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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07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95권

by Kay/케이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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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95

 

 

대지도론 제95권

85. 칠유품(七喩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어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아라한이 만든 것도 아니고 아나함과 사다함과 수다원이 만든 것도 아니며, 도에 향한 사람[向道人]이 만든 것도 아니고 과를 얻은 사람[得果人]이 만든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이 만든 것도 아니라면 어떻게 하여 분별하면서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나아가 이것은 비유상비무상천(非有想非無想天)이다’라고 모든 법에 차이를 두겠습니까.
이 업의 인연[業因緣] 때문에 지옥에 나는 이가 있음을 알고, 이 업의 인연 때문에 축생과 아귀에 태어나는 이가 있음을 알며, 이 업의 인연 때문에 인간에 태어나고 4천왕천(天王天)에 태어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이가 있음을 아는 것입니다. 이 업의 인연 때문에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을 얻는 이가 있음을 알고, 이 업의 인연 때문에 그들이 보살마하살임을 알며, 이 업의 인연 때문에 그 분이 다타아가도ㆍ아라하ㆍ삼먁삼불타임을 알게 됩니다.
세존이시여, 성품이 없는 법[無性法] 가운데는 업의 작용이 없는데도 업을 지은 인연 때문에 지옥ㆍ아귀ㆍ축생에 떨어지고 인간ㆍ천상에 태어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납니다. 이 업의 인연 때문에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을 얻고, 보살마하살이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얻게 되며,
일체종지를 얻기 때문에 중생들을 생사 가운데서 구출하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성품이 없는 법에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범부의 사람은 성인의 법에 들지 못하고 모든 법에 성품이 없는 모양을 알지 못하여 뒤바뀌고 어리석은 까닭에 갖가지 업의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니, 이 모든 중생들은 그 업에 따라서 몸을 얻게 되니, 곧 지옥의 몸이나 축생의 몸이나 아귀의 몸이나 사람의 몸이나 하늘의 몸이나 4천왕의 몸이나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의 몸이 그것이니라. 하지만 이 성품이 없는 법에는 업도 없고 과보도 없으니, 성품이 없는 것이라 언제나 성품이 없느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에 성품이 없다면 어떻게 하여 이 수다원 내지는 모든 부처님이 일체종지를 얻겠느냐’고 하는데,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도(道)는 성품이 없는 것이더냐? 수다원과에서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까지도 성품이 없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도에는 성품이 없고 수다원의 과위에도 성품이 없으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일체종지에도 성품이 없습니다.”
“수보리야, 성품이 없는 법은 성품이 없는 법을 얻을 수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성품이 있는 법은 성품이 있는 법을 얻을 수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성품이 없는 법과 도(道)의 이 온갖 법은 모두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함도 없는 한 모양[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無相]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보건대 뒤바뀐 까닭에 5중(衆)에 집착하면서 무상한 것 가운데서 항상하다는 모양[常相]과 괴로운 것 가운데서 즐겁다는 모양[樂相]과 깨끗하지 않는 것 가운데서 깨끗하다는 모양[淨相]과 나 없는 것[無我] 가운데서 나라는 모양[我相]으로 있는 바 없는 곳[無所有處]에 집착하고 있나니, 이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그 있는 바 없는 가운데서 중생을 구출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범부의 사람들이 집착하는 것에는 행여 진실한 것과 다름이 없는 것이 있어서, 그에 집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키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5도(道)의 나고 죽는 가운데서 벗어날 수도 있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범부의 사람들이 집착하여 업을 일으키는 곳에서는 털끝만큼의 진실한 일도 없으니, 다만 뒤바뀜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제 그대를 위하여 비유로 설명하리니, 지혜로운 이는 비유로써 이해하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꿈속에서 보는 사람이 5욕(欲)의 즐거움을 누린다면, 실로 그 머무는 곳[住處]이 있더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꿈도 오히려 허망하여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꿈속에 머물러 있으면서 5욕의 즐거움을 누리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든 법으로서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와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인 것에 행여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있더냐?”
“세존이시여, 모든 법으로서 유루와 무루와 유위와 무위인 것에는 꿈과 같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꿈속에서 5도에 나고 죽고 하면서 왕래함이 있더냐?”
“세존이시여, 없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꿈속에서 도(道)를 닦는 것이 있고 이 닦는 도로써 더러운[垢]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淨]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이 꿈의 법에는 진실한 일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거울 속의 형상에는 진실한 일이 있어서 업의 인연을 일으킬 수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이나 아귀나 축생에 떨어지며, 또는 인간이나 4천왕천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처의 하늘에 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형상에는 진실한 일이 없으니, 다만 어린아이만은 속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일에 어떻게 하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거울 속의 형상이 도를 닦는 것이 있고 이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왜냐 하면, 이 형상은 공하여 진실한 일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깊은 산골짜기에서 메아리가 있을 적에 이 메아리에는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일은 공하여 실제 음성이 없거늘 어떻게 하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고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메아리에는 행여 도를 닦는 것이 있고 이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일은 진실이 없으므로 ‘이것은 더럽다, 이것은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치 아지랑이는 물이 아닌데도 물의 모양이 되고 하천(河川)이 아닌데도 하천의 모양이 되는 것과 같나니, 이 아지랑이에는 행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아지랑이 가운데서는 물을 끝내 얻을 수 없고 다만 지혜 없는 사람의 눈을 속일 뿐이거늘 어떻게 하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아지랑이에는 도를 닦는 것이 있고 이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아지랑이에는 진실한 일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건달바성(乾闥婆城)이 있는데, 해가 돋을 때에 그 건달바성을 보면, 지혜 없는 사람은 성(城)이 없는데도 성이 있다고 생각하고 망루[廬觀]가 없는데도 망루가 있다고 생각하며 동산이 없는데도
동산이 있다고 생각하나니, 이 건달바성에 행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건달바성은 끝내 얻을 수 없으며 다만 어리석은 범부의 눈을 속일 뿐이거늘, 어떻게 하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건달바성에는 도를 닦는 것이 있고 그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건달바성에는 진실한 일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환술사가 환술로 만든 여러 가지 것으로써 코끼리나 말이나 소나 양이나 또는 남자나 여자가 있을 적에 그대가 생각하기에 이 환(幻)에는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환의 법은 공하고 진실한 일이 없거늘 어떻게 하여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환에는 도를 닦는 것이 있고 그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법은 진실한 일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과 같아서, 이 변화한 사람에게는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천에 태어나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변화한 사람에게는 진실한 일이 없습니다. 그러니 어떻게 업의 인연이 있고, 그 업의 인연 때문에 지옥에 떨어지겠으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겠습니까.”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변화한 사람에게는 도를 닦는 것이 있고 그 닦는 도로써 더러운 데에 집착하거나 또는 깨끗한 것을 얻는 일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런 일에는 진실한 것이 없으므로 더럽다거나 깨끗하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공한 모양 가운데에는 더러운 이가 있고 깨끗한 이가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어서 더러운 데에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이도 없습니다.”
“수보리야, 마치 더러운 데에 집착하는 이도 없고 깨끗한 이도 없듯이 이런 인연 때문에 또한 더러운 것도 깨끗한 것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나[我]와 내 것[我所]에 머무르는 중생은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도 있지만, 진실하게 보는 이에게는 더러운 것이 없고 깨끗한 것이 없으며 여실하게 보는 이에게도 더러운 것이 없고 깨끗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해서 또한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없느니라.”
