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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93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6권

by Kay/케이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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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6

 

보리자량론 제6권용수 본송
자재 해석
달마급다 한역
박상수 번역【문】어떻게 닦는가?【답】네 가지 신족[四神足]을 근본으로 삼으니
욕망ㆍ정진ㆍ마음ㆍ사유이고,
네 가지 무량[四無量]을 주지(住持)하니
말하자면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이다.이 4무량을 많이 익히고 가까이하고 나서야 마음이 감당하는 능력을 얻게 된다. 마음이 감당하는 능력을 얻게 되고 나서야 문득 최초의 선나[初禪那]에 들어간다. 이와 같이 두 번째, 이와 같이 세 번째, 이와 같이 네 번째로 저 선나(禪那)를 얻고 나서야 몸과 마음이 경안(輕安)하게 된다. 저 몸과 마음이 경안함을 구족하기 때문에 신통(神通)에 들어가는 도를 생한다. 신통에 들어가는 도를 구족하여 생하기 때문에 문득 신족(神足)을 생하니, 말하자면 혹은 욕망, 혹은 정진, 혹은 마음, 혹은 사유이다.그 중에서 욕망[欲]은 법을 지향하고, 정진(精進)은 법을 성취하고, 마음은 법에 대하여 관찰하고, 사유(思惟)는 법에 대하여 방편이 훌륭한 것이다. 저 보살은 신통에 대하여 믿고 이해하거나 작용하므로 그 마음이 자재하여 욕구하는 바에 따라 행하는데, 잘 성숙시키기 때문에, 스스로 근본에 주지(住持)하기 때문에, 바람이 허공에 두루 퍼지는 것처럼 모든 곳에서 순조롭게 행한다.
이 중에서 보살은 4무량(無量)과 4선나(禪那)를 얻고 나서 믿고 이해하기도 하고 작용도 해서 천안(天眼)을 생한다.혹은 모든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 등과 혹은 학인(學人) 및 성문과 독각의 천안이 있으나, 그 중에서 보살은 홀로 증상된 힘이 있어서 청정함이 수승하게 뛰어나고, 광명이 수승하게 뛰어나고, 상수(上首)가 수승하게 뛰어나고, 특수함이 수승하게 뛰어나다. 저 눈이 장애가 없어서 세간의 색상(色相)이 거칠거나 미세하고 멀거나 가까워도 그 욕망하는 바에 따라 모두 능히 본다. 이와 같이 하늘ㆍ인간ㆍ축생 등의 소리를 듣고, 이와 같이 지난 세상이 한계 없고 제한 없음을 염(念)하여 알고, 이와 같이 타인의 마음이 탐욕 등과 함께하는 것과 나아가 팔만 사천 가지로 차별되는 것을 알며, 이와 같이 한량없는 신족을 얻는다. 신족을 얻기 때문에 모든 조복해야 하는 중생을 전부 조복시킨다.4계(界:四大)는 독사 같고
6입(入:六根)은 비어 있는 촌락 같고
5중(衆:五蘊)은 살상자 같다고
마땅히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긴 세월 온갖 즐거운 도구를 수용하는 인연을 통해 비록 이 지계(地界) 등의 4계(界)를 수호하고 자라게 하고 오래 양성하지만, 신속하게 발동하고, 양성한 은혜를 알지 못하고, 의지할 수 없고, 위임하여 믿을 수 없기 때문에 마치 독사 같다고 관찰하여야 한다. 주체가 없기 때문에, 나와 내 것을 여의기 때문에, 눈[眼] 등의 입[諸入]에는 여섯 가지 도적의 무리가 있어서 핍박하고 고뇌하게 하여 두렵기 때문에 마치 비어 있는 촌락과 같다고 관찰해야 한다. 사물과 함께 화합해서 파괴되고 벌을 받아도 능히 가려서 장애하지 못하기 때문에 마치 살해자와 같다고 5수중(受衆:五蘊)에 대해서는 날마다 이와 같이 관찰해야 한다.법(法)과 법사(法師)를 존중하고
또한 법에 대하여 인색함을 버리며
가르치는 스승[敎師]은 비밀을 감추지 말고
듣는 자[聽者]는 산란하지 말아야 한다.이에 대하여 네 가지의 법이 있어서 능히 큰 지혜를 생하니 반드시 받아 지녀야 한다. 법과 법사에 대해서는 마땅히 존중하여야 한다. 또한 법의 인색함을 버리고 들은 법을 따르고 익히고 외운 것을 따라서 타인을 위하여 연설한다. 만약 법을 즐겨서 바라는 자가 있다면, 가르치는 스승은 손 안에 거머쥐고서 아까워하지 말고 듣는 자는 산란하지 말아야 한다. 말하자면 다른 욕심이 있어서는 안 된다.교만도 없고 희망도 없이
