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변중변론(辯中邊論) 중권
변중변론(辯中邊論) 중권
세친보살 지음
현장 한역
한길로 번역
3. 변진실품(辯眞實品)
이미 그 장애[障]를 말하였는지라, 진실함[眞實]을 설명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진실함[眞實]은 열 가지가 있을 뿐이니
근본(根本)과 모양[相]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과 인과(因果)와
굵고 가늘음[麤細]의 진실함이며
지극하게 이뤄짐[極成]과
깨끗하게 행하는 바[淨所行]과
받아들임[攝受]과 차별(差別)과
열 가지 교묘함[十善巧]의 진실함이니
다 ≺나≻라는 소견[我見]을 제거하기 위함이다
≪논≫ 진실함은 열 가지만이 있는 줄 알아야 하리니, 첫째는 근본의 진실함[根本眞實]이요, 둘째는 모양의 진실함[相眞實]이요, 셋째는 뒤바뀜이 없음의 진실함[無顚倒眞實]이요, 넷째는 인과의 진실함[因果眞實]이요, 다섯째는 굵고 가늘음의 진실함[麤細眞實]이요, 여섯째는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함[極成眞實]이요, 일곱째는 깨끗하게 행하는 바의 진실함[淨所行眞實]이요, 여덟째는 받아들임의 진실함[攝受眞實]이요, 아홉째는 차별의 진실함[差別眞實]이요, 열째는 잘하고 교묘함의 진실함[善巧眞實]이다. 이 또 열 가지는 ≺나≻라는 소견을 제거시키려 하기 위한 것이다.
‘열 가지 교묘함’이라고 함은, 첫째는 쌓임의 교묘함[蘊善巧]이요, 둘째는 경계의 교묘함[界善巧]이요, 셋째는 처의 교묘함[處善巧]이요, 넷째는 연기의 교묘함[緣起善巧]이요, 다섯째는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의 교묘함[處非處善巧]이요, 여섯째는 뿌리의 교묘함[根善巧]이요, 일곱째는 세상의 교묘함[世善巧]이요, 여덟째는 진리의 교묘함[諦善巧]이요, 아홉째는 승의 교묘함[乘善巧]이요, 열째는 함이 있고 함이 없는 법의 교묘함[有爲無爲法善巧]이다.
이 안의 어떤 것이 근본의 진실함이냐 하면, 세 가지 제성품[三自性]이니, 첫째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의 자성(自性)이요, 둘째는 의타기(依他起)의 자성이요, 셋째는 원성실(圓成實)의 자성이다. 이것에 의하여 나머지의 진실함을 세우기 때문이다.
여기서 설명하는 세 가지 제 성품 중에서 어느 이치를 진실함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세 가지의 제 성품에 있어서
하나만은 언제나 있음이 아님[非有]이고
하나는 있음[有]이면서 진실함이 아니며
하나는 있음[有]ㆍ없음[無]이면서 진실함이다
≪논≫ 곧 이와 같은 세 가지 제 성품 중에서 변계소집성의 모양은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닐 뿐이면서도 이 성품 중에서는 진실함이라고 인정되나니, 뒤바뀜이 없기 때문이다. 서로 의지성의 모양은 있는 것이면서 진실함은 아니며, 있을 뿐이요 진실함이 아니면서도 서로 의지성에서는 진실함이라고 인정되나니, 어지러운 성품[亂性]이 있기 때문이다. 원성실성의 모양에서도 역시 있으면서 있는 것이 아니며, 있고 있는 것이 아닐 뿐이면서 이 성품 중에서는 진실함이라고 인정되나니, ≺공≻한 성품[空性]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이 모양의 진실함[相眞實]이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법(法)과 보특가라[數取趣]와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하는 것[能取]과
있음과 있음이 아님의 성품 중에는
더 늘음[增益]과 줄어짐[損減]의 소견이 있다
이를 알기 때문에 바꾸지 아니하면
이것을 진실한 모양[眞實相]이라고 한다
≪논≫ 온갖 법[一切法]과 보특가라[補特伽羅]에게는 모든 더 놀음과 줄어짐의 소견이 있는데, 만약 이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곧 바꾸지 아니하면, 이것이 변계소집의 제 성품의 진실한 모양이다. 모든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법 안에는 모든 더 늘음과 줄어짐의 소견이 있는데, 만약 이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곧 바꾸지 아니하면 이것이 서로 의지성의 제 성품의 진실한 모양이라고 한다.
있음과 있음이 아닌 것에는 모든 더 늘음과 줄어짐의 소견이 있는데, 만약 이를 알기 때문에 그것을 곧 바꾸지 아니하면, 이것이 원성실성의 제 성품의 진실한 모양이라고 한다. 이것은 근본의 진실한 모양 안에서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모양의 진실함이라고 한다. 뒤바뀜이 없음의 진실함[無顚倒眞實]이라고 함은 무상함[無常]과 괴로움[苦]과 ≺공≻함[空]과 ≺나≻ 없음[無我]의 성품을 말하나니,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 항상함[常] 따위의 네 가지 뒤바뀜을 다스리게 된다.
어떻게 이 무상함 따위는 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우는 줄 알아야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성품 없음[無性]과 나고 없어짐[生滅]과
때 끼고 깨끗함[垢淨]이 셋의 무상함이다
취할 바[所取]와 일 모양[事相]과
어울려 합함[和合]이 괴로움의 세 가지[苦三種]며
≺공≻함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나니
없음[無]과 다름[異]과 제[自]의 성품이다
모양이 없음[無相]과 모양이 다름[異相]과
제 모양[自相]이 셋의 ≺나≻ 없음이며
다음과 같이 네 번의 세 가지는
근본의 진실함에 의지함인 것이다
≪논≫ 무상함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성품 없음의 무상함[無性無常]이니, 변계소집(遍計所執)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항상 함[常]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나고 없어짐의 무상함[生證無常]이니, 의타기(依他起)를을 말하는 것이어서 일어나서 다함[起盡]이 있기 때문이요, 셋째는 때 끼고 깨끗함의 무상함[垢淨無常]이니, 원성실(圓成實)을 말하는 것이어서 위치가 바뀌고 변하여지기 때문이다.
괴로움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취할 바의 괴로움[所取苦]이니, 변계소집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보특가라와 법에 대한 고집의 취할 바이기 때문이요, 둘째는 일 모양의 괴로움[事相苦]이니, 의타기를 말하는 것이어서 세 가지 괴로움의 모양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어울려 합함의 괴로움[和合苦]이니, 원성실을 말하는 것이어서 괴로운 모양의 모임이기 때문이다.
