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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79 보운경(寶雲經) 3권

by Kay/케이 2024. 8.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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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운경(寶雲經) 3

 

보운경 제3권

양 삼장 만다라선 한역
최윤옥 번역

“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해와 같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무명의 어둠을 없애는 것, 신심을 피어나게 하는 것, 시방을 두루 따뜻하게 하는 것, 선법을 자라게 하는 것, 유루(有漏)를 없애는 것, 밝게 비추는 것, 사도(邪道)와 이견(異見)을 막고 가려 나타나지 못하게 하는 것, 높고 낮은 언덕과 구덩이를 모두 드러나게 하는 것, 선업을 모두 다 일어나게 하는 것, 지혜로운 이를 기쁘게 하고 어리석은 이를 싫어하게 하는 것이다.보살이 무명의 어둠을 없앤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유하면 해가 뜨면 온갖 어둠이 모두 없어지는 것처럼, 보살의 해가 뜨면 중생에게 있는 무명의 어둠이 없어진다. 비유하면 해가 뜨면 온갖 꽃이 피어나는 것처럼, 보살의 해가 뜨면 교화를 받은 사람들 역시 모두 피어난다.해가 뜰 때 시방을 두루 따뜻하게 하듯이 보살의 해가 뜨면 공덕과 지혜가 시방을 따뜻하게 하고 중생을 동요시키지 않는다. 해가 뜨려 할 때 훤히 밝아오는 모습을 보고 해가 뜰 것을 아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지혜의 광명으로 모든 세상의 중생을 비추어 보살의 해가 뜰 것을 알게 한다.해가 질 때 모든 곳이 어두워져 온갖 물체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 광명이 모든 삼매에 들어가면 번뇌의 어둠과 모든 결루(結漏)가 모두 없어져 나타나지 않는다. 해가 뜰 때 빛이 염부제를 비추어 모든 어둠을 없애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 광명 역시 능히 두루 비춘다.해가 뜰 때 모든 희미한 밝음과 등불은 빛을 잃고 다시는 보이지 않는다. 해가 무심하게 모든 희미한 밝음을 없애는 것처럼, 법상(法相)도 스스로 그러하여 보살의 해가 뜨면 모든 이견과 온갖 삿된 외도들이 사라진다. 해가 뜰 때 염부제의 높고 낮고 좋고 나쁜 것들이 모두 다 드러나듯이, 보살의 해가 뜰 때도 정도(正道)와 사도(邪道) 역시 각각 차별된다. 사(邪)란 8사(邪)를 말하고 정(正)이란 8정(正)을 말한다.해가 뜰 때 농사짓는 농부가 온갖 일을 시작하듯이 보살의 해가 뜨면 신심 있는 중생들은 모두 다 선업을 닦는다. 해가 뜰 때 선한 사람은 기쁘게 바라보고 간사한 도적 같은 중생들은 모두 싫어하고 기뻐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해가 뜨면 현명하고 지혜로운 이는 기쁘게 바라보지만 많은 삿된 외도들은 모두 싫어하고 기뻐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 열 가지를 갖추면 해와 같은 보살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사자(師子)와 같다고 비유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두려울 것이 없는 것,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나아가면 끝내 되돌아오지 않는 것, 사자후를 할 수 있는 것, 변재를 충분히 갖추는 것, 즐겁게 임야에 거처하는 것, 산의 동굴에서 지내는 것, 대중을 꺾어 굴복시키는 것, 용맹한 힘을 갖추는 것, 능히 잘 수호(守護)하는 것이다.선남자야, 두려울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비유하면 마치 사자가 가고 오며 출입하는 데 꺼리고 어려워하는 것이 없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돌아다니고 가고 오면서 두려워하고 어려워하는 것이 없으니, 왜냐하면 자신과 대등한 존재를 볼 수 없기 때문이다.비유하면 사자가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대중이 와서 강론하고자 하면 두려워 피하지 않으며, 마음 역시 교만하지도 열등하지도 않는다. 비유하면 사자가 마음에 겁이 없어 싸움터에서 물러설 마음이 없이 곧장 앞으로만 나갈 뿐 꽁무니를 보이지 않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다.마치 사자가 부르짖으면 날짐승은 떨어지고 들짐승은 엎드려 숨으며 상어와 거북이와 자라 같은 물짐승은 물 밑으로 숨고 사람과 가축은 모두 놀라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와 같아 무아(無我)의 사자후를 하여 능히 아견(我見)에 집착한 모든 외도의 여우들을 시방으로 놀라 달아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보살은 저 중생들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일으키게 하려고 그러는 것이다. 단지 그들의 아견심을 없애고자 할 뿐이며, 또 나머지 신심 있는 중생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이다.사자왕이 용맹스럽고 두려움이 없이 사방을 두루 관찰하며 마음에 겁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그 행이 순수하고 깨끗하며 항상 삼매지혜(三昧智慧)를 자세히 관찰한다. 비유하면 사자가 임야(林野)에서 지내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항상 홀로 한적한 곳에서 지내기를 즐기고 어지럽고 시끄러운 곳을 피한다.또 사자가 산속의 굴에서 지내기를 즐기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선정삼매(禪定三昧)의 산속 굴에서 지내기를 즐긴다. 비유하면 사자가 결박당하는 일이 없는 것처럼 보살 또한 그러하여 이미 번뇌의 무거운 짐을 모두 멀리 벗어던져 행하는 데 물들고 집착하는 것이 없다. 비유하면 마치 사자가 동료 없이도 모든 짐승들의 무리를 꺾을 수 있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홀로 도량에 앉아 악마의 무리를 꺾어 굴복시킨다.선남자야, 마치 사자가 마을 가까이 머물면 노루나 사슴이 농작물을 해치지 못하도록 할 수 있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머무는 곳마다 뭇 악마와 모든 외도가 정법을 무너뜨리지 못하게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비유하면 사자와 같은 보살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잘 조복시킨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리심이 견고한 것, 보리심을 닦아 다스리는 것, 모든 근(根)을 수호하는 것, 정도(正道)를 향해 나아가는 것, 무거운 짐을 잘 지는 것, 중생을 위해 노고를 마다하지 않는 것, 바른 생활로 스스로 살아나가는 것, 허망하고 아첨하는 말을 하지 않는 것, 사람을 현혹시키는 일을 모두 하지 않는 것, 마음이 항상 정직한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잘 조복시키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잘 타고 간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선정을 행하고도 항상 공상(空相)을 닦는 것, 번뇌장(煩惱障)을 다 없애고도 항상 도를 닦는 것, 부처님의 가르침을 잘 따라 어김이 없는 것, 모든 법을 평등하게 관찰해 법계를 잘 아는 것, 마음을 항상 전다라처럼 스스로 낮추는 것, 나를 높이는 교만을 잘 없애는 것, 법을 보아 결코 의심과 후회가 없는 것, 모든 법을 잘 관찰해 결정된 모습을 얻는 것, 정도를 잘 알아 다른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것, 보리로 잘 향하여 세상의 복전(福田)이 되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잘 타고 가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연꽃과 같다고 비유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그 체(體)가 청정한 것, 물에 집착하지 않는 것, 작은 악도 물들지 않는 것, 계향(戒香)을 충분히 갖추는 것, 청정한 행을 닦는 것, 온화한 얼굴에 기뻐하는 빛이 있는 것, 부드러워 딱딱하지 않은 것, 보는 이가 다 길(吉)한 것, 생각이 성숙한 것, 자기 소유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다.어떻게 집착하지 않는가?
