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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62 변중변론(辯中邊論) 하권

by Kay/케이 2024. 7.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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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변중변론(辯中邊論) 하권

 


변중변론(辯中邊論) 하권
세친보살 지음
현장 한역
한길로 번역
6. 변득과품(辯得果品)
이미 닦음의 위치[修位]를 설명하였는지라, 과의 얻음[得果]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리라.
그릇[器]을 말하여 이숙(異熟)이라고 함과
힘(力)은 바로 그것의 더함[增上]과
좋아 즐김[愛樂], 더욱 자람[增長], 깨끗함[淨]이니
차례대로 이는 다섯 가지 결과[五果]이다
≪논≫ 그릇이라 함은, 착한 법에 따르는 이숙이며, 힘이라 함은, 저 그릇의 더 위가는 힘으로 말미암아 모든 착한 법으로 하여금 상등 품류 성품[上品性]을 이루게 한다. 좋아 즐김이라 함은, 전생에 자주 자주 닦았던 착한 힘 때문에 지금 세상에서 착한 법에 대하여 깊이 좋아 즐기는 마음을 냄이며, 더욱 자람이라 함은, 현재에 자주 자주 닦는 착한 힘 때문에 닦는바 착한 뿌리가 빨리 원만할 수 있게 함이다. 깨끗함이라 함은, 장애를 끊는 것이어서 영원히 매임을 여의게 됨이다.
이 다섯 가지는 차례대로 다음의 다섯 가지 결과이다. 첫째는 이숙의 결과[異熟果]요, 둘째는 더함의 결과[增上果]요, 셋째는 같은 종류의 결과[等類果]요, 넷째는 사람 작용의 결과[士用果]요, 다섯째는 얽매임을 여읨의 결과[離繫果]이다. 다시, 다음에 송으로 말한다.
다시 간략히 그 밖의 결과를 말하면
뒤뒤[後後]와 처음[初]과 자주 익힘[數習]과
마지막[究竟]과 따름[順]과 장애 없앰[障滅]과
여읨[離]ㆍ훌륭함[勝]ㆍ위[上]와 위없음[無上]이다
≪논≫ 간략하게 그 밖의 결과의 차별을 말하자면 열 가지가 있다.
첫째는 뒤뒤의 결과[後後果]이니, 종성(種性)을 원인으로 하여 마음을 내는 결과를 얻으며, 이와 같은 결과가 차츰 나아가는 줄 알아야 함이요, 둘째는 맨 처음의 결과[最初果]이니, 맨 처음에 세간 벗어나는 법을 증득함이요, 셋째는 자주 익힘의 결과[數習果]이니, 이로부터 뒤로는 모든 배울 것 있는 이의 위치[有學位]요, 넷째는 마지막의 결과[究竟果]이니, 배울 것 없는 이의 위치[無學位]요, 다섯째는 따름의 결과[隨順果]이니, 점차적인 원인이어서
곧 이것은 뒤뒤의 결과에 소속되는 줄 알 것이다.
여섯째는 장애 없앰의 결과[障滅果]이니, 능히 끊는 도이어서 곧 맨 처음의 결과로 장애를 없앨 수 있기 때문에 장애의 없앰이라고 말함이요, 일곱째는 얽매임을 여읨의 결과[離繫果]이니, 곧 자주 익힘의 결과와 마지막의 결과를 말하는 것이어서 배울 것 있고 배울 것 없는 이의 위치에서 차례대로 번뇌의 얽매임을 멀리 여의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자못 훌륭한 결과[殊勝果]이니, 신통 따위의 자못 훌륭한 공덕이요, 아홉째는 위 있음의 결과[有上果]이니, 보살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어서 다른 승[餘乘]에서는 뛰어났지마는 아직 부처는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요, 열째는 위 없음의 결과[無上果]이니, 여래의 지위를 말하는 것이어서 이 위에 다시는 더 다른 훌륭한 법이 없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설명된 뒤의 여섯 가지 결과는 곧 마지막[究竟] 등인 앞의 네 가지 차별인데, 이와 같은 모든 결과는 간략하게 말하였을 뿐이요, 만약 자세히 설명하려면 한량이 없다.
결과의 총괄한 뜻[總義]이라고 함은, 섭수하기 때문이요, 차별하기 때문이요, 전생에 익혔기 때문이요, 뒤뒤에 끌어 일으키기 때문이요, 표지하기 때문이며, 풀이하기 때문이다.
이 중에서 섭수한다 함은, 다섯 가지 결과요, 차별이라 함은 그 밖의 결과요, 전생에 익혔다 함은 이숙의 결과요, 뒤뒤에 끌어 일으킨다 함은 그 밖의 네 가지 결과요, 표지한다[標] 함은 뒤뒤[後後] 따위의 네 가지 결과요, 풀이한다【釋】함은 따름[隨順] 따위의 여섯 가지 결과이니, 앞의 네 가지 결과를 분별하기 때문이다.
7. 변무상승품(辯無上乘品)
이미 결과 얻는 것을 설명하였는지라, 무상승(無上乘)을 이제 말하여야겠다. 게송으로 말한다.
통틀어서 세 가지 위 없음[三無上]으로 말미암아
무상승이라고 말하나니,
바른 행[正行]과 반연할 바[所緣]와
닦아 증득함[修證]의 위 없음이다
≪논≫ 이 대승(大乘)중에는 통틀어서 세 가지 위 없음의 뜻으로 말미암아 무상승이라고 하나니, 세 가지 위 없음이라고 함은 첫째 바른 행의 위 없음이요, 둘째 반연할 바위 없음이요, 셋째 닦아 증득함의 위 없음이다.
