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52권
법원주림 제52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56. 권속편(眷屬篇)[여기에는 4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애련부(哀戀部) 개역부(改易部)
이착부(離著部)
(1) 술의부(述意部)
가만히 생각해보니, 권속은 부평초처럼 옮겨 다님에 신구(新舊)는 수레바퀴처럼 돌아서, 떠나고 머묾을 점치기 어려우매 한곳에 모임도 잠깐이구나. 실로 선악의 인연이 다름으로 말미암아 오르고 가라앉으면서 가는 곳이 다른 것이다. 그 선(善)으로서는, 저 난타가 영화를 버리고 도를 따랐으며 라운이 왕위를 버리고 맺음을 끊은 것과 같다. 이것은 전단숲이 전단향에 둘러싸인 것과 같아서, 응함을 따라 구제함에 조어(調御)의 아름다움을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이다.
또 악으로는 조달이 승단(僧團)의 화합을 깨뜨리고 아사세가 그 부왕(父王)을 죽인 것과 같아서, 항상 독한 뜻을 품고 언제나 원수를 맺는다. 이것은 벌써 가시나무의 숲과 같고 또한 살무사의 무리와도 같아서, 선과 악의 길이 갈라지는 곳에 화와 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2) 애련부(哀戀部)
『수마제장자경(須摩提長者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 세상에 계실 때 사위성 안에 수마제라는 장자(長者)의 아들이 있었다. 그가 갑자기 죽자 부모와 친척 및 친구들이 일시에 그의 이름을 부르고 슬피 울며 가슴을 치고 원망하며 울부짖다 땅에 쓰러졌다. 혹은 부모 형제를 부르고 혹은 남편과 상전을 부르는 등, 이렇게
갖가지로 울며 부르짖었다. 또 어떤 이는 제 손으로 흙을 뒤집었고 어떤 이는 칼로 제 머리털을 끊었다. 마치 독한 화살을 심장에 맞은 사람이 한없이 고통스러워하는 것과도 같았다. 또 어떤 이는 옷을 뒤집어쓰고 울며 마치 큰바람에 나뭇가지가 서로 때리는 것과도 같았다. 또 물을 잃은 고기가 땅에 뒹구는 것과도 같고 또 베어진 나무가 이리저리 누운 것과도 같아서, 이런 고초를 그 몸에 가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아시면서 짐짓 아난에게 물으셨다.
‘왜 저 대중은 저렇게 슬피 울며 부르짖느냐?’
아난은 자세한 사정을 말씀드리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 사람들을 제도하시기 위해 저리로 가시옵소서. 모든 세존께서는 청함이 없다고 해서 설법을 안 하지는 않으십니다. 저는 지금 저 사람들을 위해 부처님께 청합니다.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로 저기로 가시옵소서.’
그 때 여래는 아난의 청을 들어 그 집으로 가셨다. 저들은 멀리서 부처님께서 오시는 것을 보고 각각 손으로 눈물을 닦고 나와 부처님을 맞이했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부처님 발에 예배하고는 슬픔에 목이 메어 말을 하지 못했다. 바로 길게 한숨이라도 쉬고 싶었으나 부처님을 공경하기 때문에 감히 한숨도 못 쉬고 기가 막혀 그대로 서 있었다. 그 때 부처님께서는 장자 부모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왜 슬피 울고 고민하면서 이 환법(幻法)에 집착하고 있는가?’
저들은 동시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성중(城中)에는 오직 이 사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총명하고 지혜로우며 단정하고 묘했습니다. 나이 장성할수록 여러 사람들 중에서 뛰어났었습니다. 또 재보가 많아 창고에 넘치며 수레ㆍ말ㆍ옷ㆍ종ㆍ하인 등 이런 것이 다 풍족하여 하나도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하루아침에 죽었습니다.
그 때문에 저희들은 이렇게 슬피 울고 사모하면서 어쩔 줄을 모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을 위해 방편으로 설법하시어, 저희들을 이 고민에서 벗어나게 하시고, 지금부터 다시는 이런 고통을 받지 않게 하여 주소서.’
그 때 세존께서는 장자ㆍ부모ㆍ종친ㆍ친구 및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들은 일찍이 누구나 이 세상에 났다가 늙지 않고 앓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을 보았는가?’
사람들은 말하였다.
‘못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셨다.
‘너희들이 만일 생노병사와 우비고뇌를 떠나려 하거든 다시는 그 은애(恩愛)의 밧줄에 묶이지 말고 마음을 정견(正見)에 두고 3보께 귀명하여라. 왜냐 하면 이 세상에는 부처 만한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부처는 눈멀고 어리석은 사람을 잘 이끌어 주며, 부처의 설법은 바로 좋은 약이니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이어 다음 게송을 외우셨다.
시방세계의 그 어디에도
한 번 나서 죽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네.
생사의 가고 오는 그 길은
오직 법이라야만 끊을 수 있네.
시방세계의 그 어디에도
죽는 이를 구제할 사람 없고
오직 부처님만이 생사 끊나니
그러므로 부처님께 귀명하여라.
만일 어떤 사람이 불선(不善)을 지어
10악(惡)을 행하기 좋아하면
그는 언제나 교만한 마음으로
이 3보를 공경하지 않으리.
깨끗한 계율을 지키지 못하고
게으르면서 정진하지 않으면
이와 같은 모든 사람들
이 모두 죽은 이라 하네.
무상(無常)인 것을 상(常)이라 헤아리고
부정(不淨)인 것을 깨끗하다 헤아리며
실로 괴로운 것을 즐거움이라 하고
나[我]가 없는 것을 나가 있다 헤아리네.
중생들 모두 생사 속에 있으면서
뒤바뀐 생각에 아주 깊이 집착하여
천만억겁 동안을 헤매면서도
생사의 그 근본을 알지 못하네.
만일 어떤 사람이 참으로 진실한
이 큰 법을 잘 알 수 있으면
그는 이 무상(無常)이 바로
가장 큰 고통의 근본임을 알리라.
만일 누구나 더럽고 탁함을 보고
3독(毒)의 근본을 끊어 버리면
그는 반드시 다시 더 없는
이 큰 법을 성취하리라.
그 때 장자와 그 모든 권속들은 부처님 말씀을 듣고 슬픔과 고통이
다 없어지고 또 도과(道果)를 얻었다.”
또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어떤 바라문은 젊어서 출가하여 60세까지 배웠으나 도를 이루지 못했다. 바라문의 법을 따라 60세까지 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그는 다시 집에 돌아가 결혼하여 한 사내를 낳았다. 아이는 단정하고 사랑스러웠으며 나이 7세 때에는 글씨를 잘 쓰고 많이 알며 지혜가 있고 또 변재가 있어서 그 변론은 남보다 뛰어났었다. 그러나 갑자기 중병을 만나 하룻밤 동안에 목숨을 마쳤다. 바라문은 원통함을 이길 수 없어, 그 시체 위에 엎드려 몇 번이나 기절했다 깨어나곤 했다. 친척들은 그를 달래고 시체를 뺏다시피 하여 염하고 관에 넣어 성 밖에 내다 묻었다.
그 때 바라문은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슬피 운다고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차라리 염라왕에게 가서 아이 목숨을 살려 달라고 간청해 보는 것만 못하다.’
그리하여 바라문은 목욕 재계한 뒤에 향과 꽃을 가지고 집을 떠나 가는 곳마다 사람들에게 물었다.
‘염라왕이 다스리는 관청이 어디 있습니까?’
이렇게 계속 수천 리를 가서 어느 깊은 산중에 이르러 도를 얻은 범지(梵志)들에게 앞에서와 같이 물었다. 그 범지들은 이 바라문에게 도리어 물었다.
‘당신은 그 염라왕의 관청을 묻는데 거기 가서 무엇을 구하려 하십니까?’
바라문은 대답하였다.
‘나는 아들 하나를 두어 그 지혜와 변재는 누구보다 뛰어났었습니다. 요즈음 그 아이가 갑자가 죽어 이 슬픔과 고뇌를 이겨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염라왕에게 가서 아이 목숨을 빌어 집으로 데리고 돌아가, 내 늙음에 대비하려는 것입니다.’
범지들은 이 어리석음을 가엾이 여겨 바라문에게 말하였다.
‘염라왕이 있는 곳은 산 사람이 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방향을 가르쳐 드리지요. 여기서 서쪽으로 4백여 리를 가면 큰 내[川]가 있고 그 가운데 큰 성(城)이 있는데, 여기는 염라왕이 세상을 순찰하면서 임시로 머무는 곳입니다. 염라왕은 4월 4일에 세상을 순찰할 때는 반드시
이 성에서 지냅니다. 당신은 재계하고 가십시오. 반드시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바라문은 시키는 대로 재계하고 그 내로 가서 좋은 성을 보았다. 그 궁전과 집들은 마치 저 도리천(天)과 같았다. 이 바라문은 그 성문으로 가서 향을 피우고 발돋움하고 서서 염라왕을 만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염라왕은 문지기를 시켜 바라문을 들어 오라 하여 만나 보았다. 바라문은 왕에게 아뢰었다.
‘늦어서야 아들을 낳아 늙음에 대비하려고 7세까지 길렀사온데 근자에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대왕께서는 은혜를 베푸시어 내 아이의 목숨을 도로 살려 주십시오.’
염라왕은 말하였다.
‘그대 요구는 매우 좋다. 그 아이는 지금 동쪽 동산에서 놀고 있다. 그대가 가서 데리고 가거라.’
바라문은 곧 동산으로 가서 그 아들이 여러 다른 아이들과 놀고 있는 것을 보고, 곧 앞으로 다가가 아들을 끌어안고 울면서 말하였다.
‘나는 밤낮 네 생각에 음식도 맛이 없고 잠도 달지 않았다. 너는 과연 이 아비의 괴로움을 생각해 보았느냐?’
그러나 아들은 놀라면서 도리어 꾸짖었다.
‘이 미련한 늙은이는 아무 이치도 모르면서 잠깐 동안 붙어살던 나를 아들이라 부르는구나. 망령 되게 잔소리말고 빨리 돌아가거라. 나는 지금 여기 부모님이 따로 계신다. 우연히 잠깐 만난 사이에 공연히 나를 껴안지 말라.’
이 바라문은 슬피 눈물을 흘리고 거기서 떠나오면서 가만히 생각했다.
