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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101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89권

by Kay/케이 2024. 4.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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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89

 

대지도론 제89권

78. 사섭품을 풀이함 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김형준 개역


【經】“무엇을 80수형호(隨形好)라 하느냐 하면, 하나는 정수리를 볼 수 없고, 둘은 코가 곧고 높고 잘 생겨서 구멍이 드러나지 않으며, 셋은 눈썹이 초승달 같고 남빛을 띤 유리(琉璃)의 빛과 같으며, 넷은 귓볼이 두툼하며, 다섯은 몸이 견실하여 마치 나라연(那羅延)1)과 같으니라.
여섯은 뼈마디가 얽힌 것이 쇠사슬과 같고, 일곱은 몸을 한꺼번에 돌려 돌아보는 것이 코끼리 왕과 같으며, 여덟은 걸어 다닐 적에는 발이 땅에서 네 치쯤 뜨면서 도장 무늬가 나타나고, 아홉은 손발톱이 적동색을 띠면서 얇고 윤택하며, 열은 무릎 뼈가 견고하게 붙어 있으며 둥글고 아름다우니라.
열 하나는 몸이 정결하며 깨끗하고, 열 둘은 몸이 부드럽고 유연하며, 열 셋은 몸이 굽지 않고, 열 넷은 손가락이 길고 가늘고 둥글며, 열 다섯은 손가락이 무늬로 장엄되어 있느니라.
열 여섯은 맥(脈)이 깊고, 열 일곱은 복사뼈가 보이지 않으며, 열 덟은 몸에 윤기가 있고 광택이 나며, 열 아홉은 몸이 잘 유지되어 구불구불하게 걷지 않으며, 스물은 몸이 원만하고 충실하느니라.
스물 하나는 생각[識]이 원만하고 충실하며, 스물 둘은 몸을 가지는 태도가 의젓하며, 스물 셋은 머무르는 곳이 안정되어 동요시킬 이가 없으며, 스물 넷은 그 위엄이 모든 것에 떨치며, 스물 다섯은 온갖 중생들이 그를 보기를 좋아하느니라.
스물 여섯은 얼굴이 크거나 길지 않으며, 스물 일곱은 용모가 단정하여 흩어진 모습이 없으며, 스물 여덟은 얼굴이 잘 생겨 원만하고, 스물 아홉은 입술이 붉어서 마치 빈바 열매[頻婆果]의 빛깔과 같으며, 서른은 음성의 울림이 아주 깊으니라.
서른 하나는 배꼽이 깊고 둥글며 아름답고, 서른 둘은 털이 오른편으로 말려 있으며, 서른 셋은 손과 발이 원만하게 생기고,
서른 넷은 손과 발이 뜻대로 잘 움직이며, 서른 다섯은 손금이 분명하고 똑바르니라.
서른 여섯은 손금의 줄무늬가 길고, 서른 일곱은 손금의 줄무늬가 중간에 끊어지지 않으며, 서른 여덟은 일체의 악심을 지닌 중생이 보면 마음이 화평해지고 기뻐하며, 서른 아홉은 얼굴이 넓고 매력적이며, 마흔은 얼굴이 맑고 원만하여 마치 보름달과 같으니라.
마흔 하나는 중생의 뜻에 따라 기뻐하고 함께 말을 하며, 마흔 둘은 털구멍으로부터 향기가 나오며, 마흔 셋은 입으로부터 더 없이 좋은 향기가 풍기며, 마흔 넷은 몸의 위용이 사자와 같으며, 마흔 다섯은 가고 멈추고 하는 것이 코끼리와 같으니라.
마흔 여섯은 걷는 법이 거위왕과 같고, 마흔 일곱은 머리가 마치 마타나(摩陀那)의 열매처럼 생겼으며, 마흔 여덟은 일체의 음성을 완전히 갖추었으고, 마흔 아홉은 송곳니가 날카로우며, 쉰은 혀의 빛깔이 붉으니라.
쉰 하나는 혀가 얇고, 쉰 둘은 털이 붉은 빛깔이며, 쉰 셋은 털이 맑고 깨끗하며, 쉰 넷은 눈이 넓고도 길며, 쉰 다섯은 몸의 구멍 모양이 완전하게 갖추어 있느니라.
쉰 여섯은 손발이 붉고 흰 것이 마치 연꽃과 같고, 쉰 일곱은 배꼽이 밖으로 불거지지 않으며, 쉰 여덟은 배가 툭 튀어 나오지 않고, 쉰 아홉은 허리가 가늘며, 예순은 몸이 한편으로 기울지 않느니라.
예순 하나는 몸에 무게감이 있고, 예순 둘은 그 몸의 부분마다 다 크며, 예순 셋은 키가 크고, 예순 넷은 손과 발이 깨끗하고 부드럽고 광택이 나며, 예순 다섯은 몸의 광명이 곁으로 한 길을 비추느니라.
예순 여섯은 광명이 몸을 비추면서 걸어 다니고, 예순 일곱은 중생들을 평등하게 보며, 예순 여덟은 중생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예순 아홉은 그 중생에 따라 음성이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으며, 일흔은 법을 설할 적에는 차별을 두지 않느니라.
일흔 하나는 중생들의 언어에 따라 설법하고, 일흔 둘은
한 번 낸 소리로 여럿의 음성에 화답하며, 일흔 셋은 차례대로 인연을 따라 법을 설하고, 일흔 넷은 온갖 중생이 그 상(相)을 다 볼 수는 없으며, 일흔 다섯은 보는 이들이 조금도 싫증내는 일이 없느니라.
일흔 여섯은 머리카락이 길고 아름다우며, 일흔 일곱은 머리카락이 어지럽지 않으며, 일흔 여덟은 머리카락이 말려있어 보기 좋으며, 일흔 아홉은 머리카락의 빛깔이 아름다워서 마치 푸른 구슬과 같으며, 여든은 발에 덕상(德相)이 있느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곧 80수형호이니, 부처님의 몸이 성취된 것이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두 가지 보시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나니, 이른바 재물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이니라. 이것이 곧 보살의 희유하고 미치기 어려운 일이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사랑으로 하는 말[愛語]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6바라밀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그대들은 6바라밀을 행하여 온갖 착한 법을 거두어야 한다’고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이로운 행[利行]으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오랜 세월 동안 중생들을 교화하며 6바라밀을 행하게 하느니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일을 같이함[同事]으로써 중생을 거두어 주느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다섯 가지 신통의 힘으로써 갖가지로 변화하여 5도(道) 안에 들어가서 중생들과 함께 일을 같이 하나니, 이 네 가지 일로써 중생들을 거두어 주느니라.
또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을 교화하면서 말해주기를 ‘선남자여, 모든 글자[字]를 잘 배우고 분별해야 하고 또한 한 자[字]에서 42자(字)까지를 잘 알아야 한다. 온갖 언어(言語)는 모두 첫 자[初字]의 문에 들어가고 온갖 언어는 또한 두 번째 자의 문에서 마흔 두 번째 자의 문까지 들어간다. 온갖 언어가 모두 그 가운데에 들어가니, 한 자는 모두
42자에 들어가고 42자도 또한 한 자에 들어간다’고 하느니라. 이 중생은 마땅히 이와 같이 42자를 잘 배우고, 42자를 잘 배우고 나서는 글자의 법을 잘 설명하며, 글자의 법을 잘 설명한 뒤에는 글자가 없는 법[無字法]도 잘 설명하느니라.
