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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37 불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1권

by Kay/케이 2024.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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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1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제1권

후한(後漢) 월지국(月支國) 삼장 지루가참(支婁迦讖) 한역
김수진 번역

1. 도행품(道行品)

부처님께서 나열기성(羅閱祇城)의 기사굴산(耆闍崛山)에 계시니, 사리불과 수보리(須菩提) 등을 비롯한 큰 비구승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고, 미륵보살과 문수사리보살 등을 비롯한 마하살보살(摩訶薩菩薩)의 숫자도 헤아릴 수 없었다.
매월 보름마다 계(戒)를 설할 때였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모든 보살들이 모였으니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마땅히 배워서 이루도록 하여라.”
그때에 사리불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지금 수보리가 모든 보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것은 자신의 능력으로 하는 것일까, 아니면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일까?’
수보리가 곧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을 꿰뚫어 보고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가 설하는 법과 성취하는 법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지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법 안에서 배우는 것으로서 한결같이 깨달음이 있고 법에 어긋남이 없으며 널리 펼치어 서로 가르치고 널리 펼치어 서로 성취하니 끝내 이 법안에서 서로 다투는 일이 없으며, 법을 설할 때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지 않는 이가 없어서 선남자와 선여인들이 스스로 뉘우치고 배우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모든 보살들을 위해서 반야바라밀을 설하여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배워서 이루도록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께서 저로 하여금 보살들에게 법을 설하도록 하셨습니다만 보살이라는 이름에 집착하기가 쉽습니다. 보살이라는 이름에는 실체가 없으니 어떤 대상에서도 보살이라고 할 만한 것은 없어서 보살이라는 존재는 끝내 보이지 않으며, 보살이라는 대상을 가리키는 이름도 없고 보살도 보이지 않고 그 장소도 보이지 않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가르치고 반야바라밀을 설해서 보살들이 이를 듣고 마음이 게으르지 않게 하고 두려워하지 않게 하며 무서워하지 않게 하고 어려워하지 않게 하며 놀라워하지 않게 하고 보살들로 하여금 반드시 이를 배우게 하고 여기에 머무르게 하며, 반드시 이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을 내도록 하되 마음속으로는 정작 이러한 것을 보살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할 수 있겠습니까? 왜냐하면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원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십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찌하여 마음은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고,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알 수 없습니까? 그리고 이와 같이 있다고 해도 있는 것이 아니고, 없다고 해도 없는 것이 아니라면 유심(有心)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無心)이라고 할 것도 없다는 말씀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유심이라고 할 것도 없고, ,무심이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참으로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부처님을 위하고 부처님을 배우면서도 정작 육신과 지혜가 공(空)하다고 설한 사람은 없었는데, 육신과 지혜가 공함을 설하시니, 최고이시고 제일이십니다. 보살이 이 가르침을 따라 아유월치(阿惟越致:不退轉位)1)를 얻고 공(空)한 이치를 배우는데, 마침내 반야바라밀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서 아라한법(阿羅漢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고, 벽지불법(辟支佛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하며, 보살법(菩薩法)을 배우고자 하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을 듣고서 반드시 배우고, 반드시 지니고, 반드시 지켜야 합니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은 매우 심오해서 보살은 그대로 따라 배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보살의 마음은 붙잡을 수도 없고, 있는 곳을 알 수도 없으며 어느 곳에서도 볼 수가 없습니다.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말로 미칠 수가 없고, 보살이라는 이름은 말로 미칠 수가 없으며, 또한 보살은 어느 곳에도 없기 때문에 끝내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나오는 일도 없고 들어가는 일도 없고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라는 이름에서는 끝내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에 머무르는 일도 없고 멈추어 서는 일도 없습니다. 반야바라밀을 설할 적에 보살이 듣고서 마음이 게으르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으며,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신속히 아유월치(阿惟越致)의 지위(地位)에 들어가서 모든 것을 다 알아 다시는 반야바라밀에서 물러나지 않을 것입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色)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치 않고, 통상(痛痒:受)과 사상(思想:想)과 생사(生死:行)와 식(識)에 머무르는 것도 온당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색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머물러서 행하는 정신 작용은 온당한 정신 작용이 아니기 때문이니, 혹시 그 가운데에 머무르는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온당치 못한 정신 작용 때문이니, 이렇게 하는 것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아니며,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않는 보살은 살운야(薩芸若:一切智)를 얻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행하여야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색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색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색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이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은 곧 식이라고 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야바라밀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느냐 하면 그림자처럼 붙잡을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기 때문에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는 어떤 이름이나 존재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하며, 이러한 까닭에 삼매(三昧)에는 끝이 없고 바른 형태도 없어서
아라한과 벽지불로서는 미칠 수가 없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살운야조차도 받아들이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생각을 가지고 살운야를 바라보는 것은 온당치 않으니, 가령 생각을 가지고 바라보는 사람은 끝내 이룰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어떤 수도(修道)하는 사람이 살운야조차도 믿지 않았던 것과 같습니다.