오직 자비로 연민하는 마음과
존중하고 공경하는 뜻을 가지고
대중을 위하여 법을 설한다.다시 네 가지 법이 큰 지혜의 모습이니, 마땅히 받아 지녀야 한다. 말하자면 자신을 높이고 타인을 경시하는 것을 멀리 여의니 교만이 없기 때문이다. 이양ㆍ공경ㆍ명성을 버리니 희망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무명(無明)의 어둠에 가려진 중생을 오직 자비로 연민하기 때문에 존중하고 공경해서 그를 위하여 법을 설한다. 이 네 가지 법 때문에 보살은 큰 지혜를 구족하니, 마땅히 받아 지녀야 한다.들은 것에 대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듣고 나서는 모두 염송하여 지니며
존중하는 복전(福田)을 기만하지 않고
또한 스승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한다.많이 들은 것에 대하여 싫증을 내지 않고, 듣고 나서 법을 지니며, 법을 지니고 나서는 법에 수순하여 법을 실행하며, 존중하는 복전을 기만하지 않고 또한 가르치는 스승으로 하여금 환희하게 한다. 이 법이 보리심을 망각하여 소실하지 않게 하는 원인이다.마땅히 남의 집안[他家]을 관찰하지 말지니,
공경하고 공양하는 것을 마음에 품고
논란(論難)하기 위해서
세간의 전적[世典]을 익히거나 외우지 말아야 한다.마땅히 공양하고 공경하는 인연 때문에 남의 집안을 찾아가서 관찰하지 말아야 하지만, 보리심을 안립하고자 하는 인연 때문인 것은 제외한다. 또한 논란을 하기 위해서 모든 세간의 논서[世論]들을 익히거나 외우지는 말아야 하지만, 많이 듣고자 하는 인연 때문인 것은 제외한다.성났기 때문에
모든 보살을 헐뜯지 말고
아직 받지 않고 듣지 못한 법에 대해서도
또한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왜냐하면 선한 법을 계속하여 생하는 인연을 보호하려고 하기 때문이다.교만을 단절하여 제거하고
마땅히 네 가지 성스러운 종류[四聖種]에 안주해야 하며
타인을 혐오하지도 말고
또한 스스로를 높여서 거만하게 굴지도 말라.‘교만을 단절하여 제거하고’라는 것은 모든 중생에게 마땅히 개[狗]처럼 하심(下心)해서 아만(我慢)을 단절해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가볍고 검소한 의복ㆍ음식ㆍ침상ㆍ의약의 네 가지 성스런 종류 중에 또한 마땅히 안주해야 한다. 그 성스런 종류에 대하여 만족할 줄 알기 때문에 타인을 혐오하지도 말고, 또한 스스로를 높여서 거만하게 굴지도 말아야 한다.사실이거나 사실이 아닌 범죄라도
타인을 드러나지 않게 할지니,
타인의 잘못을 찾지 말며
자신의 잘못은 마땅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청정한 수행을 함께하는 다른 이가 죄를 지으면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모두 마땅히 드러나지 않게 해야 한다. 타인에게 잘못이 있어도 찾지 말고, 오직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곧 깨달아 알아야 한다.부처님과 모든 부처님 법을
분별하거나 의심하지 말아야 하나니,
법이 비록 가장 믿기 어렵더라도
그 중에서 마땅히 믿어야 한다.부처님에 대하여 분별하지 않아야 하나니, 세존께서는 일찍이 존재하지 않은 법을 구족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부처님 법에 대해서도 의심하지 않아야 하나니, 모든 중생과 함께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또 가장 믿기 어려운 부처님의 법에 미쳐서도 깊은 마음으로 청정하기 때문에 반드시 그것을 믿어야 한다.비록 진실한 말로 말미암아 죽게 되거나
전륜성왕 및 모든 하늘의 왕위에서
물러나게 되더라도
오직 진실한 말만을 하여야 한다.만약 보살이 진실한 말로 말미암아 물건을 약탈당하거나 죽게 되거나, 혹은 전륜성왕 및 모든 하늘의 왕위에서 물러나더라도 오직 진실한 말만을 해야 하는데, 하물며 그밖에 대해서도 진실하지 않은 말을 하겠는가?때리고 꾸짖고 두렵게 하고 죽이고 계박하여도
끝내 타인을 원망하거나 책망하지 않으니
모두 내 자신의 죄이며