수보리야, 마치 부처님이 글자의 법을 잘 아는 것처럼 글자를 잘 알고 글자 없는 법도 잘 알며, 글자 없는 법을 위하여 글자의 법을 말하나니, 왜냐 하면 수보리야, 온갖 이름과 글자를 초월한 까닭에 부처님의 법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을 끝내 얻을 수 없다면 법도 또한 얻을 수 없습니다. 법의 성품도 또한 얻을 수 없으니, 필경공(畢竟空)이기 때문이요 무시공(無始空)이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선(禪)바라밀ㆍ비리야(毘梨耶)바라밀ㆍ찬제(羼提)바라밀ㆍ시라(尸羅)바라밀ㆍ단(檀)바라밀을 행하며,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과 37조도법(助道法)과 18공(空)을 행하며,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삼매와 8배사(背捨)와 9차제정(次第定)과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를 행하면서 어떻게 과보로 얻은[報得] 다섯 가지 신통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는지요?
중생들은 실로 얻을 수 없으며, 중생이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물질[色]을 얻을 수 없고 나아가 인식[識]도 얻을 수 없습니다. 5중(衆)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6바라밀에서 80수형호까지도 모두 얻을 수 없으니, 이 얻을 수 없는 가운데서는 중생도 없고 물질도 없으며 나아가 80수형호도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는지요?
세존이시여, 보살은 반아바라밀을 행할 때에
보살조차도 오히려 얻을 수 없거늘 하물며 보살의 법이 있겠습니까.”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의 말과 같아서 중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그것은 곧 내공(內空)이요 외공(外空)이며 내외공(內外空)이요 공공(空空)이며 대공(大空)이요 제일의공(第一義空)이며 유위공(有爲空)이요 무위공(無爲空)이며 필경공(畢竟空)이요 무시공(無始空)이며 산공(散空)이요 제법공(諸法空)이며 자상공(自相空)이요 성공(性空)이며 불가득공(不可得空)이요 무법공(無法空)이며 유법공(有法空)이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5음(陰)이 공하고 12입(入)이 공하고 18계(界)가 공하며, 12인연(因緣)도 공하며, 4제(諦)도 공하고 나[我]도 공하며, 영혼[壽者]과 목숨[命者]과 나는 이[生者]와 양자(養者)와 육자(育者)와 무리의 수[衆數者]2)와 사람[人者]과 짓는 이[作者]와 짓게 하는 이[使作者]와 일어나는 이[起者]와 일어나게 하는 이[使起者]와 받는 이[受者]와 받게 하는 이[使受者]와 아는 이[知者]와 보는 이[見者]도 모두 공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4선이 공하고 4무량심도 공하고 4무색정도 공한 줄 알아야 하며, 4념처가 공하고 나아가 8성도분이 공하며, 공도 공하고 무상도 공하고 무작도 공하며, 8배사도 공하고 9차제정도 공한 줄을 알아야 하느니라.
중생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10력이 공하고 4무소외도 공하며, 4무애지도 공하고 18불공법도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수다원(須陀洹)의 과위[果]도 공하고 사다함(斯陀含)의 과위도 공하며, 아나함(阿那含)의 과위도 공하고 아라한(阿羅漢)의 과위도 공하며, 벽지불(辟支佛)의 도도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며, 보살의 지위도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온갖 법은 공한 것임을 보고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 모든 공한 모양을 잃지 않나니, 이 보살이 이와 같이 관찰할 때에 온갖 법에는 장애가 없는 것임을 알며, 온갖 법에 장애가 없는 줄 안 뒤에는 둘이 아니고[不二] 분별하지 않는[不分別] 모든 법의 모양을 파괴하지 않으며, 다만 중생들을 위하여 사실대로 설법할 뿐이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이 변화로 사람을 만들고 그 변화로 된 사람이 다시 변화로 한량없는 천만억 사람을 만들었을 적에 그들로 하여금 교화하여 보시하게 하는 이도 있고 교화하여 계율을 지니게 하는 이도 있으며, 교화하여 인욕을 닦게 하는 이도 있고 교화하여 정진을 행하게 하는 이도 있으며, 교화하여 선정을 닦게 하는 이도 있고 교화하여 지혜를 닦게 하는 이도 있으며, 교화하여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을 닦게 하는 이도 있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이 모든 법을 분별하면서 파괴하는 것이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변화로 된 사람에게는 마음도 없고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조차 없거늘 어떻게 모든 법을 분별하면서 파괴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알맞게 설법하여 중생들을 뒤바뀐 자리에서 뽑아내어 그 중생으로 하여금 저마다 알맞게 머무를 자리를 얻게 하는 줄 알아야 하나니, 속박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이 물질은 속박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속박하지 않고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 물질은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것이라 그것은 물질이 되지 않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은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는 것이라 그것은 분별이 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물질은 마침내 깨끗하기 때문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내지는 유위(有爲)이거나 무위(無爲)인 온갖 법도 또한 마침내 깨끗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도 중생과 온갖 법을 얻을 수 없으며, 온갖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보살은 법에 머무르지 않음으로써 모든 법의 모양 안에 머무르나니, 이른바 물질이 공하고 나아가 유위와 무위의 법이 공함이니라. 왜냐 하면, 물질 내지는 유위와 무위의 법은 제 성품을 얻을 수 없기에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있는 바 없는 법[無所有法]은 있는 바 없는 법에 머무르지 않고 있는 법[所有法]은 있는 법에 머무르지 않으며, 제 성품의 법[自性法]은 제 성품의 법에 머무르지 않고
다른 성품의 법[他性法]은 다른 성품의 법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이 온갖 법은 모두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얻을 수 없는 법이거늘 어느 곳에서 머무르겠는가.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 모든 공으로써 능히 이와 같이 설법하고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기에 모든 부처님과 성문과 벽지불에 대하여 허물이 없느니라.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벽지불과 아라한은 이 법을 얻은 뒤에 중생을 위하여 설법을 하면서도 또한 모든 법의 모양을 옮길 수 없기 때문이니라. 다시 왜냐 하면, 여(如)와 법성(法性)과 실제(實際)는 옮길 수 없으니, 모든 법의 성품은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법성과 여와 실제를 옮길 수 없다면 물질과 법성은 다른 것이며, 물질과 여ㆍ실제도 다른 것인지요? 또한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 내지는 유위ㆍ무위의 법과 세간ㆍ출세간과 유루(有漏)ㆍ무루(無漏)와도 다른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물질은 법성과 다르지 않고 여와도 다르지 않고 실제와도 다르지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에서 유루ㆍ무루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다르지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물질이 법성과 다르지 않고 여와 다르지 않고 실제와 다르지 않으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에서 유루ㆍ무루에 이르기까지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분별해서 ‘검은 법[黑法]에는 검은 과보[黑報]로써 지옥과 아귀와 축생이 있고, 흰 법[白法]에는 흰 과보[白報]로써 이른바 모든 하늘과 사람이 있으며, 검고 흰 법[黑白法]에는 검고 흰 과보[黑白報]가 있고,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법[不黑不白法]에는 검지도 않고 희지도 않은 과보[不黑不白報]가 있어서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다’고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세속 이치[世諦] 때문에 분별하면서 과보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요,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에서 분별하는 것은 아니니,
으뜸가는 이치 안에서는 인연과 과보를 말할 수 없느니라. 왜냐 하면, 이 으뜸가는 이치에는 실로 모양도 없고 분별도 없고 또한 언설(言說)도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물질 내지는 유루ㆍ무루의 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모양이요,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아서 필경공(畢竟空)이요 무시공(無始空)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세속 이치 때문에 분별하면서 과보가 있다 하고 으뜸가는 이치로 말씀한 것이 아니라 한다면, 온갖 범부의 사람에게도 마땅히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범부의 사람은 ‘이것은 세속 이치의 법이다. 이것은 으뜸가는 이치이다’라고 알고 있더냐? 만일 그것을 안다면 범부의 사람에게도 마땅히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있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범부의 사람은 실로 세속 이치도 알지 못하고 으뜸가는 이치도 알지 못하고 도(道)도 알지 못하고 도과(道果)를 분별하는 것도 알지 못하거늘, 어떻게 모든 과위가 있다 하겠느냐.
