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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08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96권

by Kay/케이 2024. 4.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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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96

 

 

대지도론 제96권

87. 열반여화품(涅槃如化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평등하여 작위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며,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보시(佈施)와 애어(愛語)와 이익(利益)과 동사(同事)로써 보살의 일을 행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바와 같아서 이 모든 법은 평등하여 짓는 일이 없느니라. 만일 이 중생이 스스로 모든 법이 평등한 줄 알면 부처님은 신력으로써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도 중생들을 아집에서 구출하거나, 공으로써 5도(道)의 생사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의 모양에서 제도하거나, 물질의 모양 내지는 분별의 모양과 눈의 모양 내지는 뜻의 모양과 땅의 요소[地種]의 모양 내지는 식의 요소[識種]의 모양에서 제도하거나, 유위의 성품과 모양[性相]을 멀리 여의면서 무위의 성품과 모양을 얻게 할 필요가 없었으리니, 무위의 성품의 모양이 곧 공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공으로써 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공한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온갖 법의 모양을 멀리 여의나니, 이 공으로써 하기 때문에 온갖 법이 공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변화로 된 사람이 변화한 사람을 만들 적에 이 변화는 행여 진실한 일이 있고 공하지 않은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 변화한 사람은 진실한 일이 있거나 공하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이 공한 것과 그리고 변화한 사람의 두 가지는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공공(空空)1)이기 때문에 공하나니, ‘이것이 공이요, 이것이 변화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두 가지 일은 똑같이 공한 것 가운데서 이른바 ‘이것이 공이다, 이것이 변화이다’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것은 왜냐하면, 수보리야, 물질이 곧
변화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곧 변화이며 나아가 일체종지도 곧 변화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간의 법이 곧 변화라면 출세간의 법[出世間法]도 역시 변화인지요? 이른바 4념처(念處)ㆍ4정근(正勤)ㆍ4여의족(如意足)ㆍ5근(根)ㆍ5력(力)ㆍ7각분(覺分)ㆍ8성도분(聖道分)ㆍ3해탈문(解脫門)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과 아울러 모든 법의 과위와 성현의 사람으로서 수다원(須陀洹)ㆍ사다함(斯陀含)ㆍ아라한(阿羅漢)ㆍ벽지불(辟支佛)과 보살마하살 그리고 모든 불ㆍ세존 등 이러한 법도 또한 변화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 이 법에서는 성문의 법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의 법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마하살의 법의 변화가 있고 모든 부처님의 법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의 법의 변화가 있고 업 인연의 법의 변화가 있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번뇌가 끊어진 것, 다시 말해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로써 모든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것은 모두가 변화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법에 나고[生] 없어지는[滅] 모양이 있으면, 모두 그것은 변화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법이 변화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법으로서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면, 그것은 곧 변화가 아니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어떤 것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아 변화가 아닌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거짓이 없는 모양의 열반이니, 이 법이 변화가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친히 말씀한 것과 같아서 모든 법의 평등은 성문이 만든 것도 아니고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만든 것도 아니고 모든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어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성품은 언제나 공하며, 그 공한 성품이 곧 열반이거늘 어찌하여 ‘열반의 한 법만이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니라’고 말씀하시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모든 법의 평등은 성문(聲聞)이 만든 것이 아니요 나아가 성품의 공한 것이 곧 열반이니라. 만일 새로 뜻을 낸 보살이 ‘이 온갖 법은 마침내 성품이 공하며 나아가 열반도 또한 모두가 변화와 같다’는 말을 들으면 마음으로 곧 놀라고 두려워하나니, 이 새로 뜻을 낸 보살을 위하여 ‘나고 없어지는 것은 변화와 같으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분별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교화하여 이 성품이 공한[性空] 것을 알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법이 본래는 있었다가 지금에 와서 없어진 것이더냐?”
【論】【문】이 일에 대해서는 부처님은 앞에서 이미 대답하셨거늘 수보리는 지금 무엇 때문에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모든 법이 평등하여서 짓는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하여 보살은 모든 법의 평등한 가운데서 동요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는가?
【답】이 일은 이해하기 어렵기 때문에 비록 앞에서 말씀했다 하더라도 다시 물은 것이다.
또 이제 경을 막 마치려 하면서 부처님은 깊은 공에 대하여 말씀하시지만, 그것은 범부나 성인이 행할 수 없는 것이요 도달할 수도 없는 곳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온갖 법의 평등한 모양은 결정코 공인 줄 알겠거늘 어떻게 하여 보살은 이 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할까”라고 한 것이니, 평등한 법은 조작이 없는 모양이요, 이롭게 하는 것은 조작이 있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시고 도리어 수보리가 물은 것으로 대답하셨다. 곧, 평등을 인정하시면서도 그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에 대하여 답하시길 “만일 중생들 스스로가 모든 법의 평등과 필경 공임을 안다면, 부처님의 은혜나 힘도 없다”고 하셨다. 가령 병든 사람이 스스로 알맞게 약을 고를 줄 안다면,
곧 약사(藥師)의 공력도 없게 되는 것이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만일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 필경 공하여서 짓는 것이 없다 한다면 보살은 무엇 때문에 이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이롭게 하는지요? 만일 보살이 이 평등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한다면 곧 실상을 파괴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는 것이 아니며, 다만 중생들이 필경 공인 줄 모르고 있기 때문에 보살은 가르쳐 주어 알게 할 뿐이니라”고 하셨다.
보살이 중생을 교화하는 것은 바로 대치실단(對治悉檀)2)으로, 수보리는 제일의(第一義)의 실단에서는 이익이 없다는 것으로 따졌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중생들이 뒤바뀌어서 모르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다만 그 뒤바뀜만을 깨뜨릴 뿐이니, ‘이것은 진실하다’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 평등한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나라는 모양[我相] 내지는 아는 이ㆍ보는 이의 모양[知者見者相]을 멀리 여의게 하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중생공(衆生空)이라 한다. 이 온갖 나 없는 법[無我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느니라”고 하셨다.
중생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애욕[愛]이 많은 이요, 둘째는 소견[見]이 많은 이이다. 애욕이 많은 이는 이 나 없는 법을 얻으면 곧 싫증을 내고 욕탐을 여의면서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없다면 그 밖의 물건들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라고 한다. 소견이 많은 이는 비록 나 없는 법을 안다고 하더라도 물질 등의 법에 대하여 ‘항상 있다’거나 ‘무상하다’는 등의 희론을 하게 된다. 이 때문에 다음에서 물질의 모양과 5중(衆)ㆍ12입(入)ㆍ18계(界)를 말하며 나아가 유위의 성품[性]과 모양[相]을 멀리 여의고 무위의 성품과 모양을 얻게 한다. 무위의 성품과 모양이 곧 공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법공(法空)이라 한다.
【문】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였으며 또 “어떠한 공을 쓰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한 것입니까”라고 물었는가?
