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41 불교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5권

by Kay/케이 2024. 5. 4.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도행반야경(道行般若經) 5

 

도행반야경 제5권

후한 월지국 삼장 지루가참 한역

10. 조명품(照明品)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에는 이와 같이 악마의 장난이 심해서 반야바라밀을 끊으려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의 말씀대로 보살에게는 위험한 일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더없이 크고 존귀한 것은 얻기가 힘들어서 많은 장애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도 이와 같아서 많은 장애가 일어나는 까닭에 이것을 새로 배우려는 이들도 아주 적고 마음속에 큰 법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반야바라밀을 읊거나 외우지도 않으니 이러한 사람은 악마에 휘둘린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가 말한 대로 반야바라밀을 새로 배우려는 이들이 아는 바가 매우 적고 마음속에 대승법(大乘法)을 받아들이지도 않고 반야바라밀을 읊거나 외우지도 않으니 이러한 사람은 이미 악마에게 휘둘린 것이며, 나아가 스스로 악마의 장애를 일으켜서 반야바라밀을 끊도록 한다. 만약에 선남자와 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읽고 외운다면 이것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 덕분이다. 왜냐하면 악마가 반야바라밀을 끊을 수 없도록 지켜 주시기 때문이니 이 사람은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 돌보아 주신다. 비유하건대 이것은 자식을 하나하나 낳아서 그 수가 마침내 열 명에 이른 어머니와 같다. 그 어머니가 병이 나자 아이들을 돌볼 수가 없게 되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평안하고 일이 없을 때에는 몸소 아이들을 보살펴서 잘 살도록 하며 춥고 따뜻하고 마르고 습할 때에도 언제나 아이들을 보호해 주었으니 아이들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어머니의 덕분인 것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모든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반야바라밀을 염두에 두시고, 현재 온 시방에 계시는 모든 부처님들도 항상 반야바라밀을 염두에 두시니, 만약에 이것을 모시면서 읊고 외우고 베껴 쓰면 살운야가 저절로 드러난다. 모든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한결같이 이로부터 살운야를 얻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아직 부처가 되지 못한 사람이거나 미래에 부처가 될 사람이거나 한결같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스스로 아유삼불과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이 되어 살운야의 지혜를 밝게 비추며 세상의 모든 것 역시 반야바라밀에 의해 드러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 하시니, 무엇을 가리켜 반야바라밀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밝게 비춘다고 하며, 또 달살아갈께서는 무엇으로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지셨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5음(陰)을 가지고 세상의 모든 것을 드러내신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에 의해 5음이 드러난다는 말은 무슨 뜻이며, 또 이 반야바라밀은 5음을 어떻게 나타내 보입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5음이 무너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무너짐이 없는 것도 없어 허공처럼 무너짐도 없고 무너질 것도 없음을 나타내 보이며, 또 5음에는 분별도 없고 원하는 것도 없고 무너짐도 없고 무너질 것도 없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세상의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인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을
달살아갈께서는 다 아신다. 이들은 모두 본래의 성품대로 사는 사람들이며 여래 역시 중생 본래의 성품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을 알며, 또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이거나 붙잡는다.
또 수보리여, 중생의 마음이 아프거나 어지러울 때도 달살아갈께서는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는 중생의 마음이 아프거나 어지러울 때도 이를 다 아실까? 모든 대상에는 본래 아프거나 어지러울 것이 없는 까닭에 이것을 다 아신다. 여래께서는 중생의 마음이 가지런하다는 것도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여래께서는 중생의 마음이 가지런하다는 것을 다 아실까? 여래께서는 다한 모양으로써 이것을 아신다.
또 수보리여, 여래께서는 애욕의 마음은 있는 그대로 애욕의 마음이라고 아시고, 성내는 마음은 있는 그대로 성내는 마음이라고 아시며, 어리석은 마음은 있는 그대로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아시니, 애욕의 마음에는 본래 애욕의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아시기 때문이며, 성내는 마음에는 본래 성내는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아시기 때문이며, 어리석은 마음에는 본래 어리석은 마음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음을 아시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나는 지금 반야바라밀에 의해 살운야를 얻는다. 무슨 까닭인가 하면, 달살아갈께는 애욕의 마음이 없으니 바로 이 애욕이 없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마음의 근본을 다 알아서 다시는 애욕의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의 마음에는 애욕이 없다.
달살아갈께는 성내는 마음이 없으니 바로 이 성내지 않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마음의 근본을 다 알아서 다시는 성내는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의 마음에는 성냄이 없다.
달살아갈께는 어리석은 마음이 없으니 바로 이 어리석음이 없는 마음의 작용에 의해 마음의 근본을 다 알아서 다시는 어리석은 마음이 없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의 마음에는 어리석음이 없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세상의 모든 것을 나타내 보이거나 붙잡는다.
또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마음이란 원래 넓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가는 곳도 없고 오는 곳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또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한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마음이란 원래 어디로부터 오는 곳도 없고 머무르는 곳도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마음이 넓고 크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또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마음이란 원래 머무르는 곳도 없고 어디로부터 오거나 멸하는 곳도 없어서 아무런 흔적도 없는 까닭에 그대로 다 아시며, 또 마음이란 마치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중생들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또한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느냐 하면, 마음이란 원래 청정하고 아무런 분별이 없는 까닭에 그대로 다 아신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또한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마음이란 원래 그 유래하여 오는 곳을 눈으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의 보지 못하는 마음을 그대로 다 아신다.
