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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01 보리행경(菩提行經) 2권

by Kay/케이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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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행경(菩提行經) 2

 

보리행경 제2권


용수 집송
천식재 한역
김용표 번역


4. 보리심인욕바라밀다품(菩提心忍辱波羅蜜多品)1)

모든 선업(善業)을 받들어 행하는 길은
보시와 지계가 앞서서 인도한다.
백천 겁이 다하도록
여래를 공양하고

찬제(羼提)2)를 수행한 것도
성냄[嗔恚]의 죄를 지으면 이루어지지 못하니
갖가지 체(體)가 공(空)함을 관(觀)하여
일심으로 참아야 한다.

쾌락을 탐(貪)하지 말고
뜻을 지켜 평등하게 하라.
마음에 성냄이라는 번뇌의 병이 있으면
편히 잠들지 못하고 항상 만족하지 못한다.

여기 저기 시주(施主)가 있어
이로운 공양을 공급하면
그 아끼고 중요시 하는 마음을 쫓아
성냄의 번뇌를 내지 않는다.

무릇 여러 친근한 일로
미워하고 싫어함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것에 대하여 노여운 바가 없어야
안락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평등심으로 참아내고
원수에 대하여
성냄을 모두 능히 없앤다면
세세(世世)토록 안락을 얻을 것이다.

원한이 만약 마음에 생긴다면
사랑에 대해 또한 기쁨이 없을 것이다.
만약 성냄이라는 번뇌의 음식을 먹으면
참음과 선함이 무너질 것이다.

그 음식은 나의 큰 원수여서
나에게 좋은 이익이 없으니
그것이 원수임을 알아서 먹지 말라.
이러한 까닭에 굳게 참아야 한다.

무릇 원수가 오고 가는 것을 보아도
환희하며 화내지 말라.
원수에 대하여 만약 성냄을 일으킨다면
좋은 이익은 끝내 다하여 없어질 것이다.

참는 마음이 항상 이와 같으면
성냄이 일어날 수 없다.
시절(時節) 업이 참음에 머무르면
성냄이라는 원수가 저절로 생기지 않는다.

만약 사람이 스스로를 보호하고 아끼고자 하면
악한 구업을 짓지 않아야 한다.
구업을 만약 떠나지 않으면
후에 원수에 의한 고통을 받을 것이다.

고통을 두려워하면 출리(出離)할 수 없나니
고통의 원인이 되는 일들을 행하지 말라.
그러므로 인욕의 마음을 견고히 하여
여러 안락을 얻으라.

저 눌릉아자(訥陵誐子)3)
사견(邪見)으로 해탈을 구하여
칼로 자르고 불로 몸을 태우는 것을
이익이 없음에도 능히 참아낸다.

어리석고 바른 견해가 없어서
헛되이 큰 고통을 받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보리심을 위하여
고통을 참아내지 않는가?

모기나 벼룩이나 진드기 등은
항상 배가 고프고 목이 말라 고통스러워한다.
심한 가려움은 사람을 번민스럽고 괴롭게 하지만
인욕에 머물러 돌아보지 말라.

추위ㆍ더위ㆍ비ㆍ바람과
병(病)ㆍ칼[枷]ㆍ족쇄ㆍ구타 등
여러 고뇌의 일을 당하여도
참고 견디며 쾌락을 구하지 않는다.

다른 것을 죽여 피가 흐를 때
마음을 견고히 하여 용맹해지는가 하면
잘려진 몸에서 나오는 자기의 피를 보고
두려워 놀란다.

지혜로운 자는 마음이 청정하여
항상 성냄의 번뇌가 침범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번뇌가 서로 지속하더라도
참는 마음을 항상 용맹스럽게 하라.

뱀이 배를 땅에 대고 다니는 것은
비유하면 성냄이 마음을 조복받은 것과 같다.
뱀을 죽이는 것은 용기가 아니지만
성냄을 죽인다면 최승을 얻는 것이다.

여래는 대비자(大悲者)이다.
고통을 불쌍히 여겨 윤회를 설하시고
죄의 근본을 알게 하여
인욕에 머물러 죄를 짓지 않게 하신다.

부모는 무슨 마음으로
자식이 죄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하는가?
마음을 지켜 성냄을 여의며
스스로 큰 고통의 과보를 멀리한다.

비유하면 무지한 사람이
죄를 지어 생을 얻는 것과 같다.
수행을 하여도 지혜가 없고
성내는 것도 또한 그러하다.

부사의(不思議)에 머무르고자 한다면
마땅히 자신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
이 생을 아껴 중요시한다면
성내지 않도록 하라.

만약 저 티끌의 경계를 탐하면
갖가지 죄를 생하게 되니
저 여러 업력으로 인하여
자유를 얻지 못할 것이다.

만약 경계에 대하여 탐착하지 않으면
이 모임[集]은 인(因)이 없이 서는 것이니
화합하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생함도 없다.

