수 없기 때문에 세는 것보다 먼저 들어오는 것이다.
숨을 셈에 얻지 못하는 것은 그 본래의 뜻[本意]을 잃었기 때문이니, 본래의 뜻은 비상(非常)과 고(苦)와 공(空)과 비신(非身)의 이치이다. 이 본래의 뜻을 잃고 뒤바뀜[顚倒]에 떨어지기 때문에 또한 사(師)를 잃어버린다. 사(師)는 처음 앉았을 때 첫 번째 들이 쉬는 숨[入息]에서 몸의 편안함과 차례대로 행함을 얻으니, 그 본래의 뜻을 잃었기 때문에 숨을 얻지 못하는 것이다.
숨을 셈[數息]에 뜻으로 항상 마땅히 비상ㆍ고ㆍ공ㆍ비신을 생각해야 하며, 숨이 나와도 또한 없어지고 들어가도 또한 없어짐을 헤아려야 한다.
이미 이것을 안다면 도를 얻음이 빠를 것이니, 마땅히 비상(非常)과 공(恐)의 뜻을 가져야만 하며, 이 뜻을 얻으면 곧 숨 세는 것을 얻는다.
들이쉬는 숨과 내쉬는 숨이 다른 까닭은,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된다. 이런 까닭에 다른 것이니, 도인(道人)은 마땅히 이 뜻을 분별해야만 한다.
들이쉬는 숨은 죄를 받아들이지 않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죄를 제거하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隨意]은 죄를 여의기 위함이며, 들이쉬는 숨은 인연을 받아들이기 위함이요, 내쉬는 숨은 인연에 이르기 위함이요, 뜻을 따름은 인연을 여의지 않기 위함이다.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함에 세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죄가 이름이요, 둘째는 행이 공교롭지 않아서요, 셋째는 정진하지 않아서 이다.
들이쉬는 숨은 짧고 내쉬는 숨은 길며, 따라 생각하는 바가 없는 것이 도의(道意)가 되고, 생각하는 바가 있는 것은 죄(罪)가 되니, 죄는 밖에 두어야지 안에 두어서는 안 된다.
숨을 셀 때 뜻을 여의면 숨이 길어지고, 숨을 얻으면 숨이 짧아지며, 편안하게 행하지 못하면 숨이 길게 되고, 정(定)하면 짧게 되며, 만물을 생각하면 긴 숨이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으면 짧은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에 이르지 못하고 그쳤다가 다시 세는 것은 긴 숨이 되고, 열 번째 숨을 얻은 것은 짧은 숨이 된다. 숨을 얻으면 짧게 되니, 왜냐하면, 멈추고 다시 세지 않기 때문이며, 숨을 얻으면 또한 길게 되니, 왜냐하면, 숨을 쉬지[休] 않기 때문에 길게 되는 것이다. 숨이 긴 것도 스스로 알고 숨이 짧은 것도 스스로 아는 것은, 뜻이 있는 곳을 따라서 길고 짧음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는다면 스스로 아는 것이 되고, 뜻이 길고 짧음을 깨닫지 못한다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도인(道人)은 안반수의(安般守意)를 행하여 뜻을 멈추려고 하니, 마땅히 무슨 인연으로 뜻을 멈춤을 얻을 것인가? 이제 안반수의를 설하겠으니 들을지어다.
무엇이 안(安)이 되고, 무엇이 반(般)이 되는가? 안(安)은 들이쉬는 숨이라 하고, 반(般)은 내쉬는 숨이라고 한다. 생각과 숨이 떨어지지 않는 것을 안반(安般)이라고 하며, 수의(守意)는
뜻을 멈춤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다.
행자(行者)와 새로 배우는 이에게는 네 가지 안반수의의 행이 있으니, 두 가지 악(惡)을 제거하면 16승(勝)을 즉시 스스로 알아, 마침내 안반수의를 행하여 뜻을 멈춤을 얻게 하리라.
무엇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세는 것이요, 둘째는 서로 따르는 것이요, 셋째는 멈추는 것이요, 넷째는 관(觀)하는 것이다.
무엇이 두 가지 악(惡)인가? 열 번째 숨을 넘지 말 것과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말 것이다.
무엇이 16승(勝)인가? 즉시 스스로 숨이 길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짧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몸을 움직임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미세(微細)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상쾌하지 못함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춤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멈추지 않음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꺼움을 아는 것, 곧 스스로 숨이 마음에 기껍지 않음을 아는 것, 곧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만물이 이미 없어져 다시 숨을 얻을 수 없음을 스스로 아는 것, 안으로 다시 생각할 바 없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생각하는 바를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身命)을 버리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 신명을 버리지 못하는 숨임을 스스로 아는 것이니, 이것이 즉시 스스로 아는 열여섯 가지이다.
무엇이 열 번째 세기를 넘지 않는 것이며, 열 번째 세기보다 덜하지 않은 것인가? 숨이 이미 다했는데 아직 세지 않는 것이 넘는 것이요,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는데 곧바로 세는 것이 덜 하는 것이다. 세기를 넘어서 놓친 것도 또한 악(惡)이요, 미치지 못하는 것도 또한 악이니, 이것이 두 가지 악이 된다.