또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달살아갈께서는 정작 어떤 색도 붙잡을 것이 없지만 이러한 색은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을 아시고, 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붙잡을 것이 없지만 이러한 정신 작용은 끊임없이 생겨난다는 것을 아시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그렇다면 중생들은 무엇을 생각하는가? 어떤 것이 죽으면 다른 것도 죽어 없어진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어떤 것이 죽어도 다른 것은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어떤 것이 죽지 않으면 다른 것도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죽음이 있음도 아니고 죽음이 없음도 아니라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사람이 죽으면 함께 죽는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사람이 죽어도 함께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사람이 죽지 않으면 함께 죽지 않는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죽음이 있음도 아니고 죽음이 없음도 아니라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한다.
중생은 있고 세상은 없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중생은 없고 세상은 있다는 생각도 색에 의하며, 무상하든 무상하지 않든 세상은 없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무상함이 아니든 무상하지 않음이 아니든 세상은 없다는 생각도 색에 의하고, 나도 없고 세상도 없고 정신 작용도 없고 무상하지 않은 것도 없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무상함도 아니고 무상하지 않음도 아니고 정신 작용도 없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한다.
세상은 끝이 없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세상은 끝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나와 세상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역시 그러하다.
나[我]와 통상과 있다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나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끝이 있기도 하고 끝이 없기도 하다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하고, 나와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끝이 있음도 아니고 끝이 없음도 아니라는 생각 역시 색에 의한다.
이 목숨이 곧 이 육신이라는 생각은 색에 의하고 목숨도 아니고 육신도 아니라는 생각은 색에 의하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역시 그러하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는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아실까?
수보리여, 달살아갈께서는 색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며 마찬가지로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어떻게 해서 달살아갈께서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그대로 다 아시느냐 하면, 여래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본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본래부터 없느냐 하면,
그것을 얻고자 하는 이가 본래 없기 때문이다.
달살아갈께서도 본래부터 없지만 지혜에 의해 이와 같이 진실하게 머무신다. 그것이 왜 본래부터 없느냐 하면, 세상 역시 본래부터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왜 본래부터 없느냐 하면, 어떤 대상도 본래부터 없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어떤 대상도 본래부터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수다원의 도(道)도 본래부터 없고 사다함의 도도 본래부터 없고 아나함의 도도 본래부터 없고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도 역시 본래부터 없으며 달살아갈께서도 본래부터 없으니 한결같이 본래부터 없고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고 어느 곳에서도 막힘이 없어서 모든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조차도 본래 없기에 달살아갈께서는 정작 반야바라밀에 의해 스스로 아뇩다라삼야삼불을 이루어 온 세상을 붙잡아 밝게 비추어 드러내 보이며,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에 의해 세상은 본래부터 없고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께서는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그대로 다 아신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말씀은 참으로 깊습니다. 이 부처님과 보살마하살이 모든 일을 있는 그대로 남김없이 깨달았다는 것을 뉘라서 믿겠습니까? 오직 아라한의 도를 얻은 이와 아유월치에 오른 보살과 아유삼불을 성취한 달살아갈께서만 이것을 연설하실 수 있을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본래부터 아무것도 없다는 도리는 다함이 없고 이를 연설하시는 달살아갈의 말씀도 다함이 없다.”
그때 석제환인과 욕계천의 1만 천자들과 범가이천의 2만 천자들이 모두 부처님 앞에 나와서 각자 부처님의 발등에 이마를 조아리며 예경하고 나서 한쪽에 앉았다. 욕계천과 범가이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함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부처님의 가르침은 아주 깊습니다. 이 가르침에는 어떤 모양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모양이 있다는 것은 집착일 뿐이다. 이것은 분별도 없고 바람도 없고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있는 것도 없고 머무르는 것도 없는 것으로 그 모양을 삼는다. 그 모양은 마치 허공이 머무르는 것과 같이 달살아갈ㆍ아라하ㆍ삼야삼불이 머무르는 것과 같다. 모든 천인과 아수륜과 용과 귀신이라도 이러한 모양을 무너뜨리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모양은 손으로 지을 수 없기 때문이니, 색도 이 모양을 만들어낼 수 없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이 모양을 만들어낼 수 없으며 이 모양은 설령 인비인(人非人)이라도 만들어낼 수가 없다.”
부처님께서 다시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이 허공을 지은 사람이 있다면 뉘라서 이를 믿겠느냐?”
여러 천자들이 아뢰었다.
“허공을 만든 사람이 있다는 말은 아무도 믿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허공을 만들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여러 천자들이여, 그 모양은 이와 같이 항상 머물고 부처님께서 계시든 안 계시든 진실하게 머무른다. 이와 같이 머무르는 까닭에 달살아갈께서는 아유삼불을 성취하시고 달살아갈로 불리니 달살아갈이란 본래 없는 것이다.”