연꽃이 물에서 자라지만 진흙탕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비록 세간에서 살고 있으나 세간의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방편의 지혜를 얻었기 때문이다. 비유하면 물이 연꽃을 더럽힐 수 없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작은 악도 물들지 않는다.연꽃이 피어난 곳에 향기가 가득한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태어나는 곳마다 계향이 가득하다. 비유하면 연꽃은 자라는 곳마다 그 체성이 청정해 찰리건 바라문이건 도시에서건 시골에서건 모든 사람들의 칭찬을 받는다. 보살마하살 역시 그러하여 계행이 청결해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阿修羅)와 야차(夜叉)와 건달바(乾闥婆)와 가루라(迦樓羅)와 긴나라(緊那羅)와 마후라가(摩睺羅伽)와 인비인(人非人) 등의 칭찬을 받고, 항상 모든 부처님의 보살핌을 받는다.연꽃이 피면 사람들이 모두 즐거워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온화한 얼굴에 기쁜 빛을 띠면 보는 사람의 모든 근(根)이 청정해진다. 비유하면 연꽃이 부드럽고 딱딱하지 않은 것처럼 보살도 그러하여 체성이 부드럽고 말하는 것이 난폭하지 않다.비유하면 연꽃은 항상 길한 모습이고 꿈속에서 보아도 길하다고 풀이하니, 의미도 있고 길함도 있다.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모두 곧 길하여 마침내 반드시 일체지(一切智)를 증득하게 되니, 이러한 이치로써 모두 길하다고 한다.비유하면 연꽃이 아직 피지 않았을 때는 구족하다고 하지 않고 꽃이 피고 나야 청정하게 모든 것을 구족했다고 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혜각(慧覺)이 피어야 부처가 되었다고 한다.연꽃이 활짝 피면 보는 눈을 쾌락하게 하고, 가득한 향기에 닿으면 몸이 부드러워지며, 마음으로 희열을 느끼면 뜻이 즐거움을 누리게 된다.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지혜가 성숙해 지혜의 광명이 밝게 나타나면, 중생이 그를 볼 때 그 눈이 청정해지고 들을 때 그 귀가 청정해진다. 또 계향은 멀리 퍼져 코를 청정하게 하고, 몸을 접촉해 공양하면 그 몸이 청정해지며, 공덕을 생각하면 뜻이 청정해진다.연꽃이 필 때 그것을 보는 사람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을 하듯이 부처님과 보살과 사천왕 등도 보살이 출현하는 것을 볼 때 역시 모두 수호하며 자기 소유라는 생각을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비유하면 연꽃과 같은 보살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모든 바라밀을 만족하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 모든 불법을 만족하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 모든 중생을 교화하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불도수(佛道樹)를 이루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 처음 정각을 이루고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나 사람이나 하늘이나 마(魔)나 범(梵) 중에서 교화할 수 없는 이들과 그 나머지 세간의 교화할 수 없는 이들에게도 나는 법륜을 굴리리라’고 하며 법륜을 굴리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보살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자 이 세계뿐만 아니라 헤아릴 수 없고 끝없는 세계에 이르기까지 모두 정법으로 중생을 받아들이는 까닭에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보살이 지혜의 배로 생사의 큰 바다에서 유전하는 중생을 건네주고자 하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 ‘중생들은 구원해 줄 사람도 없고 의지할 곳도 없고 살 곳도 없고 주인도 없으니, 내가 친구가 되어 돌아갈 집을 만들어 주리라’고 생각하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여래의 위덕이 자재한 것을 보이고자 ‘내가 부처님의 사자후를 하리라. 내가 부처님의 신통력을 자재하게 나타내리라’ 하고, 용과 코끼리의 위의를 나타내고자 고개를 돌려 돌아보지 않고, 하늘과 사람 등 어떤 중생도 보살과 대등한 자가 없게 하려 하고, 악마와 범(梵)과 사문과 바라문과 아수라 중에도 대등한 자가 없으므로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부처님의 대위덕으로 교화하고 제도할 사람들을 내가 제도하리라’고 하니, 이는 평범한 행이 아니고 조잡한 행도 아니며 괴롭히는 행도 아니고 천한 행도 아니므로 광대한 마음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가장 광대한 마음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청정심(淸淨心)이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체성(體性)이 구족한 것, 체성이 움직이지 않는 것, 체성이 질직(質直)한 것, 거짓된 모습이 없는 것, 모든 악행을 없애는 것, 성문의 마음을 내지 않는 것, 벽지불의 마음을 내지 않는 것, 자기를 위해 결(結)ㆍ사(使)ㆍ구(垢)의 장애를 받는 몸으로 공덕을 닦는 것이 아닌 것, 작은 은혜도 오히려 보답하거늘 하물며 다시 큰 은혜에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겠는가 하는 것, 남에게 은혜를 베풀고 스스로 뽐내지 않는 것이다.말과 행동이 상응하여 끝내 어긋나지 않으며 자기의 허물을 숨기지 않고 남의 단점을 비난하지 않는다. 보살은 끝내 밖으로 부드러운 말을 하면서 마음속으로 원한을 품는 일이 없으며, 또한 별안간 찡그리거나 성낸 얼굴로 중생을 괴롭히지 않으며, 스스로 다투려는 마음이 없고 다른 사람이 다툼을 일으키게 하지도 않으며, 이간질하는 말을 해 사람들이 서로 파괴하고 싸우게 하지 않는다.몸은 항상 공손히 하고 말하는 것이 진실하다. 말과 행동이 서로 들어맞으며, 하는 일이 모두 선하며, 여래법(如來法)에 대해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왜 허물을 말하지 않는가? 보살은 보리심을 내어 수염과 머리를 깎고 법복을 입고 여래법 속으로 출가한 것이다. 왕을 두려워해 출가하는 것이 아니고, 왕의 신하를 두려워해 출가하는 것도 아니며, 도적질을 한 까닭에 출가하는 것이 아니고, 빚을 졌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도 아니며, 두려워서 출가하는 것도 아니고, 먹고 살기 위해 출가하는 것도 아니다. 신심이 있기 때문에 출가하는 것이다.이렇게 출가했으니 항상 선법을 구하고, 좋은 벗을 가까이해 좋은 벗을 따르며, 선지식을 찾아가 선법을 듣고, 법을 듣고 나서는 수행하며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않고, 전도되어 망령되이 법을 취하는 일이 끝내 없으니 전도됨을 없애 정도(正道)에 들어가며, 정도에 들어가고 나서는 곧 정견을 얻으니, 정견을 얻고 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멀지 않게 된다.
선남자야, 이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청정심이라고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여래의 몸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 것, 여래의 입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 것, 여래의 뜻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 것, 모든 보살의 수행을 믿는 것, 보리법을 믿는 것, 모든 부처님이 일으킨 서원을 다 만족시킨다는 사실을 믿는 것, 모든 부처님이 한 말을 믿는 것, 모든 부처님은 일승(一乘)임을 믿는 것, 모든 부처님의 음성은 깊고 오묘함을 믿는 것, 모든 부처님이 중생의 근기를 따라 설법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여래의 몸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여래의 법신(法身)을 믿고 여래의 적멸(寂滅)을 믿고 여래의 비할 데 없고 헤아릴 수 없는 몸을 믿고 여래의 견고한 몸을 믿고 여래의 허물어지지 않는 몸을 믿고 여래의 금강과 같은 몸을 믿어, 진실에서 생겨난 것이어서 거짓이 아님을 믿고 알며 또 의혹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다. 이를 여래의 몸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 것이라 한다.또 다시 이렇게 생각한다.