업보(業報)이기 때문에 찾아와 나타나는 것이다.타인이 와서 때리고 꾸짖고 공포에 떨게 하고 죽이고 계박하고 유폐하는 모든 것은 모두 자신의 죄로써 마땅히 이런 일이 있는 것이므로 끝내 타인에게 성내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지난 세상에서 지은 업 때문에 지금 비슷한 좋아하지 않는 과보를 다시 받는 것이다. 저 모든 중생에게는 결코 죄가 없고 오직 내가 지은 죄의 업보가 찾아와 나타나기 때문에 이런 일이 있게 된다.마땅히 지극히 존중하고 애호하며
부모(父母)를 공양하고
또한 화상(和上)을 모시고
아사리(阿闍梨)를 공경해야 한다.부모에 대하여 지극히 애호하고 존중하고 공양해야 한다. 마땅히 하늘같이 생각하고, 부모의 뜻에 수순하여 기쁘고 즐겁게 하며, 아첨과 환상적인 마음을 여의어야 한다. 또 화상과 아사리를 공경하고 모셔야 하나니, 화상과 아사리가 설하는 법에 수순해서 안으로 숨기는 일이 없고 모두 밖으로 교화하여야 한다.성문승(聲聞乘)과 독각승(獨覺乘)을
믿으면서
가장 깊은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보살의 잘못이다.이 중 보살에게 네 가지 보살의 착오가 있으니 반드시 버려서 여의어야 한다. 말하자면 성문승과 독각승이 모든 중생 중에서 가장 깊은 법을 설한다고 하는 것은 보살의 착오이다.깊이 대승을 믿는
중생을 위하여
성문승과 독각승을 연설하는
이것도 또한 그 착오이다.깊이 대승을 믿는 모든 중생에게 성문승과 독각승을 연설하는 것은 보살의 착오이다.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법을 구하는데
교만하고 늘어져서 연설하지 않고
도리어 악을 거두어 받아들여서
믿음이 없는 자를 위임한다.만약 바르게 안주하는 훌륭한 중생이 찾아와서 구하는 것이 있을 때면 마땅히 즉시 선한 법을 설해야 한다. 그런데 다시 교만하고 늘어져서 계율을 깨뜨리는 악한 법으로 더리어 거두어들이는 것은 보살의 착오이다. 대승에 대하여 아직 믿거나 이해하지 못하고 아직 4섭사(攝事)로써 성숙하지 못하였는데도 그를 신임하는 것은 보살의 착오이다. 이것이 네 가지 보살의 착오이다.설명한 착오는 멀리 버리고
설명한 두다(頭多)의 덕(德)에 대해서는
마땅히 염(念)하여 알아야 하며
또한 모두 닦아서 가까이해야 한다.이 중에서 설명한 네 가지 착오는 마땅히 멀리 버려야 하니, 이것이 보리를 멀리 떠나기 때문이다. 만약 성문승과 독각승 중에서 말하는 두다(頭多) 등과 그 밖의 공덕이 단지 보리를 위하여 장애가 되지 않음을 알면, 그 각각에 대하여 또한 닦아 가까이해야 한다.동등한 마음으로 평등하게 말하고,
평등하고 선하게 안립시키며
또한 바르게 상응케 함으로서
모든 중생에게 차별이 없다.이 네 가지 보살도(菩薩道)를 닦아 가까이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모든 중생 중에서 평등한 마음을 일으키고, 모든 중생 중에서 평등하게 법을 설하고, 모든 중생 중에서 평등하게 잘 안립시키고, 모든 중생 중에서 바르게 상응시키니, 이것들은 모두 차별이 없다. 이것이 네 가지이다.법을 위하고 이익을 위하지 않으며,
덕을 위하고 명성을 위하지 않으며
중생의 괴로움을 해탈시키고자 하고
자신의 안락을 바라지 않는다.이 네 가지를 진실한 보살은 마땅히 깨달아 알아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단지 법을 위하고 재물의 이익을 위하지 않으며, 단지 공덕을 위하고 명성을 위하지 않으며, 단지 중생의 괴로움을 해탈시키고자 하고 자신의 안락을 바라지 않는다.은밀한 마음으로 업의 과보를 구하고
지은 바 복된 일이 발생하면
또한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일을 버린다.만약 업의 과보[業果]를 은밀한 마음으로 욕구해서 세 가지 복된 일을 지어 이 복을 발생할 때면, 오직 보리를 위하여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고, 또한 오직 보리를 위하여 중생을 성숙시키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일을 버린다. 이것이 네 부류의 진실한 보살이다.친근할 선지식(善知識)이란
말하자면 법사(法師)와 부처님과
부지런히 힘쓰는 출가한 자와