여러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이 모양은 아주 깊어서 모든 달살아갈께서 이로부터 아유삼불을 얻습니다. 달살아갈께서는 반야바라밀로부터 어디에도 걸림이 없는 지혜를 얻으시니, 이것은 곧 모든 부처님을 낳는 곳간과 같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달살아갈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세상을 나타내 보여 준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달살아갈은 이 가르침을 공경하고 받아들여서 스스로 성취한다. 모든 것이 반야바라밀에서부터 비롯하니 달살아갈은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을 공경하며 이에 의해 부처님이 된다. 이것을 가리켜 은혜를 갚는다고 한다.
무엇을 가리켜 달살아갈이 은혜를 갚는다고 하는가? 달살아갈은 반야바라밀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 아유삼불을 성취하지만 정작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제대로 은혜를 갚을 수 있는 것이다.
또 수보리여, 달살아갈은 어떤 대상도 만들어낸 이가 없다는 것을 아시니 이러한 까닭에 아유삼불을 얻으며, 또 만들어낸 것이 없지도 않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아유삼불을 얻는다. 이것이 곧 달살아갈이 은혜를 제대로 갚는다는 말이며 반야바라밀은 이로부터 드러난다. 달살아갈은 반야바라밀에 의해 어떤 대상에 대해서도 바라는 것이 없으니, 바로 이러한 까닭에 세상을 붙잡아 그대로 다 나타내 보이신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떤 대상도 알지 않고 보지 않는다면 정작 달살아갈께서는 어떻게 반야바라밀로부터 이 세상을 붙잡아 나타내 보일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말한 그대로 어떤 대상도 알지 않고 보지 않는다. 모든 대상은 허공과 같으며 이러한 까닭에 알지도 않고 붙잡지도 않고 이러한 까닭에 보지도 않는다. 이것은 모두 반야바라밀에 의한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어떤 대상도 알지 않고 보지 않으니 달살아갈은 바로 반야바라밀에 의해 이러한 도리를 알고 아유삼불을 성취하여 세상을 붙잡아 나타내 보인다. 색도 보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보지 않으니 바로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모든 세상을 붙잡아 나타내 보인다.”
수보리가 말했다.
“천중천이시여, 무슨 까닭에 색도 보지 않고 무슨 까닭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보지 않는다고 말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에 색에 의하지 않고 이로부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정신 작용을 행하면 이를 가리켜 색도 보지 않는다고 하며, 또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의하지 않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정신 작용을 행하면 이를 가리켜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보지 않는다고 하니,
색과 마찬가지로 정신 작용 역시 보는 것이 없다.
또 수보리여, 이 세상 역시 그 모양을 보지 않으니 이와 같이 보지 않는 까닭에 이 세상은 정작 반야바라밀에 의해 모든 대상을 그대로 다 드러내 보여 준다. 반야바라밀이 세상을 그대로 다 드러내 보여 준다는 것은 무슨 말이냐 하면 이 근심스러운 세상도 텅 비어서 미묘하며, 번뇌가 사라져 고요하고 청정하니, 이것을 가리켜 세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여 준다고 한다.”

11. 불가계품(不可計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더없이 커서 끝내 크기를 헤아릴 수가 없고 끝내 그 양(量)을 헤아릴 수가 없고 끝내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고 끝내 그 끝에 이를 수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과 같이 반야바라밀은 더없이 커서 끝내 그 크기를 헤아릴 수가 없고 끝내 그 양(量)을 헤아릴 수가 없고 끝내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고 끝내 그 끝에 이를 수가 없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은 왜 끝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할까? 달살아갈은 스승도 없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살운야를 얻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끝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은 왜 끝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할까? 여래가 스승도 없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살운야를 얻는 것은 무어라 이름할 수 없고 불가사의해서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끝내 그 크기를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은 왜 끝내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할까? 달살아갈을 넘어설 수 있는 이가 과연 누구일까?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끝내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다고 한다.
그렇다면 반야바라밀은 왜 끝내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할까? 달살아갈이 스승도 없이 반야바라밀에 의해 살운야를 얻는 것은 그 끝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반야바라밀은 끝내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달살아갈께서 스승도 없이 살운야를 얻는 것은 왜 끝내 크기를 헤아릴 수 없고 양(量)을 헤아릴 수 없으며 이에 견줄 만한 것이 없고 그 끝을 알 수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그 크기를 알 수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은 끝내 그 크기를 알 수 없다. 모든 대상에는 끝내 어떤 대상도 있지 않으니 바로 이것이 그 크기를 알 수 없는 까닭이다.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그 크기를 알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은 끝내 그 크기를 알 수 없다.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그 끝을 알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은 끝내 그 끝을 알 수 없다.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그 끝과 폭을 얻을 수가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은 끝내 그 끝과 폭을 얻을 수 없다. 왜냐하면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그 끝과 폭이 없으며 모든 대상에도 역시 그 끝과 폭이 없기 때문이다.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끝과 폭은 얻을 수 없고 다하는 곳이 없으니 이와 같이 모든 대상의 끝과 폭은 끝내 얻을 수 없고 다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있는 것이 없으며 모든 대상에도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보리여, 허공은 끝까지 헤아릴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허공은 끝까지 헤아릴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떤 대상도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으니 그 끝과 폭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의 가르침도 여기에 비유되어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다고 한다.
