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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04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92권

by Kay/케이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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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92

 

대지도론 제92권

82. 정불국토품(淨佛國土品)을 풀이함 ①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그때에 수보리가 생각하기를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도(道)이기에 보살은 이 도에 머무르면서 이와 같이 크게 장엄[大莊嚴]할 수 있을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가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을 아시고,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6바라밀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요 37조도법(助道法)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이며, 18공(空)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요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이며, 부처님의 10력(力) 내지는 18불공법(不共法)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도요 온갖 법이 또한 보살마하살의 도이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혹시 보살이 배우지 않는 어떤 법이 있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있겠느냐? 수보리야, 보살이 배우지 않아도 되는 어떤 법도 없나니, 왜냐 하면 보살은 온갖 법을 배우지 않으면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어떻게 보살은 온갖 법을 배운다고 할 수 있겠는지요. 그렇다면 세존께서는 희론이 없는 가운데서 희론을 짓고 계시는 것은 아니겠는지요. 이른바 ‘이것은 이것이다, 이것은 저것이다, 이것은 세간의 법이다, 이것은 출세간의 법이다, 이것은 유루의 법이다, 이것은 무루의 법이다, 이것은 유위의 법이다, 이것은 무위의 법이다, 이것은 범부의 사람의 법이다, 이것은 아라한의 법이다, 이것은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시니 말씀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온갖 법은 실로 공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온갖 법이 공하지 않다면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지금 온갖 법이 실로 공하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수보리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아서 ‘만일 온갖 법이 공하다면 부처님은 희론이 없는 가운데서 희론을 지어 〈이것이다, 저것이다〉라고 분별하고 〈이것은 세간의 법이다. 이것은 출세간의 법이다. 나아가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는데, 수보리야, 만일 세간의 중생들이 온갖 법이 공인 줄 안다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을 배워서 일체종지를 얻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지금 중생들은 실로 온갖 법이 공인 줄 모르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뒤에 모든 법을 분별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하고 있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의 도(道)에서는 처음부터 생각하기를 ‘온갖 법 가운데서는 일정한 성품을 얻을 수 없다. 다만 화합한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법이기 때문에 이름이 있을 뿐이다. 모든 법에서 나는 모든 법의 진실한 성품[實性]을 생각하면서 6바라밀의 성품에서나 37조도법(助道法)에서나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에서나 벽지불의 도에서나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도 집착하는 것이 없어야 한다’고 해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은 온갖 법의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 공은 공에 집착하지 않고 그 공도 또한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공한 가운데서 집착이 있겠느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생각하며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으면서도 온갖 법을 배우며, 이 배움[學] 가운데에 머물러 중생들의 마음의 작용[心行]을 관찰하되 ‘이 중생의 마음이 어느 곳에 있으면서 작용하는가’라고 자세히 살피면 중생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가운데서 작용하고 있는 것을 알게 되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중생은 진실하지 않고 허망한 법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제도하기 쉽겠다’고 하고, 이때에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이와 같이 그를 교화하며 말하기를 ‘그대 중생들이여, 보시를 행하여 재물이 넉넉해졌다 하여 역시 보시의 과보를 믿고 스스로가 높은 체하지 말라. 왜냐 하면, 이 가운데에는 견실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 지계와 선정과 지혜도 또한 그러하다.
여러 중생들이여, 이런 법을 행하여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부처님의 도를 얻는다 해도 이런 법이 있다고 생각하지도 말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교화하며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도 집착하는 것이 없나니, 이 가운데에는 견실한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만일 이와 같이 교화하면 이것을 바로 보살의 도를 행한다고 하나니, 모든 법에서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에는 집착할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성품이 없기 때문이며 성품이 공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머무른 데가 없나니, 이 보살은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단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시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찬제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비리야 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선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초선(初禪)을 행하면서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초선은 초선의 모양이 공하고 선을 행하는 이도 또한 공하며 소용되는 법도 또한 공하기 때문이니, 제2ㆍ제3ㆍ제4선(禪)도 또한 이와 같으며,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와 4무색정(無色定)과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다원의 과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고,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으며, 벽지불의 도를 얻어도 그 안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두 가지의 인연 때문에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의 인연이냐 하면, 첫째는 모든 도의 과위[道果]는 성품이 공하여서 머무르는 곳이 없고, 또한 소용되는 법도 없으며 머무르는 이도 없느니라.
