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40권
법원주림 제40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37.사리편(舍利篇)[여기에는 5부가 있다.]
술의부(述意部) 인증부(引證部) 불영부(佛影部)
분법부(分法部) 감복부(感福部)
(1) 술의부(述意部)
성인의 덕은 아득하여 인간과 천상에서 뛰어나나니, 그 이치는 6경(經)보다 묘하고 그 신령스러움은 백씨(百氏)보다 높다. 모든 존재의 끼친 발자국에서 뛰어나고 여러 현량(賢良)들의 훌륭한 자취를 초월했다. 교화의 인연이 이미 끝났으니 세속을 따라 그 빛을 감추었다. 그러므로 쌍수(雙樹)의 8지(枝)는 뜻을 따라 나타난 것이고, 사리의 8분(分)도 인연을 따라 감응한 것이다. 마침 금강의 선정에 들려 하매 미리 온몸을 부수었고 복을 천인(天人)에 입히려 하매 그 공을 바다와 육지에 폈다. 심지어 치아ㆍ털ㆍ손발톱 등과 두개골과 눈동자 등과 가사ㆍ발우ㆍ병ㆍ지팡이 등과 앉으신 곳ㆍ발로 밟으신 자취 등 고금(古今)의 거룩한 변화의 무궁함을 총괄하여 상서로운 영험은 계속 이르고 상서로운 광명은 자주 빛남을 현우(賢愚)들이 함께 보나니, 어찌 시기하고 또 와서 의심하겠는가?
또 저 3황(皇) 5제(帝)와 하은(夏殷)ㆍ문무(文武)와 공구(孔丘)ㆍ장로(莊老)와 같은 이는 성인이요 현인으로서 모두가 따르고 공경하여 다 그 뼈를 5천(泉)에 묻고, 그 티끌을 9토(土)에 남기었다. 그러나 그 성광(聲光)은 적막하거니와 누가 그 자취를 알겠으며, 복이 생기는 것을 아는 이가 드물거니 어떻게 과보가 오는 것을 감득하겠는가? 그러하거늘 어찌 능인(能仁) 큰 성인의 형상과 그림자가 향기를 드리워 감응의 도가 무궁하고 경앙(敬仰)의 풍(風)이 더욱 멀리 퍼짐에 견주겠는가. 교화의 자취를 대천(大千)에 계속하여 침명(沈冥)을 사계(沙界)에서 구제하실 때, 비록 열어 보이는 그 도가 뜻을 따라 혹 다르기는 하더라도, 공(空)을 회귀하는 그 취지는 모두 한결같이 진실한 것이다.
(2) 인증부(引證部)
사리(舍利)란 서역(西域)의 범어(梵語)이니 한나라 말로 신골(身骨)이라 한다. 범부들의 죽은 사람 뼈와 혼동할까 염려하여 범본(梵本)의 이름을 그대로 둔 것이다. 사리에는 3종이 있다. 첫째는 뼈사리[骨舍利]이니 그 빛이 희고, 둘째는 털사리[髮舍利]이니 그 빛이 검으며, 셋째는 살사리[肉舍利]이니 그 빛이 붉다. 보살ㆍ아라한 등에게도 3종이 있다. 부처님의 사리는 망치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고 그 제자들의 사리는 망치로 때리면 곧 부서진다.
또 『보살처태경(菩薩處胎經)』에서 세존께서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옛날 행한 공덕을 생각하면 몸을 버리고 몸을 받은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지금 너희들에게 그 한 가지만 이야기하리라. 즉 모든 부처님의 전신 사리(全身舍利)는 이 땅 밑의 금강세계에 있다. 금강국토의 두께는 84만억 리이다. 모든 부처님의 몸을 빻아서 얻은 사리가 다 그 국토에 있다. 거기 묘향(妙香)이라는 부처 국토가 있고 거기 계시는 부처님 이름은 부주(不住)여래이신데, 그 부처님은 10호(號)를 다 갖추셨고 지금 거기서 설법하고 계시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서 말씀하셨다.
“몸을 빻아서 얻은 그 사리 밑의 두께는 84억 리요 거기 국토는 청정하며 거기 부처님의 이름은 변광(遍光)인데, 10호를 다 갖추고 지금 거기서 설법하고 계신다. 또 그 밑에 시무진장(施無盡藏)이라는 국토가 있고 거기 부처님의 이름은 권조(勸助)이시다. 또 그 밑에 법고(法鼓)라는 국토가 있고 거기 부처님의 이름은 선견(善見)이며 그 국토에 전신 사리가 있는데, 과거의 억천불이 모두 거기에 사리를 두었다. 그 국토에는 나의 사리도 있느니라.”
또 『해룡왕경(海龍王經)에서 여러 용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금 세존께서 염부제로 돌아가시면 이 바다의 모든 용들은 귀의할 데가 없습니다.
저희들에게는 큰 슬픔을 더 할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실 때 이 바다에 전신 사리를 두셨기 때문에 일체 중생들은 다 공양할 수 있었으므로 우리는 공덕을 더 쌓아 용의 몸을 빨리 벗고 위없는 정진(正眞)의 도를 빨리 얻었습니다. 부처님께서 은혜를 베푸시어 그 위에 위덕을 주시면 저희들은 소원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좋다, 네 말대로 들어 주리라.”
수보리(須菩提)가 여러 용들에게 말하였다.
“부처님의 사리는 일체 사람과 하늘들이 두루 구제를 받는 것이다. 그런데 그대들은 부처님 사리를 독점하여 모시려 하는구나. 그렇다면 일체 중생들은 무슨 인연으로 구제를 받겠는가?”
용들이 대답했다.
“수보리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자신의 한정된 지혜로 부처님의 끝없는 지혜를 한정하지 마십시오. 여래의 성스러운 덕은 변현(變現)하지 않는 것이 없어 삼천세계에 각각 화현(化現)하십니다. 부처님의 사리는 증감(增減)이 없어 일체에 두루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치 해 그림자가 물 속에 나타나는 것처럼 부처님은 나시지도 않고 멸도하시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어찌 여래의 지혜를 한정하려 하십니까?”
수보리는 이 말을 듣고 잠자코 말이 없었다. 부처님께서 용들을 찬탄하셨다.
“그대들은 현명하다. 실로 그대들 말과 같아서 다름이 없다. 불도는 높고 묘하여 가[邊]도 없고 끝도 없으며 모남도 없고 둥긂도 없으며 넓음도 없고 좁음도 없으며 먼 것도 없고 가까운 것도 없다. 그것은 비유하면 마치 저 허공과 같아서 어디에도 비유할 수 없느니라.”
(3) 불영부(佛影部)
『관불삼매경(觀佛三昧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처음에 석실(石室)에 남긴 그림자는 나건가라국(那乾呵囉國) 독룡지(毒龍池) 곁에 있는 아나사산(阿那斯山)에 있는 바위의 남쪽에 있다. 다섯 나찰녀(羅刹女)가 독룡과 내통하고 항상 우박비를 내렸다. 백성들은 굶주림과 병으로 4년을 지냈다. 그리하여 왕은 용에게 기도하고 주술(呪術)을 부렸으나, 나찰녀는 기운이 왕성하여 주술이 통하지 않았다. 왕은 꿇어앉아 합장하고
부처님의 신통과 지혜를 찬탄하면서 말하였다.
‘제 마음을 아실 것입니다. 부디 자비를 드리워 이 나라에 왕림하소서.’
그 때 부처님께서 그 나라로 가셨다. 용은 천둥과 벼락을 일으키면서 인갑(鱗甲)이 온통 불꽃을 뿜었으며 나찰녀는 그 눈이 번갯불 같았다. 그리고 금강신(金剛神)은 큰 절구 공이를 들었는데 그 공이 끝에는 불이 붙어, 마치 불바퀴를 돌리는 것 같아 독룡의 몸을 태웠다. 용왕은 놀라고 두려워하여 부처님의 그림자 속으로 달려들어갔다. 그 그림자는 마치 감로수(甘露水)를 뿌리는 것 같았다. 금강신이 매우 황급하여 부처님께 예배하고 다섯 나찰녀도 부처님께 예배했다. 용왕은 그 못에서 보대(寶臺)를 내어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의 보대는 내게 소용없다. 다만 나찰의 석굴만을 내게 보시하라.’
여러 하늘들은 각각 보배 옷으로 그 석굴을 소제했다. 부처님께서는 신족(神足)을 거두시고 혼자 석실(石室)굴에 들어가 그 석실을 들어 올려 7보(寶)로 만들었다.
그 때 용왕은 부처님의 4대 제자 및 아난을 위해 석굴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세존은 석굴에서 나오셨다. 용왕은 부처님께서 본국으로 돌아가신다는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슬피 울면서 말했다.
‘왜 저를 버리고 가십니까? 저는 부처님을 뵈옵지 못하면 반드시 악을 짓고 악도에 떨어질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용왕을 안심시키고 말했다.
‘나는 네 청을 들어 네 석굴 속에 앉아 1,500년을 지내리라.”