왜냐하면 6근(根)의 신상(身相)에 대해서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옛날에 어떤 수도하는 사람이 불법을 믿고, 불법을 믿은 뒤로도 소승도(小乘道)를 지녔습니다. 그러므로 불도(佛道)에 들어와서 그 가르침대로 어떤 대상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색도 받아들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또한 깨닫지도 않고 도를 이루지도 않고 지혜도 보지 않았으며, 안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그 밖의 어떤 것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았으며, 또한 안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밖의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서도 지혜를 보지 않고, 또한 어떤 곳에서도 벗어나지 않고 배움으로써 불법을 성취하였습니다. 그리고 속속들이 깨달은 뒤에는 정작 이 법으로부터 물러나서 어떤 존재도 열반과 동일하다고 말했습니다.
보살은 어떤 존재에도 움직이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안과 밖에서도 존재를 보지 않아야 합니다. 반야바라밀은 어떤 것도 받아들이거나 따르는 일이 없으니, 어느 누구도 존재를 붙잡을 수 없으며 가질 수도 없고 버릴 수도 없으며, 또한 열반이라는 생각도 할 수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은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니,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고, 중도(中道)도 받아들이지 않고, 완전한 열반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18불공법(不共法)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합니다.
보살이 이미 반야바라밀에 들어가서 행할 때는 ‘반드시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 이 반야바라밀은 어느 곳에 있는지를 생각해야 하며, 또한 반야바라밀 안에서는 어떤 존재도 붙잡을 수 없고 있는 처소도 알 수 없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이라고 일컫는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이렇게 듣고도 게으르지 않고 겁내지 않고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이와 같이 깨달을 줄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어떤 인연으로 반야바라밀을 깨닫는가 하면 색은 본래 색을 여의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본래 식을 여의었으며, 반야바라밀도 본래 반야바라밀을 여의었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하신 그대로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보살은 설사 이들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살운야에 스스로 다가섭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보살은 설사 이들로부터 벗어나 있더라도 살운야에 스스로 다가섭니다. 왜냐하면 살운야는 태어남과 죽음에도 의지하지 않고 이를 벗어남에도 의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보살은 성불(成佛)에 빨리 다가섭니다. 그리고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 살운야의 안에서 아무런 걸림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보살이 정진하면서 그러한 말을 한다면 설사 색을 따라가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라는 마음을 내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을 관찰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라는 마음을 없애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색이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인식하여 붙잡고자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설사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행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하는 마음을 내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을 관찰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을 없애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고, 인식함이 텅 비었다고 하더라도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러한 보살은 도리어 생각을 움직이는 것이며, 이름에 움직이는 이는 반야바라밀을 지키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니, 만약에 생각을 움직이는 사람이 보살을 수호한다면 결코 그 뒤를 좇아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 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색을 따라가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이라는 마음을 내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을 관찰하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을 없애려는 일도 하지 않고 색이 텅 비었다고 하는 일도 하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인식하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내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관찰하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을 없애는 일도 하지 않고, 인식함이 텅 비었다고 하는 일도 하지 않아야 하며, 또한 보는 일도 없고 실행하는 일도 없고 또한 보는 일이 없이 실행하며, 실행하는 일이 없다고 보는 일이 없어야 하고, 또한 실행하는 일도 없으며, 실행하는 일을 그치는 일도 없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보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가 유래하는 근본이 없어서 그 실체를 붙잡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모든 이름자와 존재에 대해서 이름자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삼매는 끝이 없고, 바로 잡으려는 일이 없으며,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이라도 이것을 알 수가 없습니다. 보살마하살로서 삼매를 따르는 이는 하루 빨리 성불(成佛)하여 부처님의 위신력을 가집니다.”
수보리는 이렇게 말했다.
