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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878 불설결정의경(佛說決定義經)

by Kay/케이 2024. 9.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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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불설결정의경(佛說決定義經)

 

대송신역삼장성교서(大宋新譯三藏聖教序)1)

어제(御製)

위대하구나,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이여. 헤매는 중생들을 교화해 인도하시고, 으뜸가는 성품을 널리 드날리셨도다. 넓고 크고 성대한 언변이여, 뛰어나고 훌륭한 자도 그 뜻을 궁구하지 못하는구나. 정밀하고 은미하고 아름다운 말씀이여, 용렬하고 우둔한 자가 어찌 그 근원을 헤아릴 수 있으랴.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현묘한 진공(眞空)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으며, 만상(萬象)을 포괄하는 비유는 끝이 없네. 법 그물[法網]의 벼릿줄을 모아 끝이 없는 바른 가르침을 펴셨고, 사생(四生)을 고해에서 건지고자 삼장(三藏)의 비밀스러운 말씀을 풀어주셨다. 하늘과 땅이 변화하여 음과 양을 이루고, 해와 달이 차고 기울며 추위와 더위를 이뤘으니, 크게는 선과 악을 말씀하셨고, 세밀하게는 항하의 모래알에 빗대야 할 정도네. 다 서술할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온갖 일들을 마치 상법(像法)2)을 엿보듯이 하고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이 하였다. 이는 육정(六情)3)을 벗어나 길이 존재하고 천겁이 지나도록 오래갈 만한 것이며, 마치 수미산이 겨자씨에 담기 듯 여래께서 끝없는 세계에서 걸림이 없으신 것이다.
달마(達磨)께서 서쪽에서 오시자 법이 동토에 전해졌고, 오묘한 이치를 선양하시자 대중이 돌아갈 길을 순순히 따랐으니, 피안(彼岸)은 보리요 애욕의 강은 생멸이라, 오탁의 악취(惡趣)에서 보살행을 실천하고, 삼업(三業)의 길에서 빠진 자들을 건지셨다. 세상에 드리운 경은 궁구하기 어렵지만 도는 사사로움이 없어 영원히 태평하도다. 설산(雪山)의 패엽(貝葉)4)이 눈부신 은대(銀臺)와 같고, 세월의 연라(煙蘿)5)가 저 멀리 향계(香界)6)를 일으켰지만 높고 우뚝하여 측량하는 자가 드물고, 멀고 아득하여 이름을 붙이기 어렵다. 이런 까닭에 도(道)를 깨달은 십성(十聖)7)과 덕(德)을 갖춘 삼현(三賢)8)께서 지극한 도를 건원(乾元)9)에서 일으키고 온갖 오묘함을 태역(太易)10)에서 낳아 무성한 생명체들을 총괄해 어둠을 뚫고 한 가닥 빛을 비추었으며, 저 시시비비를 단절하고 이 몽매함을 깨우쳤던 것이다.
서역의 법사 천식재(天息災) 등11)은 항상 사인(四忍)12)을 지니며 삼승(三乘)을 일찌감치 깨달은 분들이니,
불경의 참된 말씀을 번역하여 인간과 천상의 성스러운 가르침을 이었다. 이는 꽃망울이 거듭 터진 것이요, 국운이 창성할 때를 만난 것이니, 문장(文章)에서 오성(五聲)13)을 윤택하게 하였고, 풍율(風律)14)에서 사시(四始)15)를 드러냈다. 당당한 행동거지에 온화하고 아름답도다. 광대한 세월 어둠에 빠졌던 세계가 다시 밝아 현묘한 문이 환하게 드러났으며, 궤범이자 두루한 광명인 오묘한 법이 청정한 세계에서 이름을 드날렸다. 유정을 이롭게 하여 함께 깨달음의 언덕에 오르고, 장애를 만드는 일 없이 병들고 지친 자들을 모두 구제하였으며, 드러내지 않고 자비를 행하며 만물 밖으로 광대하게 노닐고, 부드러움으로 탐학한 자들을 조복해 어리석음을 씻고 깨우쳐 주었다. 소승의 성문(聲聞)을 연설하여 그 위의에 합하고 대승의 정각(正覺)을 논하여 그 성품을 정립하자, 모든 생명체들이 깨달아 복을 받았고, 삼장의 교법에서 결락된 것들이 다시 흥성하였다.
허깨비에 홀려 길을 잃은 것이니, 화택(火宅)16)은 심오한 비유로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런 가르침을 시설하셨지만 알지 못하는 자들이 많다. 이에 “선념(善念)이 생기면 한량없는 복이 남몰래 찾아오고, 악업(惡業)이 일어나면 인연 따라 모두 타락한다”17)는 말씀으로 사부대중을 길들이고 시방세계에서 보살행을 쌓았다. 금륜왕[金輪]18)에게 꽃비를 쏟아 붓고 대궐에서 항하 모래알처럼 많은 세계를 보호하였으니, 유정천(有頂天)에 부는 바람19)도 파괴하지 못할 것이고, 끝이 보이지 않는 홍수도 휩쓸지 못하리라. 맑고 고요해 담담한 것이 원만하고 밝으며 청정한 지혜요, 성품이 공하여 물듦이 없는 것이 망상으로부터 해탈하는 인연이니, 이로써 마음의 밭에서 번뇌를 벗어날 수 있을 것이고, 이로써 우주에서 청량을 얻을 수 있으리라.