달살아갈이 마음을 내어 불법을 배우는 것은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나니 본래부터 그러할 마음도 없고 그러할 생각도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허공에 아무런 마음도 없고 아무런 생각도 없는 것과 같으니 혹시 마음이나 생각이 있으면 삶과 죽음이 끝없이 따르게 된다.
달살아갈의 가르침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그 끝을 알 수 없고 달살아갈의 가르침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헤아릴 수 없으며 이와 같이 설하는 말조차도 헤아릴 수 없고 일컬을 수 없으며 그 끝을 알 수 없다.”

부처님께서 이 경전을 연설하실 때 5백 명의 비구승과 30명의 비구니가 일시에 아라한이 되었고 60명의 우바새(優婆塞)와 30명의 우바이(優婆夷)들은 일시에 수다원의 도(道)를 얻었고 30명의 보살은 일시에 불생불멸(不生不滅)의 이치를 깨닫고 기뻐하는 가운데 현재의 겁(劫) 안에 모두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았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고 더없이 크고 안온(安穩)하여 끝내 의지할 만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더없이 크고 안온하여 끝내 의지할 만 하니 살운야와 수다원의 도(道)와 사다함의 도와 아나함의 도와 아라한의 도와 벽지불의 도가 모두 여기에서 나온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한 나라의 왕이 자신에게 속한 고을과 백성에 관한 모든 일을 신하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정작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는 것과 같으니 아라한과 벽지불과 부처의 도(道)도 모두 반야바라밀로부터 나오고 모두 이 경전에 바탕 한다.”
다시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색도 그렇지만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하며,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과 살운야도 받아들이거나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살운야는 어떻게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살운야는 어떻게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는 아라한이 이 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았느냐, 보지 못했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천중천이시여, 보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 법이 제게로 들어오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참으로 훌륭하구나. 나도 달살아갈의 법이 내게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않으니 달살아갈께서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으시고 살운야도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욕망뿐인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천중천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어렵기만 합니다. 만약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잘 믿어 아는 이가 있다면 이 사람은 일찍이 과거 세상의 부처님 때에 지은 공덕으로 지금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믿게 된 것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설령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중생들이 1겁동안 믿음을 닦아 왔다고 해도 어떤 사람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하루동안 사색을 즐기는 것의 복덕이 한층 더 크고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욕계천의 천자들과 범천의 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면 바로 부처님이 되리라는 예언을 받을 것이니 설령 누군가가 1겁 동안 기꺼이 믿음을 닦아 왔다고 해도 그 공덕이 여기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다.”
이에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은 각자 부처님의 발등에 머리를 조아려 예경을 하고 그 둘레를 세 번 돈 다음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노래를 부르며 먼 하늘을 굽이돌아 각각의 하늘 나라로 돌아갔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믿는다면 이 보살은 어느 곳으로부터 이 세상에 와서 태어난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의 마음에는 아무런 의심도 없고 싫다거나 좋다는 기색도 없이 이것을 듣고 사색하기를 즐기며 법을 설해주는 사람을 멀리 하려고 하지 않으니,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갓난아기가 끝내 그 어머니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것과 같다. 이 보살은 인간의 세상에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니 전세에도 반야바라밀을 배웠고, 금세에도 다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서 조금도 멀리하지 않고 믿고 즐긴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공덕을 쌓아 다른 부처님의 나라에 태어나서 부처님을 공양하면 그곳에서 죽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어떤 보살이 다른 곳의 부처님 나라에 태어나 부처님을 공양하면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며 그곳에서 쌓은 공덕으로 이 세상에서도 문득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또 수보리여, 어떤 보살은 도솔천에 태어나 미륵보살로부터 이 경전 중의 깊은 지혜를 듣고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나며 그곳에서 쌓은 공덕으로 이제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는다.
또 수보리여, 어떤 보살은 전세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지혜에 관해 묻지 않더니, 이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서도 반야바라밀을 듣고 마음에 문득 의문이 일어 역시 지혜에 관해 묻지도 않고 이것을 믿지도 않는다. 왜냐하면 전세의 의문이 아직 남아있기 때문이다.
또 수보리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전세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하루나 이틀이나 사흘이나 혹은 이레 동안 지혜에 관해서 물었다면 그 공덕으로 이제 다시 이 세상에 태어나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어 항상 즐거이 듣고 기꺼이 물으며 믿고 받아들인다.
또 수보리여, 만약에 보살이 어떤 때는 반야바라밀을 듣고자 하지만 어떤 때는 그렇지 않아서 마음이 어지럽고 변덕이 심하여 마치 저울추가 오르락내리락하듯 한다면, 이 사람은 아직 배우고자 하는 생각을 내지 않아서 믿음도 작고 깊은 반야바라밀을 들어도 즐겁지가 않으며 오히려 이것을 배우기 싫어하여 떠나가 버리니, 이와 같이 끝내 반야바라밀을 성취하지 못하고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道)에 빠지고 만다.”