“이러한 보살들은 모두 아유월치라는 이름자를 얻었으니, 앞의 과거불(過去佛) 때에 이미 성불하여 삼매를 따르면서도 정작 삼매를 보지도 않고 삼매라는 생각도 갖지 않고 짐짓 삼매를 지어내지도 않고 삼매를 염두에 두고 생각하지도 않고 삼매에 앉아 있다는 생각도 있지 않고 나의 삼매라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미 이러한 법을 따르는 이에게는 아무런 의심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느 곳에선가 삼매를 따라 실행하여 보살이 이미 아유월치라는 이름자를 얻어 앞의 과거불 때에 성불하였다면 삼매가 있는 곳을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볼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여, 선남자라 해도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왜 알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삼매란 붙잡을 수도 없고 있지도 않고 또한 그 이름자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내가 말한 것처럼 육신과 지혜가 공(空)한 것이 모든 보살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한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天中天:부처님)이시여,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반야바라밀을 배운다고 합니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이와 같이 배우되 어떤 법을 배웁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보살은 배울 것이 없는 법을 배운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도 정작 붙잡아 얻을 것이라고는 없기 때문이니, 결코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누가 이 법을 얻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얻을 수 있는 법은 없으니, 결코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어서는 안 된다. 이름자에 의해서는 얻을 수가 없으며, 비록 배우고 익혀서 이 법으로 들어가고자 해도 거듭 어리석음에 빠질 뿐, 역시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고 법을 이루지도 못한다. 왜냐하면 이름자를 배우는 것은 색이어서 얻고자 한다면 얻을 수 있지만 정작 그러한 까닭에 생각대로 법을 깨닫거나 붙잡을 수가 없다. 이와 같이 깨닫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기 때문에 결국 법에 머무르지 못하고 오히려 육신이 있다고 주장하니 어린아이가 배울 때처럼 어리석은 것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고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이 이와 같이 배우는 것을 가리켜 아무것도 배우지 않는다고 한다. 부처는 이와 같이 배우지 않는 것으로 배움을 삼아 마침내 부처가 되는 것이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만약에 어떤 사람이 ‘요술로 만들어낸 허깨비가 배운다면 부처를 이룰 수 있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옳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오히려 그대에게 묻겠으니 이에 답해 보거라. 수보리 그대가 생각하기에 허깨비와 색은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허깨비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다르겠느냐, 다르지 않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허깨비와 색은 다르지 않습니다. 색이 곧 허깨비이고 허깨비가 곧 색입니다.
그러므로 허깨비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다르지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수보리여, 5음(陰)의 존재를 좇지 않고 생각을 일으킨다면 보살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그렇습니다. 천중천이시여, 보살이 배워서 부처를 이루고자 하는 것은 곧 허깨비를 배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깨비는 어떤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5음의 허깨비는 색과 같고, 색과 6쇠(衰)2)와 5음은 허깨비와 같습니다.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6쇠와 5음과 마찬가지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약에 처음 배우는 보살[新學菩薩]이 이러한 말을 듣는다면 두려워하지 않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에 처음 배우는 보살이 나쁜 스승을 따라 배운다면 겁내고 두려워하겠지만 훌륭한 스승을 따라 배운다면 겁내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수보리가 아뢰었다.
“보살의 나쁜 스승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존중하지 않고 사람들로 하여금 보살의 마음을 버리고 아주 떠나가도록 가르치며 반대로 온갖 잡된 경전을 배우기를 마음에 즐거워하고, 잡된 경전을 따르도록 한다. 또한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법(道法)을 가르쳐서 이에 관한 것을 따르고 읊조리도록 권하며, 악마의 일을 설하여 이로 하여금 보살을 무너뜨리고 물러나도록 하며, 온갖 말로 나고 죽는 일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설하여 보살도(菩薩道)를 얻지 못하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나쁜 스승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보살의 훌륭한 스승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 사람은 마하반야바라밀을 존중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꾸준히 배워서 가르침을 이루도록 하며 악마에 관하여 말하되 악마를 물리치고 보호받는 방법을 알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의 훌륭한 스승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보살이 되며,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경전과 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깨달아서 모두 다 아는 까닭에 보살이라고 부른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모든 경전과 법을 빠짐없이 배우고 깨달아서 모두 다 아는 까닭에 보살이라고 부른다면 다시 마하살(摩訶薩)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하살이란 하늘 위와 하늘 아래에서 가장 존귀한 까닭에 부르는 이름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듣기를 좋아합니다. 마하살이란 무슨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듣기를 좋아한다면 내가 그대를 위해서 마하살의 뜻을 설명해 주리라. 마하살이란 스스로 모든 것을 분명히 보고 분명히 알아서 하늘 아래 온 시방의 중생과 대상들을 다 밝게 알고 있으니, 곧 사람들의 수명이 긴지 짧은지, 악한지 악하지 않은지, 즐거운지 즐겁지 않은지, 하고자 하는지 하고자 하지 않는지를 모두 알아보고 법을 설하되, 정작 여기에 집착하지 않는 까닭에 마하살이라고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도 마하살을 왜 마하살이라고 하는지 말해 보겠습니다. 이 보살의 마음과 같은 이는 어디에도 없고 어느 누구도 그 마음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모든 아라한과 벽지불도 이 마음에 도달할 수는 없으니 부처님의 마음이 곧 이것입니다.
마음에 집착이 없어서 마음에는 나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으며, 설사 부처님의 마음이 나가는 것도 없고 들어오는 것도 없다고 해도 마하살은 거기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하살이라고 하며, 이와 같이 거룩한 이는 결코 흔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무엇 때문에 보살의 마음에는 집착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마음이 생겨난 적이 없기 때문에 집착이 없습니다.”