‘사문 구담은 사람 영혼의 변화하는 법을 잘 안다고 한다. 나는 지금 거기 가서 물어 보리라.’
이에 바라문은 곧 부처님 계신 곳으로 갔다. 이때 부처님께서는 사위국(舍衛國)의 기원정사에서 대중을 위해 설법하고 계셨다. 바라문은 부처님을 뵈옵자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뒤에 지금까지의 사연을 다 부처님께 아뢰면서 여쭈었다.
‘저 아이는 참으로 내 아들이었는데, 이름 불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도리어 나를 보고는 ≺이 미련한 늙은이야, 잠깐 붙어 있었던 나를 아들이라 생각하는구나≻하면서 부자의 정이란 조금도 없었습니다. 무슨 까닭으로 그렇게 되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구나. 사람은 죽으면 혼이 떠나 다시 몸을 받으며 부모와 처자는 인연이 합해 모여 살지만
그것은 마치 나그네가 만났다가 헤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오. 그런데 어리석고 미혹한 사람은 거기에 묶이고 집착하여 그것을 자기 소유라 생각하므로 슬퍼하고 고뇌하는 것이오. 그 근본을 알지 못하고 끊임없이 생사에 침몰해 있소. 그러나 오직 슬기로운 사람만은 은애(恩愛)를 탐하지 않음으로써 고통을 깨닫고 습성을 버리고는 계율을 부지런히 닦고 식상(識想)을 없애서 생사가 끝나게 되는 것이오.’
바라문은 이 말씀을 듣고 환히 깨쳐 그 자리에서 당장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또 『대법거경(大法炬經)』에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일체 중생은 다 그 형상의 종류를 따라 그 이름이 있으니, 이것은 저 참새 따위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저 아귀 중생 같은 것은 결정된 각기 다른 이름이 없는 것이니, 하늘을 결정된 하늘이라거나 사람을 결정된 사람이라거나 아귀를 결정된 아귀라고 말하지 말라. 하나의 일에 갖가지 이름이 있고 하나의 사람에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처럼, 하나의 하늘, 내지는 하나의 아귀ㆍ축생에 갖가지 이름이 있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또한 많은 아귀에 전연 이름이 없는 것도 있으니, 잠깐 사이에 그 몸이 변해 갖가지 형상이 있거늘, 어떻게 그 이름을 다 부를 수 있겠는가? 그들은 악업의 인연이 다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한 찰나 사이에 갖가지로 몸을 변하느니라.”
(3) 개역부(改易部)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에서 말하였다.
“옛날 부처님께서는 사위국에서 천인(天人)들을 위해 설법하고 계셨다.
그 때 그 성 안에 어떤 바라문 장자는 재물이 무수히 있었으나 그 사람됨이 인색하여 보시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언제나 문을 닫고 손님 오는 것을 반가워하지 않았다. 특히 음식을 먹을 때는 문지기를 시켜 문을 굳게 닫아걸고 사람들이 함부로 들어와 구걸하지 못하게 했다.
어느 때 장자는 갑자기 맛있는 음식이 생각나 곧 그 아내를 시켜
밥을 짓고 살찐 닭을 잡아 생강 후추 등 양념을 넣어 삶게 했다. 그리고 그 요리를 차려놓은 뒤에는 밖으로 문을 잠그고 두 부부가 앉아 아이를 복판에 앉히고 함께 먹기 시작했다. 부모는 계속해서 아이 입에 닭고기를 넣어 주었다. 부처님께서는 이 장자는 전생에 복을 지었으므로 제도할 수 있을 것을 아시고, 곧 사문의 형상으로 변해 그들 앞에 나타나 그들을 위해 축복해 주셨다.
‘다만 얼마라도 그것을 내게 보시하면 큰복을 받을 것이오.’
장자는 머리를 들어 이 사문을 보고 꾸짖었다.
‘너는 도인으로서 부끄러움도 없이, 가족끼리 앉아 음식을 먹는데 어찌 그리 당돌하냐?’
사문은 답하였다.
‘그대야말로 우치하여 부끄럼도 모르는구나. 지금 나는 걸사(乞士)인데 무엇이 부끄럽겠느냐?’
장자가 물었다.
‘나는 우리 가족끼리 즐기는데 무엇이 부끄러움이 되겠는가?’
사문이 대답하였다.
‘그대는 아버지와 아내와 어머니를 죽여 원수에게 공양하면서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고 도리어 걸사를 보고 ≺왜 부끄러워하지도 않느냐?≻고 나무라는구나.’
이에 세존께서는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나에게서 생긴 가지가 끊이지 않고
다만 탐욕만을 자꾸 먹는구나.
원수를 길러 무덤만 늘리기를
어리석은 사람은 서두르네.
감옥에 아무리 자물쇠를 채워도
슬기로운 사람은 견고하다 않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처자의 꾸밈을 보고
거기 집착하는 애욕이야말로 감옥이네.
슬기로운 사람은 애욕을 감옥이라 하나니
그것은 견고해 벗어나기 어렵다.
그러므로 그것을 끊어 버려라.
애욕에 빠지지 않으면 편안할 수 있으리.
장자는 이 게송을 듣고 놀라면서 물었다.
‘도인은 무슨 까닭으로 그런 말을 하는가?’
사문은 답하였다.
‘지금 그 상에 차려 놓은 닭은 바로 전생의 그대 아버지다. 그는 간탐 때문에 항상 닭으로 태어나 그대에게 먹혔으며, 그 아이가 전생에 나찰로 있을 때, 그대는 큰 상인으로 배를 타고 바다에 들어갔다가, 배가 풍랑을 만나 나찰의 나라로 들어가 나찰에게 잡아 먹혔었다.
이렇게 5백 생을 거듭하다가 목숨을 마치고 지금은 그대 아들로 태어났다. 그대는 남은 죄가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와서 서로 해치려는 것이다. 또 이 아내는 전생에 그대의 어머니로서 그 은애(恩愛)가 매우 깊었기 때문에 지금 와서 그대 아내가 된 것이다. 그런데 그대는 어리석어 전생의 일을 알지 못하고 아비를 죽여 원수를 기르며 어머니를 아내로 삼은 것이다. 5도(道)의 생사는 수레바퀴처럼 5도를 끝없이 돌아다닌다. 그러나 이것을 누가 아는가? 오직 도인만은 이것저것을 다 보지만 어리석은 사람은 이것을 알지 못하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느냐?’
이에 장자는 매우 놀라고 두려워하여 온몸의 털이 다 일어서는 듯했다. 부처님은 위신(威神)을 나타내어 이렇게 그 전생 일을 알게 하였으므로 장자는 부처님에 의해 전생 일을 알게 되어 곧 참회하여 사과하고 곧바로 5계(戒)를 받았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그를 위해 설법하여 그는 수다원의 도를 얻었다.”
또 『잡보장경』에서 말하였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는 여행하시다가 아라국(阿羅國)으로 가셨다. 중도에 어떤 나무 밑에 앉아 쉬시는데, 남에게 매인 가단자라(迦旦遮羅)라는 노파가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그것을 보신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저기 가서 물을 좀 얻어 오너라.’
아난은 분부를 받고 곧 가서 물을 청했다. 노파는 부처님께서 물을 구하신다는 말을 듣고 손수 물을 떠 가지고 부처님 앞에 와서 물그릇을 땅에 놓고는 곧 부처님을 껴안았다. 아난이 그것을 말리려 하자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리지 말라. 이 노파는 5백 생 동안 내 어머니였다. 그 사랑하는 마음이 아직 다 없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나를 안는 것이다. 만일 이것을 막으면 그 끓는 피가 코로 나와 곧 목숨을 마칠 것이다.’
노파는 부처님을 안아 본 뒤에 그 손과 발로 말하는 형용을 하고는 한쪽에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분부하셨다.
‘너는 가서 이 여자의 주인을 불러오너라.’
그 주인은 오자 땅에 엎드려 부처님께 예배하고 한쪽에 섰다.
‘너는 이 노파를 놓아주어 그녀로 하여금 출가하도록 하라. 만일 출가하면 그녀는 아라한이 될 것이다.’
그는 곧 노파를 놓아주었다. 가섭부처님
때 노파는 출가하여 도를 배웠기 때문에 아라한이 되었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 그녀는 여러 사람들의 주인이 되어 성니(聖尼)들을 꾸짖어 여종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지금 남의 여종이 되어 60생 동안 내가 보시하는 것을 방해했으므로 항상 빈천한 신세가 된 것이다.’”
또 『현우경(賢愚經)』에서 말하였다.
“사위국의 어떤 부호 장자는 자식이 없어 늘 신기(神祇)에 기도하여 자식을 구하였다. 정성이 지극하였으므로 그 아내가 임신하여 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는데 얼굴이 단정하여 세상에 뛰어났었다. 부모와 친척들이 모두 모여 큰 강가에 나가 잔치를 벌이고 즐거워했는데, 강가에서 잘못하여 아이를 물에 떨어뜨려 곧 두루 수색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다. 부모는 간절한 애정으로 몇 번이나 까무러쳤다가 다시 깨어나곤 했으나, 그 아이의 공덕으로 아이는 끝내 죽지는 않고, 물 속에서 떴다 잠겼다 했다. 마침 큰 고기가 아이를 삼켜 아이는 고기 뱃속에 있으면서도 끝내 죽지 않았다.
그 때 그 강 하류에 있는 조그만 마을의 어떤 부자도 아들이 없어 갖가지로 구했으나 얻지 못했다. 그 부자는 항상 종을 시켜 고기를 잡아 팔았는데, 그 종이 아이를 삼킨 이 고기를 잡아 고기 배를 따다가 이 아이를 얻었다. 아이는 단정하여 모두 기뻐하였다.
이 부모는 말하였다.
‘우리 집에서는 이전부터 아이를 구해 기도하였는데 지극한 정성의 보답으로 하늘이 우리에게 이 아이를 주었다.’
그리고는 곧 아이에게 젖을 먹여 길렀다. 그 때 윗마을의 그 장자 부모는 말하였다.
‘이 아이는 우리 아이다. 우리는 이 아이를 저 강에서 잃었는데 이제 얻었으니, 우리에게 이 아이를 돌려 달라.’
이 부자가 말하였다.