탐착하지 않아 생하지 않으니
얻는 것이 없음을 스스로 설한다.
나는 이와 같은 것을 얻는 까닭에
이 생이 부사의하다.

생(生)과 불생(不生)이 없으니
이것이 어떻게 유(有)를 얻겠는가?
이것저것 관찰하면
멸하고 없어져 남음이 없음을 얻으리라.

이 마음은 항상 청정하니
비유하면 색을 따르는 마니(摩尼)4)구슬과 같다.
변하는 것은 모두 원인에 따르니
원인이 없는 상이 어찌 있겠는가?

과거에 행을 행할 때
그 행은 어떻게 지었는가?
그 행한 바의 원인에 따라
등인(等因)으로 과보를 받는다.

일체가 비록 원인에 연유한다고 하여도
원인과 선함과 악한 것은 마음에 연유한다.
성품의 적정(寂靜)을 구한다고 하여도
이와 같은 것에 어찌 그릇됨이 있는가?

만약 화합의 인(因)을 취한다면
이 고뇌를 즐기고
이 마음은 머무를 수가 없으니
지혜로운 사람은 마땅히 스스로 권한다.

이러한 까닭에 원수를 보면
선지식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인행(因行)을 이와 같이 행하고
마땅히 쾌락을 획득해야 한다.

이와 같이 여러 유정은
업으로 인하여 자재를 잃었다.
자재를 만약 성취한다면
누가 감히 고(苦)에 나아가겠는가?

산란심은 티끌을 연하니
마음이 찔리는 것[被刺]을 깨닫지 못한다.
음식이 끊기거나 음식이 더해지면 성냄은
고(苦)에 도리어 애착한다.

스스로 복된 행을 하지 않으면
도리어 업을 얽매는 것에 애착하나니,
마치 독약이라는 음식물을 먹는 것과 같아
생사의 언덕에 떨어진다.

스스로 이 번뇌에 머물러
진실로 자신을 보호하지 못하는데
타인을 해탈시키고자 하는
이 일이 무엇에 근거하여 얻어지겠는가?

번뇌는 미혹하고 혼탁하여
자살에까지 이르게 한다.
독(毒)만 성하여 자비가 없으니
어찌 성냄이 보호하지 않겠는가?

자성(自性)이 우매[愚迷]하면
다른 것에 대하여 요란(嬈亂)을 행한다.
그것은 의심 없는 노여움을 생하여
불과 같이 능히 모든 것을 태운다.

유정의 성품이 우매할 때
여러 과실을 저지른다.
우매한 까닭에 이와 같으니
연기가 허공에 날리는 것과 같다.

이 사람이 성냄을 보호하지 않는 것은
우매하고 무지한 까닭이니
비유하면 방망이로 사람을 때려
그 노여움을 증장시키는 것과 같다.

나는 과거의 생에서
여러 유정들에게 고뇌를 주었다.
이러한 까닭에 현재의 몸이
고뇌를 받더라도 능히 견뎌야 한다.

나의 몸을 철에 비유하면
그것은 불에 달구어져 단련된 것과 같다.
그와 같은 철로 된 몸이
무슨 고통을 받을 것인가?

내가 지금 이 몸을 보니
정(情)의 형상이 없는 것과 같아
비록 온갖 고뇌를 입었더라도
성냄이 일어날 것이 없다.

우매하여 애업(愛業)을 일으키니
그 고통의 본질을 알지 못한다.
고통의 연(緣)은 자신의 과오로 얻는 것이니
어떻게 성냄의 번뇌를 생할 것인가?

비유하면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처럼
날아다니는 새[飛禽], 칼 숲[劍林] 등이
스스로의 업으로 생한 것임을 알면
어디에 성냄의 번뇌가 있는가?

나는 이와 같은 업을 얻어
이 과오가 일어나는 바를 안다.
설령 지옥에 들어간다고 하더라도
다른 이가 지은 것에 말미암는 것도 아니다.

나의 업을 다하고자 하더라도
무량하여 끝이 없다.
나의 업은 이미 이와 같아
오랜 기간 동안 지옥고를 받는다.

이와 같은 나의 과오는
실로 나의 원수이다.
우매하여 노여움을 조작하니
어떻게 분별하여 알 것인가?

만약 사람이 자신을 호지(護持)하여
원수를 대하여도 참고 성내지 않으면
이러한 마음은 공덕을 생하나니
어찌 지옥에 들어가겠는가?

내가 행할 바를 다하고
원인이 그와 같음을 얻을 때
참지 못하여 성내고 보호하지 않으면
수행의 공덕을 파괴하리라.

뜻은 모양[相]도 없고 형태[形]도 없어
산란하면 곧 파괴된다.
몸을 보호하여 지니는 까닭에
몸의 고통을 마땅히 참고 받아들인다.