이 중에서 바른 행의 위 없음이라고 함은 열 가지 바라밀다의 행[十波羅蜜多行]이다. 이 바른 행의 모양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바른 행에는 여섯 가지 있나니
가장 훌륭함[最勝]과 뜻 지음[作意]과
법을 따름[隨法]과 두 치우침을 여읨[離二邊]과
차별(差別)과 차별 없음[無差別]이 그것이니라
≪논≫ 곧 열 가지 바라밀다에서는 닦는 차별에 따라서 여섯 가지 바른 행이 있다. 첫째는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이요, 둘째는 뜻 지음의 바른 행이요, 셋째는 법을 따름의 바른 행이요, 넷째는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읨의 바른 행이요, 다섯째는 차별의 바른 행이요, 여섯째는 차별 없음의 바른 행이다.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가장 훌륭함에는 열두 가지 있나니
넓고 큼[廣大]과 오랜 시간[長時]과
의지할 곳[依處]과 그지없음[無盡]과
끊임없음[無間]과 어려움 없는 성품[無離性]이며
자재(自在)와 섭수(攝受)와 일으킴[發起]과
얻음[得]과 같은 종류[等流]와 마지막[究竟]이다
이로 말미암아 열 가지 건넘[十度]을 말하여
바라밀다라고 이름하게 된다
≪논≫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에 열두 가지 있나니, 첫째는 넓고 큼의 가장 훌륭함이요, 둘째는 오랜 동안의 가장 훌륭함이요, 셋째는 의지할 곳의 가장 훌륭함이요, 넷째는 그지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다섯째는 끊임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여섯째는 어려움 없음의 가장 훌륭함이요, 일곱째는 자재의 가장 훌륭함이요, 여덟째는 섭수의 가장 훌륭함이요, 아홉째는 일으킴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째는 증득함에 이름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한째는 같은 종류의 가장 훌륭함이요, 열두 번째는 마지막의 가장 훌륭함이다.
이 중에서 넓고 큼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마침내 온갖 세간의 부귀와 안락의 자재함을 좋아하지 아니하고 뜻이 높고 멀기 때문이다. 오랜 동안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셋의 수없는 겁[三無量劫]에 쪼이고 익혀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의지할 고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널리 온갖 유정들을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기 위하여 의지할 곳이 되기 때문이다. 그지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위 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에 회향하여 다하는 일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자기와 남이 평등한 훌륭한 알음[勝解]을 얻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에 대하여 보시 등의 바라밀다를 일으켜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어려움 없음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다른 유정의 닦는바 착한 법에 대하여 깊이 따라 기뻐할뿐더러 자기가 하는 보시 등의 바라밀다로 하여금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자재의 가장 훌륭함이라함은, 허공장 사마아디[虛空藏三昧] 등의 힘으로 말미암아 닦는바 보시 등으로 하여금 빨리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 섭수와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분별이 없는 자리[無分別地]의 섭수하는 바로서 보시 등으로 하여금 극히 맑고 깨끗하게 하기 때문이다. 일으킴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훌륭한 해행 자리[勝解行地]의 가장 상등 품류의 알음[忍] 중에 있음이다. 증득함에 이름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극히 기쁨 자리[極喜地:第一地]에 있음이다. 같은 종류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그 다음의 여덟 자리[八地:第二地로부터 第九地까지이다]에 있음이다. 마지막의 가장 훌륭함이라 함은, 제10지[地] 및 부처님 자리[佛地]안에 있나니, 보살과 여래의 원인과 결과가 원만하기 때문이다.
보시 등의 열 가지 바라밀다에는 모두 이와 같은 열두 가지가 가장 훌륭함이 있음으로 말미암아 그 때문에 모두 저 언덕에 이름[到彼岸]이라는 이름을 얻는다. 무엇이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열 가지의 바라밀다라고 함은
보시[施]와 계율[戒]과 편안히 참음[安忍]과
힘써 나아감[精進]과 선정[定]과 반야(般若)와
방편(方便)과 소원[願]과 힘[力]과 지혜[智]이다
≪논≫ 이것은 보시 등의 열 가지 건넘의 별명을 나타내는 것이니, 보시 등은 어떻게 저마다 따로 행위를 짓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이롭게 함과 해치지 않음과 받음[受]과
공덕을 더함과 들임과 벗어남과
그지없음과 항상 일으킴과 결정함과
수용하여 다른 이를 성숙시킴이다
≪논≫ 이것은 보시 등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의 저마다 달리 하는 일을 나타낸 것이니, 차례대로 알아야 한다.
모든 보살은 보시(布施) 바라밀다에 의지하는 까닭에 모든 유정에게 널리 이롭게 함이다. 깨끗한 계율[淨戒]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모든 유정들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음이다. 편안히 참는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다른 이가 손해를 끼칠 적에도 깊이 참고 받음이요,
힘써 나아가는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공덕을 더욱 자라게 함이다. 선정[靜慮]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신통 등을 일으키어 유정들을 이끌어서 바른 법에 들게 함이다.
반야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바르게 유정을 가르쳐 주고 가르쳐 경계하여 해탈할 수 있게 함이다. 방편의 교묘한[方便善巧]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위없는 바르고 평등한 보리에 회향하여 보시 등의 공덕을 그지없게 함이다. 소원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보시 등에 따르는 훌륭한 생(生)을 받아들여서 온갖 생중에 언제나 부처님을 만나게 되어 공경하고 공양하면서 늘 보시 등을 일으킴이다.
힘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생각하여 가리는 힘[思擇力]과 닦아 익히는 힘[修習力]의 두 가지를 두루 갖추어서 모든 장애를 눌러 없애고 보시 등으로 하여금 언제나 결정코 옮아가게 함이다. 지혜 바라밀다로 말미암아 듣고 말하는 대로의 모든 법의 그릇됨을 떠나며 보시 등의 더 위가는 법의 즐거움[增上法樂]을 수용하여 뒤바뀜이 없이 온갖 유정들을 성숙시킨다.
