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법원주림(法苑珠林) 42권
법원주림 제42권
서명사 사문 석도세 지음
송성수 번역
39. 수청편(受請篇) ②
(3) 성승부(聖僧部)
대각(大覺)께서 열반하신 뒤에 그 법이 여러 성인에게로 돌아가니, 개사(開士)와 응진(應眞)이 말법(末法)의 가르침을 드날릴 때, 모두 여러 사찰에 교화를 펴 인연을 따라 교화해 포섭했다. 감(感)이 다르면 한 방에 있어도 하늘처럼 멀고, 응(應)이 같으면 경계는 달라도 서로 마주한 것과 같다.
송(宋)나라 태시(泰始) 말년에 정승사(正勝寺)의 석법현(釋法顯)과 정희사(正喜寺)의 석법경(釋法經) 등이 처음으로 성승(聖僧)을 그리고, 나열하여 앉혀서 모형을 표시했다. 당(唐)의 초년에 이르러 그들은 자주 영서(靈瑞)를 나타내었으니, 혹은 발꿈치를 기둥 사이에 반쯤 드러내고 혹은 지팡이 자국을 평지에 깊이 내었다. 그러므로 양제(梁帝)는 이 말을 듣고 찬탄하고 기뻐하며 공경하는 마음으로 우러르면서 “국가의 기쁨과 슬픔은 반드시 재공(齋供)에 의해야 한다”고 하였다.
영명(永明) 8년에 양제는 몸이 편찮아 화타와 편작[和鵲]의 의술을 다 썼으나 인침(茵枕)은 오히려 위중했다. 이에 결심하고 서원하여 성승(聖僧)에 귀명하기로 하고 연창전(延昌殿) 안에서 7일 기도를 시작했다. 모든 부처님과 여러 성현들에게 음식을 공양할 때는 재실(齋室)이 엄숙하고 준열하여 티끌 하나도 움직이지 않았다. 7일이 다 되었을 때 비로소 영험이 나타났으니, 하늘 향의 묘한 기운이 코를 뚫고 마음에 사무쳤으므로 향로를 압도하여 다른 향냄새는 힘이 없었다. 또 발자취와 신자국은 온 방 안에 가득하고 지팡이 흔드는 맑은 메아리는 창 밖에까지 들리었다. 그 발자국을 보고 향냄새를 맡고 대중은 모두 숙연하여 혼이 용솟음쳤다. 그 때 서광현(徐光顯) 등 10여 인은 다 이것을 보고 듣고 함께 양제에게 아뢰었다.
이에 재를 다 마친 뒤에 양제의 병은 회복되었다.
그러므로 온 조정은 다 신기한 감응을 분명히 경험하고 모두 불법에 귀의했다. 그 뒤에 서광현 등 승려와 속인 여러 사람들도 다 재를 베풀고 스님을 청하여 모두 영험이 있었으니, 성인의 감응은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옛날 수제가 장자(長者)는 전단 발우를 만들어 주머니에 넣고 높은 상아말뚝 위에 달아 놓고는 “사문이나 바라문이 사다리를 놓지 않고 이것을 취할 수 있으면 그에게 이것을 주리라” 했다. 외도들은 이 말을 듣고 신통을 부리려 했으나 되지 않아 머리를 흔들고 가버렸다.
빈두로(賓頭盧)가 이 말을 듣고 목건련에게 물었다.
“그것이 사실입니까?”
답하였다.
“사실입니다.”
빈두로는 말하였다.
“당신은 사자후(獅子吼)가 제일이니 곧 가서 그것을 가지십시오.”
그러나 목건련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두려워해 그것을 가지려 하지 않았다. 빈두로는 곧 그 집에 가서 선정에 들어, 자리에 앉은 채 팔을 뻗어 그 발우를 취했다.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그 때 종광(縱廣)이 극히 큰 방석(方石)에 앉아 몸을 공중에 날려 발우를 취해 가지고 돌아갔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꾸짖어 ‘왜 비구가 외도의 발우를 가지느냐, 또 계를 받지 못한 사람 앞에서 신통을 부리느냐?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너를 물리쳐 이 염부제에서 살지 못하게 하리라’ 하셨다. 이리하여 빈두로는 부처님의 명령을 따라 서방의 구야니에 가서 4부(部) 대중을 교화하고 불법을 널리 폈다. 염부제의 4부 대중은 빈두로를 사모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돌아옴을 허락하셨으나, 앉아서 신통을 부렸기 때문에 열반에는 들지 못하게 하셨다. 그리고 명령하여 말세의 4부 대중을 위해 그들의 복밭이 되게 하시고, 그도 스스로 맹세하여 ‘이 3천하에서 누구든지 청하면 다 가리라’ 하였다.” 또 『아육왕경』에서 해의(海意) 비구는 가마솥에서 나와 허공에 올라가 왕을 위해 게송으로 말하였다.
“당신의 몸은 사람들의 몸과 같으나
당신의 힘은 사람들의 힘보다 뛰어나다.
나로 하여금 당신 위해
신통을 부릴 줄을 알게 하여라.”
왕은 발심하고 4방승(方僧)을 청하면서 다음 게송으로 말하였다.
“거룩한 모든 아라한은
부디 와서 나를 거두어 주시라.
나는 지금 아라한을 청하나니
여러분 부디 여기 다 오시라.”
『청빈두로경(請賓頭盧經)』에서 말하였다.
“천축(天竺)의 우바새와 국왕과 장자 등은 일체의 모임을 열 때는 항상 빈두로 파라타서(賓頭盧頗羅墮誓) 아라한을 청하였다. 빈두로는 그 이름이요 파라타서는 그 성이다. 그는 수제(樹提) 장자를 위하여 신통을 나타내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를 꾸짖고 열반에 들지 못하게 하시고는 그에게 명령하여 말세의 4부 대중을 위해 그들의 복밭이 되게 하셨다. 그를 청할 때는 고요한 곳에서 향을 사르고 예배한 뒤에 천축의 마리산(摩梨山)을 향해 지극한 마음으로 이름을 부르면서 ‘대덕 빈두로 파라타서는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말세 사람들의 복밭이 되었으니, 내 청을 받아 여기서 이 공양을 잡수십시오’라고 한다. 또 새로 집을 지었을 때에도 ‘내 청을 받아 이 집 침대 위에서 주무십시오’ 하고 청해야 한다. 또 여러 스님들을 두루 청해 목욕할 때에도 ‘내 청을 받아 여기서 목욕하십시오’ 하고 청해야 한다. 그리고 날이 밝기 전에 향탕(香湯)과 회수(灰水)ㆍ조두(澡豆)ㆍ양지(楊枝)ㆍ향유(香油) 등을 살펴보고 차고 더움을 조화시켜 사람이 목욕하는 법과 같이 하고는 문을 열고 그를 들어오게 한 뒤에 문을 닫는다. 사람이 목욕을 마칠 때처럼 시간이 지난 뒤에야 여러 스님이 들어간다. 무릇 모임에서 음식을 먹고 목욕하려 할 때는 반드시 모든 스님을 청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해탈을 구하되 의심하지 않고 정신을 똑똑히 차리며 신심이 청정한 뒤에라야 비로소 그가 내려올 것이다.
근세(近世)에 어떤 장자는 빈두로 대아라한이 부처님의 분부를 받고 말세 사람들의 복밭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여법하게
대회를 베풀고 지극한 마음으로 빈두로를 청하였다. 담요 밑에 좋은 꽃을 두루 펴고 그를 시험해 보려 했다. 대중의 공양이 끝나고 담요를 들어 보았더니 꽃이 다 누렇게 시들었다. 그는 오뇌하고 스스로 꾸짖으면서 그 허물이 어디서 왔는지 몰랐다. 다시 정성을 다해 경사(經師)에게 자세히 물은 뒤에 또 대회를 베풀고 전처럼 보시했다. 꽃은 또 다시 시들었다. 그는 또 집 재산을 다 털어 다시 대회를 열었으나 그 꽃은 여전히 시들었다. 그는 오뇌하고 자책하면서 다시 1백여 명의 법사를 청해 그 과실을 알리고 참회하며 사죄했다. 그 때 그는 상좌(上座)의 한 노인을 마주하고 사방에 알려 그 허물을 사과했다.
상좌의 노인이 그에게 말하였다.
‘너는 세 번 나를 청했고 나는 네 청을 모두 받았다. 그러나 너는 종을 시켜 문에서 나를 막았고, 또 내가 나이 늙고 옷이 해졌으므로 배척을 당한 뢰제 사문(賴提沙門)이라 생각하고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네 청이 있기 때문에 억지로 들어가려 했다. 네 종은 지팡이로 내 머리를 때려 깨지게 했으니, 내 이마의 오른쪽 상처가 그것이다. 둘째 번에 왔을 때도 나를 들이려 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억지로 들어가려다가 또 머리를 맞았으니 내 이마 가운데 상처가 그것이다. 셋째 번에도 또 왔으나 여전히 머리를 맞았으니 내 이마 왼쪽 상처가 그것이다. 네가 한 짓인데 오뇌하면 무엇하겠느냐?’
말을 마치자 그는 곧 사라졌다. 장자는 비로소 그가 빈두로임을 알았다.
그 뒤로는 아무도 공양을 차리고 청할 때에 감히 문을 닫지 않았다. 만일 빈두로가 와서 그 자리에 앉게 되면 꽃은 시들지 않는다. 새로 집을 짓고 평상을 만들고 빈두로를 청하려 할 때는 다 향탕(香湯)을 땅에 뿌리고 향유(香油) 등불을 켜고 새 평상과 새 담요 위에 솜을 털어 깔고 그 위에 흰 비단을 덮는다. 그리고 초저녁에 여법하게 청하고는 다시 문을 닫은 뒤에는 삼가 함부로 엿보지 말지니라. 그리고 모두가 각각 지성으로 그가 반드시 온다고 믿으면 그 지성에는 감동되지 않는 것이 없느니라.
그가 왔을 때에는 요 위에 누웠던 곳이 나타나고 욕실(浴室)에도 탕수(湯水)를 쓴 흔적이 나타난다. 대회의 청을 받았을 때는 혹은 상좌(上座)에 있고 혹은 중좌(中座)에 있으며 혹은 하좌(下座)에 있다. 어디서나 스님의 형상으로 나타나 사람들이 그 이상한 점을 찾아도 끝내 찾지 못한다. 그가 떠난 뒤에 그가 앉았던 자리에 꽃이 시들지 않는 것을 보고야 그가 왔던 것을 안다.”