【답】공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마치 불 속에는 물이 없고 물 속에는 불이 없는 것과 같은 것도 역시 공이요, 5중(衆) 속에 나[我]가 없는 것도 또한 그와 같아서 혹은 중생공이 있기도 하고 혹은 법공이 있기도 하다.
법공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법이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역시 모두가 다 공한 것은 아니니, 마치 공한 가운데에는 작은 티끌의 근본은 존재하여 있는 것과 같다”고 한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떠한 공을 쓰기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한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얻을 것이 없으면서[無所得] 필경 공하기 때문에 온갖 모양을 멀리 여의느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이 가운데서는 중생공과 법공을 말씀하고 계시며, 이 두 가지 공 때문에 온갖 법은 공하지 않음이 없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의 모양을 여읜다”고 말씀하셨는가?
【답】온갖 법은 모조리 다 파괴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삿된 기억과 생각을 여의기만 하면 온갖 법은 저절로 여의게 된다. 마치 신통 있는 사람은 물질의 모양을 파괴하기 때문에 석벽(石壁)도 장애가 되지 않는 것과 같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그대들은 5중(衆) 가운데서 바른 기억을 닦고 탐욕을 끊으면서 바른 해탈을 얻어야 하나니, 이 때문에 여읨의 모양[離相]을 말한 것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수보리는 이런 말씀을 듣고 마음에 놀라면서 ‘어떻게 하여 온갖 법은 크건 작건 간에 도무지 근본과 실체가 없다 하실까. 범부의 사람은 허망하므로 진실한 일이 없을 수도 있지만, 성인에게는 조그마한 진실이라도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수보리는 아라한이어서 부처님의 법을 몹시 귀히 여기고 있기는 하나 역시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위하여 일부러 물은 것이며,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아시면서 이 일에 대하여 분명히 알게 하려고 비유를 말하면서 되받아 수보리에게 묻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변화로 된 사람이 다시 변화를 짓는 것과 같아서 이 변화로 된 것은 근본과 실체가 있으며 공하지 않은 것이더냐”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가] “아닙니다”고 대답하자, [부처님께서는] “이 변화하는 것에는 진실한 일이나 공하지 않은 일이 없다. 공과 변화한 사람의 두 가지 일이 합하지도 않고 흩어지지도 않으며 모두가 공하기 때문에 이요, 그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다고 한다”고 말씀하셨다.
【문】어찌하여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다 하는가?
【답】열여덟 가지 일의 실상을 타파하기 위하여 18공(空)이 있으며, 중생의 마음속에서 변화하는 그 공한 법까지 타파하기 위하여 공공(空空)을 쓰는 것이다.
세간 사람들은 환화(幻化)의 법은 오랫동안 머무르지 못하고 짓는 이[能作]가 없기에 공이라 부름을 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공한 것도 공하기에 공하니, ‘이것은 공하다’거나 ‘이것은 변화이다’라고 분별하지 않아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범부는 변화는 공하여서 진실하지 않은 것인 줄 알면서도 그 밖의 다른 법은 진실하다고 여기고 있나니, 이 때문에 변화로써 비유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밖의 다른 법과 변화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성인들이 이해하는 것과 같다면 변화로써 비유를 삼을 수가 없으리니, 분별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온갖 법을 5중(衆)이라 한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물질[色]ㆍ느낌[受]ㆍ생각[想]ㆍ의욕[行]ㆍ인식[識]은 곧 변화가 아닌 것이 없느니라”고 하셨으니, 공하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범부의 법은 허망하므로 변화와 같아야 하겠지만, 출세간의 법도 또한 변화와 같은 것입니까? 이른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니, 4념처의 법 등은 인(因)과 연(緣)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변화와 같겠지만, 이 법의 결과는 이른바 열반인데도 변화와 같으며, 그리고 이 행(行)을 일으키고 있는 이로서 수다원이나 나아가 부처님까지도 역시 변화와 같은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그러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유위와 무위와 그리고 모든 성현은 모두가 변화이니, 그것은 필경 공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이 이치는 초품(初品)을 비롯해 곳곳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나니,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와 같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문】만일 온갖 법이 모두가 공하여 마치 변화와 같다면 무엇 때문에 갖가지 법의 차별이 있는가?
【답】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것이나 그 밖의 사람이 변화로 만든 것이 비록 진실하지는 않다 하더라도 갖가지 형상으로 다름이 있다. 꿈속에서 보는 갖가지 형상도 이와 같으니, 사람은 꿈속에서 좋고 나쁜 일을 보면서 기뻐하는 이도 있고 두려워하는 이도 있다. 마치 거울 속의 형상에도 비록 진실한 일이 없기는 하나 본래의 형상에 따라 곱고 추한 것이 있듯이 모든 법도 이와 같아서 비록 공하다 하더라도 저마다의 인연이 있는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이 가운데서 말씀하시기를 “이 변화하는 법에는 성문(聲聞)의 변화가 있고 벽지불(辟支佛)의 변화가 있으며, 보살(菩薩)의 변화가 있고 부처님[佛]의 변화가 있으며,
번뇌(煩惱)의 변화가 있고 업(業)의 변화가 있느니라.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변화이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성문의 변화’라 함은, 37품(品)과 4성제(聖諦) 내지는 3해탈문(解脫門)이다. 왜냐 하면, 성문의 사람은 지계(持戒)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선정(禪定)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열반을 구하며 안팎으로 몸의 부정(不淨)을 닦기 때문이니, 이것을 신념처(身念處)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법은 열반을 위하기 때문이니, 부지런히 정진하여 이 법을 일으키면 본래 없었던 것이 비로소 있게 되고 이미 있었던 것은 다시 없게 되므로 이것이 곧 성문의 변화이다.
‘벽지불의 변화’라 함은, 이른바 12인연(因緣) 등의 모든 법을 관(觀)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벽지불의 지혜는 성문의 사람보다 깊기 때문이다.
‘보살의 변화’라 함은, 이른바 6바라밀과 그리고 두 가지 신통 즉 과보로 얻는 것[報得]과 수행으로 얻는 것[修得]이 있다.
‘부처님 법의 변화’라 함은,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일체종지(一切種智) 등의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이다.
‘번뇌의 변화’라 함은, 번뇌는 갖가지 업을 일으키나니,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업(無記)의 업과 필정업(畢定業)ㆍ불필정업(不畢定業)과 선(善)ㆍ불선(不善)ㆍ무동(無動)의 업 등 한량없는 업들이 있다.
【문】모든 번뇌는 그것이 거친 업[惡業]이거늘, 어찌하여 선업과 무동업을 낼 수 있는가?