수보리야, 성인은 세속 이치를 알고 으뜸가는 이치도 알며 도(道)도 있고 도를 닦는 것도 있나니, 이 때문에 성인은 차별이 있어서 모든 과위가 있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도를 닦으면 과위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수보리야, 도를 닦아도 과위를 얻지 못하고 또한 도를 닦지 않아도 과위를 얻지 못하며, 도를 여의지 않아도 과위를 얻고 또한 도 가운데에 머무르지 않아도 과위를 얻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들을 위하여 과위를 분별하면서도, 또한 ‘이것이 곧 유위의 성품인가, 무위의 성품인가’를 분별하지 않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유위의 성품과 무위의 성품을 분별하지 않고 모든 과위를 얻는다 하면, 어찌하여 세존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세 가지 번뇌[結]가 다한 것을 수다원의 과위라 하고, 음욕ㆍ성냄ㆍ어리석음이 얇기 때문에 사다함의 과위라 하며, 다섯 가지 이 세간의 번뇌[五此間結]가 다한 것을 아나함의 과위라 하고, 다섯 가지 저 세간의 번뇌[五彼間結]가 다한 것을 아라한의 과위라 하며, 모든 쌓임의 법[集法]이 사라지고 흩어진 모양을 벽지불의 도라 하고, 온갖 번뇌의 습기가 끊어지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한다’고 하시는지요?
세존이시여, 저는 어떻게 유위의 성품과 무위의 성품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모든 과위를 얻는 것을 알 수 있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에게는 수다원의 과위와 사다함의 과위와 아나함의 과위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이 모든 과위가 곧 유위이더냐 혹은 무위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그것은 모두 무위입니다.”
“수보리야, 무위의 법 가운데도 분별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온갖 법의 유위와 무위는 동일한 모양[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다[無相]함을 통달하면, 이때에는 유위나 무위라고 분별함이 있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면서도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나니, 이른바 내공이기 때문이요 나아가 무법유법공이기 때문이니,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집착하는 것이 없는 법[無所著法]을 얻고, 또한 남들도 교화하여 집착하는 것이 없는 법을 얻게 하고,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과 초선 내지는 제4선과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와 무변허공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와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얻게 하느니라.
이 보살은 자기 자신이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집착함이 없게 하며,
집착함이 없기 때문에 장애되는 것도 없느니라.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이 보시를 하면서도 또한 보시의 과보를 받지 않으며, 다만 중생들을 위하여 일체종지를 행할 뿐이요 일체종지의 과보를 받지 않는 것과 같으니라.
보살마하살도 이와 같아서, 6바라밀 내지는 온갖 법의 유루ㆍ무루와 유위ㆍ무위를 행하면서도 머무르지 않고 또한 법을 받지도 않나니, 다만 중생들을 위할 뿐이니라. 왜냐 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의 모양을 통달하기 때문이니라.”
【論】【문】80수형호는 몸을 장엄하는 법이거늘 ‘의식이 만족하다[識滿足]’는 것이 무엇 때문에 수형호 가운데에 있는 것인가?
【답】이 의식[識]은 과보로 생긴 의식이니, 세간의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을 저절로 안다. 범부는 의식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인간의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지만, 부처님은 한 해[一歲] 동안 완전히 갖추신 뒤에야 태어나기 때문에 몸과 의식이 모두 완전하게 갖추어지신다.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여덟 달 또는 아홉 달 동안 어머니의 태(胎) 안에 있으므로 통틀어 ‘열 달 동안’이라고 말하거니와 보살은 태 안에 열 달 동안 있으므로 통틀어 ‘한 해 동안’이라 하며, 그 동안에 몸의 감관이 완전하게 갖추어지므로 과보로 얻는 의식도 완전하게 갖추어진다.
【문】그 머무르는 곳에서 발바닥으로 평평하여 편안히 선다[足安立住處]는 것과 머무르는 곳에서 편안하다[安住處]는 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답】‘머무르는 곳에서 편안하다[住處安]’고 함은, 마치 속인 중에 용감한 병사가 무기를 단단히 붙잡고 머무를 곳에 확고히 의거하여 있으면 움직일 수 없는 것과 같다. 또 출가했을 때에는 악마의 백성[魔民]이나 악한 귀신[惡鬼]이 그를 동요시켜 물러나게 할 수 없는 것과 같다.
‘42자’의 뜻에 대해서는 마하연(摩訶衍) 가운데서 설명한 것과 같다.
‘한 글자가 모든 글자에 모두 다 들어간다’고 함은, 비유하건대 마치 둘은 하나씩이 합한 까닭에 둘이 되고 셋도 하나씩 합한 까닭에 셋이 되며, 넷도 하나씩이 합한 까닭에 넷이 되는 것과 같으니, 이와 같이 해서 천ㆍ만에 이르게 되는 것을 말한다.
또 아자(阿字)는 일정하지만 아(阿)가 변하여 라(羅)가 되기도 하고 또한 변하여 파(波)가 되는 것과도 같나니, 이렇게 하여 모두
다 42자(字)에 들어간다.
‘42자가 하나의 글자에 들어간다’고 함은, 42자에는 모두가 아자 부분[阿分]이 있어서 아자 부분은 도로 아자 속에 들어가는 것이다.
글자를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법의 이름을 잘 알고, 모든 법의 이름을 잘 알기 때문에 모든 법의 뜻[義]을 잘 안다.
‘글자가 없다[無字]’고 함은, 곧 그것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이란 뜻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든 법의 뜻에는 모든 법에 대한 명자(名字)가 없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모든 법이 마침내 공하여 이름과 글자가 없다면 어떻게 보살은 과보로 얻는 6신통에 머물러서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을 설하겠습니까? 만일 끝내 중생이 없다면 곧 법도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수보리의 말을 인가하면서 “그러하느니라. 18공(空)이기 때문에 온갖 법은 얻을 수 없나니, 나[我]와 중생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를 얻지 못하며. 부처님과 보살에 이르기까지도 모두가 공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고 하셨으니, 이와 같이 알고 나서 중생들을 위하여 이 공한 법을 설하는 것이다. 만약 중생이 존재하는 것인데도 그들에게 공을 설한다면, 그것은 곧 옳지 못하다. 하지만 중생은 공한 것이요 다만 뒤바뀜으로 인해 존재할 뿐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공을 잃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법을 설한다.
