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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39 불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3권

by Kay/케이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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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3

 

 

도행반야경 제3권

후한 월지국 삼장 지루가참 한역

4. 구화구사라권조품(漚惒拘舍羅勸助品)1)

그때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떤 보살마하살이 보시와 계율을 스스로 지키는 사람을 격려하고 돕는다면 이야말로 더없이 존귀하고 위없는 복덕이 됩니다.”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일찍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에서 공덕을 지었으니 이 모든 나라의 부처님 숫자는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완전한 열반에 든 이 보살은 처음에 불도를 닦으려는 마음을 낸 이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와 아유삼불(阿惟三佛:現等覺)2)과 무여니원계(無餘泥洹界:無餘涅槃)3)를 성취한 다음 마침내 어떤 대상도 없는 경지에 이르러 모든 공덕을 성취하니 그 공덕은 끝이 없습니다.
이것은 모든 성문들의 보시와 계율을 스스로 지키는 공덕, 번뇌가 남아 있는 사람과 스스로 번뇌를 다한 사람의 공덕, 열반에 든 모든 부처님들께서 그 가운데에서 지으시는 공덕, 청정한 계신[淨戒身]과 삼매신(三昧身:定身)과 지혜신(智慧身:慧身)과 이탈신(已脫身:解脫身)과 탈혜소현신(脫慧所現身:解脫知見身)에서 원래의 법을 나타내는 공덕, 더없이 자비로운 불법의 공덕,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불천중천(佛天中天:부처님)의 가르침을 중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공덕, 일체의 완전한 열반으로부터 부처님들께서 지으신 공덕을 모두 합한 것이니, 이러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격려하고 도와주는 것을 존귀하다고 하며, 이것은 모든 공덕 중에 가장 훌륭합니다.
보살들은 이와 같이 격려하고 도와주는 뜻을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도록 하는 데에 두어야 합니다. 하지만 어떤 보살은 자신의 마음에 의해 능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짐짓 이 마음으로부터 대상을 얻고자 합니다.”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마음에 의해서는 구할 수도 없고 마음으로부터는 얻을 대상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이에게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뜻과 생각을 갖게 되며, 지혜가 없기 때문에 4전도(顚倒)에 떨어지니, 곧 항상함이 없는 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하고 고통을 즐거움이라고 하며 헛된 것을 참되다고 하고 육신이 없는 것을 육신이 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보살은 구할 것이 없음에도 굳이 마음에 의해 대상을 구하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보살은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해야 합니까?”
미륵보살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처음 배우는 보살마하살 앞에서 이러한 이야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그대로 따라하다가는 믿음을 잃거나 즐거움을 잃거나 기쁨을 잃거나 행함을 잃을까 해서입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반드시 부처의 길로 나아가는 길에서 아유월치의 지위에 오른 보살마하살에게만 설하거나 또는 오랫동안 훌륭한 스승을 모시고 있던 보살마하살에게만 설해야 듣는 이가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보살마하살들은 다른 사람들을 능히 격려하고 도와주어 살운야에 대한 마음을 갖도록 합니다. 이와 같이 격려하고 도와주면 그 마음도 다 없어져서 있는 것도 없고 잘못된 견해에도 빠지지 않고 보는 것도 없으니, 다시 어떤 마음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어떤 마음이 이것을 구하겠습니까? 마음에는 둘이 없으니 마음은 본래부터 그러하기에 능히 모든 것을 지어냅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새로 배우기 시작한 보살마하살이 혹 이 말을 듣고 두려워하고 무서워하거나
보살마하살이 공덕을 짓고자 할 때는 과연 어떻게 권유하고 도와주어야만 그 복덕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수호해 주어야 하니, 부처님께서 계시는 곳이라면 어느 곳에서든지 온갖 악을 파괴하고 애욕을 끊고 행동에 어긋남이 없고 악마의 장난을 물리치고 번뇌의 무거운 짐을 벗고 스스로 모든 고통을 다하여 마음이 해탈했음을 아는 것과 셀 수 없이 많은 찰토(刹土:국토)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얻으신 완전한 열반 가운데에서 지은 공덕과 복덕과 모든 성문들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얻은 공덕을 하나로 묶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더없이 존귀하고 모든 공덕 중에서도 아무런 허물이 없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며, 이와 같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는 이를 이와 같이 권유하고 도와주면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견해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마음을 내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할 때 그 마음을 짐짓 생각의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그러나 마음속으로 모든 것을 안다고 생각하면 짐짓 마음으로 꾸미는 것이니 곧 잘못된 생각과 잘못된 마음과 잘못된 견해에 떨어지고 맙니다.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마음을 붙잡아 분명히 알고 반드시 이와 같이 배운다면 어떤 것도 다하여 있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으니, 다하였음을 아는 이는 정작 어떤 마음을 붙잡아야 합니까?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마음을 깨달아야 하지만 정작 마음을 대상화하여 무엇인가를 이루어낸다는 것은 어떻게 된 일입니까?