≺공≻함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첫째는 성품이 없음의 ≺공≻함[無性空]이니, 변계소집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이 있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치가 없는지라, 이 있는 것이 아님으로 말미암아 ≺공≻이라고 말하게 되기 때문이요, 둘째는 다른 성품이 다름의 ≺공≻함[異性空]이니, 의타기를 말하는 것이어서 허망하게 집착한 바와 같이 이렇게 있는 것은 아니로되, 온갖 종류의 성품은 완전히 없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요, 셋째는 제 성품의 ≺공≻함[自性空]이니, 원성실을 말하는 것이어서 두 가지 ≺공≻의 나타나는 바를 제 성품으로 삼기 때문이다.
≺나≻ 없음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모양이 없음의 ≺나≻ 없음[無相無我]이니, 변계소집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 모양은 본래가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다고 하는데 곧 이 모양이 없음을 말하여 ≺나≻없음이라고 함이다. 둘째는 모양이 다름의 ≺나≻ 없음[異相無我]이니, 의타기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모양이 비록 있다 손치더라도 그것이 제 나름대로 분별한 것과는 같지 않기 때문에 모양이 다르다고 하는데 곧 이 모양이 다름을 말하여 ≺나≻없음이라고 함이다. 셋째는 제 모양의 ≺나≻ 없음[自相無我]이니, 원성실을 말하는 것이어서 ≺나≻ 없음의 나타는 바로써 제 모양을 삼는데 곧 이 제 모양을 말하여 ≺나≻ 없음이라고 한다.
이와 같아서 설명한바 무상함ㆍ괴로움ㆍ≺공≻함ㆍ≺나≻ 없음의 네 가지를 그 차례와 같이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각각 나누어서 세 가지로 삼았으니, 네 번의 세 가지씩은
앞의 것과 같은 줄 알아야 한다.
인과의 진실함[因果眞實]이라고 함은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를 말하나니, 어찌하여 이것이 근본의 진실함에 의지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괴로움의 세 모양[苦三相]은 이미 설명하였고
쌓임[集]에도 또한 세 가지가 있나니
습기(習氣)와 등기(等起)와
모양의 매임을 여의지 못함[未離繫]이다
제 성품[自性]과 두 가지의 나지 않음[不生]과
때와 고요함[垢寂]의 둘은 셋의 사라짐[滅]이며
두루 앎[遍知]과 영원히 끊음[永斷]과
증득함[證得]은 세 가지 도의 진리[道諦]이다
≪논≫ 괴로움의 진리[苦諦]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무상함 따위 넷이 저마다 세 가지 모양[三相]이다. 앞에서 이미 설명한 것과 같다.
쌓임의 진리[集諦]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습기의 쌓임[習氣集]이니, 변계소집의 제 성품 집착[自性集]의 습기요, 둘째는 등기의 쌓임[等起執]이니, 업의 번뇌[業煩惱]요, 셋째는 아직 매임을 여의지 못함의 쌓임[未離繫集]이니, 아직 장애는 여의지 못한 진여(眞如)이다.
사라짐의 진리[集諦]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제성품의 사라짐[自性滅]이니, 제 성품이 나지 않기 때문이요, 둘째는 두 가지 취함의 사라짐[已取滅]이니,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의 두 가지가 나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본래 성품의 사라짐[本性減]이니, 때와 고요함의 둘이어서 곧 택멸(擇滅)과 진여이다.
도의 진리[道諦]의 세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두루 앎의 도[遍知道]요, 둘째는 영원히 끊음의 도[永斷道]요, 셋째는 증득함의 도[證得道]이다. 이 안에서 변계소집성에는 두루 앎이 있을 뿐이다. 의타기성에는 두루 앎과 영원히 끊음이 있으며, 원성실성에는 두루 앎과 증득함이 있는 줄 알지니, 그 때문에 이 세 가지에 의하여 도의 진리를 세운다.
굵고 가늘음의 진실함[麤細眞實]이라고 함은 세속의 진리[世俗諦]와 으뜸가는 진리[勝義諦]이다. 어찌하여 이것이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알아야 하리니 세속의 진리는
차별하자면 세 가지가 있어서
거짓[假]과 행함[行]과 나타나 앎[顯了]이니
차례대로 세 가지의 근본에 의한다
으뜸가는 진리에도 세 가지가 있어서
뜻[義]과 얻음[得]과 바른 행[正行]이니
근본의 하나에 의한 변함이 없음[無變]과
뒤바뀜의 없음[無倒]의 둘은 두루 진실[圓實]이다
≪논≫ 세속의 진리에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첫째는 거짓의 세속[假世俗]이요, 둘째는 행함의 세속[行世俗]이요, 셋째는 나타나 앎의 세속[顯了世俗]이다. 이 세 가지의 세속은 그 차례대로
세 가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진다.
으뜸가는 진리에도 세 가지가 있다고 함은, 첫째는 뜻의 으뜸가는 이치[義勝義]이니, 진여를 말하는 것이어서 뛰어난 지혜[勝智]의 경계를 으뜸가는 이치라고 하기 때문이다. 둘째는 얻음의 으뜸가는 이치[得勝義]이니, 열반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은 바로 뛰어난 결과[勝果]이며, 또한 이치의 이익[義益]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바른 행의 으뜸가는 이치[正行勝義]이니, 거룩한 도[聖道]를 말하는 것이어서 뛰어난 법으로써 이치를 삼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의 으뜸가는 이치는 다만 세 가지 근본[三根本] 중의 원성실에 의하여서만이 세우는 줄 알아야 된다.
이 원성실(圓成實)에는 통틀어서 두 가지가 있나니, 무위(無爲)와 유위(有爲)를 말하는 것이어서 차별을 있기 때문이다. 유위는 통틀어서 진여와 열반에 해당되나니 변하여 달라짐이 없기 때문에 원성실이라고 한다. 유위는 통틀어서 온갖 거룩한 도에 해당되나니, 경계에 대하여 뒤바뀜이 없기 때문에 역시 원성실이라고 한다.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함[極成眞實]에는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세간이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한[世間極成眞實]이요, 둘째는 도리가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함[道理極成眞實]이다. 어찌하여 이 두 가지가 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지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세간이 지극하게 이뤄짐은 첫째에 의하고
도리가 지극하게 이뤄짐은 셋째에 의한다
≪논≫ 어떤 일이 세간에서 함께 벌려 놓은 것으로서 자주 익히어 따라 드는[隨入] 깨달음의 슬기[覺慧]로 취하게 될 적에 온갖 세간이 똑같이, ‘이 일은 바로 땅이어서 불이 아니며, 빛깔이어서 소리가 아니다’라고 하는 따위로 집착한다면 이것을 세간이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함이라고 한다. 이것은 세 가지 근본의 진실함 중에서 변계소집성에 의해서만이 세워진 것이다. 만약 도리가 있는 이치라면 총명하고 어질고 착하며 머트럽게 생각하는 이가 세 가지 헤아림[三量]과 증득하여 이루는 도리[證成道理]에 의지하여 베풀어 설치하고 세우는 것을 바로 도리가 지극하게 이뤄짐의 진실함이라고 하나니, 이것은 근본의 셋째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진다.
