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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91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4권

by Kay/케이 2024. 8.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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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4

 

보리자량론 제4권용수 본송
자재 해석
달마급다 한역
박상수 번역【문】만약 그렇다면 수미산 백 개 분량에 해당하는 복이 모이는 일은 없기 때문에 한 사람도 능히 보리를 얻을 수 없을 것이다.【답】비록 작은 복덕(福德)을 짓는다 하여도
이 또한 방편이 있으니
모든 중생의 처소에
응당 전부 반연을 일으켜야 한다.만약 이 보살이 비록 작은 복을 짓는다고 하여도 방편이 있기 때문에 큰 복의 모임을 성취한다. 혹은 음식을 중생에게 베풀어 주기도 하고, 혹은 꽃ㆍ향(香)ㆍ만(鬘) 등을 여래의 형상에 받들어 바치는데, 그 모든 복덕이 모든 세계가 포섭하는 모든 중생의 처소에 전부 반연이 된다.
“나는 이 복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하고자 합니다. 다시 이 복으로써 모든 중생과 더불어 그것을 함께하고자 합니다.”이와 같은 등의 복을 모든 중생과 함께 보리로 회향하는데, 이것을 보살의 방편이라고 이름한다. 이와 같이 회향하면 그 복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고, 한계가 없다. 그러므로 저 일체지지는 비록 한계가 없다 할지라도 되돌아서 이 모습의 한계 없는 복 때문에 능히 얻을 수 있다. 다시 다른 의미가 있다.나에게 모든 움직임과 작용이 있는 것은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이와 같은 등으로 마음이 행한다면
누가 능히 그 복을 헤아리리오.보살은 밤낮으로 항상 다음과 같은 마음의 행상[心行]을 일으킨다.
‘가령 나의 모든 움직임과 작용인 선한 몸ㆍ입ㆍ마음의 행위는 모든 중생을 제도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소생[穌息]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모든 중생을 적멸시키려고 하기 때문에 일으킨다. 또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지지를 만족시키고 일체지지에 도달하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가 이와 같은 대비를 구족하고 선교방편에 안주한다면, 그 모든 복의 모임을 모든 부처님을 제외한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복을 구족하면 능히 보리를 획득한다.【문】어찌하여 이 복이 다시 한량이 없는가?【답】자신의 친척과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애착하지 않고
자재천(自在天)과 범천의 세계와
그 밖의 하늘나라를 탐내어 좋아하지 않고또한 열반을 탐내지 않으니
중생을 위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오직 중생만을 생각하니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이 중에서 보살은 6도(度:波羅蜜)의 수행을 행할 때 자기의 남자와 여자 및 친척, 혹은 금과 은 등의 재물, 혹은 자신의 수명, 혹은 신체의 사지와 관절, 혹은 구족된 몸, 혹은 몸과 마음의 즐거움, 혹은 하늘 사람의 자재함, 혹은 브라만의 몸을 갖는 하늘[梵身天], 혹은 무색천(無色天),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모두 애착하지 않으면서 오직 중생을 연민할 뿐 저버리지 않는다.“내가 어떻게 하여야 어린아이 같은 범부, 즉 눈 먼 장님처럼 지혜 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삼계(三界)의 감옥을 벗어나서 항상 즐거운 열반의 두려움 없는 성[無畏城] 중에 머물게 할 수 있을까?”
이와 같이 보살은 이롭고 즐거운 일을 행해서 모든 중생을 이유 없이 사랑하니, 그 모든 복덕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 또 게송에서 말한다.의지[依]와 보호[護]가 없는 세간에
그 고뇌를 구호하려고
이와 같은 마음의 행을 일으키니,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이 보살은 항상 대비로써 다음과 같이 생각을 한다.
‘지금 이 세간에는 구제함도 없고 보호함도 없어서 두루 6취(趣)를 다니면서 세 가지 괴로움[三苦]1)의 불 속으로 들어가며, 귀의할 곳이 없어서 이리저리 치달리며, 몸과 마음의 모든 질병 때문에 항상 고뇌한다. 의지하고 보호할 곳이 없는 자에게 나는 마땅히 의지할 곳이 되어서 그들의 몸과 마음으로 감수하는 모든 고뇌를 구제해야 한다.’
