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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558 변정론(辯正論) 7권

by Kay/케이 2024. 7.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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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변정론(辯正論) 7

 


변정론 제7권


법림 지음
이영무 번역


8. 신훼교보편(信毁交報篇)

유생이 물었다.
“불상을 조성하고 불경을 서사하는 것은 본래 현복(現福)을 기대함이요, 재(齋)를 지키고 도를 행하는 것은 눈 앞의 것을 이익하는 데 귀중합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지장(地藏)보살을 염(念)하여도 징험(徵驗)이 없으며,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구원하지 않아서 7난(難)의 재앙이 떠나지 않고 이어져 다투어 모이고, 2구(求)의 원(願)1)이 손을 끌어도 좇아오지 않으니 풍사간(馮士幹)이 성인에게 힐문(詰問)하는 글이 있었고, 양현지(楊衒之)가 신령에게 허물하는 논이 있게 되었습니다. 한갓 신고(辛苦)만 수고할 뿐이고 헛되게 주기(珠璣)만 허비할 뿐이어서 오로지 헛된 말만 있고 실지의 기록은 듣기 드무니, 이는 오직 착함을 하는 자가 그 효험을 입지 못할 뿐 아니라 또한 악한 일을 지은 자들이 도리어 그 영화를 받으니 불교가 도리어 오유(烏有)를 이룸에 어찌하겠습니까?”
보살이 깨우쳐서 말하였다.
“대저 그윽한 자물쇠는 열기 어려우니 오직 믿음만이 들어갈 수 있고, 현묘한 물결은 넓고 넓으니 오직 지혜만이 건널 수 있다. 지혜는 성인의 지위에 뛰어넘는 기초가 되고, 믿음은 범부를 뛰어넘는 근본이 된다. 근본은 믿음으로 인하여 행이 서게 되고, 건너감은 지혜를 의뢰하여야 신(神)이 맑아진다. 믿음은 복을 부름으로써 공을 삼고, 지혜는 근원에 돌아옴으로써 방법을 삼는다.
그러기에 말하기를 ‘지혜가 있는 자는 들음으로써 이치를 알게 되고, 믿음을 가진 자는 스승과 제자의 도를 이룬다’고 하였다.
공자는 ‘군대와 먹을 것은 잊을 수 있지만 믿음은 버릴 수 없다’2)고 하였으니, 이제 그대를 위하여 이 취지를 논하겠다. 대저 감통하는 것은 정성에 있지만 도를 이룸은 간고(懇苦)하여야 하니, 뜻이 전일하지 못하면 도를 어찌 이루겠으며, 마음이 지극하지 못하면 감통하지 못한다.
그러기에 추연(鄒衍)이 길게 탄식하자 여름날에 서리가 떨어졌고, 이광(李廣)이 마음을 집중하자 살에 꽂은 깃이 돌에 박혔으며, 장군(將軍)이 우물에 절을 하니 소륵(疎勒)에서 샘이 솟았고, 명부(明府)에서 머리를 두드리니 강릉(江陵)에서 불이 꺼졌다.
그러기에 간(肝)을 헤쳐서 쓸개를 드러내며, 목숨을 버려서 해골을 던지면 복과 복이 서로 의뢰하고 생각과 생각이 게으르지 않아서 문득 해를 돌리고 장애를 뒤바꿀 수 있을 것이니, 어찌 다만 복을 얻고 은혜를 받을 뿐이겠는가?
밖에 이미 그러함이 있고 안에 또한 걸림이 없고서 만일 관세음보살이 신기하지 못하다면 풍사간(馮士幹)이 무엇을 좇아 죽음을 면하였겠으며, 지장보살이 힘이 없었다면 양효겸(楊孝謙)이 누구로 말미암아 온전함을 얻었겠는가?
건안왕(建安王)은 꿈을 꾸고서 병이 나았다.『감응전(感應傳)』에 ‘제나라의 건안왕이 문둥병을 앓아서 관세음보살을 지성껏 생각하였더니 밤에 관세음보살이 손수 약을 발라줌을 보았는데, 그 이튿날 병이 나았다’ 하였다.
제나라 문선제(文宣帝)는 신령을 내리고서 병이 나았다.제나라 『경릉왕내전(竟陵王內傳)』에 ‘임금이 열병을 얻어 밤중에 두 번 죽었는데 꿈에 황금불상이 손수 신탕(神湯)으로 씻어줌을 보고서 그로 인하여 드디어 평상시대로 회복되었다’고 하였다.
제나라 고왕(高王)은 행을 집행하다가 칼이 부러졌다.제나라 시대에 죄수로서 극형(極刑)을 받을 이가 있었는데, 그가 꿈에 성승(聖僧)이 입으로 그 경을 일러줌을 받고서 지극한 마음으로 외우고 생각하기를 1천 번이 되었다. 그리고서 형을 집행하는데 칼이 부러졌기에 그 죄수가 죽음을 면하였으니, 지금의 『고왕관세음경(高王觀世音經)』이 이것이다.
황금 부처가 죽음을 대신하여 목이 상하였다.『감응전(感應傳)』에 ‘장일(張逸)이 일을 하다가 죽음에 이르렀다. 그가 일찍이 금상(金像)을 조성하여 아침 저녁으로 명을 빌었더니 형벌을 받음에 임하여 칼이 부러지고 목은 상하지 않았다. 관(官)에서 그 까닭을 물으니 장일이 대답하기를 ≺오직 불상을 예경하는 것을 업으로 하였습니다≻ 하기에 조사하여 보니, 그 불상의 목 위에 칼자국 두 개가 있었는데 붉기가 피를 흘린 듯하였다. 장일이 이로 인하여 사형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사씨(謝氏)는 혼과 통하여 죽은 아들을 보고 복을 빌었다.『진록(晋錄)』에 ‘낭야왕(瑯琊王) 응(凝)의 부인 진군(陳郡)의 사씨(謝氏)는 이름은 도(韜)로서 원혁(元奕)의 딸이다. 현묘한 뜻에 마음을 맑히고 자태(姿態)와 재주가 빼어나고 원대하였다. 두 아들을 잃고 아픔이 심하여 6년 동안 유막(帷幕)을 열지 않았다. 그런데 홀연히 두 아들이 돌아왔는데 자물쇠를 채우고 큰 칼을 쓴 것이 보였다. 어머니에게 스스로 관대하기를 권하며 ≺나의 죄는 벗어날 수 없으나 복과 덕을 지으면 면할 수 있습니다≻ 하고 자세히 여러 고통을 말해 주었다. 어머니가 그를 위하여 복을 빌고 복의 도움을 얻기를 바랐다’고 하였다.
손군(孫君)은 유계(幽界)에 도달하여 죽은 자식을 보고 재(齋)를 영위(營爲)하였다.『선험기(宣驗記)』에 ‘손조(孫祚)는 제나라 저양(沮陽) 사람으로서 지위가 태중대부(太中大夫)에 이르렀다. 작은 아들 치(稚)의 자는 법휘(法暉)로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지혜스러워서 부처님의 법을 받들었는데 나이가 열여덟 살이 되던 진(晋)나라 함강(咸康) 원년에 계양군(桂陽郡) 전체가 병을 앓았을 때 그가 죽었다. 손조는 무창(武昌)의 책임자로서 도임(到任)한 지 3년이 되는 4월 8일에 죽은 아들을 위해 법의 장소를 널리 열고 부처님을 모시고 스님을 청하여 재를 세우고 도를 행하였더니, 죽은 아들 치가 그 무리 가운데 있다가 불상 뒤에 숨길래 쫓아가서 그를 불러 물으니, 치가 꿇어앉아 절하고 기거(起居)를 모두 말하면서 문득 부모를 따라 집에 돌아왔다. 아버지가 병이 있으니, 치가 ≺병을 걱정 마십시오. 5월이 되면 나을 것입니다≻ 하고, 간곡하게 ≺복을 지으면 혼을 구제하여 고통을 면할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일이 헛되지 아니하였다’고 하였다.
장서(長舒)는 한 번 부름에 바람이 돌려 불었고, 소년(少年)은 네 번 던졌으나 불이 꺼졌다.『진록명상기(晋錄冥祥記)』에 ‘진나라 때에 축장서(竺長舒)라는 자가 있었으니 본래 천축 사람이다. 마음을 오로지 하여 『관세음경(觀世音經)』을 외우는 것으로 업을 삼았다. 후일 오중(吳中)에 살았을 적에 그때에 오중의 읍 안에 불이 나서 집과 서까래와 기와가 서로 얽혀 다 불타서 구원할 수가 없었다. 축장서가 사는 집이 바로 바람맞이에 있기에 마음으로 불탈 것을 생각하고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불이 축장서의 집에 이르자 바람이 돌려불어 불이 꺼짐에 온 집안이 화를 면하였다. 읍 전체가 놀라고 이상하다 여겨 신이 있음을 감탄하였다. 그때에 흉악한 소년이 있었는데, ≺그 늙은 오랑캐가 무슨 영응(靈應)이 있기에 그 집이 불에 타지 아니하는가?≻ 하고, 훗날 바람이 몹시 불 적에 그 소년이 불을 붙여 그의 집에 네 번을 던졌으나 불이 다 꺼졌다. 그 소년이 놀라고 감탄하여 그 이튿날 머리를 조아리고 사과하니, 축장서가 ≺나는 신통의 힘이 없고 항상 관세음보살 부르는 것을 업으로 하여 매양 일이 있으면 항상 벗어남을 얻는다≻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승홍(僧洪)은 금함에 있을 적에 주조한 불상이 승홍의 머리를 만졌다.『명상기(冥祥記)』에 ‘진나라 때에 사문 승홍이 경사의 와관사(瓦官寺)에 있었는데, 의희(義熙) 12년이 되던 해에 관에서 쇠로 붓는 것을 금지하였으나 승홍은 이미 장륙금상(丈六金像)을 부어 만들기를 발심하였다. 그래서 만일 장륙금상이 원만하게 이루어지면 자기는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 하고 불상을 몰래 부어 만들었는데 붓기를 마쳤으나 불상은 아직 모형(模型)에 있었다. 쇠붙이를 맡은 관에서 승홍을 잡아다가 금족(禁足)을 시켜 부(府)에 두고 칼집을 씌우기를 매우 엄히 하였다. 이에 승홍이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念)하여 날마다 1백 번씩 외웠더니 꿈에 부어 만든 불상이 옥으로 와서 손으로 승홍의 머리를 만지면서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그 불상의 가슴 앞에 한 자 남짓 구리 빛으로 새까맣게 타 있었으니 승홍이 구금(拘禁)되던 날에 해당하였다. 국가에서는 소와 말도 감옥 속에 들어가는 것을 수긍할 수 없었는데 불상이 직접 들어간 것이다. 그때에 이를 괴상하게 여기었다. 열흘 뒤에 칙명이 팽성(彭城)에 이르러서 승홍이 그로 인하여 방면되니 불상이 곧 모형(模型)을 깨고 스스로 나타났다’고 하였다.
아련(阿練)이 생을 의탁하였고 오랑캐의 말이 입에서 저절로 나왔다.『명상기』에 ‘낭야왕 민(珉)은 그의 아내가 아들이 없어 항상 관세음보살께 아들 낳기를 빌었다. 민이 그 뒤에 길을 가다가 한 오랑캐의 중을 만나서 마음으로 매우 즐거워하였다. 그 중이 ≺내가 죽으면 그대의 아들로 태어나겠다≻고 하였는데, 잠시 후 길 가다가 과연 죽었으며, 3개월 만에 민의 아내가 아이를 배었고 그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말하며 서역 16국의 말을 하였고 몹시 총명하며 기량(器量)이 있었으니, 이가 진나라 상서 왕연명(王淵明)의 몸이다. 그러기에 어렸을 때에 이름을 아련(阿練)이라 하였다. 전생 때의 일을 진술해서 말하였는데 일마다 증험이 있었다’ 하였다.
덕조(德祖)가 일심으로 염하였더니 구름이 오랑캐의 기마병(騎馬兵)을 헤매게 하였다.『선험기』에 ‘영양(榮陽) 사람 모덕조(毛德祖)가 처음 강남(江南)에 나갈 적에 사잇길로 가다가 길에서 오랑캐의 기마병을 만나 쫓기게 되어 엎드려서 길 가의 쑥밭 안에 있었는데 풀이 짧고 쑥이 성글게 있어서 몸뚱이의 반이 드러났기에 죽는 줄 알았는데, 온 집안이 잠자코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더니 갑자기 구름이 일고 비가 퍼부어서 드디어 난(難)을 면하였다’고 하였다.
이유(李儒)가 묵묵히 관세음보살을 염함에 적마(賊馬)의 무리가 놀랐다.『선험기』에 ‘대주(隊主) 이유가 뒤에 호뇌(虎牢)를 진압하였는데, 위나라 오랑캐에게 포위되어서 위급하여 항복하고자 하여 밤에 성을 넘어 나와보니 적(賊)들이 종횡으로 누워 있었다. 이유가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문득 적이 있는 곳을 통과하여 어떤 마른 연못에 이르렀을 적에 적들이 쫓아왔다. 이유가 급하여 풀 속에 들어갔으나 미처 엎드려 숨지 못하였는데 적의 말들이 풀을 향하였다. 이유가 크게 놀라서 일심으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더니 적의 말들이 갑자기 놀라서 달아났다. 이유가 이 때문에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였다.
곽선(郭宣)은 돈을 주어 질곡에서 저절로 풀려났으나, 문처무(文處茂)는 서약을 어겼다가 날아오는 화살을 맞았다.진나라 의희(義熙) 11년에 태원군(太原郡)의 곽선과 촉군(蜀郡)의 문처무가 예전에 양주자사(梁州剌史) 양수경(楊收敬)과 벗이었는데 양수경이 사람을 해침으로써 감옥에 갇혔기에 곽선과 문처무도 함께 옥살이를 하였다. 그래서 두 사람이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더니 10일이 된 뒤 밤 3경의 꿈에 한 보살이 위로하여 주면서 ≺큰 명령이 있으니 염려하지 말라≻고 하였는데, 꿈을 깨니 자물쇠의 칼이 스스로 풀렸다가 새벽이 되면 다시 그 칼이 씌워졌다. 이러하기를 두어 번 지냈다. 이 두 사람이 서로 경하하면서 원을 발하기를 ≺만일 죄를 면하게 되면 각기 돈 10만씩을 내서 상명서사(上明西寺)에 주어 공덕을 짓자≻ 하고 함께 굳은 맹서를 하였는데 얼마 뒤에 과연 두 사람이 다 죄를 면하였다. 곽선은 원에 따라 돈을 보내 상명서사에 주었는데 문처무는 맹세를 어기고 보내지 않았다. 노순(盧循)이 군사를 일으킴에 문처무는 군대에 있으면서 사포(査浦)에 머물 적에 날아오는 화살에 맞았는데 죽기 전에 ≺내가 큰 죄를 지었다≻고 말을 마치고는 죽었다’고 하였다.
하호(何瑚)는 성(聖)을 감득하고서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하씨전(河氏傳)』에 ‘하호(何瑚)의 자는 중보(重寶)이다. 양나라에서 북정자의(北征諮議)가 되었다. 그는 보고 들음이 넓고 학문에 힘써서 처음 북정자의의 명이 있었을 적에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다스려서 큰 뜻을 대략 통하였다. 효도하는 성품이 순수하게 깊어서 어버이 섬기기를 공손하게 하고 삼갔으며 어머니의 병으로 의사를 구할 적에 수레와 말을 타지 아니하였다. 홀연히 성스러운 스님을 만났는데 몸의 바탕이 뛰어나게 달랐다. 손에 향로를 들고 와서 재식(齋食)을 구하였고 이름에 일찍도 늦음도 없었으니 그의 비상함을 의심할 만하다. 이와 같이 하기를 10여 일에 어머니의 병이 문득 나으니 그 성스러운 중이 사양하고 가면서 흰 색으로 된 책 『반야경』 한 권을 남겨두고 인하여 하호의 손을 잡으면서 ≺빈도(貧道)는 27현성 가운데 물러서지 않는 자질을 가진 사람이다. 단월(檀越)의 지극한 마음에 감동하여 와서 병을 구원하였는데, 이제 병든 자가 이미 쾌차하였으니 빈도는 돌아감이 마땅하다≻ 하고 말을 마치면서 앞으로 갔는데 갑자기 보이지 않고 향로의 향기가 열흘 만에 멎었다. 하호의 정성에 감동하여 조정과 지방이 다 탄복하였다. 그는 집을 희사하여 월애사(月愛寺)를 지었다’고 하였다.
장응(張應)이 삿됨을 버리니 아내의 병이 드디어 나았다.『영귀지(靈鬼志)』에 ‘역양군(歷陽郡)에 사는 장응은 원래는 마(魔)의 가문이었는데 불가의 여자에게 장가들어 아내를 삼았다. 함화(咸和) 8년에 무호(無湖)로 이사가서 살았는데 아내가 병이 들었기에 그로 인하여 마의 일을 하여서 집의 재산이 다 없어져도 병이 낫지 않았다. 아내가 ≺나는 본래 부처님 집의 여자니, 빕니다. 나를 위하여 부처님의 일을 지어 주십시오≻라고 하기에 장응이 절에 가서 축담경(竺曇鏡)을 보니 그가 ≺부처님께서는 널리 중생을 건지시오. 그러니 그대는 일심으로 신계(身戒)를 받아 가지시오. 내가 내일 집에 가겠소≻라고 하였다. 장응이 그날 저녁에 꿈을 꾸었는데 키가 한 길 5ㆍ6 척은 되는 이가 바로 남쪽을 향하여 걸어 들어오면서 ≺이 집안이 적적하고 왜 그렇게 깨끗하지 못한가?≻ 하였는데, 축담경이 이 사람의 뒤를 따라오면서 ≺이 집이 비로소 발심하고자 하니 한두 가지만 가지고 책망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장응이 옛날부터 손재주가 있었기에 잠이 깨어서는 문득 불을 잡아 높은 자리와 귀자모(鬼子母)의 자리를 만들었다. 축담경이 그 이튿날 밥먹을 때에 장응의 집에 가니 높은 자리들이 구족하게 이미 이루어졌다. 장응의 꿈 이야기를 듣고서 남편과 아내가 5계(戒)를 받았으며 병이 또한 곧 나았다’ 하였다.
강아득(康阿得)은 탑을 조성하고서 놓여 돌아왔다.『유명록(幽明錄)』에 ‘강아득이 죽은 지 3일 만에 다시 깨어나서 말하기를 처음 죽었을 때에는 두 사람이 나의 겨드랑이를 붙잡았고, 흰 말을 탄 관리가 나를 몰고 갔는데, 몇 리를 갔는지 알지 못하였다. 북쪽으로 향한 검은 문이 보이기에 남쪽으로 들어가니 동쪽으로 향한 검은 문이 보이고, 서쪽으로 들어가니 남쪽으로 향한 검은 문이 보이기에 북쪽으로 들어가니 10여 채의 기와집이 보였다. 어떤 사람이 조복(皂服)과 농관(籠冠)으로 있었으며 그 주변에는 20여 명의 관리가 있었는데, 다 부군(府君)이라 이른다. 서남쪽에 다시 사오십 명의 관리가 있었다. 내가 곧 앞에서 부군에게 절하니, 부군이 내게 ≺어느 곳에서 봉사(奉事)합니까?≻라고 하여 내가 ≺집에서 부처님의 도상과 탑과 절을 조성하여 도인에게 공양합니다≻ 하니, 그 부군이 ≺그대는 큰 복덕을 지었소≻ 하고, 도록사자(都錄使者)에게 ≺이 사람의 수명이 다 끝났습니까?≻ 하니, 그 사자가 한 권의 책을 가져다가 땅에 엎드려 조사하여 보았는데 그 글자가 매우 작았다. 그 사자가 ≺아직 35년이 남았습니다≻ 하니, 부군이 크게 성을 내어 ≺작은 관리가 어찌 감히 사람의 수명을 빼앗는가?≻ 하고 흰 말을 탄 관리를 묶어 기둥에 결박하여 놓고 1백 대를 치니 피가 흘러 넘쳤다. 다시 내게 ≺돌아가고 싶습니까?≻ 하여 내가 ≺그렇습니다≻ 하니, 부군이 ≺이제 돌려보내되 가는 길에 편도의 지옥을 안내하여 구경시키겠소≻ 하고 즉시 말 한 필과 종자 한 사람을 주었다.
동북쪽으로 나와서 몇 리를 갔는지 알지 못하는데 한 성(城)이 보이니 사방이 수십 리나 되었다. 성에 가득히 집이 있는데 내가 부처님을 섬기기 전에 죽은 백부(伯父)와 백모(伯母)와 숙부와 숙모가 다 형틀에 있었으며 의상이 찢어지고 신체에서 피고름이 났다. 다시 앞으로 가니 한 성이 보였는데 그 속에 철상 위에 누워 있는 자가 있었는데 그 철상이 마침 붉어졌다. 무릇 10여 개의 옥을 보니 각기 통증과 고통이 있었고, 감옥 이름이 적사(赤沙)ㆍ황사(黃沙)ㆍ백사(白沙)였다. 이와 같은 일곱 개의 사(沙)에는 도산(刀山) 지옥과 검수(劒樹) 지옥이 있었으며 죄인들이 벌겋게 단 구리 기둥을 안고 있었다.
이에 돌아오니 다시 칠팔십 채의 기와집이 보였고 길을 끼고서 괴목(槐木)을 심었는데 복사(福舍)라고 하였다. 모든 부처의 제자들이 그 속에 사는데 복이 많은 자는 위로 천상에 태어나고, 복이 적은 자는 이 집에 산다고 한다. 큰 집이 20여 채가 멀리 보이는데 어떤 남자와 두 부인이 전상(殿上)으로 좇아 내려오니 이들은 내가 부처님을 섬긴 뒤에 죽은 백부와 백모와 숙부와 숙모들이다. 조금 있으니 한 도인이 와서 내게 ≺나를 알겠습니까?≻ 하여 내가 ≺잘 알지 못하겠소≻ 하니, 그 도인이 ≺그대가 어이하여 나를 알지 못한다 합니까? 내가 그대와 같이 부처님을 조성한 도표의 목수요≻ 하기에 서로 웃으며 기억하였다. 내가 돌아와 그 부군이 있는 장소에 이르러서 전에 시종으로 보냈던 두 사람을 보내고 돌아오니 문득 깨어서 살아났다’ 하였다.