‘잃지 않는다[不失]’고 함은, 모든 법이 다 공하다면, 말한 바도 공하지 않도록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말한 바가 공하지 않다’고 한다면, 공한 모양을 잃게 되니, 만일 입으로는 공을 말하면서도 마음으로는 존재한다면, 그것은 잃는 것[失]이 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둘이 아님[不二]을 말씀하시나니, 그것은 법의 모양을 파괴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일을 분명히 알게하시려고 비유로써 말씀하시나니,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과 같아서, 그는 변화로 된 사람인데도 그를 위하여 지계(持戒)와 보시 등 모든 공덕에 대한 법을 설한다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방편을 써서 법을 설할지라도 그것은 곧 허물이 없나니, 중생을 뒤바뀐 데서 구출하기 때문이요 속박[縛]도 없고 벗어남[解]도 없기 때문이다.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에서는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나, 세속의 이치[世諦] 때문에 속박이 있고 벗어남도 있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물질은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다. 왜냐 하면, 이 속박되지도 않고
벗어나지도 않는 가운데에는 물질의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 나아가 인식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다”고 하신다.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지 않는 법으로써 공한 법 가운데에 머물러 중생을 위하여 설법하면서도 중생을 얻을 수 없나니, 중생과 온갖 법은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른바 “있는 바 없는 법[無所有法]이 있는 바 없는 법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허공이 허공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고, 제 성품의 법[自性法]이 제 성품의 법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불이 불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다른 성품의 법[他性法]이 다른 성품의 법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은 마치 물의 성품 가운데에 불의 성품이 없는 것과 같으며, 또 다른 성품은 일정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만일 이와 같이 청정하게 법을 설하게 되면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과 성현에 대하여 곧 허물이 없다. 왜냐 하면,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고, 법을 설한 이도 또한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으며,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필경 공하여 모두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으로 마음의 행할 바를 삼기 때문이니, 법을 설하는 이도 또한 이와 같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3해탈문(解脫門)에 들어가 온갖 법의 진실한 성품을 얻나니, 이른바 무여열반(無餘涅槃)이다. 법을 설하는 이는 이 법에 따르기 때문에 허물이 없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이 법을 얻은 뒤에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되 법성(法性)을 굴리지 않나니, 법성은 공하여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법성을 굴리지 않는다면 물질 등의 모든 법은 법성과 다른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물질 등의 모든 법의 실상은 곧 그것이 법성이기 때문이니, 부처님의 뜻은 보살이 설법하는 때에도 법성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물질 등의 모든 법이 또한 법성과 다르지 않다면 무엇 때문에 다만 법성만을 귀히 여기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물질은 법성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대답 때문에 수보리는 따지기를 “만일 다르지 않다면, 어찌하여 분별하면서
선(善)ㆍ악(惡)과 백(白)ㆍ흑(黑)과 수다원 등의 모든 과위가 있는 것입니까”고 하였다. 이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길 “물질 등의 법이 비록 법성을 여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세속 이치[世諦] 때문에 분별이 있는 것이니, 으뜸가는 이치[第一義]에는 분별이 없다”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으뜸가는 이치를 얻은 성인들은 분별하는 것이 없어 얻을 것이 있다[有所得]고 들어도 기뻐하지 않고, 얻을 것이 없다[無所得]고 들어도 근심하지 않으니, 공하고 모양이 없는 것을 증득한 까닭이다. 이에 미세한 법조차 모양을 취하지 않거늘 하물며 분별하여 선과 악이 있다 하겠느냐. 아직 실상을 얻지 못한 이로 하여금 으뜸가는 이치를 얻게 하려는 까닭에 분별을 한 것이다.
부처님은 이 가운데서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이 법에는 언설(言說)도 없고 또한 나거나 없어지거나 더럽거나 깨끗하거나 하는 법이 없나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이요 무시공(無始空)이다”고 하셨다.
【문】이 가운데서는 무엇 때문에 다만 두 가지 공만을 말씀하면서 법이라 하시는가?
【답】일체의 존재하는 법과 중생에 대하여 ‘필경공이다’ 하면 곧 모든 법을 파괴하며, ‘무시공이다’ 하면 곧 중생을 파괴하는 것이니, 이 두 가지 법을 파괴하고 나면 곧 온갖 법을 모두 다 파괴한 것이 된다.
이 가운데서 보살은 중생들을 위하여 설법하나니, 이 때문에 두 가지 공으로써 두 가지 일을 파괴한다. 비록 그 밖의 공이 있다 하더라도 필경공이 심히 깊어서 마침내 다하는 것보다 못하나니, 그 밖의 공은 마치 불이 나무를 태워도 여전히 재와 남은 불씨가 있지만, 필경공은 재도 없고 남은 불씨도 없는 것과 같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18공(空)으로 설명한다 해도 허물할 것은 없지만 요약하여 말하는 까닭에 두 가지 공을 말한다”고도 한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만일 세속 이치 때문에 분별하여 선ㆍ악ㆍ백ㆍ흑과 모든 성인의 과위가 있다고 하다면,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에서 범부에게는 수다원 등 성인의 과위가 있어야 합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 하면 만일 세속 이치의 허망한 가운데서 분별하면서 ‘모든 성현이 있다’고 한다면, 으뜸가는 이치 가운데서는 범부도 성현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수보리는 실상(實相)과 범부는 다르다고 분별하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으뜸가는 이치는 한 모양[一相]이니라”고 하셨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그렇다면 범부도 마땅히 성인이어야 합니다”고 한 것이다.
그때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범부가 ‘이것은 으뜸가는 이치다. 이것은 세속의 이치다’라고 분별한다면, 범부에게도 마땅히 수다원 등 모든 성인의 과위가 있어야 하지만, 범부는 실로 도(道)를 알지 못하고 도를 분별할 줄도 모르며 도를 행하거나 도를 닦을 줄도 모르거늘, 하물며 도의 과위를 얻겠느냐”라고 하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성인은 이런 분별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성인의 과위를 말하느니라”고 하시자, 그때에 수보리는 자기에게 잘못이 있는 것을 깨닫고 말하기를 “한량없고ㆍ모양 없고ㆍ동요가 없는 성품 가운데서 나는 어째서 모양을 취하며 한량없는 법을 헤아리려 했을까. 어째서 억지로 범부의 법으로써 성인의 과위를 삼았을까”라고 하였다.
그때에 부처님 말씀을 받아들이면서 ‘도를 행하는 이는 과위를 얻고 도를 행하지 않는 이는 과위를 얻지 못한다’고 하는 것을 알았으며,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도를 닦으면 과위를 얻습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아니니라”고 하셨다.
【문】부처님께서 위에서는 분별하시면서 “도를 닦으면 도의 과위를 얻는다”고 말씀하셨으면서 지금은 어찌하여 “아니니라”고 하시는가?
【답】부처님은 앞에서는 집착하지 않는 마음에서 말씀하신 것이요 지금 수보리는 집착하는 마음에서 물은 것이니, 도(道)에서 과위가 나오게 하려는 것은 마치 깨에서 기름이 나오게 하려는 것과 같다. 만일 그렇다면 도와 과위는 똑같이 거짓이 된다. 이 때문에 “아니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듣고 있는 이들은 생각하기를 ‘만일 닦아서 얻지 못한다면 닦지 않아도 마땅히 얻게 되어야 한다’고 할 것이므로,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닦아도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닦지 않은 것이랴”고 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두 사람이 어느 곳에 이르려 할 적에 한 사람은 그대로 있으면서 가지 않고, 또 한 사람은 길을 잃어버렸다면 둘이 다 같이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만일 도를 닦지 않으면 오히려 조금도 마음을 가다듬는 즐거움이 없겠거늘 하물며 도의 과위이겠느냐.
만일 마음에 모양을 취하면서 도를 닦으면 비록 마음을 가다듬는 선정의 즐거움은 있다 하더라도 도의 과위는 없을 것이요, 만일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마음에 집착하지도 않으면서 도를 닦으면 곧 도의 과위가 있을 것이니, 이 때문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유위ㆍ무위의 성품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도과의 차별이 있는 것이니라”고 하셨다.

그때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그렇다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3결(結)을 끊으면 수다원을 얻는다’고 하는 등 이러한 분별이 있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반문(反問)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수다원의 과위 등은 유위이더냐, 무위이더냐?”고 하셨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그것은 무위입니다”라고 하자,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그렇다면 무위 가운데에는 차별이 있느냐”고 하셨고,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하자, “만일 분별이 없다면 그대는 어떻게 따지고 드느냐”고 하셨다.