깨끗함으로 행하는 바의 진실함[淨所行眞實]에도 요약하여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번뇌장에서 깨끗한 지혜[淨智]로 행할 바 진실함이요, 둘째는 소지장에서 깨끗한 지혜로 행하는 바 진실함이다. 어찌하여 이 두 가지가 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지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깨끗함으로 행하는 바에 두 가지 있나니
하나의 원성실에 의하느니라
≪논≫ 번뇌장과 소지장의 두 가지 장애에서 깨끗한 지혜로 행하는 바 진실함은 근본의 셋째 진실 중의 원성실에 의해서만이 세워지는 것이요, 다른 두 가지는 이 깨끗한 지혜의 경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하여 모양[相]과 이름[名]과 분별(分別)과 진여(眞如)와 바른 지혜[正智]가 근본의 세 가지 진실함에 소속되어 있는 줄 알아야 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이름은 변계소집성이고
모양과 분별을 의타기성이며
진여 및 바른 지혜는
원성실성의 소속이니라
≪논≫ 모양 등의 다섯 가지 일은 그 알맞은 바에 따라서 근본의 세 가지 진실함에 소속되어 있나니, 이름은 변계소집성에 소속되어 있고 모양과 분별은 의타기성에 소속되어 있으며 원성실성은 진여와 바른 지혜를 포섭하고 있다.
차별의 진실함[差別眞實]에는 요약하여 일곱 가지가 있다. 첫째는 해맴의 진실함[流轉眞實]이요, 둘째는 실제 모양의 진실함[實相眞實]이요, 셋째는 오직 의식의 진실함[唯識眞實]이요, 넷째는 안립의 진실함[安立眞實]이요, 다섯째는 삿된 행의 진실함[邪行眞實]이요, 여섯째는 맑고 깨끗함의 진실함[淸淨眞實]이요, 일곱째는 바른 행의 진실함[正行眞實]이다.
어찌하여 이 일곱 가지 진실함이 세 가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짐을 알아야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헤맴과 안립과
삿된 행은 처음과 둘째에 의하고
실제 모양과 오직 의식과 깨끗함과
바른 행은 뒤의 하나에 의한다
≪논≫ 헤맴 등의 일곱 가지는 그 알맞은 바에 따라서 근본의 세 가지 진실함에 소속되어 있나니, 저 헤맴ㆍ안립, 삿된 행은 근본 중의 변계소집성과 의타기성의 것에 의한다. 실제 모양ㆍ오직 의식ㆍ맑고 깨끗함, 바른 행은 근본 중의 원성실성에 의하여 세워진다.
교묘함의 진실함[善巧眞實]이라고 함은, 열 가지 ≺나≻라는 소견[我見]을 다스리게 하기 위하여 열 가지가 있다고 설명한다.
어찌하여 쌓임[蘊] 따위에서 열 가지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쌓임 등에 있어서 ≺나≻라는 소견은
하나[一]와 원인[因]과 받는 것[受者]과
짓는 것[作者]과 자재로이 바꿈[自在轉]과
더 위가는 이치[增上義]와 항상 함[常]이며
섞여 더러우며 맑고 깨끗함의 의지[雜染靑淨依]와
관(觀)과 묶고 푸는 것의 성품[縛解者性]에 집착한다
≪논≫ 쌓임 등의 열 가지 법에서 열 가지 ≺나≻라는 소견을 일으키나니, 첫째는 하나의 성품[一性]에 집착함이요, 둘째는 원인의 성품[因性]에 집착함이요, 셋째는 받는 것의 성품[受者性]에 집착함이요, 넷째는 짓는 것의 성품[作者性]에 집착함이요, 다섯째는 자재로이 바꿈의 성품[自在縛性]에 집착함이요, 여섯째는 더 위가는 이치의 성품[增上義性]에 집착함이요, 일곱째는 항상 함의 성품[常性]에 집착함이요, 여덟째는 더럽고 깨끗함의 의지할 바 성품[染淨所依性]에 집착함이요, 아홉째는 마음 보기하는 것의 성품[觀行者性]에 집착함이요, 열째는 묶고 푸는 것의 성품[縛解者性]에 집착함이다. 이 소견을 제거하기 위하여 열 가지의 교묘함[十善巧]을 닦는다.
어찌하여 열 가지 교묘함의 진실함이 세 가지 근본의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지느냐 하면, 쌓임 등의 열 가지는 세 가지 근본의 제 성품 중에 소속되어 있지 않음이 없기 때문이다. 어떻게 세 가지 제 성품[三自性] 중에 소속되어 있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이 집착할 바[所執]와 분별[分別]과
법의 성품[法性]의 이치가 거기에 있다
≪논≫ 이 쌓임 등의 열 가지에는 저마다 세 가지 이치가 있다. 빛깔 쌓임[色蘊] 중에 세 가지 이치가 있다 함은, 첫째는 집착할 바 이치의 빛깔[所執義色]이니, 빛깔의 변계소집성이요, 둘째는 분별하는 이치의 빛깔[分別義色]이니, 빛깔의 의타기성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 안의 분별로써 빛깔을 삼기 때문이요, 셋째는 법 성품 이치의 빛깔[法性義色]이니, 빛깔의 원성실성이다.
빛깔 쌓임 안에서 이런 세 가지 이치가 있는 것처럼, 느낌[受] 따위의 네 가지 쌓임에서도, 계(界) 따위의 아홉 가지 법에서도, 저마다 세 가지 이치가 있나니, 알맞음에 따라서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은 쌓임 등은 세 가지 이치의 다름으로 말미암아 저 세 가지 성품 중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이 없나니, 그러므로 알아라. 열 가지 교묘함의 진실함은 모두가 근본의 세 가지 진실함에 의하여 세워지는 것이다.
이와 같이 열 가지 ≺나≻라는 소견을 다스리려고 하기 위하여 쌓임 등의 교묘함을 닦는다고 함을 설명하기는 하였지마는
아직도 이 쌓임 등의 따로된 이치는 말하지 못하였다.
