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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82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2권

by Kay/케이 2024.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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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보녀소문경(寶女所問經) 2

 



보녀소문경 제2권


서진 월지국삼장 축법호 한역
이진영 번역


2. 발의삼십이보품(發意三十二寶品)

그때에 현자 사리불(舍利弗)이 보녀에게 물었다.
“이제 그대는 어떻게 지극한 정성의 법을 닦고 그 이치와 율을 행하겠는가?”
보녀가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그 지극한 정성이란 언사(言辭)가 없고 법이란 욕심이 없고 이치란 얻을 수 없고 율교란 몸과 마음이 고요한 것입니다. 또 그와 같다면 보낼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그 지극한 정성이란 멸진(滅盡)한 상(相)이요, 법이란 담박한 상이요, 이치란 형식을 떠난 상이요, 율교란 해탈의 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사가 없고 언사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말할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또 그 지극한 정성이란 근본이 없고 법이란 차별이 없고 이치란 두 가지가 없고 율교란 조작이 없는지라, 그러기 때문에 언사가 없어 말할 수 없고 찬탄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자 사리불은 다시 보녀에게 물었다.
“그대가 가진 보배는 어떤 종류의 것이기에 그대의 이름을 보녀라 하였는가?”
이에 보녀는 사리불에게 대답하였다.
“보살은 서른두 가지 일을 눈앞에서 보고는 보배와 같은 마음[寶心]을 일으키니, 이는 모든 성문승(聲聞乘)이나 연각승(緣覺乘)으로는 미칠 수 없는 것입니다.
서른두 가지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모든 중생을 구제하여 그들로 하여금 다 신통의 슬기로운 마음을 내어 부처님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둘째는 법의 가르침을 잘 보호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셋째는 성중(聖衆)들의 명령을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넷째는 중생을 권유하여 성현의 끝없는 보배를 받들게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다섯째는 중생들의 더러운 욕심을 없애고 그 고뇌와 환란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해 대비를 베푸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여섯째는 일체의 값진 보배를 다 보시하고 안팎의 모든 진귀한 물건에 인색하거나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일곱째는 스스로가 계율의 착한 행을 닦아서 파계한 사람을 구제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여덟째는 인욕과 정진의 그 온화하고도 세밀한 힘을 모아서 성내고 싸우거나 스스로 훌륭한 체하여 어떤 세력을 믿고 함부로 남을 해치려는 그러한 중생들로 하여금 도법(道法)을 본받고 인욕하는 마음을 내게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아홉째는 겁약하거나 게으르지 않아 그 견고한 정성으로 대승의 행에서 물러나지 않고 게으른 중생들을 교화하여 매우 정진하게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째는 전일한 마음으로 평등한 선정을 닦아서 중생들을 교화하되 욕계의 집착을 없애고 훌륭한 방편으로 선정에 돌아오게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열한째는 지혜의 분별로서 모든 어두운 법을 파괴하고 참되고 반듯하며 둘이 없는 1품(品)의 법에 들어가 그 감동으로 성스러운 지혜를 통달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두째는 평등한 마음으로 어느 것에도 해를 끼치지 않고 오직 진정한 도의 한 가지 맛을 찾아 그 모든 신통의 지혜를 얻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셋째는 모든 결박을 벗어나 함이 있고 함이 없음과 형상이 있고 형상이 없음과 즐거움도 없고 고요함을 여의지도 않음에 평등한 한편, 자연스러운 마음 그대로 진리에 머물러 어떠한 즐거움이나 괴로움에도 뜻이 흔들리거나 옮겨다니지 않고 중생을 보호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넷째는 모든 공포를 여읨으로써
12연기의 서로 이어진 그 오묘한 이치에도 아무런 두려움 없이 들어가 제도해야 할 것은 제도하고 초월해야 할 것을 깨달아 어떤 그릇된 견해도 갖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열다섯째는 많은 공덕을 쌓되 그것으로 만족하게 생각하지 않고 상호(相好)를 원만히 갖추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여섯째는 항상 바르게 깨달은 이를 보기 좋아함으로써 여러 부처님께 친근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일곱째는 경전의 법을 듣고 전적(典籍)을 고찰하여 그 이치를 가늠하고 헤아리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여덟째는 그 경전의 법을 들은 대로 강설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열아홉째는 만약 법을 들어서 다른 이에게 설하려는 자라면 한량없는 마음을 내야 하는데 모든 법을 일으키되 어느 스승으로부터도 가르침을 받지 않았다면 그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무째는 자신의 수행을 건립(建立)하여 파계한 자를 보고 은혜로써 구제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스물한째는 더 배울 것이 없으면서도 처음 배우는 이의 뜻을 지니어 경솔하거나 거만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두째는 스스로 훌륭한 체하는 태도와 매우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서 자신을 낮추고 공순하게 가르침을 받되 모든 중생에게 머리 조아려 굽히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셋째는 미묘한 이치에 뜻을 두어 모든 근기가 밝게 통달함으로써 낮고 천한 교리를 깨끗이 제거하고 대승을 믿어 즐겨 하여 그 정직한 마음으로 도에 나아가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넷째는 마장이 되는 일을 여의고 번뇌를 제거함으로써 청정 결백하여 더러움과 결함과 탐욕을 아주 없애고서 어떤 안락한 곳에 처하여도 게으르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다섯째는 항상 전일한 행을 닦아 담박하고도 한적한 위치에 있음으로써 그 몸과 마음이 고요하여 생사의 환란에 더럽히지 않고 대비에 뜻을 두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스물여섯째는 보살이 일체 자신의 안락을 버리고서 하늘과 사람을 안락케 하려 하고 뭇 고통과 환란과 번뇌에 허덕이는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게으르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일곱째는 보살이 고요한 광명의 세력으로
번뇌 없는 법을 얻어 마치 자기 손바닥을 보는 것처럼 해탈을 관찰하되 모든 일을 버리지 않고 시방 부처님들의 법을 모두 구족하려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스물여덟째는 보살이 덧없고 괴롭고 공하고 나 없고 몸 아닌 그 모든 법을 관찰하되 싫어함이 없고 더러운 욕심에 물들지 않아 욕심 없는 도품(道品)의 법을 즐겨 하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스물아홉째는 보살이 공하고 상(相) 없고 원(願) 없는 해탈을 얻어 모든 법에 지어감이 없음으로써 중생을 관찰하되 어떠한 법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서른째는 보살이 모든 갈래의 고뇌와 환란을 볼 때에 마치 그 머리털이 불에 타는 것처럼 긴박한 생각으로써 한없는 정진을 갖추어 무수한 겁(劫)의 생사를 겪으면서 모든 신통의 지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서른한째는 보살이 불도(佛道)에 친근하여 점점 그 미묘한 몸과 성스러운 지혜의 업을 더함으로써 그 업을 행할 때에 대승의 법을 버리지 않고 모든 가난과 액난을 극복하여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게으르거나 싫어하지 않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이요, 서른두째는 보살이 만약 중생을 권유하고 일깨우되 첫째가는 간절한 뜻으로 도의 이치를 즐겨 하고 나를 계교하지 않으며 견고한 뜻으로 대비에 이르는 것이 곧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입니다.
사리불이여, 이것이 바로 보살이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키는 서른두 가지 일이며, 그러므로 이 끝없는 진귀한 보배를 일체 보살의 보배와 같은 마음이라 합니다.”
이때 세존께서 보녀를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보녀가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켜서 도에 들어가는 보살의 행을 명쾌하게 말하였구나.
또 보녀는 모든 보살에게 한량없는 공덕이 있음을 찬탄하여 더없이 밝고 참된 도를 발심하게 하는구나. 왜냐 하면 이는 성문의 보배나 연각의 보배가 아니고 바로 불도의 보배인 동시에 보살의 보배이기 때문이다. 불도의 보배를 더욱 높임에 따라 성문ㆍ연각을 출생하는 이 보살의 보배와 같은 마음을 일으킴은 일체의 보배를 죄다 출생하느니라.”