부처님께서 굴 속에 앉아 열여덟 가지 변화를 부려 몸을 솟구쳐 돌 속으로 들어가시자, 마치 밝은 거울이 돌 속에 있는 것 같아 안에서 비친 것이 밖으로 나타났는데, 멀리서 바라보면 나타나지만 가까이서 보면 나타나지 않았다. 백천 하늘들이 부처님의 그림자에 공양하자 그 그림자도 설법하였다. 이것이 지금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4) 분법부(分法部)
『보살처태경』에서 말하였다.
“그 때 8국(國)의 왕들이 사리를 가지고 서로 다투었다. 우파길(優波吉)이라는 한 대신이 8국의 왕에게 간(諫)했다.
‘무엇 때문에 군사를 일으켜 서로 싸우십니까?’
그리고 제석천(天)이 곧 사람으로 나타나 왕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하늘들에게도 한 몫이 있어야 합니다.
만일 힘으로 싸우신다면 승부가 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를 거기 참여시키는 것을 어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 때 아뇩달(阿耨達)용왕과 문린(文隣)용왕과 이나발(伊那鉢)용왕 등이 8국의 왕에게 말하였다.
‘우리 몫도 있어야겠습니다. 만일 주지 않으면 힘으로 굴복시킬 것입니다.’
그러자 우파길 대신이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멈추시오. 사리는 다 같이 나누어야 합니다. 무엇 때문에 서로 다투십니까?’
그리고 곧 3분으로 나누어 1분은 하늘에 주고, 1분은 용왕에게 주고, 1분은 8왕에게 주었다. 그것을 항아리로 나누어 받았는데 각각 1석(石) 남짓하였다. 이 대신은 꿀을 항아리 안에 바르고 사리를 고루 나누어주었다.
그리하여 하늘은 그 사리를 가지고 천상으로 올라가 곧 7보탑을 세우고, 용왕은 그것을 가지고 용궁으로 돌아가 7보탑을 세웠다. 대신 우파길은 사리를 항아리에 넣고 항아리까지 합해 보탑을 세우고, 재와 흙 49곡(斛)을 얻었는데 다시 그것으로 49기의 보탑을 세웠다. 또 다비[闍維]한 자리에도 보탑을 세우니 높이는 39인(仞)이었다.”[1인(仞)은 7척이다.]
또 『아육왕경(阿育王經)』에서 말하였다.
“8국의 왕이 사리 때문에 다투어 각각 군사를 일으켰다. 제석천(帝釋天)이 직접 내려와 그들을 타일러 금 항아리에 나누어주었다. 아사세왕이 다른 왕과 함께 각각 8만 4천 개의 사리를 얻었다. 그리고 부처님의 수염 하나만이 남았으나 감히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사세왕이 처음 왔다 하여 사리와 수염을 얻었다. 그들은 각각 돌아가 기뻐하면서 음악을 울려 하늘을 진동시켰다. 난두화(難頭禾)용왕이 사람으로 변화하여 부처님께서 열반하신 곳으로 가다가 길에서 아사세왕을 만나고 돌아와서 왕에게 말하였다.
‘가지고 있는 사리에서 1분만 주십시오.’
아사세왕이 안 된다 하자 용왕이 말하였다.
‘나는 난두화용왕 입니다. 만일 주지 않으면 당신 나라를 들고 8만 리 밖으로 던져 가루로 만들 것입니다.’
아사세왕이 두려워 곧 부처님의 수염을 그에게 주었다. 용왕은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 수미산 밑에
높이 8만 4천 리 되는 수정유리 탑을 세웠다. 아사세왕이 죽은 뒤에 아육왕이 그 나라를 얻었다. 그 때 어떤 대신이 아육왕에게 아뢰었다.
‘전에 난두화용왕이 아사세왕을 위협하여 부처님의 수염을 빼앗아 갔습니다.’
아육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화를 내어 곧 귀신의 왕에게 명령하여 철망을 만들고 그것을 수미산 밑의 물 속에 넣어 용왕을 묶으려 했다. 용왕은 크게 놀라 여럿과 계책을 상의했다.
‘아육왕은 부처님을 믿는다. 그가 자는 틈을 보아 그 궁전을 수미산 밑 물 속에 옮겨다 두면 반드시 그 성이 풀릴 것이다.’
그리고 곧 다른 용을 보내어 왕의 궁전을 들고 왔다. 왕은 깨어나 거기가 어딘지 몰라하다가, 높이 8만 4천 리 되는 수정 탑을 보고는 그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두렵기도 했다. 용왕이 직접 나와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아사세대왕이 부처님의 수염을 내게 직접 주신 것이지, 내가 뺏은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내게 말씀하시기를 ≺내가 열반한 뒤 겁(劫)이 다하려 할 때는 내 모든 경전과 계율 및 가사와 발우를 간직했다가 이 탑 안에 두고, 미륵이 내려올 때에 다시 그것을 내어 주라≻고 했습니다.’
아육왕이 이 말을 듣고 크게 사과하면서 말하였다.
‘나는 실로 그런 줄은 몰랐노라.’
용왕은 곧 다른 용들을 시켜 왕의 궁전을 본래 있던 곳에 옮겨 두게 했다.
또 『선견론(善見論)』에서 말하였다.
“제석천왕의 궁전 안에 2과의 사리가 있다. 하나는 부처님의 오른쪽 치아요, 다른 하나는 오른쪽이 이지러진 항아리 안의 뼈이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자 8국(國)에서 모두 찾아와 사리를 구하면서 각각 4병(兵)을 일으켜 사리를 둘러쌌다. 연(煙)이라는 바라문이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 역사(力士)들이여, 사리는 지금 여기 있습니다. 8분으로 나누어야 하겠습니다.’
역사들이 말했다.
‘삼가 여래께 상의하십시오.’
바라문이 다시 외쳤다.
‘사리를 넣은 병을 내게 주시면, 나는 그것을 가지고 두나라(頭那羅) 마을로 돌아가 탑을 세우겠습니다.’
그 때 필바라연나(畢波羅延那) 바라문이 다시 부처님을 다비한 곳에서, 부처님을 화장한 재를 청해 그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구시성(拘尸城)의 역사는 1분을 얻어 탑을 세웠으며, 파바국(波婆國)은 제2분을 얻어 그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라마(羅摩)마을은 제3분을 얻어 돌아가 탑을 세우고, 차륵국(遮勒國)의 여러 찰제리(刹帝利)는 제4분을 얻어 돌아가 탑을 세우고, 비누국(毗★國)의 여러 바라문은 제5분을 얻어 돌아가 탑을 세우고, 비야리국(毗耶離國)의 여러 이창(利昌)들은 제6분을 얻어 돌아가 탑을 세우고, 가비라바국(迦毗羅波國)의 여러 석자(釋子)들은 제7분을 얻어 돌아가 탑을 세우고, 마가다국의 아사세왕은 제8분을 얻어 왕사성에 돌아가 탑을 세웠다. 그리고 연 바라문은 사리를 넣은 병(甁)을 얻어 두나라(頭那羅) 마을로 돌아가 탑을 세우고, 필바라연 바라문은 재를 얻어 그 나라로 돌아가 탑을 세웠다..
그리하여 염부제 안에는 8개의 사리탑과 제9의 병탑[甁塔]과 제10의 재탑[灰塔]이 있게 되었다. 그 뒤로도 셀 수 없이 많은 탑이 세워졌다.”
또 『아육왕경』에서 말하였다.
“아육왕은 아사세왕이 빼앗긴 사리를 다시 찾으려 했다. 그런데 용왕은 항하(恒河) 속에 큰 철검륜(鐵劒輪)을 만들어 두고 수륜(水輪)을 사리가 있는 곳에 두고 돌렸다. 그래서 아육왕이 갖가지 방편을 다 써 보았으나 얻을 수가 없어 연화(蓮華) 비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저것을 얻을 수 있겠는가?’
비구가 대답했다.
‘수천 섬의 능금[柰]을 그 가운데 던지면 그 검륜을 멎게 할 수 있습니다.’
왕은 비구의 말을 따라 능금을 물 속에 넣고, 그 중의 하나를 시험삼아 그 기계 구멍 속에 넣었다. 그러자 검륜이 곧 정지하여 다시는 돌지 않았다. 그러나 용왕이 다시 그것을 수호하고 있었으므로 도무지 어찌할 수 없었다.
왕이 또 비구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얻을 수 있겠는가?’
비구가 말하였다.
‘용왕의 복이 뛰어나기 때문에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어떻게 용왕의 복이 뛰어남을 아는가?’
비구가 말하였다.
‘금으로 용의 상(像)과 왕의 상을 만들고 그 둘을 저울로 달아보십시오. 무거운 쪽이 복이 뛰어난 것입니다.’
왕이 곧 그렇게 해보았더니 용의 상이 배나 무거웠다. 왕이 이것을 보고 곧 부지런히 복을 닦았다. 그리고 다시 상을 만들어 달아보니, 두 상의 무게가 꼭 같았다. 왕이 더욱 부지런히 복을 닦고 다시 상을 만들어 달아보았다. 그 때는 왕의 상이 훨씬 무거웠다.