나는 입의 악업에 대하여
여러 허물을 짓지 않는다.
몸이 여러 고통을 입지 않는데
어떻게 마음에 성냄이 있겠는가?

나는 금생 가운데에서
깨끗한 마음으로 이로운 행을 하고
이익에도 이미 마음이 없으니
무슨 일로 먹고 마시겠는가?

무릇 지어야 할 일 가운데
중요한 것은 이타행(利他行)에 있는데
그들에게 이익도 없고 그릇되게 애착한다면
결정코 의심할 나위 없이 죄를 얻는다.

탐욕은 말할 것도 없이 삿된 목숨은
지금 죽는 것만 못하다.
삿되게 비록 오래 산다 하더라도
죽으면 마땅히 고취(苦趣)에 떨어진다.

비유하면 꿈속에서
백 년 간 쾌락을 받는 것과 같으니,
마치 진실로 즐거움을 얻은 것 같지만
깬 뒤에는 어찌 창졸간임을 알지 않겠는가?

그 때 수명의 길고 짧음이
무상함을 깨우치나니,
이 두 가지 일을 깨달은 뒤에
거기서 어찌 쾌락을 얻겠는가?

오랜 동안 환락에 머물면
스스로 이익을 얻는다고 말하지만
이는 마치 행인이 도적에게 모두 빼앗겨
알몸에 빈손이 되는 것과 같다.

복의 공용(功用)은 더하고 덜함을 따르고
죄의 근원은 되돌아와 다시 생한다.
복이 다하여도 죄가 생하지 않으려면
성내지 않음의 공용을 수호하여야 한다.

오로지 불선(不善)만을 지어가면
그것이 어찌 생명을 살리는 것이겠는가?
이와 같이 사유하지 않으면
불선은 파괴되지 않는다.

성냄을 찬양하지 않는 것은
그것이 유정(有情)을 파괴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마음에 이타(利他)를 생각한다면
성낼 이유가 없다.

유정을 위하여 수행하는 마음을 지닌 사람이
인욕에 머무르지 않는 까닭에
유정을 보고 번뇌를 일으킨다.
그러므로 인욕의 공덕을 찬탄해야 한다.

탑ㆍ불상ㆍ오묘한 법 등을
비방하고 파괴하더라도
부처님 등은 고뇌가 없으니
나도 그것에 대하여 화내지 않는다.

스승 및 권속에 대하여
애착의 업을 짓지 말라.
현재는 과거의 인연으로 생긴 것임을
잘 살펴보고 스스로 힘써라.

깨닫는 마음으로 유정을 관하면
항상 뭇 고통과 고뇌가 있다.
그것이 이와 같음을 본 뒤에야
고뇌를 능히 참을 수 있으리라.

성냄과 어리석음은
분별하면 허물이 같으니
이 독(毒)의 허물에서
어떻게 허물없음을 설할 수 있겠는가?

어찌하여 과거에
다른 이를 해치는 업을 지었는가?
이와 같은 모든 업의 원인이
끊어진다면, 이것이 무엇을 짓겠는가?

부처님의 복이 또한 그러한 것처럼
나도 이제 일심으로 지으리니
일체 유정과 더불어
서로 자비심으로 바라보리.

비유하면 불이 집을 태우는 것 같나니
집 안에서 불길이 일어날 때
집 안에 만약 풀이 있다면
그 불은 저절로 이리저리 번져갈 것이다.

이러한 것은 마음에 비유된다.
마음이 성냄의 불에 화합하면
그것은 복과 공덕을 태우나니
찰나에 소유하는 것이 없게 된다.

만약 사람이 죽이려고 손에 쥐고 있다가
그것을 놓아주면 가히 훌륭하다고 할 만하다.
지옥의 고통도 능히 면하리니,
이 선(善)을 누가 칭찬하지 않으리.

만약 사람이 세간에 있으면서
적은 고통도 능히 참을 수 없다면
지옥의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니
성냄의 원인을 어찌 끊지 않을 것인가?

내가 이와 같은 고통으로
백천의 지옥을 지나는 것도
하나하나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함이지
나를 위해 짓는 것이 아니다.

나는 이와 같은 등의
여러 커다란 고뇌의 일들이 없지만
세간을 여의려는 까닭에
이익을 위하여 이와 같이 행한다.

고통을 여의고 쾌락을 얻는
그 모든 공덕을 찬양한다.
이와 같이 찬양을 얻으니
어찌 기쁘지 않겠는가?

그것은 이미 이와 같이
걸림 없는 쾌락을 얻은 것이다.
남을 위한 행은 최상의 것이니
지혜로운 이가 어찌 힘쓰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최상의 행은
쾌락을 얻어 닦는 것이 아니다.
이 견해가 만약 버려지지 않는다면
정견을 파괴할 것이다.

만약 다른 사람을 경애하고
덕으로 칭찬하면
다른 사람의 덕은 이미 칭찬한 것이니
곧 스스로를 경애하라.