둘째는 적은 일로써 만족하게 여기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수다원의 과위를 얻지 못하면 안 된다. 나는 반드시 수다원의 과위를 얻되 다만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만 한다. 나아가 나는 벽지불의 도를 얻지 못하면 안 되니, 나는 반드시 얻되 다만 그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야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얻고는 머무르지 않아야만 한다. 왜냐 하면, 나는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다시는 그 밖의 다른 마음은 없고 일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한 마음[一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향할 뿐 다른 마음을 멀리 여의므로 몸ㆍ입ㆍ뜻으로 짓는 업이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응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 한 마음에 머물면서 능히 보리의 도[菩提道]를 내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보리의 도를 낼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온갖 법은 나는[生] 것이 없느니라. 어떤 것을 나는 것이 없다고 하느냐 하면, 짓는 것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는 그것이니, 온갖 법이 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법 모양[法相]은 항상 머무르는 것이 아닌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이 모든 법의 법 모양은 항상 머물러 있나니, 중생이 이 법이 머무르는 법의 모양임을 모르기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보리의 도를 내며 이 도로써 중생들을 생사에서 구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나는[生] 도(道)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나지 않는[不生] 도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세존이시여, 나지도 않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닌 도로써 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리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도로써 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 또한 도가 아닌 것으로써 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니, 수보리야,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라면, 지금 보살이 아직 부처님이 되지 않았을 때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하거늘 어떻게 다타아나가도(多陀阿伽度)ㆍ아라하(阿羅訶)ㆍ삼먁삼불타(三藐三佛陀)이신 모든 부처님에게는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은 보리를 얻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보리를 얻지 않습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부처님이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가 물은 것과 같아서 보살일 때도 역시 보리를 얻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과 37조도법을 완전하게 갖추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완전하게 갖추며, 여금강삼매(如金剛三昧)를 완전하게 갖추어 한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면 이때를 부처님이라 하니, 온갖 법 가운데서 자재(自在)하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보살마하살은 처음에 뜻을 내어서부터 스스로가 몸의 거친 업[身麤業]을 제거하고 입의 거친 업[口麤業]을 제거하며 뜻의 거친 업[意麤業]을 제거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을 깨끗하게 해 주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몸의 거친 업이라 하고 입의 거친 업이라 하며 뜻의 거친 업이라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살생(殺生) 내지는 삿된 소견[邪見]의 착하지 못한 업[不善業]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이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간탐하는 마음과 계율을 깨뜨리는 마음과 성을 내는 마음과 게으른 마음과 산란한 마음과 어리석은 마음을 바로 보살의 뜻의 거친 업이라 하며, 또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을 바로 보살의 몸과 입의 거친 업이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4념처(念處)의 행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바로 보살의 거친 업이라 하며, 4정근(正勤)과 4여의족(如意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분(覺分)과 8성도분(聖道分)과 공삼매(空三昧)와 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매를 멀리 여의는 것도 또한 보살의 거친 업이라 하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수다원의 과위를 탐내고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를 탐내며 벽지불의 도를 증득한다면,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의 거친 업이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위에서부터 수보리는 언제나 갖가지로 공한 법을 물었고 그때 모임에 있는 대중들의 의심 때문에 그는 이미 고요히 사라지고[寂滅] 희론이 없는 법[無戱論法]을 체득했으면서도 오히려 다시 많은 질문을 했나니, 그러므로 묻지 않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다.
또 어떤 보살과 하늘들은 선정에 깊이 들어 있으면서 말하기는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법의 이익을 얻고자 했었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말을 하지는 않으면서도 마음으로는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문】수보리는 말이 없었는데, 세존께서는 말씀으로 대답하신 것인가?
【답】부처님의 몸빛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질 않으니, 마치 빛깔에 싫증냄이 없는 것처럼 음성에 있어서도 또한 이와 같았다. 비록 말씀을 하신다 하더라도 미세한 선정의 행에 방해되지 않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또 부처님은 고요히 사라진 모양에 편안히 서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에 머물러 온갖 법의 착한 것과 착하지 못한 것 등을 분별하지 않으셨으며, 중생이 의심이 있어서 물으면 부처님은 그가 묻는 것과 생각하고 있는 것을 따라 대답하셨으니, 이 때문에 수보리와는 동일하지가 않다.
