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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90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3권

by Kay/케이 2024. 8.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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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자량론(菩提資糧論) 3

 

보리자량론 제3권용수 본송
자재 해석
달마급다 한역
박상수 번역다시 그 밖의 스승의 생각으로는
모든 깨달음의 자량은
진실[實]과 버림[捨] 및 적정[寂]과 지혜[智]의
네 가지 처소에 포섭되는 바이다.또 한 논사(論師)는 이렇게 생각한다.
‘일체 보리의 자량은 모두 진실한 곳[實處]ㆍ버리는 곳[捨處]ㆍ적정한 곳[寂處]ㆍ지혜로운 곳[智處]에 포섭되는 바이다.’
진실이란 허망하지 않은 모습이며, 진실은 곧 계(戒)이다. 그러므로 진실을 시라바라밀로 삼는다. 버림은 곧 보시이다. 그러므로 버리는 곳[捨處]을 다나바라밀로 삼는다. 적정이란 곧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이다. 마음이 혼탁하지 않으면 애호하는 일과 애호하지 않는 일에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정한 곳[寂處]을 찬제바라밀과 선나바라밀로 삼는다. 지혜로운 곳[智處]을 또한 반야바라밀로 삼는다. 비리야바라밀은 두루 여러 곳에 들어가되 정진하지 않으면 곧 모든 곳에서 성취하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비리야바라밀은 모든 일을 성취시킨다. 그러므로 일체의 자량은 모두 이 네 곳에 들어간다.【문】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이, “자(慈)의 자량으로 걸림이 없는 마음을 얻고, 버림[捨]의 자량으로 증오와 애호를 단절하게 된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자(慈)와 비(悲)에는 어떠한 차별이 있는가?【답】대비(大悲)는 골수(骨髓)를 사무쳐서
모든 중생의 의지가 되나니,
아버지가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대하는 것과 같고
자(慈)는 일체에 보편하다.생사의 험한 길에 들어가면 지옥ㆍ축생ㆍ아귀의 여러 세계에 떨어지면서 악하고 삿된 그물에 머물고 어리석음의 숲에 덮여 삿된 길[邪徑]과 그릇된 길[非道]을 가는 것이 마치 눈이 어두운 장님이 출리(出離)1)가 아닌 가운데 보면서도 출리라고 여기는 것과 같다. 그리하여 늙고ㆍ병들고ㆍ죽고ㆍ근심하고ㆍ슬퍼하고ㆍ괴로워하고ㆍ번뇌하는 모든 도적에게 붙잡혀서 악마의 의지가 행해지는 숲에 들어가 부처님의 뜻[佛意]에서 멀어지는 자가 된다.보살은 대비(大悲)로 자신의 피부와 살점 및 근육을 뚫어 골수에 사무치기까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의지처[依處]가 됨으로서 이 중생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나고 죽는 광야와 험난한 나쁜 길을 벗어나게 하여 일체지(一切智)의 성(城)과 두려움 없는 궁전[無畏宮]에 안치시키고자 한다. 비유하면 장자(長者)가 유일한 복스런 자식에게 질병의 괴로움이 닥쳐오자 사랑이 피부와 살을 뚫고 골수에 들어갈 때까지 오로지 언젠가는 그 병이 치유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비(悲)도 또한 마찬가지라서 오직 괴로운 중생에게 일어나며, 자(慈)는 널리 일체중생에게 일어난다.또다시 자(慈) 때문에 모든 중생에게서 걸림이 없는 마음을 얻고, 비(悲) 때문에 나고 죽는 속에서도 피곤하여 싫어함이 없다. 또 자(慈)는 선한 사람속에서 생기고, 비(悲)는 선하지 않은 사람 속에서 생긴다. 또 보살은 자(慈)가 증장하므로 자기의 즐거움에 집착하지 않아서 대자를 낳고, 비(悲)가 증장하므로 모든 지절(支節)과 목숨을 버려서 대비를 낳는다.만약 부처님의 공덕을 사념하고
또 부처님의 신변(神變)을 듣고서
애호하고 기뻐하고 감수하고 청정하면
이것을 이름하여 큰 기쁨[大喜]이라고 한다.‘만약 부처님의 공덕을 사념하고’ 중에서 무엇이 부처님의 공덕인가?