【論】【문】부처님은 이미 곳곳에서 이런 일을 대답하셨거늘 지금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이치는 비록 동일하다 하더라도 원인이 되는 일에는 차이가 있다. 이른바 온갖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성품은 언제나 머물러 있고 공하여 있는 바 없으니, 성현이 만든 것도 아니다.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이해하기 어렵고 헤아리기 어려우며 한량 있는 것[有量]으로써 알 수도 없으나,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까닭에 갖가지의 언어와 이름과 비유로써 그들을 위하여 해설하시는 것이다.
근기가 영리한 이는 성인의 뜻을 이해하지만 근기가 둔한 이는 곳곳에서 집착을 내고 언어와 이름에 집착하나니, 만일 ‘공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곧 공에 집착하고, ‘공도 또한 공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다시 집착을 낸다. 만일 온갖 법은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어서 ‘말[言語]의 길이 끊어졌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또한 다시 그것에 집착하나니라.
자기의 마음이 깨끗하지 않기 때문에 성인의 법을 들어도 깨끗하지 않게 여기는 것이 마치 눈병 난 사람이 깨끗한 구슬을 보면서도 그 눈에 가린 것이 보이는 지라 곧 그 구슬이 깨끗하지 않다고 여기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갖가지 인연으로 말씀하시는 데도
허물이 있다고 보면서 의심을 내며 말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공하며, 공한 것도 또한 공하다면 어찌하여 분별 하면서 6도(道)가 있고 항상 나는 것이 있을까”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의심과 힐난 때문에 수보리는 경이 다 마치려 할 적에 중생들을 위하여 곳곳에서 이런 일을 묻고 있으니, 이 때문에 거듭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셨다.
【문】수보리는 존재[有]를 가지고 공을 따지거늘, 부처님은 어찌하여 그의 뜻을 인가하시는가?
【답】부처님께서는 “모든 법은 공하여 항상 머물러 있으며,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달라지지 않는다”고 하는 그 말을 인가한 것이지, “어찌하여 분별하여 6도(道) 등이 있겠는가”고 하는 힐난을 인가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힐난으로써 공을 부수려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그 힐난하는 바를 해설하시면서 “이른바 범부의 사람은 성인의 법에 들지 못하고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하였으며 지닌 바 성품이 없음[無所有性]을 알지 못하여 공삼매(空三昧)를 잘 닦아 익히지 못한 까닭이다”고 하셨다.
뒤바뀜이란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이요 어리석다는 것은 삼계의 매임[界繫]인 무명(無明)이다. 비록 그 밖의 다른 번뇌는 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 두 가지의 법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며 뒤바뀐 것이어서 곧 그것은 거짓말이요 속임수이다.
만일 뒤바뀜을 따르면 내는 업과 과보가 근본부터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중생이 비록 깊이 탐착한다 하더라도 정해져 있거나 진실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5도(道)는 모두가 공하여서 다만 임시로 붙인 이름만이 있다.
또 그대는 모든 성현에 대하여 따지면서 이 모든 성현은 뒤바뀜과 차별을 끊었기 때문에 다른 이름[異名]이 있다 하지만, 뒤바뀐 것이어서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끊을 것도 없다.
또 없어지고 잃게 되어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끊는다[斷] 하지만, 실로 끊을 수 있는 어떤 법이 있다 해도 오히려 끊을 법이 없거늘 하물며 뒤바뀐 것이랴. 이 때문에 온갖 성현의 과위[果]는 모두 있는 바가 없다.
뒤바뀜을 끊는 것이 곧 성인의 과위요 과위는 곧 끊는 것이니, 과위를 위하여 닦게 되는 도(道)도 또한 동일하여 있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도를 닦을 때에는 반드시 공하고ㆍ모양이 없고ㆍ조작이 없는 법을 이용해야 한다.
도(道)와 과위[果]를 분별하기 때문에
성현이라는 차별이 있지만, 이제 실로 있는 바 없는 법에서는 있는 바 없는 것을 얻을 수 없거늘 어떻게 차별이 있겠는가. 이 때문에 따지지 말아야 한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뒤바뀐 까닭에 세간이 있다면 그 뒤바뀜이 있다는 것도 또한 진실이 있어야 하리니, 거짓[虛]과 진실[實]은 상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들이 집착하는 것에서 행여 진실한 것이 있어서 집착을 내고 업을 일으킨다면, 그 업의 인연 때문에 6도의 생사에서 해탈을 얻는 것은 아니겠습니까”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다만 뒤바뀜 때문에 집착을 낼 뿐이다. 만일 뒤바뀜이 없다면 어떻게 상대되는 진실한 법이 있겠느냐. 나아가 털끝만큼의 진실한 일도 없으며, 필경에도 없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문】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시는 진실한 이치는 이른바 필경 공한 것인데 이것은 진실이 아닌가?
【답】이 제일의공(第一義空)도 또한 분별로 인한 것이니, 범부들이 뒤바뀌어 있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 만일 뒤바뀜이 없었다면 역시 으뜸가는 이치도 없을 것이다. 만일 범부들의 뒤바뀜이 많건 적건 간에 진실이 있다면, 으뜸가는 이치에서도 마땅히 진실이 있어야 한다.
【문】만일 두 가지가 다 같이 진실하지 않다면 어찌하여 해탈을 얻는 것인가? 마치 사람의 손이 더러울 적에 도리어 더러운 물에 씻는 것과 같거늘 어떻게 깨끗하게 되겠는가?
【답】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필경 공하고 으뜸가는 이치이어서 진실로 깨끗한데, 범부가 뒤바뀌어서 깨끗하지 못한 법이 있기 때문에 이 깨끗한 법이 있는 것이니, 파괴할 수도 없고 변하여 달라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모든 법의 실상에 대하여 탐착과 욕탐을 일으켜서 번뇌를 내나니, 이 때문에 “이 법의 성품은 공하여 있는 바가 없고, 있는 바가 없기 때문에 진실한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비록 두 가지 법은 모두가 진실하지 않더라도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서 차별이 있다. 마치 열 가지의 선[十善]이나 열 가지의 불선(不善)과 같다. 두 가지가 모두 유위의 법[有爲法]이기 때문에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으면서도 선과 불선에는 차별이 있나니, 산목숨을 죽이기 때문에 악도에 떨어지고 죽이지 않기 때문에
천상에 태어난다.
마치 보시와 도둑질의 두 가지 일에서도 비록 모양을 취하여 마음에 집착함은 바로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또한 차별이 있는 것과 같으며, 마치 중생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는 있는 바가 없지만, 중생들을 괴롭히면 큰 죄가 있고 중생에게 자비로 대하면 큰 복이 있게 되는 것과 같다.
인자한 것[慈]은 성내는 일을 깨뜨리고 베푸는 것[施]은 간탐을 깨뜨리듯이 비록 두 가지 일은 다 같이 진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서로 파괴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부처님은 “모든 법에는 털끝만큼도 그 근본과 정해진 실체가 없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런 일을 증명하려는 까닭에 ‘꿈속에서 5욕(欲)을 받는 등’의 비유를 들어 말씀하신 것이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온갖 법이 필경 공하여 지닌 바 성품이 없는 것이라면 지금 무엇 때문에 현재 눈으로는 빛깔을 보고 귀로는 법을 듣게 될까’라고 하였기 때문에 부처님은 꿈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신 것이다.