이러한 마음의 행을 일으키는 모든 복덕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는가?지도(智度)를 익혀서 상응하는 것이
우유(牛乳)를 당겨 짜는 동안이나
한 달[一月]과 다시 여러 달[多月]이 되면
그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리리오.이 반야바라밀은 능히 모든 부처님과 보살을 낳고 또 모든 부처님 법과 보살 법을 성취한다. 보살이 만약 우유를 당겨 짜는 동안 사유하고 수습(修習)하면 그 복의 모임도 오히려 한량이 없는데, 하물며 하룻밤ㆍ이틀 밤ㆍ사흘 밤 나아가 이레 밤ㆍ반 달ㆍ한 달이나 다시 여러 달 동안 수습하여 상응하는 모든 복의 모임을 어느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부처님께서 찬탄하시는 깊은 경전을
스스로 읽고 또한 타인에게 가르치며
또 그를 위하여 분별하여 말하면
이것을 복덕의 모임이라고 이름한다.매우 깊다는 것[甚深]은 매우 깊은 경전을 말한다. 공(空)과 상응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것, 그것이 매우 깊은 것이다. 또한 연기하여 생하는 것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연기하여 생함이 곧 법이며, 법은 곧 여래의 몸[如來身]이다. 저 여래의 몸과 상응하는 것이 매우 깊은 경전으로서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찬탄하시는 바이다. 혹은 경전을 스스로 읽거나 혹은 타인으로 하여금 읽게 하거나 혹은 타인을 위하여 해설하면서도 바라는 마음이 없으니, 단지 여래의 몸이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래의 몸은 곧 법의 몸[法身]이니, 영구히 머무르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그 모든 복을 누가 능히 헤아릴 수 있겠는가?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를 위하여 발심(發心)하게 하면
복의 창고[福藏]가 다시 증대하고 수승해져
마땅히 부동지(不動地)를 얻으리라.여기에 있는 선교방편을 구족한 보살은 먼저 4섭사(攝事)2)로써 모든 중생을 거두고, 그 중생이 자신의 말을 받아들인 것을 알고 난 뒤에는 가르침으로 보리심을 발생하게 한다. 이와 같이 선교방편을 구족한 보살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는데, 그 모든 복을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이 없으니, 한량이 없기 때문이다. 또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복의 창고가 다시 증대하고 수승해진다. 복의 창고라고 말하는 것은 복이 다함이 없기 때문이다. 능히 다함없음에 도달하기 때문에 다할 수 없는 것이다. 부동지(不動地)라는 것은 움직일 수 없기 때문에 부동지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서 보살은 타인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세세생생 보리심이 움직이지 않고 소실하지 않으면서도 타인으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하게 하기 때문에 이 마음이 곧 부동지의 원인이 된다.부처님께서 굴리시는
가장 수승한 법의 바퀴[法輪]를 따라 굴리며
모든 악한 해침[惡刺]을 적멸(寂滅)시키는
이것이 보살의 복의 창고[福藏]이다.부처님 세존께서 바라나성(婆囉奈城:Bārānasi)의 선인(仙人)이 거처하는 사슴 동산[鹿林]에서 법의 바퀴를 굴리신 것처럼, 그 가장 수승한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을 또한 복의 창고로 삼는다.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이러한 것에 세 가지 인연이 있다. 말하자면 여래께서 설하신 매우 깊은 경전에서 공과 상응하여 세간을 벗어나는 것인데, 혹은 지니고, 혹은 말하고, 또 법에 수순하여 법을 행하고, 혹은 이와 같은 등등의 경전을 지니어 유실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첫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 근기(根器) 있는 중생을 위하여 (경전을) 분별하여 연설하는 것이 두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 저 경전에서 설한 것처럼 법에 의거하여 수행하는 것이 세 번째 법의 바퀴를 수순하여 굴리는 것이다.‘모든 악한 해침을 적멸시킨다’는 것을 말해 보자. 불교(佛敎)에 대한 악한 해침은 외도(外道)의 삿된 견해 및 악마(惡魔)가 욕계(欲界)에서 자재하여 해탈을 증오하는 것이다. 만약 사부대중[四衆]3) 속에서 어떤 이단의 사람이 법이 아닌 것을 법이라고 말하고, 계율이 아닌 것을 계율이라고 말하고, 스승의 가르침이 아닌 것을 스승의 가르침이라고 말하면, 이것이 불교 안의 악한 해침이다. 마땅히 법에 따라 그것들을 꺾어 항복시키고 교만을 깨뜨리고 견해를 부수어서 법이 치성하게 타오르게 해야 한다.
이것을 모든 악한 해침을 적멸시킨다고 이름한다. 악한 해침을 적멸시키기 때문에 보살의 복의 창고라고 이름한다.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지옥의 큰 괴로움을 인내하거니
하물며 그 밖의 작은 괴로움이랴.
