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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479 법원주림(法苑珠林) 36권

by Kay/케이 2024. 7.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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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36

 

 

법원주림 제36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32. 현번편(懸幡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일로 인하여 이치를 깨달으니 반드시 모습[相]을 빙자하여 참다운 데로 인도하고, 성인의 모습을 우러러보고 신번(神幡)을 공경하여 받들어 올려야 한다. 그러므로 아육왕(阿育王)은 유신(遺身:부처님 유골)으로 탑을 만들어 멀리 허공에 띄워 걸었고 위주(魏主)는 통천(通天)의 누대(樓臺)를 일으켜 그 어짊이 은하수에 사무쳤던 것이다. 이에 빛나는 번기(幡旗)를 나부끼어 대천(大千)에 오르기를 바라고 주자(珠紫)가 서로 비추어 백억 중생들에게 밝음을 토해 내기를 기원했다. 지혜의 바람이 혹 움직여 청승(淸昇)의 업(業)에 징후가 있었고 실바람이 때때로 불어와 윤왕(輪王)의 과보가 끝이 없었다.

(2) 인증부(引證部)
『가섭힐아난경(迦葉詰阿難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아육왕(阿育王)은 스스로 경내(境內)에 1,200개의 탑을 세우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 뒤에 왕은 병이 들어 곤경에 처해 있었다. 어떤 사문(沙門)이 왕에게 문병을 오자 왕이 말하였다.
‘나는 전에 1,200개의 탑을 만들고 각각 금실로 짠 번기를 만들어 손수 그 번기를 달고 꽃을 흩어 비로소 일을 마무리 지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중병을 얻었으니 그 소원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스럽습니다.’
도인(道人:沙門)이 왕에게 말하였다.
‘바라건대 왕께서는 합장하고 한결같은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도인이 곧 신통을 보이자 당장에 1,200개의 탑이 한꺼번에 왕의 앞에 나타났다. 왕은 그것을 보고 기뻐하여통합뷰어
곧 금번(金幡)과 금화(金華)를 가져다가 모든 찰간(刹竿) 위에 달았다. 그러자 탑사(塔寺)가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면서 모두 왕 가까이로 왔다. 그 때 왕은 본래의 소원을 이루고 몸의 병도 다 나았다. 왕이 곧 큰 뜻을 발하자 수명도 25년이나 늘어났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번기를 속명신번(續命神幡)이라고 하였다.”
또 『보광경(普廣經)』에서 말하였다.
“만약 네 무리의 남녀가 임종할 무렵이나 또는 이미 목숨을 마쳤을 때, 그가 죽은 날 누런 번기를 만들어 찰간 위에 달면 그들로 하여금 복덕을 얻게 할 것이요, 여덟 가지 환난[難]의 고통도 여의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시방 모든 부처님의 정토에 태어나게 될 것이다. 번기와 일산의 공양은 마음의 소원을 따라 보리(菩提)까지도 이루게 할 것이고, 번기는 바람을 따라 움직여서 모든 번뇌[都蓋]를 부수어서 작은 먼지처럼 만들 것이다.
번기가 한 번 움직일 때에 전륜왕의 자리와 티끌처럼 작은 왕의 자리까지 그 과보가 한량없이 많아질 것이다.
등을 켜는 공양은 모든 어두운 곳을 다 비추므로 고통받는 중생들도 이 광명을 힘입어 서로 볼 수 있을 것이고, 이 복덕의 인연으로 중생들을 구제하여 다 쉬게 할 것이다.
[

【문】 무엇 때문에 경에서 죽은 사람을 위해 누런 번기를 만들어 찰탑(刹塔) 위에 달라고 하는가?
【답】 비록 성인의 해석은 보지 못했지만 이 이치로써 찾아볼 수 있다. 이 5대(大) 색깔 중에 황색(黃色)은 중앙에 위치하고 있어서 충성을 나타내고 있는데, 마음을 다해 복을 닦으면 중음신(中陰神)을 인도하여 변방의 나라에 태어나지 않고 중국(中國)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것이다.
또 황색(黃色)은 금의 형상이므로 귀신의 명도(冥道)에서는 금으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제사를 지낼 때에 흰 색 종이로 돈을 만들면 귀신은 은전(銀錢)1)으로 쓰고 누런 색의 돈을 만들면 귀신은 금전으로 쓴다.”
또 『비유경(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곡식 도적이 주인의 곡식을 다 훔쳐갔다, 주인이 도적(벌레)을 붙잡아 고문하였다.
‘너는 왜 내 곡식을 다 훔쳐갔느냐? 너는 무슨 귀신이냐?’
도적이 주인에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데리고 네거리 길에 나가면 내 이름을 아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주인이 누런 말을 타고 누런 옷을 입은 어떤 사람을 만났는데, 누런 옷을 입은 사람이 도적을 보고 물었다.
‘곡식 도적아, 너는 왜 여기에 있느냐?’
주인이 비로소 이 벌레가 곡식 도적임을 알고 그에게 또 물었다.
‘저기 누런 말을 타고 누런 옷을 입은 사람은 누구냐?’
곡식 도적이 말했다.
‘그는 황금(黃金)의 정(精)입니다. 주인의 곡식을 먹은 값을 갚으려고 하는 사람입니다.’
주인은 그로 인하여 금을 얻었는데 아무리 써도 다 없어지지 않았다.
진실로 사람과 귀신은 사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에 느끼고 보는 것도 각기 다르다. 그러므로 성인이 누런 번기를 만들어 죽은 사람을 위해 찰탑에 걸어두는 것이다. 그리하여 혼신(魂神)으로 하여금 찾아보아 진실2)을 얻게 하여 망령을 구제하는 것이다.”]
또 『백연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가비라위성(迦毘羅衛城) 안에 어떤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큰 부자로서 재물과 보배가 한량없이 많아 이루 다 칭량하여 계산할 수가 없었다. 그는 한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얼굴이 단정하고 수려하며 절묘한 것이 뭇 사람들보다 뛰어났다.
그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허공에서 큰 번기 하나가통합뷰어
온 성을 두루 덮었다. 부모가 그것을 보고서 한없이 기뻐하였고 그로 인하여 아이의 이름을 파다가(波多迦)라고 지었다.
이 아이가 나이가 들어 점점 자라자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구하여 아라한이 되어 3명(明)ㆍ6통(通)과 8해탈(解脫)을 갖추었다. 비구들은 그것을 보고는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파다가는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태어날 때부터 얼굴이 단정하여 뭇 사람들보다 뛰어났으며, 공중에 큰 번기가 있어 성 위를 두루 덮었고, 또 세존을 만나 출가하여 도를 증득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과거 91겁 전에 비바시(毘婆尸)부처님께서 열반(涅槃)에 드신 뒤에 그 당시 어떤 왕이 있었으니, 그 왕의 이름은 반두말제(槃頭末帝)였다. 그 왕은 그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어 네 개의 보배 탑을 세웠는데, 그 높이가 1유순(由旬)이었다. 그는 그 탑에 공양하곤 하였는데, 그 때 어떤 사람이 탑의 주변에서 큰 법회를 열고 한 개의 긴 번기를 만들어서 탑 위에 달아 놓고 발원하고는 떠나갔다.
이 공덕을 인연하여 이 때부터 91겁 동안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서 항상 큰 번기가 그를 덮었으며, 그는 또 복을 받아 쾌락을 누렸고 나아가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얻었느니라.’”
또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여러 비구들과 아난을 데리고 울비라연국(鬱卑羅延國)에서부터 여러 촌락을 두루 유행하셨다. 그 때 날씨가 극심하게 더웠는데 시원한 그늘이 없었다.
어떤 양치는 목동이 부처님께서 더위 속에 다니시는 것을 보고 곧 깨끗한 마음을 일으켜 풀을 엮어 일산을 만들어 부처님께 드리우고 부처님께서 다니시는 곳을 따라다녔다. 그러다가 양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보고 일산을 놓아 땅에 던져 버리고 양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부처님께서 미소를 지으시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양치는 사람은 나를 공경하는 마음 때문에 풀을 엮어 일산을 만들어서 부처님 위를 덮어주었다. 이런 공덕 때문에 13겁 동안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이나 인간 세계의통합뷰어
존귀한 가문에 태어나 그 쾌락이 무궁할 것이요, 항상 7보의 일산이 저절로 그를 씌워 줄 것이다. 13겁이 지나면 출가하여 도를 닦아 벽지불(辟支佛)이 될 것이니, 그 이름을 아뇩보리(阿耨菩提)라고 하리라.’
게송을 말한다.

보배 사찰 높은 교로(交露) 받들고
고운 채색 하늘을 비치네.
완전히 구름 사이에 펄럭이니
거꾸로 덮은 것이 붉은 연꽃 같아라.

노을 같은 번기 비단 빛을 여니
향기는 향로 연기와 어울려
펄럭펄럭 나부껴 정해진 곳 없으니
다만 본래 가볍게 돌기 때문이다.

못물은 온갖 그림자를 비추어 나타내고
샘물은 갖가지 꽃의 고움을 희롱하네.
밤낮으로 바람 불어 회전하니
전륜왕의 인연이 겹겹이 쌓이누나.

아무리 우러러보아도 싫증나지 않고
친구 맺어 오래도록 머물러 바라보며 감동하였네.
어찌 알겠느냐? 빛깔 중에 이 비단이
복을 불러오고 수명[壽]을 늘릴 줄을.”

감응연(感應緣)[한 가지 증험만 인용하였다.]
송(宋)나라 유침지(劉琛之)는 패군(沛郡) 사람이다. 일찍이 광릉(廣陵)에 있을 때 어떤 사문을 만났다. 사문은 침지를 보고 말하였다.
“당신에게 병 기운이 있으나 죽지는 않을 것입니다. 한 1,2백 전(錢)을 가지고 음식을 차려 대중 스님들에게 공양하면 그 걱정을 면할 것입니다.”
그러나 침지는 원래 불법을 믿지 않았으므로 이 말을 듣고 마음 속에 분노가 치밀었다.
사문이 말하였다.
“더욱 공경하는 마음과 믿음을 내어 내 말을 믿고 성을 내지 마십시오.”
그리고는 한 스무 걸음쯤 가다가 갑자기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7일이 지나자 침지는 병이 나서 위독해 거의 죽게 되었다. 9일이 되는 한낮에, 어렴풋한 꿈 속에 5층 불도(佛圖)가 심장 위에 있고, 20명쯤의 스님들이 탑을 돌면서 예배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이로 인해 큰 이익을 얻어 병이 차츰 나아갔다.
그 뒤에 그는 경사(京師)에 있었는데 전에 알지도 못한 어떤 사문이 갑자기 그 방으로 들어와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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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법에 인연이 있는데 왜 정진하지 않습니까?”
침지는 전에 사문을 만났던 일을 이야기하자 그는 대답하였다.
“그 사람은 바로 빈두로(賓頭盧)입니다.”
말을 마치자 곧 어디론지 가버렸다.
원가(元嘉) 17년(440) 여름에 광릉(廣陵)에서 침지는 멀리 혜왕정사(慧王精舍) 앞에 번기와 일산은 매우 많은데도 형상이 없음을 보고 곧 그리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 절 문에 이르자 그것들은 다 갑자기 없어져 버렸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33. 화향편(華香篇)[여기에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삼가 생각하면, 석가는 신(神)을 가비라위성에 내려 몸을 왕궁(王宮)에 의탁했다. 지혜는 실로 지식[知]을 생겨나게 하고 도는 오직 두루 깨달음을 낸다. 백억 세계에 지혜의 밝음을 연설하고 대천(大千)세계에 법비[法雨]를 쏟아 붓는다. 신령스런 모습은 시방에 두루하고 보배의 탑은 법계에 두루한다. 이름난 울금향을 사르니 가벼운 구름이 안개를 흩는 것 같고 보배의 꽃이 채색을 머금으니 거꾸러진 연뿌리가 연꽃을 드리운 것 같다. 지극한 정성으로 공양할 때 법의 자리로 함께 나아가, 머리를 조아리고 손가락을 튀겨 복과 이익에 함께 젖는다.