이는 마치 대상을 따라 대상이 생겨나는 것과 같으며, 이와 같이 진실됨을 지어내는 것을 본래의 지어냄이라고 하고 삿된 지어냄이라고 하지 않으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짓는 바 공덕입니다.
만약에 어떤 보살마하살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께서 지으신 공덕과
모든 성문 및 범부들이 지은 공덕과 가르침을 들은 축생ㆍ천(天)ㆍ용(龍)ㆍ열차(閱叉:야차)ㆍ건타라(健陀羅:건달바)ㆍ아수륜(阿須倫:아수라)ㆍ가루라(迦樓羅)ㆍ견타라(甄陀羅:긴나라)ㆍ마후륵(摩睺勒:마후라가) 등 인비인(人非人)들이 마음을 내어 지은 공덕과 처음으로 보살의 길을 배우는 이들의 공덕을 하나로 뭉쳐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야말로 참으로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고 더없이 존귀한 것이고 갖가지 공덕 가운데 아무런 허물없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니, 보살은 바로 이와 같이 권유하고 도와주는 복덕에 의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어떤 대상도 다하였음을 거듭 알아야 하지만 원래 어떤 대상도 생겨나거나 멸하지 않았고 있는 곳도 없으니 보살은 정작 이와 같이 생겨남이 없는 법에 의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이 법은 모양이 있는 대상과는 함께 하지 않으니 바로 그러한 작용에 의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까닭에 잘못된 생각에도 빠지지 않고 잘못된 마음에도 빠지지 않고 잘못된 견해에도 빠지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짐짓 바라는 것도 없고 갖가지 잘못된 일에도 빠지지 않는 것을 가리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고 합니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복덕 짓는 법을 온전히 알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과거 모든 부처님들의 육신은 이미 소멸되었고 권유하고 도와준 복덕도 소멸되어서 있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고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반야바라밀을 행해야만 합니다.
만약 완전한 열반에 든 모든 부처님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공덕으로부터 구하는 것이 있다면 그러한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기에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습니다. 하지만 어떤 불천중천(부처님)께서도 집착하여 생각하지 않으시니 과거는 이미 멸하였다고 생각하지 말 것이며 그렇게 생각하는 이에게는 아무런 공덕도 없습니다.

보살마하살은 반드시 구화구사라(漚惒拘舍羅:선교방편)를 배워야 하니, 아직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못한 이는 여기에 들어갈 수 없고, 이미 반야바라밀을 얻은 이만이 여기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육신에 대해 분별하지 말 것이니, 다 쓰고 나면 이것은 반드시 사라집니다. 이러한 까닭에 육신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공덕이 있는 사람은 문득 생각을 돌려서 고행 가운데에 머무르고자 하니,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은 결코 이러한 공덕을 지어서 권유하고 도와주는 데에 쓰기를 기꺼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바르게 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니, 이 사람은 완전한 열반에 드신 부처님들을 보고 문득 생각을 돌립니다. 이러한 까닭에 공덕을 짓는 것을 꺼리고 이에 붙잡히지도 않고 오히려 고행 가운데에 머무릅니다. 이와 같이 분별하지 않는 것이 곧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의 공덕입니다. 반대로 분별하는 것은 비유하면 독(毒)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만약에 진수성찬에 독을 섞어 놓으면 빛깔도 보기 좋고 향도 그윽해서 싫어하는 사람이 없겠지만, 그 안에 독이 섞여 있는 줄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 크게 기뻐하면서 음식을 배불리 먹고 나면 점차 이것이 소화되면서 오랫동안 육신이 고통스럽기 때문입니다.