석현(石賢)은 스님들께 공양올리고 살아남을 입었다.『유명록』에 ‘석장화(石長和)가 죽은 지 4일 만에 깨어나서 말하기를 처음 죽었을 적에 동남쪽으로 가다가 보니 두 사람이 길을 다스리고 있었는데 항상 거리가 50보였고 내가 빨리 가도 또한 그러한 거리였다. 길 양쪽에 가시나무를 심어 놓았는데 날카롭기 매발톱과 같았고, 크고 작은 여러 사람들이 가시나무 속을 달려가는데 마치 쫓겨가는 몸처럼 신체가 찢겨 있었고 땅바닥에 피가 고여 있었다. 가시 가운데의 사람들은 내가 홀로 평평한 길을 걷는 것을 보고 탄식하며 ≺부처님의 제자는 홀로 큰 길을 가는구나≻라고 하였다. 내가 앞으로 나가니 칠팔십 채의 기와집이 있었고 그 집 속에는 각(閣)이 10여 개가 있었으며 들보 뒤에 창문이 있고 그 안에 사람이 있었는데, 얼굴을 돌렸으나 바야흐로 석 자나 되었다. 조포(皂袍)를 사방으로 꿰맨 것을 입고, 겨드랑이를 기대고 향해 앉으니 오직 옷깃 이상만 보였다.
나를 보고 곧 향하여 절을 하고 또 ≺석현(石賢)이라는 분이 오셨소. 우리가 이별한 지 20여 년이오≻ 하여 내가 ≺그렇소≻ 하고 뜻 가운데 기억하는 것이 있는 듯하였다. 이때에 풍익(馮翊) 맹승(孟承)이 있었다. 부부가 먼저 죽었는데 각(閣) 위의 사람이 ≺석현(石賢)씨여, 맹승을 아십니까?≻ 하여 내가 ≺아는 처지요≻ 하니, 각 위의 사람이 ≺맹승은 살아 있을 때에 정진(精進)을 안 하였기에 이제 나를 위하여 땅바닥을 쓸고 있으며, 맹승의 아내는 정진을 잘 하였기에 편히 지내며, 관가(官家)의 일을 보고 있소≻ 하였다. 각 위의 사람이 손을 들어 서남쪽의 한 방향을 가리키며 ≺맹승의 아내가 지금 방에 있소?≻라고 하였다. 맹승의 아내가 즉시 창문을 열어 향하여 석장화를 보면서 ≺석현씨가 언제 왔습니까?≻ 하고 자기 집안의 아들딸의 크고 작은 이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두 잘 있습니까? 당신이 돌아갈 때는 이곳을 지나갈 것이니 편지 한 통을 부탁하겠소≻ 하였다. 조금 있으니 맹승이 각의 서쪽에서 오는 것이 보이는데 한 손에는 빗자루를 들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들고 오며 또한 집안의 소식을 물었다.
각 위의 사람이 ≺들으니 어룡초(魚龍超)가 정진을 닦는다고 합니다. 참말입니까? 어떠한 수행을 합니까?≻ 하여 내가 ≺그는 물고기와 고기를 먹지 않으며 술을 입에 대지 않고 항상 높은 경을 굴리며 여러 병든 사람을 구제합니다≻ 하니, 각 위의 사람이 ≺전하는 말이 참말이구려≻ 하고 각 위의 사람이 도록(都錄)을 맡은 자에게 ≺석현은 수명이 다 된 것입니까? 그의 수명을 잘못 뺏은 것입니까?≻ 하니, 기록을 맡은 자는 40여 년을 더 기록에 넣었다.
각 위의 사람이 기록을 맡은 자에게 ≺홀로 타는 수레 한 대를 장만하라≻ 하니, 양쪽에 거기(車騎)를 탄 두 관리가 나를 보내는데 잠깐 사이에 동쪽으로 향하여 문득 수레와 말을 탄 사람이 따르니 차견(差遣)한 수와 같았다.
내가 절하여 사례하고 수레에 올라 돌아오니 전에 행하던 길 가에 정(亭)과 전(傳)과 관리와 백성과 걸상과 자리와 먹고 마시는 도구가 있었다. 내가 갑자기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이 나의 시체 곁에 앉아 있고 나의 시체가 크게 소만한 것이 보였다. 내가 시체의 냄새를 맡고 시체 가운데 들어가지 않으려 하여 시체를 세 번 돌았다. 내가 탄식하며 시체의 머리를 대하여 앞으로 가니 나의 죽은 누이가 뒤를 미는 것이 보이기에 문득 시체의 얼굴 위에 떨어졌다. 그로 인하여 깨어났다’고 하였다.