‘우리는 지금까지 기도하여 아이를 구하다가 지금 신이 보응하여 우리에게 이 아이를 준 것이다. 당신 아이는 강에서 잃어버렸으니 지금 어디 있는지 모르지 않느냐?’
이렇게 다투었으나 끝이 나지 않아, 그들은 왕에게 가서 판결을 구하면서, 제각기 사리를 따져 주장했다. 왕은
이들의 주장을 다 들었으나 그래도 결단을 내릴 수 없어 이렇게 말하였다.
‘두 집에서 이 아이를 함께 길러라. 그리고 아이가 장성하거든 두 집에서 각각 그의 아내를 맞이하여 살림을 따로 차리고, 이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이 집에 붙이고 저 부인이 아이를 낳으면 아이는 또 저 집에 붙이라.’
그리하여 두 사람은 각각 왕이 시키는 대로 그 아들이 장성하자 각각 결혼시켜 생활에 아무 부족함이 없게 했다. 그 아들이 부모에게 출가하기를 청했을 때 부모는 애정으로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허락했다. 아들은 곧 부처님께 가서 청해 불도에 들어가려 하므로 부처님께서 곧 허락하시고 칭찬하시면서 말씀하셨다.
‘잘 왔도다.’
그러자 아들의 수염과 머리털은 저절로 떨어지고 곧 사문이 되어 이름을 중성(重成)이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설법하여 그는 온갖 번뇌가 다 없어지고 그 자리에서 바로 아라한이 되었다. 아난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알 수 없습니다. 이 중성은 본래 어떤 행을 닦고 어떤 선근을 심었기에 지금 세상에 나서 물에 빠져 고기가 삼켰어도 끝내 죽지 않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우선 들으라. 나는 설명하리라. 오랜 옛날 비바시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와 대중을 모으고 그들을 위해 묘한 법을 연설하셨다. 그 때 어떤 장자가 그 모임에 와서 그 부처님의 3귀계(歸戒)를 듣고 불살계(不殺戒)를 받은 뒤에 또 그 부처님께 1전(錢)을 보시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세세생생에 복을 받아 아무 부족함이 없었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장자가 바로 지금의 저 중성이니라. 그는 그 1전의 보시로 말미암아 91겁 동안 항상 재물이 많았고 금세에 와서 두 집의 공급을 받았으며, 불살계를 받았기 때문에 물에 떨어져 고기가 삼켜도 죽지 않았고 3귀계를 받았기 때문에 지금 내 세상을 만나 아라한의 도를 얻었느니라.’”
또 『불설장자자오뇌삼처경(佛說長者子懊惱三處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사위성의 어떤 큰 부자 장자는
재보는 무수하였으나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죽은 뒤에 그 재물을 관가에 몰수당할까 염려하여, 그 부부는 3보(寶)께 기도하고 귀명하여 정진하고 게으르지 않았으므로 그 부인은 곧 임신하였다.
지혜로운 여자는 으레 다섯 가지 일을 잘 안다. 첫째는 남편의 뜻을 알고, 둘째는 남편의 생각하고 생각하지 않는 것을 알며, 셋째는 임신한 까닭을 알고, 넷째는 아기의 남녀를 알며, 다섯째는 그 선악을 안다. 이 여자는 장자에게 말하였다.
‘나는 아기를 잉태하였습니다.’
그래서 장자는 기뻐했다. 달이 차서 아들을 낳자 장자는 다섯 유모를 데려다 공양하고 안아 길렀고, 아이가 장성하자 좋은 여자에게 결혼시켰다.
그 아들 부부는 동산으로 놀러나가 무우(無憂)라는 나무를 보았다. 그 꽃 빛은 깨끗하고 부드러우며 붉은 비단 빛 같았다. 아내가 남편에게 말하였다.
‘나는 저 꽃을 가지고 싶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그 꽃을 꺾으려고 나무 위에 올라갔다가 연약한 나뭇가지가 부러져 아들이 그만 떨어져 죽었다. 부모는 이 소식을 듣고 곧 달려가, 아들의 머리를 안고 어루만지며 자세히 보았으나 아들의 숨은 아주 끊어져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부모는 슬픔에 5장이 다 끊어지는 듯하였으며 여러 손님들도 이것을 보고 모두 애통해 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과 함께 성 안으로 들어갔다가 이 독자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고 가엾이 여겨 그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나면 죽음이 있고 사물은 이루어지면 무너짐이 있으며 과보가 닥치면 목숨이 다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니, 버리고 간 것을 다시 걱정하지 말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이 아이는 본래 도리천에 있다가 거기서 수명이 끝나 그대 집에 와서 태어났고, 지금 그대 집에서 목숨을 마치면 곧 용으로 태어나 금시조(金翅鳥)의 왕이 잡아먹을 것이니, 그 때는 세 곳의 부모가 한꺼번에 울 것이다. 그렇다면 그 아이는 과연 누구의 아들인가?’
그리고 부처님께서 곧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천상의 저 모든 천자를
다 그대의 아들이라 하겠는가?
저 모든 용들 속에 있다 하여
그것을 용신(龍神)의 아들이라 하겠는가?
그 때에 이 부처는 다 알고 말하노니
그것은 저 하늘들의 아들 아니요
또한 그대의 아들도 아니며
또한 저 용들의 아들도 아니니라.
나고 죽는 저 모든 인연들은
무상(無常)하기 마치 허깨비 같고
모두가 오래 머무르지 않는 것은
마치 저 지나가는 나그네 같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장자에게 말씀하셨다.
‘죽음은 벗어날 수 없는 것이요 이미 간 것은 잡을 수 없는 것이니라.’
장자는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아이의 전생의 죄와 복은 어떠하나이까?’
‘이 아이는 전생에 보시하기를 좋아하고 남을 존경하였다. 이 복덕으로 말미암아 부호의 집에 태어났었고, 사냥하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그 목숨이 짧았으니, 죄와 복이 사람을 따르는 것은 마치 그림자가 형체를 따르는 것과 같으니라.’
장자는 기뻐하면서 또 법인(法忍)을 얻었다.”
(4) 이착부(離著部)
『십주비바사론(十住毗婆娑論)』에서 말하였다.
“가정이란 곧 부모ㆍ형제ㆍ처자ㆍ권속ㆍ수레ㆍ말 등이 불어나기를 추구하여 만족할 줄 모르는 곳이다. 가정이란 그 채우기 어려움은 마치 바다가 모든 강물을 삼키는 것과 같고, 가정이란 그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은 마치 불이 섶나무를 태우는 것과 같다. 가정이란 쉼이 없어서 각관(覺觀)이 늘 계속되는 곳이다. 가정이란 괴로운 성질이라 원수가 친한 이를 속이는 것과 같고, 가정이란 장애하는 곳이라 성인의 도를 방해하며, 가정이란 어지러이 싸우는 곳이라 항상 서로 다투며, 가정이란 성[瞋]이 많아 항상 좋다 나쁘다 꾸짖는 곳이다.
가정이란 덧없는 곳이라 아무리 오래 가려 해도 반드시 무너지고, 가정이란 온갖 고통이 닥치는 곳이라 항상 급급히 수호해야 하며, 가정이란 의심하는 곳이라 마치 저 원적(怨賊)과 같으며, 가정이란 착각하는 곳이라 거짓 이름을 탐하고 집착하며, 가정이란 기생과 같아 갖가지로 거짓 꾸미는 곳이요, 이 가정이란 잘 변하는 곳이라 가난하면 반드시 흩어져 가며, 이 가정이란 거짓이라 진실한 일이 없는 곳이요, 가정이란 꿈과 같아서 부귀도 곧 사라지는 곳이며, 가정이란 아침 이슬과 같아 잠깐 사이에 사라지는 것이요, 가정이란 꿀 방울 같아 그 맛이 매우 적은 곳이며, 가정이란 가시밭과 같아 탐욕의 가시가 사람을 해치는 곳이요, 가정이란 쇠부리벌레와 같아 각관(覺觀)을 항상 쪼아먹는 곳이다. 이런 우환은 다 낱낱이 적을 수 없느니라.
그러므로 재가(在家)보살은 그것을 이런 것이라 관찰하고 그 허물을 알아야 하느니라. 집에 있는 처자ㆍ권속ㆍ노비ㆍ재물 등은 나를 구제하지 못하고 귀의할 곳이 아니며 나의
좋은 벗이 아니니, 그러므로 그것을 빨리 버려야 하느니라. 또 까마득한 옛날부터 일체 중생들은 6도(道) 가운데서 서로 부자(父子) 사이가 되었거늘, 거기 어찌 일정한 친소(親疎)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다음과 같은 게송을 외우느니라.
저 무명이 슬기의 눈을 가리어
되풀이하는 나고 죽는 가운데로
오고 가면서 갖가지 업을 지어
서로 아비 되고 또 자식되었네.
세간의 즐거움을 탐하고 집착하여
보다 훌륭한 일 있는 줄을 모르고
원수를 자주 벗이라 생각하고
친한 벗을 또 원수라 생각했네.
그러므로 나의 가르침에 의하여
부디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마음 내지 마라.
사랑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일으키면
진실한 법을 알지 못하느니라.”
또 『대보살경』에서 말하였다.
“사리자야, 만일 어떤 중생이 남녀ㆍ처첩 등 모든 여자에 대한 색욕에 맛들이면, 그것은 조약돌의 우박에 맛들이는 것이요 예리한 칼날에 맛들이는 것이며 크고 뜨거운 쇠알에 맛들이는 것이요. 뜨거운 쇠평상에 맛들여 앉는 것이며 뜨거운 쇠안석[鐵几]에 맛들이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화만을 쓰고 향을 바름에 맛들이면 이것은 뜨거운 쇠화만에 맛들이는 것이요 또한 대소변을 몸에 바름에 맛들이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거처하는 집을 섭수(攝受)하면 이것은 크고 뜨거운 쇠독을 섭수하는 것이요, 노비와 하인을 섭수하면 이것은 지옥의 악졸(惡卒)들을 섭수하는 것이며, 코끼리ㆍ말ㆍ낙타ㆍ나귀ㆍ소ㆍ염소ㆍ닭ㆍ돼지 등을 섭수하면 이것은 지옥의 검고 얼룩진 돼지ㆍ개 등을 섭수하는 것이요, 또 1백 유선나에 뻗친 금위(禁衛)의 졸개들을 섭수하는 것이다. 요약해 말하면 만일, 처첩ㆍ남녀 등 모든 여색(女色)의 탐욕을 섭수하면 이것은 일체의 온갖 고통과 근심ㆍ슬픔ㆍ번뇌의 무더기를 접수하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차라리 천 유선나나 되는 크고 뜨거운 쇠평상이나 극히 뜨겁고 두루 뜨거운 불꽃에 의지해 붙을지언정 부모가 주는 처첩
등 모든 여색의 욕망에 대해, 더러운 애욕의 마음으로 멀리서나마 그 모습을 바라보지도 말아야 하겠거늘, 하물며 그것을 가까이해 껴안아서야 되겠는가?