(2) 인증부(引證部)
『불설화취다라니경(佛說華聚陀羅尼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여래가 멸도(滅度)하신 뒤에 허허벌판 길을 가다가 여래의 탑을 보고, 한 송이 꽃을 바치고 한 개의 등불을 켜거나 혹은 한 덩이 진흙으로 불상 앞을 발라 공양하거나, 잔돈 한 푼이라도 불상을 보수하기 위하여 보시하거나 혹은 한 웅큼의 물로 불상을 씻어 더러운 것을 제거하고 꽃과 향을 공양하며 한 걸음 걸어서 탑으로 나아가거나 한 번이라도 ‘나무불(南無佛)’ 하고 부르면, 이 사람을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뜨리려고 하나 백천만 겁을 지나더라도 끝내 그렇게 할 수 없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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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정법념경(正法念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부처의 탑에 향을 바르면 그는 목숨을 마친 뒤에 향락천(香樂天)에 태어나서 여러 천녀(天女)들과 항상 서로 즐기다가 천상의 수명이 다하며 사람의 몸을 받아 태어나면 큰 부잣집에 태어나느니라.”
또 『아사세왕경(阿闍世王經)』에서 말하였다.
“과거 무수한 겁 전에 일체도(一切度)라는 부처님께서 계셨다. 그 부처님께서 그 권속들과 함께 걸식을 실행[分衛]하였다. 어떤 장자의 세 아들이 좋은 옷을 입고 함께 놀다가 부처님과 모든 보살들의 광명이 대단한 것을 보고 서로 손가락질하면서 ‘우리들은 마땅히 공양해야 한다’고 하였다. 두 아이가 말하였다.
‘향도 없고 꽃도 없는데 무엇으로 공양한단 말인가?’
그 중 한 아이가 머리에 꽂았던 흰 구슬을 빼어 들고 두 아이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것을 부처님께 공양하겠다.’
두 아이도 그것을 따라서 각각 머리의 구슬을 뽑아 들고 부처님께 갔다. 한 아이가 또 두 아이에게 물었다.
‘우리는 이 공덕으로 무엇을 구할까?’
한 아이가 말했다.
‘나는 부처님 오른쪽에 있는 비구와 같이 되기를 원하리라.’
또 한 아이는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 왼쪽에 있는 신족(神足)을 지닌 비구와 같이 되기를 원하리라.’
두 아이는 한 아이에게 묻자 그 한 아이는 대답하였다.
‘나는 부처님과 같이 되고 싶다.’
그 때 8천 천자(天子)가 다 말했다.
‘참으로 장하다. 만일 그 말대로 다 된다면 일체가 다 그 은혜를 입을 것이다.’
이 세 아이는 부처님 앞에 가서 각각 그 흰 구슬을 부처님 위에 흩었다. 처음에 말을 내어 그 뜻을 묻던 두 아이의 구슬은 부처님 어깨 위에 있었고, 보리심을 낸 한 아이의 구슬은 부처님의 머리 위에서, 구슬과 꽃이 뒤섞인 교로장(交露帳)으로 화했는데 그 장막 안에 부처님이 계셨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가운데의 그 아이는 바로 나요, 오른쪽에 있던 아이는 사리불이며, 왼쪽에 있던 아이는 목건련이이니라.
사리불아, 너희들은 본래 생사를 두려워했기 때문에 보리심(菩提心)을 내지 못하고 일찍이 열반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 한 아이를 보라.통합뷰어
아뇩보리를 구하였기 때문에 성불하게 되었느니라.’”
또 『채화수결경(採華授決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라열국(羅閱國) 왕이 열 명의 사람을 시켜 항상 좋은 꽃을 꺾어다가 왕가(王家)에 바치게 하였다.
하루는 후궁인 귀인(貴人)들이 성을 나가 꽃을 꺾다가 부처님을 만나 발심하고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고는 마음으로 혼자서 생각하며 중얼거렸다.
‘차라리 신명(身命)을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이 꽃을 부처님께 바치고 거룩한 대중들에게 뿌리리라. 그리하여 비록 해침을 당하더라도 고통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는 곧 그 꽃을 꺾어서 부처님과 거룩한 대중들에게 뿌리고 스스로 귀명(歸命)하여 일심으로 정중하게 부처님께 예배하였다. 부처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매우 불쌍하게 여겨 그들을 위해 설법하시자, 꽃을 꺾던 모든 사람들이 다 도에 대한 마음을 내었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별(記莂)을 주셨다.
‘훗날 틀림없이 부처가 되어 그 이름을 묘화(妙華)라고 하리라.’
그 때 꽃을 꺾던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가 그들 양친(兩親)에게 하직인사를 하였다.
‘저는 이제 목숨이 다하여 왕에게 발각되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부모가 깜짝 놀라면서 무슨 죄를 지었느냐고 물었다. 그들이 그 이유를 대답하였다.
‘왕에게 바칠 꽃이 없습니다. 발각되면 틀림없이 목숨이 위태로울 것이니, 그러므로 하직을 고하는 것입니다.’
양친이 그 말을 듣고 더욱 걱정하고 슬퍼하면서 꽃바구니를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는 좋은 꽃이 가득 들어 있었고 향기가 사방으로 짙게 퍼졌다.
부모가 말하였다.
‘이것을 왕에게 바치면 되지 않겠느냐?’
그 때 왕은 크게 성내어 말하였다.
‘어째서 알현하러 오지 않느냐?’
그리고는 사람을 시켜 결박해 오게 하였다. 그 죄는 마땅히 저자거리에서 참형을 당하여 버려지는 데 해당되었다. 꽃을 꺾던 사람들이 왕의 얼굴을 쳐다보았으나 그 안색이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왕이 괴이하게 여겨 그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의 죄는 마땅히 죽임을 당해야 하거늘 어째서 무서워하지 않느냐?’
그들이 곧 왕에게 아뢰었다.
‘사람은 태어나면 죽음이 있고 물건이란 이루어지면 반드시 부서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늘 법(法)이 아니면 신명(身命)을 아끼거나 하지 않습니다. 아침에 꽃을 꺾으러 갔다가 부처님을 만나 그 꽃을 다 공양하였습니다.
그것은 명령을 어긴 죄가 되니, 그 죄는 죽음에 해당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차라리 덕 있는 이 때문에 죽을지언정 덕이 없는 사람을 위해 살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와서 꽃바구니를 열어 보았더니 그 안에 꽃이 여전히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것은 모두 여래께서 은혜와 인자함으로 우리를 보호한 것입니다.’
왕은 매우 괴이하게 여기면서 마음으로 그 말을 믿지 않았으므로 일부러 부처님 계신 곳에 나아가 부처님께 그 뜻을 여쭈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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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그렇습니다. 이 사람은 지극한 마음으로 시방의 중생들을 구제하고 싶어서 신명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꽃을 나에게 뿌렸던 것입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보답을 받을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수기 받기를 ≺장래에 성불하면 그 이름을 묘화(妙華)라고 할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왕은 크게 기뻐하며 결박했던 것을 풀어주고 잘못을 뉘우치면서 생각이 어리석어 보살에 미치지 못했음을 자책하고 ‘바라옵건대 이 죄를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십니다. 능히 스스로 허물을 고칠 수만 있다면 그것은 죄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祈樹給孤獨園)에 계셨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여러 비구들을 데리고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걸식을 하시기 위해 막 어떤 거리에 이르렀는데, 한 부인이 어린아이를 안고 그 거리의 땅바닥에 앉아 있었다.
그 때 그 어린아이는 세존(世尊)을 만나뵙자 기쁜 마음이 생겨 그 어머니에게 꽃을 달라고 했다. 어머니는 곧 꽃을 사다 주었다. 어린아이는 꽃을 얻어 가지고 부처님 계신 곳으로 나아가 부처님 위에 그 꽃을 뿌렸다. 그 꽃은 허공에서 꽃 일산으로 변하여 부처님께서 가시거나 머물러 계시거나 간에 꼭 따라다녔다.
어린아이는 그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큰 서원을 세웠다.
‘이렇게 공양한 선근(善根)의 공덕으로 저로 하여금 미래 세상에 정각(正覺)을 이루어 부처님과 다름없이 중생들을 제도하게 하여지이다.’
그 때 세존께서는 이 어린아이가 그렇게 발원하는 것을 보시고 나서 곧 미소를 지으셨다. 그러자 부처님의 면문(面門:口)으로부터 다섯 가지 색깔의 광명이 나와 부처님을 세 번 돌고 다시 부처님의 정수리로 들어갔다.
그 때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여래께서는 존귀하고 소중하신 분이므로 헛되게 웃지 않으시는데, 무슨 인연으로 지금 미소를 지으셨습니까? 부디 세존께서는 자세히 풀어 말씀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이 어린아이를 보아라. 이 아이는 나에게 꽃을 뿌림으로써 미래 세상에는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天上)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서 항상 쾌락을 누리며 13아승기겁을 지난 뒤에는 벽지불(辟支佛)이 될 터이니, 그 명호를 화성(華盛)이라 하리라. 그는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여 한량이 없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미소를 지었을 뿐이다.’
통합뷰어
그 때 모두 비구들은 부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기뻐하면서 받들어 실천하였다.”
또 『백연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계셨다. 그 때 그 성 안에 호족(豪族)과 부귀한 장자(長者)들은 모두 샘물가에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스스로 즐기면서 바라내국(波羅柰國)을 위하여 화만(華鬘) 만드는 대회를 열었다.그 때 그 모임 속에 한 사람을 보내 숲 속에 가서 바라내꽃을 꺾어 화만을 만들게 하였다.
그 때 꽃을 꺾는 사람이 그 모임에서 꽃을 꺾으러 떠났다가 길에서 세존을 만났다. 그 부처님 상호에서 나오는 광명이 널리 비추어 마치 백천 개의 해와 같았다.
그는 매우 기뻐하면서 부처님의 발에 예배를 올리고 그가 꺾은 꽃을 모두 부처님 위에 뿌리고 떠나갔다.
그리고는 되돌아오면서 다시 꽃을 꺾으려고 나무에 올라갔다가 나뭇가지가 부러져서 땅에 떨어져 죽었다. 그는 목숨을 마치고는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는데, 모습이 단정하면서도 빼어나고 절묘하여 바라내(波羅柰)꽃을 가지고 궁전을 지었다.
제석천왕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어디에서 복업(福業)을 짓고 여기에 와서 태어났느냐?’
그는 본래 지은 인연을 가지고 제석천왕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러자 제석천왕은 게송으로 찬탄하며 말하였다.

네 몸은 마치 순금색 같아
두루 비추어 매우 선명(鮮明)하구나.
그 얼굴 단정하기 그지없어
여러 하늘들 중에 가장 뛰어나구나.

그 때 천자(天子)도 곧 게송으로 제석에게 대답하였다.

나는 부처님의 은덕을 입고
바라내꽃을 부처님 위에 뿌렸나니
이와 같이 좋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지금의 이런 과보 증득했다네.

그 때 천자는 곧 제석과 함께 부처님의 처소에 나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는 마음이 활짝 열리고 뜻이 풀려 20억이나 되는 삿된 소견의 업장(業障)을 깨뜨리고 수다원과(須陀洹果)를 증득하였다.
그리고는 마음 속으로 기뻐하면서 곧 부처님 앞에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게송을 말하였다.

우뚝하신 큰 세존은
최상(最上)이어서 견줄 데 없나니,
통합뷰어
부모님ㆍ스승의
공덕으로는 미칠 수 없다네.

네 개의 큰 바다 모두 말리고
백골(白骨)의 산을 모두 뛰어넘으며
세 개의 악한 세계 막아버리고
세 개의 좋은 문을 능히 여셨네.”

또 『잡보장경(雜寶藏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천녀(天女)가 게송을 말하였다.

나는 옛날 그 화만(華鬘)을
가섭부처님의 탑에 공양하고
지금 천상에 태어나서
이 훌륭한 공덕을 얻고
이 천상에 태어나 있으면서
금색 몸의 과보 얻었네.”

또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방의 승지(僧地)에 탑을 세울 수 없으면 부처님 법을 위하여 스스로 그 종자를 심어라. 만약 승가가 화합하면 세울 수 있지만 화합하지 못하면 만들 수 없다. 만일 승지에 갖가지 꽃이 있으면 마땅히 정인(淨人)이 그것을 취하여 차례로 승려에게 주어 마음대로 공양할 수 있지만, 그것을 사사롭게 취하여 스스로 삼보(三寶)에게 공양해서는 안 된다.
만약 꽃이 너무 많아서 승가에서 아무리 가져도 다함이 없을 때, 승가가 화합하면 그것을 마음대로 가지도록 허락하라.
또한 승방(僧坊) 안에 탑을 세우거나 불상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사람의 냄새나고 더러움을 가까이 함으로써 그것이 청정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2층으로 된 집에 있어서 만약 경전이나 불상이 아래층에 있으면 그 위에 살지 않아야 한다. 또 탑이 있는 땅의 꽃은 법과 승가에는 공양하지 말고 꼭 부처님에게만 공양해야 한다.
또한 이 꽃을 팔아서 번 돈으로 탑에 공양하는 데 쓰는 것은 가능하다. 또 탑에 소속되어 있는 물[水]은 탑에 공양하는 데 쓰고, 쓰다 남은 물이 있을 때, 만약 이 탑을 관리하는 사람이라면 그 남은 물을 팔 수도 있다. 그러나 그 돈은 탑에 소속된 것이기 때문에 다른 데에 사용해서는 안 된다. 만일 다른 데에 쓰면 계전범죄(計錢犯罪)에 속한다. 만일 탑 안에 아무도 없으면 물의 공력(功力)을 시설하여 한결같이 한 스님을 시켜 남아 있는 물의 많고 적음을 살피게 하고 그 분량을 잘 헤아려서 써야 하느니라.”
또 『문수문경(文殊問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문수사리(文殊師利)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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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존이시여, 공양하다가 남은 꽃으로 온갖 병을 치료하는 데 쓰게 한다면 그 법은 어떻습니까?’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그 꽃에 각각 따로 108번 주문(呪文)을 외워야 한다.’
부처님을 찬송하는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무 불다사야 사바하
南無 佛闥寫冶 沙 呵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마 가로미 반야바라밀다예 사바하
那末 柯盧履民旨反般若波羅蜜多裔 莎 呵
부처님 발꽃[佛足華]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모 바타제점담염 사바하
那莫 波陀制點耽鹽 莎 呵

보리수(菩提樹)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무 보리핍륵감람 사바하
南無 菩提逼力龕嵐 莎 呵

법륜(法輪)을 굴리는 곳의 꽃 주문은 이러하다.

나무 달마자가라야 사바하
南無 達摩斫柯羅夜 莎 呵

탑(塔)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모 슈바야 사바하
那莫 鍮跋耶 莎 呵

보살(菩薩)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무 보리살타야 사바하
南無 菩提薩埵野 莎 呵

많은 승가[衆僧]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모 승가야 사바하
那莫 僧伽野 莎 呵