【답】두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는 가까운 원인[近因]이요, 둘째는 먼 원인[遠因]이다. 사람에게 나라는 마음[我心]이 있으면서 후생에 받는 몸이 언제나 쾌락이 있게 하기 위하여 보시를 닦는 것은 바로 가까운 원인이며, 욕계(欲界)의 쇠뇌(衰惱)와 깨끗하지 못한 몸을 여의기 위하여 선정을 닦는 것은 바로 먼 원인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온갖 범부는 모두가 나라는 마음[我心]이 화합하기 때문에 업을 일으킨다”고 하기도 하며,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나라는 마음을 여의면 제6식(識)이 일어남이 없지만, 나라는 마음에 머무르기 때문에 제6식이 일어나나니, 나라는 마음이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다”라고 한다.
【문】번뇌는 더러운 마음[垢心]이요,
착한 마음은 깨끗한 마음[淨心]이다.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은 화합하지 못하거늘 무엇 때문에 “나라는 마음[我心]에 머무르면서 착한 업을 일으킬 수 있다”고 말하는가?
【답】그렇지 않다. 온갖 마음은 모두가 지혜와 함께 생기는 것이므로 무명(無明)의 마음에서도 역시 지혜는 있어야 한다. 지혜와 무명은 서로 반대되는 법이면서도 한 마음에서 일어난 것이니,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도 또한 이와 같다. 범부는 아직 성인의 도를 얻지 못한 이거늘, 어떻게 나[我]라는 마음을 여읠 수 있으며 착한 일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을 내는 등의 번뇌 가운데서는 선(善)을 행할 수 없지만, 나라는 마음은 무기(無記)이어서 유연(柔軟)하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번뇌의 마음속에서 선업과 무동업(無動業)과 무구업(無咎業)이 생긴다.
업의 변화라는 것은 온갖 과보의 법을 일으키는 것으로 이른바 6도(道)를 말한다. 나쁜 업의 과보는 3악도이고, 착한 업의 과보는 3선도이다. 나쁜 업에는 상(上)ㆍ중(中)ㆍ하(下)가 있어서 상은 지옥이요, 중은 축생이며, 하는 아귀이다. 착한 업에도 상ㆍ중ㆍ하가 있어서 상은 하늘이요, 중은 사람이며, 하는 아수라 등이다.
상(上)의 착한 업에도 갖가지 경중(輕重) 등의 분별이 있고, 상의 나쁜 업에도 경중의 차별이 있다. 그 차례와 경중에 대해서는 지옥(地獄) 중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그 밖의 세계[道]에 대해서는 역시 「분별업품(分別業品)」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문】만일 업을 따라 있게 된다면 무엇 때문에 변화를 말하는가?
【답】범부의 사람은 모든 법을 변화와 같지 않다고 보지만, 성인은 필경 공한 모양인 줄 알기 때문에 천안(天眼)으로 중생을 볼 적에 모두가 처음도 나중도 중간도 없는 것이 마치 변화를 짓는 이[化主]가 먼 곳에 있으면서 그 변화를 짓는 것과 같다고 보나니, 업도 또한 이와 같아서 과거 세상 동안에 지금의 몸의 변화를 짓는 것이다.
변화로 된 일들의 갖가지는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과 기쁨과 두려움을 내게 한다. 지혜 있는 이는 그 모두에 실체가 없다고 보지만, 사람들은 제멋대로 근심이나 기쁨을 내고 있으니, 이런 사람들이야말로 가히 우스운 것이다. 업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 때문에 “업의 변화”라고 말한다.
【문】이 모든
변화는 모두가 업으로 된 것이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업의 변화’라고만 말하지 않는가?
【답】업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깨끗한 업[淨業]과 더러운 업[垢業]이다. 깨끗한 업이란 성문의 변화 내지는 부처님의 변화이며, 더러운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이다.
또한 두 가지 업이 있으니, 범부의 업과 성인의 업이다. 범부의 업이란 곧 번뇌의 변화요, 성인의 업이란 수다원에서부터 부처님까지이다. 그러므로 비록 이 모두가 업의 변화라 하더라도 자세히 분별한다 하여 허물될 것은 없다. 이 때문에 “수보리야, 온갖 법은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이 모든 성인으로서 번뇌가 끊어진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로써 온갖 번뇌와 습기가 끊어진 이의 이 모든 끊어진 것도 모두가 변화와 같습니까”라고 하였다. 곧, 수보리는 ‘유위의 법은 거짓이기 때문에 변화와 같다 하겠지만, 무위의 법은 진실이요 조작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변화가 아니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에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이에 대답하시기를 “온갖 법은 나는 것이나 없어지는 것이나 간에 모두가 변화와 같으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본래는 없었다가 지금은 있게 되고 지금은 있던 것이 나중에는 없어지기도 하며 사람의 마음을 헷갈리고 미혹하게 하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뜻은 ‘온갖 것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법이어서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제 성품이 없기 때문에 필경 공하며, 필경 공하기 때문에 모두가 변화와 같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모든 법의 실상을 구하려는 뜻을 오히려 쉬지 않았기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어떠한 법이 변화와 같지 않은 것입니까”라고 하였으니, 수보리의 뜻은 ‘어느 하나의 결정된 진실한 법으로서 변화와 같지 않은 것이 있다면 이 법에 의지하여 정진하면서 구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있어서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어떤 법으로서 나는[生]것도 없고 없어지는[滅] 것도 없다면 곧 그것은 변화가 아니니라”고 하셨으니, 어느 것이냐 하면 이른바 거짓됨이 없는 모양의 열반이니, 이 법은 생함이 없기 때문에 없어지는 것이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근심을 내게 할 수도 없다. 부처님은 ‘온갖 유위의 법은 필경 공하여서 모두가 변화와 같지만 오직 열반이란
이 하나의 법만이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분별해 주신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아서 평등한 법은 부처님께서 만든 것도 아니고 성문이나 벽지불이 만든 것도 아니어서,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은 항상 머물러 있어서 성품이 공한 모양이며 그 성품이 공한 모양이 곧 열반입니다”고 하였다.
수보리의 뜻에서는 ‘반야바라밀에 깊이 들어가면 열반도 또한 공하다는 것을 앞의 품의 곳곳에서 말씀하셨거늘, 이제 와서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오직 이 하나의 열반만이 변화와 같지 않다고 하실까’라고 생각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의 말씀을 인용하여 따지는 것이니, 곧 “모든 법의 실상은 성품이 공하고 그 법은 항상 머물러 있다 함을 모든 부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연설했을 뿐입니다. 성품이 공하다는 것이 곧 열반이거늘 이제 나고 없어지는 법에서 따로 ‘거짓이 없는 모양인 열반이 변화와 같지 않다’고 말씀하십니까”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모든 법은 평등하여 항상 머물러 있으니, 성현이 만든 것도 아니다. 그러나 새로 배우는 보살들이 이런 말을 들으면 곧 두려움을 낼 것이다. 이 때문에 분별하면서 ‘나고 없어지는 것은 변화와 같지만, 나고 없어지지 않는 것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하느니라”고 하셨다.
【문】오직 부처님 한 분만은 거짓이 없는 사람이므로 온갖 사람들은 모두가 부처님에게서 진실한 일을 구하려고 하고 있거늘, 지금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온갖 법은 도무지 공하다”고 말씀하기도 하고, 혹은 “도무지 공하지 않다”고 하시기도 하는가?
