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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602 보리행경(菩提行經) 3권

by Kay/케이 2024.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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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리행경(菩提行經) 3

 

보리행경 제3권


용수 집송
천식재 한역
김용표 번역


6. 보리심정려바라밀다품(菩提心靜慮波羅蜜多品)1)

부처님은 선정의 뜻에 안주하여
더욱 더 정진해감을 기뻐하시며
마음이 산란한 사람이
번뇌의 싹 사이에 머무름을 불쌍히 여기신다.

나는 지금 몸과 마음을 알아
산란심을 내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세간을 멀리하고
의혹 또한 멀리 여읜다.

이로운 행은 가히 사랑할 만하니
사랑은 세간을 떠나지 않는다.
지혜로운 자는 곧 사유하여
이것을 모두 버린다.

사마타(奢摩他)2)
미발사낭(尾缽奢曩)3) 등에 의지하여
이와 같이 행을 일으켜
번뇌를 모두 파괴한다.

먼저 사마타를 구하고
세간의 행을 빌리지[籍] 말라.
무상은 항상하나니
사랑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가?

만약 천 생(千生)을 거듭한다 해도
다시 애착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
미발사(尾缽捨)를 즐기지 않으면
또한 등지(等持)에 머무르지 못한다.

보고 나서 지족(止足)하지 못하면
이러한 우환은 과거의 갈애에 의한 것이다.
여실하게 보지 않으면
어찌 번뇌의 다함을 얻겠느냐?

뜻은 사랑[愛]의 쌓임[集]을 연하여
번뇌에 불타게 된다.
저 지옥에 떨어진 것을 사유해보면
단명(短命)하여 잠깐잠깐 머무른다.

선우(善友)는 영원히 지속되지 못하며
견고(堅固)한 법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행은 어리석음과 같으니
결정코 악취(惡趣)에 떨어진다.

어찌하여 어리석음과 함께 하는가?
독(毒)이 끌어당기기 때문이니
자기의 권속에 대해서도
찰나에 원한(怨恨)을 맺는다.

범부의 성품[性]은 다르게 생겨나
기쁨이나 노여움[喜怒]의 정해짐이 없다.
성냄이 많아 일을 받들기 어렵고
좋은 이익을 멀리 여읜다.

하열(下劣)한 마음을 스스로 칭찬하며
애증[憎愛]의 죄에 얽매여 집착하게 한다.
이 성냄을 버리지 않으면
마땅히 악취에 떨어지리라.

어리석음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니
이것은 공덕이 없다.
스스로를 칭찬하고 남을 훼방하여
윤회의 즐거움을 스스로 얻는다.

어리석음을 지니면
이러한 등의 불선(不善)에 머무르나니
불선과 불화합(不和合),
저 일들을 모두 획득한다.

일신(一身)의 내가 즐겨하는 것에
뜻으로 탐함이 없이
어리석음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뛰어난 일을 사랑하여 얻으라.

찬탄을 하지 말라.
어떤 선한 일에 머무르리오.
마치 벌이 꿀을 만드는 것과 같이
적정(寂靜)하여 성취를 얻으라.

내가 일체처(一切處)를 다녀
미증유자(未曾有者)와 같다면
늘 많은 사람들에게서
찬탄(讚歎)과 경애(敬愛)를 얻으리라.

만약 곳곳에서 미혹하여 헤매고
의요(意樂)를 얻어 쾌락하면
이로써 세간에서
생사의 두려움을 얻는다.

이러한 까닭에 지혜로운 자는
생사를 두려워한다.
천 가지의 고뇌를 알아
결정코 이에 머물러 받는다.

만약 찰나의 순간에
스스로 정진하여
좋은 명칭을 획득하면
이양(利養)이 많으리라.

같은 이익을 얻은 사람으로서
나에게 상처를 입힘은 공덕이 아니다.
만약 이러한 훼방을 더하면
나의 환희를 기리는 것이라 이른다.

비방에 성내지 않고
칭찬 또한 기뻐하지 않는다.
소위 부처와 모든 유정(有情)들도
모두 이와 같다.

칭찬은 공덕을 얻고
비방은 쓴 업보를 초래한다.
세간(世間)에서 사유하지 않는 것
이것은 어리석음 때문이다.