불상(佛像) 꽃의 주문은 이러하다.
나모 바라지야 사바하
那莫 波羅底耶 莎 呵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꽃을 쓸 때에는 또한 사부대중이 믿고 수행하되, 반드시 일찍 일어나 깨끗하게 목욕하고 양치질하며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해야 한다. 이 꽃을 공경하여 발로 밟거나 꽃 위를 타고 넘지 말고통합뷰어
법대로 가져다가 깨끗한 그릇에 안치하라.
만약 누가 추위나 더위로 머리를 앓거든 모두 찬물로 이 꽃을 비벼서 그 물을 몸에 바르고, 토하거나 이질에 걸려 피똥을 싸거나 혹 배앓이를 하거나 속에서 번열이 나고 아프거든 장(漿)물에 이 꽃을 비벼 그 장물을 마셔라. 또 입에 부스럼이 났으면 따뜻한 물로 이 꽃을 비벼서 그 꽃 즙을 머금어라.
만약 하늘에서 비가 내려 그치지 않거든 공한처(空閑處)에서 이 꽃을 불에 태워버리면 비가 곧 그친다. 또 몹시 가물 때에는 공한처에서 이 꽃을 물에 담그고 다시 주문을 외우면서 찬물을 꽃 위에 뿌리면 하늘에서 곧 비가 내릴 것이다.
또 소나 말 따위가 본성이 온순하지 못할 때에는 이 꽃을 먹이면 곧 조복(調伏)될 것이다.
또 과일 나무의 꽃과 열매가 무성하지 못할 때에는 냉수와 쇠똥으로 이 꽃을 비벼 그 꽃 즙을 가져다가 그 나무의 뿌리에 주되 소홀히 하거나 너무 과하지 않으면 꽃과 열매가 많이 생길 것이다.
또 밭에 물이 너무 많아서 곡식이 손감(損減)될 때에는 이 꽃을 가져다가 가루로 만들어서 밭에 뿌리면 곧 곡식이 잘 자랄 것이다. 또 나라에 질병이 유행할 때에는 냉수로 꽃을 비벼서 나팔이나 북 따위에 발라 불거나 쳐서 소리를 내면 그 소리를 듣는 사람은 곧 병이 나을 것이다.
또 적국(敵國)이나 또는 도적들이 침략하거나 손해를 끼칠 때에는 물로 이 꽃을 비벼서 그곳에 가서 그 물을 뿌리면 곧 물러나 흩어질 것이다. 또 높은 산 반석(盤石)에서 많은 비구들이 그 돌 위에 꽃을 비비고 나서 서로 예배하면 오랜 뒤에 그 반석 위에서 저절로 진귀한 보배가 생길 것이다.’[우선 중요한 것만 뽑아 대략 기술한다. 나머지 자세한 내용은 이 경전에 의거해 보라.]
부처님께서 문수에게 말씀하셨다.
‘이 주문을 하나하나 108번 외우고, 너는 곳곳마다 이 주문 장구(章句)를 부처님께서 꽃에 대한 법을 설하듯이 꼭 말하라. 나머지 다른 꽃에 대해서도 다 그렇게 하라.’”
또 『화엄경(華嚴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사람이 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이름은 대상장(大象藏)이었다. 그 향은 용들의 싸움으로 인하여 생긴 것이었다.
만약 그 향 하나를 사르면 큰 광명이 일어나고 그물 같은 구름이 그 위를 덮으며 맛은 감로(甘露)와 같고 이레 밤 이레 낮 동안 향수의 비가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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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몸에 바르면 몸이 금빛이 되고 의복이나 궁전 누각에 바르면 그 또한 다 금빛이 되며, 만약 어떤 중생이 이 향기를 맡으면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기쁘고 즐거우며, 모든 병이 없어지고 횡액이나 억울한 일들도 없어진다. 두려움과 해칠 마음을 멀리 여의고서 오로지 큰 사랑으로 향하고 중생들을 널리 생각하게 된다.
나는 그런 줄 알고 나서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여 한량없이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물러나 변하지 않는[不退轉] 지위를 얻게 하였다.
또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은 이구산(離垢山)에서 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몸에 바르면 불로 그를 태워도 타지 않느니라.”
또 『백연경(百緣經)』에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가비라위(迦毘羅衛)성 안에 한 장자가 살고 있었다. 그 집은 큰 부자로서 재물과 보물이 한량없이 많아서 이루 다 칭량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그 집에 사내아이 하나가 태어났는데 그 얼굴이 세상에 드물 만큼 단정했다. 몸의 모든 털구멍에서는 전단향 냄새가 나고 그의 입에서는 우발화(優鉢華) 향내가 났다.
부모는 그것을 보고 나서 한량없이 기뻐하였고 이로 인하여 그의 이름을 전단향(旃檀香)이라고 하였다. 아이는 점점 자라나서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구하여 아라한과(阿羅漢果)를 증득하였다.
비구들은 이것을 보고 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전단향은 전생에 무슨 복을 지었기에 호족(豪族)의 집안에 태어나서 몸과 입에서는 향내가 나며, 또 세존을 만나 출가하여 도를 증득하였습니까?’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말씀하셨다.
‘지난 과거 91겁 전에 비바시(毘婆尸)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셨다. 그 때 반두말제(槃頭末帝)라는 왕이 있었는데, 그가 그 사리를 거두어 네 가지 보배로 높이가 1유순(由旬)이나 되는 탑을 만들고서 이 탑에 공양하였다.
그 때 어떤 장자가 그 불탑(佛塔)에 들어갔다가 땅이 갈라진 것을 보고 진흙을 발라 수리하고 전단향을 그 위에 뿌리고 발원한 뒤에 그곳을 떠나갔다.
그는 이 공덕의 인연 때문에 이 때부터 91겁 동안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았고 천상이나 인간 세계에 태어나면 그의 몸과 입에서는 항상 향내가 나고 복을 받고 즐거움을 누렸다.통합뷰어
나아가 지금에 이르러서는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증득하였다.’”
또 『대장엄론(大莊嚴論)』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에 들으니 가섭(迦葉)부처님 때에 어떤 법사(法師)가 대중들을 위해 설법하였는데, 그 대중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가섭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그는 목숨을 마치고 나서 천상에 태어났고, 그 뒤로도 그는 인간 세계와 천상에서 늘 쾌락을 누렸다. 석가모니부처님께서 반열반(般涅槃)에 드신 뒤로 1백 년이 지나 아수가왕(阿輸迦王) 때에 큰 법사가 되어 아라한이 되었고 그의 입에서는 항상 묘한 향기를 풍겼다.
어느 때 그 법사는 왕과 멀지 않은 곳에서 대중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있었는데, 그 입에서 나오는 향기가 왕의 처소에까지 이르렀다. 왕은 그 향기를 맡고 마음 속에 의혹이 생겨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비구가 묘한 향기로 조합하여 만든 것을 입에 머금고 있는 것일까? 그래서 이런 향내가 나는 것인가?≻
이렇게 생각하고는 그 비구에게 말했다.
‘입을 열고 양치질을 해보시오.’
그래도 여전히 그의 입에서는 향내가 났다.
비구가 왕에게 아뢰었다.
‘무슨 까닭에 나에게 입을 열고 양치질을 하라고 했습니까?’
그러자 왕이 대답하였다.
‘내가 그 향내를 맡고 마음에 의심이 생겼기 때문에 입을 열게 하고 양치질도 하게 했던 것입니다. 그래도 향내는 더욱 짙게 났는데, 이 향내는 오직 비구의 입에만 있을 뿐 다른 비구에겐 그 향내가 없었습니다.’
왕이 또 비구에게 말했다.
‘그 이유를 나에게 말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구는 미소를 지으면서 곧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 천지에 자재(自在)한 사람
지금 마땅히 그대를 위해 설명하겠습니다.

이것은 침수향(沈水香)이 아니요,
또한 꽃잎이나 줄기로 된 것도 아닙니다.
전단향 등 모든 향기가
화합하여 이런 향내를 내는 것입니다.

나는 희유(希有)한 마음을 내어
지금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옛날에 가섭부처님을 찬탄했기 때문에
곧 이런 향기를 얻은 것입니다.

저 부처님 때에 이미 모은 것
새 향기와 다름이 없나니
밤낮으로 항상 향기가 있어
일찍이 끊어졌던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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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일운경(日雲經)』에서 말하였다.
“향의 연기가 다하지 않은 것을 땅에 버리면 월기죄(越棄罪)를 받아 5백 년이 지난 뒤에는 분시지옥(糞屎地獄)에 떨어진다. 왜냐 하면 마음이 방자했기 때문이다.”
또 『야문경(夜問經)』에서 말하였다.
“장엄한 공양거리를 입으로 재를 불듯이 불어버리면 우발라지옥(優鉢羅地獄)에 떨어지며, 또 가까운 과보로는 풍신왕(風神王)이 된다.”
또 『요용최경(要用最經)』에서 말하였다.
“코로 향내를 맡은 사람은 향기를 감(減)하기 때문에 그 복덕이 없고, 정보(正報)로는 파두마지옥(波頭摩地獄)에 떨어지며, 미래 세상에는 코로 향기를 맡지 못할 것이다.”
또 『일공양경(日供養經)』에서 말하였다.
“향을 공양할 때에 그 향합을 닫지 않으면 흑분시지옥(黑糞屎地獄)에 떨어져서 반겁 동안 죄를 받을 것이고 그 뒤에는 믿음과 지혜의 과보가 없을 것이다. 왜냐 하면 기운이 아닌 것을 내어 향을 모으기 때문이다.”[이상 세 경전은 비록 목록에는 없는 것이지만 모두 신(神)을 감응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따로 표기(標記)해 둔다.]
또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 앞에 향을 사르는 데에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오래된 향을 바꾸는 것이요, 둘째는 반드시 스스로 향을 내어 쓰며, 셋째는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향을 보시하는 것이다.
또 향로를 쓸 때에 세 가지 일이 있다.
첫째는 먼저 향로를 엎어 묵은 재를 꼭 버리고 그 가운데 있는 향을 한쪽에 모으는 것이요, 둘째는 마땅히 깨끗하게 잘 닦은 다음에 불을 담고 다시 향을 주워 그 안에 두어야 하며, 셋째는 불을 담을 때에 불이 너무 성하더라도 입으로 불어서 끄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오랫동안 무명(無明) 나무를 싫어했더니
비로소 내원(柰苑) 꽃을 기뻐하게 되었네.
처음으로 향산(香山)의 길에 들어가
곧바로 화택(火宅)의 수레 만났네.

인자한 아버지는 여러 번 맞아 인도하는데
어린 아들은 그 은혜 배반하고 멀리 떠나네.
비록 등나무 갉는 쥐의 위태함을 깨닫지만
마침내 상자 안에 있는 뱀을 슬퍼하였네.

녹야원(鹿野苑)에는 선림(禪林)이 무성하고
영취산(靈鷲山)에서 그 가지를 움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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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정(禪定)의 꽃에 지혜의 열매 맺나니
허공을 타고 아득히 저 강을 건너가네.

법비[法雨]는 때때로 떨어지고
향의 구름은 조각조각 많기도 하다.
만일 장차 신선 되어 날아가려거든
여기 와서 진라(塵羅) 속에 있는 중생 구제하라.”

감응연(感應緣)[대략 일곱 가지 증험을 인용하였다.]

송(宋)나라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
제(齊)나라 고사(高士) 명승소(明僧紹)
양(梁)나라 사문 석혜쇠(釋慧釗)
남제(南齊) 진안왕(晋安王) 소자무(蕭子懋)
당(唐)나라 사문 석혜주(釋慧主)
당나라 옹주(雍州) 위남산(渭南山) 표곡(豹谷)의 신향(神香)
또 잡속(雜俗)의 향이 난 곳

① 송(宋)나라 사문 구나발마(求那跋摩)
옛날 송(宋)나라 영가(永嘉) 연간 외국의 삼장(三藏) 법사 구나발마가 기환사(祇桓寺)에 와서 머물고 있었다. 그가 강설할 때마다 사부대중은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한 번은 여름 안거(安居)를 마치고 신자들이 온갖 꽃을 꺾어 가지고 와서 여러 스님들의 자리 밑에 두었다. 그런데 뒤에 다시 보니 오직 구나발마 자리의 꽃만은 처음처럼 싱싱했다.
그는 죽을 때를 미리 알고, 그 날 먼저 목욕한 뒤에 합장하고 경을 외우면서 단정히 앉은 채 죽었다. 그 몸에서는 향내가 나고 또 부드러웠다. 그 자리 밑에 손수 쓴 유문(遺文) 한 권이 있었다. 그 게송은 다음과 같았다.

마라바(摩羅婆) 나라 경계에 있는
아란야(阿蘭若) 절에서
나는 처음 성과(聖果)를 얻었고
도적(道迹)이 되어 모든 번뇌 떠났다.

혹은 사자국(師子國)의
겁파리(劫波利) 마을에서
3과(果)를 더욱 닦았으니
이를 사다함(斯陀含)이라 한다.

문제(文帝)는 더욱더 기뻐하였다. 또 그 시체가 있는 곳에서 어떤 물건을 보았는데,통합뷰어
그 형상은 마치 용과 같았다. 길이는 1장쯤 되었는데 곧바로 하늘로 올라갔다. 대중 스님들은 매우 안타까워하면서 곧 외국의 법에 의해 향나무로 화장하고 탑을 세웠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② 제(齊)나라 고사(高士) 명승소(明僧紹)
제(齊)나라 서하사(栖霞寺)는 남서주(南徐州) 낭야군(琅邪郡) 강수북향(江垂北鄕) 빈가리(頻佳里)의 섭산(攝山)에 있다, 제나라 고사(高士) 평원(平原)의 명승소(明僧紹)가 송나라 태시(太始) 연중에 세운 것이다. 일찍부터 법종(法鍾)이 저절로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절은 마을에서 5, 6리쯤 떨어져 있었다.
송나라 승명(昇明) 때에 마을 사람들이 새벽에 그 산 중턱에 번기와 일산이 나열해 있고 5색 연기가 허공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것을 바라본 남녀들은 다 그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모두 다투어 가서 보았으나 아무것도 없었다.
그 때 법도(法度)라는 법사는 그 산의 절에서 『무량수경(無量壽經)』을 강설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갑자기 금빛이 온 절을 비추는 것을 보았다. 그 빛 가운데에는 흡사 대관(臺舘)과 같은 형상이 널리 벌려 있었다. 그 절의 스님들과 정인(淨人)들이 조금이라도 법답지 않거나 또 속인 나그네 등 더러운 사람들이 그 절에 들어가면 곧 호랑이가 나타나 으르릉거리며 각 방을 돌아다녔는데, 온 산골짜기를 울리는 그 소리는 지금도 그러하다. 혹은 염불이나 송경(誦經)을 하다가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부리면 곧 산신(山神)이 나타나곤 했다. 또 검은 옷을 입었고 키는 1장이며 손에는 밧줄을 들고 있었다. 스님들은 다 놀라고 두려워서 염불과 송경을 게을리하지 못했다.

③ 양(梁)나라 사문 석혜쇠(釋慧釗)
양(梁)나라 남방의 명진사(冥眞寺)는 말릉현(袜陵縣) 중흥리(中興里)에 있는데, 보통(普通) 5년(524)에 사문 혜쇠(慧釗)가 지은 것이다. 혜쇠의 성은 서(徐)씨이다. 제나라 초에 그 장인을 따라 여릉(廬陵)에 가서 살았다. 그는 길에서 두건 하나를 주웠는데, 그 두건 속에는 비단 머리띠가 있고 그 머리띠 속에는 5색 종이 봉지가 각각 다섯 개씩 있었다. 처음 네 겹에는 아무것도 볼 수 없었고, 마지막 제일 밑의 것은 그 꿰맨 종이의 빛이 마치 번갯불처럼 온 방안을 다 비추었다.
그는 이것으로 인해 신령스런 징조를 감응하여통합뷰어
물에 들어가도 빠지지 않았고 불에 들어가도 타지 않았다. 그 집 사람들은 그를 미쳤다 하여 처음에 대나무로 만든 우리 속에 가두고 굳게 잠가 두었는데 조금 있다가 그는 거기에서 나왔다. 그래서 그의 신력(神力)을 알고는 곧 빈 자리를 펴 놓고 복을 청했다. 그러자 공중에서 소리가 났다.
‘나는 바로 장생(長生)보살이다. 이 국토를 이롭게 할 것이니 너희들은 불법에 의해 청정하게 공양하라.’
이리하여 사람들은 다투어 향과 꽃을 공양했는데 그 때마다 영험이 있었다.
남인(南人) 이숙헌(李叔獻)이 본주(本州)로 옮겨 달라고 계속 빌었다. 그 뒤에 그는 과연 교주 자사(交州刺史)가 되어서는 침향(沈香)으로 그의 신영(神景)을 만들었다. 세상 사람들은 신(神)은 명화(名華)를 소중히 여긴다 하여 그것을 화랑신(華娘神)이라고 불렀고, 백성들은 공양을 보내어 재회(齋會)를 가득 메웠다. 그 이외에도 혜쇠가 교화한 곳에는 모두 절을 세웠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양경사기(凉京寺記)』에 나온다.]