마치 사람이 꿈이라는 힘 때문에 비록 진실한 일이 없다고 해도 갖가지를 듣고 보고 하면서 성을 내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잠을 자지 않고 깨어 있는 사람은 그의 곁에 있으면서도 보이지 않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범부의 사람은 무명(無明)의 뒤바뀐 힘 때문에 망령되이 보는 것이 있지만, 성인은 깨친 분이므로 보는 것이 없다. 온갖 법으로써 유루(有漏)ㆍ무루(無漏)와 유위(有爲)ㆍ무위(無爲)의 모두는 진실하지 않고 허망하기 때문에 보거나 듣는 일이 있는 것이다.
또 마치 꿈속에서 6도(道)에 생사 왕래하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수다원에서아라한까지도 보게 되는 것이다. 꿈속에서는 이런 법이 없는데도 꿈으로는 보는 것이며, 꿈속에서는 실로 깨끗한 것[淨]도 없고 더러운 것[垢]도 없나니, 업의 과보와 6도에서도 역시 이와 같다.
뒤바뀐 인연 때문에 업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업의 과보도 마땅히 공해야 한다. 뒤바뀜을 물리쳐 없애기 때문에 도(道)라 하지만 뒤바뀜은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도도 또한 진실하지 않아야 하나니, 거울 속의 형상과 메아리와 아지랑이에서 변화한 것과 같음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반문(反問)하시면서 “이 법에도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느냐”고 하시니,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온갖 법에는
나[我]가 없거늘 어떻게 하여 더러운 것이 있고 깨끗한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라고 하고, 이 때문에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는 이나 깨끗한 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다면, 더럽다거나 깨끗하다는 것 또한 없는 것이다”고 하셨다.
【문】만일 모든 법을 분별한다면 『아비담(阿毘曇)』 등의 경에서는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으니, 다만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을 받아들이는 이가 없을 뿐이다. 3독(毒) 등의 모든 번뇌가 바로 더러운 것이요, 3해탈문(解脫門) 등의 모든 도를 돕는 법[助道法]이 바로 깨끗한 것이다”고 한다.
【답】비록 그런 설명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 일은 옳지 못하다. 만일 중생과 법이 속한 데가 없으면 또한 짓는 이[作者]도 없고, 만일 짓는 이가 없으면 또한 짓는 법도 없어서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다.
마치 사람이 불에 타려 할 때에 두려워서 버리고 여의는 것이요 불이 불을 여의는 것이 아닌 것처럼 중생들도 또한 이와 같아서, 5중(衆)의 괴로움이 두렵기 때문에 버리고 여의는 것이요 괴로움이 괴로움을 여의는 것은 아니니, 만일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없으면 해탈도 없다.
또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른바 나[我]와 내 것[我所]이라는 법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은 더러운 것을 받아들이고 깨끗한 것도 받아들이지만, 나[我]는 끝내 없기 때문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머무를 데가 없고 머무를 데가 없기 때문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고 하셨다.
【문】나[我]에게는 비록 나라는 견해[我見]가 없다고 하더라도 실로 범부의 사람은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모든 번뇌를 일으킨다.
【답】만일 나와 나라는 견해가 없으면 반연할 것[所緣]도 없나니, 반연할 것이 없거늘 어떻게 내게 되겠는가?
【문】비록 나[我]가 없다 하더라도 5중(衆) 가운데서 삿된 행으로 나[我]가 있고 나라는 견해를 내면서 ‘5중이 곧 나요, 내 것이다’라고 여긴다.
【답】만일 5중 가운데서는 결정코 나라는 견해를 내는 인연이 있다 한다면 다른 이의 5중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내지 않는 것인가? 만일 다른 이의 5중 가운데서도 낸다 한다면 큰 혼란이 오게 될 것이다. 이 때문에 나라는 소견은 일정한 인연이 없으며 다만 뒤바뀌기 때문에 낼 뿐이다.
【문】만일 뒤바뀜 때문에 낸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자기의 몸에 대해서만이 견해를 내는가?
【답】이 뒤바뀜은 미치고 그릇된 것이라 그 실제의 일을 구하지 않아야 한다. 또 비롯함이 없는 때로부터
나고 죽고 하면서 상속(相續)하는 5중 가운데에 스스로 탐착을 내는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我]라는 마음에 머무르는 중생은 더러운 것도 받고 깨끗한 것도 받느니라”고 하셨다.
또 여실하게 보는 이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지만, 만일 나[我]는 결정코 진실한 것이 있다고 보는 이에게는 더럽고 깨끗함이 있어야 한다. 여실하게 보는 이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는 이는 모든 법의 실상을 보며, 또 모든 법의 실상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므로 이 때문에 더러운 것이 없고 모든 법의 실상은 취할 만한 모양이 없으므로 이 때문에 깨끗한 것도 없다.
또 8성도(聖道) 가운데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로 깨끗한 것이 없다[無淨] 하며, 모든 번뇌를 없애고 뒤바뀜에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바로 더러운 것이 없다[無垢] 한다.

86. 평등품(平等品)을 풀이함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진실이라고 보는 이도 더럽지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으며[不淨]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이도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있는 바 없는 것[無所有] 가운데에 더러운 것이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면, 있는 것[所有] 가운데에도 더러운 것이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있는 바 없는 것이나 있는 것 가운데에는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여실하게 말하는 이[如實語者]도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여실하게 말하지 않는 이[不實語者]도 또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은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을 나는 곧 ‘깨끗하다’고 말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것이 깨끗한 것이냐 하면, 그것은 모든 법의 평등함이니, 이른바 여(如)와 불이(不異)와 불광(不誑)과 법상(法相)과 법주(法住)와 법위(法位)와 실제(實際)이어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법의 성품이 항상 머무르는 것을 곧 깨끗하다 하느니라. 하지만, 세속의 이치로써 말하는 것이요 맨 으뜸가는 이치는 아니니, 맨 으뜸가는 이치는 온갖 언어와 논의와 음성을 초월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공하여 말로 설명할 수도 없으며 마치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다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이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법이어서 근본이 없고 정해진 실체가 없는 것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킬 수 있는지요?
그리고 원하기를 ‘나는 마땅히 단(檀)바라밀을 완전히 갖추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신통(神通)바라밀을 완전히 갖추고 지혜[智]바라밀을 완전히 갖추며, 4선(禪)과 4무량심(無量心)과 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念處)를 완전히 갖추고 나아가 8성도분(聖道分)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3해탈문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부처님의 10력을 완전히 갖추며, 나아가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마땅히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모든 다린니(陀鄰尼, dhāraṇī)의 문과 모든 삼매의 문을 완전히 갖추어야 한다. 나는 장차 큰 광명을 놓아 시방을 두루 비추고 모든 중생들의 마음을 알아 그들이 응해 오는 바에 따라 법을 설해야 한다’고 하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가 말한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은 마치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아지랑이와 같고 그림자와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존이시여, 온갖 법이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와 같다면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이 꿈 내지는 변화와 같은 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법으로써는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출 수 없는 일입니다.”