마땅히 보리심을 발하여
일체 유정으로 하여금
여러 쾌락을 얻게 하라.
어찌 유정에서 성을 내겠는가?

부처님은 삼계의 응공(應供)이시니
유정의 성불을 바라신다.
세상의 이득은 참되지 않는데
저 번뇌를 어찌하여 짓겠는가?

사람이 골육(骨肉)과
여러 권속에 이르기까지
양육하여 목숨 등을 주면
기뻐하지 않고 성을 내는 것이 어찌 생하겠는가?

그와 같이 보리를 구하여야 하나니,
마땅히 보리심을 발휘해야 한다.
유정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복을 스스로 버리는 것이니, 어지 성을 낼 것인가?

만약 사람이 구하는 바가 있다면
재물을 내어 크게 보시하라.
구하는 바를 얻지 못하였더라도
재물이 집에 있는 것과 같지는 않으리라.

청정한 공덕의 복은
무슨 장애로 획득하지 못하는가?
얻은 뒤에도 스스로 수용하지 않으니
성냄의 수행에 머무르는 것과 같다.

죄를 짓는 것과 복을 짓는 것은
서로 같지도 않고, 따라 기뻐하지도 않으며
또한 다시 의지하여 짓지 않으니
마땅히 스스로 하나도 얻는 것이 없다.

만약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그 환희를 구하고자 하고
다시 여러 찬탄하는 말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인(因) 없이 얻으려는 것이다.

비록 이롭고 원만하게 하고자 하더라도
도리어 고통스럽고 즐거움이 없다.
보리심으로 참지 않는다면
이익을 성취하지 못한다.

번뇌의 악한 갈고리는
사람을 끌어 자재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지옥의 졸병이
사람을 던져 화탕(火湯)에 들어가게 하는 것과 같다.

나는 본래 다른 이의 이익[利他]을 구하나니,
헛되이 무슨 칭찬이 필요한 것인가?
이러한 일들은 복과 수명이 없으며
힘이 없고 안락도 없다.

스스로를 이롭게 하는 행[自利行]은 원만하지 않으니,
지혜로운 자는 모름지기 이를 깨달아야 한다.
늘상 이를 스스로 행하여
마땅히 원만함을 사랑하고 즐길 일이다.

수행은 칭찬을 요한다.
만약 칼로 자살을 한다면
세상이 부실한 것같이
이익도 없고 이익의 즐거움도 없다.

비유하면 파괴된 집에
해가 비춰 안과 밖이 보이면
칭찬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모름지기 마음을 밝게 요달해야 한다.

그대는 소리에 대해
일어나고 사라짐이 평등하다고 사유하라.
마음도 이와 같이 다른 이를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해
마땅히 이 같은 행을 해야 한다.

다른 무엇을 받는 바가 있어
이익을 행할 것인가?
그가 이미 쾌락을 얻었으므로
나의 이익은 헛된 것이 아닐 것이다.

그는 저 이익과 즐거움을 얻어
모든 것으로써 나를 찬양한다.
어떻게 나에 대하여
다른 위덕의 즐거움을 분별할 것인가?

그가 이와 같이 나를 찬양하여
사람으로써 그 스스로 얻는다.
그가 연(緣)이 없이 이렇게 한다면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과 같을 것이다.

내가 비록 이러한 찬탄을 얻더라도
빨리 부수고 집착하지 말라.
바른 덕행자를 증오하고
이로 말미암아 성냄을 일으킨다.

이러한 칭찬은 오히려 장애를 만들어
나의 보리심이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
보호하여 악취에 떨어지지 않으려면
그를 위해 무아를 행하라.

만약 모든 유정들의
이양(利養)과 존비(尊卑)의 얽매임을 풀고자 한다면
유정으로 하여금 해탈케 하라.
그들이 어찌 성냄을 일으킬 수 있겠는가?

사람이 고통을 버리고자 하여
해탈의 문에 들어왔다면
이것은 부처님의 위덕 때문이니
내가 어찌 그들에 대한 진심을 일으키랴?

이 성냄을 나는 내지 않으니
복에 장애가 되기 때문이다.
평등인(平等忍)을 수행하면
그가 얻지 못할 것은 없다.

자신의 여러 허물은
인욕하는 까닭에 짓지 않고
허물을 짓지 않는 까닭에
저 복을 획득할 수 있다.

만약 사람이 복이 없다면
스스로 생하도록 참고 견뎌야 한다.
항상 인욕에 안주한다면
어찌 장애가 있다 할 것인가?

세상에 이익을 구하는 사람은
보시에 있어서 장애를 짓지 않아야 한다.
출가를 장애하는 까닭에
이것은 출가를 성취할 수 없다.

세간의 여러 얻기 어려운 것도
구하면 능히 주어진다.
나는 오직 선(善)의 이익을 설하나니
허물이 있어서 얻는 바가 없다.