3. 총명품(聰明品)

이에 현자 사리불이 세존께 여쭈었다.
“전에 없는 일이옵니다. 하늘의 하늘이시여, 이 보녀의 말솜씨야말로 모든 것을 잘 분별하고 해설한다 하겠으니, 그는 본래 총명한 지혜가 있기 때문에 이 중요한 일을 두루 꿰뚫어 널리 연설하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사리불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보녀가 법요(法要)를 연설하는 것이 총명한 지혜가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이 보녀는 이미 한없이 총명한 변재를 얻었노라.”
그때 기년(耆年) 사리불이 보녀에게 물었다.
“그대가 분별하는 그 총명의 지혜로써 해탈의 방편을 말할 수 있겠는가?”
보녀가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일체의 법은 다 총명한 지혜로 만든 업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법을 분별 해설함은 바로 총명한 지혜이니, 왜냐 하면 일체의 중요한 이치를 포섭하여 취하기 위해 도심(道心)을 일으키므로 이것이 총명한 지혜이며, 법계를 평등히 받들기 위해 도심을 일으키므로 이것이 변재(辯才)의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다 생각이 끊어진 경지에 들어가 명철한 지혜와 일체의 이치에 순응하는 지혜를 나타내며, 이 도심을 일으킴으로써 걸림없고 끊임없는
변재에 도달하나니, 이것이 이른바 변재의 총명한 지혜입니다.”
보녀가 다시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모든 이치에는 지어감이 없고 집착을 떠나 그 훌륭한 뜻과 총명한 지혜로 항상 환술[幻] 같은 법의 이치를 잘 생각하며, 또 법사(法事)를 위해 모든 법문을 통달하되 명철한 마음 자리에 돌아가 6정(情)에 치우치지 않고 마음에 아무런 집착이 없고 변재에는 걸림이 없으며 총명의 지혜로써 그 모든 법과 법 아닌 것을 분별하여 법의 담박함을 보아야 하나니, 그것이 바로 이치에 순응하는 것입니다. 이른바 변재란 그 이치를 나타내기 위해 음성을 빌릴 뿐이고 언사(言辭)에 붙일 따름입니다.
불(佛)이라면 이치를 깨닫지 않은 것이 없고 모든 법이 또한 그로 말미암아 생겨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치에 순응하여 법을 분별하나니, 변재를 지닌 자라면 자유로이 법을 분별하되 법의 이치에 따라 욕심 없는 법이라야 법이라 할 수 있고 순응하는 법이라야 법이라 할 수 있고 법다운 변재라야 변재라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이치와 함이 없는 이치와 회합(會合)의 이치라야 총명한 이치이며, 회합의 이치란 모든 이치가 회합된 한 가지 법 맛[法味]의 이치인 것입니다. 성중(聖衆)들이 이러한 멸진(滅盡)의 이치에 순응하여 그 멸진에 따라 분별하므로 이를 변재라 하니, 사리불이여, 모든 법을 위해 그 문장과 구절을 강설하되 항상 이 법을 관찰한다면 총명한 지혜라 할 것입니다.”