왜냐 하면 사리자야, 여자란 바로 모든 고통의 근본이요 장애의 근본이며 살해의 근본이요 결박의 근본이며 근심 걱정의 근본이요 원수 되는 근본이며 장님 되는 근본이기 때문이니라. 또 여자는 성스러운 슬기의 눈을 파멸하는 것이요 또 여자란 뜨거운 쇠꽃을 땅에 뿌려 놓고 맨발로 그 위를 밟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여자란 모든 사특한 성질을 유포하고 증장시키는 것이니라.
사리자야, 무엇 때문에 여자라 하는가? 이른바 여자란 무거운 짐을 지는 것이다. 왜냐 하면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게 하기 때문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게 하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무거운 짐을 지고 두루 다니게 하기 때문이요, 중생들로 하여금 이 무거운 짐 때문에 마음을 피곤하게 하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이 무거운 짐 때문에 들볶이게 하기 때문이며, 중생들로 하여금 이 무거운 짐 때문에 다치게 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또 무엇 때문에 여자라 하는가? 이른바 여자란 모든 중생들이 무엇을 운반해 맡기는 곳이요, 탐애(貪愛)의 종이 되어 떠돌다 빠지는 곳이기 때문이다. 여자에게 순종하면 조세(租稅)를 실어다 바치는 곳이요, 아리따운 여자는 중생이 미혹하는 곳이며 뛰어난 여자는 중생이 항복하는 곳이요, 여자에게 굴복하는 자에게는 의지하는 곳이 되고 여자가 마음대로 하면 중생이 방탕하는 곳이 되며, 여자의 종이 된 자에게는 몹시 시달리는 곳이 되고 여자를 따라 놀림이 되는 자가 흠앙하는 곳이 되나니, 사리자야, 이런 인연으로 이 온갖 곳을 여자라 하느니라.”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세 종류의 아들이 있다. 세 종류란 첫째는 부모를 따라 난 아들이요, 둘째는 부모보다 잘난 아들이며, 셋째는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다. 부모를 따라 난 아들이란, 이른바 부모가 살생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으며 음탕하지 않고 거짓말하지 않으며, 술을 마시지 않으면 아들도 그에 따라 살생 등을 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따라 난 아들이라 하느니라.
부모보다 잘난 아들이란, 이른바 부모는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받지 않더라도 아들은 능히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받나니, 이것을 잘난 아들이라 하느니라.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란, 부모가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받지 않으면 아들도 살생하지 말라는 등의 계율을 받지 않나니, 이것을 부모보다 못난 아들이라 하느니라.”
또 『오무반복경(五無返復經)』에서 말하였다.
“이렇게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에서 1,250비구들과 함께 계셨다.
그 때 어떤 범지(梵志)가 라열기국(羅閱祇國)에서 공부하러 사위국으로 왔다가, 어떤 밭가는 부자(父子)를 보았다. 독사가 그 아들을 물어 아들은 죽게 되었으나 그 아버지는 여전히 밭을 갈면서 아들은 보지 않고 그 아들도 울지 않았다. 범지가 그 아버지에게 물었다.
‘이 아이는 누구 아들이오?’
아버지가 대답했다.
‘그 아이는 내 아들이오.’
그러자 범지가 물었다.
‘당신 아들이라면 어째서 울지도 않소?’
아버지가 말하였다.
‘사람은 나면 죽고 성한 것은 반드시 쇠하며, 선한 사람은 좋은 과보가 있고 악한 사람은 나쁜 과보가 있는 법이오. 아무리 슬퍼하고 울어 보아야 죽음에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오. 당신은 지금 성 안으로 들어가거든, 우리 집은 아무 데 있는데 거기 들러서 ≺지금 내 아들은 이미 죽었으니 한 사람 분 점심만 가져 오라≻고 전해주시오.’
범지는 가만히 생각했다.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아무 반복(返復)이 없는가? 아들이 땅바닥에서 죽었는데 슬퍼하는 기색도 없이 도리어 음식만 찾는가? 이처럼 인정 없는 사람이 있을까?’
범지는 성 안으로 들어가 그 사람 집에 들러 그 죽은 아이 어머니에게 말했다.
‘당신 아들은 이미 죽었고 그 아버지가 ≺한 사람 분 음식만 가지고 오라≻고 소식을 전합디다.’
그리고 범지는 이어 물었다.
‘그런데 아들이 죽었다 해도 왜 아무 반응이 없습니까? 아들은 생각지도
않습니까?’
그러자 아이 어머니는 곧 비유로 말하였다.
‘아이가 나를 의탁해 났을 뿐이오 내가 아이를 부른 것이 아닙니다. 아이는 지금 제가 간 것이니 내가 만류할 것도 아닙니다. 비유하면 나그네가 들렀기 때문에 주인이었지만 나그네가 지금 떠날 때에는 주인이 그것을 붙들 수 없는 것처럼 우리 모자 사이도 이와 같아서, 가고 오기와 떠나고 머무르는 것은 내 힘이 아니요 그 본행(本行)을 따른 것이니 내가 구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지는 또 그 누나에게 물었다.
‘당신 아우가 이미 죽었는데 왜 울지도 않습니까?’
그 누나도 비유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목수가 산에 들어가 나무를 베어 그것을 엮어 큰 뗏목을 만들어 물에 띄워 두었다가, 큰바람이 일어 뗏목이 부서져 물을 따라 흘러갈 때는 앞뒤의 것이 각기 흩어져 서로 돌아보지 않는 것처럼, 우리 남매도 그와 같아서, 인연이 화합해 한집에 났지만, 수명의 길고 짧음을 따라 죽고 삶이 무상하여 모이면 헤어짐이 있는 것입니다. 내 아우는 목숨이 다해 각기 제 갈 데로 가는 것이라 내가 구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지는 또 그 아내에게 말하였다.
‘당신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왜 울지도 않습니까?’
그 아내도 비유로 말하였다.
‘비유하면 새들이 해가 저물어 한 나무에 모여 함께 자다가 이튿날 아침에는 제각기 날아가 먹이를 찾는 것처럼, 인연이 있으면 모이고 인연이 없으면 흩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부부도 이와 같아서 무상(無常)이 닥쳐 각기 그 본행(本行)을 따라 가는 것이라 내가 구호할 수 없는 것입니다.’
범지는 또 그 종에게 말하였다.
‘상전이 이미 돌아가셨는데 왜 울지도 않는가?’
종도 또 비유로 말하였다.
‘우리 상전과 인연이 화합하여 나는 마치 송아지가 어미 소를 따르듯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미 소를 죽일 때 송아지는 그 곁에 있으면서도 어미 소의 목숨을 구제하지 못합니다. 아무리 슬퍼하고 운들 무슨 이익이 있겠습니까?’
범지는 이 말을 듣고 마음으로 자신이 무식한 것을 자책하고 후회했다. 그리고 생각했다.
‘나는 이 나라 사람들은 부모께 효도하고 3보를 공경하여 받들어 섬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멀리서 학문하러 여기까지 왔지만, 여기 와서 아무 이익이 없음을 깨달았다.’
그래서 다시 길가는 사람들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나는 여쭈어 볼 일이 있습니다.’
행인이 말했다.
‘요즈음 기원정사(精舍)에 계십니다.’
범지는 곧 부처님께 가서 머리를 조아려 예배한 뒤에 한쪽에 물러앉아 합장하고 머리를 숙인 채 잠자코 아무 말이 없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뜻을 아시고 물으셨다.
‘왜 머리를 숙인 채 걱정하고 즐거워하지 않는가?’
범지가 말했다.
‘제 소원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모두가 제 본 뜻과 틀립니다. 그래서 즐겁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또 물으셨다.
‘무엇을 잃었기에 근심하고 즐겁지 않는가?’
범지는 말하였다.
‘저는 나열기에서 학문을 위해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 와서 다섯 사람이 반복(返復)이 없는 것을 보았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물으셨다.
‘그 다섯 사람이 반복이 없는 것이란 무엇인가?’
범지는 말하였다.
‘나는 부자(父子) 두 사람이 밭에서 씨 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아들이 땅바닥에 죽어 있는데 그 아버지가 슬퍼하지 않고 온 집안의 노소들도 전연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대역(大逆)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지 않다. 그대 말과 같지 않다. 그 다섯 사람은 가장 잘 반복한 것이다 몸의 덧없음과 몸은 자기 소유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안 것이다. 옛날부터 성인도 이 죽음은 면하지 못하거늘 왜 범부를 위해 큰 소리로 울고 작은 소리로 울겠느냐? 그것은 죽음에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것이다. 세속 사람들은 무식하여 끊임없이 생사에 유전하고 있는 것이다.’
범지는 이 말을 듣고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말하였다.
‘나는 부처님 말씀을 듣잡고, 병자가 병이 나은 것과 같고 장님이 눈을 얻은 것과 같으며 어둠 속에서 등불을 얻은 것과 같습니다.’
그리고 범지는 도의 자취를 얻고는 말하였다.
‘일체의 죽음은 울 것이 아니다. 죽음을 멸하고 출생을 예방하는 것이 근심하지 않는 법이다. 죽은 사람의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사는 사람은 씨를 심어 산업(産業)을 가진다. 죽은 사람을 위하려면 부처님과 스님들을 청해 향을 피우고 공양하며 경전을 독송하고 날마다 예배하며 또
3보께 보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나서 머리를 조아려 부처님께 예배하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게송을 읊는다.
권속은 힘쓰고 시끄러움이 많아
물들고 집착하여 마음을 어지럽힌다.