공덕을 어떻게 쌓는지 옳게 알지 못하는 이는 큰 어려움이 있으니, 장차 보살마하살로부터 수호 받는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을 독송하는 것도 알지 못하고, 그 안의 일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이와 같이 공덕을 옳게 쌓는 법을 알지 못한 채 공덕을 쌓는 것을 가리켜 진수성찬에 독이 섞여 있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는, 만약 불도를 구하는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들께서 이루어 놓으신 지계신(持戒身)과 삼매신(三昧身)과 지혜신(智慧身)과 이탈신(已脫身)과 탈혜소현신(脫慧所現身) 및 성문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지은 공덕과, 불천중천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지은 공덕과, 벽지불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지은 공덕을 한데 묶어 다른 사람들에게 권유하고 도와주면서 그 복덕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짐짓 자신을 위해 이용하는 것이기에 비유하면 독(毒)과 같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보살마하살이라면 반드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니,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들께서 지어 놓으신 공덕이 어디에 있으며 이로써 어떻게 다른 사람들을 권유하고 도와주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와 같은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남에게 그대로 전하는 보살은 부처님의 공덕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는 것과, 그 모양과 법의 내용을 바로 깨닫고 그 공덕으로 다른 사람을 권유하고 도와주며 이것이 인연이 되어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합니다. 보살마하살이 베푸는 보시 가운데 이에 견줄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이것은 끝내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을 여의지 않습니다. 이와 같이 보시하는 것은 독이 섞여 있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은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의 가르침에 조금도 어긋나지 않습니다.
보살마하살은 청정한 계율과 삼매와 지혜와 해탈과 해탈했음을 스스로 아는 것과, 마찬가지로 욕계(欲界)도 없고 색계(色界)도 없고 무색계(無色界)도 없으며,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고 있는 것도 없이 보시해야 하고, 보시하는 행위마저도 있는 것이 없어야 하니, 이와 같이 보시해야 법에 어긋나지 않으며, 법마저도 있는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이 사람이 베푸는 보시는 독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이것과 다른 보시는 원래의 보시에 어긋납니다.
천중천께서는 이와 같이 법에 어긋나지 않게 보시를 행해야 한다고 가르치셨으니, 이것이 곧 원래의 보시이며 이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옳은 말이다. 수보리여, 부처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일컬어 보살마하살의 보시라고 한다. 설령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한결같이 자애롭게 생각하고 차별 없는 마음으로 지켜 주더라도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보시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한다. 이것보다 더 존귀한 것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에 삼천대천국토의 모든 중생들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문득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의 보살들에게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월 동안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 등을 기꺼이 보시한다면, 수보리 그대는 복이 많다고 생각하느냐, 적다고 생각하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아주 많을 것입니다, 천중천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다. 수보리여, 다른 사람을 권유하고 도와주면 그 복덕이 훨씬 커서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권유하고 도와주는 이의 복덕은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라도 다 받아들일 수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붙잡아 이것을 보시하더라도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니, 여기에는 그 백 배, 아니 천 배, 아니 만 배, 아니 억 배, 아니 억만 배의 공덕이 있기 때문이다.”
그때 사천왕(四天王)이 사는 하늘 나라의 2만 명이나 되는 천인 모두가 부처님의 발 위에 이마를 조아리는 예경을 하고 나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선교방편)에 의해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도리천(忉利天)의 모든 천인들이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 다음 이렇게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에 의해서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염천(炎天)의 모든 천자들이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 다음 이렇게 말씀드렸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에 의해서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도솔천의 모든 천자들이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 다음 이렇게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에 의해서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격려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니마라제천(尼摩羅提天)의 모든 천인들이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 다음 이렇게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에 의해서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다시 바라밀니화야발치천(波羅蜜尼和耶拔致天)의 모든 천인들이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를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 다음 이렇게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구화구사라에 의해서 이와 같은 보시를 행하니 그 공덕은 아주 크고 존귀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그 가운데에서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범천(梵天)인 범가이천(梵迦夷天)과 범부루천(梵富樓天)과 범파리산천(梵波利産天)과 마하범천(摩訶梵天)과, 합천((病-丙/盍)天)인 파리타천(波利陀天)과 합파마나천((病-丙/盍)波摩那天)과 아회긍수천(阿會亘修天)과 수하천(首訶天)과 파리수하천(波利首訶天)과 하파마수하천(訶波摩首訶天)과 수하가천(首訶迦天)과 비이반라천(比伊潘羅天)과 아비야타천(阿比耶陀天)과 수타시니천(須陀施尼天)과 아가이타천(阿迦貳吒天) 등의 모든 천인들이 모두 이마를 부처님의 발에 대어 절하고 아뢰었다.
“천중천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크게 보시한 공덕이 지극합니다.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이로부터 권유하고 도와주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타위천(首陀衛天)의 모든 천자들에게 이르셨다.