또 수보리에게 묻기를 “만일 선남자나 선여인이 온갖 법은 한 모양이어서 모양이 없다는 것을 통달하여 3해탈문 가운데에 머물러 열반을 증득한다면, 이때에는 어떤 법이 있어서 ‘유위이다, 무위이다’라고 분별하느냐”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아닙니다”라고 하였으니, 부처님의 뜻은 ‘오직 이 마음만이 진실일 뿐이요, 그 밖의 다른 때는 모두가 거짓이거늘 너는 어째서 따지고 드는가’라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적에 온갖 법을 분별하지 않으면서 내공(內空) 등의 모든 공에 머무르니, 이것이 바로 크게 청정한 것이다. 자기 자신이 집착하지 않고 중생들에게도 집착하지 않게 하나니, 이른바 단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가 그것이다.
보살의 도에서는 모두 교화하여 집착하지 않게 하는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이 보시 등을 행하면서도 보시 등을 분별하지도 않고, 또한 보시 등의 법의 과보도 받지 않으며 다만 중생을 이롭게 하고 제도하기 위할 뿐인 것과 같다.
보살의 마음도 또한 이와 같나니,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성품을 잘 통달하기 때문이다.
‘잘 통달한다’고 함은 법 성품의 모양을 취하지 않고 또한 법 성품 가운데에 머무르지도 않으며, 법 성품에 대하여 의심하지도 않고 어둡지도 않은 것이니, 그러면서 법을 설하기 때문에 걸리는 것도 거리끼는 것도 없고 막히는 것도 없다. 이것이 곧 법의 성품을 통달한다는 것이다.

79. 선달품(善達品)을 풀이함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은 모든 법의 모양[法相]을 잘 통달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건대 마치 변화한 사람[化人]이 음욕[婬]ㆍ성냄[怒]ㆍ어리석음[癡]을 행하지 않고 물질 내지는 인식을 행하지 않으며, 안팎의 법을 행하지 않고 모든 번뇌와 결사(結使)를 행하지 않으며, 유루(有漏)의 법ㆍ무루(無漏)의 법과 세간(世間)의 법ㆍ출세간(出世間)의 법과 유위(有爲)의 법ㆍ무위(無爲)의 법을 행하지 않고 또한 성인의 과위도 없는 것처럼 보살도 또한 이와 같아서 이런 일이 없으며, 또한 이런 법을 분별하지 않는 것을 곧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한다 하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변화한 사람에게는 어떻게 도를 닦는 일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변화한 사람이 닦는 도는 더럽지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또한 5도(道)의 생사(生死)에 있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부처님이 변화로 만든 사람은 근본과 진실한 일이 있어서 더러운 것도 있고 깨끗한 것도 있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변화로 만든 사람은 근본과 진실한 일도 없고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일도 없으며 또한 5도의 생사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온갖 물질은 마치 변화한 것[化]과 같으며, 모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한 것과 같은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물질은 마치 변화한 것과 같으며 온갖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한 것과 같으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물질이 마치 변화와 같고 온갖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마치 변화와 같으며 온갖 법도 마치 변화와 같다면, 변화한 사람은 물질이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없으며, 더러운 것도 없고 깨끗한 것도 없으며 5도의 생사도 없고 또한 해탈하는 곳도 없거늘 보살에게는 어떠한 효용[功用]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마하살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혹 어떤 중생이 지옥ㆍ아귀ㆍ축생ㆍ인간ㆍ하늘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을 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중생이 삼계(三界)로부터 해탈하게 되는 것을 보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보아 알기 때문이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보아 안다면, 무슨 일 때문에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37조도법(助道法)을 행하며, 나아가 대자대비(大慈大悲)를 행하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 스스로가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은 줄 알면, 보살마하살은 끝내 아승기겁 동안 중생들을 위하여 보살의 도를 행하지 않았을 것이니라.
수보리야, 중생들은 스스로가 모든 법이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모르고 있나니,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아승기겁 동안 6바라밀을 행하며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마치 꿈과 같고 메아리와 같으며, 그림자와 같고 아지랑이 같으며,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다면 중생들이 어느 곳에 머물러 있기에 보살은 6바라밀을 행하면서 그들을 구출하는지요?”
“수보리야, 중생은 다만 이름[名]ㆍ모양[相]과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름ㆍ모양과 허망한 가운데서 중생들을 구출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이름이며 어떤 것이 모양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이름은 억지로 만들어 붙인 것이니, 이른바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다’, ‘이것은 남자이다, 이것은 여자이다’, ‘이것은 큰 것이다, 이것은 작은 것이다’,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사람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유위이다,
이것은 무위이다’, ‘이것은 수다원의 과위이다, 사다함의 과위이다, 아나함의 과위이다, 아라한의 과위이다, 벽지불의 도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도이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온갖 화합하는 법은 모두가 임시로 붙인 이름[假名]이며 이름으로써 모든 법을 취하나니, 이 때문에 이름이라 하느니라. 온갖 유위의 법은 다만 이름과 모양이 있을 뿐이건만 범부와 어리석은 사람은 그 가운데서 집착을 내고 있느니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이름 가운데서 멀리 여의도록 교화하며 말하기를 ‘중생들이여, 이 이름은 다만 껍데기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허망한 기억과 분별 가운데서 생겼을 뿐이니, 그대들은 허망한 기억과 생각에 집착하지 마시오. 이것은 본래부터 모두가 제 성품이 없고 공하기 때문에 지혜로운 이는 집착하지 않는 바이오’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법을 설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이름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모양이라 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두 가지의 모양이 있어서 범부의 사람들이 집착하느니라. 어떤 것이 두 가지냐 하면, 첫째는 빛깔 있는 모양[色相]이요, 둘째는 빛깔 없는 모양[無色相]이니라.
수보리야, 어떤 것을 빛깔 있는 모양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있는 바의 굵거나 가늘거나 아름답거나 추하거나 하는 물질[色]이니, 모두 공하느니라. 이 공한 법 가운데서 생각하고 분별하며 마음에 집착하고 있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빛깔 있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빛깔 없는 모양이라 하느냐 하면, 모든 빛깔이 없는 법을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마음에 집착하여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번뇌가 생기나니, 이것을 이름하여 빛깔 없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으로 하여금 이 모양과 집착을 멀리 여의게 하며, 모양이 없는 법 가운데서 ‘이것은 모양이다, 이것은 모양이 없다’라는 두 가지의 법에 떨어지지 않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모양을 멀리 여의면서
모양이 없는 성품[無相性]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다만 이름과 모양만 있다면, 어떻게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좋은 이익을 얻게 하며, 어떻게 보살은 모든 지(地)를 두루 갖추어 한 지위로부터 다른 한 지위에 이르고 중생을 교화하면서 3승을 얻게 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모든 법의 근본이 반드시 있어서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자기 자신을 이롭게 할 수도 없고 또한 남을 이롭게 할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모든 법에는 근본과 진실한 일이 없고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을 뿐이니라. 이 때문에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선(禪)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나니 모양[相]이 없기 때문이며, 비리야(毘梨耶)바라밀과 찬제(羼提)바라밀과 시라(尸羅)바라밀과 단(檀)바라밀을 두루 갖출 수 있나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4선(禪)의 바라밀과 4무량심의 바라밀과 4무색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4념처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8성도분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내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무법유법공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며, 8배사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9차제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의 10력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나아가 18불공법의 바라밀을 두루 갖추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은 모양이 없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이 착한 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다른 사람들을 교화하여 착한 법을 두루 갖추게 하나니,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모든 법의 모양이 실로 털끝만큼이라도 있다 한다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은 모양이 없고 기억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거나 또한 중생을 교화하여 무루(無漏)의 법을 얻게 할 수가 없느니라. 왜냐 하면, 온갖 무루의 법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무루의 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어떻게 ‘이것은 곧 성문의 법이다, 이것은 곧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곧 보살의 법이다, 이것은 곧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등급을 매기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양이 없는 법은 성문의 법과 다른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모양이 없는 법은 벽지불의 법과 보살의 법과 부처님의 법과 다른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양이 없는 법이 곧 수다원의 과위요 사다함의 과위이며, 아나함의 과위요 아라한의 과위이며, 벽지불의 법이요 보살의 법이며 부처님의 법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그렇습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이런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것을 배워서 착한 법을 더욱 늘리나니, 이른바 6바라밀과 4선과 4무량심과 4무색정과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이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그 밖의 법의 긴요한 것으로는 이른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3해탈문(解脫門)만한 법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온갖 착한 법은 모두가 3해탈문에 들기 때문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의 제 모양이 공한 것을 곧 공해탈문이라 하고, 온갖 법의 모양이 없는 것을
곧 무상해탈문이라 하며, 온갖 법의 조작도 없고 생기는 것도 없는 모양을 곧 무작해탈문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3해탈문을 배우면 이때에는 5음(陰)의 모양을 능히 배우고 12입(入)의 모양을 능히 배우며, 18계(界)의 모양을 능히 배우고 4성제(聖諦)와 12인연(因緣)의 법을 능히 배우며, 내공ㆍ외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능히 배우고 6바라밀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능히 배우며,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능히 배우게 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5음의 모양을 배울 수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물질[色]의 모양[相]을 알고, 물질의 생멸(生滅)을 알며, 물질의 여(如)를 아느니라.