저 보리행으로써
원망을 멀리 떠나라.
마치 집안의 감춰진 것을 내놓는 것과 같으니
이러한 까닭에 어려움이 아니라고 말한다.

업의 원인을 참회하는 것은
처음 앞서 이끄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인욕의 과보가
이와 같이 생하는 것을 얻으리라.

그것은 나라고 하는 마음이 없으니
이 마음은 곧 인욕에 머물러
부사의한 공덕을 성취하여
오묘한 법을 공양한다.

이 마음은 다른 이의 이익을 위하나니,
나아가 생명을 가지고
혹은 원망을 가지고서 공양하지 않는데
무엇하러 따로 인욕을 말하겠는가?

그러한 악한 마음들에 대하여
각각에 인욕해야 한다.
이와 같은 것에 대해 인욕하면
묘한 법을 공양하는 원인이 된다.

불토(佛土)와 중생토(衆生土)의
위대하신 석가모니께서 이것을 설하셨으니,
그것에 대해 봉사를 많이 하면
능히 부귀를 받게 되리라.

여래는 법에 있어서
유정과 평등하다.
부처님을 존중하는 까닭에
유정을 존중하는 것 또한 그러하다.

뜻을 세운 것이 이와 같으니
스스로에 대해 지은 바가 없다.
그 큰 평등심으로
유정을 평등하게 대하라.

큰 뜻으로 유정을 대하고
자비의 마음으로 공양하라.
발심하여 부처님의 복과 같으니
부처님과 같은 복을 얻으리라.

그러므로 불법을 행하라.
부처님과 유정이 평등하지만
부처님과 평등하지 않은 것은
그 공덕의 바다가 끝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의 공덕은 정순(精純)하여
어느 공덕도 능히 비교할 수 없다.
삼계(三界)를 공양하더라도
그것을 능히 보지 못한다.

불법의 스승은
유정이 그 최상이다.
모든 유정을 공양하되
마땅히 이와 같이 뜻을 세워야 한다.

스스로의 권속만을 위해
이로운 행을 하지 말고
다른 이를 위해 봉사하는 데 있어서
어떤 과오도 짓지 말라.

몸을 파괴하여 무간지옥(無間地獄)에라도 들어가라.
만약 그가 이미 지었다면 나는 다시 짓는다.
광대한 마음으로 저 일체를 위하여
이와 같이 항상 선을 행해야 한다.

비유하면 세상 사람들이 자재주(自在主)를 위하여
자가의 일에 대해 사정을 헤아리지 않는 것과 같다.
나는 그들의 하인이 되어
교만하지 않고 순종하리라.

비유하면 부처님은 고통 속에서도 고통이 없고,
쾌락을 얻어 환희하시는 것과 같다.
일체불이 환희하시니
부처님은 기뻐하시며 그를 위하여 일하신다.

마치 몸에 번뇌가 두루하면
일체의 궁핍을 모두 충족하고자 하는 것처럼
유정의 고통도 이와 같으나
나는 방편이 없어 헛되이 연민한다.

이러한 까닭에 이 고통을 나는 멀리 여의고
일체의 고통을 구하기 위해 대자비를 일으킨다.
먼저 인욕하는 사람을 걱정하게끔 한
죄업을 지금 참회한다.

내가 지금 여래에게 봉사하는 것과
세간을 위해 봉사하는 것은 같은 것이다.
여러 사람의 발이 내 머리를 밟아도
그 일을 당해 환희함이 부처님처럼 하리라.

세간 일체 천한 일도 능히 하는 것은
연민으로 걸림이 없기 때문이다.
이 일체의 비교할 수 없는 일들을 보고
이 같은 존귀한 분을 누가 존경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이 여래를 받들며
이와 같이 스스로의 이익을 성취하리라.
세상의 고뇌를 없애기 위하여
이와 같이 나는 지금 출가한다.

비유하면 한 왕이
능히 대중을 조복하는 것과 같다.
대중은 하나가 아니지만 능히 조복하는 것은
왕을 존경하고 친근하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이지만 혼자가 아닌 것은
왕의 힘이 있기 때문이니
제재하고 단속하는 데
아무 과실이 없을 것이다.

연민으로 인욕에 머무르라.
힘이 지옥의 옥졸과 같아지면
유정을 보호하기를
악한 왕을 섬기는 것처럼 하라.

성냄은 왕이 명령하는 바가 아니라
이 지옥의 고통과 같은 것.
유정을 번뇌롭게 하나니
저 고통은 스스로 받는 것이다.

기쁨은 왕이 주는 바가 아니고
부처님 같은 분에게서 얻는 것과 같다.
유정에 대한 착한 마음
이 마음을 어찌 받아들이지 않겠는가?