자성(自性)은 고통과 함께 머무르니
생(生)이 어찌 즐거운 것이겠는가?
어리석음은 벗이 아니니
이것은 곧 여래의 말씀이다.

만약 어리석음에 있으면
자리(自利)도 없고 사랑하지도 않는다.
만약 이타(利他)의 문(門)에 들어가면
이와 같이 스스로를 사랑하나니

유정을 상처 입히지 않는다.
일심(一心)으로 받들지 않으며
이물(利物)의 행을 상하게 하는 것은
번뇌가 선을 무너뜨림과 같다.

마치 저 하늘의 궁전과
나무뿌리에 있는 집에서
그가 좋아하고 즐기는 마음에 따라
뜻대로 얻으니 최상이 되는 것과 같다.

자성의 광대함은
이리하여 걸림 없는 무애처(無礙處)가 된다.
그곳은 일찍이 볼 수 없고
또한 관찰할 수 없다.

부귀(富貴)는 비유하면 질그릇이
비록 완성되었더라도 견고하지 못한 것과 같다.
수용(受用)하면 자유로우나
고뇌가 조속히 이르게 되니

마치 타인의 옷을 훔치고
이를 나누어 문에 걸치는 것과 같다.
다니고 머묾에 자재(自在)롭지 못하니
마땅히 고뇌 떠나기를 구해야 한다.

자기의 몸을 헤아려 보면
실로 고뇌의 법으로 차 있다.
나의 이와 같은 몸
이 몸은 당연히 무너지게 된다.

이 몸을 관찰해 보면
성(性)과 신(身)이 서로 여읜다.
성(性)은 그래도 무너짐이 없지만
몸은 당연히 승냥이의 밥이 된다.

한 번 태어나면 정히 한 번 죽는 것
유정계(有情界)는 이와 같다.
여기에서 또 무엇을 볼 것인가?
사대(四大)는 각기 나뉘어 떠나간다.

마치 사람이 먼 길을 갔을 때
집에 이르고자 하는 것과 같다.
근심 고통도 그것과 다르지 않아
오로지 장애가 없기를 구한다.

비유하면 윤회도 또한 이러하여
모두 태어나 머물다가
곧 (시신을 메고 가는) 네 사람에게 이르리니
그곳에서 멀리 떠나야 한다.

이와 같은 일신(一身)은
원수가 찬양하지 않는 것
참됨에 이르러 이와 같이 이루면
세간을 염환(厭患)하지 않는다.

과거 세간 당시에
생사에 회한(悔恨)이 없고
행했던 행이 비천하지 않으면
능히 세간의 고를 여읜다.

염불을 마음과 입으로 함께하니
사람이 꺼리거나 훼방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몸과 뜻을 다스리니
적정(寂靜)하여 번거롭고 어지러움이 없다.

이와 같이 나는 항상 행하여
모든 번뇌를 멸진(滅盡)하리라.
스스로 마음을 해탈하고
다시 일체를 해탈케 하리라.

마음의 평등함을 얻어서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에
모든 고뇌의 얽매임과
지옥 등을 모두 끊는다.

만약 어떤 남녀 등이
합장하고 많이 공경하면,
그 선한 이익은 헤아릴 수 없고
죄가 없이 칭찬받게 될 것이다.

스스로의 돈을 잘 사용하면
멀리 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을 여읜다.
이러한 행을 능히 행하면
최상의 적정(寂靜)을 얻으리라.

저 사람은 이러한 얻음이 있나니
내 스스로 얻음과 다르지 않다.
이와 같이 명백히 알아 행하면
어찌 적정에 다다르지 않겠는가?

일심(一心)이 탐애(貪愛)에 머무르면
이는 하취(下趣)로 끌려간다.
업은 염마계의 문을 받나니
앞에 나타난 것을 두려워하며 본다.

그 문은 그대의 원수
번뇌는 현재와 동일하지 않다.
분명 탐애(貪愛)에 머무르면
현재 나타난 것에서 어찌 벗어나겠는가?

허물을 스스로 덮고 보호하지만
하나하나가 다른 이의 눈에는 보인다.
저들이 지금 먹는 것을
투기(妬忌)하여 어찌 보호하지 않는가?