친하고 성김은 결정된 것이 아니거니
어찌하여 치우쳐 미워하고 사랑하는가?
건성(乾城)은 조금도 실체가 없건만
목마른 사슴들이 아지랑이를 다툰다.
마음을 쉬면 상공의 메아리요
잡념을 버리면 마음 근원 참되다.”
감응연(感應緣)[대략 일곱 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의 거사(居士) 두원(杜願)
진(晋)의 거사 동청건(董靑建)
송(宋)의 거사 원곽(袁廓)
송(宋)의 거사 변열지(卞悅之)
당(唐)의 사문 석혜여(釋慧如)
당(唐)의 거사 왕회사(王會師)
당(唐)의 거사 이신(李信)
진(晋)의 거사(居士) 두원(杜願)
진(晋)나라 두원(杜願)은 자는 영평(永平)이요, 재동(梓橦) 사람이다. 집은 큰 부자요 아들 하나가 있었는데, 이름은 천보(天保)로서 두원은 천보를 매우 사랑했다. 태원(泰元) 3년에 천보는 나이 10세에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 몇 달이 지난 뒤에 그 집에서 기르는 돼지가 새끼 다섯 마리를 낳아 처음 태어난 새끼가 제일 살이 쪘다. 뒤에 그 고을에 장관이 새로 부임해 왔을 때 두원은 그를 대접하기 위해 처음 난 돼지 새끼를 잡았다. 갑자기 어떤 비구가 두원 앞에 나타나 말하였다.
“그 돼지는 바로 그대 아들이다. 겨우 1백여 일에 어찌하여 벌써 잊었는가?”
그리고는 이내 사라졌다. 두원이 4방을 둘러보았을 때 그는 서쪽 하늘로 날아가고, 향기가 퍼져 하루가 지나서야 그쳤다.
진(晋)의 거사 동청건(董靑建)
진(晋)나라 동청건(董靑建)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 아버지 현명(賢明)은 건원(建元) 초년에 월기교위(越騎校尉)가 되었다. 청건의 어머니 송(宋)씨가 청건을 배었을 때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말하였다.
“당신은 반드시 아들을 낳을 것이오. 날 때 그 몸에
푸른 표가 있을 것이니 그에 따라 이름을 청건이라 하시오.”
아이가 나자 과연 그 말과 같았으므로 이로 인해 청건이라 이름했다. 청건은 거동이 단정하고 말과 웃음이 아름다우며 성질은 너그러워, 아무도 성내는 얼굴을 못 보았으므로 모두가 신기하다 했다. 나이 14세 때에는 그 고을의 주부(主簿)가 되었고, 건원 초년에 황저(皇儲)가 번한(樊漢)을 진압할 때에는 수조참군(水曹參軍)이 되었다.
2년 7월 17일에 병이 위독했을 때 그는 스스로 말하였다.
“내 병은 결코 낫지 않을 것이다.”
임종 때에 일어나 앉아 그의 어머니에게 말하였다.
“죄가 다하면 복이 올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인연의 얽힘이 영원히 끊어지리니, 어머님은 은애(恩愛)를 베어 버리시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그리고 7성(聲)으로 크게 울다가 울음소리가 그치자 이내 숨이 끊어졌다. 그리하여 그 재실 앞에서 장사를 치르려 했다. 그 날 밤에 혼령이 나타나 말하였다.
“이승과 저승은 아주 다르니 빈소를 재실 앞에 두지 마시오 불상(佛像)을 만드는 어떤 도인이 스스로 와서 시체를 맞이해 갈 것이오.”
이튿날 과연 담순(曇順)이라는 도인이 그 혼령의 말대로 왔다.
담순이 말하였다.
“빈도(貧道)는 남림사(南林寺)에 있으면서 1장 8척의 불상을 만들어 거의 다 되었는데 현자(賢子)의 그런 감응이 있었습니다. 우리 절 서쪽에 조그만 빈터가 있으니 거기 안장(安葬)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절 곁에 안장했다. 3일 만에 그 어머니가 10여 명의 친족을 데리고 무덤에 가서 제사를 드렸는데 무덤 동쪽에 청건이 나타나 마치 생시처럼 어머니에게 말했다.
“어머님은 애정을 끊어버리고 그만 돌아가십시오. 청건은 지금 절에 돌아가 있겠습니다.”
어머니는 울음을 그치고 돌아와 온 집에 채식(菜食)으로 장재(長齊)를 지냈다. 윤달 11일에 그 아버지 현명의 꿈에 청건이 나타나 말하였다.
“아버님, 잠깐 동쪽 재실로 나가십시오.”
현명은 곧 향탕(香湯)에 목욕 재계하고 동재로 나가 있었다. 14일 밤에 현명은 꿈결에 청건이 부르는 소리를 듣고 놀라 일어나, 청건이 생시처럼 동재 앞에 있는 것을 보고 곧 물었다.
“너는 그 동안 어디 있었느냐?”
청건은 대답하였다.
“저는 죽은 뒤로부터 지금까지 연신궁(練神宮) 안에 있사온데 1백 일이 차면 저 도리천에 가서 날 것입니다. 저는 부모
형제들이 울며 애통해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어 21일이 되는 날, 모든 부처님과 보살님께 예배하고 4천왕에게 청하여 그 때문에 잠깐 돌아왔습니다. 지금부터 부모님은 다시는 울면서 제사 지내지 마십시오. 어머니는 저를 보기 위해 발원하였으므로 오래지 않아 목숨을 마치면 곧 저와 한곳에 나실 것입니다. 그리고 아버님은 73세까지 사시다가 목숨을 마친 뒤에는 3년 동안 죄의 과보를 받으시겠지만 부지런히 도를 닦아 행하시면 그것을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는 또 물었다.
“너는 지금 밤중에 오는데 어떻게 그런 광명이 있느냐?”
청건은 말하였다.
“지금 여러 보살님과 하늘들과 함께 내려오므로 이것은 그들 몸의 광명입니다.”
또 물었다.
“너는 천상에서 누구를 보았느냐?”
청건은 대답하였다.
“왕차기(王車騎)ㆍ장오흥(張吳興)과 외조부(外祖父) 송서하(宋西河)를 만났습니다.”
청건은 이어 말하였다.
“저는 다만 이 문중(門中)에서만 난 것이 아닙니다. 47년 이래로 지금까지 일곱 번 죽고 일곱 번 나서 이미 4종의 도과(道科)를 얻었습니다. 먼저 7원(願)을 발하여 인간에 나기를 원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생사를 겪었지만, 지금부터는 7고(苦)를 아주 떠날 것입니다. 저는 임종 때에 7처(處)의 생사를 보았습니다. 그 때 크게 운 것은 그들 7가(家)와 이별하겠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물었다.
“너는 그 동안 누구누구 집에 태어났었더냐?”
청건은 대답하였다.
“강리부(江吏部)ㆍ양광주(羊廣州)ㆍ장오응(張吳興)ㆍ왕차기(王車騎)ㆍ소오흥(蕭吳興)ㆍ양급사(梁給事)ㆍ동월기(董越騎) 등의 집에 태어났지만 이들 집에서는 오직 17년 만 살았고 나머지 여러 곳에서는 53년 동안 살았습니다. 지금부터 여러 해 동안 독한 병이 유행할 것이니 부디 부지런히 공덕을 닦으십시오. 제가 보기로는 세상 사람들은 죽어서 3도(塗)에 많이 떨어지고 하늘에 나는 이는 적습니다. 부지런히 정진하면 구제 될 수 있을 것이요, 천상에 나기를 발원해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수행이 다르면 서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입니다.”
또 물었다.
“지금 네 어머니가 너를 생각하는 슬픔에 거의 죽게 되었으니 너를 만나 보게 할 수 없겠느냐?”
청건은 말하였다.
“만나 볼 필요 없습니다.”
“그러면 더욱 애만 태우다 말겠느냐?”
청건은 말하였다.
“다만 이 이야기만 말씀하십시오. 저 여러 하늘들이
이미 떠났으니 저도 여기 오래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 참연한 슬픈 빛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그가 떠난 뒤에 대숲 좌우에는 아직도 향기가 남아 있어 사람들이 다 그 향내를 맡을 수 있었다.
청건이 태어난 일곱 집이란, 강개(江槪)ㆍ양희(羊希)ㆍ장영(張英)ㆍ왕현(王玄)ㆍ송모(宋謨)ㆍ소혜명(蘇惠明)ㆍ양계부(粱季父) 등이다. 현명은 드디어 출가하여 이름을 법장(法藏)이라 했다.
송(宋)의 거사 원곽(袁廓)
송(宋)나라 원곽(袁廓)은 자가 사도(思度)이니 진군(陳郡) 사람이다. 원휘(元徽) 때에 그는 오군승(吳郡丞)이 되었다. 병을 앓은 지 며칠 안 되어 남은 숨길만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으므로, 관과 수의(壽衣) 등을 모두 갖추고 죽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염습한 지 3일 만에 몸을 움직이고 눈을 깜빡이며 사람들을 보고 말하였다.
“어떤 사자(使者)가 명령을 받고 왔다면서 나를 데리고 갔다. 어딘가 가자 성(城)이 있었는데 누각은 높고 정연하며 계단은 아름다웠다. 내가 거기 가자 주인은 남쪽을 향하여 앉아 있고, 뜰에는 많은 사람이 늘어서 의관(衣冠)이 위엄 있고 화려했다. 칼을 든 어떤 사람이 나를 가리키며 앉으라 하여 나는 앉았다. 서로 안부를 물은 뒤에 술상이 나왔는데 술과 지짐ㆍ과일ㆍ떡ㆍ김치 기타 안주 등은 모두 내가 일찍이 먹던 것으로서 그 종류나 모양이 세간 것과 다르지 않았다. 술이 몇 순배 돌고 난 뒤 주인은 내게 말했다.
‘나 주부(主簿)는 불행히 궁중 일에 빠뜨림이 많은데 당신은 영리하고 총명하기 때문에 당신을 채용하려 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십시오.’
나도 여기가 저승임을 알기 때문에 굳이 사양하면서 말했다.
‘못나고 재간 없는 나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일입니다. 더구나 나는 젊어서부터 외로이 자라 형제도 없습니다. 공사(公私)는 다르지만 부디 은혜를 베풀어 나를 놓아 돌려보내 주십시오.’