【답】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새로 뜻을 낸 보살들을 위하는 까닭에 ‘열반은 변화와 같지 않다’고 말하느니라”고 하셨다.
【문】사람들을 위해서는 모든 법의 모양을 바꿀 수 있는 것인가?
【답】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모든 법의 모양이란 성품이 공하다. 성품이 공하거늘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느냐”고 하셨다.
부처님은 처음에 이 모든 법의 실상을 얻었을 적에 마음은 다만 열반의 고요히 사라진[寂滅] 곳으로만 향하고 있었는데, 그때에 시방에 계신 모든 부처님과 하늘들은 부처님께 청하기를 “열반에 들지 마시고 이 온갖 중생들을 고뇌에서 제도하여 벗어나게 해야만 합니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곧 그 청을 받아들이셨으니, 부처님은 다만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하여 머물렀을 뿐이다. 그러므로 이롭게 할 중생이 있기만 하면 그 일에 따라서 그를 위해 법을 설한 것인 줄 알아야 한다.

모든 유위의 법은 거짓이라고 관찰하기 때문에 이 열반은 진실한 것이어서 변하지도 않고 달라지지도 않지만 새로 뜻을 낸 보살이 이 열반에 집착한다면 이 집착으로 인하여 모든 번뇌를 일으키게 되나니, 이 집착을 끊게 하기 위하여 “열반은 변화와 같다”고 말씀한 것이요, 만일 집착하는 마음이 없다면 이때에는 곧 “열반은 변화와 같은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다.
또 두 가지 도가 있나니, 소승의 도[小乘道]와 대승의 도[大乘道]이다. 소승의 논의(論議)에서는 열반으로 진실을 삼지만, 대승의 논의에서는 예리한 지혜로써 깊이 들어가기 때문에 물질 등의 모든 법은 모두가 열반과 같다고 관찰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두 가지의 설명에 허물은 없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어떻게 새로 뜻을 낸 보살을 교화하여 그로 하여금 평등하고 성품이 공한 것을 알게 합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의 생각에는 ‘성품이 공한 법은 범부들로서는 크게 두려워할 만한 곳이다. 성품이 공하여 있는 바가 없다는 말을 듣게 되면 마치 깊은 구덩이에 임한 것과 같나니, 왜냐 하면, 아직 도를 얻지 못한 모든 이들은 나[我]라는 마음에 깊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공하다는 법을 두려워하면서 생각하기를 〈부처님은 사람들에게 착한 행을 부지런히 닦도록 가르치면서도 끝내는 아무것도 없는 데로 돌아가게 하는 구나〉라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한 것이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무슨 방편으로써 이 새로 발심한 이들을 가르쳐 주겠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모든 법은 먼저는 있었는데 지금은 없더냐”고 하셨다. 부처님의 뜻은, 새로 뜻을 낸 이들은 나중에는 없게 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모든 법이 먼저는 있었다가 지금은 없는 것이더냐”고 하신 것이다.
수보리가 스스로 ‘모든 법은 먼저도 저절로 없었고 지금에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으면서도, 다만 새로 뜻을 낸 이들이 나라는 소견[我見]으로 마음을 가리고 있기 때문에 놀라며 두려워하고 있으므로, 그들을 위하여 그 뒤바뀜을 없애 주면서 진실한 소견을 얻게 한 것이니, 마침내 잃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번뇌와 뒤바뀜의 실상 즉 성품이 공한 것을 알게 되면 이때에는 곧 두려움이 없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등의 법으로써 새로이 발심한 이에게 가르치기를 “만일 모든 법이 먼저는 있었다가 도를 행했기 때문에 없는 것이라면 마땅히 두려워해야 되지만, 애초부터 없었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않아야 하니,
다만 뒤바뀜을 제거하면 될 뿐이다”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88. 살타파륜품(薩陀波崙品)을 풀이함 ①

【經】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는 마땅히 살타파륜(薩陀波崙)3) 보살마하살과 같이 해야만 하느니라. 이 보살은 지금 대뢰음(大雷音)부처님 처소에 있으면서 보살도(菩薩道)를 행하고 있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한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본래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리를 구하지 않았느니라. 그가 고요한 숲 속에 있었는데,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그대 선남자여, 이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가되 고달프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잠을 자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며, 음식을 먹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낮과 밤이라는 생각을 하지 말며, 춥고 덥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안과 밖이라는 생각도 하지 말라.
선남자여, 길을 갈 때에는 좌우를 보지 말고 그대가 갈 때에 몸의 모양을 파괴하지 말며, 물질의 모양을 파괴하지 말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의 모양을 파괴하지 말라. 왜냐 하면 만일 이 모든 모양을 파괴하게 되면 부처님의 법에 장애가 있고 만일 부처님의 법에 장애가 있으면 곧 5도(道)의 생사(生死) 가운데서 왕래하게 되고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고 하였느니라.
그때에 살타파륜보살은 공중의 소리에 대답하기를 ‘저는 가르침을 따르겠습니다. 왜냐 하면, 저는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큰 광명이 되려고 하기 때문이요, 온갖 부처님 법을 쌓으려고 하기 때문이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고 하였느니라.
살타파륜보살에게 또 공중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참으로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그대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법에 믿는 마음을 내어야 하며 모양[相]을 여의는 마음으로써 반야바라밀을 구하면서
나[我]라는 모양을 여의고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여읠지니라. 마땅히 나쁜 벗을 멀리 여의어야 하고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히 하면서 공양해야 하나니, 어떤 이가 선지식이냐 하면, 공ㆍ무상ㆍ무작과 무생(無生)ㆍ무멸(無滅)의 법과 그리고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기쁘게 하여 믿음의 즐거움에 들어가게 하는 이가 곧 선지식이니라.
선남자여, 만일 이와 같이 행하면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리니, 혹은 경권 가운데서 듣게 되거나 혹은 보살의 설명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선남자여, 그대가 이 반야바라밀을 듣게 되는 곳이면 마땅히 부처님과 같은 분이라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그대는 그 은혜를 알아야 하며 생각하기를 〈이 반야바라밀을 들려주는 이가 곧 나의 선지식이다. 나는 이 법을 들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음[不退轉]을 신속히 얻고 모든 부처님께 가까이 다가가며 언제나 부처님이 계신 국토에 태어나서 뭇 재난을 멀리 여의어 재난이 없는 상태[處]를 완전히 갖추게 될 것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이런 공덕을 생각하고 헤아리면서 그 법을 듣게 되는 곳이면 마치 부처님과 같다는 생각을 일으켜야 하느니라.
그대 선남자여, 세간의 이익을 구하는 마음 때문에 법사(法師)를 따르지 말며, 다만 법을 사랑하고 법을 공경하기 위하여 설법하는 보살을 따르라.