수보리는 이 6바라밀 등 모든 법의 매우 깊은 이치를 들으면서도 그 끝을 얻지 못하였나니, 이 때문에 “어떤 것이 보살의 도이기에 이 도를 행하면서 깨끗하고 집착이 없이 6바라밀 등의 착한 법을 장엄하는 것일까”라고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그의 뜻을 아시고 수보리에게는 이로운 것이 비록 적더라도 모든 보살들을 더욱 이롭게 하기 위하여 대답하시기를 “6바라밀 등이 바로 보살의 도이니라”고 하셨다.
6바라밀은 바로 보살이 처음 발심할 때의 도이다. 다음으로 4선(禪)과 8배사와 9차제정 및 37도품(道品)을 행하는 것은 다만 열반을 구한 것일 뿐이며, 18공(空)과 부처님의 10력 등의 미세한 법은 부처님의 도만을 구하기 위해서이다.
6바라밀의 도는 거의 모두가 중생들을 위하기 때문이요 37품 등은 다만 열반을 구할 뿐이며, 18공 등은 열반 가운데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초월하여 보살 지위의 도에 들어간다. 이 세 가지는 모두가 생신(生身) 보살이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온갖 법은 모두 보살의 도이니, 이 법의 성품은 생신의 보살이 행하는 것으로 모든 법에 좋고 나쁨이 있음을 보지 않는다. 모든 법의 평등한 모양에 편히 서 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마땅히 모든 법을 배워야 한다. 만일 하나의 법이라도 배우지 않으면 일체종지를 얻을 수 없다”고 하셨다. ‘온갖 법을 배운다’고 함은, 온갖 종류의 방편문으로써 생각하고 헤아리며 닦고 관찰하여 통달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은 하나의 모양이어서 이른바 공하다면 어떻게 보살은 온갖 법을 배우겠는지요? 이는 희론이 없는 모양의 법에서 희론을 하시는 것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른바 모든 법에 대하여 ‘이것이다, 저것이다’ 한다는 것이니, 이 희론의 모양을 간략히 설명하자면 ‘이것은 동쪽이다, 저것은 서쪽이다, 이것은 위다, 이것은 아래이다, 이것은 항상 있다, 이것은 무상하다, 이것은 진실이다, 이것은 거짓이다, 이것은 세간이다, 이것은 출세간이다, 나아가 이것은 2승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고 하는 것이다.
부처님은 그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온갖 법은 공한 모양이니, 만일 법이 실로 일정하여 공하지 않다면 곧 그것은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는 것이다.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에 4제[諦]도 없고 4제가 없기 때문에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승보(僧寶)도 없나니, 이와 같다면 3보 등의 모든 법은 모두 파괴된다.
지금 모든 법은 진실로 공하고 나아가 공한 모양까지도 공하건만, 중생이 어리석고 뒤바뀐 까닭에 집착한다. 이 때문에 중생들에 대하여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켜, 그들을 구해내려고 부처님 몸의 힘을 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그 말씀을 믿고 받게 하며, 뒤바뀜을 버리고 모든 법의 실상에 들게 하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비록 모든 법이 공인 줄 안다고 하더라도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분별하여 말하는 것이니, 만일 중생들이 스스로 모든 법이 공인 줄 안다면 보살은 다만 스스로 공한 모양 가운데에 머무를 뿐이요, 온갖 법을 배우고 분별할 필요조차도 없다.
보살은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생각하기를 ‘온갖 법은 일정하거나 진실한 성품이 없고 다만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길 뿐이며, 이 모든 인연도 또한 저마다 화합으로부터 생긴 것이다. 이에 필경공에 도달하게 되니, 필경에 공하다는 오직 이 하나의 법만이 진실이요 그 밖의 다른 것은 성품이 없기 때문에 모두가 거짓이다.
나는 비롯함이 없는 세상으로부터 이 거짓된 법에 집착하여 6도(道) 가운데서 싫어하면서도 고통을 받았었다. 나는 이제 이 3세(世)와 시방(方)의 부처님의 제자요, 반야는 바로 나의 어머니이다. 이제부터 다시는 거짓된 법을 따르지 말아야 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나아가 필경 공한 것까지도 또한 집착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의 법 즉 단바라밀 등이겠느냐”고 하셨다.
그때에 보살은 보살의 도를 밝게 비추며 그 마음이 안온해지면서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다만 집착하는 마음만을 끊으면 도(道)는 저절로 이르리라’고 하였다. 이런 일은 알고 나서는 생각하기를 ‘중생은 세간에 깊이 집착하지만 필경 공이요 또한 그 공도 성품이 없어서 머무르는 곳이 없으므로 중생들은 믿어 받기가 어렵다’고 하면서,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을 믿어 받게 하기 위하여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다.