오래 된 귀신은 지혜가 많아서 괴이함을 나타내어 배불리 먹었고, 새 귀신[新鬼]은 아는 것이 없기에 불가(佛家)에 들어와서 점차 연마(硏磨)하였다.『편략(遍略)』에 ‘새 귀신이 음식을 얻지 못하여 형체가 수척하였다. 갑자기 옛 친구를 만났는데 그는 죽은 지 여러 해가 되어 형체가 살찌고 건강하였다. 서로서로 안부를 물은 다음에 그 귀신에게 사는 방법을 물으니 오래 된 귀신이 ≺사람들을 위하여 괴상한 짓을 하면 사람들이 반드시 크게 놀라서 그로 인하여 음식을 가져 오네. 그래서 이렇게 살찌고 건강하네≻ 하니, 새 귀신이 문득 부처님 섬기는 집에 들어가니 그 집은 정진하여 항상 착한 업을 닦았다. 그 집 서쪽에 멧돌이 있기에 귀신이 가서 미니 그 집 주인이 크게 기뻐하며 자제에게 신칙하여 ≺우리 집이 지극히 가난하기에 착한 신이 가는 것을 돕는다≻ 하고 연자방아를 급히 굴려 보리를 찧기를 저물도록 하니 수십 곡(斛)의 보리를 찧었다. 새 귀신이 먹을 것은 얻지 못하고 피곤만 심하였기에 그 집을 떠나가서 다시 어떤 집에 이르러서 방아에 올라가 찧으니 그 집은 바로 믿는 집이었기에 서로 기뻐하면서 ≺어제는 아무개 집의 맷돌이 굴더니 이제는 우리의 방아를 돕는다≻ 하고 더 곡식을 찧어 여종으로 하여금 키질을 하게 해서 날이 저물 때까지 하니 50여 곡(斛)의 쌀을 얻었다. 새 귀신은 이와 같이 피곤하기만 하고 또 먹을 것은 얻지 못했기에 마음속으로 분한 생각이 나서 스스로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날 밤에 다시 오래 된 귀신을 만나 원망과 책망을 펴니 오래 된 귀신이 ≺그대가 스스로 생각지 못한 것이다. 그 두 집은 부처님을 받들고 바로 믿으니 그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어렵다. 그러나 마음 씀이 한결같이 지극하면 또한 감동이 철저할 것이니 명계(冥界)에 있는 우리들이 바로 그 편에 해당한다. 이제 가서 문 앞에 죽간(竹竿)을 세우고 노끈을 끊고 입에 물대는 집을 찾아서 그 곳에 가서 괴상한 짓을 하자≻ 하였다. 새 귀신이 그 말대로 한 집에 이르니 문에 죽간이 있고, 여러 여자들이 창문 앞에서 함께 먹는 것이 보였다.
뜰 가운데 흰 개가 한 마리 있기에 새 귀신이 그 개를 공중에서 다니게 하니 그 집에서 놀라고 두려워하여 ≺태어난 후로 이런 괴이한 일은 보지 못하였다≻ 하고 점치는 데 가서 물으니, 점치는 이가 ≺이는 객귀(客鬼)가 먹을 것을 찾는 것이니 그 개를 잡아서 떡과 과일을 만들어 뜰 가운데서 제사지내면 다른 탈이 없을 것이오≻ 하기에 그 점치고 이의 말과 같이 하였더니 새 귀신이 드디어 먹을 것을 얻었고, 뒤에는 항상 배불렀다’고 하였다.

조태(趙泰)는 정밀히 생각하여 오직 착함만을 구하였다.『유명록』에 ‘조태의 자는 문화(文和)로서 청하패구(淸河貝丘)의 사람이다. 공부(公府)에서 불러도 나가지 않고, 전적(典籍)을 정밀히 생각하여 향당(鄕黨)에서 이름을 일컬었다. 나이 35세, 진(晋)나라 대시(大始) 5년 7월 3일 밤중에 죽으니 심장병으로 죽었지만 심장의 위가 따뜻하며 신체를 굽히고 펴고 하였기에 시체를 10일 동안 두었더니, 기운이 목구멍으로부터 나왔는데 우레 소리와 같았으며 눈을 뜨고 음식을 찾으면서 문득 일어나서 말하기를 처음 죽었을 때에 두 사람이 있었는데 누런 말을 타고 병사 두 사람을 쫓아가며 다만 ≺잡아 갑시다≻라고 말하였다. 두 사람이 두 겨드랑이를 붙잡고 동쪽으로 갔는데 몇 리를 갔는지 알 수 없었다. 문득 큰 성이 보였는데 주석과 쇠로 만든 듯하며 바로 높이 솟았다. 서쪽 성문으로 쫓아 관의 부사(府舍)에 들어가니 이중의 검은 문이 있었으며, 수십 채의 기와집에 남자와 여자가 한 오륙십 명은 살고 있었다. 관리는 검은 홑옷을 입었는데 오륙 명을 데리고 성자(姓字)와 남녀를 구별하여 적었다. ≺움직이지 말고 입과(入科)3)를 부군(府君)에게 드려라≻고 했다. 나의 이름은 서른 번째에 있었다. 조금 있다가 가지고 들어가니 부군이 서쪽으로 향하여 앉아 있다가 과(科)를 내미니 이름을 보았다.
다시 그것을 가지고 남쪽의 검은 문에 들어가니 한 사람이 붉은 옷을 입고 큰 집의 아래에 있어서 차례대로 이름을 부르면서 먼저 생년월일과 행하였던 일과 무슨 죄와 허물이 있으며 무슨 공덕을 지었으며 무슨 착한 행을 하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는 것이 각각 같지 않았다.
주관하는 자가 ≺그대들이 말하기를 허락한다. 이곳에서는 항상 6부(部)의 감독하고 기록하는 사자(使者)를 보내어서 항상 인간 세상에 있으면서 사람들이 짓는 착하고 악한 일들을 기록하여 서로 대조하여 검교한다. 사람이 죽으면 세 가지의 악한 길이 있는데 산 것을 죽이는 것과 음사(淫祠)하는 것이 가장 무거우며, 부처의 법을 받들어 5계(戒)를 지니고 10선(善)을 행하며 자비한 마음으로 보시를 하면 죽어서 복사(福舍)에 있어 편안히 살며 하는 것이 없다≻ 하였다.
내가 ≺나는 한 가지도 한 일이 없고 그렇다고 악을 범한 것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과문(科問)을 모두 마치고는 나에게 수관(水官)이 되게 하였다. 감독하며 관리하는 자는 1천여의 사람들을 데리고 모래를 운반하여 언덕 위에 두는 일이었다. 밤낮으로 애써가며 부지런히 일하여 울면서 뉘우쳐 ≺살았을 적에 착한 일을 아니하였기에 이제 이러한 곳에 떨어졌으니 돌아가서 대(代)를 찾겠다≻고 하였다.
나는 뒤에 수관도독(水官都督)으로 옮겨 모든 옥의 일과 말과 군사를 대주는 일을 감독하여 처리하였다.
동쪽으로 가서 지옥으로 안내하여 갔으며, 다시 이리(泥犁)지옥에 이르러 보니 남녀 오륙천 명이 있었고, 큰 나무가 있었는데 가로와 너비가 5십여 보(步)이고 높이가 1천 장(丈)이며, 사변(四邊)에 다 칼이 있었다. 위의 일을 한 사람은 그 나무 위에 올라가서 불을 쪼이지만 그 아래는 십십(十十) 오오(五五)로 불타는 칼 위에 떨어져서 그 몸을 찌른다. ≺이 사람은 저주하고 꾸짖어 말하며 남의 재물을 뺏고 선량한 사람을 해쳤던 자다≻라고 하였다.
나의 아버지 어머니와 두 동생이 이 지옥 가운데 있으면서 우는 것이 보였다. 조금 있다가 두 사람이 문서를 싸가지고 와서 옥리(獄吏)에게 ≺이 세 사람은 집에 부처를 섬기고 절을 찾아가서 번(幡)을 달고 향을 피우며 주문을 읽어 원하였으니 살아 있을 때의 죄와 허물을 구원하여 풀어주어라≻ 하여 복사(福舍)로 나가자 자연히 의복을 입게 된 것이 보였다.
지름길로 한 문에 이르니 그 집을 개광대사(開光大舍)라고 일렀다. 세 겹의 검은 문이 있었는데 다 흰 벽에 붉은 기둥이었다. 이 세 사람이 곧 그 문에 들어가니 대전(大殿)에는 여러 가지의 보배가 눈을 어리치게 빛나고 있었고, 당에는 두 마리의 사자가 나란히 엎드려서 하나의 금옥(金玉)으로 된 상을 짊어지고 있었는데 황금 사자좌(獅子座)라고 불렸다. 어떤 사람이 몸길이가 한 길 여섯 자가 되고 얼굴빛이 황금빛이요, 목에 해의 광명이 있었는데 이 자리 위에 앉아 있었고, 사문이 서서 모셨는데 사방에 앉아 있는 이들은 모두 진인(眞人)이요, 보살들이었다. 태산부군(泰山府君)을 보고 예하고서 내가 그 관리에게 저기 앉아 있는 분이 누구냐고 물으니 그 관리가 ≺부처님이오.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사람을 제도하는 스승입니다≻ 하기에 내가 다시 부처님께 물으니 부처님께서 ≺자비로써 이 악도의 가운데와 여러 지옥의 사람들을 제도하여 다 나가서 법을 듣게 한다≻ 하셨다. 그때에 제도를 받은 자가 1백만 9천 사람이니, 이들이 한꺼번에 나갔기에 지옥이 다 비었다. 이들을 백 리나 되는 성 가운데 옮겨 있게 하니 이 가운데 있는 자들은 모두 부처의 법을 받드는 제자들로서 이 복사에서 지내기를 7일을 하고서 행한 것의 공덕이 조금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는 것을 보았다.
또한 열 사람을 불러서 하늘 위에 나게 함을 보았는데 수레와 말과 시종이 있었으며, 맞이하여 허공에 올라감을 보았다. 또 다시 한 성을 보았는데 세로와 너비가 2백여 리나 되는데, 이수변형성(吏受變形城)이라고 하였다. ≺살았을 때에 도법(道法)을 듣지 못한 자는 지옥에서 상고하여 다스리고, 이미 마친 자는 이 성에서 다시 형체가 변하는 과보를 받는다≻ 하였다.
이 문에 들어와서 보니 수천만 개의 흙집과 방(坊)과 골목이 있었는데, 그 중앙에 큰 기와집이 있었으니 너비가 5십여 보나 되고 그 큰 집 밑에 5백여 명의 관리들이 있어서 사람이 이름을 대조하여 거두었다. 그래서 착하고 악한 행장에 따라 몸의 형체가 변하는 길을 받아서 각기 갈 길을 따라 갔다. 살생한 자는 하루살이 벌레가 되어서 아침에 태어났다가 저녁때에 죽으며, 설사 그곳에서 나와 사람이 되더라도 항상 단명(短命)한다 하며, 도둑질한 자는 돼지와 염소의 몸이 되어서 고기를 도살(屠殺) 당하여 사람에게 갚는다 하며, 음행을 한 자는 집비둘기와 따오기와 뱀의 몸을 받아 난다 하며, 이간질하는 말을 한 자는 독수리와 부엉이와 산비둘기의 몸이 되어 악한 소리를 사람이 들으면 다 주문을 외워 죽게 한다 하며, 빚을 진 자는 노새와 나귀와 말과 소와 물고기와 자라의 무리가 된다 하였다.
큰 집의 아래에 땅이 있고 문호가 북쪽으로 향하고 한 문호는 남쪽으로 향하였는데 불러서 북쪽 문호로 따라 들어가서 남쪽 문호로 나오는 자는 다 몸의 형체가 변하여서 새와 짐승이 되는 것들이다.
또 한 성이 있었는데 세로와 너비가 백 리나 되었다. 그 가운데 기와집은 살기가 편안하였다. ≺살아 있을 적에 악한 행을 하지 않았으나 큰 도를 보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죄도 받지 않은 자니 이름을 귀신성이라 한다. 그 성에서 1천 해를 지나고 나와서 사람이 된다≻ 하였다.
또 어떤 성은 너비가 5천여 보나 되었다. 이름을 지옥이라 하며 중간에 귀양간 자를 벌주며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돌아와서 대(代)를 찾으니 이를 귀양살이를 푼다고 한다. 이들은 다 이 성 가운데 있는데 남녀가 오륙십만 쯤 되는 이들이 다 벌거벗어 옷이 없었고, 굶주리고 피곤함을 서로 부지하였다. 이들이 나를 보고 머리를 두드리며 통곡하였다.
내가 그 관리에게 ≺천도(天道)와 지옥도의 문 거리가 얼마나 됩니까?≻ 하니, 그 관리가 ≺천도와 지옥도의 문은 서로 마주 있어서 서로 통하오≻ 하였다. 내가 지옥을 맡은 이에게 ≺지옥은 법답습니까?≻ 하니, 지옥의 책임자가 ≺그대는 죄가 없기 때문에 수관도독(水官都督)이 되었소. 그렇지 않았으면 지옥의 사람들과 다를 것이 없었을 것이오≻ 하였다.
내가 ≺사람이 죽어서는 무엇을 즐거움으로 합니까?≻ 하니, 옥의 책임자가 ≺오직 부처님의 제자만이 정진을 하여 금계(禁戒)를 범하지 않음을 낙으로 삼습니다≻ 하니, 내가 ≺부처님을 받들지 않았을 때는 죄의 허물이 산같이 쌓였는데 이제 부처님의 법을 받든다면 그 허물이 없어집니까?≻ 하니, 옥의 책임자가 ≺다 없어집니다≻ 하였다. 옥의 책임자가 도록(都錄)하는 사자를 불러서 ≺조문화는 무엇 때문에 죽어서 왔는가?≻ 하니, 그 사자가 눈을 들어 나이를 기록한 호적을 보니 아직도 남아 있는 나이가 30년은 더 있었는데 잘못 하여 악한 귀신에게 쫓겨서 온 것이기에 이제 보내서 집에 돌아오게 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큰 이나 작은 이나 모두 발심하여 부처를 받들게 되어서 죽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위하고 두 아우를 위하여 번(幡)을 달았으니 대개 복의 모임을 지은 것이다’ 하였다.