왕은 자신의 상이 무거운 것을 안 뒤에 여러 군사들을 거느리고 물가로 나갔다. 그러자 용왕이 스스로 나와 갖가지 보배를 왕에게 바쳤다.
왕이 용왕에게 말했다.
‘아사세왕이 네게 사리를 주셨다. 나는 지금 그 사리를 가지려 한다.’
용왕은 제 위력이 왕에게 미치지 못함을 스스로 알았으므로, 곧 왕을 인도해 사리가 있는 곳으로 가서 탑 문을 열고 사리를 꺼내어 왕에게 주었다. 그리고 아사세왕이 만든 등불까지 다 주려 했다. 그러나 사리를 집어내자 그 등불도 곧 꺼졌다. 왕은 괴이하게 여겨 또 연화 비구에 물었다.
‘아사세왕이 등의 기름을 어떻게 재량(裁量)해 두었기에 사리를 집어내자마자 바로 꺼지는가?’
존자가 말했다.
‘그 때 계산을 잘 하는 사람이 있어, 1백 년 동안에 얼마만큼 기름이 들 것이라는 것을 계산해 두었기 때문에 지금까지 켜져 있었을 뿐입니다.’”
(5) 감복부(感福部)
『대비경(大悲經)』에서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멸한 뒤에 만일 어떤 사람이, 겨자만큼 만이라도 내 사리에 공양하고 공경하고 존중하여 겸허하게 공양한다면, 이 사람은 이 선근(善根)으로 모두 열반세계를 얻고 열반의 끝까지 갈 수 있을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이 불상이나 탑을 만들어 세우고 곧 신심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며 나아가서 꽃 한 송이를 공중에 뿌린다면,
이 사람은 이 선근으로 모두 열반세계를 얻고 열반의 끝까지 갈 것이다.”
부처님께서 이어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중생이 부처님을 생각하며 꽃 한 송이를 공중에 뿌리면 이런 복덕으로 얻는 과보는 끝이 없을 것이다. 만일 어떤 중생이 지극한 성심으로 부처님의 공덕을 생각하고, 꽃 한 송이를 공중에 뿌리면 그는 오는 세상에 제석천왕이나 범천왕이나 전륜성왕이 되고 그 복의 과보도 끝이 없을 것이다. 또 부처라는 복밭에 보시하여 유위(有爲)의 과보가 끝이 없으면, 이 사람은 반드시 열반세계를 얻고 열반의 끝까지 갈 것이다. 심지어 어떤 축생이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선근으로 지은 복의 과보로 열반세계를 얻고 열반의 끝까지 갈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삼천대천세계에 네 가지 사문의 과(果)를 얻은 사람과 벽지불을 감자나 대나무나 갈대처럼 가득 채우고, 또 만일 어떤 사람이 현재나 멸도한 뒤에 탑을 세워 공양하고, 1겁이나 1겁이 못 되는 동안 마음에 드는 온갖 음악으로 공경하고 존중하여 겸허하게 공양하고, 만일 어떤 사람이 부처님 앞에서 단 한 번이라도 합장하고 한 번이라도 부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자, 이 복덕을 앞의 공덕에 비하면 1백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천분, 백천억분, 내지 가라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모든 복밭 중에서 제일이요 최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처님께 보시하면 큰 공덕과 신통의 위력을 이루느니라.”
게송을 읊는다.
금구(金軀)께서 산골(散骨)을 남기시니
보탑(寶塔)이 천룡(天龍)세계에 두루했네.
처음에 10탑을 세웠다가
나중에는 8만을 이루었네.
주개(珠蓋)는 신령스런 광명의 변화인데
찰주(刹柱)는 부용(芙蓉)을 토하며
아침 안개와 이슬을 여러 번 펼치고
새벽의 신령스런 자취를 자주 보인다.
붉은 무지개는 서로 비추어 피어나고
바람은 메아리를 흔들어 종소리와 어울리며
선란(仙鸞)은 가끔가끔 나타나고
신승(神僧)이 자주자주 따른다.
모든 성인 위에 홀로 뛰어나니
함식(含識)이 모두 공경하는 마음 낸다.
다듬이 방망이로 때려도 부서지지 않으니
비로소 성인의 덕이 큼을 알겠다.
감응연(感應緣)[대략 16증험을 인용한다. 수(隋)에 53주(州)가 있다.]
한(漢)의 승려와 도사(道士)가 법을 겨룸
위(魏)의 외국 사문이 금 쟁반에 놓은 사리가 5색의 불꽃을 날림
오(吳)의 강승회(康僧會)가 사리에 기도함
손호(孫皓)가 불법을 없애 버리려 할 때 사리가 채색을 냄
진(晋)의 축장서(竺長舒)가 사리를 물 속에 던지니 5색의 광명이 나 타남
진(晋)의 동왕(董汪)의 집의 목상(木像) 사리가 광명을 냄
진(晋)의 광릉(廣陵)의 사리가 광명을 놓음
진(晋)의 북쪽 지역 승려 법개(法開)가 절을 세우고 사리를 구함
진(晋)의 맹경(孟景)이 절을 세우고 사리 3과(顆)를 얻음
진(晋)의 의희(義熙) 때에 사리 1과가 스스로 나뉘어져 3과가 됨
송(宋)의 가도자(賈道子)가 부용꽃 속에서 사리 1과를 얻음
송(宋)의 안천재(安千載) 집에서 부처님을 받들고 사리를 얻음
송(宋)의 장수원(張須元) 집의 불상 앞의 꽃 위에서 사리 수십 과를 얻음
송(宋)의 유응지(劉凝之)가 액자 밑에서 사리 2과를 얻음
송(宋)의 서춘(徐椿)이 독경하다가 사리 2과를 얻음
한(漢)의 승려와 도사(道士)가 법을 겨룸
『한법내전(漢法內典)』에서 말하였다.
“명제(明帝)는 불법을 펴고 절을 세우며 승려를 제도했다. 5악산관(岳山館)의 도사(道士)들은 석로(釋老)와 도력(道力)을 겨루어 우열(優劣)을 가리자고 했다. 도경(道經)을 불로 시험했을 때 그것이 불에 닿자 곧 타서 재가 되었다. 도사들의 우두머리 비재(費才)는 부끄러워하고 슬퍼하여 대중 앞에서 죽었다. 장연(張衍)이 대중을 깨우쳐 그들은 모두 다투어 출가했다.
그 때 서역(西域)에서 가지고 온 사리 5과는 5색(色)으로 공중으로 바로 올라 일산처럼 돌면서 햇빛을 가리었다. 마등(摩騰) 아라한은 몸을 솟구쳐 높이 날아 올라 허공이 땅인 듯 서 있고, 땅을 허공처럼 밟으면서 신통 변화가 자재하여 대중을 위해 설법했다. 하늘은 보배 꽃을 내려 부처님과 스님들 위에 뿌리고 하늘 음악과 이상한 소리를 대중이 다 같이 들어 셀 수 없이 많은 사람을 구제했다.”
자세한 것은 다음의 ‘파사편(破邪篇)’에서 말한 것과 같다.
위(魏)의 외국 사문이 금 쟁반에 놓은 사리가 5색의 불꽃을 날림
위(魏)나라 명제(明帝) 때 낙성(洛城)에는 본래 3사(寺)가 있었다. 그 하나는 궁전의 서쪽에 있었다. 사리를 항상 번찰(幡刹) 꼭대기에 매어 두었는데, 그것이 예사로 궁전 안을 엿보았으므로, 명제가 그것을 싫어하여 없애 버리려 했다. 그 때 그 절에 있던 외국의 사문이 금 소반에 물을 담고 그 물에 사리를 넣으니 5색 광명이 불꽃을 날려 그치지 않았다. 명제는 그것을 보고 탄복하여 말하였다.
“신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이럴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길 동쪽에 주려(周閭) 1백 간을 짓고 그 이름을 관불도정사(官佛圖精舍)라 했다.
오(吳)의 강승회(康僧會)가 사리에 기도함
오(吳)나라 손권(孫權)의 적오(赤烏) 4년에 외국의 사문 강승회(康僧會)가 처음으로 강표(江表)에 와서 불상을 모시고 도를 수행했다. 오나라 사람들은 요괴(妖怪)라 생각하고 임금에게 알렸다. 손권은 승회를 불러 물었다.
“부처는 무슨 영험이 있는가?”
사문이 답하였다.
“부처님은 신령스런 자취를 감추었으나 그 유골(遺骨)인 사리는 중생을 구제하기 위하여 나타남[應現]이 견줄 데가 없습니다.”
손권이 물었다.
“그것은 어디 있는가?”
사문이 말했다.
“만일 사리를 얻으면 그것을 위해 절을 세우리라.”
이러하여 사문은 37일 동안 지성으로 기도하여 드디어 사리 병(甁)을 얻었다. 그리하여 아침에 손권에게 바치니 그 광명이 온 궁전을 비추었다. 손권이 병을 들어 금 소반에 쏟았다. 그러자 사리가 떨어지면서 소반을 때려 소반이 곧 부서졌다. 손 권은 크게 놀라 희유한 광경을 기이하게 여겼다.