이른바 모든 부처님 세존이 한량없는 천백의 구치(俱致)2) 겁 속에서 선근(善根)을 쌓은 것이며, 몸ㆍ입ㆍ마음의 업을 수호하지 않은 것이며,3) 다섯 가지 마땅히 알아야 할 것 중에서 의심을 단절한 것이며,4) 네 가지의 대답하기 난처한 것5) 중에서 실수가 없는 것이며, 서른일곱 가지 보리를 보조하는 법6)을 가르쳐 준 것이며, 열두 지분[十二分:十二支緣起]으로 연기하여 생하는 것 중에서 인연을 깨달은 것이며, 아홉 가지의 가르침[九敎]7)을 가르친 것이며, 네 가지의 주지(住持)를 구족한 것이며, 네 가지 한량없음[四無量]을 획득한 것이며, 여섯 바라밀[六波羅蜜]을 만족한 것이며, 보살 십지(菩薩十地)를 설한 것이며, 출세간의 다섯 무리[出世五衆]8)를 성취하여 만족한 것이며,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ㆍ열 가지 힘[十力]ㆍ열여덟 가지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의 법[十八不共佛法]을 구족한 것이며,한계가 없는 경계이며, 자신의 마음을 자재로 굴리는 것이며, 법에 싫증을 내거나 만족하지 않는 것이며, 금강(金剛) 같은 삼마지(三摩地)를 얻은 것이며, 허망하게 법을 설하지 않은 것이며, 법을 파괴함이 없는 것이며, 세간을 지도하는 스승이며, 정수리[頂]를 보는 일이 없는 것이며, 더불어 동등함이 없는 것이며, 능히 수승함[能勝]이 없는 것이며, 불가사의한 법이며, 대자(大慈)ㆍ대비(大悲)ㆍ대희(大喜)ㆍ대사(大捨)를 얻은 것이며, 백 가지 복된 모습이며, 한량없는 선근이며, 한계가 없는 공덕이며, 한량이 없는 공덕이며, 헤아릴 수 없는 공덕이며, 분별할 수 없는 공덕이며, 희유한 공덕이며, 함께할 수 없는 공덕인 것이다. 이와 같은 것들을 ‘부처님의 모든 공덕을 사념한다’고 한다.‘모든 부처님의 신변(神變)을 듣고서’에 대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 세존은 모든 중생을 교화하므로 신통변화를 일으킨다. 마땅히 제도하여야 할 중생에 따라서, 중생의 몸에 따라서, 그 형상과 분량[形量]ㆍ길고 짧음[長短]ㆍ넓고 좁음[廣狹]에 따라서, 그 색의 부류[色類]가 갖가지로 특수하게 차별되는 것에 따라서, 그 음성이 청정하게 분별되는 것에 따라서 일으키는데, 모든 부처님 세존은 갖가지 희유한 신통을 통해 그 행하는 바대로, 그 믿음과 욕망하는 바대로 저 각각의 방편에 따른 차별의 신통변화로써 그를 교화하는 것이다.이러한 일을 듣고 나서, “애호하고ㆍ기뻐하고ㆍ감수하고ㆍ청정한 것을 큰 기쁨[大喜]이라고 이름한다” 중에서 마음이 용열(勇悅)한 것을 애호[愛]라고 이름하며, 애호하는 마음이 몸에 두루한 것을 기쁨[喜]이라고 이름하며, 기뻐하는 마음이 즐거움[樂]을 자각하는 것을 감수[受]라고 이름하며, 즐거움을 감수할 때에 바르게 깨달은 자[正覺者]의 큰 신통과 덕(德)을 염(念)하여서 그 마음이 혼탁하지 않은 것을 청정[淨]이라고 이름하며, 그 마음이 청정해질 때 기뻐하는 마음이 충만한 것을 큰 기쁨[大喜]이라고 이름한다. 저 얼마 안 되는 승[少分乘]에 오르는 자에게 비록 기쁨이 있어도 함께하지 않으므로 큰 기쁨이라고 이름할 수 있는 것이다.【문】보살은 중생을 버려야 하는가, 마땅히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답】보살은 중생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나니
반드시 힘이 감당하는 바에 따라서
항상 거두어들여야 한다.보살마하살은 항상 모든 중생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만약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으로 고뇌하고 인색함ㆍ계율을 지키지 않음ㆍ성내며 한탄함ㆍ게으름ㆍ산란한 심정ㆍ나쁜 지혜의 길에 올라서, 다른 길로 들어간다면, 이 중생들을 마땅히 버려서는 안 된다. 항상 보시ㆍ계율ㆍ수행을 설하면서 힘이 가능한 바에 따라 반드시 거두어들여야 하고 반드시 버리지 말아야 한다.보살은 처음부터
힘이 감당하는 바에 따라서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여
대승으로 들어가게 해야 한다.이 대승에 오른 보살은, 중생 속에서 감당할 수 있는 바에 따라서 처음부터 지어야 한다. 앞의 방편바라밀 가운데 방편을 설명한 것처럼 반드시 정근을 해서 모든 방편을 통해 중생을 교화시켜 이 대승에 안치시켜야 한다.
