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1권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제1권
서진(西晉) 월지(月支)삼장 축법호(竺法護) 한역
이진영 번역
1. 문혜품(問慧品)
이와 같이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여래의 보배롭고 청정한 높은 자리에서 노니셨는데, 그 자리는 곧 여래께서 건립(建立)하신 것으로서 끝없는 공덕을 쌓아 장엄하게 만든 도량이었고, 또 부처님 지혜의 보응(報應)에 따라 모든 행을 깨끗이 제거한 곳이었다.
부처님께서 보살궁(菩薩宮)에 나아가 한량없는 게송을 강설하시는데, 그 여래의 찬탄으로 위엄 있는 변화를 나타내고 걸림없는 성도(聖導)로 널리 모든 처소에 들어가며, 미묘한 이치에 뜻을 두어 방편의 행을 권유하셨다. 또 평등한 과거의 지혜로써 미래의 겁(劫)에 이르도록 넓은 서원을 세워 한량없는 공덕을 베풀기 위해 평등한 깨달음에 수순하여 법 바퀴를 잘 굴리시니, 그 한량없는 으뜸된 진리와 분별하는 지혜가 모든 법에 자유로워서 중생들의 마음과 근기를 환히 보고는 피안(彼岸)으로 건네고 방편을 깨달아 모든 집착과 삿된 업의 행을 끊게 하시며 불사를 일으키게 하시니, 중생들로 하여금 다 독실히 믿게 하고 고요한 교화를 받게 하였다.
그리고 6백만의 큰 비구들이 함께 있었는데, 그 비구들의 마음은 잘 다스려져 온갖 거리낌과 번뇌의 욕심을 다 제거하였다. 또한 여래 법왕(法王)의 아들이 되어 심묘한 법을 닦아 도화(道化)를 일으키되 뒤바뀌지 않고 위의를 빛내며 성스러운 길을 성취해 큰 중우(衆祐)가 되는 한편 여래의 안상(安詳)을 본받아 구경(究竟)을 잘 얻었다.
다시 부처님께서는 보살의 큰 성중(聖衆)들과 함께 계셨는데, 보살들은 한량없고 생각할 수 없는 넓고도 큰 모임에 있어서도 그 소행이 거리낌 없었다. 또 보살들은 잠깐 사이에 곧 한량없는 불국토를 드나들면서 방편을 베풀어 시방의 여래를 다 받들어 공양하였다.
동시에 경전을 자문하고 받아 듣되 싫어하거나 지치지 않고서 항상 정근하여 중생을 권화(勸化)하며 지혜의 훌륭한 방편으로 피안에 이르되 바라밀[度無極]을 얻어 걸림없는 해탈문[無礙解脫門]을 세움으로써 곧 뭇 생각과 갚음을 바라는 그물을 벗어나 모든 신통지혜에 친근하게 되었다.
그 보살의 명호를 말하자면, 명천(明天)보살ㆍ선유보(選遊步)보살ㆍ택전투(擇戰鬪)보살ㆍ조명장(照明藏)보살ㆍ견만의(蠲慢意)보살ㆍ용보(踊步)보살ㆍ안관(眼觀)보살ㆍ뇌음(雷音)보살ㆍ이명(離冥)보살이며, 이러한 한량없고 그지없고 비유할 수 없는 보살들이 그 자리에 있었다.
그때 세존께서 그 도량에 머무는 보살들에게 이른바 무음개사(無陰蓋辭)라는 법문을 찬탄하며 읊으셨는데, 그 법문이란, 모든 보살은 경로(經路)가 청정함으로써 부처님의 법력에 따라 두려움이 없고 성인의 지혜를 구족함으로써 모든 법전(法典)에 자유롭고, 또 다라니문의 법인(法印)에 들어가 뭇 법문을 해결하고 끝없는 성인의 신통으로 지혜에 뛰어들고 퇴전하지 않는[不退轉] 바퀴를 굴림으로써 설법함에 물러서지 않으며, 모든 승(乘)이 평등하여 이끄는 것에 두 가지가 없고 무너지지 않는 1품(品)의 법계에 노닐면서 중생들의 근기와 지혜를 잘 분별한다는 것이었다. 또한 홀로 뛰어나고도 굳세게 모든 법을 분명히 이해하고 온갖 마군의 경계를 없앴으며, 이미 뭇 환란을 벗어나 법에 순응하고 번뇌와 삿된 소견을 다 제거하고는 한량없는 지혜에 들어가 방편으로 서로 권조(勸助)하며, 이와 아울러 그 끝없는 행으로 방편의 지혜를 찬탄하니, 시방 부처님들께서도 함께 널리 설하신 바였다. 또 바라지 않는 행과 거리낌 없는 문에 들어가
모든 법을 높이는 한편, 그 응하는 대로 생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성인의 통달한 경지에 널리 들어가며, 깊고 미묘한 인연의 일에 노닐면서 도업(道業)을 밝히고 끝없는 덕혜(德慧)를 널리 설하며, 부처님의 몸ㆍ입ㆍ뜻의 이 세 가지 일로써 심행(心行)을 장엄하여 끝없는 성인의 지혜에 돌아가 성문승(聲聞乘)을 부수고 몸과 마음이 담박하고도 명철(明哲)하므로 연각을 교화하여 모든 신통의 지혜를 이룩하게 하며, 대승을 이끌어 도품(道品)에 들어가므로 모든 법에 신인(信忍)을 얻어 여래의 일으킨 공덕을 선양하여 강설 분별하는 동시에 읽어 외워 선포함으로써 그 성스러운 지혜의 교수(敎授)가 유포되지 않는 곳이 없었다.
그때 세존께서 이 도량에서 그 거룩한 지혜의 법전(法典)을 널리 외워 설하시자 때마침 대중의 모임 가운데 보녀(寶女)란 한 여인이 있다가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손에 아름다운 구슬 영락(瓔珞)을 들고는 세존께 나아가 아뢰었다.
“그러하옵니다. 큰 성인이시여, 제가 아뢰는 말씀이 지극하며 헛되지 않는다면 이 대중의 모임에 설법하신 부처님의 말씀이나 보살들이 강설한 것을 제가 다 기억하고 또 이 경전의 이치를 완전히 깨달아서 시방에 널리 유포함과 동시에 한량없는 사람들에게 권유하며, 이 법보(法寶)를 향해 더 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구하려는 마음을 내게 하겠습니다. 이러한 저의 서원이 변하지 않으리란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여래의 위신(威神)으로 이 고리 구슬[貫珠]에 성스러운 뜻을 나타내 보여 주옵소서.”
이때 세존께서 대중에게 신통변화를 나타내셨으니, 여러 보살들의 머리 위에 누각을 만들고 구슬의 휘장을 드리웠다. 그리고 이 보살들이 오는 세상에 바른 깨달음을 이룩할 때엔 그 불국토가 이같이 미묘 장엄한 도량이 될 것을 보여 주고, 한편으로는 모임의 대중으로 하여금 이 서응(瑞應)에서 나타나는 뭇 보배의 누각과 구슬의 휘장의 장엄 청정함을 보고 모두가 기뻐하게 하였다.