‘여래의 입에 비밀이 있어 직접 그 자리에서 수기(受記)하시고, 비밀히 수기하시고, 아직 발심(發心)하지 않은 이에게 수기하시고, 처음 발심한 이에게 수기하신다고 들었다.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이 네 가지에 의지해 설법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모든 부처님께서 하시는 것은 잘못이 없는 줄을 믿고, 모든 부처님의 입은 잘못이 없는 줄을 믿고, 모든 부처님께서 위에서 하신 말씀이 허망하지 않은 줄 믿는다.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이미 모든 잘못을 다 없애셨기 때문이고, 모든 허물을 다 떠나셨기 때문이다. 모든 티끌을 없애 어떤 뜨거운 번뇌도 없고, 모든 결업(結業)을 다 없애 자재하여 장애가 없으며, 마음이 항상 적멸해 탁한 것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어 맑고 깨끗하며 청정하시다. 만약 여래의 몸과 입에 허물이 있다고 한다면 이는 옳은 말이 아니니, 여실하여 허황되지 않고 거짓이 없으시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분명히 이 문제에 대해 의혹을 내지 않는다. 이를 여래의 입에 비밀이 있음을 믿는 것이라 한다.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한다.
‘여래의 뜻에 비밀이 있다고 들었다. 마음의 작용이 모두 지혜에서 나오는 것으로 오직 여래가 알게 하려는 이를 제외하고는 성문이나 연각이나 어떤 보살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의 지혜 바다는 매우 깊고 건너기 어려워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며, 모든 마음과 뜻이 나타낼 수 있는 것을 초월했기 때문이다. 헤아릴 수 없고 끝이 없어 허공계와 같고, 모든 외도와 점상(占相)과 복서(卜筮)와 주술(呪術)로 아는 것보다 뛰어나며, 마음이 항상 여실하여 허망함이 없다.’또 ‘보살은 중생을 위하는 까닭에 하는 일에 피곤해 하거나 싫증을 내지 않고 놀라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는, 의지의 힘을 튼튼히 해 무거운 짐을 지고 능히 대욕(大欲)을 일으켜 모든 바라밀을 충족한다. 그리하여 모든 불법을 점차 만족해 마음에 걸림이 없어지고 그와 대등한 사람이 없게 된다. 보살은 견고하게 정진하고 견고하게 장엄하며, 견고한 지혜로 견고한 서원과 흔들리지 않는 서원과 견줄 데 없는 서원을 낸다. 왜냐하면 보리의 모습에 걸맞기 때문이다. 이렇게 점차 늘리고 넓히고 나아가 만족시키며, 여실히 알아 허망함이 없고 마음에 의혹이 없게 된다.믿음을 닦아 의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생각한다.
‘처음 발심해서 내지 도량에 앉아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게 되었고, 모든 법을 두루 알고 가리는 것이 없이 밝게 깨달아 천안통(天眼通)ㆍ천이통(天耳通)ㆍ타심통(他心通)ㆍ숙명통(宿命通)과 뜻대로 충족되는 지혜[如意足智]와 번뇌가 다한 지혜[漏盡智]를 얻어 한 찰나에 3세(世)를 모두 안다.’그리하여 이와 같은 지혜로 중생계를 관찰하고는 몸으로 짓는 업이 선하지 못하고, 입으로 짓는 업이 선하지 못하고, 뜻으로 짓는 없이 선하지 못하며, 현성(賢聖)을 비방하고, 크게 삿된 견해를 일으키는 중생을 보고, 또 사견(邪見)을 낸 인연으로 말미암아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끊어진 후에 대지옥에 떨어지는 줄을 안다. 또 이와 같은 중생이 몸으로 짓는 업을 선하게 닦고, 입으로 짓는 업을 선하게 닦고, 뜻으로 짓는 업을 선하게 닦으며, 현성을 비방하지 않고, 정견(正見)을 성취하면 이러한 인연으로 몸이 무너지고 목숨이 끊어진 후에 천상에 태어단다는 것을 관찰한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의 선악 차별을 관찰한다.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예전에 보살도를 닦을 때 커다란 서원을 일으키기를, ≺내가 만약 스스로 보리를 이루게 된다면 다른 사람도 역시 성취하게 하리라≻고 하였다. 나의 서원이 만족하였으니, 말과 행동이 진실해 허망함이 없다.’
이렇게 여기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는다.또 이렇게 생각한다.
‘내가 듣기로 여래에겐 오직 1승(乘)만이 있을 뿐이라고 했는데, 그건 진실이고 잘못된 것이 아니니 허망함이 없다. 왜냐하면 마치 염부제에 많은 작은 섬이 있는데 이 모든 작은 섬이 다 염부제를 의지하고 있으므로 역시 모두 염부제라고 부르는 것과 같다. 여래의 1승 또한 그러하여 일체의 모든 수레가 다 대승(大乘)으로부터 나온다. 그러므로 1승을 여래의 대승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역시 이 가운데에서도 의심하지 않고 여실하게 안다. 그러므로 보살은 여래승(如來乘)을 믿는다.또 이렇게 생각한다.
‘일찍이 여래의 온갖 설법을 들으니 가지가지 수다라(修多羅)는 진실 아닌 것이 없다. 왜냐하면 여래께서 교화시킬 중생을 따라 어떤 법을 묻는가에 따라 그에 맞추어 대답하셨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능히 사실대로 알아 믿고 받아들여 의심하지 않는다.또 이렇게 생각한다.
‘일찍이 모든 부처님의 음성은 깊고 오묘하다고 들었는데, 이건 진실이어서 마음에 의심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모든 하늘은 보잘것없는 복을 닦고도 깊고 묘하고 부드러운 음성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물며 헤아릴 수 없는 백천만억의 공덕을 갖춘 여래이겠는가.’