自述
요새 재(齋)를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 법에 의하지 않고 다만 인정(人情)을 좇아 시행한다. 범인은 부처님과 성승(聖僧)을 걱정하지 않는다.
이미 앞의 경에서 말한 것과 같이 시주(施主)는 먼저 불당을 깨끗이 소제하고 성승이 앉을 자리를 안치해야 한다. 목욕하여 몸을 깨끗이 한 뒤에 좋은 향을 피우고 비단 번기와 일산을 달며 온갖 꽃을 뿌린다. 손으로 향로를 잡고 정성을 다해 공경하고 우러러 3보 및 성승을 받들어 청하고 시방 법계의 모든 범부와 성인도 다 두루 청한다. 그리고 “제자의 청을 받아 성의(聖儀)를 굽히어 집으로 와서 왕림하십시오” 한다. 온 집안의 노소들은 다 정성을 다해 7일 전부터 미리 이렇게 존중하는 마음을 가진다. 만일 집이 가난하여 좋은 향과 꽃이 없고 또 그 자리를 만들 만한 곳이 없으면 그때그때 형편을 보아 처리한다. 성승이 앉기 전에 미리 아주 좋은 곳에 부처 자리를 안치하고 법에 맞게 물을 뿌리고 청소한다. 그 다음의 좋은 곳에는 성승이 앉을 자리를 만들고는 부드럽고 새로운 희고 깨끗한 것을 깔고 그 위에는 솜을 편다. 만일 시주가 마음으로 존중하고 느낌이 있어서 공양을 마치고 그 자리를 볼 때, 사람이 앉은 흔적이 있으면 보신(報身)이 온 줄을 알고 그런 흔적이 없으면 그것은 화신(化身)이 온 것이며 만일 시주가 마음으로 완전히 경시하고 태만했으면 보신도 화신도 모두 안 온 것이다.
그 자리에는 채색 그림이나 찬란한 비단이나 금은 등 온갖 장식 및 꽃을 흩거나 두지 말라. 그가 비록 아라한이라 하더라도 범승(凡僧)과 같이 250의 별해탈계(別解脫戒)를 받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온갖 비단이나 금은 등의 물건은 받지 않는 것이다. 만일 그들이 부처나 보살 등 대성으로서 출가한 사람의 상에 구애받지 않는 사람이면 그 때문에 갖가지 공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성승을 자리에 앉히고 공양을 드릴 때에도 그 자리가 6척 이상 높으면 안 되며 6척 이하의 법다운 승좌(僧座)면 좋다. 또 성승의 소상(塑像)을 그 자리에 앉혀도 안 되나니, 혹 보신(報身)이 스스로 오더라도 어찌 그 소상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겠는가. 또 절에 항상 있는 스님의 그릇에 공양을 담아도 안 되나니, 보신이 와서 접촉할 수 없는 스님의 깨끗한 그릇의 공양을 먹을까 두렵기 때문이다. 만일 발우나 속인들의 소반으로 드리면 그것은 화신과 보신에 다 통하는 것으로서 가장 법다운 것이다.
만일 성승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 있어서 돈이 들어와 성승을 위해 쓸 때는 그것을 발우나 수저ㆍ구리단지ㆍ수건 등에 두었다가 그것으로 아주 좋은 소반이나 그릇을 사서 그 등에 주서(朱書)로 글자를 적어 두어, 다른 사람이 감히 잡스럽게 쓰거나 아무 집에서나 날마다 쓰지 못하게 해야 한다. 아침과 점심때마다 그것에 음식을 담아 항상 부처님과 스님에게 드리면 어찌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다시 남는 돈이 있으면 그것으로 하나의 호상(胡床)과 하나의 유단(油單)을 사서 쓰고 공양을 마치면 그릇은 조두(澡豆)로 깨끗이 씻어 호상 위에 두고 유파(油巴)로 덮어둔다. 날마다 따로 이런 표시로 3보께 공양하는 마음이 항상 끊이지 않으면 큰 공덕을 얻을 것이다.
만일 많은 돈을 얻었으면 서국(西國)의 사법(寺法)과 속인들의 집처럼 아주 고용하고 좋은 곳에 성승을 위해 방을 만들고 4시(時) 중에서 겨울과 여름을 따라 갖가지로 공양한다. 여름철에는 방 안에 날마다 따로 좋고 깨끗한 자리를 깔고 홑속옷과 구리단지ㆍ구리병ㆍ조두(澡豆)와 깨끗한 수건을 준비하고 오전에는 음식을 드린다. 밤에는 등불을 켜고 향을 피우며 마음과 힘을 따라 여법하게 공양한다. 겨울이 되면
두터운 옷과 담요ㆍ숯불ㆍ더운물ㆍ등불 등을 두고 때를 따라 공양한다.
혹 성승의 돈으로 남는 것이 있더라도 그것은 항상 절에 있는 스님이나 내지 다른 스님이 써서는 안 되며 또 불법에 써서도 안 되며 또 그것으로 다른 성승의 형상을 지어서도 안 된다. 어떤 사람은 성승의 돈으로 불상을 채색으로 그리거나 성승을 4벽(壁)에 그리거나 가섭ㆍ아난 등의 형상을 그리는 것을 자주 본다. 그러나 빈두로는 열반에 들지 않았기 때문에 성승의 부촉과 진지(進止)를 얻을 수 없거늘 어찌 함부로 그것을 호용(互用)할 수 있겠는가. 만일 사사로이 썼으면 반환해야 하고 반환하지 않으면 죄를 짓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분율(四分律)』에서 “이것에는 허용되지만 다른 것에 쓰면 죄를 짓게 된다”고 한 것이다. [남의 것을 자기 것처럼 써서 자기와 남을 불문하고 예사로 다른 데 쓰면 어찌 옳다 하겠는가?]
이상에 말한 것은 다 경율(經律)의 성의(聖意)에 의해 적은 것이니, 이대로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 3보의 물건은 귀중한 것이어서 호용(互用)할 수 없는 것이니 털끝만큼의 차이가 천리의 벌어짐이 될까 두렵다. 그러므로 양무제(梁武帝) 때에 대덕(大德)과 영유(英儒)들이 다 함께 서역(西域), 삼장(三藏)을 청해 『찬집성승법용(簒集聖僧法用)』을 다섯 권으로 번역해 내었던 것이니,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것도 다 그대로 쓴 것이다.
(4) 시식부(施食部)
『열반경』에서 말하였다.
“광야의 귀신들에게 불살생계(不殺生戒)를 줌으로 인해, 그들은 고기를 먹지 못했기 때문에 기력이 허약해져 장차 죽게 되었다. 부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나의 성문(聲聞) 제자들에게 명령하여 불법이 있는 곳에서는 다 너희들에게 음식을 주게 하리라. 만일 그들이 사는 곳에서 너희들에게 음식을 주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는 악마의 권속이요 참 내 제자 성문이 아니니라.
그러나 중생에게 음식을 줄 때는 반드시 분량이 있어야 한다. 만일 남의 시주의 음식을 먹을 때는
오분율(五分律)에 의해야 한다.’”
『오분율』에서는 말하였다.
“만일 거지아이나 새나 개 등에게 먹이를 줄 때에는 다 제각각의 식량(食量)을 따라 그 이내로 주어야 하며 그 분량 이상으로 주어서는 안 된다. 요새 보면 승려나 속인들은 재(齋)를 올릴 때 시주의 음식을 절약한다 해서 그 처자에게 음식을 주지 않고 먼저 스님들에게 공양하여 장차의 복밭을 만든다. 스님들은 먼저 먹은 음식의 다소는 생각하지 않고 우선 배불리 먹는다. 많은 음식을 새나 개에게 주는 것은 시주에게 손해 되고 또 자기 죄도 되는 것이다. 만일 분량 이내로 제 음식을 줄 때는 많고 적은 분량을 따지지 않는다.”
또 『십이두타경(十二頭陀經)』에서 말하였다.
“음식을 얻어먹을 때는 다음과 같이 ‘굶주리는 중생을 보면 이 1분(分)을 덜어 줌으로써 나는 주는 이가 되고 그는 받는 이가 되게 하리라’고 생각하라.
음식을 주고는 이렇게 서원 하라.
‘일체 중생으로 하여금 복을 일으키게 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또 그들이 간탐(慳貪)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라.’ 그리고 음식을 가지고 한적한 곳에 가서 그 한 덩이를 깨끗한 돌 위에 놓고 금수에게 줄 때도 앞에서와 같이 서원하라. 또 음식을 먹으려고 할 때는 다음과 같이 ‘내 몸 안에는 8만 마리의 벌레가 있다. 이들은 다 이 음식을 먹고 모두 안온 하라. 나는 지금 이 음식을 이 벌레들에게 주고 그 뒤에 도를 얻을 때에는 항상 이들에게 법을 보시하리라’고 생각하라. 이것을 중생을 버리지 않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관불형상경(灌佛形像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대중에게 말씀하셨다.
“세상에는 발심하고 소원을 이루려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그들은 보시할 때 다소를 헤아리지 말고 남을 다 충족하게 하라. 그 일을 마치고 남는 음식이 있더라도 다 먹지말고, 절을 지키고 법을 지니는 여러 스님들에게 보내어 모두 나누어 먹게 하라. 물건을 낼 때는 마땅히 복이 생기기를 바라고 각각 다투어 그것을 나누어 가지고 집에 돌아가 처자에게 주지 말라. 그렇게 주면 이것을 돌 위에 심은 종자가 다 말라 끝내 날 때가 없는 것이라 한다. 지금 보시하면 앞으로의 복이 많아 스님들에게 보시할 수 있나니, 이것 하나를 보시해 만 배의 과보를 얻는 것이라 하느니라.”
또 『사분율(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스님에게 죽을 보시하면 다섯 가지 이익을 얻는다. 첫째는 주림을 없애고, 둘째는 갈증을 없애며, 셋째는 먼저 먹은 것을 소화하고, 넷째는 대소변이 고르며,
다섯째는 눈이 밝아지는 것이다.”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죽을 보시하면 열 가지 이익을 얻는다.
그러므로 게송으로 한다.
계율을 지니고 청정한 사람을
받들어 공경하고 때를 따라 죽을 드려
열 가지의 이익을 행하는 사람은
색(色)과 힘과 목숨과 즐거움과 말과 맑은 변재를 얻고
묵은 음식과 풍(風)이 없어지고 주림과 목마름 사라지나니
이것을 약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이나 천상에 나서 오래 살고 즐거우려면
지금 부디 여러 스님들에게 죽을 보시하라.”
