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55권
법원주림 제55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62. 파사편(破邪篇)[여기에는 2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1) 술의부(述意部)
대개 들으니, 3승(乘)이 바퀴자국을 열자[啓轍] 모든 아들이 화택(火宅)의 화를 면하고, 8정(正)이 근본을 열어 놓자 모든 중생이 무위(無爲)의 과(果)를 깨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사랑의 구름이 비를 내릴 때 쑥과 난초를 구별하지 않는데 지혜의 해가 빛을 놓을 때 어찌 언덕과 골짜기를 분별하겠는가. 우선 가르침을 세우고 모범을 보일 때는 미묘함을 다하고, 뜻을 내고 정을 낼 때는 헤아리기 어려우니, 비록 주(周)ㆍ공(孔)의 유술(儒術)과 장(蔣)ㆍ노(老)의 현풍(玄風)이라 해도 그것을 가지고 이것에 견주려면 너무나 거리가 멀어 비길 것이 아니다. 더구나 제대(帝代)의 현사(賢士)와 고금(古今)의 명군(名君)도 다 함께 존중하여 이김이 없이 경앙함에 있어서랴.
옥과 자갈의 값을 달리 하고 경수(涇水)와 위수(渭水)의 흐름을 나누며, 6사(師)를 제압하고 8사(邪)를 바르게 하며 4도(倒)를 돌이키고 1미(味)로 돌아가게 하며, 염속(染俗)의 자연을 꺾고 인과의 바른 길을 일으키며, 사지(邪智)의 허각(虛角)을 꺾고 이견(異見)의 망언(妄言)을 막으며, 구슬의 보배를 구하는 마음을 열고 상(象)의 거짓을 관찰하는 식(識)을 바르게 하려면, 그 덕이 진제(眞諦)와 같고 그 체(體)가 무생(無生)과 합하지 않고서야, 어찌 이 현문(玄門)에 계합하여 하나의 진실[一實]을 실천할 수 있겠는가.
(2) 인증부(引證部)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빈저라는 장자는 말할 수 없는 큰 부자였고 또 만부성(滿富城) 안에 사는 만재(滿財)라는 장자도 또한 큰 부자로서 재물이 많았다. 이들은 젊을 때부터 친구로서 서로 경애하였다.
빈저 장자가 천만의 보물을 만부성에서 팔 때는 만재 장자를 중개인으로 삼았고 만재 장자도 수천만의 보물을 사위성에서 팔 때는 빈저 장자를 중개인으로 삼았었다.
이때 빈저 장자에게는 수마제라는 딸이 있었는데, 얼굴이 아름다워 도화색 같고 세상에 드물었다. 만재 장자가 수마제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빈저에게 물었다.
‘저이는 누구 집 처녀인가.’
빈저가 대답하였다.
‘바로 내 딸이네.’
만재가 말하였다.
‘마침 내게 총각 아들이 있는데 결혼 시키면 어떻겠는가.’
빈저가
‘그럴 수 없네’라고 답하자 만재가 ‘무엇 때문인가’ 하고 물었다.
빈저가 말하였다.
‘종성(種姓)이나 재산은 서로 다 걸맞는데 섬기는 신(神)이 같지 않네. 내 딸은 부처를 섬기는데 자네 집은 외도를 섬기지 않는가. 이 때문에 자네 청을 들을 수 없네.’
만재가 말했다.
‘우리가 섬기는 것은 따로 모시고 자네 딸이 섬기는 것은 또 따로 공양하면 되지 않는가.’
빈저가 말하였다.
‘내 딸이 자네 집에 간다면 피차에 각각 내는 돈이 말할 수 없이 많지 않겠는가.’
만재가 물었다.
‘자네는 얼마를 요구하는가.’
빈저가 말했다.
‘나는 지금 6만량의 금이 필요하네.’
그러자 만재 장자는 곧 6만량의 금을 빈저에게 주었다. 빈저는 이제 어떤 방편으로도 거절할 수 없어 만재 장자에게 말하였다.
‘설혹 내 딸을 자네 집에 보내더라도 먼저 부처님께 말씀드려서 승낙하시면 그대로 따라 하겠네.’
그리하여 빈저는 곧 부처님께 가서 말씀드렸다.
‘저의 딸 수마제를 만부성에 사는 만재 장자에게 보내어도 좋겠습니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수마제가 저 집으로 간다면
많은 이익이 있어 헤아릴 수 없는 인민들을 제도할 것이다.’
빈저는 이 말씀을 듣고 예배하고 나와, 집으로 돌아와서 여럿이 함께 음식을 장만하여 만재의 집으로 보내었다.
만재가 물었다.
‘내게는 음식이 필요 없네. 다만 그 딸을 우리 집으로 보내주겠는가’
빈저는 ‘꼭 그렇게 하고 싶다면 지금부터 15일 뒤에 그 아들을 이리로 보내게’ 하고, 이내 헤어졌다.
이때 만재 장자는 필요한 것을 다 갖추고 보우(寶羽)로 만든 수레를 타고 80유연 안으로 왔다. 빈저도 딸을 장식시켜 보우의 수레를 타고 나와 중도에서 만났다. 만재 장자는 며느리를 데리고 돌아오려 했다.
이때 만부성의 인민들은 각각 규제법(規制法)을 만들어 ‘만일 이 성에 있는 여자가 다른 나라로 시집가면 중한 벌을 받을 것이요, 또 다른 나라에서 여자를 데리고 이 나라에 들어와도 또한 중한 벌을 받을 것이다’라고 했다.
그 때 그 나라에 6천의 범지(梵志)들이 있어서 그 나라 사람들에게 봉양을 받았는데, 규제법으로 ‘만일 범하는 사람이 있으면 6천 범지들에게 음식을 공양해야 한다’고 했다.
만재 장자는 스스로가 그 규제를 범했음을 알고 6천 범지에게 공양하기로 했다. 그런데 범지들은 순전히 돼지고기와 짜게 거른 술을 먹었으며, 또 입는 옷은 흰 천이나 혹은 털옷을 입되, 오른 어깨만 덮고 몸의 반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때가 되어 이들은 장자의 집으로 갔다. 장자는 무릎걸음으로 나가 맞이하여 공경스럽게 예배하였다. 가장 위의 범지는 손을 들어 칭찬하고 장자의 목을 끌어안았다. 이들이 각각 자리에 앉자 장자는 수마제에게 말했다.
‘너는 잘 단장하고 우리 스승님께 예배 드려라.’
수마제는 말하였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아버님, 나는 저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장자가 말하였다.
‘저것은 벌거벗은 것이 아니다. 그들이 입은 것은
바로 법복(法服)이다.’
그러나 수마제는 말하였다.
‘저들은 다 발가벗은 부끄러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무슨 법복이 저렇습니까? 세존의 말씀에, 세상 사람이 귀하게 여기는 것은 참(慚)과 괴(愧)가 있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만일 이 두 가지가 없으면 존비(尊卑)가 없이 다 개나 돼지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나는 참으로 저들에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그 때 수마제의 남편이 수마제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지금 곧 일어나 우리 스승님들께 예배하시오. 이 여러 사람들은 다 내가 하늘처럼 섬기는 분들이오.’
수마제는 말하였다.
‘그만 두시오. 나는 저런 참괴가 없는 벌거벗은 사람들에게 예배할 수 없습니다. 차라리 나를 나귀나 개한테 예배하라 하십시오.’
남편은 말하였다.
‘그런 말 마시오. 당신은 입을 삼가 피를 범하지 마시오. 저분들은 나귀도 아니요 개도 아니요. 다만 그 입은 옷이 바로 법복일 뿐이오.’
이때 수마제는 눈물을 흘리고 슬피 울며 안색이 변하면서 말하였다.
‘차라리 내 목숨을 끊을지언정 결코 이런 사견(邪見)에는 떨어지지 않으리라.’
이때 여러 범지들은 모두 높은 소리로 ‘무엇 때문에 저 여종은 저렇게 욕설을 하는가’ 하고는, 음식을 모두 다 먹고 곧 떠났다.
이때 만재 장자는 높은 누각 위에서 ‘내가 저 며느리를 데려와 우리 집을 망치고 우리 가문을 욕되게 했구나’ 하고 걱정했다. 그 때 수발이라는 범지는 5신통을 얻은 사람으로서 장자의 집에 가서, 누각으로 올라가 장자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리 걱정하고 계십니까?’
장자가 ‘어제 며느리를 데려왔는데……’ 하고 그 사정을 다 이야기하자, 그 범지는 ‘그 며느님이 섬기는 스승은 범행을 행하는 사람으로서 지금 그분들은 참으로 뛰어난 사람들입니다’고 했다.
장자는 물었다.
‘당신은 외도 이학(異學)으로서 무엇 때문에 저 사문 석사(釋子)들을 칭찬하고 감탄합니까? 그들은 어떤 신덕(神德)이 있고 어떤 신통변화가 있습니까?’
이 범지는
말하였다.
‘그 신덕을 듣고 싶어하십니까? 그러면 대강 이야기하겠습니다. 저 여자가 섬기는 스승의 가장 어린 제자로서 균두라는 사미가 있습니다. 그가 아뇩달지(池)로 빨래하러 갔을 때, 그 못의 신(神)과 하늘ㆍ용ㆍ귀신 등이 다 일어나 그를 맞이하여 공경하고 문안하되 ≺잘 오셨습니다. 사람의 스승님, 이 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공양을 올렸습니다. 그는 공양을 마치고 빈 발우를 금상(金床) 위에 두고는, 몸을 단정히 가부하고 앉아 차례로 제9정(定)에 들었습니다. 이 때에 하늘ㆍ용ㆍ귀신 등이 그 빨래를 빨아 주자, 그는 그것을 허공에 널어다 말려서는 걷어가지고 다시 허공을 날아 돌아갔습니다. 장자님, 아셔야 합니다. 가장 어린 그 제자의 신통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큰 제자이겠으며, 더구나 여래ㆍ지진(至眞)ㆍ등정각(等正覺)이겠습니까?’
이때 장자는 그 범지에게 물었다.
‘우리도 이 여자가 섬기는 그 스승을 만날 수 있습니까?’
범지가 말하였다.
‘집에 돌아가서 그 며느님에게 물어 보십시오.’
장자는 집에 들어가 수마제에게 물었다.
‘나는 지금 네가 섬기는 그 스승님을 뵈옵고 싶은데 우리 집으로 오시게 할 수는 없느냐?’
수마제는 이 말을 뜯고 기뻐하여 어쩔 줄 몰라하면서
‘곧 음식을 잘 장만하십시오. 내일 여래가 비구들을 데리고 이리 오실 것입니다’고 말했다.
장자는 말하였다.
‘네가 알아서 초청하여라. 나는 그 법을 모른다.’
그리하여 수마제는 목욕하고 향불을 들고 누각 위에 올라가, 여래 계시는 곳을 향해 합장하고 다음 게송으로 찬탄했다.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신통변화는
중생들을 바른 도에 서게 하심이거니
나는 지금 이런 곤욕 당하고 있사온데
원하노니 부디 여기 왕림하소서.
이 때에 그 향은 구름과 같이
저 허공에 달려 있다가
기원정사를 두루 감돌며
여래 앞에 멈춰 있었네.
모든 석자(釋子)들 그 허공에서
기뻐하면서 예배 드리고
또 그 앞에 있는 향을 보았나니
이것은 수마제의 청하는 표시였네.
갖가지 꽃을 비처럼 내려
그것은 다 헤아릴 수 없어
기원의 숲을 가득 채우고
여래의 웃음은 광명을 놓네.
그 때 세존은 신족(神足) 비구 목건련과 가섭ㆍ아나율 내지 균두 사미 등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들은 신족으로 먼저 저 성으로 가라.’
비구들은 ‘예 그리하겠습니다. 세존.’이라 대답하고, 건다라는 사람을 시켜 ‘내일 아침에 큰 가마솥을 지고 허공을 날아 저 성으로 가서 장자의 집을 세 번 돌아라’고 했다.
그리하여 균두 사미는 5백 그루의 꽃나무를 화작(化作)하였는데 그것은 여러 가지 빛깔의 꽃이 다 만발해 있었다. 또 반특은 털이 새파란 5백 마리의 소를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라운은 갖가지 빛깔의 5백 마리의 공작을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가필나무는 극히 용맹스러운 5백 마리의 금시조를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우비가섭은 일곱 개의 머리를 가진 5백 마리의 용을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수보리는 수미산을 화작하여 그 안에 가부하고 앉아 저 성으로 갔다. 또 가전연은 빛깔이 새하얀 5백 마리의 학을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지월은 5백 마리의 호랑이를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아나율은 극히 용맹스러운 5백 마리의 사자를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가섭은 꼬리가 빨갛고 금ㆍ은으로 장식한 5백 마리의 말을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또 목건련은
여섯 개의 이빨에 일곱 군데가 편편하여 금ㆍ은으로 장식한 흰 코끼리를 화작하여 그것을 타고 저 성으로 갔다. 이와 같이 신통변화를 나타내어 다 그 성을 세 번 돌고 장자의 집으로 떠나갔다.
이때 세존은 때가 된 줄을 아시고 땅에서 7인(仞)쯤 떨어진 허공에 계셨는데, 아냐구린은 그 오른쪽에 있고 사리불은 왼쪽에 있으며 아난은 뒤에서 불자(拂子)를 들고 있고 천 2백 제자들은 앞뒤로 둘러싸고, 여래는 그 가운데 계셨다. 그리고 여러 하늘과 제석 및 천왕들도 다 그 신변을 나타내어 허공에 있으면서 수천만 가지의 음악을 울리고 온갖 하늘꽃을 여래께 부렸다. 사위성내의 인민들도 모두 땅에서 7인쯤 떨어진 허공에 계시는 여래를 보고 다 기쁨을 이기지 못했다.
이때 만재 장자는 멀리서 여래의 상호(相好)가 마치 금덩이처럼 큰 광명을 놓으시는 것을 보고는, 게송으로 수마제에게 묻고 수마제도 게송으로 답했으며 천인(天人)과 범지들은 다 스스로 귀명(歸命)했다. 6천 범지들은 이런 신통변화를 보고 저희끼리 이야기했다.
‘우리는 이 나라를 떠나 다른 나라로 가자.’
이것은 마치 새나 짐승들이 각기 흩어져 달아나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여래가 오시는 소리를 듣고 각기 달아나면서 불안해했으니, 그것은 여래의 큰 위력 때문이었다.
이때 세존께서 그 신족을 버리고 성내로 들어가면서 성문의 문지방을 밟으시자 천지가 크게 진동하고 모든 신(神)들은 꽃을 뿌렸다. 세존은 장자의 집에 가서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하여 장자와 8만 4천의 인민들을 위해 계율과 보시와 생천론(生天論)을 말씀하시고, 탐욕의 더러움을 나무라시고 출가의 중요함을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모두 그 자리에서 모든 번뇌가 없어지고 법안(法眼)이 깨끗해져,
모두 3보(寶)에 귀의하고 5계(戒)를 받아 지녔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 수마제와 8만 4천인은 다 전생에 가섭 부처님께 네 가지 공양, 즉 보시와 애경(愛敬)과 남을 이롭게 함과 평등한 이익 등을 공양하였으므로 가난한 집에 태어나지 않았었다. 그리고 수마제는 ≺오는 세상에도 이런 세존을 만나 나로 하여금 여자의 몸을 변하게 하지 말고 법안이 깨끗하게 하여지이다≻라고 서원했다. 이때 성중의 인민들은 이 애민왕(哀愍王)의 딸이 이런 서원을 세우는 것을 보고 모두 그 서원을 따라 기뻐했느니라.’
부처님은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애민왕은 바로 지금의 저 수달 장자요, 그 때의 왕의 딸은 바로 지금의 이 수마제이며, 그 때의 그 나라 인민들은 바로 지금의 저 8만 4천의 인민들이다. 그들은 그 때의 그 서원으로 말미암아 지금 나를 만나 법을 듣고 도를 얻었느니라.’”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장조(長爪) 범지는 염부제의 대논사(大論師)였는데, 그는 ‘나는 일체의 변론을 다 부술 수 있고 일체의 말을 다 부술 수 있으며 일체의 고집을 다 돌이킬 수 있다. 믿고 공경할 만한 어떤 진실한 법도 없다’고 했다.
사리불의 외숙 마하구히라는 그의 누님 사리와 변론하여 지고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것은 누님의 힘이 아니다. 반드시 지혜로운 사람을 임신하여 그 아기가 일러 주었을 것이다. 아직 나기 전에도 저러한데 나서 자라면 어떻겠는가.’
이렇게 생각한 뒤에도 교만한 마음이 생겨 널리 변론하기 위해 출가해 범지가 되어 남천축국(南天竺國)에 들어가 경서를 읽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물었다.
‘너는 무엇을 구하고자 하는가.’
장조(구히라)는 답하였다.
‘나는 18종의 대경(大經)을 다 읽으려 한다.’
사람들이 말하였다.
‘너의 목숨을 다해도 한 경서도 다 알지 못하겠거늘 어찌 그것을 다 알겠다고 하는가.’
장조는 혼자 ‘옛날에도
교만하기 때문에 누이에게 졌는데 지금 또 이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이 두 번의 일로 그는 ‘나는 손톱을 깎지 않고 꼭 18종의 경서를 다 읽으리라’고 스스로 맹세했다.
사람들은 그의 긴 손톱을 보고 이에 그를 장조 범지라 불렀다. 그는 갖가지 경서의 이치로 시비를 비판하여 남의 변론을 부수었다. 마치 힘이 센 미친 코끼리가 마구 달려들어 발로 차고 밟을 때, 아무도 그것을 제지시킬 수 없는 것처럼, 장조도 모든 논사들을 다 굴복시켰다. 그리고는 마가다국 왕사성(城) 나라타촌의 고향으로 돌아와 사람들에게 물었다.
‘내 누님이 낳은 아들은 지금 어디 있습니까?’
사람들이 말하였다.
‘당신 누님의 아들은 나이 8세에 일체 경서를 다 읽고 16세 때에는 변론으로 모든 사람을 다 이겼습니다. 지금은 석종(釋種)의 도인 구담이라는 사람의 제자가 되어 있습니다.’
장조는 이 말을 듣고 교만한 마음을 일으키고 믿지 않는 마음이 생겨 이렇게 말하였다.
‘내 누님 아들은 그처럼 총명한데, 그가 무슨 술수로 속이고 꾀어 머리를 깎아 제자로 삼았는가?’
이렇게 말하고 곧 부처님께로 갔다.
그 때 사리불은 계를 받은 지 반달만에 부처님을 모시고 서서 부채로 부처님을 부쳐 드리고 있었다. 장조는 이것을 보고 부처님께 문안한 뒤에 한쪽에 앉아 ‘나는 일체 변론을 부술 수 있고 일체의 말을 부술 수 있으며 일체의 고집을 돌이킬 수 있다. 여기 어떤 것이 모든 법의 실상이며 어떤 것이 제1의(義)인가. 마치 큰 바다의 물을 다 퍼내어 그 밑을 보려는 것처럼, 아무리 오래 공부해도 한 법도 얻을 수 없거늘, 저이는 무슨 변론으로 내 누님의 아들을 얻었는가’ 하고 생각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부처님께 말하였다.
‘구담이시여, 나는 어떠한 법도 수락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장조에게 물으셨다.
‘그렇다면 어떠한 법도 수락하지 않는다는 그 견해에는 수락하는가?
부처가 질문할 뜻을 네가 이미 알았다면, 그 사견(邪見)의 독이 왕성하여 너로 하여금 독기를 내어 ≺어떠한 법도 수락하지 않는다≻고 하게 하는데, 그렇다면 그 견해를 너는 수락하는가?’
그 때 장조는 마치 좋은 말이 채찍을 보고 그 그림자를 돌아보고도 두려움을 깨닫는 것처럼 곧 바른 도에 안착했다. 장조 범지는 이미 부처님 말씀을 들었는지라, 채찍 그림자가 마음에 들어가, 곧 교만을 버리고 머리를 숙이고는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은 나를 두 가지의 패배하는 문[負門] 안에 떨어뜨렸다. 내가 만일, 이 견해를 수락한다고 하면 이 패배하는 문은 분명하기 때문에 여러 사람들이 다 알 것이다. 또 어떻게 어떤 법도 수락하지 않는다 하다가 지금에 와서 이 견해를 수락한다 하겠는가. 이것은 당장에 거짓말하는 것이니, 이 분명하게 패배하는 문은 많은 사람이 다 아는 것이다.