짐은 부끄럽게도 박학하지도 못하고 석전(釋典)20)에 능통하지도 못하니, 어찌 감히 서문을 써서 후인에게 보일 수 있는 자이겠는가? 반딧불이나 횃불과 같아 찬란한 태양과 견주기에 턱없이 부족하니, 작은 소라로 바다를 측량하려다 그 깊은 연원을 끝내 밝히지 못하는 자일 따름이로다!
불설결정의경(佛說決定義經)


법현(法賢) 한역
김영덕 번역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대비구[大苾芻] 대중 1,250인과 함께 계셨다.
그때 세존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너희들을 위하여 매우 깊은 결정정의(決定正義)를 자세히 설하노니,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리라. 그 뜻은 깊고 원대하고 순수하고 전일(專一)하며, 잡됨이 없고 맑고 청정한 범행의 모습을 갖추었으니, 너희들은 자세히 듣고 이를 잘 생각하여라.”
그때 모든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룩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것을 결정정의라 하옵니까? 저희들은 기쁘게 듣겠사오니, 오직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저희를 위하여 설해 주소서.”
그때 부처님께서 모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결정의(決定義)라는 것은, 말하자면 5온(蘊)ㆍ5취온(取蘊)ㆍ18계(界) ㆍ12처(處)ㆍ12연생(緣生)ㆍ4성제(聖諦)ㆍ22근(根)ㆍ여래십력(如來十力)ㆍ4무소외(無所畏)ㆍ4선정(禪定)ㆍ4무색정(無色定)ㆍ4무량행(無量行)ㆍ4무애지(無礙智)ㆍ4삼마지상(三摩地想)ㆍ4념처(念處)ㆍ4정단(正斷)ㆍ4신족(神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지(覺支)ㆍ8정도(正道)니라. 이와 같은 등의 법(法)을 결정정의라 이름하느니라.
5온이란, 말하자면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 등이니, 이와 같은 것을 5온이라 이름하느니라.
5취온(取蘊)1)이란, 말하자면 색취온(色取蘊)ㆍ수취온(受取蘊)ㆍ상취온(想取蘊)ㆍ행취온(行取蘊)ㆍ식취온(識取蘊) 등이니, 이와 같은 것을 5취온이라 이름하느니라.
18계란, 말하자면 안계(眼界)ㆍ색계(色界)ㆍ안식계(眼識界)ㆍ이계(耳界)ㆍ성계(聲界)ㆍ이식계(耳識界)ㆍ비계(鼻界)ㆍ향계(香界)ㆍ비식계(鼻識界)ㆍ설계(舌界)ㆍ미계(味界)ㆍ설식계(舌識界)ㆍ신계(身界)ㆍ촉계(觸界)ㆍ신식계(身識界)ㆍ의계(意界)ㆍ법계(法界)ㆍ의식계(意識界) 등이니, 이와 같은 것을 18계라 이름하느니라.
12처란, 말하자면 내안처(內眼處)ㆍ외색처(外色處)ㆍ내이처(內耳處)ㆍ외성처(外聲處)ㆍ
내비처(內鼻處)ㆍ외향처(外香處)ㆍ내설처(內舌處)ㆍ외미처(外味處)ㆍ내신처(內身處)ㆍ외촉처(外觸處)ㆍ내의처(內意處)ㆍ외법처(外法處) 등이니, 이와 같은 것을 12처라 이름하느니라.
12연생이란, 말하자면 무명(無明)은 행(行)을 연하고, 행은 식(識)을 연하고, 식은 명색(名色)을 연하고, 명색은 6처(處)를 연하고, 6처는 촉(觸)을 연하고, 촉은 수(受)를 연하고, 수는 애(愛)를 연하고, 애는 취(取)를 연하고, 취는 유(有)를 연하고, 유는 생(生)을 연하고, 생은 늙음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고뇌를 연하느니라. 이와 같이 곧 하나의 큰 고통[苦蘊]이 모여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곧 온법(蘊法)이 있게 되느니라. 만약 인연이 없다면 온법이 곧 멸하나니, 말하자면 무명이 멸하면 곧 행이 멸하고, 행이 멸하면 곧 식이 멸하고, 식이 멸하면 명색이 멸하며, 명색이 멸하면 곧 6처가 멸하며, 6처가 멸하면 곧 촉이 멸하고, 촉이 멸하면 곧 수가 멸하며, 수가 멸하면 곧 애가 멸하고, 애가 멸하면 곧 취가 멸하고, 취가 멸하면 곧 유가 멸하고, 유가 멸하면 곧 생이 멸하고, 생이 멸하면 곧 태어남과 늙음과 병듦과 죽음과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이 멸하느니라. 이와 같이 하나의 큰 고통[苦蘊]이 멸하느니라.
이와 같은 모든 법은 무명(無明)이 인연이 되어 있게 되는 것이니라.”
“생멸(生滅)이 연이 된다는 것은 무엇이옵니까?”