이와 같이 이미 가장 훌륭함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뜻 지음의 바른 행[作意正行]의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말한다
보살은 세 가지의 지혜로써
한결같이 대승을 생각하면서
베풀어 설치하는 법 그대로 하면
뜻 지음의 바른 행이라고 한다
≪논≫ 만약 모든 보살로서 들음[聞]과 생각함[思]과 닦음[修]으로 이루어지는 미묘한 지혜로써 자주자주 뜻을 짓고 대승을 생각하며 보시 등에 의하여 베풀어 설치되는 계경[契經] 등의 법 그대로 하게 되면, 이와 같은 것을 뜻 지음의 바른 행이라고 한다.
이 모든 보살이 세 가지 지혜로써 대승을 생각한다면 어떠한 공덕이 있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이는 착한 경계[善界]를 더욱 자라게 함과
뜻에 들어감과 일을 이룩함이다
≪논≫ 들어서 이루어지는 지혜[聞所成慧]는 대승을 생각하며 착한 뿌리 경계[善根界]를
더욱 자랄 수 있게 함이다. 생각하여 이루어지는 지혜[思所成慧]는 대승을 생각하며 바르게 들었던 것의 진실한 뜻에 깨치어 들어감이다. 닦아서 이루어진 지혜[修所成慧]는 대승을 생가하며 소망하는 일을 이룩하여 원만하게 함이니, 다스림을 닦는 자리[修治地]에 나아가 들기 때문이다.
뜻 지음의 바른 행에는 어떠한 돕는 짝[助伴]이 있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이 돕는 짝은 바로
열 가지 법의 행[法行]인 줄 알아야 한다
≪논≫ 이와 같은 뜻 지음의 바른 행은 열 가지 법의 행으로 섭수하는 바로 말미암는 줄 알아야 하리니, 어떤 것을 열 가지 법의 행이라고 하느냐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쓰고 베낌과 공양함과
남에게 베품과 들음과 펼쳐 읽음과
받아 지님과 바르게 열어 폄과
읊고 욈과 그리고 생각함과 닦음이다
≪논≫ 이 대승에는 열 가지 업의 행이 있나니, 첫째는 쓰고 베낌이요, 둘째는 공양함이요, 세째는 다른 이에게 베품이요, 네째는 만약 다른 이가 읽고 외면하는 마음을 오로지 자세히 들음이요, 다섯째는 스스로가 펼쳐서 읽음이요, 여섯째는 받아 지님이요, 일곱째는 바르게 다른 이를 위하여 글의 뜻을 열어서 폄이요, 여덟째는 읊고 욈이요, 아홉째는 생각함이요, 열째는 닦아 임힘이다.
열 가지 법의 행을 행하여 몇 가지 복을 얻게 되느냐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열 가지 법의 행을 행하게 되면
복 더미를 얻음이 한량 없도다
≪논≫ 이와 같은 열 가지 법의 행을 수행하면 얻게 되는 그 복 더미야말로 그 양이 그지 없다.
무엇 때문에 대승경등에서만 이 법의 행을 닦아서 가장 큰 과보를 얻는다고 말하고, 성문승에 있어서는 그와 같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훌륭하기 때문이고 그지없기 때문이며
남을 거둬 주되 쉬지 않기 때문이다
≪논≫ 이 대승에서 모든 법의 행을 닦음에는 두 가지 인연으로 말미암아 가장 큰 과보를 얻는 것이니, 첫째는 가장 훌륭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그지없기 때문이다. 다른 유정들을 거두어서 이롭게 하는지라, 그 때문에 대승을 말하여 가장 훌륭하다고 한다.
비록 남음 없는 열반[無餘涅槃]을 증득한다 하더라도 다른 이들을 이롭게 하는 일이 언제나 쉬지 않는지라, 그 때문에 대승을 말하여 그지없다고 한다. 이와 같이 이미 뜻 지음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법을 따름의 바른 행[隨法正行]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법을 따름의 행은 두 가지여서
모든 산란함이 없음[無散亂]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이 변하여 바뀜[轉變]이니
모든 보살은 알아야 한다
≪논≫ 법을 따름의 행에는 간략하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산란함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이요, 둘째는 뒤바뀜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이다. 보살은 이것을 바르게 환히 알아야 한다.
이 안에는 여섯 가지의 산란함이 없기 때문에 산란함이 없다고 한다. 여섯 가지 산란함이라고 함은 첫째가 제 성품[自性]의 산란함이요, 둘째가 바깥[外]의 산란함이요, 셋째가 안[內]의 산란함이요, 넷째가 모양[相]의 산란함이요, 다섯째가 거칠고 무거움[麤重]의 산란함이요, 여섯째가 뜻 지음[作意]의 산란함이다.
이 여섯 가지 모양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선정에서 나움[出定]과 대경에서 흐름[於境流]과
맛ㆍ흐림ㆍ들뜸[味沈掉]과 속여 보임[矯示]과
≺나≻라는 고집[我執]과 마음의 열등[心下劣]이니
지혜로운 이들은 알아야 한다
≪논≫ 이 중에서 선정에서 나옴은 다섯 알음 몸[五識身]으로 말미암아서이니, 곧 이는 제 성품의 산란함인 줄 알아야 한다. 대경에서 흐름이라고 함은 바깥 인연에 내달아 흩어짐이니, 곧 바깥의 산란함이다. 맛ㆍ흐림ㆍ들뜸이라고 함은 사마아디[等持] 맛에 집착함과 흐리멍덩함과 들뜸이니, 곧 안의 산란함이다. 속여 보임이라고 함은 곧 모양의 산란함이니, 속이는 모양을 나타내면서 선정을 닦고 행을 더하기 때문이다. ≺나≻라는 고집이라고 함은 곧 거칠고 무거움의 산란함이니, 난체를 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열등이라고 함은 곧 뜻 지음의 산란함이니, 낮은 승(乘)에 대하여 뜻 지음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보살은 이 여섯 가지 산란한 모양에 대하여 두루 환하게 알아야 하며 빨리 제거하여 없애야 된다.