또 『식시획오복보경(食施獲五福報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알아야 한다. 음식에 절도가 있으면 먹어도 손해가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음식을 남에게 보시하는 사람은 다섯 가지 공덕이 있고 남으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잘 소화하고 마음이 넓어지며 다섯 가지 복을 얻는다. 다섯 가지 복이란, 첫째는 지혜로운 사람이 목숨을 주고, 둘째는 색(色)을 주며, 셋째는 힘을 주고, 넷째는 편안함을 주며, 다섯째는 변설을 주는 것이다.
목숨을 줌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안색이 초췌하고 나타내 보일 수 없으며 7일을 넘기지 못해 갑자기 목숨이 끝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을 준다는 것은 곧 목숨을 주는 것이다. 그 목숨의 시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마다 수명이 길어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수명이 길어 중간에서 일찍 죽지 않으며 자연한 복의 과보로 그 부(富)가 무량하나니, 이것을 목숨을 주는 것이라 한다.
색을 줌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할 때는 안색이 초췌하고 나타내 보이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을 주는 것은 곧 색을 주는 것이다. 그 색의 시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마다 얼굴이 단정하여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안색이 빛나므로 보는 사람은 다 기뻐하며 머리를 조아려 예배하나니, 이것을 색을 주는 것이라 한다.
힘을 줌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하면 몸은 여위고 마음은 약해져 할 일을 잘 할 수 없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을 주는 것은
곧 힘을 주는 것이다. 그 힘의 시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마다 힘이 많아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그 힘은 짝할 사람이 없으며 출입하고 진지(進止)해도 힘이 줄지 않나니, 이것을 힘을 주는 것이라 한다.
편안함을 줌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할 때는 마음이 근심스럽고 몸이 위태로워 앉거나 일어나거나 안정이 되지 않아 스스로 편안해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을 주는 것은 곧 편안함을 주는 것이다. 그 편안함의 시혜를 받은 사람은 세상마다 안온하여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어떤 재앙도 당하지 않으며, 가는 곳마다 선량한 사람을 만나고 재산이 무량하며 중간에 일찍 죽지 않는다. 이것을 편안함을 주는 것이라 한다.
변설을 줌이란 무슨 뜻인가? 사람이 음식을 먹지 못할 때는 몸은 여위고 뜻은 약하여 입으로 말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람은 그를 위해 음식을 준다. 그 음식을 주는 것은 곧 변설을 주는 것이다. 법의 이익을 설명할 때는 막힘이 없고 슬기로운 변설은 모든 것을 통달한다. 천상이나 인간에 나더라도 그 말을 듣는 사람은 모두 기뻐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그 설법을 듣는다.
이상이 음식의 과보인 5복이니라.’”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때에 맞는 시식(施食)에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는 멀리서 왔을 때요, 둘째는 멀리 갈 때며, 셋째는 병이 났을 때요, 넷째는 춥거나 더울 때며, 다섯째는 처음으로 과일을 얻었을 때이나. 새로 나온 곡식을 얻었을 때는 먼저 계를 지니고 정진하는 사람에게 주고 그 다음에 자신이 먹는다.
또 보시에 3법(法)이 있다. 첫째 음식을 절에 보내는 것을 상(上)이라 하고, 둘째 집에 청하여 공양하는 것을 중(中)이라 하며. 셋째 절을 지으려고 청할 때 주는 것과 마음을 내어 공양하는 것을 하(下)라 한다.”
또 『장아함경』에서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목이 말라 물을 마시고 싶다. 너는 물을 가져오너라.’
아난이 말씀드렸다.
‘아까 5백 채의 수레가 상류를 건너가는 바람에 물이 다 흐려 발은 씻을 수 있으나 마실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부처님께서는 ‘너는 물을 가져오너라’ 하고 세 번이나 말씀하셨다. 아난은
‘지금 구손강(拘孫江)이 여기서 멀지 않습니다. 그 물은 맑아 마실 수도 있고 목욕할 수도 있습니다’고 대답했다. 그 때 어떤 귀신이 설산(雪山)에 있었다. 그는 불도를 독실히 믿고 있었다. 그는 여덟 가지 깨끗한 물을 발우에 담아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바쳤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어여삐 여겨 그것을 받으셨다.”
(5) 식시부(食時部)
【문】 어떤 것을 먹을 때라 하고 어떤 것을 지난 때라 하는가?
【답】 『사분율(四分律)』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해가 뜰 때에 비로소 죽을 먹는다.[해가 뜨기 전은 먹는 때가 아니다] 그리고 오시(午時)에도 먹을 수 있다.”
조사해보니 이 오시가 바로 법이니 이 때가 바로 먹을 때이다. [『승기율』에서는 ‘이 오시를 지나면 털 하나, 눈 한번 깜빡이는 사이에도 풀잎 등의 그림자가 생기나니, 이 때는 먹을 때가 아니다’고 하였다] 사천하에서도 이와 같다. 그러므로 『비라삼매경(毘羅三昧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법혜(法惠)보살을 위해 말씀하셨다.
“음식을 먹을 때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아침이니 하늘이 먹을 때요, 둘째 낮이니 법답게 먹을 때며, 셋째 저녁이니 짐승이 먹을 때요, 넷째 밤이니 귀신이 먹을 때이다.”
부처님께서는 6취(趣)의 인(因)을 끊고 그들로 하여금 부처님과 같게 하였으므로 정오는 법답게 먹을 때이다. 정오가 지난 뒤에는 하취(下趣)와 같기 때문에 상취(上趣)가 먹을 때가 아니다. 그러므로 비시(非時)인 것이다. 『십송률』에서는 “오직 하늘만은 정오를 지나 먹어도 죄가 없다”고 하였다.
또 『십송률』에서 말하였다.
“염부제의 비구가 서방의 구야니(拘耶尼)에 가면 구야니의 시간을 쓰고, 구야니의 비구도 다른 3주(洲)에 가면 또한 그와 같다. 만일 여기서 자면 여기의 시간을 쓰고 저기서 자면 저기의 시간을 쓰며 다른 3주도 또한 그렇다.”
그러므로 『마덕륵가론(摩德勒伽論)』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문】 과연 비시(非時)에 먹어도 죄가 아닐 수 있는가?
【답】 있다. 만일 북방의 울단월에 머물면서 거기의 시간을 쓰면 그것은 죄가 아니요, 다른 주(洲)에 있어서도 이와 같다. 염부제의 정오는
북방에서는 밤중이요 동방에서는 해가 질 때며 서방에서는 해가 뜰 때이니, 다른 주(洲)에서는 서로 변하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살바다론(論)』에서 말하였다.
“시(時)의 해석에 네 가지가 있다. 첫째 해가 뜰 때부터 정오까지 그 밝음이 한창 성할 때를 시(時)라 하고 정오에서 새벽까지 그 밝음이 차츰 사라지는 때를 비시(非時)라 한다. 둘째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밥을 지어먹을 때여서 구걸해도 그들이 괴로워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시(時)라 하고 정오부터 밤중까지는 속인들이 잔치하고 놀 때어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면 그들을 귀찮게 함이 많기 때문에 이것을 비시(非時)라 한다. 셋째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속인들은 사무를 보고 음란(淫亂)한 마음이 아직 나지 않아서 구걸해도 그들이 귀찮게 여기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시(時)라 하고 정오부터 이후는 그들은 사무를 쉬고 음탕한 이야기와 온갖 놀이를 할 때여서 마을에 들어가 걸식하면 그들은 비방할 것이기 때문에 이것을 비시라 한다. 넷째 아침부터 정오까지는 걸식할 때여서 음식을 얻어먹고 몸을 보호하며 편한 마음으로 도를 닦아 일이 법에 순응하기 때문에 이것을 시(時)라 하고 오후부터는 으레 도를 닦고 걸식할 때가 아니기 때문에 비시(非時)라 한다.”
(6) 식법부(食法部)
『대유교경(大遺敎經)』에서 말하였다.
“비구가 음식을 먹으려 할 때는 마땅히 단월을 위해 향을 피우고 게송을 세 번 외워 보시를 찬양한 뒤에 맛있는 음식을 먹어야 한다. 또 상좌(上座)가 시키는 대로 따라서 도사(道士)들은 각기 나가 손을 씻고 양치질한 뒤에 돌아와 각각 제자리에 앉는다. 그리고 각각 게송 하나씩을 외우고 차례를 따라 일어나되 차례를 어겨서는 안 된다.
또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공양을 베푸는 사람이 손으로 향로를 잡고, 공양 때가 되었다고 외치면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신다.
‘향은 부처의 사자(使者)다. 그러므로 향을 사루어
시방의 모두를 청하라.” [이미 향을 피울 줄 알았으니 본래 부처님을 청하라 한 것이다. 그러나 범부들은 마음이 멀리 떨어져 있어 눈으로 직접 보고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로 하여금 향을 피워 시방의 일체 범부와 성인을 청하라 하시고, 그로써 복의 일은 허공에 올라 두루 어디나 가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다. 바로 향을 주면서 게송을 외우라 할 때는 일체의 승려와 속인들은 화엄경에 의해 각각 한 게송씩을 외운다.]
계율의 향과 선정의 향과 해탈향(解脫香)의
그 광명의 구름 누대가 세계를 두루 덮네.
시방에 계신 무량한 부처님께 공양하나니
보고 또 들으시고 두루 쪼여 적멸을 깨닫게 하소서.
또 『삼천위의경(三千威儀經)』에서 말하였다.
“앉아서 향을 받는 것도 좋다. 여자가 향을 줄 때 접촉하여 물들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앉아서 받아도 좋다는 것이다.” [만일 비방을 받을까 두려우면 여자로 하여금 마음을 멀리하게 하여도 된다. 남자가 향을 주고 여자가 그것을 받을 때는 위의 반대로 하면 된다.]
自述
의복이나 음식을 얻을 때는 좋고 나쁨을 가리지 말라. 다만 그것으로 몸과 목숨을 지탱하고 보전하여 도를 닦을 수만 있다면 부처님의 뜻에 맞는 것이다. 마치 고차(膏車)에 기름이 필요한 것과 같거니 어찌 정묘(精妙)한 것만 가리겠는가? 다만 그것을 굴러가게 하여 목적지에만 가면 좋은 것이다. 그러므로 『잡보장경』에서 세존께서는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이 몸은 수레 같은 것이니
좋고 나쁜 것 가리지 않네.