“말하자면 선제(先際:과거)를 알지 못하며, 후제(後際:미래)도 알지 못하고 중제(中際:현재)도 알지 못하며, 내법(內法)도 알지 못하고 외법(外法)도 알지 못하고 내외법(內外法)을 함께 알지 못하며, 선업(善業)도 알지 못하고 불선업(不善業)도 알지 못하고 선불선업(善不善業)을 함께 알지 못하며, 인(因)을 알지 못하고 과(果)를 알지 못하고 인과(因果)를 함께 알지 못하며, 이미 생긴 인연법[已生緣法]을 알지 못하고 아직 생기지 아니한 인연법[未生緣法]을 알지 못하고 현재의 인연법[現生緣法]도 알지 못하며, 부처님도 알지 못하고 법도 알지 못하고 승가[僧]도 알지 못하며, 고통이라는 법[苦法:苦諦]을 알지 못하고 고통의 원인[集法:集諦]을 알지 못하고 소멸한다는 법[滅法:滅諦]도 알지 못하고 진리에 이르는 길[道法:道諦]도 알지 못하며, 선법(善法)을 알지 못하고 불선법(不善法)도 알지 못하며, 죄의 법[罪法]을 알지 못하고 복의 법[福法]도 알지 못하며, 행할 수 있는 법[可行法]을 알지 못하고 행할 수 없는 법[不可行法]도 알지 못하며,
높고 낮은 법[高下法]을 알지 못하고 유위무위법(有爲無爲法)도 알지 못하느니라. 이와 같이 알지 못하니, 능히 흑백의 법[黑白法:선악법] 등에서 능히 모양이 없는 지혜[無相智]를 일으키지 못하므로 이 무명으로 말미암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며, 과실(過失)이 되며, 나아가 여실지(如實智)를 알아아 능히 적정열반(寂靜涅盤)을 깨닫지 못하느니라.
말하자면 이 무명의 체성(體性)이 미혹하고 어두워 어리석음이 순일(純一)하니, 마치 맹인은 오직 어두운 길만 다니듯이 모든 번뇌를 모아 지혜를 감손하여 모든 장애의 법에서 능히 벗어나지 못하느니라. 이 무명이 명(明)에 장애가 되고, 무명이 고통이 되고, 무명이 독의 그릇이 되고, 무명이 노끈으로 얽맴이 되며, 무명이 독의 뿌리가 되고, 무명이 독의 나무가 되며, 무명이 근본 번뇌가 되고, 무명이 근본 무명에 수반하여 일어나는 번뇌[隨煩惱]2)가 되리니, 무명은 이 뒤바뀜이 있는 곳[顚倒處]이요, 무명은 캄캄한 방이요, 무명은 어리석고 어두운 것이니, 이와 같은 등의 뜻을 무명이라 하느니라.
이를 인연하여 행법(行法)이 일어나니, 행법이란 행(行)에 세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몸으로 행하고 말로 행하고 뜻으로 행함이니라. 몸으로 행함[身行]이란 말하자면 나오고 들어가는 숨은 몸에 의지하고 몸에 매달려 있음이니, 몸에 의지함으로 말미암아 숨이 나오고 들어가므로 몸으로 행한다고 이름하느니라. 말로 행함[語行]이란 이른바 결점을 논란[論難]하여 분별함이니, 곧 이 논란과 분별함이라는 말 때문에 말로 행함이라 이름하느니라. 뜻으로 행함[意行]이란 말하자면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심소법(心所法)3) 등이 마음에 의지하고 마음에 속하여 있으니, 마음에 의지하는 까닭에 뜻으로 행함이라 하느니라.
다시 세 가지 행(行)이 있나니, 무엇이 세 가지인가. 이른바 복되는 행[福行], 죄가 되는 행[罪行], 흔들리지 않는 행[不動行]이니, 이것을 세 가지 행이라 하느니라.
행이 연(緣)이 됨으로 말미암아 식법(識法)이 일어나느니라. 식법이란 식(識)에 여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안식(眼識)ㆍ이식(耳識)ㆍ비식(鼻識)ㆍ설식(舌識)ㆍ신식(身識)ㆍ의식(意識)을 6식(識)이라 하느니라.
식이 연이 됨으로 해서 명색(名色)이 일어나니, 명색이란 말하자면
색온(色蘊)ㆍ수온(受蘊)ㆍ상온(想蘊)ㆍ행온(行蘊)ㆍ식온(識蘊)이니라. 색(色)이란 다섯 가지 안의 대상[內五塵]이며, 모두 4대(大)로 이루어졌느니라. 4대란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이니라. 지(地)의 체(體)는 견고하고 무거우며, 수(水)의 성품은 흘러서 윤택하게 함이요, 따뜻한 것은 화(火)이고, 움직임을 풍(風)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4대로 이루어진 5진(塵)을 색온(色蘊)이라 이름하느니라. 이 온법(蘊法)에서 4온(蘊)을 명(名:정신)이라 이름하고, 하나의 온을 색(色:물질)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은 5온은 명색(名色)이라 이름하는데, 명색을 연하여 6처(處)가 일어나느니라. 6처란 말하자면 내육처(內六處)로서 안처(眼處)ㆍ이처(耳處)ㆍ비처(鼻處)ㆍ설처(舌處)ㆍ신처(身處)ㆍ의처(意處)이니라. 이것을 6처라 이름하느니라.