그때
보녀가 부처님 처소에 나아가서 구슬 영락을 뿌리자, 부처님의 위신력과 보녀의 지성스러운 서원으로 그 구슬은 부처님과 보살들의 머리 위 허공에 걸려 있다가 화려한 구슬 달린 휘장이 둘러 쳐진 보배 누각으로 변하였다. 누각의 둘레는 매우 넓었으며, 갖가지 변화로 말할 수 없이 신기하고 아름다운 모습들을 연출하였고, 주변으로 고루 펼쳐진 장식은 화려하기 그지없었으며, 두루 펴져 안치된 곳은 기울어지지 않고 반듯하였다.
이것을 본 보살들은 한결같이 이렇게 생각하였다.
‘우리들도 지난 옛날에 이러한 서원을 세웠다면 우리의 불국토가 깨끗하고 아름답게 가꾸어질 것이고 도량의 보리수도 그와 같을 것이다.’
이 보살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한 그대로 화려하게 휘장이 드리워진 누각을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자 이들은 전에 없던 일이라며 신기해 하면서 부처님께 나아가 아뢰었다.
“도저히 저희 힘으로는 미치기 어려운 일이옵니다. 하늘의 하늘[天中天]이시여, 이 보녀는 서원을 세운 힘으로 저희들을 위해 능히 상서로운 변화를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무수한 겁(劫)에 이르기까지 이 보녀가 뜻만 일으킨다면 지금 같은 이 모든 변화를 잠깐 동안에 다 나타낼 수 있을 것입니다.”
세존께서 대답하셨다.
“그렇다. 보살들이여, 그대들의 말과 같으니라. 보녀는 발심하여 그 뜻을 세운 대로 이미 62백천억 해(姟)에 걸쳐 도를 행하여 왔고 모든 부처님께 공덕의 뿌리를 심었으므로 이제 이러한 지극한 정성으로 진실한 서원을 세운 것이요, 이 때문에 보녀는 그의 서원대로 공덕의 갑옷[鎧]을 입고서 곧 상서로운 변화를 나타낼 수 있게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여러 보살들이여, 이 보녀가 만약 원하기만 한다면 하늘의 꽃을 널리 퍼부어 이 삼천대천세계에 가득 차게 할 수 있고, 또 그가 말한 대로 이름난 향ㆍ도향(擣香)ㆍ택향(澤香)ㆍ잡향(雜香)과 옷과 음식까지도 퍼부을 수도 있으며, 마음만 먹으면 깃발ㆍ일산ㆍ비단 따위가 저절로 허공에 가득 차게 장식할 수도 있다.
다시 온 세상에 수재(水災)나 화재(火災)를 저절로 일어나게 할 수도 있고, 수재를 화재로 바꾸거나 화재를 수재로 바꾸는 일도 모두 그가 말만 하면 그렇게 이루어진다.
나아가서는 이 자리에 모인 대중들 전부의 생김새와 옷가지를 변화시켜 저절로 전륜성왕과 똑같이 만들 수도 있고, 혹은 사천왕의 생김새나 옷, 제석천의 형상과 범천의 얼굴 모습과 큰 신천(神天)의 아리따운 모양과 비구ㆍ비구니ㆍ청신사(淸信士)ㆍ청신녀(淸信女)의 모든 얼굴로 변화시키고자 하면 곧 그의 말대로 다 이루어진다. 혹은 괴이한 변화를 일으키는 억백천의 마군을 조화로 만들어낼 수 있는데, 그 마군들 하나하나가 각자 손에 들고 있는 갖가지 칼이나 몽둥이를 조금도 움직이지 못한 채 뻣뻣하게 머물게 하거나, 또는 그 칼과 몽둥이를 다시 온갖 구슬 영락과 뭇 아름다운 꽃으로 변화시키는 일도 할 수 있다. 혹은 저 아득히 먼 벌판에 음식과 옷이 저절로 솟아 나오게 할 수 있으며, 거기에 큰 성곽을 만들어 18억 채의 가옥이 그 속에 들어가게 할 수 있다. 나아가 삼천대천세계 중생의 모든 생김새를 다 여래의 모습으로 변화시키려 하면 곧 그의 뜻대로 할 수 있고, 이 모임의 대중을 다 허공에 올라가 있게 하고 싶으면 역시 그의 말대로 할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족성자들아, 이 보녀는 몸소 한량없고 끝없는 모든 부처님 경계에 들어감으로써 불세존께서 설법하신 경전을 허공에서 다 통달하고 뭇 공덕을 다 갖추어서 그 음성을 널리 퍼뜨리되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아무런 결함이 없으며, 시방 부처님의 말씀을 또한 자신의 말과 다름없이 널리 펼칠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보녀는 서원을 세운
힘으로 신족의 변화로써 이러한 모습들을 널리 나타내 보인 뒤에 곧 부처님 앞에서 게송을 읊어 찬탄하였다.
보배로써 도업을 삼고
오묘하고 거룩한 보배를 지니시어
그 존귀한 경전과
한량없는 도덕을 연설하시며
더러운 욕심과 번뇌를
깨끗이 다 제거하고는
일곱 가지 깨달음의 보배로
널리 자혜롭게 보시하시고
그 보배의 광명으로
뭇 어두움을 비추어 주시니
이제 이 갖가지 품류(品類)의
빛나는 명월주(明月珠)와
가장 수승한 보배 영락과
값진 고리 구슬을
세존께 공손히 받치옵니다.
설령 마노(馬瑙) 보석이나
수장명주(首藏明珠)와
염광주(焰光珠)와 무구장주(無垢藏珠)와
태양과 달빛이 눈부시게 비쳐도
세존께서 내신 광명을 입으면
모조리 가리고 덮여 빛나지 못합니다.
능인(能仁)의 몸을 살피자니
그 한량없는 복을 입어
열 가지 힘을 이룩하시고
이 국토에 머물면서도
가장 윗 세계에 이르시니
성스런 몸을 관찰한 뒤엔
더욱더 공경심이 커집니다.
이 모임의 모든 대중들
각각 부처님을 뵙고
세존께서 자기 앞에 계신다고
모두들 속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곤 각자 온 방향에서
찬란하여 견줄 데 없는 얼굴과
앉고 눕고 경행(經行)할 때와
현재 대중의 모임에 계시면서
말씀하시거나 잠자코 계신 광경과
즐거이 선정에 드신 거룩한 위의와
그 성스러운 지혜의 한량없으신
부처님의 모든 모습을 우러러봅니다.
털구멍 하나하나마다
빛을 뿜어내어
시방을 널리 비추시며
몸은 연꽃과 같아서
가장 뛰어나고 두루 가득하십니다.