걸식하는 무리이다.이 네 부류 보살의 선지식은 반드시 친근해야 한다. 어떠한 이들이 그 네 부류인가? 말하자면 법사는 보살의 선지식이다. 문혜(聞慧)1)를 도와서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부처님 세존은 보살의 선지식이다. 모든 부처님 법을 도와서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부지런한 출가자는 보살의 선지식이다. 모든 선근을 도와서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걸식하는 자는 보살의 선지식이다. 보리심을 도와서 유지시키기 때문이다. 이 네 부류의 보살의 선지식은 마땅히 친근해야 한다.세간의 논[世論]에 의지하는 자와
세간의 재물을 전적으로 추구하는 자와
독각승과 연각승을
믿고 이해하는 것이다.이 네 부류 보살의 악지식(惡知識)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어떠한 이들이 그 네 부류인가? 말하자면 세간의 논이란 갖가지 잡스런 변재(辯才)를 닦아 가까이하기 때문이다. ‘세간의 재물을 거둔다’는 것은 법을 거두지 않기 때문이다. 독각승이란 의리(義利)가 적고 하는 일이 적기 때문이다. 성문승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행동하기 때문이다.이 네 가지 악지식을
보살은 반드시 알아야 한다.
다시 마땅히 추구해야 하는 것이 있으니
말하자면 네 가지 큰 창고[四大藏]이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네 가지 지식(知識)은 악지식임을 알고 나서 반드시 여의어야 한다. 다시 추구하여 얻어야 하는 것이 있다. 말하자면 네 가지 큰 창고이다.부처님이 출세하시면 모든 도(度; 바라밀)를 듣고
아울러 법사의 처소에서
그것을 보는 마음이 장애가 없어
공적한 처소에 안락하게 머문다.이 네 가지 보살의 큰 창고[大藏]를 마땅히 얻어야 한다. 어떠한 것들이 그 네 가지인가? 말하자면 세상에 출세하신 모든 부처님을 받들어 모시고, 육바라밀(六波羅蜜)을 청문하고, 장애 없는 마음으로 법사를 보고, 방일하지 않음으로써 공적한 처소에 안락하게 머문다. 이것이 네 가지 보살의 큰 창고로써 마땅히 그것을 얻어야 한다.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ㆍ공(空)은
전부 그것과 상사(相似)하니
일체의 처소에서 평등하게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한다.지ㆍ수ㆍ화ㆍ풍ㆍ허공 등과 더불어 두 가지의 인연이 서로 비슷한 보살은 마땅히 거두어 받아들여야 하나니, 말하자면 평등하기 때문이고 이롭기 때문이다. 가령 지대(地大) 등과 허공의 다섯 가지는 마음이 있든 마음이 없든 일체의 처소에서 평등하여 다른 모습이 없으며, 모든 중생이 항상 자량(資糧)으로 이용하는 바인데도 변이(變異)가 없어서 보은을 구하지 않는다. 나도 또한 이처럼 깨달음의 도량에 이를 때까지 궁극적으로 모든 중생의 자량으로 이용되더라도 변이가 없어서 보은을 구하지 않는다.마땅히 의미를 잘 사유하고
부지런히 다라니(陀羅尼)를 생해서
법을 듣는 자에 대하여
장애를 짓지 말아야 한다.‘의미’라는 것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이니, 그것에 대하여 마땅히 잘 사유해야 한다. 함께 논의하든 홀로 머물든 마땅히 이와 같이 해야 한다. 또 금지된 계율의 청정한 심의(心意)를 안주시키고, 부지런한 정진으로 당장의 생을 청결히 해야 하고 아울러 은주(銀主)ㆍ해주(海主) 등의 다라니를 들어야 한다. 또 법을 듣는 자에게 미미한 사소한 인연으로라도 장애를 짓지 말아야 하니, 법의 재난으로부터 발생하는 업을 여의려고 하기 때문이다.번뇌 속에서 능히 조복하여
사소한 일은 남김없이 버리고
여덟 가지 게으른 일은
모두 반드시 제거해 없애야 한다.‘번뇌 속에서 능히 조복하고’라는 것을 말해 보자. 이 중에 아홉 가지 번뇌의 일이 있다. 말하자면 나에게 이익이 없는 것을 짓는데, 이미 지은 것과 지금 짓는 것과 장차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이다. 내가 친애하는 것에 대하여 이익이 없는 것을 짓는데, 이미 지은 것과 지금 짓는 것과 장차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세 가지이다. 내가 증오하고 혐오하는 것을 위하여 이익을 짓는데, 이미 지은 것과 지금 짓는 것과, 장차 짓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다시 세 가지이다. 