두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짧은 숨이 되고, 아홉 번째 숨에 이르러 어지러운 것은 긴 숨이 되며, 열 번째 숨을 얻는 것은 상쾌한 숨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미세함이 된다. 뜻이 긴 데에 있다면 바로 뜻을 돌이켜서 ‘나는 왜 긴 것을 생각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뜻이 짧은 데에 있다면 즉시 깨달아서 뜻이 멈추지 않도록 해야 하니, 멈추면 집착이 된다. 신명(身命)을 버리는 것을 숨을 행한다[行息]고 이르니, 도의(道意)를 얻으면 문득 신명을 버리며, 아직 도의를 얻지 못했으면 항상
몸을 아끼는 까닭에 신명을 버리지 못한다. 숨이 미세한 것은 도(道)가 되고, 긴 것은 생사(生死)가 되며, 짧은 숨이 움직이면 생사가 되고, 도(道)보다 길면 짧음이 되니, 왜냐하면, 도의(道意)를 얻지 못하여 아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짧음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단(單)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복(複)이 되며, 멈춤[止]은 뜻을 한결같이 함이 되고, 관(觀)은 뜻을 앎이 되며, 돌이킴[還]은 도를 행함이 되고, 청정함[淨]은 도에 들어감이 된다.
셀 때 생각이 열 번째 숨이 이르러 붙잡고 있는 것이 바로 외선(外禪)이요, 몸의 부정(不淨)을 생각하고 공(空)을 따르는 것이 바로 내선(內禪)이다.
선법(禪法)은 악이 와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것을 ‘버린다’고 한다. 입을 다물고 숨을 셈에 기(氣)의 나고 듦을 따르되, 기가 어떤 곳에서 일어나고 어떤 곳에서 멸하는지 알아야 한다. 뜻에 생각하는 바가 있으면 숨을 세지 못하고, 더디고 빠르고 크고 적음이 있어도 또한 세지 못하며, 귀로 어지러운 소리를 들으면 또한 세지 못한다.
숨을 셈에 뜻이 숨 세는 데만 있다면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뜻을 행하여야 마침내 멈춤[止]이 되며, 숨을 셀 때 뜻이 다만 숨에만 있다면 이것은 공교함이 되지 못하니, 마땅히 뜻이 좇아서 일어나는 곳과 기(氣)가 멸하는 곳을 알아야만 마침내 세는 것에 응하여서 인연이 다하면 문득 정의(定意)를 얻는 것이다.
수의(守意)는 나고 드는 숨을 생각하여 이미 숨을 생각함에 악(惡)이 생기지 않기 때문에 수의가 된다. 숨은 인연을 따라 생겨나니, 인연이 없고 인연을 멸한다면 숨도 끊어져 멈추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이 지극히 성실하고, 숨이 어지럽지 않은 것이 인욕(忍辱)이 되며, 숨을 셈에 기가 미세하여 다시 나고 드는 줄을 깨닫지 못해야만 이에 마땅히 한 생각을 지켜서 멈출 것이다. 숨은 몸에도 있고 또한 밖에도 있으니, 인연을 얻어 숨이 생기며 죄가 아직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숨이 있으니, 인연을 끊으면 숨이 다시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숨을 셈에 제2선(禪)을 따를 것이니, 왜냐하면, 생각을 기다리지 않기 때문에 제2선을 따르는 것이다.
숨을 세기만 하는 것은 수의(守意)가 되지 못하며, 숨을 생각해야 마침내 수의가 되니, 숨이 밖으로부터 들어와 숨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면 숨은
들어오는 중이고 뜻은 다했으며 식(識)은 수를 세는 데 있다.
열 가지 숨에 열 가지 뜻이 있어 열 개의 묶임[絆]이 되고, 서로 따르는 것에 두 가지 뜻이 있어 두 개의 묶임이 되며, 멈춤[止]에 한 가지 뜻이 있어 한 개의 묶임이 된다.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면 악한 뜻이 되어 가히 묶을 수 없으며, 악한 뜻이 멈추어야 마침내 숨을 셈을 얻으니, 이것이 조화가 되어야 가히 뜻을 묶을 수 있다.
이미 숨을 얻었으면 숨을 버리고, 이미 서로 따름을 얻었으면 서로 따름을 버리며, 이미 멈춤을 얻었으면 멈춤을 버리고, 이미 관(觀)을 얻었으면 관을 버리며, 다시 돌이키지 말 것이니, 다시 돌이키지 않는다는 것은 다시 숨을 세어 뜻을 부리거나 또한 뜻이 숨을 부리게 하지 않는 것이다.
생각하는 바가 있다면 숨이 뜻을 부리게 되고, 생각하는 바가 없다면 뜻이 숨을 부리게 된다.
숨에 네 가지 일이 있으니, 첫째는 바람, 둘째는 기운, 셋째는 숨, 넷째는 헐떡거림[喘]이다. 소리가 있는 것은 바람이 되고, 소리가 없는 것은 기운이 되며, 나고 드는 것은 숨이 되고, 나고 드는 기운이 다하지 못한 것은 헐떡거림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은 안을 끊음이며, 밖으로 부터 들어올 때 세는 것은 바깥을 끊음이고 또한 바깥 인연을 여의려 하는 것이요, 가운데로부터 나올 때 세는 것은 안의 인연을 여의려고 하는 것이니, 바깥은 몸을 여읨이 되고, 안은 뜻을 여읨이 된다. 몸을 여의고 뜻을 여의는 이것이 바로 서로 따르는 것이 되며, 나고 드는 숨 이것이 두 가지 일이 된다.
숨을 세는 것은 안과 밖의 인연을 끊으려고 하는 것이니, 무엇이 안과 밖인가? 안(眼)ㆍ이(耳)ㆍ비(鼻)ㆍ구(口)ㆍ신(身)ㆍ의(意)는 안이 되고,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세활(細滑)ㆍ염(念)은 밖이 된다.
숨 쉼을 행하는 것은 뜻을 공(空)으로 향하게 하려는 것인데 다만 나머지 뜻만 멈추려고 한다면 어떻게 공으로 향하겠는가? 숨 가운데는 숨 쉬는 대상이 없기 때문이다.