승회가 말하였다.
“부처님의 영골(靈骨)은 금강처럼 썩지 않고 겁화(劫火)에도 타지 않으며 다듬이 방망이로 쳐도 부서지지 않습니다.”
손권이 역사(力士)를 시켜 방망이로 사리를 힘껏 때리게 했다. 그러나 방망이만 깨지고 사리는 상하지 않은 채 광명이 사방으로 비치어 사람의 눈을 부시게 했다. 또 불에 태우니 빛이 날아 올라 큰 연꽃이 되었다. 손권은 크게 신심을 내어 이에 절을 세우고 이름을 건초(建初)라 하고, 그 절이 있는 지방 이름도 불타리(佛陀里)라고 고쳤다.
손호(孫皓)가 불법을 없애 버리려 할 때 사리가 채색을 냄
손호(孫皓)는 악한 정치를 행해 불법을 없애버리려 하여 경전을 불사르고 탑을 부수었다. 신심이 있는 어떤 사람이 간(諫)하였다.
“우선 너그러이 말미를 주었다가 영험이 없음을 확실히 안 뒤에 없애도 늦지 않습니다.”
손호는 이 말을 따라 승회를 불러 말하였다.
“만일 그 영험이 눈앞에 나타나면 그대를 위해 불법을 일으키겠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불법을 폐하고 그대를 죽이리라.”
승회가 말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인연이 있으면 반드시 감응하십니다. 말미를 주시면 영험을 청하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손호는 사흘 동안의 말미를 주었다.
그 때 1백여 명의 스님들이
모두 절에 모였고, 손호는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절을 포위하고 또 무기를 가지고 기한이 되면 죽이려 했다. 승려들은 영험이 없을까 두려워해 스스로 목을 졸라 죽는 자도 있었다. 승회가 대중에게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리를 주실 때는 오직 지금 밖에 없다. 전에도 영험이 있었는데 어찌 지금에 와서 속이시겠는가?”
곧 기한이 되어 사리를 얻어 손호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이 여래의 금강의 뼈입니다. 지성으로 빨리 얻었습니다. 1백 균(鈞)의 방망이로 때려도 조금도 상하지 않을 것입니다.”
손호가 말했다.
“금석(金石)도 닳는데 마른 뼈가 어찌 견고하겠는가? 사문으로서 눈앞에서 속이다니, 그저 빨리 죽을 뿐이다.”
그리고 사리를 쇠 다듬잇돌 위에 놓고 금방망이로 내리쳤다. 금과 쇠는 다 움푹 패였으나 사리는 그대로 있었다. 다시 맑은 물로 씻으니 사리는 광명을 날리고 채색을 발하여 온 궁전을 환히 비추었다. 손호는 이에 기꺼이 감복해 믿고 정성을 다해 교화를 받았다.
진(晋)의 축장서(竺長舒)가 사리를 물 속에 던지니 5색의 광명이 나타 남
진(晋)나라 초년에 축장서(竺長舒)는 일찍부터 사리를 가지고 있으면서 매우 소중히 여겼다. 그 아들은 사문이 되어 이름을 법안(法顔)이라 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속가로 돌아오고 싶어하여 아버지를 비웃으면서 말하였다.
“사리란 모래나 돌일 뿐인데 무엇을 귀하다 하겠습니까?”
이에 아버지는 그 사리를 물에 던졌다. 사리는 5색으로 세 번 돌면서 광명이 여러 자나 높이 올라갔다. 법안은 이 영험을 보고 신심을 내어 마침내 속가로 돌아가지 않았다. 장서는 임종 때 세속에 얽매인 속된 생각을 내어 병이 위중했다가 사문이 되어 죽었다. 그 사리는 강하(江夏)의 탑 안에 넣어 두었다.
진(晋)의 동왕(董汪)의 집의 목상(木像) 사리가 광명을 냄
진(晋)나라 태흥(太興) 때에 어잠(於潛)의 동왕(董汪)은 목상(木像)을 믿었는데 그것이 밤에 광명을 내었다. 그 뒤에 목상 곁에서 무엇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나기에 동왕이 가 보았다. 그것은 바로 사리로서 물 속에서 떴다 잠겼다 하면서 5색이 찬란하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았다. 그 뒤에도 사문의 법으로서 그는 항상 가 보았다. 그것은 드디어 높이 4ㆍ5척의 공중에 솟아올랐다가 다시 그의 품속으로 들어갔다
그는 곧 말하였다.
“만일 저로 하여금 절을 세우게 하시려거든 다시 위신(威神)을 보이소서.”
그러자 그것은 그의 앞에 나와 뛰었다. 그가 곧 절을 짓자, 어잠 사람으로 불법에 귀의하는 사람이 하루에 10여 명이었다.
진(晋)의 광릉(廣陵)의 사리가 광명을 놓음
진(晋)나라 대흥(大興) 때에 북쪽 사람으로서 광릉(廣陵)에 귀양가는 이가 하루에 천여 명이었다. 어떤 사람이 사리를 가지고 조그만 절을 세웠다. 사리는 광명을 발하여 찰봉(刹峯)까지 이르러 사방 사람들이 다 감동했다.
진(晋)의 북쪽 지역 승려 법개(法開)가 절을 세우고 사리를 구함
진(晋)나라 함화(咸和) 때에 북쪽 지역 승려 안법개(安法開)는 여항(餘杭)으로 가서 절을 세우고자 했으나 돈이 없었다. 그래서 여러 해 동안 돈을 꿰는 새끼를 꼬아 팔아 3만 냥을 얻었다. 시장에 집을 짓고 새끼 꼬는 것을 업으로 삼으면서 절을 세우려 했으나 사리가 없었다. 나유(羅幼)란 사람이 일찍부터 사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법개는 거기 가서 사리를 간청했다. 그러나 그는 주지 않았다.
법개는 어느 절에 가서 부처님께 예배했다. 나유의 사리가 그 자리 앞에 있었으므로 그는 나유에게 가서 알렸다. 나유는 그를 따라 절에 가서 사리를 보고 기뻐하여 그것을 법개에게 주었다. 그래서 둘이서 여항에 절을 세웠다고 한다.
진(晋)의 맹경(孟景)이 절을 세우고 사리 3과(顆)를 얻음
진(晋)나라 함강(咸康) 때에 건안(建安) 태수(太守) 맹경(孟景)이 절을 세우고자 했다. 저녁에 책상머리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찾아보다가 사리 3과를 얻어서 절을 세웠다.
원가(元嘉) 16년 6월에 사리는 광명을 놓아 아래위를 두루 비추다가 이레만에 사라졌는데, 모두가 그것을 보았다.
진(晋)의 의희(義熙) 때에 사리 1과가 스스로 나뉘어져 3과가 됨
진(晋)나라 의희(義熙) 원년에 유림읍(有林邑) 사람이 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재일(齋日)마다 그것이 빛을 내었다.
사문 혜수(慧邃)는 광주 자사(廣州刺史) 조규(刁逵)를 따라 남방에 있으면서 그 빛나는 상을 공경하여 달라고 하려다가 미처 말을 내지 못했다. 그런데 사리가 스스로 나누어져 2과가 되었다. 조규가 이 말을 듣고 기뻐하여 또 그에게 가서 그것을 달라 했다. 그런데 사리가 또 나누어져 3과가 되었다.
조규는 장간사(長干寺)의 불상을 본뜨려 했다. 그러나 그 절 주지가 고집을 부리고 들어 주지 않았다. 그 날 밤 꿈에 키가 여러 장(丈)이나 되는 어떤 사람이 나타나 주지에게 말했다.
“불상은 선전하여 교화함이 고귀하거늘 왜 그리 인색한가?”
이튿날 아침에 주지는 조규에게 본뜨는 것을 허락했다. 본뜬 불상이 이루어지자 조규는 그 사리를 불상의 상투 속에 넣었다. 서방에서 오는 불상들이 많이 방광(放光)하는 것은 다 사리 때문이다.
송(宋)의 가도자(賈道子)가 부용꽃 속에서 사리 1과를 얻음
송(宋)나라 원가(元嘉) 6년에 가도자(賈道子)는
형상(荊上)으로 가다가 부용꽃이 한창 피어 있는 것을 보고 조금 꺾어 집으로 돌아왔다. 꽃에서 무슨 소리가 들려 괴상히 여겨 찾아보다가 사리 1과를 얻었다. 진주처럼 흰 꽃이 광명을 내어 온 집을 비추었다. 공손히 받들어 상자에 넣고 벽에 달아 두었다.
그 집안 사람은 항상, 어떤 스님이 밖에서 들어와 가사를 벗고 책상 위에 앉고, 어떤 사람은 그 집에서 자면서 무례하게 구는 것을 보았다. 그 사람의 꿈에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를 보고 말했다.