④ 남제(南齊) 진안왕(晋安王) 소자무(蕭子懋)
남제(南齊)의 진안왕(晋安王) 소자무(蕭子懋)의 자는 운창(雲昌)인데 무제의 아들이다. 7세 때에 원숙원(阮淑媛)의 병이 위독하여 스님을 청해 도를 행했다.
어떤 사람이 연꽃을 부처님께 바쳐 공양했다. 대중 스님들은 구리쇠로 만든 독에 물을 담고 그 연꽃을 거기 담가 그 꽃과 줄기가 시들지 않게 하려고 했다. 이렇게 3일을 지났는데 꽃은 더욱 싱싱했다. 자무는 눈물을 흘리며 부처님께 예배한 뒤에 발원했다.
‘만일 이 훌륭한 꽃으로 인해 우리 어머니의 병을 낫게 할 수 있다면 부처님의 힘으로 재를 마칠 때까지 이 꽃을 시들지 않게 하여지이다.’
7일 동안의 재를 마쳤으나 꽃은 더욱 곱고 붉었다. 독 속을 살펴 보았더니. 꽃뿌리에 잔털이 조금 나 있었고 어머니 병은 곧 나았으므로 그 때 사람들은 모두 그 아들의 효도로 인해 생긴 감응이라고 했다.
자무의 아우 남해왕(南海王) 자한(子罕)의 자는 영화(靈華)이다. 그 어머니는 아름다운 얼굴을 좋아했는데 병이 위중했다. 자한은 밤낮으로 부처님께 예배했다. 그 때 그는 대나무로 등찬(燈纘)을 만들었다. 그 등불은 밤새도록 지극히도 밝았다. 이 등찬이 밤을 지낸 뒤에 가지와 잎이 무성하고 어머님의 병도 곧 나았다.[이 일은 『오균춘추(吳均春秋)』에 나온다.]

⑤ 당(唐)나라 사문 석혜주(釋慧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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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나라 시주(始州) 영안현(永安縣)에 살았던 석혜주(釋慧主)의 성은 가(賈)씨로서 계율 가짐이 제일이요, 또 복업을 지었다. 뒤에는 고향으로 가서 남산에 숨어 살면서 오직 솔잎만 먹고 살았다. 다른 부류인 금수(禽獸)들은 같이 모여 있으면서도 소리가 없었고, 혹은 산신(山神)이 복령(茯苓)ㆍ감송향(甘松香) 등을 보내 주었다. 여섯 때[時]로 도를 행하여 한 시도 빠뜨리지 않았다. 금수들이 따라다녔는데 예불하고 송경하면 그들이 꼭 듣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유현(幽顯)을 위해 보살계를 받았다.
그 뒤에 원숭이들이 그에게 말했다.
“우리는 당신과 다르지만 부처의 해는 다 통합니다.”
혜주는 매우 괴상히 여겼다.
‘축생이 말을 잘한다는 것은 참으로 희한한 일이다.’
그리고는 상서로운 용과 날짐승들이 특별히 뛰어난 향을 가지고 와서 산 안에 가득 채웠다. 뒤에 활재목을 채집하는 여덟 사람들이 와서 혜주를 보고 크게 놀라면서 혜주를 위로했다.
“지금 성군(聖君)이 세상에 나와 연호(年號)를 개황(開皇)이라 합니다.”
정관(貞觀) 3년(629)에 명(明) 선사는 절에 있었다. 그는 맑고 빼어나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한낮에 혼자 앉아 있다가 몸이 반쪽인 어떤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대중을 향해 말하였다.
“나는 혜주 율사와 함께 이 절을 지었다. 두 사람의 마음은 같은데 갑자기 나는 몸의 반을 잃었다. 장차 혜주 율사가 나보다 먼저 가려는 것이 아닌가?”
그 이튿날 점심 때에 속인들은 모두 놀라 말하였다.
“오늘 절에 무슨 모임이 있는가? 사방 길에 객승(客僧) 수천 명이 절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지금 어디 있는가?”
조금 있다가 점심 때에 혜주는 아무 병도 없이 세상을 떠났다. 나이는 89세였다.

⑥ 당(唐)나라 옹주(雍州) 위남산(渭南山) 표곡(豹谷)의 신향(神香)
당(唐)나라 옹주(雍州) 위남현(渭南縣) 남산의 도표곡(倒豹谷) 절벽에 돌이 하나 매달려 있었는데, 그 무늬와 형상이 거꾸로 달린 표범과 같았으므로 그 골짜기 이름을 도표곡(倒豹谷)이라고 했다. 또 그 골짜기에 있는 어떤 바위 모양이 마치 부처님 얼굴과 같았으므로 또한 그 골짜기를 상곡(像谷)이라고 했다.
옛 노인이 전하여 말하였다.
“옛날 어떤 범승(梵僧)이 와서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이 골짜기 상면산(像面山)에 일곱 개의 불감(佛龕)이 있는데, 옛날 일곱 부처님께서 여기 와서 설법하셨으며 개울에 있는 첨복(瞻蔔) 꽃으로 항상 공양하였다’고 하였다.”
근래에는 영휘(永徽) 연중에 남산 용지사(龍池寺)의통합뷰어
사문 지적(智積)이 향냄새를 맡고 찾아갔으나 어디서 나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다가 그것이 개울의 모래에서 나는 것 같아 곧 모래를 헤쳐 보았다. 모양이 띠풀 뿌리 같은 것이 모래에 싸여 있었는데 매우 향기로웠다. 그래서 그것을 가지고 나가 개울물에 흔들며 씻어 보았더니 온 개울물이 다 향기로웠다.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용지사 불당(佛堂)에 두었다. 온 불당이 다 매우 향기로웠다.
이 산 밑에 사는 속인들은 가끔 이 산에서 보았다고 한다. 혹은 불탑과도 같고 혹은 꼭 부처님의 얼굴 같은 것이 하늘 끝에 솟아나와 있었다. 그러므로 상두(像頭)라는 이름이 함부로 붙여진 것이 아니다. 또 그 옆에 가미곡(嘉美谷)이 매우 가까이 있었는데, 이것은 요진(姚秦) 때의 왕가(王嘉)가 살던 곳이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에 나온다.]