왕탄(王坦)은 의심을 품었다가 죽어 보고서야 징험하였다.『속수신기(續搜神記)』에 ‘사문 축법도(竺法度)는 전에 비중(比中)의 중랑장(中郞將)으로 있던 왕탄(王坦)과 친구로 지냈다. 그래서 함께 삶과 죽음, 죄와 복의 보응(報應)의 일을 의론하였으나 어둡고 어두워서 밝히기 어려웠기에 있는 지 없는지를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서로 약속하기를 ≺만일 먼저 죽으면 그 신(神)은 앎이 있을 것이니 죄와 복의 결정되는 것을 서로 알려 주자≻ 하였다. 왕탄이 뒤에 도읍에 있을 적에 갑자기 축법도 스님이 오는 것을 만났기에 왕탄이 놀라서 ≺상인(上人)께서 어디로부터 오십니까?≻ 하니, 축법도가 ≺빈도(貧道)가 아무 달 아무 날에 죽었는데 죄와 복이 다 헛되지 않아서 일이 몸에 그림자 따르듯 하오. 단월(檀越)께서 다만 항상 도덕을 부지런히 닦아서 신명(神明)이 좋은 곳에 오르게 구제하시오. 먼젓번에 그대와 약속을 하였기에 이제 와서 말해 주는 것이오≻ 하고 말을 마치고서 인하여 보이지 않았다’ 하였다.
5층의 탑을 아직 짓지 않았는데 형(刑)에 임했으나 칼날이 부러졌다.영양(榮陽)에 사는 고구(高苟)는 나이가 50이었는데 사람을 죽인 죄로 구속되어 옥에서 항쇄(項鎖)와 족쇄를 하니 그의 생각에 반드시 죽을 것 같았다. 같이 옥에 있는 자가 ‘노력해서 함께 관세음보살을 염하자’고 하니, 고구가 ‘나의 죄가 너무 무거우니 마음으로 달게 죽음을 받을 뿐이오. 무엇 때문에 억지로 면하겠습니까?’라고 하였으나 같이 옥에 갇힌 자가 권하기에 고구가 그를 인해 발심을 하여서 ‘맹세코 악을 버리고 착함을 행하며 오로지 관세음보살을 염하여 잠깐도 쉬지 않겠소. 만일 죽음을 면하여 벗어나면 5층의 부처님 탑을 짓고 몸을 버려 종이 되어 여러 스님들을 공양하겠소’ 하고 1개월을 정성들였더니 항쇄와 족쇄가 저절로 풀렸다. 감사가 이를 보고 놀라고 괴상하게 여겨 고구에게 ‘부처와 신이 그대를 불쌍하게 여긴다면 목을 베어도 죽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형을 집행하는 날에 칼을 들어서 아직 형의 집행을 하지 않았는데 칼이 부러지고 칼날이 끊어졌다. 일을 맡은 이가 이 사실을 아뢰어서 죽음을 용서받아 면하였으니, 이 사실은 『선험기(宣驗記)』와 『속수신기』에 나와 있다.
한 거위가 죽으려 할 적에 꿈을 얻고서 형체가 온전하였다.송나라 오흥(吳興) 태수 낭야의 왕습지(王襲之)는 학문에 있어서 장자와 노자를 좋아하면서 부처를 믿지 않았으며, 오직 살생하는 것으로 뜻을 삼았다. 처음에 진서성(晋西省)의 낭중(郞中)이 되었는데, 지극히 빈객(賓客)을 좋아하였고 내성(內省)에서 한 쌍의 거위를 기르면서 매우 애완(愛玩)하여서 그것을 천성(天性)으로 여겼다. 그날 밤 꿈에 그 거위가 입에 한 권의 책을 물고 왔는데 10여 장은 되었다. 그 책을 취하여 보니 다 죄와 복의 일을 말하였는데, 그 이튿날 그 책을 다시 보니 다 불경이었다. 그로 인하여 살생을 하지 않고 독실하게 믿음이 남보다 더하였다. 그는 뒤에 더 부하고 귀하여졌다.
곽전(郭銓)은 몸을 나타내 보여서 법집(法集)을 일으키게 하였다.익주(益州) 자사 곽전이 죽은 지 이미 20여 년이었다. 그가 원가(元嘉) 8년에 여(輿)를 타고 인도하여 좇기를 평상시 살아 있을 때와 같이하여 사위 유의지(劉疑之)에게 나타나 ‘내가 귀양간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니 노력해서 40명의 스님이 모이는 법집(法集)의 재(齋)를 일으키면 귀양살이를 면할 수 있다’고 하고 홀연히 보이지 아니하였다. 이는 『선험기』에 나온다.
유문(兪文)이 바다에 떴는데 큰 물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유문이 남해(南海)에서 소금을 싣고 오다가 바람을 만났기에 묵묵히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더니 바람이 멈추고 물결이 고요해져서 이에 면하게 되었으니, 이 말은 『선험기』에 나온다.
문화(文和)가 깨어나서는 정성을 기울여 부처를 받들었다.정도혜(程道惠)의 자는 문화로서 무창(武昌) 사람이다. 옛날에는 부처의 법을 믿지 않았고 대대로 도교의 법을 믿어서 사문이 걸식하러 오면 문득 힐난하여 ‘이치를 궁구하고 성품을 다하는 데는 장자와 노자보다 나은 것이 없다’ 하였는데 뒤에 병으로 인하여 죽어서 염라대왕(閻羅大王)을 만나고서는 비로소 부처의 법이 숭상할 만함을 믿고 드디어 부처님을 받들었으니 『선험기』에 나온다.
장달(張達)은 내침을 당하고서 지극한 뜻으로 재를 닦았다.장달이 죄를 지어 옥에 갇혀서 분수로는 마땅히 죽음을 받게 되었다. 그래서 생각을 오로지하여 관세음보살을 염하였더니 자물쇠를 채운 큰 칼이 저절로 풀려서 인하여 면하게 되었기에 죽을 때까지 재계를 지켰으니 『장씨별전(張氏別傳)』에 나온다.
오흥(吳興)이 모두 타도 경당(經堂)은 여전하였다.원가(元嘉) 중에 오흥의 곽내(郭內)에 불이 나서 수백 채를 태워 다 없어졌으나 오직 경당과 거사(車舍)만이 엄연하게 불타지 아니하니 그때에 모두 신기하게 여기었다. 『선험기』에 나온다.
포성(蒲城)에서 불이 났어도 정사(精舍)만은 타지 않았다.원가 8년에 하동(河東)의 포판성(蒲坂城)에 크게 불이 나서 끄지 못하였는데 오직 정사만이 크고 작은 것이 엄연하였기에 속인의 집에 다시 모셨다. 불경과 불상이 다 손상되거나 떨어지지 않았기에 백성들이 놀라고 이상하게 여겨 갑절이나 함께 발심하였으니, 『선험기』에 나온다.
건강(建康)에 있는 사천왕의 사당에서 거위가 죽었다가 다시 울었다.건강군의 큰 거리에 사천왕의 사당이 있었는데 항상 초하루와 보름에 흰 거위를 죽여서 제사하였는데, 사람들이 이를 오랑캐의 풍속이라 하였다. 그 뒤에 흰 거위 세 마리를 잡았는데, 다스리기를 마치자 흰 거위가 놀라 일어나서 슬피 울면서 신좌(神座)의 아래로 들어갔으며, 사당에서 축수하는 자의 꿈에 신이 ‘우리 부처님께서 크게 제자들을 경계하여 본래 살생을 하지 않고 청정한 계를 행하게 하셨다. 그런데 어찌하여 거위를 죽여 제사를 지내는가? 전에 죽었던 거위가 놀라 달아난 것은 그대들의 마음을 깨우치고자 함이다’ 하였다. 그 뒤로는 드디어 거위 죽이던 짓을 고치고 다시 사당에 제사지내지 않았으니, 이는 『건강별기(建康別記)』에 나온다.
오군(吳郡)의 시(市) 가운데서 형을 받는 죄수가 죽음을 면하였다.오군 사람 심영(沈英)이 감옥에 갇혀 죽음을 받게 되었는데 오군의 시 가운데서 날마다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외우며 마음과 입으로 쉬지 않고 불렀더니 형을 임함에 칼날이 저절로 부러졌다. 그로 인하여 방면되었다고 한다. 어떤 데서는 ‘오나라 사람 육휘(陸暉)가 감옥에 갇혀 분수로는 죽을 처지였기에 이에 집의 사람을 시켜 관세음보살의 상을 조성하여 죽음을 면하기를 바랐더니 형을 임하여 세 번 칼질하였으나 그 칼이 다 꺾어졌다. 관원이 이상하게 여겨 물으니 육휘가 ≺아마 관세음보살의 자비의 힘인가 합니다≻ 하기에 그 상의 목 위를 보니 이에 세 번의 칼 자국이 있었다. 형을 집행하던 관리가 이 사실을 아뢰어서 죽음을 면하였다. 『선험기』에 나온다.
사당의 신이 비단을 받드니 곧 이무기의 몸을 벗었다.양(梁)나라 외병상서(外兵尙書) 유구(劉璆)의 『진탑사기(晋塔寺記)』에 ‘사문 안세고(安世高)는 안식국(安息國) 임금의 태자로서 『음지입경(陰持入經)』은 그가 한역(漢譯)한 것이다. 그가 예장(豫章)에 갈 적에 궁정호(宮亭湖)에 이르니 사당의 신이 안세고에게 ≺나는 옛날 외국(外國)에 있을 적에 출가하여 도인이 되었는데 보시 행하기만을 좋아하고 계를 가지지 않았기에 오늘날 여기에 있어서 궁정호의 신이 되었소. 이 주위의 1천 리는 다 내가 통괄(統括)하는 바로서 백성들이 나에게 바치는 보배는 수가 없소. 지금 나는 먼저 몸이 자신을 버린 과보이오. 그러니 만일 계를 가졌으면 응당 하늘에 태어났을 것인데, 금계(禁戒)를 헐었기 때문에 이 신으로 태어났소.
스님은 나의 동학(同學)으로서 이제 서로 만나게 되었으니 슬픔과 기쁨을 어이 다 말하리까? 나의 수명은 아침이나 저녁이오. 그런데 추한 형체가 길고 커서 여기서 목숨을 버려 호수를 더럽히고 싶지 않소. 산의 서쪽을 지나서 빈 못 가운데 버리고 싶소. 그런데 이 몸이 죽은 뒤에 지옥에 떨어질까 두렵소. 나에게 비단 1천 필이 있으니 돌함 가운데 여러 잡물(雜物)과 같이 있소. 나를 위하여 탑을 세워 삼보를 경영하여 세워서 나로 하여금 세상을 지내고서 좋은 곳에 나게 하시오. 깊이 이로써 부탁합니다≻ 하였다.
안세고가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그 신에게 ≺어찌하여 형체를 나타내어 말을 함께 하여 대하지 않습니까?≻ 하니, 그 신이 ≺계를 헌 죄로 형체가 아주 추하고 더러워서 보면 반드시 놀라고 두려워할 것이오≻ 하였다. 안세고가 ≺다만 잠깐 몸을 나타내시오. 내가 두려워하지 않겠소≻ 하니, 그 신이 상(床) 뒤에서 머리를 내는데 큰 이무기였다. 안세고의 무릎 가에 이르러서 눈물이 비오듯 쏟아지는데 그 꼬리가 얼마나 긴지 알 수 없었다. 조금 있다가 상 뒤로 들어갔다.
안세고가 이에 그 비단과 물건을 취하여서 배에 싣고서 이별을 고하고 물러가니 무리들이 일시에 노를 저어 길을 떠났다. 그 신이 다시 뱀의 몸을 나타내어 산 꼭대기에 올라가서 멀리 떠나가는 것을 보았고, 여러 사람들이 손을 들어 이별한 뒤에 그 신이 멸하였다. 잠깐 사이에 예장에 도달하여서 곧 경계에 동사(東寺)를 세웠다. 그 신은 옮겨가서 산의 서쪽을 지나 운명하니 머리에서부터 꼬리까지의 길이가 40여 리나 되었다. 지금의 심양군(尋陽郡) 사촌(蛇村)이 이곳이다.
안세고가 도읍에 돌아와서 사당 가운데의 남은 물건으로 와관사(瓦官寺)에서 탑 3층을 일으켰더니 안세고의 뒷날 꿈에 그 신이 와서 ≺스님이 저를 위해 복을 지어주셨기에 이제 이무기의 몸을 벗었습니다≻ 하였다. 이는 『선험기』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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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씨 어머니가 부처님 앞에 등을 켰더니 기약하지 않았는데 아들이 이르렀다.차씨 어머니가 송(宋)나라 여릉왕(廬陵王)의 청니(靑泥)의 난(難)을 만나서 불불(佛佛)의 포로가 되어 적의 진영에 있었다. 그의 어머니가 선래(先來)로 부처님을 받들었으므로 곧 일곱 등을 부처님 앞에 켜면서 낮과 밤을 정성된 마음으로 관세음보살께 울면서 아들이 돌아오기를 원하면서 이와 같은 정성으로 1년을 지냈더니 그의 아들이 갑자기 돌아왔다. 아들이 ‘일곱 날과 일곱 밤을 행하여 홀로 남쪽으로 달아났는데, 하늘이 음산하여 서쪽인지 동쪽인지 알지 못하였을 적에 멀리서 일곱 등불의 불빛이 보이기에 불빛을 바라보며 달아났다. 마을 같은 데서 투숙하려 하였으나 마침내 이르지 못하여서 이와 같이 7일을 달리다 보니 어느 새에 집에 돌아와서 어머니를 보았는데 아직도 부처님 앞에서 땅에 엎드려 있었고, 또 일곱 등을 켰음을 보았다’ 한다. 그로 인하여 깨달음을 얻어서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부처님의 신력(神力)임을 알았다. 이로부터 정성이 지극하여 오로지 보시와 인욕을 행하였다. 『선험기』에 나온다.
이부상서 공경(孔瓊)은 방생(放生)으로 말미암아 고통에서 벗어났다.이부상서 공경의 자는 언보(彦甫)이다. 그는 본래 불교를 믿지 않았으나 범태와 더불어 4월 8일에 와관사에 이르러 함께 방생 참회를 함으로 인하여 그가 죽은 뒤 수십 일 뒤에 꿈을 의탁하여 형의 아들에게 ‘내가 본래 불교를 믿지 않았으나 범태와 더불어 방생을 한 것이 원인이 되어 하나의 착한 힘을 타서 이제 고통에서 벗어났다. 죄와 복의 보응(報應)은 결단코 어긋나지 않는다. 너는 마음을 가다듬어 복을 지어서 나를 도와 착함을 일으키면 고통에서 벗어날 것이다’ 하였다. 공경의 『별전(別傳)』에 나온다.
도사 사준(史儁)은 불상을 관욕(灌浴)하고서 걸어다녔다.사준은 학식이 있었는데 그는 도교를 받들고 불교를 업신여겼다. 항상 남에게 ‘부처는 작은 신(神)이니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여 매양 부처님의 존상(尊像)을 보면 가볍게 꾸짖었더니 그가 후에 병으로 인하여 다리가 저리기에 가지가지로 복을 빌었으나 도무지 효험이 없었다. 그의 친구 조문(趙文)이 ‘경전에서 복을 말하는 중에 불상을 관욕하는 것이 제일이라 하였소. 그러니 시험삼아 관세음보살의 상을 조성하시오’ 하였다. 사준은 병이 급하였기에 친구의 말대로 불상을 조성하여 관욕하였더니 불상이 이루어지는 날 꿈에 관세음보살이 현몽함을 보고서 병이 드디어 나았다고 한다. 『선험기』와 『명상기(冥祥記)』에 자세히 나온다.
진(陳)나라 현범(玄範)의 아내는 부처의 광명이 법좌에 연해 비침을 보았다.진나라 현범의 아내 장씨(張氏)가 정성된 마음으로 부처님을 받들어서 항상 소원을 세우기를 ‘나의 손으로 황금 존상을 조성하여서 종신토록 공양하고 싶다’ 하였다. 원이 있으면 좇지 않는 것이 없다. 장씨가 마음을 오로지 한 지 오래 되었더니 갑자기 관세음보살의 황금 존상이 연거푸 광명을 놓아 다섯 자나 되는 높은 대좌 위를 비추었다고 한다. 『선험기』와 『명상기』 등에 나온다.
장도(張導)의 어머니는 광염(光焰)을 토하여 쟁반을 비추었다.장도의 어머니 왕씨(王氏)는 본래 불교를 돈독하게 믿었는데 4월 8일에 재식(齋食)을 하고서 사리를 감득하니 흐르는 광명이 입에서 나와 음식 쟁반을 비추었다 한다. 『선험기』에 나온다.
복야(僕射) 정선(鄭鮮)은 유계(幽界)의 연령을 늘림을 감득하였다.정선의 자는 도자(道子)이다. 그는 관상법(觀相法)을 잘하여 자기의 수명이 짧은 것을 알고 어떻게 연장할 수 없을까 생각하였더니 꿈에 어떤 사문이 정선을 보고 ‘그대가 수명을 늘리고자 하면 육재일에 방생을 하고, 착함을 생각하며, 재를 가지고 계를 받들면 수명을 늘리고 복을 얻을 것이다’라고 일러 주었다. 정선이 그로 인하여 부처의 법을 받들었기에 드디어 오래 삶을 얻었다. 『선험기』에 나온다.
상서 유식(劉式)이 지극히 염하니 불상이 돌아왔다.팽성(彭城)에 사는 유식(劉式)이 항상 한 불상을 공양하였는데 아무 연고 없이 불상을 잃어서 있는 데를 알지 못하였다. 유식이 밤낮으로 이를 생각하며 스스로를 책망하였더니 지극한 생각이 가만히 통하였는지 1백 일이 지난 뒤에 그 불상이 갑자기 본좌(本座)에 나타났는데, 신기한 광명이 방 안을 비추었다. 이에 온 집안이 놀라고 기뻐하며 갑절이나 다시 마음을 기울였다. 『선험기』에 나온다.
유유민(劉遺民)이 정밀하게 생각하기를 돈독히 함에 얼굴에 있는 구슬이 눈썹 사이에서 빛났다.유유민은 팽성 사람이다. 젊어서 유생(儒生)이 되었으며, 어버이를 잃고서는 지극한 효도로 소문났다. 집이 가난하였기에 여산(廬山)의 서림(西林)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는 병이 많았기에 아내와 아들을 마음 쓰지 않고 집에 가고 오는 발을 끊고 참선하는 업을 정밀히 생각하였더니 반 년이 지난 뒤에 눈썹 사이의 상호를 보았고, 점점 지나서 부처님의 눈 하나를 보았으며, 그리고 머리털 가의 두 빛을 보았고, 또 부처님의 전신(全身)을 보았다. 이를 일러 도화(圖畵)로써 한 도인의 밝은 구슬을 보았다고 이른다. 이로 인하여 병이 나았다 한다. 『선험기』에 나온다.
오나라 임금이 절을 에워싸고 중을 붙잡음에 사리가 발우 위에 광명을 띄웠다.손호(孫晧) 때에 왕정변(王正辯)이 일을 올려 말하기를 ‘부처의 법은 없애야 합니다. 중국에는 오랑캐의 신이 이롭지 못합니다’ 하니, 손호가 문득 조명을 내려 모든 사문을 모이게 하고 군사를 풀어 절을 에워싸고 목베어 폐하는 일을 행하고자 하면서 강승회 법사에게 ‘부처가 만일 신기하다면 숭배할 것이요, 만일 영험이 없으면 승려들은 한 날에 목숨을 같이 할 것이오’ 하니, 중들이 혹은 목매어 죽고 혹은 밖으로 도망쳐 갔다. 강승회가 이에 재계를 맑히고 7일을 기약하여 신통 변화를 나게 하여서 구리 발우에 물을 담아 뜰 가운데 놓았더니 중식(中食)을 마치자 햇빛이 빛나면서 뜰에 둔 발우에 소리가 들렸고, 홀연히 사리가 밝게 뜰을 비추면서 위에 떴다. 손호와 대중이 앞에 나와 보고서 놀라고 놀라서 어떻게 할지 몰라 자리를 피했다가 얼굴빛을 고치고 나왔다.
강승회가 ‘폐하께서 맹분(孟賁)의 힘으로 백 근의 철퇴를 가지고 쳐도 금강 같은 사리는 마침내 훼손하거나 파괴하지 못합니다’ 하니, 손호가 말대로 하여서 먼저 경을 읽고 범패를 부르며 예배를 하고 꽃을 뿌리며 향을 사르고 높이 부르짖기를 ‘붉은 정성을 운반하여 옵니다. 자씨(慈氏)보살이 나루에 오는 것이 끊기지 않으면 법륜(法輪)을 굴려서 신령한 길에 철저하여 위신(威神)이 적지 않을 것이니, 오늘에 나타나십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삼보가 길이 끊어질 것이오’ 하고 말을 마치자, 장사가 철퇴를 휘두르니 바람이 일어나듯 하여서 보는 자들이 몸을 떨면서 기운이 다하였다. 장사가 친 철퇴는 부서졌으나 사리는 부서지지 않고, 광명이 비추어 그 광채가 기둥에 가득하였다. 손호가 엎드려서 정성을 바쳐 재와 강(講)을 부지런히 경영하였다.
이 탑은 건강(建康) 큰 도시의 북쪽에 있는데 뒤에도 오히려 광명의 상서로움이 있었으니 원가(元嘉) 19년 가을에 사찰에서 밤에 광명을 놓았는데 선홍(鮮紅)의 채색을 발하였다. 그리고 불의 광명이 4층을 끼고 올라가서 서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에워쌌다.
또 어떤 물체를 보았으니 꿩의 꼬리와 같은 부채가 그를 따라 나가고 머물고 하는데 그의 이름은 자세히 알 수 없고 보는 자가 혹은 만나고 혹은 만나지 못하였다가 20일이 지나서야 온 도시의 사람이 다 보았다. 찰간(刹竿) 위에 큰 자색 광명이 있었다 한다. 『오록(吳錄)』과 『선험기』에 나온다.