장차 유정을 보호하는 것으로
후에 마땅히 성불할 것이다.
보고 느끼고 존중하여 칭찬하니
이러한 선은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것이다.

병이 없고 또한 단엄(端嚴)하며
쾌락하게 오래 살고
부귀하여 전륜성왕이 된다.
이것은 모두 인욕으로 성취하는 것이다.

5.보리심정진바라밀다품(菩提行經菩提心精進波羅蜜多品)

지혜로운 자는 인욕하고
보리는 정진에 머문다.
게으름[懈怠]이 복을 멀리 여의는 것은
바람의 흐름을 여의는 것과 같다.

정진력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것은 분별하여 설함을 요한다.
게으름은 정진의 반대이니
모름지기 독약과 같이 보아야 한다.

수면(睡眠)을 탐하고 맛들이면
쾌락한 일이 없다.
윤회의 고통은 가히 싫어할 만하니
그것은 게으름에서 생긴다.

번뇌의 집에는
게으름의 힘이 이끌고 들어가나니,
이미 무상(無常)의 문에 도달하였는데,
어찌 이를 알지 못하는가?

정진은 나와 남을 위한 것인데
이러한 행을 그대는 보지 않는다.
게으름은 또한 수면과 같고
푸줏간의 소와 같다.

만약 이것을 보지 못한다면
모든 진리의 길을 끊는 것이다.
그것은 얻을 바가 없는 것들인데
어찌 수면을 즐길 것인가?

마약 위의(威儀)를 얻으면
무상이 홀연히 다가오리라.
보시로는 미치지 못하니
어찌 게으름에 머물겠는가?

부지런히 수행하지 않으며
안연(安然)하게 정진하면
홀연히 무상이 찾아오니
생각하여도 고통스럽다.

저 염마계(焰魔界)의 문을 보고
고뇌로 다시 급한 마음이 되어
찰나에 눈물을 흘려도
어느 권속도 능히 구할 수 없다.

지옥의 소리를 듣고
스스로의 업의 번뇌를 생각하니
몸이 청정치 못한 곳에 머물러 있어
두려움과 공포가 끝이 없다.

지옥의 고통은 지극히 모진데
어찌 악업을 다시 지으랴?
솥 안에서 물고기가 팔딱거리는 것처럼
그것은 매우 두려운 일이다.
 
지옥의 업을 이미 지었으니
화탕(火湯)의 고통을 받아
몸이 썩어 문드러지는 고통을 당하리라.
어떻게 하여 청정함을 얻겠는가?

마왕은 고통이 많은 사람을 잡아
무상(無常)으로 보낸다.
무상의 고통을 두려워하라.
이를 소홀히 할 것이 아니다.

우매하여 수면에 집착하는 것은
이것은 허물이 작은 것이 아니어서
큰 고통의 강에 들어가나니
다시 인관의 몸을 얻지 못한다.

최상의 진리의 기쁨과
끝없는 기쁨의 씨앗을 없애고도
해태하며 즐겨 웃는다.
고통의 씨앗 속에서 그대는 무엇을 즐거워하는가?

패배를 당하면 노여움이 많아지니
그것을 알고 스스로 정진하라.
나와 남이 각각 행한 것은
나와 남이 평등한 것과 같다.

나는 어떻게 보리를 얻을 것인가?
분별함이 없이 지어야 하리라.
여래는 진실로써
실로 바른 해탈을 설하신다.

저 모기ㆍ등에ㆍ파리와
벌레ㆍ두꺼비ㆍ조개 등도
정진력을 얻는다면
또한 마땅히 보리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어떻게 태어난 사람인데
능히 이익과 불이익을 알고
항상 모든 정진을 알면서도
왜 보리를 얻지 못하는가?

혹시 손과 발을 버릴까 하여
이것에 대하여 두려움을 일으킨다.
우매함으로 스승의 가르침을 위배하니
이러한 이익을 알지 못한다.

잘리고 부서지며 태워지고 쪄지는 것이
끝이 없나니, 모두 빼내는[拔出]
셀 수 없는 구지겁(俱胝劫) 동안은
보리를 얻지 못하리라.

이 무수한 고통을 지나
오랜 세월이 지나야 보리를 증득할 수 있다.
비유하면 독으로 인한 상처의 고통은
독이 다해야 고통도 모두 달아나는 것과 같이

모든 의사들은
여러 병고(病苦)에서 구하고 치료한다.
따라서 이렇게 큰 병의 고통을 소멸시키기 위해서는
작은 고통은 참고 견디어야 한다.

그러므로 구하여 치료하는 것을 설하나니
단 약은 몸에 이롭지 않다.
훌륭한 의사는 큰 병을 치료할 때
단 약을 주지 않는다.

전후가 모두 이와 같으니
지혜로운 자가 모두 행해야 할 바이다.
그 후로 더 나아가 닦아
몸까지도 버리어 사용한다.