어떻게 물질의 모양을 아느냐 하면, 물질은 필경 공하여서 안의 부분[內分]이 달라지고 거짓이며 실체가 없어서 마치 물거품이 견고하지 않은 것과 같은 줄 아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의 생멸을 아느냐 하면, 물질은 생길 때도 어디서 오는 데가 없고 떠날 때도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만일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다면, 이것이 곧 물질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물질의 여를 아느냐 하면, 이 물질의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물질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여(如)의 이름과 여의 실체는 거짓이 아니며, 여의 앞ㆍ뒤ㆍ중간도 또한 그러하여 언제나 달라지지 않나니, 이것이 곧 물질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느낌[受]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느낌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느낌의 여를 아느냐 하면, 보살은 모든 느낌의 모양은 마치 물속의 거품이 하나가 생기면 하나가 없어지는 것과 같음을 아나니, 이것이 곧 느낌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느낌은 어디서 오는 곳도 없고 어디로 가서 이르는 곳이 없으니, 이것이 곧 느낌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느낌의 여를 안다는 것은, 이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니, 이것이 곧 느낌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생각[想]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생각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생각의 여를 아는 것인가? 생각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이 생각은 마치 아지랑이에서는 물을 얻을 수 없는데도 부질없이 물이라는 생각을 내는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생각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생각은 어디서 온 곳도 없고 가서 이르는 곳이 없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생각의 여를 안다는 것은, 모든 생각의 여는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실상(實相)에서 옮아가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생각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의욕[行]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의욕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의욕의 여를 아는 것인가? 의욕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의욕은 마치 파초가 한 잎 한 잎 떨어져 없어져 견고하거나 충실하지도 못한 것과 같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의욕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모든 의욕이 생긴다 해도 어디서 온 곳도 없고 가서 이르는 곳도 없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의욕의 여를 안다는 것은, 모든 의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의욕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인식[識]의 모양을 알고 어떻게 인식의 생멸을 알며 어떻게 인식의 여를 아는 것인가? 인식의 모양을 안다는 것은, 마치 환술사가 환술로 네 가지의 병사들을 만드는 것처럼 진실한 인식이 없는 것도 이와 같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모양을 아는 것이니라.
인식의 생멸을 안다는 것은, 이 인식이 생길 때에도 어디서 온 곳이 없고 사라질 때에도 가는 곳이 없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생멸을 아는 것이니라.
인식의 여를 안다는 것은, 인식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 늘어나지도 않고 줄어들지도 않나니, 이것이 곧 인식의 여를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모든 입(入)을 아느냐 하면, 눈은 눈의 성품이 공하고 나아가 뜻은 뜻의 성품이 공하며, 빛깔은 빛깔의 성품이 공하고 나아가 법은 법의 성품이 공한 것임을 아는 것이니라.
경계[界]를 아느냐 하면, 눈은 눈의 경계[眼界]가 공하고
빛깔은 빛깔의 경계[色界]가 공하며, 안식은 안식의 경계[眼識界]가 공하고 나아가 의식의 경계[意識界]까지도 그와 같음을 아는 것이니라.
어떻게 4성제(聖諦)를 아느냐 하면, 괴로움[苦]의 거룩한 진리를 안 때에 두 가지 법을 멀리 여의며,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는 둘이 아니고[不二] 구별도 없는[不別] 줄 아는 것이니, 이것을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라 하며, 쌓임[集]ㆍ사라짐[滅]ㆍ도(道)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어떻게 괴로움의 여(如)를 아느냐 하면,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가 곧 여요 여가 곧 괴로움의 거룩한 진리인 것이니, 쌓임ㆍ사라짐ㆍ도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어떻게 12인연을 아느냐 하면, 12인연의 나지 않는 모양을 아는 것이니, 이것을 곧 12인연을 안다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저마다 분별하며 모든 법을 안다면, 물질의 성품으로 법성(法性)을 파괴하고 나아가 일체종지의 성품으로 법성을 파괴하는 일은 없겠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법성 외에 다시 법이 있다면 법성을 파괴한 것이 되겠지만, 법성 외의 법은 얻을 수 없나니, 이 때문에 파괴하지 않느니라. 왜냐 하면 수보리야,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는 ‘법성 외의 법은 얻을 수 없다’고 알기 때문이니, 법성 외에는 어떤 법도 있다고 말하지 않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마땅히 법성을 배워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만일 법성을 배운다면 배우는 바가 없는 것[無所學]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법성을 배운다면 곧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니라. 왜냐 하면, 온갖 법이 곧 법성이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이 곧 법성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무위의 성품[無爲性] 속에 들어가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법성을 배우면 곧 온갖 법을 배우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반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단바라밀을 배우며,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초선(初禪)과 제2선과 제3선과 제4선을 배우는지요?
보살마하살은 무엇 때문에 자(慈)ㆍ비(悲)ㆍ희(憙)ㆍ사(捨)를 배우고, 무엇 때문에 무변허공처와 무변식처와 무소유처와 비유상비무상처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4념처와 4정근과 4여의족과 5근과 5력과 7각분과 8성도분을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8배사와 9차제정과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을 배우며, 무엇 때문에 6신통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32상과 80수형호를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배워서 찰리(刹利)의 큰 족성과 바라문(婆羅門)의 큰 족성과 거사(居士)의 큰 집안에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배워서 4천왕천(天王天)의 처소와 33천(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솔타천(兜率陀天)과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에 태어나는지요?
무엇 때문에 배워서 범천왕(梵天王)이 머무는 곳이나 광음천(光音天)과 변정천(遍淨天)과 광과천(廣果天)과 무상정(無想定)과 정거천(淨居天)에 태어나며, 무엇 때문에 배워서 무변허공처에 태어나고 무변식처에 태어나며 무소유처에 태어나고 비유상비무상처에 태어나는지요?
무엇 때문에 최초로 뜻을 낸 지위[初發意地]에서 제2ㆍ제3ㆍ제4ㆍ제5ㆍ제6ㆍ제7ㆍ제8ㆍ제9ㆍ제10지(地)까지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성문의 지위와 벽지불의 지위와 보살의 지위를 배우는지요?