정령(丁零)4)이 패악해서 만월(滿月) 같은 부처님의 얼굴을 쏘았다가 뒤에 목베는 형을 받았다.『선험기』에 ‘상주(相州) 업성(鄴城) 가운데 장륙(丈六)의 진금입상(眞金立像) 한 구(軀)가 있었다. 정령선우(丁靈單于)는 지극히 성품이 흉패(兇悖)해서 불교를 믿는 마음이 없었기에 이에 활을 당겨 불상을 쏘니 화살이 불상의 얼굴을 명중하여 피가 흘러내렸다. 비록 힘써 닦았지만 피 흔적이 남아 있었으며 정령선우가 다시 5백 명의 역사(力士)를 가려 뽑아서 그 불상을 잡아당겨 땅에 넘어뜨리고 해체(解體)하여 구리 쇠를 만들어서 그릇으로 쓰게 하니 그 불상이 입으로 큰 소리를 내었는데, 소리가 우레처럼 떨쳤다.
그 역사가 혼이 나가고 쓸개가 터진 듯 사람들이 다 땅에 넘어져서 미민(迷悶)하여 구르면서 무서워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적(賊)의 무리들이 잠시 두려운 생각을 가져서 돌아와 믿는 자가 많았다. 정령선우는 그 뒤에 병에 걸리고 죄를 받아 주형(誅刑)을 받아 죽었다’ 하였다.

혁련(赫連)이 흉하고 미련하여 불상의 옷을 입었다가 뇌진탕을 만나 죽었다.『선험기』에 ‘불불(佛佛) 오랑캐가 기주(冀州)의 경내를 파괴하니 도속(道俗)들이 다 죽음을 당하였다. 그들은 성품이 흉학(凶虐)하고 포악하여 살상함에 싫증냄이 없었다. 그들이 관중(關中)에 이르니 죽은 자가 반이 넘었고 부녀자들과 어린아이의 시체가 산처럼 쌓였다. 그들이 해치는 마음을 마음대로 하여 그로써 쾌락을 삼기에 스스로 말하기를 ≺불불은 사람 가운데의 부처니 예배를 받을 만하다≻ 하고, 문득 그려서 불상을 만들어 등에다 차고 전(殿)에 들어가 앉으며 나라 안의 사문들로 하여금 자기의 등을 향하여 예배하게 하고, ≺상에 예배하는 것이 곧 나에게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 혁련이 나가 노닐 적에 바람과 비가 사납게 이르러 사면이 어두워서 돌아갈 바를 알지 못하였고, 우레와 번개가 쳐서 죽었다. 그리고 이미 장사를 지낸 뒤에는 그 무덤에 벼락을 맞아 관(棺)이 찢어지고 시체가 밖으로 나왔는데 그의 등에 흉학무도(凶虐無道) 등의 글자가 씌어 있었다. 나라 사람들이 경쾌(慶快)하게 여겨서 그의 죽음이 늦은 것을 혐오하였다.
혁련이 젊었을 때에 색두(索頭)5)의 주인이 되었다가 사규(沙圭)에 먹힘이 되어 아내와 아들이 형벌로 죽음을 당하였다’ 하였다. 소자현(蕭子顯)의 『제서(齊書)』에 나와 있다.

척발(拓拔)이 절을 허물었다가 온몸에 고름이 흘렀다.위나라 태무제(太武帝)가 삼보를 크게 헐어 절과 탑을 파괴하였다가 그 후 수년 동안에 온 몸에 부스럼이 나서 피고름이 몸을 두루하였으니, 여러 신하들이 불신(佛神)을 파괴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최호(崔浩)의 전(傳)에 나온다.
우문(宇文)은 승(僧)을 제지하였다가 온몸에 부스럼이 나서 죽었다.주(周)나라 무제(武帝)는 삼보를 훼폐(毁廢)하였더니 후에 망이궁(望夷宮)에서 크게 지독한 부스럼이 나서 열흘이 지나도록 쾌차하지 않고 있다가 죽었다.
사회(謝晦)는 탑을 파괴하고서 곱사병이 해마다 계속되었다.『진록(晋錄)』에 ‘상서(尙書)로 있는 사회가 발심하기 전에 형주(荊州) 자사가 되었을 적에 ≺절과 불탑이 인간에는 맞지 않으니 성곽 밖으로 옮겨야 한다≻ 하여 스스로 부하를 인솔하여 새 절문에 이르렀다. 인솔한 대사(隊士) 80여 명이 각기 칼과 도끼를 들고서 부도를 헐어 무너뜨리니 존상이 종횡으로 널려 있고 기와와 나무가 기울어지고 떨어졌다. 조금 있더니 구름과 안개가 하늘에 어둡고, 바람과 티끌이 발기(勃起)하였다. 사회가 곧 놀라서 달아나고 대사들이 놀라 흩어져서 어디로 갈 지 알지 못하였다.
사회 등이 밤에 꿈을 꾸었는데, 그 사문이 허공에 솟아올랐고, 광명이 빛나게 나타남을 보았으며, 또 보니 두 사람의 형체가 다 한 길이 넘었으며, 웅장한 자세가 매우 거룩하였다. 그가 소리를 가다듬고 눈을 부릅뜨며 ≺그대의 행위가 도에 어긋남을 항상 스스로 보아야 한다≻ 하였는데, 그 뒤에 대인의 아전들은 다 몸에 문둥병이 나서 오랫동안 앓다가 죽었으며, 대인들도 모두 법을 범하여 죽었고, 사회는 해를 이어 곱사병을 앓았으며, 후에는 반역을 꾀하다가 온 집안이 목베임을 받아서 비명(非命)으로 죽었다’ 한다.