⑦ 또 잡속(雜俗)의 향이 난 곳
『수신기(搜神記)』에서 말하였다.
“처음에 구익(鉤弋) 부인이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였다. 그 시체는 냄새가 나지 않고 향기로웠다.”
『속수신기(續搜神記)』에서 말하였다.
“합비강(合淝江) 어귀에 크고 흰 배 한 척이 물 가운데 엎어져 있었다. 어부들이 밤에 그 곁에서 잠을 자다가 피리 소리를 들었고 또 향기가 크게 진동함을 느꼈다. 전하는 말에 의하면 ‘조공(曹公)이 기생을 싣고 놀다가 배가 여기서 엎어졌다’고 한다.”
『이원(異苑)』에서 말하였다.
“사주위(司州衛) 사도(士度)의 어머니는 항상 경을 외우고 장재(長齋)를 지내면서 도가 아니면 행하지 않았다. 일찍이 재를 올리고 재당(齋堂)에서 나올 때 스님들은 아직 공양하기 전이었는데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구름 속에서 어떤 물건이 내려와 그들 앞에 떨어졌다. 큰 발우에 향기로운 밥이 가득 담겨 있었다. 스님들은 다 숙연하게 한꺼번에 경례하고 그 어머니는 손수 그것을 나누어 주었다. 재에 모인 사람들은 이레 동안 배고픈 줄 몰랐다.”
『술이기(述異記)』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여산(廬山)으로 가서 소나무를 베다가 어떤 사람의 말소리를 들었다.
‘여기서 베어 가지 말라.’
이 사람은 소리를 찾아 올라가다가 이상한 꽃 한 송이를 보았다. 모양은 매우 사랑스럽고 그 향기는 비상했다. 그는 이것이 신이(神異)임을 알고통합뷰어
곧 꺾어 먹었다. 그리하여 3백 살이나 살았다고 한다.”
『유명록(幽明錄)』에서 말하였다.
“진상자(陳相子)는 오흥(吳興)의 오정(烏程) 사람이다. 처음에 불가(佛家)에서 불경을 보다가 드디어 승하술(昇霞術)을 배웠다. 인간에서 재를 지낼 때 공중에서 묘한 소리가 들리고 묘한 향기가 맑고 뛰어났었다.”
『허매별전(許邁別傳)』에서 말하였다.
“허매의 젊을 때의 이름은 영(映)이었다. 고평(高平) 염경(閻慶) 등이 다 그에게 나아가 수업을 받았다. 처음에 염경 등이 영에게 갔을 때 영이 피우는 향은 다 5색의 연기를 내었다.”
『부도증전(浮圖澄傳)』에서 말하였다.
“증이 발우에 물을 담고 향을 사르면서 축원하면, 잠깐 사이에 푸른 연꽃이 나왔다.”
『박물지(博物志)』에서 말하였다.
“서역(西域)의 사신이 향을 바쳤다. 한(漢)나라 제도에는 바치는 향이 한 근(斤)이 되지 못하면 받지 않게 되어 있었다. 서역 사신이 고국으로 출발할 때 향그릇을 내어 놓았다. 그것은 큰 콩알만했다. 시험삼아 그것을 궁문에 놓아 두었는데, 그 향기가 장안(長安) 사방 수십 리 안에 다 퍼졌고 하루가 지나서야 비로소 그쳤다.”
『부남전(扶南傳)』에서 말하였다.
“돈손국(頓遜國) 사람은 항상 향과 꽃으로 천신(天神)을 섬긴다. 향에는 많은 종류가 있다 구발엽(區撥葉) 꽃ㆍ치(致) 꽃ㆍ각수(各遂) 꽃ㆍ마이(摩夷) 꽃 등은 겨울과 여름에도 시들지 않으므로 하루 수십 수레씩 실어 장에 내다가 판다. 마를수록 더욱 향기롭고 가루를 내어 몸에 발라도 좋다.”
『술정기(述征記)』에서 말하였다.
“북쪽 국경에 장(張)씨 어머니 무덤이 있다. 옛 말에 의하면 왕(王)씨의 아내라고 한다. 매장한 지 여러 해 뒤에 무덤을 열어 보았더니 향불이 그대로 타고 있었다. 그 집에서는 그것을 받들어 청수도(淸水道)라 했다.”
세설(世說)에 말하였다.
“환거기(桓車騎) 때에 진장(陳莊)이라는 사람은 무당산(武當山)에 들어가 도를 배웠다. 그가 거처하는 곳에는 항상 흰 연기가 있었는데 그 향기가 사방에 진동했다.”
사향(麝香)에 대하여,통합뷰어
『산해경(山海經)』에서 말하였다.
“취산(翠山) 북쪽에 사향노루가 많다.”
『본초경(本草經)』에서 말하였다.
“사향은 맛이 시며 악을 물리치고 귀정(鬼精)을 죽인다. 중대산(中臺山)에서 생산된다.”
위유향(葳蕤香)에 대하여, 『손씨서응도(孫氏瑞應圖)』에서 말하였다.
“위유는 왕이 예의를 두루 갖추면 하루 동안에 뿌리가 나며, 왕이 사람의 목숨을 아끼면 난다. 또 위향(葳香)이라고도 한다.”
울금향(鬱金香)에 대하여, 『주례(周禮)』에서 춘관(春官)이 울인(鬱人)에게 올린 글에 말하였다.
“울인(鬱人)은 과기(祼古亂反器)를 맡은 사람이다. 무릇 손님을 대접하는 데에 오르는 과기는 울창주(鬱鬯酒)를 섞어 이기(彝器)에 담아 내어 놓는 것이다.”[울금초(鬱金草)를 쪄서 울창주(鬱鬯酒)를 만드는 것이다.]
『설문(說文)』에서 말하였다.
“울창(鬱鬯)은 백초(百草)의 꽃인데 남방 먼 곳 사람들이 공물(貢物)로 바치는 향기로운 물건이다. 울인(鬱人)은 그것을 모아 술을 빚어 강신제(降神祭)에 쓴다.”
소합향(蘇合香)에 대하여 『속한서(續漢書)』에서 말하였다.
“진(秦)나라에서는 여러 가지 향을 합해 그것을 삶은 물을 소합(蘇合)이라 한다.”
『광지(廣志)』에서 말하였다.
“소합향은 진(秦)나라에서 생산된다.”
혹은 말하였다.
“소합국(蘇合國) 사람들은 그것을 캐어 그 즙을 짜서 향기름을 만든다. 그리고 그 찌꺼기는 상인들에게 판다.”
혹은 말하였다.
“여러 가지 향초를 한데 삶아 소합을 만드는 것이요, 자연의 한 가지 물건이 아니다.”
부자(傅子)가 말하였다.
“서국(西國)의 호언(胡言)에 ‘소합향이란 짐승이 만드는 것으로서 중국에서는 다 그것을 괴변[怪]이라고 한다.’”
계설향(鷄舌香)에 대하여 오(吳)나라 때의 『외국전(外國傳)』에서 말하였다.
“오마주(五馬州)에서 계설향이 생산된다.”
『속수신기(續搜神記)』에서 말하였다.
“유광(劉廣)은 예장(豫章) 사람이다. 나이 어려 결혼하지 못하고 촌에 갔더니 어떤 여자가 말했다.
‘나는 바로 하참군(何參軍)의 딸로서 나이 14세에 일찍 죽었습니다. 서왕모(西王母)가 나를 기르면서 아래 사인(士人)과 사귀게 했습니다.’
유광은 그와 더불어 사귀었다. 그 날 자리 밑에서 수건을 얻었고통합뷰어
그 수건에는 계설향이 싸여 있었다. 그 어머니가 그것을 불에 태워 버리니 그것은 바로 화완포(火浣布)였다.”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서 말하였다.
“계설향은 두박주(杜薄州)에서 생산된다.”
또 말하였다.
“이 풀은 말라도 입에 머금으면 입을 향기롭게 할 수 있다.”
유익기(兪益期)의 전문(箋文)에 말하였다.
“외국의 늙은 호인(胡人)들이 말하는 여러 가지 향은 다 하나의 큰 나무인데 그 나무의 꽃을 계설향이라고 한다.”
작두향(雀頭香)에 대하여 『강표전(江表傳)』에서 말하였다.
“위(魏)나라 문제(文帝)는 사신을 오(吳)나라에 보내어 작두향을 구했다.”
훈육향(薰陸香)에 대하여 『위략(魏略)』에서 말하였다.
“진(秦)나라에서 훈육향이 생산된다.”
『남방초물장(南方草物狀)』에서 말하였다.
“훈육향은 대진국(大秦國)에서 생산된다.”
또 말하였다.
“바닷가의 모래밭에 큰 나무가 저절로 나서, 한여름에 그 나무의 진액이 흘러 모래 위에 떨어지면 이인(夷人)들은 그것을 채집해 모아 사람들에게 판다.”[『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도 이와 같이 말했는데, 다만 다른 것은 “그 모양은 복숭아 진액과 같다”고 한 것뿐이다. 또 전술(典術)에도 이와 같이 말했는데 다만 다른 것은 “송지(松脂)를 만드는 법과 같고 이것을 오래 먹으면 신령(神靈)에 통하게 된다”고 하였다.]
『유익기』의 전문[兪益期箋]에 말하였다.
“여러 가지 향은 다 하나의 나무인데, 그 나무 진액이 훈육향이 된다.”
유황향(流黃香)에 대하여,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에서 말하였다.
“유황향은 도곤국(都昆國)에서 생산된다. 도곤국은 부남(扶南)의 남쪽 3천여 리에 있다.”[『남주이물지』에도 이와 같다.]
『광지(廣志)』에서 말하였다.
“유황향은 남해(南海)의 변두리 나라에서 생산된다.”
청목향(靑木香)에 대하여 『광지(廣志)』에서 말하였다.
“청목향은 교주(交州)에서 생산된다.”
『서충남방기(徐衷南方記)』에서 말하였다.
“청목향은 천독국(天篤國)에서 생산되는데 그 형상은 알지 못한다.”
또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서 말하였다.
“청목향은 천축국(天竺國)에서 생산된다. 이 풀의 뿌리 모양은 감초(甘草)와 같다.”
『유익기(兪益期)』의 전문에서 말하였다.
“모든 향은 다 하나의 나무인데 그 나무 마디가 바로 청목향이다.”
전단향(栴檀香)에 대하여, 축법진(竺法眞)의 『등라산소(登羅山疏)』에서 말하였다.
“전단향은 외국에서 생산된다. 원가(元嘉) 말년에 승성등(僧成騰)이 산에서 큰 나무를 보았다.통합뷰어
그 그늘은 수묘(數畝)를 덮고 3장(丈)이 넘는 아름이요 매운 향내가 격렬했다. 그 사이의 마른 가지를 당겨 칼로 베니 이것이 흰 전단이다.”
또 『유익기』의 전문에서 말하였다.
“모든 향은 다 하나의 나무인데, 그 나무 뿌리를 전단이라 한다.”
감송향(甘松香)에 대하여 『광지(廣志)』에서 말하였다.
“감송향은 양주(凉州)의 모든 산에서 생산된다.”
도납향(兜納香)에 대하여 『위략(魏略)』에서 말하였다.
“도납향은 대진국(大秦國)에서 생산된다.”
『광지』에서 말하였다.
“도납향은 서방(西方)에서 생산된다.”
애납향(艾納香)에 대하여 『광지』에서 말하였다.
“애납향은 표국(𣿖國)에서 생산된다.”
『악부가(樂府歌)』에서 말하였다.
“나그네 호인(胡人)은 어디서 오며, 여러 나라들은 무엇을 가지고 오는가? 구(氍)담요ㆍ유(毺)담요ㆍ흡(𣯾)담요ㆍ등(㲪)담요 등과 다섯 목향(木香)과 미질향(迷迭香)과 애납향과 도량향(都梁香) 등이다.”
곽향(藿香)에 대하여 『광지』에서 말하였다.
“곽향은 남방의 모든 나라에서 생산된다.”
『오시외국전(吳時外國傳)』에서 말하였다.
“도곤(都昆)은 부남(扶南)에 있는데 거기서 곽향이 생산된다.”
또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서 말하였다.
“곽향은 전손(典遜)의 바닷가에 있는 나라에서 생산된다. 전손은 부남(扶南)에 소속되어 있다. 곽향의 모양은 도량향(都梁香)과 같고 옷 속에 넣어 두면 좋다.”
『유익기』의 전문에서 말하였다.
“모든 향은 다 하나의 나무인데 그 나뭇잎을 곽향이라 한다.”
풍향(楓香)에 대하여, 『남방기(南方記)』에서 말하였다.
“풍향나무의 씨는 오리알만하고 그것을 햇볕에 말리면 태울 수 있다.”
「위무령(魏武令)」에서 말하였다.
“방이 깨끗하지 못하면 햇볕에 말린 풍향과 혜초(蕙草)를 태우는 것을 허락한다.”
잔향(𥴈香)에 대하여 『광지』에서 말하였다.
“잔향은 남방의 여러 나라에서 생산된다.”
목밀향(木蜜香)에 대하여 『이물지』에서 말하였다.
“목밀향을 향수(香樹)라 하며, 난 지 천 년된 뿌리는 너무 크므로, 먼저 베어 넘어뜨리고 4, 5년 뒤에 가서 보면, 세월이 오래 되어 그 나무 뿌리의 나쁜 것은 다 썩어버리고 가운데 마디만이 단단하며 매서운 향기가 있을 뿐이다.”
또 『광지』에서 말하였다.
“목밀향은 교주(交州)와 서방(西方)에서 생산된다.”
『본초경(本草經)』에서 말하였다.
“목향은 또 밀향이라고도 하며통합뷰어
맛은 맵고 성질은 따뜻하다.”
병향(栟香)에 대하여 『남방초물장(南方草物狀)』에서 말하였다.
“병향의 줄기는 오호(烏滸)에서 생산된다.”
도량향(都梁香)에 대하여 『광지』에서 말하였다.
“도량향은 회남(淮南)에서 생산된다.”
침향(沈香)에 대하여 『이원(異苑)』에서 말하였다.
“사문(沙門) 지법(支法)은 광주(廣州)에 있으면서 8척 되는 담요를 가지고 있었고 또 침향과 8척의 평상도 가지고 있었다. 태원(太元) 때에 왕한(王漢)은 광주의 대아(大兒)를 위해 그 두 가지 물건을 사문에게 힘써 청했으나 주지 않았으므로 그를 죽여 버리고 그것을 얻어 가져다 주었다.”
『남주이물지(南州異物志)』에 말하였다.
“목향(木香)은 일남(日南)에서 생산된다. 이것을 채취하려면 먼저 나무를 베어 오랫동안 땅에 쌓아 둔다. 겉의 흰 부분은 다 썩어버리고 그 심(心) 속의 단단한 것을 물에 담그면 이것을 침향이라 한다. 그 다음에 심과 바깥 흰 부분 사이에 그다지 단단하지 않은 것을 물에 담가 두면 가라앉지도 않고 뜨지도 않아 수면과 편편하다. 이것을 잔향(𥴈香)이라 하며 그 가장 작고 거칠고 흰 것을 참향(槧香)이라고 한다.”
또 『고미광주기(顧微廣州記)』에서 말하였다.
“신흥현(新興縣)의 향은 다 침향이다. 모양은 동심초(同心草)와 같다. 토인(土人)들이 그것을 베어 여러 해를 지내면 살은 다 썩고 심(心)만 남는다. 이것을 침향이라고 한다.”
또 『유익기(兪益期)』의 전문에서 말하였다.
“모든 향이 다 하나의 나무인데 그 나무의 심(心)을 침향이라고 한다.”
갑향(甲香)에 대하여, 『광지』에서 말하였다.
“갑향은 남방에서 생산된다.”
또 『범엽화향방(范曄和香方)』에서 말하였다.
“갑(甲)을 달인 것을 잔향(𥴈香)이라고 한다.”
미질향(迷迭香)에 대하여 『위략(魏略)』에서 말하였다.
“미질향은 대진(大秦)에서 생산된다.”
『광지』에서 말하였다.
“미질향은 서해(西海)에서 생산된다.”
영릉향(零陵香)에 대하여 『남월지(南越志)』에서 말하였다.
“토인(土人)들은 영릉향을 연초운향(鷰草芸香)이라고 한다.”
『대대례(大戴禮)』에서 말하였다.
“하소정(夏小正) 달에 운초를 캐어 사당의 채소로 쓴다.”
또 『예기(禮記)』 월령(月令)에서 말하였다.
“중동(仲冬) 달에 운초가 처음 생산된다.[정현(鄭玄)이 말하기를, “운초는 향초이다”라고 했다.]”
또 『설문(說文)』에서 말하였다.
“운초는 목숙(目蓿)과 같다.”
『회남설(淮南說)』에서 말하였다.
통합뷰어
“운초는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릴 수 있다.”
난향(蘭香)에 대하여 『주역』 계사(繫辭)에서 말하였다.
“마음을 같이하는 사람의 말은 그 향기가 난초 같다.[왕광(王廣)이 말하기를, “난(蘭)은 방(芳)이다”라고 했다.]”
또 『역통괘험(易通卦驗)』에서 말하였다.
“동짓달에 광막한 바람이 불면 난초가 처음 난다.”
또 『설문(說文)』에서 말하였다.
“난초는 향초다.”
또 『본초경』에서 말하였다.
“난초는 일명 수향(水香)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을 오래 먹으면 기운이 늘어나고 몸이 가벼워지며 늙지 않는다. 그리고 괴향(槐香)은 몽초(蒙草) 중간에서 생산된다. 그러므로 계합(稽合)이 지은 「괴향부(槐香賦)」의 서문에 말하였다.”
또 도말향(兜末香)에 대하여 『한무제고사(漢武帝故事)』에서 말하였다.
“서왕모(西王母)가 내려올 때 왕이 도말향을 피웠다. 도말향은 도거국(兜渠國)에서 바친 것으로서 큰 콩만하며 문에 바르면 향기가 백 리까지 풍긴다고 한다. 일찍이 관중(關中)에 큰 역질(疫疾)이 돌아 사람들이 잇따라 죽었다. 그 때 이 향을 피워 죽는 사람이 그쳤다고 한다.”
또 생향(生香)에 대하여 『진인관윤전(眞人關尹傳)』에서 노자(老子)가 말하였다.
“진인(眞人)이 놀 때는 각각 연꽃 위에 앉는다. 연꽃 지름은 10장(丈)이다. 또 반생영향(反生靈香)은 그 향기가 바람을 거슬러 30리까지 풍긴다.”
신향(神香)에 대하여 『십주기(十洲記)』에서 말했다.
“천한(天漢) 3년(B.C. 98)에 서국(西國)의 왕사(王使)가 영교(靈膠)ㆍ길광구(吉光裘)ㆍ신향(神香)을 바치면서 그 사신이 말하였다.
‘이 신향은 요사(夭死)한 사람을 다시 살린다.’
그 뒤 원년(元年)에 장안 성내[長安城內]에 큰 병이 돌아 하루 백여 명이 죽었다. 임금은 시험삼아 그 월지(月氏)국의 신향을 성내에 피웠다. 죽은 지 사흘이 못 된 사람은 다 살아나고 꽃다운 향기는 사흘이 지나도록 그치지 않았다. 임금은 사람을 시켜 비밀히 기록해 두었는데 그 뒤 하루 아침에 다 잃어버렸다.”
경정향(驚精香)에 대하여 『십주기』에서 말하였다.
“취왈주(聚曰洲)는 서해에 있다. 그 뒤는 진선(眞仙)의 영관(靈舘)이 많은데, 궁제(宮第) 북문에 있는 큰 나무는 풍목(楓木)과 비슷하고 그 향기는 수백 리까지 풍기는데 그 이름을통합뷰어
반혼수(反魂樹)라고 한다. 나무를 두드리면 마치 소가 우는 소리처럼 나서 그 소리를 듣는 사람마다 다 놀란다. 그 뿌리의 심(心)을 캐어 옥 가마에 삶아 즙을 내고 다시 약간 볶아 환(丸)을 만들면 그것을 경정향이라고 한다. 혹은 진령(震靈)이라고도 하며 또 다른 이름은 반생향(反生香)이라고도 하고, 혹은 인오정(人烏精)이라고도 하며 혹은 각사향(却死香)이라고도 한다. 그 향기는 수백 리까지 풍기며 땅에 쓰러져 있던 시체도 그 향기를 맡으면 곧 살아난다.”