처음의 쌓임의 이치를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하나가 아님[非一]과 묶어 간략해 함[總略義]
나눈 대문[分段]의 이치를 쌓임이라 한다
≪논≫ 쌓임의 이치를 요약하면, 세 가지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하나가 아님의 이치[非一義]이니, 계경(契經)에, ‘모든 빛깔 따위로서 과거이거나 미래이거나 현재이거나 안이거나 바깥이거나 굵거나 가늘거나 못하거나 낫거나 멀거나 가깝거나 간에’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 둘째는 묶어 간략히 하는 이치[總略義]이니, 계경에, ‘이와 같은 온갖 것을 간략히 하여 한 무더더기로 한다’라고 하는 말씀과 같다. 셋째는 나눈 대문의 이치[分段義]이니, 계경에, ‘빛깔 쌓임 따위라고 말한다’고 하는 말씀과 같은데, 따로따로 빛깔 따위의 모양을 벌려 세우기 때문이다. 이 ‘무더기’의 뜻으로 말미암아 쌓임의 이치가 성립될 수 있고, 도 세간이 ‘무더기’의 이치를 쌓임이라고 이름함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쌓임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경계[界]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능히 취함[能取]과 취할 바[所取]와
저 취함[取]의 종자(種子)의 이치를 경계라고 한다
≪논≫ 능히 취하는 종자[能取種子]의 이치라고 함은, 눈[眼] 따위의 여섯 가지 안의 경계[六內界]이다. 취할 바 종자[所取種子]의 이치라고 함은 빛깔[色] 따위의 여섯 가지 바깥 경계[六外界]이다. 저 취함의 종자[取種子]의 이치라고 함은 눈 알음[眼識] 따위의 여섯 가지 알음의 경계[六識界]이다.
이미 경계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처소[處]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능히 받음[能受]과 알 바 대경[所了境]과의
받아쓰는 문[受用門]의 이치를 처소라 한다
≪논≫ 이 중에서 능히 받음이라고 함은 받아쓰는 문의 이치[受用門義]이니, 여섯 가지 안의 처소[六內處]이며, 만약 알 바의 대경이면서 받아쓰는 문의 이치라면 이것은 여섯 가지 바깥 처소[六外處]이다.
이미 처소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연기(緣起)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연기의 이치는 원인[因]과
결과[果]와 작용[用]에서 더하고 덜함이 없음이다
≪논≫ 원인과 결과와 작용에 있어서 만약 더 늘음[增益]이 없고 줄어짐[損減]이 없다고 하면, 이것은 연기의 이치라고 알아야 한다. 이 중에서 원인을 더 늘인다고 함은 지어감의 행(行) 등에서
평등하지 않은 원인이 있음을 집착함이다. 원인을 줄인다고 함은 저 원인이 없음을 집착함이며, 결과를 더 늘인다고 함은 ≺나≻를 있게 하는 지어감 등은 무명(無明) 등을 반연으로 하여 날 뿐이라고 집착함이다. 결과를 줄인다고 함은 무명 등에는 지어감 따위의 결과는 없다고 집착함이며, 작용을 더 늘인다고 함은 무명 따위는 지어감 따위를 내는데 있어서 따로 작용이 있다고 함을 집착함이다. 작용을 줄인다고 함은 무명 등은 지어감 따위를 내는 데 있어서 온전히 공능(功能)이 없다고 집착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은 더 늘음과 줄어짐의 집착이 없다면 그것은 연기에 있어서의 교묘함인 줄 알아야 한다.
이미 연기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處非處]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사랑스럽지 않음[非愛]과 사랑스러움[愛]과 깨끗함[淨]과
함께 남[俱生]과 훌륭한 임금[勝主]과
얻음[得]과 행함[行]에 자재하지 아니함이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의 이치이다
≪논≫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이 이치라고 함은, 요약하여 일곱 가지로 말미암아 자재하지 못함이니, 그의 모양을 알아야 한다.
첫째는 사랑스럽지 않는 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나쁜 행으로 말미암아서는 비록 애욕이 없다 손치더라도 나쁜 세상[惡趣]에 떨어짐이다. 둘째는 사랑할 만한 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아름다운 행으로 말미암아서는 비록 애욕이 없다 손치더라도 좋은 세상[善趣]에 오름이다. 셋째는 맑고 깨끗한 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다섯 가지 덮개[五蘊]를 끊지 못하고 일곱 가지 각지[七覺支]를 닦지 않는지라, 결코 괴로움의 맨 끝[苦邊際]을 지을 수 없음이다. 넷째는 함께 나는 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한 세계에 두 분의 여래와 두 분의 전륜왕(轉輪王)의 똑같은 땡 출현함이 없음이다.
다섯째는 훌륭한 임금에 대하여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여인으로서는 전륜왕이 되지 못함이다. 여섯째는 증득(證得)하는 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여인은 독각(獨覺)과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를 증득하지 못함이다. 일곱째는 나투어 행하는[現行]데에 자재하지 못한다 함은, 진리를 본 이[見諦者]는 반드시 생(生)을 해치는 따위의 일을 나투어 행하지 아니하거니와 모든 범부[異生]들은 다투어 행하게 된다. 다계경(多界經) 안에서 널리 이들을 설명하였으니, 알맞음에 따라서
도리에 계합함과 도리에 계합하지 않음을 환히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도리에 계합하고 못함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뿌리[根]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리라.
뿌리는 취함[取]과 머무름[住]과 이어짐[續]과
씀[用]과 두 가지 깨끗함[二淨]에서 더함[增上]이다
≪논≫ 스물두 가지 뿌리[二十二根]는 여섯 가지 일[六事]에서 더 위가는 이치에 의하여 세워지나니, 대경[境]을 취함에서 눈[眼] 따위의 여섯 가지 감관[六根]은 더 위가는 이치가 있으며, 목숨 뿌리[命根]는 한 기간이 계속 함에서 더 위가는 이치가 있다. 남자, 여자의 두 가지 근[二根]은 가족을 이어감에서 더 위가는 이지가 있으며, 착함과 나쁜 업의 과보를 수용(受用)함에서 즐거움 따위의 다섯 가지 뿌리[五根]의 깨끗함에서 알지 못함[未知] 따위의 뿌리는 더 위가는 이치가 있다.
이미 뿌리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세상[世]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원인[因]ㆍ결과[果]와 이미[已]ㆍ아직[未]의 수용은
바로 세상의 이치인 줄 알아라
≪논≫ 원인ㆍ결과ㆍ이미ㆍ아직은 수용(受用)은 그 알맞음에 따라서 세 세상[三世]의 이치로 구별되나니, 원인과 결과에 있어 다 같이 이미 수용하였다고 하면, 이는 과거(過去)의 이치요, 만약 원인과 결과에 있어 다 같이 아직 수용하지 못했다고 하면, 이는 현재(現在)의 이치이다.