이렇게 여기에 대해 깊이 믿고 의심하지 않는다. 이를 보살이 여래의 깊고 오묘한 음성을 믿는 것이라 한다.또 여래께서 능히 한 소리로 모든 법을 연설하시어 중생의 근기에 따라 모든 의혹을 다 없애 주신다는 것을 믿는다. 보살은 ‘모든 중생이 모두 세존께서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말씀하신다고 생각하나, 이것은 부처님께서 한 소리로 모든 법을 연설하시는 것을 중생이 부류에 따라 역시 각각 믿고 이해하는 것이다. 여래에겐 한다는 생각도 없고 또 하지 않는다는 생각도 없다’고 여실하게 알고 허망함이 없으며 여기에 대해 의심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깊이 믿어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큰 바다와 같다고 비유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커다란 보배 창고인 것, 깊고 넓어 건너기 어려운 것, 헤아릴 수 없이 크고 넓은 것, 점점 차례로 깊어지는 것, 번뇌와 한 곳에서 지낼 수 없는 것, 적멸해 하나의 모습인 것, 많은 물줄기가 모여들어도 모두 다 받아들이는 것, 밀려들되 때를 놓치지 않는 것, 능히 다른 사람을 위해 귀의처가 되어 주는 것, 다함이 없는 것이다.보살이 커다란 보배 창고와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큰 바다는 온갖 여러 보배들이 모두 그 가운데에서 나오고 염부제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 다투어 가져가도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보살 역시 그러하여 보배 창고와 같으니, 끝없이 많은 중생들이 모두 신심으로 보살행(菩薩行)을 닦아도 그 공덕의 보배 창고는 역시 줄어들지 않는다. 이를 보살이 큰 보배 창고와 같은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가 깊고 넓어 건너기 어려운 것처럼, 보살 또한 그러하여 그 지혜의 법해(法海)를 어떤 악마와 외도도 건널 수 없다. 이를 보살이 깊고 넓어 건너기 어려운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큰 바다가 광대해 끝이 없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공덕과 지혜가 광대해 끝이 없다. 이를 보살이 바다처럼 깊고 넓어 끝이 없는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가 점점 차례로 깊어지는 것처럼, 보살마하살은 일체지를 이루어 점점 깊어지게 된다. 이를 보살이 큰 바다처럼 점점 깊어지는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가 바다의 법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에 죽은 시체를 묵히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법해 역시 모든 결루(結漏)와 번뇌의 시체 및 악지식을 머물러 두지 않으니, 왜냐하면 보살법이 원래 그러하기 때문이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에 여러 물이 흘러 들어와 모두 같이 한 맛이 되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희고 깨끗한 선업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모든 공덕이 종지(種智)의 바다에 들어오면 역시 같이 한맛이 되니, 평등해 차별이 없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가 백천 갈래의 많은 강물을 받아들이지만 그 큰 바다는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처럼, 보살 역시 그러하여 모든 불법을 듣고 받아들이며 또 중생을 위해 분별하여 해설하지만 늘지도 줄지도 않는다. 이를 보살이 마치 큰 바다가 늘지도 줄지도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의 조류가 한계를 넘지 않는 것과 같다는 것은 무엇인가? 보살 또한 그러하여 마땅히 성숙시킬 중생에 대해 역시 때를 놓치지 않기 때문이다.마치 큰 바다가 큰 몸을 가진 여러 중생들의 의지처인 것처럼, 보살마하살 역시 그러하여 큰마음을 가진 모든 중생을 위해 의지할 굴(窟)이나 집이 되어 준다. 이를 보살이 마치 큰 바다처럼 의지할 굴이나 집이 되어 주는 것이라 한다.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가 다함이 없는 것처럼 보살마하살 또한 그러하여 모든 중생을 위해 응해서 설법하여도 없어져 다함이 없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큰 바다에 비유되는 보살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미세(微細)한 지혜라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생사 벗어나기를 구할 줄 잘 아는 것, 생사 벗어나는 법을 잘 아는 것, 모든 법이 평등해 같은 하나의 모습인 줄을 잘 아는 것, 모든 법이 허깨비 같은 모습인 줄을 잘 아는 것, 모든 법상을 잘 아는 것, 매우 깊은 12인연을 잘 아는 것, 모든 업이 불가사의한 줄을 잘 아는 것, 모든 법의 뜻을 잘 아는 것, 여실한 뜻을 잘 아는 것, 여실한 지혜를 잘 아는 것이다.선남자야, 보살이 생사를 벗어나는 법을 잘 아는 것이란 무엇인가?
보살은 지혜로써 모든 중생의 탐욕과 성냄이 맹렬하고 어리석음으로 캄캄한 것을 관찰하고는 ‘이와 같은 중생이 어떻게 생사를 벗어나겠는가?’라고 생각한다. 그리고는 동등하게 한 모습인 것으로 관찰해 모든 법이 허깨비와 같은 줄을 알고 나서 모든 법을 여실하게 알아 매우 깊은 인연을 건너고, 업이 불가사의한 줄을 안다.그리하여 일체 모든 법이 상이 없는 줄도 알고 갖가지 모든 업도 알아, 능히 연기(緣起)와 모든 업상(業相)을 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미세한 지혜로 인해 모든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법에 대해서 그 뜻을 확실히 알고, 그 뜻을 이해함으로써 소견(所見)이 진실해지고, 소견이 진실한 까닭에 곧 능히 중생을 생사에서 벗어나게 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미세한 법이라고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따라 응하는 언변[隨應辯]을 얻었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부처님은 이렇게 말한다.
‘일체 모든 법에는 내가 없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사람도 없으며, 짓는 이도 없고, 아는 이도 없고, 보는 이도 없다. 또 일체 모든 법이 모두 다음과 같은 모습이니, 모든 법은 공(空)이고, 모든 법은 허망하게 속이는 것으로 주인이 없고, 모든 법은 망상이어서 실제가 없이 모두 인연을 따라 일어난다.’
선남자야, 이와 같은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따라 응하는 언변을 얻은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사변(辭辯)이라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논의하는 데 막힘이 없는 것, 말이 다함이 없는 것, 말씨가 부드럽고 매끄러운 것, 열택(悅澤)이 무궁한 것, 대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말이 천하지 않은 것, 말하는 데 두려워하거나 꺼리는 것이 없는 것, 말이 비할 데 없는 것, 말이 다른 사람의 미움을 받지 않는 것, 비록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하지만 네 가지의 의지하는 뜻을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사변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정변(淨辯)이라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말을 더듬지 않는 것, 말을 할 때 두려움이 없는 것, 말이 비열하지 않는 것, 말이 거칠거나 높은 체하지 않는 것, 뜻이 작거나 낮지 않은 것, 말이 빠지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그 소리가 맑고 투명한 것, 소리가 빠지거나 모자람이 없는 것, 때에 응해 말을 하되 빠뜨리지 않는 것, 말을 잘해 거칠거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 것이다.보살이 말을 더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말할 때 대중의 위덕을 두려워하지 않으므로 말을 더듬지 않는다.
보살이 두려움 없이 말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체성이 정직한 까닭에 꺼리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보살이 말할 때 비열하거나 열악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보살은 대중 속에 있을 때 마치 사자와 같아 꺼리거나 어려워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말이 거칠거나 높은 체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번뇌를 없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번뇌가 있으면 말이 반드시 거칠고 높은 체하게 된다.보살은 뜻이 작거나 낮지 않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법을 잘 얻었기 때문이다. 이미 깊이 법을 이해하였으므로 그 뜻이 명료한 것이다.
보살은 말이 빠지거나 모자람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경론을 잘 이해하기 때문이다. 만약 이해하는 경론이 적으면 말을 할 때 빠뜨리는 것이 생긴다.보살은 음성이 빠지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다는 것은 무엇인가?
왜냐하면 보살은 일체 모든 음성을 다 알기 때문이다.