보리는 오른손[右手]에 있도다.가령 보살은 견고한 갑옷을 걸치고 항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근면하게 정진하는 마음을 발한다. 한 중생을 해탈시키려 하기 때문에 비록 아비지대지옥(阿毘至大地獄) 속에 머물면서 겁(劫)이 지나도록 괴로운 고통을 받아도 감내하며 흔들리지 않는데, 하물며 그 밖의 작은 괴로움쯤이랴. 보살이 능히 이와 같은 등의 괴로움을 인내하면, 마땅히 보리가 오른손 안에 머무는 것과 같음을 알아야 한다.작용을 일으켜도 자신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함이니,
모두가 대비(大悲)를 말미암기 때문에
보리는 오른손 안에 있도다.보살이 일으키는 온갖 작용으로 보시 등은 대비를 말미암기 때문에 오직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기 위함이다.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열반을 얻게 하려고 끝내 자신에게는 미미한 즐거운 일조차 하지 않으니, 그 또한 대비자(大悲者)이다. 이와 같은 대인(大人)은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지혜로 희론(戱論)을 여의고
정진으로 게으름을 여의며
베풀어 보시하여 인색함을 여의면
보리가 오른손 안에 있도다.【문】앞에서 이미 다나(陀那) 등 모든 바라밀을 해석하였다. 지금 다시 해석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답】앞에서는 주로 수행하는 자를 위하여 해석하였고, 지금은 얻을 바 없는 인의 지혜가 빛나는 자[無所得忍智光者]를 위하여 해석하는 것이다. 하나의 길의 모습[一道相]을 깨달아 알기 때문에 저 지혜는 희론을 멀리 여읜다. 멍에[軛]를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저 정진은 게으름을 멀리 여읜다. 탐욕을 제거하였기 때문에 저 보시는 인색함을 멀리 여읜다. 이와 같은 보살은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 안에 도달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의지함도 없고 지각도 없는 선정[定]과
원만해서 잡되지 않은 계(戒)와
좇아서 생겨남이 없는 인(忍)에는
보리가 오른손 안에 있도다.만약 보살이 선나바라밀을 잘 성취하고 나면, 이 선정[定]은 삼계(三界)에 의지하지 않고 그 모습은 적정해서 사념과 지각이 없다. 또 원만한 시라(尸羅)는 잡됨이 없고 혼탁함이 없어서 보리로 회향해도 마멸되는 일이 없다. 또 반야바라밀을 잘 성취하고 나면 연기(緣起)하여 생하는 법 중에서 무생인(無生忍)에 안주한다. 그리하여, 근본이 수승하기 때문에 퇴전하는 일이 없으니, 마땅히 보리가 그 오른손 안에 존재함을 알아야 한다.【문】수행으로 인(忍)을 얻은 보살이 모든 복전(福田)을 쌓아 모으고, 이 복의 모임이 능히 보리를 얻는다는 것을 이미 설명하였다. 어떻게 처음 발심한 보살이 모든 복전을 쌓아 모으고, 이 복의 모임이 능히 보리를 얻게 되는가?【답】현재 시방(十方)에 머무시는
모든 정각(正覺)께
저는 그 분 앞에다
저의 선하지 않은 짓을 진술합니다.만약 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시방의 세간에서 장애되는 일이 없고, 본원(本願)의 힘으로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머무신다면, 이제 실증자(實證者)인 그분들 앞에다 모든 죄를 이렇게 털어 놓을 것이다.
“만약 제가 무시(無始)로부터 유전한 이래로 지난 세상과 현재까지 스스로 악한 업을 짓기도 하고, 혹은 타인에게 시키거나 혹은 따라 기뻐하면서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몸ㆍ입ㆍ마음의 업을 일으켰다면, 저는 모두 진술하여 감히 덮어 두지 않을 것이고 전부 영원히 단절해서 끝내 다시는 짓지 않겠나이다.저 시방세계에서
만약 부처님께서 보리를 얻으셨는데
법을 연설하시지 않는다면
나는 법의 바퀴를 굴리시기를 청하리라.만약 부처님 세존께서 큰 서원을 만족시켜서 보리수(菩提樹) 아래서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시고는 잠시 적정함에 안주하고자 세간을 위하여 법의 바퀴를 굴리시지 않으면, 나는 마땅히 저 부처님 세존께 불법의 바퀴를 굴리심으로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안락하게 하고, 세간을 연민하여 대중을 위하고, 하늘나라와 인간을 이롭고 즐겁게 하실 것을 권청하겠나이다.현재 시방세계에
계시는 모든 정각(正覺)께서
만약 생명의 활동[命行]을 버리고자 하시면
머리 숙여 예배하며 머물기를 권청해야 한다.만약 부처님 세존께서 세간에 걸림 없이 시방에 계시면서 보리를 증득하고 법의 바퀴를 굴리어 바른 법에 안주하면서 마땅히 교화하여 제도시킬 중생을 교화하여 제도시키고 난 후에 생명의 활동을 버리고자 하시면, 나는 마땅히 저 부처님 세존께 머리 숙여 예배하면서 오랫동안 머무시면서 많은 사람을 이롭게 하고, 많은 사람을 안락하게 하고, 세간을 연민하여 대중을 위하고, 하늘나라와 인간을 이롭고 즐겁게 하실 것을 권청하겠나이다.가령 모든 중생들의
몸ㆍ입ㆍ마음으로부터 생겨나는
보시와 지계의 복(福)과
나아가 사유의 수행까지성인 및 범부가
과거ㆍ현재ㆍ미래 세상에서
쌓아 모은 모든 복에 대하여