그때에는 악마의 일[摩事]을 깨달아 알아야 하니, 만일 악마가 설법하는 보살에게 5욕(欲)의 인연을 지어주고 거짓된 법을 위하여 그로 하여금 받게 하여도 그 설법하는 보살이 진실한 법의 문에 들어 있다면, 그 공덕의 힘 때문에 받고서도 물듦이 없느니라. 또 세 가지 일 때문에 이 5욕을 받는 것이니, 곧 방편의 힘 때문이요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심게 하기 위함이요 중생들과 그 일을 같이 하기 위함이니라.
그대는 이 가운데서 물든 마음을 내지 말고 깨끗한 생각을 일으키며 생각하기를 〈나는 아직 구화구사라(漚和拘舍羅)4)를 알지 못한다.
대사(大師)는 방편의 법으로써 중생을 제도하고 복덕을 얻게 하기 위하여 이 모든 5욕을 받되 지혜에 있어서는 집착도 없고 장애도 없으며 욕탐에 물들지도 않는다〉고 해야 하느니라.
선남자여, 곧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관찰해야 한다. 모든 법의 실상이란 이른바 온갖 법의 더럽지도 않고[不垢] 깨끗하지도 않는 것[不淨]이니,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제 성품이 공하여 중생도 없고 사람도 없고 나[我]도 없으며, 모든 법은 마치 환(幻)과 같고 꿈[夢]과 같으며 메아리[響]와 같고 그림자[影]와 같으며 아지랑이[炎]와 같고 변화한 것[化]과 같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이 모든 법의 실상을 관찰한 뒤에는 법사를 따라야 하나니, 그대는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성취할 것이니라.
또 선남자여, 그대는 다시 악마의 일을 깨달아야 하리니, 설령 설법하는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받으려는 사람을 보고 염두에 두지 않는다 하여도 그대는 마음에 원한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느니라. 그대는 오직 법으로써 공경할 뿐이요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며, 언제나 법사를 따라야 한다’고 하였느니라.”
【論】해석하겠다. 앞의 품(品) 가운데서 말하기를 “새로 뜻을 낸 보살에게는 성품이 공한 법을 어떻게 가르쳐 주어야 합니까? 성품이 공한 법은 필경 있는 바가 없고 빈 것[空]이어서 알기도 어렵고 얻기도 어렵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은 반문하시기를 “법이 먼저는 있다가 지금에는 없는 것이더냐”고 하셨다.
부처님의 뜻은 ‘성품이 공한 법은 얻기 어렵거나 알기 어려운 것이 아니니, 왜냐 하면, 본래부터 항상 없는 것이요 다시 새로 달라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대는 무엇 때문에 마음으로 놀라면서 얻기 어렵다고 여기느냐. 이 성품이 공한 법이 비록 심히 깊다 하더라도 보살은 다만 일심으로 부지런히 정진하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을 뿐이니, 이와 같이 일심으로 하기만 하면 곧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살타파륜의 본생(本生)을 말씀하시어 그것을 증명하신다.
부처님의 법에는 12부경(部經)이 있어서 혹은 수투로(修妬路)와 게경(偈經)과 본생경(本生經)으로 인하여 제도되기도 한다. 지금 부처님은 본생경으로써 증명을 삼으시는데, 만일 듣는 이가 있으면 생각하기를 ‘그 사람도 얻었으므로 나도 또한 얻어야 한다’고 하게 된다.
그 때문에 살타파륜보살의 본생의 인연을 말씀하신 것이니, 곧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구하기를 마땅히 살타파륜보살과 같이 해야만 하느니라”고 하신 것이다.
【문】만일 반야바라밀이 모양도 없고 필경 공이라면 선정을 행하여도 오히려 얻기 어려운 것이거늘, 하물며 근심하고 슬피 울면서 산란한 마음으로 구한다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인가?
【답】새로이 뜻을 낸 보살을 위하여 살타파륜을 말씀하신 것이다.
【문】만일 살타파륜이 바로 새로이 뜻을 낸 이라면 어째서 시방의 모든 부처님께서 그의 앞에 나타나시며 모든 삼매(三昧)를 얻는가? 몸을 아끼지 않으면서 다시 담무갈(曇無竭)을 뵙고 다시 한량없는 아승기의 삼매를 얻었거늘, 어떻게 ‘새로이 뜻을 낸 보살’이라 부르는가?
【답】새로이 배우는 보살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깊은 마음으로 세간의 즐거움에 탐착하면서 연약한 마음으로 뜻을 내는 이요, 둘째는 깊은 마음으로 뜻을 내고 세간의 즐거움에 탐착하지 않는 이이다. 연약한 마음으로 뜻을 낸 이면 부처님은 발심했다고 하시지 않으며, 깊은 마음으로 뜻을 낸 이라야 비로소 발심했다고 여기신다.
성문의 법 가운데서 부처님은 두 비구에게 말씀하시기를 “나의 법 가운데에는 털끝만큼의 난법(煖法)5)도 없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 난법을 가장 미미하고 작은 것이라고 보시지만, 범부의 사람은 그것을 크다고 본다. 비유하건대 마치 국왕은 한 장의 담요를 보고 많다고 여기지 않지만, 가난한 이는 그것을 보고 많다고 여기는 것 같나니, 일심으로 몸을 아끼지 않기 때문에 살타파륜으로 증명을 삼으신 것이다.
【문】만일 살타파륜보살이 이와 같이 고행(苦行)할 수 있었다면 담무갈로부터 모든 삼매를 얻고는 마땅히 부처님이 되었어야 하거늘, 지금 무엇 때문에 대뢰음부처님 처소에서 보살의 행을 닦고 있는가?
【답】부처님의 법은 한량없고 끝이 없다. 만일 천만 아승기겁 동안 부지런히 고행을 닦는다 해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살타파륜의 한 세상 동안의 고행이겠는가.
또 어떤 보살은
보살의 도와 10력과 4무소외 등을 완전하게 갖추고 있으면서도 중생들을 위한 까닭에 세간의 머무르면서 실제(實際)를 아직 취하지 않는 이도 있나니, 마치 문수사리(文殊師利) 등과 같다. 살타파륜도 혹 이러한 이이기 때문에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은 것이다.
보살의 삼매는 시방의 국토에 있는 티끌 수와 같으며 살타파륜이 얻은 것은 6만의 삼매이거늘 어찌 이것을 많다 하겠는가.
‘대뢰음부처님[大雷音佛]’이란, 마치 큰 용왕이 장차 비를 내리려 할 때 크게 우레 소리를 떨치면 까마귀ㆍ참새ㆍ작은 곤충까지도 모두 두려워했던 것처럼 이 부처님이 처음에 법륜을 굴리실 때에 시방의 중생들이 모두 발심하였고 외도(外道)와 삿된 견해를 지닌 이들이 모두 다 두려워하면서 굴복했었으니, 이 때문에 하늘과 사람과 중생들이 그 부처님을 ‘대뢰음’이라 부른 것이다. 이 부처님은 지금 현재도 계신다.