부처님께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법으로는 단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출 수 없으며, 이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법을 행한다 하여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는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온갖 법은 모두 기억과 생각으로 짓는 법이니라. 이 기억과 생각으로 짓는 법으로는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 온갖 법으로써 도를 돕는 법[助道法]은 그 과위를 유익하게 할 수도 없나니, 이른바 이 모든 법은 나는 것[生]도 없고 벗어나는 것[出]도 없으며 모양[相]도 없느니라.
보살이 처음 뜻을 일으켜서부터 짓는 착한 업은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이니라. 왜냐 하면, 모든 법은 모두가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와 같음을 알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등의 법으로는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를 완전히 갖추지 못하며,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못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지은 바 착한 업으로써 단바라밀 내지 일체종지는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것인 줄 알며, 또한 온갖 중생들도 꿈과 같은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것을 알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가운데서 행하고 있는 것을 아나니, 이것이 곧 보살마하살의 취하지 않는[不取] 반야바라밀이니라. 이것은 법이 있는데도 이것을 사용하거나 취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종지를 얻나니, 이 모든 법은 꿈과 같아서 취할 것이 없고 나아가 모든 법은 변화한 것과 같아서 취할 것이 없음을 아느니라.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을 곧 취할 수 없는 모양이기 때문이요 선(禪)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은 곧 취할 수 없는 모양이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이 취할 수 없는 모양임을 알고 나서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취할 수 없는 모양이요 근본과 정해진 진실이 없어서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으니, 취할 수 없는 모양의 법으로 취할 수 없는 모양의 법을 얻을 수는 없기 때문이니라. 다만 중생들이
이와 같은 모든 법의 모양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할 뿐이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느니라.
이 보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보시하는 것은 모두 온갖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요, 나아가 닦고 익히는 모든 지혜도 모두가 온갖 중생들을 위해서이니,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니라. 보살마하살은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니, 다만 온갖 중생들을 위해서일 뿐이니라.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보아도 중생이 없으므로 다만 중생이라는 모양에만 머무르니라. 나아가 아는 이[知者]도 없고 보는 이[見者]도 없으므로 알고 보는 모양 안에만 머무르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뒤바뀜을 멀리 여의게 하며, 멀리 여읜 뒤에는 감로의 성품[甘露性] 가운데에 있게 하느니라. 이 가운데에 머무른다면, 허망한 모양 즉 중생의 모양 내지는 아는 이ㆍ보는 이의 모양이 없으니, 이때에 보살은 동요하는 마음[動心]과 기억하는 마음[念心]과 희론하는 마음[戱論心]을 모두 버리고 언제나 동요하지 않는 마음과 기억하지 않는 마음과 희론하지 않는 마음을 행하니느라.
수보리야, 이런 방편의 힘 때문에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자기 자신이 집착하는 것이 없이 온갖 중생들을 교화하여 집착함이 없게 하나니, 이것은 세속의 이치 때문이요 으뜸가는 이치 때문인 것은 아니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세존1)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실 적에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얻되 세속의 이치 때문에 얻으시는 것인지요, 아니면 으뜸가는 이치 때문에 얻으시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세속의 이치 때문에 ‘부처님은 이 법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이 법 가운데에는 ‘이 사람이 이 법을 얻는다’고 하는 그 어떠한 법도 없나니, 왜냐 하면, 이 사람이 이 법을 얻는다면 이것은 곧 크게 얻을 것이 있다는 것[有所得]이니, 이 두 가지 법으로써는 도(道)도 없고 과위[果]도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두 가지 법을 행하여 도도 없고
과위도 없다면 둘이 아닌 법[不二法]을 행하여 도도 있고 과위도 있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 법을 행하여 도가 없고 과위도 없다면 둘이 아닌 법을 행하여도 도가 없고 과위도 없느니라. 만일 두 가지 법도 없고 둘이 아닌 법도 없으면, 그대로가 도요 그대로가 과위이니라.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법으로써 도를 얻고 과위를 얻는 것이요 이런 법으로써 도를 얻지 못하고 과위도 얻지 못한다 하면, 그것은 곧 희론이 되기 때문이니라. 모든 평등한 법 가운데에는 희론도 없고 희론의 모양도 없나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의 평등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있는 바 없는 성품이거늘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이 평등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있는 법[有法]이 없다면 없는 법[無法]도 없어서 또한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을 말하지도 못하느니라. 평등을 제외하고는 다시 그 밖의 다른 법도 없고 온갖 법을 여의는 것이 평등한 모양이니, 평등함이란 범부거나 성인이거나 간에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또한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모든 법의 평등은 온갖 성인, 이른바 모든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모든 보살마하살과 모든 부처님까지도 모두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모든 법 가운데서 행하는 힘이 자재하거늘 어떻게 하여 부처님도 행하실 수 없고 이르실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법의 평등이 부처님과 다름이 있다면 마땅히 그처럼 물어야 하겠지만, 수보리야, 이제는 모든 범부의 사람들도 평등하며 모든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과 모든 보살마하살과 부처님과 성인의 법도 모두가 평등하느니라. 이것은 하나이고 평등하여 둘이 없나니, 이른바 ‘이것은 범부의 사람이다, 이것은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이다’ 하는 것은
이러한 온갖 법이 평등한 가운데서는 모두가 얻을 수 없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는 모두가 얻을 수 없다면 ‘이것은 범부의 사람이다, 나아가 이 분은 불ㆍ세존이시다’라고 하듯이 범부와 수다원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분별이 없을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법이 평등한 가운데서는 ‘이 사람은 범부의 사람이다, 이 사람은 수다원이다, 나아가 이 분은 불ㆍ세존이다’라고 분별하는 일이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범부의 사람과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분별이 없다면 어찌하여 분별하면서 3보(寶)가 있는 것인지요? 현재 세간에는 불보(佛寶)와 법보(法寶)와 승보(僧寶)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불보ㆍ법보ㆍ승보가 모든 법의 평등한 것과 차이가 있더냐?”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제가 부처님으로부터 들은 이치와 같다면 불보ㆍ법보ㆍ승보는 모든 법의 평등한 것과 차이가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불보와 법보와 승보가 곧 평등한 것입니다. 이 법은 모두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하나의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런 힘이 있으시어 모양이 없는 모든 법의 처소에서 ‘이 사람은 범부이다, 이 사람은 수다원이다, 이 사람은 사다함이다, 이 사람은 아나함이다, 이 사람은 아라한이다, 이 사람은 벽지불이다, 이 사람은 보살마하살이다, 이분은 부처님이시다’라고 분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서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셨다면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4천왕천(天王天)이며 나아가 이것은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다, 이것은 범천(梵天)이며 나아가 비유상비무상처천(非有想非無想處天)이다, 이것은 4념처이며 나아가 8성도분이다, 이것은 내공(內空)이며 나아가 이것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10력이며 나아가
이것은 18불공법이다’라고 알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알 수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때문에 수보리야, 부처님은 큰 은혜의 힘이 있기에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모든 법을 분별하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마치 부처님께서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범부의 사람도 또한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며, 수다원 내지는 벽지불도 또한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평등한 모양이라면 곧 그것이 범부의 사람의 모양이요 곧 그것이 수다원의 모양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이어서 곧 그것이 평등한 모양입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모든 법은 저마다의 모양이 있어서 이른바 물질의 모양이 다르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이 다르며, 눈의 모양이 다르고 귀ㆍ코ㆍ혀ㆍ몸ㆍ뜻의 모양이 다르며, 땅[地]의 모양이 다르고 물[水]ㆍ불[火]ㆍ바람[風]ㆍ허공[空]ㆍ식(識)의 모양이 다르며, 탐욕의 모양이 다르고 성내는 것과 어리석은 모양이 다르며, 삿된 견해의 모양이 다르고 선(禪)의 모양이 다르며, 무량심(無量心)의 모양이 다르고 무색정(無色定)의 모양이 다르며, 4념처의 모양이 다르고 나아가 8성도분의 모양이 다르며, 단바라밀의 모양이 다르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의 모양이 다르며, 3해탈문의 모양이 다르고 18공(空)의 모양이 다르며, 부처님의 10력의 모양이 다르고 4무소외의 모양이 다르며, 4무애지의 모양이 다르고 18불공법의 모양이 다르며, 유위의 법의 성품이 다르고 무위의 법의 성품이 다르며, 이 범부의 사람의 모양이 다르고 나아가 부처님의 모양도 다름이 있어서 모든 법은 저마다 모양이 다르거늘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의 다른 모양 가운데서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지요?