12. 비유품(譬喩品)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배가 바다에서 파괴된 것과 같으니 그 안에 탄 사람들이 모두 물에 빠져 죽어 아무도 물을 건널 수 없게 되었을 때 어떤 힘센 사람이 마침 배 안에 있는 널빤지나 돛대에 올라타고 그 속에서 빠져 나오면 이 사람은 끝내 물에 빠져 죽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사람이 널빤지나 돛대를 의지하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도 이와 같으니 설령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더라도 정작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않고 구화구사라를 배우지 않으면 이 보살은 문득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道)에 빠지고 만다.
수보리여, 보살이 설령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더라도, 정작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않고 구화구사라를 배우지 않으면 이 보살은 끝내 살운야를 얻지 못하고 중도에서 문득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만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덜 구워진 항아리를 가지고 물을 길러 가는 것과 같으니, 머지않아 이 항아리는 반드시 부서져서 사용할 수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는 아직 덜 구워졌기 때문이다.
또 수보리여, 만약 어떤 보살이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할 때 다행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고 구화구사라를 배운다면, 이 보살은 중도에 물러나지 않고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를 훌쩍 벗어나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게 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어떤 사람이 잘 구워진 항아리를 가지고 물을 길러 가는 것과 같으니, 이 사람은 반드시 안전하게 물을 길어 돌아간다. 왜냐하면 이 항아리는 잘 구워졌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보살이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할 때 다행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고 구화구사라를 배운다면, 이 보살은 중도에 물러나지 않고 교만한 마음도 없어지며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서 훌쩍 벗어나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게 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오래되어 낡은 배를 해변에 대놓고 그 안에 재물을 가득 실은 다음 이것을 타고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배는 항구에 이르기도 전에 가라앉아서 모든 재물을 잃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수보리여, 어떤 보살이 설령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더라도 정작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않고 구화구사라를 배우지 않으면 이 보살은 중도에서 커다란 보물을 잃을 것이니, 무엇을 가리켜 커다란 보물이라고 하는가? 부처님이 바로 커다란 보물이니, 이 보살은 중도에서 문득 커다란 보물을 잃고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만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오래되어 낡은 배를 잘 고쳐서 해변에 대놓고 그 안에 재물을 가득 실은 다음 이것을 타고 목적지로 가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이 배는 중도에 가라앉지 않고 무사히 목적지에 이를 것임을 알아야 한다.
또 수보리여, 만약에 어떤 보살이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할 때 다행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고 구화구사라를 배운다면 이 사람은 중도에 물러나지 않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를 것임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보살은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쓰는 까닭에 끝내 아라한이나 벽지불의 도에 빠지지 않고 불문(佛門)을 향하여 바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나이가 120살에 이른 어떤 늙은 사람이 온갖 병환과 추위와 더위로 자리에 누워 몸이 편치 않은 것과 같으니 그대 생각엔 이 노인이 스스로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일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노인은 너무 늙어서 아무런 기력도 없기 때문이니 설령 노인의 병이 모두 낫는다고 해도 스스로 일어나 돌아다닐 수는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살도 이와 같아서 설령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더라도 정작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지 못하고 구화구사라를 배우지 않으면 이 보살은 끝내 부처님이 되지 못하고 중도에서 문득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배우지 않고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에 이 노인이 온갖 병환과 추위와 더위에도 불구하고 몸이 건강해져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다니고자 한다면 건강한 두 사람이 이 노인의 양쪽 겨드랑이 아래로 팔을 넣어 부축하면서 말하기를 ‘아무것도 걱정 마십시오. 가시고자 하는 곳까지 부축해 드릴 테니 중도에 저희들이 떠날까 걱정하지 마십시오’라고 하니 이렇게 해서 이 노인은 가고자 하는 곳을 마음대로 갈 수가 있다.
수보리여, 보살도 이와 같아서 믿음을 가지고 기꺼이 선정을 닦고 정진에 힘써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할 때 다행히 깊은 반야바라밀을 얻고 구화구사라를 배운다면 이 보살은 중도에 물러나지 않고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

13. 분별품(分別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아사부보살[阿闍浮菩薩:신발의보살(新發意菩薩)]1)은 반야바라밀을 어떻게 배워야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선지식(善知識)을 모셔야 하고 반드시 선지식을 기꺼워해야 하며, 반드시 좋은 생각으로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어떻게 하는 것이 반야바라밀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냐 하면 이 보살이 행하는 보시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한 것일 뿐,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살운야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만약에 보살이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행한다면 이것은 단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위한 것일 뿐,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는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살운야는 집착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또 수보리여,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서는 즐거움을 얻을 수 없으니 아사부보살은 이렇게 해서
서서히 반야바라밀로 들어간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괴로움을 싫어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살은 괴로움을 싫어하여 세상을 편안히 하고 세상을 보호하고 세상의 의지처가 되고 세상의 집이 되고 세상을 제도하고 세상의 돈대(墩臺)가 되고 세상의 인도자가 되기 위해 어려움을 견뎌낸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세상을 보호해 준다고 하느냐?
수보리여, 보살은 중생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것과 온갖 고통을 벗어나게 하고 법을 가르쳐서 해탈하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세상을 보호해 준다고 한다.
수보리여, 어떤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의지처가 된다고 하느냐?