향기로운 기름이나 냄새나는 기름이나
조리(調利)에 있어서는 다 꼭 같으니라.“
또 『지도론』에서 말하였다.
“음식은 도를 행하기 위한 것이고, 몸을 살찌우기 위한 것이 아니니, 이것은 말을 먹이고 돼지를 기르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음식을 얻었을 때는 먼저 3보(寶)께 바치고 그 다음에 4생(生)에게 주라. 그러므로 『화엄경』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만일 음식을 얻었을 때에는
마땅히 원하여라. 모든 중생을
법을 위하여 공양 베풀고
언제나 그 뜻은 불법에 있으라고.”
또 『우바새계경(優婆塞戒經)』에서 말하였다.
“만일 스스로 의복과 음식을 만들면 먼저 부처님께 올리고 또 부모ㆍ사장ㆍ화상으로 하여금 먼저 한 번씩 쓰시게 한 뒤에 자신이 써야 한다. 부처님께 올리는 사람은 꽃과 향으로 대신하고, 모든 음식은 반드시 먼저 사문과 범지에게 보시한 뒤에 자신이 먹어야 한다.
음식을 먹을 때는 다시 생각해야 한다.
즉 첫 번째 숟가락으로 밥을 뜰 때에는 일체의 악을 다 끊기를 원하고 두 번째 숟가락으로 밥을 뜰 때는 일체의 선을 완전히 닦기를 원하며 세 번째 숟가락으로 밥을 뜰 때에는 닦은 바 선근을 다 중생들에게 돌려주어 다 함께 성불하기를 원하라. 만일 낱낱이 다 생각할 수 없으면 음식을 먹으려 할 때 통틀어 한 번 생각해도 좋다.”
그러므로 『마덕륵가론(摩德勒伽論)』에서 말하였다.
“음식을 얻었을 때는 숟가락마다 생각하고, 옷을 얻었을 때는 입을 때마다 생각하며, 방에 들어갈 때는 들어갈 때마다 생각하라. 만일 근기가 둔한 사람이면 통틀어 한 번 생각하라.”
그러므로 『화엄경』 제6권에 말하였다.
“보살은 140원(願)이 있다. 무릇 모든 행위는 다 게송을 외우며 다음과 같이 ‘이렇게 먹는 것은 번뇌가 있어서가 아니고 중생을 이롭게 하기 위해서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증일아함경』에서 말하였다.
“보시 중의 상(上)이란 법의 보시보다 나은 것이 없고, 업 중의 상(上)이란 법의 업보다 나은 것이 없으며, 은혜 중의 상(上)이란 법의 은혜보다 나은 것이 없다. 만일 지나치게 배불리 먹으면 기식(氣息)이 급하고 몸이 비만해져 모든 맥이 통하지 않고 마음을 막히게 하여 앉거나 누워도 편하지 않다. 또 너무 지나치게 적게 먹으면 몸이 여위고 마음이 멀어져 뜻이 견고하지 않다.”
그러므로 『증일아함경』의 게송을 말하였다.
“많이 먹으면 근심과 고통 이루고
적게 먹으면 기력이 쇠약하며
양에 알맞게 먹는 사람은
저울의 높고 낮음 없는 것 같다.”
또 『살차니건자경(薩遮尼乾子經)』의 게송에서 말하였다.
“음식을 너무 많이 먹는 사람은
몸이 무겁고 게으름이 많아
이 세상이나 오는 세상에
그 몸에서 큰 이익을 잃는다.
수면(睡眠)의 고통을 스스로 받고
또한 남까지 괴롭게 한다.
정신이 미혹되어 깨어나기 어렵나니
때를 맞추고 양을 알아 먹으라.”
自述
그러므로 출가한 사람이 음식을 먹으려 할 때 먼저
깨끗한 손으로 남에게서 받아먹으면 그는 출가한 뛰어난 사람이라 하며, 못난 범부와 같지 않다. 그러므로 반드시 남에게 받아서만 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살바다론(薩婆多論)』에서 말하였다.
“비구가 음식을 남에게서 직접 받아서만 먹는 데에는 다섯 가지 뜻이 있다. 첫째 도둑질하는 인연을 끊기 위해서이다. [제가 스스로 취해 먹음에도 도적의 모습이 있다.] 둘째 증명을 만들기 위해서이다. [혹은 무슨 질주가 있더라도 비구에게는 관계가 없다.] 셋째 비방을 막기 위해서이다. [출가한 사람이 제가 스스로 취하는 것은 고상한 것이 아니다.] 넷째는 욕심을 적게 하고 족함을 알기 위해서이다. [기어코 받지 않는다고 해서 검소한 것과는 다르다.] 다섯째는 남의 믿음과 공경하는 마음을 끌어내기 위해서이다. [남에게서 직접 받아서만 먹는 것을 보고 외도들은 신심을 낸다.]”
옛날 어떤 비구가 한 외도와 함께 길을 가다가 한 나무 밑에서 쉬었다. 그 나무 위에 과일이 달려 있었다. 식사 때가 되어 외도는 비구에게 말했다.
‘나무에 올라가서 과일을 따서 드십시오.’
비구는 말하였다.
‘우리 계법에는 사람보다 키가 큰 나무에는 올라가지 말라 했소.’
외도는 또 말했다.
‘그러면 나무를 흔들면 되지 않소.’
비구는 말하였다.
‘우리 계법에는 제 손으로 나무를 흔들어 과일을 떨어뜨리지 말라 했소.’
외도는 이 말을 듣고 자신이 나무에 올라가 과일을 따서 땅에 던지면서 비구에게 말하였다.
‘저것을 주워 드십시오.’
비구는 말하였다.
‘우리 계법에 직접 받지 않은 것은 먹지 말라 했소.’
외도는 나무에서 내려와 과일을 집어 비구에게 직접 주었다. 그리고 외도는 생각했다.
‘과일 하나에 있어서도 이런 법이 있거늘 하물며 세상을 벗어나는 법이겠는가?’
외도는 드디어 같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이에 그 비구를 따라 불법 안에 출가하고 도를 닦아 곧 번뇌가 없어졌다.”
또 『사리불문경(舍利弗問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외도나 범지(梵志)도 음식을 직접 받아서만 먹을 줄을 알거늘 하물며 내 제자로서 어찌 직접 받지 않은 것을 먹겠는가? 그러나 무엇이나 다 받지 않아서는 안 된다. 다만 저절로 나오는 보배나 여자에게 주는 것은 예외이다. 만일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으레 주는 입은 옷이나
혹은 금을 담은 그릇을 직접 받으면 그것은 금하는 보시이니라.”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사위국(舍衛國)의 마하가라(摩訶迦羅) 비구는 일체의 분소의(糞掃衣)와 음식을 직접 받았다. 죽은 사람의 옷이나 음식은 그것을 다 가지고 나가서 물에 깨끗이 씻은 뒤에 직접 남에게서 받지 않고, 음식은 먹으면서 항상 죽은 사람 곁에 있었다. 그러나 유행병이 있을 때에는 성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 때 사람들은 다 그를, 죽은 사람의 살을 먹었다 하여 그 나쁜 소문이 퍼졌다. 비구들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비구들을 다 모으고 법을 만들어 ‘지금부터 비구들은 직접 받지 않은 음식은 입에 대기만 해도 죄가 된다’고 하셨다.”
또 『대방등다라니경(大方等陀羅尼經)에서는 말하였다.
“또 음식을 받을 때는 여색(女色)을 보지말고 다만 마음속으로 ‘내 마음 속의 이 독화살을 어떻게 하면 뽑아 버릴까? 나는 여색을 보기 때문에 오랜 옛날부터 지금까지 그 여색에 걸려 3도(塗)에 떨어진 채로 벗어날 기약이 없었다’고 생각하라. 또 저 6진(塵)도 이와 같이 관찰하라. 내 제자들은 여기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런 도덕은 사람의 좋은 공덕을 죽이는 것이니라.”
自述
모든 스님의 음식은 다 평등하여 범부와 성인을 물론하고 상하가 두루 균등해야 한다. 그러므로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하였다.
“만일 어떤 단월이 음식을 돌릴 때 상좌(上座)에 앉은 이에게 많이 주면 그 상좌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모든 스님들에게도 다 이렇게 주는가?’
그 때 단월이 ‘상좌 스님에게만 이렇게 드립니다’라고 답하면, 상좌는 다시 ‘모든 스님들에게 다 꼭 같이 돌리시오’라고 말해야 한다. 그래서 그가 ‘모두 그렇게 드렸습니다’라고 했을 때 비로소 받아먹어야 한다.
상좌의 법으로는 음식을 받자 곧 먹어서는 안 된다. 음식을 다 돌린 뒤에 ‘다 공양을 듭시다’라고 외치기를 기다려 먹어야 한다. 또 상좌의 법으로는 천천히 먹어야 한다. 그런데 어떤 이는 빨리 다 먹고 앞에 나간다. 그러나 물을 다 돌리고 남을 따라 축원한 뒤에 나가야 한다.
또 『처처경(處處經)』에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오후에 음식을 먹지 않으면 다섯 가지 복이 있다. 첫째 음심(淫心)이 적고, 둘째 누움이 적으며, 셋째 마음이 한결같고, 넷째 하풍(下風)이 없으며, 다섯째 몸이 편하고 또 병이 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문은 먹지 않는 이 복을 알아야 한다.”
自述
만일 음식을 늘 탐하면 번뇌를 증가시킨다. 그러므로 그것을 싫어하여 더러운 것이라는 생각을 일으켜야 한다.
그러므로 『지도론(智度論)』에서 말하였다.
“음식에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은 이 음식은 더러운 것에서 생긴 것이라고 보라. 마치 이 살은 정혈(精血)의 수도(水道)에서 생긴 것과 같다고 보아야 한다. 이것을 고름과 벌레가 머무는 곳이라 한다. 소유(蘇乳)는 낙혈(酪血)이 변해서 된 것과 같아서 문드러진 고름과 다름이 없다. 요리하는 사람의 그 더러움은 갖가지로 깨끗하지 못하다. 음식을 입에 넣으면 뇌수에서는 문드러진 점액(粘液)이 두 길로 흘러내려 침과 화합한 뒤에 맛을 이루며, 그 형상은 마치 토한 것과 같아 배의 문으로 들어간다. 그래서 지(地)는 그것을 지니고 수(水)는 그것을 썩히며 풍(風)은 그것을 움직이게 하고 화(火)는 그것을 익힌다. 마치 솥에 죽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탁한 것은 밑에 가라앉고 맑은 것은 뒤에 있다. 또 술을 빚는 것과 같아서 탁한 찌꺼기는 똥이 되고 맑은 것은 오줌이 되며, 또 세 구멍이 있다. 바람이 기름진 즙(汁)을 모든 맥[百脉]에 불어넣으면 먼저 있던 피와 합해 엉겨서 살로 변하고 새 살에서 지방이 생기며 골수는 이 안에서 생긴다. 신근(身根)은 새살과 묵은 살이 합해 5근(根)을 내고 이 5근에서 5식(識)이 생기며 5식에서 차례로 의식(意識)이 생겨 분별해 상(相)을 취하고 좋고 추함을 헤아리며, 그 다음에는 아(我)와 아소(我所)ㆍ심(心) 등 모든 번뇌와 모든 죄업(罪業)이 생긴다.