이미 세상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진리[諦]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느낌[受]과 느낌의 양식[受資糧]과
저 원인하는 바의 모든 행[所因諸行]과
두 가지 고요히 사라짐[二寂滅]과 다스림[對治]은
이는 진리의 이치인 줄 알아라
≪논≫ 진리라고 함은 곧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인 줄 알아야 한다. 첫째는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苦聖諦]이니, 온갖 느낌과 느낌의 양식을 말하는 것이어서 계경 중에, ‘온갖 느낌은 모두가 이는 괴로움이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느낌의 양식이라고 함은 느낌에 따르는 법[順受法]이다. 둘째는 쌓임의 거룩한 진리[集聖諦]이니, 곧 저 괴로움의 원인하는 바의 모든 행이다. 셋째는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滅聖諦]이니,
앞의 두 가지의 마지막의 고요히 사라짐[究竟寂滅]이다. 넷째는 도의 거룩한 진리[道聖諦]인, 괴로움과 쌓임을 다스릴 수 있는 도(道)이다.
이미 진리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승(乘)의 이치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공덕(功德)과 허물[過失]과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로 말미암아
다른 이에 의하거나 스스로가 벗어남[出離]은
이는 승의 이치인 줄 알아야 한다
≪논≫ 승이라고 함은 곧 삼승(三乘)인 줄 알아야 한다. 이 안에서 알맞은 대로 그 이치를 나타내 보이자면, 만약 다른 이로부터 열반의 공덕과 나고 죽음의 허물을 듣고서 이의 지혜를 일으키며 이 지혜로 말미암아 벗어나게 되는 이라면 이는 성문승(聲聞乘)이다. 다른 이로부터 열반의 공덕이거나 나고 죽음의 허물을 듣지 아니하고서 스스로가 이의 지혜를 일으키며 이 지혜로 말미암아 벗어나게 되는 이라면 이는 독각승(獨覺乘)이다. 만약 거절로 분별이 없는 지혜를 일으키고 이 지혜로 말미암아 벗어나게 되는 이라면 무상승(無上乘)이라고 한다.
이미 승의 이치를 설명하였는지라, 어떤 것이 함이 있고 함이 없는 법[有爲無爲法]의 이치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함이 있고 함이 없는 이치라 함은
거짓[假]이거나 원인[因]이거나
모양[相]이거나 고요함[寂靜]이거나
또는 저 살필 바[所觀]의 이치이니라
≪논≫ 알아야 한다. 이 안의 거짓이라고 함은, 이름[名] 따위를 말하며, 원인이라고 함은, 종자가 소속하는 장식(藏識)이다. 모양이라고 함은, 그릇[器]과 몸[身]과 받아쓰는 도구[受用具]와 전식(轉識)의 소속인 뜻[意]과 취함[取]과 생각함[思惟]이다. 뜻이라고 함은, 언제나 생각하고 헤아리는 성품의 의식[識]이요, 취함이라고 함은, 다섯 가지 알음[五識]이 나타난 대경을 취하기 때문이요, 생각함이라고 함은, 곧 이는 제6뜻 알음[意識]이니, 온갖 대경을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거짓이거나 원인이거나 모양이거나 서로 응하는 법[相應法]을 통틀어서 유위라고 한다.
또는 고요함이라고 함은, 증득한바 사라짐[滅]과 능히 증득할 도(道)이니, 고요하기 때문이다. 저 살필 바의 이치라고 함은 바로 진여(眞如)인데 이것은 고요한 도[寂靜道]의 반연할 바 대경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설명한바 모든 고요함이거나 또는 살필 바의 이치를 통틀어서 무위(無爲)라고 한다.
이 안에서 쌓임[蘊] 따위의 열 가지 이치를 반연하여 일어나는 바른 알음[正知]을 쌓임 등의 교묘함[善巧]이라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진실함의 묶은 이치[總義]를 요약하면 두 가지가 있나니, 능히 나타냄[能顯]과 나타낼 바[所顯]의 진실함이다. 능히 나타냄의 진실함이라고 함은, 곧 맨 처음의 세 가지 근본이니, 나머지를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타낼 바 진실함이라고 함은, 뒤의 아홉 가지이니, 이는 처음의 근본이 나타내 보일 바이기 때문이다.
나타낼 바 아홉 가지라고 함은, 첫째는 뛰어난 체함을 떠난 데[離增上慢]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둘째는 뒤바뀜을 다스리는 데[對治顚倒]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셋째는 성문승으로 벗어나는 데[聲聞乘出離]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넷째는 무상승으로 벗어나는 데[無上乘出離]서 나타나는 진실함이니, 굵음[麤]은 성숙시키고, 가늘음[細]은 해탈시키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다른 이의 이론을 잘 굴복시키는 데[能伏他論]서 나타나는 진실함이니, 비유의 도리에 의지하여 다른 이를 항복시키기 때문이요, 여섯째는 대승을 환히 나타내는 데[顯了大乘]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일곱째는 온갖 알 바에 드는 데[入一切種所知]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여덟째는 허망하지 않는 진여를 나타내는 데[顯不虛妄眞如]서 나타나는 진실함이요, 아홉째는 ≺나≻의 집착하는 일이 온갖 비밀에 속는 데[人我執事一切秘密]서 나타나는 진실함이다.
4. 변수대치품(辯修對治品)
이미 진실함[眞實]을 말하였는지라, 이제 다음에는 모든 다스림 닦음[修諸對治]을 설명하여야겠는데, 곧 온갖 보리분법(菩提分法)을 닦는 것이다.
이 안에서는 먼저 4념주(念住)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는데 게송으로 말한다.
거칠고 무거움[麤重]과 사랑의 원인[愛因]과
≺나≻라는 일[我事]과 헷갈림 없음[無迷] 때문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四聖諦]에 들기 위하여
염주(念住)를 닦는 줄 알아야 한다
≪논≫ 거칠고 무거움은 몸으로 말미암아 환히 나타나게 되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몸은 거칠고 무거운 모든 행이 있음을 모양으로 삼기 때문이다.
모든 거칠고 무거움은 곧 행고(行苦)의 성품인지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성인은 모두가 괴로운 것임을 자세히 살피며, 모든 샘이 있는 느낌[有漏受]을 말하여 사랑의 원인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쌓임의 거룩한 진리에 든다.
마음은 바로 ≺나≻라는 집착[我執]의 의지할 바 반연의 일이기 때문에 이것을 자세히 살피어 사라짐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나≻를 끊어 없앰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로 말미암아 여의어지기 때문이다. 법을 자세히 살피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함의 법[染淨法]에 대하여 어리석고 헷갈림을 멀리 여의어 도의 거룩한 진리에 드나니, 이 때문에 네 가지 거룩한 진리의 도리에 들기 위하여 맨 처음에 4념주관(念住觀) 닦는 것을 설명한다.
이미 4념주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정단(正斷) 닦는 것을 설명하리니, 게송으로 말한다.