만일 분별을 하지 않는다면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도 없고, 만일 반야바라밀을 행하지 못하면 한 지위[地]로부터 다른 한 지위에 이를 수도 없으며,
만일 한 지위로부터 다른 한 지위에 이르지 못하면 보살의 지위에 들어갈 수도 없고, 보살의 지위에 들지 못하면 그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할 수 없으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할 수 없기 때문에 신통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도 없습니다.
신통바라밀을 두루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단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도 없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두루 갖추어 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고 모든 부처님 처소에서 선근을 심으며 이 선근으로써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지 못합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묻기를 ‘이 모든 법의 모양에는 역시 범부의 사람이 있고 또한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ㆍ세존이 있으며, 이 모든 법에는 저마다의 모양으로서 이른바 물질의 모양이 다르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법까지도 그 모양이 모두 다르거늘 어찌하여 보살마하살은 하나의 모양으로 관찰하며 분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고 했는데,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물질의 모양은 공한 것이며, 나아가 모든 부처님의 모양도 공한 것이더냐?”
“세존이시여, 실로 공합니다.”
“수보리야, 공한 가운데서 각각의 모양의 법, 이른바 물질의 모양에서 모든 부처님의 모양까지를 얻을 수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얻을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평등한 가운데서는 범부의 사람도 아니고 범부의 사람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부처님도 아니고 또한 부처님을 여의는 것도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평등은 유위의 법인지요? 아니면, 무위의 법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유위의 법도 아니고 무위의 법도 아니니라. 왜냐 하면, 유위의 법을 여의고는 무위의 법은 얻을 수 없으며, 무위의 법을 여의고서는 유의의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 이 두 가지의 법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할 수도 없는 하나의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이니라.
부처님은 또한 세속의 이치로써 말씀하신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로써 말씀하신 것은 아니니라. 왜냐 하면,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에는 몸의 행[身行]도 없고 입의 행[口行]도 없고 뜻의 행[意行]도 없으며, 또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여의지 않고 으뜸가는 이치를 얻기 때문이니라. 이 모든 유위의 법과 무위의 법의 평등한 모양이 곧 으뜸가는 이치이니,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보살로서의 일을 행하며 중생들을 이롭게 하느니라”
【論】해석하겠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 진실하게 보는 이와 허망하게 보는 이에 차이가 없다고 대답하신 것은 더럽고[垢]ㆍ깨끗한[淨] 것이 없다고 보신 까닭이다’고 하였다. 이런 생각을 한 뒤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진실하다고 보는 이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이도 또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온갖 법의 성품은 있는 바가 없기 때문입니다. 있는 바 없는 가운데서는 더러운 것이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있는 것 가운데도 또한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있는 바 없는 데서는 아주 없다[斷滅]고 보기 때문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있지 않아야 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는 항상 있다[常]고 보기 때문에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이 있지 않아야 하나니, 있는 것[所有]에서 만일 결정코 그것이 있다 한다면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은 것이요,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항상 있는 것이며, 항상 있기 때문에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진실하다고 보는 이와 진실하지 않다고 보는 이의 그 뜻은 어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에는 비록 다른 모양이 없다고 하더라도 모든 법은 평등하다고 말할 수 있으므로 이것을 깨끗하다[淨]고 하느니라. 만일 분별하면서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의 모양을 말하면 그 일은 옳지 못하니, 온갖 법은 평등하기 때문에 나는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실상인 여(如)ㆍ법성(法性)ㆍ법주(法住)ㆍ법위(法位)ㆍ실제(實際)는 곧 평등하다. 보살은 이 평등한 가운데에 들어가서 마음에 미워하거나 사랑하는 것도 없다”고 하셨다.
이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있으며
조작하는 법은 모두가 거짓이니, 이 때문에 “조작이 없는 법은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항상 머물러 있다”고 하는데, 이를 들은 이들이 마음에 곧 모양을 취하면서 이 모든 법은 평등하다고 집착한다. 마치 사람이 손가락으로 달을 가리킬 적에 알지 못하는 이는 다만 그 손가락만을 보면서 달은 보지 않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도 이와 같아서 모두가 세속의 이치이니, 세속의 이치는 진실이 아니요 다만 일을 성취하기 위하여 짐짓 말했을 뿐이니라”고 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금을 풀과 바꾸는 것과 같으니, 그 일을 모르는 이는 말하기를 “무엇 때문에 귀중한 것을 천한 것과 바꾸느냐”고 하자, 그는 대답하기를 “나는 필요한 일에 쓰려고 그러한다”고 하는 것과 같다.
이 평등한 이치는 말로 설명할 수 없어서 온갖 이름이나 언어나 음성 등이 모두 다 끊어진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의 평등함은 바로 희론이 없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이로되 다만 거칠거나 세밀한 생각[覺觀]으로 산란한 마음 가운데에서 언어가 있기 때문에 말하는 바가 있을 뿐이다.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을 듣고 그 뜻을 다 이해하였지만, 새로 뜻을 낸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묻는 것이니, 곧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은 공하여서 말로 설명할 수 없고 마치 꿈과 같으며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다면, 어떻게 보살은 근본이 없는 법 가운데서 마음을 내며 서원하기를 ‘나는 마땅히 단바라밀을 완전히 갖추어야 하고, 나아가 중생들을 위하여 그들에 맞추어 법을 설해야 한다’고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반문(反問)으로써 대답하시기를 “수보리야, 보시 등에서 다라니문(陀羅尼門)의 설법 등에 이르기까지 모든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 같은 것이 아니더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실로 그렇습니다. 이 모든 법은 비록 이익은 있다고 하더라도 꿈과 같은 법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고 하였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꿈 등의 법은 모두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하지만, 보살은 진실한 법을 구하기 위하여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님의 도를 얻거늘 어떻게 하여 진실하지 못한 법을 행하는지요? 진실하지 못한 법으로는 단바라밀 등을 행할 수 없습니다”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의 말을 인가하면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보시 등의 법은 모두 생각[思惟]과 기억[憶想]과 분별(分別)에 의하여 짓고 일으키며 내는 법이니,
이와 같은 법에 머무르게 되면 일체종지를 이룰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바로 그때에 대중 속에서 듣는 이들이 마음에 게으른 생각을 내었으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이 온갖 법은 모두가 도를 돕는 인연[助道因緣]이니라”고 하셨으니, 만일 이 법에 대하여 삿되게 행하거나 그릇됨이 있으면 이것은 진실하지 않다[不實]고 하며, 만일 곧은 행으로 잘못이 없으면 곧 그것이 도를 돕는 법이다. 이 법은 도를 돕기 위한 것이요 과위[果]를 위한 것이 아니다.