숨을 셀 때 뜻이 달아나는 것 아닌가? 이를 곧바로 깨닫는다면 죄는 무겁고 뜻은 가벼우니, 죄가 뜻을 이끌어 빨리 가버리기 때문에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도(道)를 행하여 이미 숨 쉬는 것을 얻으면 저절로 숨 쉬는 것이 싫어져서 뜻을 돌리려고 하여도 다시 세고 싶지 않으니, 이와 같은 것이 숨 쉬는 것을 얻음이요,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도 또한 그렇다.
나고 드는 숨의 사라짐을 알아서 숨의 모습[相]을 얻고, 생사(生死)를 알아서 다시 쓰지 않음으로써 생사의 모습을 얻는다면, 이미 4선(禪)을 얻은 것이니, 다만 공(空)을 생각하여
도(道)를 심을 것이다.
숨 쉬는 것을 행하여 이미 정(定)을 얻어서 다시 기(氣)의 나고 듦을 깨닫지 못한다면, 문득 관(觀)할 수 있으니, 첫째 마땅히 55가지 일을 관해야 하고, 둘째 마땅히 몸 가운데서 12인연을 관해야 한다.
그렇다면 숨이 나고 듦에 나고 드는 곳이 있는가? 숨이 들어올 때가 바로 그 곳이요, 숨을 내쉴 때가 바로 그 곳이다. 숨을 세며 몸으로 앉아서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生)ㆍ사(死)ㆍ식(識)을 멈추고 행하지 않음이 바로 앉음[坐]이 된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고 다시 헤아리는 것은 숨은 본래 아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숨을 생각하여 도를 얻었는데 어찌 아는 것이 없다고 하는가? 뜻은 숨을 알지만 숨은 뜻을 알지 못하니, 이것이 아는 바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능히 뜻을 헤아릴 수 없다면 곧바로 숨을 세도록 해서 뜻을 정하려고 하지만, 비록 숨을 세더라도 다만 악(惡)이 생겨나지 않을 뿐이요 지혜는 없으니, 마땅히 어떤 행으로 지혜를 얻어서 첫 번째로부터 열 번째까지 이르러 분별하여 어지러움을 안정시키고 대경(對境)을 식별하여 약(藥)을 쓰겠는가? 이미 정의(定意)를 얻었다면 곧바로 지혜를 따라서 헤아림을 얻어 관(觀)을 따른다.
무엇이 세는 것[數]이 되는가? 센다는 것은 일[事]을 말한다. 비유컨대 사람이 무슨 일이 있으면 곧바로 구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은 죄를 세는 것이지만 도인(道人)은 복을 세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 번째까지 정하여 한 번 뜻을 일으키면 첫 번째가 되고, 두 번 뜻을 일으키면 두 번째가 되어, 세기를 열 번째에서 마치니, 열 번째까지 이르면 끝이 되는 까닭에, 열까지 세는 것이 복이 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죄가 있다는 것은, 능히 숨 쉬는 것을 무너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죄가 되며, 또한 생사(生死)에 뜻을 두어 소멸하지 못하고 세간에 떨어져 세간 일을 끊지 못하므로 죄가 되는 것이다. 6정(情)의 여섯 가지 일에다 통양(痛痒)ㆍ사상(思想)ㆍ생사(生死)ㆍ식(識)을 합한 열 가지는 안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고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ㆍ질투(嫉妬)ㆍ진에(瞋恚)ㆍ우치(愚癡)는 밖의 열 번째까지의 숨에 응하니, 이른바 멈추어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열여섯 가지 일인가? 열여섯 가지는 세어서 열여섯 번째까지 이름을 말하니, 즉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을 이 열여섯 번째까지 행하여 여의지 않음이 도(道)를 따르는 것이다.
숨을 세는 것은 바람을 생각하여 색(色)을 따르게 되니, 어떻게 도에 응(應)하는가? 뜻을 행함이 세는 데에 있고 색과 기(氣)를 생각하지 않으면, 모두 곧바로 소멸하여 비상(非常)에 떨어지거나 비상을 아는 것이 도가 된다. 도인(道人)이 도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앉아서 행하는 두 가지를 알아야만 하니, 첫째는 앉음[坐]이고, 둘째는 행함[行]이다.
앉음과 행함은 같은 것인가, 같지 않은 것인가? 때로는 같고 때로는 같지 않으니,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 등 이 여섯 가지 일을 때로는 앉아서 하기도 하고 때로는 다니면서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세어서 뜻을 정(定)하는 것이 바로 앉음[坐]이 되고, 뜻이 법을 따르는 것이 행이 되며, 이미 뜻을 일으켜서 여의지 않음은 행도 되고 또한 앉음도 된다.
좌선(坐禪)하는 법은,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지 않고,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지 않는 것이다.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센다는 것은, 첫 번째 숨을 세는 것을 아직 마치지 않았는데 곧바로 두 번째를 말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에서 두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지나친 정진(精進)이 된다.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센다는 것은, 숨이 이미 두 번 들어왔는데 겨우 첫 번째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두 번째에서 첫 번째를 세는 것이니, 이런 것은 미치지 못하는 정진이 된다.
세 번째로부터 네 번째에 이르고, 다섯 번째로부터 여섯 번째에 이르며, 일곱 번째로부터 여덟 번째에 이르고, 아홉 번째로부터 열 번째에 이르기까지 각각 부분이 있으니, 마땅히 속한 곳을 분별하여 첫 번째에 있어서는 첫 번째를 세고, 두 번째에서는 두 번째를 세는 것이 바로 법을 행하는 것이며, 곧바로 정진을 따르는 것이다.
앉음[坐]으로 도를 따르는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숨을 세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둘째는 경을 외우면서 앉아 있는 것이요, 셋째는 경을 듣고 기뻐하며 앉아 있는 것이, 바로 이 세 가지다.