독수리는 항상 탐하기를
오직 살찐 고기만을 좋아한다.
또 피로써 장엄(莊嚴)된
이러한 음식을 오로지 소중하게 여긴다.

비유하면 귀신의 바짝 마른 형용과
그 행동을 보는 것과 같다.
모습이 원래 이와 같으니
그것을 보면 가히 두려워할 만하다.

입과 입술 및 어금니와 침
모두 부정(不淨)에 의해 생긴다.
부정은 참을 수 없는데
먹고 마시는 것에 어찌 그리 애착하는가?

도라솜[睹羅綿]으로 몸을 감싸면 촉감이
곱고 매끄러워 희희(嬉戱)를 즐기지만
더러운 냄새[臭穢]가 어찌 나지 않겠는가?
욕심 있는 자는 마음이 스스로 미혹하다.

이 탐함을 고통의 덮개[苦蓋]라 이르는데
미혹한 자는 견고하게 즐거움에 집착한다.
집착함이 없으면 곧 아무 일이 없는데
어찌 이를 떠나지 않는가?

쇠약함과 늙음은 서로 좇아서 생긴다.
살점을 바르고 더러움으로 장식한 것인데
그것이 공(空)하고 허깨비[幻]인 것을 알지 못하고
또 구토 물을 좋아한다.

마치 부정(不淨)이 가득한 가죽 주머니와 같나니
미혹한 사람은 생각지 못한다.
부정한 것이 이와 같이 많은데
그것을 그대는 어찌하여 기쁘게 행하는가?

인간의 육신은 깨끗하게 이루어져 있지 않아
어리석은 이나 지혜로운 이가 모두 알 수 있다.
자성(自性)은 원래 없는데 마음이
어찌 함부로 육신에 애착하는가?

만약 그가 애착하는 마음이 없으면
이는 분명한 지견을 얻는다.
만일 그에게 이것이 없다면
스스로 구토 물을 보지 못한다.

다른 이에게 부정(不淨)하지 않음이 있는 것은
스스로에게는 희유한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스스로 깨끗하지 않은 것,
그것은 너에게 희유할 수 없다.

어리석음은 부정(不淨)한 마음이고
몸은 연꽃에 비유되니
지혜의 태양이 비추면 활짝 피는 것과 같다.
깨끗하지 않은 몸을 어찌 애착하겠는가?

부정은 바야흐로 무상이고
애욕에 물드는 것도 바야흐로 바르지 않다.
바르고 깨끗한 몸을 얻고자 한다면
어찌 애욕에 물듦에 집착하겠는가?

어찌 다른 구토 물에 집착하겠는가?
탐함에 의해 그것은 부정하다.
그 부정한 땅에서
씨앗은 싹트고 증장한다.

그대는 깨끗하지 못한 몸을 받는데
이 몸은 오직 벌레의 무더기이다.
이 몸은 이미 깨끗하지 않으니
깨끗하지 않은 것은 애착할 만하지 않다.

부정한 것이 하나가 아닌데
그런데도 그대는 스스로를 혐오하지 않는다.
달리 부정한 그릇[不淨器]은 없다.
이 그릇을 누가 심히 애착하겠는가?

용뇌향(龍腦香)과 쌀 따위는
먹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고
입에 들어가서 최상의 맛을 낸다.
이는 땅이 청정함과 부합한다.

만일 이것이 분명하다면
그것은 부정하고 불리(不離)한 것이다.
더럽고 추한[穢惡] 무덤가의 시체
이 몸이 만약 이와 같다면

이 몸이 만약 이와 같다면
이를 보고 큰 두려움을 얻는다.
이미 능히 그것을 알고 난 뒤에
어찌 다시 애락(愛樂)을 일으키겠는가?

백단향(白檀香)4)은 깨끗하니
몸은 이와 같은 미묘함이 없다.
어찌하여 수승한 향이 있는데
마음으로써 다른 것에 애착하겠는가?

자성(自性)의 냄새를 탐하면
적정(寂靜)을 즐기지 못한다.
또한 법의 모든 향(香)에 대해서도
일체가 모두 물들게 된다.

만일 또 머리와 손톱과 발톱이 길고
어금니와 치아가 때로 검게 되고
기름때가 낀
더러운 몸이 알몸으로 드러나는 것과 같다.