따라서 수보리는 여쭈기를 “살타파륜 보살마하살은 어떻게 반야바라밀을 구한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문】살타파륜은 아직 아비발치(阿鞞跋致)를 얻지 못했거늘, 무엇 때문에 보살마하살이라 부르는가?
【답】큰 보살[大菩薩]이 있기 때문에 작은 이[小者]에게도 역시 대(大)라 하기도 한다. 또 그는 비록 아직 진실한 지혜는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반야바라밀을 깊이 생각하고 있는 까닭이며 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면서 큰 공덕이 있기 때문에 역시 보살마하살이라 부른다.
【문】무엇 때문에 살타파륜[살타(薩陀, sadā)는 진(秦)나라 말로 ‘항상〈常〉’이라는 말이요 파륜(波崙, prarudita)은 ‘운다〈啼〉’는 말이다]이라 부르는가? 그의 부모가 이름을 지어 준 것인가? 아니면, 그것은 어떤 인연이 있어 얻게 된 이름인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그가 어릴 때에 늘 울기를 좋아했기 때문에 ‘항상 우는 이[常啼]’라고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대비(大悲)를 행하면서 그 마음이 부드러웠기 때문에 중생들이 악한 세상에 있으면서 가난하고ㆍ늙고ㆍ병들고ㆍ근심하고ㆍ괴로워하는 것을 보고는 그들을 위하여 슬피 울었나니, 이 때문에 뭇 사람들이 그를 살타파륜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보살은 부처님 도를 구하기 위하여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비고 고요한 데에 있으면서 마음으로 멀리 여읨[遠離]을 구하고,
일심으로 사유하고 헤아리면서 부처님의 도를 힘써 구했는데, 그때에 세상에는 부처님이 계시지 않았다. 이 보살은 세상마다 자비의 마음을 행했는데도 인연이 작았기 때문에 부처님이 없는 세상에 태어났다. 이 사람은 중생들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정진하여 잃지 않기를 원했으니, 그 때문에 비고 고요한 숲 속에 있었던 것이다. 이 사람은 이러한 전생에 쌓은 복덕의 인연과 이 세상에서의 한마음으로 크게 서원을 내고[欲] 크게 정진한 이 두 가지 인연 때문에 공중에서 교시하는 음성을 듣게 되었으나, 오래지 앉아 곧 사라져버렸으므로 그는 이내 생각하기를 ‘나는 어째서 묻지 않았던 것일까’라고 하고, 이 인연 때문에 밤낮 7일 동안을 근심하면서 슬피 울었다. 이로 인하여 하늘과 용과 귀신들이 ‘항상 우는 이[常啼]’라고 불렀다”고 한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대답하시기를 “과거 세상에 살타파륜이라는 보살이 있었으니, 그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명리를 탐내지 않았으며, 반야바라밀을 구할 때에 텅 비고 고요한 숲 속에 있었는데 허공에서 소리가 나서 텅 빈 숲에까지 들려왔느니라”고 하셨으니, 앞에서의 말씀과 같다.
【문】공중에서의 소리란 바로 어떤 소리였는가?
【답】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그리고 모든 하늘과 용왕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이 사람이 세간의 법에 탐착하지도 않고 일심으로 부처님의 도를 구하는 것을 보고, 이때에 부처님의 법이 없었으므로 그에게 반야를 얻는 인연을 보이려고 공중에서 소리를 낸 것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살타파륜과 전생에 좋은 인연을 지었던 사람이 이 숲속에서 귀신이 되어 있었는데, 그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 귀신도 전생에 지은 인연 때문에 역시 부처님의 도를 구하고 있었으니, 이 두 가지 인연6) 때문에 소리를 낸 것이다”라고 한다.
이는 마치 밀박(密膊)바라문의 경우와 같다. 수달다(須達多)가 왕사성(王舍城)으로 가서 며느리를 구하느라 큰 장자(長者)의 집에 들렀을 때였다. 그때에 밀박은 왕사성에 모인 큰 바라문들 가운데서 음식을 지나치게 많이 먹은 탓으로 배가 터져 죽은 뒤에 귀신이 되어서는 왕사성의 성문 위에 머무르고 있었다.
수달다도 이 바라문이 이미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에 수달다는 장자의 집에 가서 묵었는데 그 집 장자가 꼭두새벽에 일어나서 음식을 장만하고 있었으므로 수달다는 묻기를 ‘당신은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아들 장가를 들이렵니까. 딸 시집을 보내렵니까. 아니, 대국의 왕을 청하렵니까. 고을 사람들을 모아서 잔치를 벌이렵니까. 어찌 그리도 서두르면서 일을 하고 계십니까’라고 하였다. 장자는 대답하기를 ‘나는 부처님과 승가를 청하려 합니다’고 했다. 수달다는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듣고 놀라며 한편 기뻐하면서 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 장자는 먼저 이미 도의 자취[道跡]를 얻은 사람이라 그를 위하여 부처님의 위덕을 자세히 말해 주었다.
수달다는 그의 말을 듣고 나자 좋아하는 정(情)이 우러나오면서 몹시 부처님이 뵙고 싶어졌으며, 부처님에 대한 생각에 잠도 자지 못했다. 그는 부처님을 생각하는 마음이 지극했기 때문에 잠깐 만에 깨어나서 밤에 떠 있는 달빛을 보고는 날이 새어 해가 떴다고 여기면서 곧 일어나 성문으로 나아가서 보니 성문은 이미 열려 있었다. 왕사성의 성문을 초저녁에 아직 닫지 않는 것은 손님들이 들어오게 하기 위해서요, 이른 새벽에 일찍 여는 것은 손님들이 떠나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문이 열린 것을 보고 곧장 부처님이 계신 데를 향해 나아갔다.
부처님은 그때에 한림(寒林)7) 가운데에 머물고 계셨다. 그 중간쯤 갔을 때에 달이 졌으므로 다시 어두워졌다. 수달다는 마음으로 후회하고 주저하면서 도로 성 안으로 들어오려 하는데 그때에 밀박신(密膊神)이 몸으로 광명을 놓아 모든 숲과 들을 환히 비추어 주면서 거사(居士)에게 말하기를 ‘거사여,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말고 곧장 나아가되 돌아서지 마시오. 가게 되면 큰 이익을 얻게 되시리다’고 하였으니, 그 경에서 게송으로 자세히 말한 것과 같다.
수달다는 부처님을 뵈옵고 수다원의 도를 얻었으며 부처님과 승가를 청하여 사위성(舍衛城)에서 그의 몸이 다하도록 공양했다. 부처님은 사리불로 하여금 수달다의 스승이 되게 하셨으며, 사위성에 정사(精舍)를 짓게 하셨다.