“삼천대천세계 국토의 모든 보살마하살은 그렇다 치더라도 설령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의 모든 중생들이 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나, 또는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또 다른 부처님 나라의 모든 중생들이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세월동안 하늘의 꽃과 가루향과 바르는 향과 사르는 향과 잡향과 하늘의 비단과 일산과 깃발과 악기, 아니 설령 그보다 더한 것을 가지고 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즐겁게 해 드린다고 해도 정작 보살마하살이 권유하고 도와주며 보시를 행하는 것에는 미치지 못하며, 청정한 삼매신과 지혜신과 이탈신과 탈혜소현신 및 성문의 가르침 가운데에서 얻은 모든 공덕을 하나로 합한다 해도 권유하고 도와주는 공덕에는 미치지 못한다.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은 이와 같이 더없이 존귀해서 견줄 것이 없으니 보살마하살은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에 의해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수보리가 부처님에게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설하신 모든 말씀을 하나로 합한 것은 더없이 존귀합니다. 하지만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그렇다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으로부터 보살마하살이 얻는 것은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한결같이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대상 가운데에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고 배울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는 것을 알며, 어떤 대상도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한 적도 없고 대상을 따라 다른 대상이 생겨나거나 멸하지도 않으니, 그 안에서는 끝내 생겨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안다. 이야말로 모든 대상이 머무르는 진실된 모양이니 나 역시 이로써 불도를 구하는 이들을 권유하고 도울 뿐이다. 이와 같이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보시를 행하는 이는 머지않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은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을 존귀하게 여긴다.
또한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께서 계신 곳에서 보시를 행하는 이들을 권유하여 도와주고,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닦는 이들을 권유하고 도와주는 해탈한 이들을 권유하여 도와주고, 해탈했음을 스스로 아는 이들을 권유하여 도와주니, 해탈은 곧 보시이고, 해탈은 곧 지계이고, 해탈은 곧 인욕이고, 해탈은 곧 정진이고, 해탈은 곧 선정이고, 해탈은 곧 지혜이고,
해탈은 곧 지혜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이고, 해탈은 곧 해탈했음을 스스로 아는 것 그 자체로서의 부처님이고, 해탈은 곧 모든 번뇌를 벗어난 것이고, 해탈은 곧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이고, 해탈은 곧 주위의 모든 대상이다. 이러한 까닭에 미래에 나실 모든 부처님들도 해탈과 같고, 현재의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부처님 나라의 모든 불천중천들도 해탈과 같고, 과거와 미래의 모든 부처님의 제자들도 해탈과 같아서 그 가운데 어느 것에도 집착할 것이 없고 얽매일 것이 없고 벗어날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아는 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 어떤 것도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으로 보시를 행함에 견줄 수 없고, 어떤 것도 이를 무너뜨릴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여, 보살마하살은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을 존귀하게 여긴다.
하지만 수보리여, 설령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부처님 나라의 모든 보살들이, 항하의 모래알처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긴 세월 동안 의복과 음식과 침구와 의약으로 보살마하살들을 공양하거나 혹은 계율을 지키고 인욕(忍辱)에 힘쓰고 부지런히 정진(精進)하고 선정(禪定)을 닦아 삼매를 얻었다고 하더라도 정작 권유하고 도와주는 것의 공덕은 그보다 백 배, 아니 천 배, 아니 만 배, 아니 억 배, 아니 억만 배나 되며 이로부터 가장 존귀한 복덕이 나온다.”

5. 니리품(泥犁品)4)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이루는 것이 많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얻지 못하는 이름이 없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더없이 밝게 비춥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어둠을 몰아냅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집착하지 않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더없이 존귀합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눈 없는 이에게 눈을 가져다 줍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길을 잃고 헤매는 이에게 길을 열어 줍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곧 살운야입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곧 보살마하살의 어머니입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생겨난 적도 멸한 적도 없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부처님께서 녹야원에서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4제법의 법륜을 세 번 거듭 굴린 일을 구족하였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고통받는 이를 평안하게 합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삶과 죽음으로부터 중생들을 지켜 줍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모든 대상에 대하여 한결같이 그러합니다.
천중천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세다라(世多羅)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머물고 부처님을 공경하는 이는 반드시 반야바라밀에 스스로 귀의한다.”
이에 석제환인은 마음속으로 ‘사리불 존자께서는 무슨 까닭에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일까?’라고 생각하고는 바로 사리불에게 물었다.