4. 문보녀품(問寶女品)

그때에 현자 사리불이 세존께 여쭈었다.
“이 보녀는 더없는 바르고 참된 도를 발심한 지가 오래된 듯한데 어떤 부처님께 그러한 큰 도를 배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이제부터 과거 헤아릴 수 없는 무수한 겁의 오래고도 먼 세간에 유위(維衛) 여래ㆍ지진ㆍ등정각ㆍ
명행족ㆍ선서ㆍ세간해ㆍ무상사ㆍ도법어ㆍ천인사ㆍ불중우란 부처님께서 세간에 출현하셨으니, 그 세계의 이름은 청정(淸淨)이고, 그 불토의 의복ㆍ음식ㆍ가옥ㆍ누각은 마치 제4의 도솔천(兜率天)과 같으며, 그곳에 있는 76억의 보살들은 다 오직 한 가지 가르침만 받든 순수한 이들이어서 퇴전하지 않는 한편, 모든 다라니를 얻어 변재에 뛰어났느니라.
그리고 사리불아, 유위 여래ㆍ지진 부처님 당시에 복보청정(福報淸淨)이란 이름의 전륜성왕이 있어서 천 세계를 통솔하였는데, 그에게는 간직한 값진 보배가 한량없이 있었다. 또 그 복보청정 성왕의 궁중에 있는 8만 4천의 부인과 채녀(婇女)는 한결같이 궁에 있는 사람 가운데 가장 바르고 옥 같은 여인이었고, 성왕의 아들 천 명은 모두가 역사(力士)이어서 그 위의와 세력은 이루 말할 수 없었느니라. 그럼에도 그 성왕은 36억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에 걸쳐 큰 성인이신 유위여래를 공양하되, 모든 것을 보시하여 안락하게 지내시게 하였으며, 여러 보살들에 대한 의식ㆍ상좌ㆍ침구ㆍ약품까지도 다 공급하였느니라.”
사리불은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큰 성인이시여, 유위여래의 수명은 얼마이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대답하셨다.
“유위여래의 수명은 10중겁(中劫)이었으나 복보청정왕이 그 여래를 공양한 햇수는 이루 헤아릴 수 없느니라. 그런데 어느 때 왕은 궁중의 여러 왕자들과 권속을 비롯한 92해(姟)의 무리들과 함께 그 부처님을 둘러싸고 따르면서 엎드려 예배하고 백천의 값어치가 있는 명월주와 영락을 받들어 올리면서 합장하여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큰 성인이시여, 저희들이 몸소 모든 공양의 준비를 갖추었으니, 공양으로서 어찌 이보다 더 뛰어나게 여래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사리불아, 유위여래께서 복보청정에게 이렇게 대답하셨느니라.
‘대왕은 아셔야 합니다. 이보다 더 존귀하고 훌륭하며
비교할 수 없는 다른 공양이 있는데 왕은 아직 그 공양을 베풀지 못하였습니다. 이 공양이야말로 왕이 앞서 베푼 공양거리보다 백 배, 천 배, 만 배, 억 배, 억만 배나 뛰어난 것입니다.’
왕은 다시 여쭈었다.
‘어떤 공양이옵니까?’
유위여래께서 그 대왕의 마음을 짐작하시고는 다음의 게송을 읊어 대답하셨다.

항하사처럼 무수한
그 억천의 불국토에
가득 찬 값진 보배로
억백천 겁에 이르도록

여래를 공양하여
이렇게 모은 복덕이라 해도
저 중생을 가엾이 여겨
도에 발심한 자로서

항하사처럼 무수히
억천 부처님을 섬기며
무수한 억겁을 동안 받든
그 복덕엔 미치지 못하리라.

부처님의 대비하신 도심(道心)
일곱 걸음만으로도 수승하시니
부처님을 이같이 공양함이
가장 더없는 존경의 길이네.