이와 같이 이미 상관함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을 설명하였다. 뒤바뀜이 없음이 변하여 바뀜을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알고 봄[知見]의 글[文]과 뜻[義]과
뜻 지음[作意] 및 움직이지 않음[不動]과
두 모양[二相]과 더럽고 깨끗함[染淨]과 손[客]과
두려움도 뽐냄도 없음[無怖高]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논≫ 열 가지 일 안의 사실대로의 지견에 의하여 열 가지 뒤바뀜 없음의 일을 세우는 줄 알아야 한다.
이 안에서 어떤 것을 글에 있어서 뒤바뀜 없음이라고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서로 응함[相應]과 익힘[串習]과
혹은 이것을 뒤집음으로 말미암아
뜻이 있고 있지 않는 줄을 아니니
이것이 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논≫ 만약 모든 글을 끊임없이 차례로 펴서 읽으면 말하되 서로 응한다고 하고 누구나 그런 이름을 인정하며, 그 일만을 지목하는 것에 대한 차츰차츰 기억하는 것을 익힌다고 한다. 이 두 가지만으로 말미암아 뜻이 있는 글이 되며, 이것과 반대되는 것이면 뜻이 없는 글이 된다. 사실대로 이 두 가지 글을 알고 보면, 이것을 글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뜻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두 가지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과
현실 같이는 실제 있음이 아님과
있음과 있음 아닌 것을 여읜 줄 앎이
이것이 뜻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논≫ 두 가지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난다 함은 취할 바[所取]와 능히 취함[能取]의 성품에 비슷하게 나타남이니, 어지러운 식[亂識]이 저 행상(行相)과 비슷하게 생기기 때문이다. 현실 같이는 실제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함은 현실의 것과 같이는 실제로 그와 같이 있지 않은 것이다. 있음을 여읜다 함은, 이 뜻은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이어서 성품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있음이 아님을 여읜다 함은, 저 어지러운 식이 나타나서 있는 것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사실대로 이 안의 뜻을 알고 보면, 이것이 뜻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저 말의 훈습(熏習)함이
말의 뜻 지음이며 그의 의지라고 알지니
나타나서 두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논≫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말의 훈습한 바로서 말의 뜻 지음이라고 한다. 곧 이 뜻 지음은 바로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분별하는 의지할 바[所依]이다. 이것은 나타나서 두 가지 취함[二取]의 원인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이 뜻 지음은 바로 쓸모없는 이론과 생각의 훈습한 바로 말미암아 말의 뜻 지음이라고 한다. 사실대로 이 뜻 지음을 알고 보면, 이것이 뜻 지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인 줄 알아야 한다.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이라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뜻의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고 눈 흘림[幻] 따위인 줄 알지니
있음과 없음에 움직이지 않기 때문이다
≪논≫ 앞에서 모든 뜻[義]은 있거나 있지 않음을 여의었다고 설명하였는데, 이것은 눈 흘림 따위와 같이 있는 것도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눈 흘림으로 만든 모든 코끼리와 말 따위 같은 것은 그것이 실제로는 코끼리와 말 따위의 성질이 있는 것은 아니로되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 어지러운 식이 저 모든 코끼리 또는 말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모든 뜻은 나타나서 취할 바와 능히 취함에 비슷하지마는 결코 실제 있는 성품과 같은 것이 없으며, 또한 전혀 없는 것도 아니어서 어지러운 식이 저 취할 바와 능히 취함과 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따위라는 말[等聲]은, 아지랑이와 꿈의 경계와 물의 달 따위를 나타내 보이는 것이니, 알맞게 알아야 한다. 뜻이 눈 흘림 같음을 자세히 살핌으로써 있다 없다는 품류[有無品]에 대하여 마음이 움직이거나 흩어지지 아니한다. 사실대로 이 움직이지 않음을 알고 보면, 이것이 움직이지 않음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인 줄 알아야 한다.
두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자기만의 모양이 있는 것과[自相]과 공통의 모양[共相]이 있는 안에서 모두 다 뒤바뀜이 없음이다.
자기만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자기만의 모양에 있어 뒤바뀜이 없다 함은
온갖 것은 이름뿐인 줄을 알아서
온갖 분별을 여의는 것이니
으뜸가는 뜻의 제만의 모양[勝義自相]에 의한다
≪논≫ 사실대로 온갖 눈의 빛깔[眼色]로부터 뜻의 법[意法]에 이르기까지
모두 이름뿐인 것을 알거나 보면, 곧 온갖 분별을 다스리나니, 이것이 제만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으뜸가는 뜻의 제만의 모양에 의하여 설명하는 것이다. 만약 세속에 한다면 이름이 있을 뿐만이 아니요, 갖가지 차별된 모양을 취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공통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참된 법계[眞法界]를 여읨으로써
따로 하나의 법도 없는지라
그러므로 이것을 통달한다면
공통의 모양에서 뒤바뀜이 없다
≪논≫ 하나의 법으로서 법에 ≺나≻ 없음[法無我]을 여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참된 법계를 모든 법의 공통의 모양에 포섭한다. 사실대로 이의 공통한 모양을 알고 보면, 이것이 공통의 모양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는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더럽거나 깨끗함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뒤바뀜의 뜻 지음이 아직 사라지지 못함과
이미 사라졌음을 알게 된다면
법계의 섞여 더러움[雜染]과
맑고 깨끗함[淸淨]에 있어 뒤바뀜이 없음이다
≪논≫ 만약 아직 뒤바뀜의 뜻 지음을 끊어 없애지 못했다면 그 때에는 법계를 말하여 섞여 더러움이라 하고, 이미 끊어 없었을 때에는 말하여 맑고 깨끗함이라고 한다. 사실대로 이 더럽거나 깨끗함을 알고 보면 다음과 같이 바로 더럽거나 깨끗함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음이다.