수행을 일으키는 것은 바로 중생을 제도하기 위한 방편의 법이다.
중생들의 마음 작용이 나아가는 데를 관찰하여 ‘어느 법을 좋아하고 어느 일을 생각하며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고, 관찰하는 때에 중생들이 집착하는 곳은 모두가 다 거짓이고 뒤바뀐 것이며 기억하고 생각하며 분별하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이어서 그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때에 보살은 크게 기뻐하며 생각하기를 ‘중생은 제도하기 쉬울 뿐이다. 왜냐하면, 중생이 집착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에게 외아들이 있는데 그 아들은 아주 더러운 데에 앉아 흙을 모아 곡식이라 하고 풀과 나무를 길짐승ㆍ날짐승이라 하면서 좋아하며 애착하고 있을 때에 어느 다른 사람이 그것들을 빼앗아 버리면 성을 내고 슬피 운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이 아들이 지금은 비록 애착하고 있다 하더라도 이런 일은 쉽게 그만둘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작은 것이건 큰 것이건 간에 그대로 놓아두는 것과 같다. 왜냐 하면, 이 물건들은 진짜가 아니기 때문이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중생들이 부정하고 냄새나는 몸과 5욕에 애착하고 있는 것은 모두가 덧없고 갖가지 괴로움의 원인이라는 것을 관찰하면서 이 중생이 신근(信根)등 5선근(善根)이 성취될 때에는 곧 버리고 여의게 되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어린 아이가 집착하는 것이
실로 진짜 물건이라면 비록 나이가 백 살에 이른다 하더라도 더욱 더 집착하며 버릴 수 없을 것이요, 만일 중생이 집착하고 있는 물건이 결정코 진실이요 존재하는 것이라면 비록 신근 등 5근을 얻는다 하더라도 더욱 더 집착하게 되므로 역시 여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든 법은 공하고 거짓이어서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번뇌 없는 깨끗한 지혜의 눈을 얻을 때에는 곧 집착하던 것을 멀리 여의고 스스로 크게 부끄러워하게 된다. 마치 미친병이 도졌을 때에 한 일은 법다운 것이 아니므로 정신이 들은 뒤에 그것을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면목 없어 하는 것과 같다.
보살은 그 중생이 제도되기 쉽다는 것을 알고 나서는 반야 가운데에 편히 머물러 방편의 힘으로 중생을 교화하면서 “그대들은 보시를 행하여 넉넉한 재물을 얻게 되었다 하여 이 보시의 과보를 믿고 뽐내지 말 것이다. 이 안의 것은 견실한 것이 없고 모두가 언젠가는 파괴되어 아직 보시하지 못했을 때와 다름이 없게 되니, 지계(持戒) 등에서 18불공법까지도 또한 그러하다.
이 모든 법은 비록 깨끗하여 크게 이익이 있다고 해도 모두가 그것은 유위(有爲)의 법이어서 인연으로부터 생기며 제 성품이 없다. 그대들이 만일 이런 법에 집착한다면 고뇌를 낳는 것이니, 마치 이글거리는 쇠구슬이 비록 보물이라 하더라도 잡으면 곧 손을 데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보살은 중생을 교화하며 보살도를 행하면서 자기 자신이 집착하지 않고 또한 중생들에게도 집착하지 않도록 말해 주며, 집착이 없는 마음으로써 단바라밀을 행하기 때문에 단(檀) 가운데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머무르지 않는다’고 함은, 이른바 보시할 때에 세 가지 모양을 취하지 않고 또한 과보에 집착하여 뽐내면서 죄업을 내지도 않으며, 보시의 과보가 파괴되고 소멸할 때에도 또한 괴로움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니, 시라바라밀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머무르지 않는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보살이 공에 깊이 들어가서 모든 법의 성품을 보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조그마한 일로써는 만족하게 여기지 않기 때문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다”고 하셨다. 이 보살은 다른 마음이 없이 다만 한결같이 보리의 도[菩提道]를 낼 뿐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은 생겨나는 것이 없다[無生] 하면 어떻게 보살은 보리의 도를 내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가하시면서 “온갖 법은 생겨나는 것이 없다. 나는 실로 곳곳에서 모든 법은 생겨나는 것이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범부를 위하여 말한 것이 아니요, 다만 무작해탈(無作解脫)을 얻고 세 가지 업을 일으키지 않는 이를 위하여 말했을 뿐이다”고 하셨다.