수보리여, 보살은 중생들로 하여금 나고 죽는 것과 온갖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고 법을 가르쳐서 해탈하도록 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의지처가 된다고 한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집이 된다고 하느냐?
수보리여, 보살은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고 비로소 달살아갈이라고 불리며, 이때 세상을 위하여 경전은 집착의 대상이 아니라고 설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은 세상의 집이 된다고 한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집착이 없다고 하느냐?
수보리여, 색에는 아무런 집착도 없고 묶여 있는 곳도 없다. 색은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멸하는 것도 없으며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그러하다. 이와 같이 모든 대상에는 아무런 집착도 없고 묶여 있지도 않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세상을 제도한다고 하느냐?
수보리여, 보살은 그것이 색이든 색이 아니든 모두 제도하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속하든 아니든 모든 대상을 제도한다. 이러한 까닭에 보살이 세상을 제도한다고 한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보살은 모든 대상을 제도하고 아유삼불을 얻습니다. 왜냐하면 정작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보살은 괴로움을 싫어하여 아무것에도 집착하지 않는 것으로 가리켜 어려움을 견뎌낸다고 한다. 이 보살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마침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고 이로부터 경전을 설하니 이러한 것 역시 보살이 세상을 제도한다고 한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돈대가 된다고 하겠느냐?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물 가운데에 돈대가 솟아있어서 물이 양쪽으로 갈라져 흐르는 것과 같다.
수보리여, 보살도 이와 같아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모든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둘로 자르며 다른 모든 대상도 이와 같이 잘라버린다.
모든 대상을 잘라버리는 것이 곧 선정이고 감로(甘露)이고 열반(涅槃)이니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겨서 마침내 아유삼불을 얻는다. 이러한 까닭에 부처님은 세상의 돈대가 된다고 한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세상의 인도자가 된다고 하겠느냐?
수보리여, 보살이 마침내 아유삼불을 얻고 나면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의 행위는 텅 비었다고 설하고, 다른 모든 대상 역시 텅 비었다고 설하며 이들은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멸하는 것도 없고, 어떤 대상도 분별하지 않고 어떤 대상도 있는 곳이 없고 어떤 대상도 정신 작용을 행하지 않고 어떤 대상도 꿈과 같고 어떤 대상도 하나와 같고 어떤 대상도 허깨비와 같고 어떤 대상도 끝이 없되 정작 어떤 대상도 이와 같지 않으니 모든 것이 똑같이 아무런 차이도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이와 같이 아주 깊으니 뉘라서 이것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만약 보살이 과거세에 부처님 계신 곳에서 오랫동안 수행하여 공덕을 쌓았다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이 보살은 과거세에 부처님 계신 곳에서 어떻게 닦았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멀리 여의어서 다시는 이를 가까이 하지 않고 마침내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분명히 깨달았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이 보살은 세간의 인도자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이와 같이 아유삼불을 얻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세상 사람들을 위해 인도자가 된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은 괴로움을 싫어하여 마하승나승녈을 세워서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세상 사람들을 완전한 열반에 들어가도록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보살은 이와 같이 괴로움을 싫어하여 마하승나승녈을 세운다. 이러한 까닭에 승나승녈 그 자체에도 묶여 있지 않고, 색과 통상과 사상과 식에도 묶여 있지 않으니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는 물론 살운야에도 묶여 있지 않고, 그 외의 어떤 대상에도 묶여 있지 않다. 이러한 까닭에 승나승녈[僧那僧涅:서원(誓願)]이라고 한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는 구하는 대상과 구하는 행위와 구하는 사람 이 세 가지를 분별하면 온당치 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무슨 까닭에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 세 가지를 분별하면 온당치 않다고 말하는가?”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이것을 쉽게 지킬 수는 없지만 전혀 지킬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반야바라밀로부터는 어떤 대상도 생겨 나오지 않으니 반야바라밀을 지키는 것은 마치 허공을 지키는 것과 같고, 반야바라밀을 지키는 것은 마치 한량없는 대상을 지키는 것과 같고, 반야바라밀을 지키는 것은 마치 있지도 않은 것을 지키는 것과 같고, 반야바라밀을 지키는 것은 마치 아무런 집착도 없는 것을 지키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반야바라밀 안에 있는 사람은 아유월치의 지위에 있는 보살임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깊은 반야바라밀 안에서 아무런 집착도 없는 사람은 끝내 다른 사람의 말을 따르지 않고, 다른 도를 좇지 않으며 어떤 두려움도 없고 게으름도 없다. 이 사람은 과거세에 이 깊은 경전에서 가르치는 지혜에 대하여 부처님께 여쭌 적이 있어서 이제 다시 이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마음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게으름도 없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이 보살은 어떻게 관찰하기에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도 마음에 아무런 두려움도 없고 게으름도 없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보살은 마음이 살운야를 향해 있으며 이로써 반야바라밀을 관찰한다.”
수보리가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이 보살의 마음이 살운야를 향해 있다는 것은 어떤 뜻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이 보살의 마음은 공(空)을 향해 있으며 이로써 반야바라밀을 관찰한다.