“이 사람은 석가의 진신(眞身)으로서 여러 성인들이 와서 경례하는데 너는 왜 나쁜 짓을 하는가? 죽어서는 지옥에 떨어지고 거기서 나오면 사람의 노비가 될 것이다. 어찌 두렵지 않은가?”
그 사람은 크게 놀라 얼마 안 되어 병으로 죽었다. 사리가 있는 그 집 땅에서는 연꽃 여덟 송이가 나서 60일 만에 시들더니, 1년 뒤에는 어디로 갔는지 없어졌다.
송(宋)의 안천재(安千載) 집에서 부처님을 받들고 사리를 얻음
송(宋)나라 원가(元嘉) 8년에 회계(會稽)의 안천재(安千載)는 그 집안이 모두 불법을 받들었다. 밤에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있어 나가 보았다. 10여 명이 붉은 옷을 입고 재물을 싣고 와서 문안에 쌓으면서 말하였다.
“관청에서 불도(佛圖)를 만들라 한다.”
그리고 어디론지 사라졌다. 이튿날 그는 남의 집 재(齋)에 가서 잿밥을 먹다가 사리 1과를 얻었다. 빛은 자금색이고 방망이로 쳐도 깨어지지 않으며 물로 씻으면 광명을 발산했다. 그는 늘 공경했고 사리는 항상 이상한 향기를 내었다. 그 뒤에 사리를 내어 예배하려 했으나 간 곳이 없어 두루 찾아 반나절만에 돌아왔다.
그 때 임천왕(臨川王)이 강릉(江陵)을 진수(鎭守)하러 갈 때 그를 맞이해 갔다. 사리는 가끔 여러 가지 빛을 내었다. 좌사(佐史)와 사문들이 다 사리를 보았으나 그 빛은 같지 않았다. 왕이 그것을 담는 물그릇을 받들고 축원했을 때 그 소리를 따라 그것은 곧 빛을 내었다. 밤에 어떤 사람 1백여 명이 사리가 있는 그 집을 돌고 향을 사르며 꽃을 받드는 것이 마치 부처님께서 나오실 때와 같았다. 날이 밝자 사람들과 사리는 모두 간 곳이 없었다.
송(宋)의 장수원(張須元) 집의 불상 앞 꽃 위에서 사리 수십 과를 얻음
송(宋)나라 원가(元嘉) 9년에 심양(潯陽)의 장수원(張須元)의 집에서 8관재(關齋)를 베풀었다. 승려와 속인들 수십 명이 불상 앞의 꽃 위가 마치 빙설(氷雪)과 같은 것을 보고 그 자리를 자세히 살펴보다가 사리 수십 과를 얻었다. 물로 씻으니 빛을 계속 내었다.
그 뒤에 그것이 갑자기 없어졌는데, 며칠만에 부엌문을 열어 다시 치아 사리를 얻었다. 향합 안의 흰 천에 들어 있는 사리 10과는 빛을 발산해 하늘에 닿았다. 여러 나라에서 다 와서 보고 그것을 달라고 했다.
송(宋)의 유응지(劉凝之)가 액자 밑에서 사리 2과를 얻음
송(宋)나라 원가(元嘉) 15년에 남군(南郡)의 유응지(劉凝之)는 형산(衡山)에 들어가 숨어살면서 나라에서 불러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5두미(斗米)의 도(道)를 받들면서 불법은 믿지 않았다. 꿈에 어떤 사람이 땅에서 여러 장(丈) 떨어진 공중에서 그에게 말했다.
“너의 의심이 비로소 풀릴 것이다.”
그는 깨어나 갑자기 깨치고는, 반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부지런히 부처님께 예배했다. 갑자기 액자 밑에서 자색 광명을 보고 그 자리를 더듬어 사리 두 과를 얻었다. 그것은 쪼개도 때려도 깨지지 않고 물에 씻으면 광명이 나며 밥을 먹을 때는 치아 사이에 숨고 뱉으면 또 광명을 내었다. 그 아내와 아들이 또 1과 씩 얻어 모두 5과가 되었다. 그 뒤에도 갑자기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아 곧바로 얻었다.
송(宋)의 서춘(徐椿)이 독경하다가 사리 2과를 얻음
송(宋)나라 원가(元嘉) 19년에 고평(高平)의 서춘(徐椿)은 경을 읽고 밥을 먹다가 사리 2과를 얻어 항아리에 넣어 두었다. 뒤에 다시 보았을 때는 그것이 차츰 불어나 20과가 되었다. 그는 그 뒤에 광릉령(廣陵令) 유복(劉馥)의 집에 기숙하고 있었다. 유복이 가만히 그 항아리를 열어 보았을 때 그 항아리는 비어 있었는데 서춘이 고향에 돌아갔을 때는 그것이 갑자기 나타났다. 그러나 그 뒤에 그가 타락하자 그것들은 다 간 곳이 없었다. 사리의 응현(應現)을 본 사람은 많지만 그것을 공경하는 사람은 얻고, 업신여기는 사람은 잃는다.
사리가 동방으로 흘러 들어와 여러 임금의 대(代)를 지냈지만 그 전기에 전하는 것은 만에 하나도 안 된다. 사상(事相)이 거듭되고 응현(應現)이 잦음으로 말미암아 그것은 신기한 것이 아니었으니, 부처님의 교화가 잠기고 숨는 것은 실로 그 까닭이 있어서이다. 그러나 탑을 세우는 나라도 있었다. 그 중에도 수(隋)나라 때가 제일이었으니, 교화가 미친 한 경계 안에 1백여 군데가 있어 신기한 감응이 많이 나타났다. 모든 별전(別傳)에 있는 것을 지금 대충 뽑아 내어 그 감득(感得)을 표한다.
수문제(隋文帝)가 세운 불사리탑(佛舍利塔)[28주(州)에 탑을 세우고 53주(州)에 상서로운 감응이 있었다.]
옹주(雍州)의 선유사(仙遊寺)ㆍ기주(岐州)의 봉천사(鳳泉寺)ㆍ화주(華州)의 사각사(思覺寺)ㆍ동주(同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ㆍ경주(涇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ㆍ태주(泰州)의 대악사(垈岳寺)ㆍ병주(幷州)의 무량수사(無量壽寺)ㆍ정주(定州)의 상악사(常岳寺)ㆍ숭주(嵩州)의 숭악사(嵩岳寺)ㆍ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ㆍ곽주(廓州)의 연운악사(連雲岳寺)ㆍ형주(衡州)의 형악사(衡岳寺)ㆍ양주(襄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ㆍ모주(牟州)의 거신산사(巨神山寺)ㆍ오주(吳州)의 회계산사(會稽山寺)ㆍ소주(蘇州)의 호구산사(虎丘山寺).
이상 17주(州)의 절에 세운 탑은 절의 재물과 정고(正庫)의 재물로 만든 것이다.
진주(秦州)ㆍ과주(瓜州)ㆍ양주(楊州)ㆍ익주(益州)ㆍ호주(毫州)ㆍ계주(桂州)ㆍ교주(交州)ㆍ여주(汝州)ㆍ번주(番州)ㆍ장주(蔣州)ㆍ정주(鄭州).
이상 11주(州)는 산수(山水)와 주현(州縣)의 절 등 청정한 곳을 따라 탑을 세운 것이니, 그곳에서 나온 물건은 앞의 것과 같다. 문하(門下:제자)는 우러러 생각합니다. 정각(正覺)께서는 대자대비로 중생을 구호하고 만물의 나루터와 다리가 되십니다. 짐(朕)은 3보(寶)께 귀의하고 성교(聖敎)를 다시 일으켜, 4해(海) 안의 일체 인민들과 함께 보리심(菩提心)을 내고 복업(福業)을 닦기를 생각한다. 우리로 하여금 현재와 미래에서 길이 선인(善因)을 지어 다 함께 묘과(妙果)에 오르게 하라.
짐(朕)은 사문 30인과, 법상(法相)을 잘 알고 또 선교하고 인도할 수 있는 사람을 청하여, 그들에게 각각 시자(侍者) 2인을 주고 또 산관(散官)에게 각각 한 사람을 주어 120근의 향을 사르고,
말 다섯 마리로 길을 나누어 사리를 보내어, 앞에 적은 여러 주(州)에 가서 탑을 세우려 한다. 그것은 저 천륙사(川陸寺)와 같은 것으로서 산수사(山水寺)에 세운 탑도 그대로 있다.
그 산에 본래부터 절이 없으면 그 주(州) 안에 있는 청정한 절터에 그 탑을 세우리라. 맡은 바 도량을 만들 사람을 그 주(州)에 보내되, 스님이 많으면 360명, 그 다음은 240명, 또 그 다음은 120명이며 스님이 적을 때는 거기 있는 스님을 다 쓸 것이다.
그리하여 짐(朕)과 황후ㆍ태자ㆍ여러 왕자ㆍ왕손 등 및 내외의 관리와 일체 신민(臣民)과 유현(幽顯)의 생령(生靈) 등을 위해 각각 7일 동안 도를 행하고 또 참회하며 도를 행하는 날에는 타찰(打刹)할 것이다. 그 주(州)나 다른 주를 불문하고 그 사람에 맡겨 보시하게 하되, 돈은 10문(文) 이하로 한정하고 10문 이상은 못 하게 할 것이다. 보시한 돈으로 모두 탑을 만들 때 만일 돈이 적어 충당할 수 없으면 부역을 시키거나 창고의 물건을 쓸 것이다.