나는 모두 따라서 기뻐해야 한다.혹은 모든 중생이 보시ㆍ지계ㆍ수행 등으로 짓는 복된 일, 즉 몸ㆍ입ㆍ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으로서 이미 모았고 현재 모으고 앞으로 모을 것과 성문ㆍ독각ㆍ모든 부처님ㆍ보살ㆍ모든 성인들 및 범부가 소유하는 모든 복에 대하여 나는 모두 따라서 기뻐하겠나이다. 이와 같이 선수자(先首者)ㆍ승주자(勝住者)ㆍ수이자(殊異者)ㆍ최상자(最上者)ㆍ승섭자(勝攝者)ㆍ미묘자(美妙者)ㆍ무상자(無上者)ㆍ무등자(無等者)ㆍ무등등자(無等等者)를 따라서 기뻐해야 하나니, 이와 같이 따라서 기뻐하는 것을 수희(隨喜)라고 이름합니다.만약 나에게 있는 복을
모두 한 덩어리[一搏]로 삼아
모든 중생에게 회향하여
바른 깨달음을 얻게 할 것이다.혹은 내가 무시로부터 유전한 이래 부처님ㆍ법ㆍ승가 및 개별적인 사람의 주변에서 소유한 복의 모음, 나아가 축생에게 한 덩어리의 음식을 베푼 것, 혹은 귀의하는 선근, 혹은 과오를 참회하는 선근, 혹은 권청하는 선근, 혹은 따라서 기뻐하는 선근, 이런 것들을 모두 헤아려 함께 한 덩어리로 삼습니다. 그리고 나는 모든 중생을 위하기 때문에 보리로 회향하여 다 베풀어 주고, 이 선근으로써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고 일체지지(一切智智)를 얻게 하겠나이다.나는 이와 같이 허물을 참회하고
권청하고 복을 따라 기뻐해서
급기야 보리로 회향하니
모든 부처님과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혹은 내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보리로 회향하는 선근, 혹은 과오를 참회하는 선근, 혹은 법의 바퀴를 굴릴 것을 권청하는 선근, 혹은 장수(長壽)를 권청하는 선근, 혹은 따라서 기뻐하는 선근, 이런 것들을 모두 헤아려 한 덩어리로 하고 난 후에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보살이셨을 때 이미 회향하시고 장차 회향하시듯이 나 또한 이와 같이 모든 선근으로 보리에 회향하고, 이 회향의 선근으로 나와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마땅히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하게 하겠나이다. 나는 이제 다시 요약하여 설명하겠나이다.나의 죄악(罪惡)을 말하여 참회하고
부처님께 청하고 복을 따라서 기뻐하며
보리에 회향하는 것이
가장 수승한 이[最勝]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다.자신이 지닌 죄악을 남김없이 모두 말해서 참회하고, 또 부처님께서 법의 바퀴를 굴리시면서 오래 머무시기를 권청하고, 모든 복을 따라서 기뻐하고, 복 등을 회향하겠나이다.
보리를 위하기 때문에 앞에서처럼 회향하겠나이다. 가장 수승한 분[最勝人]께서 말씀하신 바처럼 마찬가지로 회향하겠나이다.”【문】또 그 회향은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답】오른쪽 무릎은 땅에 대고
한쪽 어깨에 상의(上衣)를 단정히 걸치고
낮과 밤 각각 세 때[三時]에
합장하며 이와 같이 한다.마땅히 스스로 청정하게 하여 정결한 의복을 걸치고, 손과 발을 깨끗이 씻고, 군의(裙衣)4)를 원만하게 정리하고, 한쪽 어깨 위에다 위에 걸치는 옷을 정리하고 나서,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며 한 마음으로 분별하는 생각을 여의어야 한다. 혹은 여래의 탑이 있는 곳이나, 혹은 형상이 있는 곳이나, 혹은 허공에서 모든 부처님께서 앞에 머무시는 것처럼 반연한다. 이러한 생각을 한 후에 앞에서 설명한 했듯이 낮이나 밤 각각 세 때에 행한다.한 때 행하여 짓는 복에
만약 형색(形色)이 있다면
항하사 수효의 대천(大千)도
또한 능히 수용하지 못하리.저 설해진 여섯 때[六時]의 회향 중에서 만약 한 때 짓는 가운데 생기는 복덕을 분별한다면, 여실하게 보시는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는, “그것에 만약 곡식 등이 모인 것처럼 형색이 있다면 이 복의 모임은 한량이 있기 때문에 비록 항가강의 모래수와 같은 큰 삼천세계가 그 한계를 다한다 해도 또한 수용할 수 없다”라고 말씀하신다. 그 회향의 복은 허공계(虛空界)와 동등한 회향이기 때문이다. 나아가 한 때의 회향조차 오히려 이와 같은 복의 모임이 있는데, 하물며 여러 번의 회향이랴. 비록 처음 발심한 보살일지라도 회향하는 힘으로 말미암아 또한 큰 복을 성취하며, 다시 이와 같은 모양의 복이 모임으로써 점차 능히 보리를 얻게 된다.【문】모든 보살이 큰 복을 성취하는 방편을 이미 설명하였다. 이제 복의 사용[福用]을 보호하고자 하면, 어떠한 방편이 있어야 하는가?【답】저 처음 발심했던
모든 작은 보살[小菩薩]에 대하여
마땅히 존중하여 사랑하기를
마치 스승님이나 부모님처럼 해야 한다.저 처음 발심한 보살이 만약 자신의 선근 및 자신을 보호하고자 한다면, 모든 처음 발심한 보살에 대하여 마치 일체지의 스승이신 세존과 자신을 낳으신 부모님처럼 마땅히 지극한 존중과 애경(愛敬)하는 마음을 일으켜야 한다. 이와 같이 처음 발심한 보살을 으뜸으로 삼고, 모든 보살에 대해서도 또한 마땅히 이와 같이 지극한 애경과 존중을 해야 한다. 만약 이것과 다르다면 곧 자신 및 선근이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린다. 세존께서 경전 가운데 일찍이 말씀하신 바와 같다.