6처가 연이 되어 촉법(觸法)이 일어나는데, 촉에 여섯 가지가 있느니라. 말하자면 안촉(眼觸)ㆍ이촉(耳觸)ㆍ비촉(鼻觸)ㆍ설촉(舌觸)ㆍ신촉(身觸)ㆍ의촉(意觸)이니라. 이들을 촉이라 이름하며, 촉이 연이 됨으로 해서 수법(受法)이 일어나느니라.
수(受)에는 세 가지가 있는데, 이른바 고수(苦受)ㆍ낙수(樂受)ㆍ사수(捨受)이니라. 이와 같이 안촉(眼觸)은 이러한 3수(受)를 연하고, 나아가 의촉(意觸)에 이르기까지 또한 이와 같으니, 이것을 수라고 하느니라.
수를 연하여 애법(愛法)이 일어나느니라. 애(愛)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눈은 물질[色]을 보고, 귀는 소리를 듣고 코는 냄새를 맡고 혀는 맛을 알고 몸은 촉감을 느끼고 뜻은 법을 분별하는 것이니라.
여섯 가지 법을 탐함으로 말미암아 애(愛)란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애를 연으로 하기에 집착하는 법[取法]이 일어나는 것이니라. 집착하는 데 네 가지가 있으니, 말하자면 욕취(欲取)ㆍ견취(見取)ㆍ계금취(戒禁取)ㆍ아어취(我語取)이니라.
애착함으로 말미암아 집착[取]이라는 이름을 얻는 것이니라. 취(取)를 연으로 함으로 해서 존재라는 법[有法]이 일어나느니라.
존재라는 법에 세 가지가 있으니, 욕유(欲有)ㆍ색유(色有)ㆍ무색유(無色有)이니라.
욕유(欲有)라 함은 10악취(惡趣) 및 인취(人趣)ㆍ천취(天趣)이니라. 10악취란 여덟 지옥[八地獄]을 말하느니라. 첫째가 등활(等活)지옥, 둘째가 흑승(黑繩)지옥, 셋째가 중합(衆合)지옥, 넷째가 호규(號叫)지옥, 다섯째지옥, 여덟째가 무간(無間)지옥, 아홉째가 방생취(傍生趣)이고, 열째가 아귀취(餓鬼趣)이니 이와 같은 열 가지를
악취(惡趣)라 하느니라.
인취(人趣)란 말하자면 사대주(四大洲)이니, 남섬부주(南贍部洲)ㆍ동승신주(東勝身洲)ㆍ서우화주(西牛貨洲)ㆍ북구로주(北俱盧洲)이니라. 남섬부주는 그 크기가 가로 너비 7천 유순(由旬)이며, 이 주(洲)의 모양은 북쪽이 넓고 남쪽이 좁아서 마치 수레 모양 같다. 동승신주는 그 크기가 가로 너비 8천 유순이며, 그 주의 모양은 마치 반달과 같다. 서우화주는 그 크기가 가로 너비 9천 유순이며, 그 주의 모양은 마치 둥근 달과 같다. 북구로주는 그 크기가 가로 너비 십천(十千) 유순이며, 그 주의 모양은 사방이 반듯하여 마치 연못 같다. 이와 같은 사주를 이름하여 인취(人趣)라 하느니라.
천취(天趣)란 욕계육천(欲界六天)이니, 사왕천(四王天)ㆍ도리천(忉利天)ㆍ야마천(夜摩天)ㆍ도솔천(兜率天)ㆍ화락천(化樂天)ㆍ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니라.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욕계육천이라 하느니라. 이들 모든 취(趣)를 욕유(欲有)라 하느니라.
색유(色有)에는 18천(天)이 있으니, 말하자면 범중천(梵衆天)ㆍ범보천(梵輔天)ㆍ대범천(大梵天)ㆍ광천(光天)ㆍ무량광천(無量光天)ㆍ광음천(光音天)ㆍ정천(淨天)ㆍ무량정천(無量淨天)ㆍ변정천(遍淨天)ㆍ무운천(無雲天)ㆍ복생천(福生天)ㆍ광과천(廣果天)ㆍ무상천(無想天)ㆍ무번천(無煩天)ㆍ무열천(無熱天)ㆍ선현천(善現天)ㆍ선견천(善見天)ㆍ색구경천(色究竟天)이니라. 이들 모든 천계를 색유라 하느니라.
무색유(無色有)에는 네 가지의 천이 있는데, 이른바 공무변처천(空無邊處天)ㆍ식무변처천(識無邊處天)ㆍ무소유처천(無所有處天)ㆍ비상비비상처천(非想非非想處天)이니라. 이들 모든 천을 무색유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3유(有)를 유(有)라 이름하며, 유를 인연함으로 말미암아 태어나는 법[生法]이 일어나니, 태어남[生]이란 모든 유정이 이 온을 버리고 업의 과보를 따라 다시 계취(界趣:三界ㆍ六趣)에서 온의 모습[蘊相]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생이라 이름하는 것이니라.
생을 연하여 늙고 죽음이 있느니라.