이 보시가 월등하고
이 계율과 인욕 한량없고
이 정진 굳건하고
이 선정과 지혜 흔들림 없음에랴.

그러므로 누구나 도에 발심하여
세간의 스승 되기를 바란다면
이 복덕 가장 한량없어
쌓고 또 쌓아 다함이 없으며

이름이 널리 퍼지는가 하면
권속이 모두 건전하고
또 재보와 세력을
마음대로 얻을 수 있으리니

전륜성왕이나 제석ㆍ범천의
그 훌륭한 위력(威力)으로
만약 환희심 내어 다른 생각 끊고
모든 신통의 지혜를 갖춘다면

온갖 나쁜 갈래를 소멸하여
8난(難)의 두려움 없애고
청정한 도를 더욱 자라내어
항상 천상ㆍ인간의 쾌락을 누리리라.

또 누구든지 더러움 여의고
더 없는 도에 뜻을 세우려면
모든 근기를 밝게 통달하여
성스러운 총명으로 어두움 없애며

여러 부처님 뵙고 받들어 섬겨
경전의 설법을 듣는 한편
모든 지혜를 힘써 구하기 위해
항상 그 도심(道心)을 넓혀야 하리라.

주저하거나 의혹됨이 없어
아첨을 떠나 항상 곧고 순박하고
중생을 가엾이 여겨 구제하되
그 수승한 도에 뜻을 두며

온갖 욕망과 쾌락을 버리고
법락(法樂)만을 즐겨 함으로써
온 세간에 아무런 집착 없고
그 수행을 물 위의 연꽃같이 하며

복덕의 지혜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바라밀을 힘써 구해야 하리니
이같이 도에 발심한다면
그 누가 큰 도를 세우지 못하랴.

이것이 곧 큰 횃불의 광명으로

뭇 어두움을 비추어 구제하는
가장 높고도 거룩한
중생들의 큰 도사(導師)이네.

그러므로 이 세간에 가장 뛰어나
약을 베풀어 모든 병 제거하고
도의 뜻을 건립(建立)함이
억천 겁을 지나도 다함이 없네.

사리불아, 그때 복보청정왕은 유위여래로부터 이 게송을 듣고 도에 발심하여 그 공덕을 찬탄하면서 스스로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기쁨에 겨워 어찌할 바를 몰랐으며, 곧 더없는 바르고 참된 도에 발심하였다. 이에 궁중에 있는 태자와 관속을 비롯한 백관의 신하와 그 밖의 모든 권속들까지 다 왕을 시종하면서 다음의 게송을 읊었노라.

이제 세존께서
도의 뜻을 세우시어
인자한 마음을 일으켜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므로

저희들도 공경하고 존중하여
한결같이 도의 마음 내어서
그 마음을 굳게 하려 하오나
생사의 본제(本際)를 알지 못하여
그릇된 일에 사로잡히고
고뇌에 떨어져 허덕입니다.

이제 정성껏 정진하여
불도에 뜻을 두고
중생들에 착한 일 행하기 위해
변재와 지혜를 더욱 길러내며

거룩하게 통달하신 유위부처님을
알뜰하게 공양함으로써
그 한량없는 신통의 지혜 얻어
천상ㆍ세간의 안락을 받으렵니다.

저희들 범천ㆍ제석과 전륜왕은
다 함이 있는[有爲] 안락이므로
함이 없는 안락을 구하기 위해선
마땅히 이 도의 마음을 준수하며

그 심오한 선정에 들어
한량없는 이치를 생각하고
피안(彼岸)으로 건너기 위해
도 닦기를 또한 그렇게 하렵니다.

큰 성인의 신통 지혜는
통달하지 않은 것이 없어
일체의 지혜를 갖추셨으니

그 소행을 말하자면
부처님의 불가사의하신
열 가지 힘,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여래의 모든 법이 그것인바

이 모두가 청정한 마음을 따라
넓고 그지없는 도를 얻으셨습니다.

억천 불국토를 움직여
두루 음성을 펴시더라도
중생들 그 음성 모두 들어 알고는
청정한 행을 닦으니
넓고도 더러움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총명한 자가
이 도의 마음 낸다면
열 가지 힘 지닌 여래께
모든 칭찬을 받게 되며

나아가서는 모든 중생 위해
그 선지식을 비롯한
총명스런 지혜 있는 이로 하여금
다 도의 마음 내게 하리니

이같이 부처님 도는
상(想) 없는 지혜를 나타내므로
무수한 억천 겁에
그 모든 공덕을 널리 설하여도
부처님의 도를 향한 마음만은
언제나 다함이 없으십니다.