장애[障]와 다스림[治]의 온갖 차별을
이미 두루하게 알았다고 하면
멀리 여읨[遠離]과 닦아 쌓음[修集]을 위하여
네 가지 정단[四正斷]을 부지런히 닦는다
≪논≫ 앞에서는 4념주를 닦고 나서 온갖 장애와 다스림의 품류 차별을 두루알았는지라, 이제는 다스릴 바 장애의 법을 멀리 여의기 위하고, 능히 다스림의 도를 닦아 쌓기 위하여 4정단을 부지런히 힘써 닦고 익히나니, 설명하신대로 이미 생긴 나쁘고 착하지 않은 법[已生惡不善法]을 끊게 하기 위한다고 네 가지에 이르기까지 널리 말한다.
이미 4정단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신족(神足) 닦는 것을 설명하리니, 게송으로 말한다.
감당하는 성품[堪能性]에 의지하여 머무르고
온갖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다섯 가지 허물[五過失]을 없애버려서
여덟 가지 끊는 행[八斷行]을 부지런히 닦는다
≪논≫ 앞에서 닦은 바 여읨[離]과 쌓음[集]의 정진에 의하여 마음은 곧 편안히 머물러서 감당할 수 있는지라, 훌륭한 일을 이룩하기 위하여 네 가지 신족[四神足]을 닦는다. 이것이 모든 하고자 하는 바 훌륭한 일의 원인[所欲勝事因]이기 때문이다. 머무름[住]이라고 함은 마음의 머무름이니, 이것은 바로 사마아디[等持]이다.
그 때문에 4정단에 이어서 4신족을 설명하는 것이며 이 감당하는 성품은 다섯 가지 허물을 끊어 없애서 여덟 가지 끊는 행을 닦을 수 있다.
무엇을 다섯 가지 허물[五種過失]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게으름[懈怠]과 성인 말씀[聖言]을 잊음과
흐리멍덩[惛沈]하고 들뜸[掉擧]과
행을 짓지 않음[不作行]과 행을 지음[作行]이
바로 다섯 가지의 허물인 줄 알아라
≪논≫ 이 중에서는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합쳐서 하나의 허물로 하였는줄 알아야 된다.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끊어 없애기 위하여 더한 행[加行]을 짓거나 이미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끊어 없애고서 다시 더한 행을 하는 것도 다 모두가 허물이 되나니, 이 다섯 가지를 없애기 위하여 여덟 가지 끊는 행을 닦는 것이다.
어떻게 저 행상(行相)을 벌려 세우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게으름을 끊어서 없애기 위하여
하고자 함[欲]ㆍ부지런함[勸]ㆍ믿음[信]ㆍ편안함[安]을 닦음이니
곧 의지할 바[所依]와 능히 의지함[能依]과
원인한 바[所因]와 능한 결과[能果]이며
그 밖의 네 허물을 제거하기 위하여
기억[念]ㆍ지혜[智]ㆍ생각[思]과 버림[捨]을 닦음이니
말씀 기억함과 흐리멍덩하고 들뜸을 깨달음과
조복의 행[伏行]과 없애서 평등하게 흐름[滅燈流]이다
≪논≫ 게으름을 없애기 위하여 네 가지 끊는 행[四斷行]을 닦음이니, 첫째는 하고자 함이요, 둘째는 바르게 부지런함[正勤]이요, 셋째는 믿음이요, 넷째는 가쁜함[輕安]이다.
다음과 같이 의지할 바 따위를 알아야 하리니, 의지할 바라고 함은, 하고자 함이어서 부지런히 함의 의지할 바이기 때문이요, 능히 의지함이라고 함은, 부지런함이어서 하고자 함에 의하여 일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원인한 바라고 함은, 믿음이 바로 의지할 바이어서 하고자 함이 생기는 가까운 원인이며 만약 그것을 믿어 받는다면, 곧 바라게 되기 때문이다. 능한 결과라고 함은, 편안함이 바로 능히 의지함이고 부지런함이 가까이 나는 바 결과인지랄, 부지런히 정진한 이는 훌륭한 선정을 얻게 되기 때문이다.
뒤의 네 가지 허물을 다스리기 위하여 수대로 나머지 네 가지 끊는 행을 닦나니, 첫째는 기억이요, 둘째는 바르게 앎[正知]이요, 셋째는 생각이요, 넷째는 평등이다.
다음과 같이 곧 말씀을 기억하는 따위를 알아야 하리니, 말씀을 기억한다고 함은 기억[念]을 말하는 것이어서 대경을 잊지 아니하고 성인의 말씀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흐리멍덩하고 들뜸을 깨닫는다 함은, 곧 바르게 앎을 말하는 것이어서 말씀을 기억함으로 말미암아 흐리멍덩함과 들뜸의 두 가지 허물을 따라 깨닫기 때문이다. 조보의 행이라고 함은, 생각[思]이어서 따르며 흐리멍덩함과 들뜸의 허물을 깨달음으로 말미암아 그 뒤에는 조복하여 제거시키기 위하여 더한 행[加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없애서 평등하게 흐름이라고 함은, 저 흐리멍덩함과 들뜸을 이미 끊어 없앤 뒤에는
마음은 곧 버림[捨]에 머물러서 평등하여지면서 흐르게 되기 때문이다.
이미 4신족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5근(根)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닦을 바 5근을 어떻게 벌려 세우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이미 순해탈(順解脫)을 심었지마는
다시 다섯 가지 더함[五增上]을 닦나니
하고자 함[欲]과 행함[行]과 잊지 않음[不忘]과
산란하지 않음[不散亂]과 생각하여 가림[思擇]이다
≪논≫ 4신족으로 말미암아 마음에 감당하여 냄이 있어서 순해탈분(順解脫分)의 착한 뿌리가 원만해진 뒤에는 다시 다섯 가지의 더함을 닦아야 한다. 첫째는 하고자 함의 더함[欲增上]이요, 둘째는 가행의 더함[加行增上]이요, 셋째는 경계를 잊지 않음의 더함(不散亂增上]이요, 넷째는 산란하지 않음의 더함[不散亂增上]이요, 다섯째는 생각하여 가림의 더함[思擇增上]이니, 이 다섯 가지는 차례대로 곧 믿음[信] 등의 5근이다.
이미 5근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5력(力) 닦는 것을 설명하여야겠다. 무엇이 5력이며, 차례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곧 장애 없애는 것을 힘[力]이라고 하나니
원인과 결과로 차례를 세운다.