또 제2의 패배하는 문은 은밀한 것이다. 내가 수락하려 한다는 것이니, 이것은 아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는 부처님께 답하였다.
‘구담이시여, 나는 어떤 법도 수락하지 않는다는 이 견해도 수락하지 않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대가 만일 어떠한 법도 수락하지 않고 또 이 견해도 수락하지 않는다면 아무 부술 것도 없어서 보통 사람과 다를 것이 없는데, 무엇으로써 잘난 체하여 그처럼 교만한 마음을 내는가?’
장조는 답할 말이 없어, 스스로 또 패배하는 문에 떨어진 줄을 알고는, 곧 부처님의 지혜에 대해 공경과 믿음을 일으켜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이미 졌다. 그런데도 세존은 이것을 들어내지 않고 시비를 말하지도 않으며 마음에 두지도 않으신다. 부처님의 마음은 유연하고 가장 청정하며 매우 깊은 공경을 받을 만하여 부처님 이상 청정하며 매우 깊은 공경을 받을 만하여 부처님 이상 갈 이 아무도 없다.’
부처님은 그를 위해 설법하여 그의 삿된 견해를 끊어주셨다. 그는 그 자리에서 온갖 번뇌를 아주 버리고 법안이 청정해졌다. 그리고 사리불은 이 말을 듣고 곧 아라한이 되었으며 이 장조 범지도 출가하여 사문이 되어 아라한이 되었다.”
또 『불설유광불경(佛說乳光佛經)』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부처님은 마침 약간
바람을 맞아[中風] 우유를 드셔야 했다.
그 때 유야리국(國)의 마야리 범지는 5만 제자들의 스승이 되고 또 국왕과 대신ㆍ인민들의 공경을 받으며 큰 부호의 대우를 받았다. 그러나 탐욕과 질투로 불법을 믿지 않고 다만 이도(異道)만을 좋아했다.
이에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내 이름으로 저 마야리 범지의 집에 가서 우유를 좀 구해 오너라.’
아난은 분부를 받고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그 집으로 갔다. 그 때 마침 마야리 범지는 5백명의 상족(上足) 제자를 데리고 왕을 만나려고 왕궁으로 가기 위해 집을 나오던 길이었는데, 아난을 만나 곧 아난에게 물었다.
‘당신은 아침 일찍이 무엇을 구하러 오십니까?’
아난이 답하였다.
‘부처님께서 몸이 좀 불편하셔서 저를 시켜 우유를 좀 얻어 오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마야리는 잠자코 답하지 않고 혼자 생각했다.
‘내게 우유가 있는데 주지 않는다면 나를 인색하다 할 것이요, 또 기분좋게 주면 다른 범지들은 나를 구담의 도를 섬기는 사람이라 할 것이니 참으로 딱하다. 그러나 저 사나운 소를 가리키면서 손수 짜 가라 하고, 그 소에 떠받쳐 죽게 하여 저 불도를 욕되게 하면, 그는 버림을 받을 것이요 나는 도리어 사람들의 존경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이 우유를 얻지 못하더라도 내가 인색하지 않음은 밝혀질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고 곧 아난에게 말하였다.
‘소는 벌써 아침에 저 언덕을 놓아 두었으니, 당신이 직접 가서 그 젖을 짜시오.’
그리고 그 아이에게 ‘너는 이 아난 비구를 데리고 가서 소 있는 곳을 가리켜 드리되 부디 너는 그 소를 붙들지 말라’고 했다. 그러자 5백 제자들은 이 스승의 말을 듣고 모두 크게 기뻐했다.
그 때 유마힐이 부처님을 뵈러 오다가 이 범지의 집 문 앞에서 아난을 만나 ‘이런 이른 아침에 발우를 들고 무엇을 구하러 나왔습니까?’ 하고 물었다. 아난은 ‘여래께서 몸에 풍(風)이 조금 있어
우유가 필요하므로 나를 시켜 구해 오라 하셨습니다’고 대답했다.
유마힐은 곧 아난에게 말했다.
‘그런 말 마십시오. 여래ㆍ정각(正覺)님의 몸은 금강과 같아서 모든 악을 다 끊고 오직 선만 있는데 무슨 병이 있겠습니까. 그저 아무 말 말고 그대로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하늘ㆍ용ㆍ귀신 등도 이런 소리를 듣지 않게 하십시오. 만일 시방의 보살이나 아라한이 이런 말을 들으면 ≺전륜성왕도 자재(自在)를 얻었는데 하물며 여래이…≻라고 말할 것입니다. 아난님, 부디 우유를 구한다는 이런 부끄러운 일을 마시고 빨리 돌아가십시오. 그리고 부디 말을 조심하십시오.’
아난은 이 말을 듣고 매우 부끄러워했다. 그 때 아난은 공중에서 이런 소리를 들었다.
‘아난님, 저 장자의 말과 같습니다. 다만 여래가 이 5탁(濁)의 악세(惡世)에 나타나심은 일체 3독(毒)의 행을 제도하기 위하신 것 뿐입니다. 곧 가서 우유를 구하십시오. 그런데 아까 유마힐이 그런 말을 했지만 부끄러워하지는 마십시오.’
이에 5백 범지들은 공중의 이 소리를 듣고 곧 의심이 없어져, 모두 크게 기뻐 날뛰면서 다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얻었다.
그 때 마야리의 안팎 권속들과 부락 사람 등, 수천명이 다 아난을 따라 소 있는 곳으로 갔다. 아난은 소곁에 가서 가만히 생각했다. ‘지금 내가 섬기는 스승님의 법은 제 손으로는 우유를 짜지 못하게 되어 있다’ 이렇게 생각하자, 제2의 도리천왕이 하늘에서 내려와 범지 소년으로 화하여 소 곁으로 갔다.
아난은 이것을 보고 기쁜 마음으로 ‘젊은 범지가 자청해서 우유를 짜려 하는구나’하고 말하였다. 그는 곧 ‘아난님, 나는 범지가 아닙니다. 나는 제석천입니다. 나는 여래가 우유를 구하신다는 말을 듣고 일부러 여기 온 것입니다’라고 했다.
아난은 말하였다.
‘천왕님은 지위가 존귀한데, 어떻게 이 더러운 소를 가까이 하십니까?’
제석천왕이 말하였다.
‘내가 아무리 존귀한들 여래 만이야 하겠습니까.
여래는 그런 존귀하신 몸으로도 싫어하지 않고 공덕을 세우셨거늘 하물며 이 조그만 천인이겠습니까?’
아난은 말하였다.
‘그렇다면 저를 위해 곧 젖을 짜주시기 바랍니다.’
제석은 응낙하고 곧 그릇을 가지고 소 곁으로 갔다. 그러자 소는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으므로 구경꾼들은 모두 놀라며 이상히 여겼다. 그 때 제석은 다음 게송을 외웠다.
지금 부처님이 조금 편찮으시다.
너는 나에게 그 젖을 다오.
부처님이 드시고 병 나으시면
너는 부량한 복을 얻으리.
부처님은 천상ㆍ인간의 스승으로서
언제나 자비로써 걱정하신다.
저 날거나 기는 곤충들까지도
모두 구제해 해탈시키신다.
그러자 어미소도 곧 제석을 위해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그 손으로 내 몸 어루만지라.
어쩌면 이리도 참 시원할까.
그러나 두 젖통의 그 젖만 짜고
뒤의 것은 그대로 남겨 두어라.
그것은 두었다가 내 새끼 주리.
저것은 아침부터 먹지 않았다.
비록 복은 많이 안다 하여도
고루 나누어 주고자 한다.
이때 곁에 있던 송아지는 그 어미를 위해 다음 게송을 외웠다.
나는 무수한 겁(劫)으로부터
부처라는 말 처음 들었다.
나는 말하노니 내 몫까지도
모두 부처님께 다 바치시오.
세존은 일체의 스승으로서
두 번 뵈옵기 지정 어렵네.
나는 풀을 먹고 물 마시거니
이것으로 오늘 하루 다 만족하네.
나는 이전에 사람으로 태어나
이미 오래 동안 젖을 많이 먹었고
또 6축(畜)으로 있으면서도
또한 그것을 무수히 먹었었다.
이 세상의 어리석은 사람들
그들도 또한 매우 많은데
부처님에게 보시할 줄 모르나니
뒤에 후회한들 무슨 이익 있으리.
나는 전생에 탐욕이 많아
남에게 마구 달겨들었고
그리고 또 나쁜 벗 따라
부처님의 계율을 믿지 않았다.
16겁 동안 지내오다가
이제야 부처님 계심을 알았나니
병자가 좋은 약 얻은 것 같다.
내가 먹을 젖 그 몫 모두 다
발우에 가득 채워 주시오.
나는 지금에 지혜를 얻었나니
도를 이루어 부처와 같이 되리.
이리하여 제석은 발우 가득히 우유를 짰다. 그리고 아난은 그 우유를 얻어 매우 기뻐하였다.
이때 그 범지들은 읍에서 들어오다가 이 어미소와 송아지의 이야기를 듣고 모두 놀라고 괴상히 여기면서 ‘이 소는 매우 사나워서 사람들이 감히 가까이 하지 못하는데 오늘은 어찌 그렇게도 유순할까. 이것은 반드시 아난에게 감동을 받은 것이다. 구담의 제자도 이러하거늘 하물며 부처의 위덕과 신통변화이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그 가르침을 믿지 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이리하져 범지들 남녀 모두 만여인은 다 기뻐 날뛰면서 번뇌를 아주 버리고 법안(法眼)을 얻었다.
아난은 우유를 가지고 돌아와 부처님께 그 동안의 사실을 자세히 말씀드렸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실로 저 소의 모자의 말과 같다. 저 소의 모자는 전생에 큰 장자ㆍ부자로서 재물이 많았지만, 인색하여 보시하지 않고 부처님의 계율을 믿지 않으며 생사를 알지 못하고 항상 외도를 위해 재물을 쓰면서 그들의 따름을 좋아하고 세월이 갈수록 나무람이 많지 않음을 좋아하였다. 그러나 도리가 없어, 빚을 다 받았으면서도 남을 비방하고 달겨들면서 빚이 아직 남았다고 하였다. 다만 이 때문에 16겁 동안 축생으로 있었는데, 지금 내 이름을 듣고 기뻐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그것은 축생의 과보가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이 소의 모자는 이 뒤로 목숨이 끝나면 일곱 번은 도솔천(天)과 범천에 날 것이요, 일곱 번은 세간에 태어나되, 항상 부자로 나고 악도에는 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곳마다 항상 전생의 일을 알고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면서 향을 피우고 경을 읽을 것이다. 저 어미소는 이 인연으로 최후에는 미륵 부처님을 만나 사문이 되어 정진한지 오래지 않아 아라한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 송아지도 이렇게 오르내리면서 20겁을 마치면 부처가 되어 이름을 유광(乳光)이라 할 것이다. 그리하여 그 소의 모자는 다 해탈을 얻을 것이니라.‘
그 때 그 회중의 5백 장자의 아들은
다 위없는 도의(道意)를 내었고 3천 8백 범지들은 곧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또 『불설심명경(佛說心明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은 왕사성(城)의 영조산(靈鳥山)에서 5백 비구와 4부 대중과 함께 계시다가, 어떤 현(縣)으로 가시어 분위(分衛)를 행하실 때 모든 하늘ㆍ용ㆍ귀신 등은 부처님을 따라가 위에서 모시었다. 부처님이 어느 범지의 문 앞에 서서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었다. 그 때 그 범지의 아내는 부엌에서 밥을 짓고 있다가 그 광명이 몸을 비추는 것을 보자 몸이 아주 편해져, 한없이 기뻐하며 돌아보았다. 그녀는 부처님의 단정하고 묘한 상호(相好)를 보고 더욱 기뻐하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나는 이제 부처님과 그 제자를 뵈었으니 실로 내 소원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음식을 정각(正覺)님께 드리고 싶었으나 가만히 ‘그 어리석은 남편은 도릴 믿지 않으므로 그 보시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원한을 맺을 것이다’고 생각하고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곧 밥을 담고 국 한 국자를 떠서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은 신통으로 그 발우의 음식을 온갖 맛있는 음식으로 만들고, 그 보시를 다음 게송으로 찬탄하셨다.
가사 백 마리 말을
금과 은으로 그 굴레 장식하여
그것을 사람에게 보시하여도
한 주걱의 밥과 국만 못하네.
가사 7보로 만든 수레에
온갖 보배 쌓아 보시하여도
한 주걱 밥과 국을 부처에게 보시하는
그 복이 저것보다 훨씬 많다네.
가사 백 마리의 흰 코끼리를
진주 영락으로 꾸며 보시하여도
부처님께 보시하는 한 주걱의 밥과 국
그 복이 저것보다 훨씬 많다네.
저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왕후인
보현 옥녀(寶賢王女)의 그 짝이 없는
아름다운 얼굴과 그리고 또
7보(寶)의 영락으로 장식한 몸
이와 같이 아름다운 그 미인들
수백명이 모두 여기 있는데
이들을 남에게 각각 고루 보시해도
한 주걱의 밥과 국의 보시보다 못하네.
이에 범지들은 고요히 앉아 부처님의 이 찬탄하는 게송을 듣고 마음에
의혹이 생겨 부처님께 여쭈었다.
‘한 주걱의 밥과 국이 무슨 가치가 있기에 여러 가지 보배로 보시하는 것도 그것보다 못하다 찬탄하며, 이 국과 밥의 값은 1전도 안 되는데 저것보다 여러 억배라고 찬탄하시니, 그 말씀을 누가 믿겠습니까?’
이에 세존은 곧 그 넓고 긴 혀를 내어 온 얼굴을 다 덮고 범천에까지 가게 하시고는 범지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무수 억배천겁 동안 항상 지성(至誠)을 행하여 이 혀를 얻었다. 어찌 거짓말로 이것을 이룰 수 있겠는가. 나는 지금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니, 그대들은 지성으로 대답하라. 그대들은 일찌기 사위성과 왕사성을 왕래하다가 그 중간에 있는 니구류라는 큰 나무가 있는데, 그 그늘이 여러 사람과 5백 대의 수레를 두루 덮는 것을 보지 못했는가?’
저들은 대답했다.
‘예, 그런 나무가 있습니다. 우리는 보았습니다.’
부처님은 다시 물으셨다.
‘그 씨는 얼마나 크던가?’
저들은 답하였다.
‘겨자만했습니다.’
부처님은 ‘그대들은 두 가지 말을 한다. 씨는 겨자만하다면서 나무는 왜 크다고 하는가’ 하시자, 저들은 ‘사실입니다. 어찌 감히 속이겠습니까?’ 하고 말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겨자 만한 씨가 광대한 나무를 생장(生長)시키고, 땅에서 나서 자라 갈무리 할 수 없는 넓은 그늘이 되거늘, 하물며 여래의 위없는 정각(正覺)의 무량한 복해(福海)의 가장 뛰어남이겠느냐. 큰 사랑과 넓은 자비는 모든 것을 구제하므로 음식을 그에게 바치는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범지들은 대답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자는 목숨을 마치면 여자의 몸을 남자로 바꾸어 천상에 날 것이요, 내려와서는 사람으로 태어나 깊고 묘한 법을 알 것이다. 그리고 14겁 뒤에는 부처가 되어 이름을 심명(心明)이라 할 것이다.’
범지들은 심복하여 온 몸을 땅에 던져 진심으로 자책하고 부처님께 귀명하며 말하였다.
‘은혜를 베풀고 가없이 여겨 출가하게 하소서.’
부처님은 곧 승낙하여 그들을 사문으로 만들고 4제(諦)를 강설하시어, 그들은 번뇌가 없어지고 마음이 모두
풀렸다.
또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십선(十仙) 외도들이 부처님과 신통의 힘을 겨루려 하자 아사세왕은 그 외도들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은 지금 손톱으로 수미산을 파려 하고 이빨로 금강을 깨물려 하는 것과 같다. 대사(大士)들아, 그대들은 마치 우치한 사람이 배가 고파 잠을 자는 사자의 왕을 깨우려 하고, 사람이 그 손가락을 독사 아가리에 넣으며 손으로 재에 덮인 불을 헤집는 것과 같다.
선남자들아, 비유하면 여유가 사자의 울음을 흉내내고 모기가 금시조(金翅鳥)와 날기를 겨루며 토끼가 바다를 건너 그 끝을 보려 하는 것처럼, 그대들도 지금 그와 같다.
그대들이 지금 그런 생각을 내는 것은 마치 부나비가 불무더기에 달려드는 것과 같다. 그대들은 내 말을 듣고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말지니라.’”
또 『장엄론(莊嚴論)』에서 교시가는 외도들에게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너희 외도들이 하는 모든 일
그 모두 허망하여 진실 아니다.
마치 저 어린애가 장난으로
흙을 모아 성곽을 만들 때
술취한 코끼리가 마구 짓밟아
모두 부숴 남기지 않는 것처럼
부처님이 모든 외도의 이론을 부수는
그 일도 또한 그와 같아라.”
또 『백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에 어떤 미련한 사람이 검은 사탕을 녹일 때 어떤 부자가 왔다. 그는 그 부자를 위해 그 사탕물을 불위에 얹어 놓고 부채로 부치면서 식기를 기다렸다. 곁의 사람이 말하였다.
‘밑에는 불이 그치지 않는데 위에서 아무리 부채로 부친들 그것이 어떻게 식을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여러 사람의 비웃음을 받았다.
이것은 저 외도들과 같다. 그 왕성한 번뇌의 불을 끄지 않고 고행을 조금 행하되, 가시덤불 위에 눕거나 겨를 씻어 그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끊고 굶지만 다섯 가지 열(熱)이
몸을 태우는데도 시원하고 고요한 도를 얻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렇게 될 리가 없어, 한갖 지혜로운 사람의 비웃음만 받으며, 현재에 고통을 받고 미래에 재앙을 남기는 것이다.”
또 『백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그 아내의 얼굴이 매우 아름다워 그녀를 못내 사랑했다. 그러나 그 아내는 진실성이 없어 남의 남자와 자주 왕래하다가 그만 음심이 왕성하여, 본 남편을 버리고 그 군서방을 따르기로 했다. 그래서 가만히 한 노파에게 말했다.
‘내가 떠난 뒤에, 할머니가 죽은 여자 시체를 구해 내 방에 두고, 내 남편에게 내가 죽었다고 하십시오.’
노파는 그 뒤에 그 남편이 외출한 틈을 타서 한 시체를 구해 그 방에 두었다가 남편이 돌아오자 그에게 ‘당신 아내가 죽었습니다’고 말했다. 남편은 그 시체를 보고는 슬피 울고 애통해 하면서 나무를 재고 기름을 뿌려 화장한 뒤에, 그 뼈를 주워 주머니에 넣고 밤낮 지니고 있었다. 그 뒤에 그녀는 그 군서방에 염증을 느껴 집에 돌아와 본 남편에게 말했다.
‘나는 당신 아내입니다.’
남편이 말했다.
‘내 아내는 죽은 지 오래요. 당신은 누구인데 거짓말을 하오.’
그녀가 재삼 말했으나 남편은 끝내 믿지 않았다.
이것은 저 외도들과 같다. 그들은 다른 사설(私說)을 듣고 거기에 혹하고 집착하여, 그것을 진실이라 믿고 끝내 고치지 않으면서, 아무리 바른 가르침을 들어도 믿으려 하지 않는다.
또 『백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두 상인이 다 같이 장사하러 다녔다. 한 상인은 순금을 팔고 또 한 상인은 두라솜을 팔았다. 금을 사려는 어떤 사람이 그 금을 시험하려고 불에 태워 보았다. 솜 장수는 가만히 불에 타는 그 금을 훔쳐 솜에 쌌다. 금이 뜨겁기 때문에 솜이 다 타버려서 훔친 사실이 탄로가 나서 두 가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이것은
저 외도들과 같다. 즉 그들은 불법을 훔쳐 자기들 법에 이용하면서, 망령되게 ‘이것은 우리 법이요 불법이 아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외전(外典)을 다 태워 없애어 세상에 유행하지 않게 된다. 이것은 저 금을 훔쳤다가 그 사실이 탄로 나는 것과 같다.”