앉음[坐]에 3품(品)이 있으니, 첫째는 미합좌(味合坐)요, 둘째는 정좌(淨坐)요, 셋째는 무유결좌(無有結坐)이다.
무엇이 미합좌인가? 뜻이 행을 집착하여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미합좌가 된다. 무엇이 정좌인가? 생각하지 않는 것이 정좌가 된다. 무엇이
무유결좌인가? 맺음이 이미 다한 것이 무유결좌가 된다.
숨[息]에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잡식(雜息)이요, 둘째는 정식(淨息)이요, 셋째는 도식(道息)이다. 도를 행하지 않는 것이 잡식이 되고, 세어서 열 번째까지 이르도록 어지럽지 않는 것이 정식이 되고, 이미 도를 얻는 것이 도식이 된다.
숨에 세 가지가 있으니, 대식(大息)이 있고, 중식(中息)이 있고, 미식(微息)이 있다. 입으로 말하는 바가 있는 것은 대식이요, 멈추고 도를 생각하는 것은 중식이요, 멈추고 4선(禪)을 얻는 것은 미식이다.
부처님께서는 왜 사람들에게 숨을 세어 뜻을 지킬 것을 가르치셨는가? 네 가지 이유가 있으니, 첫째는 고통을 받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둘째는 뜻을 어지럽힘을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요, 셋째는 인연을 막아 생사와 만나지 않게 하려는 까닭이요, 넷째는 니원도(泥洹道)를 얻게 하려는 까닭이다.
비유컨대 해가 광명이 없다고 설하는 것에 네 가지 까닭이 있으니, 첫째는 구름이 끼었기 때문이요, 둘째는 먼지가 끼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큰 바람이 불기 때문이요, 넷째는 연기가 끼었기 때문인 것처럼, 숨 세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에도 또한 네 가지 인연이 있으니, 첫째는 생사를 생각하여 헤아리기 때문이요, 둘째는 음식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요, 셋째는 몹시 여위었기 때문이요, 넷째는 앉아서 죄지(罪地)를 고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네 가지 일이 모두 상(相)이 있으니, 앉아 숨을 세면서 갑자기 다른 일을 생각하여 숨과 뜻을 잃는 것은 바로 생각하여 헤아리는 상이요, 골절이 모두 아파 능히 오래 앉아 있지 못하는 것은 바로 많이 먹은 상이요, 몸이 무겁고 뜻이 혼몽하여 다만 자려고만 하는 것은 바로 몹시 여읜 상이요, 4면(面)으로 앉았기만 하여 한 숨도 얻지 못하는 것은 바로 죄지(罪地)의 상이다. 만일 죄가 됨을 알았다면 마땅히 경행(經行)을 하거나 앉아 경문(經文)을 읽어서 뜻으로 죄를 익히지 않으면 또한 화(禍)가 소멸될 것이다.
도인(道人)은 도를 행하여 마땅히 근본을 생각할 것이니, 무엇이 근본인가? 심(心)ㆍ의(意)ㆍ식(識)이 바로 근본이 된다. 이 세 가지 일은 모두 보이지 않아서 이미 생겨났다가 곧바로 멸하여 근본의 뜻이 다시 생겨나지 않으니, 이 뜻을 얻음이 도의(道意)가 된다. 근본의 뜻이 이미
소멸하면 고통이 있지 않으며, 다시 인연으로 생겼다가도 곧바로 끊어지니, 정의(定意)가 날로 수승해진다. 날로 수승해지는 것이 정의가 되니, 때로는 숨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서로 따름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며, 때로는 멈춤[止]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관(觀)을 좇아 정의를 얻기도 한다. 정(定)의 인연(因緣)을 얻음에 따라 곧바로 행한다.
숨 쉬는 것을 행하여 또한 탐(貪)에 떨어지니, 왜냐하면 뜻이 정해지면 문득 기뻐지기 때문이니, 곧바로 마땅히 나는 숨과 드는 숨을 헤아려야만 생각이 사라질 때, 숨이 생겨나면 몸이 생겨나고, 숨이 사라지면 몸도 사라진다. 아직 생사의 괴로움을 벗어나지 못한 것은, 어째서 인가? 기뻐서 이와 같이 헤아리기 때문이니, 곧바로 탐욕을 멈추어야 한다.
숨을 세는 것은 빠르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은 느리게 하려고 하며, 때로는 숨 세는 것을 마땅히 느리게 하고 서로 따르는 것을 빠르게 하기도 하니, 왜냐하면 숨을 셀 때 뜻이 어지럽지 않으면 마땅히 느리게 해야 하고, 세는 것이 어지러우면 마땅히 빠르게 해야 한다. 서로 따르는 것도 또한 이와 같이 한다.
첫 번째로 세는 것과 또한 서로 따르는 것이 생각하는 바가 다르니, 비록 숨을 세더라도 마땅히 기(氣)의 나고 듦을 알아 뜻을 세는 것에 붙여두어야 하며, 숨을 세다가 다시 서로 따르는 것과 지와 관을 행한다면, 이른바 숨 쉬는 것을 얻지 못한다고 하니, 전생의 습(習)이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觀)에 있는 것이다. 비록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을 얻더라도 마땅히 돌이켜서 숨 세는 것으로부터 일으켜야 한다.
숨을 셀 때 뜻을 여의지 않으면 이것은 법을 여읜 것이 되며, 법이 아니기 때문에 숨을 셀 때 뜻이 죄를 따르지 않지만, 뜻을 세간에 둔다면 곧 죄에 떨어진다. 숨을 세는 것은 뜻을 어지럽히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이니, 뜻이 어지럽지 않아서 다시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한다면 상지중(上之中)의 뜻을 증득하고 멈춤[止]을 알 것이다. 멈춤은 관(觀)과 같고 돌이킴[還]은 정(淨)과 같다.