≪논≫ 앞에서 설명한바 믿음 등의 5근이 훌륭한 세력의 작용이 있음을 다시 말하여 힘이라고 하나니, 믿지 않음[不信]의 장애 따위를 조복하여 없애고, 또한 그것에게 위압과 뒤섞임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 다섯 가지 차례는 인과에 의하여 세워지는데, 앞의 원인에 의하여 뒤에 결과를 이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만약 틀림없이 인과가 있음을 믿는다면 부지런히 힘써 나아가게 되며, 부지런히 힘써 나아가고 나면 곧 바른 기억[正念]에 머무른다. 바른 기억에 머무르고 나면 마음이 곧 선정을 얻으며, 마음이 선정을 얻고 나면, 사실대로 알 수가 있다. 이미 사실대로 알았다면 이룩하지 못하는 일이 없나니, 그 때문에 이 차례는 인과에 의하여 세워지게 된다.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순해탈분이 이미 원만해진 뒤에 다시 5근을 닦는 것이라면, 어느 자리가 순결택분(順決擇分)에서 닦고 익히는 5근의 자리[位]이고 5력의 자리가 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순결택분의 두 가지와 가지는
5근에 있고 5력에 있다
≪논≫ 순결택분 중의 난(煖)과 정(頂)의 두 가지는 5근의 자리에 있고, 인(忍)과 세제일법(世第一法)은 5력의 자리에 있다.
이미 5력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각자(覺支: 七等覺支) 닦는 것을 말하여야겠다. 닦을 바 각지를 어떻게 벌려 세우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각지를 요약하면 다섯 가지 있나니
의지할 바[所依]와 제 성품[自性]과
벗어남[出離]과 아울러 이익(利益)이며
그리고 세 가지의 물듦 없는 갈래[三無染支]이다
≪논≫ 이 갈래는 깨달음을 돕기 때문에 각지라고 하나니, 이로 말미암아 각지 자리는 견도위(見道位)에 있다. 널리는 일곱 가지가 있고 간략히는 다섯 갈래가 있다. 첫째는 깨달음의 제 성품 갈래이어서 법을 고름[擇法]이요, 셋째는 깨달음의 벗어남 갈래이어서 힘써 나아감[精進]이요, 넷째는 깨달음의 이익 갈래이어서 기쁨[喜]이요, 다섯째는 깨달음의 물듦 없는 갈래이어서 여기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편안함[安]과 선정[定]과 버림[捨]이다.
무엇 때문에 다시 물듦이 없음이 세 가지라고 말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인연과 의지할 바와
제 성품으로 말미암아 뜻이 차별되나니
그러므로 가뿐함[輕安]과 선정과 버림을
말하여 물듦 없는 갈래라고 한다
≪논≫ 가쁜함은 바로 물듦 없음의 인연이니, 거칠고 무거움[麤重]이 원인이 되어서 모든 섞여 더러움[雜染]이 생기는지라, 가뿐한 이것이야말로 그것의 가까운 다스림[近對治]이기 때문이다. 의지할 바는 선정이요, 제성품은 곧 버림이니, 그 때문에 이 물듦이 없는 뜻에는 따로 세 가지가 있다.
깨달음의 갈래 닦는 것을 설명하였으니, 도의 갈래[道支] 닦는 것을 말하여야겠다. 닦을 바 도의 갈래는 어떻게 벌려 세우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분별(分別)과 가르쳐 보임[誨示]과
다른 이를 믿게 함에 세 가지 있음과
장애 다스림[對治障]에도 세 가지가 있으므로
도의 갈래는 여덟 가지가 된다
≪논≫ 수도위(修道位)에서 도의 갈래를 세우기 때문에 이것은 도의 갈래이다. 널리는 여덟 가지이지마는 간략하게는 네 가지이다.
첫째는 분별의 갈래이니, 바른 소견[正見]을 말하는 것이어서 이것이 비록 이는 세간의 것이라 하더라도
세간을 벗어난 뒤에야 얻게 되는지라, 전도위 중에서 스스로가 증득한 바를 분별하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는 다른 이를 가르쳐 보이는 갈래이다. 바른 생각[正思惟]과 바른 말[正語]의 일부분이 같이 일어남[等起]을 말하는 것이어서 말을 하여 다른 이를 가르쳐 보이기 때문이다. 셋째는 다른 이로 하여금 믿게 하는 갈래이니, 거기에는 세 가지가 있어서 바른 말과 바른 행위[正業]와 바른 생활[正命]이다. 넷째는 장애를 다스리는 갈래에도 세 가지가 있나니, 바른 노력[正精進]과 바른 기억[正念]과 바른 선정[正定]이다.
이로 말미암아 도의 갈래가 간략하게는 네 가지이고 널리는 여덟 가지이다. 무슨 일로 뒤의 두 가지는 저마다 나누어져서 세 가지가 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소견[見]과 계율[戒]과 멀리 여읨[遠離]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깊이 믿어 받게 하며
근본과 따름의 미혹[本隨惑] 및
자재의 장애[自在障]를 다스리기 때문이다
≪논≫ 바른 말 등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이 자기 소견과 계율과 멀리 여읨을 나타내어 다른 이로 하여금 믿게 하는 것이다. 바른 말로 말미암아 논의하고 결단하여 가려서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뛰어난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 알게 한다. 바른 행위로 말미암아 삿된 행위를 하지 아니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깨끗한 계율이 있다는 것을 믿어 알게 한다. 바른 생활로 말미암아 양이 알맞고 때에 알맞게 법답게 옷과 발우 등의 물건을 빌고 구하여 다른 이로 하여금 자기에게는 훌륭하게 멀리 여읨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
바른 노력 등의 세 가지는 다음과 같이 근본 번뇌[本煩惱]와 따른 번뇌[隨煩惱]의 두 가지와 자재의 장애를 다스리게 된다.
이 다스릴 바에는 요약하여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근본 번뇌이니, 수도위에서 끊을바요, 둘째는 따른 번뇌이니, 흐리멍덩함[惛沈]과 들뜸[掉擧]이요, 셋째는 자재의 장애이니, 이끄는바 훌륭한 품류의 공덕을 장애한다.
이 중에서 바른 노력은 특별히 처음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그것을 다스리기 위하여 도를 부지런히 닦기 때문이다. 바른 기억은 특별히둘째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기억을 매어서 그침[止] 따위의 모양 안에 편안히 머물러서 흐리멍덩함과 들뜨는 것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다. 바른 선정은 특별히 셋째 것을 다스릴 수 있는지라, 뛰어난 디야아나[靜慮]에 의하여 빠르게 모든 신통 등의 훌륭한 공덕을 끌어 일으킬 수 있기 때문이다.
다스림을 닦는[隨治]차별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뒤바뀜 있음에서 뒤바뀜 없음에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있음이 따름과
뒤바뀜 없음에서 뒤바뀜 없음이 따름의
이것이 다스림을 닦는 것의 차별이다
≪논≫ 이 다스림을 닦음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뒤바뀜이 있는 데서 뒤바뀜이 없음에 따름이요, 둘째는 뒤바뀜이 없는 데서 뒤바뀜이 있음에 따름이요, 셋째는 뒤바뀜이 없는 데서 뒤바뀜 없음에 따름이다. 이와 같이 세 가지의 다스림을 닦는 차별을 차례대로 범부[異生]와 배울 것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 없는 이[無學]의 자리에 있다.