무엇 때문에 중생을 성취하는 일과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는 일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모든 다라니를 배우며, 무엇 때문에 요설의 법[樂說法]을 배우고, 무엇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배우며, 배운 뒤에는 일체종지를 얻고 온갖 법을 아는지요?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법성 가운데에는 이러한 분별이 없습니다. 세존이시여, 장차 보살은 도가 아닌[非道] 가운데에 떨어지지는 않겠는지요? 왜냐 하면 세존이시여, 법성 가운데는 이와 같은 분별이 없으며, 법성 가운데는 물질도 없고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없으며, 모든 법성도 또한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을 멀리 여의지 않아서 물질이 곧 법성이요 법성이 곧 물질이며,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도 또한 이와 같고 온갖 법도 또한 이와 같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그대가 말한 것과 같아서 물질이 곧 법성이요,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 곧 법성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일 법성 외에 법이 있다고 보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 되나니,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성이 곧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 줄 아느니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온갖 법이 곧 법성인 줄 알며, 그런 뒤에 이름과 모양[名相]이 없는 법으로써 이름과 모양을 말하나니, 이른바 ‘이것이 물질이고, 이것이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며, 나아가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하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솜씨 좋은 환술사나 환술사의 제자가 여러 사람들이 있는 곳에 서서 갖가지 형색의 남자ㆍ여자ㆍ코끼리ㆍ말과 반듯하게 다듬어진 동산 숲, 그리고 모든 작은 집ㆍ큰 집ㆍ흐르는 샘물ㆍ목욕하는 연못ㆍ의복ㆍ침구ㆍ향화ㆍ영락ㆍ반찬과 음식 등을 환술로 만들고, 여러 가지 풍악을 울리면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과 같으니라.

또 다시 사람들을 환술로 만들어서 보시도 하고 또는 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ㆍ지혜를 닦게도 하며, 이 환술사는 또 찰리의 큰 족성과 바라문과 거사의 큰 집안과 4천왕천의 처소와 수미산과 33천ㆍ야마천ㆍ도솔타천ㆍ화락천 및 타화자재천 등을 환술로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또 범중천(梵衆天)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천을 환술로 만들며, 또한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보살마하살이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단바라밀과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과 반야바라밀을 행하고, 초지(初地) 내지는 10지(地)를 행하며,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신통에 유희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고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며, 모든 선정ㆍ해탈ㆍ삼매에 유희하고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18불공법과 대자대비를 행하며, 부처님 몸의 32상과 80수형호를 완전하게 갖추는 것 등을 환술로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과 같으니라.
이런 가운데서 지혜 없는 사람은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이 사람은 재주가 많고 교묘하여 여러 가지 일들을 만들어서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며, 갖가지의 형색 내지는 32상과 80수형호로 부처님 몸을 장엄하는구나’라고 찬탄하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서 지혜 있는 이[士]는 생각하면서 말하기를 ‘전에 없던 일이로다. 이 가운데에는 진실한 일이란 없는데도 있는 바 없는 법[無所有法]으로서 여러 사람들을 즐겁게 하면서 형상이 있게 하지만, 일마다 모양도 없고 있는 것마다 모양이 없구나’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법성을 여의고는 어떤 법도 보지 않으며,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 비록 중생을 얻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 자신이 보시하고 또한 다른 사람에게도 보시하게 하며,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고 보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계율을 지니며 또한 남들에게도 계율을 지니게 하고, 스스로 인욕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인욕하게 하며, 스스로 정진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정진하게 하며, 스스로 선정을 행하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선정을 행하게 하며, 스스로 지혜를 닦으면서 또한 남들에게도 지혜를 닦게 하고, 지혜를 닦는 법을 찬탄하며 지혜를 닦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10선(善)을 행하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10선을 행하게 하며, 10선을 행하는 법을 찬탄하고 10선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5계(戒)를 받아 행하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5계를 받아 행하게 하며, 5계의 법을 찬탄하고 5계를 받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8계재(戒齋)를 받고 또한 다른 이를 교화하여 8계제를 받게 하며, 8계제의 법을 찬탄하고 8계제를 행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느니라.
스스로 초선을 행하고 나아가 스스로 제4선을 행하며, 스스로 자ㆍ비ㆍ희ㆍ사를 행하고 스스로 무변허공처 내지는 비유상비무상처를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행하게 하느니라. 스스로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을 행하고 스스로 3해탈문과 부처님의 10력을 행하며, 나아가 스스로 18불공법을 행하면서 또한 다른 사람을 교화하여 18불공법을 행하게 하며 18불공법을 찬탄하고 18불공법을 행하는 이를 기뻐하며 칭찬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법성의 앞ㆍ뒤ㆍ중간에 차이가 있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법성을 보이거나 중생을 성취시킬 수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법성의 앞ㆍ뒤ㆍ중간은 차이가 없으니, 이 때문에 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중생들을 이롭게 하기 위하여 보살의 도를 행하는 것이니라.”
【論】【문】부처님은 품(品)마다 그 가운데서 모든 법의 모양을 통달하는 일을 말씀하셨거늘,
지금 수보리는 무엇 때문에 다시 묻는가?
【답】이 반야바라밀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으며 언설(言說)이 없기 때문이니, 비록 자주자주 듣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갖추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 물은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송아지가 비록 크고 착한 어미의 맛있는 젖을 먹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그칠 줄 모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의 크신 자비는 마치 이 착한 어미 소와 같고, 반야바라밀은 마치 맛있는 우유와 같으며, 수보리는 마치 송아지와 같아서 비록 자주 모든 법의 모양을 듣는다 하더라도 여전히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다.
또 오직 부처님의 일체지(一切智)만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통달할 뿐이며, 그 밖의 다른 사람은 비록 통달한다 하더라도 궁구하여 다할 수 없나니, 이 때문에 “그 밖의 보살은 아직 부처님이 되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통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물은 것이다.
부처님은 비유로 대답하시기를 “마치 환술로 변화한 사람은 3독(毒) 등 모든 번뇌와 결사(結使)가 없고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數法]도 없으며, 안팎의 유루(有漏)ㆍ무루(無漏)의 법 가운데에도 포섭되지 않는 것이어서 범부의 법에도 떨어지지 않고, 또한 성인의 과위 안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그는 수다원 등이라고 말할 수 없는데도 또한 다른 이의 마음에 선과 악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변화의 일을 반드시 성취하게 하나니, 이 변화는 실로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아서 6도(道)에 속하지 않느니라.
보살의 몸도 또한 이와 같아서 3독 등의 번뇌가 없고 이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모두 앞의 세상에서의 거짓되고 뒤바뀐 법이요, 인연으로 생겼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으며 능히 이와 같이 행하고 있나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의 모양을 잘 통달한 것이니라”고 하셨다.
이때에 수보리는 비록 공을 잘 알고 있었다 하더라도 부처님의 법을 공경하고 귀중이 여기며, 또 부처님의 모든 법은 한량없기 때문에 부처님께 묻기를 “세존이시여, 온갖 물질 등의 법이 모두 공한 것은 마치 변화한 것[化]과 같은 것인지요?”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온갖 물질 등의 법은 모두가 마치 변화한 것과 같다”라고 하셨으니, 곧 ‘그대는 부처님 법을 귀중히 여기기에 가히 공하다고 말하지 않지만, 나는 일체지(一切智)이기에 모든 법은 공하다고 말할 수 있다. 마치 다른 사람들은 사자의 힘을 귀히 여기지만, 사자 자신은
그의 힘을 귀히 여기지 않는 것과 같다’라고 하신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필경 공하여서 모두가 마치 변화와 같다면, 부처님은 무엇 때문에 갖가지로 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며 보살로 인하여 3악도(惡道)를 끊고 중생들을 구출하여 열반을 얻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반문(反問)하시기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은 본래 보살의 도를 행할 때에 반드시 중생이 5도(道) 가운데서 구출되는 일이 있다고 보느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하기를 “없습니다”고 하였다.