“존자께서 이렇게 묻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리불이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이여, 반야바라밀은 보살의 수호를 받기 때문이니 이로써 불도를 구하는 이들을 권유하고 도와주면 그 공덕과 복덕으로 살운야를 성취합니다. 설령 보살이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행하더라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태어나면서부터 장님인 사람은 설령 백 명이나 천 명이나 만 명이나 천만 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정작 앞에서 인도하는 이가 없으면 성 안으로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구익이여, 반야바라밀을 제외한 다섯 가지 바라밀도 마치 앞 못 보는 장님 같아서 만약에 반야바라밀을 여의면 살운야에 들어가고자 해도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은 다섯 가지 바라밀의 수호자이니, 이 모두에게 눈을 가져다 주어서 다섯 가지 바라밀로 하여금 각기 제 이름을 갖고 제 구실을 하도록 합니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떻게 해야 반야바라밀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색를 보지 않아야 들어갈 수 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보지 않아야 들어갈 수 있고, 5음(陰)을 보지 않아야 들어갈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반야바라밀에 들어갈 수 있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그런데 부처님이시여, 이렇게 얻은 반야바라밀은 어떤 대상으로 돌아갑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대상에도 돌아가지 않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이름한다.”
석제환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살운야에도 돌아가지 않고 이를 붙잡을 수도 없습니다. 설령 반야바라밀에 대해 묻더라도 살운야를 붙잡을 수는 없고 여기로 돌아갈 수도 없고 나고 죽는 것에도 돌아가지 않으며 또한 돌아가지 않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면 어떻게 돌아가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돌아갈 곳이 없기 때문에 돌아가야 한다.”
석제환인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일찍이 들어볼 수 없었던 말씀입니다. 반야바라밀이 그러하듯이 모든 대상 역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머무르면서도 머무르는 곳이 없다니 말씀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에 보살이 반야바라밀에 대해 돌아갈 곳이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고 분별한다면 바로 반야바라밀을 여의게 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다른 원인에 의해서도 반야바라밀을 여의니 곧 반야바라밀을 두고 공허하다느니 있는 것이 없다느니 하면서 가까이하지도 않고 멀리하지도 않으면 역시 반야바라밀을 여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어떤 것을 믿지 않게 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믿으면 색을 믿지 않게 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행위를 믿지 않게 되고 수다원(須陀洹)의 가르침을 믿지 않게 되고 사다함(斯陀含)과 아나함(阿那含)과 아라한(阿羅漢)과 벽지불(辟支佛)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지 않게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마하바라밀(摩訶波羅蜜)이 곧 반야바라밀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해서 마하바라밀이 반야바라밀이라는 말이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반야바라밀은 색에 대하여 크다고도 하지 않고 작다고도 하지 않고 색에 의해 깨달음을 얻지도 않고, 색에 의해 깨달음을 얻지 않는 것도 아니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크다고 하지도 않고 작다고 하지도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의해 깨달음을 얻지도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의해 깨달음을 얻지 않는 것도 아니며,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이 가진 열 가지 능력에 의해 깨달음을 얻지도 않고 깨달음을 얻지 않는 것도 아니며 살운야에 다시 빠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살운야는 넓지도 않고 좁지도 않기 때문이며 반야바라밀은 짐짓 행함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는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만약 어떤 사람이 이 가운데에서 대상을 구하거나 있는 것이 있다고 말하면, 이는 크게 어긋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마저 태어난 적이 없으니 반야바라밀도 사람도 원래 저절로 그러하거늘 정작 사람들이 이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반야바라밀은 헤아릴 수 없고 중생도 헤아릴 수 없으며, 반야바라밀은 무너지지 않고 중생도 무너지지 않으며, 중생은 마치 반야바라밀과 같아서 마침내 아유삼불을 이루며, 중생이 열 가지 능력이 있는 까닭에 달살아갈에게도 열 가지 능력이 나타납니다.
부처님이시여, 이러한 까닭에 마하바라밀이 곧 반야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고 깊습니다. 만약에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깊이 믿어 이를 헐뜯지도 않고 의심하여 흔들리지도 않는다면 이 보살은 어느 곳에서 살다가 여기에 태어난 것이며, 또한 보살의 도를 닦는 도중에 얼마나 오랫동안 반야바라밀을 배우면서 그 가르침을 행해 왔습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은 전에 다른 부처님의 나라에 살다가 이곳에 태어났다. 이 보살마하살은 일찍이 그곳에서 다른 부처님들을 공양하고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도 반야바라밀을 배운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전에 내가 본 부처님의 가르침과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생각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반야바라밀은 보고들을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은 보고들을 수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물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닦아 왔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반야바라밀을 듣고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닦아 왔는지는 보살마다 서로 다르다. 어떤 보살은 일찍이 백 분의 부처님, 아니 천 분의 부처님을 직접 뵙고 공양을 올렸으며 그 곁에서 청정한 계율을 닦았다. 하지만 대중과 더불어 반야바라밀에 대한 설법을 듣다가 도중에 자리를 뜨니, 이 보살은 보살마하살의 가르침을 존귀하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금생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우게 되더라도 이를 듣지 않고 도중에 자리를 떠나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전생에도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다가 도중에 자리를 뜬 적이 있기 때문이다.