【문】어찌하여 보살은 다만 대승으로 중생을 교화하고 성문승과 독각승으로써는 교화하지 않는가?【답】항하사 수의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과[羅漢果]를 얻게 하는 것보다도
하나를 교화하여 대승에 들게 하는
이 복덕이 위[上]가 된다.항하사와 같은 중생을 교화하여 아라한과를 얻게 한다면, 이 대승의 복은 저 성문승 등으로 교화하는 복보다 훨씬 뛰어나다. 종자(種子)가 다함이 없으므로 이 모든 종자는 능히 그 밖의 중생들을 위하여 보리심의 방편이 된다. 또한 성문과 독각을 출생하므로 이 복이 그것보다 뛰어나다. 이 복이 뛰어난 것은 대승이 성문승과 독각승보다도 우수하기 때문이다. 또 보리심에는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복덕이 존재하기 때문이며, 또 대승으로 말미암아 삼보의 종자를 단절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큰 복을 욕구하여 반드시 대승으로 중생을 교화해야지 다른 승(乘)으로 교화해서는 안 될 것이다.【문】모든 마하살(摩訶薩)이 어찌하여 오직 대승으로만 중생을 교화할 뿐 성문승과 독각승으로는 하지 않는가?【답】성문승과 독각승으로
교화하는 것은
그것이 작은 힘이므로
대승의 교화를 감당하지 못한다.만약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을 저버려 대비(大悲)를 결여한 탓에 대승의 교화를 감당하지 못하는 중(中)과 하(下)의 마음을 가진 중생이라면, 성문승과 독각승으로써 그를 교화하여 제도한다.【문】어떤 중생을 삼승(三乘)으로 교화시킬 수 없다면 그를 마땅히 버려야 하는가,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답】성문승과 독각승
그리고 대승 중에서
교화를 감수하지 못하는 자는
마땅히 복의 처소[福處]에 두어야 한다.어떤 중생이 나고 죽는 것을 좋아하고 해탈을 싫어해서 성문승과 독각승 및 대승으로 교화할 수 없다면, 반드시 교화하여 범승(梵乘)9)의 네 가지 범행[四梵行]10) 중에 안치시켜야 한다. 또 범승으로 교화할 수 없는 자는 마땅히 교화하여 천승(天乘)11)의 열 가지 선한 업도[十善業道] 및 보시 등의 복 받는 일[福事] 중에 안치시켜야 하며 버리지 말아야 한다.【문】어떤 중생이 세간의 쾌락을 기뻐하고 좋아해서 세 가지 복[三福]12)된 일에 대하여 행할 힘이 없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는가?【답】만약 어떤 사람이
하늘나라와 해탈의 교화를 감수하지 못한다면
곧 현세(現世)의 이익으로써
능력대로 마땅히 거두어야 한다.어떤 중생이 오로지 욕망의 쾌락을 추구하느라고 다른 세상이 있음을 관찰하지 못해서 지옥ㆍ아귀ㆍ축생의 세계로 향할 뿐이라면, 그리하여 하늘나라에 태어나게 하거나 해탈시키지 못한다면, 또한 마땅히 저 지혜가 어린아이와 같음을 연민해서 그 상응하는 바대로 현세에서 거두어들여야 하며, 자기의 능력에 따라 보시 등으로 그를 거두어야 하고 연민으로 버리지 않아야 한다.【문】만약 보살이 이 어린아이 모습과 같은 모든 중생의 처소에서 교화할 수 있는 방편이 없다면, 마땅히 그 사람에 대하여 무엇을 하여야 하는가?【답】보살은 중생에게
능히 교화할 인연이 없다 해도.