이 보시 등은 곧 유위의 법[有爲法]이요 도(道)도 또한 유위이다. 동일한 모양이기 때문에 도와 과위가 서로 이익을 주나니, 이른바 모든 법은 실로 벗어나는[出] 것도 나는[生] 것도 없으며, 하나의 모양이요 모양이 없는 것이어서 고요히 사라진 열반이다. 이 때문에 열반에 있어서는 이익이 있을 수 없나니, 마치 때맞추어 오는 비는 풀과 나무를 이롭게 하면서도 허공은 이롭게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도를 돕는 법과 도과를 알면서 처음 발심할 때부터 짓는 착한 법으로써의 보시 등은 모두 그것이 필경 공한 것이어서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은 줄을 안다.
【문】만일 보살이 모든 법의 실상을 알면, 보시 등을 행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답】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보시 등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중생을 성취시킬 수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보살은 몸과 음성과 언어를 장엄히 하고 부처님의 신통의 힘을 얻어 갖가지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인도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중생을 성취시키기 위하여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또한 단바라밀에 대하여 있다거나 없다는 모양을 취하지 않고, 또한 꿈과 같은 등의 모든 법에 대하여 희론을 펴지도 않고 곧장 행하며, 이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는 것이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모양을 취할 수 없고 나아가 18불공법도 또한 모양을 취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것이 취할 수 없는 모양임을 안 뒤에는 발심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고는 생각하기를 ‘온갖 것은 근본이 없고 모양을 취할 수 없으며
마치 꿈과 같고 나아가 변화한 것과 같다. 취할 수 없는 법으로써는 취할 수 없는 모양의 법을 얻을 수 없다. 다만 중생들이 이런 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니, 나는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할 뿐이다’라고 한다. 이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온갖 보시를 하면서도 온갖 중생들만을 위하나니, 이른바 보시 등의 모든 착한 법은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닦는 것이요 자신의 몸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그 밖의 다른 일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온갖 중생들을 위해서이다”라고 하셨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멀리 여의고 다만 반야바라밀만을 행한다면, 모든 법의 실상만을 구하면서 혹은 삿된 소견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아직 일체지(一切智)를 얻지 못했으며, 구하고 있는 일체지의 일에서도 마음이 아직 조복되어 유연해지지 못했기 때문에 모든 치우침에 떨어지고 마니, 모든 법의 실상은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중생을 가엾이 여기는 까닭에 탐착하는 마음이 점점 얇아지며, 필경 공에 대해서도 ‘만일 공하다면 이런 허물이 있다’거나, ‘만일 공하지 않다면 저런 허물이 있다’는 등으로 희론하지 않는다”고 하셨다.
【문】다른 곳에서는 “보살은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도 이롭게 하다”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중생만을 이롭게 한다”고만 말씀하고,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한다”고는 말씀하지 않는가?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는 것에 무슨 허물이라도 있는 것인가?
【답】보살이 착한 도[善道]를 행하는 것은 온갖 중생들을 위해서이니, 이것은 곧 진실한 이치이다. 그 밖의 다른 곳에서 “자기 자신도 이롭게 하고 또한 중생들도 이롭게 한다”고 말씀하는 것은 곧 범부의 사람을 위해서 하는 말씀이며 그러한 뒤에 보살의 도를 잘 행한다는 것이다.
도에 들어가는 사람에게는 하ㆍ중ㆍ상이 있다. 하의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제도하기 위하여 착한 법을 행하는 이요, 중의 사람은 자기 자신도 위하면서 다른 이들을 위하는 이이며, 상의 사람은 다만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만 착한 법을 행하는 이이다.
【문】그런 일은 옳지 못하다.
하의 사람은 다만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이요, 중의 사람은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며, 상의 사람은 자기도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도 이롭게 하는 이다. 만일 다른 사람들만을 이롭게 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 없다면 어떻게 상의 사람이라 하겠는가?
【답】그렇지 않다. 세간의 법이 그러하다. 자기 자신에게만 공양하는 이도 그 복을 얻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몸을 해치는 이도 죄를 얻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하는 이를 하등의 사람이라 한다. 온갖 세간의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을 이롭게 할 뿐 다른 이들은 위하지 못한다. 만일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도를 행한다면 이것은 곧 단멸(斷滅)이니, 자신만을 애착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자기 자신의 쾌락을 버리고 다만 온갖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법을 행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상등의 사람이라 하나니, 온갖 중생들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중생들만을 위하여 착한 법을 행하면 그 중생들이 아직 성취하지 못했다 해도 자기의 이익은 곧 두루 갖춘 것이 된다. 만일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 중생들을 위한 것이면 그것은 잡다한 행[雜行]이다.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이에게는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만 부처님만을 좋아하고 생각하여 자기 몸이 부처님이 되기만을 구하는 이요, 둘째는 자기의 몸도 위하면서 또한 중생들을 위하는 이며, 셋째는 다만 중생들만을 위하는 이이다.
이런 사람은 청정하게 도를 행하면서 나[我]라는 뒤바뀜을 깨뜨리기 때문이니,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도 없고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도 없으며, 이 가운데 편히 머무르면서 중생을 구출하여 감로의 성품 안에 놓아둔다.
감로의 성품[甘露性]이라 함은, 이른바 온갖 도를 돕는 법[助道法]이다. 왜냐 하면, 이 법을 행하여 열반에 이르게 되므로 열반을 감로라 하며, 이 감로의 성품에 머무르면 나[我] 등의 망상이 다시는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고 또한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한다.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을 으뜸으로 이롭게 하는 것이라 한다.
【문】위에서는 다만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도를 행할 뿐이다”고 말씀하셨거늘,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자기 자신도 집착함이 없고 중생으로 하여금 집착함이 없게 한다” 하시는가?

【답】부득이 하기 때문이다. 만일 자신에게 지혜가 없으면 어떻게 다른 이를 이롭게 하겠는가. 이 때문에 먼저 자기 자신이 집착함이 없고서 그런 뒤에 남들에게 가르치는 것이다.
만일 이런 공덕을 다른 이에게 줄 수 있는 것이 재물과 같다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은 있는 바의 모든 공덕을 모두 다 주어야 하고, 나아가 조달(調達)2)같은 원적에게도 주어야 되며, 그러한 뒤에 다시 스스로가 공덕을 닦고 쌓겠지만, 이 일만은 그렇지가 못하여 나 자신은 못하면서 다른 이만 하도록 할 수는 없다.
이것도 세속의 설명일 뿐 으뜸가는 이치는 아니다. 왜냐 하면,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는 중생도 없고, 하나도 없고 다른 것도 없으며, 똑같이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서도 “집착할 곳이 없다”고 말한다.