언제나 고요히
성실한 이치에 뜻을 세우고
그 참된 말씀은 수행에 걸맞으며
모든 법을 깨달아 분별하시니
이 도를 갖추어 피안을 건너신
가장 높은 이께 예배하옵니다.
그때 보녀는 게송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고 나서 다시 아뢰었다.
“제가 이제 여래께 이 경전의 구절에 대한 그 뜻의 취향(趣向)을 묻고자 하오니, 허락하신다면 여쭈어 보겠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묻고 싶은 대로 하라. 내 기꺼이 너를 위해 분별 해설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여 주리라.”
그러자 보녀는 부처님의 허락을 받고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그리고 이렇게 여쭈었다.
“보살이 항상 지극한 정성을 갖춘다는 것은 무엇이며, 여래께서 보살들을 위해 진실한 말씀을 설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보살이 법에 순응한다는 것은 무엇이며, 여래께서 보살들을 위해 경전을 강설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보살이 위의를 본받아 따르는 것은 무엇이며, 여래께서 보살들을 위해 그 이치의 갈래를 설하신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또 보살이 율교(律敎)를 받들어 순응한다는 것은 무엇이고, 여래께서 보살들을 위해 율교에 대한 일을 강설하여 결정하신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녀의 물음이 참으로 훌륭하구나. 그대의 그 참된 변재를 널리 해설하리니 자세히 듣고 잘 생각하여라.”
“예. 세존이시여, 즐거이 듣겠습니다.”
그때 보녀는 분부를 받들었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보살이 항상 지극한 정성을 갖는 세 가지 법이 있으니, 그 세 가지란, 첫째는 부처님을 속이지 않음이요, 둘째는 자신을 속이지 않음이요, 셋째는 모든 중생을 속이지 않음이다. 그리고 보살이 부처님을 속이고 자신과 중생을 속인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 하면, 보살이 더 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마음을 일으키면서도 그 뜻은 성문과 연각의 지위를 그리워하여 그것에 대해 달갑고 즐거워하는 뜻을 품으며 그 지위를 구하려는 것이 곧 보살로서 부처님을 속이고 자신과 중생을 속이는 것이다.
또 보살이 부처님을 속이지 않고
자신과 중생을 속이지 않는 것이란 어떤 것인가 하면, 보살이 큰 도에 마음을 일으킬 때 설령 온갖 애를 쓰게 되거나, 뭇 고뇌와 환란을 겪는 한편 여러 마군들에게 침해를 당하기도 하고 외도들에게 시달리기도 하며, 때로는 모욕과 비방과 희롱을 당하고, 때로는 꾸지람과 구타와 위해(危害)와 허망한 일이 가해져 오더라도 그가 지닌 뜻이 고요하여 원망하거나 겁약(怯弱)하거나 미혹하거나 두려워하거나 근심하거나 후회하지 않음은 물론 더욱 한결같은 굳센 뜻과 평등한 행을 계속하여 큰 도에 대한 발심을 버리지 않고 오직 슬기로운 마음을 값진 보배로 여기는 동시에 이 도심(道心)을 항상 지니는 것을 모든 세간에서는 가장 존귀하다고 생각하느니라.
다시 중생을 위해 발심하되, 그들을 구호하고 귀의하도록 제도하거나, 그 견줄 데 없고 비유할 수 없는 발심을 언제나 물러나지도 버리지도 않고 한결같은 뜻을 세워 불도를 항상 기꺼워하며 법 바퀴를 이끌어 중생들로 하여금 다 이것을 보게 한다. 이와 같이 모든 서원의 힘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몸가짐과 거동을 더욱 법답게 하고 정진하여 끝내 다른 사람의 언교(言敎)를 파괴하지 않으니, 이것이 바로 보살로서 부처님을 속이지 않고 자신과 중생을 속이지 않는 것이다.
만일 보살이 부처님을 속이지 않고 자신과 중생을 속이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보살의 으뜸가는 지극한 정성이라 할 것이다.
다시 보살은 네 가지 일에 있어서 부처님을 속이지 않으니, 견고함에 수순하고, 위의에 따르고, 굳센 힘을 지니고, 쉬지 않고 정진함이 그것이다. 또 네 가지 일에서 자신을 속이지 않으니, 뜻이 인자하고 온화하며, 그 마음이 곧고 소박하며, 아첨하지 않고, 속이지 않는 것이다. 보살은 또 네 가지 일에 있어서 중생을 속이지 않으니, 방편으로 병에 따라 약을 주며, 자애로운 마음으로 대하고, 함께 슬퍼하며, 네 가지 은혜를 더하는 것이다. 이 또한 보살로서
도심(道心)을 버리지 않고 옛날에 세운 서원을 어기거나 잃지 않는 이른바 으뜸가는 지극한 정성이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의 지극한 정성이란, 이른바 입이 고요하여 어떠한 말에 있어서도 그 말씨에 결함이 없고 진리에 어긋나지 않으며, 홀로 있거나 대중 속에 있더라도 항상 지성스러운 말을 하게 되나니, 그러므로 국가의 중대한 일이라 하여 거짓말을 하지도 않고, 값진 보배와 재물을 모으는 사업 때문에 헛된 말을 하지도 않고, 부모와 친족을 관계하여 재물을 탐하거나 비용을 아끼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도 않는다.”