다시 묻기를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친히 ‘부처님이 계시거나 계시지 않거나 간에 모든 법의 법 모양은 항상 머무른다’고 말씀하셨습니다만, 마치 성인의 법 모양이 공한 것처럼 범부도 또한 이와 같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그가 한 말을 인가하시면서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항상 머무른다. 중생들이 알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보리의 도[菩提道]를 일으키는 것이니, 다만 범부들의 뒤바뀐 법을 제거하기 위하여 도(道)라 할 뿐이다. 만일 결정코 집착할 만한 도가 있다고 한다면 그것도 바로 뒤바뀐 것이다. 도와 도 아닌[非道] 것이 평등한 그것이 바로 도이다. 그러므로 따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떻게 보리를 얻을 수 있습니까. 나는 도[生道]로써 얻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나는 도라 하면, 보살이 이 유위의 법의 나고 없어지는 모양을 관찰하면서 이것을 진실이라 여기기 때문에 ‘아니니라’고 하셨다. 마치 앞에서 ‘이글거리는 쇠구슬’에 대한 비유로 말씀하신 것과 같다.
나지 않는 법[不生法]이면 곧 그것이 하는 것도 없고[無爲] 짓는 것도 없는[無作] 법이기 때문에 역시 보리를 얻을 수 없나니, 나거나 나지 않는 이 두 가지는 다 같이 허물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것도 아니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니면서 보리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아니니라”고 대답하신 것이다.
【문】만일 나는 것과 나지 않는 것 두 가지가 다 같이 허물이 있다면, 나는 것도 아니고[非生] 나지 않는 것도 아닌[非不生] 것은 허물이 있지 않아야 하거늘, 무엇 때문에 “얻지 못한다”고 하시는가?
【답】만일 나는 것도 아니고 나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은 좋은 것이요 저것은 추한 것이라고 분별한다면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을 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허물이 있다’고 하신 것이다. 만일 집착하지 않을 수 있다면 바로 그것이 보리의 도(道)이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네 구절[四句]로써도 얻지 못하면 어떻게 하여 도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도(道)로써도 하지 않고 도 아닌[非道] 것으로써도 하지 않으면 곧 보리를 얻는다”고 하셨다. 왜냐 하면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이기 때문이다.
보리를 모든 법의 실상이라 하므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이 얻게 되는 구경(究竟)의 실상이어서 변하거나 달라지는 것도 없다. 온갖 법은 보리 가운데로 들어가 모두가 고요히 사라지는 모양이 되는 것은 마치 온갖 물이 큰 바다 가운데로 들어가 똑같이 하나의 맛이 되는 것과 같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보리의 성품이 곧 도의 성품이다”고 하신 것이니, 만일 보리의 성품과 도의 성품이 다르다면 보리를 이름하여 “희론이 없는 고요히 사라진 모양[無戱論寂滅相]”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때문에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이다”고 말한 것이다.
또한 두 가지 법이 다르다면 도를 행하여도 보리에 도달하지 못해야 한다.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원인과 결과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다시 여쭈기를 “만일 그렇다면 보살이 도를 행하고 있으면 마땅히 곧 부처님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도가 곧 보리이기 때문입니다. 또 부처님도 보살이어야 하니, 왜냐 하면 보리가 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무엇 때문에 차별이 있어서 부처님에게는 10력 등과 32상과 80수형호가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수보리는 새로 배우는 보살들을 위하여 분별하면서 부처님께 “보살은 마땅히 부처님이어야 합니다”고 따지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반문(反問)하여 대답하시기를 “부처님은 보리를 얻는 것이더냐”고 하셨다.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왜냐 하면, 보리는 부처님을 여의지 않고 부처님은 보리를 여의지 않아서 두 가지 법이 화합한 까닭에 부처님이 그대로 보리이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따지면서 ‘보살이 곧 부처님이다’라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것이 전체의 모양[總相]으로서의 대답이다.
【문】부처님은 바로 중생이요 보리는 바로 법이거늘 어떻게 부처님이 곧 보리라 하는가?
【답】먼저 32상(相)이 있어서 몸을 장엄하고 6바라밀 등의 공덕이 있어서 마음을 장엄한다 하여도 부처님이라고는 하지 않으며,
보리를 얻은 까닭에 부처님이라 이름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과 보리는 다르지 않다’고 한다.