광란하고 스스로 어리석고 미혹하여
대지(大地)를 가고자 하고
또한 온갖 무기를 가지고
일심으로 자살을 바란다.

공동묘지의 앙상한 해골 모습을 보고
곧 비명을 지르지만
마을에 돌아다니는 앙상한 해골에 대해서는
미혹한 사람은 도리어 즐기고 있다.

부정(不淨)이 곧 이와 같으나
이러한 고통을 저들은 애착한다.
저 지옥에서와 같이
고통을 받지 않음이 없다.

젊어서 쾌락을 탐하여
수승한 선력(善力)을 구하지 않으니
젊어서 구하지 않는데
늙어서 어찌 짓겠는가?

마치 해가 질 때
피곤하여 나아가지 못하는 것과 같고
마치 사슴의 무리가
밤이 되자 헛되어 돌아가는 것과 같다.

석장과 발우를 항상 지니고 가니
길에 있음이 피곤하고 고통스럽다.
마치 송아지가 어미를 따라감과 같이
무소외(無所畏)도 또한 이러하다.


만일 스스로 욕심으로 미혹된다면
자신을 팔아서 노비가 되나니
그들은 자재(自在)를 얻지 못하고
또한 업을 좇아 끌려가게 된다.

여자가 임야(林野)에서 출산하는 것과 같고
전쟁에서 목숨을 보호하기 어려운 것과 같다.
미혹한 자는 욕심 때문에 속아
자기를 믿고 노예가 되기도 한다.

욕심을 끊은 자는 마음이 깨끗하여
고통을 능히 자세히 관찰하나니
그들이 불태워지려 하고
또 독창(毒槍)에 찔리기 원하는 것을 본다.

미혹한 사람은 탐욕의 경계[欲境]를 구하여
기쁨을 얻고는 망령되게 수호한다.
이익이 없는 일을 끝없이 하여
청정함을 모두 파괴한다.

세간의 헛된 재물을
어리석은 사람은 아주 조급히 탐하나니
윤회왕래(輪迴往來)의 고통에서
어느 때 해탈할 것인가?

이와 같이 탐욕의 맛을
욕심내는 자는 많이 받는다.
마치 소가 무거운 수레를 끌어
저 곳에 이르도록 풀을 먹지 못하는 것과 같다.

탐욕의 맛은 세상에 없는 풀과 같으니
그것을 보는 자는 사람 가운데 드물다.
본 뒤에 잘못된 것을 무너뜨리면
찰나에 깨달으니 이러한 사람은 희유하다.

몸은 이를 짓기 위해
언제나 피곤하니
수승한 선정의 업을 닦지 않으면
반드시 지옥에 떨어지리라.

그는 백억 겁 동안
나누어 받아도 피곤함을 깨닫지 못하나니
그가 큰 고통을 행하는 괴로움은
보리를 구하는 것이 되지 못한다.

발우와 지팡이와 독과 불도 없고
산에 낭떠러지나 원수 등이 없으니
탐욕을 떠난 자는 이와 같이
지옥의 고통을 여의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탐욕을 멀리 떠나라.
애요(愛樂)는 분별을 내나니
애요는 공처(空處)가 아닌
좋은 숲과 땅을 다툰다.

선재(善財)의 월광(月光)은 밝고
백단(白檀)의 맑은 향(香)은 정결하나니
넓은 보배 누각 사이에서
행주(行住)함은 무한한 기쁨이다.

아름다운 숲의 소리는 시끄럽지 않고
맑고 깨끗한 바람은 오래도록 불어온다.
그곳은 적정하여
사유하면 마음이 상쾌하고 민첩해진다.

어느 곳이거나 가히 친근할 만하니
빈 곳이나 집이나 바위나 나무 아래에서
애착을 버리고 번뇌를 여의면
자재롭게 근(根)과 식(識)을 보호한다.

이곳은 주재(主宰)하는 이가 없으니
자재롭게 가는 대로 머물며
환희하고 쾌락을 누리니
어찌 제석천(帝釋天)을 받들겠는가?

공덕과 지혜
이와 같은 등의 여러 법을 관하고
또 바른 보리심으로
의혹을 사라지게 해야 한다.