나그네[客]에게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 함은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법계의 본래 성품은
맑고 깨끗함이 허공과 같은지라
더럽거나 깨끗함이 주인이 아님을 안다면
이것이 나그네에 대한 뒤바뀜 없음이다
≪논≫ 법계의 본래 성품은 깨끗함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이로 말미암아 먼저의 더러움과 뒤의 깨끗한 두 가지 차별된 모양은 바로 손이어서 주인이 아닌 줄 알아야 한다. 사실대로 이 손의 모양[客相]을 알고 보면, 이것이 손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두려워함이 없고 뽐냄이 없음에 있어서 다 같이 뒤바뀜이 없다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유정(有情)과 법(法)은 없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함의 성품조차 없나니
이 두렵거나 뽐냄 없음을 안다면

이것이 두 가지에 있어 뒤바뀜 없음이다
≪논≫ 유정과 법은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에는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성품도 모두 있는 것이 아니다. 더럽거나 깨끗하다는 뜻을 모두 이룰 수 없기 때문에 더럽거나 깨끗한 품류[染淨品]는 덜함도 없고 더함도 없다. 이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는 두려워함도 없고 난체함도 없나니, 사실대로 두려워하거나 뽐냄이 없음을 알고 보면, 이것을 두 가지에 있어서 뒤바뀜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뒤바뀜이 없는 행의 총괄한 뜻[總義]이라 함은 글[文]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그침과 살핌[止觀]의 두 가지 모양에 통달한다. 뜻[義]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바르게 모든 뒤바뀜의 모양에 통달한다. 뜻 지음[作意]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뒤바뀜의 인연에 있어서 바르게 멀리 여의며 움직이지 않음[不動]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저 모양을 잘 취한다. 제만의 모양[自相]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저 다스림의 분별없는 도[無分別道]를 닦으며, 공통한 모양[共相]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바르게 본래 성품의 맑고 깨끗함에 통달한다. 더럽거나 깨끗함[染淨]의 뒤바뀜이 없으므로 말미암아 아직 끊지 못했거나 이미 끊은 장애를 분명히 알며, 나그네[客]의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사실대로 더럽거나 깨끗한 두 가지 모양을 분명히 안다. 두려워함이 없음[無怖]과 뽐냄이 없음[無高]의 두 가지 뒤바뀜이 없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장애는 끊어 없어져서 영원히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 열 가지 뒤바뀜이 없음은 차례대로 저 열 가지 금강글귀[金剛句] 안에 벌려 세워진다. 무엇을 열 가지 금강글귀라고 하느냐 하면, 있거나 있지 않음[有非有]과 뒤바뀜이 없음[無顚倒]과 의지할 바[所依]와 눈 흘림 따위의 비유[幻燈喩]와 분별이 없음[無分別]과 본래 성품의 맑고 깨끗함[本性淸淨]과 섞여 더러움이 맑고 깨끗하여짐[雜染淸淨]과 허공의 비유[虛空喩]와 줄어짐이 없음[無滅] 및 더함이 없음[無增]이 그것이다.
이와 같은 열 가지 금강 글귀를 포섭하기 위하여 두 게송이 있다.
알아야 하리니 있거나 없거나 있지 않음과
뒤바뀜이 없음과 의지할 바와
눈 흘림 따위와 분별이 없음과
본래 성품이 언제나 깨끗함이며
그리고 섞여 맑고 깨끗하여짐과
성품의 깨끗함을 허공에 비유함과
줄어짐도 없고 더함도 없음이니
이것이 열 가지의 금강 글귀이다

첫째는 열 가지 금강 글귀를 벌려 세웠나니, 제 성품[自性]이라고 함은 제 성품 때문이요, 반연할 바[所緣] 때문이요, 분별이 없기[無分別] 때문이요, 어려움을 풀이하기[釋難] 때문이다.
제 성품 때문이라고 함은 세 가지 제성품[三自性]있어서 원성실성(圓成實性)과 변계소집성(遍計所執性)과 의타기성(依他起性)이니, 이것이 첫 세 글귀이며, 차례대로 알아야 한다.
반연할 바 때문이라고 함은, 곧 세 가지 제 성품이요, 분별이 없기 때문이라고 함은, 이로 말미암아 분별이 없는 것은 곧 분별이 없는 지혜[無分別智]이고 여기에서 분별이 없는 것은 곧 본래 성품이 맑고 깨끗하기 때문이다. 차례대로 경계[境]와 지혜[智]를 벌려 세우는 것인줄 알지니, 세 가지 제 성품과 분별이 없는 것이요, 어려움을 풀이하기 때문이라고 함은 그 나머지 글귀이다.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제 나름대로 분별성과 서로 의지성의 모양이 만약 실제로 이것이 없다 하면, 어떻게 있을 수가 있겠는가, 만약 실제로 이것이 있다고 하면, 모든 법은 본래 성품이 맑고 깨끗하지 않아야 하리라’고 하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눈 흘림 따위의 비유를 말하나니, 눈 흘림의 일 따위 같은 것은 비록 실제로는 이것이 없으면서도 나타나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만약 온갖 법이 본래 성품은 맑고 깨끗하다 하면, 어떻게 먼저는 더러웠다가 깨끗함이 있을 수 있는가’라고 한다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더럽거나 깨끗함이 있는 것과 허공의 비유를 설명하나니, 허공과 같은 것은 비록 본래 성품이 깨끗하면 서로 섞여 더러움과 맑고 깨끗한 시기가 있다.
또 어떤 이가 힐난하기를, ‘한량없는 부처님이 세상에 출현하시어 한 분 한 분이 한량없는 유정들을 제도하여 나고 죽음을 벗어나 열반에 들게 하신다면 어째서 나고 죽음에는 아주 없다는 허물이 없겠는가. 열반 경계 안에는 더욱 늚이 없는 허물이 있는가’라고 한다면, 이 힐난을 풀기 위하여 더러움과 깨끗한 것에 줄음이 없고 더함이 없음을 설명하나니, 또 유정 경계와 맑고 깨끗한 품류는 모두 다 한량없기 때문이다.