늙음[老]이란 모든 유정이 온법(蘊法)의 과보가 성숙하여 마음과 식(識)이 미혹하고 산란하여 잊거나 잃어버림이 많아지고 머리가 희어지며 얼굴이 주름지고 몸의 힘이 파리하고 약하며 지팡이로 거동하며 천식으로 헐떡거리고 점점 힘이 적어지며 모든 근(根:六根)이 쇠하고 냄새나니, 이것을 늙음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죽음[死]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유정의 능동적인 것을 따라 업을 불러서 수명이 끝나 다하게 되니, 식(識)이 집수(執受)를 버려 명근(命根)이 끊어져 멸하며 모든 온(蘊)이 흩어지나니, 이것을 죽음이라 이름하느니라. 늙음은 일정한 모양이 없고 죽음에 붙어서 지탱하며 두 법이 하나로 합하여 있기 때문에 노사(老死)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12연법(緣法)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성제법(聖諦法)이라 하는가? 이른바 고제(苦諦)ㆍ집제(集諦)ㆍ멸제(滅諦)ㆍ도제(道諦)이니라. 고제란 태어남의 고통[生苦]ㆍ늙음의 고통[老苦]ㆍ병듦의 고통[病苦]ㆍ죽음의 고통[死苦]ㆍ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고통[愛別離苦]ㆍ원수와 미운 사람과 만나는 고통[怨憎會苦]ㆍ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고통[求不得苦]ㆍ5음이 왕성한 고통[五陰盛苦]이니라. 이와 같은 등의 고통을 고제라 하느니라.
집제란 말하자면 탐애법(貪愛法)이니, 이 탐애로 말미암아 탐착이 생기며, 탐착 때문에 업이 발생하여 윤택하게 자라서 불러 모은 것이 인(因)이 되니, 이것을 집제라 이름하느니라.
멸제란 말하자면 탐애법과 다른 번뇌를 모두 다 끊어 없애고 적멸(寂滅)의 이치를 깨닫는 것으로 이것을 멸제라 하느니라.
도제란 곧 8정도(正道)이니, 즉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으로 이 8정도를 도제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4제는 바른 지혜[聖智]로 볼 수 있으므로 4성제(聖諦)라 하느니라.
또다시 어떤 것을 22근(根)4)이라 하는가? 이른바 안근(眼根)ㆍ이근(耳根)ㆍ비근(鼻根)ㆍ설근(舌根)ㆍ신근(身根)ㆍ남근(男根)ㆍ여근(女根)ㆍ명근(命根)ㆍ의근(意根)ㆍ낙수근(樂受根)ㆍ고수근(苦受根)ㆍ희수근(喜受根)ㆍ우수근(憂受根)ㆍ사수근(捨受根)ㆍ신근(信根)ㆍ진근(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ㆍ미지당지근(未知當知根)ㆍ
이지근(已知根)ㆍ구지근(具知根)이니, 이와 같은 것을 22근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10력(力)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여래지(如來智)이니, 모든 유정의 이치와 이치가 아닌 것을 아는 법[處非處法]을 여실히 깨달아 아는 것을 여래의 첫 번째 처비처지력(處非處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다시 과거ㆍ현재ㆍ미래 세상에 있는 중생과 모든 업을 행하는 법의 곳곳에 태어나는 인연 과보를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모두 다 깨달았나니, 이것을 여래의 두 번째 업보지력(業報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모든 선정법(禪定法)ㆍ해탈ㆍ삼마지ㆍ삼마발저(三摩鉢底)5)와 모든 번뇌의 법[諸漏法]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깨달아 아느니라. 이것을 여래의 세 번째 정력(定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모든 중생류(衆生類)의 근성(根性)의 수승하고 하열한 갖가지 차별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여실하게 깨달아 아느니라. 이것을 여래의 네 번째 근승렬지력(根勝劣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모든 중생의 종류가 믿고 아는 갖가지 종류가 같지 아니함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여실하게 깨달아 아느니라. 이것을 여래의 다섯 번째 신해지력(信解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모든 중생 종류가 가진 갖가지 계취(界趣)의 차별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여실하게 깨달아 아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여섯 번째 계취지력(界趣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모든 중생 종류가 가진 낙욕(樂欲)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여실히 깨달아 아시느니라. 이것을 여래의 일곱 번째 낙욕지력(樂欲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과거 한량없이 크고 수도 없이 많은 세계 가운데 있는 중생의 갖가지 일, 말하자면 한 번 태어나거나 열 번 태어나거나 백 번 태어나거나 또 백 번 천 번 태어나거나 나아가 무수한 백천만 번 태어나거나, 이와 같은 무수한 성겁(成劫)ㆍ괴겁(壞劫) 가운데 중생이 여기서 죽어 저곳에 태어나고 저곳에서 죽어 이곳에 태어나며, 나아가 족성(族姓)의 귀하고 천한 이름이나 음식의 쓰고 단 것[苦樂], 수명의 길고 짧음 등의 이와 같은 모습과 이와 같은 인연을 갖춘, 이와 같은 과거 한량없는 세계 속의 갖가지 일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능히 깨달아 아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여덟 번째 숙명지력(宿命智力)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또 청정한 천안(天眼)으로써 중생의 귀하고 천함과 높고 낮음과 잘생기고 추한 것과 태어나고 죽는 데에, 혹은 선도(善道)6)에 태어나거나 악취(惡趣)에 떨어짐과, 그리고 그 중생이 행하는 업을 관찰하여 보시나니, 이른바 몸의 착하지 못한 업으로 온갖 삿된 행을 하고 입의 착하지 못한 업으로 성현(聖賢)을 헐뜯어 비방하고 뜻의 착하지 못한 업으로 삿된 견해를 일으키어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수명을 마친 뒤에는 악도 가운데 떨어지며, 또다시 중생이 몸으로 착한 업을 지어서 삿된 행을 행하지 아니하며, 입으로 착한 업을 지어서 성현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뜻으로 착한 업을 지어서 바른 견해[正見]를 일으키며, 이러한 인연으로 말미암아 수명이 끝난 뒤에 사람 세계나 천계에 태어나는 이와 같은 등의 일을 천안으로 다 능히 보고 관찰하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아홉 번째 천안지력(天眼智力)이라 하느니라.