그때 빈기문타불(邠祁文陀弗)3)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마하승나승녈(摩訶僧那僧涅)4)과 대승(大乘)을 실천하기 때문입니다. 부처님도 같은 이름으로 불립니다. 이러한 까닭에 마하승나승녈과 대승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슨 까닭으로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며, 보살마하살이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마음속으로 나는 반드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모든 중생들을 제도하여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본래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요술쟁이가 요술을 부려 널찍한 빈터에 두 곳의 큰 성(城)을 세우고 그 안에 요술로 만든 사람들을 가득 채운 다음 이들의 목을 모두 자르는 것과 같으니, 수보리 그대가 생각하기에는 그 가운데 실제로 다치거나 죽는 이가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아뢰었다.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수없이 많은 중생들을 모두 제도하여 한결같이 완전한 열반에 들게 하니,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지 못하는 이는 한 사람도 없다. 보살이 이러한 말을 듣고도 무서워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성내지 않고 버리지 않고 그밖에 가르침마저 그대로 따른다면 이것이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생각건대 이러한 일은 결코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이 행하는 이는 살운야를 이룰 수도 없고 공양할 수도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중생마저도 생겨난 적이 없다면 어떻게 마하승나승녈을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에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습니다.”
빈기문타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토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다는 것은 무슨 말씀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색 그 자체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도 않으며 풀려 있지도 않습니다.”
빈기문타불이 말했다.
“무엇 때문에 색 그 자체에는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으며 풀려 있지도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 않고 풀려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보리가 빈기문타불에게 말했다.
“색 그 자체는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 그 자체도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집착하지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으며, 아득히 끝이 없는 까닭에 집착하지도 않고 매여 있지도 않고 풀려 있지도 않습니다.
비유하자면 허공에는 집착함도 없고 매여 있음도 없고 풀려 있음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아무것도 생겨나게 하지 않는 까닭에 집착함도 없고 매여 있음도 없으며 풀려 있음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마하살의 마하승나승녈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무엇을 가리켜 대승을 실천한다고 합니까? 그것은 어디에 있고 어떻게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어떻게 그로부터 나오며 누가 그것을 완성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대승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어서 그 넓이와 끝을 알 수가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저는 대승이 어디에서 오는지 알고 싶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대승은 과거의 세계와 현재의 세계와 미래의 세계를 훌쩍 벗어나서 살운야의 가운데에 머무르니, 이로부터 생겨나는 것도 없고 이로부터 유래하는 것도 없다.”
“왜 그렇습니까? 천중천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느 곳으로부터 생겨났다거나 또는 어디서부터 왔다느니 하는 두 가지 모두는 그 실체를 붙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미 실체를 붙잡을 수 없는데, 대승이 생겨난 곳을 어디에서 찾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대승은 하늘 아래와 하늘 위의 모든 사람들을 훌쩍 벗어났기에 그 가운데 이에 비교될 만한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대승은 허공과 같으니 허공이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받아들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승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까닭에 대승이라고 부릅니다.
또한 대승은 오는 때도 볼 수 없고, 가는 때도 볼 수 없으며 머무르는 곳도 볼 수 없고 끝간 곳도 볼 수 없으며, 귀로 들어 알 수도 없고, 눈으로 보아 알 수도 없으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서 볼 수도 없으니 곧 천중천과 같으며, 이러한 까닭에 대승이라고 부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바로 그러한 까닭에 대승이라고 한다.”
빈기문타불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부처님께서는 앞에서 수보리 존자를 시켜 반야바라밀을 설하게 하시더니 지금은 대승을 말하도록 하시는군요.”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천중천이시여, 혹시 제가 반야바라밀에 대해 잘못 말한 것은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가 설한 반야바라밀은 잘못이 없다. 핵심을 잘 말했다.”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보살은 이곳도 염두에 두지 않고 저곳도 염두에 두지 않고 중앙도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색이 끝이 없기에 보살도 끝이 없으며, 색과 마찬가지로 보살도 미칠 수가 없고 붙잡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보살도 미칠 수 없고 붙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보살들에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볼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는데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보살이란 그 모양을 편리한 대로 일컫는 이름인데 어떻게 천중천이라고 부르겠습니까? 다만 글자를 따라서 분별할 뿐이니 그 본래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본래의 의미란 처소가 없는 것으로 처소를 삼고, 모양이 없는 것으로 모양을 삼습니다. 그러나 본래의 의미가 형상이 있는 존재라면 어떻게 색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색은 볼 수도 없고 실체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 어디에 색이 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볼 수 없으며 보살도 볼 수 없습니다.
어떤 보살도 찾을 수가 없고 어떤 보살도 있지 않기에 끝내 볼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무엇을 보살의 반야바라밀이라고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보살은 결코 볼 수도 없고 있는 곳도 없고 끝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도대체 어떤 대상을 향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까닭에 단지 글자만을 일컬어 보살이라고 말할 뿐입니다.