마치 수달다에게 선지식[知識]의 신(神)이 교시하여 인도한 것처럼 살타파륜의 선지식이 교시하여 인도한 것도 또한 그러했다. 이 때문에 그가 근심하고 괴로워하는 것을 보고 그에게 가르쳐주고 인도하기를 “선남자여, 그대는 여기서부터 동쪽을 향해 가라. 갈 때에 고달픔 등을 생각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문】고달픔과 배고프고 목마름이 한데 어울려 와서 몸이 절박하거늘,
어떻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인가?
【답】커다란 서원[欲]과 정진의 힘 때문에 일심으로 부처님 도를 좋아하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 휴식과 음식 등은 모두가 몸을 돕는 법일 뿐이다. 이런 일이 비록 닥쳐온다 하더라도 마음을 어지럽게 하지 못하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요 무상하며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원수와 같고 도적과 같은 줄 알기 때문이다. 다만 몸의 즐거움을 위한 것일 뿐이거늘 어떻게 염두에 둘 필요가 있겠는가. 배고프고 목마르며 고달픔 등 때문에 부처님의 도를 버리지 말 것이다.
‘낮과 밤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함은, 낮에는 법을 행하고 밤에는 쉬겠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것이니, 실로 밤과 낮이라는 것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해가 수미산(須彌山)에 의하여 그림자가 가려지므로 밤이라 하기 때문이다.
‘안과 밖이라고 생각하지 말라’고 함은, 중생은 대개가 안의 법[內法]에 탐착한다. 안의 법은 몸을 말하고, 밖의 법[外法]은 5욕(欲)을 말한다. 안팎의 법은 일정하지 않으며 성품이 공하기 때문에 탐착하지 않아야 한다.
‘왼쪽과 오른쪽을 돌아보지 말라’고 함은, 사람이 산란한 마음으로 길을 가기 때문에 좌우를 돌아보게 되는데, 길을 가는 이가 이유도 없이 뒤를 본다면 당연히 앞도 보지 못하게 된다. 따라서 다만 ‘좌우를 돌아보지 말라’고 한 것이다. 또 악마는 항상 수행하는 이를 미혹하고 어지럽게 하면서 혹은 갖가지 형상을 나타내기도 하며 혹은 아름다운 모습이 되기도 하고 혹은 두려운 짐승이 되기도 하여 길의 좌우에 있게 되므로 ‘돌아보지 말라’는 것이다. 이런 것은 모두가 거친 생각[麤念]을 그치라는 것이다.
‘몸의 모양과 물질 등의 모양을 파괴하지 말라’고 함은 5중(衆)이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는 이름을 임시로 붙인 것인데 만일 따로 다시 몸의 법이 결정코 있다 한다면 이것이 곧 몸의 모양을 파괴하는 것이며, 또 몸이 없다는 법에 집착하여도 이것도 또한 몸의 모양을 파괴하는 것이다. 동일하다ㆍ다르다ㆍ있다ㆍ없다는 등의 치우친 소견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게 되면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나니, 이 때문에 ‘몸의 모양을 파괴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만일 이 모든 모양을 파괴하면 곧 부처님의 법에 장애가 있나니, 부처님의 법에 장애가 있으면 곧 5도(道)의 생사 가운데에 왕래하면서 반야바라밀을 얻을 수 없느니라”고 하셨다.
살타파륜은
공중의 소리에 대답하면서 그 자신이 인연을 말한 것이니, 이른바 “살타파륜은 온갖 중생들을 보건대 무명(無明)의 어둠 속에 떨어져 있으므로 나는 지혜의 광명이 되려 합니다. 온갖 중생에게는 일체의 번뇌가 있으므로 나는 온갖 부처님 법의 즐거움[佛法樂]8)을 베풀려고 합니다. 온갖 중생은 모두가 삿된 도[邪道]에 떨어져 있으므로 나는 이 중생들을 위하여 위없는 도[無上道]를 구하는 것입니다”고 하였다.
이 세 가지 서원[願]은 반야바라밀을 얻으면 곧 완전히 갖출 수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교시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문】살타파륜은 그의 형상을 보지도 못하고 다만 그 소리만이 들릴 뿐이거늘, 무엇 때문에 곧 교시를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답】사람이 구하고 있는 일이 다급하면 소리만을 듣고도 응하는 것이니, 살타파륜도 이와 같다.
또 그가 하는 말의 이치가 좋게 들리면 그 사람도 또한 좋은 이인 줄 알 수 있기 때문에 눈으로 꼭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마치 어둠 속에 여러 가지 중생이 있을 적에 눈으로는 비록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 소리만을 듣고도 그 종류를 알게 되는 것과 같다.
그때에 공중에서 소리가 나면서 다시 찬탄하기를 “훌륭하도다”라고 했으니, 비록 형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더라도 능히 훌륭한 말을 믿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그는 온갖 중생들을 제도하려는 까닭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며 마음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나니, 이와 같은 인연 때문에도 찬탄하기를 “훌륭하도다”라고 한 것이다.
‘3해탈문에서 믿는 마음을 내어야 하다’고 함은, 이 문이 바로 모든 법의 실상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이 세 가지 문을 여의면 모두가 거짓이어서 진실한 것이 없으므로 “네가 비록 아직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큰 신근(信根)의 힘을 내어야 한다”는 것이니, 신근의 힘 때문에 점차로 모든 근(根)을 갖추게 된다.
‘모양을 여의는 마음으로써 반야바라밀을 구한다’고 함은, 이른바 모든 법의 필경 공한 것을 관찰하면서 중생의 모양[衆生相]을 여의고 법의 모양[法相]을 여의는 것이다.
【문】3해탈문은 반야 속에 포섭되어 있는가? 만일 포섭되어 있다면 무엇 때문에 따로 설명하는가? 만일 포섭되어 있지 않다면 어떻게 하여 경에서 “온갖 도를 돕는 법[助道法]은 모두가 반야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다”고 말씀하는가?
【답】
온갖 법은 모두가 반야 속에 들어가 있다. 사람들은 모두가 괴로움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해탈하기를 구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반야의 갈래 가운데서 먼저 이 3해탈문을 말하게 된다. 어떤 인연으로 이런 해탈을 얻느냐 하면, 모든 두 가지 치우침인 이른바 중생의 모양과 법의 모양을 여의고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다.
【문】처음에는 정진(精進)을 가르치고 나중에는 3해탈문과 반야를 가르치는데, 지금은 무슨 일 때문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히 하라”고 가르치는가?
【답】비록 좋은 법이 있어도 가르치는 이가 없으면 행할 때에 착오가 많이 생긴다. 마치 비록 좋은 약이 있다고 하더라도 역시 용한 의사가 필요한 것과 같다.