도를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었다가 그 뜻이 어긋났다면, 마땅히 다시 숨을 세거나 경(經)을 읽어야 하며, 마침내 다시 선(禪)을 행하여 미세한 뜻을 얻으면,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을 행하지 않아도 된다.
부처님은 여섯 가지 깨끗한 뜻이 있으니,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다.
이 여섯 가지 일로 능히 형체 없는 것을 제어하신다.
숨은 또한 뜻이기도 하고 뜻이 아니기도 하니, 왜냐하면, 셀 때 뜻이 숨에 있으면 뜻이 되지만, 세지 않을 때는 뜻과 숨이 각자 스스로 행동하니, 이것은 뜻이 아니요, 숨을 좇아 생겨나니 숨이 이미 그치면 뜻도 없는 것이다.
사람이 뜻을 부리지 못하고 뜻이 사람을 부리니, 뜻을 부리는 이는 이른바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과 관과 돌이킴과 정(淨)에서 『37품경』을 생각한다. 이것이 바로 뜻을 부리는 것이니, 사람이 도를 행하지 않고, 탐내어 구하며 욕심을 따르면, 이것은 뜻이 사람을 부리는 것이다.
숨에 구식(垢息)이 있으니, 때[垢]를 버리지 못하면 숨을 얻지 못한다. 무엇이 구식인가? 3명(冥) 가운데서 가장 극심한 것이 이 구식이다. 무엇이 3명인가? 3독(毒)이 일어날 때는 몸속이 틀림없이 어둡기 때문에 3명이라고 한다. 3독은 첫째 탐음(貪婬), 둘째 성냄[瞋恚], 셋째 어리석음[愚癡]이니, 사람이 모두 이 세 가지 일로 인해서 죽는 까닭에 독(毒)이라고 한다. 숨을 셀 때는 뜻이 숨 세는 데에 있지만 세지 않을 때는 세 가지 뜻이 있으니, 선한 뜻도 있고, 악한 뜻도 있으며,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는 뜻도 있다.
사람이 숨 쉬는 상(相)을 얻었는지 알려고 한다면 마땅히 만물과 모든 좋은 경계를 관(觀)해서 뜻이 다시 집착하지 않는다면 이것이 숨 쉬는 상을 얻은 것이요, 뜻이 다시 집착한다면 이것은 상을 얻지 못한 것이니, 마땅히 다시 정진하여 가가(家家)의 뜻을 행함을 없애려고 해야 한다. 이른바 6정(情)이 가가의 뜻이니 만물을 탐애하는 것이 모두 가가의 뜻이다.
서로 따르는 것은 이른바 선법(善法)을 행하여 이를 좇아 해탈을 얻어 마땅히 서로 따르는 것이며, 또한 5음(陰)과 6입(入)을 따르지 않고 숨과 뜻이 서로 따르는 것이다.
세 번째 멈춤[止]은, 무슨 까닭에 코끝에 멈추어 있는가? 숨을 세는 것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모두 코로부터 나고 드니, 뜻으로 옛 곳을 익힌다면 또한 인식하기 쉽기 때문에 코끝에 붙여두는 것이다. 악한 뜻이
오면 이를 끊는 것이 선(禪)이니, 어떤 때는 코 밑에 멈추어 있고 어떤 때는 마음속에 멈춰 있기도 하여, 붙어 있는 곳에서 멈추기 때문에, 사(邪)가 와서 사람의 뜻을 어지럽힌다면 한 가지 일로 똑바로 관하여, 모든 악이 와도 마땅히 마음이 움직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아야 한다.
멈춤[止]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세어서 멈추는 것이며, 둘째는 서로 따라서 멈추는 것이며, 셋째는 코끝에 멈추는 것이며, 넷째는 마음을 쉬어서 멈추는 것이다.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5락(樂)과 6입(入)을 제지(制止)하는 것이다. 들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그친다는 것은, 이른바 악이 다시 들어오지 못하고 코끝에 이르러 멈춘다는 것이요, 내쉬는 숨이 코끝에 이르러 죄다 멈춘다는 것은, 이른바 뜻이 다시 몸을 떠나서 악으로 향하지 않기 때문에 코끝에 멈춘다는 것이요, 또한 처음 숨을 들이쉴 때 문득 한 생각으로 향하고 다시 구르지 않아서 숨의 나고 듦을 또 다시 깨닫지 못함을 말하니, 이것이 바로 멈춤이 된다.
멈춘다는 것은,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는 앞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달아도 뒤의 뜻이 나오는 것은 깨닫지 못하므로, 앞의 뜻을 깨달아 뜻을 서로 관(觀)해서 곧바로 나고 드는 숨을 살피되 실패한다면 문득 상(相)을 받아들여 생사를 두려워해서 뜻을 버리고 곧바로 도의(道意)의 상(相)을 따르니, 서로 따르지 말고 다만 생각을 코끝에 붙여두어 5음(陰)의 인연을 다시 생각하지 않아 죄가 끊어지고 뜻이 소멸하며, 또한 헐떡거리지 않음이 바로 멈춤[止]이 된다.
서로 따르지 말라는 것은, 다시 뜻으로 나고 듦을 생각한다거나 5음의 인연을 따르지 않으며, 다시 헐떡거리지 않음을 말한다.
네 번째 관(觀)한다는 것은, 숨을 관하다가 실패할 때에는 신체(身體)를 관하여 숨 쉬는 것과 달리하는 것이니, 인연이 나타나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소멸하는 것이다.