그때에 복보청정대왕이 이 게송을 읊어 찬탄하자, 92해(★)의 인민 대중과 후궁과 1천 명의 왕자들은 다 더없는 바른 진리의 도를 구하려는 뜻을 내었고, 삼천대천세계는 여섯 가지로 진동하였고, 14억의 하늘들은 권하여 돕는 음성을 내어 크게 도를 구하는 마음을 내었다.
그러한 뒤 전륜성왕은 다시 공경하고 정숙하게 10억 년 동안 유위여래를 공양하되, 모든 것을 베풀어 안락하게 모셨으며 청정한 범행(梵行)과 계율을 닦고 항상 여래께서 말씀하시는 경전을 들었고 그 권속들과 함께 가서 법의 가르침을 받았다. 그리고 마침내 왕은 그 맏아들을 국왕으로 세운 뒤에 수염과 머리카락을 깎고 견고한 신심으로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사문이 되고 나서는 곧 네 가지 다함이 없는 장구(章句)를 배워 차례로 찬탄하면서 낱낱 그 이치를 구하였으니, 이른바 네 가지란 지성(至誠)의 장구ㆍ법전(法典)의 장구ㆍ묘의(妙誼)의 장구ㆍ율령(律令)의 장구가 그것이다. 구절들은 억천 세에 걸친 선권방편(善權方便)을 다 갖추었으므로 왕은 이것을 배운 뒤로부터 일천 세계에서 삼매로
중생을 제도하였고, 이들은 모두 다 유위여래의 처소에서 사문이 되었다.
사리불아, 그 때의 복보청정이라는 전륜성왕이 어찌 다른 사람이라 하겠는가? 그런 생각을 해서는 안 되니 바로 이 보녀가 그였느니라. 이 보녀는 유위부처님께 처음으로 더없는 바른 진리의 도 구하는 마음을 내었던 것이다.”
그러자 사리불은 다시 세존께 여쭈었다.
“보녀는 무슨 죄가 있어 여인의 몸을 받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아, 보살은 무슨 죄가 있어서 여인의 몸을 받는 것이 아니다. 왜냐 하면 보살은 지혜의 신통과 착한 방편을 지니어 성스럽고 현명하기 때문에 일부러 여인의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아, 너는 이 보녀를 여인으로 생각했느냐? 그러한 생각을 하지 말라. 성스러운 신통의 힘을 이어받아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바로 참다운 보살이니, 남자의 법이나 여인의 법이 없을 뿐 아니라 모든 법의 이치를 구족한다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노라.
이 보녀는 남섬부주에 있으면서 9만 2천의 어린 여자들을 깨우치고 가르쳐 다 더없는 바른 진리의 도 구하는 마음을 내게 하였느니라.”
그때 보녀가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기년(耆年)께서는 여인의 몸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위해 법을 강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사리불이 대답하였다.
“지금 나 같은 사람은 남자의 몸도 좋아하지 않거늘 하물며 또 여인의 형상을 받겠습니까?”
보녀는 물었다.
“그대는 자신의 몸을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십니까?”
“그렇습니다. 근심하고 싫어합니다.”
보녀는 대답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보살은 일체의 중생을 뛰어넘어 짝할 이가 없는 것입니다.”
“무슨 까닭입니까?”
“사리불이여, 성문들이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것을 보살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성문들이 더럽게 여기는 것이 무엇이고 싫어하는 것이 무엇인가?
다섯 쌓임[五陰]과 네 원소[四大]와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입니다. 이것을 성문은 근심하지만 보살은 근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또 여러 갈래로 돌아다니면서 몸 받는 것을 성문은 근심하지만 보살은 근심하지 않으며, 생사에 허덕임을 성문은 근심하지만 보살은 한량없는 생사에 드나들면서도 처음부터 끝까지 시종 근심하거나 싫어하지 않으며 공덕의 업을 성문은 게을리 하지만 보살은 아무리 많은 공덕을 쌓아도 그것을 만족하게 여기지 않고 근심하지도 않으며, 대중의 모임에 있기를 성문은 싫어하지만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기 위해 싫어하지 않으며, 자신의 번뇌를 성문은 싫어하지만 보살은 모든 중생들 번뇌의 욕심까지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성문은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것을 보살은 조금도 근심하지 않습니다.”

5. 팔력품(八力品)