또 살타파륜은 바로 새로이 뜻을 낸 보살이요 반야바라밀은 매우 깊거늘, 어떻게 다만 공중에서 나는 간략히 교시하는 소리만을 듣고 스스로 완전하게 갖출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선지식을 친근히 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선지식에 대한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지금 요약하여 설명하면 두 가지의 모습이 바로 선지식이다. 첫째 일심으로 살바야(薩婆若)에 향하도록 가르치는 이요, 둘째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ㆍ무생(無生)ㆍ무멸(無滅) 등 반야바라밀의 법을 가르치는 이이다. 만일 이와 같이 행할 수 있는 이면 오래지 않아서 반야바라밀을 얻게 되나니, 마치 약사(藥師)가 병든 이를 위하여 약 먹는 법을 말해 주면서 “그대는 이 법대로 먹기만 하면 병이 곧 나을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경권으로부터 듣게도 되고 또는 보살의 설법으로 듣게 된다’고 함은, 살타파륜을 담무갈보살에게로 보내는데 그 안에는 두 곳의 반야가 있어서이니, 첫째는 보대(寶臺) 위에 있는 금첩(金牒)으로 된 책이요, 둘째는 담무갈이 설한 것이다. 만일 복덕이 많은 이면 담무갈이 설하는 법을 듣게 되려니와 복덕이 적은 이면 경권으로부터 듣게 될 것이다.
‘법사에 대하여 부처님이라는 생각을 낸다’고 함은, 부처님 도를 가르쳐 줄 수 있는 인연 때문이다. 세간의 소인(小人)들은 그 할 일만 끝나면 곧 그의 은의(恩義)를 잊어버리고 생각하기를 ‘마치 사람이 배를 타고 물을 건너가는 것과 같다. 저 언덕에 도달한 뒤면
그 배가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고 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말하기를 “너는 그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생각하기를 ‘반야를 들려주는 이가 바로 나의 선지식이다’라고 해야 한다”라고 한 것이다.
온갖 이익 가운데서는 반야의 이익이 가장 뛰어나니, 이 반야를 행하면 빨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물러나지 않게 된다. 또다시 반야를 행하는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을 친근히 하고 언제나 부처님이 계신 나라에 태어나며, 여덟 가지 재난[八難]을 여의고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는 때를 만난다. 그러니 보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내가 이와 같은 등의 모든 공덕을 얻은 것은 모두가 반야로부터 얻은 것이요, 반야바라밀은 스승으로부터 얻은 것이다’라고 해야 하니, 이 때문에 스승을 보기를 마치 부처님과 같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반야바라밀을 설하는 이가 큰 복덕이 있고 아는 것이 많아서 공양을 많이 얻고 있을 적에 그 제자로서 처음에는 반야 때문에 따랐으나, 뒤에는 점차로 공양의 이익 때문에 따르게 되는 이도 있나니, 이 때문에 “세간의 이익 때문에 법사를 따르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다만 “선지식에만 친근하라”고 말하지 않고 이러한 갖가지의 인연을 말씀하는 것인가?
【답】어떤 사람은 이미 선지식을 만났으면서도 그의 뜻을 얻지 못하고 도리어 원수가 되어서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고 또 서로가 헐뜯기도 하기 때문이니, 오직 부처님 한 사람만이 이런 허물이 없다. 그 밖의 다른 사람으로서 그 누가 이런 허물이 없는 이가 있겠는가.
만일 제자로 있으면서 스승의 허물을 보게 되면 진실이거나 거짓이거나 간에 그의 마음을 스스로 무너뜨리면서 다시는 법의 이익을 얻지 못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공중에서 소리가 나며 다음과 같이 가르쳤던 것이다.
“설령 스승의 허물을 본다 해도 혐오하거나 원한을 일으키지 말라. 너는 생각하기를 ‘나는 전생에 지은 복덕이 구족하지 못하기 때문에 부처님을 만나지 못하고 이제 이 잡다한 행[雜行]을 하는 스승을 만났다. 나는 마땅히 그의 과실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반야를 잃는 일이 없어야 한다. 스승의 허물은 나에게 와 달라붙지 않으니, 나는 다만 스승으로부터 반야바라밀의 법만을 받으면 된다’고 하라.”
비유하건대 마치 개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 속에 좋은 보물을 담아 놓은 것과 같으니,
주머니 때문에 그 보물을 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마치 죄인이 촛불을 가지고 길을 비추어 주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의 죄 때문에 그 광명을 받지 않아서 도랑이나 개천에 빠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또한 길을 갈 적에 어린 사람이 길을 인도하는 것과 같으니, 그 사람이 어리다 하여 그의 말에 따르지 않을 수도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인연 때문에 스승을 멀리 여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스승이 만일 실제로 죄가 있어도 오히려 여의지 않아야 하거늘, 하물며 이 가운데서 악마가 인연을 지어 설법하는 이로 하여금 매우 오묘한 5욕(欲)이 있게 하는데도 제자로 하여금 그 법에 염착(染著)하지 않게 하는 것이겠는가. 그 설법하는 이는 방편 때문에 받는 것을 드러내 보이는 것이다. 방편이란 이른바 중생으로 하여금 복덕의 인연을 심게 하고, 또한 그들과 일을 같이함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기 위한 것이다.
또 어떤 보살들은 모든 법의 실상을 통달한 까닭에 장애되는 것도 없고 죄과도 없게 된다. 비록 죄과를 짓는다 하더라도 역시 방해될 것도 없나니, 마치 사람이 장년(壯年)이 되어 힘이 왕성할 때는 뱃속의 소화기관도 왕성하여 비록 부적당한 음식을 먹었다 하더라도 병이 일으키지 않는 것과 같다. 또 마치 좋은 약이 있으면 비록 악한 독을 입었다 하더라도 해가 될 수 없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그대는 스승에 대하여 혐오나 원한을 일으키면서 스스로 반야를 잃지 말라’고 함은 경 가운데서의 설명과 같다.
또 설법하는 이로서 계율을 깨끗하게 지니면서 5욕을 떠났고 지식도 많으며 좋은 명문(名聞)이 있고 위덕이 높은데, 제자들이 법을 받는 데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다음과 같이 말해주기도 한다.
“그대는 그런 가운데서도 원망하지 말고 생각하되 ‘나는 전생에 지은 죄 때문에 지금 소인(小人)이 되어 있으며, 스승은 나를 업신여기지 않으시건만 나 자신이 복이 없어서 도를 얻지 못하고 있다’고 해야 하며, 또한 ‘나는 스승에 대한 교만한 마음을 깨뜨리고 법의 이익을 구해야 한다’고 해야 하오.
이러한 여러 스승들이 있으니, 보살이라면 반야바라밀을 구하기 위하여 다만 일심으로 공경하면서 그의 장단점을 생각하지 않아야 하오. 만일 이와 같이 스승에 대하여 인욕하면서 일심으로
늘어나거나 줄어드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그대는 스승에게서 묘한 법을 모조리 다 얻으리니, 마치 완전하고 견고한 그릇에 받는 물건은 새는 일이 없는 것과 같소.”
살타파륜이 공중에서 나는 소리를 들은 뒤에 그곳으로부터 동쪽으로 향해 나아간 내용은 경 가운데서 자세히 설하는 것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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