부처님께서 또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입의 말씨를 청정하게 하는 서른두 가지 일이 있으니, 그 서른두 가지란 다음과 같다. 첫째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느끼고, 둘째는 공덕을 조성하고, 셋째는 항상 남 부끄러움을 느끼고, 넷째는 착한 일을 닦고, 다섯째는 졸렬하거나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여섯째는 남을 조롱하거나 비방하지 않고, 일곱째는 난폭한 짓을 하지 않고, 여덟째는 모든 하늘을 교화하고, 아홉째는 두려움을 일으키지 않고, 열째는 모든 나쁜 갈래를 벗어나고, 열한째는 착한 길을 열어 주고, 열두째는 성현의 명령에 따르고, 열셋째는 밝은 지혜를 공손히 받들고, 열넷째는 내적으로 청정하고, 열다섯째는 외적으로는 선을 닦고, 열여섯째는 언교(言敎)를 받아들이고, 열일곱째는 말씨를 분별할 줄 알고, 열여덟째는 무리하거나 그릇된 말을 하지 않고, 열아홉째는 말씨를 부드럽게 하고, 스무째는 그 언어가 빼어나고, 스물한째는 입에서는 깨끗한 향기가 풍겨 나오고, 스물두째는 가르침을 잘 따르고, 스물셋째는 속이거나 거짓이 없고, 스물넷째는 열뇌(熱惱)가 없고, 스물다섯째는 사랑스러운 업을 행하고, 스물여섯째는 내적으로 잘못이 없고, 스물일곱째는 외적으로 그릇됨이 없고, 스물여덟째는 죄업을 저지르지 않고, 스물아홉째는 불국토[衆祐地]를 조성하고, 서른째는 불도(佛道)를 즐거워하고, 서른한째는 전달하는 말씨가 지성스럽고, 서른두째는 말하는 대로 이익을 얻음이 그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지극한 정성은 소원을 다 갖추는 것이다. 왜냐 하면 보시하기를 기뻐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인색하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모든 것을 다 보시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청정한 계율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금계(禁戒)를 헐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설령 어떤 경우에서라도 청정한 계율을 구족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인욕의 힘을 세우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원한을 품지 않아야만 그 서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모든 것을 인욕하는 힘으로써 부드럽고 온화해지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정진을 준수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게으르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모든 공덕의 근본을 널리 행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선정을 닦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모든 것에 전일한 마음을 수습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지혜를 세우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삿된 이치를 믿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성인의 지혜를 분명히 요달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또 네 가지 바른 생각[四意止]을 행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방일하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뜻을 고요히 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네 가지 바른 노력[四正勤]을 행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뭇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마음에서 악을 없애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이것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네 가지 신족[四神足]을 행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어느 곳이든 날아다니며 가지 못하는 곳이 없어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이것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다섯 가지 감관[五根]을 갖추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모든 감관이 고요하여 착란을 일으키지 않아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모든 감관이 담박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다섯 가지 힘[五力]을 갖추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모든 세력을 얻어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열 가지 힘을 구족하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일곱 가지 깨달음의 뜻[七覺意]을 이룩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모든 것을 요달해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온갖 느낌이 일어나지 않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여덟 가지 바른 도[八聖道]를 행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삿된 길을 없애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바른 길에 들어서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네 가지 은혜[四恩]를 베푸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모든 곤궁한 액난을 포섭하여 구제하지 않는 것이 없어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며, 그러므로 이것을 본 연후에야 지극한 정성이 된다. 네 가지 범행[四梵行]을 닦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선 하늘ㆍ사람을 위할 뿐만 아니고 모든 중생에게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를 베풀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성이며, 신통의 지혜로 세 가지 해탈문에 들어가 바로 고요함을 관찰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선 온갖 결함과 더러움을 없애고 뭇 행을 널리 갖추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모든 공덕과 법의 근본을 구족하는 것을 보살의 길로 삼으니 제도하지 않는 것이 없고 착하지 못한 모든 법을 깨끗이 제거해야만 그 소원을 성취하나니, 그러므로 원만한 공덕과 성스러운 법을 다 갖추게 됨을 본 연후에야 이것이 바로 지극한 정성이 된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또한 성현의 진리를 배워 그것을 받들어 행해야만 괴로움인 줄 아는 지혜를 갖게 되고 그 습기를 끊고 다 끊어졌음을 환히 알며 성스러운 길을 수행할 수 있다. 이른바 괴로움인 줄 아는 지혜란 다섯 가지 쌓임[五陰]을 분별하여 일어나는 생각을 없앰이요, 습기를 끊음이란 다섯 가지 쌓임의 애착에서 쌓이고 모인 것들을 모두 끊음이요, 어떠한 은정(恩情)에서도 그 습기 되는 행이 없으니 그것이 해탈문이 되어 모든 유거(遊居)할 처소와 시여(施與)할 대상이 끊어지는 것이다. 이 처소와 대상이 끊어지면 과거에서 이른 곳이 없고 과거에서 이른 곳이 없다면 그것이 바로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는 올바른 법인 것이요, 이미 모든 법에서 버릴 것이 없다면 이것이 바로 습기를 끊음이다.
그는 모든 생각과 집착이 모두 끊어졌음을 알며 일으킨 방편도 끝내는 다하였음을 보아 다시는 생사에 대한 생각을 일으키지 않고 모든 것에 시종
평등하여 어떠한 법에도 더하거나 덜함이 없게 된다. 이같이 평등하게 관찰하는 자라면 그는 생각이 모두 끊어진 지혜를 깨달은 것이요, 또는 여덟 가지 바른 길을 평등하게 관찰함으로써 모든 것을 평등하게 치료하여 온갖 상념(想念)과 삿된 생각이 없음은 물론 어떠한 더러운 먼지 속에 있더라도 거기에는 나[我]가 없고 내가 없음으로써 느낌이 없는 동시에 생겨나는 것이 없고 업을 짓는 자도 없이 모든 법을 잘 수행하리니, 이것이야말로 성스러운 길이다. 만일 이러한 지극한 정성의 지혜로써 모든 것을 깨달아 중생을 위해 모두 널리 펼치되 안[內]도 없고 증득하는 것도 없다면 이것이 바로 보살의 지극한 정성이라 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지극한 정성[至誠]의 가르침을 말씀하실 때에 1만 명의 보살들이 다 성현의 지혜를 구족하여 법인(法忍)을 얻었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보살이 법에 순응하여 그 법대로 실행함이란 어떤 것인가? 법의 가르침에 따라 법을 생각하고 법으로 뜻을 삼고 법을 공경하고 법행(法行)을 준수하고 법을 사모하며 법의 즐거움을 즐기고 법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다. 또 법을 미묘한 영락으로 삼고, 법을 굳센 칼이나 몽둥이로 삼으며, 법의 갑옷을 입어 그 서원을 스스로 장엄하고, 법의 횃불을 밝혀 그 광명을 스스로 닦으며, 항상 법에 뜻을 두어 그 법을 자신의 뜻으로 삼고 법에서 노닐면서 모든 경전을 분별하며, 자신의 방편으로 법에 순응하여 그 법행에 노닐며, 법을 침상으로 삼고 법을 거동의 모범[威儀]으로 삼으며 법의 일을 보호하고 법을 보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법은 한이 없으므로 법으로 재물을 삼으며, 널리 법을 연설하여 그 법으로 변재를 장엄하고 항상 법신(法身)을 닦고 그 법으로 언사(言辭)를 삼으며 깊이 법(法)을 생각하여 방일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이 법행을 준수하여 빠짐없이 성취하되 법 아닌 것을 행하지 않고 항상 법주(法主)를 따르는 것이다.
이른바 법주를 따른다는 것은, 설사 이러한 지성으로 진리를 구하더라도 불법(佛法)의 갑옷을 입고
그 불법을 옹호하는 동시에 성중(聖衆)을 공경하고 정성껏 경전을 들어 도(道)의 뜻을 즐겨 하며 뭇 착한 일을 쌓아 지진(至眞)을 버리지 않는 것이다. 또한 뜻이 본래 청정하여 아무런 집착 없이 그 순응해야 할 일을 어기지 않고 여러 성현과 착한 벗을 보고는 항상 공경하여 그 가르침을 따르며, 교만을 떠난 지극한 마음으로 법회(法會)에 참석하여 경전을 찬탄하고 법전(法典)을 사모하여 탐구하되 만족한 생각을 갖지 않으며 그 도의 뜻을 강설하매 게으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경법(經法)에 대해 스승 삼을 이가 없을 정도이며, 부처님의 인자하신 은혜 갚기를 생각하여 자신의 할 일을 끝내고는 한적한 곳에 머물러도 두려움이 없고 성현의 교훈을 저버림 없이 지족(止足)할 줄 알아 열 가지 착한 일을 따르는 것이다.