이에 사리불이 보녀에게 물었다.
“보살 대사가 어떠한 위신력을 이어받아야 그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겠습니까?”
보녀가 대답하였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여덟 가지 힘을 갖추어야 그 더럽게 여기고 싫어하는 마음을 없앨 수 있나니, 여덟 가지란 어떤 것인가? 첫째는 인자한 힘으로 중생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가엾이 여기는 힘으로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요, 셋째는 온화한 성품의 힘을 지녀 천박하게 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지혜의 힘으로 번뇌를 여의는 것이요, 다섯째는 방편의 힘으로 마음에 싫어함이 없는 것이요, 여섯째는 공덕의 힘으로 수행에 아무런 집착이 없는 것이요, 일곱째는 성스러운 힘으로 어리석지
않은 것이요, 여덟째는 정진의 힘으로 본래의 서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여덟 가지 힘이며, 보살은 이러한 도덕의 힘을 두루 확립하기 때문에 근심하거나 싫어함이 없는 것입니다.”
기년 사리불이 다시 보녀에게 물었다.
“그대는 이러한 힘을 모두 갖추셨습니까? 만약 갖추었다면 평등하게 오가거나 자유롭게 다닐 수 있겠습니까?”
보녀가 대답하였다.
“만약 평등으로서 평등에 머문다면 설령 이러한 힘을 구족하여 그 평등을 행하더라도 그 평등이야말로 어떤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 해서 낮고 천한 것도 아니니, 그 평등은 무엇이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조작하는 것이 없지도 않고 어떤 행위를 조작하지도 않으므로 그것을 바로 평등이라 합니다. 평등은 허공과 같으니 일체의 법 또한 허공과 같은 것입니다. 허공과 같다는 것은 허공이란 그 자체가 없고 다만 텅 빈 것일 뿐이니 텅 비었기 때문에 고요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한 허허벌판과 같아서 표현할 말이 없음이니, 일체의 법도 그와 같습니다. 허공과 같아서 황홀하기만 하고 어떤 형체나 언사(言辭)가 없는지라 이러한 평등이라면 위태롭지도 않고 어떤 세력이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무엇인가 위태로운 것이 있을 때에 세력을 갖게 됩니다. 왜냐 하면 설령 애욕의 번뇌로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지혜로써 세력을 삼고, 탐욕과 인색함으로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보시를 하여 건강하게 하고, 계율을 범하여 위태로워지면 금계로써 건강하게 하고, 성냄과 미워함을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인욕으로 세력을 삼고, 게으름을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정진으로 세력을 삼고, 어지러운 생각을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선정으로 세력을 삼고, 삿된 지혜로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바른 지혜로써 세력을 삼고, 그 밖의 모든 법에 있어서 보살이 착하지 못한 덕을 말미암아 위태로워지면 착한 덕의 근본으로 세력을 삼는
것입니다.”
이때 세존께서 보녀를 칭찬하셨다.
“훌륭하고 훌륭하다. 누구라도 말을 하려면 보녀처럼 이렇게 말해야 하리라.”
이렇게 말씀하실 때에 5백 명의 보살들이 법의 지혜를 얻었다.

6. 십종력품(十種力品)