또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그 모양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 곧 으뜸가는 이치이지만, 이 가운데서는 말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에 이것은 세속의 이치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도량(道場)에서 얻게 되는 법은 세속의 이치로써 얻습니까, 으뜸가는 이치로써 얻습니까”라고 하였는데, 수보리의 생각으로는 ‘만일 세속의 이치로써 얻는다 하면 곧 그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못한 것이요, 만일 으뜸가는 이치로써 얻는다면 으뜸가는 이치에는 얻는 것도 없고 얻는 이도 없으며 말로 설명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다’고 했던 것이었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세속의 언어로써 ‘부처님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고 말한 것이지 이 가운데서는 얻는 이도 없고 얻을 법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일 이런 사람[人]과 이런 법(法)을 얻는다면 그것은 곧 두 가지 법이기 때문이다. 두 가지의 법에는 도(道)도 없고 과위[果]도 없으니, 두 가지 법이란 곧 보살이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다. 이와 같은 두 가지 법은 모두가 세속의 이치 때문에 있는 것이니, 만일 두 가지라면 부처님의 법이 어떻게 허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일 어떤 사람이 으뜸가는 이치를 얻지 못하여 다만 두 가지 법으로써 모든 법을 분별할 뿐이면 이것이 곧 허망한 것이다.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은 으뜸가는 이치를 얻었기 때문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으뜸가는 이치를 얻게 하면서 비록 모든 법을 분별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허망한 것이 아니다.
수보리가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두 가지 법으로써 도가 없고 과위도 없다고 하면 이제 둘이 아닌 법[不二法]으로써 도가 있고 과위가 있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두 가지의 법에서도 도가 없고 과위도 없으며, 둘이 아닌 법에서도 도가 없고 과위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문】그 밖의 다른 곳에서는 “두 가지의 법은 곧 범부의 법이요, 둘이 아닌 법은 성현의 법이다”라고 말씀하셨으니,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의 불이입법문(不二入法門) 가운데서 말씀한 것과 같다.
【답】불이입(不二入)은 곧 진실한 성인의 법이니, 혹 새로 뜻을 낸 보살이 아직 모든 법의 실상을 얻지 못한 채 이 불이법을 들으면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혹은 불이법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헐뜯기도 한다.
또 부처님은 이 두 가지의 치우친 견해를 차단하면서 중도(中道)를 말씀하기도 하나니, 이른바 “둘이 아니고 둘이 아닌 것도 아니다”고 하셨다.
두 가지 법[二法]이란 각각의 다른 모양[別相]을 말하며, 둘이 아닌 것[不二]이란 바로 하나의 공한 모양[一空相]을 말한다. 이 하나의 공한 모양으로써 저마다 다른 모양을 깨뜨리는 것이며, 깨뜨린 뒤에 그 일이 끝나면 다시 둘이 아닌 모양도 버리나니, 이것이 곧 도요 곧 과위이다. 왜냐 하면 모든 성현은 비록 둘이 없는 법을 찬탄한다 하더라도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법으로써 도를 얻고 과위를 얻는다’거나, ‘이 법으로써는 도가 없고 과위도 없다’고 하면 바로 그것이 희론이니, 희론이 없는 것이 곧 평등한 법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모든 법이 있는 바 없는 성품[無所有性]이라면 어떤 것이 평등한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있는 성품[有性]이나 없는 성품[無性]을 여의면, 이것을 임시로 이름을 붙여 평등이라 한다”라고 하셨다.
만일 보살이 온갖 법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온갖 법의 성품을 말하지도 않으며, 온갖 법의 모양 등도 말하지 않으면서 드러내 보이면서도 또한 없는 법과 없는 법의 성품과 없는 법의 모양 등도 말하지 않으며, 드러내 보이면서도 이 두 가지 치우침을 여의고 다시는 평등한 모양이 있다고도 말하지 않으며, 온갖 경우에서 평등한 모양을 취하지 않고 또한 이 평등이 없다고도 말하지 않으면서
모든 착한 법을 행하는 데에 방해되지 않으면, 이것을 이름하여 ‘모든 법의 평등[諸法平等]’이라 한다.
다시 ‘모든 법의 평등’이란 이른바 온갖 법에서 초월하는 것이다.
【문】앞에서는 곳곳에서 ‘모든 법은 곧 평등한 모양이고, 평등은 곧 모든 법의 실상이어서 이름은 달라도 뜻은 동일하니, 물질의 여(如)는 물질이 아니로되 물질을 여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셨거늘, 이제는 무엇 때문에 평등이 온갖 법을 벗어난다고 말하는가?
【답】온갖 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물질 등 모든 법의 체성[體]이요, 둘째는 물질 등 법 가운데서의 행이니, 범부는 삿된 행[邪行]이요 성현은 바른 행[正行]이다. 이 가운데서 말하는 ‘평등’은 범부의 행을 초월한다는 것이지, 물질 등을 초월한다고 한 것은 아니다.
다시 평등은 행(行)할 수도 없고 이를[到] 수도 없으니, 여기에서 수보리는 놀라면서 여쭈기를 “부처님도 또한 행할 수 없고 이를 수 없다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이 법은 매우 깊고 미묘하여 행하기 어렵다 하더라도, 부처님만은 마땅히 이런 일을 하실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긴 것이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수다원에서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부처님의 뜻은 ‘3세(世)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도 행할 수가 없고 이를 수도 없거늘 하물며 한 부처님이겠느냐. 평등한 성품이 저절로 그러하다’고 하신 것이다.
그 때문에 수보리가 또 여쭈기를 “부처님은 온갖 법에서 행하는 힘이 자재하시며, 부처님의 걸림 없는[無礙] 지혜는 모든 곳마다 이르지 않음이 없으시거늘 어찌하여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다고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부처님과 평등이 다르다 한다면 마땅히 ‘무엇 때문에 행할 수도 없고 이를 수도 없다고 하는가’라고 따져야 하겠지만, 지금 범부의 평등과 수다원의 평등과 부처님의 평등은 모두가 하나의 평등이어서 둘도 없고 분별도 없느니라”고 하셨다. 이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제 성품[自性]은 제 성품에서 행할 수 없고 제 성품에 이를 수도 없으며, 제 성품은 마땅히 다른 성품[他性]에서 행해져야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부처님과 평등이 다르다 한다면 부처님은 마땅히 평등을 행해야 되지만, 다만 부처님이 곧 평등일 뿐이기 때문에
행하지도 않고 이르지도 않나니, 지혜가 적어서 그런 것은 아니니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평등이어서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다름이 있을 수 없다면 지금 범부와 성인은 차별이 있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의 질문을 인가하시면서 “평등한 가운데에는 차별이 없지만 세속의 이치이기 때문에 범부의 법에는 차별이 있다”고 하셨다.
또 여쭈기를 “만일 범부로부터 부처님에 이르기까지 차별이 없다면 어떻게 하여 3보(寶)가 세간에 크게 나타나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평등이 곧 법보(法寶)요 법보가 불보(佛寶)이며 승보(僧寶)이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아직 법을 얻지 못할 때는 부처님이라 하지 않지만, 평등한 법을 얻으면 그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기 때문이니, 이 평등한 법을 얻기 때문에 분별하면서 수다원 등의 차별이 있는 것이다.
수보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고서 “이 법은 모두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 않으며,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으며 대할 수도 없는 하나의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습니다. 그러나 오직 부처님만은 이런 힘이 있으시므로 공하고ㆍ모양이 없는 가운데서 ‘이는 범부이고, 이는 성인이다’라고 분별하십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이런 법을 분별하지 않으시면, 어떻게 하여 지옥 내지는 18불공법이 있는 줄 알겠느냐”고 하셨다.