이와 같이 글자와 모양은 원래부터 있지 않으며 글자의 모양 또한 원래부터 있지 않으니, 무엇을 가리켜 본래의 의미라고 할 것이며 뉘라서 글자의 의미만을 가지고 근본에 이를 수 있겠습니까? 본래의 의미에서 생겨난 의미에도 원래부터 모양이 없는데 무슨 까닭에 인식함을 붙잡을 수 없다고 합니까? 근본에 이르러도 역시 붙잡을 것은 없는데 무슨 까닭에 인식함이 있다고 합니까?
이와 같이 모든 존재의 모양에는 원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고 근본이 없이 펼쳐져 있으며 어떤 존재도 이를 지어낸 이가 없고 근본이 없습니다. 본래부터 근본이 있지 않은데 마땅히 무엇에 근거하여 반야바라밀을 설할 수 있겠습니까? 반야바라밀 역시 어느 특별한 곳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며 보살 또한 붙잡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니, 혹시 보살의 길을 닦는 어떤 사람이 이러한 말을 듣고도 두려워하지 않고 놀라지 않고 어려워하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반야바라밀법을 실천하고 있는 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이때에는 색에 빠지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색은 생겨난 곳이 없으니 더 이상 색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온통 색이 아닌 것들뿐이라면 이미 색은 없는 것이니, 이 역시 생겨난 곳이 없으며 그로부터 얻을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글자라는 것도 색이라는 존재로서 본래부터 있는 것은 아니니, 이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색을 생각하여 그 안에 깊이 들어가는 일도 없고, 또한 이때에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도 들어가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식도 생겨난 곳이 없으니 더 이상 식이라고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식으로부터 나오는 것도 없고 식으로 들어가는 것도 없으며 색을 모두 살펴보아도 소유할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가 존재에 대해서 말한 것을 제가 들으니, 보살은 생겨난 곳이 없습니다.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곳이 없다면 보살이 굳이 보살의 길에 나서서 고행을 감수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설사 온 시방의 하늘 아래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이롭게 한다고 해도 어떻게 이러한 고통을 견디며 참을 수 있겠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나도 역시 보살이 이와 같은 고통을 감수하며 참아내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보살의 길을 닦고자 한 것은 보살이 스스로 결심한 것이지, 내가 그러한 고통을 감수하도록 한 것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마음속으로 ‘내가 고통스러운 마음을 감수하며 참아내고자 하는 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습니다. 이와 같이 온당치 않은 마음을 내게 되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을 이롭게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을 평안하게 하고자 하거든 아비처럼 돌보고 어미처럼 늘 생각하고 자식처럼 여기고 자신의 육신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고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돌보아야 하니,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지녀야만 합니다.
어떤 보살도 볼 수 없고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니 안팎의 어떤 존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마땅히 이와 같이 생각하고 반드시 이와 같이 행해야 하니, 보살은 비록 이와 같이 행하더라도 고통을 감수하거나 참아낸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시여, 설령 그렇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생겨난 것을 볼 수는 없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곳이 없다면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대로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설령 보살이 이와 같다고 하더라도 보살이 생겨난 것을 볼 수는 없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보살이 실제로 생겨난 적이 없다면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말씀대로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살운야가 생겨난 적이 없다면 모든 것을 얻는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말씀대로 모든 것을 얻는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보살도 생겨나지 않으니 보살은 결코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살운야도 생겨난 적이 없으니 살운야의 가르침 역시 생겨난 적이 없으며, 모든 것을 얻는 완전한 선법(禪法)도 생겨난 적이 없으니 모든 것을 얻는 선법도 생겨난 적이 없습니다. 이것을 일컬어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보살을 얻는다고 하고, 얻을 것이 없는 것으로 살운야를 얻는다고 합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생겨남이 없는 법은 생겨난 적이 없으니 이로써 생겨남이 없는 법을 얻으며, 또한 생겨남이 없는 법은 아무것도 얻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생겨남이 없는 법은 생겨남이 없음을 얻으며, 또한 생겨남이 없는 법은 아무것도 없는 것까지도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생겨남이 없음을 얻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가령 생겨남이 없음에 의해 생겨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생겨남이 없는 법을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다고 합니다.”
수보리가 말하였다.
“가령 생겨남이 없는 법이 아무것도 없으면 생겨남이 없을 터이니 그런 까닭에 생겨남이 없다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하였다.