또 다음과 같이 ‘이 음식에 들인 공력(功力)은 매우 많다. 한 그릇의 밥을 생각할 때 이것을 지은 사람이 흘린 땀을 모으면 음식은 너무 적고 땀은 매우 많다. 이 음식을 위한 고생은 이와 같다. 이것을 입에 넣으면 곧 부정한 것이 되어 잠깐 사이에 똥과 오줌으로 변한다. 본래 그처럼 맛있던 것이 이제는 더러워 보고 싶지도 않다’고 생각해야 한다.
행자는 또 ‘이처럼 더러운 음식에 만일 내가 탐착하면 나는 3도(塗)에 떨어질 것이다’고 생각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하고는 부디 5욕(欲)을 싫어하라. 비유하면 어떤 바라문과 같다. 그는 정결한 법을 닦다가 어떤 볼일이 있어 부정(不淨)한 나라로 갔다. 그는 가만히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이 부정을 면할 수 있을까? 오직 마른 음식을 먹어야만 청정해질 것이다.’
그는 백수(白髓)의 떡을 파는 한 노파를 보고 말했다.
‘나는 무슨 일이 있어 여기서 1백 날 동안 있을 것입니다. 그 떡을 만들어 늘 보내 주면 그 값은 많이 드리겠습니다.’
노파는 날마다 떡을 만들어 늘 보내주었다. 바라문은 그것을 탐해 배불리 먹고 배우 기뻐했다. 그런데 그 노파가 만든 떡은 처음에는 희고 깨끗했는데 뒤에는 변해 빛깔도 없고 맛도 없었다. 그가 노파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이렇게 됩니까?’
노파가 말했다.
‘모진 종기가 다 나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무슨 말입니까?’
노파는 말하였다.
‘우리 대가(大家)의 부인이 비밀한 곳에 모진 종기가 나서 면소(麵蘇)를 붙였더니 종기가 터져 고름이 나왔습니다. 그 고름과 면소를 한데 으깨어 그 떡을 만들었습니다. 날마다 이렇게 해 당신에게 보냈는데 그 때문에 그 떡이 좋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부인의 종기가 다 나았으니 난들 어디 가서 그것을 다시 구하겠습니까?’
바라문은 이 말을 듣고는 두 주먹으로 머리와 가슴을 치고 헛구역질을 하면서 말했다.
‘내가 왜 이 깨끗한 법을 부셔버렸을까? 이제 내 일은 끝장이다’고 했다. 그리고 볼 일을 다 집어치우고 빨리 본국으로 돌아왔다. 행자도 또한 이와 같다. 이 음식에 탐착하여 기뻐하고 즐겨 먹으면서 부정은 보지 않다가 뒤에 가서 고통을 받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7) 식흘부(食訖部)
『파리론(波離論)』에서 말하였다.
“출가한 승니(僧尼)와 속인 등은 재(齋)를 올린 뒤에 조두(澡豆) 가루나 거마(巨摩) 등으로 양치질을 하지 않으면 다 재를 이루지 못한다. 이것은 과거의 연제(蓮提) 비구와 같다. 그는 나이 60세까지 빠지지 않고 재계를 하면서 하루에 한 끼만 먹고 거마와 조두 가루 등으로
양치질을 하여 재를 이루었으니, 만일 그렇게 하지 않았으면 다 재를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이 경우에는 조목이 없다. 『출요율의(出要律儀)』에는 ‘거마란 쇠똥이다’고 했다. 만일 『파리론』에 의한다면 어찌 쇠똥으로 양치질을 할 수 있겠는가? 『야사법사전기(耶舍法師傳記)』에는 ‘서역의 속인과 외도들은 범천(梵天)과 소 등을 섬기기 때문에 이 두 가지는 능히 만물을 내고 인민을 기른다고 했다. 그러므로 쇠똥으로 도량을 깨끗이 했던 것이라 했다’고 했다. 그러면 왜 그것으로 양치질은 하지 않았겠는가?”
『사분율(四分律)』 등에서는 “다만 행주좌와(行住坐臥)의 4종 위의를 지키고 5종의 정식(正食)을 먹으며, 4상(相)의 어긋남이 없으면 대법을 이룬다”고만 하고, “조두 가루로 양치질함으로써 재를 이룬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또 『선견론(善見論)』에서는 말하였다.
“재를 마치고 음식을 토하되 그것이 목을 넘어오기 전에 도로 삼키면 범하지 않지만 만일 이미 나온 것을 다시 삼키면 죄를 범한다.”
또 『승기율(僧祇律)』에서는 말하였다.
“음식을 먹은 뒤에 목이 마르면 부처님께서는 콩ㆍ보리 등 일체의 곡물을 삶아 깨어지지 않은 것이면 비시(非時)에라도 즙(汁)을 내어 마실 수 있다. 소유(蘇油)나 꿀 및 석밀(石蜜)과 모든 과일 즙 등은 반드시 물에 씻어 깨끗이 한 것에서 짠 것은 마실 수 있다. 발우에 남은 물이라도 빗물에 씻으면 깨끗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선견론(善見論)』에서 말하였다.
“사루가(舍樓伽) 과일즙을 걸러서 맑게 한 것은 비시(非時)에라도 마실 수 있다.”[사루가는 연 뿌리이다.]
『마덕륵가론(摩德勒伽論)』에서 말하였다.
“사탕물은 비시라도 마실 수 있다.”
『승기율(僧祇律)』에서는 말하였다.
“사람에게는 404병(病)이 있다. 풍대(風大)의 101병은 유지(油脂)로 다스리고, 화대(火大)의 열병 101은 소(蘇)로 다스리며, 수대(水大)의 101병은 꿀로 다스리며, 잡병의 101은 위의 세 가지 약으로 다스린다.”
『십송률(十誦律)』에서는 말하였다.
“석밀(石蜜)은 비시(非時)에는 먹을 수 없다. 5종의 사람은 비시라도 먹을 수 있다. 첫째 멀리 여행하는 사람이요, 둘째 병든 사람이며, 셋째 굶은 사람이요, 넷째 조금 먹은 사람이며, 다섯째 물을 주는 곳에서 물에 섞어서 주면 마실 수 있다.”
『오분률(五分律)』에서 말하였다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에는 마실 수 있다.”[그러므로 병이 없고 때가 아니면 석밀이나 소유 등이라 하더라도 먹을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승기율(僧祇律)』에서는 말하였다.
“호주ㆍ
필발열매ㆍ마하륵ㆍ생강 등은 모시(無時)로 먹되 함께 섞은 것이면 비시에도 먹을 수 있다.”
또 『사분률(四分律)』에서 말하였다.
“쓰고 맵고 시고 단 것 등 일체는 함부로 먹을 수 없는 것이지만, 비시라도 목숨이 위태할 때는 약으로 만들어서는 먹을 수 있다.”
『선견론(善見論)』에서 말하였다.
“모든 나무 및 과일ㆍ뿌리ㆍ줄기ㆍ가지ㆍ 잎 등 마음대로 먹을 수 없는 것이라도 다 목숨이 위태할 때는 약으로 만들어서는 먹을 수 있다.”
自述
요새 보면 사람들은 먹을 때가 아닌 때에 먹으면서 먹을 때에 먹는다고 하는데 어찌 그것이 옳겠는가. 이른바 변방의 승려나 속인들은 계율에서 과일즙은 먹어도 좋다는 말을 듣고는 곧 마른 대추 즙을 먹거나, 혹은 날 배ㆍ날 포도ㆍ날 석류 등을 찧은 즙을 마시지 않고 씨 채로 마구 먹으며, 비록 찧은 즙이라도 걸러서 맑게 하지 않은 탁한 즙을 찌꺼기와 함께 다 먹는다. 혹은 사루가 즙을 열병을 다스림으로써 먹어도 좋다는 말을 듣고 그 뿌리를 날것인 채로 마구 먹고, 혹은 청반(請飯)의 물을 마시며 혹은 주리고 목마르지 않으면서 소유ㆍ꿀ㆍ석밀 등을 비시에 먹고 혹은 살구 씨를 달여 조탕(稠湯)을 만든다. 이렇게 외람된 사람이 한 둘이 아니어서 다 적을 수 없다.
다만 『십송률』에 의하면 앞에서 말한 멀리 여행하는 사람 등 5종의 사람이 아니면 함부로 먹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먹기를 마치고 재를 파하면 자주 범하는 자가 많음을 본다. 그러므로 소(疎)에 따로 적은 것이다.
(8) 축원부(祝願部)
『불본행경(佛本行經)』에서 말하였다.
“그 때 세존께서는 아침 일찍이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비구들에게 앞뒤로 호위를 받으며 대중의 우두머리가 되어 수두단왕(輸頭檀王)의 궁전으로 가셨다. 이미 만들어 놓은 부처님의 자리에 앉고 비구들도 각각 차례대로 여법하게 앉았다. 그 때 수두단왕은 부처님을 우두머리로 하여 여러 비구들이
차례대로 자리에 앉자 갖가지 미묘한 음식을 손수 돌렸다. 공양을 마친 뒤에 세존은 수두단왕을 교화시켜 그로 하여금 깨치고 기뻐하게 하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절로 돌아오셨다.”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어떤 비구가 남의 초청을 받아 공양하러 갔을 때, 그 집에 갈 때도 잠자코 들어가고 나올 때도 잠자코 나왔다. 여러 거사(居士)들은 그를 나무라면서 ‘음식이 좋았는지 나빴는지 우리가 모르지 않는가?’하고 말하였다. 비구들이 부처님께 이 사실을 아뢰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지금부터는 그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그 시주를 위해 게송으로 찬미하고 축원하도록 하라.’