먼저 이와 같이 관(觀)하고
나와 남이 둘이 아님을 중시하라.
나 자신의 일체 행은
고락(苦樂)이 또한 평등하도다.

손은 많은 종류의 일을 만드니
이를 지킴은 일신(一身)을 보호함과 같다.
세간은 무너뜨리더라도 법은 무너뜨리지 못하니
고락도 또한 이러하다.

자신만의 고통을
하나하나 모두 없애는 것과 같이
이와 같이 내가 수지(受持)함은
유정(有情)을 위하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남을 사랑하여
평등의 즐거움을 얻게 하면
그들이 쾌락을 얻은 뒤에
자신의 수승함을 어찌 빼앗기겠는가?

내가 만약 남을 사랑하지 않아
그들이 모든 고통과 두려움을 얻으면
그들은 고통과 두려움을 벗어나지 못하니
스스로에 대해 어찌 수승함이 있겠는가?

고통과 해침을 만약 얻게 한다면
사랑하고 보호하지 않았음을 말미암나니
미래에 고통과 해침을 당할 몸을
어떻게 하여 보호할 것인가?

내가 만약 사견(邪見)에 머무르고
또 아만(我慢)을 일으키면
이와 같은 분별로 생을 얻고
또 이와 같은 분별로 죽음을 얻을 것이다.

죄를 짓고 죄를 짓지 않음은
저 손과 발의 경우와 같다.
손과 발의 고통은 같지 않은데
어찌 같다고 말하여 보호하는가?

이로써 부합하지 않음을 알면서도
마음은 아만(我慢)에 머무른다.
이는 이치에 맞게 끊어야 하나니
그 스스로 마땅히 힘껏 해야 한다.

종자(種子)가 모여 차례대로
나란히 줄을 서는 것이 군의 대오[伍]와 같다.
만약 이와 같다면 고통이 없겠지만
그들은 알지 못하니, 어떻게 얻겠는가?

고통은 본래 주재(主宰)하지 않고
세간의 일체를 능가하지 않는다.
만약 시라(尸羅:戒律)에 머무르면
이러한 고통은 능히 이루어지지 않는다.

만약 청정한 계에 머무른다면
능히 일체의 고를 제거할 수 있다.
일체의 고통에 인(因)이 없다면
모든 고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비애[悲]의 고통은 어찌하여 많으며
어떤 힘에 의해 능히 만들어지는가?
세간을 생각하는 까닭에
비애의 고통이 많게 된다.

많지 않은 하나의 고통이라도
유정들이 얻음을 보게 되니
비애의 고통은 이와 같이 생겨남이
자타에 평등하다.

자신의 고뇌를 없애지 않고
남의 고통을 없애고자 하니
이러한 까닭에 묘인월(妙人月)5)
그 유정의 구(句)를 설한다.

선자(善者)는 이와 같이 관(觀)하고
타인의 고통을 평등하게 보호하니
무간지옥에 있더라도
거위와 같이 연못[蓮池]에서 노닌다.

유정을 해탈케 함은
그것은 환희의 바다와 같다.
이와 같이 항상 부족함은
저 해탈의 맛과 동일하다.

이 이타(利他)가 이루어지는 날
무아(無我)임은 의심함이 없다.
이타는 구하는 바가 없으니
누가 그 과보에 애착하리오.

그러므로 나는 이와 같이
덕이 없다고 스스로 이른다.
비심(悲心)과 호심(護心)을
남을 위해 이와 같이 일으킨다.

지혜로운 자는
수갈라혈(輸羯羅血)6) 등을 세밀히 아나니,
지혜로운 자는 이러한 깨달음을 얻어
사물이 실답지 않다고 관찰한다.

이 몸은 다르게 만들어지지 않았으니
어찌 스스로 알지 못하겠는가?
자신으로써 다른 이의 몸[他身]을 아니
이와 같은 까닭에 어렵지 않다.

스스로 자기에게 있는 허물을 알고
남의 공덕을 알지 못하면
자성(自性)은 버림을 즐거워하지 않고
헛되이 남의 베풂만 관찰한다.

이 몸의 화합은
인연이 박수와 같다.
이것이 이 세간의 연(緣)이니
유정은 어찌 모르는가?

어떻게 무생(無生)을 배우는가?
배움과 같이
스스로의 몸은 몸이 아니며
스스로 다른 이의 몸과 같다는 것을 안다.