주부는 말했다.
‘당신은 저승과 이승이 다르기 때문에 사양하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곳의 영광스러운 녹(祿)과 대우로서 의복과 음식ㆍ수레 등은 다 당신의 세상보다 훌륭합니다. 간절한 내 마음은 꼭 함께 일하고 싶습니다. 내 소망을 저버리지 않으시리라고 나는 꼭 믿습니다.’
그래도 나는 굳이 사양하면서 말하였다.
‘내 자녀들은 아직 어려 이제 모두 겨우 이갈이 하는 나이입니다. 만일 내가 갑자기 여기 소임을 맡으면 아이들은 의탁할 데가 없습니다. 부자의
간절한 이 정을 가엾이 여겨 주십시오.’
그것으로 인해 눈물을 흘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주인은 말하였다.
‘당신이 그렇게 사양하시니 어찌 억지로 할 수 있겠소. 내 원을 이루지 못하니 한탄스러울 뿐입니다.’
그리고는 책상에 있는 책을 한 권 들고 어디에다 점을 찍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은혜에 감사하고 하직하고 돌아오게 되었는데 주인이 다시 말하였다.
‘당신은 선친(先親)을 뵙고 싶지 않습니까?’
그리고 나서 곧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리고 많은 관서(官署)를 지나 마지막에 어떤 성(城)에 이르렀다. 난간은 모두 검은 감옥 같았다. 거기 들어가 어느 비스듬한 곳으로 가자, 꽉 찬 모든 집들이 서로 맞대었는데 매우 누추했다. 다음의 어느 집에 이르러 내 생모(生母) 양(羊)씨를 보았다. 그녀는 그 집에 살면서 더러운 옷이 모두 생시와 달랐으며 나를 보자 놀라며 반가워했다. 그 문 곁에 있는 어떤 사람은 몸과 얼굴에 부스럼이 생기고 그 꼴이 매우 이상했다. 그녀는 나를 불러 무슨 말을 하려 하므로 나는 놀라 양씨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양씨가 말하였다.
‘이 사람은 왕부인(王夫人)이신데 너는 모르겠느냐?’
왕부인이 나를 보고 말하였다.
‘나는 세상에 있을 때, 인과를 믿지 않았다. 그렇다고 무슨 별다른 중한 죄는 없었고 다만 가만히 앉아 잘못한 종들에게 매질했기 때문에 이런 벌을 받는다. 내가 죽은 뒤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고초는 잠깐도 그치지 않았다. 그래서 전에는 네 누이를 불러 와서 내 대신 받도록 하려 했으나 끝내 아무 소용이 없었고 다만 걱정만 더했을 뿐이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렸다. 왕부인은 바로 내 적모(嫡母)요, 내 누이는 그 때도 그 곁에 있었다.
조금 있다가 그 사자는 다시 나를 데리고 가서 어떤 거리를 지나갔다. 마을 집들은 모두 잘 정돈되어 백성들이 사는 집들 같았는데, 한 집도 대나무 울타리나 초가집이 없었다. 아버지는 가슴을 열고 두건을 쓰고 책상을 기대고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가는 것을 보고는 손을 들어 나를 가라고 하면서 말하였다.
‘너는 이미 풀려났으니 빨리 돌아가라. 여기 올 것 없다.’”
그래서 원곽이 아버지께 하직을 고하고 돌아올 때 그 사자는 원곽을 집에까지 데려다 주고 돌아갔다. 원곽은
바로 지금의 세마(洗馬)이다.
송(宋)의 거사 변열지(卞悅之)
송(宋)나라의 거사(居士) 변열지(卞悅之)는 제음(濟陰) 사람이다. 벼슬을 그만두고 조구(潮溝)에 살 때, 나이 50세에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의 아내가 그를 위해 첩을 얻어 주었으나 그 첩마저 여러 해가 되도록 아기를 배지 못했다. 그래서 자식을 보기 위해 『관음경(觀音經)』을 천 번 읽기로 했다. 천 번의 수가 거의 찼을 때 그 첩이 아기를 배어 드디어 사내아이를 낳으니, 원가(元嘉) 18년 기축년이었다.[이상 네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당(唐)의 사문 석혜여(釋慧如)
당(唐)나라 경성(京城) 진적사(眞寂寺)의 사문 혜여(慧如)는 젊어서부터 부지런히 고행(苦行)하면서 신행(信行)을 스승으로 섬겼으며 신행이 죽은 뒤에는 오로지 그의 법을 믿고 받들었다.
수(隋)나라 대업(大業) 때에 참선하여 선정을 닦아 7일 동안 꼼짝하지 않았으므로 대중은 모두 감탄하고 이상히 여기면서 삼매에 들었다고 했다. 얼마 뒤에 혜여는 눈을 뜨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 대중이 이상해 묻자 그는 말하였다.
“불이 내 다리를 지져서 앓다가, 상처가 다 낫는 것을 보고서야 이제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혜여는 그 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는데 다음과 같다. 혜여는 염라왕에게 붙들려 가서 그에게 7일 동안만 불도 수행하기를 청했다. 7일이 다 되자 염라왕은 혜여에게 물었다.
“그대는 선친(先親)과 친우를 보고 싶은가?”
혜여가 말하였다.
“그 두 사람을 다 보고 싶습니다.”
왕은 사람을 보내어 한 사람을 불러왔다. 그러나 거북 한 마리가 와서 혜여의 발을 핥으면서 눈물을 흘릴 뿐이었다.
또 한 사람에 대해서 말하였다.
“그는 죄가 지중하여 불러 낼 수가 없으니 그대가 직접 가서 보라.”
사자는 혜여를 데리고 옥문으로 갔으나 문이 굳게 닫혀있었다. 문지기를 부르자 대답하는 사람이 있었다. 사자가 혜여를 보고 말하였다.
“스님은 급히 피하시오. 문 앞에 바로 다가서지 마시오.”
그러자 혜여는 한쪽으로 피했다. 문이 열리자 큰불이 문 안에서 흘러나오는데, 마치 불볕이 쏟아져 나오듯 혜여의 다리에 붙어 다리를 태웠다. 눈을 들어 바라보았으나 문은 이미 닫혀 끝내 사람은 보지 못했다. 왕은 비단 30필을 혜여에게 주었다. 그러나 혜여는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왕이 말하였다.
“이미 뒷방에 보냈다.”
여러 스님들은 모두 뒷방으로 가서 그 비단이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보았다. 불에 탄 다리의 상처는 돈 만한데 1백여 일이 지나 다 나았다.
혜여는 무덕(武德) 초년에 죽었고, 그 때의 진적사는 바로 지금의 화도사(化度寺)다.[이 한 가지 증험은 『명보기(冥報記)』에 나온다.]
당(唐)의 거사 왕회사(王會師)
당(唐)나라 경도(京都) 서시 북점(北店)의 왕회사(王會師)는 그 어머니가 먼저 돌아가시어 복(服) 입기를 다 마쳤다. 현경(顯慶) 3년에 그 집에서 청황빛 암캐가 났다. 그 강아지가 음식을 훔쳐먹었다 하여 회사의 아내는 막대기로 그 개를 여러 번 때렸다. 개가 드디어 사람으로 변해 말하였다.
“나는 네 시어미다. 네가 나를 때린 것은 큰 잘못이다. 나도 집 종들을 너무 심하게 다스렸기 때문에 이런 과보를 받았는데, 이제 나는 이렇게 맞았으니, 네 집에 큰 수치스러운 일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곧 달아났다. 회사는 이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면서 곧 나가 개를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개는 또 나갔다. 이렇게 네다섯 번 되풀이하다가, 그 마음이 좀 누그러진 것을 보고, 회사는 시장 북쪽 큰 거리에 있는 자기 점포 북쪽에 큰 담을 쌓고 그 뒤에 조그만 집을 짓고 거기 개를 두고는 날마다 음식을 보내었다. 시장 사람과 나그네 등 많은 사람들이 모두 와서 보고 떡을 던져 주는 사람도 말할 수 없이 많았다. 이 개는 그 집을 떠나지 않았으나 재(齋)를 지내는 날에는 음식을 먹으려 하지 않았다. 12년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 모른다.
당(唐)의 거사 이신(李信)
당(唐)나라 거사 이신(李信)은 병주(幷州) 문수현(文水縣) 태평리(太平里) 사람으로서, 융정부위사(隆政府衛士)로 있었다. 현경(顯慶)연간 겨울에 상례(常例)를 따라 삭주(朔州)로 당번을 가게 되어 붉은 초마(草馬)를 타고 붉은 초구(草驅)를 데리고 떠났다. 때는 세밑이라, 날씨는 매우 춥고 바람과 눈은 매우 매서워 10여 리를 가다가 말이 더 나아가지 못했다. 이신은 당번 기한이 촉박하여 채찍으로 말을 수십 번 때렸다. 말은 드디어 사람으로 변해 말하였다.
“나는 너의 어미다. 생전에 네 아버지 몰래 한 섬 남짓 쌀을 거지 여자에게 주었기
때문에 지금 이런 과보를 받았고 또 이 망아지는 네 누이이다. 그러나 나는 노력해 그 빚을 다 갚았는데 너는 왜 또 나를 이처럼 핍박하는가?”
그러자 이신은 이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어쩔 줄을 모르다가 곧 사과하고 예배한 뒤에, 몸소 그 말의 안장과 고삐를 지고 말하였다.
“진실로 내 어머니라면 우리 집을 찾아 가 보십시오.”
말은 곧 앞서 가고 이신은 안장과 고삐를 지고 뒤를 따라 집으로 갔다. 이 신의 형제 등은 이것을 보고 슬퍼하면서 맞이하고는 마구간을 따로 지어 말을 넣어두고 마치 어머니를 섬기듯 먹여 길렀다. 그리고 스님을 청해 재를 지내면서 온 집안이 모두 정진하였으므로, 그 고을의 도인과 속인들은 모두 감탄했다.
그 때 공부시랑 온무은(工部侍郞 溫無隱)과 기주사법 장금정(岐州司法 張金停)은 모두 부모의 상(喪)을 당해 집에 있다가 이 말을 듣고 기이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들은 이신의 집에 가서 말이 그대로 있음을 보고 그 사정을 물어 보았는데, 모두 전하는 말과 같았다.[이상 두 가지 증험은 『명보습유(冥報拾遺)』에 나온다.]