‘누가 그 축원을 지어야 하겠습니까?’ 하고 비구들은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상좌(上座)가 지어라. 상좌가 지을 수 없으면 차례로 지을 수 있는 사람이 지어라’ 하셨다.”
그러므로 『승기율(僧祇律)』에서 말했다.
“상좌는 그가 무엇을 위해 보시하는지를 알고 그 때를 맞추어 축원해야 한다. 만일 죽은 사람의 명복(冥福)을 비는 사람이면 다음과 같이 축원하라.
목숨이 있는 일체 중생들
모두 다 죽음으로 돌아간다.
선하거나 악하거나 그 행을 따라
스스로 그 과보를 모두 받는다.
악을 행한 사람은 지옥에 들어가
선을 행한 사람은 천상에 난다.
도를 잘 닦아 행한 사람은
번뇌를 다 없애고 열반 얻는다.
또 아들을 낳아 복을 비는 사람에게는 이렇게 축원해 주어야 한다.
이 아이는 부처님께 귀의한다.
비바시(毘婆施)부처님과 시기(尸棄)부처님
비섭바(毘葉婆)부처님과 구루(拘樓)부처님
구나함(拘那含)ㆍ가섭(迦葉)ㆍ석가(釋迦)부처님
이 7세(世)의 큰 성인께 귀의한다.
비유하면 마치 사람의 부모가
그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온 세상의 기구들을
그 아들이 다 얻기 바라는 것처럼
그 아들로 하여금 모든 복 받되
이보다 몇 배나 더 받게 하며
온 집안의 모든 권속들
그 받는 즐거움도 끝이 없어라.
또 새집에 들어간 사람의 공양이거든 이렇게 축원해 주라.
집을 덮는 보시로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다 얻으라.
길상(吉祥)한 저 성현들
모두 이 집에서 수용(受用)하여라.
이 세상에서 지혜로운 사람이
이 자리를 잘 알고 집을 지어
행이 깨끗한 사람 청하여
복을 닦으려 음식 차렸다.
스님들이 직접 축원하니
이 집의 신(神)이 기뻐하면서
선심으로 항상 수호하면서
언제나 길이 여기 있거라.
혹 마을에 들어가거나
또 혹은 광야로 나가거나
혹은 낮이나 또 밤이나
천신(天神)이 항상 수호하여라.
또 장사하러 떠나는 상인(商人)의 복을 빌기 위한 공양이거든 이렇게 축원해 주라.
어디로 가든지 다 안온하고
모든 하늘이 길상(吉祥)으로 응하라.
이 말을 듣고 기뻐하면서
하고 싶은 것 다 이루라.
두 발 중생도 다 안온하고
네 발 중생도 다 안온하며
떠날 때에도 다 안온하고
돌아올 때에도 다 안온하며
밤에도 낮에도 다 안온하라.
모든 하늘이 항상 돕고 보호하며
동행하는 사람도 다 현선(賢善)하며
그들 모두가 다 안온하여
건강하고 어질고 또 착하여라.
손도 발도 다 병이 없고
온 몸의 모든 부분
그 어디에도 아픈 곳 없어져라.
그리고 하고 싶은 일이 있으면
어디로 가든지 소원 이루라.
또 아내를 맞이한 사람의 공양이면 이렇게 축원하라.
여자는 불법 믿고 계를 지니며
그 남자도 또한 그렇게 하라.
믿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능히 보시를 잘 행한다.
두 사람이 다 계를 지니고
바른 견해를 닦아 행하며
기뻐하면서 다 함께 복을 짓고
모든 하늘이 항상 따라 보호하라.
이런 업행의 그 과보는 여행에 노자가 필요 없음과 같다.
또 출가하는 사람을 위한 공양이면 이렇게 축원하라.
발우를 들고 집집이 걸식할 때
분노도 받고 혹은 기쁨 받는다.
그러나 그 뜻을 잘 단속하라.
출가한 이는 보시하기 어렵나니라.”
그러므로 『오분율(五分律)』에서 말하였다.
“상좌가 재(齋)를 할 때에 이상의 일을 잘 참작하여 시주를 위해 축원하면 그는 완전한 과보를 얻는다.”
또 『증일아함경』에서는 부처님께 동산을 보시하는 여자를 위해 다음 게송으로 축원하셨다.
“동산의 과일나무 시원함을 보시하고
다리를 놓아 사람들 건네 주며
길 가까이 변소를 지어
사람들 모두 휴식 얻는다.
그는 밤낮으로 항상 편하고
짓는 그 복은 한량없나니
모든 법의 계율을 잘 성취하라.
죽으면 반드시 천상에 나리.”
(9) 시복부((施福部)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였다. 왕사성(王舍城)의 어떤 장자(長者)는 재보가 무량하여 헤아릴 수 없었다. 그 부인이 딸을 낳았는데 아이는 낳자마자 곧 말을 잘하였고 집안에는 온갖 맛있는 음식이 저절로 다 갖추어졌다. 부모는 이것을 보고 그 아이는 사람이 아닌 비사사(毘舍闍) 귀신이라 하고 두려워해 감히 가까이 가지 않았다. 그 아이는 부모가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는 어머니를 향해 합장하고 다음 게송으로 말했다.
원컨대 어머님은 내 말 들으시오.
나는 지금 사실대로 다 말하리라.
나는 실로 비사사 귀신이 아니요
또 어떤 다른 귀신도 아닙니다.
나는 실로 사람으로서
업행(業行)이 나를 따라다닙니다.
그 선한 업의 인연 때문에
지금 이러한 과보 받았습니다.
그 때 부모는 이 아이의 게송을 듣고 기뻐하여 곧 다가가 아이를 안고 젖을 먹여 길렀다. 그리고 이름을 선애(善愛)라 했다. 어느 때 그 아이는 어머니를 보고 기뻐하며 합장하고 어머니께 아뢰었다.
‘어머님, 나를 위해 부처님과 비구승을 초청해 주십시오.’
어머니는 그 청을 들어 주었다. 이는 곧 온갖 맛난 음식을 다 차려 놓고 부처님 앞에서 간절한 마음으로 설법을 청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아이를 위해 설법하여 아이는 수다원이 되었다. 그 뒤에 아이가 부처님께 출가하기를 청하자 부처님께서는 ‘잘 왔도다, 비구니여’ 하셨다. 그녀는 머리털이 저절로 떨어지고 법복이 몸에 입혀져 비구니가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수행하고 아라한이 되어 세상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그 때 세존은 1,250 비구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가다가 광야에 이르러 공양 때가 되어 선애 비구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음식을 만들어 나와 비구승들에게 공양하라.’
선애는 곧 부처님의 발우를 들어 공중에 던졌다. 그러자 온갖 맛있는 음식이 저절로 발우 안에 가득 담겼다. 이렇게 차례로 1,250 비구의 발우에도 음식이 가득 담겨 모두 풍족하게 먹었다. 아난은 이것을 보고 미증유(未曾有)라 찬탄하고 부처님께 청해 그녀의 전생의 인연을 말씀해 달라 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현겁(賢劫) 중에 가섭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셨다. 그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여러 비구들과 함께 성 안에 들어가 차례로 걸식하다가 어떤 큰 장자의 집에 이르렀다. 그 집에서는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고 어떤 손님을 청하려 하고 있었다. 그 집의 여종은 부처님과 비구들이 걸식하러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는
장자에게 아뢰지도 않고 준비한 그 음식을 부처님과 비구들에게 다 공양했다. 그 뒤에 손님이 와서 자리에 앉자 장자는 여종에게 말했다.
≺준비한 음식을 내 오너라.≻
여종은 대답했다.
≺주인님, 아까 부처님과 비구들이 걸식하러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준비한 그 음식을 다 갖다 주었습니다.≻
주인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면서 여종에게 말하였다.
≺우리는 그런 큰 복밭을 만났다. 너는 그 음식을 다 그분들께 보시했으니 그 유쾌함은 다 말할 수 없구나. 나는 이제 너를 놓아주리니 너는 무엇이나 마음대로 청하라.≻
여종은 ≺주인님, 만일 저를 놓아주신다면 저는 불도를 닦겠습니다.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했다. 장자는 허락했고 그녀는 비구니가 되었다. 그 뒤로 1백 년 동안 변하지 않고 정근하다가 목숨을 마쳤다. 그러나 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천상과 인간에 나서 온갖 맛있는 음식이 생각만 하면 다 저절로 왔으며, 지금은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얻었느니라.’
비구들은 이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또 『백연경(百緣經)』에서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 계실 때다. 부처님께서는 여름 안거(安居)를 마친 뒤에 비구들을 데리고 다른 나라로 여행하러 나가셨다. 그 때 빈비사라왕은 여러 신하들을 데리고 성을 나오다가 멀리서 여래를 바라보고 ‘여래가 내 공양을 받으러 오신다’고 했다. 그 때 세존은 멀리서 왕의 매우 간절한 뜻을 아셨다. 그러나 비구들이 차츰 더 여행하려 하였으므로 마갈타국(國)으로 갔다가 거기서 여러 새들을 만났다. 그 중에 있던 앵무새왕은 멀리서 여래가 오시는 것을 보고 허공에 날아 올라 길을 거슬러 여래를 맞이하면서 ‘부처님과 비구 스님들은 저희들을 가엾이 여겨 저희들 숲 속에서 하룻밤 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승낙하셨다. 앵무새왕은 부처님께서 승낙하셨음을 알고 숲 속으로 돌아가 모든 앵무새들에게 분부하여 모두 나가 부처님을 맞이하라 했다.
그 때 세존은 여러 비구들을 데리고 앵무새 숲으로 가시어, 각각 자리를 펴고 나무 밑에 앉아 좌선에 들어갔다. 앵무새왕은 부처님과 비구들이 고요히 앉아 참선하는 것을 보고 매우 기뻐하여 공중에서 부처님과 비구승들 위를 날아 돌면서 사자와 호랑이 등
짐승과 또 도적들이 부처님과 비구승을 해치지나 않을까 하고 감시했다. 날이 밝자 부처님께서는 거기서 떠나려 하셨다. 앵무새왕은 기꺼이 부처님을 인도하여 왕사성으로 가서 빈비사라왕에게 아뢰었다.
‘세존께서 비구들을 데리고 지금 여기 오십니다. 대왕은 온갖 음식을 준비하고 길에 나가 맞이하십시오.’
왕은 이 말을 듣고 갖가지 음식을 준비한 뒤에 당기ㆍ번기ㆍ향ㆍ꽃을 가지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여러 신하들과 함께 길에 나가 부처님을 맞이했다. 앵무새왕은 그 날 밤에 갑자기 목숨을 마치고 도리천에 나서 홀연히 8세의 아이만큼 장대해졌다. 그는 생각했다.