34. 패찬편(唄讚篇)[여기에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찬탄부(讚歎部)
음악부(音樂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표창[襃]을 기술하는 뜻은 노래를 읊는 글에 붙여지고, 노래를 읊는 글은 소리에 의지한다. 그러므로 노래를 읊는 것이 교묘하면 표창을 기술하는 뜻이 펼쳐지고, 소리가 절묘하면 노래를 읊는 글이 화창[暢]하니 말과 글이 소리를 기다리는 것은 서로 돕는 이치이다.
서방(西方)의 범패(梵唄)를 살펴 보면 동국(東國)에 있는 찬(讚)과 같다. 찬이란 글을 따라 문장을 얽는 것이요, 패라는 것은 짧은 게(偈)로써 송(頌)을 펴는 것이다. 그 일과 뜻을 비교하면 이름은 다르지만 실상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하였다.
“미묘한 음성으로써 부처님의 덕을 노래하여 찬탄한다.”
이렇게 말한 것이 바로 그 뜻이다.
옛날에 석존(釋尊)께서 선정에 드시자 거문고 소리와 노래 소리가 석실(石室)을 진동하였고, 바제(婆提)가 패(唄)를 드날리자 맑은 메아리가 정거(淨居:하늘)에 사무쳤으니, 세상을 깨달으신 지극한 음성을 진실로 다 칭송할 수 없다.
말법 시대에 이르러서 이것을 닦고 익힘에 지극히 밝은 징험이 있었다. 그런 까닭에 진사(陳思:陳思王 曹植)의 정밀한 생각은 어산(魚山)의 범창(梵唱)을 감득했고, 백교(帛橋:人名)의 서원(誓願)은 대사(大士)의 미묘한 음성을 통달하였으며, 약련(藥練)은 부지런한 행동으로 유기(幽祇)에서 법운(法韻)을 받았고, 문선(文宣)은 힘쓴 정성으로 재실(齋室)에서 몽향(夢響)을 발하였다.
이것은 다 천궁(天宮)의 기운을 모사(模寫)하고 정찰(淨刹)의 소리를 본뜬 것으로서 사계(詞契)를 누르고 높이며 절문(節文)을통합뷰어
토해내고 받아들인 것이니, 이 또한 신응(神應)의 드러난 징조요 학자(學者)의 명백한 모범이다.
저 경전의 음성을 본보기[懿]로 삼으니 그 절묘함은 자연에서 나오고, 만들어 사용함에 닦고 연마하니 그 메아리는 익혀서 되는 것이 아니다.
대개 도의 소리를 찬란하게 발하여 세속의 소리[聽]로 바꾼 까닭은 마땅히 그것으로 하여금 맑으면서도 약하지 않고 웅장하면서도 사납지 않으며, 흐르면서도 넘치지 않고 엉기면서도 막히지 않아, 그 취지가 기취(祇鷲)의 풍도를 발휘하고 그 운치가 소한(霄漢)의 기운을 맺어 멀리서 들으면 왕양(汪洋)하여 높고 맑으며 가까이 붙으면 종용(從容)하여 화목하고 엄숙하게 하기 위해서이니, 이것이 그 큰 취지이다.
경전은 깊고도 멀어서 우레 소리라고 한 말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또한 칭찬하고 찬탄하며 끊임없이 재(齋)를 올린다면 대중들이 많이 모여 영원할 것이다. 밤이 너무 깊고 오래되어 향불이 사라지고 촛불이 꺼지면, 졸음의 덮개[睡蓋]가 저 6정(情)을 덮을 것이요, 게으름의 번뇌[嬾結]는 온몸[四體]을 얽어맬 것이다.
이에 미묘한 메아리를 선택하여 법좌에 오르고 훌륭한 소리를 가려내어 경전을 열면 궁(宮)ㆍ상(商)의 노랫소리는 옥과 금을 진동시켜 도리어 4비(飛)를 꺾고 7중(衆)을 슬프게도 하고 기쁘게도 할 것이다. 그것은 가릉빈가(迦陵頻伽)의 소리와 같고 신란(神鸞)의 메아리와 같아서 능히 잠의 혼을 다시 깨우고, 게으름의 정(情)을 도로 엄숙하게 함으로써 방안에 가득한 사람들의 귀를 놀라게 하고 자리에 참석해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할 것이니, 그러한 때에 당면하면 비로소 경성(經聲)의 귀함을 알게 될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장아함경(長阿含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음성에 다섯 가지 맑고 깨끗함이 있어야 비로소 범성(梵聲)이라고 말한다.
어떤 것을 그 다섯 가지라고 하는가?
첫째는 그 음성이 정직한 것이요, 둘째는 그 음성이 화목하고 맑은 것이며, 셋째는 그 음성이 깨끗하게 통하는 것이요, 넷째는 그 음성이 깊고 가득한 것이며, 다섯째는 그 음성이 두루하고 멀리까지 들리는 것이니, 이 다섯 가지를 갖추어야 비로소 범음(梵音)이라고 말한다.”
또 『범마유경(梵摩喩經)』에서 말하였다.
“여래께서 설법하시는 음성에는 여덟 가지가 있다.
첫째는 가장 좋은 음성이요, 둘째는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음성이며, 셋째는 부드럽고 나긋나긋한 음성이요,통합뷰어
넷째는 온화하고 고른 음성이며, 다섯째는 존귀하고 슬기로운 음성이요, 여섯째는 잘못 말하지 않는 음성이며, 일곱째는 심오하고 절묘한 음성이요, 여덟째는 여자의 음성과 같지 않은 것이니, 그 말에 새어나가거나 빠짐이 없어서 그 단점을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모든 하늘이 범패 소리를 듣고 마음으로 기뻐하기 때문에 개패성(開唄聲)이라고 한다.”
또 『비니모경(毘尼母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여러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에게 범패를 허락한다. 범패라는 것은 언설의 말씀[辭]이니라.’
‘아무리 그 언설을 들어도 무슨 법을 설명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다라(修多羅)에서부터 나아가 우바제사(優婆提舍)에 이르기까지 마음대로 설명한 12부(部) 경전에 대하여 또한 의심하는 사람이 있어서 만약 차례차례 그 글을 설명하자면, 글이 너무 많아져서 싫증을 내게 될까 염려스럽다. 만약 좋은 말만 간략하게 추려 모아서 그 이치를 바로 나타내 보이면 어떨지 모르겠다.’
이러한 인연들을 세존께 갖추어 아뢰자, 부처님께서 곧 허락하셨다. 그러자 여러 비구들은 경전 중에서 중요한 말씀과 절묘한 글을 인용하여 그 뜻을 직설적으로 나타내었다.
그 때 어떤 비구가 부처님과 거리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높은 소리로 노래를 지어 경전을 외웠다. 부처님께서 그 소리를 들으시고는 허락하지 않으시며 말씀하셨다.
‘이 음성으로 경전을 외우면 다섯 가지 허물이 있나니, 그것은 마치 외도들이 노래하는 음성으로 법을 설하는 것과 같다.
첫째는 스스로 지닌 것이라 말할 수 없는 것이요, 둘째는 청중들에게 맞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모든 하늘들이 기뻐하지 않는 것이요, 넷째는 말이 바르지 않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며, 다섯째는 말이 교묘하지 못하기 때문에 뜻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니, 이것을 다섯 가지 허물이라고 말하느니라.”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에 바사닉왕(波斯匿王)이 군사들과 함께 기원정사(祇洹精舍) 곁을 지나가다가 한 비구의 청아하면서도 좋은 범패 소리를 들었고, 군대들도 서서 들었는데 전혀 싫증이 나지 않았다. 코끼리와 말들까지도 귀를 쫑끗 세우고 머물러 선 채 가기를 거부했다.
왕은 군사들과 함께 곧바로 절에 들어가 보았다. 그리고 범패를 하는 비구를 보았더니 그 형모(形貌)가 말할 수 없이 추악하고 더러웠으며 키는 난쟁이와 같아서 차마 볼 수가 없었다.통합뷰어
왕이 곧 부처님께 여쭈었다.
‘지금 이 비구는 과거에 무슨 업을 지었기에 이런 과보(果報)를 받습니까?’
부처님께서 왕에게 말씀하셨다.
‘지나간 과거 세상에 어떤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그 명호는 가섭(迦葉)이었습니다. 그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신 뒤에 기리비왕(機里毘王)이 그 사리를 거두어 가지고 탑을 세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네 용왕(龍王)이 사람의 모습으로 변신하여 그 왕에게로 와서 탑 세우는 일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보배를 써서 만드시려고 합니까, 아니면 흙으로 만드시려고 합니까?≻
왕은 곧 대답하였습니다.
≺큰 탑을 만들어 볼까 하는데 보물이 많지 않다. 그래서 지금 흙으로 만들려고 하는데, 그 탑의 사방은 5리(里)로 하고, 높이는 25리로 하려고 한다.≻
용이 왕에게 말하였습니다.
≺내가 바로 용왕인데 일부러 와서 물어본 것입니다. 만약 보물을 사용하시려면 제가 반드시 도와드리겠습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용왕이 다시 왕에게 말하였다.
≺네 성문 밖에 네 개의 샘물이 있습니다. 동쪽 문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해자[塹]를 만드는 데 쓰면 그것이 유리(琉璃)로 변할 것이요, 남쪽 문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해자를 만드는 데 쓰면 그것은 황금으로 변할 것이며, 서쪽 문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해자를 만드는 데 쓰면 그것은 백은(白銀)으로 변할 것이요, 북쪽 문에 있는 샘물을 떠다가 해자를 만드는 데 쓰면 백옥(白玉)으로 변할 것입니다.≻
왕은 그 말을 듣고 기쁨이 배나 더하여 곧바로 네 명의 감독관을 세우고 각각 한 가지씩의 일을 맡게 하였습니다. 그 중 세 감독관은 곧 일을 시작하여 거의 이루게 되었으나 한 감독관은 게으름을 피워 유독 혼자만 일을 성취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자 왕이 그곳에 가서 보고 그 사람을 이치로 꾸짖었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원망을 품고서 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이렇게 큰 탑을 언제 다 만들겠습니까?≻
왕이 공인들에게 칙명을 내려 밤낮으로 부지런히 짓기 시작하여 한꺼번에 다 마쳤다. 탑은 매우 높았고 온갖 보배로 장엄되어 있어 아주 특이하고 장관이었다.
그 감독관은 이 탑을 보고 나서 환희용약(歡喜踊躍)하며 지난 잘못을 참회하고 한 개의 금방울을 가져다가 탑 꼭대기에 달고는 소원하는 말을 하였다.
‘나로 하여금 태어나는 곳마다 음성이 매우 아름다워서 일체 중생들로 하여금 듣기 싫어하는 사람이 없게 하소서. 또 장래에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현하실텐데 그 명호는 석가모니라고 하실 것입니다. 그 때엔 저로 하여금 그 부처님을 만나뵙게 하고 생사를 벗어나게 하소서.’
얫날에 탑이 큰 것을 혐오했기 때문에통합뷰어
태어나면 얼굴이 항상 못나고 더러웠고, 금방울을 가져다가 탑 꼭대기에 달고 부처님 만나뵙기를 소원하였기 때문에 그 뒤로 5백 생 동안 음성(音聲)이 매우 아름다웠으며, 지금은 또한 부처님을 만나 출가하여 도를 닦아 아라한과를 증득하였습니다.
이러한 인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은 다른 사람이 복을 짓는 것을 보거든 마땅히 헐뜯고 비방하지 말아야 합니다. 나중에 나쁜 과보를 얻으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3) 찬탄부(讚歎部)
『보살본행경(菩薩本行經)』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생각해 보니 옛날 어떤 부처님께서 이 세상에 나오셨는데, 그 부처님의 명호는 불사(佛沙) 다타아가도(多陀阿伽度)ㆍ아하라(阿訶羅)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였다. 그 때 그 부처님께서는 잡보굴(雜寶窟) 안에 계셨다. 나는 그 부처님을 뵙고 마음에 기쁨이 생겨 열 손가락을 합하여 합장하고 한 발을 든 채 이레 낮 이레 밤 동안 이 게송을 가지고 그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그 게송은 이러했다.

천상 천하에 부처님 같은 이 없고
시방세계에도 견줄 이 없네.
세간의 모든 존재 나는 다 보았지만
일체의 어느 것도 부처님만한 이 없네.

아난아, 내가 이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고 나서 이와 같은 서원을 내자, 그 부처님께서 자기를 모시고 있는 사람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94겁(劫)이 지나간 뒤에 틀림없이 부처가 되어 그 명호를 석가모니라고 하리라.≻
나는 그 때 이런 기별을 받은 뒤로는 정진(精進)을 놓아 버리지 않고 공덕을 증장시켜 한량없이 많은 생 동안 범천(梵天)ㆍ제석천(帝釋天)ㆍ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었다.
이 선업(善業)의 인연의 힘 때문에 나는 네 가지 변재(辯才)를 얻어 다 원만하게 갖추었으므로 나와 논쟁을 벌여 나를 굴복시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나는 또 아뇩보리(阿耨菩提)를 증득하였고, 나아가 마침내는 위없는 법륜(法輪)을 굴렸느니라.’”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가섭보살이 부처님의 앞에서 "039_0667_c_02L"/>다음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하였다.

이 세간을 불쌍하게 여기시는 큰 의왕(醫王)께서는
몸과 지혜가 모두 적정(寂靜)하시며
나[我]라는 것이 없는 법 가운데 참 나가 있나니
그러므로 나는 무상존(無上尊)께 경례합니다.

발심(發心)과 필경(畢竟), 이 두 가지는 다르지 않건만
이와 같은 두 마음 중 먼저 마음이 어렵다네.
스스로는 구제되지 못했지만 남을 먼저 제도하나니
그러므로 나는 처음으로 마음 내신 분께 예배합니다.”

또 『보성론(寶性論)』의 게송에 말하였다.

“나는 지금 일체의
무상존(無上尊)께 귀명하옵나니
법왕님의 창고를 여시어
모든 중생들 이롭게 하소서.

부처님 몸은 전제(前際)도 없고
또 중간제(中間際)도 없으며
그리고 후제(後際)도 없고
고요하여 스스로 깨달으셨네.

스스로 깨달아 아신 뒤에는
남도 깨달아 알고 깨닫게도 하나니
그러므로 저들을 위해
무외(無畏)를 말하시고 항상 도를 행하시네.

부처님은 지혜와 자비의 힘으로
능히 금강저(金剛杵)를 잘 가지고
모든 소견의 산을 꺾어 부수나니
그러므로 나는 지금 경례하옵네.

불가사의한 그 법은
문혜(聞慧)의 경계 아니네.
언어의 길을 멀리 뛰어난
안 마음의 지혜 맑고 시원함일세.

참되고 묘한 저 법의 해[日]는
맑고 깨끗해 티끌이 없고
그 큰 지혜의 광명은
모든 세간을 두루 비추네.

모든 가림과 장애 부수고
각관(覺觀)ㆍ탐욕ㆍ분노ㆍ우치 등
모든 번뇌를 부수었나니
그러므로 나는 지금 경례하옵네.

그리고 능히 저 자성(自性)의
청정한 마음을 잘 아시고
번뇌란 실(實) 없음을 잘 아시나니
그러므로 모든 번뇌 멀리 여의었네.

장애가 없는 깨끗한 지혜로
여실히 보나니, 저 중생들의
통합뷰어
그 자성의 청정한 마음과
또 부처 법신(法身)의 그 경계를.

걸림없는 깨끗한 지혜 눈으로
모든 중생들의 그 자성이
무량한 경계 두루함을 보시나니
그러므로 나는 지금 경례하옵네.”

또 『발보리심론(發菩提心論)』의 논주(論主)가 설한 부처님을 찬탄한 게송에 말하였다.

“가이[邊] 없으신 부처님과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부처님과
허공과 동등하신 부동지(不動智)이시며
세상을 구원하시는 대비존(大悲尊)께 경례합니다.

우리 스승이신 천중천(天中天)의 양행게(兩行偈)[『보요경(普曜經)』에 나온다.]와 어떻게 오래 살 수 있는가의 양행게[『열반경(涅槃經)』에 나온다.]와 여래의 묘한 색신의 양행게[『승만경(勝鬘經)』에 나온다.]와 세간에 사는 것이 허공과 같다는 양행게[『초월명경(超月3)明經)』에 나온다.]는 이러하다.