이와 같이 이타(利他)하되
이미 짓고 나서는 의심하거나 걱정하지 않는다.
과(果)가 익어서 스스로 받나니
당연히 그 무생(無生)을 획득하게 된다.

그러므로 세간의 배움은
비심(悲心)과 호심(護心)이다.
이 애심(愛心)은 스스로를 가로막아
극히 무거우니, 마치 번뇌와 같다.

유정의 두려움을 알고
스승이 되어 학문을 드러낸다.
만약 능히 이와 같이 배우면
비록 어려움이 있을지라도 물러나지 않는다.

사문(沙門)이 두려움을 보더라도
그는 보호를 받는 자가 아니다.
자신과 다른 사람을 보면
당연히 급히 구해야 한다.

성냄은 원수나 두려움이 많은 것처럼
애착이 없으면 두려움을 얻음도 적다.
최상의 비밀로써
자타(自他)에 전(轉)하며 이익을 행한다.

물이나 땅이나 허공을 나는 모든 생명을
사람으로 하여금 살생케 하지 말라.
오히려 지금
그들의 굶주림과 기갈(飢渴)을 구하고 제도해야 한다.

만약 재물의 이익[財利]을 위해
부모를 죽이고 삼보를 해치면
이는 세간에서 가장 악한 일이니,
죽어서는 아비(阿鼻)지옥의 과보를 얻는다.

어찌 지혜로운 자가
애착을 보고 공양하리오.
원통함을 보고도 보고자 하지 않는 것을
어찌 공양이라 말하겠는가?

저 귀신은 스스로를 이롭게 하여 생각하되
‘그것을 버리면 무엇을 얻는가’라고 하고,
남을 이롭게 하는
‘무엇을 주어 수용하게 할까’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자신을 이롭게 하고 남을 해침으로써
지옥이 따로 생기게 된다.
자신을 해치고 남을 이롭게 하면
모든 공덕이 구족(具足)하게 된다.

작의(作意)의 선서(善逝)를 본다.
이와 같은 행은 별처(別處)이다.
하열(下劣)하여 스스로 애착하지 않고
어리석어 악취(惡趣)에 던져진다.

자리(自利)로 미세함을 알게 되면
이제 당연히 노예로 떨어지게 된다.
이타(利他)로 미세함을 알게 되면
당연히 자재(自在)의 주인이 된다.

세간에 모든 고(苦)가 있음은
예전에 스스로 탐애(貪愛)에 미혹함이고
세간에 모든 쾌락이 있음은
예전에 남을 이롭게 즐겁게 한 때문이다.

어찌 여러 가지의 설(說)이 필요한가?
이 가운데에서 이미 보았으니,
어리석은 자는 자신의 행위를 즐거워하지만
부처님은 남을 위한 일만 하신다.

부처님의 보리를 구하지 않으면
윤회하여 어찌 즐거움을 얻겠는가?
자신의 괴로움을 남에게 주려 한다면
윤회하고 이로 말미암아 얻음이 없으니,

후세를 관찰 해봐도
선리(善利)는 성취되지 않는다.
노복에 대한 업을 일으키면
주인된 사람은 돌아와 받게 되니

서로의 이락(利樂)을
미혹한 자는 보고 여읜다.
그리고 돌아와 서로 괴로워하니
악의 고통스러운 업보[苦報]를 받게 된다.

세간의 재앙을 받는다든지
고(苦)에 놀라 두려워 함[驚怖] 등도
저 일체는 스스로가 만드는 것
어찌하여 이를 만드는가?

자신을 버리지 못하여
고통을 여의지 못하는 것은
마치 불에서 떨어지지 않아
불의 피해를 멀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자신의 고통을 능히 제거할 수 있다면
능히 남의 고통도 제거할 수 있다.
그로써 자타(自他)를 수용하니
이러한 까닭에 비유를 취한다.

그대는 지금 별다른 생각 없이
모든 유정을 이롭게 하라.
그대는 결정코
업을 인(因)하여 분별이 있음을 생각하라.

눈은 보는 것으로써 능함[能]이 되나니
관(觀)해지는 것이 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손은 잡는 것을 용(用)으로 삼나니
잡혀지는 것이 어찌 손이 되겠는가?