57.교량편(校量篇)[여기에는 7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시전부(施田部) 십지부(十地部)
복업부(福業部) 죄업부(罪業部) 잡행부(雜行部)
방토부(方土部)
(1) 술의부(述意部)
깊고 밝은 슬기의 한 법칙은 중생 제도를 도모하는 데 있다. 업행(業行)의 선과 악은 오르고 내리는 과보를 받고, 크고 작은 나라의 말은 지역을 따라 그 길고 짧음이 다르며, 덕에는 숨고 나타남이 있고 행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그러므로 여러 성인들이 그 자취를 내림에 있어서 그 느낌을 반연하여 그에 따라 응할 때, 혹은 기적을 보이고 상을 나타내며 혹은 형체를 감추고 자취를 숨긴다. 그러나 그 법칙은 다르더라도 도를 넓힘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는 것이니, 만일 비교해 헤아리지 않으면 그 낫고 못함을 알기 어려운 것이다.
(2) 시전부(施田部)
『보살본행경』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수달에게 말씀하셨다.
‘옛날
비람(比藍)이라는 바라문은 얼굴이 단정하여 비할 데 없고 슬기가 제일이며 재보가 무량하여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비람은 생각했다.
≺이 재보는 다 무상한 것이다. 나는 이것을 쓰지 않고 궁핍한 사람들에게 보시하리라.≻
그리하여 큰 보시회를 열어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 왔다. 비람은 손을 씻으려고 군지(軍持)를 기울였다. 그러나 물이 나오지 않아 그는 크게 걱정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지금 큰 행사를 하려는데 내게 무슨 죄가 있기에 물이 나오지 않는가?≻
그 때 허공에서 천인(天人)이 말하였다.
≺당신이 행하는 큰 보시는 매우 좋은 일로서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없습니다. 다만 당신이 보시하려는 그 사람들은 다 간사하고 거짓이 많으며 소견이 비뚤어진 무리들로서 당신이 공경하는 그런 공양을 받을 만한 사람이 못 됩니다. 그래서 그 물이 안 나오는 것입니다.≻
이에 비람은 이 천인의 말을 듣고 깨침이 있어 곧 서원하였다.
≺지금 나는 이 보시로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이루려는 것이다. 내 이 서원이 진실이라면 내 쏟는 이 물이 내 손에 떨어져라.≻
이렇게 서원한 뒤에 병을 기울이자 물이 곧 손에 쏟아졌다. 천인들은 그를 찬탄했다.
≺당신의 서원대로 당신은 오래지 않아 부처가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비람은 빈궁한 이들에게 의복과 음식을 보시하되 12년 동안 다 보시하고 하나도 남기지 않았다.’
부처님께서 이어 말씀하셨다.
‘그 때의 그 비람 바라문은 바로 지금의 나이니라. 그때 내 보시도 좋았고 그 마음도 좋았다. 그러나 보시를 받는 사람이 좋지 않으면 보시가 아무리 많더라도 그 얻은 과보는 매우 적으니라. 그런데 지금 내 법이 진실하고 묘하며 청정하고, 내 제자들이 진실하고 정직하면 보시는 비록 적더라도 얻는 과보는 매우 많을 것이다.
12년 동안 염부제의 모든 사람에게 보시하는 공덕보다 수다원 한 사람에게 보시하는 그 복이 훨씬 많고, 1백
수다원에게 보시하는 복의 과보와 앞의 복의 과보를 다 합해도 한 사다함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못하며, 1백 사다함에게 보시하는 복의 과보와 앞의 복의 과보를 합해도 한 아나함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못하고, 1백 아나함에게 보시하는 복의 과보와 앞의 복의 과보를 합해도 한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못하며, 1백 아라한에게 보시하는 공덕과 앞의 공덕을 합해도 한 벽지불에게 보시하는 것보다 못하며, 1백 벽지불과 1백 아라한과 1백 아나함과 1백 사다함과 1백 수다원 및 염부제의 모든 사람에게 보시하는 공덕을 모두 합해도, 탑과 승방(僧房)과 정사(精舍)를 세우고 과거ㆍ미래ㆍ현재의 4방승(方僧)에게 의복 음식 등을 보시하는 공덕이 저것보다 훨씬 많으니라.
또 앞에서 지은 모든 공덕도 한 부처님께 보시하는 공덕이 저것보다 훨씬 많아 헤아릴 수 없으며, 한 부처님께 보시하는 복덕과 앞의 공덕을 다 합해도 어떤 사람이 하루 동안에 3귀계(歸戒)와 8관재(關齋)와 5계(戒)를 지키면 이 공덕은 앞의 공덕보다 백천만 배나 더 많아 비유할 수 없을 만큼 많으니라. 또 계를 지키는 복덕과 앞의 일체 공덕을 다 합해도 한 식경(食頃)에 좌선하고 중생을 자비로 생각하면, 이 공덕은 저것보다 백천만 배나 더 많으니라. 또 앞의 공덕을 모두 다 합해도 법을 들어 마음에 두고 4제(諦)를 생각하면, 이 공덕은 앞의 것보다 가장 존귀하고 제일이어서 그 이상이 없느니라.’
이에 수달은 이 법을 듣고 기뻐하면서 몸과 마음이 청정해져서 아나함의 도를 얻었다.”
(3) 십지부(十地部)
『금강삼매불괴불멸경(金剛三昧不壞不滅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미륵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지금 그대를 위해 보살이 행하는 공덕지(功德地)의
법을 설명하리라. 초지(初地)보살은 초생달의 빛이 아직 나타나지 않았으나 그 밝은 상은 다 갖추어 있는 것과 같고, 2지 보살은 5일의 달과 같으며, 3지 보살은 8일의 달과 같고, 4지 보살은 9일의 달과 같으며, 5지 보살은 10일의 달과 같고, 6지 보살은 11일의 달과 같으며, 7지 보살은 12일의 달과 같고, 8지 보살은 13일의 달과 같으며, 9지 보살은 14일의 달과 같고, 10지 보살은 15일의 달이 원만하여 볼 만하며 밝은 상을 완전히 갖춘 것과 같아서, 그 마음이 담박하고 편히 머물러 움직이지 않으며 빠지지도 않고 물러나지도 않아 수릉엄삼매(首楞嚴三昧)에 머무느니라.’”
또 『무성섭론석(無性攝論釋)』에서 말하였다.
“이른바 초지(初地)에서 법계(法界)를 통달했을 때 일체의 지(地)를 통달한 사람은 초지를 바로 통달했을 때도 뒤의 일체의 지를 빨리 잘 통달하나니, 이것은 같은 종류이기 때문이다.
다음 게송과 같다.
마치 대나무의 첫 마디를 쪼개었을 때
다른 마디도 빨리 쪼개지는 것처럼
초지의 참 지혜를 얻으면
모든 지(地)를 빨리 얻을 수 있다.”
(4) 복업부(福業部)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한 염부제 사람의 복덕은 한 전륜성왕(轉輪聖王)의 복덕과 같고, 한 전륜성왕의 복덕은 한 동방 불우체 사람의 복덕과 같으며, 한 동방 불우체 사람의 복덕은 한 서방 구야니 사람의 복덕과 같고, 한 서방 구야니 사람의 복은 한 북방 울단월 사람의 복과 같으며, 한 북방 울단월 사람의 복은 한 4천왕(天王)의 복과 같고 한 4천왕의 복은 한 32천왕의 복과 같으며 한 32천왕의 복은 한 제석의 복과 같고 한 제석의 복은
한 염마천의 복과 같다. 이렇게 계속 비교하면 내지 비상천(非想天)의 복은 헤아릴 수 없느니라.”
또 『정법념처경』에서 말하였다.
“삼십삼천이 받는 5욕락(欲樂)을 금륜왕(金輪王)이 받는 5욕락에 비하면 이것은 저 하늘의 16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한다. 저들이 받는 하늘 몸은 뼈도 살도 없고 더러운 때도 없으며, 그들은 질투를 내지 않고 그 눈은 깜빡이지 않으며, 그 옷에는 때가 없고 연기와 안개도 없으며 또 대소변의 우환도 없다. 그 몸의 광명은 멀리 비추는데 전륜성왕은 이런 일이 없다. 자기네 처자를 치우치게 섭수(攝受)하지 않으며 질투를 떠나고 음식이 자재하며 잠이나 피로 등의 괴로움도 없는데 전륜성왕 등은 이런 일이 전연 없다.
이 여러 하늘 사람은 노래 춤 음악 등을 가르치는 사람이 없고, 그들은 남에게서 배우지 않아도 그 선업 때문에 저절로 다 안다. 그러나 거기서 타락할 때에는 그것을 다 잊어버린다. 도리천 같은 아래 하늘에도 이런 큰 쾌락이 있거늘 하물며 위의 하늘의 쾌락이겠는가? 그것은 비유할 수도 없느니라. 이렇게 계속 비교해 아래에서 위의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까지에 이르면 그 쾌락은 어디에도 견줄 수 없느니라.”
(5) 죄업부(罪業部)
『십륜경(十輪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찰제리의 전타라왕이 3보(寶)에 대해 악심을 일으키면 그는 일체의 부처님 처소에서도 구제를 받지 못하느니라. 비유하면 기름을 짤 때 낱낱 깨알에서 다 온갖 벌레를 내는데, 그 기름 짜는 바퀴가 돌아가 기름을 짜면, 이 기름 짜는 사람은 낮이나 밤이나 얼마나 많은 벌레를 죽이겠는가?
또 어떤 사람이 열 개의 바퀴로 기름을 짜면 한 바퀴는 하루 낮 하루 밤 동안에 천 섬의 기름을 짠다. 이렇게 내지 천 년을 짜면 그는 얼마나 많은 죄를 짓겠는가?”
지장 보살은 말하였다.
‘아무도 그가 짓는 죄의 분량을 모를 것이요, 오직 부처님만이 아실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또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그 10륜(輪)의 죄는 한 음탕한 여자의 집의 죄와 같고, 그 집에 있는 천 명의 여자가 다 애욕을 구한다면 이렇게 열 명의 음녀 집의 그 죄는 한 술집의 죄와 같으며 이런 열 집의 술집의 죄는 한 푸줏간의 죄와 같고 이런 열 집의 푸줏간의 죄는 한 찰제리ㆍ전타라 거사의 죄와 같으며 이 전타라의 10륜(輪)의 죄는 한 바퀴의 하루 낮 하루 밤의 죄와 같으니라.’