“보살에게 성내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 말고는 보살을 장애하고 또 선근을 소멸하여 버리는 다른 한 법도 나는 보지 못하였다. 만약 보살이 백 겁(百劫) 동안 선근을 쌓아 모았다고 하여도 보살에게 성내는 이러한 마음으로 말미암아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린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에 대하여 마치 교사(敎師)처럼 마땅히 존중해야 한다.보살에게 비록 과오가 있어도
오히려 말하지 말아야 하는데
하물며 사실이 아닌 일임에랴.
오직 여실하게 찬탄해야 한다.만약 보살이 대승을 행하는 사람의 죄과(罪過)를 비방하여 악명(惡名)을 얻게 하면, 세세생생 소유한 선한 법이 모두 다 소멸하여 버리고 백법(白法)을 증장할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모든 보살들에게 비록 죄과가 있다 하여도 스스로 선근의 명[善根命]을 보호하기 위하여 마땅히 나타내어 말하지 말아야 한다. 하물며 사실이 아닌 일임에랴. 비유하면 왕의 죄[王罪]와 같으니,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보살에게는 청정한 삶[活命]이 있을 뿐 비방할 것이 없다.”
그런데도 저 달마(達摩)비구는 그 악함을 망령되게 말했기 때문에 70겁 동안 지옥의 과보를 받고, 또 6만 번의 생애 동안 빈궁한 사람이 되고, 항상 장님ㆍ벙어리ㆍ문둥병ㆍ악성 종양을 받는다. 그러므로 보살의 처소에서 악함이 있든 악함이 없든 모두 말하지 말 것이며, 그에게 진실한 덕이 있다면 오직 칭찬해야 한다. 자신의 선근을 증장시키기 위함이고, 또한 그 밖의 사람에게 믿음을 생하게 하기 위함이다.만약 사람이 부처가 되기를 발원해서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한다면
시현(示現)하고 또 치성(熾盛)하게 하고
또한 희열(喜悅)을 생하게 하여야 한다.혹은 어떤 중생이 이미 보리를 구하고자 발원해서 오직 퇴전하지 않게 하고자 하였는데, 어리석고 성 잘 내고 탐욕 많은 어떤 사람이 자신의 붕당(朋黨) 때문에 이와 같은 말을 한다.
“어찌하여 오랜 동안 보살의 어려운 수행을 행하는가? 저 열반의 즐거움은 평등하고 비슷하니 성문행(聲聞行)을 행하여 신속하게 열반을 획득하자.”
이것에 대해 나중에 마땅히 그 과보를 설명할 것이다. 만약 갖가지 비유로 부처님의 공덕을 나타내서 그 마음으로 들어가게 하면, 이것을 시현(示現)이라고 한다. 그로 하여금 모든 보살행을 구족하여 정진하게 하면, 이것을 치성(熾盛)이라고 한다. 정진을 다시 증장하여 신속하고 예리하게 하고자 해서 바른 깨달음의 공덕과 크게 신통한 일을 말하면, 이것을 희열(喜悅)이라고 한다. 이와 같이 그로 하여금 보리심(菩提心)을 버리지 않게 한다.아직 매우 깊은 경전을 이해하지 못하고서
부처님 말씀[佛說]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만약 이와 같은 말을 하면
가장 괴로운 나쁜 과보를 받으리라.‘매우 깊은 경전’이란 소위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과 상응하여 한량없는 단견(斷見)과 상견(常見) 등의 치우친 견해를 제거하고, 자아[我]와 인간[人]과 중생(衆生)과 수자(壽者) 등의 자성(自性)을 소멸하며, 여래의 큰 신통과 희유한 공덕을 나타내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경전과 율전에 대하여 아직 증득해 알지 못하면서 어리석음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왜냐하면 부처님 세존께서 “만약 여래가 설한 경전을 비방하면 가장 괴로운 나쁜 과보를 받는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무간(無間) 등의 모든 죄를
전부 한 덩어리로 하여
앞의 두 가지 죄에 비교해도
몇 분의 일에도 능히 미치지 못한다.세존께서는 불퇴륜경(不退輪經)5)에서 무간지옥에 떨어지는 다섯 가지 업[五無間業]의 모든 죄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가령 삼천대천세계 속에서 모든 중생의 목숨을 끊는 죄의 과보, 혹은 항가강의 모래 수와 동등한 부처님 세존께서 멸도하시고 난 후에 존재하는 모든 지제(支提)6)를 파괴하거나 태우는 일, 혹은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법안(法眼)을 장애하는 죄의 과보 등 이와 같은 죄과를 모두 다 모아서 덩어리로 만든다고 하자. 가령 깊은 경전을 아직 이해하지 못했으면서도 집착을 일으켜서 부처님 말씀이 아니라고 말하거나, 또는 보살이 보리에 대한 서원을 일으키고 나서 보리심에서 물러나게 된다고 하자.앞의 무간지옥에 떨어질 다섯 가지 죄를 모아서 이 두 가지 죄와 비교 하면 백 분의 일[百分]에도 미치지 못하고 또 천 분의 일[千分]에도 미치지 못하며, 나아가 수분(數分)ㆍ가라분(柯羅分:털 하나의 백분의 일)ㆍ산분(算分)ㆍ비유분(譬喩分)ㆍ우파니사다분(優波尼沙陀分:지극히 미세한 것)에도 또한 미치지 못한다. 이러한 죄상(罪相) 때문에 자신과 자신의 선근을 보호하기 위하여 이 두 가지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문】이미 보살이 자신의 선근을 보호하는 것을 이미 설명하였다. 어떠한 것이 수도(修道)의 수승한 의미인가?【답】세 가지 해탈문[三解脫門]에 대하여
마땅히 잘 수습해야 한다.