마땅히 큰 자비를 일으켜서
반드시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만약 보살이 죄악을 좋아하는 연민스런 중생 속에서 능히 교화를 행할 수 있는 방편이 없다면, 보살은 그에게도 마땅히 자식 같은 생각을 일으켜서 큰 자비를 일으켜야 하며 포기할 도리(道理)가 있어서는 안 된다.【문】이미 중생 속에서 모름지기 거두어들여야 할 것을 말하였지만, 아직 거두어들여야 하는 방편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지 못하겠다.【답】보시로써 거두고 또 법을 설하며
다시 법을 설하는 것을 청문(聽聞)하고
또한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을 행하면
이것이 거두는 방편이 된다.모든 보살은 중생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보시를 거두는 방편으로 삼기도 하며, 혹은 타인이 보시하는 것을 받기도 하며, 혹은 타인을 위하여 법을 설하기도 하고, 혹은 타인이 법을 설하는 것을 듣기도 하고, 혹은 타인을 이롭게 하는 일을 행하기도 하고, 혹은 애호하는 말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일을 함께하는 것으로써 하기도 하고, 혹은 모든 밝은 곳[明處]을 설명하기도 하고, 혹은 공교(工巧)로써 가르치기도 하고, 혹은 작업을 시현하기도 하고, 혹은 병든 자로 하여금 쾌유를 얻게 하기도 하고, 혹은 험난함을 구제하여 꺼내주기도 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중생을 거두어들이는 방편이라고 한다. 마땅히 이 모든 방편으로 중생을 거두어들여야 하지 저버려서는 안 된다.【문】이와 같은 거두어들이는 방편으로 중생을 거두고 나면 어떠한 이로움을 성취하는가?【답】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게으르지도 않고 방일하지도 않아서
서원을 일으켜 보리로 삼으니
세상을 이롭게 함이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이 가운데 ‘보살은 서원[願]을 지어서 세간을 이롭게 한다’는 것은 이와 같은 마음을 일으킨 것이다.
‘무릇 세간을 이롭게 하는 일이라면 나는 모두 마땅히 지으리라.’
이러한 서원을 세우고 나서는, 모든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일에 대하여 피로해 하거나 권태로워 하거나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 또 마땅히 이러한 생각을 해야 한다.
‘세간을 이롭게 하는 것은 곧 자신을 이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인연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문】이미 보살은 항상 중생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해야지 버림을 행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모든 법 속에서 버려야 하는가,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답】매우 깊은 법계(法界)에 들어가
분별을 소멸하여 여의면
모든 공용(功用)이 존재하지 않아
모든 처소가 자연히 버려진다.법계란 곧 인연으로 생겨나는 것이니, 이것은 먼저 설명했다. 여래가 세상에 나오든 나오지 않든 이 법계(法界)의 법성(法性)은 항상 머무니, 이른바 인연으로 생겨나는[緣生] 것이다. 또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다.
“아난다야, 연기하여 생겨남은 매우 깊으며, 증득함도 또한 매우 깊다.”그러므로 이 매우 깊은 법계에 들어가는 보살은 일체의 있음과 없음 등의 두 극단을 소멸해서 방편지(方便智)를 섭취하고 나면 곧 모든 요동하는 사념과 희론과 분별을 단절하고 모든 모습을 취하는 것을 여의어서 모든 심(心)ㆍ의(意)ㆍ식(識)의 행하는 곳을 다시는 행하지 않는다. 나아가 부처님을 행하고, 보리를 행하고, 보살을 행하고, 열반을 행하는 것을 또한 모두 행하지 않는다. 그러면 모든 법에 대하여 다시는 공용(功用)이 없고, 모든 법 속에서 마음의 적정을 얻으며, 마음이 적정하면 다시는 분별심이 없게 된다. 이것을 제일의(第一義)의 버림이라고 이름하는데, 이것이 곧 보살이 분별하지 않는 것이다. 이미 출세간의 버림을 설명하였다. 나는 이제 마땅히 세간의 버림을 설명하겠다.이익ㆍ명성ㆍ찬탄ㆍ안락 등의
네 곳에 모두 집착하지 말아야 하며
위에 상반되는 것에 또한 걸림이 없으니
이들을 버림[捨]이라고 이름한다.이익[利養]ㆍ명성[名聞]ㆍ찬탄(讚歎)ㆍ안락(安樂) 등에 묶여 집착하는 바가 없으며, 이것과 상반되는 이익이 없음[無利]ㆍ명성이 없음[無名]ㆍ헐뜯음[毁]ㆍ괴로움[苦] 등에서도 또한 물러나 걸림이 없으며, 애욕과 증오를 버려서 그 속에 처해 머물면서도 다시는 분별하지 않으니, 이것을 두 번째 세간의 버림이라고 이름한다.【문】만약 모든 법 중에서 제일의(第一義)의 버림을 행하는 보살이라면, 보리를 이루기 위해 머리털과 옷[頭衣]을 태우는 것과 같은 근면한 수행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답】보살은 보리를 이루어
아직 퇴전하지 않음이 없을 때까지는
비유하건대 머리털과 옷을 태우는 것처럼