또 『백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산적(山賊)이 왕의 창고의 옷을 훔쳐 멀리 달아났다. 왕은 사방으로 사람을 보내어 그 산적을 잡아와서 그가 가지고 있는 옷을 보고 물었다.
‘네가 가진 그 옷은 어디서 난 것이냐.’
산적은 ‘이 옷은 우리 조부 때부터의 옷입니다’고 했다. 왕은 그 옷을 입어 보라 했다. 그러나 그것은 산적이 본래부터 가졌던 옷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입는 법을 몰라, 손에 있어야 할 것을 다리에 끼고 허리에 있어야 할 것을 머리에 얹었다. 왕은 이것을 보고, 여러 신하들을 불러 다 보인 뒤에 그에게 말하였다.
‘만일 그것이 네 조부 때부터 있었던 옷이라면 너는 그 입는 법을 알 것인데, 왜 모두 뒤바꾸느냐. 위의 것을 밑으로 하고 밑의 것을 위로하는 것은 그 입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니, 그것은 반드시 네가 어디서 훔친 것이고 본래부터 너의 옷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을 비유하면 왕은 부처님과 같고 왕의 보물 창고는 부처의 법과 같으며 그 우치한 산적은 외도와 같다. 외도들은 부처님의 말을 훔쳐 자기네의 법에 이용하면서 제것이라 하지만, 그것을 바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불법을 인용할 때 위아래를 몰라서 법상(法相)을 바로 알지 못한다. 이것은 마치 저 산적이 왕의 보배옷을 얻었으나 그 차례를 알지 못하고 입는 것과 같으니라.”
또 『백유경』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사람은 얼굴이 단정하고 지혜를 구족했으며 또 재물이 많아, 세상 사람들이 모두 그를 찬탄했다.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보고 그를 ‘내 형님이다’라고 했다. 그러다가 그
뒤에는 도리어 그를 비방하면서 ‘내 형이 아니다’고 했다. 곁의 사람들이 말하였다.
‘너는 우치한 사람이다. 어쩌면 그 재물 때문에 남을 형이라 부르다가 이제 도리어 비방하면서 형이 아니라고까지 하느냐?’
그 우치한 사람은 ‘나는 그의 재물을 얻기 위해 형이라고 인정했을 뿐이고 실은 형이 아니다’고 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모두 웃었다.
이것은 저 외도들과 같다. 저들은 부처님의 선한 말씀을 듣고 그것을 탐하고 훔쳐 제것이라 하며, 내지는 다른 사람까지 수행하게 하면서도 자기들은 수행하려 하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양을 위해 부처의 말을 훔쳐 중생을 교화했을 뿐이고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데 어떻게 수행하겠느냐’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바름과 그름이 어긋나 밝고 어둡고
선과 악은 달라 서로 치나니
대자비는 범지를 항복받을 때
허공을 타고 각각 형체를 변화시킨다.
6천 범지가 모두 집착 버리고
7부 대중은 각각 경사히 여긴다.
간사한 무리들은 헛되이 항거하여
배에 자물쇠 채우고 함부로 명예를 구한다.
신자(身子 : 사리불)는 재주와 지혜가 많아
마음대로 교화하여 대기(大機)의 뜰을 비추며
4변(辯)은 모두를 다 항복받고
6통(通)은 뛰어난 마음을 떨친다.
방편을 부려 그른 견해 무찌르고
사견(邪見)을 굴복시킴은 이승 저승이 같다.
반딧불 미미함을 뻔히 알면서도
헛되이 햇빛과 겨루려 하였구나.
감응연(感應緣)[대략 여섯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성(聖)의 참과 거짓을 분별함
그름과 바름이 서로 뒤집혀짐
망령되이 사교(邪敎)를 전함
요혹(妖惑)으로 대중을 어지럽힘
도교(道敎)에서 부처를 공경함
사(邪)를 버리고 정(正)으로 돌아옴
성(聖)의 참과 거짓을 분별함
대개 삿됨과 그름[邪正]이 서로 침범하여 화와 복이 번거로이 뒤섞이니, 뛰어난 성인이 아니면
어찌 가르쳐 이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95종은 상계(上界)의 천존(天尊)을 근본[宗]으로 삼고, 25제(諦)는 중생들의 몽매한 근본을 헤아리면서 모두 정법(正法)이라 말하고 다 크게 구제한다 일컫는다.
또 노방(魯邦)의 공자는 예악(禮樂)을 9주(州)에서 말하고, 초국(楚國)의 이담(李聃)은 허현(虛玄)을 5악(岳)에서 열어 각각 중요한 정무(政務)에 벼슬살이 하였으나, 모두 제한된 지역에서 거리를 나눌 뿐이어서 변론의 주장은 어긋나 뒤틀리고 이치의 길은 곤경에 빠져 의혹의 그물로 마음을 덮어 돌아갈 곳을 모르게 하였다. 그것이 황각(黃覺)이 사사로움이 없어 중생들을 구제할 때 사람과 귀신이 마음을 다해 따르고 법부와 성인들이 모두 머리를 조아리는 것만 하겠는가. 비유하면 하늘에 두 해가 없고 한 나라에 두 임금이 없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천상 천하에 홀로 존귀하다고 외치고 삼천대천이 다 정각(正覺)과 같다 하여, 4생(生)을 이끄는 우두머리가 되고 6취(趣)를 건네주는 배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록(史錄)에서 태재 비(太宰嚭)가 공자에게 물었다.
“부자(夫子)는 성인이십니까?”
공자는 대답했다.
“나는 널리 알고 잘 기억할 뿐이요 성인은 아니다.”
또 물었다.
“3왕(王)은 성인이십니까?”
공자는 말하였다.
“3왕은 지혜와 용맹을 잘 썼다. 성인이고 아닌 것은 구(丘)의 아는 바가 아니다.”
또 물었다.
“5제(帝)는 성인이십니까?”
공자는 답하였다.
“5제는 인의(仁義)를 잘 썼다. 성인이고 아닌 것은 구(丘)의 아는 바가 아니다.”
또 물었다.
“3황(皇)은 성인이십니까?”
공자는 답하였다.
“3황은 시정(時政)을 잘 알았다. 성인이고 아닌 것은 구의 아는 바가 아니다.”
태재는 놀라면서 물었다.
“그렇다면 누가 성인입니까?”
공자는 안색을 변하면서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서방(西方)에 성인이 있는데, 다스리지 않아도 어지럽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 믿으며 교화하지 않아도 스스로 행한다고 한다. 그래서 탕탕(蕩蕩)하여 아무도 그를 어떤 사람이라 말하지 못한다고 하였다.”
이 말에 의하면 공자는 부처가 대성인(大聖人)이심을 아주 잘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시절, 인연이 익지 못했기 때문에 이를 들어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아직 훌륭한 말의 극치는 얻지 못한 것이다.
또 후한(後漢) 때에 통인인 부의(傅毅)는, 부처의 교화를 드날려 지은 『법본내전(法本內傳)』에서 말하였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영평(永平) 3년에 명제가 꿈에서 신인(神人)을 보았다. 금신(金身)의 키는 1장 6척이었으며 목에는 햇빛이 있었다. 명제는 꿈에서 깨어나 신하들에게 물었다. 부의가 말했다.
‘천축(天竺)에서 부처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명제는 사신을 천축에 보내어 불상과 승려 두 사람을 맞이해 왔다. 명제는 이에 절을 세우고 그 벽에 천승 만기(千乘萬騎)가 불탑을 세 번 도는 그림을 그렸다. 또 남궁(南宮)의 청량대(淸凉坮)와 고양문(高陽門) 위의 현절릉(顯節陵)에는 부처의 입상(立像)을 그리고, 또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난대(蘭坮)의 석실(石室)에 봉안했다.”
자세한 것은 앞의 경삼보편(敬三寶篇)에 기술한 것과 같다.
전(傳)에서 말하였다.
“그 때 사문 가섭마등과 축법란은 그 위행(位行)이 헤아리기 어려웠는데, 채암(蔡暗)이 사신으로 가서 동국(東國)으로 오기를 청했다. 마등은 동으로 올 때 구역을 지키지 않고 마음대로 걸어 낙양(洛陽)에 와서는, 사물의 뜻을 가르치고 믿음의 근본을 밝혔다. 명제가 마등에게 물었다.
‘법왕이 세상에 나오셨는데 왜 그 교화가 여기에는 미치지 않습니까?’
마등은 답하였다.
‘가비라위는 삼천대천세계와 백억 일월(日月)의 중심입니다.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이 다 저기서 났고 내지 하늘ㆍ용ㆍ귀신으로서 원과 행이 있는 자는 다 저기서 나서 부처님의 바른 교화를 받고 모두 도를 깨칩니다. 그러나 다른 곳의 중생들은 부처를 부르는[感招引] 인연이 없어 부처님이 거기 가시지 않습니다. 비록 부처님은 가시지 않더라도 광명이 미치는 곳에는 5백년 혹은 천년 혹은 천년 뒤에는 다 성인이 나와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해 교화하는 것입니다.”
전(傳)에서 말하였다.
“한(漢)나라 영평(永平) 14년 1월 1일에 5악(岳)의 도사(道士)들이 조회할 때 서로 의논했다.
‘천자님은 우리의 도법(道法)을 버리고 멀리 호교(胡敎)를 구하신다. 오늘 아침에 모였으니 우리는
글을 지어 올려 항의하자.’
그리고 그 글에서 말했다.
‘5악 18산관(山觀)에 있는 태상(太上)의 3동(洞) 제자인 저선신(楮善信) 등 69인은 방술(方術)에 있어서 못할 것이 없습니다. 원컨대 저 서승(西僧)들과 겨루어 그 진위(眞僞)를 분별하려 합니다. 만일 겨루어 저희들이 지면 천자님께서 마음대로 하시고 저희들이 이기면 저 허망한 것을 제거해 주소서.’
천자는 상사령(尙書令)인 송상(宋庠)을 시켜 저들을 장락궁(長樂宮)으로 들게 하여 보시고 말하였다.
‘이 달 15일에 백마사(白馬寺)에 모두 모여라.’
하였다. 도사들은 곧 세 개의 단(壇)을 만들고 단마다 따로 24문(門)을 두고 각각 도경(道經)을 싸서 세 단에 두었다. 천자의 어행전(御行殿)은 백마사의 남문에 있었다. 그리고 부처의 사리와 경전과 불상은 길 서쪽에 두었다. 15일에 재(齋)를 마치고 섶에 침단향을 섞어 횃불을 만들어 도경을 둘러싸고 눈물을 흘리면서 아뢰었다.
‘천존(天專)님 영험을 비나이다.’
그리고 불을 놓아 경을 살랐다. 경은 불을 따라 모두 재가 되고 말았다. 5악의 도사들은 서로 돌아보고 안색이 변하면서 크게 두려워했고 도사 중의 비숙재(費叔才)는 원통하여 자살했다. 태부 장연(太傅 長衍)은 저선신 등에게 말하였다.
‘그대들의 시험에는 아무 영험이 없으니 그것은 허망한 것이오. 서방에서 온 참 법을 따르시오.’
저선신은 말하였다.
『모성자(茅成子)』의 말에 ≺태상(太上)이란 연보(靈寶)이니, 그것은 바로 천존님이며, 조화(造化)의 작용은 바로 퇴소(太素)≻라 했으니 어찌 허망이라 하겠소.』
장연은 말하였다.
‘태소에 귀덕(貴德)이라는 이름은 있으나 언교(言敎)의 일컬음은 없는 것이오. 그런데 지금 그대는 말하는 언교가 있으니 그것이 바로 허망이오.’
저선신은 대꾸할 말이 없어 잠자코 있었다.
이때 부처님의 사리의 5색 광명이 바로 허공으로 올라가 일산처럼 돌면서 대중을 두루 덮고 햇빛을 가리었으며, 마등 법사는 몸을 솟구쳐 높이 날아 올라가 공중에서 앉고 누우면서 신통변화를 두루 나타내었다. 이때 하늘에서는 보배꽃이 내려와 불상과 스님들의 위에 두루 흩어졌으며 또
천상의 음악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켰다. 대중은 크게 기뻐하여 희한한 일이라 찬탄하면서 법란 법사를 둘러싸고 설법을 듣고는 모두 범음(梵音)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했다.
범천(梵天)의 복을 받기 위해 처음으로 절을 세우고, 사공(司空)인 양성후 유준(陽城候 劉峻)은 관리와 선비ㆍ백성 등 천여인과 함께 출가했으며 4악(岳)의 도사 여혜통(呂慧通) 등 6백20인도 출가하고 음부인(陰夫人) 왕첩여(王婕妤) 등은 궁녀와 여자 2백 30인과 함께 출가하여 10사(寺)를 세우고, 7성(城) 밖에는 비구승을 살게 하고 3성(城) 안에는 여승을 살게 했다.
“이 뒤로는 불법이 온 천하에 두루 퍼져 5권의 책이 전했으나, 자세히 적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이 전기가 요새 나온 것으로서 본래의 힘을 겨룬 기사는 없지 않았는가고 의심한다. 그러나 오서(吳書)에 비숙재가 원통하여 죽은 것을 밝혔다. 그러므로 그 전기는 사실의 기록이며 거짓이 아닌 것이다.
그 오서에 말하였다.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에 강거국(康居國)의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오(吳)나라로 와서 사리를 얻었다. 그 사리의 5색 광명은 천지를 비추면서 망치로 때릴수록 더욱 견고하고 불에 태워도 타지 않았으며, 큰 연꽃 같은 광명을 내어 궁전을 두루 비추었다. 임금과 신하들이 놀라며 희한한 경사라 찬탄하고 그것을 위해 절을 세워 사람들을 구제하여 출가시켰다. 또 교법을 처음으로 일으켰다 하여 절 이름을 건초사(建初寺)라 했다.
손권은 상서령 감택(尙書令闞澤)에게 물었다.
‘한(漢)나라 명제(明帝) 때부터 지금까지 대개 몇 해인가. 불교가 한나라에 들어온 지 이미 오래인데 무엇 때문에 이제야 강동(江東)에 처음 오는가.’
‘한나라 명제 영평 10년에 불법이 처음 들어왔사온데 지금은 적오 5년이니 백 70년이 되었습니다. 처음 영평 14년에 5악의 도사들이 마등과 힘을 겨루다가 도사들이 져서
남악 도사 저선신과 비숙재 등이 그 모임에 있다가 원통해 죽었습니다. 그 제자들은 그들을 남악에 장사한 뒤에 출가하려 하지 않았으므로 불법을 펼 사람이 없었는데, 그 뒤에 한나라의 능지(凌遲)를 만나 전쟁이 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지금 여러 해를 지나 비로소 불법이 유행하게 된 것입니다.’
손권은 또 물었다.
‘공구(孔丘)와 이로(李老)를 부처와 비교할 수 있는가.’
감택은 답하였다.
‘신(臣)이 들으니, 노(魯)나라의 공군(孔君)은 영특한 재주가 빼어나고 거룩한 덕이 뛰어나 세상에서 소왕(素王)이라 합니다. 또 경전을 저술하여 주도(周道)를 가르쳐 장려하고 후생(後生)을 교화하여 유교(儒敎)의 바람이 고금을 다 윤택하게 했습니다. 또 일민(逸民)으로서 허성자(許成子)ㆍ원양자(原陽子)ㆍ장자(莊子)ㆍ노자(老子) 등 백가(百家) 제자(諸子)의 글은 다 몸을 닦고 스스로 즐기며 산곡(山谷)에서 방랑하면서 그 마음을 놓아 담박(淡泊)으로 돌아가기를 배웁니다. 그 실제는 인륜(人倫)과 장유(長幼)의 차례에도 어긋나거니와 또한 세속을 편히 하고 백성을 교화하는 가르침도 아닙니다.
한(漢)나라 경제(景帝) 때에 이르러서는 황자(黃子)ㆍ노자(老子)를 숭앙하기 더욱 심하여 자(子)를 고쳐 경(經)이라 하고 비로소 도학(道學)을 세워 조야(朝野)에 명령하여 모두 읽고 외우게 했습니다. 그러나 공자ㆍ노자의 2교(敎)를 불법과 비교하면 미치지 못하는 것이 멀고도 멉니다. 왜냐 하오면 공자ㆍ노자의 2교는 하늘에서 본받아 제정한 것이므로 감히 하늘을 어기지 못하지만, 불교는 하늘도 본받아 봉행하므로 감히 부처를 거르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말한다면 실로 비교해서 대비할 수 없는 것입니다.‘[지금 장초(章醮)를 보면 속세에서 신(神)에 제사하는 것과 같아서 술과 포(脯)와 바둑과 거문고를 차린다.]
손권은 크게 기뻐하여 감택을 태자의 태부(太傅)로 삼았다.”
송(宋)나라 문제(文帝)는 고제(高帝)의 셋째 아들로서 슬기롭고 널리 알며 바르고 착하였다. 왕위에 있은지 13년만에 어느 날 조용히 시중 하상지(侍中 何尙之)와 이부 양현보(吏部 羊玄甫)에게 물었다.
“짐(朕)은 젊어서부터 불경을 많이 읽지 못하고 더구나 여가가 없어 3세(世)의
인과(因果)를 분별하지 못해 마음에 걸리지만 그렇다고 감히 다른 것을 주장할 수도 없다. 그런데 그대들은 이 시대에 뛰어나 많은 사람들이 공경하고 믿어한다.”
양현보가 말하였다.
“범태(范泰)와 사령운(謝靈運)은 항상 말하기를 ≺6경(經)의 글은 본래 세상을 구제하고 정사를 위하며 반드시 성령(性靈)의 진오(眞奧)를 구하는 데 있다. 어찌 부처의 교리로써 지남(指南)을 삼지 않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석문(釋門)에 그대들이 있는 것은 공문(孔門)에 계로(季路)가 있는 것과 같다. 이른바 악한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했다. 이 뒤로 문제는 불경에 뜻을 두어 그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름과 바름이 서로 뒤집혀짐
사혹(邪惑)이 물었다.
“석가(釋迦)는 천축(天竺)에서 났고 수다라는 서번(西蕃)에서 나왔다고 하지만, 그 이름은 주ㆍ공(周ㆍ孔)에는 전함이 없고 공덕은 전모(典謨)에 일컬음이 없으니 실로 이것은 먼 오랑캐들이나 존경할 것이요, 우리 중하(中夏)에서 사유(師儒)할 것이 아니다.
그런데 정사(精舍)를 널리 일으켜 갑제(甲第)가 거리에 가득하여 금백(金帛)을 헛되이 써 버리거늘 복리(福利)가 어디 있겠는가. 그보다는 불상(佛像)을 모두 녹여서 조각한 것과 주조(鑄造)한 것을 없애면 그로써 재물의 샘이 줄지 않을 것이요, 경전을 헐음으로써 읽고 베낌을 금하며 승려를 폐하여 호적에 편입시키면, 적이 나라와 국민을 이롭게 하고 집을 일으켜 복이 많을 것이다.”
방외(方外)가 대답했다.
“살펴보면 그것은 남탁(濫濁)하여 충효(忠孝)의 도가 아니다. 대개 충신은 나라를 받들 때 무궁한 복을 받기를 원하며 효자는 부모를 봉양할 대 재앙을 미연에 막기를 힘쓰는 것이다. 복의 인연이 많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을 구하되 미치지 못하듯 하고 재앙의 싹이 닥칠 것을 보면 그것을 피하되 탐탕(探湯)하듯 한다. 나라에서 천지에 대한 기도를 중히 여기는 것은 복을 빌기 때문이요 집에서 음양(陰陽)의 꺼림을 꺼리는 것은 재앙을 꺼리기 때문이다. 의심하면서도 복을 꺼리는 것은 재앙을 꺼리기 때문이다. 쫓아 보내려는 것은 사람의 상정이요 충성의 도리이다. 그대는 사람이 말하는 복을 버리고 사람이 말하는
재앙을 취하려 하니, 이것이 어찌 충신으로서 나라를 이롭게 하려는 계획이며 효자로서 부모를 편히 하려는 방법이겠는가.