또다시 여래는 저 중생의 모든 번뇌를 아시나니, 이미 다하여 번뇌 없는 해탈[無漏解脫]과 지혜해탈(智慧解脫)을 깨달아 아시며, 스스로의 신통력으로 이와 같은 법을 깨달아 나의 삶[生]은 이미 다하고 범행(梵行)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바를 이미 마쳐서 다시 태어남[後有]을 받지 아니하는 이와 같은 법을 부처님의 지혜의 힘으로 능히 다 깨달아 아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열 번째 누진지력(漏盡智力)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열 가지 힘[十力]을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께서는 10력으로 말미암아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를 하시어 대법륜을 굴린다고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무소외(無所畏)라 하는가? 이른바 여래ㆍ응공ㆍ정등정각께서는 대중 가운데에서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느니라.
‘나는 스스로의 지혜로 여실한 도(道)를 타고[乘] 와서 정각을 이루어 사자후를 하여 미묘한 법륜을 굴리나니, 사문ㆍ바라문ㆍ천ㆍ사람ㆍ마왕과 범천 가운데 능히 동등할 자가 없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여래의 일체지무외(一切智無畏)라 하느니라.
여래는 이미 안락하고 고요하며 위없이 훌륭한 곳[勝處]의 공덕의 과보법을 얻어 모든 번뇌가 이미 다하여 종자와 습기[種習]가 함께 없어졌나니, 이것을 여래의 누진무외(漏盡無畏)라 하느니라.
여래는 다시 모든 성문(聲聞)의 대중들을 위하여 괴로움이라는 진리를 열어 보여 번뇌를 여의고 고통이 끝까지 다하게 설하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출고도무외(出苦道無畏)라 하느니라.
여래는 다시 모든 성문을 위하여 장애되는 법[障法]을 설하여 그들을 벗어나게 하시나니, 이것을 여래의 장도무외(障道無畏)라 하며, 이와 같은 것을 4무외법이라 하느니라.
또다시 어떤 것을 4선정(禪定)이라 하는가? 이른바 온갖 욕심과 모든 염법(染法)을 여의고 의혹하며 분별하는 생각을 끊는 것을 첫 번째 이생희락정(離生喜樂定)이라 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욕심을 여의고 분별하는 생각을 끊어 버리고 나서 마땅히 불교 이외의 법[外法]을 모두 다 끊어 버리고 안으로 다시 고요한 선정[寂定]에서 안팎의 법[內外法]을 거두어 모두 다 하나에 귀결시키는 것을 두 번째 정생희락정(定生喜樂定)이라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기쁘고 즐거운 생각을 버리면 몸에 기쁨과 즐거움을 받아들일 것이 없나니,
이것을 세 번째 이희묘락정(離喜妙樂定)이라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괴로움과 즐거움의 법을 버리고 근심과 기쁜 생각이 없이 모든 법에 청정하나니, 이것을 네 번째 사념청정정(捨念淸淨定)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이름하여 4선정법(禪定法)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무색정(無色定)이라 하는가? 이른바 그 선정[定]을 닦아 아래의 색상(色相:물질의 모습)을 싫어하고 위로 무색(無色:정신)을 좋아하며 무색으로 말미암아 오직 허공만 있어 이에 허공의 끝이 없는 것을 관찰하여 이와 같은 생각을 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공무변처정(空無邊處定)이라 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그 인연하는 공무변처를 여의고 나서 다시 능히 인연하는[能緣] 식(識)도 또한 끝이 없다는 것을 생각하나니, 이러한 까닭에 식무변처정(識無邊處定)이라 이름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그 능연의 식을 여의고 나서는 마땅히 다시 능연(能緣)과 소연(所緣)이 함께 없다는 것을 생각하나니, 이런 까닭에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이라 이름하느니라.
다시 다음에 그 무소유를 여의고 나서는 마땅히 다시 그 거친 생각[麤想]은 없으나 미세한 생각[細想]이 없지 않다고 생각하나니, 이런 까닭에 비상비비상정(非想非非想定)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들을 4무색정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무량행(無量行)이라 하는가? 이른바 자무량(慈無量)ㆍ비무량(悲無量)ㆍ희무량(喜無量)ㆍ사무량(捨無量)이니라. 만약 비구[苾芻]가 대자(大慈)의 마음을 갖추어 모든 유정에게 원망하지 않고 친밀함도 없으면서 평등하게 즐거움을 주어서 이와 같이 항상 사랑[慈]이 한량없는 마음을 행한다면, 이것을 자무량행이라 이름하느니라.
만약 비구가 대비심(大悲心)을 갖추어 모든 유정에게 원망하지 않고 친밀함도 없으면서 평등하게 능히 고통을 없애며 이와 같이 언제나 한량없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행한다면
이것을 비무량행이라 하느니라.