다만 모든 유정을 위하기 때문에
신견(身見)에 머무르지 않는다.
견(見)을 떠나 선서(善逝)는
당연히 이와 같은 이로움을 행한다.

하품(下品)의 사람을 보고
자타(自他)의 견해를 일으켜
애증(愛憎)을 관(觀)하더라도
내 마음엔 의혹이 없다.

이 선(善)은 무아(無我)를 만들고
무아의 나를 획득하게 한다.
큰 훼방과 찬탄함에도
고통도 없고 또한 즐거움도 없다.

내가 지은 업인(業因)으로
선하게 안주(安住)함을 얻는다.
세간에서는 겸하(謙下)하는 것을 최상으로 하여
무덕(無德)을 곧 유덕으로 삼는다.

그 덕을 칭찬하지 않더라도
일체의 덕은 스스로 있다.
이를 만약 겸하하면
나는 이로 말미암아 수승함을 얻게 된다.

계(戒)를 여의고 번뇌를 본다.
무아의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모든 병인(病人)을 치료함과 같이
약의 힘에 따라 병이 쾌차되리라.

나는 이와 같이 병을 고치니
자견(自見)이 어찌 이르겠는가?
그래도 스스로 공덕이 있고
그 덕은 아(我:自我)가 머무르지 않는다.

지옥의 악(惡)의 문에 있어도
그것에 대해 근심을 내지 않으면
공덕이 있기 때문에
이는 곧 지혜로운 사람이 된다.

스스로 평등을 관(觀)하면
이익은 스스로 증장하게 된다.
자리(自利)는 존비(尊卑)를 나누고
투쟁하고 성취하려 한다.

이 일체 세간에서
누가 공덕을 볼 수 있겠는가?
이와 같은 공덕의 이름을
이 사람이 얻음을 듣지 못했다.

죄의 덮개[蓋]는 마음의 보배를 덮고
스스로 공양하지 않는다.
자신의 이익의 몸에 대해서도
모두 얻지 않는다.

봄[見]이 있어 잠깐 즐겁더라도
반드시 오래도록 즐겁지는 않을 것이다.
이와 같은 일체의 사람을
비웃고 헐뜯어 상처를 입힌다.

하열(下劣)한 마음의 아만(我慢)으로
스스로 뛰어나다고 타인을 혐오하는 것처럼
지혜와 모습과
종족(種族)과 재부(財富) 등을 자랑하는 것,

이러한 것으로써 자신의 덕을 삼고
항상 칭찬을 듣고자 한다.
칭찬을 듣고 승심(勝心)을 내어
환희하고 즐거움을 얻는다.

이로써 이익을 얻고는
자기의 공덕의 힘이라 이른다.
과거에 지은 털 끝만큼의 인(因),
이 부정업(不正業)을 얻고는

이러한 작은 과보가 다한 뒤에는
오래도록 윤회한다.
이와 같이 윤회하는 가운데
그 백천의 고(苦)를 받는다.

무변겁(無邊劫)을 지나도
거기에서 벗어날 도리를 알지 못한다.
고통을 받고 항상 크게 곤란해도
죄의 마음으로는 이를 깨닫지 못한다.

이와 같이 지각하지 못하였더라도
오래도록 선종(善種)을 일으키면
후에 여래의 말을 듣고
진실로 공덕을 얻는다.

그대가 만일 과거를 보았다면
그러한 악업은 받지 않는다.
보리는 바로 쾌락이니
이러한 즐거움은 떠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수게라(輸揭羅) 등에 비유한다.
그대는 어찌하여
아만(我慢)과 불선(不善)을 또다시 지으려 하는가?

제행(諸行)과 자기 자신의 몸은
이를 관(觀)하되 보지 말라.
이와 같은 여읨을 획득하고
이타(利他)를 그대는 항상 행해야 한다.

자신은 즐기면서 남을 괴롭히면
이것은 곧 하열(下劣)한 행이다.
그대 스스로의 일심(一心)으로
남에게 애증(愛憎)을 짓는 것이다.

중간에 홀연 사유하기를
어느 때 무엇이 이것을 만드는가라고 하여
곧 스스로 쾌락을 버리고
남에게 고통 주는 일 또한 행하지 말라.