“수보리여, 가령 생겨남이 없는 것은 생겨남이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생겨남이 없으니, 수보리여, 이것이 생겨남이 없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생겨남이 없는 것은 곧 생겨남이 없는 것을 즐겨 듣는 것입니다. 사리불이여, 생겨남이 없이 즐기는 것이 바로 즐기는 것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생겨남이 없이 듣는 것이 곧 듣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말하는 바가 없는 것까지 없앤 것을 말하는 바 없이 말한다고 하며, 이것을 즐기는 바 없이 즐긴다고 합니다. 이러한 까닭에 말하는 것이고 이러한 까닭에 즐기는 것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법에 있어 제일이십니다. 왜냐하면 수보리여, 질문을 받는 즉시 답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제자가 설하는 법은 온 시방 어디에도 변화하여 온 곳을 모르지만 질문에 대해 바로 답합니다. 왜냐하면 온 시방의 어떤 존재도 그것이 생겨나는 곳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수보리여, 그렇다면 보살은 어떤 법에 의해 태어납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반야바라밀에 의해 태어납니다. 만약에 이 법을 설할 때나 경을 읽을 때 보살이 믿고 의심하지 않으면 그 보살은 마땅히 이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법을 따르더라도 이 법은 불어나지 않으며, 설령 따르지 않더라도 이 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 법을 따르더라도 이 법은 불어나지 않고, 설령 따르지 않더라도 이 법은 줄어들지 않습니다. 이 법을 따르면 모든 사람을 가르칠 수 있으며, 이 법을 따르는 사람은 한 사람도 잃지 않고 모두 보살마하살을 얻게 됩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이 다 이 법을 배워 그 법을 여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훌륭하십니다. 사리불이여, 존재란 사리불께서 말씀하신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생들은 생각을 여읨으로써 오히려 이것을 다 압니다. 중생의 성품이 텅 빈 까닭에 그 생각의 성품도 텅 비었으니 중생들을 다 알기는 어려우며 그 생각도 다 알기가 어려운 줄 알아야 합니다.
사리불이여,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행해야만 합니다.”

2. 난문품(難問品)

이때에 석제환인(釋提桓因)은 4만 명의 천자(天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고, 사천왕(四天王)들은 2만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으며, 범가이천(梵迦夷天)5)은 1만여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고, 범다회천(梵多會天)은 5천 명의 천자와 함께 이 모임에 앉아 있었다. 모든 천자들은 지난 세상의 공덕으로 인하여 그 광명이 눈부셨고, 부처님의 위신력과 부처님의 능력 덕분에 모든 천자들의 광명도 눈부시게 비추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현명하신 수보리여, 이 모임에 가득 모인 천만 명의 천자들은 한결같이 수보리께서 설하시는 반야바라밀을 듣고 싶어합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에 어떻게 머물러야 합니까?”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拘翼:석제환인(釋提桓因)의 다른 이름]이여, 천만 명의 천자들이 기꺼이 듣고자 한다니 나는 당연히 설할 것입니다.
나 수보리는 부처님의 위신력과 능력에 의지하여 모든 천자들에게 널리 반야바라밀을 설할 것입니다. 혹시 천자들 가운데 아직도 보살도를 닦지 않는 이들이 있다면, 그러한 이들은 이제 빠짐없이 보살의 길을 닦아야 할 것입니다. 이미 수다원(須陀洹)의 도(道)를 얻었다면 다시 보살도를 얻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왜냐하면 나고 죽는 길에 막혀 있기 때문입니다.
혹시 그러한 이에게 보살의 길을 행하게 한다면 나는 크게 기뻐할 것이고, 끝내 공덕의 가르침이 끊어지지 않도록 할 것이며, 나는 그들로 하여금 바르고 존귀한 법인 중도(中道)를 얻어서 부처님의 자리에 오르도록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훌륭하구나. 수보리여, 모든 보살들에게 권유하여 이와 같이 기꺼이 배우도록 하다니.”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저 수보리는 당연히 부처님의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은혜를 갚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과거 세상의 달살아갈(怛薩阿竭:如來)ㆍ아라하(阿羅呵:應供]ㆍ삼야삼불(三耶三佛:正徧智)들께서는 한결같이 모든 제자들로 하여금 여러 보살들을 위해 반야바라밀을 설하도록 하셨으며, 달살아갈께서도 그 가운데서 배워 스스로 부처가 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와 같이 작용하는 까닭에 반드시 부처님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오니, 저도 반야바라밀을 거듭 설할 것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보살의 가르침을 받아야 하니, 저는 또 기꺼이 이를 권유할 것입니다. 저는 이미 모든 것을 받았고 모두에게 기꺼이 권유할 것이니, 보살들은 머지않아 부처가 될 것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보살이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는지, 어떻게 공(空)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반야바라밀에 머무는지를 물었으니, 이제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구익이여, 보살마하살은 마하승나승녈과 대승[摩訶衍]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색에도 마땅히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성인(聖人)의 맨 처음 단계인 수다원(須陀洹)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사다함(斯陀含)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아나함(阿那含)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아라한(阿羅漢)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벽지불(辟支佛)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부처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색이든 색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수다원이든 수다원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사다함이든 사다함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아나함이든 아나함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아라한이든 아라한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벽지불이든 벽지불이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부처이든 부처가 아니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색이 무상하지 않다고 함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생사와 식이 무상하지 않다고 함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색이 고통스럽든 즐겁든 마땅히 거기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색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고통스럽든 즐겁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아름답든 추하든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색이 내 것이 있든 없든 거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내 것이 있든 없든 내 것이라는 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수다원의 가르침을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하며, 수다원의 가르침을 이미 성취했어도 거기에는 머무르지 않아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수다원의 도는 아직도 일곱 번 태어나고 일곱 번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수다원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다함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사다함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다함의 도에는 아직도 한 번 태어나고 한 번 죽는 일을 되풀이하는 일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사다함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나함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아나함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나함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문득 천상의 완전한 열반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나함의 도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아라한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아라한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아라한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간단함이 없는 처소인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아라한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벽지불의 도를 흔들림 없이 성취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고 벽지불의 도를 이미 성취했어도 여기에는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벽지불의 도를 성취하고 나면 문득 아라한의 도를 넘어 미처 부처의 도에 이르기도 전에 도중에서 완전한 열반에 안주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벽지불의 도에도 머무르지 않고, 부처의 도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공덕을 짓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 나는 헤아릴 수 없이 아득히 많은 중생들로 하여금 한결같이 완전한 열반에 들어 부처의 도에 머무르도록 할 것입니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의 도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머무시는가?’