미묘하고 깨끗한 5중(衆)의 화합을 임시로 이름 붙여 부처님이라고 한 것이니, 곧 그것이 5중이다. 5중은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을 여의지 않고 보리가 곧 5중의 실상이며 온갖 법은 모두가 보리에 들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부처님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부처님이다. 다만 범부만 마음속에서 다름이 있다고 분별할 뿐이다.
【문】그대는 앞의 논의(論議)에서 말하기를 “보리와 도는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다”고 하였는데, 경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도가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도이며, 부처님이 곧 보리요 보리가 곧 부처님이다”라고 말씀하는가?
【답】동일하다, 다르다 하는 것은 비록 다 같이 진실하지 않다 하더라도 동일[一]하다는 말을 많이 쓰기 때문에 여기에서 “보리가 곧 도요 도가 곧 보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잘못이 없다.
‘항상 있다[常]’는 것과 ‘무상[無常]하다’는 이 두 가지 치우친 견해에서도 ‘항상 있다’고 함은 번뇌를 많이 내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고, ‘무상하다’고 함은 능히 뒤바뀜을 깨뜨리기 때문에 많이 사용하지만, 그 일이 이미 이루어져 있으면 역시 무상함도 버리게 된다.
이 가운데서도 이와 같아서, 만일 갖가지 다른 법을 관찰하면 그 때문에 집착하는 마음을 많이 내지만, 만일 모든 법이 한 모양이어서 즉 무상하고 괴롭고 공하다 하는 등으로 관찰하면 이때에는 번뇌가 생기지 않고 집착하는 마음도 적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이 동일하다는 것을 많이 사용한다. 그러나 진실한 이치[實義] 가운데서는 이 동일하다는 것도 사용하지 않나니, 만일 동일하다는 것에 집착하면 곧 또 그것이 우환거리가 된다.
또 다른 것이 없기 때문에 동일함도 또한 얻을 수 없나니, 서로 대비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다만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동일한 모양도 취하지 않기 때문에, 말한다 해도 잘못이 없을 뿐이다. 동일하다는 것도 진실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이 곧 부처님일 수는 없다.
또 여기서 부처님은 다시 수보리에게 대답하시면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리는 비록 조용히 사라진 모양이라 하더라도 보살은 6바라밀 등의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추고 금강삼매(金剛三昧)에 머물러 한 생각과
상응하는 지혜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어야 그때에 온갖 법 가운데서 자재하게 되면서 부처님이라는 이름을 얻는다”고 하셨다.
보살은 비록 도와 보리가 다르지 않다 함을 안다고 하더라도 아직 모든 공덕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이라 하지 못하며, 또 부처님은 모든 일을 다 마쳐서 원(願)과 행(行)이 만족한 까닭에 보살이라고 하지 않나니, 얻는 이는 바로 부처님이요, 법이 바로 보리이며, 보리를 구하는 이가 곧 보살이다.
수보리는 부처님으로부터 보리의 모양과 도의 모양을 듣고 중생을 성취시키고 나서 이제는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묻고 있는데, 그것은 모든 아라한이나 벽지불은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일에 대하여 알 수 있는 어떤 힘도 없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문】어떤 것이 부처님의 국토[佛土]를 깨끗하게 하는 것인가?
【답】부처님 국토라 함은, 백억의 일월(日月)과 백억의 수미산(須彌山)과 백억의 4천왕(天王) 등의 모든 하늘이 있는 것을 바로 3천대천세계라 하며, 이와 같은 등 한량없고 끝이 없는 3천대천세계를 하나의 부처님 국토[一國土]라 하는데,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불사(佛事)를 지으신다.
부처님은 항상 낮의 세 때[三時]와 밤의 세 때에 불안(佛眼)으로써 중생을 두루 관찰하면서 ‘그 누가 선근(善根)을 심어야 하는가, 그 누가 잘 성취되었고 더욱 자라야만 하는가. 그 누가 선근이 성취되었고 제도되어야 하는가’를 자세히 보신다. 이것을 보신 뒤에는 신통의 힘으로써 그 보신 바에 따라 중생을 교화하신다.
마음이 바깥 인연을 따르면서 뜻대로 되는 일을 만나도 성내는 번뇌를 내지 않고, 깨끗하지 못하거나 무상한 것 등의 인연을 만나도 탐욕 등의 번뇌를 내지 않으며, 있는 바 없고 공한 인연을 만나도 어리석음 등의 모든 번뇌를 내지 않게 한다.