이것들은 모두 번뇌를 짓는 일이다. 이 아홉 가지 번뇌의 일에 대하여 마땅히 스스로 조복해야 한다.‘사소한 일은 남김없이 버리며’라는 것을 말해 보자. 이 중에 스무 가지의 작은 일이 있다. 말하자면 믿지 않음[不信]ㆍ부끄러움이 없음[無慚]ㆍ아첨과 환상[諂幻]ㆍ요동함[掉]ㆍ어지러움[亂]ㆍ방일[放逸]ㆍ해침[害]ㆍ수치스러움이없음[無愧]ㆍ게으름[懈怠]ㆍ근심함[憂]ㆍ혼미함[昏][예전에는 수(睡)]ㆍ수면[睡][예전에는 면(眠)]ㆍ한탄함[恨]ㆍ덮음[覆]ㆍ질투함[嫉]ㆍ인색함[慳]ㆍ거만함[高]ㆍ분함[忿]ㆍ후회함[悔]ㆍ번민함[悶]이다. 이들 스무 가지의 사소한 일은 모두 남김없이 버려야 한다.‘여덟 가지 게으른 일은 모두 반드시 제거해 없애야 한다’는 것을 말해 보자. 이 중에 여덟 가지 게으른 일이 있다. 말하자면 내가 힘써 작업을 해야 하는데도 편안히 누워서 정진을 일으키지 않고ㆍ내가 힘써 작업을 하고 나서ㆍ내가 길을 가고자 하고ㆍ내가 길을 가고 나서ㆍ나의 몸이 피로하여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ㆍ나의 몸이 무겁게 느껴져서 작업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고ㆍ나에게 이미 질병이 생겨서ㆍ내가 질병에서 일어난 지 오래되지 않아서 편안히 누워 정진을 발하지 않고ㆍ이들로 말미암기 때문에 마땅히 얻어야 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도달해야 하는 것을 도달하지 못하고, 증득해야 하는 것을 증득하지 못한다. 이들 여덟 가지 게으른 일을 제거하여 단절하기 위해서 꼭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분수에 맞지 않는 것을 탐내지 말고
방자한 탐욕은 뜻에 적합하지 않으니,
여의는 것을 모두 화합하게 하여
친하든 친하지 않든 묻는 일이 없다.만약 이양(利養)ㆍ명성ㆍ안락함ㆍ칭찬과 명예ㆍ복덕을 구족한 중생을 보면, 그가 구족한 복에 대해 분수에 맞지 않게 탐내는 마음을 내지 말라. 분수에 맞지 않게 탐내는 마음을 지으면 뜻에 적합하지 않다. 그러므로 마땅히 짓지 말아야 한다. 또 각각 서로 다투다가 헤어지고 허물어진 중생에 대해서도 친하고 친하지 않음을 묻는 일이 없이 모두 화합하여 동일한 마음으로 서로 애호하게 해야 한다.공(空)에서 공을 얻는 것을
지혜로운 자는 의지해 행하지 말지니,
만약 공을 얻는다면
그 해로움이 신견(身見)보다 더하다.공에 의지하여 크게 지혜가 없는 덩어리[大無智聚]를 빼어 버리기 때문에 지혜로운 자는 공을 얻는 것에 의지하여 행하지 말아야 한다. 만약 공을 얻는 것에 의지하여 행하면, 곧 신견(身見)을 소유한 사람보다 치유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나쁘다. 모든 견해와 행은 공을 말미암아 벗어나지만, 만약 공견(空見)에 집착하면 그는 치유할 수 없다. 다시는 그것을 벗어나게 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청소[掃]와 바름[塗]과 장엄(莊嚴) 및
여러 종류의 북과 악기와
향(香)과 만(鬘) 등의 공양구를
지제(支提)에 공양한다.여래의 지제 및 형상이 있는 처소에서 땅을 청소하고 땅에 바르며, 또 향(香)ㆍ꾸미개[鬘]ㆍ태우는 향[燒香]ㆍ가루향[末香]ㆍ꽃ㆍ일산[蓋]ㆍ당기(幢旗)ㆍ번기(幡旗) 등의 장엄하는 공양구를 가지고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 단정한 계향(戒香)의 자재함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패적(貝笛)ㆍ공후(箜篌)ㆍ요고(腰鼓)ㆍ대고(大鼓)ㆍ뇌고(雷鼓)ㆍ박수(拍手) 등의 갖가지 북과 악기를 가지고 공양하는 것은 천이통[天耳]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갖가지 등륜(燈輪)을 만들어
지제사(支提舍)에 공양하고
덮개[蓋] 및 가죽신[革屣]과
말 수레와 가마 등을 보시한다.지제사 중에서 마땅히 갖가지 향유(香油)ㆍ소(酥)ㆍ등(燈)ㆍ꾸미개[鬘] 등을 잘 공양해야 하니, 불안(佛眼)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 산개(傘蓋)ㆍ가죽신ㆍ코끼리 수레ㆍ말 수레ㆍ가마 등을 보시하는 것은 보살이 어렵지 않게 위없는 신통승(神通乘)을 얻고자 하기 때문이다.오로지 법을 기뻐하고 좋아해야 하며
부처를 믿어서 증득하는 바를 즐거이 알아야 한다.