반드시 이렇게 근면한 수행을 하여야 한다.비록 모든 법에 대하여 반드시 이와 같이 버리더라도 보살은 결정코 머리털과 옷을 태우는 것처럼 수행해야 하며, 혹은 아직 불퇴전 보리를 얻지 못한 보살은 보리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
보살에게는 퇴전하지 않는 다섯 가지 보리의 인연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무엇이 다섯 가지인가? 화취(華聚)13) 등의 경전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 가령 큰 서원을 구족한 모든 보살 및 부처님 세존의 명호(名號)를 듣는 것이니, 이것이 첫 번째의 인연이다. 혹은 그 부처님 세존의 국토에 태어나고자 원하는 것이니, 이것이 두 번째의 인연이다. 반야바라밀경(般若波羅蜜經) 등의 심원한 경전을 받아 지니고 또 설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 번째의 인연이다. 현전주(現前住) 등의 삼마제(三摩提)를 배워 익히고 또 따라서 기뻐하며 얻는 것이니, 이것이 네 번째의 인연이다. 이 네 가지 인연은 아직 인(忍)을 얻지 못한 보살이 퇴전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만약 이 보살이 보살의 부동지(不動地)에 안주하여 이미 무생인(無生忍)을 얻었다면 궁극적으로 결정코 퇴전하지 않는다고 말한다.【문】만약 이 네 가지 인연 중에서 한 가지 인연만 따르더라도 보살이 퇴전하지 않음을 얻는다면, 앞에서 머리털과 옷을 태우는 것처럼 마땅히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고 말한 것이 어떻게 성립되겠는가?【답】그런데 저 모든 보살은
보리를 구할 때에
정진하여 반드시 휴식하지 말 것이니
짐[荷]을 지는 것이 무겁기 때문이다.비록 다시 네 가지 인연 중에서 한 가지 인연만 따라도 보살이 모두 퇴전하지 않음을 얻게 된다고 해도 정진하여 휴식하지 말아야 한다. 앞에서 ‘나는 마땅히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 열반을 얻게 하겠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짐을 지기가 무겁기 때문에 그 중간에 정진하며 휴식하지 않는 것이다.【문】어찌하여 그 중간에 정진하며 휴식할 수 없는가?【답】아직 대비(大悲)의 인(忍)을 생하지 않으면
비록 퇴전하지 않음을 얻었다고 하여도
보살은 마치 죽은 것과 같으니
방일(放逸)을 일으키기 때문이다.네 가지 인연 중에서 어떤 인연을 따라 불퇴전을 얻은 보살이 아직 대비를 낳지 못하고 나아가 무생인을 얻지 못한 탓에 중간에서 업력으로 생사를 받는 것은 방일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반드시 머리털과 옷을 태우는 것처럼 근면하게 수행해야 한다. 무생인을 얻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 중간에도 정진하며 휴식하지 않는 것이다.【문】보살에게 다시 어떠한 죽음이 있는가?【답】성문지(聲聞地)와 독각지(獨覺地)는
만약 들어가면 문득 죽음이 되지만,
보살은 모든 이해하고 아는 바의 근(根)을
단절하기 때문이다.앞에서 설명한 네 가지의 인연 중 어떤 인연을 따라 불퇴전을 얻었다고 해도 이 보살이 아직 대비를 갖고 있지 않고 인(忍)을 얻지 못해서 성문지와 독각지를 초월하지 못했다면, 이는 나쁜 친구의 세력으로써 나고 죽는 괴로움을 두려워하거나, 혹은 태어남을 받는 중간이거나, 혹은 겁이 파괴되는 시간에 성내고 혐오하는 보살이 바른 법을 훼방하거나, 보리심을 소실하고 성문지와 독각지의 마음을 일으키거나, 혹은 성문에서 해탈하거나, 혹은 독각에서 해탈하여 증득을 짓는 것으로서 보살의 근(根)인 이른바 대비를 단절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모든 보살 및 부처님 세존을 이름하여 ‘설명하고 이해해서 죽음을 안다’고 하는 것이다.【문】여기에서 마땅히 사량해야 하나니, 보살은 니리(泥梨)14)에 머무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가?【답】가령 니리에 떨어져도
보살은 두려움을 낳지 않지만
성문지와 독각지에서는
바로 큰 공포를 일으킨다.보살이 설사 니리에 머물면서 헤아릴 수 없는 백천(百千)의 괴로움을 겪는다 하더라도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는 공포에는 비교되지 않는다.【문】어찌하여 그러한가?【답】니리에 떨어져도
필경에는 보리에 장애되지 않지만
성문지와 독각지는
필경에 장애가 된다.설사 니리에 들어가도 바른 깨달음의 도에는 필경 장애가 될 수 없다. 니리에 머물 때나 혹은 악업이 다 없어지는 한계에서는 보리의 도에 잠시 장애가 된다. 그러나 보살이 만약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면, 곧 필경 소생하지 못하므로 성문지와 독각지는 바른 깨달음의 도에 장애가 된다. 이런 까닭에 보살이 니리에 들어간다 해도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는 공포에는 비교되지 않는 것이다.【문】그 공포란 어떠한가?【답】목숨[壽]을 애착하는 사람이
머리가 잘리는 것[斬首]을 두려워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성문지와 독각지는
마땅히 이와 같은 공포를 일으킨다.경전에서 부처님 세존은 이와 같은 말씀을 하셨다.