처음은 공(空), 다음은 무상(無相),
세 번째는 무원(無願)이다.이 중에서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 마땅히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해야 한다. 최초에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을 수행해야 하니, 모든 견해를 타파하기 위해서이다. 두 번째로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은 온갖 분별로 반연하는 뜻을 취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세 번째로 무원해탈문(無願解脫門)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를 뛰어넘기 위해서이다.【문】어찌하여 이들을 해탈문이라고 이름하는가?【답】자성(自性)이 없기 때문에 공(空)하고
이미 공하다면 어찌 모습을 지으리오.
모든 모습이 이미 적멸하니
지혜로운 자가 무엇을 소원하리오.연기하여 생하기 때문에 법은 자성이 없다. 이것을 공(空)이라고 이름한다. 그것이 공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반연하는 일이 없으니, 이것이 바로 무상(無相)이다. 모습을 여의기 때문에 곧 소원(所願)이 없다. 또 만약 법이 연(緣)으로부터 생한다면 그 자성은 생함이 없고, 자성이 생함이 없기 때문에 그 법은 공하다. 만약 법이 공하다면 그 중에는 모습[相]이 없고, 모습이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은 무상(無相)이다.
만약 모습이 있지 않다면 그 중에서 마음이 의지하는 바가 없고, 의지하는 바가 없기 때문에 계(界) 속에서 마음이 원하는 바가 없다.이를 수행하고 염(念)할 때에
열반의 도[涅槃道]에 가까이 다가서니,
불체(佛體)가 아닌 것을 염하지 말고,
그것에 대하여 방일하지 말라.이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할 때 만약 방편에 포섭되지 않는다면 곧 열반에 가까이 다가선다. 비록 닦아 익히더라도 그 밖의 보리처(菩提處)에 떨어지지 말지니, 마땅히 무소득의 인[無所得忍]을 구해야 하고 또한 선교방편(善巧方便)에 머물러야 한다.나는 열반 중에서
응당 증득을 짓지 말아야 하나니,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발생해서
또한 지도(智度)를 성숙시켜야 한다.다음과 같은 마음을 발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을 이익되게 하고, 모든 중생을 제도하여 해탈시켜야 한다. 비록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하여도 마땅히 열반에 대하여 증득을 짓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나는 반야바라밀을 수행하려고 하기 때문에 세 가지 해탈문 속에서 오로지 성숙해야 한다. 나는 마땅히 공을 닦아야 하지만 공을 증득하지 말아야 하고, 나는 무상을 닦아야 하지만 무상을 증득하지 말아야 하며, 나는 무원을 닦아야 하지만 무원을 증득하지 말아야 한다.’활 쏘는 사람[射師]이 화살을 쏘아
각각 서로 유지시켜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처럼,
큰 보살도 또한 그러하다.비유하면 활 쏘는 사람이 활 쏘는 것을 잘 배우고 나서 화살을 공중으로 쏠 때 계속 쏘아서 나중의 화살이 각각 서로 맞추어 그 화살이 마침내 많아져도 공중에서 서로 유지시켜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해탈문의 공중에
마음의 화살을 잘 쏘아서
교묘한 방편의 화살이 계속 유지되어
열반에 떨어지지 않게 하여야 한다.이처럼 위대한 화살을 쏘는 이 보살은 공ㆍ무상ㆍ무원이라는 활을 배우고 닦음으로써 세 가지 해탈문의 공중(空中)에 마음의 화살을 쏘고, 또 중생을 자비롭게 연민하는 선교방편이라는 화살로써 더욱더 상속시켜서 삼계(三界)라는 허공 중에 그 마음의 화살을 유지시켜서 열반의 성[涅槃城]에 떨어지지 않게 해야 한다.
【문】어떻게 다시 그 마음으로 하여금 열반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가?【답】나는 중생을 버리지 않으니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다음으로 익혀서 상응해야 한다.나는 세 가지 해탈문에서 잘 성숙하고 나면 열반을 손 안에 있는 것처럼 취하고자 한다. 그러나 내가 젖 먹는 어린아이 같은 범부라서 스스로 열반의 성으로 향할 수 없다면, 아직 열반하지 못하기 때문에 나는 열반에 응당 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 나는 반드시 다음과 같이 정진을 일으켜야 한다.