보살은 몸과 마음이 모두 무지하여 이로써 죄를 짓는 까닭에 설령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더라도 그 사람으로 하여금 이를 설하지 못하도록 한다. 반야바라밀이 끊어지면 곧 살운야도 끊어지고,
살운야가 끊어지면 다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부처님의 법도 끊어지니, 이 보살은 이러한 죄를 짓는 까닭에 죽어서 큰 지옥에 떨어진다.
보살은 백천 년 아니 억천만 년 동안 큰 지옥 안에서 온갖 독에 의해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으며 그곳에서 목숨이 다하면 다시 다른 큰 지옥에 태어나고 그곳에서도 목숨이 다하면 다시 다른 큰 지옥에 태어나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받는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그 죄는 5역죄(逆罪)5)와 서로 같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5역죄를 여기에 비유하는 것은 오히려 과분하다. 만약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설하거나 읊조리고 있을 때 어떤 사람이 그 법에 대해 마음속으로 의심하여 배우지 않고 ‘이것은 달살아갈의 가르침이 아니다’고 말하면서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을 방해하고 배우지도 못하게 하면, 이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무너뜨리는 것은 물론 남까지도 무너지게 하며, 스스로 독을 마시는 것은 물론 남에게도 독을 마시도록 하는 것과 같다. 또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죽음에 이르는 것은 물론 남까지도 죽음에 이르도록 하며, 스스로 반야바라밀을 알지 못하는 것은 물론 남까지도 반야바라밀을 알지 못하게 하여 끝내 무너지도록 한다.
사리불이여, 이러한 무리들은 쳐다보는 것조차도 온당치 않고 자리를 함께 하여 앉거나 함께 이야기하거나 함께 음식을 먹는 것도 온당치 않다. 왜냐하면 이러한 무리들은 법을 헐뜯어서 자신도 어둠 가운데에 있는 것은 물론 남도 어둠 가운데에 있도록 하고, 이러한 사람은 스스로 독을 마셔 목숨을 끊는 것은 물론 다른 사람도 독을 마셔 목숨을 끊도록 하니, 이와 같이 법을 끊어 놓는 사람의 말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그와 똑같은 죄를 받게 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헐뜯고 반야바라밀을 헐뜯고 나아가 모든 법을 헐뜯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와 같이 법을 헐뜯는 이는 어떤 모습을 받게 되는지 가르쳐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법을 헐뜯는 무리들이 내 이야기를 듣게 되면 얼굴에 나 있는 구멍마다 피를 쏟거나 혹은 그 자리에서 바로 죽거나 아니면 그 고통으로 인한 근심이 독이 되어서 그대로 말라비틀어질 것이다. 마치 한낮에 꽃을 꺾으면 바로 말라죽는 것과 같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그대의 물음에 더 이상 자세하게 대답할 수가 없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원하오니 이 사람들이 어떤 모습을 받을지를 자세히 밝히시어 혹시 후세인들이 이 말을 듣거든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나는 결코 저 사람처럼 법을 헐뜯거나 끊어 놓지 않으리라고 다짐하도록 해 주십시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이제 그 사람의 모습을 밝히겠다. 사람은 그러한 원인으로 죄를 받아 육신이 아주 추하고 흉하며 말로 다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고 고약한 냄새가 나는 곳에 살게 된다. 그 고통은 아주 크며 오랫동안 지속된다. 남자와 선여인들이 이 정도의 말만 들어도 감히 법을 헐뜯지 않으리라고 다짐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항상 몸과 입과 마음을 조심해야 하니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에 의해 이러한 죄를 짓는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어리석은 사람들은 설령 나의 가르침을 따라 출가한다고 해도 여전히 반야바라밀은 바른 법이 아니라고 헐뜯고 반야바라밀을 끊어 놓으며 부처님과 보살의 씨앗도 끊어 놓고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들의 살운야도 끊어 놓는다. 살운야를 끊는 것은 곧 법을 끊는 것이고 법을 끊는 것은 곧 비구승을 끊는 것이고 비구승을 끊게 되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죄를 받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끊어 놓았다면 그것은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악마에게 휘둘린 까닭에 이 선남자와 선여인들은 반야바라밀을 믿지도 않고 기꺼워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깊은 반야바라밀을 서슴없이 끊어 놓는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을 끊어 놓는 것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무엇을 가리켜 그릇된 스승의 네 가지 가르침을 따른다고 하느냐? 첫째는 순순히 따라 배우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법을 높이 받들어 모시지 않는 것이며, 셋째는 법을 헐뜯기에 힘쓰고, 넷째는 스스로 잘난 체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깔보는 것이다. 이것이 그 네 가지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을 믿는 이들은 아주 적습니다. 이 법을 온전히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반야바라밀을 믿는 이들은 아주 적다. 이 법을 확실히 깨닫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무슨 까닭에 이 심오한 반야바라밀을 믿는 이들이 적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색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색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정신 작용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정신 작용이라고 한다.