그리고 세존께서 다음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10륜(輪)의 죄는 한 음녀 집의 죄와 같고
10음녀 집의 죄는 한 술집의 죄와 같으며
10술집의 죄는 한 푸줏간의 죄와 같고
10푸줏간의 죄는 한 찰제리 집의 죄와 같다.”
(6) 잡업부(雜業部)
『수제가경(樹提伽經)』의 게송에 말하였다.
어떤 것이 허공보다 높은가?
아만(我慢)이 허공보다 높다.
어떤 것이 대지(大地)보다 무거운가?
계덕(戒德)이 대지보다 무겁다.
어떤 것이 초목보다 많은가?
어지러운 생각이 초목보다 많다.
어떤 것이 바람보다 빠른가?
의념(意念)이 바람보다 빠르다.
어떤 것이 하늘에 나는가?
10선(善)이 하늘에 난다.
어떤 것이 사람 몸을 입는가?
5계(戒)가 사람 몸을 입는다.
어떤 것이 지옥에 빠지는가?
10악이 지옥에 빠진다.
어떤 것이 축생에 떨어지는가?
저돌(觝突)이 축생에 떨어진다.
어떤 것이 금강보다 견고한가?
집착 없음이 금강보다 견고하다.
어떤 것이 학의 털보다 부드러운가?
마음 부드러움이 학의 털보다 부드럽다.
어떤 것이 전단보다 향기로운가?
지니는 계율이 전단보다 향기롭다.
어떤 것이 해와 달보다 밝은가?
부처 광명이 해와 달보다 밝다.
어떤 것이 산보다 편안한가?
좌선(坐禪)이 산보다 편안하다.
어떤 것이 땅보다 움직이는가?
3계(界)가 땅보다 움직인다.
어떤 것이 가장 청정한가?
열반이 가장 청정하다.
어떤 것이 가장 더러운가?
생사가 가장 더럽다.
어떤 것이 가장 높은가?
화목한 집이 가장 높다.
어떤 산이 가장 밝은가?
수미산이 가장 밝다.
어떤 나라가 가장 즐거운가?
사위국(舍衛國)이 가장 즐겁다.
어떤 나라가 인민이 많은가?
가이국(迦夷國)이 인민이 많다.
어떤 것이 깊은 산에 노는?.
사슴들이 깊은 산에 논다.
어떤 것이 숲을 좋아하는가?
여우 오소리가 숲을 좋아한다.
어떤 것이 풍진(風塵)에 떨어지는가?
모래자갈이 풍진에 떨어진다.
어떤 것이 깊은 못에 노는가?
잉어가 깊은 못에 논다.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어떤 천자가 다음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계율과 어떤 유의와
무엇을 얻고 무엇으로 업을 삼고
슬기로운 사람은 어떻게 살며
어떻게 천상에 가서 나는가?
그 때 부처님께서 다음 게송으로 답하셨다.
생물 죽임을 아주 버리고
계를 지녀 자신을 잘 방어하며
해칠 마음을 중생에게 가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주지 않는 것 취함을 아주 버리고
주는 것 가져 마음이 즐거우며
도적질할 마음을 끊어 없애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남이 사랑하는 것 빼앗지 않고
삿된 음행을 아주 버리어
자신의 사랑에 만족할 줄을 알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자기와 또 남을 위하고
재물 위하고 익살 잘 부리되
거짓말해서까지 그것 위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이간질하는 말을 끊어 버리어
남의 친우를 이간질하지 않고
항상 피차(彼此)를 화해시키기 생각하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상냥하지 않은 말을 아주 버리고
부드러운 말을 하여 남을 해치지 않으며
언제나 순박하고 아름다운 말 쓰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말이 되지 않는 말은 말하지 말라.
아무 의미 없으면 이롭지 않다.
언제나 법의 말을 따라 말하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한 마을이거나 빈 땅이거나
이익을 보면 내 소유라 하는 등
이런 탐욕을 부리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인자한 마음으로 해칠 생각이 없어
그 어떤 중생도 해치지 않고
마음에 항상 원한 맺음 없으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고통의 업과 또 그 과보
이 둘은 모두 깨끗한 믿음 낸다.
바른 견해를 받아 지니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이와 같은 이상의 모든 선법은
10종의 깨끗한 업의 자국이거니
이것을 고루 받아 굳게 지니면
이것이 곧 천상에 나는 길이다.
그 때 석제환인은 다음 게송으로 부처님께 여쭈었다.
어떤 법이 목숨을 알지 못하고
어떤 법이 목숨을 못 깨달으며
어떤 법이 목숨을 자물쇠 걸고
어떤 법이 목숨을 결박짓는가?
세존께서 다음 게송으로 답하셨다.
색(色)이란 것 목숨을 알지 못하고
모든 행이 목숨을 못 깨달으며
몸이 그 목숨 자물쇠 걸고
애욕이 목숨을 결박짓는다.”
또 『잡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손에 배만한 흙덩이를 드시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떠냐, 내 손의 이 흙덩이가 많으냐, 저 큰 설산의 흙과 돌이 많으냐?’
비구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세존 손의 흙덩이는 아주 적고, 저 설산의 흙과 돌은 너무 많아 산수로도 비유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의 4성제(聖諦)를 아는 중생은 내가 쥔 흙덩이와 같고, 그것을 여실히 알지 못하는 자는 저 대설산의 토석(土石)과 같으니라.’
그리고 세존께서는 손톱으로 흙을 집어 들고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내 손톱의 흙이 많으냐, 이 대지의 흙이 많으냐?’
비구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그 손톱의 흙은 매우 적고 이 대지의 흙은 너무 많아 산수로도 비유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중생으로서 형상을 볼 수 있는 것은 손톱의 흙과 같고, 그 형상이 미세하여 볼 수 없는 것은
대지의 흙과 같으며, 육지와 같이 물의 성질에 있어서도 또한 그렇다. 인도(人道)를 얻는 사람은 손톱의 흙과 같고 비인(非人)에 떨어지는 사람은 대지의 흙과 같으며, 중국에 나는 사람은 손톱의 흙과 같고 변방에 나는 사람은 대지의 흙과 같으며, 성인의 혜안(慧眼)을 이루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성인이 되지 못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며, 법률을 아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법률을 모르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며, 부모를 아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부모를 모르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며, 재계(齋戒)를 받을 줄 아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재계를 받을 줄 모르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또 지옥ㆍ축생ㆍ아귀 등에서 목숨을 마치고 인간에 나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지옥 등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지옥 등에 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며, 지옥ㆍ축생ㆍ아귀 등에서 목숨을 마치고 천상에 나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지옥 등에서 다시 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며,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다시 천상에 나는 자는 손톱의 흙과 같고 천상에서 목숨을 마치고 지옥 등에 나는 자는 대지의 흙과 같으니라.’”
또 『기세경(起世經)』에서 말하였다.
“염부제(閻浮提)에는 다섯 가지의 승사(勝事)가 있고 구타니(瞿陀尼)ㆍ불바제(弗婆提)ㆍ울단월(鬱單越)ㆍ염마세(閻摩世)와 일체의 용ㆍ금시조(金翅鳥)ㆍ아수라 등에는 각각 세 가지의 승사[事]이 있다.
그 다섯 가지란, 첫째는 용맹이요, 둘째는 바른 생각이며, 셋째는 부처가 세상에 나오는 것이요, 넷째는 업을 닦는 곳이며, 다섯째는 범행(梵行)을 행하는 곳이다. 구타니주에는
염부제보다 훌륭한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소가 많고, 둘째는 염소가 많으며, 셋째는 마니보주(摩尼寶珠)가 많은 것이다. 불바제주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그 섬이 넓고 크며, 둘째는 모든 작은 섬을 다 포함했으며, 셋째는 섬이 매우 훌륭하고 묘한 것이다. 울단월주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거기 사는 사람은 나와 내 것이 없고, 둘째는 수명이 가장 길며, 셋째는 그 행이 가장 훌륭한 것이다. 염마세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수명이 길고, 둘째는 몸이 크며, 셋째는 의복과 음식이 저절로 생기는 것이다.
일체의 용 및 금시조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수명이 길고, 둘째는 몸이 크며, 셋째는 궁전이 넓은 것이다. 아수라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수명이 길고, 둘째는 형색(形色)이 훌륭하며, 셋째는 많은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다. 4천왕천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궁전이 높고, 둘째는 궁전이 묘하며, 셋째는 궁전에 훌륭한 광명이 있는 것이다. 삼십삼천에도 세 가지의 승사가 있다. 첫째는 수명이 길고, 둘째는 몸빛이 훌륭하며, 셋째는 즐거움이 많은 것이다. 나머지 위의 4천(天)과 또 마천(魔天)은 다 삼십삼천과 같은데 어떤 것은 앞의 3천(天)보다 훌륭하다. 염부제의 다섯 가지의 승사와 다른 여러 하늘에 대해서는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게송을 읊는다.
악은 너무 많아 세기 어렵고
선은 적으므로 말할 수 있다.
사람과 하늘은 대개 적은데
탁한 세계는 티끌과 같다.
귀하고 천함은 서로 바뀌고
가난하고 부함은 원인이 다르다.
낫고 못함을 비교해 헤아리면
즐거움과 괴로움은 오르고 잠긴다.
위의 2천하 사람의 복은 한 동륜왕(銅輪王)의 복과 같고, 한 동륜왕의 복은 한 구타니 사람의 복과 같으며, 위의 3천하 사람의 복은 한 은륜왕(銀輪王)의 복과 같고, 한 은륜왕의 복은 한 울단월 사람의 복과 같으며, 위의 4천하 사람의 복은 한 금륜왕의 복과 같고, 한 금륜왕의 복은 한 사천왕천 사람의 복과 같으며, 한 사천왕천 사람의 복은 한 천왕의 복과 같고, 한 천왕의 복은 한 삼십삼천 사람의 복과 같으며, 한 삼십삼천 사람의 복은 한 제석의 복과 같고, 한 제석의 복은 한 염마천 사람의 복과 같고 한 염마천 사람의 복은 한 천왕의 복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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