적국 모든 주(州)의 승니(僧尼)들은 다 사리를 위해 재(齋)를 지내되, 10월 15일 오시(午時)를 기한하고, 또 그 때에 사리를 돌 함에 넣을 것과 자사(刺史) 이하, 현위(縣尉) 이상이 총관(總管)하고, 군기(軍機)가 아니면 일상 사무는 정지하고 7일 동안은 오로지 도를 행하고 타찰(打刹)하는 일 등을 검사할 것이니, 주관하는 자는 부디 정성과 공경을 다해 짐의 뜻에 부응(副應)하도록, 시행하라. 인수(仁壽) 원년 6월 13일, 내사령(內史令) 예장왕(豫章王) 신(臣) 간(暕)은 포고하노라.
사리감응기(舍利感應記) 20권(卷)[수(隋)의 저작랑(著作郞) 왕소(王邵) 지음]
황제(皇帝)가 옛날 용잠(龍潛)으로 있을 때 어떤 바라문과 사문이 택상(宅上)에 와서 사리 1과를 내놓으면서 말하였다.
“단월(檀越)의 마음이 좋으시기 때문에 이것을 여기 둡니다.
공양하십시오.”
사문이 떠난 뒤에는 아무리 찾아도 그의 있는 곳을 알 수 없었다. 그 뒤에 황제는 사문 담천(曇遷)과 함께 각각 그 사리를 손바닥에 놓고 세어 보았다. 그런데 적기도 하고 많기도 하여 그 수가 일정하지 않았다. 이에 담천이 말했다.
“저는 일찍이 바라문의 말을 들었는데 ‘부처님의 법신(法身)은 수량(數量)을 뛰어넘은 것이어서 세간에서 헤아릴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에 비로소 7보의 상자를 만들고 사리를 거기에 넣어 두었다. 신니 지선(神尼智仙)이 말하였다.
“저는 장차 온 천하의 인자한 아버지가 되어 불법을 다시 일으키고 일체의 신명(神明)이 돌아오게 할 것입니다.”
그 뒤에 과연 주(周)씨가 불법을 없애고 수나라 왕실[隋室]이 천명(天命)을 받아 다시 불법을 일으켰다. 황제는 늘 그 신니의 말을 생각하고 말하였다.
“내가 일어난 것은 부처님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하의 사리탑 안에 각각 신니상(神尼像)을 만들리라.”
황제와 황후는 경사(京師)의 법계니사(法界尼寺)에 기초를 이은 부도를 만들어 묵은 소원을 갚고 그 밑에 사리를 안치했다. 개황(開皇) 15년 늦가을 밤에 신광(神光)이 탑의 기부(基部)에서 올라와 노반(露盤)을 오른쪽으로 돌았는데 그 번쩍임이 풀무의 불꽃같았다. 열흘 동안에 이런 일이 네 번 있었다.
황제가 인수(仁壽) 원년 6월 13일에 인수궁(仁壽宮)의 인수전(仁壽殿)으로 납시니 그 날은 본래 탄생하시던 날이었다. 해마다 이 날이면 깊은 마음으로 길이 생각하면서 복과 선을 닦고 부모의 은혜를 갚으려 했다. 그러므로 덕이 많은 사문을 청해 지극한 도를 이야기하며, 장차 해내(海內)의 모든 주(州)에서 고상(高爽)하고 청정(淸靜)한 30군데를 가려 각각 사리탑을 세우려 했다. 이리하여 황제는 7보의 상자에서 30과의 사리를 내어 어좌(御座)의 책상 안에 두고 여러 사문을 청해
향을 사르고 예배하면서 말하였다.
“제자는 항상 정법으로 3보를 호지하고 일체 중생을 구제하겠나이다.”
그리고 곧 금병과 유리병을 각각 30개씩 가져와 유리병 안에 금병을 담고 금병 안에 사리를 넣었다. 육향(陸香)을 살라 진흙을 만들어 그 뚜껑에 바르고 도장을 찍었다. 그리고 10월 15일 정오를 기해 30주(州)에서는 각각 구리 함과 돌 함에 사리를 넣어 한꺼번에 탑을 세우기로 했다. 그리하여 사문들이 각각 사리를 모든 주(州)에 보낼 때는 일체의 승려와 속인들이 다 그 경내(境內)에서 향과 꽃을 장엄해 가지고 보당(寶幢)을 세우며 음악을 울리고 길을 소제하는 등 정성과 힘을 다해 그 사리를 맞이했다.
여기에 관해서는 다 말할 수 없으며, 그 사리의 영험은 널리 전하는 것과 같다. 지금은 대충 10여 가지만 써서 뒷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다. 그 날 황제는 황후와 태자 및 궁내의 비빈(妃嬪)들과 함께 정성으로 마음과 힘을 다해 참회하고 두루 중생을 위해 좋은 인연을 함께 맺었다. 황제는 어떤 이상한 스님이 갈색 가사로 어깨를 덮고 곁의 사람들에게 “남을 놀라게 하지 말라”하면서 사리를 두고 가는 것을 보았다. 그 뒤에 아무리 찾아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으니, 사리가 장차 퍼지려는 것이었다. 황제는 말하였다.
“지금 불법이 다시 일어나려 하니 반드시 감응이 있을 것이다.”
그 뒤 곳곳에서 올리는 글이 다 그의 말과 같았다. 황제는 그 10개월 동안 밥을 먹을 때마다 늘 치아 밑에서 사리를 얻었는데 황후도 그러했다. 은 소반에 물을 담고 사리 1과를 물에 띄워 백관(百官)들에게 보였다. 잠깐 사이에 그것은 2과가 되어, 물에서 오른쪽으로 돌다가 2과가 한데 붙었다.
귀인(貴人) 및 진왕(晋王) 소(昭)와 예장왕(豫章王) 간(暕)은 황제가 내린 벼루를 받았는데, 각각의 벼루 안에 사리 한1과가 들어갈 만했다. 보름이 못 되어 궁내에는 사리가 19과나 되었으며 그것은 다 광명을 발했다.
그 뒤로 4방의 승려와 속인들이 그들이 가진 사리를 다 황제께 바쳤다. 황제는 말하였다.
“어찌 모두 반드시 진신(眞身)이겠느냐?”
사문들이 그것을 시험삼아 망치로 때려 보았다. 거기에는 과연 13알의 옥속(玉粟)이 있었고 그 진신사리가 든 철갑(鐵匣)은 손상이 없었다.
옹주성(雍州城) 서쪽 주지현(盩厔縣)의 남쪽에 있는 선유사(仙遊寺)에 탑을 세우는 날은 하늘에서 눈이 내리고 산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사리를 넣으려 하자 어두운 구름이 갑자기 흩어지고 햇빛이 밝게 비치었다. 승려와 속인들이 다 흩어진 뒤에 구름이 다시 전처럼 모였다.
기주(岐州)의 봉천사(鳳泉寺)에 탑을 세울 때 옥 같은 문석(文石)을 감득(感得)하여 그것으로 함을 만들었다. 또 쌍수(雙樹)와 새ㆍ짐승의 영상(靈祥)이 나타나고 기석(基石)은 변해 수정같이 되었다.
경주(涇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 세 곳에서 각각 오래 된 돌을 보내 왔는데 세간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합해 함을 만드니 서로가 꼭 맞았다.
진주(秦州)의 정념사(靜念寺)에 탑을 세우려고 기초를 정하자 상서로운 구름이 다시 덮이고 눈이 내리며 초목들은 모두 꽃을 피웠다. 사리를 함에 넣자 광명이 비치고 찬탄하는 소리가 있었다.
화주(華州)의 사각사(思覺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넣자 햇빛이 빛나고 5색 광명이 수십 장 높이로 비치어 탑 위를 덮고 마침 하늘은 보배꽃을 내렸다.
동주(同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 비를 만나 피할 곳이 없었는데, 사리를 함에 넣자 갑자기 구름이 흩어지고 햇빛이 밝게 비치며, 또 신기한 광명이 해를 겹으로 쌌다. 12개월 동안에는 밤에 빛이 50리를 비추었다.
포주(浦州)의 서암사(栖岩寺)에 탑을 세울 때는 땅이 진동하고 산이 부르짖으며 종이 큰 소리를 내었다. 또 광명이 5도(道)에 비치어 2백 리 밖에서 모두 그것을 보았다.
병주(幷州)의 무량수사(無量壽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는 낮에 구름이 모였다가 사리를 함에 넣으려 하자 하늘이 개이고 햇빛이 나며, 다시 신기한 광명이 5색을 놓으며 천신(天神)이 형상을 나타냈는데, 그 수가 얼마인지 알 수 없었다.