과거의 색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색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미래의 색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미래의 색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현재의 색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색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색이라고 한다.
과거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과거의 정신 작용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정신 작용이라고 한다. 미래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미래의 정신 작용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정신 작용이라고 한다. 현재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집착하지도 않고 묶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다. 왜냐하면 현재의 정신 작용은 원래부터 저절로 그러하기 때문에 정신 작용이라고 한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작용하는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깊고 깊으며 믿는 사람들이 적다.”


6. 청정품(淸淨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반야바라밀을 깨닫는 이는 아주 적습니다. 사람들이 이를 친근히 하여 배우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반야바라밀을 깨닫는 이는 아주 적으니 사람들이 이를 친근히 하여 배우지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그 이유는 색이 청정하면 반야바라밀도 청정하고, 색과 말이 청정하면 반야바라밀도 청정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청정하면 반야바라밀과 말도 모두 청정하니, 이런 까닭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청정하다는 것은 곧 반야바라밀이 청정한 것과 같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색이 청정하면 살운야도 청정하고, 살운야와 말이 청정하면 색도 청정하니, 이러한 까닭에 색이 청정하다는 것은 곧 살운야가 청정하다는 것과 같아서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이와 같이 현재의 것이 앞의 것을 끊지도 않고 앞에 것이 뒤의 것도 끊지 않기 때문에 어떤 것도 무너짐이 없다.
그러므로 앞의 것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청정하고 살운야도 청정하다. 살운야가 청정하다는 것은 곧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청정하다는 것과 같아서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으며, 이와 같이 지금의 것이 앞의 것을 끊지 않고 앞의 것이 뒤의 것을 끊지 않는 까닭에 어떤 것도 무너짐이 없다. 그러므로 앞의 것이 끊어지지 않는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아주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더없이 밝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에는 때가 끼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더럽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에는 있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욕계(欲界)에서도 욕망을 갖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색계(色界)에서도 색을 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무색계(無色界)에서도 정신을 낳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모든 것을 알면서도 정작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지혜가 있으면서도 지혜가 없는 것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색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청정한 것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대해서 아는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청정해서 살운야에 더할 것도 없고 덜할 것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청정해서 어떤 대상도 취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매우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색도 청정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청정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도(道)가 청정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살운야가 청정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아무런 단서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끝 간 데가 없고 색도 끝 간 데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내가 청정하기에 끝간데가 없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끝간데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그 중간에도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것을 알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하지만 분별하는 이는 문득 반야바라밀을 여의어서 멀리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수보리여, 이름자가 있으면 분별이 있고 그러한 까닭에 집착하게 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안일한 생각으로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을 집착이라고 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색이 텅 비었다고 아는 것을 집착이라고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텅 비었다고 아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과거의 대상을 단지 과거의 대상으로만 아는 것을 집착이라고 하며, 미래의 대상을 단지 미래의 대상으로만 아는 것을 집착이라고 하며, 현재의 대상을 단지 현재의 대상으로만 아는 것을 집착이라고 합니다. 어떤 보살이 이와 같은 대상에 의해 큰 공덕을 얻고자 한다면 이것은 곧 집착입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왜 집착이라고 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마음에 새겨들으십시오. 이와 같이 분별하는 마음으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습니다. 마음은 본래 청정하여 능히 얻는 것이 있으니, 선남자와 선여인이 모든 집착을 여의는 것은 곧 본래의 모습도 버리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수보리여, 그대는 보살마하살들로 하여금 본래의 모습을 깨닫고 집착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하였구나. 또 수보리여, 내가 이제 다시 깊고도 미묘한 집착의 뜻을 설할 터이니 잘 듣도록 해라. 처음 말이나 중간 말이나 끝의 말이나 하나도 빠짐없이 듣도록 해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기꺼이 듣도록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에 어떤 선남자와 선여인이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의 모양을 생각하고 이를 따른다면 이것은 집착이다.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불천중천께서 성취하신 번뇌가 없는 법으로 불도를 구하는 이들을 격려하고 도와주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하면 이것은 집착이다. 