만일 종묘(宗廟)의 제수(祭需)을 폐하여 자손의 어육(魚肉)을 보태고 제사의 제복(祭服)을 헐어, 종과 첩의 의복에 충당하면서까지, 구차하게 아래 사람에게 은혜 베풀기를 구하고 윗사람을 편히 하는 복을 숭상하지 않으며, 부모를 봉양하는 음식에 쓰이는 비용을 아까워 하고, 부모에 대한 봉양을 폐하고 집을 치장하기를 생각한다면, 이런 것을 충효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대개 3달(達)의 지혜는 백신(白神)도 그 신통을 따를 수 없고, 10력(力)의 존귀함은 천성(千聖)도 그 큼에 맞설 수 없다. 모든 의혹이 다 없어졌고 모든 덕을 다 갖추었으니, 범천(梵天)도 우러르고 제석도 섬기는 것이다. 그 도는 4생(生)을 구제하고 교화는 3계(界)에 통하며 생사의 윤회(輪廻)를 없애고 열반의 상락(常樂)을 보이나니, 주ㆍ공(周ㆍ孔)도 헤아릴 수 없으며, 널리 보시하고 두루 제도하는 것은 요ㆍ순(堯ㆍ舜)도 오히려 부족하게 여기셨다. 사랑이 평등하여 버리는 물건이 없으니 어찌 인(仁)이라 하지 않을 수 있으며 지혜를 갖추어 묘한 깨달음이 있으니, 어찌 성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개 인성(仁聖)의 지극한 도를 체득한 사람으로서 어찌 구차히 속이는 궤변(詭辯)이 있겠는가. 고요히 생각하면 믿음은 더욱 굳어질 것이다. 더구나 절을 세우는 공덕은 큰 바다보다 깊고 스님을 제도하는 복은 높은 산보다 무겁다는 것은 법왕(法王)께서 분명히 말씀하신 것이요, 개사(開士)가 독실하게 권하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일으키면 경사를 더해 나를 이롭게 할 것이니 그 또한 크지 않으며, 이것을 공경하면 선을 내어 사람을 이롭게 할 것이니 그 또한 넓지 않은가. 혹은 조그만 손해가 있더라도 그 이익이 크다면 어찌 나라에서 마땅히 숭상할 것이 아니겠으며, 혹은 조그만 이익이 있더라도 그 손해가 크다면 어찌 백성들이 마땅히 피할 것이 아니겠는가. 이것으로 신하가 그 임금에 삼가지 않으면 그는 충신이 아니요, 이것으로 자식이 그 부모를 염려하지 않으면 그는 효자가 아닌 것이다.”
사혹이 물었다.
“불법은 본래 서번(西蕃)에서 생긴 것이라 중국에서는 받들지 않아야 할 것이다.”
방외가 답하였다.
“유여(由余)는 서유(西戎)에서 났지만 진목공(秦穆公)을 도와 패업(霸業)을 열었고 일제(日磾)는 북적(北狄)에서 났지만 한무제(漢武帝)를 모시고 위해(危害)를 제거했다. 신하가 이미 있으매 스승도 또한 그러하거늘, 어찌 꼭 동속(同俗)을 취해 그 이방(異方)을 버리겠는가. 스승은 도가 큼으로써 존귀하다 하고 법은 선이 높음으로써 훌륭하다 하여, 그 멀고 가까움을 헤아리지 않는 것이다. 그러하거늘 어찌 이역(異域)에서 났다고 하여 그 도를 천대하겠으며 먼 곳에서 났다고 하여 그 보배를 버리겠는가.
대개 무리에서 뛰어난 준마(駿馬)는 꼭 중읍(中邑)에서만 나는 것이 아니요, 세상에 드문 보배는 반드시 중화(中華)의 물건만이 아니다. 한(漢)나라에서는 서역(西域)의 명마(名馬)를 구하고 위(魏)나라에서는 남해(南海)의 명주(明珠)를 쓴다. 물소와 코끼리의 어금니와 뿔로 조공을 바치고 비취의 깃과 털을 쓰는데, 물건이 먼 나라에 난 것이라 하여 보배 아님이 아니거니, 부처만이 먼 나라에서 났다 하여 어찌 그를 버리겠는가. 만일 약물(藥物)이 오랑캐 나라에서 나고 금주(禁呪)가 호월(胡越)에서 생겼지만, 그것이 진실로 사(邪)를 물리치고 병을 고친다면, 어찌 멀리서 왔다고 하여 그것을 쓰지 않겠는가.
대개 3독(毒)을 멸함으로써 무위(無爲)를 증득하여 그 사(邪)를 물리침은 큰 것이요, 8고(苦)를 제거하여 상락(常樂)을 이룬다면 그 병을 고침은 대단한 것이다. 그런데 어찌 오랑캐와 중화(中華)에 국집하여 친소(親疎)를 따지겠는가. 더구나 백억의 일월(日月) 아래 있고, 삼천 세계의 안에 있으니, 그 복밭이 저 나라에는 있고 이 나라에는 없겠는가.”
사혹이 물었다.
“시서(詩書)에 말하지 않은 것을 수다라라 하는 것은 숭상할 수 없는 것이다.”
방외가 답하였다.
“대개 천문(天文) 역상(曆像)의
심오함과 지리 산천의 뛰어난 해설과 경맥(經脈) 공혈(孔穴)의 진찰과 침약(針藥) 부주(符呪)의 방술(方術) 등은 다 시서에는 실리지 않은 것이요, 주공(周孔)도 밟혀서 말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길흉을 점쳐 보면 증험이 있고 그 행용(行用)을 살펴보면 효험이 있다. 또 주ㆍ공이 말하지 못한 물건은 얼마든지 있어 그 끝이 없고 시서에 실리지 않은 법도 끝이 없거늘 어찌 한정할 수 있겠는가. 실로 글은 말을 다하지 못하고 말은 뜻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니, 어찌 6경(經)의 국한된 가르침에 구애되어 3승(乘)의 통한 뜻을 버리겠는가.
대개 능사(能事)는 상고(上古)에는 일어나지 못했으므로 성인이 후대에 와서 할 일을 시작했으니, 그러므로 동우(棟宇)로 회소(檜巢)의 주거와 바꾸었고 문자(文字)로 결승(結繩)의 제도를 대신한 것이다. 피를 마시고 털을 먹는 음식은 먼저 쓴 것이라 하여 보배로움이 아니요, 곡식을 먹고 불로 익히는 음식은 비록 뒤에 만든 것이라 하더라도 나쁜 것이 아니다. 또한 어려서는 명아주잎과 콩잎을 먹고 자라서는 쌀과 고기를 먹으며, 젊어서는 베옷을 입고 늙어서는 후복(候服)을 만나지만 어찌 명아주잎과 콩잎을 먼저 얻었다 하여, 그것이 쌀과 고기의 맛보다 낫겠으며 후복을 늙어서 입는다 하여 그것에 베옷의 귀함보다 못하겠는가.
대개 만물에는 변천이 있으나 3보(寶)는 언제나 머물러 있으면서, 적연(寂然)히 움직이지 않고 느낌이 있으면 어디나 가서 교화하는 것이다. 처음에 왕궁(王宮)에서 난 것도 아니요 쌍수(雙樹)에서 아주 가신 것도 아니거늘, 어떻게 생멸을 논할 수 있겠는가. 느낌을 따라 달려가서 닦기를 재촉하면서 왔다 갔다 하는 것일 뿐이다.”
사혹이 물었다.
“부처란 요매(妖魅)의 기운이요 절이란 음사(淫邪)의 집이거늘, 어찌 중하(中夏)에서 사람을 가르치는 스승의 법으로 삼을 수 없겠는가.”
방외는 답하였다.
“요귀(妖鬼)는 오직 재앙만 일으키거늘 어찌 10선(善)의 교화를 펼 수 있으며 도깨비는 반드시 사기(邪氣)에 의지하거늘 어찌 8정(正)의 도를 일으키겠는가. 요귀도 개를 두려워하고 도깨비도 삵을 겁내거늘 어찌 제석의 높은 마음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천마(天魔)의
큰 힘을 꺾을 수 있겠는가. 또 저 도징(圖澄)ㆍ라집(羅什)ㆍ도안(道安)ㆍ혜원(慧遠) 같은 사람들은 덕과 이름이 높고 미치지도 취하지도 않았거늘 어찌 은애와 영화로운 자리를 버리고 이매(魎魅)의 사도(邪道)를 구했겠으며 몸을 괴롭히고 절조에 괴로워하면서 망량(魍魎)의 노신(奴神)을 섬겼겠는가.
또 동한(東漢)으로부터 우리 대당(大唐)에 이르러서는 대대로 요사스런 말을 금하고 곳곳에서 부정한 제사를 막았거늘, 어찌 그 재물을 버리고 그 백성들을 놓아 이매(魎魅)의 당탑(堂塔)을 만들고 망량의 부류에 들어감을 용납했겠는가. 또 상고의 제왕과 신하들은 인륜(人倫)에 뛰어나 모두 그 가르침을 받아 귀의하고 마음에 두어 숭상하고 믿었거늘, 어찌 요귀를 높이고 도깨비를 받듦으로써 스스로 굽혔겠는가. 이것은 실로 이 묘함을 보고 참임을 알았기 때문에 그러했을 뿐인 것이다. 밝은 임금과 어진 신하는 그 덕을 도모하고, 범부인 백성과 또 군자는 그 말을 생각하며, 큰 선비와 높은 승려는 그 이치를 사모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대로 이것을 보배로 하여 큰 교훈으로 삼았고 여러 성인들은 이것을 본받아 인간과 천상의 사범이라 하였으며 이치는 끝까지 미묘하고 복은 진제(眞諦)와 같거늘, 어느 성인이 이보다 뛰어나며 어떤 도가 이보다 낫겠는가. 그 은혜에는 감사하지 않고 도리어 미친 소리를 하는구나.”
사혹이 물었다.
“부모에게 받은 몸은 상처를 내어서는 안 되는 것인데 왜 사문들은 수염과 머리를 깎음으로써 선왕(先王)의 도를 배반하고 충효의 의리를 잃는가.”
방외가 답하였다.
“대개 임금과 부모를 섬길 때 충절을 다하면 비록 몸을 죽이더라도 그것을 인(仁)이라 하지만, 충효를 소홀히 하여 구차히 살기를 탐하여 한갖 몸만 온전히 하면 그것은 도리가 아니다. 의(義)로 말하면 나라의 위태함을 보면 목숨을 바치고 예(禮)로 말하면 어려움에 다달아 구차히 면하려는 것을 막는 것이니, 어찌 일률적으로 사상(死傷)을 피하고 다른 사람만을 덩달아 따라서 피부와 머리털을 돌아볼 수 있겠는가. 4지를 베고 간을 바치는 것은 상해가 심한 것이나 머리와 수염을
깎는 것은 그 허물이 미미한 것을 논자(論者)는 허물하지 않으면서 도를 구하기 위해 그 털을 사랑하지 않는 것만 어찌 허물할 수 있겠는가. 탕(湯)임금은 백성들을 가엾이 여겨 몸을 태우면서까지 못에 기도하였고 묵자(墨子)는 겸애(兼愛)에 독실하여 발에서 정수리까지 다 갈고자 하였거늘, 하물며 위로 군부(君父)를 위해 복리(福利)를 간절히 구하는데, 수염과 머리를 깎는 것쯤 돌아볼 것이 무엇 있는가.
또한 성인의 가르침은 그 길은 다르나 돌아가는 곳은 같으며, 군자의 도는 경은 다르나 그 도리는 같나니, 그런 사람은 바로 저 태백(太伯)이다. 그는 가정에서의 부모 봉양을 폐하고 약을 캐러 간다고 핑계대어 돌아오지 않았으며, 중국의 복장을 머리고 머리를 깎음으로써 장식을 삼았으니, 경을 배반하고 예(禮)에 어긋남이 이보다 심함이 없었다. 그러나 중니(仲尼)는 그를 칭찬하여 ‘태백은 그 덕이 지극히 높다’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까닭인가. 비록 그 외형은 임금과 부모를 배반했으나 그 마음은 가정과 나라에 충실하였고 그 형식은 백월(百越)에 이지러졌으나 그 덕은 3양(讓)에서 온전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태백은 의관(衣冠)의 제도를 버렸으나 지극한 덕에는 손실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사문이 진신(縉紳)의 위용을 버린 것도 묘한 도에야 무슨 상함이 되겠는가. 비록 옷을 바꿔 입고 얼굴을 고쳐 신자(臣子)의 떳떳한 위의를 어겼다 하더라도 도를 믿고 마음을 돌려 임금과 부모의 복이 많기를 원하며, 그 몸과 뜻을 괴롭히면서 출가의 온갖 덕을 닦아 그 임금과 부모에게 역겁(歷劫)의 경사를 남긴다면 그 충효됨이 또한 많지 않은가. 이른바 착한 사문으로서 불충 불효하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말이다.”
사혹이 물었다.
“서역(西域)의 오랑캐들은 진흙에 의해 났기 때문에 진흙으로 만든 탑과 상(像)을 섬기는 것인가.”
방외는 답하였다.
“그것도 생각하지 못한 말이다. 대개 신령스런 형상을 세우고 존귀한 형상을 모사하는 것은 거기에 쓰이는 자료가 많아 진흙만을 쓰는 것이 아니다.
혹 새기고 주조(鑄造)할 때는 쇠나 나무나 금이나 구리쇠를 쓰고, 수놓을 대도 또한 붉고 푸른 비단실을 쓴다. 이럴 때도 서역의 남녀들이 모두 여기서 났다고 하겠는가. 또 중국의 사당은 나무로 신주(神主)를 만드는데, 그렇다면 예를 제정하는 군자들이 다 나무에서 났다 하겠는가. 부모를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종묘(宗廟)를 위하고 부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에 그 형상을 세워, 그로써 망극(罔極)한 마음을 나타내고 그로써 곁에 계시는 듯한 공경을 표하는 것이니, 성인의 덕을 흠앙하는 데 있어서 이것이 무엇이 잘못인가. 만일 탑묘(塔廟)를 나무나 진흙으로 만든 형상이라 하여 공경할 것이 아니라면, 국ㆍ묘(國ㆍ廟)의 나무로 만든 신주의 형상도 또한 공경할 것이 아니라 하겠는가. 대개 선을 허물이라 하는 자는 악도 공(功)이라 하는 것이다.”
사혹이 물었다.
“부처가 없으면 나라가 태평하고 나라의 수명이 길며, 부처가 있으면 정치가 가혹하고 나라의 수명이 짧을 뿐인가.”
방외는 답하였다.
“그것도 생각하지 못한 말로서 음흉한 한 사람은 으레 그런 말을 한다. 미련한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능인(能仁)이 베푼 가르침은 다 음학(淫虐)한 풍속을 드러내고 보살이 주장한 말은 오로지 걸주(桀紂)의 일만을 편다고 한다. 그러나 사실로 말하면 전연 그렇지 않다. 대개 은(殷)나라가 큰 보배를 잃은 재앙은 저기(姐己)의 말에서 일어났고, 주(周)나라가 제후(諸侯)를 잃은 화는 포사(襃似)의 웃음에 기인한 것이다. 3대(代)가 망한 것이 다 이 물건(여자) 때문인데 3승(乘)의 가르침이 어찌 이것을 숭상하겠는가.
부처의 도는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로서 원수와 친한 이를 평등하게 보호하고 남과 나를 다 함께 구제하는 것이다. 그 은덕이 이미 커서 어질고 미련한 이가 모두 사모하고 숭상하는 것이다. 가사 희(羲)ㆍ헌(軒)ㆍ순(舜)ㆍ우(禹)의 덕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6도(度)에 다 포괄되고 예(羿)ㆍ착(浞)ㆍ계(癸)ㆍ신(辛)의 허물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10악(惡)으로 다 금지 될 수 있는 것이다. 걸(桀)로 하여금 욕심을 적게 하는 가르침을 펴게 하고 주(紂)로 하여금 큰 사랑의 도를 따르게 했다면 이(伊)ㆍ여(侶)도 그 꾀를 쓸 자리가 없었을 것이니,
탕ㆍ무(湯ㆍ武)인들 어찌 그를 방벌(放伐)할 수 있었겠는가. 또 명조(鳴條)에서의 나라를 버리는 화를 면하게 하고, 목야(牧野)에서의 도과(倒戈)의 난(亂)을 그치게 하며, 하후(夏后)로 하여금 낙예(洛汭)의 노래를 따르게 하고, 초자(楚子)로 하여금 건계(乾溪)의 탄식이 없게 하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석씨(釋民)의 교화는 그 이익됨이 적지 않은 것이니, 그 복을 한없이 뻗게 하고 그 위망(危亡)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혹이 물었다.
“있으면 손해요 없으면 이익이다. 그러므로 불법이 있기 전에는 사람이 다 화순하고 세상에 찬역(簒逆)이 없었는데 불법이 들어온 뒤로는 패난(悖亂)을 많이 일으키지 않았는가.”
방외는 답하였다.
“어리석어 생각하지 못하고 예사로 흉한 모함을 하는구나. 대개 9려(黎)가 덕을 어지럽힌 것이 어찌 불법이 없을 때가 아니며, 3묘(苗)가 천명(天命)을 거역한 것이 불법이 있는 뒤가 아닌가. 하은(夏殷)의 말년에 무슨 화순이 있었으며 춘추(春秋)의 시절에 과연 찬역이 없었던가. 도적들이 간사하고 흉(凶)할 때는 고요(睾繇)를 선비라 일컬었고, 오랑캐들이 매우 성할 때는 길보(吉甫)를 친 공로를 박대했었다. 그런데 우치한 사람은 부처가 찬역을 일으키고 불법이 화순을 무너뜨렸다 하면서, 오로지 거짓말을 꾸미지만 이것은 다 사실의 기록과 어긋나는 것이다. 한 오라기 실을 훔치는 것도 부처는 경계하거늘 어찌 찬역의 어지러움을 조장하겠으며 한 마디 말의 다툼도 부처는 금하거늘 어찌 화순의 도를 어지럽히겠는가.
부처의 가르침이란, 신하에게는 충성을 권하고 자식에게는 효도를 권하며 나라에는 태평하기를 권하고 집에는 화목하기를 권하며, 선을 펴서 천당의 즐거움을 보이고 악을 징계하여 지옥의 괴로움을 나타내며, 오직 한 글자[字]만으로 칭찬하지 않거늘 어찌 5계(戒)만으로 경계하였는가. 그러하거늘, 이에 화순을 해치고 어지러움을 조장한다 하니, 어찌 이다지도 모함이 심하며 또한 부처의 해(日)를 이처럼 해치는가. 다만 스스로 고해(苦海)에 빠질 뿐이다. 이것을 무시하여 피하지 않으니 실로 슬픈 일이라 하겠구나.”
사혹이 물었다.
“천도(天道)는 무정하여 모두 거짓만 드러내니 화음(禍★)과 복선(福善)이 어찌 이렇게도 애매한가. 무엇 때문에 버려진 쓸모 없는 사람이 도리어 장수를 누리고, 높이고 공경할 사람이 자기 목숨을 마치지 못하는가. 생각하면, 복을 쌓으면 경사를 늘리고 악을 쌓으면 재앙을 불러야 하겠거늘, 어찌하여 진퇴(進退)에 모순이 생기며 정상이 환한데 버리고 취함이 스스로 어긋나니, 어떻게 대답하겠는가.”
방외는 답하였다.