기뻐하고 좋아하면서 스님을 모시고
또한 바른 법을 듣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이 중에서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법을 기뻐하고 좋아해야 하고, 다섯 가지 욕망[五欲]의 복락(福樂)을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부처님을 신봉하여 얻게 되는 이익을 알아야 하고, 오직 색신(色身)을 바라보는 것만을 믿고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스님을 모든 좋은 도구를 가지고 항상 기뻐하게 모시고, 오직 찾아가서 안부를 묻는 것만으로 기뻐하지 말아야 한다. 마땅히 법을 듣는 것을 기뻐하여 싫증을 내지 말고, 단지 잠시 동안 그 말을 듣는 것을 기뻐하여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지난 세상[前生]에 생하지 않았으며
현재에는 머무르지 않으며
미래 세상[後際]에는 도달하지 않는다고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한다.인연의 화합하는 힘 때문에, 또 유래되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지난 세상에서 생하지 않았다. 생각 생각마다 파멸하기 때문에, 또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현재에 머무르지 않는다. 소멸하여 남는 것이 없기 때문에, 또 도달하여 가는 바가 없기 때문에 미래 세상에 도달하지 않는다.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을 관찰해야 한다.좋은 일은 중생에게 주면서도
저 좋은 과보를 구하지 않으며
마땅히 홀로 괴로움을 인내하고
스스로 치우치게 즐거움을 누리지 말아야 한다.보살은 마땅히 좋은 일로써 모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며, 스스로는 그들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좋은 일을 희망하지 않는다. 또 모든 중생에게 한량없이 괴로운 모습이 있으면, 내가 홀로 그를 위하여 인내하여 감수한다. 나에게 즐거운 도구가 있으면 모든 중생에게 주어서 수용하게 하는 것을 즐거움으로 삼는다.비록 큰 복의 과보를 구족하여도
마음으로 거만하지 않고 기뻐하지 않으며
비록 아귀처럼 빈궁하여도
또한 비굴하지 않고 근심하지 않는다.비록 복의 과보를 크게 구족한 하늘나라에 안주한다고 하여도 마음으로 기뻐하거나 거만하지 않는다. 비록 아귀가 되어 빈궁과 파산으로 핍박받고 괴로워서 가장 살기 어렵다고 하여도 마땅히 비굴한 마음[下心]을 생하지 말고 또한 다시 근심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인도(人道)에서 빈궁하여 파산함이랴.만약 이미 배운 자가 있으면
마땅히 극진하게 존중해야 하고
아직 배우지 않았다면 배움에 들게 하며
경시하거나 천대하지 말아야 한다.만약 이미 배운 중생이 있으면 그에 대하여 마땅히 지극하게 존중해야 한다. 만약 아직 배우지 않은 자가 있으면 그들로 하여금 배움에 들게 하고 또한 그들을 경시하거나 천대하지 말아야 한다.계율을 구족한 자는 공경하고
계율을 어긴 자는 계율에 들게 하며
지혜를 구족한 자는 친근하고
어리석은 자는 지혜에 안주하게 한다.계율을 구족한 사람에게는 마땅히 인사하고 합장하고 예배하는 등으로써 공경하고 또한 그에게 계율을 지키는 복을 설명해야 한다. 만약 계율을 어긴 자라면 마땅히 계율에 들게 해야 하고 또한 그에게 계를 어기는 죄를 설명해야 한다. 지혜를 구족한 자에게는 마땅히 친근해야 하고 또한 그를 위하여 지혜의 덕을 나타내야 한다. 어리석은 자에게는 마땅히 지혜에 안주하게 해야 하고 또한 그를 위하여 어리석음의 과오를 연설해야 한다.유전하는 괴로움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태어나고 늙고 죽으며 나쁜 세상에 떨어지는
이러한 두려움을 겁내지 말고