큰 사랑으로 모든 중생을 가엾이 여기시되
번뇌에 덮이고 눈이 어두운 사람들 위해
보지 못하는 장님의 눈을 뜨게 하여 보게 하시고
듣지 못하는 이를 교화하여 도로써 밝게 하시네.

세상에 사는 것이 허공과 같고
마치 저 연꽃이 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것 같아
마음이 청정하여 저것들을 벗어났으니
머리를 조아려 위없는 어른께 예배합니다.


自述
당시 한지(漢地)의 유행(流行)은 깎고 줄이기[刪略]를 좋아했다. 그런 까닭에 대중들 속에 있으면서 범패(梵唄)를 지을 때 반게(半偈)를 많이 지었다.”
그러므로 『비니모론(毘尼母論)』에서 말하였다.
“반패(半唄)를 짓지 마라. 그것은 돌길라죄(突吉羅罪)를 짓는 것이다.”
그러나 이 범패의 문사(文詞)는 서방의 어떤 것에 의한 것인지, 어떤 전고(典誥)에서 나온 것인지 잘 모르겠다.
【답】 다만 성인이 범패 짓는 것을 허락했을 뿐이니, 경전의 찬게(讚偈)에 의해 그것을 취해 쓰는 것은 해롭지 않다. 그러나 관내(關內)와 관외(關外)의 오(吳)나라와 촉(蜀)나라의 패사(唄詞)는 각기 그 좋아함을 따르므로 패찬(唄讚)에 여러 가지가 있다. 다만 한범(漢梵)이 이미 다르므로 음운(音韻)을 호용(互用)할 수 없다.
송조(宋朝)에 이르러서는 강승회(康僧會)4) 법사가 있었는데 그는 강거국(康居國)5) 사람이었다. 학문이 넓고 말재주가 있어서 경전을 많이 번역해 내었으며, 또한 범음(梵音)도 잘해 니원패(泥洹唄)를 전하였는데, 소리가 슬프고 고상하여 그 아름다움이 세상에서 뛰어났으므로 음성의 학문을 연마하는 데는 모두 그것을 취하여 법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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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옛날 진(晋)나라 때의 도안(道安) 법사는 세 가지 과(科)를 모아 지어서 상경(上經)ㆍ상강(上講)ㆍ포살(布薩) 등 과거 현인(賢人)이 세운 제도를 땅에 떨어뜨리지 않았으므로 천하의 법칙으로서 사람들이 모두 익히고 시행하였다.
또 위(魏)나라 때 진사왕(陳思王) 조식(曹植, 192~232)은 자(字)를 자건(子建)이라 하였으며, 위나라 무제(武帝)의 넷째 아들7)이었다. 어릴 때부터 규장을 머금어[含珪璋:출중함] 일곱 살 때에 글을 지었고 붓을 들면 곧 문장을 이루어 조금도 개정(改定)하지 않았으며 세간의 예술을 잘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한단(邯鄲)의 순우(淳于)는 그를 보고 놀라고 감복하여 천인(天人)이라고 말하였다.
조식은 늘 불경(佛經)을 읽으면서 문득 감탄하여 눈물을 흘리며 도의 종극(宗極)에 이르렀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전찬칠성(轉讚七聲)을 지으니, 올라가고 내려오는 곡절(曲折)의 메아리를 세상 사람들이 풍송(諷誦)하면서 모두 그것으로 헌장(憲章)을 삼았다.
일찍이 어느 때에는 어산(魚山)에서 놀다가 갑자기 공중에서 범천(梵天)의 메아리를 들었다. 청아(淸雅)하면서도 구슬프고 아름다운 그 소리가 마음을 감동시켰다. 그래서 혼자서 한참 동안 들었는데 시종들도 다 같이 들었다.
조식은 신비한 이치를 깊이 느끼고 법의 감응을 더더욱 깨달았다. 이에 그 성절(聲節)을 본떠 베껴서 범패(梵唄)를 만든 뒤에 글을 짓고 소리를 만들어 후세에 법으로 전하니, 범성(梵聲)이 세상에 나타난 것이 여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가 전해준 범패에는 대체로 여섯 가지 계(契)가 있다.

(4) 음악부(音樂部)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왕사성(王舍城)의 어떤 부귀한 장자들이 각기 사람들을 거느리고 모여 큰 절회(節會)를 베풀고는 갖가지 음악으로 서로 즐겼다.
그 때 무용가의 부부 두 사람이 남방에서 청련화(靑蓮華)라는 한 미녀를 데리고 왔다. 그 여인의 모습은 단정하고 절묘하게 아름다워 세상에서 보기드문 존재였다. 그녀는 총명하고 지혜로워 아무도 응대할 수 없었다. 여자로서 가질 수 있는 예순네 가지 재주[藝]를 그녀는 다 갖추어 알았다. 더구나 무법(舞法)을 잘 알아 빙빙 돌고 구부리고 우러름이 가락에 맞고 마디에 맞았다. 그리하여 외쳐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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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성 안에 과연 나만큼 춤을 잘 추는 이가 있는가? 경론을 잘 알아 나와 문답할 자가 있는가?’
그 때 어떤 사람이 대답하였다.
‘불세존께서 지금 가란다 죽림(竹林)에 계신다. 잘 문답하여 너로 하여금 의심이 없게 해 주시리라.’
무녀(舞女)는 이 말을 듣고 곧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다니고 따라 다니면서 한편으론 춤도 추면서 죽림으로 갔다. 불세존을 보고도 여전히 교만하고 방일하여 시시덕거리면서 여래를 공경하지 않았다.
그 때 세존께서 이런 짓을 보시고 곧 신통의 힘으로 이 무녀를 변화시켜, 마치 1백 살된 할머니처럼 머리는 희고 얼굴에 주름살져서 쭈글쭈글하며 이가 빠지고 꼽추처럼 걷게 만들었다. 그 때 무녀는 스스로 제 몸을 보니 자신이 아주 늙은 것을 돌아보고 이런 말을 하였다.
‘내 몸이 왜 갑자기 이런 늙은 상이 되었는가? 이것은 반드시 부처님의 위신이 나로 하여금 이렇게 만든 것일 것이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깊이 부끄러워하며 말하였다.
‘원하옵나니 세존이시여, 저를 용서해 주소서.’
그 때 세존께서 이 무녀의 마음이 이미 조복된 것을 아시고 곧 신통의 힘으로 그 몸을 전처럼 변화시켜 주었다. 대중은 이 무녀가 갑자기 늙어졌다 갑자기 젊어지는 등 항상하지 않은 것을 보고는, 각각 염리심(厭離心)을 내고 무상(無常)을 깨치고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네 종류의 사문과(沙門果)를 얻는 이도 있었고 위없는 보리심을 내는 이도 있었다.
그 때 저 무녀와 그 부모는 곧 부처님 앞에서 출가하기를 청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잘 왔다, 비구니야.’
그러자 그녀의 머리털은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서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닦고 익혀서[修習] 아라한이 되어 모든 하늘과 세속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때 대중들은 이것을 보고 부처님께 그 인연을 물었다.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무량한 세상 이전 어느 때에 바라내국에 태자가 있었는데 그 태자의 이름은 손타리(孫陀利)라고 하였다. 그는 산에 들어가 도를 배워통합뷰어
다섯 가지 신통을 얻었다. 그는 긴나라 여자를 보았다. 그 얼굴이 단정하고 절묘해서 천녀와 같았는데 온갖 아양을 다 부리면서 노래를 하기도 하고 춤을 추기도 하여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그녀를 보는 그로 하여금 집착하여 선도(仙道)를 잃게 했다. 그러나 그 때 손타리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고 아무 욕정의 생각이 없이 그녀에게 말하였다.
≺일체는 유위(有爲)로서 모두가 항상하고 일정한 것이 없다. 내가 지금 네 몸을 관찰해 보니 모든 더러운 것이 그 안에 가득하고 얇은 가죽으로 그 위를 덮어 오래 보전할 수 없을 것 같다. 너는 지금 머리털이 희고 얼굴에 주름이 졌으며 꼽추처럼 걸어다닌다.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그처럼 교만하고 방자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아까 너의 노랫소리는 지금 그 음성이 이미 변했는데, 무엇 때문에 그런 온갖 자태를 부리느냐?≻
그 때 긴나라는 이 말을 듣고 나서 곧 선인(仙人)에게 죄과를 참회한 뒤에 발원했다.
≺나로 하여금 오는 세상에 생사를 끊게 하소서. 나는 당신 곁에서 도를 얻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 왕자로서 선도(仙道)를 배운 사람이 누군지 알고 싶은가? 그는 바로 지금의 나요, 그 때의 긴나라 여자는 지금의 이 청련화(靑蓮華) 비구니이다. 그 때 그가 발원한 힘으로 말미암아 지금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얻은 것이다.’
비구들은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또 『백연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가비라위성의 어떤 장자는 재보(財寶)가 한량없이 많아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부인이 아들을 낳았는데 단정하고 절묘하여 세상에 보기 드문 존재였다. 아이가 차츰 성장하자 그 좋은 음성을 대중들이 모두 듣기를 좋아했으며, 부처님을 만나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모든 비구들은 부처님께 그가 도를 얻은 인연을 말씀해 달라고 간청했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과거 91겁 전에 비바시(毘婆尸)라는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 그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통합뷰어
반두말제(槃頭末帝)라는 국왕이 그 부처님의 사리를 거두어, 높이 1유순이나 되는 네 개의 보탑(寶塔)을 만들고는 거기에 공양했다. 그 때 어떤 사람은 이 탑을 보고 기뻐하여 음악을 울리며 탑을 돌면서 공양한 뒤에 발원하고 거기서 떠나갔다.
그는 이 공덕의 인연으로 91겁 동안 세 갈래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과 인간에서 항상 좋은 음성으로 대중들로 하여금 즐겨 듣게 했으며 오늘에 이르러서는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얻은 것이다.’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적에 사위성(舍衛城) 안에 살고 있는 모든 인민들이 각각 스스로 장엄하게 창(唱)을 짓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성을 나가 유람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성문에 이르러 부처님과 승가 대중이 성으로 들어가 걸식하려는 것을 보았다. 모든 사람들은 부처님을 뵙고 환희하여 예배하고 곧 음악을 연주하여 부처님과 승가 대중을 공양하고 발원한 뒤에 떠나갔다. 부처님께서는 미소를 지으시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사람들은 음악을 연주하여 부처님과 승가 대중을 공양하였기 때문에 이 공덕을 인연하여 미래 세계에 1백 겁 동안 악한 세계에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천상과 인간에서는 늘 쾌락을 받을 것이다. 그렇게 1백 겁을 지낸 뒤에 벽지불(辟支佛)이 되어 모두 동일한 이름으로 묘성(妙聲)이라고 부르게 되리라.
이런 인연 때문에 만약 어떤 사람이 음악을 연주하여 삼보(三寶)에게 공양한다면 얻어지는 공덕이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불가사의(不可思議)할 것이다.’”
그러므로 『법화경(法華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만약 사람을 시켜 음악을 연주하게 하되
북을 두드리고 각패(角貝:나팔)를 불며
퉁소ㆍ피리ㆍ거문고ㆍ공후(箜𥱌)며
비파(琵琶)ㆍ징ㆍ구리로 만든 바라 등

이와 같이 갖가지 미묘한 소리를
모두 가져다가 공양을 올리면
그들은 모두 부처님의 도를 이루리라.

또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말하였다.
“긴나라(緊那羅)는 수미산(須彌山) 북쪽에 머물고 있고,통합뷰어
소철위산(小鐵圍山)을 지나면 대흑산(大黑山)이 있는데 거기에도 살고 있으며, 또 열 개의 보산(寶山)에도 살고 있다.
거기에는 부처님 법이나 해와 달, 그리고 별들도 없지만 옛날에 보시한 힘으로 말미암아 지금은 7보(寶)의 궁전에 살고 있으며 그 수명도 매우 길다.
이 왕(긴나라왕)이 본래 인간 세계에 있을 적에 어떤 큰 장자(長者)가 불탑(佛塔)을 만들었다. 이 긴나라는 하나의 찰주(刹柱)를 보시하여 그 절[寺廟]을 완성하였고, 또 깨끗한 음식으로써 그 절을 짓는 공인들에게 보시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목숨을 마친 뒤에는 흉억신(胸臆神)이 되어 두 산 사이에 살고 있었다.
전생에 인간 세상에 있었을 때에는 큰 장자가 되어 재산이 한량없이 많았다.
그 때 걸식하는 어떤 사문이 있었는데 그의 부인이 그 사문에게 음식을 보시하자 곧 크게 진노(瞋怒)하여 말하였다.
‘어떤 걸인(乞人)이기에 내 아내를 넘보느냐? 당장 이 사람의 손과 발을 끊어버려라.’
그 장자는 목숨을 마친 뒤에 이렇게 추한 몸을 받아 84겁 동안 항상 손과 발이 없었다.”
여러 하늘에서 잔치가 있을 때마다 그 음식을 모두 건달바(乾闥婆)에게 주었고, 번갈아 하늘을 오르내리며 음악을 연주하려고 하다가 그 겨드랑이 아래에서 땀이 흐르면 곧 하늘로 올라가곤 하였다.
어떤 긴나라(緊那羅)가 있었으니, 그 이름은 두루마(頭婁磨)였다. 그는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대하여 거문고를 타면서 노래하여 세존(世尊)을 찬탄하였다. 그 때 수미산과 여러 숲의 나무들까지 모두 진동(震動)하였으니, 가섭(迦葉)은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스스로 편안치가 못했고 5백 선인(仙人)은 미치고 취한 듯한 마음이 생겨 그 신족(神足)을 잃어버렸다.8)
또 『대수긴나라왕소문경(大樹緊那羅王所問經)』에 말하였다.
“그 때 대수긴나라왕은 자신이 타는 유리 거문고를 염부단금(閻浮檀金) 꽃잎으로 장엄하였으니, 그것은 선(善)하고 깨끗한 업보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는 여래의 앞에 있으면서 스스로 거문고와 그 밖에 8만 4천 가지 악기를 잘 다루었다. 이 대수왕(大樹王)이 이 거문고를 타고 갖가지 악기를 연주할 때에 그 소리가 이 삼천대천세계에까지 널리 들렸다.
이 거문고 소리와 절묘한 노랫소리는 욕계(欲界) 여러 하늘의 음악 소리를 다 뒤덮어 버리고통합뷰어
모든 산의 약초(藥草)와 우거진 숲들도 두루 다 진동시켰다. 그것은 마치 매우 취한 사람이 나가거나 물러가거나 간에 자꾸만 넘어지는 것과 같이, 수미산이 부서져 솟아났다 빠져들곤 하면서 안정을 찾지 못했고, 오직 불퇴전(不退轉)의 보살을 제외한 모든 범성(凡聖)들과 그 밖에 이 거문고 소리와 여러 가지 악기 소리를 듣는 온갖 것들은 저마다 스스로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모두 일어나서 춤을 추었다.
일체 성문들도 다 위의를 잃고 실없이 방일하게 즐기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들이 춤추고 놀면서 스스로 몸을 가누지 못하는 것과 같았다.
그 때 천관(天冠)보살이 성문 대가섭(大迦葉) 등에게 말하였다.
‘그대들 모든 대덕들은 이미 번뇌를 여의고 여덟 가지 해탈을 얻었거늘, 왜 지금 저마다 위의를 잃고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온몸을 움직이며 춤을 추는가?’
그 때 대덕인 여러 성문들이 대답하였다.
‘선남자(善男子)여, 우리들은 이런 상황에서 자재(自在)로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돌개바람에 나부끼는 나무들이 스스로 버틸 힘이 없는 것처럼, 그것은 본심으로 즐기려 해서 그러는 것이 아닙니다.’
그 때 천관보살이 대가섭에게 말하였다.
‘당신들은 지금 이 불퇴전 보살의 위덕(威德)과 세력을 보라. 누가 이와 같은 모습을 보고 무상정진보리도(無上正眞菩提道)의 마음을 내지 않겠는가?’
거문고 소리의 위력으로 온갖 법의 소리를 설하여 8천 보살이 무생인(無生忍:無生法忍)을 증득하였다.
게송을 말한다.