“도교(道敎)는 경박하고 거칠거늘 어떻게 3보(報)를 밝힐 것이며 유종(儒宗)은 악착하여 다만 일생(一生)만을 말할 뿐이다. 그러므로 중니(仲尼)는 계로(溪路)에게 말하기를 ‘생과 인사(人事)도 너는 아직 모르거늘 죽음과 귀신을 네가 어찌 섬기겠는가’ 하였다. 굉원(宏遠)의 후한서(後漢書)에는 ‘도가(道家)란 노자(老子)에게서 흘러나와 청허(淸虛)와 담박(淡泊)을 주로 삼고 선을 돕고 악을 미워함을 교로 삼으면서, 처자를 기르고 부서(符書)를 쓰지만 그 화복(禍福)의 보응(報應)은 일생 안에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이 세상 안의 눈 앞에 있는 것만을 주장이요 형상 밖의 먼 이야기는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구열(苟悅)은 의심이 컸었고 사천(史遷)은 깊이 미혹되었던 것이다. 나아가서는 당후(唐虞) 같은 상성(上聖)도 주균(朱均)을 낳았고, 고수(瞽叟) 같은 하우(下愚)도 유순(有舜)을 낳았으며, 안회(顔回)는 대현(大賢)이지만 일찍 죽었고, 상신(商臣)은 극악했으나 자손이 번창했으며, 도척(盜跖)은 몹시 포악했지만 복으로 죽었고, 이숙(夷叔)은 지극히 인(仁)했으나 굶어 죽었으며, 장탕(張湯)은 가혹한 관리였지만 7대에 영락을 드리웠고, 비간(比干)은 바른 신하였으나 그 한 몸이 찔려서 죽임을 당했으니, 이런 유례(類例)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것을 혹 의심하지만 그것은 사람의 상정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 종각(種覺)만을 변지(遍知)라 불러 멀리 2세(世)를 주장하고 3보(報)를 널리 설명하는 것은 그 걸린 의심으로 하여금 안개가 걷히듯 하게 하고 오랜 막힘으로 하여금 구름이 흩어지듯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옥 같은 말씀으로 두루 설명하고 금 같은 말씀으로 자세히 밝히신 것이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어떤 업은 현세에도 괴롭고 과보도 괴로우며 어떤 업은 현세에는 괴로우나 과보는 즐거우며 어떤 업은 현세에도 즐겁고 과보도 즐거우며 어떤 업은 현세에는 즐거우나 과보는 괴롭다’고 한 것이다. 혹은
남은 복이 없어지지 않았으면 악이 곧 가해지지 않고, 혹은 전생의 재앙이 아직 있으나 선의 반연이 곧 생긴다. 이것은 마치 재가 불을 덮고 있는 것과 같거늘 어찌 없다고 하겠는가. 만일 가만히 찾아보면 반드시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선과 악이 분명하지 않은 것은 기린이 싸움으로써 해가 이지러짐과 같고, 보응이 돌아감이 있는 것은 고래가 죽어 별이 나타남과 같은 것이니, 다만 그 감통(感通)의 분(分)만 관찰해 보면 선악의 징후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망령되이 사교(邪敎)를 전함
나는 들으니, 백마(白馬)가 동으로 옴에 3장(藏)이 여기서 일어났고 청우(靑牛)가 서쪽으로 감에 2편(篇)이 여기서 일어났다고 하였다. 혹은 현현(玄玄)을 밝혀 백성을 교화하고 혹은 공공(空空)을 밝혀 세상을 구제함은 그림과 글을 살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장을 세우고 근본[宗]을 나타내지만 이 세상에서 마치는 것이다.
석교(釋敎)의 번역은 그 시대가 분명하고 문사(文史)로 모두 나타내어 백성들이 의혹하지 않는다. 그러나 도가(道家)의 현적(玄籍)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다. 오직 노자(老子)의 2편(篇)만은 이담(李聃)이 몸소 밝힌 것이지만 다른 경전은 다 범부의 생각이 섞여 있는 것이다. 왜그러냐 하면, 전한(前漢) 때의 왕포(王褒)는 『동현경(洞玄經)』을 지었고, 후한(後漢) 때의 장릉(張陵)은 『영보경(靈寶經)』과 『장초(章醮)』 등 도서(道書) 24권을 지었으며, 오(吳) 때의 갈효선(葛孝先)은 『상청경(上淸經)』을 짓고 진(晋) 때의 도사 왕부(王浮)는 『명위화호경(明威化胡經)』을 지었으며, 또 포정(飽靜)은 『삼황경(三皇經)』을 지었다. 제(齊) 때의 도사 진현명(陳顯明)은 64권의 『진보허품경(眞步虛品經)』을 지었고 양(梁) 때의 도홍경(陶弘景)은 『태펑경(太淸經)』과 『중초의(重醮儀)』 10권을 지었으며, 후주(後周)의 무제(武帝)가 2교(敎)를 말할 때 화주(華州)의 전(前) 도사 장빈(張賓)은 본부(本州)의 자사(刺史)에게 가르쳐 주었고 장안(長安)의 전도사 초자순(焦子順)[일명 도항(道抗)]은 개부(開府)에 뽑혔었다.
부풍(扶風)의 전 도사 마익(馬翼)과 옹주(雍州) 별가(別駕) 이운(李運)
등 4인은 천화(天和) 5년에 고성(故城) 안의 우진사(宇眞寺)에서 불경을 제멋대로 어지럽혀서 도가(道家)의 위경(僞經) 천여권을 지었다. 그 때 만년현(萬年縣) 사람 색교(索皎)가 표구(表具)할 때 거기서 다만 견란(甄鸞)이 ‘도를 비웃은 곳’만 보았을 뿐인데, 모두 고치고 없앴었다.
요즘 대업(大業) 말년에 오통관(五通觀)의 도사 보혜상(輔慧祥) 같은 이는 3년 동안 말하지 않다가 곧 『열반경』을 고쳐 『장안경(長安經)』이라 했다. 당시의 제도로는 도사가 성문 밖으로 나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었는데, 그 집 사람이, 도사가 안에 황색 옷을 입은 것을 보고는 그를 붙들어 유수(留守)에게 보내어, 경전을 고칠 사실이 발각나서, 상서위(尙書衛) 문승(文昇)이 왕에게 아뢰어 금강문(金光門) 밖에서 베어 죽임을 당했었다. 이것은 근래의 일이라 모두가 듣고 본 것이다.
또 견란(甄鸞)의 『소도론(笑道論)』에서는 “도가(道家)들은 망령되어 제자(諸子)의 3백 50권을 주해하여 도경(道經)이라 한다”고 했다. 또 『현도목록(玄道目錄)』을 조사해 보면 “망령되이 『예문지(藝文誌)』의 책 이름을 취해 8백 84권을 고쳐 주해하여 도경이라 한다”고 했다. 이에 의해 말한다면 그것이 거짓임을 밝히기에 족하다.
또 인덕(麟德) 원년에 서경(西京)의 도사 곽행진(郭行眞) 등이 왕명을 받고 백성을 몰아쳤다. 다른 도사들은 이것을 보자 임금의 위엄을 빙자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고 어지럽히면서 서로 부추겨 도사들을 가려 뽑아 모았다. 동명관(東明觀)의 이영요(李榮姚)ㆍ의현(義玄)ㆍ유도(劉道) 등은 성관(聖觀)의 도사 전인혜(田仁慧)ㆍ곽개종(郭蓋宗) 등을 모아, 고금의 도사들이 지은 위경(僞經)으로서, 세상에 흩어져 행하지 않는 것들을 모두 모으고 그것을 다시 고치고 편집하였다. 그리고 가만히 불경의 요의(要義)를 가려 취하고 문구를 고치고 부처의 말을 돌려 바꾸고, 사람과 범의 명수(名數)인 3계(界)ㆍ6도(道)ㆍ5음(陰)ㆍ12입(入)ㆍ18계(界)ㆍ37도품(道品) 등 대소(大小)의 법문을 모두 훔쳐 도경에 붙이고, 이것을 장차 화전(華典)으로 삼으려 했다.
옛날의 도경에는
제사에 모두 사슴고기의 포와 청주(淸酒)를 썼는데, 지금은 그것을 고쳐 마른 대추와 향수를 쓴다. 다만 도경의 말이 투박하고 온갖 잡된 곳을 모두 없애 버렸다.
대업(大業) 때에 오통관(五通觀)의 도사 보혜상(輔慧祥)은 『열반경』을 『장안경(長安經)』이라 고쳤다가 죽음을 당하여 그 책이 유행하지 않았는데, 지금 다시 그것을 『태상영보원양경(太上靈寶元陽經)』이라 고치고, 다시 다른 불경을 고쳐 『승모니경(勝牟尼經)』 혹은 『태평경(太平經)』이라고 따로 부른다. 도경에는 본래 우바새ㆍ우바이ㆍ단월(檀越)ㆍ현자(賢者)ㆍ달친(噠嚫) 등의 이름이 없었는데, 지금 도사들은 다 이것들을 훔쳐 쓰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름들이 한어(漢語)인지 범음(梵音)인지 모른다. 또 이것이 한어라면 왜 모든 사서(史書)에 이런 말이 없으며 만일 이것이 범어라면 이 말을 번역하면 무슨 뜻인지도 알지 못한다. 장자ㆍ노자는 서역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이것은 훔쳐 쓴 것임을 알 수 있고 또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자 같은 이는 옛책에 의하면 바로 주(周) 때의 주하장사(柱下藏史)로서 홀(笏)을 잡고, 『신(臣)』이라 일컬었으니 속인과 다름이 없는 것이다. 지금은 그를 가람과 같은 별관(別觀)에 모시고 천존노자(天尊老子)라 일컬으면서 온 몸에 금칠들 하고 있으니, 옛날 불경에서 부처를 천존(天尊)이라 부른 것을 여기서 또 훔쳐 쓴 것이다. 한위(漢魏) 이래로 부요(符姚)에 이르기까지 승려를 도사(道士)라 부른 것도 또한 훔쳐 쓰는 것이다. 도사란 옛날에는 제주(祭主)의 이름이었다. 도경에는 본래 금강사자(金剛師子)가 없는데 지금 도관(道觀)의 문 머리에 모두 불교를 본받아 이것을 두었으니, 이것은 금강사자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한지(漢地)에 언제 이것이 있었던가. 지금 갑자기 함부로 만들어 두고 불경을 본받는 것이다. 불경에는 부처와 마하가섭은 다 금색인데 이것은 경전에 의해 법대로 지은 것이다. 또 불경에는 수달이 동산을 사서 부처를 위해 가람을 지었는데 다 성교(聖敎)에 의한 것이다. 이리하여 차츰 시방에 두루 통한 것으로서, 세존이
도를 이루고 5백의 금강과 5백의 흰 코끼리와 5백의 사자를 감득(感得)했으므로, 이런 행위는 다 성교에 의해 만든 것이다.
또 만일 불경에 의하면 여기나 다른 세계의 모든 부처ㆍ보살ㆍ범왕(梵王)ㆍ제석 등이 나타낸 공양 도구와 장엄한 보물은 무량 무변하여 이루 다 적을 수 없이 경에 모두 있는데, 그대로 본뜨려면 만에 하나도 이룰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의 노자 5천 문(文) 두 권 안에 어디 일찍이 이런 장엄이 있었던가. 만일 다른 경전에 있다면 그것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불경의 것을 훔치고 고쳐 도경에 넣은 것이다. 또 부처가 말한 경과 같이 “이와 같이 나는 들었다”고 하여 그 말한 때와 말한 장소를 모두 본받았다. 그리고 경을 증명하여 믿음을 내게 한 것이니, 이것은 다음의 사실과 같다.
대당(大唐) 태종 문황제(太宗 文皇帝)와 지금의 황제는 조산대부 위위사승 상호군 이의표(朝散大夫 衛尉寺丞 上護軍 李義表)와 부사(副使)로서 전 융주 황수현령 왕현책(前融州 黃水縣令 王玄策) 등 22인을 서역(西域)에 전후로 세 번 보내고 다시 다른 사람을 보내었고 옛날의 제왕들도 전후로 사람을 보내었다. 그들은 다 거기 가서 세존이 불경을 연설한 때의 장소와 가람의 고적을 직접 보았고, 또 7불(佛) 이래의 온갖 징상(徵祥)과 그 영감과 변응(變應) 등은 모두 『서국지(西國志)』 60권 안에 다 있어서 현재에도 유전(流傳)하고 있는 것은 귀재(貴宰)들이 다 아는 것이다. 모르긴 모르지만 천존 노자가 그런 경서를 이미 내었던가. 그 때 그 경을 말하던 곳은 어디 있고 어떤 사람을 상대해 말했으며 그 말한 때와 말한 곳에서는 어떤 영험이 있었으며 어느 임금 어느 때에 그 경을 설명했던가. 만일 그 때 그 장소에서 조그만 영험이라도 있었다면 왜 5경(經)과 모든 사기(史記)에 실리지 않았던가.
다만 함께 있었다는 것을 구차하게 보존하고 많이 유행시킴으로써
우매한 세상을 속이려 했지만 무식한 무리는 그런 줄을 모르나 유식한 군자들은 안지가 이미 오래였으니, 이것은 실로 한(漢) 때의 황건(黃巾) 오두미(五斗米)의 비적들이 전후로 계속 일어나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열반경』과 『백유경(百喩經)』 등에서 “내가 열반한 뒤에 여러 외도들이 내 말을 훔쳐 제법 안에 두고 제것이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배치할 줄을 몰라 상하(上下)를 미혹시키고 어지럽힐 것이니 이것은 마치 산적이 왕의 보배옷을 훔쳐 얻었으나 그 입는 절차를 알지 못해 거꾸로 입는 것과 같고 또한 개를 훔치러 밤에 남의 집에 들어갔으나 개를 기르는 장소를 모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하신 것이다.
부처님이 이렇게 이미 예언하셨으니,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의 도사들이 불경을 훔쳐 제 법으로 만드는 것도 괴상할 것이 없으니 만일 불경을 훔치지 않으면 부처님은 거짓말을 하신 것이요 또 큰 성인이 아니신 것이다. 그러므로 오주(吳主) 손권(孫權)이 그 상서령 감택(尙書令 闞澤)에게 물었다.
“선도(仙道)에 영보(靈寶)의 법이 있다는데 그 가르침은 어떤 것인가.”
감택이 답하였다.
“대개 영보란 첫째 의거할 만한 씨족(氏族)이 없고, 둘째 도를 이룬 장소가 없습니다. 그 가르침은 산골짜기에서 나온 것으로서 사람의 알 바가 아니니, 그것은 바로 숨어사는 사람이 함부로 지껄인 것이요 성인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
손권은 그 현명한 대답을 찬탄하였다. 이른바 천존(天尊)이란 이름은 불경에서 나온 것이니, 우리 성인의 자취를 훔쳐 자기들 경전에 넣은 것이다. 왜냐 하면, 오경정사(5經正史)를 상고하면, 3황(皇) 이래로 모두 천존은 천상에 산다고 따로 말하지 않고, 다만 주공(周公)과 공자가 『예기(禮記)』를 짓고 시(詩)를 산정(刪定)하여 고쳤다고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5전(典)과 3분(墳)에는 대라(大羅)라는 말을 볼 수 없고 과거의 제왕에게서 교사(郊祀)라는 이름을 들을 수 없거늘, 어떻게 옥장(玉璋)을 잡고 황갈(黃褐)을 입고 흰 머리털을 늘어뜨리고 금관(金冠)을 쓰고 는 천존이라 따로 불리면서 구화전(九華殿)에 단정히 앉아 홀로 대도(大道)라 일컬으며 칠영궁(7英宮)을 다스릴 수 있겠는가. 비록 도교가 있어 천존을 말하고 제자(諸子)들이
영보(靈寶)를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이것은 다 길거리의 뜬소문인 것으로 의거할 것이 못 되는 것이며 길거리의 글이요, 국사(國史)에 관계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또 재(齋)의 의식을 고쳐 만든 사적도 찾아 볼 수 있다. 그 모두가 금과 은을 두루 벌려 놓고 화려한 비단을 많이 둘러쳤으니, 이 모두가 3장(張)의 궤변이요 수정(修靜)의 망언이니, 이 두류(逗留)를 물리쳐 부순 것은 저 임(琳)의 논(論)과 같다. 그 논에서, “또 도사란 이름은 노자의 가르침에는 전에 없었고 하상(河上)이라는 말은 유교(儒敎)에서 말하지 않는다. 왜냐 하면, 『요서(姚書)』에 ‘한위(漢魏)에서 부요(符姚)에 이르기까지는 다 승려를 도사라 불렀는데 위(魏)의 태무(太武) 때에 구겸지(寇謙之)가 처음으로 도사라는 이름을 훔쳐 가만히 제주(祭酒)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고 했다”고 했으니, 이 어찌 임(琳)이 억측으로 판단한 것이겠는가. 바로 역사책에 분명히 있는 것이다.
또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에서는 “문제전(文帝傳)”과 반악(潘岳)의 『관중기(關中記)』와 혜강(嵆康)의 『황보시고사전(皇甫諡高士傳)』 및 『방부로(訪父老)』 등에는 다 하상공(河上公)이 초막을 짓고 신통변화를 나타낸 일도 장소도 없다”고 하였으니, 그에 대한 모든 것은 다 허망한 속임으로서 사실이 아니며 거짓으로 꾸며 만든 것이 명백하거늘 어찌 거기에 활동과 이룸이 있겠는가. 지금의 주상(主上)께서는 수공(垂拱)하여 도를 물으시며 조정에 앉으실 때 9족(族)이 이미 다 친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시니 실로 3장(張)의 더러운 꾀를 물리치고 5천의 묘한 법문을 밝히실 것이다.
또 상고하면 후한(後漢) 명제(明帝)의 영평(永平) 14년에 도사 저선신(褚善信) 등 690인은 불교가 낙양(洛陽)에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그 힘을 겨루기 위해 도가(道家)의 경전 모두 37부 744권을 가져갔는데, 그 중에서 59권은 바로 도경(道經)이요 그 나머지 235권은 제자(諸子)의 글이었다.
또 상고하면 진(晋)의 갈홍(葛弘)의 『신선전(神仙傳)』에서는 말하기를 “노교(老敎)가 세상을 구제하고 재앙을 소멸시키는 법은 무릇 9백 30권과 부서(符書)
70권 등 모두 1천권이다”고 했다. 또 송(宋)의 태시(泰始) 7년에 도사 육수정(陸修靜)은 명제(明帝)에게 답하기를 “도가의 경서와 약방(藥方)ㆍ부도(符圖) 등은 모두 천 2백 28권인데, 1,090권은 이미 이 세상에 유행하고 있으며 138권은 아직 천궁(天宮)에 있다고 합니다”고 했다. 지금의 『현도경목(玄都經目)』을 상고하면 거기에는 “송(宋)의 육수정(陸修靜)이 왕에게 올린 목록에 의하면 ‘지금 6,363권이 있다’ 하고, ‘2,040권은 그 책을 볼 수 있으나 4,323권은 다 볼 수 없다’고 했다” 하였으니, 이로써 그 사적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 궤변과 망언의 유래는 국사(國史)를 학대함에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소온(簫溫) 등의 말에 의하면 오직 도덕(道德) 2편(篇)뿐이요, 만일 한제(漢帝)의 교량(校量)을 취하면 7백여 권이 있어야 할 것이며, 갈홍(葛弘)의 신선전(神仙傳)에 의하면 겨우 천권이 있고, 육수정이 올린 목록에 따르면 앞의 것보다 90권이 더 많고 또 현도경목(玄都經目)에 의하면 더욱 더 많아진다. 이미 앞과 뒤가 같지 않다면 그 허망함은 분명한 것이다.
거기에다 책의 권수와 장편(章篇)의 수를 더 보태고, 불경에 의해 머리와 꼬리를 바꾸어, 혹은 명산(名山)이 스스로 솟아났다 하고 때로는 선동(仙洞)이 날아왔다 하지만, 어째서 황령(黃領)만이 홀로 알고 뛰어난 현인(賢人)들은 보지 못했는가. 어떤 역사책에도 기록이 없지 않는가. 그러면 묻노니, 지금 도사들이 추측하는 뒤에 나올 경전은, 그것을 노자가 따로 연설한 것이라 할 것인가, 천존이 다시 설명한 것이라 할 것인가. 비록 그들이 말했다 하더라도 으레 그 말한 때와 장소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해, 어느 달이라 할 것인가. 만일 그런 증거라도 있다면 혹 유행할 수 있겠지만 만일 거짓말이라면 그것은 마땅히 불살라버려야 할 것이다.
더구나 지금 명조(明朝)의 어우(御宇)는 백왕(百王)이 계승할 것이요 성상(聖上)의 임헌(臨軒)은 천년을 기약할 것이다. 그리하여
한창 5교(敎)를 널리 펴려고 요사스런 책은 모두 없애며 9주(疇)를 거듭 이어받아 요도(要道)의 훈계를 크게 드날리려 하시거늘, 어찌 감히 기린과 노루로 성상(聖上)을 정탐하며 사슴과 말로 조정을 기롱하겠는가. 다만 황건(黃巾)이 그 참과 거짓을 혼동하고 소견이 좁은 도사들이 옳고 그름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상황을 진인(秦人)에게 빌어오고 그것을 노속(魯俗)에 비유하고 있으니, 건곤의 용마(龍馬)를 본받았거늘 어찌 천지를 날아 올라 넘겠는가. 이치가 실로 그러하지 않거늘 어떻게 꾸지람을 감당할 수 있겠는가.