마땅히 악마의 나쁜 지혜를 항복시켜야 한다.유전(流轉)에는 태어남ㆍ늙음ㆍ죽음ㆍ근심ㆍ슬픔ㆍ괴로움ㆍ번뇌 등의 여러 종류가 있으며, 지옥ㆍ축생ㆍ아귀ㆍ아수라의 나쁜 세계들이 있다. 보살은 유전에 대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악마의 나쁜 지혜를 항복시켜야 한다.존재하는 모든 부처님 국토는
모든 공덕을 잡아 모으니,
모두 그것을 얻기 위하여
서원을 발하고 또 정진한다.시방의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 국토에서는 부처님 국토를 구족하기도 하고,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기도 하고,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따라서 듣기도 하고, 스스로 그것을 보기도 하는데, 그것은 모두 수승한 공덕을 잡아 모은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자불토(自佛土) 속에 들어가 도달하게 해야 한다”고 마땅히 이와 같이 서원해야 하며, 서원한 바를 따라 즉각 성취를 따르게 또한 이와 같이 정근하며 수행해야 한다.항상 모든 법 중에서
취하지 않고 버림을 행하니
이것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짐을 받아 지고자 하는 것이다.‘취하기 때문에 괴롭고, 취하지 않기 때문에 즐겁다’라는 생각을 하고 나서 항상 모든 법을 취하지 않고 버린다. 비록 취하지 않고 버린다 해도, 만약 이것이 선행한다면 보리에 나아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아직 제도하지 못한 자를 나는 마땅히 제도하고, 아직 해탈하지 못한 자를 나는 마땅히 해탈시키고, 아직 적멸하지 못한 자를 나는 마땅히 적멸시켜야 한다”고 서원하면서 중생의 짐을 받아지니, 이렇게 짐을 지는 것은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모든 법을 바르게 관찰하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지만
또한 대비(大悲)와 대자(大慈)를
버리지 말아야 한다.모든 법이 존재하는 바가 없다고 말하는 것은 꿈과 같고 환상과 같기 때문이고, 모든 법에 ‘나’가 없고 내 것이 없는 것은 모습이 없음을 관찰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가장 수승한 의미의 법으로써 이 모습을 관찰할 때에도 중생에 대하여 대비와 대자를 버리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배가(倍加)하여 다시 헤아리고 찬탄하며 말해야 한다.
“기이하도다. 저 모든 중생은 어리석음의 어둠에 덮여서 나와 내 것에 집착할 뿐 이 가장 수승한 의미의 도법(道法)에 대해서는 깨달아 알지 못한다. 나는 마땅히 어느 때엔가 저 중생으로 하여금 이 가장 수승한 의미의 도법에 대하여 깨달아 알게 해야 한다.”
이것이 중생 속에서 대비와 대자를 버리지 않는 것이다.온갖 공양 중에서 수승하게 뛰어난 것을
부처님 세존께 공양하니
그가 짓는 것은 무엇인가.
말하자면 법의 공양[法供養]이다.가령 온갖 공양구[供具]를 가지고 모든 성문ㆍ독각ㆍ보살 및 부처님 세존께 공양하는 일이 있다. 말하자면 혹은 모든 꽃[華]ㆍ향(香)ㆍ꾸미개[鬘]ㆍ가루향[末香]ㆍ등륜(燈輪)을 공양하고, 혹은 모든 덮개[蓋]ㆍ당(幢)ㆍ번(幡)을 공양하고, 혹은 모든 음악 등을 공양하고, 혹은 모든 약(藥)과 맛있는 음식 등을 공양한다. 만약 저 모든 공양보다 수승하게 뛰어난 것을 부처님께 공양하고자 한다면, 다시 그것은 무엇이겠는가? 대답하자면 이른바 법의 공양이다. 저 법의 공양에는 또한 어떠한 모습이 있는가?만약 보살장(菩薩藏)을 지니고
또 다라니(陀羅尼)를 얻어
깊은 법의 근원적인 바닥에 들어가면