보살이 때를 알아 말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만약 앞의 말에 응할 때는 뒤의 말을 집착하지 않고, 뒤의 말에 응할 때도 역시 앞의 말에 집착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때를 잘 알기 때문이다.보살은 말을 잘해 거칠거나 귀에 거슬리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뻐할 말이 아니면 그를 위해 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입의 허물은 온갖 번뇌가 맺힌 데에서 생기기 때문이니, 악을 끊은 까닭에 하는 말이 부드럽다. 보살마하살은 명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왜냐하면 보살의 모든 근(根)이 이미 모두 날카롭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모든 근이 무딘 까닭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는 것이니, 날카로우면 그렇지 않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정변이라고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요설변(樂說辯)이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듣기 좋게 하는 말, 찡그리지 않고 하는 말, 이치에 맞는 말, 법에 맞는 말, 평등한 말,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말, 남을 가볍게 여기지 않는 말, 물들지 않은 말, 괴롭히지 않는 말, 가지가지의 언변이다.선남자야, 보살의 듣기 좋게 하는 말이란 중생으로 하여금 마음에 기쁨을 내게 하는 것이다. 찡그리지 않고 하는 말이란 부드러운 얼굴과 기쁜 기색으로 중생을 모두 안심시키고 위로하는 것이다. 보살의 이치에 맞는 말이란 아름다운 말로 중생을 기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의 법에 맞는 말이란 중생을 가르쳐 이익을 주는 것이다. 보살의 평등한 말이란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위해 설법하여 능히 모든 중생을 다 기쁘게 하는 것이다. 보살의 스스로를 높이지 않는 설법이란 모든 교만을 없앤 이런 마음으로 하기 때문이고, 보살은 동사섭(同事攝)으로 설법해 중생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보살의 남을 가벼이 여기지 않는 설법이란 마음이 항상 전일(專一)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물들지 않는 말이란 청정한 계율을 굳게 지켜 중생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괴롭히지 않는 말이란 참는 힘으로써 중생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보살의 가지가지 언변이란 항상 즐겁게 하는 말로써 중생을 기쁘게 하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요설변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설법을 잘해 중생으로 하여금 믿고 받아들이게 한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법기(法器)가 될 만한 사람을 위해서 설법하는 것, 그 근성(根性)에 맞추어 설법하는 것, 비난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외도나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교만하여 정성스러운 마음이 없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신심이 없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아첨하고 속이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먹고 살기를 구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이익을 구해 인색하고 탐욕스러우며 질투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 미치거나 어리석거나 귀먹거나 말 못하는 사람에게 설법하지 않는 것이다.선남자야, 보살은 무엇 때문에 법에 인색하지 않고, 자기가 얻은 법을 모두 중생에게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믿고 이해하게 해야 하며, 스승이 되어 몰래 감춰 두고는 말해 주지 않는 짓을 하지 않는가? 보살은 끝내 중생에게 자비스럽지 않은 마음을 일으키지 않으며 또 중생을 외면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법기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에게만은 평등한 마음[捨心]으로 들어간다.”제개장보살(除蓋障菩薩)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그런 중생들에게 설법하지 않는다면 누구를 위해 설법해야 합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신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설법하고, 선근이 성숙해 법기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있으면 그를 위해 설법하라. 과거 부처님 앞에서 여러 선근을 심어 아첨하고 속이는 마음이 없는 사람, 또 환술로 현혹시키거나 거짓으로 위의를 나타내지 않는 사람, 명예를 구하거나 이익을 구하지 않는 사람, 항상 선지식의 수호를 받는 사람, 지혜로운 이에게서 듣고 능히 따라 믿고 이해하는 사람, 모든 근이 날카로운 사람, 법을 듣고 열심히 정진할 수 있는 사람,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를 수 있는 사람, 이런 선남자 등이 있으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그들을 위해 설법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설법을 잘해 중생이 믿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법을 설하는 법사(法師)라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불법을 닦아 모아 설법하면서도 법을 보지 않고 닦아 모으면서도 역시 법을 보지 않는 것, 번뇌를 끊어 설법하면서도 끊어야 할 번뇌를 보지 않고 또한 법도 보지 않는 것, 세간을 싫어하고 욕심을 떠나 적멸에 들어 이와 같은 설법을 하면서도 세간을 싫어하는 모습을 얻지 않고 욕심을 벗어난 모습도 얻지 않고 또 적멸의 모습도 얻지 않는 것이다.수다원과를 얻어 설법하면서도 수다원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 사다함과를 얻어 설법하면서도 사다함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 아나함과를 얻어 설법하면서도 아나함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 아라한과를 얻어 설법하면서도 아라한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 벽지불과를 얻어 설법하면서도 벽지불의 모습이 있는 것을 보지 않는 것, 아견에 대한 집착을 끊어 없애고 설법하면서도 나[我]도 보지 않고 집착도 보지 않는 것, 업의 과보를 알고 설법하면서도 업의 과보의 모습을 보지 않는 것이다.왜냐하면 보살은 다음과 같이 관찰하기 때문이다.
‘모든 가명(假名)은 법에 의지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니, 이름에는 법이 없고 법 속에서도 이름이 없다. 단지 세속에서 거짓으로 이름을 만들어 세간에 유포시킨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세제에서는 거짓으로 지은 이름이 있으나 제일의제에서 보면 아무것도 없어 모두가 곧 허망하고 범부를 속이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 법을 갖추면 그 보살을 법을 설하는 법사라고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견고한 법이라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보살마하살이 비록 색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색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 수ㆍ상ㆍ행ㆍ식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수의 모습ㆍ상의 모습ㆍ행의 모습ㆍ식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 보살이 비록 욕계(欲界)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욕계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 비록 색계(色界)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색계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 비록 무색계(無色界)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무색계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이다.비록 모든 법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모든 법의 모습을 허물지 않는 것, 비록 모든 법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가명인 중생을 허물지 않는 것, 비록 법이 텅 비어 없는 줄을 관찰하지만 끝내 단견(斷見)에 떨어지지 않는 것, 비록 모든 법의 진실을 관찰하지만 정도(正道)를 허물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묘한 방편의 지혜로 있고 없는 것을 잘 알아 모습에 집착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견고한 법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법계를 잘 안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지혜가 있는 것, 선지식에게 의지하는 것, 열심히 정진하는 것, 수행하는 데 장애가 되는 것을 멀리 여의는 것, 청정한 것, 공경하는 것, 공관을 많이 익히는 것, 모든 삿된 견해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것, 도를 향해 나아가는 것, 소견이 진실한 것이다.선남자야, 보살은 지혜가 있으므로 선지식을 가까이하고, 선지식을 보고는 존경하고 기뻐한다. 그러므로 선지식에 대해 세존이라는 생각을 하고, 선지식에게 의지해 머문다. 그리하여, 선지식으로 인해 열심히 정진하게 되고 선지식으로 인해 능히 모든 악법을 없앤다. 비록 모든 선법을 만족하였더라도 게으르지 않게 열심히 정진해 장애를 없앤다. 이미 장애를 없앤 까닭에 열심히 도를 닦으면 몸과 입과 뜻의 업이 청정하게 되어 모든 습악(習惡)을 없앤다. 청정하게 되므로 능히 공경하고 공양하며, 공경하고 공양하므로 공관(空觀)을 얻는다. 공관을 닦으므로 모든 가명(假名)을 없애고, 모든 가명을 없애므로 능히 정도(正道)로 향하며, 정도로 향하므로 능히 진실(眞實)을 본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실을 본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소견이 헛되지 않은 것을 진실이라고 한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무엇을 진실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다시 대답하셨다.
“허망하지 않은 법을 진실이라고 한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허망하지 않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진실과 같은 것이어서 진실과 다르지 않은 것을 허망하지 않다고 한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진실과 같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이 법은 오직 마음으로만 알 수 있지 입으로는 말하기 어렵다. 이는 문자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법상(法相)이 문자를 떠났다는 것은 무엇입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법상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으며, 모든 심소(心所)의 행처를 초월하며, 모든 희론(戱論)을 떠나며, 조작이 없고 또 피차도 없으며, 헤아리고 계교하여 미칠 수 있는 경지가 아니고 또 상모(相貌)가 아니며, 모든 어리석은 범부의 소견을 초월하며, 악마의 세계를 초월하며, 모든 번뇌의 처소를 초월하며, 모든 마음과 의식이 나타내는 것을 초월하며, 적멸한 현성의 처소에 머물지 않되 모든 현성이 증득해 아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구경에 여실한 것이라 한다. 이것이 일체지(一切智)이니, 이른바 생각할 수 없는 경계이며 둘이 아닌 경계이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여실상(如實相)은 어떻게 깨달으며, 어떻게 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출세간지(出世間智)로써 마침내 증득하고 보아 스스로 이 법을 얻는다.”제개장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의 체성은 구경에 청청하고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법입니다. 이는 맑고 고요한 법이고, 미묘하고 가장 훌륭한 법이며, 항상 머물러 움직이지 않고 무너지지 않는 법이어서, 부처님께서 계시거나 안 계시거나 법성(法性)이 항상 그러합니다. 보살마하살이 어려운 행과 괴로운 행을 열심히 수행하며 백천만억의 어려운 행과 괴로운 행을 닦는 것은 이 법을 얻어 중생을 안립(安立)시키기 위해서입니다.”제개장보살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것을 들어서 얻은 지혜[聞慧]로 듣고, 생각해서 얻은 지혜[思慧]로 생각해 몸으로 깨달은 것이라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여실한 법을 관찰하여야 몸이 깨달을 수 있기 때문이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들어서 얻은 지혜로 듣고, 생각해서 얻은 지혜로 생각하는 것으로는 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없다. 듣거나 생각해서 얻은 지혜로 몸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선남자야, 너는 이제 자세히 들어라. 내가 비유로 말하리라. 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늦봄 날씨가 뜨거울 때 드넓은 광야 가운데서 어떤 사람은 동쪽에서 와 서쪽으로 향해 가고, 어떤 사람은 서쪽에서 와 동쪽으로 가다가 서로 마주치게 되었다.서쪽에서 온 사람이 더위 때문에 괴로워서 그 사람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 더워서 괴롭고 매우 갈증이 나니 나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오. 어느 곳에 갈증을 식힐 만한 시원한 못이나 샘이 있습니까?’동쪽에서 온 사람은 지름길을 잘 알고 길의 사정을 잘 알기에 곧 그에게 대답하였다.