손호(孫晧)가 불상에 오줌을 누었다가 성기(性器)가 여러 달 동안 아팠다.『선험기』에 ‘오나라 임금 손호는 성품이 매우 포악하였고, 일을 함이 사람의 정리에 가깝지 아니하였다. 채녀(婇女)와 동산의 땅을 고르는 것을 보다가 아래에서 홀연히 한 구의 황금 불상을 얻으니 형상이 밝고 엄하였다. 손호가 그 불상을 변소에 두고서 병기(屛器)에 넣어 두었으니 4월 8일이 되자 손호가 이에 불상 머리에 오줌을 누면서 웃고 말하기를 ≺오늘이 4월 8일이니 그대를 위하여 관정(灌頂)을 한다≻ 하고 여러 채녀들을 대하여 희롱하며 즐겼다.
그 뒤 시간이 지나서 음수(陰水)의 주머니가 갑자기 곪고 아프며 창자가 뜨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부터 새벽까지 고통스러워서 죽을 지경이었다. 이름난 의원이 약을 올렸으나 그 약을 써도 병이 점점 더하였다.
태사(太史)가 점을 치며 말하기를 ≺큰 신을 범하였기 때문입니다≻ 하여 칙령으로 기도하였으나 한 번 기도하면 한 번 더하여서 위와 아래에 대책이 없었다. 중궁(中宮)에 한 채녀가 있었는데 전에 부처님의 법을 받들었기에 아는 것이 있어서 무릇 예언한 일마다 맞았다. 그가 ≺폐하께서 부처님의 도상(圖像)을 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하니, 손호가 ≺부처가 큰 신이냐?≻ 하니, 그 채녀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 높은 이는 부처님보다 더한 분이 없습니다. 폐하께서 전에 얻으셨던 불상이 아직도 측간 옆에 있습니까? 그분을 거두어 공양 올리기를 청합니다. 폐하의 부스럼이 반드시 나으실 것입니다≻ 하였다.
손호가 너무나 아프기 때문에 즉시 향탕(香湯)을 갖추어서 손수 그 불상을 씻어 전(殿) 위에 모시고 머리를 조아리어 사죄하고서 일심으로 애민(哀愍)해 주시기를 구하였더니 그날 밤으로 아픔이 그치고 부스럼이 곧 소멸하였다. 이에 강승회를 모셔다가 5계(戒)를 받고 곧 대불사(大佛寺)를 일으켜서 여러 스님들은 공양하였다.

주공(朱恭)은 비구니를 죽이고서 측간에 떨어졌다.[송(宋)나라에 악한 사람 주공이 있어서 매양 살생과 도적질로 업을 삼았다. 그래서 밤에 연화사(蓮華寺)에 이르러서 비구니를 죽이고 물건을 도둑질하여 그날 밤에 원(院)에 돌아와 달아나는데 나갈 곳을 알지 못하여 드디어 측간에 떨어져서 죽었는데 그의 등에는 아직도 물건을 지고 있었다 한다. 『수신록(搜神錄)』에 나온다.]
동예(董禮)는 중을 겁탈하고서 소에게 받혀 죽었다.동예는 항상 스님들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업을 삼아서 재물을 얻어 가지고 집에서 손님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었는데 갑자기 미친 소가 밖에서 들어와 앉아 있는 동예를 뿔로 받아 이고서 날뛰니 동예가 그 자리에서 죽었다. 『양후기(梁後記)』에 나온다.
최평업(崔平業)은 불상을 녹이고서 눈이 멀었다.양나라 사람 최평업은 활 쏘고 말 달리기를 잘하였다. 그가 무사(武士)가 되어 군사를 감독하면서 일생 동안 불상을 훔쳐다가 녹여 구리로 쓰는 것을 업으로 삼아 그 구리를 팔아서 술과 고기를 장만하여 먹으면서 마음에 부끄럽거나 번뇌함이 없었다. 나이 50세가 될 적에 아내와 아들과 형과 아우가 모두 죽고 오직 최평업 한 몸이었으며, 갑자기 병이 생겨 눈이 멀었고 배고픔과 추위가 닥쳐서 굶어 죽었다. 『양후기』에 나온다.
왕진악(王鎭惡)은 절의 종(鍾)을 훔쳤다가 벙어리가 되었다.양나라 사람 도사 왕진악은 학문은 있으나 착한 마음이 없었으며, 말을 함이 그르고 헐뜯음이 많았기에 또한 그때 사람들이 혐오하였다. 부처의 법을 경만(輕慢)하고 스님을 보면 반드시 희롱하였다. 후년에 학문을 가르치는 것으로써 업을 삼았는데 그때에 녹계사(鹿溪寺)의 승 법만(法滿)이 구리 종 한 좌를 그의 학내(學內)에 맡겼다. 가져가지 않은 사이에 왕진악이 이를 훔쳐서 녹여 돈으로 만들어 썼다가 뒤에 법만에 대하여 맹세하였다. 그는 해가 지나도록 무거운 병을 앓았고, 혀가 굽어서 입으로 말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맹세를 어긴 줄 알고 재물을 희사하여 종을 부어서 죄를 속죄하였다. 그러나 죽는 날까지 벙어리가 되었다. 『왕씨가계(王氏家誡)』에 나온다.
곽조심(郭祖深)은 양나라 무제(武帝)에게 글을 올려 절을 없애라고 하였다가 문둥병을 앓았다.양나라 사람 곽조심이 양나라 무제에게 여덟 조목의 일을 상서(上書)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경계 안에 있는 작은 절과 안업(案業)이 없는 중들을 폐지하자고 말하였으나 양나라 무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그 뒤 꿈에 착한 신이 와서 침뱉는 것을 보고서 드디어 문둥병에 걸려서 비록 뉘우쳤으나 낫지 않았다. 『원혼기(寃魂記)』에 나온다.
위원숭(衛元嵩)은 부처님 법을 헐뜯은 뒤에 열병의 풍(風)을 앓았다.위원숭은 부처님의 법을 헐뜯었는데 뒤에 몸에 열병의 풍이 나서 앓다가 죽었다.
상객(上客)이 죽을 적에 염소 울음소리를 내었다.안씨(顔氏)가 ‘왕극(王克)이 영가군(永嘉郡)을 맡았을 적에 어떤 사람이 염소를 죽여 손님을 모아 잔치하려 하였다. 그때에 염소가 묶은 끈을 풀고 와서 어떤 객(客)에게 가서 무릎 꿇고 두 번 절하고서 객의 옷 속에 숨었다. 그런데 이 객은 그러한 사실을 끝까지 말하지 않고 그 염소를 구원하자는 청이 없었기에 잠깐 사이에 그 염소를 잡아 불에 구워서 먼저 그 객에게 올렸다. 그 객이 한 살점을 입에 넣어서 살가죽 안에 내려가 몸에 퍼지자 온몸이 아픔이 심하여 부르짖었으며 말을 하고자 하는 것이 염소의 울음소리가 되어 죽었다.
현령(縣令)이 깨어남에 부스럼이 발하였다.양나라 때에 어떤 사람이 현령이 되어서 절에 기숙(寄宿)하였는데 주민들이 소와 술을 가져다가 현령에게 바치니 그 현령이 소를 사찰의 기둥에 매어놓고 불상을 치우고 자리를 깔아서 불당(佛堂)에서 빈객을 접대하였다. 그 소를 아직 죽이지 않았을 때에 소가 묶어 놓은 끈을 풀고 와서 섬돌 밑에 이르러 절을 하니 그 현령이 크게 웃으며 좌우의 사람들을 시켜 그 소를 잡아서 먹고 마시다가 취하여서 문득 처마 밑에 누워 잠을 잤다. 깨고 나서 몸이 간지러워 긁었으나 몹시 아팠다. 이로 인해 문둥병에 걸려서 10년 만에 죽었다. 『안씨가훈(顔氏家訓)』에 나온다.
부곡(部曲)6)이 아들을 낳음에 저절로 손 없는 아들을 낳았으며, 조청(朝請) 대부가 불고기를 씹으니 마치 칼이 몸에 들어간 것과 같이 아팠다.양사달(楊思達)이 서양군(西陽郡)의 책임을 맡았을 적에 후경(侯景)의 난을 만났고 때가 마침 가뭄이 심하여 백성들이 밭에 있는 보리를 훔쳐다가 먹었다. 그래서 양사달이 한 부곡을 보내 지키게 하였으며, 보리를 훔쳐간 자를 잡으면 문득 손을 끊게 하여 손 끊은 자가 10여 사람이나 되었다. 그 부곡이 나중에 아들 하나를 낳았는데 저절로 손 없는 아들을 낳았다. 제(齊)나라에 한 봉조청(奉朝淸)이 있었는데 집이 매우 호걸스럽고 사치하여서 손수 잡은 소가 아니면 먹지 않았다. 그가 나이 30여 세에 병이 났는데 문득 소가 와서 살과 해골을 부딪침을 보니 마치 칼로 쑤시는 듯이 아팠다. 그 자리에서 절규하고서 죽었다.
양나라 사람이 머리를 감으니 머리 위에서 닭의 소리가 났다.양나라 때에 어떤 사람이 항상 달걀의 흰자를 목욕하는 물에 타서 쓰면서 ‘머리털이 빛이 난다’ 하면서 목욕 할 때마다 이삼십 개의 달걀을 깨뜨려 썼다. 그가 죽을 때에 머리털 속에서 다만 떠들썩하게 수천 마리의 닭 우는 소리가 났다. 『안씨가어(顔氏家語)』에 나온다.
유씨(劉氏)는 뱀장어국을 팔았는데 아들을 낳으니 머리가 뱀장어 같았다.강릉(江陵) 유씨는 뱀장어로 국을 끓이는 것을 업으로 삼았는데, 그 뒤에 아들을 낳으니 머리는 뱀장어요, 목 아래는 사람의 몸이었다. 『안씨가어』에 나온다.
관찰하여 보니 대저 부처의 교를 믿는 자와 헐뜯는 자의 자취는 마치 그림자가 형체에 붙어 있는 것과 같고, 골짜기에서 메아리를 전하는 것과 같다. 귀로 들은 것과 눈으로 본 것을 대략 말하였으니 노력한다면 그대도 다행히 스스로 면하게 되리라.”
그 유생이 말하였다.
“스승님의 정성된 뜻을 살피면 착함과 악함이 분명하고 믿음과 헐뜯음이 교대로 갚아집니다. 그런데 안회(顔回)의 덕과 행실로써 도리어 일찍이 죽음을 만났으며, 도척(盜跖)이 흉하고 미친 이로서 도리어 오래 살았으며, 두 왕씨(王氏)는 부처를 섬기고도 가정에 주형(誅刑)이 있었으며, 세 분의 장씨(張氏)는 도교를 받들고도 가족이 멸하였으니 착함을 행하고도 화(禍)를 당하고 악한 짓을 하고도 허물이 없었으므로 교대로 갚는다는 증거가 어찌 거짓말이 아니겠습니까?”
보살이 그를 알아듣게 타일렀다.
“안회는 나면서부터 열[十]을 알았고, 자하(子夏)는 나면서부터 덕이 있었으니 모서리를 보임에 네 귀퉁이를 알지 못하는 것은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한 세상에 국한된 말이니 이치를 다하지 못한 것이다. 3세를 모두 들어야 바야흐로 근원을 다한다고 하겠다.
성인의 말씀에 업이 나타남이 있어서 고통 받을 짓을 하여 고통의 보를 받는 것이요, 업이 나타남이 있어서 즐거운 짓을 하여도 고통의 보를 받는 것이요, 업이 나타남이 있어서 고통스러운 짓을 하였는데 즐거움의 보를 받는 것이요, 업이 나타남이 있어서 즐거운 짓을 하여 즐거움의 보를 받는 것이다. 그것은 혹은 남은 복이 다하지 않아서 악이 곧 더하여지지 못하였거나, 혹은 전세(前世)의 허물이 아직 남아 있는데 착한 인연이 문득 발한 것이다. 그러니 마치 재를 더하여 불을 숨기는 것과 같거니 어떻게 없다고 일컫겠으며, 가만히 소리를 듣는 것과 같으니 반드시 있는 줄을 알겠다.
또 대저 착함과 악함에 돌아옴이 있어서 보응(報應)이 어긋나지 않으니 주공과 공자의 가르침이 다 이 말과 같았다. 그러니 착한 일을 하고도 우연히 화가 이름을 만나고, 악한 일을 하고도 혹은 복이 옴을 만난다고 하면 공자의 말이 반드시 허언일 것이니, 어찌 실답지 못함을 말하였겠는가?
또 강의 남쪽에서는 오나라가 믿지 못하여 1천 사람의 장막이 있었고 하수 북쪽에서는 한나라가 믿지 못하여 1만 석(石)의 배가 있다 하였으니 쑥대의 작은 마음으로써 폭풍[扶搖]의 멀리 운전함을 헤아리지 말아야 한다.
안씨(顔氏)가 그의 아들들에게 경계하였다.
‘너희들이 만일 세속의 계획을 돌아보고 두어서 문호(門戶)를 세우고 아내와 자식을 버리지 않고 출가를 못한다 하면 오히려 마땅히 계행을 겸하여 행하여서 외우고 읽는 데 마음을 두어서 내세의 양식을 삼아야 한다. 사람의 몸을 얻기 어려우니 헛되이 보내지 말아야 한다. 대저 아들과 손자가 있는 자는 이것이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창생(蒼生)일 뿐이니, 몸으로 더불어 어찌 친하겠느냐? 그런데도 그를 애호(愛護)하여 부지런하고 수고하면서 산업에 힘써서 굶주림과 배부름을 근심하는구나. 하물며 자기의 신(神)에는 어기어서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 버리려고 하는가?’
이를 일러 큰 성인의 자비하신 가르침에는 어리석고 범부들의 억지의 말을 믿는다고 하겠다.”