또 법주에 순응함이란 보시할 것을 서로 권하여 불도를 찬탄하고, 금계와 인욕을 받들어 힘을 삼고 정진을 준수하여 겁약하지 않고, 고요한 선정을 닦아 지혜에 들어가 노닐고 중생들을 진리로 교화하기 위해 방편을 나타내고, 중생을 옹호하기 위해 자비를 품고 함께 기뻐하며 보호하거나 여의는 두 가지 일을 오직 지성으로 순응한다. 낱낱 경우에 따라 착한 업을 지으며, 신통을 일으키되 올바른 법을 이용하고 노니는 처소마다 법을 베푸니, 이렇게 함으로써 네 가지 바른 뜻을 잊거나 잃어버리지 않고 네 가지 바른 노력을 평등하게 준수하고 네 가지 신족(神足)을 현재에 바로 구경(究竟)하며, 모든 감관[根]을 통달하여 그 힘을 잘 다스리고 모든 깨달음을 얻어 그 경로(經路)를 초월하며,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 그 소행을 다 관찰하여 진리의 성스러운 해탈로써 광명을 비추어 성문에게 빛을 쪼여 그들이 따르게 하고 그 본지(本地)에 따라 연각을 교화하되 대승의 덕을 찬탄하여 걸맞는 이치로써 연기의 법을 연설한다. 공(空)하여 없는 것임을 깨달아 두려움이 없고 형상 없음[無相]에 노닐어 집착이 없고 원 없음[無願]을 관찰하여 5음(陰)이
환상[幻]과 같음을 알며, 또 네 가지 원소[四大]가 허공과 같음을 관찰하고 모든 감관[入]이 본래 다 청정하여 공한 것임을 알며, 나아가서는 일곱 가지 성현의 재물[七聖財]로써 업을 삼아 여섯 가지 기억해야 할 법[六念處]을 닦고 여섯 가지 바라밀[六度無極]을 즐겨 하고 다섯 가지 눈[五眼]의 가장 청정함을 얻어 항상 스스로 보호함으로써 모든 것을 초탈하며, 도업(道業)을 잘 닦아 일체의 중생을 평등한 마음으로 제도하고 한량없는 부처님에 대한 일체 공덕의 법을 노래로 찬탄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법에 순응하는 보살이라면 나라는 모양[我相]을 말하지 않고, 사람이란 모양[人相]을 헤아려 따지지도 않고, 또 수(壽)와 명(命)이란 모양을 헤아리지 않으며, 단견(斷見)ㆍ상견(賞見)을 비롯한 모든 존재[有]에 대한 견해[見]을 갖지 않으며, 또 어떤 변제(邊際)에 치우치거나 중간에 의지하지도 않고 친구를 좇아 다니거나 다투지 않고 화합하지 않는 것이 없는 반면 편가르는 일도 없고 뒤바뀌거나 그릇된 소견을 갖지 않으며, 모든 의심을 벗어나고 음개(陰蓋)의 온갖 장애하는 것들을 깨끗이 제거하며, 법을 어기지 않고 법을 어지럽게 하지도 않으며, 경전을 비방하지 않고 경전의 도를 경솔히 하지도 않으며, 끊임없이 모든 법을 구경(究竟)한다.
그리고 도에 순응하는 보살이라면 그도 역시 모든 법에 뜻을 두어 경전을 구족함으로써 그 지성스러운 말씨가 저절로 법에 순응하게 되고, 저 이학(異學)에 물들지 않아 법의 말씀에 순응함으로써 자신의 간악하고 어지럽던 일과 그릇된 행을 다 없앰은 물론 세간 사람들까지 법의 말씀에 순응하게 한다. 그 보살은 또 공(空)을 행함에 순응함으로써 아무것도 얻음이 없고 그릇된 생각과 성내거나 미워하는 법이 없고, 원 없는[無願] 가르침에 순응함으로써 삼계(三界)에 걸쳐 일체 행함이 없으면서도 간절하게 정진하여 온갖 결함과 더러움을 제거하게 되나니, 이와 같이 법에 순응하는 보살은 일어남도 없고 사라짐도 없어 생(生)을 받지 않으며 본성(本性) 그대로 청정하여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게 된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법이란 얻을 바가 없고 문자(文字)가 없고 언설(言說)이 없고 또 사장(辭章)이 없으며, 빛깔이 없어 볼 수도 없고
나아가는 처소도 없으며, 훈계하는 것도 없고 가르치는 것도 없으며, 마음과 뜻과 식별을 여의므로 아무런 때나 결함이 없고, 결함과 결점이 없으므로 모든 탐욕을 멀리하고 그윽함과 어두움이 없으므로 쌓아 모음이 없으며, 내가 없으므로 받을 것도 없고 가질 것도 없으며 받을 것을 여읜다. 경계와 차별이 없으며, 시방세계의 어디에도 집착하는 곳이 없으므로 담박할 뿐이다.
그 소행의 나아가거나 물러남이 없으므로 볼 수도 없으며, 깊고도 넓은 이치를 지니되 그 깨달음에 있어서 상념(想念)이 없고 생각하고 행함이 없으므로 성현을 초월하였다. 슬기로운 자를 교화시키되 적응되거나 적응되지 않음이 없으므로 모든 것 그쳐 쉴 수 없으면서도 적응될 수 있음은 바로 진리 그대로이며, 삼세(三世)가 다 공하여서 아주 사라짐도 없고 끝내 멸망함도 없고 도로 물러나는 일도 없으며, 또 생겨남도 없고 성취함도 없고 무너져 사라짐도 없다. 또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음도 없고, 성취함이 없고 성취하지 않음도 없으며, 또 행함이 없고 보이는 바가 없으며 보이지 않음도 없고 보임을 여의지도 않으며, 또 상(相)을 이룩함도 없고 상을 이룩하지 않음도 없으므로 이것이 바로 한 가지 상인 것이다.