지혜로운 자는 육신을 보기를
마치 푸성귀가 생겨났다가
말라 시들면 썩은 흙에 버려지는 것처럼 하나니
버리는 것을 어렵게 생각지 않는다.

몸이 고통을 짓는 것이라면
마음이 그것을 헛되이 지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는 마음이 약하지 않기에
악업의 고통이 없다.

법(法)을 알아 뜻이 쾌락해 지면
복(福)이 갖추어져 몸이 쾌락해 진다.
이것은 헛되이 윤회하지 않으니
고통을 얻더라도 어찌 슬퍼할 것인가?

과거의 일체 죄장을 여의고
이타(利他)의 복의 바다를 깊게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보리심의 힘
이승(二乘)은 평등을 화급히 요한다.

이와 같이 이익은 즐겁지 않나니
행(行)들이 어찌 고통을 얻겠는가?
지혜로운 자는
보리심의 수레를 타고 즐거움을 얻는다.

유정을 성취하게 하기 위하여
기꺼이 방편력(方便力)을 베푼다.
몸의 힘은 괴로움과 두려움을 짓나니
이를 관하며 오직 칭찬한다.

이와 같이 분별을 끊고
정진의 힘을 증장해야 한다.
내 몸을 능히 버리고
몸의 방편을 넘어서야 한다.

나는 나와 남의
무수한 과실을 소멸시켜야 한다.
그러나 하나하나의 과실은
겁이 다하도록 남음 없이 해야 한다.

저 과실 하나하나를 다하니
나는 털끝만큼도 있지 않다.
끝없는 고통에서 이미 벗어나면
내 마음이 무슨 손해를 보겠는가?

내가 많은 공덕을 구하는 것은
나와 남을 이익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하나의 공덕을 배우되,
겁이 다하여도 배움은 다함이 없다.

털끝만큼의 공덕도
나는 태어나서 일찍이 짓지 않았으니
어쩌다 얻어진 이 일생을
헛되이 헤아리고 얻고자 하지 않으리라.

나는 즐거이 큰 공양을 일으켜
불세존을 공양하는 것을
가난하여 능히 짓지 못했으니,
원했지만 원만하지 못하였다.

두려워하는 이를 편안케 하지 못했고
어머니를 쾌락케 하는 것을 닦지도 못하고서
어머니의 태(胎) 속에 들어가면
단지 어머니를 병들게 하고 괴롭힐 뿐이다.

과거에 법을 여의어
나는 지금 과보를 받았다.
태어난 것이 이미 이와 같으니
마땅히 행하되, 어떠한 법을 행해야 할 것인가?

일체의 선한 마음의 근원인
세간의 석가모니께서는
저 근본이 항상 물러서지 않고
늘 좋은 과보를 얻는다.

번뇌의 고통에 칭칭 얽매여서
갖가지 두려움을 얻나니
다른 이에 대해 장난(障難)함을 좋아하면
죄를 짓게 되어 스스로 받는다.

만약 사람이 곳곳에서
능히 착한 원을 일으킨다면
그러한 것들의 복을 받고
그 공양의 과보를 획득한다.

만약 사람이 곳곳에서
죄를 지어 쾌락을 취한다면
그러한 것들의 과보를 받아
고통의 그릇 속에 빠지게 된다.

『월장경(月藏經)』5)에는, 청량하고
광박(廣博)하고 미묘하고 향기롭고 정결한
부처님의 음성이 맛이 으뜸이라 하나
그러나 닦지 않으면 얻지 못한다.

저 부처님[善逝]의 아들들은
부처님의 법을 이해해야 한다.
마치 연꽃이 핀 중에 최상인 것과 같고
또한 인각(仁覺)의 달과 같다.

염마계[焰魔]6)의 옥졸은
죄 지은 자의 혼을 끌어당겨서
불구덩이와 커다란 솥에
모두 넣어 태우고 삶는다.

사람을 죽이는 달아오른 기구는
살점을 백천 근으로 도려내나니
열철지옥[熱鐵地]에 떨어짐은
모두 불선(不善)으로 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선을 지어
극히 미세하게 관찰하라.
저 금강번(金剛幡)에 의지하여
배우고 관해야 한다.

처음 배울 때는 화합(和合)을 관해야 하나니
너희들은 배우지 않아야 할 것을 관하지 말라.
그리하여 최상(最上)이라 이름하지 않나니
너희는 회향심[迴心]을 지어야 하리라.

살아가는 가운데 짓는 것은
죄의 고통을 증장시키나니,
위가 되는 일의 업은 닦지 말고
아래의 수승함도 구하지 말라.

세 가지의 일7)은 응당 알아야 한다.
업의 번뇌력으로 말미암아
장래의 악인(惡因)이 되니
이것을 어찌 짓겠는가?

세간의 번뇌는
사람을 구속하여 자유롭지 못하게 한다.
나도 다른 사람처럼 견딜 수 없으니
그러므로 나는 짓지 않아야 한다.