수보리여, 살운야로 대상을 관찰한다는 것은 정작 바른 관찰이 아니다. 살운야는 이루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여, 색도 역시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은 더 이상 색이 아니고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이루 헤아릴 수 없으니, 이것은 더 이상 정신 작용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도 없고 나오는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또한 아는 것이 있지도 않고 아는 것이 없지도 않고 생겨나는 것도 없고 짓는 것도 없고 패배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유래하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멸하는 것도 없고 보는 것도 없고 있는 것도 없다.
수보리여, 이와 같이 공(空)은 한량이 없고 살운야는 이루 헤아릴 수 없어서 부처가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고 부처를 얻는다는 것도 있을 수 없으니,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에 의지하여 부처를 얻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고, 또한 단바라밀(檀波羅蜜:보시바라밀)과 시바라밀(尸波羅蜜:지계바라밀)과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인욕바라밀)과 유체바라밀(惟逮波羅蜜:정진바라밀)과 선바라밀(禪波羅蜜:선정바라밀)과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부처가 된다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이에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힘듭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들이여, 이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힘들다. 이러한 까닭에 달살아갈은 이 깊은 경전을 설하지 않으려 하였던 것이고 아유삼불에 이르고자 하지 않았던 것이니, 아유삼불이란 원래 있지도 않고 이 경전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아주 깊고 똑같은 것이 없으며 다른 모든 대상과 마찬가지로 의지하여 오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가는 것도 없다.”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깊은 경전을 믿는 이들은 아주 적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집착이 강하니 여래는 단지 이들을 가엾게 여겨서 이 경전을 그들에게 설하실 뿐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들이여, 옳고도 옳은 말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 깊은 경전을 믿는 이들은 아주 적다.
세상 사람들은 한결같이 집착이 강하니 여래는 단지 이들을 가엾게 여겨서 이 경전을 설할 뿐이다.”

14. 본무품(本無品)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떤 대상도 서로간에 집착함이 없으며, 허공처럼 아무런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이시여, 이 경(經)은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 없으니, 어떤 대상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수보리님의 모든 말씀은 공(空)의 지혜를 설하는 달살아갈의 가르침만을 따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들이여, 옳고도 옳은 말이다. 수보리의 말은 모두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른다.”
천자들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이시여, 무슨 까닭에 어떤 대상도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수보리의 말이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합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천자들이여, 어떤 대상도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이 없다는 수보리의 말은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르니, 달살아갈의 이러한 가르침조차도 본래 없고 또한 의지하여 생겨나는 것도 없고 의지하여 돌아가는 것도 없다.
달살아갈이 본래 없으니 모든 대상도 본래 없고 모든 대상이 본래 없으니 달살아갈도 본래 없으며 본래 없다는 것에는 서로 차이가 없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는 달살아갈의 본래 없다는 가르침을 따르며 달살아갈도 본래 없다고 한다.
달살아갈은 본래 아무 곳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는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라 머무른다.
달살아갈이 본래 없다는 것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고 어떤 대상도 본래 없다는 것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 달살아갈은 본래 없으니 아무 데에도 걸림이 없고 어떤 대상도 본래 없으니 아무 데에도 걸림이 없다. 모든 대상은 본래 하나이고 같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고 본래 없으며 지은이도 없다. 모든 것이 본래 없지만 또한 본래 없는 것도 아니다. 달살아갈은 이와 같이 본래 없기에 무너지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는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는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른다.
달살아갈은 본래 없으니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모든 대상도 본래 없으니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이러한 까닭에 수보리는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른다고 한다.

달살아갈은 본래 없으니 과거에도 본래 없고 미래에도 본래 없고 달살아갈은 현재에도 본래 없으니 여기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이와 같이 서로 똑같아서 아무런 차이도 없는 것을 가리켜 참으로 본래 없다고 한다. 보살이 이와 같이 참으로 본래 없음을 얻으면 이를 일컬어 달살아갈이라고 한다.”
부처님께서 이와 같이 설하실 때 대지(大地)가 여섯 가지 모양으로 진동하였으니, 곧 수보리가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른 까닭이고 수보리가 색과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도 받아들이지 않고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의 도(道)도 받아들이지 않고 달살아갈의 가르침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사리불이 말했다.
“천중천이시여, 본래 없다는 것은 아주 깊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본래 없다는 것은 깊고도 깊다.”
이와 같이 본래 없다는 설법을 듣고 2백 명의 비구승들이 그 자리에서 모두 아라한이 되었고, 5백 명의 비구니들은 모두 수다원의 도를 얻었고, 5백 명의 천인들은 모두 나고 죽음이 없는 평안한 진리를 얻었고, 처음으로 불법을 배우는 60명의 보살들은 모두 아라한의 도를 얻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60명의 보살들은 과거세에 각기 5백 분의 부처님을 공양하고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닦았으나 정작 공(空)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한 까닭에 아라한의 도만을 얻었을 뿐이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비록 도(道)를 얻고 공(空)을 얻고 대상을 초월함을 얻고 바람이 없음을 얻었더라도, 정작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하면 중도에서 문득 아라한의 도에 빠져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

비유하자면 이것은 마치 몸의 크기가 8천 리(里)에서 2만 리나 되고 날개가 아직 돋지 않은 커다란 새가 도리천 위에서 몸을 던져 염부리의 지상에 내려오고자 하는 것과 같으니 사리불이여, 그대 생각엔 이 새가 중간에서 후회하는 마음이 들어 도리천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다시 돌아갈 수 있겠느냐, 없겠느냐?”