만약 비구가 크게 기뻐하는 마음을 가지고 모든 유정에게 원망하지 않고 친밀함도 없으면서 평등하게 환희심을 베풀어 이와 같이 항상 한량없이 기쁜 마음을 행한다면 이것을 희무량행이라 하느니라.
만약 비구가 모든 유정들에게 원망하지 않고 친밀함도 없으면서 평등하게 안주(安住)하여 이와 같이 항상 행한다면 이것을 4무량행이라 이름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4무량행(無量行)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무애지(無礙智)라 하는가? 이른바 사무애지(辭無礙智)ㆍ변재무애지(辯才無礙智)ㆍ법무애지(法無礙智)ㆍ의무애지(義無礙智)이니라.
사무애(辭無礙)란 소리를 연으로 하여 그 경계를 삼아 모든 음성에서 말씀이 걸림이 없는 까닭에 사무애지라고 하느니라.
변재무애(辯才無礙)란 4변(辯)7)과 7변(辯)8)이니, 무릇 논란[論難]이 있으면 빠르고 막힘 없는 까닭에 변재무애지라 하느니라.
법무애(法無礙)란 명칭과 구절과 문장을 연하여 어떠한 가르침에 따라도 통하지 아니함이 없기에 법무애지라 하느니라.
의무애(義無礙)란 뜻을 연하여 경계로 삼고 말하는 어떤 뜻이든지 그에 따라서 밝히지 못하는 것이 없는 까닭에 의무애지라 이름하나니, 이와 같은 것을 네 가지 걸림없는 지혜[四無礙智]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삼마지상(三摩地想)이라 하는가?
만약 어떤 비구가 관찰하기를, ‘나의 이 몸은 정수리에서 발끝까지 머리카락ㆍ손톱ㆍ치아ㆍ피부ㆍ살갗ㆍ힘줄ㆍ뼈 등과 같은 갖가지 부정한 것을 함께 모아 놓은 것이다’라고 한다면, 이것은 비유하면 창고에 양식을 많이 쌓아 두고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서 이것은 쌀이고 이것은 보리라고 잘 분별할 수 있도록 쌓아 둔 것을 창고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 비구가 자기 몸속을 보고 생각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이렇게 관찰하는 자는 곧 탐욕의 법을 끊어 버릴 것이니, 이것을 첫 번째 삼마지상(三摩地想)이라 하느니라.
또다시 비구가 몸을 보고 생각하기를, 삼마지에서 얻어지는 경안(輕安)의 맛을 느끼면, 또한 이 삼마지에서 얻은 즐거운 느낌도 또한 생각 없이 느껴진다고 관찰한 것이다. 비유하면 연꽃이 물에서 생겨났으나 그 연꽃은 자기가 물에서 생겼다는 생각도 없이 맑고 시원하듯이, 비구가 관찰하여 생각함도 또한 이와 같아 능히 관찰하고 생각하는 자는 곧 법을 보고 가볍고 편안하고 즐거운 맛을 얻을 것이다. 이것을 두 번째 삼마지상이라 하느니라.
또다시 비구가 삼마지에서 밝은 생각[明想]으로 관찰하되 해가 어두움을 밝히는 것처럼 관찰하여 계속하여 끊어지지 않고 어두운 밤이나 밝은 낮이나 다 다름 없이 이런 밝은 생각을 하여 청정하고 잡됨이 없어야 한다. 비유하면 가을날에 구름이 끼어 어둡게 그늘이 지면 태양이 밝게 나타나지 못하지만, 만약 눈밝은 사람이 햇빛을 관찰하고 생각하면 청정하여 잡된 것이 없는 것처럼 비구가 관찰하고 생각함도 역시 이와 같다. 능히 관찰하여 생각하는 자는 누구든지 곧 밝은 지혜가 앞에 나타날 것이니, 이것을 세 번째 삼마지상이라 하느니라.
또다시 비구가 삼마지에 있으면서 이렇게 관찰하고 생각하는 것이다. 즉 괴로움이나 즐거움, 나아가 근심과 기쁨에 이르기까지 끊어 없애고, 오직 두 가지 청정한 생각만 버리는 것이다.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수레를 몰고 평탄한 땅을 가는데 걸리는 것이 없는 것과 같이 비구가 관찰하여 생각하는 것도 또한 다시 이와 같아서 능히 관찰하여 생각하는 자는 곧 지혜가 뛰어나고 날카롭게 앞에 나타날 것이니라. 이것을 네 번째 삼마지상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들을 4삼마지상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념처법(念處法)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신(身)ㆍ수(受)ㆍ심(心)ㆍ법(法)이니라. 만약 비구가 몸은 부정하여 더러운 것이 가득차며 진실함이 없다고 관찰한다면,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신념처(身念處)라 하느니라.
또다시 내외(內外)의 두 가지 법을 관찰함에 있게 되는 모든 받아들임은 다 괴로움이니, 이렇게 관찰하는 것을 수념처(受念處)라 하느니라.
또다시 심법(心法)과 심소법(心所法)을 관찰함에 모두 다 항상함이 없다고 관찰하는 것을 심념처(心念處)라고 하느니라.