현묘한 소리는 맑은 기운 토해내고
신비한 메아리는 깊은 귀머거리 트이게 한다.
누대에 올라 봄 노래 부르니
높은 흥취는 보기 드문 자취로세.

허공에 올라 느낀 신령스런 깨달음
어산(魚山)에서 생각하는 아이[思童]9)를 흔드네.
하늘 노래인 범패(梵唄)를 모사(摹寫)하면서
법의 소리 펴는 것과 같아지기 바라네.

높은 곳인 줄 잊었기 때문에 내려오지 않고
여러 길[仞] 허공 속으로 날아 오르네.
비구들은 노랫소리로 찬탄하고
사람과 짐승들은 마음을 떨쳐 두려워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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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현묘한 글귀를 통했기 때문이니
곧 기러기가 허공에 노님을 느끼네.
정신은 아침에 전오(筌悟)10)를 발휘하니
훤하게 탁 트여 스스로 영통(靈通)하네.”

감응연(感應緣)[대략 여섯 가지 증험을 인용하였다.]

진(晋)나라 사문 백법교(帛法橋)
진(晋)나라 사문 지담약(支曇籥)
제(齊)나라 사문 석승변(釋僧辯)
제(齊)나라 사문 석담풍(釋曇馮)
제(齊나)라 사인(仕人) 양씨(梁氏)
당(唐)나라 자사(刺史) 임의방(任義方)

① 진(晋)나라 사문 백법교(帛法橋)
진(晋)나라 중산(中山)에 살고 있었던 백법교(帛法橋)는 중산 사람이다. 젊어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했으나 차츰 음성이 끊겨 늘 트이지 않음을 개탄했다. 이에 음식을 끊고 참회하면서 7일 밤낮 동안 관세음에게 머리를 조아려 현보(現報)를 기원하기로 하였다. 동학(同學)들이 간절히 만류했으나 맹세코 고치지 않았다. 7일째 되는 날 갑자기 목구멍이 탁 트임을 깨닫고 물을 찾아 세수하고 양치질하고는 말하였다.
“내게 감응이 있었다.”
그리하여 3계경(契經)을 외우니 그 소리가 3리쯤에까지 들려 모두들 놀라 감탄하고 사람은 물론 짐승들까지도 다 와서 보고 들었다. 그 뒤로 경전 50만 언(言)을 외우되 밤낮 쉬지 않고 읊어댔다. 소리가 너무도 구슬프고 애절하여 신(神)의 세계에까지 통했으며 그의 나이 90세가 되도록 그 목소리는 변하지 않았다.
진(晋)나라 목제(穆帝) 영화(永和) 연중에 하북(河北)에서 죽으니 곧 석호(石虎)의 말기였다.

② 진(晋)나라 사문 지담약(支曇籥)
진(晋)나라 지담약(支曇籥)은 본래 월지국(月氏國) 사람으로서 건업(建鄴)에 살고 있었다. 젊어서 출가하여 부지런히 수행하고 나물밥만 먹으면서 오(吳)나라 땅인 호구산(虎丘山)에 거주하고 있었다.
진(晋)나라 효무제(孝武帝) 초년에 왕의 명령으로 서울로 나와 건초사(建初寺)에 머물렀다. 효무제는 그에게서 5계(戒)를 받고 그를 공경하여 스승으로 섬겼다.
담약은 특별나게 묘한 음성을 지니고 태어났으므로 경을 잘 읽었다.통합뷰어
일찍이 꿈에 천신(天神)이 그 성법(聲法)을 가르쳐 주었다. 그는 꿈에서 깨어 곧 신성(新聲)을 지으니 범향(梵響)은 맑고 아름다워, 사방으로 날아 퍼졌다가 문득 한 번 바뀌고 꺽이다가 도로 악기를 타는 듯하였다. 비록 동아(東阿)의 먼저 변함과 강회(康會)의 나중 지음이 시종 순환하기는 하였으나 담약의 묘함에는 미치지 못했다. 후배들이 전해 베낄 때는 모두 그것을 본받지 않은 이가 없었다. 그가 지은 6언(言)의 범패는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온다.
뒤에, 살던 곳에서 죽으니 나이는 81세였다.

③ 제(齊)나라 사문 석승변(釋僧辯)
제(齊)나라 때 안락사(安樂寺)의 석승변(釋僧辯)의 성은 오(吳)씨이고 건강(建康) 사람이다. 출가하여 안락사에 머물고 있었다. 젊어서부터 경 읽기를 좋아하여 슬픔과 아름다움을 절충하여 제나라 초년에는 독보적인 존재로서 그를 따를 이가 없었다.
일찍이 신정(新亭)의 유소택(劉紹宅)의 집에서 재(齋)를 지냈는데 승변이 초저녁에 경을 읽다가 처음으로 1계(契:한 번 가락을 바꾸는 것)를 얻게 되자 갑자기 학떼가 내려와 섬돌 앞에 모여 있다가, 승변이 한 권을 다 읽어 마치자 한꺼번에 다 날아갔다. 이로 말미암아 그 명성이 천하에 떨쳐 가까운곳은 물론 먼 곳에서도 다 알게 되었고, 후대의 학자들까지도 모두 그를 떠받들어 섬기지 않은 이가 없었다.
영명(永明) 7년(485) 2월 19일에 사도(司徒)인 경릉 문선왕(景陵文宣王)이 꿈에 그가 부처님 앞에서 『유마경』 1계(契)를 읊는데 그 소리로 인해 꿈이 깨었다. 그는 곧 일어나 불당에 가 보았더니 꿈 속에서 본 일과 똑같았다. 다시 옛 『유마경』을 한 차례 읊조렸더니 곧 음운(音韻)의 흐름이 너무도 교묘하고 아름다움을 깨닫고 이튿날 아침에 경사(京師)에서 좋은 음성을 지닌 스님들을 모이게 하였다. 승변 등이 차례로 소리를 내 독경하였는데 승변이 전한 옛 『유마경』 1계와 『서응경(瑞應經)』 7언게(言偈) 1계가 가장 뛰어난 명가(命家)의 작품이었다. 후세 사람들이 가끔씩 전하는 것은 모두 와전된 것으로 그 대체를 잃은 것이다.
승변은 제나라 영명 11년(489)에 죽었다.

④ 제(齊)나라 사문 석담풍(釋曇馮)
제(齊)나라 백마사(白馬寺)의 석담풍(釋曇馮)의 성은 양건(楊揵)씨이고 남안(南安) 사람이다. 그는 젊을 때에 경사(京師)에 유학하여 백마사에서 경 읽는 법을 배웠다. 소리 가락이통합뷰어
매우 교묘하여 아침이 지나도록 자임(自任)으로 여겨 독경하였으나 그 때 사람들은 아무도 그를 추앙하지 않았다. 그래서 오로지 규범에 정신을 쏟아 더욱더 연마하여 만년에 대중들보다 출중하게 되자 많은 사람들이 흡족하게 여겨 달리 보았으며 『삼본기경(三本記經)』을 독송할 때는 그 소리가 더욱 좋아졌다.
뒤에 촉(蜀)나라로 돌아와 용연사(龍淵寺)에 머물렀는데 그 음성을 사모하는 파한(巴漢) 사람들은 다 그 소리의 법을 숭상했다. 그가 범음(梵音)을 한 번 토해낼 때마다 문득 코끼리와 말들이 슬피 울고 길을 가던 사람들은 발길을 멈추곤 했다. 그로 인해 동종(銅鐘)을 만들었는데 그 동종에서 미래에 항상 8음(音) 4변(辯)이 있었으니 이것이 용촉(庸蜀)의 동종이 있게 된 시초이다.
그는 뒤에 그가 살던 곳에서 죽었다.
오(吳)나라 경제(京帝) 때에 오정(烏程) 백성으로서 고질병에 걸린 사람이 있었다. 그는 병이 낫자 곧 향언(嚮言)을 말할 수 있었다. 향언이란 앉은 자리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그것을 들으면서도 그 소리가 큰 줄을 깨닫지 못하고, 멀리서 들으면 사람을 마주 대해 말하는 것과 같아 그 소리가 멀리서 오는 것인지 깨닫지 못했다. 소리가 가는 곳은 그가 향해 있는 곳을 따르되 아무리 멀어도 십몇 리를 넘지 못하였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⑤ 제(齊)나라 사인(仕人) 양씨(梁氏)
북제(北齊) 때 어떤 사인(仕人)이 있었다. 그의 성은 양(梁)씨이고 큰 부호였다. 그는 임종 때 그 처자에게 말하였다.
“내가 평생 사랑하는 노비와 말은 다 오랫동안 부려 내 마음에 든다. 내가 죽거든 따라 죽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나는 탈 것이 없게 될 것이다.”
그가 죽은 뒤에 그 집 사람들은 푸대에 흙을 담아 종을 눌러 죽이고 말은 미처 죽이지 못했다.
그 종은 죽은 지 나흘 만에 다시 살아나 말했다.
“어디로 가는지 몰랐는데 갑자기 관부(官府)의 문에 이르렀다. 문지기가 붙들어 두는 바람에 나는 문에서 하룻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에 죽은 주인을 보니 사슬을 차고 있었는데 문 지키는 병졸이 들어오라 하기에 관부로 들어갔더니 주인이 나를 보고 말하였다.
‘나는 죽은 사람도 노비를 부릴 수 있다고 생각하고 유언하여 너를 불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각각 그 고통을 받을 뿐 전연 서로 상관이 없구나. 내가 지금 관부에 말해 너를 놓아 주게 하리라.’
말을 마치자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통합뷰어
나는 병풍 밖에서 그 안을 엿보았다. 관리가 문 지키는 수위에게 물었다.
‘어제는 기름을 얼마나 짰느냐?’
수위가 대답했다.
‘여덟 말을 짰습니다.’
관리가 말하였다.
‘다시 데리고 가서 한 섬 여섯 말을 더 짜라.’
주인은 압박을 받아 끌려 나오면서 마침내 아무말도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 다시 올 때는 아주 밝은 표정으로 내게 말하였다.
‘지금 너를 위해 말해 보리라.’
그리고는 또 들어갔다. 관리가 또 물었다.
‘기름을 짰느냐?’
수위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은 죽은 지 사흘 만에 그 집 사람들이 스님들을 초청해 재를 올리고 있습니다. 그 경패(經唄)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쇠들보가 번번이 부러지기 때문에 기름을 짜서 못했습니다.’
관리가 말하였다.
‘우선 데리고 가라.’
주인은 관리에게 말했다.
‘관리님, 저 종을 놓아 주시기 바랍니다.’
관부에서는 곧 주인과 나를 놓아 주어 함께 문을 나왔다. 주인은 나를 보내면서 처자에게 전하라 했다.
‘너희들이 추모하는 재를 지낸 복[追福]에 힘입어 나는 큰 고통을 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으니 다시 경상(經像)을 만들고 빌어 화를 벗어나게 해주기 바란다. 지금부터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저들은 얻어 먹지 못해 내 죄를 더 중하게 할 것이다.’
이 말을 마치고 곧 헤어졌다.”
종은 다시 살아나 이렇게 자세히 이야기했다. 과연 그 집에는 그 날 재를 올리고 있었다. 이에 그 집 사람은 모두 모여 추복(追福)하고 온 문중이 다 열심히 행했다.[위의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기(冥報拾遺記)』에 나온다.]

⑥ 당(唐)나라 자사(刺史) 임의방(任義方)
당(唐)나라 괄주 자사(括州刺史) 낙안(樂安) 임의방(任義方)은 무덕(武德) 연간에 죽었다가 수일 만에 다시 살아나 말하였다.
“나는 끌려가서 염라대왕을 보았다. 왕은 사람을 시켜 나를 끌고 가서 지옥을 보여 주었는데 불경에 말한 것과 다르지 않았다.”
또 말하였다.
“땅 밑의 한낮은 어두워 안개 속을 가는 것과 같았다.”
그 때 그 집 사람들은 의방의 심장 위에 따뜻한 기운이 있기에 곧 스님을 초청하여 도를 행했다. 의방은 땅 밑에서 그 찬패(讚唄) 소리를 들었다. 왕은 그 장부를 조사해 보다가 형리(刑吏)에게 말했다.
“아직 죽을 때가 아닌데 왜 붙잡아 왔는가?”
그리고는 곧 놓아 주어 돌아가게 했다.
의방은 나오다가 세 관문을 지나게 되었다.통합뷰어
관문지기들은 모두 자고 있었다. 보내 주는 사람이 말하였다.
“그저 찬패 소리만 찾아가면 집에 이르게 될 것이다.”
의방은 한참 가다가 큰 구덩이가 앞에 있음을 보고 그것을 뛰어 건너려다가 그만 구덩이 속에 빠졌다. 구덩이에 떨어지는 순간 곧 깨어났다. 지옥을 설명한 그림을 땅에 그리고 그가 타는 봉급으로 다 경상(經像)을 만들었다. 그는 일찍이 『금강반야경』 천여 부를 베꼈다. 이것은 의방 자신이 말한 것이다.[위의 한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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