요혹(妖惑)으로 대중을 어지럽힘
나는 들으니, 소리가 고르면 메아리가 순(順)하고 형체가 곧으면 그림자가 단정하다고 하였다. 불을 일으켜 얼음을 얻고 콩을 심어 보리를 얻음을 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소장(蘇張)이 귀곡(鬼谷)에서 만남은 부사(浮詐)에 처하는 처음이요, 안민(顔閔)이 공문(孔門)에서 만남은 덕행(德行)을 나타내는 처음이다. 그러므로 2편(篇)의 교화를 배움은 묘한 무위(無爲)를 구함이요, 3장(張)의 풍습을 행함은 난적(亂賊)의 괴수가 되기를 꾀함임을 알 수 있다.
무엇 때문인가. 후한(後漢)의 순제(順帝) 때에 패(沛)땅의 사람 장릉(張陵)은 촉토(蜀土)에서 나그네로 있다가 고로(古老)들이 다음과 같이 전하는 말을 들었다.
“옛날 한고조(漢高祖)는 24기(氣)에 맞추어 24단(壇)에 제사함으로써 마침내 천하의 왕이 되었다.”
장릉은 자신의 덕은 생각하지 않고 드디어 이 꾀를 꾸며 소를 죽여 24소(所)에 제사를 지내고, 거기 토단(土壇)을 쌓고 초막을 짓고 24치(治)라 일컬으니, 치관(治舘)이 이로써 처음 일어났다. 그 23소(所)는 촉지(蜀地)에 있고 윤희(尹喜)의 1소(所)는 함양(咸陽)에 있었다. 이에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유인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불러 모다 조세(租稅)를 거두면서 반역의 단서를 꾀하였다. 그러다가 마침 독사에 물리어 반역을 일으키지 못하고 말았다.
또 장릉의 손자 장로(長魯)는 그 조부의 술수를 본받아 뒤에 한중(漢中)에서 사군(師君)이라 자칭하다가, 화란(禍亂)이 4방에서 일어나 조공(曹公)에게 멸망당했다.
또 중평(中平) 원년에 거록(鉅鹿) 사람 장각(張角)은 황천부사(黃天部師)라 자칭하고
36명의 장수를 두어 모두 황건(黃巾)을 쓰게 하였으며, 멀리 장로(張魯)와 상응하여 10만 군중을 거느리고 업성(鄴城)을 불살랐다. 한(漢)나라에서는 하남윤(河南尹) 하진(何進)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해 멸망시켰다.
또 진(晋)의 무제(武帝) 함녕(咸寧) 2년에 도사 진서(陳瑞)는 좌도(左道)로 대중을 유인하여 천사(天師)라 자칭하니, 따르는 무리가 수천명이었다. 그러다가 여러 해 뒤에는 익주 자사(益州 刺史) 왕준(王濬)에게 피살되었다.
또 진(晋)의 문제(文帝) 태화(太和) 2년에 팽성(彭城)의 도사 노송(盧悚)은 대도(大道)의 제주(祭酒)라 자칭하고 사술로 대중을 유혹하여 많은 무리를 모으고는 새벽에 광한문(廣漢門)을 치면서 “해서공(海西公)을 맞이하라”고 하였다. 그 때 전중(殿中)의 환비(桓秘) 등은 그 내용을 알고 나와 싸웠는데 그는 베임을 당하여 죽었다.
또 양(梁)의 무제(武帝) 대동(大同) 5년에 도사 원감긍(袁敢衿)은 요사스런 말로 대중을 유혹하여 금보강(禁步岡)을 가다가 관군(官軍)에게 습격을 당해 베임을 당하여 죽었다.
또 수(隋)의 문제(文帝) 개황(開皇) 10년에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의 도사 포동(蒲童)은 좌동(左童) 2명과 함께 붕계관(崩溪館)에 있으면서 성인(聖人)이라 자처하고 백성들을 미혹시키되, 지붕까지 평상을 포개 놓고 그 위에 앉아 “15명의 동녀(童女)는 내 법을 받을 만하다” 하고, 동녀들을 평상에 불러 올려 포장을 두루 치고 그 안에서 간음했다. 이렇게 여러 날을 지내다가 사실이 발각되어 이내 도망갔다.
또 개황(開皇) 18년에 익주(益州)의 도사 한랑(韓朗)과 금주(錦州) 도사 황유림(黃儒林)은 촉왕(蜀王)을 부추겨 반역을 일으키게 하면서 “큰 일을 세우려면 반드시 훌륭한 인연을 의지해야 합니다”고 했다. 그리고 드디어 촉왕으로 하여금 나라의 창고를 다 기우려 천척의 도상(道像)을 만들고 천인의 큰 재실을 세우게 한 두에 선제(先帝)의 상을 그리다가, 도리어 머리와 손이 묶여 주문(呪文)을 외운다는 것이 잠꼬대와 같았다. 하북공(河北公) 조중경(趙仲卿)이 이것을 조사하여 사실을 알고 경성(京省)으로 압송하여 죄를 다스렸으며, 그는 시장에서 처형되었다.
근자에
당(唐)의 무덕(武德) 3년에 면주(綿州) 창륭현(昌隆縣) 사람 이망(李望)은 전에 황로(黃老)를 섬겨 항상 요사(妖邪)를 부렸다. 지난 대업(大業) 말년에 도사 포자진(蒲子眞)이 도술을 조금 익혔다가, 붙들려 동경(東京)으로 와서 낙양(洛陽)에서 장사 지냈는데, 이망이 거짓으로 “자진이 근자에 돌아왔다”고 했다. 또 그 현(縣)의 어떤 산 곁에 석실(石室)이 있는데 바위굴 안이 어두워 아무도 감히 엿보지 못했다. 이망은 그 석실을 기대어 요사를 부렸는데, 밝은 데서 목을 길게 배고 큰 소리로 무슨 기별을 받았다 하고는, 어둠 속에 들어가서는 숨을 죽이고 낮은 소리로 거짓으로 화복(禍福)을 말하였다. 그리고 도사들을 시켜 이 소문을 퍼뜨려 현(縣)에서 주(州)까지 퍼졌다. 관인(官人)들도 처음에 조사하다가 모두 그대로 믿었다. 그 뒤에 자사(刺史) 계대례(季大禮)가 “이 일은 중대한 것이니, 반드시 나라에 아뢰어야 하지만, 우선 직접 조사해서 시비를 정하리라” 하고, 드디어 온 고을의 관리와 도사 등 백여인과 함께 그 굴에 가서 재배하고 기일을 청하였다. 이망은 당장 답하기를 “들을 사람은 마음을 기우려라”라고 했다. 그러나 오직 파서현령(巴西縣令) 낙세질(樂世質)만은 인정의 기미를 깊이 통달하였으므로 그의 거짓임을 알고 어둠 속에 들어가 가만히 지키다가, 이망이 소리를 낮추는 것을 보고 곧 꾸짖자 이망은 자백하고 항복하였다. 그 고을의 감옥에 수감하고 죄를 주려 하였는데 며칠을 지내지 못하고 그는 약을 먹고 자살했다.
근자인 정관(貞觀) 13년에 서경(西京)의 서화관(西華觀)의 도사 진영회(秦英會)와 성관(聖觀)의 도사 위령부(韋靈符)와 환속(還俗)한 도사 주영감(朱靈感)은 모두 『장초(章醮)』를 조금 알았으므로 왕은 그들을 시켜 동궁(東宮)을 섬기게 했다. 그들은 동궁을 미혹시키고 어지럽혀 큰 일을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고, 모두 베임을 당하여 죽고, 그 집과 재물과 처자들은 다 관(官)에 몰수당했다.
또 용삭(龍朔) 3년에 서화관(西華觀)의 도사 곽행진(郭行眞)은 집안이 비천하고 또 원래 가난하였다. 그러나
『장초(章醮)』를 조금 알았으므로 외람되게 왕을 모시게 되었다. 왕명으로 용심산(龍尋山)에 약을 캐러 갔을 때 천위(天威)를 빙자하여 백성을 혹란(惑亂)시켜 재물을 널리 갈취하는 등 그 간사한 꾀가 극심했다.
또 경성(京城)의 도사들은 불경을 뒤섞어 도경(道經)에 훔쳐 넣었다. 왕은 그것을 보고 거짓임을 아시고, 법관을 시켜 조사할 때 고초가 심하자 바로 자백했다. 왕의 은혜로 죽음은 용서하고 먼 고을로 귀양 보내었다. 그의 소유인 처자와 재산은 다 관에서 몰수했다. 이로써 알 수 있으나, 그 습성이 바르지 못하면 재앙이 되풀이 되며, 좌도(左道)의 더러운 풍속에서 이런 욕됨이 일어나는 것이다.
조칙(詔勅)
도사(道士) 조산대부(朝散大夫) 기도위(騎都尉) 곽행진(郭行眞)은 임품과 학식이 취할 것이 없고 도와 기예도 보잘것이 없으나, 의약을 조금 알고 장초(章醮)를 조금 익혀서 태자 홍(弘)의 병을 치료해 조금 나았다. 그러므로 그 공로로 나라에서 영화스러운 벼슬을 주고 또 전에 구사(驅使)였던 반연으로 함부로 화가 온다 위협하였다. 또 고관들과 사귀고 법관에게 부탁하여 오로지 사기를 행하면서 남의 재물을 갈취하여 사람을 시켜 공덕을 짓게 하였으나 남모르는 도적질이 더욱 많다.
붉은 색과 자주색도 구별하지 못하면서 지극한 교리를 거짓으로 연설하고 콩과 보리도 분간하지 못하면서 금하는 글을 가만히 읽으며 한갖 종과 첩만을 알고 집 치장만을 오로지 힘쓰니, 천 길의 신령스런 시내물인들 어찌 그 더러운 성질을 씻을 수 있으며 9액(液)의 신단(神丹)인들 어찌 그 더러운 마음을 단련시킬 수 있겠는가. 머리털을 뽑아도 그 허물을 다 셀 수 없으니, 대나무를 끊은들 어찌 그 죄를 다 적을 수 있겠는가. 이런 허물을 다 이야기하면 그 벌을 따라 죽여도 마땅하겠지만 도문(道門)에 발을 들여 놓았기 때문에 인정으로 차마 할 수 없어, 부득이 도문에서 제명하고 애주(愛州)로 아주 귀양보내야 한다. 그러므로, 그에 따라 영장 강령(令狀 綱領)을 보내어 저리로 압송하는 것이다. 법관은 조사하여 고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그가 사사로이 기른 종들과 논ㆍ집ㆍ맷돌ㆍ수레ㆍ소ㆍ말 등은 다 관에서 몰수해야 할 것이다.
용삭(龍朔) 3년 12월 14일 선고함.
생각하면 적은 황건(黃巾)을 쓰고 거록(鉅鹿)에서 일어났고 귀서(鬼書)와 단간(丹簡)은 평양(平壤)에서 출발했다. 그런데 그 복장은 운라(雲羅)를 본떴다 하지만, 이 말은 너무나 차이가 있고 의상은 우곡(雨穀)과 같다 하지만 이것은 인정에 가깝지 않다. 학과 용을 타고 어찌 두건을 쓰고 베옷을 입겠으며 난새와 봉황새를 몰고 어찌 머리에 가죽갓을 쓰겠는가. 그러므로 백석(白石)ㆍ적속(赤松)의 무리도 다 귀신의 졸개가 아니다.
또 이담(李聃)이 주(周)를 섬길 때는 그 복장은 유묵(儒墨)과 같았는데 공기(公旗)가 한(漢)을 꾀하던 날에 비로소 황건(黃巾)이 있었다. 그 조습(祖習)과 같다면 백양(伯陽) 도사도 다 조배(朝拜)해야 마땅한데 만일 종기(宗旗)로 다스린다면 이 폐단은 다 멸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교에서 부처를 공경함
自述
이상에 열거한 것은 다 전적(典籍)에서 인용한 것이어서 사정(邪正)이 분명하고 승침(昇沈)이 각기 다른 것이니, 어찌 횃불이 해와 달의 광명과 다툴 수 있으며 가까운 허공의 티끌이 태산의 높이와 겨룰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불법은 매우 심원하여 범임이 헤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승중(僧衆)은 매우 고상하여 황관(黃官)의 짝이 아님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개 출가란, 안으로는 친족의 애정을 하직하고 밖으로는 벼슬의 영화를 버리며, 오로지 위없는 보리를 구하고 생사의 고해를 벗어나기 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조종(朝宗)의 복장을 버리고 복전(福田)의 옷을 입고는 도를 행함으로써 4은(恩)에 보답하고 덕을 그 대의(大意)이다. 진실로 알 수 있나니, 3보(寶)의 무거운 자리가 어찌 공자ㆍ노자의 두 가르침과 같겠는가.
그러므로 공자ㆍ노자의 경서와 한위(漢魏) 이래의 안팎의 사적(史籍)을 상고하고, 외도의 경전 가운데서 부처와 승(僧)을 존경한 글을 대략 인용하여 이하에 열거하는 것이다. 이미 경전을 공경하는 터이니, 법에 의하고 부처를 따라 사우(邪愚)를 항복받고 정전(正典)을 받들기 바라는 것이다.
[대략 22경을 인용하여 3보의 글을 공경하게 함]
『도사법륜경(道士法輪經)』에 의하면 천존(天尊)은 다음 게송으로 도사를 경계했다.
불도(佛圖)를 보거들랑
한없는 생각으로
일체가 다 모두
법문(法門)에 들기 원하여라.
사문을 보거들랑
한없는 생각으로
빨리 출가하여
불도 배우기 원하여라.
『태상청정소마보진안지지혜본원대계상품경(太上淸淨消魔寶眞安志智慧本願大戒上品經)』의 49원(願)에 의하면, 천존은 다음과 같은 원문(願文)을 말하였다.
“사미니를 보거든 일체가 법도(法度)를 밝게 알고 부처처럼 도를 얻기 원하여라.”
『노자승현경(老子昇玄經)』에서 말하였다.
“천존은 도릉(道陵)에게 ‘동방으로 가서 법의 가르침을 받으라’고 했다.
『승현경(昇玄經)』에서는 또 말하였다.
“동방의 여래가 선승 대사(善勝大士)를 보내어 태상(太上)에게 가서 말하기를 ‘여래는 노자가 장릉(長陵)을 위해 설법한다는 말을 듣고 짐짓 나를 보내어 와서 보는 것이다’하자 했다. 노자는 장릉에게 ‘그대는 나를 따라 부처에게로 가자. 나는 그대로 하여금 일찍이 보지 못한 것을 보고 일찍이 듣지 못한 것을 듣게 하리라’ 했다. 장릉은 곧 대사에게 예배하고 그를 따라 부처에게 가서 설법을 들었다.”
『도사장릉별전(道士張陵別傳)』에서 말하였다.
“장릉(張陵)은 곡명산(鵠鳴山)에 있으면서 금상(金像)에 공양하고 불경을 읽었다.”
『노자서승경(老子西昇經)』에서 말하였다.
“내 스승님은 천축(天竺)에서 교화하시다가 열반에 드셨다.”
또 부자(符子)는 말하였다.
『지혜관신대계경(智慧觀身大戒經)』에서 말하였다.
“도를 배우는 사람은 대범유영궁(大梵流影宮)을 돌면서 예배해야 한다.”
『승현경(昇玄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사문이 와서 경을 들으려 하거든 그 공주(供主)를 관찰하여 음식의 비용을 계산하거나 경을 듣지 못하게 하지 말며, 항상 그를 윗자리에 앉히고 도사와 경사(經師)는 그 아랫자리에 앉히라.”
『승현경』에서 또 말하였다.
“도사가 재공(齋供)을 베풀었을 때 만일 비구가 오거든 그를 상좌에 앉힌 뒤에 잘 공양하고, 도사와 경사는 하좌에 있어야 한다. 또 비구니가 법을 들으러 오거든 으슥한 자리로 인도해 상좌에 앉힌 뒤에 공주(供主)는 그에게 법다이 공양하고 그를 거절하지 말라.”
『화호경(化胡經)』에서 천존은 부처를 공경하는 다음 게송을 말하였다.
“우담발꽃을 꺾기 원하고
전단향을 피우기 원하며
천 부처께 공양하고
정광 부처께 머리 조아려 예배하리라.
부처는 어이 그리 늦게 나시고
열반은 어찌 그리 빠르신가.
석가모니를 뵈옵지 못한 것
마음 속에 언제나 괴로워하네.“
『영보소마안지경(靈寶消魔安志經)』에서 천존은 다음 게송을 외웠다.
도에는 재(齋)가 제일이니
부지런히 행하면 부처 이루리.
[도사신개본(道士新改本)에는 “부지런히 행하면 금궐(金厥)에 오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큰 법의 다리를 놓아
모든 사람을 다 건네주어라.
『노자대권보살경(老子大權菩薩經)』에서 말하였다.
“노자는 바로 가섭 보살로서 진단(震旦)에서 교화했다.”
『영법륜경(靈法輪經)』에서 말하였다.
“갈선공(葛仙公)이 처음 태어난지 며칠 안되어 어떤 외국의 사문이 갈선공을 보고는 곧 예배하고 안고는 선공의 부모에게 말하였다.
‘이 아이는 원래 서방(西方)의 선견(善見) 보살인데 지금 한(漢)나라 땅에 와서 중생을 교화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찍부터 선도(仙道)에 들어가 한낮에 하늘로 날아 올라갈 것입니다.’
또 선공은 그 자제에게 말하였다.
‘내 스승님의 성은 파열종이요 이름은 유나하이니, 서역(西域) 사람이다.’”
『선인청문중성난경(仙人請問衆聖難經)』에서 갈선공(葛仙公)이 그 제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옛날 석도미(釋道微)ㆍ축법개(竺法開)ㆍ장태(張太)ㆍ정사원(鄭思遠) 등 4인과 함께 동시에 발원하였는데, 도미ㆍ법개 2인은 사문이 되기를 발원하였고 장태와 정사원은 도사가 되기를 발원했었다.”
『선공기거주(仙公起居注)』에서 말하였다.
“그는 그 때 갈상서(葛尙書)의 집에 났었다. 상서는 나이 80이 넘어 비로소 한 아들을 두었다. 그 때 어떤 사문이 천축의 승려라고 자칭하면서 시장에서 향을 많이 사고 있었다. 사람들이 괴이히 여겨 묻자 그 사문은 ‘나는 어제밤 꿈에 선사(善思) 보살이 갈상서의 집에 하생(下生)하는 것을 보았다. 나는 이것을 가지고 가서 그를 목욕시킬 것이다’라고 했다. 선공이 태어날 대가 되자, 그 사문이 와서 향을 피우고 아이를 오른쪽으로 일곱 번 돌고는 예배공경하고 목욕시켰다.”
『선공청문상경(仙公請問上經)』에서 말하였다.
“사문과 도사에게 ‘부처에게 지극히 하고 승려를 공경하라’고 했다.”
『상품대계경(上品大戒經)』 교량공덕품(校量功德品)에서 말하였다.
“불탑(佛塔)에 보시하면 천배의 과보를 얻고 사문에게 보시하면 백배의 과보를 얻는다.”
『승현내교경(昇玄內敎經)』에서 말하였다.
“혹 어떤 사람은 평상시에는 한 달도 안 되어 복을 지으면서 사문이나 도사가 설법하고 권선(勸善)하면 끝내 따를 뜻이 없다.”
도사 도은거(陶隱居)는 예불문(禮佛文) 1권을 지었다.
『지혜본원계상품경(智慧本願戒上品經)』에서 말하였다.
“날마다 부처와 승려에게 점심을 보시하고 절에 1전 이상을 보시하면 다
2만 4천배의 과보를 얻는다. 공덕이 많고 과보도 많으면 나는 곳마다 현명하고 진기한 놀이개가 끊이지 않으며 7대가 다 무량한 부처 나라에 들어간다.”
『선공청문경(仙公請問經)』에서 말하였다.
“또 범인이 이 공덕을 행하면서 사문이나 도사나 대부(大傅)가 되기를 원하면 그는 후생에 사문이 되어 불법을 크게 배워 대중의 법사가 될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재(齋)를 올릴 때에 사문과 도사를 청해 독경하는 것을 보고 비웃으면서 ‘저 사람은 허공을 향해 경을 외우니 무엇을 바라서인가. 빈 배로 하루에 한 번 먹으니 죄인일 뿐이다’고 한다. 도사는 인자한 마음으로 그에게 타이르지만 그는 여전히 그런 생각을 버리지 않다가, 죽어서는 지옥에 들어가 5고(苦)에 지독히 고통을 당한다.