또다시 내외의 두 가지 법을 관찰하매 이 법 가운데에는 나라는 생각[我想]도 생기지 않는다고 관찰하는 것을 법념처(法念處)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4념처법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4정단법(正斷法)이라 하는가? 이른바 이미 생긴 악한 법을 마땅히 정진하여 부지런히 닦아 끊어 버려 모두 다 없어지게 하는 것을 첫 번째 바르게 끊는[正斷] 법이라고 하느니라.
또다시 아직 생기지 아니한 악한 법을 마땅히 정진하여 막고 보호하여 끊어서 모두 생기지 아니하게 하는 것을 두 번째 바르게 끊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또다시 아직 생기지 아니한 선한 법을 마땅히 정진하여 모든 착한 법이 모두 생겨 자라나게 하는 것을 세 번째 바르게 끊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또다시 이미 생긴 착한 법을 마땅히 정진하여 더 자라나 견고하고 원만하게 하는 것을 네 번째 바르게 끊는 법이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4정단법이라고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신족법(神足法)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부지런히 마음으로 관찰하고자 함이니, 만약 비구가 모든 미혹하고 허망한 법[染法]에서 허망한 생각을 여의고 모든 착한 법을 바라고 구하는 마음을 일으켜 착함에 나아가 싫어함이 없다면 이것을 욕신족(欲神足)이라 하느니라.
다시 착한 법에서 부지런히 모든 수행을 닦아 바르게 행하여 물러나지 아니하는 것을 근신족(勤神足)이라 한다.
다시 모든 법에서 삿된 생각을 여의고 마음에 바르게 분별하는 것을
심신족(心神足)이라 한다.
다시 바른 지혜로 몸속을 관찰하매 몸속에는 나라는 것이 없고, 다시 밖의 경계를 관찰해도 나라는 법의 체(體)가 없으며, 나아가 둘이 공함[二空]을 깨닫는 것을 관신족(觀神足)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4신족법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5근(根)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신근(信根)ㆍ진근(進根)ㆍ염근(念根)ㆍ정근(定根)ㆍ혜근(慧根)으로 이와 같은 것을 5근이라 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5력(力)이라 하는가? 이른바 신력(信力)ㆍ진력(進力)ㆍ염력(念力)ㆍ정력(定力)ㆍ혜력(慧力)으로 이와 같은 것을 5력이라 이름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7각지법(覺支法)이라 하는가? 이른바 택법각지(擇法覺支)ㆍ정진각지(精進覺支)ㆍ희각지(喜覺支)ㆍ경안각지(輕安覺支)ㆍ사각지(捨覺支)ㆍ염각지(念覺支)ㆍ정각지(定覺支)로 이들을 7각지법이라 이름하느니라.
다시 어떤 것을 8정도법(正道法)이라 하는가? 이른바 정견(正見)ㆍ정사유(正思惟)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ㆍ정정진(正精進)ㆍ정념(正念)ㆍ정정(正定)이니라.
정견(正見)이란 베풀어 준 법을 믿되 부모를 믿는 것처럼 하며, 모든 선행과 선하지 않은 행을 바르게 보는 것을 말한다. 이와 같이 선과 선하지 않은 업은 마땅히 과보가 있고, 지금 세상과 후세가 있어서 그 세계 중에서 모든 중생이 있고 아라한이 있어 이치대로 수행하며 스스로의 신통력으로 이와 같은 법을 보나니, 마치 나의 삶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확립되었으며 해야 할 일은 이미 다하였고 다음의 생애를 받지 않는다는 등의 일 같은 것을 정견이라 이름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사유(正思惟)라 하는가? 이른바 삿된 생각을 여의는 것이다. 삿된 생각이란 바르지 못한 견해를 일으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마음을 내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을 멀리 여의는 것을 정사유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어(正語)라 하는가? 이른바 허망한 말[妄言]ㆍ교묘히 꾸미는 말[綺語]ㆍ이간질하는 말[兩舌]ㆍ나쁜 말[惡口] 등을
여의는 것을 정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업(正業)이라 하는가? 말하자면 살생과 도둑질과 삿된 음행 등의 법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을 정업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명(正命)이라 하는가? 이른바 바른 견해를 갖추고 바른 법[正法]에 출가하여 법복(法服)을 입고 모든 삿된 행을 떠나 정법을 믿으며, 나아가 음식과 앉고 눕는 도구를 수용하매 다 정법에 의지하는 것을 정명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정진(正精進)이라 하는가? 이른바 삿되게 부지런히 정진함[邪勤]을 여의고 진실한 법에서 바르게 부지런히 정진하는 것을 정정진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념(正念)이라 하는가? 이른바 삿된 생각을 여의고 항상 정법을 생각하며 마음에 기억하여 잊거나 잃어버림이 없는 것을 정념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정정(正定)이라 하는가? 이른바 심법과 심소법에서 산란함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모든 붙들고 일어나는 마음[攀緣]을 여의며 사마타(奢摩他:止)와 비발사나(毘缽舍那:觀)로 분명하고 바르게 관찰하는 것을 정정이라 하느니라. 이와 같은 것을 8정도법이라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는 이 법을 말씀하시고 나서 다시 비구 대중들에게 알리어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마땅히 알라. 내가 설한 분명하고 바른 법[決定正法]은 처음도 좋고 중간도 좋고 나중도 좋으며, 그 뜻은 깊고 원대하며 순수하고 전일하며 청정하고 원만하느니라.”
이때 비구 대중들이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모두 크게 환희하며 믿고 받아 받들어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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