둘째, 저 제 성품을 벌려 세운다함은 어떤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어지러운 경계[亂境]의 제 성품[自性] 원인[因]과
어지러움이 없는 제 성품 경계와
어지럽고 어지러움이 없는 두 결과와
저 둘의 편[二邊際]이 그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법을 따름의 바른 행을 설명하였다. 두 치우침을 여읨의 바른 행[離二邊正行]을 어떻게 알아야 되는가 하면, 보적경(寶積經)에서 말씀하신 중도의행[中道行]과 같다. 이 행은 어떤 것의 두 치우침을 멀리 여의는가 함을 게송으로 말한다.
다른 성품[異性]과 동일한 성품[一性]이고
외도(外道)와 그리고 성문(聲門)이며
더욱 늘임[增益]과 줄어짐[損減]의 치우침은
유정과 법의 두 가지씩이다
다스릴 바[所治]와 능히 다스림[能治]이고
항상 머무름[常住]과 아주 없음[斷滅]이며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의 치우침이요
더러움과 깨끗함의 둘에는 세 가지 있다
두 치우침[二邊]의 성품을 분별한다면
다시 일곱 가지가 있는 줄 알지니
있는 것과 있지 않음의 치우침이며
능소(能所)의 고요함[寂]ㆍ두려움[怖]ㆍ무서움[畏]이다
취할 바와 능히 취함과 바름[正]과 삿됨[邪]이고
쓸 데 있음[有用]과 쓸데없음[無用]이며
일으키지 않음[不起]과 시간[時]따위이니
이것이 두 치우침을 분별함이다
≪논≫ 만약 빛깔[色] 따위에서 ≺나≻는 다름이 있다고 집착하거나 이것은 동일한 것이라고 집착한다면, 저마다 한편이 되므로 이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中道行]을 설명한다. 나와 선비에 이르기까지 없다고 자세히 살핀다. 내가 있다고 본다면 반드시 이런 집착을 일으키나니, 나는 몸에서 다르다고 하거나 혹은 바로 그것이 몸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만약 빛깔 따위에 집착하여 항상 머무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외도의 편이요, 항상 함이 없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성문의 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빛깔 따위는 항상 하거나 항상 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고 자세히 살피는 그것이다.
반드시 ≺나≻가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유정들을 더 늘리는 편이요, 반드시 ≺나≻가 없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유정들을 줄이는 편이니, 그것은 역시 거짓인 유정을 아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나≻거나 ≺나≻없음[無我]이라는 두 치우침의 중간 지혜[中智]에 머무르는 그것이다.
반드시 마음은 실제가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법을 더 늘리는 편이요, 반드시 마음을 실제가 없다고 집착한다면 이것을 법을 줄이는 편이므로 이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한다. 이곳에는 마음[心]도 없고 생각[思]도 없고 뜻[意]도 없고 의식[識]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착하지 못한 따위[不善等]의 모든 섞여 더러운 법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다스릴 바의 편이요, 착함 따위의 모든 맑고 깨끗한 법이 있다고 집착하면 이것은 능히 다스리는 편이므로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두 치우침에 있어서 따르거나 권하거나 찬양하지 않는 그것이다.
유정과 법에 대해 반드시 집착하여 있다고 하는 이것은, 항상 머무른다는 편이요, 결코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집착하면 이것은 아주 없다는 편이므로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곧 이 두 치우침에 대한 중간 지혜가 그것이다.
무명(無明)이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고, 만약 밝음[明]이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이와 같이 다스릴 바의 모든 행과 능히 다스리는 무위(無爲)와 또한 늙어 죽음과 그것을 없앨 수 있는 모든 다스림의 도[對治道]가 있다고 집착하면,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은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고, 이 다스릴 바와 능히 다스리는 것의 취할 바와 능히 취함은 곧 이는 검은 품류[黑品]와 흰 품류[白品]의차별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밝음과 무명은 둘이 없고 둘로 나누어진 것이 없다라고 더 널리 설명한다. 밝음과 무명 등의 취할 바와 능히 취하는 것은 모두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섞여 더러움에는 세 가지가 있다. 번뇌의 섞여 더러움[煩惱雜染]과 업의 섞여 더러움[業雜染]과 태어남의 섞여 더러움[生雜染]이다.
번뇌의 섞여 더러움에는 다시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모든 소견[諸見]이요, 둘째는 탐냄ㆍ성냄ㆍ어리석음의 모양[貪瞋癡相]이요, 셋째는 후생 몸의 소원[後有願]이다. 이를 능히 다스리는 ≺공≻의 지혜[空智]와 모양 없음의 지혜[無相智]와 소원 없음의 지혜[無願智]이다.
업의 섞여 더러움에는 짓는바 착하거나 나쁜 업이니, 이의 능히 다스림의 것은 짓지 않음의 지혜[不作智]이다.
태어남의 섞여 더러움에는 세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후생 몸의 태어남이요, 둘째는 태어난 뒤에 임자 마음, 딸린 마음[心心所]이 생각생각에 일어남이요, 셋째는 후생 몸의 계속이다. 이의 능히 다스림의 것은 남이 없는 지혜[無生智]와 일어남이 없는 지혜[無起智]와 제 성품 없는 지혜[無自性智]이다.
이와 같은 세 가지 섞여 더러움이 제거되어 사라지는 것을 맑고 깨끗함[淸淨]이라고 말한다.