‘오던 길에 시원하고 맛좋은 물이 있었는데 짜거나 쓴 맛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곳에서 목욕하고 배불리 마시고 이곳으로 오는 길입니다.선남자여, 당신이 가려는 그곳까지엔 여러 갈래 길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얼마 가지 않으면 곧 두 길이 나타날 것입니다. 하나는 왼쪽으로 난 길이고 또 하나는 오른쪽으로 난 길입니다. 당신은 왼쪽 길을 버리고 오른쪽 길로 가야만 합니다. 그러면 그곳에서 오래가지 않아 울창하고 시원한 덤불숲이 보일 겁니다. 그 덤불숲에 묘한 못과 샘이 많이 있습니다. 물이 많고 맛도 좋아 목욕도 할 수 있고 마실 수도 있어 갈증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 목마른 사람이 물이 있는 곳을 듣고 생각하고 나면 갈증이 멈추어지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비록 시원하다고 들었더라도 몸은 아직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이것도 역시 그러하여 들어 얻는 지혜와 생각해 얻는 지혜 등으로는 곧 실상(實相)의 법을 깨달아 알 수 없다. 드넓은 광야는 비유하면 생사와 같고, 목마른 사람은 곧 얽매인 범부이니, 번뇌의 열이 핍박하면 곧 애착의 갈증이 일어난다. 길을 잘 아는 사람이란 비유하면 모든 지혜의 길을 잘 아는 보살과 같고, 물을 마신다는 것은 비유하면 법의 맛을 잘 얻는 것과 같다. 시원하게 목욕한다는 것은 비유하면 몸으로 증득한다는 것과 같고, 맑고 깨끗하며 짜고 쓴 맛이 하나도 없다는 것은 비유하면 여실한 법과 같다.선남자야, 너는 지금 잘 들어라. 내가 다시 비유하여 말하겠다. 가령 여래가 염부제에 있으면서 1겁의 수명이 다하도록 감로의 맛을 ‘향기가 매우 묘하고 달고 맛있고 청정해 먹으면 즐거움을 느낀다’고 설명하고, 모두들 그 맛이 비할 데가 없다고 찬탄한다고 하여도, 어떤 사람이 비록 그 빛깔은 보았으나 아직 먹지 않았다면 그 맛을 알겠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내가 지금 너를 위해 다시 비유로 설명하겠다. 어떤 사람이 맛있는 과일을 먹고 나서는 아직 먹지 못한 사람 앞에서 그 과일이 색과 향기와 맛을 갖추었다고 찬탄하였다고 하자. 그 사람이 과일에 대해 말하는 것을 들었을 때 스스로 저 과일의 색과 향기와 맛을 알 수 있겠느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 역시 이와 같다. 듣거나 생각해 얻은 지혜라고 해도 곧 진실한 법의 모습을 깨달아 아는 것은 아니니라.”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지금 저를 위해 쾌히 이런 비유들을 말씀하시니, 듣는 이가 있다면 머지않아 그들도 반드시 법의 이익을 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법을 들으면 반드시 아비발치(阿厦跋致)를 깨달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기 때문입니다.”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네가 말한 것처럼 이 법을 듣는 사람은 반드시 아비발치를 깨달아 분명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법계(法界)를 잘 아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공처(空處)에 잘 머문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역공(力空)을 잘 아는 것, 무외공(無畏空)을 잘 아는 것, 불공법공(不共法空)을 잘 아는 것, 계취공(戒聚空)을 잘 아는 것, 정취공(定聚空)을 잘 아는 것, 혜취공(慧聚空)을 잘 아는 것, 해탈취공(解脫聚空)을 잘 아는 것, 해탈지견취공(解脫知見聚空)을 잘 아는 것, 공공(空空)을 잘 아는 것, 실제공(實諦空)을 잘 아는 것이다. 비록 공을 알지만 공의 모습에 집착하지 않고, 공이라는 견해를 내지 않으며, 공을 의지하지 않고, 이 공의 인연과 모습으로 인해 단견에 떨어지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공처에 잘 머무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무상(無相)에 머문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외상(外相)을 없애는 것, 내상(內相)을 없애는 것, 희론의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있다고 생각하는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경계의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거동하는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처소를 향해 가는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조작하는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식의 모습을 없애는 것, 모든 식이 인식하는 대상의 모습을 없애는 것이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모든 보살이 이와 같이 무상에 머문다면, 부처님께서 무상에 머무신다는 것은 또 어떤 것입니까?”부처님께서 곧 대답하셨다.
“여래의 경계는 불가사의하다. 왜냐하면 지혜로써 생각하고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생각하려고 하면 마음이 미쳐 날뛰듯 어지러워질 것이다. 모든 중생이 다 함께 헤아려 생각한다 해도 여래의 이 언덕 저 언덕의 일은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여래의 경계는 깊고 넓고 불가사의하기가 마치 허공과 같아 나타낼 수 있는 모든 수량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보려고 집착하기만 하면 마음이 항상 전도되고 마니, 숫자로 헤아려 생각하고 헤아릴 것이 아니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의문이 있습니다. 부디 허락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네가 물으려고 하는 것에 따라 내가 지금 분별해서 해설하겠으니, 일체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모두 허락하셨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약 아소(我所)에 집착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의 법이 아니라면, 세존께서는 곧 대법주(大法主)이신데 어떻게 자신을 칭찬하고 기리실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라. 너를 위해 말해 주겠다.”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예,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 여래가 교만해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이익을 구하지 않고 명예를 구하지도 않고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도 않으며, 허망하게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고 아첨하거나 속이지도 않는다. 그럼 무엇 때문인가? 단지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고, 안락하게 수행하는 법을 얻게 하려고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이다. 또 무엇 때문인가? 중생으로 하여금 여래의 처소에서 깊이 믿고 공경하는 마음을 내게 하고, 마음으로 깊이 환희하는 법기를 감당할 만한 이들은 오랫동안 안온하게 좋은 이익을 획득하고 항상 즐거움을 누리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곧 하늘 가운데 존귀한 분이며, 자재한 법왕이신 것을 중생들이 어찌 모르겠습니까?”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모른다. 왜냐하면 하열한 중생들은 업행(業行)이 비루하고 지혜가 적고 믿음이 적어 항상 선하지 않은 짓을 하고 온갖 악을 품으므로 여래에게 큰 위덕이 있다는 것을 모른다. 이런 여러 이유 때문에 여래가 스스로 진실한 덕을 칭찬하고 찬탄해 저 중생들로 하여금 믿고 받아들여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선남자야, 비유하면 마치 치료법을 잘 아는 의사와 같다. 그 의사가 있는 곳에 온갖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이 많고, 이 의사 외에는 치료할 수 있는 의사가 없는데, 모든들 이 의사에게 큰 위덕이 있는 줄을 모른다고 하자. 이때 훌륭한 의사는 모든 병자가 처방할 약을 알지 못하고 또한 먹지 말아야 할 음식도 모르는 것을 보고는 ‘내가 치료해 그 병의 고통을 없애 주겠다’며 대자비를 일으킨다.이때 이 훌륭한 의사는 여러 사람 앞에서 스스로 자기의 덕을 칭찬하며 ‘나는 이 병을 잘 알고, 병의 원인을 알고, 병에 따라 처방하는 약을 잘 안다’고 말한다. 이때 중생들은 그 훌륭한 의사를 믿고 공경하게 되어 믿는 마음으로 인해 곧 그에게 의지한다. 이때 훌륭한 의사가 약간의 약을 처방해 주면, 모든 사람은 그 약을 먹고 병이 모두 없어져 낫게 된다.선남자야, 이때 그 의사는 스스로를 칭찬한 것이냐?”