『선공청문경(仙公請問經)』에서 말하였다.
“5경(經)은 유속(儒俗)들의 업이나 불도는 모두가 그 가르침을 찬탄하니 큰 스승으로 삼는 것이 좋다.”
『태상영보진일권계법륜묘경(太上靈寶眞一勸誡法輪妙經)』에서 말하였다.
“나는 모든 하늘을 두루 관찰하면서 무수한 겁(劫) 동안 도사와 백성의 남녀들이 이미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얻었음을 보았고, 고선(高仙) 진인(眞人)과 자연(自然)의 시방의 부처가 다 전생에 부지런히 도를 구해 닦았음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법륜묘경(法輪妙經)』에서 말하였다.
“대개 윤회(輪廻)를 없애지 못하고 다시 인간에 태어날 때, 큰 지혜가 밝은 사람은 무수한 겁 동안 배움이 이미 이루어진 사람이요, 진인(眞人)ㆍ고선(高仙)과 자연의 시방 부처는 모두 행업(行業)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이상에 열거한 도경이 다 참인지 거짓인지 알 수 없다. 만일 그것이 진경(眞經)이라면 요즘의 도사나 여관(女官)들이 3보에 대해 예배하지 않는 것은 천존 노자 스승의 가르침을 어기는 것이니, 이런 사견(邪見)을 지닌 사람들은 참 제자가 아니요 무식한 무리와 같거늘 어찌 스승으로 공경할 수 있겠는가. 또 만일 이것이 모두 위경(僞經)이라면 이런 도경은 다 없애야 할 것이니, 이리 저리 어기고 바꾸어 마침내 어지러운 풍속을 만들기 때문이다.]
사(邪)를 버리고 정(正)으로 돌아감
양(梁)나라 고조(高祖) 무황제(武皇帝)는 나이 38세에 제위에 올랐다. 49년 동안 제위에 있을 때는 비록 억조의 정무(政務)가 많더라도 손에 책을 놓지 않고 내경(內經)과 외전(外典)을 모두 마음에 두어 다 훈해(訓解)한 것이 수천여 권이었다. 그리고 또 검약하고 절제하여 비단옷을 입지 않고 한적한 곳에서 밤낮으로 게으르지 않았으며, 다만 베옷과 왕골자리와 짚신과 갈포 두건 뿐이었으니, 처음 제위에 오르자 곧 이런 것을 다 준비했었다. 하루에 한 끼만 먹으면서 맵고 비린 것은 먹지 않았으니 제왕이 있은 때로부터 이런 일은 드물었다.
전에는 노자를 섬겨 부도(符圖)를 숭상했으나 그 근원을 캐어 보고는 망령된 지음임을 알았다. 그리하여 황제는 곧 신필(神筆)을 움직여 조서(詔書)를 내리니, 다음과 같이 도교를 버리는 글이었다.
도교를 버리는 글.
“천감(天鑒) 3년 4월 8일에 양국(梁國)의 황제(皇帝) 난릉 소연(蘭陵簫衍)은 시방의 모든 부처님과 시방의 존귀한 법과 시방의 거룩한 승가에 머리를 조아리고 합장하여 예배하나이다. 경전에 보면 ‘보리심을 내는 것이 곧 부처의 마음이며 그 이외의 모든 선(善)은 비유할 수 없으니, 중생들로 하여금 3계(界)의 괴로움의 문을 나와 무위(無爲)의 뛰어난 길에 들어가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여래는 번뇌가 없어지고 지혜가 응축되어 깨달음을 이루시었으며, 지극한 도는 세상을 통달하고 덕은 원만하여 성인이 되셨습니다. 슬기의 횃불을 냄으로써 미혹함을 비추고 법의 흐름을 거울삼음으로써 더러움을 씻으시며, 상서로운 자취를 하늘 복판에 열고 신령스런 위의를 형상 밖에 빛내십니다. 모든 생물을 욕심의 바다에서 건지고 일체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며 상락(常樂)의 높은 산에 오르고 애하(愛河)의 깊은 바닥에서 나오시며, 그 말은 四구(句)를 나누고 그 말은 백비(百非)를 끊었습니다.
사바 세계에 자취를 감응하여 왕궁에서 형상을 나타내시니, 3계(界)를 걸으면서 홀로 높았고 대천세계에 빛을 흐르게 하십니다. 다만 세상 사람의 기심(機心)이 천박하여 염증을 내기 좋아하기에, 드디어 고요히 원상(圓常)을 설명하고 다시 그 빛을 학수(鶴樹)에서 거두었습니다. 아사세왕은 죄를 멸하고 바수반두는 재앙을 없앴으니,
대성(大聖)이신 법왕(法王)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누가 그 고통에서 구제해 주었겠습니까. 계시던 자취는 숨었다 하더라도 그 도에는 손상이 없습니다.
제자는 일찍이 방황하여 노자에 빠져 그를 섬기면서 역대로 계속해 이 삿된 법에 물들었다가, 과거의 인(因)이 잘 피어나 아득함을 버리고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이제 옛 의사를 버리고 정각(正覺)께 의지하오니, 원컨대 제자로 하여금 미래 세상에서는 동남(童男)으로 출가하여 경의 가르침을 널리 펴서 중생을 교화하여 다 함께 성불하게 하소서. 차라리 정법(正法) 안에 있으면서 길이 악도에 빠질지언정, 노자의 교리에 의하여 잠깐 동안 천상에 나기를 원하지 않사오며, 대승의 마음을 몸소 얻고 2승(乘)의 생각을 버리겠습니다. 원하옵나니, 모든 부처님은 증명하시고 모든 보살네는 거두어 주소서.
제자 소연은 합장 예배하나이다.’”
그 때 황제는 도인과 속인 2만여인과 함께 중운전(重雲殿)의 중각(重閣) 위에서 이 글을 손수 쓰시고 보리심을 내셨다.
4월 11일에 다시 문하(門下)들에게 조서를 내리셨다.
“대경(大經)에, 도에 96종이 있다. 하였으나 오직 불도 하나만이 정도(正道)요 그 이외의 95종은 다 사도(邪道)이니라.
짐(朕)은 사도인 외도(外道)를 버리고 정도인 부처님을 섬기리라. 만일 공경(公卿)으로서 이 서원에 참여하는 자가 있으면 각각 보리심을 내어야 한다. 노자ㆍ주자ㆍ공자 등은 비록 여래의 제자이나 교화의 자취가 이미 잘못 되었으므로 다만 세간의 선(善)에 그칠 뿐이요 범부를 고쳐 성인으로 만들지는 못한다. 공경ㆍ백관ㆍ왕후ㆍ종족들은 마땅히 거짓을 뒤집어 참으로 나아가고 사(邪)를 버리어 정으로 들어가야 하느니라. 그러므로 『성실론(成實論)』에서 말하기를 ‘만일 외도를 섬기는 마음이 무겁고 불법을 섬기는 마음이 가벼우면 그것은 곧 사견(邪見)이요 만일 마음이 평등하면 그것은 곧 무기성(無記性)이니 선악에 해당 되지 않는다’고 하였다. 만일 부처님을 섬기는 마음이 강하고 노자를 섬기는 마음이 약하면 이것은 곧 청신(淸信)이다. 이른바 청신에서
청(淸)이란 안팎이 다 깨끗해 온갖 더러운 의혹과 얽매임이 모두 없어진 것이요, 신(信)이란 정(正)을 믿고 사(邪)를 믿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청신제자라 하는 것이요 그 이외의 믿음은 다 사신(邪信)이므로 청신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니, 문하들은 빨리 시행할 지니라.”
4월 17일에 시중 안전장군 단양 윤소릉왕(侍中安前將軍 丹陽尹小陵王)은 황제께 글을 올렸다.
“신(臣) 윤(綸)은 들었습니다. 여래의 장엄하신 상호는 외외(巍巍)하여 유정천(有頂天)에 이르고, 미묘한 색신(色身)은 탕탕하여 무제(無際)에 나타납니다. 금륜(金輪)을 빌어 세상을 계도하고 은속(銀粟)에 의탁하여 범정(凡情)에 응합니다. 반야의 예리한 칼을 갈아 열반의 묘한 열매를 거두시며 생사의 고해(苦海)에 떠서 상락(常樂)의 저쪽 언덕으로 건너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자비의 구름을 드리워 감로(甘露)의 비를 내리시니, 7처(處)의 8회(會)에 교화의 이치가 무궁하며, 4제(諦)와 5시(五時)에 이익의 방법이 무진하여 모두 물은 맑고 해는 밝으며 안개는 흩어지고 구름은 걷히었습니다. 횃불의 빛나는 빛에 티끌의 더위는 스스로 잠잠해지니 세속에 들어가 어리석음을 교화하고 세간을 벗어나 이 진여(眞如)에 계합(契合)했다 할 수 있습니다. 빽빽한 숲의 그릇된 길로 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법문(法門)을 우러러 게으름이 없게 하고, 간절한 애욕에 귀먹고 눈먼 사람으로 하여금 깊은 이치를 사모하여 돌아올 줄 알게 하셨습니다.
도수(道樹)는 가비라에서 비롯하였고 덕의 음성은 경락(京洛)에서 무성하였으며, 항성(恒星)은 나타나지 않았으나 주(周)나라에서 조짐이 싹튼 것을 보았고, 보름달의 모습이 원만하매 한(漢)나라에서 밤의 꿈에 느꼈으니 이로써 5법(法)이 전해지고 온갖 덕이 비로소 조짐을 보였습니다. 화속(華俗)이 잠겼기 때문에 고풍(高風)을 다투어 일으키니, 이 3명(明)을 빌어 아득한 길의 잘못을 비추고 이 7각(覺)을 의지해 긴 밤의 고통을 제거했습니다.
마침 만나 뵈온 황제 보살께서는 하늘에 응하고 세상을 어거하시며 부의(負扆)하시고 백성에게 나아가실 때는 우주의 광명을 머금고 바다 끝까지 비추시며, 걸림이 없는 변재로 백성들을 대하시고
본원(本願)의 힘으로 중생을 거두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능히 방법을 따라 약을 주고 방편을 보여 정(正)을 나타내시며 일승(一乘)의 뜻을 숭상하고 10지(地)의 터를 넓히십니다.
그러므로 만방(萬邦)이 함께 돌아와 바른 의식을 다 받고, 이승 저승의 신령과 귀신이 모두 구제를 받습니다. 사람들은 등각(等覺)의 서원을 일으키고 만물은 보리의 마음을 내어 모두 바른 경지로 돌아가기를 힘써 바라고 근원의 세계로 돌아감을 기뻐합니다. 다 함께 자비를 보존하여 모두 인욕(忍辱)을 닦으니, 이른바 보호와 이익과 다리와 나룻배 등이 그것입니다. 도의 광명이 이미 퍼졌슴에 백성들도 또한 그대로 됩니다.
이에 응진(應眞)은 지팡이를 날려 허공에 올라 그림자를 이어 삿된 외도를 부수고 정도를 굳게 가지시니, 가람과 정사(精舍)의 보찰(寶刹)들은 서로 바라보며 강회(講會)와 전경(傳經)의 덕음(德音)이 귀에 가득합니다. 신(臣)은 전에는 이치의 근원을 알지 못하고 외도를 섬겼사온데, 이것은 마치 단맛나는 과일을 얻기 위하여 도리어 쓴 종자를 심은 것과 같고 갈증을 덜기 위하여 짠물을 마신 것과 같습니다. 지금은 미혹된 방향을 알아차려 돌아갈 곳을 조금 알고는 보살의 대계(大戒)를 받고 몸과 마음을 경계하려 합니다. 그리고 노자의 그릇된 가르침을 버리고 법류(法流)의 참 가르침에 들어가겠사오니, 엎드려 원하옵건대 천자(天慈)를 굽어 내리시어 허락해 주시옵소서.”
4월 18일에 중서사인(中書舍人) 신(臣) 임효공(任孝恭)은 조서를 다음과 같이 폈다.
“능히 미(迷)를 고쳐 정(正)으로 들어갔으니, 이것은 전생에 훌륭한 종자를 심은 것이라 하겠다. 부디 더욱 용맹 정진하라.”
북제(北齊)의 고조(高祖) 문선황제(文宣皇帝)가 이담노자(李聃老子)의 도법을 폐지하는 조서(詔書).
“옛날 금릉도사(金陵道士) 육수정(陸修靜)이란 자는 도문(道門)에서 명망이 있는 자로서, 송(宋)ㆍ제(齊) 양대에 걸쳐 3장(張)을 본받아 서술하고 2갈(葛)을 널리 부연하니, 치장(郗張)의 선비들이 문을 봉하고 앉아 그대로 받아 적었다. 드디어 그들은 함부로 천착(穿鑿)하고 재(齋)의 의식을 널리 제정하니 쓰이는 비용이 막대하였으나 뜻이 왕에게 있는 자는 그대로 따라 받들라.”
마침 양조 계운(梁祖 啓運)이 조서를 내려 그 도를 버리니, 수정은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해 드디어 그 제자들과 변경으로 망명간 사람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북제(北齊)로 들어갔다. 또 금과 옥을 뿌려 귀인들에게 선물하고 금기(襟期)에 부탁하니 황제는 거기에 혹했었다. 이에 천보(天保) 6년 9월에 조서를 내려 모든 사문을 불러 도사로서 학문에 통달한 자 10여인과 함께 기예를 겨루게 하고 친히 참관했다.
그 때 도사들이 주문을 외우니 사문들의 가사와 발우가 혹은 날고 혹은 딩굴었으며 또 주문으로 모든 들보가 혹은 가로 놓이고 혹은 세로 일어서게 하였다. 그러나 사문들은 일찍이 그 방술을 배우지 못했으므로 잠자코 있어서 한 사람도 상대하지 못했다. 남녀들은 떠들며 저들을 옹호하고 귀천들은 마음을 바꾸어 모두 도사들이 이겼다 했다. 도사들은 기뻐 날뛰면서 하늘을 흘겨보며 큰소리로 방술을 자랑했다. 또 외치기를 “신통과 방편을 모두 꺾고 막아 내리라. 사문이 하나를 나타내면 나는 둘을 나타내리라. 이제 조그만 도술을 부렸는데 모두 항복했으니 이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이다”고 했다. 황제는 상통(上統)에게 명하여 법사와 수정을 겨루게 하라 했다. 상통은 “방술(方術)이란 조그만 기예로서 속유(俗儒)들도 이것을 부끄러워하거늘 하물며 출가한 사람이겠는가. 그러나 황제의 명령이라 거역하기 어려우니 어찌 답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저 하좌에 있는 승려를 시켜 상대하게 하리라” 하고 곧 가서 찾아 보았다. 마침 불준(佛俊)이라고도 하고 또 담현(曇顯)이라고도 하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어떤 사람인지 모르나 일정한 곳이 없이 더돌아다니면서 술과 고기 먹는 것이 속인과 같았고, 때로는 함부로 하는 말이 매우 슬기롭고 심원했다. 상통은 그의 깊은 도량을 알았으므로 가만히 가서 교섭했다. 그 때 명승(名僧)들이 크게 모여 있었다.
담현은 말좌에서 술에 대취해 우뚝히 앉아 있었으므로 유사(有司)는 감히 부르지 못하고 이 사실을 상통에게 알렸다. 상통은 “도사와 제주(祭酒)는 으레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다만 술을 마시는 도인이라야 함께 말할 수 있으니, 가마에 태워 데리고 오라”고 했다. 이에 대중은 모두 그를 꺼려 거절하려 했으나 상통의 권위라 감히 막지 못하고, 두 사람이 가서 가마에 태워 데리고 와서 고좌(高座)에 앉혔다. 담현은 고좌에 오르자
곧 서서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나는 술을 마시고 매우 취해 있다. 취중에 들으니, ‘사문이 하나를 나타내면 나는 둘을 나타내리라’ 했는데 이 말이 사실인가.”
도사가 “사실이다.”고 하자, 담현은 곧 발돋음하고 서서 “나는 하나를 나타내었으니 그대는 둘을 나타내라”고 했다. 모두 아무 답이 없었다.
담현이 또 말하기를 “아까 주문으로 옷을 날렸을 때 나는 일부러 문을 열고 그대의 방술을 시험해 보았다” 하고, 조선사(稠禪師)의 가사와 발우에 주문을 외워보라 했다. 여러 도사들이 한꺼번에 그 주문을 외웠으나 하나도 까딱하지 않았다. 황제는 그 가사를 가져오라 하여 열 사람이 들고 당기고 해도 그것은 까딱하지 않았다. 담현은 이에 그 가사를 거두라 했다. 또 들보에 주문을 외워 보라 했으나 전연 영험이 없었다. 도사들은 서로 돌아보며 불안해 하면서도 다시 언변으로 스스로 뽐내면서 “불가에서 자기네를 안(內)이라 하니 안이면 작은 것이요 우리 도가를 밖(外)이라 하니 밖이면 큰 것이다”고 했다. 담현은 이 말이 떨어지자 곧 “만일 그렇다면 천자(天子)는 안에 계시니 반드시 모든 관리들보다 작을 것이다”고 하자, 수정과 그 권속들은 다 입을 다물고 아무 말이 없었다.
황제는 직접 그 선악을 보았는지라 곧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법문은 둘이 아니요 진종(眞宗)은 하나에 있다. 그것을 바른 길을 구하여 적멸과 담박으로 근본을 삼는 것이다. 제주(祭酒)의 도란 세간의 거짓인데 속인들은 깨치지 못하고 그것을 그대로 숭상한다. 그러나 누룩을 맛있는 것이라 하니 청허(淸虛)가 어디 있느냐. 고기포를 핥으니 자비와는 아주 거리가 멀다. 위로는 인사(仁祠)와 다르고 밑으로는 제전(祭典)에 어긋나니, 마땅히 다 금하여 다시는 섬기지 말라. 원근에 다 반포하여 모두 들어 알도록 하라. 도사로서 귀순하는 자는 다 소현(昭玄)에 붙이고 상통 법사에게는 출가하기를 허락하며 아직 발심하지 못한 자는 다 먹물옷 입고 머리를 깎게 하리라.”
이 날에 목을 베인 자는 한 둘이 아니었으며 자칭 신선이라 하는 자는 삼작대(三爵坮)에 올라가 몸을 던져 날아가라 하였으나, 그들은 다 떨어져 죽어 그 시체가 당에 깔렸다. 이리하여 거짓과 속임이 아주 끊어지고
제(齊)나라 안에서는 두 가지 믿음이 없어졌다.
수(隋)나라 초년에 이르러 그 방술이 차츰 열리기 시작하다가 지금 동천(東川) 때에 와서는 이 도교가 더욱 미미해져 다시 항거할 수 없게 되었다.
대당 정관(大唐 貞觀) 22년에 길주(吉州)의 수인(囚人) 유소략(劉紹略)의 아내 왕(王)씨는 오악진선도(五岳眞仙圖)와 옛날 도사 포정(鮑靜)이 지은 『삼황경(三皇經)』 등 모두 14지(紙)를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서 “무릇 제후(諸侯)로서 이 글을 가진 자는 반드시 국왕이 되고 대부(大夫)로서 이 글을 가진 자는 남의 부모가 되며 서민으로 이 글을 가진 자는 부자가 되고 본 부인으로서 이 글을 가진 자는 반드시 황후가 되리라”고 했다. 길주의 사법 참군(司法參軍) 길변(吉辯)이 이로 인해 죄수들의 집을 수색하다가 이것을 왕씨의 옷장 속에서 발견했다. 그래서 소략 등을 취조할 때 그들은 “이전의 도사에게서 얻어 가지고 있습니다”고 했다. 주관(州官)은 이것을 도참(圖讖)이라 하여 이 그림과 경을 봉해 가지고 가서 성(省)에 알리고 성에서는 나라에 아뢰었다. 나라에서는 성관(省官)에게 명령하여 조사하라 했다. 그래서 당시의 조의랑(朝議郞)과 형부랑중(刑部郞中)인 기회업(紀懷業) 등이 조정에서 내려와, 청도관(淸道觀)의 도사 장혜원(張慧元)과 서화관(西華觀)의 도사 성무영(成茂英) 등을 취조했다. 그들은 “이것은 전의 도사 포정 등이 지은 것을 함부로 먹으로 쓴 것이요 지금의 장혜원 등이 지은 것이 아닙니다”라고 자백했다. 나라에서는 이것을 없애 버리라 했다.