≺공≻ 따위 지혜의 경계는 ≺공≻ 따위 법을 말하는 것이어서 세 가지 섞여 더러움은 그의 알맞음에 따라서 ≺공≻ 따위의 지혜가 ≺공≻ 따위를 짓게 한 것은 아니니, 그의 본래 성품은 바로 ≺공≻한 성품 따위로 말미암아서요, 법계의 본래 성품은 물듦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법계에 대하여 혹은 섞여 더러움이라고 집착하거나
맑고 깨끗함이라고 집착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으로 됨이니, 본래 성품은 물듦이 없어서 더럽거나 깨끗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행을 설명하나니, ≺공≻을 연유하지 않고서 법을 공하게 하며 법의 성품은 스스로 ≺공≻한 것이라고 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다시 일곱 가지가 있어서 둘의 치우침을 분별한다. 무엇이 일곱 가지냐 하면, 있다고 분별하거나 있지 않다고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며, 그는 실로 보특가라(補特伽羅)가 있다고 집착함은 무너져 없어지는지라, ≺공≻한 성품을 세우게 되기 때문이다. 혹은 ≺나≻없음[無我]에서 분별하여 없는 것이라 한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중도의 행을 설명하나니 보특가라를 없애기 위하여 비로소 ≺공≻한 성품을 세운 것은 아니지마는 그러나 그 ≺공≻한 성품은 본래 성품이 저절로 ≺공≻한지라, 과거도 ≺공≻하고 미래도 ≺공≻하고 그 중간의 때 역시 ≺공≻하다라고 더 널리 설명하기에 이른다.
고요할 바[所寂]를 분별하고 능히 고요함[能寂]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나니, 끊을 바[所斷]가 있고 능히 끊음[能斷]이 있다고 집착하여 ≺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허공의 비유를 말한다.
두려울 바[所怖]를 분별하여 그로부터 생기게 되는 무서울 만한 것[可畏]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제 나름대로 분별성의 빛깔 따위가 있어서 두려움이 생길만 하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며, 그로부터 생기게 되는 괴로움의 법[苦法]이 있어 무서움을 낼 만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그림 그리는 이의 비유를 말한다. 앞의 허공에 관한 비유는 성문을 위하여 말한 것이요, 지금의 그림 그리는 이의 비유는 보살을 위하여 말한 것이다.
취할 바를 분별하고 능히 취함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되나니,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요술사의비유를 말한다. 의식뿐인 지혜[唯識智]로 말미암아 경계 없는 지혜[無境智]가 생긴다. 경계 없는 지혜가 생김으로 말미암아 다시 의식뿐인 지혜를 버리나니, 경계가 이미 있는 것이 아니라면 의식 역시 이는 없는 것이어서 반드시 반연할 바[所緣]에 의탁하여 의식은 비로소 생기기 때문이다. 이로 말미암아 비유할 바[所喩]와 비유[喩]는 똑같은 법이다.
바른 성품을 분별하고 삿된 성품을 분별한다면 저마다 어느 한 편이 된다.

사실대로 살핌[如實觀]을 바르다 하고 삿되다고 함은 두 가지의 성품이라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양쪽 나무로 불을 내는 비유를 설명한다. 양쪽 나무에 비록 불의 모양은 없으나 서로 뚫며 비빔으로 말미암아 능히 불을 내고 불을 낸 뒤에는 도리어 양쪽의 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다.
이 사실대로 살핌도 그와 같아서 비록 성인 도의 바른 성품의 모양은 없으나 바른 성품의 거룩한 지혜를 능히 발생시키며 이와 같은 바른 성품의 거룩한 지혜를 발생시킨 뒤에는 다시 이 사실대로 살핌을 능히 제거하여 보낸다. 이로 말미암아 비유는 똑같은 법이다. 그러나 사실대로 살핌에는 비록 바른 성품의 모양은 없으나 바른 성품에 따르기 때문에 또한 삿된 성품의 모양이 없다.
쓸데 있음을 분별하고 쓸데없음을 분별하면 어느 한 편이 되나니, 거룩한 지혜[聖智]는 반드시 먼저 분별하여야 물듦을 없앨 수가 있고 혹은 전혀 쓸데없는 것이라고 집착하게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처음의 등불 비유를 설명한다.
일으키지 않음을 분별하고 시간 등을 분별하면 어느 한편이 되나니, 저 능히 다스림[能治]은 마침내 일어나지 않는다고 집착하거나 혹은 물듦과 시간의 길이를 같이 해야 한다고 집착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두 치우침의 분별을 여의게 하기 위하여 뒤의 등불 비유를 설명한다.
이와 같이 이미 둘의 치우침을 여의는 바른 행[差別無差別正行]은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차별과 차별이 없음이라고 함은
알아야 한다. 10지(地)에 있어
열 가지의 바라밀다의
더함[增上]과 평등한 것[等]의 닦아 모음이다
≪논≫ 10지 중에서 열 가지 저 언덕에 이름[十到彼岸]의 어느 하나를 더 위 가게 닦아 모으면 차별의 바른 행이라 말한다. 온갖 자리[一切地]에서 모두 평등하게 보시 등의 열 가지 바라밀다를 닦아 모으면 이와 같은 바른 행을 차별이 없다고 하는 줄 알아야 한다.
여섯 가지 바른 행의 총괄한 뜻[總義]에는 곧 이와 같은 품류의 가장 훌륭함[最勝]이니, 이로 말미암아 베풀어 설치하게 되는 그대로 대승법 등을 생각한다.
이와 같은 품류의 어지러움이 없이 변하여 바뀜[無亂轉變]으로 말미아아 사마타(奢摩他)를 닦고 뒤바뀜이 없이 변하여 바뀜[無到轉變]으로 비파사나(毘鉢舍那)를 닦으며, 이와 같은 뜻을 위하여 중도의 행을 닦아서 벗어나기를 구하며, 10지 중에서는 차별과 차별이 없는 행을 닦아 익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바른 행의 위 없음을 설명하였다.
반연할 바 위 없음[所緣無上]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하리라.