【문】모든 부처님은 마치 해가 돋을 때와 같아서 높은 데 있는 것을 낮은 데 있게 하거나 낮은 데 있는 것을 높은 데 있게 할 수는 없으니, 다만 만물을 밝게 비추어 주면서 눈이 있는 이로 하여금 구별하고 알게 할 뿐이다. 모든 부처님도 이와 같아서 모든 법의 모양을 바꾸지 않고, 다만 일체지(一切智)로써 비추어 주면서 사람들에게 널리 연설하여 알게 할 뿐이다. 그런데 그대는 무엇 때문에 “만일 부처님이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에서 18불공법 내지는 18불공법이 있는 줄 알겠는가”라고 하는가? 마치 지금 축생들을 직접 눈으로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가 분별하여 아는 것과 같거늘 어찌하여 부처님의 말씀을 필요로 하는가?
【답】부처님은 비록 좋거나 추한 모든 일을 짓지 않으신다 하더라도 연설하시면서 사람들에게 내보이신다. 아는 것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범부들이 허망하게 아는 것이요, 둘째는 여실하게 아는 것이다. 축생 등의 모양을 아는 것은 곧 범부의 사람들이 허망하게 아는 것이니, 부처님은 그 진실한 모양을 알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이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어떻게 지옥 등이 있는 줄 알겠느냐”고 말씀하신 것이다.
또 모든 부처님의 법은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어서 희론이 없다. 이 가운데서 만일 지옥 등의 모양이 있다고 분별하면 ‘고요히 사라지고 둘이 없으며 희론이 없는 법’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부처님은 비록 고요히 사라지고 둘이 없는 모양인 줄 안다고 하더라도 고요히 사라진 모양 가운데서 모든 법을 분별하면서도 희론에 떨어지지 않는다.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여읜 이는 비록 눈으로 축생 등을 보더라도 역시 그 모양을 여실하게 알지 못한다. 마치 소의 뿔과 발과 꼬리 등의 여러 부분이 합쳐서 다시 소라는 법이 생겨 하나가 되는 것과 같다. 모든 부분은 여럿이거니와 소라는 법은 하나이어서 하나는 여럿이 되지 않고 여럿은 하나가 되지 않는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런 설명은 잘못된 것이다. 이 여러 부분을 제외하고 다시 소라는 법이 있어야 하고 힘의 작용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이 합쳐서 생기면서도 소라는 법은 여러 부분과 다르지도 않다. 왜냐 하면 이 여러 부분이 합친 것을 보기 때문에 소를 본다고 하는 것이요, 다시는 그 밖의 다른 물건을 보면서 소라고는 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른 것[異]은 하나인 것[一]을 깨뜨리고, 하나인 것은 다른 것을 깨뜨리며,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으로는 하나이면서 다른 것을 깨뜨린다. 만일 하나인 것과 다른 것이 없다면 어찌하여 하나도 아니고 다르지도 않은 것이 있겠는가. 만일 이 모든 법이 평등한 가운데에 들어가면 그때에야 비로소 여실하게 소의 모양을 얻게 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말씀하기를 “만일 부처님이 모든 법의 모양을 분별하지 않고 두 진리[二諦]를 말하지 않으면 어떻게 하여 축생 등을 잘 말하겠는가”라고 하나니, 이른바 평등에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모든 법을 분별하는 것이다. ‘동요하지 않는다’고 함은, 모든 법을 분별할 때에 하나다ㆍ다르다는 모양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마치 부처님께서 모든 법 등에서 동요하지 않으신 것처럼 벽지불 내지는 범부도 모든 법 등에서 역시 동요하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은 평등한 모양이요 나아가 범부도 또한 평등한 모양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은 어찌하여 모든 법을 분별하시면서 이 물질이 다르고 물질의 성품도 다르며, 느낌의 성품이 다르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성품이 다르다 말씀하시는지요? 만일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한 지위[一地]로부터 다른 한 지위에 이르며, 나아가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할 수 없습니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물질 등의 모양을 미루어 생각하며 찾아본다면 그것은 곧 공한 것이더냐”고 하시자, “세존이시여, 실로 공합니다”라고 하였다.
“공한 가운데에는 다른 모양의 법이 있느냐”고 하시자,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왜냐 하면, 이 필경 공은 모양이 없는 지혜로써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 가운데서 어떻게 하여 다른 모양이 있겠는가.
곧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만일 공한 가운데에 다른 모양이 없다면 공한 것이 바로 진실된 것이다. 그러니 그대는 어찌하여 공한 가운데에서 모든 법을 분별하여 이런 질문을 하는 것이더냐? 필경 공한 가운데서는 공한 것도 또한 얻을 수 없고, 저마다의 모양도 또한 얻을 수 없거늘, 그대는 어찌하여 그 공한 것과 저마다의 모양을 따지고 있느냐’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법이 평등한 가운데는 분별이 없어서 범부의 사람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니, 다만 범부는 진실한 모양이 아니면서도 진실한 모양을 여의지도 않아서 범부의 진실한 모양이 곧 성인의 모양이다. 이 때문에 “다만 범부도 아니고 범부를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부처님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와 같다”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는 이 평등한 모양은 크게 이익이 있으므로 평등에 대한 일정한 모양을 알고자 하여 이 때문에 여쭈기를 “이것은 유위(有爲)입니까, 무위(無爲)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유위도 아니고 무위도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일 유위라면 모두가 그것은 거짓이어서 조작된 법이요, 만일 무위라면 무위의 법은 나고[生]ㆍ머무르고[住]ㆍ없어지는[滅] 것이 없으므로 없는 법이기 때문이다. 없는 법이기에 무위라는 이름을 붙일 수조차 없지만, 유위로 인하여 무위가 있게 되는 것이다. 이는 경에서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는 것은
마치 긴 것을 여의고는 짧은 것도 없는 것과 같나니, 이것은 곧 상대(相待)되는 이치이다”라고 말씀한 것과 같다.
【문】유위의 법은 무상한 것이요 무위의 법은 항상 있는 것이거늘 어떻게 하여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시는가?
【답】무위의 법은 분별이 없기 때문에 모양이 없지만, 만일 항상 있는 모양이라 한다면 ‘모양이 없다’고 말할 수가 없다. 유위의 법을 깨뜨리기 때문에 무위라 하는 것이요 다시 다른 법은 없다. 마치 사람이 감옥에 갇혀 있을 적에 담장을 뚫고 나오게 되는 것과 같아서, 그 벽을 파괴하면 그것이 곧 허공이요 다시는 다른 허공이 없다.
허공은 또한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지 않는다. 무위의 법도 이와 같나니, 유위의 법 가운데에 먼저 무위의 성품이 있어서 유위가 파괴되면 곧 그것이 무위이다. 이 때문에 말하기를 “유위를 여의고는 무위를 얻을 수 없다”고 한다. 이 유위와 무위의 성품은 모두가 합하지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하나의 모양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는 것이다.
부처님은 세속의 이치 때문에 이런 일을 말씀하는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에서가 아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는 몸과 입과 뜻의 행(行)이 없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유위ㆍ무위법의 평등함이 바로 으뜸가는 이치이다. 이 유위와 무위의 법이 평등하다고 관찰하면서도 또한 그 하나의 모양[一相]에 집착하지도 않는 것이다. 이 보살은 이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며, 방편의 힘 때문에 갖가지 인연으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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