또 전령관(田令官)이 아뢰었다.
“불교의 내율(內律)에 의하여 승니(僧尼)들은 계(戒)를 받고 음전(蔭田) 30묘(畝)씩을 각각 얻습니다. 그러하온데 지금의 도사와 여도사(女道士)들은 다 『삼황경(三皇經)』에 의하여 그 상청(上淸)과 하청(下淸)을 받고 승니의 계를 바꾸어서도 또한 음전 30묘씩 받습니다. 그러나 『삼황경』은 이미 폐기되었으므로 도사와 여도사들은 계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음전 받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그리고 『삼황경』의 폐기를 청하였다. 경성의
도사들은 그 때의 음전이 폐지될까 두려워해 가만히 주관(奏官)에게 부탁하고, 노자의 『도덕경』으로 바꾸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그 해 5월 15일에 조칙이 내려, 시랑 최인경(侍郞 崔仁卿)이 그 칙지(勅旨)를 선포했다.
“『삼황경』의 문자는 이미 전할 수 없게 되었으니 다시 요망스럽게 말하는 자는 다 제거하고, 곧 노자 『도덕경』으로 바꾸도록 조처하라. 도관(道觀)이나 백성들로서 저 글을 가진 자 있으면 모두 결박지어 성(省)으로 보내어 조처하라.”
그 해 겨울에 모든 고을의 고사(考使)들이 서울에 들어와 조정에 모여 저 글을 모두 모아, 예부상서청(禮部尙書廳) 앞에 가져다 놓고 불을 놓자 곧 다 사라졌다. 그러므로 알 수 있으니, 대대로 억지로 꾸며넣고 빼고 한 것이 실로 많았고, 사람들이 함부로 지은 많은 책들을 무식한 무리들이 그것을 다 성인의 말이라 한 것이다.
진(晋)나라 팽성(彭城)에 도융(道融)이라는 스님이 있었다. 그는 급군(汲郡)의 임려(林廬) 사람으로서 12세에 출가했다. 그 스승은 그의 신채(新彩)를 사랑하여 먼저 외학(外學)을 시키려고 마을에 가서 논어(論語)를 빌어 오라 했다. 그는 그것을 빌어 그 자리에서 다 읽어 외우고 책을 가져 오지 않았다. 스승은 따로 논어를 빌어 그 책을 덮고 물었더니, 한 자도 빠뜨리지 않았다. 스승은 그의 신이함을 찬탄하고 마음대로 유학을 보냈다.
그는 나이 30에 재주와 지해(知解)가 뛰어나 안팎의 경서를 모두 마음 속에 간직했다. 요흥(姚興)은 “어제 도융을 보니 아주 슬기롭고 특히 불경에 밝았다” 하고, 곧 불러 들여 소요원(逍遙園)에서 구마라집의 역경에 참여하게 했다.
얼마 뒤에 사자국(國)에서 어떤 바라문이 왔다. 그는 총명하고 변재가 있으며 학식이 많아 서역(西域)의 속서는 거의 다 읽고 그 나라 외도들의 스승이 되었었다. 그는 구마라집이 관중(關中)에서 불법을 크게 유행시킨다는 말을 듣고 그 제자들에게 “어찌 석씨(釋民)의 가르침만을 진단(震旦)에 전하게 하고 우리의 바른 교화는 동국(東國)에 퍼지게 하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하고는, 드디어 낙타에 책을 싣고 장안(長安)으로 들어왔다. 요흥은
그의 입이 편편하고 눈이 움퍽 들어간 것을 보고 자못 미혹되었다.
바라문은 요흥에게 “지극한 도는 일정한 틀이 없어 각각 섬기는 것이 다릅니다. 지금 저 진승(秦僧)과 변재의 힘을 겨루어 보고 이기는 사람이 그 교화를 퍼도록 하겠습니다.”고 했다. 효응은 곧 허락했다.
그 때 관중(關中)의 승려들은 모두 서로 바라보면서 기가 죽어 아무도 맞서려 하지 않았다. 구마라집이 도융에게 말하였다.
“저 외도는 총명하기가 사람 중에서 뛰어나 겨루면 반드시 이길 것이라고 한다. 우리의 위없는 큰 도가 우리에게 와서 굴한다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만일 저 외도가 이기면 우리의 법바퀴는 굴대가 꺾이는 것이니 그래서야 되겠는가. 내가 보기로는 오직 그대 한 사람에게 달려 있구나”
도융은 스스로 돌아보아 자기의 재주와 힘은 모자라지 않으나 외도의 경서를 다 읽어보지 못했었다. 그래서 가만히 사람을 시켜 그 바라문이 가진 경서의 목록을 베껴 오게 하여 한 번 읽고 다 외웠다. 그 뒤에 변론할 날을 정하여 요흥이 직접 나오고 대신들도 다 모이고 관중의 승려들도 모두 다 모였다. 도융은 바라문과 문답할 때 예리한 칼날 같은 변론이 현묘한 이치를 다 캐어 도저히 저의 미칠 바가 아니었다. 바라문은 제 변론이 진 줄을 알았으나 그래도 많이 읽은 것으로 떠들었다. 도융은 이에 그가 읽은 책과 진(秦)나라 경사(經史)의 목록과 책 수를 열거할 때 저보다 3배나 많았다. 이에 구마라집이 저를 나무랐다.
“그대는 우리 대진(大秦)의 박학을 듣지 못했는가. 왜 함부로 경솔히 멀리 여기까지 왔는가?”
바라문은 부끄러워 뉘우치며 항복하고는, 도융의 발에 예배하고 한 열흘만에 어디론지 가버렸다. 상법(像法)의 운수가 다시 일어난 것은 도융의 힘이었다.
그 뒤에 도융이 팽성으로 돌아와 강설을 계속할 때, 그 도를 듣고 모이는 사람이 천여명이었고 늘 의지해 따르는 문도(門徒)만도 3백여명이었다. 그 성품은 친압(親狎)하지 않고 항상 누각에 올라가 가슴을 터놓고 친절히 잘 타일렀다. 일생 동안 법을 펴다가 뒤에 팽성에서 생을 마치니 나이는 74세였다.
그의 저서로서 『법화경』ㆍ『대품(大品)』ㆍ『금광명경(金光明經)』ㆍ
십지경(十地經)』ㆍ『유마경』 등의 의소(義疏)는 다 세상에 유행한다.
『위서(魏書』에서 말하였다.
“정광(正光) 원년에 명제(明帝)는 조복(朝服)을 입고 천하에 크게 사면령(赦免令)을 내리고 불교와 도교 2종(宗)의 문인(門人)들을 궁전 앞으로 불러 재(齋)를 마쳤다. 시중(侍中) 유등(劉騰)이 조칙(詔勅)을 선포하고 법서(法師)와 도사(道士)의 토론을 청하였으니, 그들 제자들의 의심을 풀어 주기 우해서였다.
그 때 청통관(淸通觀)의 도사 강빈(姜斌)과 융각사(融覺寺)의 승려 담모최(曇謨最)가 토론하게 되었다.
명제가 물었다.
“부처와 노자가 동시대의 사람인가.”
강빈이 “노자가 서역으로 들어가 오랑캐를 교화할 때 부처는 그 시자(侍者)였으니 그들은 분명히 동시대입니다”라고 답했다. 모최가 “어떻게 그것을 아는가” 하자, 강빈은 “노자의 『개천경(開天經)』을 상고해 보고 그것을 알았다”고 했다.
모최가 물었다.
“노자는 주(周)나라의 어느 왕, 몇 년에 났으며 주나라 어느 왕 몇 해에 서역으로 들어갔는가.”
강빈은 답하였다.
“주나라 정왕(定王)이 즉위한지 3년 을묘년에 초(楚)나라 진고현(陳苦縣) 여경곡(厲卿曲) 인리(仁里)에서 9월 14일 밤 자시(子時)에 나서, 주나라 간왕(簡王) 4년 정축년에 주나라를 섬겨 수장리(守藏吏)가 되었고, 간왕 3년에 태사(太史)가 되었으며 경왕(庚王) 원년 경진년 나이 85세 때에 주덕(周德)이 능지(凌遲) 당하는 것을 보고, 산관령(散關令) 윤희(尹喜)와 함께 서역으로 들어가 오랑캐를 교화하였으니, 이로서 넉넉히 증명되는 것이다.”
모최가 물었다.
“부처는 주나라 소왕(昭王) 24년 4월 8일에 나서 목왕(穆王) 53년 2월 15일에 멸도(滅度)하셨다. 열반에 드신 뒤 3백 45년을 지나 정왕(定王) 3년에 비로소 노자가 났으니, 태어나자 곧 나이 85세가 된 셈이며 경왕(敬王) 원년에서 무릇 4백 25년을 지나 비로소 윤희와 함께 서역으로 도망갔으니, 이 연수를 따지면 너무 현저히 다른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 아닌가.”
강빈은 말하였다.
“만일 부처가 주나라 소왕 때 났다면
무슨 기록이 있는가.”
모최는 말했다.
“주서이기(周書異記)와 『한법본내전(漢法本內傳)』에 다 명문(明文)이 있다.”
강빈이 물었다.
“공자는 법을 제정한 성인인데 당시에 부처에 대해서는 전연 기록이 없는데 무슨 까닭인가?”
모최는 말하였다.
“당신의 견문이야말로 바로 관견(管見)이요, 또 책도 많이 읽지 못했다. 상고해보면 공자에게 『삼비복경(三備卜經)』이 있으니 이른바 천(天)ㆍ지(地)ㆍ인(人)이다. 부처에 대한 말은 중비(中備)에 나오다. 당신이 일찍이 그것을 보았더라면 이런 미혹은 없었을 것이다.”
강빈이 물었다.
“공자는 성인이라 말하지 않아도 아신다. 무엇 때문에 점(卜)을 의지하겠는가?”
모최가 말하였다.
“오직 부처만이 모든 성인의 왕이요 4생을 인도하는 우두머리시다. 일체의 중생을 아시고 전후(前後)의 2제(際)와 길흉(吉凶)의 시종(始終)을 점의 힘을 빌지 않고 아신다. 그 이외의 작은 성인들은 비록 미연의 이치를 안다 하더라도 반드시 시귀(蓍龜)의 힘을 빌어야 영괘(靈卦)를 통하는 것이다.”
시중 상서령(侍中 尙書令) 원문(元文)은 황제의 명령으로 “그 『개천경(開天經)』은 어디서 얻었으며 또 그것은 누구의 말인가?”
그리고 중서시랑(中書侍郞) 위수(魏收)와 상서랑(尙書郞) 조영(祖塋) 등을 보내어 그 책을 가져 오라 하고, 황제가 그것을 보고 의논해 보자 했다. 태위 단양(太尉 丹陽) 왕소종(王蕭綜)과 태부(太傅) 이식(李寔)과 위위(衛尉) 허백도(許伯挑)와 이부상서(吏部尙書) 형란(邢欒)과 산기상시(散騎常侍) 온자승(溫子昇) 등 백 70여인은 그 책을 다 읽어보고 황제에게 아뢰었다.
“노자는 다만 5천문(文)만 지었을 뿐, 다시 말한 것은 없습니다. 신들의 의논은, 강빈 등은 대중을 미혹시킨 죄에 해당하므로 황제께서는 저들을 극형에 처하시기를 바랍니다.”
그 때 삼장법사 보리유지는 부처님의 자비에 의해 황제에게 간하여 극형은 중지하고 도마읍(徒馬邑)으로 귀양 보내게 했다.[이상 2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진(晋)나라 정도혜(程道慧)는 자가 문화(文和)이니 무창(武昌) 사람이다. 대대로 쌀 5두(斗)의 녹(祿)을 받으면서 부처가 있다고 믿지 않고 늘 “고래로 바른 도는
이로(李老) 뿐이다. 무엇 때문에 오랑캐의 말에 미혹되어 그것을 훌륭한 가르침이라 하겠는가” 하고 말했다.
태원(太元) 15년에 병으로 죽었으나 심장 밑이 아직 따뜻했으므로 그 집에서는 그 시체를 염(歛)하지 않았었다. 며칠 뒤에 깨어나 그는 말했다. 즉 죽을 때에 10여인이 와서 그를 묶어 데리고 가는데 어떤 비구를 만났다. 그 비구가 “이 사람은 전생에 복을 많이 지었으므로 묶어서는 안된다”고 하여, 그는 풀려났으나 그대로 몰려갔다. 길은 닦여서 편편하였지만 양쪽에는 가시밭이어서 거의 발을 들여놓을 수 없었다. 그들은 다른 죄수들을 몰아 그 가시밭 속으로 가는데 죄수들은 가시에 찔려 큰 소리로 울부짖다가 도혜가 평로로 가는 것을 보고 모두 부러워하고 감탄하면서, “부처님 제자는 평로로 가는 것을 보니 복을 닦은 사람이다”고 했다. 도혜가 “나는 불법을 믿는 사람이 아니다”고 하자, 어떤 사람이 웃으면서 “당신이 잊었을 뿐입니다”고 했다. 도혜가 이에 스스로 기억해 보니, 자신은 전생에 부처를 받들면서 이미 다섯 번 나고 다섯 번 죽어 그 근본 뜻을 잃어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 나서는 어려서 악인을 만나 사정(邪正)을 분별하지 못하고 이에 사도에 빠져 있었던 것이었다.
조금 지난 뒤에 큰 성에 이르러 바로 청사(廳舍)로 갔다. 나이 4, 50쯤 되는 어떤 사람이 남쪽을 향해 앉았다가 도혜를 보자 깜짝 놀라면서 “그대는 여기 올 사람이 아니다”고 했다. 어떤 홑옷을 입은 사람이 장부를 들고 대답하기를 “이 사람은 사당을 부수고 사람을 죽였으니 그 죄로 여기 왔습니다”고 했다.
아까 만났던 비구가 도혜를 따라 들어와 그 사실을 정성스레 말하기를 “사당을 부순 것은 죄가 아닙니다. 이 사람은 전생에 복이 많은데, 사람을 죽인 죄는 중하지만 그 과보는 아직 이르지 않았습니다”고 했다. 남향으로 앉은 사람은 “장부에 기록한 사람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 하고는, 도혜를 앉으라 하고 사과하면서 “조그만 귀신이 장부의 기록을 잘못했소. 하지만 또한 그대가 전생 일을 잊어 버리고 큰 정법을 받들 줄 몰랐기 때문이기도 하오” 하고, 도혜를 데리고 가라 했다. 그리고 잠겸부교장군(暫兼襲校將軍)을 시켜 지옥을 두루 보이게 하라 했다. 도혜는 기뻐하며 물러나와 그 장군을 따라갔다. 여러 생으로 갈 때 그 성들은 다 지옥인데 수억의 사람들이 다
죄를 받고 있었다. 미친 개가 사람의 4지를 물어 살이 다 흩어지고 피는 땅을 적셨다. 또 새들이 그 칼날 같은 주둥이를 가지고 빨리 날아와서 사람의 입 안에 들어가 안팎을 쪼아 꿰뚫으면, 그 사람은 땅에 딩굴고 큰 소리를 치며 힘줄과 뼈가 다 부서져 흩어졌다.
그 이외에 지나가면서 본 것은 조태설(趙泰屑)과 하대저(荷大抵)가 본 것과 거의 같으므로 다시 적지 않고, 다만 이 두 가지만이 다르기 때문에 자세히 적는 것이다.
이렇게 두루 본 뒤에 도헤는 거기서 풀려나 돌아오다가, 다시 아까 만난 그 비구를 만났다. 그 비구는 도혜에게 구리쇠로 된 조그만 방울 같은 것을 주면서 말했다.
“그대는 집에 돌아갈 때 이것을 문 밖에서 버리고 방으로 가지고 들어가지 말라. 어느 해 어느 달 어느 날에 그대에게는 재액이 있으니 부디 삼가고 그것만 지내면 90세까지는 살 것이다.”
그 때 도혜의 집은 서울 대행(大裄)의 남쪽에 있었다. 도혜는 돌아가다가 조협교(皂莢橋)를 지나면서 친우 세 사람이 수레를 세우고, 도혜가 죽어 슬프다고 이야기하는 소리를 들었다. 또 집에 이르러서는 그 집 여종이 울면서 시장에 가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저 친구들이나 여종은 도혜를 보지 못했다. 도혜는 대문을 들어가다가 아까 그 구리쇠 방울을 문 밖 다리 위에 두었다. 그 빛이 날아 퍼지면서 하늘까지 올랐다가 한참만에 작아지더니 차츰 사라졌다.
대문에 들어서자 시체 냄새가 구역질이 날 만하며, 문상 오는 손과 친구들이 도혜에게 부딪치므로 오래 서성거릴 수 없어 이에 시체로 들어가자 곧 다시 살아났다. 수레를 세우고 이야기하던 사람과 시장에 가던 여종의 이야기를 하자 하나도 틀리지 않았다.
도혜는 그 뒤에 정위(廷尉)가 되어 서당(西堂)에서 송사를 맡기로 했다가 그 행렬에 나가기 전에 갑자기 기절하여 사람을 알아보지 못하고 한나절만에 깨어났는데, 그 날과 때를 맞추어 보니 곧 그 도인이 삼가라던 때였다.
얼마 후에 광주 자사(廣州刺史)가 되고, 원가(元嘉) 6년에 죽으니 나이는 69세였다. [이 한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나라 익주 복수사(益州 福壽寺)의 석보경(釋寶瓊)은 속성은 마(馬)씨이니
면죽현(綿竹縣) 사람이다. 소년으로 출가하여 맑고 검소했으며, 「대품(大品)」을 이틀에 한 번씩 외우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여러 읍의(邑義)를 가르쳐 하루 한 권을 외우는 사람이 거의 천여명이었으므로 4방에서 그의 이름을 듣고 다 와서 공경했다.
본읍(本邑)에 이어 있는 십방(什邡)의 모든 현(縣)은 모두 도교를 믿는 사람으로서 이 사교(邪敎)에 대한 집착이 오래였으므로 다른 누가 와서 투숙하려 해도 용납하지 않았다.
여기가 고향이지만 보경은 속사를 익히고 도교는 믿지 않았다. 마침 이(李)씨의 일가들이 도회(道會)를 열고 보경을 청하였다. 보경은 나중에야 거기 가서도 도상(道像)에 예배하지 않고 그대로 앉았다. 모두들 “천존(天尊)께 예배하지 않으니 그러면 우리 종법(宗法)을 무시하느냐”고 했다. 보경은 “사정(邪正)의 도가 다르고 섬기는 바가 각기 다르다. 나는 하늘에도 예배하지 않거늘 하물며 노군(老君)이겠는가” 하고 말했다.
중의가 분분하면서 자못 보경을 공격하였다. 보경은 이 의논이 그치지 않는 것을 보고 또 말하기를 “나는 예배하지 않을 데에 예배한다. 그러나 선종(先宗)에게 욕을 끼칠까 두렵다” 하고, 드디어 한 번 절했다. 그러자 도상(道像)과 그 자리가 한꺼번에 흔들렸다. 또 한 번 절하자 온 자리가 뒤집히면서 도상이 땅에 떨어져 몸이 모두 부숴졌다. 도인들은 창피스러워하면서도 “바람이 때렸다” 하고, 다투어 와서 바로 앉혔다. 그러나 보경이 또 한 번 절하자 도상은 다시 거꾸러졌다. 보경은 “하늘이 맑고 날씨가 화창한데 왜 바람을 원망하는가. 그대들은 어리석어 내 바람임을 몰랐구나” 하고 말했다.
대중은 모두 두려워해 일심으로 보경에게 예배했다. 4방에서 이 말을 듣고는 모두 도교를 버리고 불교로 돌아왔으며, 온 고을의 도인과 속인 및 이웃 고을의 도인 무리들은 함께 감탄하고 모두 와서 보경에게 청하여 보살계를 받았다. 그 현령(縣令)인 고달(高達)은 본래부터 정성과 믿음이 있어 그의 위덕을 공경하고 다시 그 고을의 절에서 보경을 청해 강설을 시작했다. 정관(貞觀) 8년에 보경은 그 고향에서 죽었다.[이 한 가지 증험은 『당고승전(唐高僧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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