반연할 바라 함은 안립(安立)과 법계(法界)와
세울 바[所立]와 능히 세움[能立]과 지녀 있음[任持]과
새겨 지님[所持]과 안에 지님[內持]과 통달함[通達]과
더함[增]과 분증(分證)과 등운(等運)과 가장 훌륭함[最勝]이다
≪논≫ 이와 같아 반연할 바에는 열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벌려 세워 시설함의 반연할 바[安立法施設所緣]요, 둘째는 법계의 반연할 바[法界所緣]요, 셋째는 세울 바의 반연할 바[所立所緣]요, 넷째는 능히 세움의 반연할 바[能立所緣]요, 다섯째는 지녀 있음의 반연할 바[任持所緣]요, 여섯째는 새겨 지님의 반연할 바[印持所緣]요, 일곱째는 안에 지님의 반연할 바[內持所緣]요, 여덟째는 통달함의 반연할 바[通達所緣]요, 아홉째는 더욱 넓음의 반연할 바[增廣所緣]요, 열째는 분증의 반연할 바[分證所緣]요, 열한째는 등운의 반연할 바[等運所緣]요, 열두째는 가장 훌륭함의 반연할 바[最勝所緣]이다.
이 안에서 맨 처음은 벌려 세우는 바 저 언덕에 이름[到彼岸] 등의 차별된 법문(法門)이요, 둘째는 진여(眞如)요, 셋째는 차례대로 곧 앞의 두 가지 것인 줄 알아야 하리니, 저 언덕에 이름 따위의 차별된 법문은 반드시 법계를 통달함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들어서 이루는 지혜[聞所成慧]의 경계이니, 안에서 따로 지니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초지(初地) 중의 견도위(見道位)의경계요, 아홉째는 수도위(修道位) 안에서 7지(地)의 경계까지요, 열째는 곧 7지 중의 세간과 세간 벗어난 도의 품류 차별이어서 부분부분으로 증득함[分分證]의 경계요, 열한째는 제8지의 경계요, 열두째는 제9와 제10의 여래자리[如來地]의 경계이다.
이 안의
첫째와 둘째도 모든 뜻의 위치에 따라 그 여러 이름을 얻는 줄 알 것이다.
이와 같이 이미 반연할 바 위 없음을 설명하였다.
닦아 증득함의 위 없음[修證無上]은 그 모양이 어떤 것인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닦아 증득함이란 모자람이 없음[無闕]과
헐뜯지 않음[不毁]과 요동 않음[不動]과 원만함[圓濟]과
일으킴[起]과 견고함[堅固]과 고르고 부드러움[調柔]과
머무르지 않음[不住], 장애 없음[無障], 쉼이 없음[無息]이다
≪논≫ 이와 같은 닦아 증득함에는 톻틀어 열 가지 있다.
첫째는 종성의 닦아 증득함[種性修證]이니, 인연에 모자람이 없기 때문이요, 둘째는 믿고 앎의 닦아 증득함[信解修證]이니, 대승을 훼방하지 않기 때문이요, 셋째는 마음 냄의 닦아 증득함[發心修證]이니, 낮은 승(乘)에 요동되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넷째는 바른 행의 닦아 증득함[正行修證]이니, 바라밀다가 원만할 수 있기 때문이요, 다섯째는 이생에 듦의 닦아 증득함[入離生修證]이니, 성인의 도를 일으키기 때문이다.
여섯째는 유정을 성숙시킴의 닦아 증득함[成熟有情修證]이니, 견고한 착한 뿌리가 오랜 동안에 모이기 때문이요, 일곱째는 깨끗한 국토의 닦아 증득함[淨土修證]이니, 마음이 고르고 부드럽기 때문이요, 여덟째는 물러나지 않는 자리의 수기를 얻음의 닦아 증득함[得不退地受記修證]이니, 생사와 열반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이 두 가지에서 물러나 옳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아홉째는 부처 자리의 닦아 증득함[佛地修證]이니, 두 가지 장애가 없기 때문이요, 열째는 보리를 나타내 보임의 닦아 증득함[示現菩提修證]이니, 휴식이 없기 때문이다.
무상승(無上乘)의 총괄한 뜻[總義]에는 간략하게 세 가지 무상승의 뜻이 있나니, 바른 행의 위 없음[正行無上]이요, 바른 행을 지님의 위 없음[正行持無上]이요, 바른 행의 결과의 위 없음[正行果無上]이요, 바른 행의 결과의 위 없음[正行果無上]이다.
무엇 때문에 이 논을 변중변(辯中邊)이라고 하는가를 게송으로 말한다.
이 논의 변중변은
깊고 은밀함[深密]과 굳고 착실함[堅實]의 뜻과
넓고 큼[廣大]과 온갖 것[一切]의 뜻을 말하여
모든 상서롭지 않은 것[不吉祥]을 없앴네
≪논≫ 이 논은 중간과 갓의 행을 말씀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한다. 곧 이는 중도에 머무름[處中]과 두 치우침[二邊]의 능히 반연하는 행[能緣行]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또, 이는 중간과 갓의 경계를 말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하나니, 곧 이는 중도에 머무름과 두 치우침의 반연할 바 대경[所緣境]의 뜻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혹은 이것은 처음과 뒤를 여읜
중도의법을 말하기 때문에 변중변이라고 한다.
이 논에서 말한 바는 바로 깊고 은밀한 뜻이니, 모든 머트러운 생각으로 하는 일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바로 굳고 착실한 뜻이니, 다른 이의 말을 능히 꺾고 그에게 조복되지 않기 때문이며, 바로 넓고 큰 뜻이니, 자기나 다른 이를 이롭게 하고 즐겁게 하는 일을 말하기 때문이다.
바로 온갖 것의 뜻이니, 널리 3승(乘)의 법을 결단하여 알기 때문이다. 또 모든 상서롭지 않는 것을 제거하여 없앰이니, 영원히 번뇌장(煩惱障)과 소지장(所知障)을 끊기 때문이다.
내가 말한 이 논의 모든 공덕을
모두 지녀 중생들에게 널리 베풀어서
훌륭한 남[勝生]을 얻고 복과 지혜 더하여
넓고 큰 삼보리를 빨리 증득하게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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