‘나는 어떤 복을 지었기에 천상에 났는가?’
그는 스스로 자세히 관찰하고는 앵무새로서 부처님께 청해 하룻밤 쉬시게 했기 때문에 거기 와서 난 것을 알고 ‘나는 지금 돌아가 세존의 은혜를 갚으리라’ 하고 생각했다. 그는 천관(天冠)을 쓰고 영락을 달아 그 몸을 장식한 뒤에 향과 꽃을 받들고 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물러나 한쪽에 앉았다.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4제법(諦法)을 설명하셨다. 그는 마음이 열리고 뜻이 풀려 수다원의 과(果)를 얻고 부처님을 세 번 돌고 천상으로 돌아갔다.
그 때 비구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지금 저 천자(天子)는 전생에 무슨 업을 지어 앵무새가 되었으며 또 무슨 복을 닦아 천상에 났으며 여기 와서 부처님께 공양하고 설법을 듣고 과(果)를 얻었습니까?’
세존께서는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이 현겁(賢劫) 중에 가섭이라는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셨다. 그 불법 안에서 어떤 장자가 5계(戒)를 받았다가 어느 때 한 계를 깨뜨렸기 때문에 앵무새로 태어났고 다른 4계는 완전히 지켰기 때문에 지금 나를 만나 출가하여 도를 얻었느니라.’
부처님께서는 이어 말씀하셨다.
‘알고 싶은가? 그 때의 우바새(장자)는 지금의 저 앵무새이니라.’
비구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기뻐하며
봉행했다.”
또 『부법장경(付法藏經)』에서 말하였다.
“과거 91겁 전의 일이다. 비바시부처님께서 열반하신 뒤에 어떤 비구는 두통이 심하였다. 그 때 박구라(薄拘羅)가 어떤 가난한 사람으로 변해 두통이 심한 그 비구를 보고 하리륵 열매 하나를 그에게 주었다. 비구는 이것을 먹고 두통이 다 나았다. 박구라는 이 약을 보시한 인연으로 91겁 동안 천상과 인간에 나서 복을 받아 쾌락하면서 앓는 적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어떤 바라문의 집에 태어났는데 그 어머니가 일찍 죽자 아버지는 다시 장가갔다.
박구라는 아직 어릴 때에 그 후모(後母)가 떡을 만드는 것을 보고 떡을 좀 달라 했다. 후모는 그를 미워해 곧 아이를 붙잡아 불에 단 번철 위에 던져버렸다. 번철은 달아 있었으나 아이를 태우지 못했다. 아버지는 밖에서 들어와 뜨거운 번철에 있는 박구라를 보고 곧 안아 내렸다. 그 뒤에 후모는 솥에 고기를 삶고 있었다. 박구라는 또 그 어머니에게 고기를 달라고 했다. 후모는 더욱 성을 내어 박구라를 솥 안에 던졌다. 그러나 조금도 상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아들이 보이지 않아 박구라를 불렀다. 박구라는 이 소리를 듣고 솥 안에서 대답했다. 아버지는 곧 박구라를 안아 내었다. 그러나 아이는 여전했다.
그 뒤에 후모가 강으로 나갈 때 박구라는 그 뒤를 쫓아갔다. 후모가 성을 내어 ‘이 요망한 귀신은 삶아도 볶아도 죽지 않는다’ 하고 곧 박구라를 잡아 강물에 던져버렸다. 어떤 큰 고기가 아이를 집어 삼켰다. 그러나 복이 있기 때문에 그래도 그는 죽지 않았다. 어떤 어부가 이 고기를 잡아 시장에 나가 팔려 했다. 그러나 값을 너무 비싸게 불렀기 때문에 사는 사람이 없었다. 해가 저물어 고기가 상하려 했다. 박구라 아버지가 이것을 보고 곧 사 가지고 집에 돌아가 칼로 배를 갈랐다. 아이는 고기 뱃속에서 큰 소리로 ‘아버님 조심하십시오. 이 아이가 다칩니다’고 했다.
아버지는 고기 배를 가르고 아이를 안아 내었다. 아이는 조금도 다치지 않았다. 아이는 차츰 자라 장대해진 뒤에 부처님께 나아가 출가하여 아라한이 되었다. 그 뒤로 나이 160이 될 때까지 한번도 앓는 일이 없고, 심지어 몸에 열이 나거나 머리 아픈 일도 없었다. 그는 그 약을 보시한 인연으로 그처럼 오래 살면서 다섯 군데서도 죽지 않았다. 즉 번철에 구어도 구어지지 않고, 솥에 삶아도 문드러지지 않으며, 물에 빠뜨려도 죽지 않고, 고기가 삼켜도 삭지 않으며, 칼로 베어도 상하지 않았다. 이런 인연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것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또 『십송률(十誦律)』에서 말하였다.
“왕사성(王舍城)의 시리구다(尸利仇多)라는 거사(居士)는 큰 부자로서 재산이 많았다. 그는 외도 바라문의 제자로서 늘 ‘사문 구담(瞿曇)은 참으로 일체지(一切智)가 있는가?’ 하고 의심했다.
그는 부처님께 가서 아뢰었다.
‘사문 구담이시여, 내일은 우리 집에 와서 공양하십시오.’
부처님께서는 그를 제도할 수 있다 생각하고 잠자코 승낙하셨다.
거사는 집에 돌아가 문 밖에 큰 불구덩이를 만들어 불은 있으나 연기는 나지 않게 하고 그 위에 모래를 덮었다. 또 집에 들어가서는 짜지 않은 자리를 펴고 또 음식에 독약을 섞어 두고는 혼자 중얼거렸다.
‘만일 구담이 참으로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알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불구덩이에 빠지고 또 중독이 되어 죽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을 보내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음식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다른 비구들을 내 앞에 먼저 가게 하지 말라.’
그리고 부처님께서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들고 앞에 서시고 비구들은 뒤를 따라 시리구다 집으로 가셨다. 부처님께서는 문 앞에서 그 불구덩이를 연못으로 변화시키자 그 못물은 깨끗하고 차가워졌으며 갖가지 연꽃이 물을 가득 덮었다. 부처님과 비구들은 다 연꽃 위를 걸어 집에 들어가 짜지 않은 자리를 다 짜지게 하고 그 자리에 앉으셨다. 그리고 시리구다에게
‘마음속의 그 의심을 버려라. 나는 실로 일체지를 지닌 사람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거사는 위의 두 가지 신력(神力)을 보고 곧 신심이 생겨 부처님을 존중하여 합장하고 아뢰었다.
‘이 음식에는 독약이 들었습니다. 부처님께서는 드시지 마십시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셨다.
‘그저 그 음식을 내어놓아라. 비구들은 병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부처님은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비구들에게 분부하라. 등공(等供)을 외치기 전에는 아무도 먹어서는 안 된다고.’
이때 부처님께서는 축원하셨다.
‘음욕과 분노와 우치가 이 세계의 독이다. 부처에게는 진실한 법이 있어 일체의 독을 다 제거한다.’
이 진실한 말로 독은 다 제거되고 음식은 곧 청정해졌다. 이때 거사는 물을 손수 돌렸다. 대중은 다 배불리 먹고는 손을 씻고 발우를 챙겼다. 거사는 조그만 자리를 부처님 앞에 갖다 놓고 앉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그 자리에서 법안이 깨끗해졌다. 부처님께서는 절에 돌아와 이 일로 대중을 모으고 ‘지금부터는 부처 앞에 가거나 또 화상(和尙)이나 상좌(上座) 앞에 가지말고 등공(等供)을 외치기 전에는 공양을 먹지 말라’고 하셨다.”
또 『마득륵가론(摩得勒伽論)』에서 말하였다.
“대중이 음식을 돌릴 때 상좌는 ‘모든 스님에게 평등하게 주라’고 말해야 한다. 이렇게 승발(僧跋)을 외치게 한 뒤에 함께 먹어야 하느니라.”
게송을 읊는다.
법의 모임에는 맛난 공양 차리고
재(齋) 올리는 날에는 신령(神靈)을 느끼나니
두루 청하고 따로 청하고 청함이 없어
나그네와 주인에게 아름다운 상서가 있다.
범부와 성인이 새벽에 함께 가서
어떤 재난에도 다 편안하다.
이것은 자선(慈善)의 힘 때문이니
악을 뒤집어 복의 성(城)을 이루리라.
감응연(感應緣)[대략 6가지 증험을 인용한다.]
진(晋)의 사공(司空) 하충(河充)
진(晋)의 비구니 축도용(竺道容)
진(晋)의 궐공측(闕公則)
진(晋)의 남양(南陽)의 등병(膝幷)
진(晋)의 사문 구나발마(仇那跋摩)
양(梁)의 사문 석도림(釋道琳)
진(晋)의 사공(司空) 하충(河充)
진(晋)나라의 사공(司空)인 여강(廬江)의 하충(何充)은 이름이 도차(道次)이다. 젊어서 불법을 믿고 마음의 업이 매우 정묘했다. 서재 방에 항상 빈자리 하나를 만들어 놓고 그 자리와 휘장이 정하고 화려하였는데 구슬이 매달려 있었으며, 여러 해 신이(神異)가 내리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뒤에 큰 법회 때에 승려와 도인이 매우 많이 모였다. 좌석 끝에 어떤 스님이 있었는데, 얼굴과 옷은 추루하고 정신과 표정은 매우 비속했다. 그는 대중 가운데서 나와 바로 법좌(法座)에 올라가서는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아무 말이 없었다. 온 방 안 사람들은 모두 괴상히 여겨 다 그를 방자하다고 생각했다. 하충도 불쾌하여 그 빛을 얼굴에 나타냈다. 점심 공양을 돌릴 때 이 스님은 높은 자리에서 공양을 다 먹고는, 발우를 들고 방에서 나가면서 하충을 보고, “어찌 수고롭게 정진하기를 기다리겠는가” 하고 발우를 공중에 던지고 허공 속으로 날아갔다. 하충과 승려와 속인들이 빨리 달려가 바라볼 때 빛나는 위의는 위대하고 화려하였는데 드디어는 가물가물 사라졌다. 모두 애석해하면서 여러 날을 참회했다.