수보리가 사리불의 생각을 알아차리고 바로 사리불에게 물었다.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머무시고 어디에 머무십니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부처님께서는 머무시는 곳이 없습니다.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의 마음은 머무시는 곳이 없이 머무시니, 일체 현상이 서로 원인이 되어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단계에도 머물지 않으시고, 일체 현상의 원인이 끊어져 더 이상 되풀이되는 일이 없는 단계에도 머물지 않으십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옳은 말씀입니다.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합니다. 머물되 머문다고 할 수 없는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처럼 반드시 이와 같이 머물되 머물지 않는 법을 배워야만 합니다.”
그때에 모든 천자들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열차(閱叉:야차)들의 생각을 충분히 알 수 있어서 크든 작든 그 말을 모두 이해할 수가 있지만 수보리 존자의 말씀은 도저히 알 수가 없구나.’
수보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이 말은 참으로 알기 어려우니 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여기에서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무슨 뜻인지 알고는 싶지만 수보리 존자의 지금 말씀은 더욱 깊고 미묘하구나.’
수보리가 다시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이미 수다원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사다함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아나함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물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아라한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벽지불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이미 부처님의 도를 깨달아 그 가운데에 머무르고 있더라도 결코 이러한 지혜로부터 물러나서는 안 됩니다.”
여기에서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수보리 존자의 설법이 이러하시니 도대체 어느 곳에서 수보리 존자와 같은 법사(法師)를 찾을 수 있을까?’
수보리가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법사라는 것은 허깨비와 같으니 내게서 법을 듣고자 한다면 아무것도 들을 수가 없고 깨달을 수도 없습니다.”
이에 모든 천자들은 다시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도대체 어떤 법이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할 수 있다는 말인가?’
수보리가 다시 이를 알아차리고 모든 천자들에게 말했다.
“허깨비는 사람과 같고 사람은 허깨비와 같으니 나는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道)도 모두 허깨비와 같다고 말하며, 나아가 부처님의 도까지도 나는 허깨비와 같다고 말합니다.”
천자들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도조차도 허깨비와 같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열반까지 허깨비와 같습니다.”
천자들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열반까지도 허깨비와 같습니까?”
수보리가 천자들에게 말했다.
“설령 열반을 초월하는 어떤 법이 있더라도 이 역시 허깨비와 같습니다. 왜냐하면 허깨비나 사람이나 열반이나 모두 허공과 같아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과 빈기문타라불(邠祁文陀羅弗:부루나)과 마하구사(摩呵拘私:마하구치라)와 마하가전연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어떤 것이 반야바라밀의 모양이고 어떤 법들이 이로부터 나오는 것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이 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아유월치의 보살이니 이것이 곧 반야바라밀의 모양입니다. 이러한 설법을 들은 모든 제자들은 모든 것을 갖추어 신속히 아라한을 이룹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반야바라밀에서 말하는 모양은 이와 같으니 이 법으로부터 나오는 것은 결국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법 가운데에는 있는 것도 없고 들을 것도 없고 얻을 것도 없기 때문이니, 가르침에 충실한 비구에게는 듣고자 하는 법이 없고 얻고자 하는 법도 없기에 이 법 가운데에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석제환인은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수보리 존자께서는 설법으로 법보(法寶)의 비를 내려 주셨으니, 나는 차라리 꽃을 만들어 수보리 존자님의 머리 위에 뿌려드려야겠다.’

석제환인은 곧 요술로 꽃을 만들어 수보리 존자의 머리 위에 흩뿌렸다.
수보리는 이를 알고 마음속으로 생각하였다.