미천한 업[下業]을 닦아
어떻게 안주하게 할 것인가?
마땅히 아(我)와 무아(無我)를 관하여야 하나니
이것이 내가 지어야 할 것이다.

한 방울의 감로를
새가 먹고 금시조(金翅鳥)8)로 변하는 것처럼
나의 뜻이 미약하더라도
능히 작은 고난을 벗어난다.

성냄은 무심(無心)의 장애가 되나니
불선의 죄이기 때문이다.
무심이 일어나는 것이
광대하면 장애가 미치는 것을 이겨낸다.

이러한 까닭에 청정한 마음으로
이 문구를 읊고 짓는다.
저 삼계(三界)를 알게 하고
나는 멀리 희론을 여읜다.

나는 일체의 수승함을 얻으니
어떤 이도 나를 이기지 못하리라.
나는 이제 스스로 알았나니
바로 불사자(佛師子)의 아들이로다.

유정이 아(我)와 인(人)을 여의면
최상의 것을 얻는다.
게으름과 원한에 정복되지 않으니
게으름과 원한이 스스로 항복한다.

악취(惡趣)에 끄달려
몸의 선은 빨리 파괴된다.
종들은 어리석고 악함을 말미암아
남에게 의지하여 먹고 초췌해진다.

그가 일체를 받아
아만(我慢)에 머무르기를 수행하면
얻는 명성의 하열함을
어찌 말로 다하겠는가?

이와 같이 용맹한 이는
스스로 저 원수를 이긴다.
용맹하게 이를 수행하니
아만과 원수가 이기지 못하리라.

저 아만심이 만약 일어난다면
이것은 실로 나의 원수이니
수승한 과(果)를 얻고자 하여도
이 과는 모두 다 버려진다.

비유하면 정진은 사자와 같고
번뇌는 짐승에 해당되기에
번뇌의 짐승은 천만(千萬)이나 되지만
능히 맞설 수 없다.

세상에 있는 큰 고뇌들을
사람들은 스스로 모두 자세히 보아야 하나니
번뇌를 항복받지 않으면
이와 같은 고통을 얻는다.

내가 차라리 머리가 떨어지고
심장이 쪼개질지언정
번뇌의 저 원수들이
나를 항복시키지 못하리라.

정진을 닦는 것으로 인하여
저 아만의 업이 소멸하나니,
수승한 과보를 획득하여
저절로 기쁨과 즐거움을 받는다.

쾌락을 위하여 인(因)을 닦는다면
도리어 획득하지 못한다.
닦은 바는 결정되지 않고
또한 수승한 것을 얻을 수 없다.

윤회의 탐욕에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은
비유하면 칼날에 발려진 꿀을 탐하는 것과 같지만
복의 감로를 탐하면
그것을 먹은 후에는 점점 아름다워진다.

이러한 까닭에 업이 적정(寂靜)해지면
오묘한 수행 과보가 따른다.
마치 날이 따뜻하고 달이 차
낮과 밤이 서로 좇는 것과 같다.

정진의 힘은
능히 게으름을 부순다.
멀리 여읨을 얻기 때문에
깊은 마음으로 애락한다.

번뇌의 막대기는 견고하여
지혜의 검과 다투나니
비유하면 막대기와 검을 서로 쥐고
여인과 함께 배우는 것과 같다.

검을 잡은 손에 힘이 없으면
그것을 잃을까 두려움으로 조급하다.
지혜의 검을 잃는 것도 그와 같나니
지옥은 마음에 있다.

세간은 선한 사람을 알아
독의 피를 마시는 것을 승낙하지 않는다.
마음의 허물도 또한 그러하니
마음의 허물을 마시지 말아야 한다.

출가하여 정진하는 마음은
비유하면 기름 그릇을 쥔 것과 같나니
그릇이 떨어지면 반드시 없어지듯이
그것을 떨어뜨리는 까닭에 두려워한다.

수면과 게으름에 집착하는 것은
비유하면 독사를 품고 있는 것과 같아서
제거하지 않으면 반드시 해를 당하리니
그것을 제거함을 마땅히 화급히 하라.

하나하나의 깊은 허물에 대해
마음을 돌이키고 사유해야 한다.
이 허물은 수호하지 않아야 하나니
내가 어찌 다시 짓겠는가?

화합의 업인(業因)은
바른 생각[正念]의 겁으로 끊어라.
무엇을 스스로의 자리[自位]라 이름하는가.
이는 생각하여 획득하는 것이다.

바른 생각의 마음을 일으키지 않고는
조금도 악을 멸하지 못한다.
다가오는 업은 지나간 행과 같으니
일체의 과보를 얻는다.

그 도라솜[睹羅綿]9)
바람에 따라 오고 가며 움직이듯이
정진하는 사람도 또한 이와 같아
날로 그 힘이 증대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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