마음과 뜻으로 상(相)을 받아들이는 것은, 이른바 뜻에는 얻으려고 하는 바가 있으나, 마음으로 인연은 모이면 마땅히 다시 소멸함을 헤아려서 곧바로 하고 싶은 바를 끊고 다시 향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마음과 뜻으로 상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인연을 인식하여 상(相)을 관함을 구족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의 인연을 인식해 알아서,
내쉬는 숨도 또한 관하고 들이쉬는 숨도 또한 관한다는 것이다. 관(觀)은 이른바 5음을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관을 구족하는 것이요, 또한 뜻에 응하여 의상(意相)을 관함이 두 가지 인연이 되어 안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한다.
내쉬는 숨이 다르고 들이 쉬는 숨이 다름을 관한다는 것은, 이른바 내쉬는 숨은 생사음(生死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사상음(思想陰)이 되며, 때로는 내쉬는 숨은 통양음(痛痒陰)이 되고 들이쉬는 숨은 식음(識陰)이 됨을 말하니, 인연을 따라 일어나 문득 음(陰)을 받으며, 뜻이 향하는 바에 떳떳함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다. 도인은 마땅히 이것을 분별하여 알아야 한다. 또한 내쉬는 숨이 소멸하는 것을 들이쉬는 숨을 생긴다고 하며, 들이쉬는 숨을 소멸하는 것을 내쉬는 숨이 생긴다고도 한다.
연고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과 만물에 대하여 뜻이 일어났다가 이미 멸하고 물건도 생겨났다가 다시 죽으니, 이것이 바로 연고가 없는 것이다.
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들이쉬는 숨이며, 들이쉬는 숨이 아니면 이것은 내쉬는 숨이라고 하는 것은, 숨을 내쉴 때 뜻으로 들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거나 숨을 들이쉴 때 뜻으로 내쉬는 숨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에 ‘아니다’라고 말한 것이다.
중신(中信)은, 이른바 도(道) 가운데 들어가 도의 인연을 보고 도를 믿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중신이다.
다섯 번째 돌이킨다[還]는 것은, 묶임[結]을 버리는 것이니, 이른바 몸의 일곱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여섯 번째 정(淨)은, 묶임을 버리는 것이니, 뜻의 세 가지 악을 버리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還]고 하며, 돌이킨다는 것은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몸을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악을 돌이킨다는 것이다.
다섯 번째인 돌이킴[還]을 얻어도 아직 몸이 있기도 하고 또한 몸이 없기도 하다. 왜냐하면, 뜻이 있으면 몸이 있고 뜻이 없으면 몸이 없으므로 뜻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돌이킨다’고 한다.
돌이킨다는 것은, 이른바 뜻으로 다시 악을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이니, 악을 일으킨다면 이것은 돌이킴이 아니다.
또한 이른바 먼저 몸을 돕고 뒤에 뜻을 돕는다고 하니, 살(殺)ㆍ도(盜)ㆍ음(婬)ㆍ양설(兩舌)ㆍ악구(惡口)ㆍ망언(妄言)ㆍ기어(綺語)를 하지 않는 것은 몸을 돕는 것이 되고, 탐ㆍ진ㆍ치를 하지 않는 것은 뜻을 돕는 것이 된다.
5음(陰)을 돌이킨다는 것은,
비유컨대 금을 사려다가 돌을 얻었다면 곧바로 땅에 버리고 쓰지 않듯이, 사람들은 모두 5음을 탐애하여 고통을 얻지만 문득 하려고 하지 않는 것이 바로 5음을 돌이킴이 된다.
무엇이 문득 소멸하여 다한 곳을 본 것인가? 이른바 무소유(無所有)가 바로 소멸하여 다한 곳이다.
이미 소유가 없다면 무슨 까닭에 ‘곳’이라고 하는가? 무소유한 곳이 네 곳이 있으니, 첫째 나는 새는 공중으로 곳을 삼고, 둘째 나한(羅漢)은 니원으로 곳을 삼고, 셋째 도는 유위(有爲)가 없음으로 곳을 삼고, 넷째 법은 관(觀)으로 곳을 삼는다.
내쉬고 들이쉬는 숨에서 5음의 상(相)을 받는다는 것은, 뜻이 삿되고 생각을 빠르게 하여, 굴려서 되돌려 추사(麤思)가 생기고 5음의 상을 받는 것이다. 받는다는 것은, 상(相)을 받지 않음을 받는 것이니, 5음의 상을 받음으로써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 소멸한다는 것은, 12인연을 받은 사람이 12인연을 좇아 태어나고 또한 12인연을 좇아 죽는 것이다.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은 5음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다.
어느 곳에서 일어나고 어느 곳에서 소멸하는지를 안다는 것은, 이른바 좋거나 나쁜 인연이 일어났다가 곧바로 다시 멸하며, 또한 몸과 기(氣)가 생기고 소멸함도 생각하면 문득 생겨나고 생각하지 않으면 문득 소멸함을 말하는 것이다.
뜻은 몸과 더불어 동등하니, 이 생사의 도를 끊음이 이 생사 가운데 있으며, 일체의 악한 일이 모두 뜻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지금은 먼저가 아니고 먼저는 지금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이른바 먼저 생각한 바는 이미 소멸하였으므로 지금 생각은 먼저 생각이 아니요, 또한 전생에 지은 바와 금생에 지은 바가 각기 복(福)을 얻음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행한 바의 선(善)은 먼저 행한 바의 악이 아님을 말함이요, 또한 지금 숨은 앞의 숨이 아니고 앞의 숨은 지금 숨이 아님을 말하는 것이다.