9. 품조중서편(品藻衆書篇)

그 유생이 물었다.
“성인이 법을 제정하는 것이 다 까닭이 있습니다. 청하건대 자세하게 말하여 주십시오. 그의 취지를 듣고자 합니다.”
보살이 그에게 알아듣게 타일렀다.
“옛적에 이름 없는 촌 늙은이가 있었으니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고 그의 이름도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푸른 시내와 1천 길의 남쪽과 붉은 대(臺) 7반(盤)의 북쪽에 살고 있었고, 땅은 형세가 뛰어난 데를 차지하였고, 산은 기름진 데 있었으며, 문은 위태한 봉우리를 베개로 삼았고, 처마는 푸른 시내를 임하여서 근심을 잊고 길이 즐기기에 이미 한가한 뜰에는 풀이 곱게 자라나 있었고 연꽃으로 일산을 하고 연을 옷으로 하여서 또한 곡소(曲沼)에 분피(紛披)하였으며, 구름과 같은 누각이 잠시 일어남에 그림자가 아침 냇물에 곱게 비치고 노을 같은 비단을 잠깐 폄에 빛이 가까운 해를 머금었다.
널리 벌려 있어서 단(壇)을 삼는 대나무가 다투어 중원(中園)에 푸름을 벌렸고, 아름다운 잎이 우물을 덮은 오동나무는 다투어 야원(野院)에 그늘을 드리웠다. 계단에는 거꾸로 있는 버드나무가 번성하였고, 문에는 등 덩굴이 걸려 있었다. 드러누운 돌은 걸상과 같아서 오래도록 숲 아래에 비껴 있고, 솟아오르는 샘은 비와 같아서 마냥 창문 앞을 씻는다. 솔바람은 학의 울음과 함께 구슬프고, 봄 새는 나무하는 노래와 함께 운치가 있으니 참으로 마음을 쉬게 하는 복지(福地)요, 세상을 삼는 도원(桃源)이라 하겠다.
내가 오랫동안 신령스럽고 기이함을 들었기에 비로소 그곳을 지나게 되어서 기미년(己未年) 중하(仲夏)의 달에 책궤를 짊어지고 지팡이를 짚고 멀리서 나아갔다. 그 촌 늙은이가 마침 급군(汲郡)의 거문고를 어루만지며 소문(蘇門)의 북을 울려서 인하여 백설(白雪)의 곡조를 노래하고 잠깐 청산(靑山)의 편을 읊조렸으니, 그 가사에 ‘원숙(元淑)은 세상의 지위가 낮았고, 장경(長卿)은 벼슬할 뜻이 적었지요. 두어 이랑의 밭을 경영하고 3전(錢)으로 말을 먹인다오. 높이 솟은 봉우리 흰 구름 위에 솟아 있고 달은 푸른 산 아래 걸려 있소. 마음에 하고 싶은 말 있으나 말 잊은 자를 얻지 못하였다오’라고 하였다.
내가 그를 꾸짖었다.
‘대저 상(象)은 뜻을 표하지만 뜻을 얻으면 상을 잊게 되고, 말은 이치를 나타내지만 이치에 들어가면 말이 쉬게 되오. 그러기에 말로써 이치 얻음을 알면 청함을 기다리지 않아도 스스로 말하고, 상을 빌려서 뜻을 알면 반드시 낌새에 의지한 뒤에 움직일 것이오. 그래서 저가 말 없는 데서 말을 하면 이도 들음이 없는 데서 들어서 그의 말하지 않음을 말하면 이치가 스스로 현묘하게 알 것이요, 들음이 없는 것을 들으면 크게 통하는 데에 돌아올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입에 선택하는 말이 없어도 천하가 본을 받고 말이 헛되이 운행되지 않기에 세계가 우러릅니다.’
이에 그 촌 늙은이가 거문고를 놓고 자리를 피하여 손을 잡으면서 기뻐서 ‘내가 사람을 얻었소. 내가 사람을 얻었소’ 하고, 나를 인도하여 풍정(風亭)에 이르게 하고 월관(月館)에 노닐게 하여 문원(文苑)을 열고 서주(書廚)를 펴서 공자의 벽(壁)에 남겨진 경을 열람하게 하고 급(汲) 땅 무덤의 남긴 기록을 살펴보며 동관(東觀)과 남궁(南宮)의 전(典)을 찾고 옥함(玉函)과 단침(丹枕)의 비방을 연구하게 하였다.
내가 오랫동안 살피다가 인하여 물었다.
‘빈도(貧道)가 몸을 타고난 것이 이롭지 못하여 항시 묵은 병을 안고 다닙니다. 그래서 병이 고황(膏肓)에 들어 의약(醫藥)이 효험이 없어서 여러 해를 약을 먹어도 낫지를 아니합니다. 그래서 눈을 비추고 개똥벌레를 모으는 근력(筋力)이 이미 틀렸고, 9류(流)와 7략(略)은 하늘을 끌어 잡는 것보다 어려우니 1만 권과 백가(百家)의 학설이 아득하기 바다와 같습니다. 선생은 이미 사달(四達)에 명백하여 세상에서 통인(通人)이라고 일컫기에 청하여 묻습니다. 인간의 서적이 무릇 얼마나 있으며, 엿보아 읽어 나를 이롭게 하는 것은 어느 것이 가장 좋습니까?’
그 촌 늙은이가 이 말을 듣고서 상심하였다가 얼굴을 고쳐 한참 만에 말하였다.
‘옛날에 습욱(習郁)은 미천(彌天)이라는 대답에 굴복하였고, 감택(闞澤)은 등지(登地)의 말을 미루었다 하오. 그러니 기술자의 앞에서는 칼질하고 도끼질하기 어렵소. 비록 그렇지만 『예』에 ≺말이 없으면 가르치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응당 가만히 있겠소. 이제 대강 드러내어 덕음(德音)에 대답할까 합니다. 살펴보니 먼 옛날 글이 없었을 때는 부적을 새겨 믿음을 나타냈습니다만 이미 거북의 등에서 글이 나오고 새의 발자취에서 글자가 나왔기에 성인이 명하여 기록하게 하니 창힐(蒼頡)이 채집(採集)하여 글을 이루었소. 그러기에 글이 없는 것은 요긴하지 않은 것이오. 지혜가 없으면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였다.
내가 또 힐문하였다.
‘아름다운 사람이면 글을 읽지 않음을 보지 못하였소. 그러나 글을 읽는다 하여 반드시 사람을 아름답게 함은 아닙니다. 그러니 어찌 이 말이 이상하지 아니합니까?’
그 촌 늙은이가 거듭 나에게 대답하였다.
‘본래 지식은 민첩하기를 의뢰하였고 일은 쓰여짐과 쓰이지 않음을 겸하였으니 옥을 다듬어서 그릇을 이룬다 함이 어찌 헛된 말이겠소. 옛날 소의 머리와 뱀의 몸을 한 임금과 그물을 맺고 털을 깎는 임금들은 순박하여 자연스러우니 일찍이 전측(典則)이 없었소. 이(離)와 연(連)이 호(號)를 기록하고 율(栗)과 육(陸)이 비로소 일어났으니, 그런데 공자의 아는 것이 70여 대(代)로서 이외의 것은 너무나 멀어서 성인도 기억하지 못하오.
그러다가 복희씨(伏羲氏)와 염제씨(炎帝氏)로 내려오면서 헌원씨(軒轅氏)와 전욱씨(顓頊氏)가 교대하여 일어나서 봉건(封建)의 제도가 갑자기 열려서 그로 인하여 간책(簡冊)을 두게 되었고, 문(文)과 질(質)이 서로 무역함에 미쳐서 도(道)는 실패하였고, 사(詞)는 번성하였으니, 이에 우(虞)나라에서는 상상(上庠)을 두었으며, 하(夏)나라에서는 서서(西序)를 열었고, 은(殷)나라에서는 우학(右學)이라 일컬었고, 주(周)나라에서는 동교(東郊)를 설치하였으며, 진(秦)나라의 갱분(坑焚)에 이르러서는 전적들이 없어졌고, 한(漢)나라에서는 힘써 닦아서 선비를 높이고 업을 중하게 여겼기에 제남(濟南)의 복생(伏生)이 입으로써 전해 주었으며, 혹은 칠서(漆書)가 급(汲)의 무덤에서 나옴을 만났으며, 혹은 잔경(殘經)이 공자의 벽에서 나옴을 만나는 등 조금 있다가 불을 찾는 비둘기가 모이듯 하며 분삭(墳索:古書)이 차츰 많아졌소.
『예문지(藝文志)』에서는 ≺6서(書)와 7적(籍)과 백씨(百氏)와 9류(流) 등 무릇 1만 3천2백69권 5백96가(家)로서 부(部)가 다른 것을 구분한 것이 서른여섯 가지인데 그 안에는 7경(經)과 아울러 악장(樂章)이 저절로 3천33권이 있었으나 지금의 세상 풍속에는 악장은 행해지지 않았다. 그래서 세상을 교훈하는 풍속은 오직 예와 효도뿐이니 효도는 몸을 세우는 근본이요, 예는 정치를 하는 데 우선하는 것이다≻ 하였소.
『원신계(援神契)』에 ≺『효경(孝經)』의 한 부에 저절로 59권이 있으니, 이는 바로 시대가 질(質)과 문(文)을 변할 뿐 아니라 또한 학문에 우(優)와 열(劣)을 이룬다≻ 하였소.
후한(後漢)에 이르러서 좨주(祭酒)를 공경하여 천자가 건권(巾卷)의 의식을 행하였소. 그러기에 환영(桓榮)7)이 봉해진 것은 무력(武力) 때문이 아니요. 그러므로 궐리(闕里)에서 모인 무리와 화음(華陰)에서 저자를 세웠으나 그 시대가 계세(季世)에 속함에 사적(史籍)이 점점 은성하여 수레를 채우고 겸하여 두 시렁의 장옥(藏屋)이 넘쳤기에 동탁(董卓)이 장안(長安)으로 옮겨갈 적에 2천여의 수레에 실었으나 비를 맞아 훼손되고 버려서 백에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었소. 그때에 가려서 견소(絹素)를 참구하였고 사람들이 또 취하여 등복(縢幞)을 하였기에 낙읍(洛邑)에 돌아올 때에는 거두는 것이 대개 적어서 처음과 끝이 공잔(空殘)하여 혹은 부질(部帙)이 아닌 것도 있었소.
상고하여 보니 『논어』에서는 착한 말을 기록하였고, 『모시(毛詩)』에서는 완곡하게 간하는 것을 열었으며, 『상서(尙書)』에서는 조책(詔策)을 밝혔고, 『주역(周易)』에서는 길흉(吉凶)을 베풀었으며, 『3례(禮)』에서는 높고 낮음을 구별하였고, 『3전(傳)』에서는 7지(地)를 자세히 하였으며, 『전국책(戰國策)』에서는 권(權)과 정(正)을 베풀었고, 『산해경(山海經)』에서는 구릉(丘陵)에 대하여 말하였으며, 『3사(史)』에서는 예전과 지금을 기록하였고, 『3창(蒼)』에서는 문자를 말하였으며, 다음으로는 한비자(韓非子)와 노자(老子)와 묵적(墨翟)과 장주(莊周)와 관중(管仲)과 맹가(孟軻)와 신불해(申不害)와 평중(平仲)이며, 대대(大戴)와 소대(小戴)는 성은 같으나 이름이 다르고, 대관(大冠)과 소관(小冠)은 자(字)는 같으나 씨가 달라서 그의 앞 뒤의 저술을 통괄하여 보면 편축(編軸)이 더욱 성하여서 혹은 두 사마씨(司馬氏)와 두 반씨(班氏)와 현안(玄晏)과 포박자(抱朴子)와 채옹(蔡雍)과 유향(劉向)과 손성(孫盛)과 왕충(王充)들이며, 방씨(防氏)의 『7록(錄)』과 왕씨(王氏) 집안의 『4부(部)』에 미쳤다.
조사하여 보니 양나라 무(武) 황제가 완효서(阮孝緖) 등을 시켜서 문덕정(文德政)의 어전에서 문덕정 어서(御書) 4만 4천5백여 권을 편찬하였소. 그때에 무제는 내법(內法)을 닦았고 부처의 도를 많이 참구하였소.
또 유묘(劉杳)와 고협(顧協) 등 열여덟 명을 시켜서 화림원(華林苑) 가운데서 요어(要語) 7백20권을 편찬하니, 이를 『편략(遍略)』이라 이른다. 다 여러 책들을 추려 뽑아서 비슷한 부류로써 서로 모았을 적에 이에 문필(文筆)의 선비들을 검사하여 쓰니 머리털을 달아매고 송곳을 쥐는 데 이르러서 이를 연(緣)하여 게을러졌소.