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여래 세존은 대의왕(大醫王)과 같아 능히 중생이 번뇌하는 병을 치료하고, 또 번뇌가 일어나는 곳을 알아 큰 법의 약을 두루 그들에게 주지만, 중생들은 어리석고 번뇌에 가려 여래가 대의왕임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여래는 곳곳마다 중생 앞에서 항상 스스로를 칭찬하는 말을 하니, 이때 중생이 문득 믿음과 공경하는 마음이 생겨 여래에게 귀의한다. 그러면 성주세존(聖主世尊)은 의왕처럼 대법의 약으로 중생들 번뇌의 병을 없앤다.무엇을 대법의 약이라고 하는가?
탐욕은 부정(不淨)으로 치료하고, 성냄은 자비스러운 마음으로 치료하고, 어리석음은 인연법(因緣法)으로 치료하니,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법약으로 모든 번뇌의 병을 일일이 다스린다. 선남자야, 여래는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이익이 있는 줄 아는 까닭에 스스로를 찬탄하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와 같은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무상(無相)에 머무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비록 보시를 하지만 보시에 의지해 바라는 것이 없고, 비록 금하는 계율을 지키나 금하는 계율에 의지해 바라는 것이 없고,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 역시 그러하여 바라는 것이 없고, 비록 삼계에 의지하나 삼계의 상(相)을 바라지 않고, 비록 보리를 구하나 보리의 상을 취하지 않고, 비록 정도를 행하나 정도의 상을 취하지 않고, 비록 열반을 구하나 열반의 상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 무엇 때문인가? 보살은 바라는 모든 상을 떠났기 때문에 비록 모든 불법을 행하나 마음에는 항상 바라는 것이 없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바라는 것이 없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자심(慈心)을 한량없이 닦는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 자심, 친한 이를 따르지 않는 자심, 항상 법을 행하는 자심, 선정에 의지해 닦는 자심, 성내는 마음을 없애기 위해 닦는 것이 아닌 자심, 항상 모든 중생에게 이익을 주기 위해 일으키는 자심, 항상 중생을 위해 평등을 닦는 자심, 괴롭히고 해치지 않기 위해 닦는 것이 아닌 자심, 시방에 두루하여 널리 닦는 자심, 세간을 벗어나 닦는 자심이다.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자심을 한량없이 닦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비심(悲心)이 한량없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중생이 의지할 곳도 없고 구해 줄 사람도 없고 믿을 사람도 없이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보살이 곧 보리심을 내는 것, 법대로 수행하는 것, 법을 획득하는 것, 그로 인해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 탐욕스런 중생을 가르쳐 보시하게 하는 것, 파계하는 중생을 가르쳐 지계를 닦게 하는 것, 괴롭히고 방해하는 중생을 가르쳐 인욕을 닦게 하는 것, 게으른 중생을 가르쳐 정진을 닦게 하는 것, 마음이 산란한 중생을 가르쳐 선정을 닦게 하는 것, 어리석은 중생을 가르쳐 지혜를 닦게 하는 것이다.억센 고집으로 온갖 악을 저지르며 가르침을 받아들이지 않는 중생을 보더라도 보살은 또한 마음이 물러서지 않으니, 비록 중생을 위해 오랫동안 온갖 고통을 겪더라도 반드시 저들을 구제하겠다는 뜻을 세우고 지치거나 싫증내지 않는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비심을 한량없이 닦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희심(喜心)이 한량없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뜨겁게 타오르는 생사 가운데에 있던 중생이 3유(有)의 거짓 주인을 떠나는 것을 보고 환희심을 내는 것, 생사에 진동하며 오가던 업을 엮는 밧줄을 끊어버리고 환희심을 내는 것, 생사의 큰 바다 속에 마갈(魔竭)과 악각수(惡覺水)와 나찰(羅刹)의 재난이 있는 것을 보고 이제 생사의 큰 바다에 있는 이러한 여러 재난을 멀리 떠나게 되어 환희심을 내는 것이다.악마의 깃발을 쓰러뜨리고 환희심을 내는 것, 금강 같은 지혜로 번뇌의 산을 먼지가루처럼 남김없이 무너뜨리고 환희심을 내는 것, ‘내가 이제 스스로 고통을 없앴으니 다른 사람 역시 고통이 없게 하리라’고 하며 환희심을 내는 것, ‘나는 이제 생사의 오랜 잠의 경계에서 마음에 깨달음을 얻었다. 모든 중생이 애착에 속박되고 무명으로 눈이 멀었으니, 역시 그들도 모두 깨닫게 하리라’고 하며 환희심을 내는 것이다.‘내가 이제 스스로 해탈을 얻어 모든 악취의 험난한 곳을 벗어났으니, 역시 악취의 험난한 곳으로 떨어지는 모든 이들을 제도해 해탈하게 하리라’고 하며 환희심을 내는 것, ‘생사의 광야와 6취(趣)의 험로에서 동반자 없이 홀로 가며 길을 몰라 우왕좌왕 위치를 몰랐었는데, 이제야 내가 바른 길을 알아 위치를 알게 되었다’고 하며 환희심을 내는 것, ‘나는 이제 일체지의 성에 가까이 다가와 부처님 자리에 인접하게 되었다’고 하며 환희심을 내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희심이 한량없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사심(捨心)이 한량없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눈으로 좋은 모습을 보아도 마음이 물들어 집착하지 않고 평등한 마음으로 들어가는 것, 귀로 소리를 듣거나 코로 냄새를 맡거나 혀로 맛을 보거나 몸으로 부드러운 것을 접촉하거나 뜻으로 모든 법을 알아도 이러한 5진(塵)에서 그 상을 취하지 않고 또 괴로워하지도 않으며 항상 평등한 마음을 행하는 것이다.고고(苦苦)와 행고(行苦)와 괴고(壞苦)의 이 세 가지 느낌에 대해 마음에 더하거나 덜함이 없이 항상 평등한 마음을 행하는 것, 해야 할 일을 이미 끝내고 모든 번뇌를 다 없애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행하는 것이다. 보살은 ‘나는 그들을 제도하고 난 뒤에 나 자신을 제도하리라’고 생각하며 평등한 마음을 행한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의 사심(捨心)이 한량없는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신통이 자재하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목숨을 버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태어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동자가 되어 갖가지로 웃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출가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고행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보리수로 향하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악마의 수고와 원망을 항복시키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고요한 곳에 즐거이 머무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법륜을 굴리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 열반에 드시는 모습을 나타내는 것이다.”제개장보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인연으로 도솔타천(兜率陀天)에서 목숨을 버리는 모습부터 열반에 이르는 모습까지를 나타내십니까?”