‘이 꽃은 도리천(忉利天)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 나는 전에도 이러한 꽃을 본 적이 있다. 이 꽃을 나의 머리 위에 흩뿌린 이는 이것을 요술로 만들어 냈음이 분명하다. 이 꽃은 요술로 만든 꽃이며 나무에서 피어난 것이 아니다. 석제환인이 만들어내어 나의 머리 위에 흩뿌린 이 꽃은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이지 나무에서 피어난 것은 아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 존자여, 이 꽃은 비롯하는 곳 없이 생겨났습니다.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께서는 이 꽃이 비롯한 곳 없이 생겨났고 또한 마음의 나무에서 피어난 것도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꽃이라고 할 수가 없겠군요.”
석제환인이 말했다.
“깊이 알고 설하시는 수보리 존자의 말씀은 늘어나거나 줄어들지도 않습니다. 이와 같은 법을 설하시다니, 존자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배워야만 합니다.”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구익이여, 그 말씀은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보살은 마땅히 법 가운데에서 이와 같이 배워야만 하니, 보살이란 바로 이러한 것을 배우는 이로서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는 배우지 않나니, 이것을 가리켜 불도를 배우고 살운야를 배운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배우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아득히 많은 경전을 배운다고 하니, 색이 생겨나게 하는 것은 배우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생겨나게 하는 것도 배우지 않고, 다른 법을 받아들이는 것도 배우지 않으며, 받는 것도 배우지 않고 잃는 것도 배우지 않나니, 이를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이러한 것을 배우면 받아들이는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것을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사리불이여. 이러한 것을 배우면 받아들이는 일도 없고
잃는 일도 없습니다. 이렇게 배우는 것을 가리켜 살운야를 배운다고 하고 살운야를 낸다고 합니다.”
석제환인이 사리불에게 물었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만 합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이러한 것은 수보리 존자께 여쭙는 것이 온당합니다.”
석제환인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어떤 위신력을 의지해서 배워야 알 수 있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의 위신력을 의지해서 배워야 알 수 있습니다. 구익이여, 그대가 질문하기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행해야 하는가?’라고 했는데, 반야바라밀은 색을 따라서 행해도 안 되고 색을 떠나서 행해도 안 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따라서 구해서도 안 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인식함을 떠나서 구해서도 안 됩니다. 왜냐하면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반야바라밀이 아니지만 동시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떠난 것도 반야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마하바라밀(摩訶波羅蜜)은 끝도 없고 밑바닥도 없는 바라밀이라고 하는데 무슨 까닭입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마하바라밀은 가없는 바라밀이고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이니, 마하바라밀은 끝내 얻을 수가 없고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은 끝내 볼 수가 없으며 밑바닥이 없는 바라밀은 끝내 그 깊이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중생은 그 밑바닥도 없고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습니다.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고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고 중간이나 가장자리도 없고 가지도 없어서 끝내 헤아려 알 수 없고 체달하여 알 수 없습니다.
구익이여, 법(法)이 밑바닥이 없는 것처럼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으며 동시에 바라밀은 밑바닥을 여의지도 않습니다.
또 구익이여, 법에는 밑바닥도 없고 가지도 없으니 그 깊은 곳에는 중간도 없고 가장자리도 없고 끝나는 때도 없어서 밑바닥을 찾아도 밑바닥이 없으며, 밑바닥이 없는 것까지도 없는 바라밀입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수보리 존자시여, 무슨 까닭에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석제환인에게 말했다.
“이것은 전혀 헤아릴 수가 없으니 설령 셈하고 또 셈하더라도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다.”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떤 까닭에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그대의 생각은 어떠십니까? 어떤 법 가운데에서든 중생들에게 본래 생겨남이 있다고 가르친 적이 있던가요?”
석제환인이 말했다.
“어떤 법도 그렇게 가르친 적은 없으며 어떤 법도 중생이 생겨나서 머물러 있다고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설령 생겨난 것이 있다면 단지 그것은 이름자일 뿐이고 머물러 있는 것도 이름자일 뿐이어서 실제로 있는 것이라고는 끝내 없으니, 다만 그 이름자에 집착하여 말이 많을 뿐입니다. 중생 또한 처음도 끝도 모두 텅 비어서 있는 것이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그대의 생각에는 중생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중생을 볼 수는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구익이여, 어디에 중생의 작의(作意)6)가 있고, 어디에 중생의 밑바닥이 있겠습니까? 실제로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항하(恒河)의 모래알만큼 수많은 수명이 다하도록 오랜 세월 동안 중생들을 제도하시니, 중생들은 모양대로 생겨나고 모양을 따라 제도되지만 이로부터 생겨난 이들이 어찌 끊어지는 때가 있겠습니까?”
석제환인이 말했다.
“끊어지는 때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중생은 다하는 때가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중생도 밑바닥이 없고 반야바라밀도 밑바닥이 없습니다. 보살은 반드시 이와 같이 배우고 이와 같이 깨닫고 이와 같이 알아야만 하며,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법을 행해야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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