다시 아무런 상이 없으며 집착할 바도 없으며, 또 집착을 여의었고 집착을 여읠 것도 없으므로 집착도 없고 속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며, 내 것이라 할 것도 없으면서 누구에게 속한 것도 아니고 따르거나 지켜야 할 것도 없다. 번뇌가 없으며 짝할 것이 없고, 또 평등할 것이 없으며 평등해질 것도 없다. 지극히 정성스러운 것도 없고 허망하지 않으며, 즐거움도 괴로움도 아니고 정진도 정진 아님도 아니며, 또 어울림이 없으면서 어울림이 없지도 않고, 전정(專精)하지 않으면서 전정하지 않음도 없다. 또 명색(名色)이 없고 생멸이 없으며, 견고하지도 않고 견고하지도 않음도 없으며, 파괴함도 없고 파괴하지 않음도 없으며, 금강(金剛)의 상(相)도 아니고 파괴의 상도 아니므로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지극한
정성에 어긋나지 않으면서 다른 것도 아니고 동떨어진 것도 아니며, 그 어떤 비슷한 부류나 짝할 것도 없고, 처소와 상념(想念)도 없으며, 또 이것과 저것도 없고 차등도 없고 안과 바깥이 없고 중간도 없다. 즐겨 함도 없고 피안(彼岸)을 건넘도 없으며, 본 것도 들은 것도 없고, 기억함도 없고 가르침도 없으며, 아는 것도 없고 모르는 것도 없다. 형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형체가 없는 것도 아니며, 조작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작이 없는 것도 아니어서 모든 존재를 다 여의었으므로 이것을 법이라 한다. 이러한 법은 음성이 없으면서 음성 아닌 것이 없고 또 취합(聚合)이 없고 언설(言說)이 없으니, 보살이 법에 순응함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언사(言辭)를 다 갖추었다면 그것이 바로 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법에 순응하는 자는 아예 다른 사람과 싸우지 않고 함부로 다른 사람을 깔보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배우지 못한 이라 해서 업신여기려 하지 않고 배움을 성취한 자라 해서 치우치게 공경하지도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스스로를 칭찬하지 않고 자기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경전을 어지럽게 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공양을 받기 위해서 도의(道義)를 설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 때문에 의심을 일으키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언제나 다른 사람의 허물을 말하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경전을 함부로 여기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결코 다른 사람의 경도(經道)를 방해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끝내 모든 법에 대하여 그 법을 깨달았다는 생각으로 법을 차별하거나 나누고 헤아리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모든 법을 공한 것으로 보고 덧없는 것으로 보고
원 없는 것으로 보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법계를 파괴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근본 없는 것을 들추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참된 근본의 경지를 벗어나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성냄과 미워함에 이끌려 중생을 인도하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모든 의식[識]에 얽매이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계교(計較)하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법의 이치를 착란하지 않고 법의 장엄을 어기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자신의 의식[識]에 미혹하지 않고 법의 도의(道義)에 의혹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바른 뜻을 헐뜯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바른 법품(法品)을 착각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을 미혹시키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붕당(朋黨)을 조성하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연기(緣起)하는 일들을 따르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어떤 세력을 자랑하지 않고 청정한 법에 아무런 인연을 갖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인색하고 탐욕스런 번뇌의 더러움이 없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금계(禁戒)를 헐뜯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금계를 헐뜯는 사람을 버리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게으름이나 성냄과 미움, 그리고 원한을 맺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게으르고 번뇌에 물든 사람과 행동을 같이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도(道)의 뜻을 잃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지혜의 근본을 파괴한 적이 없다.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법의 장단점을 논란하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이라 해서 그 사람이 설하는 경전까지 싫어하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경전을 가지고서 전적(典籍)에 이용하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율교(律敎)와 법률을 어기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일부러 그 율교와 법률을 준수하지 않아도 응함에 따라 법과 법 아닌 것을 다 분별하며,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마음으로 말미암아 실수하지 않고
항상 그 심념(心念)을 경전에 두며, 또 그 법에 순응하는 자는 모든 성취할 것을 파괴하지 않는다. 법에 순응하는 자는 결박을 취하지 않고 생사를 벗어나며,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언제나 함이 없는[無爲] 법을 버리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친한 벗이라든가 원수라는 생각을 갖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보응(報應)의 과(果)를 무너뜨리지 않고, 죄복의 보응을 믿어 즐거워하지도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나쁜 말을 듣더라도 보복할 것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과 투쟁할 결함을 구하지 않는다.
법에 순응하는 자는 함부로 입[口]을 놀리지 않고 몸과 입과 마음을 기르되, 아첨하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자신을 나타내려고 한적한 곳에 있는 자신의 모습을 남에게 보이려 하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공양의 이익을 탐하여 조그마한 일에 끌리지 않는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욕심이 없다면서 흉포하고 거짓된 일을 저지르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과 자기와의 차별을 두어 불도를 연설하지 않고 불도와 반대되는 가르침을 개입시키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일곱 가지 거룩한 재물[七聖財]을 탐하거나 그것에 인색하지 않다. 또 법에 순응하는 자는 음식을 탐내 양식을 저축하지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부모와 종족을 헐뜯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다른 사람의 단점을 비웃지 않고 자신의 공덕을 칭찬하지도 않으며, 법에 순응하는 자는 부처님의 도덕을 분별하여 한계를 두지 않고, 법에 순응하는 자는 대승을 찬탄하되 게으르거나 싫어하지 않나니, 이 모든 것이 바로 보살이 법에 순응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보살이 위의에 순응한다고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치란 것은 명문(名聞)을 구하거나 저열한 이치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모든 공덕의 근본을 닦고 많은 착한 이치를 쌓음으로써 그 지성(志性)이 뛰어나 올바른 도에 발심하여
공한 이치를 모으는 것이니, 보시를 하더라도 보답을 바라지 않는 이치, 모든 중생을 안락케 하는 이치, 금계를 헐뜯지 않는 이치, 참을 수 없는 것을 다 참는 이치, 정진하여 모든 하는 일을 다 성취하는 이치, 선정으로 고요한 경지에 들어가는 이치, 지혜로워서 주저하는 일이 없는 이치이다.
인자한 마음을 닦는 자는 중생을 평등하게 관찰하는 이치, 중생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는 자는 중생을 위해 모든 것을 펼쳐내는 이치, 함께 기뻐하는 자는 법의 즐거움을 일으키는 이치, 담담한 마음을 지니는 어떠한 고락에도 흔들림이 없는 이치이다. 또 보시하는 자는 보시하고 나서 후회하지 않는 이치, 중생을 즐겁게 해 주고 침해하는 마음이 없는 이치이며, 모든 것을 조성(造成)함에는 법의 원력을 일으켜야 하는 이치, 평등을 닦음에는 중생을 권유하여 대승에 뜻을 두되 네 가지 은혜로써 교화해야 하는 이치, 모든 만물은 덧없고 괴롭다는 이치, 일체의 법은 나라고 할 것이 없다는 이치, 모든 번뇌가 담박해진 이치, 그러면서 모든 의식[識]에는 성스러운 지혜를 깨달아야 하는 이치이며, 모든 일을 수행함은 장엄을 갖추는 이치, 일체의 경전을 존중함은 그 보배 갈무리를 잘 보호하는 이치이며, 사람[人]과 목숨[命]에 집착하는 자에겐 법으로써 교화해야 하는 이치, 이 생각과 집착을 벗어나 통달하려는 자에겐 다함 없는 법을 설해야 하는 이치이며, 경권(經卷)을 분별하되 법을 파괴하지 않는 이치,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 수순함은 물질 없는 지혜를 얻되 뛰어난 말솜씨를 지녀 뭇 사람의 병에 따라 설법하는 이치이다.