어떤 대상에도 대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에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고 현재도 없으며, 이러한 까닭에 지어내는 것도 없고 분별할 수도 없고 인연을 만들 수도 없고 보고들을 수도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이 모든 대상의 본성은 아주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본래 청정하기 때문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저는 이제 반야바라밀에 귀의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법에는 지어낸 이가 없기 때문에 아유삼불을 얻는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어떤 법도 실제로 아유삼불을 이룬 적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서로 다른 두 가지 법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작용은 본래 청정하기 때문에 이를 일컬어 하나라고 한다. 청정한 까닭에 어떤 것도 지어내지 않고 청정함조차도 없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까닭에 모든 집착을 여의는 것은 곧 본래의 모습도 버리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아유삼불은 있는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것은 마음으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수보리가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들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집착도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그렇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색을 분별[想]하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분별하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색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으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색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곧 색을 행하지 않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바라보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은 곧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행위를 행하지 않는 것이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참으로 어렵습니다. 집착하는 가운데에도 집착함이 있지 않고 이러한 집착은 오히려 집착이 아니라니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색을 바라보는 것에 집착하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바라보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행하면 설령 보살마하살이 색을 바라보더라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바라보더라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며,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도를 따르더라도 집착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집착을 뛰어넘고 다시 살운야도 훌쩍 벗어나기 때문이니, 이러한 것을 가리켜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말씀하시는 법은 너무 깊어서 알기가 어려우니 설령 설하더라도 이 법은 줄어들지 않고 설령 설하지 않더라도 줄어들지 않으며 설령 설하더라도 늘어나지 않고 설령 설하지 않더라도 늘어나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옳고도 옳은 말이다.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이것은 달살아갈께서 설령 목숨이 다하도록 허공을 찬탄해도 허공은 결코 늘어나지 않고, 찬탄하지 않아도 허공은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으며,
비유하면 허깨비를 칭찬해도 늘어나지 않고 칭찬하지 않아도 줄어들지 않는 것과 같다. 또 착하다는 말을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악하다는 말을 들어도 성내지 않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이 한결같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소리내어 읊조리더라도 이것은 결코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아주 겸손해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고통을 기꺼이 감수합니다. 반야바라밀을 수호하는 이는 게으르지도 않고 무서워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흔들리지도 않고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을 수호하는 것은 곧 허공을 수호하는 것이기 때문이니, 누구라도 보살마하살에게 반드시 예경을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위대한 승나(僧那:誓願)의 갑옷을 입으니 마치 허공과 맞서 싸우는 것과 같습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해 위대한 승나의 갑옷을 입으니 마치 허공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습니다.
천중천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대용맹(大勇猛)이라고 부릅니다. 텅 비어있는 법에 바탕 하는 까닭에 스스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고 아유삼불을 얻습니다.”
그때 무리 가운데에 있던 어떤 비구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나는 반드시 반야바라밀에 귀의할 것이니 어떤 대상도 이로부터 생겨난 적이 없고 멸한 적도 없다.’
그러자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약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따르고자 한다면 어떤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텅 비어 있다는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떻게 하는 것이 텅 비어 있다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번뇌가 스러져 고요한 것을 좋아한다면 이것을 가리켜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안다고 합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을 배우면 나는 언제까지라도 이를 수호하겠습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구익이여, 그대는 이 법이 잘 수호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볼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석제환인이시여, 만약에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른다면 반드시 수호를 받을 것이니, 인비인(人非人)이 끝내 마음대로 하지 못할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만약에 어떤 보살마하살이 허공을 수호한다면 곧 반야바라밀을 따라 행하는 것입니다. 구익이시여, 그대 생각에 메아리를 수호할 수 있다고 보십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할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시여, 설령 어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더라도 그 법은 정작 이 메아리와 같은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앎으로써 다시는 분별하는 일이 없으니 분별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이 곧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가지신 위신력의 작용으로 삼천대천국토의 사천왕들과 모든 석제환인과 범천왕들이 일시에 부처님께서 계신 곳으로 와서 그 주위를 세 번 도는 예경을 하고 한쪽으로 물러나 앉았다.
사천왕들과 모든 석제환인과 범천왕들은 곧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해 천 분의 부처님들을 보았다. 이들은 모두 석가문(釋迦文:석가모니)이라는 이름으로 불렸고, 그 주위를 에워싼 비구들은 모두 수보리라고 불렸는데, 이들이 부처님께 반야바라밀을 묻는 것이 곧 지금의 석제환인과 똑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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