‘내가 짓는 바에 따라서 오직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려고 하기 때문이며, 또한 모든 중생이 열반을 얻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먼저 마땅히 이와 같은 작용을 일으켜야 한다.
다음으로 곧 마음과 세 가지 해탈문에 수순하여 상응한다. 수순(隨順)이란 뒤를 따른다는 의미이다. 만약 이와 같지 않으면, 그 마음의 화살은 선교방편에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세 가지 해탈문을 행할 때 곧 성문의 해탈이나 혹은 독각의 해탈 중에 떨어지고 만다. 지금 다시 선교방편이 있다.집착 있는 중생들이
긴 밤과 현재에 행하는
전도(顚倒)와 모든 모습은
모두 어리석은 미혹 때문이다.어린아이 같은 범부인 모든 중생들은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무시(無始) 이래로 유전하여 긴 밤 동안 네 가지의 전도[四顚倒]에 집착한다. 소위 항상하지 않은 것을 항상하다고 말하고, 괴로움을 즐겁다고 말하고, 청정하지 못한 것을 청정하다고 말하고, 자아가 없는 것을 자아라고 말하는 것이다. 또한 안팎의 중(衆)ㆍ계(界)ㆍ입(入)7) 속에서 나와 내 것을 헤아리기 때문에 이른바 얻을 바가 있어서 긴 밤 동안 행하고 나서 또 현재에도 행한다.모습에 집착하여 전도된 자는
법을 설해서 끊어 없애게 해야 한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발생하고
다음으로 익혀서 상응해야 한다.“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은 어리석은 미혹 때문에 나와 내 것이라는 두 가지 계교(計較)의 집착을 일으킨다. 또 색(色) 등의 존재하지 않는 것 중에서 허망하게 분별을 일으켜 모습을 취하고 네 가지 삿된 전도를 생한다. 나는 법을 설해서 그로 하여금 끊어 없애게 해야 한다.”
먼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고 난 뒤에 세 가지 해탈문 중에서 수습하여 상응한다. 만약 이것과 다르게 세 가지 해탈문을 수습하는 자는 곧 열반의 도(涅槃道)에 나아가 다가간다.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지만
중생을 보지 않는다.
이것이 또한 가장 난해한 일로서
희유(希有)하여 사량할 수 없다.보살이 중생에 대한 생각[衆生想]을 일으키는 것, 이것이 또한 가장 난해하여 사량할 수 없고 일찍이 없는 일로서 허공에 그림을 그리는 것과 같다. 가장 수승한 의미[最勝義]에서는 본래 중생이 없으니, 이 보살은 알지 못하고 얻지 못하지만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고자 부지런히 정진한다. 오직 대비(大悲)를 제외하고 어디에 다시 이와 같은 어려운 일이 있겠는가?비록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들어가서
해탈문을 수습하여 상응하지만
아직 본원(本願)을 만족시키지 못하였기 때문에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이것을 마땅히 사량(思量)해야 한다. 만약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도달하려는 보살이 서른두 가지 법8) 때문에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들어가서 해탈문과 상응할 때 그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本願]을 만족시키지 못하였다면, 열반을 증득해야 하는가, 증득하지 말아야 하는가? 세존께서 경전 가운데 말씀하셨다.
“사대(四大)는 달리 바꾸게 할 수 있어도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들어간 보살이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기 못하고서 열반을 증득하는 일은 없다.”
그러므로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도달한 보살은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만약 아직 확정된 지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선교방편의 힘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니,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했기에
또한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만약 처음 발심한 보살로서 아직 올바로 확정된 지위에 도달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선교방편에 포섭되었기 때문이다. 세 가지 해탈문을 수행할 때 중간에 아직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키지 못하면 또한 열반을 증득하지 않는다.지극히 유전(流轉)을 싫어하면서도
또한 유전으로 향하고
열반을 믿고 좋아하면서도
또한 열반을 등진다.유전 속에 있는 이 보살은 세 가지 치열한 불길 때문에 반드시 유전을 지극히 싫어해서 여의어야 하지만, 또한 유전으로부터 도피하려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아야 한다. 마땅히 중생을 자식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유전으로 향해야 한다. 또 사택(舍宅)을 덮어 보호하는 것처럼 반드시 열반을 믿고 좋아해야 하지만, 다시 또한 열반을 등져야 한다. 일체지지(一切智智)를 구족하려고 하기 때문에 유전 속에서 싫어해서 여의는 일이 있다면, 곧 열반에 대해서도 또한 믿고 좋아하는 일이 있게 된다. 가령 유전을 향하지 않고 열반을 등지지 않으면서 아직 본래의 서원을 채우지 못한 채 해탈문을 닦아 익힐 때에는 곧 열반을 증득하고 만다.마땅히 번뇌를 두려워해야 하지만
또한 번뇌를 다하지도 말아야 한다.