이 때문에 모든 보살은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제도하기 쉽게 하기 위하여 그 국토 안에는 모자라는 것이 없게 하며, 나[我]라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간탐과 성냄 등의 번뇌를 내지 않는다.
어떤 부처님 국토에는 온갖
나무에서 언제나 모든 법의 실상에 대한 음성이 나오나니, 이른바 ‘생겨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 일어나는 것도 짓는 것도 없다’는 등이 그것이다. 중생들은 이 묘한 음성만을 듣고 다른 소리는 듣지 않으며, 중생 등은 근기가 영리하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다. 이와 같은 등으로 부처님 국토를 장엄하는 것을 부처님의 국토를 깨끗하게 한다고 하나니, 마치 『아미타경(阿彌陀經)』 등의 여러 경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보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스스로 거친[麤]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깨끗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거친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셨다.
【문】만일 보살이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려면 이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고 신통의 바라밀에 머무른 연후에야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할 수 있겠거늘, 여기서는 무엇 때문에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거친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는가?
【답】세 가지 업[三業]을 깨끗하게 하는 것은 비단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것만이 아니요, 온갖 보살의 도에서도 모두 이 세 가지 업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처음에 몸과 입과 뜻의 업을 깨끗하게 하고 그 뒤에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이 몸을 깨끗하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도 깨끗하게 한다. 왜냐 하면, 한 사람만이 그 국토에 태어나는 것이 아니요 모두가 함께 인연을 짓고 있기 때문이다.
안의 법[內法]과 바깥 법[外法]으로 착하거나 혹은 착하지 못한 인연을 짓나니, 거친 말[惡口]을 하는 업이 많기 때문에 땅에 가시나무가 생기고, 아첨과 속임수와 굽은 마음 때문에 땅은 높고 낮은 데가 있어 평평하지 않으며, 간탐이 많기 때문에 가뭄이 들면서 기후가 고르지 못하고 땅에는 모래와 자갈이 생기게 된다.
위의 모든 악을 짓지 않으면 그 때문에 땅은 평평하고 바르면서 진기한 보물이 많이 나오나니, 마치 미륵부처님이 출현할 때에는 사람들이 모두 10선(善)을 행하고 있기 때문에 땅에는 진기한 보물들이 많은 것과 같다.
【문】보시 등 모든 착한 법으로도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과보를 얻게 되거늘, 무엇 때문에 다만 세 가지 업을 깨끗하게 한다고 하시는가?
【답】비록 선악의 모든 법은 바로 괴로움과 즐거움의 인연인 줄 안다 하더라도 온갖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에는 도를 얻을 때에 지혜를 큰 것[大]으로 삼고, 마음을 가다듬는 가운데서는 정(定)을 큰 것으로 삼으며, 업을 짓는
때에는 사(思)를 큰 것으로 삼는 것과 같다.
이 사업(思業)을 얻은 뒤에는 몸과 입과 뜻의 업을 일으키며 보시와 선정 등은 이 사(思)를 첫머리로 삼나니, 비유하건대 마치 옷을 기울 때에는 바늘에 이끌려가게 되는 것과 같다. 뒷세상의 과보를 받을 때에는 업력(業力)을 큰 것으로 삼나니, 이 때문에 세 가지 업을 말하여 온갖 착한 법을 포섭하는 것이다.
의업(意業) 가운데서는 온갖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을 모두 다 포섭하고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에서는 온갖 형상 있는 법[色法]을 포섭하나니, 사람의 몸에 이 세 가지를 행하여 복덕을 두루 갖추게 되면 곧 국토가 깨끗하게 된다. 안의 법이 깨끗하기 때문에 바깥 법도 깨끗하게 되나니, 마치 얼굴이 깨끗하기 때문에 거울 속의 형상도 깨끗한 것과 같다. 마치 『비마라힐경(毘摩羅詰經)』에서 “살생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오래 산다”고 말한 것과 같다.
【문】몸과 입과 뜻의 거친 업[麤業]의 이런 일들은 알기가 쉽거늘,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묻는 것인가?
【답】거칠고[麤] 미세한[細]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도를 구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보시는 거친 선[麤善]이지만 속인에 있어서는 미세한 선[細善]인 것과 같고, 소승 가운데서는 착하지 못한 업은 거친 것이 되고 착한 업은 미세한 것이 되지만 마하연(摩訶衍)에서는 착한 것을 취하는 법의 모양이나 나아가 열반까지도 모두 거친 것이라고 하는 것과 같나니, 거칠고 미세한 것이 일정하지 않기 때문에 묻는 것이다.