차라리 스스로 자신의 머리에 그것을 떨굴지언정
다시는 다른 허물을 만들지 말고
어떠한 작은 과실도 짓지 말라.
이것은 위대한 석가모니의 말씀이다.

다른 수승한 선(善) 등으로
다른 사람을 은근히 칭찬하라.
비유하면 하인이 주인을 섬기는 것과 같이
마땅히 유정을 섬겨야 한다.

그가 과실(過失)에 머물러
선정이 없고 공덕이 없으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사람이더라도
이러한 공덕의 뜻을 내야 한다.

그대가 만약 신속하게 하면
자신을 위하고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다.
저 신속함이 이와 같으면
반드시 고뇌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이 수행은 제일이나
아직 그 힘을 얻지 못했나니
비유하면 새로이 위의(威儀)에 머무르면
재물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몸을 수지(受持)하고
마음을 항복받아 산란하지 않게 하라.
그대는 마땅히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나니,
그대는 이것을 어찌 행하지 않는가?

이것으로 항상 관찰하고
헛된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
이와 같이 나를 조복하여
일체의 과실을 없앤다.

나를 봄에 어디로 가는가?
무명은 일체를 무너뜨린다.
과거의 때와 같고
그대의 아집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자리(自利)를 지금 내가 지니고 있으나
이것을 여의어 멀리하지 않으면
마치 사람을 다른 이에게 팔아
많은 고통으로 자재하지 못한 것과 같다.

그대가 유정에게 주지 않으면
산란하지 않다고 이름함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까닭으로 사람을
옥졸(獄卒)에게 넘겨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지옥에서의 갖가지 일은
해를 입는 것도 또한 장구(長久)하다.
이 얻음을 자리(自利)로 삼고
원망이 생기지 않음을 염(念)하라.

자애(自愛)를 짓지 않아야
자애를 얻는다.
만약 스스로 호지(護持)하는 것을 보면
호지함은 실답지 않은 것일 뿐이다.

이 몸은 곧 여여(如如)로써
수호함을 지어
상품(上品)의 유연함을 얻으니
이것에 이르러도 또한 그러하다.

만약 이것에 이르게 된다면
마치 땅이 일체를 받아들이는 것과 같다.
만약 원만하지 않다면
어느 사람이 뜻으로써 구하겠는가?

애착하는 마음의 번뇌는
능히 부술 수 없나니
마치 오랫동안 부귀를 누렸더라도
일체를 능히 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만약 다른 물건을 탐하면
현자(賢者)라는 이름을 얻지 못한다.
이러한 까닭에 수승함이 증장되기를 구하여
몸과 마음이 방일하지 않아야 한다.

그 애착은 마침내 다하여
이러한 움직임은 깨닫지 못한다.
여러 악하고 부정한 몸을
내가 어떻게 집착하겠는가?

나의 이 몸은 어떠한가?
비록 활동을 하지만 반드시 죽으리라.
흙과도 다르지 않으니
아견(我見)을 어찌하여 깨뜨리지 않는가?

이 부실한 나의 몸을 위해
헛되이 고뇌를 받아들인다.
어떻게 다시 무정(無情)에 대하여
다시 성냄을 일으킬 것인가?

나는 지금 쓸데없이 양육하여
마침내 승냥이와 독수리의 먹이가 된다.
이에 이르러 애착하여 성내지 않으니
애착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겠는가?

만약 성냄과 노여움에 머무르더라도
마땅히 기뻐하며 공양해야 한다.
이와 같이 알지 않는데
어떻게 고통을 짓는다고 하겠는가?

내가 사랑하는 이 몸은
곧 내가 친해야 할 대상이다.
일체가 자신(自身)을 사랑하는데
어찌 나를 사랑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나는 몸을 버리고
세간을 버린다.
이것을 관하건대, 많은 허물은
비유하자면 업의 그릇을 지닌 것과 같다.

저 업과 세간의 행은
내가 떠나간 몸을 따른다.
조용히 마음을 모아 산란하게 하지 않으면
당연히 무명은 끊어지게 된다.

이러한 까닭에 번뇌를 깨뜨리고
나는 선정(禪定)에 머문다.
사도(邪道)는 마음을 끌어당기지 못하니
스스로 최상의 머묾이라 이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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