“목숨을 애착하는 사람이 머리가 잘리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살이 위없는 보리를 욕구해서 성문지와 독각지를 두려워하는 것도 또한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보살이 비록 니리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성문지와 독각지에 떨어지는 공포에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문】아직 무생인을 얻지 못한 모든 보살에게 장애되는 법을 이미 설명하였다. 이 보살은 어떻게 무생인을 얻는가?【답】생하지도 않으며 또한 소멸하지도 않고
생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것도 아니며
함께하는 것도 함께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공하고 공하지 않음을 설하는 것도 마찬가지다.이 가운데 보살은 연기하여 생하는 것을 관찰할 때 이렇게 생각한다.
‘연기하여 생하는 법은 단지 시설(施設)일 뿐이니, 마치 생함이 없는 속에서 생함이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생하는 것은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생[生]함은 존재하지 않으니. 생함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저 소멸함[滅]도 둘이 되는데, 둘 모두 자체가 없음은 생멸과 같다. 저 생하지 않음[不生]과 소멸하지 않음[不滅]도 둘이 되는데 역시 둘 모두 자체가 없다. 저 생함과 소멸의 두 가지 중에서 생하고 생하지 않음과 소멸하고 소멸하지 않음도 또한 존재하지 않으니 서로 위배되기 때문이다. 공도 또한 마찬가지니, 존재하는 자가 없는 것 같기 때문이다. 저 공하지 않음[不空] 및 공하면서 공하지 않음[空不空]도 또한 마찬가지다.’【문】만약 연기하여 생하기 때문에 모든 법에 자체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어찌하여 다시 연기하여 생하는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가?【답】어떤 모든 법[所有法]도 수순하여
그 가운데서 부동(不動)을 관찰하면
그것이 무생인이니
모든 분별을 단절하기 때문이다.이와 같이 보살은 연기하여 생하는 것을 여실하게 관찰할 때 모든 법 자체를 보는 것을 여의게 된다.
자체를 보는 것을 여의기 때문에 즉각 법 자체를 취하는 것을 단절하며, 법 자체를 단절하게 될 때에 이러한 생각을 한다.
‘안팎의 법[內外法]이 없는 것은 아니나 법 자체는 없다. 비록 연기하여 생하는 법이 있다고 하여도 다만 갈대의 묶음[葦束]이나 환몽(幻夢)과 같다. 만약 법이 연기로부터 생한다면 그 자체는 생하지 않는다.’
이러한 관찰을 하고 나면 사문(沙門)이든 바라문(波羅門)이든 능히 움직일 수 없어서 증득을 취하지 못한다. 저 생함이 없는 법을 즐거이 관찰함으로써 모든 분별을 단절하였으므로 생함이 없는 인[無生忍]이라고 이름한다. 이 보살은 곧 보살의 부동지에 안주한다. 게송에서 말한다.【답】이미 이 인(忍)을 획득하고 나면
‘그대는 반드시 부처가 되리라’는
수기(授記)를 즉시에 얻나니,
그러면 문득 퇴전하지 않음[不退轉]을 얻는다.이 무생인을 얻기 때문에 즉시 이전도 아니고 이후도 아닌 때를 얻어서 모든 부처님께서 현전하시어 부처님이 될 것이라 수기하신다.