보녀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의 열 가지 힘이라고 하였는데, 어떠한 힘을 성취하여야만 열 가지 힘이 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보녀에게 대답하셨다.
“가령 보살이 보살도를 행하면서 영원히 낮고 처한 승(乘)에 뜻을 두지 않고 끝까지 불선업을 짓지 않아야만 그 견고한 힘으로써 도량에 나아가게 되느니라.”
보녀가 다시 여쭈었다.
“그 열 가지 힘이란 어떠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보녀야, 이치에 맞거나 맞지 않음을 환히 알고 한계 있거나 한계 없음을 환히 아는 지혜의 힘으로 사실 그대로의 진리를 알아 행하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여래의 첫 번째의 힘이다. 여래는 이 힘으로 대중의 모임에서 사자후(師子吼)를 하여 집착 없는 법요를 해설하고 청정한 법 바퀴를 굴리니, 사문ㆍ범지나 천ㆍ용ㆍ마왕ㆍ범천ㆍ세간의 사람 중에는 아무도 그 거룩한 덕을 당할 수 없나니, 이 모두는 항상 법대로 행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죄와 복의 과보를 남기려고 한다면 이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니, 보살은 여래가 준수한 그 힘을 입고서 불도를 이루며,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죄와 복의 원인을 다 알게 된다. 여래는 과거ㆍ미래ㆍ현재 죄복의 과보를 알고 선악의 갈래를 사실대로 아나니 이것이 바로 여래의 두 번째 힘이요, 여래가 이 힘으로 대중의 모임에서
사자후를 하며 집착 없는 도리를 해설하고 청정한 법 바퀴를 굴리니, 사문ㆍ범지나 천ㆍ용ㆍ마왕ㆍ범천ㆍ세간 사람 중에는 아무도 그 거룩한 덕을 당할 수 없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중생들의 근기를 관찰하여 설법하고 그 근원을 알고 나서 그들을 해탈케 한다. 또 뭇 사람의 근기에 따라가는 법을 모두 갖추어 이로써 불도를 얻으니, 중생을 위해 정진의 근(根)으로 중생들을 깨달아 사실대로 진리를 안다. 여래가 현재 중생들의 근본을 알고서 사자후를 외치는 것이 곧 여래의 세 번째 힘이며, 이 모두가 법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 모든 중생계에 들어가 그 인물의 좋아함과 그 중생의 근기를 따라 법을 건립(建立)하며, 중생계에 들어가 구경(究竟)의 힘으로 불도를 얻음으로써 세간의 그 무수한 형태와 갖가지 종류를 알게 되나니, 여래가 중생계에 들어가 그 중생 각자의 믿음과 환희심에 따라 교화하고 제도하는 것이 곧 여래의 네 번째 힘이니, 이 모두가 법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해탈하기를 원하는 어떤 중생이 있다면 그의 신념을 인하여 그들을 구제해 주고, 지혜를 구하는 이가 있으면 보살은 그 신심 내는 중생을 보고 싫어하거나 더럽게 여기지 않음은 물론 끝까지 해탈시키려는 그 굳건한 마음으로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중생들의 갖가지 신심과 한량없는 즐거움을 사실 그대로 알게 된다. 보녀야, 여래가 이 선인(仙人)과 중생의 갖가지 신심이나 한량없는 즐거움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곧 여래의 다섯 번째 힘인 것이니, 여래는 이 힘으로 대중 속에서 사자후를 외치며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마왕ㆍ범천(梵天) 중에 아무도 그 거룩한 덕을 당할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발휘하는 지혜를 나타내어 그 함이 있고 없음과 형상이 있고 형상이 없는 모든 법에 있어서 성문의 승, 연각의 승을 구하거나 또는 대승을 구하거나 간에 보살은 이 지혜의 힘을 갖추어 불도를 얻음으로써 모든 구경(究竟)의 지혜에 들어가 사실 그대로를 안다. 보녀야, 여래는 뭇 지혜에 널리 들어가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이 사실 그대로의 진리를 알기 때문에 대중 가운데 홀로 뛰어나 사자후를 외치며, 모든 것을 항상 법대로 응하므로 천상ㆍ세간에 아무도 당할 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곧 여래의 여섯 번째 힘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언제나 옛날에 심은 공덕의 근본을 잊지 않고 본래의 초월한 서원을 실천함에 게으르지 않으니, 이 옛날 공덕의 근본을 잊지 않는 그 힘을 모두 갖추어 마침내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과거 무수한 겁의 일을 마음에 기억하여 사실 그대로를 알게 된다. 여래는 자기는 물론이요, 다른 중생의 헤아릴 수 없는 그 옛날의 일까지 사실대로 모두 알아서 대중에게 사자후를 외치니, 그것이 곧 여래의 일곱 번째 힘이요,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마왕ㆍ범천 중에 아무도 당할 이가 없나니, 이 모두가 항상 법대로 응하기 때문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선정을 닦아 그 마음에 아무것도 자라남이 없고 욕심의 번뇌를 떠나 조화되고 부드럽고 어질며, 이 조화되고 부드럽고 어진 힘을 구족하여 마침내 불도를 성취한다. 그리하여 일체의 선정과 해탈문의 바른 행으로 중생들의 그 번뇌와 의심을 사실대로 알게 된다. 보녀야, 여래가 일체의 선정과 해탈문으로
중생계를 깨달아 그들의 번뇌와 의심을 사실 그대로 아는 것이 곧 여래의 여덟 번째 힘인 것이며, 이 힘으로 대중들에게 사자후를 외치므로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마왕ㆍ범천 중에 아무도 여래의 거룩한 덕을 당할 수가 없는 것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언제나 중생들의 공로를 덮거나 숨기지 않고 배우지 못한 이와 배워서 아직 성취하지 못한 이를 업신여기지 않으며, 광명을 나타내어 중생들을 비춘다. 그는 보살이 그 넓고도 큰 광명의 힘을 구족하여 불도를 이룩함으로써 하늘 눈[天眼]으로 사실 그대로를 투철히 보게 되나니, 여래ㆍ지진이 투철한 도의 눈[道眼]으로 보지 못하는 것이 없는 그것이 곧 여래의 아홉 번째 힘이며, 이 힘으로 홀로 대중에 노닐면서 사자후를 외치므로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마왕ㆍ범천 가운데 그 거룩한 덕을 당할 이가 없는 것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번뇌 있는 법으로 인도하지 않고, 번뇌 없는 법을 널리 설하여 그 모든 번뇌를 자라나지 않게 하며, 또 번뇌 없는 도로써 중생들에게 바른 길을 나타내 보인다. 그는 이 번뇌 없는 법의 힘을 구족하여 마침내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일체의 번뇌 없는 지혜를 널리 통달하여 사실 그대로를 알게 된다. 보녀야, 여래가 모든 번뇌 없는 지혜로써 일체의 번뇌 없는 법을 열어 보이는 그것이 곧 여래의 열 번째 힘이다. 여래가 이 진실한 힘으로 대중의 모임에 사자후를 외치어 집착 없는 도리를 널리 설하고 청정한 법 바퀴를 굴리므로 사문ㆍ범지와 청룡ㆍ마왕ㆍ범천ㆍ세간 사람 중에 아무도 당할 이가 없다.
이 모두가 여래의 열 가지 힘이며, 여래는 이 열 가지 힘을 모두
성취하였으므로 바른 깨달음을 얻은 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만일 보살이 이 힘에 대해 듣고 먼저 보살의 열 가지 힘을 구족한다면 마침내 여래의 열 가지 힘을 성취하리라.”