정주(定州)의 북악사(北岳寺)에 탑을 세울 때 어떤 노인이 흙을 지고 와서 땅에 모두 깔고는 간 곳이 없었다. 여기는 옛날부터 물이 없었는데 갑자기 흐르는 물이 앞뒤로 하나만이 아니었다.
상주(相州)의 대자사(大慈寺)에 탑을 세울 때에는 하늘이 어둡고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함에 넣으려 하자 해가 났다. 사리를 넣은 뒤에는 구름이 다시 모이고 하늘에서 기이한 꽃이 매우 많이 내리쏟아졌다.
정주(定州)의 정각사(正覺寺)에 탑을 세울 때에는 신령스런 광명이 마치 흐르는 별처럼 절에 들어왔다. 공양을 차렸는데 20만 명이 다 먹지 못했다.
숭주(崇州)의 한거사(閑居寺)에 탑을 세울 때 흰토끼가 가마 앞에 오고, 처음에는 눈이 내렸다. 사리를 함에 넣으려 하자 날이 개었다가 넣고 나자 구름이 다시 모였다.
호주(毫州)의 개적사(開寂寺)에 탑을 세울 때 그 경내(境內)에는 돌이 없었다. 딴 곳에서 세 개의 돌을 가져와서 그것을 붙여 함을 만들었다. 탑 기부(基部)에는 반석이 있고 두 우물이 그것을 끼고 있었다.
여주(汝州)의 흥세사(興世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는 어두운 구름에 눈이 내리다가 사리를 내리자 하늘이 개이더니, 함에 넣은 뒤에는 구름이 다시 모였다.
태주(泰州)의 대악사(垈岳寺)에 탑을 세울 때 밤에 북소리가 울리고 세 겹의 문이 저절로 열리며, 어떤 말 탄 사람이 나와 맞이하는 등, 빛나는 영험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청주(靑州)의 승복사(勝福寺)에 탑을 세울 때 터를 파다가 저절로 된 반석의 함을 발견하고, 그것을 탑에 넣으려 하자 광명의 영험이 나타났다.
모주(牟州)의 거신산사(巨神山寺)에 탑을 세울 때 자색(紫色) 지초(芝草) 세 줄기를 얻고, 구름이 끼었다가 사리를 내리려 하자 날이 개고, 탑 문을 닫은 뒤에는 구름이 다시 모였다.
수주(隨州)의 지문사(智門寺)에 탑을 세울 때 터를 파다가 신령스런 거북을 얻고 감로(甘露)가 내리며 벌이 돌면서 날고 있었다. 거북에는 상서로운 무늬가 있었다.
양주(襄州)의 대흥국사(大興國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는 구름이 끼었다가 사리를 내리려 하자 날이 개었으며, 사리를 함에 넣은 뒤에는 구름이 다시 모였다.
양주(楊州)의 서사(西寺)에 탑을 세울 때는 오래 가물었는데 사리가 경내(境內)에 들어오자, 그 밤에 비가 흡족하게 왔다.
장주(葬州)의 서하사(栖霞寺)에 탑을 세울 때 이웃 사람이 먼저, 부처님께서 서쪽에서 오셔서 절에 들어오시는 꿈을 꾸었는데, 꿈과 같이 이르렀다.
오주(吳州)의 대우사(大禹寺)에 탑을 세울 때, 사리가 다섯 강에 떠서 왔는데 풍파가 일지 않았다. 또 사리는 신령스러운 광명을 발산했고 사람은 자색 지초를 얻었다.
소주(蘇州)의 호구사(虎丘寺)에 탑을 세울 때, 탑 세울 터를 파다가 사리 1과를 얻었다. 공중에서 나는 하늘 음악소리를 사람들이 다 들었고 우물이 사흘 동안 울었다. 그 때 사리가 비로소 왔다.
형주(衡州)의 형악사(衡岳寺)에 탑을 세울 때 네 번이나 바람이 거슬러 불어오고 물이 바로 흐르기를 네 번 빌었다. 그러자 산봉우리 위의 흰 구름은 넓이 2장(丈)으로 퍼져 그 자리에 바로 내려와 세 번 돌고 갔다.
계주(桂州)의 연화사(緣化寺)에 탑을 세울 때 10리를 못 가서 천 마리쯤 되는 새가 가마를 호위하고 날아가다가 성 안에 들어가자 곧 흩어졌다.
번주(番州)의 영취사(靈鷲寺)에 탑을 세울 때 구덩이 안에서 신선이 나와 구름을 타고 올라가는 기상을 나타내었다.
익주(盆州)의 법취사(法聚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는 어두운 구름이 끼었는데 가마에서 사리를 내리자 해가 빛나고, 탑 문을 닫자 다시 구름이 끼었다.
곽주(廓州)의 법강사(法講寺)에 탑을 세울 때 처음에 성 밖 서쪽으로 갔는데, 그 날 밤에
곽주에서 여러 장(丈)의 광명이 나타나 동쪽에서 와서 땅 속으로 들어갔다. 안팎 사람들이 다 보았다.
수주(隨州)의 관인(官人) 왕위(王威)가 귀양갈 사람 90인을 잡아 귀양을 보내게 되었다. 길에서 사리를 모시고 오는 사람을 만나 다 함께 선심을 내어 죄수를 놓아주되 기한을 정했다. 그 죄수들은 놓여나 한 기한에 천 리를 가는 동안 한 사람도 달아나는 자가 없었다.
수주(隨州)의 어떤 사람은 운수(溳水)가에서 어옥(魚獄) 3백 개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그 집의 대대로 내려오는 직업이었다. 그는 사리를 보자 어옥을 부수어 고기를 다 놓아주었다. 그리하여 이 악법을 아주 끊었고 다른 주(州)에서도 그것을 본받았다.
사리의 감응을 경축하는 글[表]과 답
수(隋)의 안덕(安德) 왕웅(王雄)과 백관(百官) 등
“신(臣) 웅(雄) 등은 말합니다. 신은 들었습니다. 대각(大覺)은 이치가 완전히 갖추어져 있어서 그 이치가 공유(空有)를 비추고 지성(至聖)은 허응(虛凝)하여 그 이치에는 생멸(生滅)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현상은 나뉘어져 겨자처럼 모이더라도 금 항아리에 담겨지고 몸은 흩어져 티끌처럼 날리더라도 보배로운 절을 일으킵니다. 제석천(天)이 재[灰]를 청하고 아육왕(王)이 탑을 세운 이래로, 아직 사리를 나누어 펴 훌륭한 업을 이어 융창시킨 일이 없었습니다.
삼가 생각하오면 황제께서는 오랜 겁(劫)에 선인(善因)을 쌓아 전생에 보리를 증득하시고 사람의 왕으로 강탄(降誕)하시어 세계를 호지하십니다. 지난번에 도가 멸한 것은 시운[運]에 달려 있는 것이어서, 인사(仁祠)가 폐지되고 헐렸으며, 자비 등불의 그림자가 사라지고, 지혜 바다의 흐름이 끊어졌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황조(皇祚)가 이미 일어났고, 법의 북이 한창 울립니다. 그리하여 구우(區宇)의 안이 다 정토(淨土)가 되고, 생령(生靈)의 무리들이 모두 범운(梵雲)에 덮였습니다.
지난 여름 6월에는 조서(調書)를 내려 사문을 청해 맞이하고, 사리를 30주(州)에 보내어 10월 15일에 동시에 탑을 세웠습니다.
그러하온데 포주(蒲州)의 서암사(栖岩寺)에 탑을 세우려 계획한 곳에 있어서는 이 산 위에 종과 북 소리가 있었으며, 사리를 강당에 맡기자
그 날 밤에 사리가 부도 위에서 큰 광명을 발산했습니다. 그리고 그 광명은 강당 안에서 흘러 나와 온 방 안을 가득 비추었습니다. 사리를 구리 함에 넣을 때에는 또 광명이 향로의 향 연기처럼 공중으로 올라갔다가 부도의 보병(寶甁)으로 돌아왔습니다. 또 자색 불꽃을 내어 혹은 흩어지고 혹은 모이면서 다 연꽃이 되었습니다. 또 부도 위에 광명이 있어서 그 현상은 불상과 같아 화부(華趺)를 완전히 갖추고 오래 있다가 차츰 사라졌습니다. 또 어떤 광명이 부도의 보병을 도는 것을 포주 성내에 있는 인수사(仁壽寺)의 스님들이 멀리서 모두 보았습니다. 그것은 산꼭대기에 있는 누각과 같았고 산봉우리와 시내 골짜기들이 모두 환히 보였으며, 그것은 포주성의 동남 한 모퉁이를 한참 동안 비추어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 서암사는 곧 태조(太祖) 무원황(武元皇)께서 세우신 것입니다. 또 화주(華州)에 탑을 세울 때에는 구름과 안개가 끼고 큰 눈이 오다가 갑자기 날이 개었고, 바로 탑 위에는 5색의 상륜(相輪)이 있었으며 사리를 내려놓은 뒤에는 구름과 안개가 다시 일었습니다. 황제와 황후께서는 또 사리를 얻으셨습니다. 그것은 빛을 흘리고 채색을 흩으면서 혹은 나타났다가 혹은 잠기었으니, 지극한 덕과 정성이 영성(靈聖)에 합한 것이 아니면 어찌 그 신공(神功)과 묘상(妙相)이 이처럼 기특할 수 있겠습니까? 신(臣) 등은 지금 한창 나이에 이미 태평한 세상을 보았고 살아서 좋은 업을 얻어 비로소 번뇌의 경계를 벗어났습니다. 이 기쁨을 이기지 못하여 삼가 글을 올려 경축하나이다.”