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도솔타천에서는 오욕에 물들고 집착하므로 항상하여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한다. 보살은 모든 중생 중에서 가장 높고 가장 훌륭해 오욕에 물들지 않으므로, 몸이 마침내 죽음으로써 항상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중생의 병을 고친다. 그리하여 무상하다는 생각을 하게 하고 마음이 방일하지 않도록 한다. 도솔타천에서는 방일함이 많아 공경하는 마음과 믿고 즐거워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며, 애욕에 물들고 집착해 정법을 받아들이지 않고, 늘 기쁘게 놀며 마음껏 재미있게 놀기만 한다. 그래서 보살은 그들의 방일한 마음을 없애고자 목숨을 버리는 모습을 나타내 보인다.이때 중생들은 보살이 목숨을 버리는 것을 보고 모두 방일함을 버리고 싫어해 벗어나려는 마음을 내며, 방일함을 버린 까닭에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낸다.보살이 어머니의 태에 있으면서 많은 신기한 모습을 보이는 것 역시 중생이 그 변화를 믿고 받아들이게 하기 위해서이다. 어머니의 태 속에 있으면서도 중생을 위해 설법하여 모두 아비발치를 얻어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향하게 한다.만약 보살이 어린아이일 때 모습을 보고 선근이 성숙하는 중생이라면, 보살은 이 중생의 선근을 성숙시키기 위해 어린아이 시절 모습을 나타낸다. 만약 보살이 출가하는 모습을 보고 선근이 늘어나는 중생이라면, 보살은 곧 이들을 위해 집을 버리고 출가한다. 만약 추하고 더러운 것에 뜻을 두어 집착하는 중생이라면, 보살은 고행하는 모습을 나타내어 그들을 성숙시킨다. 고행하는 모습을 보아야 성숙할 천ㆍ용과 야차와 건달바라면 곧 그들을 위해 그런 모습을 나타내어 성숙시키고, 또 모든 외도 등을 조복시킨다.한량없는 중생들이 오래도록 발원하기를 ‘보살이 보리수에 속히 나아가면 나도 당연히 따라서 쫓아가리라’고 하면, 이때 보살은 곧 보리수 아래로 나아가는 모습을 나타낸다. 이때 그 중생들은 아비발치를 얻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기에 이른다.또 교만하고 높은 체하며 스스로 자기의 세력을 믿는 중생이 있으면, 보살은 그들의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해 도량에 앉아 악마의 원한을 꺾어 굴복시키는 모습을 나타내어 그들로 하여금 믿고 복종하게 만든다.보살은 적정을 좋아하는 중생들의 선근을 증장시키려고 도량에 앉은 모습을 나타낸다. 보살은 도량에 앉을 때 삼천대천세계의 온갖 소리를 모두 다 사라지게 해 삼천대천세계를 일시에 적정하게 하여 적정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매우 희유하다는 생각을 내게 하고,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내게 하며,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적정을 얻게 한다.또 어떤 중생은 스스로를 대사(大師)라 일컬으며 일체지를 가졌다는 생각을 하지만 생사를 벗어나는 길을 알지 못하고, 세상을 벗어나는 법을 알지 못하며, 또한 현생 이후의 과보를 알지 못한다. 이런 중생을 꺾어 굴복시키기 위하여, 또 법기를 감당할 만큼 성숙한 중생을 보면 이러한 사람들을 위해 무상삼보리도(無上三菩提道)를 이루어 바라내(波羅㮈)로 나아가 4제(諦)의 법륜을 굴리는 모습을 나타낸다.또 열반을 나타내 성숙시킬 수 있는 중생이 있으면, 그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해 열반에 드는 모습을 나타낸다. 보살은 이와 같은 인연과 이와 같은 뜻으로 도량에 앉는 모습에서부터 열반에 드는 모습까지를 나타낸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신통이 자재한 것이라 한다.선남자야, 보살에게 다시 열 가지 법이 있으면 여덟 가지 재난을 여의었다고 한다.
무엇이 열 가지인가?
선하지 않은 악업을 떠나는 것이다. 여래께서 제정하신 금계(禁戒)를 끝내 허물어 범하지 않고 탐욕과 질투를 없애며, 과거 부처님 때 심은 모든 선근으로 항상 복업을 닦아 지혜가 구족하고, 방편을 잘 알며, 발원할 것을 잘 알고, 염오심(厭惡心)이 많아 능히 열심히 정진한다.보살은 악업을 지어 지옥에 들어가는 일이 없고 비록 지옥에 처하더라도 끝내 지옥의 괴로운 과보를 받지 않으며,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역시 괴롭힐 수도 없다. 비록 지옥에 떨어지더라도 오랫동안 그곳에 있지 않고, 또한 다시 괴롭히고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는다.보살은 뜻과 품성이 부드럽고 조화되어 항상 열 가지 선을 닦고, 이 열 가지 선으로 인해 지옥에 떨어지지 않는다. 보살은 부처님의 계율을 허물어 축생 가운데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 비록 축생으로 나타나더라도 축생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 보살은 탐욕과 질투를 일으켜 아귀 중에 떨어지는 일이 없으며, 비록 아귀로 나타나더라도 아귀의 고통을 받지 않는다.보살은 끝내 사견(邪見)을 가진 집안에 태어나지 않으며, 사견을 가진 곳에 태어나더라도 반드시 선지식을 만난다. 왜냐하면 이미 과거에 모든 선을 닦았기 때문이며, 또 과거 부처님 때 오랫동안 선근을 심었기 때문이다. 항상 정견(正見)을 가진 집안에 태어나 선한 인연을 갖추니 선한 인연을 갖춘 까닭에 공덕이 크고 넓어진다.보살은 끝내 어떤 근도 손상되거나 모자라지 않으니, 만약 근이 모자라면 법기를 감당할 수 없다. 보살은 오래도록 덕을 쌓으며 복을 닦기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모든 형상과 탑사와 법과 승가에 곳곳마다 복을 닦아 항상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항상 이와 같이 닦은 까닭에 모든 근이 다 갖추어져 빠지거나 모자라는 것이 없으므로 법기를 감당한다.보살은 끝내 변두리 지방의 못나고 어리석으며 귀머거리나 벙어리 같은 사람들이 사는 여러 악한 곳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마치 흰 양처럼 어리석고 무지해 선악의 뜻도 구분할 수 없고 법기를 감당할 수 없으며, 또한 사문과 바라문도 알지 못한다.보살은 중국에 태어나 지혜가 총명하고 근기가 날카로워 대지견(大智見)이 있고, 또 마음으로 기꺼이 지혜로운 이를 가까이해 선악을 잘 알아 분별하며 법기를 감당할 만하고, 사문과 바라문을 깊이 믿는다. 왜냐하면 보살은 본래 지혜를 닦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보살은 장수천(長壽天)에 태어나지 않는다. 장수천에 태어나면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을 볼 수 없으니, 도의 과보를 멀리 떠나게 되고 중생을 성숙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보살은 욕계에 태어나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실 때에 반드시 만나 뵙고 중생을 교화하니, 무슨 인연인가? 좋은 방편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보살은 끝내 부처님께서 계시지 않은 세계엔 태어나지 않고, 또 법을 들을 수 없는 곳엔 태어나지 않으며, 나아가 공양할 많은 승가가 없는 곳에는 태어나지 않는다. 이처럼 보살은 태어나는 곳마다 반드시 삼보를 만나게 되니, 왜냐하면 본래의 서원력 때문이다.보살은 태어나는 곳마다 반드시 염오심을 가지고, 교만하게 스스로를 높이는 마음이 없다. 온갖 악이 있는 여덟 가지 재난에 대해 들으면, 반드시 염오심을 내고 기뻐하지 않으며, 열심히 닦고 정진해 모든 선법을 갖추고 악법을 없앤다.
선남자야, 이러한 열 가지를 갖추면, 이를 보살이 여덟 가지 재난을 여읜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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