또 보시하되 조금도 싫증을 내지 않고, 계율을 지키되 바람을 다 이루며, 널리 듣되 그 들은 것을 실행하고, 공덕을 지어 모든 상(相)을 원만히 하며, 은혜를 베풀되 모든 중생의 근기를 잘 알고, 고요히 선정에 들어 마음이 짓는 일을 보호하며, 관찰하여 지혜에 통달하는 것이 이치이다.
네 가지 바른 생각이란 그 뜻을 억제하기 때문이고, 네 가지 바른 노력이란 모든 공덕의 법을 나타내기 때문이고,
신족(神足)을 갖춤이란 시방을 날아다니기 때문이고, 그 다섯 가지 감관[根]을 갖춤이란 다른 사람을 파괴하거나 헐뜯지 않기 때문이고, 다섯 가지 힘을 갖춤이란 온갖 번뇌에 시달려 어지러워지지 않기 때문이고, 일곱 가지 깨달음의 갈래란 일체의 법을 환히 깨달아 그 바른 길을 구하는 동시에 모든 법에 원한이 없기 때문이고, 신통을 성취함이란 그 본말(本末)을 통하여 아무런 결함이 없기 때문이다. 이렇게 법에 순응한다면 이것이 곧 법의 이치를 구경(究竟)함이며, 이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 바로 위에 순응하는 것이요, 이치에 어긋난 것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보살이야말로 위의에 순응하는 자라고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뒤바뀌고 그릇된 소견을 없애는 것이 공의 이치이므로 공을 행하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요, 모든 생각[想]의 어울림과 어울리지 않음을 다 제거하는 것이 생각 없는 것[無想]이므로 생각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모든 삼계의 서원을 여의는 일이 원 없는 것[無願]이므로 원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며, 온갖 조작의 행(行)을 벗어남이 행 없는 것[無行]이므로 행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다. 일체의 생멸을 끊어 버리는 것이 생멸 없는 것이므로 생멸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모든 감각의 일어남을 없애는 것이 느낌 없음이므로 느낌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괴로움과 습기를 깨끗이 제거하여 괴로움이 다하고 성스러운 길을 실천하는 것이 괴로움을 없애는 것이므로 괴로움을 없앤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며, 모든 법에는 사람이란 생각과 목숨이라는 생각이 없으므로 나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다.
일체의 언사(言辭)와 음향(音響)에 통달함이 바로 얻을 것 없는 것이므로 얻을 것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모든 행을 청정케 하는 것이 바로 성실한 진리이니, 지극히 정성스런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요, 일체 도품(道品)과
법을 준수함이 방일하지 않는 것이므로 방일 없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모든 들은 것을 다 받들어 행하는 것이 신심이므로 이 신심을 준수하여 실천하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함이요, 모든 승(乘)은 다 대승을 따라야 하므로 대승을 따르는 보살이라면 곧 이치에 순응하는 것이 된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파괴할 수 없고 여러 가지의 일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한 가지 품류(品類)이거나 한 가지 맛[味]이라면 그것이 이치이고, 흔들림이 없는 동시에 또 다함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지어감[行]이 없음으로써 나는[生] 것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오는 것이 없으므로 가는 것도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나는 것이 없으므로 사라짐도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두 가지 일이 없으므로 어느 하나를 들거나 내리지도 않고 높이거나 낮추지도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조작하는 것이 없고 형체도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아무런 작용이 없고 그 존재[有]하는 것도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같은 형상이 없어 권교(勸敎)할 것이 없고 또 아는 것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삼계의 더러움을 깨끗이 제거하고 3세를 평등히 관찰하여 번뇌를 아주 없앤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노닐거나 오가는 처소가 없고 또 아무런 결함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원수가 없으므로 그 행이 담박하여 마음이 번뇌에 어지럽지 않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안일하게 지내는 것만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널리 펴는 것도 없고 두루 거두어들이는 것도 없이 항상 걸맞게 행한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과거ㆍ미래ㆍ현재를 다 끊어 버리고서 아첨하는 일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바른 법과 바른 법 아닌 것까지도 생각하지 않아 그 한계의 있고 없음과 덧 있고 덧없음을 다 제거하고서 평등한 지혜로 모든 것을 초월한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모든 문자(文字)를 그 음성에 따라 다 깨달아 일체의 근본이 청정하여
언사(言辭)가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뜻과 식별을 깨달아 널리 법을 설함도 없이 그대로 출가한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번뇌의 욕심과 생각 있고 생각 없음과 걸맞고 걸맞지 않음을 모두 분별하되 거기에 집착된 생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모든 법에 평등하여 여러 가지로 차별을 두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공(空)하고 상(相) 없고 원(願) 없어서 아무런 조작이 없고 형상도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으뜸가는 지성스러운 일만을 환히 깨달아 다른 것을 믿거나 다른 사람을 우러러보지도 않고 어떤 형상과 처소를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모든 것을 가르치되 그 상(相)에 집착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그 상이 마치 허공 같은 고요한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고, 파괴될 수 없는 상이어서 진리 그대로 차별의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잘 개화(開化)하는 상이어서 마치 환영[幻] 같은 자연의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고, 그 네 가지 원소까지도 법계의 상을 삼아 바깥 상으로 관찰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보시ㆍ지계ㆍ선정ㆍ방편을 행하되 모두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속임과 거짓이 없는 지성을 베풂으로써 모든 행위에 아무런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며, 금강처럼 파괴할 수 없는 견고한 상이어서 세간에 처하되 싸우는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하는 일이 매우 착하여 궁극의 진리를 구족하는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며, 모든 것에 널리 들어가 두루 구제하되, 쌓임[陰]ㆍ덮개[蓋]의 문(門)을 향하는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다. 모든 갈래에 평등하여 일체의 법에 들어가는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며, 평등하고도 그릇되지 않아
모든 사물을 동등하게 보아 치우치는 상이 없다면 그것이 이치이고, 선정과 지혜로 생사 없는 상에 노닐며 해탈하는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다. 성인의 상에 의지하여 어떤 지혜를 얻거나 그 가르침을 따르는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고, 그 진리대로 깨달아 발표하는 상이거나 모든 법을 평등하게 이끌어 가는 상이라면 그것이 이치이다.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그 모든 이치를 고루 다 닦고 또 이와 같이 모든 이치의 일을 해설한다면 그는 곧 일체의 뭇 이치를 분별하는 자이니, 보살이 위의를 순응함이란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이른바 보살이 율교(律敎)를 받들어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여래께서 강설하시는 두 가지 율이 있으니, 첫째는 죄에 대한 율이고, 둘째는 번뇌의 욕심을 없애는 율이다.