이것이 법의 공양이다.이 중에서 만약 보살장과 상응하면 여래께서 설하신 경전 등은 깊고 깊은 밝은 모습이 모든 세간에 위배되어 그 근저를 얻기 어렵고 미세하여 드러나지 않는 요의(了義)를 보는 것이 어렵다. 총지(摠持)인 경전의 왕인(王印)으로써 그것을 인증하는데, 퇴전하지 않는 원인은 6도(度)로부터 발생하고, 거둘 것을 잘 거두어 보리법(菩提法)을 돕는 것에 수순하여 들어가서 바른 깨달음의 성품과 화합하고, 모든 대비(大悲)에 들어가서 대자(大慈)를 말하고, 뭇 악마의 견해를 여의어 인연으로 생기는 것을 잘 말하고, 중생도 없고 수명도 없고 길이 양육함도 없고 사람도 없음에 들어가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ㆍ무작(無作)과 상응하여 깨달음의 도량에 앉아서 법의 바퀴를 굴리며,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가 찬탄하는 바가 되고, 재가(在家)의 진흙탕을 건너서 모든 성인(聖人)을 거두어들이고, 모든 보살행을 연설해서 법(法)ㆍ의미[義]ㆍ사설[辭]ㆍ잘 연설함[樂說]의 변재에 들어가 무상(無常)ㆍ고(苦)ㆍ무아(無我) 등 음성의 천둥을 울리고, 모든 외도들의 논의와 견해를 얻어 고집하는 자를 두렵게 하며, 모든 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바로서 유전(流轉)을 대치하는 열반의 즐거움을 나타낸다. 이와 같은 등의 경전을 말하거나 지녀서 관찰하고 거두어 가지는, 이것을 법의 공양이라고 이름한다.또 법의 공양이란 퇴보하여 타락하지 않고 총지를 수순하여 행하기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원ㆍ무작과 상응하는 깊은 법 속에서 그 근저에 들어가 도달하여 움직이지도 않고 의심하지도 않는다. 이것을 가장 수승한 의미 중의 법공양이라고 이름한다.마땅히 의미에 의지해야 하지
잡된 맛에만 애착하지 말아야 하며
깊은 법의 도[深法道] 속으로
잘 들어가서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또 법의 공양을 말해 보자. 만약 법 가운데서 법을 사유하고 법을 행하면, 연생(緣生)에 수순하여 온갖 치우친 견해[邊取見]를 여의어서 출현하지도 않고 생겨나지도 않는 인(忍)을 얻어 무아(無我)에 들어가므로 인연에 대해 어기지도 않고 투쟁하지도 않아서 나와 내 것을 여읜다. 그리하여 마땅히 의미에 의지해야지 잡되게 꾸민 구절의 의미를 애착해서 쫓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지혜에 의지해야지 식(識)에 의지하지 말아야 하며, 의미가 분명한 경전에 의지해야지 의미가 분명하지 않은 세속의 언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마땅히 법에 의지해야지 사람의 견해를 취하지 말아야 하며, 마땅히 여실한 법행(法行)에 수순하여 머무름이 없는 곳[無住處]에 들어가서 무명(無明)ㆍ행(行)ㆍ식(識)ㆍ명색(名色)ㆍ육입(六入)ㆍ촉(觸)ㆍ수(受)ㆍ애(愛)ㆍ취(取)ㆍ유(有)ㆍ생(生)ㆍ노사(老死)ㆍ우비고뇌(憂悲苦惱), 지극한 곤란이 모두 적멸함을 잘 관찰한다. 이와 같이 연생(緣生)을 관찰하고 나서 인출(引出)이 다함이 없으니, 중생을 연민하여 생각하기 때문이다. 모든 견해에 집착하지 않고 방일하지 않으니, 만약 항상 이와 같이 한다면 비로소 위없는 법의 공양이라고 이름한다.이와 같이 이 자량(資糧)으로
항하사와 같은 대겁(大劫)에서
출가인과 재가인은
마땅히 바른 깨달음을 구족하여야 한다.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은 자량으로 항하사와 동등한 분량의 대겁(大劫) 중에서 출가 대중과 재가 대중의 보살승(菩薩乘)은 많은 시간 동안 서원을 구족하여 바른 깨달음을 성취한다.저 자량의 게송을 연계해
보리의 사유가 되니,
자량의 의미가 빠짐없는 것이
능히 그 게송에서 알2) 수 있다.나는 이제 그 게송을 선택하여
의미를 늘이거나 줄여서
게송의 의미들을 잘 해석하였으니
현명하고 지혜로운 자는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그 자량의 게송을 해석하니,
내가 지은 복의 선함[福善]은
유전하는 중생이
마땅히 정변각(正遍覺)을 얻게 하고자 함이다.성자(聖者) 용수(龍樹)가 지은 보리자량론(菩提資粮論)을 끝마친다. 나는 비구 자재(自在)로서 해석하는 것을 끝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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