마땅히 뭇 선함을 모으기 위하여
가림[遮]으로써 번뇌를 가려야 한다.유전의 원인이 되기 때문에 반드시 번뇌를 두려워해야 하지만 필경에는 번뇌를 다 없애지 말아야 한다. 만약 번뇌를 다 단절하면 곧 보리의 자량을 모을 수 없게 된다. 그러므로 보살은 가리고 제어하는 법[遮制法]으로써 모든 번뇌를 가린다. 번뇌를 가려서 그것을 무력(無力)하게 하기 때문에 보리의 자량인 선근을 모으게 된다. 선근을 모으기 때문에 본래의 서원을 만족시켜서 능히 보리에 도달하게 된다.【문】어찌하여 단절하여 소멸시킴으로써 모든 번뇌를 소멸시키지 않는가?【답】보살은 번뇌를 성품으로 삼으며
열반을 성품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번뇌를 태워버리지 말아야
보리의 종자를 생한다.가령 모든 성문의 성자들은 열반을 성품으로 삼으니, 열반을 반연하여 사문(沙門)의 과보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부처님은 열반을 성품으로 삼지 않는다. 모든 부처님은 번뇌를 성품으로 삼으니, 보리심이 이로 말미암아 생하기 때문이다. 성문과 독각은 모든 번뇌를 태워버려서 보리심의 종자를 생할 수 없으니, 이승(二乘)의 마음 종자는 유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번뇌를 여래의 성품으로 삼는다. 번뇌가 있음으로써 중생은 보리심을 발생하고 불체(佛體)를 출생하기 때문에 번뇌를 여의지 말아야 한다.【문】만약 번뇌를 태워버려서 보리심의 종자를 생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법화경(法華經)에서는 번뇌를 태워버린 모든 성문들에게 수기(授記)하였는가?【답】그 모든 중생에게 수기하는 것은
이 수기[記]에 인연이 있어서이니,
오직 부처님의 선교방편으로써
저 언덕에 도달하게 하려 함이다.어떠한 중생들이 성취할지 그 속의 인연은 오직 부처님만이 아시는 것이다. 조복(調伏)의 저 언덕에 도달하는 것이 그 밖의 중생과 더불어 비슷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보리심의 종자를 생하지 못하는 자라면 무위(無爲)의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경전9)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허공[空] 및 연꽃[蓮華]과 같고
험준한 단애[峻崖]와 깊은 구덩이[深坑]와
계(界)와 남자가 아닌 자[不男]와 가자(迦柘)와
또한 타버린 종자[燒種子]와 같다.허공 가운데 종자를 낳지 못하는 것처럼 이와 같은 무위(無爲)에서는 부처님 법을 낳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낳지 못한다.
고원(高原)의 광야(曠野)에서는 연꽃을 피우지 못하듯이, 성문과 독각이 들어가는 무위(無爲)의 올바로 확정된 지위[正定位]에서는 부처님 법을 생하지 못한다.
‘험준한 단애[峻崖]’라는 것을 말해 보자. 일체지지(一切智智)의 성(城)으로 가는 도중에는 두 가지 험준한 단애가 있으니, 소위 성문지(聲聞地)의 험준한 단애와 독각지(獨覺地)의 험준한 단애이다. 성문과 독각으로서 만약 일체지(一切智)가 있다면 곧 보살에게 두 가지의 험준한 단애가 되지 않는다. ‘깊은 구덩이[深坑]’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장부(丈夫)가 뛰어올라 내치는 것[跳擲]을 잘 배우면 비록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더라도 안온하게 머물지만, 만약 잘 배우지 못해서 깊은 구덩이에 떨어지면 곧 구덩이 안에서 죽는 것처럼, 보살은 무위(無爲)를 수습하여 잘 상응하기 때문에 비록 무위를 수습하더라도 무위 속으로 떨어지지 않지만,성문 등은 무위를 수습하여 잘 상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곧 무위 속에서 떨어진다. ‘계(界)’라는 것을 말해 보자. 성문은 무위의 세계[無爲界]에 계박되어 존재하기 때문에 다시 유위(有爲) 속에서 행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중에서 보리의 마음을 생하지 못한다. ‘남자가 아닌 자[不男]’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남근의 기능이 소실된[根敗] 장부가 다섯 가지 욕망[五欲]에 대하여 다시는 탐닉하는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무위법(無爲法)을 구족하여 모든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또한 탐닉하는 일이 없다.‘가자(迦柘)’10)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모든 하늘나라와 세간이 비록 저 가자 구슬을 잘 수리하려고 해도 끝내 비유리보(鞞琉璃寶)로 만들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비록 다시 여러 계학(戒學)ㆍ두타[頭多]의 공덕ㆍ삼마제(三摩提) 등을 구족하여도 끝내 깨달음의 도량에 앉아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증득할 수 없다. ‘또한 타버린 종자[燒種子]와 같다’라는 것을 말해 보자. 가령 타버린 종자는 비록 땅 속에 묻고 물을 뿌리며 햇볕을 따뜻하게 쬐어 주어도 끝내 생겨날 수 없는 것처럼, 성문은 번뇌의 종자를 태워버리고 나면 삼계 속에서 역시 생겨나는 뜻이 없다. 이와 같은 경전의 말씀 때문에 성문은 무위법을 획득하고 나서 보리심을 생하지 않는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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