죄에 대한 율이라는 것은 생각의 근본과 순응하지 않는 근본과 무명의 근본과 어리석음의 근본과 뒤바뀜의 근본과 진실하지 않는 근본과 허위의 근본과 몸에 집착하는 근본과 나에 치우친 근본과 사람이란 생각에 집착되는 근본과 게으름의 근본과 버리는[捨] 마음이 없는 근본과 귀의할 줄 모르는 근본과 의심하는 근본과 거만하고 방자한 근본과 지혜를 이룩하기 어려운 근본을 바로잡는 것이다.
번뇌의 욕심을 없애는 율이란, 그 모든 것에 주저하지 않아 생각 없음에 머물고, 죄처(罪處)가 없는 동시에 죄를 말하지도 않고, 왕자(王者)와 같은 지위를 좋아하지 않는가 하면 번잡한 일을 저지르지도 않고, 간탐하지 않으므로 어떤 소견이나 마음의 일어남이 없고, 그 뜻이 고요하고 단아하여 모든 괴로움을 다하였으므로 존재하는 것이 없고 처소가 없고 방면도 없고 번뇌도 없고 인색함도 없고 보는 것도 없어서 마음 그대로 모든 번뇌를 없앰이니, 일체의 법이 또한 그러하므로 근
본이 없고 머무는 처소가 없다.
마음이 그를 연하여 이끌리지 않으면 그 마음이 청정하고도 선결하여 모든 존재를 초월함은 물론, 나아가서는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 생사와 환란을 죄다 벗어난다. 성교(聖敎)를 준수하여 한마음을 잡되 주저함이 없나니, 이러한 뜻으로 함께 귀의한다면 죄가 없으니, 이것을 번뇌의 욕심을 없애는 율이라 한다.”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말씀하셨다.
“번뇌는 무엇이고, 번뇌를 끊는 율은 무엇인가? 번뇌라 하면 음욕과 성냄과 어리석음과 무명과 은애(思愛)와 열두 가지 연기의 행을 말함이요, 번뇌를 끊는 율이란 끝까지 모든 법으로 개화(開化)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공(空)의 일로 모든 법을 열어 가르치니 그로 하여금 욕심의 행과 성냄과 미워함과 어리석음을 없애고, 무상(無相)으로 모든 법을 열어 가르치니 그로 하여금 온갖 습기의 행과 번뇌를 없애고, 무원(無願)으로 모든 법을 열어 가르치니 그로 하여금 모든 공덕의 착한 일을 행하게 한다. 그리하여 이 모든 행에 행할 것이 없고 모든 법에 더 교화할 것이 없으며 다시 행할 것이 없는 행으로써 모든 법을 이끌어 가되 그로 하여금 모든 법에 의지하는 인연을 없애고 지키고 따라야 할 아무 견해도 없게 하기 때문이다. 설령 이 열두 가지 인연에 귀속되는 경우가 있더라도 평등한 모든 법으로써 욕심의 번뇌를 없앤다면 본말(本末)이 다 고요해지리니, 이른바 공이란 속(俗)과 도(道)가 다 공한 것이므로 이러한 공을 닦는다면 일체의 번뇌와 욕심이 또한 공해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이 공으로 도에 평등히 한다면 이것이 바로 욕심을 없애는 율교라 한다.
어떤 이가 ‘저 율을 맡아 스스로 교화하는 자라면 이것을 율이라 하리라’고 이렇게 말한다면, 그는 이미 자신을 교화할 줄 아는 이로서 교화하는 율을 깨달은 것이다.
이른바
자신을 교화하는 율이라 함은 나와 나 아님을 분별하여 그 몸의 자연스러움을 알되, 첫째는 담박함을 알고 다음엔 사실 그대로를 알아 자기에게 성냄이 없음을 깨닫는다. 또 몸이란 본래 공하여 아무것도 없음을 분별하되, 이미 근본이 없고 얻을 것이 없음을 깨닫는 한편 자신을 분별함에 있어 동요하지 않고 짝할 이가 없음을 깨달으며 생하거나 일어난 바도 없음을 분명하게 안다. 이와 같이 분별한다면 그 번뇌에 근본 없음이 또한 그러한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만일 나 없는 것을 나 있다고 생각하거나 번뇌가 없는 것을 번뇌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뒤바뀜이요, 또 그 반대로 나란 본래 청정하여 몸이 없고 욕심의 번뇌도 본래가 청정하여 번뇌 없는 것이라고 이렇게 관찰한다면 이것을 번뇌를 끊는 율이라 한다.
과거의 욕심 번뇌를 다 개화했다면 그는 미래ㆍ현재에 있어서도 다시는 그러한 욕심 번뇌가 없으리니, 왜냐 하면 모든 행을 거듭하지 않고 번뇌를 또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자기 자신에게서 아무런 생각이 없다면 과거나 미래ㆍ현재가 있을 수 없다. 또 마음이란 색상(色像)이 없고 안과 바깥이 없고 얻을 것도 없나니, 욕심의 번뇌도 그와 마찬가지로 색상이 없고 안과 바깥이 없으며, 얻을 것이 없고 얻을 것이 없으므로 성내거나 미워함이 없고 싸움도 없고 더 이상 없앨 것도 없고 조작도 없고 조작 아닌 것도 없다. 일체의 번뇌가 이로 말미암아 은애(恩愛)를 벗어나므로 존재하는 것도 없고 존재를 여의는 것도 아니니, 이것을 가리켜 번뇌의 욕심을 교화하는 율이라 한다.
보녀야, 만일 보살이 욕심을 개화하는 이러한
율을 깨닫는다면 그는 곧 뭇 사람의 욕심을 가르쳐 해달의 길로 인도하기 위해 설법하리니, 이것을 일러 율의 가르침을 받들어 순응한다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 지극히 진실한 교법(敎法)인 율교를 받들어 순응하는 이치를 말씀하시자, 그때 1만 명의 보살들이 생사 없는 법의 지혜[不起法忍]를 얻었으며, 보녀는 기쁨에 겨워 어쩔 줄 몰랐다. 그는 선심(善心)이 자라나 부처님께 나아가 말하였다.
“이제 여래께서 이 지성의 교법을 명쾌히 말씀하시고 율의 이치를 찬탄하심은 전에 없었던 일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그는 다툼이 없고 나아가서는 중생들의 다툼도 깨끗이 제거하여 곧 이 경전에 순응하게 될 것입니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4583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3권 (0) | 2024.07.31 |
---|---|
[적어보자] #4582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2권 (0) | 2024.07.31 |
[적어보자] #4580 보계경사법우파제사(寶髻經四法憂波提舍) (0) | 2024.07.30 |
[적어보자] #4579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6권 (0) | 2024.07.30 |
[적어보자] #4578 별역잡아함경(別譯雜阿含經) 15권 (0) | 2024.07.3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