보살과 2승(乘)으로서 닦는바 다스림에 차별의 모양이 있음을 어떻게 알아야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보살로서 닦아 익히는 바는
반연할 바[所然]와 뜻 지음[作意]과
증득함[證得]의 자못 뛰어남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2승과는 차별이 있다
≪논≫ 성문과 독각은 자기의 상속하는 몸[相續身] 따위로써 대경을 삼아서 다스림을 닦지마는 보살은 공통하게 자기와 다른 이의 상속하는 몸 따위로써 대경을 삼아서 다스림을 닦는다. 성문과 독각은 몸 따위의 대경에서 무상하다는 등의 행상(行相)으로써 생각하여 다스림을 닦지마는 만약 모든 보살이라면 몸 따위의 대경에서 얻을 바 없음[無所得]의 행상으로써 생각하여 다스림을 닦는다.
성문과 독각이 염주(念住) 등을 닦는 것은 몸 등이 빨리 매임을 여의게 되기만을 위한 것이지마는 모든 보살이 염주 등을 닦는 것은 몸 등이 빨리 매임을 여의게 되기를 위한 것이 아니고 머뭄이 없는 열반[無住涅槃]만을 증득하기 위해서이니, 보살과 2승이 닦는바 다스림은 이 세 가지 일로 말미암아 차별이 있다.
다스림을 닦음의 총괄한 뜻[總義]이라 함은, 깨달음을 여는 것의 닦음[開覺修]과 줄어짐의 닦음[損減修]과 밝게 꾸밈의 닦음[瑩飾修]과 일으켜 울음의 닦음[發上修]과 이웃의 닦음[隣近修]이다. 견도위에 이웃이 되기 때문인 것과 증득하여 듦의 닦음[證入修]과 더욱 훌륭함의 닦음[增勝修]과 처음 자리의 닦음[初位修]과 중간자리의 닦음[中位修]과 뒷 자리의 닦음[後位修]과
위가 있음의 닦음[有上修]과 위 없음의 닦음[無上修]이어서 반연할 바 뜻ㆍ지음ㆍ증득함에 이름[至得]의 자못 뛰어난 것을 말한다.
5. 변수분위품(辯修分位品)
이미 다스림 닦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修分位]는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설명한 바의 다스림을 닦음에는
나누어진 위치에 열여덟이 있나니
원인[因]과 듦[入]과 행(行)과 결과[果]와
지음[作]과 지음 없음[無作]과 자못 훌륭함[隨勝]이며
위[上]와 위 없음[無上]과 해행[解行]과
들음[入]과 벗어남[出離]과 수기【記】와 말씀[說]과
정수리에 물 부움[灌頂] 및 증득(證得)과
훌륭한 이익[勝利]과 할 일을 이룸[成所作]이다
≪논≫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은 모든 다스림을 닦는 차별의 나누어진 자리에는 열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원인 위치[因位]이니, 종성에 머무는 보특가라요, 둘째는 드는 위치[入位]이니, 이미 마음을 냄이요, 셋째는 행을 더하는 위치[加行位]이니, 마음을 낸 뒤에 아직은 과위의 증득을 얻지 못함이요, 넷째는 결과 위치[果位]이니, 이미 과위를 얻었음이요, 다섯째는 할 일 있는 위치[有所作位]이니, 배울 것 있는 데에 머무름이요, 여섯째는 할 일 없는 위치[無所作位]이니, 배울 것 없는 데에 머무름이요, 일곱째는 자못 훌륭한 위치[殊勝位]이니, 이미 모든 신통 등의 자못 훌륭한 공덕을 성취하였음이요, 여덟째는 위가 있는 위치[有上位]이니, 성【문】따위를 초월하여 이미 보살 자리에 들었음이요, 아홉째는 뒤 없는 위치[無上位]이어서 이미 부처를 이루었음이니, 이로부터 이상은 보다 뛰어난 자리는 없기 때문이다.
열째는 훌륭한 해행위치[勝解行位]이니, 훌륭한 해행지위의 모든 보살이요, 열한째는 증득하여 드는 위치[證入位]이니, 극히 기쁜 자리[極喜地]요, 열둘째는 벗어난 위치[出離位]이니, 다음의 여섯 자리[六地]요, 열셋째는 수기 위치[受記位]이니, 제8지(地)요, 열넷째는 말 잘하는 위치[辯說位]이니, 제9지요, 열다섯째는 정수리에 물 붓는 위치[灌頂位]이니, 제10지요, 열여섯째는 증득한 위치[證得位]이니, 부처님의 법신(法身)이요, 열일곱째는 훌륭한 이익 위치[勝利位]이니, 받아쓰는 몸[受用身]이요, 열여덟째는 할 일을 이루는 위치[成所作位]이니, 변화하는 몸[變化身]을 말한다.
이 모든 나누어진 위치에 차별이 비록 많다 손치더라도 간략하게 말하면 세 가지만이 있는 줄 알아야 하리니,
그 세 가지가 무엇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알아야 하리 법계(法界) 중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의 나누어진 위치 있어서
부정함[不淨]과 부정을 깨끗이 함[淨不淨]과
청정함[淸淨]이 그것이니 알맞은 바에 따른다
≪논≫ 참 법계에 대한 위치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가 있나니, 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서 앞의 모든 위치를 포섭한다. 첫째는 부정한 위치[不淨位]이니, 원인 위치로부터 행을 더하는 위치까지이다. 둘째는 부정을 깨끗이 하는 위치[淨不淨位]이니, 배울 것 있는 이의 위치[有學位]이다. 셋째는 청정한 위치[淸淨位]이니, 배울 것 없는 이의 위치[無學位]이다.
어떻게 앞의 모든 위치의 차별에 의하여 보특가라[補特伽羅] 세우는 것을 알아야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앞의 모든 위치 중의
온갖 차별된 모양에 의하여
그의 알맞은 바에 따라서
모든 보특가라를 세우게 된다
≪논≫ 앞의 모든 위치의 차별된 모양에 의하여 알맞은 대로 보특가라를 세우나니, ‘이것은 종성에 머무름[住種性]이요, 이것은 이미 마음을 냄[已發心]이다’하는 등으로 알아야 한다.
닦음의 나누어진 위치의 총괄한 뜻[總義]이라고 함은, 감당해 낼 위치[堪能位]인 종성의 위치[種性位]와 일으켜 나아가는 위치[發趣位]인 듦의 위치[入位] 및 행을 더 하는 위치[加行位]와 부정한 위치와 부정을 깨끗이 하는 위치와 청정한 위치와 장엄 있는 위치[有莊嚴位]와 10지(地)에 두루 차기 때문인 두루 찬 위치[遍滿位]와 위 없는 위치[無上位]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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