진(晋)의 비구니 축도용(竺道容)
진(晋)나라의 비구니 축도용(竺道容)은 어떤 사람인지 모른다. 그녀는 오강사(烏江寺)에 있으면서 계행이 순수하고 엄하며 영험이 자주 있었다. 진(晋)의 명제(明帝) 때에는 크게 존경을 받았는데, 그 자리 밑에 꽃을 깔고 그의 도력(道力)을 시험했더니, 과연 꽃은 시들지 않았다.
그 때 간문제(簡文帝)는 청수도(淸水道)를 믿었는데 그가 섬기는 스승은 바로 경사(京師)의 왕복양(王𣾴陽)이었다. 복양은 그 자기집[私第] 안에 도사(道舍)를 짓고 나그네들을 잘 교화했는데 문제는 그 중에서 마지막에 그를 따랐다. 그 뒤로 문제는 그 도사에 들어갈 때마다 으레 보면 신인(神人)들이 사문의 형상이 되어 방 안에 가득 있었다.
문제는 그것이 도용이 행하는 것임을 알고 인해 도용을 스승으로 삼아 끝내는 불법을 받들었다. 진(晋)씨가 불도를 숭상한 것은 이 비구니의 힘이었으니 그 때 사람들은 그녀를 존중하여 성인이라 불렀다. 신림사(新林寺)는 바로 문제가 도용을 위해 지은 절이다. 효무(孝武) 초년에 도용은 갑자기 자취가 사라졌으나 어디로 갔는지 몰랐다. 그래서 그 가사와 발우를 장사지냈으며 그 절 곁에 무덤이 있다 한다.
진(晋)의 궐공측(闕公則)
진(晋)나라 궐공측(厥公則)은 조(趙)나라 사람으로서 성질이 담박하고 조용하여 오직 법사(法事)에만 정근했다. 진무(晋武) 때에 낙양(洛陽)에서 죽었다. 승려와 속인의 동지들이 백마사(白馬寺)에 법회(法會)를 열고 그 날 저녁에 경을 읽을 때 밤중에 공중에서 찬탄하는 소리가 들려서 사람들이 우러러 보았다. 어떤 사람이 있어 몸은 웅장하고 옷은 정제했다. 그가 말했다.
“나는 궐공측입니다. 지금 서방의 안락 세계에 났는데 여러 다른 보살님과 함께 경을 들으러 왔습니다.”
방 안 사람들은 다 놀랐으나 모두 직접 볼 수 있었다. 그 때 또 급군(汲郡)의 위사도(衛士度)도 고행하는 거사(居士)로서 궐공측을 스승으로 섬겼다. 그 어머니도 또한 불법을 깊이 믿어 경을 잃고 재(齋)를 지니며 항상 스님을 집에 청해 공양했다. 한 번은 점심때에 그 어머니가 재당(齋堂)에 나가 여러 비구니들과 함께 거닐다가 멀리 바라보았다. 그러자 갑자기 공중에서 어떤 물건이 내려와 그 어머니 앞에 떨어졌다. 그것은 곧 발우였는데, 거기에 밥이 가득 담겨 향기가 진동했다. 온 집안이 다 조용해지면서 한꺼번에 경례했다. 어머니가 손수 그 발우의 밥을 나누어 돌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7일 동안 배고프지 않았다. 이 발우는 아직도 그 지방에 있다.
사도는 글을 잘해 팔관참문(八關懺文)을 지어 진나라 말기에 재를 올리는 사람은 아직도 그것을 쓰고 있다. 그는 영창(英昌) 때에 죽었다. 그 때도 영이(靈異)를 나타내었는데, 그 상을 만든 사람이 지은 『성현전(聖賢傳)』에는 그 사실이 자세히 적혀 있는데 거기에는 “사도 또한 서방 극락세계에 났다”고 했다. 또 오흥(吳興)의 왕해(王該)는 “늙은 궐공측이 촛불을 밤에 돋우자 위사도가 그 법을 이어받았다.
다 염박(恬泊)하여 생(生)이 없고, 모두 태해(蛻骸)하여 죽지 않는 사람들이다” 하였다.
진(晋)의 남양(南陽)의 등병(膝幷)
진(晋)나라 남양(南陽)의 등병(膝幷)은 대대로 불법을 공경하고 믿으면서 더욱 정진했다. 항상 재회(齋會)를 베풀 때마다 초청하기를 어기지 않고, 혹 따라오는 사람이 있어도 머물게 하여 대접했다. 그 후에 재회 때 스님 수가 아주 줄었다. 사람을 시켜 거리에 나가 보게 했더니 어떤 사문이 버드나무 그늘에 앉아 있었으므로 그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정인(淨人)이 밥을 주다가 밥이 땅에 떨어지는 바람에 밥통의 밥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그는 망연히 어쩔 줄을 몰랐다. 사문은 “빈도(貧道)의 발우에 밥이 있습니다. 그것이면 대중의 한 번 공양에 충분할 것입니다” 하고 등병을 시켜 나누어주게 했다. 승려와 속인들은 다 만족하게 먹었다. 그러자 사문은 발우를 공중에 던지고 몸을 날려 따라 올라가 가물가물 사라졌다.
등병은 곧 나무에 그의 상을 새기고 조석으로 예배했다. 등병의 집에 무슨 화가 있으려면 이 상이 반드시 먼저 넘어졌다고 한다. 등병의 아들 함(含)은 소준(蘇峻)의 공(功)으로 동흥(東興)에 봉(封)해졌다.
사문 축법진(竺法進)은 개도사(開道寺)의 주지이다. 총명하고 많이 알아 다른 풍속의 말까지 능히 다 알았다. 경락(京洛)에 장차 난리가 일어나려 하자 그는 산중으로 들어가려 했다. 대중이 만류했으나 그는 듣지 않고 대중을 모아 향을 피우고 고별하려 했다. 향기가 퍼지려 할 때 갑자기 어떤 스님이 와서 상좌에 앉았는데, 옷은 때가 묻어 추하고 얼굴은 누렇게 부어 있었다. 법진은 그를 천히 여겨 아랫자리로 끌어 내렸다. 그러나 어느새 또 상좌에 가서 앉아 있었다. 이렇게 세 번에 이르자 그는 어디론지 사라졌다. 대중이 좌정하고 막 밥을 들려 하자 갑자기 폭풍이 일어나 모래를 날리며 밥상이 넘어졌다. 법진이 참회하고 자책(自責)하자 바람은 그쳤다. 이는 법진이 산에 들어가기 전에 미리 세상이 장차 크게 어지러울 것이라고 말하므로, 법진이 산에 들어가서는 좋지 않고, 또 승려와 속인들이 간절히 만류하기 때문에
이런 신이(神異)를 나타내어 그의 떠날 생각을 못하게 한 것이라 했다.
진(晋)4)의 사문 구나발마(仇那跋摩)
송(宋)나라의 구나발마란 사람은 제(齊)나라 말로는 공덕종(功德種)5)이란 뜻으로서 계빈국왕(國王)의 아들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삼장법사(三藏法師)라 불렀다. 송나라 초년에 중국에 와서 번역한 경전이 매우 많고 계행이 순수하여 비길 사람이 없었다. 혜관(慧觀) 사문이 그 덕을 사모하여 그를 청해 경사(京師)의 기원사(祈洹寺)에 있었다. 그 때 그를 본 사람은 다 그를 범인(凡人)이 아니라 생각했으며 그의 신미(神味)는 깊고 오묘하여 아무도 헤아리지 못했다.
일찍이 청을 받아 종산(鍾山)의 정림사(定林寺)에 있었다. 그 때의 도속(道俗)들이 많은 꽃을 꺾어 와서 스님들의 자리 밑에 넣어 두고 시험하여 진인(眞人)을 구했다. 다른 스님들의 자리 밑에 있는 꽃은 다 시들었으나 이 구나발마의 자리 밑의 꽃은 싱싱하기가 처음 같았다. 이에 경사 사람들은 모두 그이 신이함을 더욱 공경했다. 원가(元嘉) 8년 9월 18일에 죽었다. 그러나 아무 병도 없이 다만 가부(跏趺)하고 앉아 옷깃을 여미고 합장했을 뿐이었다. 이에 한 밤을 지냈으나 얼굴빛은 변하지 않았다. 그래서 혹은 깊은 선정에 들어 있다고 생각했다.
조금 있다가 그 자리에서 유서(遺書)를 얻었다. 그 글에서 “나는 사문의 2과(果)를 얻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가 죽은 줄을 알았다.
그 제자들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는데, 모두 향내를 맡았다. 경사(京師)에서 모여 온 2백여 인이 그 저녁에 경을 읽으려고 문 밖에 모여 섬돌에 가득했다. 새벽이 되었을 때 서남쪽 공중에 구름 기운이 일어나더니 조금 있다가 어떤 물건이 한 가닥 길게 끌면서 시체를 둘러싸 가지고 가버렸는데 거기 모인 사람들이 다 함께 보았다고 했다.
구나발마가 죽기 전에 30게송을 지어 그 제자에게 맡겼는데 거기에 “이것을 천축 스님에게 보내 보이라”고 했었다.
[이상의 다섯 가지 증험은 『명상기(冥祥記)』에 나온다.]
양(梁)의 사문 석도림(釋道琳)
양(梁)나라 부양(富陽)의 제견사(齊堅寺)의 석도림(釋道林)은 본래 회계(會稽)의 산음(山陰) 사람이다. 젊어서 출가하여 계행이 있고 『열반경』과 『법화경』을 잘 알고 『유마경』을 외웠으며 오(吳)나라 장서(張緖)의 섬김을 받았다. 뒤에 부양현(富陽縣)의
천림사(泉林寺)에 살았는데, 도림이 거기 오자 그 절의 귀신의 장난이 사라졌다.
도림의 제자 혜소(慧韶)가 무너지는 집에 눌려 머리가 가슴속으로 들어갔다. 도림은 혜소를 위해 부처님께 기도했다. 혜소는 밤에 꿈을 꾸었다. 서역(西域)의 도인 두 사람이 와서 혜소의 머리를 빼어 주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보니 완쾌되었다. 이에 도림은 성승재(聖僧齋)를 베풀고 새 비단을 평상 위에 깔았다. 재를 마치고 보니 비단 위에 사람의 발자국이 있는데 모두 3척이 넘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 영험에 감탄했다. 그 뒤로 부양 사람들은 집집마다 성승(聖僧)의 자리를 따로 만들고 음식으로 공양했다.
양나라 초년에 도림은 제희사(齊熙寺)에 살다가 천감(天監) 18년에 죽었는데 나이는 72세였다.[이 한 가지 증험은 『양고승전(梁高僧傳)』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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