사리불이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다시 돌아갈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다시 이 새가 염부리의 지상에 닿을 때 아무런 고통도 없기를 바란다면 과연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느냐?”
사리불이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새에게 고통이 없다는 것은 있을 수 없으며 심지어는 고통이 심해서 죽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몸이 너무 큰데다가 날개마저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사리불이여, 보살도 이와 마찬가지이니 설령 항하의 모래알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세월 동안 보시와 지계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을 닦더라도 정작 공(空)의 도리에 들어가지 못하고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한 채 불도를 구하고자 하고 부처가 되고자 한다면 중도에 문득 아라한의 도와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만다.
사리불이여, 보살이 비록 과거와 미래와 현재의 부처님이 계신 곳에서 계율(戒律)과 정진(精進)과 삼매(三昧)와 지혜(智慧)의 공덕을 닦고 부처님의 살운야를 듣더라도 정작 마음속으로 색을 좇으면, 여래의 계율과 정진과 삼매의 지혜 공덕을 얻을 수도 없고 부처님의 살운야도 깨달을 수 없으며, 단지 모든 대상이 공하다는 말만을 알아듣고 문득 이로부터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고자 해도 끝내 얻지 못하고, 중도에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만다. 왜냐하면 이 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얻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리불이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부처님의 말씀대로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여의는 까닭에 문득 아라한과 벽지불의 도에 빠지고 맙니다.
부처님이시여,
만약 어떤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와 아유삼불을 얻고자 한다면 마땅히 반야바라밀의 구화구사라를 잘 배워야만 합니다.”
욕망뿐인 욕계천의 모든 천자들과 범천의 모든 천자들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알기 어렵고 깨닫기 힘들며 아뇩다라삼야삼보는 얻기 힘듭니다.”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반야바라밀은 아주 깊어서 알기도 어렵고 깨닫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제가 생각하기로는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기란 아주 쉽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대상에도 있는 것이 없으니 어디에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모든 대상은 공(空)해서 얻을 수 없으니 아유삼불을 얻고자 해도 그 대상을 얻을 수 없고, 아뇩다라삼야삼보 역시 그 대상을 붙잡을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단지 모든 대상이 공(空)한 것만 알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쉽게 얻을 수 있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씀대로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얻기 쉽다고 한다면 항하의 모래알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보살들이 결코 이로부터 물러서지 않았을 것이니, 이러한 까닭에 아뇩다라삼야삼보는 얻기 힘들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에 색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에 색을 여읜 것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색이 본래 없는 것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색이 본래 없는 다른 대상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을 본래 여읜 것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통상과 사상과 생사와 식이 본래 없는 다른 대상은 이로부터 물러서겠습니까, 물러서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본래 없는 것은 이로부터 물러서도록 하겠습니까, 물러서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도록 하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그대 생각엔 본래 없는 것을 여읜 다른 대상은 이로부터 물러서도록 하겠습니까, 물러서도록 하지 않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물러서도록 하지 않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이 법은 붙잡을 수 없으니 다시 어떤 법이 이로부터 물러서도록 하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씀대로라면 어떤 보살도 이로부터 물러서는 일이 없으니 그렇다면 아라한과 벽지불과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보살은 각기 다르지 않으니 수보리의 말씀대로 오직 하나의 도(道)만이 있을 뿐입니다.”
이에 분만타니불(分漫陀尼弗:부루나)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그렇다면 오직 하나의 가르침만이 있는지를 수보리님에게 물어야 할 것입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수보리여, 오직 하나의 도만이 있습니까?”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본래 없는 것 안에서 과연 서로 다른 세 가지 가르침을 볼 수 있습니까, 없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본래 없는 것에서 이들 세 가지를 붙잡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그렇다면 본래 없는 것에서 한 가지를 붙잡을 수는 있을까요?”
사리불이 말했다.
“수보리여, 붙잡을 수 없습니다.”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이와 같이 실제로 이것을 찾더라도 붙잡을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 그대는 왜 굳이 성문이니 벽지불이니 부처니 하고 분별합니까? 이 셋은 본래 없는 것이니 여기에는 서로 아무런 차이도 없습니다. 만약에 보살이 본래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면 이 보살은 반드시 불법을 얻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수보리여, 그대의 말은 모두 부처님의 위신력에 의한 것이니 만약에 보살이 이 셋은 본래 없으며 서로 같아서 아무런 차이도 없다는 말을 듣고 마음에 게으름이 없으면 반드시 불법을 얻을 것이다.”
이에 사리불이 말했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해야 보살이 아뇩다라삼야삼보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수보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부처님이시여, 어떻게 해야 보살의 도를 성취할 수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모든 사람들에게 말할 때는 모두를 평등하게 보아야 하고 마음을 선하게 하여 해를 입히려는 생각을 갖지 말아야 하며,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함께 이야기하고 성내지 말 것이며 마음 속으로 모든 중생을 어여삐 여겨야 한다.
보살은 반드시 이렇게 머물러야 한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