생사를 분별하기 위함이라는 것은, 뜻은 생각이 생겨나면 곧 생기고 생각이 소멸하면 소멸하기 때문에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고 말 한 것이다. 만물과 몸, 과거나 미래의 복도 끝내 다하고 마니,
왜냐하면, 모두 생겨나면 문득 소멸하고 소멸하면 문득 다하기 때문이니, 이미 다하는 것임을 알았다면 마땅히 힘써 구해야 할 것이다.
앞을 봄에 좇아서 온 바가 없다는 것은, 이른바 사람은 좇아서 온 바가 없으므로 뜻이 일어나면 사람이 된다고 하며, 또한 사람은 스스로 지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좇아서 온 바가 있다고 하니, 사람이 스스로 지어 스스로 얻음이 바로 좇아 온 바가 없는 것이다.
생사를 마땅히 분별해야 한다는 것은, 이른바 5음(陰)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이요, 또한 생사의 뜻과 사람의 뜻과 유상(有常)을 분별함을 안다는 것이며, 또한 무상(無常)을 분별할 줄 안다는 것이다.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은, 지금 당장에는 죄가 나타나지 않지만 사람이 생사의 즈음에 있어서는 마땅히 죄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뒤를 보아도 처소가 없다는 것이다.
아직 도의 자취를 얻지 못하였으나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열다섯 가지 뜻을 얻었으므로 중도에 죽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열다섯 가지 뜻을 얻어 곧바로 도를 따른다면, 또한 굴려서 올라가 아라한에 이를 것이다.
중도에 도의 자취를 얻어 또한 중도에 목숨이 다하지 않는 것은, 숨과 뜻과 몸의 세 가지 일에 있어서, 이른바 좋거나 나쁜 뜻은 마땅히 도의 자취를 얻었다가 또한 다시 중도에 무너지기도 하며, 숨은 죽었다가 다시 생겨나며, 좋은 뜻은 일어났다가 다시 소멸하기도 하지만, 몸은 또한 중도에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엇이 정(淨)인가? 모든 탐욕하는 대상은 부정(不淨)이 되니, 탐욕을 제거하면 바로 정(淨)이 된다.
무엇이 5음(陰)의 상(相)인가? 비유컨대 불은 음(陰)이 되고 땔감은 상(相)이 된다.
숨을 세는 것[數息]으로부터 정(淨)에 이르기까지 이 모두가 관(觀)이 되니, 이른바 몸과 서로 따르는 것과 멈춤[止]과 관(觀)과 돌이킴[還]과 정(淨)이 본래 존재가 없음을 관하는 것이다. 안의 뜻으로는 숨을 세고 밖의 뜻으로 나쁜 인연을 끊음이 바로 두 가지 뜻이 된다.
무슨 까닭에 먼저 안팎으로 신체를 관(觀)하지 않고, 도리어 먼저 숨을 세고 서로 따르며 멈추고 관하고 돌이키고 청정함을 하는가? 뜻이 청정하지[淨] 않기 때문에 몸을 보지 못하니, 뜻이 이미 청정하다면 문득 몸의 안팎에 열아홉 가지 도(道)가 있음을 다 본다. 열아홉 가지 행이 있는데,
사람이 열아홉 가지 병이 있기 때문에 또한 열아홉 가지 약이 있으니, 몸을 관하여 악로(惡露)를 생각하는 것은 바로 탐음(貪陰)을 멈추는 약이 되고, 4등심(等心)을 생각하는 것은 바로 성냄[瞋恚]을 그치는 약이 되며, 스스로 ‘본래 무슨 인연이 있는가?’라고 헤아리는 것은 바로 어리석음[愚癡]을 그치는 약이 되고, 안반수의(安般守意)는 바로 생각이 많은 것의 약이 된다.
스스로 신체의 안팎을 관할 것이니, 무엇이 신(身)이 되고, 무엇이 체(體)가 되는가? 뼈와 살은 신이 되고, 6정(情)이 합하여 체가 된다. 무엇이 6정인가? 눈은 빛에 합하며, 귀는 소리를 받아들이며, 코는 냄새를 향하며, 입은 맛에 끌리며, 매끄러움[細滑]에 몸이 쇠퇴하며, 뜻은 종자(種子)도 되고 어리석음도 되고 물건을 낳는 것도 된다.
신체가 안과 밖으로 중복되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의 탐구(貪求)함은 크고 작음이 있고 앞과 뒤가 있으니, 얻고자 하는 바를 마땅히 분별하여 관해야 한다.
관한다는 것은, 보는 것이 생각이 되고 생각으로 인해 보이게 되니, 관한다는 것은 즉 아는 것이다.
신체를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앉아서는 일어남을 생각하고 일어나서는 뜻을 생각하여 소행(所行)하는 뜻과 소착(所着)하는 식(識)을 여의지 않는 것이 바로 신체를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무엇이 생각이 소멸한 때가 되는가? 나고 듦을 생각하여 기(氣)가 다했을 때 뜻과 숨이 소멸하는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비유컨대 허공에 그리려 해도 그릴 곳이 없는 것처럼 생사의 뜻과 도의 뜻도 모두 그러하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숨과 뜻을 설명할 수 없어서 저절로 설명이 소멸한 때이다. 날숨과 들숨에서 생각이 소멸한 때란, 물건은 인연을 좇아 생기므로 근본을 끊는 것이 소멸한 때가 된다.
안팎으로 통양(痛痒)을 보고 관한다는 것은, 통양이 좇아 일어나는 바를 보면 문득 관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고 관함이 된다. 안팎의 통양이라는 것은, 밖의 좋은 물건은 외양(外痒)이 되고 밖의 나쁜 물건은 외통(外痛)이 되며, 안의 맞는 뜻은 내양(內痒)이 되고 안의 맞지 않는 뜻은 내통(內痛)이 된다.