부처님은 차례로 거친 업의 모양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산목숨을 빼앗는 것 내지는 삿된 소견이니, 이 세 가지 몸에 대한 업과 네 가지 입에 대한 업과 세 가지 뜻에 대한 업을 모두 거친 것이라 한다”고 하신다.
또한 보살의 6바라밀의 법을 파괴하는 간탐 등을 모두 거친 것이라 한다.
【문】앞에서 10선도(善道)를 말씀할 적에 이미 간탐 등이 포섭되었거늘, 무엇 때문에 다시 따로 말씀하는가?
【답】이 여섯 가지 법은 10불선도(不善道)에 들어가지 않으니, 10불선도는 모두가 중생을 괴롭히는 법이다. 이 여섯 가지 법은 다만 중생을 괴롭히는 것만은 아니어서 마치 간탐하는 마음과 같이 자신의 재물만 아낄 뿐이요 중생을 괴롭히지 않는다.
탐내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다른 이의 재물만을 탐내고 중생은 괴롭히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탐내는 마음이 더욱 왕성해져서
구해도 얻지 못하게 되면 헐뜯고 해치려고 하는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업도(業道)라고 하나니, 업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성을 내는 마음도 이와 같다. 작은 것은 업도라 하지 않으며 그것으로 나쁜 곳에 나아가기 때문에 도(道)라고 하나니, 이 때문에 따로 여섯 가지 법을 말하여도 허물할 것이 없다.
【문】6바라밀 가운데서 이미 계율에 대하여 설명했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계율이 깨끗하지 않은[戒不淨] 것을 말씀하는가?
【답】파계(破戒)의 법이란 바로 살생 등의 거친 죄[麤罪]를 말한다. 계율이 깨끗하지 못한 것은 미세한 죄이어서 중생을 괴롭히지는 않나니, 마치 술을 마시는[飮酒] 것 등은 10불선도에 들어가지 않는 것과 같다.
또 5중계(衆戒)를 깨뜨리는 것을 파계라 한다. 받은 계율을 깨뜨리지 않으나, 항상 3독(毒)으로 덮혀 있어서 그 마음이 계율을 기억하지 못하며, 천상의 복에 회향하여 삿된 소견으로 계율을 지니는 것이니, 이와 같은 것 등을 계율이 깨끗하지 못하다고 한다.
또 만일 보살이 마음에 4념처 등의 37품(品)과 3해탈문(解脫門)을 멀리 여의면 이것을 거친 업[麤業]이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이 가운데서의 마음은 모두가 진실한 법을 관찰하여 열반을 따르고 세간은 따르지 않지만, 만일 4념처 등의 법을 벗어나면 마음이 곧 산란해지기 때문이다. 마치 뱀이 다닐 때에는 본래 성품이 구불구불 가기를 좋아하나, 만일 대나무 통[竹筒] 안에다 넣어 두면 곧게 되다가도 대나무 통에서 나오면 도로 구부러지는 것과 같다.
또 만일 보살이 수다원 과위[須陀洹果]의 증득을 탐내면 이것도 거친 것이 된다. 마치 사람이 부처님께서 “수다원의 과위를 얻으면 3악도에 떨어지지 않고 한량없는 고통을 다하게 되는 것이 50유순(由旬)이나 되는 연못의 물[池水]과 같지만, 그 밖의 다른 데에 있으면 한 방울 두 방울의 물방울과 같다”고 하는 말씀을 듣고, 곧 탐내는 마음을 내는 것과 같다. 그 마음이 견고하지 못하기 때문에 본래 부처님이 되기를 구한 것은 중생들을 위한 것이었으나 지금은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증득을 취하려 하는 것이므로 이것은 바로 부처님을 기만하고 또한 중생들까지 저버리는 것이니, 이 때문에 거칠다고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손님을 청하여 음식을 대접하려 하다가 끝내 음식을 주지 않으면 이것은 곧 거짓말을 하고 손님을 배반하는 것이니,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처음 발심할 때에
‘나는 반드시 부처님이 되어서 온갖 중생들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는 서원을 세웠으면서도 수다원을 탐낸다면 곧 온갖 중생들을 배반하는 것이다. 마치 수다원을 탐내는 것처럼 나아가 벽지불의 도를 탐내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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