황제의 답
“문하(門下)가 우러러 생각하니, 정각(正覺)께서는 중생을 구호하실 때 생령(生靈)을 고해(苦海)에서 건지시고 어리석고 미혹한 이를 화택(火宅)에서 구제하신다.
그러므로 짐(朕)은 지극한 마음으로 회향(廻向)하고 생각을 맺어 귀의하는 것이다. 온 천하의 신민(臣民)과 유현(幽顯)에 이르기까지 다 함께 뛰어난 업을 숭상하고 좋은 인(因)을 짓기를 생각한다. 그러므로 사리를 분포(分布)하여 신탑(神塔)을 건립할 때, 대성(大聖)은 자민(慈愍)하여 광상(光相)을 자주 보이시고 궁전 안에
사리가 강령(降靈)하니, 그 내력은 알 수 없으나 자연히 변현(變現)하는 것이다. 짐은 기쁘게 정대(頂戴)하면서 일찍이 없던 일을 얻었다. 이것은 실로 중생이 다행하여 이런 아름다운 복을 맞이한 것이니 어찌 짐의 미미한 정성으로 이런 감응을 이룰 수 있겠는가.
이제 왕공(王公) 들의 글을 보니 두려워하고 공경함이 더욱 깊다. 짐과 왕공 등 모든 백성들은 마땅히 더욱 마음을 가다듬고 3보(寶)를 흥륭시켜야 할 것이다. 지금 사리의 참 형상이 50과가 있으니, 소사(所司)는 전의 의식에 의해 해내(海內)에 나누어 보내라. 3도(塗)ㆍ6도(道)가 다 함께 번뇌를 면하고 품식(禀識)과 함령(含靈)이 다 같이 묘과(妙果)에 오르기를 바란다. 주관하는 자는 잘 시행하라.”
고구려ㆍ백제ㆍ신라 3국의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가려고 각각 사리 1과씩을 청해, 본국에 탑을 세우고 공양하겠다고 했다. 황제는 명령을 내려 다 허락했다. 그리고 황제는 경사(京師)의 대흥사(大興寺)에 탑을 세우라 명했다. 먼저 사리를 상서도당(尙書都堂)에 두고 12월 2일 아침에 출발했다. 이때 하늘은 청명하고 기운은 온화하며 바람은 고요했다. 보배 수레와 번기ㆍ당기와 향ㆍ꽃ㆍ음악 등 갖가지 공양이 거리에 가득 차고, 몇 천만억인지 알 수 없는 승려와 속인 백성들은 그 복장과 행동이 조용하여 질서가 있었다. 상주국(上柱國) 사공공(司空公) 안덕(安德) 왕웅(王雄) 이하는 다 걸어서 절로 가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베풀고 예참(禮懺)했다. 푸른 새가 대중 속에 친압해 들어 왔으므로 어떤 사람이 허리에 차는 칼을 빼서 던져 보시했는데 사람들 속에 떨어졌으나 모두 상한 데가 없었다.
인수(仁壽) 2년 정월 23일에 다시 사리를 53주(州)에 분포하여 탑을 세우려 했다. 그 때 총관 자사(總管刺史) 이하 현위(縣尉) 이상으로 하여금 7일 동안 통상의 사무를 폐하게 하고 스님을 청하여 도를 행해 교화하고 타찰(打刹)하며 보시 돈 10문(文) 등 모두 이전의 의식에 의거해서 행했다.
4월 8일 정오를 기해 온 나라에 동시에 사리를 내려 그것을 돌 함에 넣어 봉했다. 그 때에 감득(感得)한 상서로운 감응은 따로따로 적으면 이하와 같다.
상주(常州)[구름도 비도 없고 하늘에서는 상서로운 꽃이 내려 온 성(城)을 두루 덮었다.]
천주(泉州)ㆍ순주(循州)ㆍ영주(營州) [흰 광명을 세 번 놓고 오래된 돌을 감득(感得)하여 그것을 깨어 함을 만들었다.]
홍주(洪州)[머리가 흰 까마귀가 계속해서 길을 인도했다.]
항주(杭州)[그 자리를 팔 때 흰 석굴이 있었고 돌 함에 사리를 넣었다.]
양주(凉州)ㆍ덕주(德州)[큰 새가 탑을 도는 것을 감득했는데 사람들은 알지 못했다.]
창주(滄州)ㆍ관주(觀州)[탑 위에 5색 구름이 나타나 낮에서 저녁까지 있었다.]
영주(瀛州)[터 안에서 자색 지초가 나타났다.]
기주(冀州)[장님과 절름발이가 다 나았다.]
유주(幽州)[돌 함이 수경(水鏡)과 같아 광명을 놓아 온갖 상(像)을 나타내었다.]
서주(徐州)[돌 함이 신선과 성승(聖僧) 등의 상(相)을 나타내었다.]
여주(莒州)[신령스런 광명을 세 번 나타내고 그 터에서 오래된 탑을 얻고 벙어리가 말을 잘 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齊州)ㆍ내주(萊州)ㆍ초주(楚州)[들 사슴이 안상탑(雁翔塔) 위에 와서 들었다.]
강주(江州)[땅에서 동상(銅像)이 나왔다.]
담주(潭州)[사리가 강에 이르자 신조(神鳥) 천 마리가 맞이하였다.]
모주(毛州)[하늘이 금은화(金銀華)를 내렸다.]
패주(貝州)ㆍ송주(宋州)[우물 맛이 쓰던 것이 단맛으로 변하고 광명을 발하였으며 하늘에서 상서로운 꽃이 눈처럼 내렸다.]
조주(趙州)[붉은 광명을 발산하고 상서로운 상(像)이 헤아릴 수 없었다.]
제주(濟州)[광명을 두 번 발산하고 향기가 있었으며 종소리가 산의 구름 끝에 메아리쳤다.]
곤주(袞州)ㆍ수주(壽州)ㆍ신주(信州)ㆍ형주(荊州)[구름이 탑 위를 덮고 비처럼 내리는 꽃이 떨어지지 않았다.]
난주(蘭州)[터 밑에서 돌부처를 얻고 또 두 동상을 얻었다.]
양주(梁州)ㆍ이주(利州)[발산하는 광명이 해와 달과 같았다.]
노주(潞州)[영천(靈泉)이 저절로 솟고 병자의 병이 나았다.]
여주(黎州)[땅 밑의 와문(瓦文]은 천추(千秋)에 즐거이 움직였다.]
자주(慈州)[구름 일산이 하늘을 나는 신선과 같았고 영천(靈泉)이 솟아나며 병이 나았다.]
위주(魏州) 변주(汴州)[자주 광명을 발산하고 하늘에서 보배 꽃이 내려 사람들이 다 그것을 얻었다.]
심주(沈州)[기이한 향기와 광명을 내며 상(像)을 보고 병이 나았다.]
허주(許州)[그 주(州)의 90리 밖까지 광명을 놓아 탑 덮개를 비추고 단 우물이 솟아났다.]
예주(豫州)[5색 광명이 나타났으며 문자도 5색이었다.]
현주(顯州)ㆍ조주(曹州)[광명의 변화가 가장 번성했다.]
안주(安州)[하룻밤 동안 향기를 감득했고 광명을 놓고 구름 일산이 고기떼처럼 모였다.]
진주(晋州)[5색 광명을 세 번 발산했다.]
회주(懷州)[숫토끼가 스스로 와서 친하고 광명을 놓는 이적이 있었다.]
협주(陜州)[전후 열한 번 광명의 기적이 나타났다.]
낙주(洛州)[향기가 바람 같고 자주 광명을 놓았다.]
등주(鄧州)[함에서 옥 무늬가 나타났다.]
진주(秦州)[사리를 거듭 얻고 돌 함이 마노(馬瑙)함으로 변했다.]
위주(衛州)[광명이 밖을 비추었다.]
소주(沼州)[어떤 스님이 전부터 허리를 앓았는데, 움직이지 않다가 사리가 온다는 말을 듣고 10리까지 마중 나가 병이 나았다.]
정주(鄭州)[광명을 놓아 번기 안이 환히 밝았다.]
기주(杞州)[5색 광명을 놓았다.]
이상 모두 53주(州)인데, 40주로부터 다 영서(靈瑞)가 있었으나 모두 열거할 수 없다. 자세한 것은 대전(大傳)에 있다.
이하에 명본(明本)과 원본(元本)에 의해 수록(收錄)한 것이 있으나 본문(本文)과 중복되므로 생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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