“그대는 미래, 어느 때, 어떤 세계, 어떤 겁(劫) 중에서 응당 어떠한 여래(如來)ㆍ응공[應]ㆍ정변지(正遍知)가 될 것이다.”
이것을 보살의 불퇴전이라고 이름한다.【문】초지(初地)에 안주하는 것으로부터 나아가 7지(地)까지의 모든 보살은 모두 결정적으로 삼보리(三菩提:遍知)를 지향하는데, 어찌하여 불퇴전(不退轉)이라고 말하지 않고 오직 부동지(不動地)에 안주하는 보살을 불퇴전이라고 말하는가?【답】이미 부동(不動)에 안주하는 모든 보살은
법의 그러함에서 불퇴전의 지혜를 얻는다.
그 지혜는 이승(二乘)도 굴릴 수 없으니,
이 때문에 홀로 불퇴전이란 이름을 얻은 것이다.이것은 믿음 등의 출세간의 선근을 소유하는 모든 성문과 독각, 나아가 제7지에 머무는 보살을 능히 장애하여 퇴전시킬 수 없기 때문에 불퇴전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것이지, 다른 열 가지 부류의 보살이 삼보리(三菩提)를 위하여 모든 법에서 퇴전하지 않음을 말한 것이 아니다.불퇴전의 인연을 이미 설명하였다. 이 중에서 또 수승한 수기(授記)를 얻는데, 대승에서는 네 가지의 수기를 말한다. 말하자면 아직 보리심을 발생하지 않은 수기[未發菩提心授記]ㆍ함께 보리심을 발생하는 수기[共發菩提心授記]ㆍ은밀하게 감추는 수기[隱覆授記]ㆍ현전하는 수기[現前授記]이다. 이것이 네 가지의 수기이다.이 중에서 ‘아직 보리심을 발생하지 않은 수기’란 그 사람의 예리한 근기가 증상(增上)의 믿음을 구족했음을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장애 없는 부처님 눈[佛眼]으로 관찰하고 나서 수기하시는 것이다. ‘함께 보리심을 발생하는 수기’란 선근의 종자, 보리의 종자를 성숙시켜 먼저 닦아 익힘으로서 그 근기가 맹렬하게 예리해 증상행(增上行)을 얻는 경우이다. 단지 모든 중생을 해탈시키고자 하기 때문에 즉각 마음을 발할 때에 불퇴전에 들어가서 타락하는 법이 없이 여덟 가지 한가함이 없음[八不閑]15)[말하자면 여덟 가지 재난[八難]이다.]을 여읜다.이 사람은 자신이 수기 받는 것을 듣거나 하면 여섯 바라밀에 대하여 정진을 일으키지 않는다. 만약 그것을 듣지 못하면 다시 정진을 일으키므로 듣지 못하게 하는데, 타인으로 하여금 그 수기하는 것을 듣고서 의심을 끊게 하시고자 부처님께서는 위신력으로 은밀하게 감추어 수기하신다. 만약 보살이 출세간의 5근(根)을 성숙시켜 무생인을 얻어서 보살의 부동지(不動地)에 안주하면, 그것이 곧 현전의 수기[現前授記]이다. 이것이 네 가지 수기이다. 저 무생인을 획득한 보살은 이미 결정되었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 세존께서 현전에서 수기하시는 것이다. 또 별도로 은밀한 의미의 수기[密意授記]가 있으며, 그것을 다섯 번째로 삼는다. 법화경(法華經)에서 말하는 바와 같다.우리들은 모두 따라서 기뻐하니,
큰 선인[大仙]께서 은밀한 의미의 말로써
두려움 없는 성자(聖者)인 사리불(舍利弗)에게
수기하는 것과 같이,우리들도 또한 마땅히 성불(成佛)하여
세상에 위없는 것을 얻을 것이라고
다시 은밀한 의미의 말로써
위없는 바른 깨달음을 설하신다.어떠한 의미 때문에 이 별개의 말[別語]의 수기를 설하는가? 어떤 논사(論師)는 말한다.
“아직 결정적으로 성문승에 들어가지 않은 자로 하여금 보리심을 발생시키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말한다.
“이미 보리심을 발생한 초업(初業) 보살들 중에는 유전하는 괴로움을 두려워해서 성문의 열반에서 멸도(滅度)를 취하고자 하는 자가 있는데, 그로 하여금 보리심을 견고하게 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또 말한다.
“다른 부처님 국토의 보살이 여기에 모여서 수기하는 때가 도달하면 비슷한 이름으로 그를 위하여 수기하기 때문이다.”