7. 사무소외품(四無所畏品)

보녀가 다시 부처님께 여쭈었다.
“여래 지존(至尊)의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이란 어떤 것이며, 또 보살로서 어떠한 행을 닦아야만 그 네 가지 두려움 없음과 열여덟 가지 공통되지 않은 부처님의 법을 이룩할 수 있습니까?”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도를 행하면 언제나 법에 있어서 스승의 명령을 어기지 않고 이러한 상(像)을 깨달은 뒤에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중생을 가엾이 여겨서 모든 것을 아낌없이 보시하며, 또 평등하게 법을 받들어 그 귀취(歸趣)를 관찰하되 조금의 생각[想]도 없는 동시에 뭇 집착을 여임으로써 마침내 불도를 이룩하여 사자후를 하게 되니, 나도 이것을 성취하여 평등한 깨달음을 얻은 것이다.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나는 이 법을 분명히 알았기 때문에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으며,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귀신ㆍ마왕ㆍ범천ㆍ세간 사람으로서는 여래의 상서로운 감응인 넓고 큰 그 위덕(威德)의 광명을 볼 수 없고, 부처님의 단점을 찾아내려 해도 도무지 그 단점을 볼 수 없겠거늘, 어찌 감히 ‘부처님께서는 평등한 바른 깨달음을 성취하지 못하셨다’고 속으로 생각인들 내겠느냐? 또 설령 그런 말을 할지라도 부처님께서는 두려워하는 마음이나 행동이 없음은 물론 홀로 대중에 뛰어나 사자후를 외치어 집착 없는 도리를 널리 설하고 청정한 법 바퀴를 굴리리니, 그러므로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귀신ㆍ마왕ㆍ범천ㆍ세간 사람으로서는 여래의 거룩한 덕을 당할 이가 없는 것이다. 이것이 여래의 첫 번째 두려움 없음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 안의 행[內行]을 알고
안팎의 법을 분별하며, 또 거리끼는 법을 분명히 알아서 그 무너지고 물러서는 법을 익히지 않는 동시에 순종하지도 않고 스스로 행하지 않음은 물론 이 법으로 다른 사람을 교화하거나 널리 퍼뜨리지도 않는다. 모든 거리끼는 법은 다 버려서 이로써 불도를 성취하여 사자후를 외친다. 그리고 저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귀신ㆍ마왕ㆍ범천과 세간 사람들로부터 그 누구도 여래가 거리끼는 법을 강설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 법을 행하게 한다고 의심하며 왈가왈부하는 일을 당하지 않을 것이요, 비록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을 겁내지 않고 두려움 없는 행으로 널리 법 바퀴를 굴려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를 외치니, 이것이 여래의 두 번째 두려움 없음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항상 맑고 선한 법을 받들어 다투지 않고 경전을 강설하여 모든 중생을 정화하며, 현재 바로 일반적인 것을 초월한 덕에 나아가며 그 무수한 함이 없는[無爲] 업을 담당하면 널리 중생계에 들어가 번뇌와 원한을 깨끗이 제거하고 스스로가 함이 없는 그 많은 업을 쌓아간다. 여래도 이와 같이 중생을 권화(勸化)하여 불도를 성취함으로써 사자후를 외치기를, ‘나는 모든 원한 맺힌 일을 깨끗이 제거하였다’고 하며 법을 강설하고, 이 행을 잘 닦아 장엄 청정함을 다 이룩하느니라. 그리하여 저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귀신ㆍ마왕ㆍ범천과 세간 사람들 중에 아무도 ‘여래는 원한이 맺힌 법을 강설한다’고 의심하며 왈가왈부하는 일을 결코 당하지 않으며, 비록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을 겁내지 않고 두려움 없는 행으로 큰 법 바퀴를 굴리어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를 외치니, 이것이 여래의 세 번째 두려움 없음이다.
다시 보녀야, 보살도를 행하면서 ‘나에게 지혜와 바른 견해가 있고, 다른 사람은 아는 것도 없고
바른 견해도 없다’고 하며 너무나 지나친 교만을 한번도 일으킨 적이 없으며 동시에 항상 겸손한 뜻으로 스스로 훌륭한 체하지 않는다. 뭇 일을 올바르게 깨달아 나쁜 행에 집착하지 않고 이 법을 잘 닦아 모두 갖추어 이로써 불도를 성취하여 사자후를 외치나니, 즉 ‘그대들은 알아야 한다. 나는 이 모든 번뇌를 다 없애고 생사의 환란을 깨끗이 제거하였고, 다시 중생을 위해 널리 경전을 설하여 그들의 온갖 번뇌를 제거시킨다’라고 하느니라. 그리하여 저 사문ㆍ범지와 천ㆍ용ㆍ귀신ㆍ마왕ㆍ범천과 세간 사람들 중에 아무도 ‘여래가 강설하는 법은 모든 번뇌를 아직 다 제거하지 못하였도다’고 의심하여 왈가왈부하는 일을 당하지 않으며, 비록 그렇게 말하는 자가 있더라도 그것을 겁내지 않고 두려움 없는 행으로 큰 법 바퀴를 굴려 대중 가운데에서 사자후를 외치니, 이것이 여래의 네 번째 두려움 없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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