또 『수광원(壽光苑)』 2백 권과 『요록(要錄)』 60권이 있으며, 『유원(類苑)』 1백20권이 있다. 이들은 마침내 주(周)나라가 은(殷)나라의 예(禮)를 인한 것이니, 덜하고 더했음을 알 수 있을 것이요. 그래서 명목(名目)은 비록 다르나 도리어 전의 것을 넓혔으니 이는 마치 걸상 위에 걸상을 깔고, 집 밑에 집을 가설한 것과 같소.
유신(庾信)의 『애강남부(哀江南賦)』에서 ‘저궁(渚宮)의 저녁에 원제(元帝)가 손수 서적 14만 권을 불태웠다’ 하였으니, 이는 겸본(兼本)들이요.
가만히 많은 것을 의심하여 저 홍류(洪流)를 교정하였으나 다시 용천(庸淺)한 헤아림이 아닐런지 불이 펴서 이름에 전론(典論)이 침몰하였을까 두렵소. 그래서 법사(法師)가 읽고자 하나 완비되어 있기가 어렵겠고, 또 급한 것만 따르기에 두루 꾸리지 못하였소. 다만 현(絃)과 위(韋)는 짝할 수 없고 천(闡)과 약(約)은 같지 않소이다.
역사책으로 지은 것은 전적으로 척당(倜儻)을 갖추지 못하였으며, 『춘추(春秋)』의 말은 더욱 작사(斫射)가 있으며, 유교의 풍(風)은 싸우는 전쟁에 망하고, 노자와 장자는 유탕(遺蕩)에 지나쳤으며, 『국어(國語)』는 헛됨을 숭상하였고, 좌구명(左丘明)은 기롱하고 속였소.
가령 5경(經)과 백씨(百氏)는 한림(翰林)의 체와 뼈 아닌 것이 없으며, 『이아(爾雅)』와 『이소(離騷)』는 인연과 정의 근본이 되기에 족하오. 그러니 그 인륜을 근원해서 자세하게 갖춘 것은 어찌 『예경(禮經)』과 『효경(孝經)』에 지나겠는가?
『효경』은 서민으로부터 황제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은 전적이요, 생으로부터 사(死)에 이르도록 끝과 처음을 갖추고 있소. 효(孝)가 있고 충(忠)이 있으며 신(信)이 있고 의(義)가 있어야 이치에 있어서 익히기 쉽고 일에 있어서 살펴서 잊기 어려운 것이오.
대략 18장(章)에는 효로 다스림이 첫째에 있어서 생각하여 보니 이임(吏任)들이 받드는 것이요, 민서(民胥)들이 힘입는 것이어서 신명을 관통하고 풍속을 다스리고 인도한다. 그러니 비록 5종(宗)의 항렬이 함께 한 번 열람하여 겸하여 외우더라도 바탕을 의론하면 이에 정신을 표명하고, 재주를 말하면 실지로 기량(伎倆)에 돌아오는 데는 오직 효가 포괄하여서 인(仁)하고 서(恕)할 뿐이니, 이는 집에서 스스로 이룸이 아니라 이와 같을 뿐이다.’
내가 또 꾸짖어 말하였다.
‘대저 5경(經)은 호한(浩汗)하고 백씨(百氏)는 부소(扶疎)하지만 뜻은 기미함을 아는 데 극하고 이치는 성품을 다함을 싸는 것이니, 비유하면 북극성이 온갖 사물에 응하는 것과 같고, 동쪽 바다가 온갖 냇물을 인도하는 것과 같아서 공을 서로 미루지 못하고 덕에는 오로지 내림이 없거늘 어찌하여 『효경』 한 권을 찬탄하는 데 그치겠는가?’
그 촌 늙은이가 대답하였다.
‘3덕(德)의 기초는 인륜이 주가 되고, 백행(百行)의 우두머리는 요도(要道)가 근원이 되오. 그러기에 태호씨(太昊氏)와 염제씨(炎帝氏)는 근본을 힘쓴다고 일렀으며, 주나라 무왕 발(發)과 주공 단(旦)은 크다고 일컬었으며, 공자가 자하(子夏)에게는 색(色)이 어렵다고 교훈하였고, 자유(子遊)에게는 공경함을 알라고 교훈하였으며, 선왕(先王)이 법을 받들면 건상(乾象)이 나타나고, 밝고 밝은 임금이 어버이를 높이면 산과 냇물이 상서로움을 표명하기 때문에 드디어 푸른 매가 절(節)에 합하고, 흰 꿩이 날아가는 데 길들며, 분백(墳柏)이 봄에 마르고, 물 속에 잠겼던 물고기가 겨울에 뜀이 있게 되오.
이를 나라에 행하면 정령(政令)이 온 천하에 나타나고, 향인(鄕人)에게 쓰면 덕의 가르침이 백성들에게 더합니다. 그러기에 ≺효도는 어버이 섬기는 데서 시작하고 임금 섬기는 것이 중간이 되고 자기의 몸을 세우는 데서 마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어버이에 대하여는 서리와 이슬을 밟으면서 감탄을 일으키고 차와 갈대를 품으면서 슬픔에 싸입니다. 찬 수풀의 아픔이 이미 더하였으며 바람과 나무의 마음이 더욱 간절합니다. 이로써 구부려서는 위의 성인에게 돌아오고, 발돋음하여서는 하우(下愚)에게 미친다 하겠소.
조사하여 보니 『예기』에 ≺효라 함은 봉양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구명결(鉤命決)』에 ≺효라 함은 나감이요 법도이고 기리는 것이요 연구함이요 봉양하는 것이다≻ 하였으며, 『이아(爾雅)』에 ≺부모님을 잘 섬기는 것을 효라 하니, 효의 뜻은 이어서 어버이를 받드는 것이다≻ 하였으며, 『예기』에 ≺기른다 함은 봉양하는 것이니, 효의 도는 덕을 기르고 이치에 따르고 때에 거스르지 않는 것으로서 이를 기른다고 이른다. 나간다 함은 이룸이니, 천자의 효는 우(禹)임금의 덕이 능히 용수로(用水路)에 힘을 다하여서 큰 공을 이루고는 보잘것없는 음식을 먹고 궁을 낮추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소.
그러기에 공자가 ≺내가 흠잡을 데가 없다≻ 하였다. 법도라 함은 제후(諸侯)의 효니 위로는 천자를 받들어 한 나라를 거느리고 그의 법도를 지켜서 뜻에 어기고 범함이 없는 것이요, 기린다 함은 경대부(卿大夫)의 효니 덕을 부지런히 하고 안으로 살펴서 일심으로 윗사람을 섬기어서 진실로 사직(社稷)에 이로운 것이면 법으로 하지 아니함이 없어서 이웃나라에 꽃다움을 전하여 맑은 법도가 저절로 멀리 가는 것이요, 연구한다 함은 다함이요, 선비라 함은 섬기는 것이니 능히 옳고 그름을 말하여서 한 관리로 하여금 본받게 하고 덕을 살피고 힘씀을 바로하여 충순(忠順)함을 잃지 않고 정성을 다하고 섬김을 다하여 그의 뜻이 옮기지 않는 것이오.
『주례(周禮)』의 사씨(師氏)의 직책에 ≺덕으로써 나라의 자식들을 가르친다. 첫째는 지덕(至德)이니 그로써 도의 근본을 삼음이요, 둘째는 민덕(愍德)이니 그로써 행의 근본을 삼음이요, 셋째는 효덕(孝德)이니 그로써 악하고 거슬림을 막는 것이다. 하늘이 덮고 땅이 싣는 공을 말한 것을 지덕이라 이르고, 그의 재성(裁成)의 공을 말한 것을 민덕이라 이르고, 그의 어질고 사랑하는 마음을 기린 것을 효덕이라고 이른다≻고 하였소.
공자가 효를 펼 적에 먼저 어버이를 사랑하여 이름을 드날림을 진술하고, 그런 뒤에 천경(天經)과 지의(地義)를 말하였으며, 주공은 효를 논할 적에 먼저 부도(覆燾)와 재할(宰割)을 일컬었고 그러한 뒤에 좋은 것을 부모에게 폈소이다.
공자는 주나라 말기에 나고 말속(末俗)에 성장하였기에 효제(孝悌)가 끊어짐을 보았고, 예악(禮樂)이 무너짐을 개탄하였소. 증자(曾子)는 돈독히 행하여 어버이 섬기는 데 삼가하여서 어버이의 곁에 모시는 것으로써 효도를 밝혔으니, 제자들이 기록을 두어 『효경(孝經)』이라 이름하였소이다.
『구명결』에 ≺1백 임금이 다 닦아서 만고에 바꾸지 않는 것은 효를 말함이다≻ 하였소.
진(秦)나라에서는 『여론(呂論:呂氏春秋)』의 한 글자를 걸어 놓아서 도리어 가책(可責)을 이루었고, 촉(蜀)나라에서는 『양언(楊言)』의 천 금을 걸어 놓아서 다시 더욱 괴이하게 되었소. 효경의 덕은 내[川]와 언덕으로도 셀 수 없지만 효는 신명을 감동시키고 공은 조화와 짝하여 무거움을 비기면 5악(岳)의 산이 가볍고 깊음을 비교하면 4독(瀆)의 흐름이 얕아서 바람과 비가 그의 파도를 어지럽히지 못하고 허공이 족히 그의 영예(令譽)를 깃들이지 못하오. 말은 간략하면서도 가르침은 커서 지극히 아름답고 지극히 선하오. 법사의 불교를 들려 주십시오. 간청하오. 말하여 제가 깨닫지 못한 것을 열어 주시오.’
내가 대답하였다.
‘안이 밖과 어긋나고 진(進)이 속(俗)과 어긋나서 비록 자취는 9류(流)가 달라서 이치가 일치하기는 어렵지만 오직 달관(達觀)한 선비는 회통(會通)하게 됩니다. 만일 그 가르쳐서 돌아오는 곳을 통괄하여 그의 시초와 종말을 자세히 하려면 성(性)과 상(相)으로서도 그의 문을 건널 수 없게 되고, 색(色)과 심(心)으로도 그의 경계에 이를 수 없소. 그러니 말함을 잊고 생각함을 끊어서 이미 유마(維摩)거사가 비야리성(毘耶離城)에서 입을 다물었으며 비춤을 다하고 신(神)을 다하여서 부처님께서 이에 마갈타(摩竭陀) 나라에서 엄실(掩室)하였소.
깊고 깊어 그윽하고 간략하니 희화(羲和)의 직책이 어찌 알겠으며, 미세하고 은밀하며 희이(希夷)하니 상림(上林)의 서적에도 싣지 않았소. 찾아보니 진사(眞士)와 응사(應士)가 다 자비한 바람에 목욕하였으며, 상방(上方)과 하방(下方)이 다 성스러운 가르침에 젖었소.
녹야원(鹿野苑)에서 시작하여 저 학림(鶴林)에서 마칠 때까지 곧 3장(藏)과 3륜(輪)의 글과 4승(乘)과 4계(階)의 말과 반자(半字)와 만자(滿字)의 큰 뜻과 관화(貫花)와 산화(散花)의 별담(別談)이 있어서 도도하게 마르지 않는 샘을 솟게 하고 담담하게 길이 사는 이슬을 드리웠소.
그의 말이 교묘하고 그의 뜻이 깊고 멀어서 여덟 하수가 바다에 돌아감과 같고, 1만 모양이 허공에 나아감과 같아서 알기 어렵고 들어가기 어려운 것은 모든 부처님의 이치에 맡기는 경(經)이라 부르고, 유(類)를 따르고 마땅함을 따르는 것은 지극한 사람의 권화(權化)하는 전적(典籍)이라고 부릅니다. 낙수(雒水)로부터 새서(璽書)의 송(頌)이 얽혀들고 방원(芳園)에서 화개(華蓋)의 사당을 세운 것은 주사행(朱士行)이며, 높은 무리들이 욕지(耨池)의 8미(味)를 마시는 것은 극가빈(郄嘉賓)이오.
세족(世族)이 가타(伽陀)의 일환(一丸)을 차고서 한가지로 자기의 몸에 평등하게 부처될 성품이 있음을 깨닫지 않음이 없으니, 이 번뇌가 곧 보리(菩提)임을 체달(體達)하는 것이오. 가령 소통지원(疏通知遠)의 글과 옥동금장(玉洞金章)의 글자와 장자방(張子房)의 신[履]을 주는 기술과 문희(文喜)가 도를 묻는 편(篇)은 다 말이 공공(空空)에 관계되지 않고 일이 유유(有有)에 마침내 걸리어서 아울러 여덟 가지 마(魔)의 그물에 걸리고 돌이켜 네 가지 전도(顚倒)되는 채롱에 얽히게 되니, 선생이 전에 말한 것과 어떤 것이 진선(盡善)합니까?’
그 촌 늙은이가 ‘이 늙은이는 늙음이 장차 이름에 내가 제일이라 하였는데 대략 법음(法音)을 들으니 나의 잘못이 황연(恍然)합니다. 공경히 명함을 듣고서 모두 받들어 행하겠습니다’고 사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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