여러 논사는 이와 같이 별개의 말의 수기를 분별한다. 그 중에서 참다운 의미는 오직 부처님 세존뿐이라야 능히 알 수 있다.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현전하여 머무시는
견고한 삼마제를 얻기까지는
반드시 방일(放逸)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모든 부처님의 현전(現前) 삼마제를 얻고 나서 머문다 함은 말하자면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 앞에 나타나 머무는 삼마제를 말한다. 삼마제라는 것은 평등에 머무는 것이니, 보살은 이 삼마제를 얻을 때까지는 반드시 방일하지 말아야 한다. 아직 삼마제를 얻지 못한 보살은 오히려 나쁜 세계에 떨어져서 한가하지 않음[不閑]을 여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삼마제를 얻기 위하여 반드시 방일하지 말아야 하며, 만일 삼마제를 얻으면 저 모든 두려움에서 모두 해탈하게 된다.이 삼마제에는 세 가지가 있다. 말하자면 색을 반연하는 것[色攀緣]ㆍ법을 반연하는 것[法攀緣]ㆍ반연함이 없는 것[無攀緣]이다. 이 중에서 여래의 형색(形色)과 상호(相好)와 장엄한 몸을 반연하면서 부처님을 사념한다면, 이것이 색을 반연하는 삼마제이다. 만약 다시 열 가지 명호[十名號]의 몸, 열 가지 힘[十力]과 두려움 없음[無畏]과 함께하지 않는 부처님의 법[不共佛法] 등 한량없는 색의 부류[色類]인 부처님 공덕을 반연하면서 부처님을 사념한다면, 이것이 법을 반연하는 삼마제이다.만약 다시 색(色)을 반연하지 않고, 법(法)을 반연하지 않고, 또한 부처님을 억념(憶念)하지 않고, 또한 얻는 바가 없어서 모든 모습을 멀리 여읜 공한 삼마제[空三摩提]라면, 이것을 반연함이 없는 삼마제라고 이름한다. 이 중에서 처음 발심하는 보살은 색을 반연하는 삼마제를 얻고, 이미 행(行)에 들어간 자는 법을 반연하고, 무생인을 얻은 자는 반연함이 없다. 이것들을 이름하여 결정(決定)을 획득하였다고 하는데, 자재하기 때문이다.모든 부처님께서 현전하여
머무시는 견고한 삼마제,
이것을 보살의 아버지로 삼으며,
대비(大悲)의 인(忍)을 어머니로 삼는다.여기에서 말하는 현재의 부처님께서 현전하여 머무시는 세 가지 삼마제는 모든 보살의 공덕 및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포섭하기 때문에 ‘모든 보살의 아버지’라고 이름한다. ‘대비’란 나고 죽으며 유전하는 속에서 고달프게 여기거나 싫증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또 성문지와 독각지의 험난한 언덕에서 보호하여 떨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어머니라고 이름한다. ‘인(忍)’을 말해 보자. 인을 얻은 보살은 모든 유전하는 괴로움 및 모든 나쁜 중생 속에서 유전하는 것을 싫어하지 않고, 중생과 보리를 저버리지 않고 싫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 인을 또한 모든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 다시 다른 게송에서 말한다.지도(智度)를 어머니로 삼고
방편(方便)을 아버지로 삼는다.
낳고 유지하기 때문에
보살의 아버지와 어머니라고 말한다.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의 법을 낳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반야바라밀을 보살의 어머니로 삼는다고 말씀하셨다. 모든 보살의 법은 반야바라밀로부터 생겨나고 선교방편[巧方便]에 의해 유지되는 탓에 성문지와 독각지의 험난한 언덕으로 나아가게 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리를 유지시키기 때문에 선교방편을 보살의 아버지로 삼는다고 말씀하셨다.【문】보살은 몇 가지 복으로써 능히 보리를 얻는가?【답】조금씩 조금씩 모은 복으로는
보리를 얻을 수 없다.
수미산 백 개 분량의 복을
모아야 능히 획득할 수 있다.보리(菩提)란 말하자면 일체지지(一切智智)이다. 그 지혜는 응지(應知)16)와 동등하고, 응지는 허공(虛空)과 동등하며, 허공은 한계가 없기 때문에 응지 역시 한계가 없다. 한계가 있는 복으로 한계가 없는 지혜를 얻을 수 없으니, 이 때문에 조금씩 조금씩 모은 복으로는 보리를 얻을 수 없다. 어떻게 하든지 수미산 백 개 분량에 해당하는 복을 모아야 능히 얻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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