안에 있으면 내법(內法)이 되고 밖의 인연에 있으면
외법(外法)이 되며, 또한 눈은 안이 되고 빛은 밖이 되며, 귀는 안이 되고 소리는 밖이 되며, 코는 안이 되고 냄새는 밖이 되며, 입은 안이 되고 맛은 밖이 되며, 마음은 안이 되고 생각은 밖이 되며, 좋고 매끄러움을 보고 뜻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양(痒)이 되고, 추악(麤惡)함을 보고 뜻으로 내키지 않는 것이 바로 통(痛)이 되니, 모두 죄에 떨어진다.
통양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만약 사람이 팔뚝이 아파도 아프다는 뜻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저 일체 몸의 아픔도 이와 같다고 생각하여 아픈 데에 뜻을 두지 않는다면, 아픔을 멈춤이 된다. 생각할 수도 있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어서 생각이 아픈 데에 집착한 바가 없으며, 스스로 몸을 아껴 마땅히 다른 사람의 몸을 관하고 뜻으로 다른 사람의 몸을 아껴 마땅히 스스로의 몸을 관하는 것도 또한 멈춤[止]이 된다.
안팎으로 통양이 거듭 나오는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경계[色]를 보고 사랑함에 박하고 후함이 있어서 그 뜻이 평등하지 않아 관함에 많거나 적거나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관하는 도를 두 가지로 분별하니, 마땅히 안으로는 어리석음이 있는 지를 관하고 밖으로는 자증(自證)할 것을 관해야 한다.
몸과 마음의 통양(痛痒)이 각자 다르니, 춥고 더움 그리고 칼과 몽둥이의 극심한 고통을 얻는 것은 몸의 통(痛)이 되고, 맛있는 음식과 편안한 수레에 타는 것과 좋은 옷과 몸에 편리한 모든 것은 몸의 양(痒)이 된다. 마음의 통(痛)은 자신을 걱정하고 다시 다른 사람과 만 가지 물건을 걱정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통이 되고, 마음이 좋아하는 바와 모든 환희를 얻는 것이 바로 마음의 양(痒)이 된다.
뜻의 상(相)을 관하는 것에 두 가지 인연이 있으니, 속으로 악을 끊고 도를 생각하는 것과 5락(樂)ㆍ6쇠(衰)를 마땅히 제지하고 끊는 것이다.
관한다는 것은, 스스로 몸을 관하는 것이니, 몸은 추(麤)와 세(細)를 알지 못하므로 얻어서 마침내 깨닫는 것이 바로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하면 숨도 또한 이 뜻이요, 세는 것도 또한 이 뜻이니, 셀 때에 숨을 관하는 것이 뜻으로 뜻의 상을 관함이 된다.
뜻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음탕[婬]한 짓을 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하지 않으며, 성[瞋恚]을 내려고 하면 제지하여 성내지 않으며, 어리석은 짓을 하려 하면 제지하여 짓지 않으며, 탐하려고 하면
제지하여 구하지 않아서, 모든 악한 일을 일절 향하지 않음이 바로 관하여 멈춤이 된다. 또한 『37품경』을 알아서 항상 생각하여 여의지 않음이 멈춤이 된다.
숨을 내쉬고 들이쉴 때 다[盡]하고 정(定)하여 문득 관한다는 것은, 다한다는 것은 죄가 다함을 말하고, 정은 숨이 뜻을 멈춤을 말한다.
정관(定觀)은 관하여 멈춰서 돌이켜 청정함을 말하고, 다하여 멈춤[盡止]은 내가 능히 이를 설하고 이를 깨우쳤더라도 이것을 두루 다시 하는 것이 바로 다하여 멈춤이 된다. 숨을 일으키는 곳에서 만약 보시하여 복을 지음과 일체의 선법(善法)이 이미 일어났다가 곧바로 멸하고, 다시 뜻이 삿됨을 생각하여 죄행(罪行)을 향하여 익히며, 또한 무수한 전세(前世)와 금세(今世)에 뜻이 이와 같이 서로 따르지 않고, 다른 사람도 또한 그러함을 이미 깨우쳐 알았다면, 마땅히 끊어야 하고, 이미 끊었다면 안팎의 뜻으로 뜻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안팎의 법을 본받는다는 것은, 안의 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은 다른 사람을 말하며, 계를 지니는 법도 있고 계를 지니지 않는 법도 있으니,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본받는 것이다.
안의 법은, 지혜를 행하여 『37품경』을 여의지 않으며, 일체의 다른 일을 뜻 가운데 두지 않고, 도를 행하여 도를 얻음이 바로 안의 법이 된다. 밖의 법은, 생사를 따르고 생사를 행하면 문득 생사를 얻어 벗어나지 못하므로 일체를 마땅히 끊어야만 하니, 이미 끊었다면 이것이 바로 안팎의 법을 관하여 멈춤이 된다.
법을 관하여 멈춘다는 것은, 일체의 사람들이 모두 자기 몸을 제 몸인 줄 알지만 자세히 헤아린다면 내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눈이 있고 색이 있으나 눈도 또한 몸이 아니고 색도 또한 몸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미 죽으면 눈이 있어도 보이는 바가 없고, 또한 색이 있어도 응하는 바가 없으니, 몸이 이와 같다면 다만 식(識)이 있을 뿐이지 또한 몸은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식은 형체도 없고 또한 가볍게 멈추는 곳도 없으니, 이와 같이 헤아린다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도 또한 그러하며, 이렇게 헤아림을 얻는다면 이것이 바로 법을 관하여 멈추는 것이다. 또한 악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멈춤이 되고, 악을 생각하는 것은 멈춤이 아니니, 왜냐하면 뜻으로 행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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