부처님은 그의 마음을 인가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을 때는 온갖 법은 마치 환과 같고 변화한 것과 같음을 알고 보기 때문이니라”고 하셨다.
수보리는 말하기를 “만일 그렇다면 보살은 무슨 일 때문에 6바라밀을 행합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중생들 스스로가 모든 법은 공하여서 마치 환과 같음을 안다면, 보살은 곧 공들일 것이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또한 만일 모든 법이 반드시 공한 모양이라면 곧 보살은 공들일 것도 없으며, 모든 법은 진실한 것도 아니고 공한 것도 아니어서 모든 언어의 길을 초월하고 필경 공하여서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지만, 중생들은 이런 일을 모르기 때문에 나[我]라는 마음을 내어 나쁜 죄업을 짓고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마치 장자(長者)에게 아들이 있는데 그가 소경이라 독을 마시려고 하자, 장자는 그가 반드시 죽을 것임을 알고 갖가지 방편을 써서 마시지 못하게 막는 것과 같다. 보살도 이와 같아서 이 중생들을 보면 뒤바뀌어서 밝지 못하고 소경인지라 3독(毒)의 물을 마시고 있으므로 대비의 마음을 내어 한량없는 아승기 동안 6바라밀을 닦으면서 부처님 국토를 깨끗하게 하고 중생들을 교화하는 것이다.
수보리는 이런 말씀들을 듣고 다시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공한 것이어서 근본이 없고 마치 꿈과 같고 환 등과 같다면, 중생들은 어디에 머물러 있기에 보살은 그들을 구출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셨다.
수보리의 생각으로는
마치 사람이 깊은 진창에 빠져 있을 때에 구출해 주는 것과 같다고 여기고 있으므로,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중생은 다만 이름과 모양과 속임수와 그리고 기억과 분별하는 가운데에 머물러 있을 뿐이다”라고 하셨다.
곧, 부처님의 뜻은 ‘온갖 법 가운데는 결코 진실한 것이 없다. 다만 범부가 속고 있기 때문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캄캄한 가운데서 사람과 비슷한 물건을 보고서 진짜 사람이라 여기면서 두려운 생각을 내는 것과 같다. 또 사나운 개가 우물가에 가서 자기의 그림자를 보고 짖으면서 그 물속에는 개도 없고 자기의 형상만이 있을 뿐인데도 격한 마음을 내며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것과 같다. 중생도 이와 같아서 4대(大)가 화합한 까닭에 몸이라 하고, 인연으로 생긴 의식[識]이 화합한 까닭에 동작도 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범부는 그러한 가운데서 사람이라는 모양을 일으키어 애욕을 내고 성을 내면서 죄업을 일으켜 3악도에 떨어지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중생들을 가엾이 여겨 갖가지 인연으로 교화하여 공한 법을 알게 하면서 그들을 구출하며, 그들에게 말하기를 ‘이 법은 모두 필경 공하여서 아무것도 없다. 중생은 뒤바뀜과 허망 때문에 마치 있는 것이라고 보지만, 그것은 마치 변화한 것과 같고 환과 같으며 건달바성(乾闥婆城)과 같아서 진실한 일이란 없다. 오직 사람의 눈을 속이고 헷갈리게 할 뿐이다’고 한다.
또 온갖 법은 다만 이름이 화합함에 따라 다시 그 밖의 이름이 있을 뿐이다. 마치 머리와 발과 배와 등이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몸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과 같고, 또 머리칼ㆍ눈ㆍ귀ㆍ코ㆍ입ㆍ살갗 및 뼈가 화합한 까닭에 임시로 머리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과 같으며, 여러 개의 털이 화합한 까닭에 머리카락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따로따로 갈라진 까닭에 털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여러 작은 티끌[微塵]이 화합한 까닭에 아주 작은 부분[毛分]이라 하고, 또한 모든 작은 부분들이 화합한 까닭에 작은 티끌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작은 티끌[微塵]은 제일 미세한 것이므로 나누어진 것[分]이 될 수 없으며, 나누어진 것이 없기 때문에 화합하는 것도 없으니, 이것은 곧 정해진 법이다. 그 때문에 ‘온갖 것은 공하여서 정해진 법이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답】만일 작은 티끌이 곧 물질이라면 마땅히 나누어진 것이 있어야 한다. 왜냐 하면,
온갖 물질은 모두가 허공 가운데에 있으며 모두 시방(十方)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작은 티끌이 곧 물질이라면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고, 만일 시방으로 나누어진 것이 있다면 어찌하여 그것이 극미(極微)이겠는가. 만일 그대의 말과 같아서 ‘작은 티끌은 나누어진 것이 없다’ 한다면 물질이 아니다. 왜냐 하면, 물질의 모양에서 벗어나기 때문이다.
또 물질은 5정(情)으로 얻을 수 있다고 하는데 만일 작은 티끌은 5정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이 물질인지를 알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작은 티끌은 다만 헛된 이름만이 있을 뿐이니, 눈으로 보는 굵은 물질조차도 오히려 파괴하여 공하게 할 수 있거늘, 하물며 볼 수도 없고 접촉할 수도 없는 것이겠는가.
【문】작은 티끌은 미세하기 때문에 5정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기는 하나, 성인이 얻은 천안(天眼)으로는 볼 수 있다.
【답】천안으로 보는 것이 비록 미세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의 모양이기 때문에 마땅히 나누어진 부분이 있어야 한다. 만일 나누어진 부분이 없다면 그것은 물질이 아니며, 물질이 아니라면 곧 천안으로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천안도 거짓되고 허망하게 보는 눈이다. 이 때문에 성인은 혜안(慧眼)으로써 세간을 관찰하여 도(道)를 얻는다.
작은 티끌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아서 다만 이름만이 있을 뿐이요 실체가 없다. 작은 티끌은 없는 것이므로 온갖 법은 이름이 화합한 까닭에 다시 임시로 붙인 이름은 있을 뿐이고 진실하거나 일정한 것은 없다. 그런데도 중생들은 부질없이 탐착을 내면서 탐냄과 성냄의 인연 때문에 나쁜 업을 일으켜 한량없는 아승기 동안 3악도에 있으면서 고통을 받는다.
만일 모든 법이 진실하고 일정하더라도 오히려 탐내고 성을 내는 죄의 인연을 짓지 않아야겠거늘, 하물며 거짓되고 진실이 없는 것이겠는가. 만일 이 거짓된 이름과 모양을 버리고서 공한 법에 집착하지 않는다면, 곧 열반의 상(常)ㆍ낙(樂)을 받으리라.
【문】이름[名]과 모양[相]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이름은 바로 여러 가지 물건에 붙인 이름이라서 마치 뜨거운 물건의 이름을 불이라 한 것과 같다. 모양이란 마치 연기[烟]를 보고 불이라는 모양을 아는 것과 같나니, 뜨거운 것[熱]은 곧 불의 체성[火體]이다.
또 5중(衆)이 화합한 것 가운데서 남자ㆍ여자라 하는 것은 곧 이름이요, 그 몸의 모습에서 남자와 여자를 구별할 수 있나니, 그것을 모양이라 하는 것과 같다.
이런 모양을 보기 때문에 이름을 붙여서 남자 또는 여자라 한다.
【문】만일 그렇다면 이름과 모양에는 차별이 없다. 왜냐하면, 모양을 보는 까닭에 이름을 얻고 이름을 아는 까닭에 모양을 얻기 때문이다.
【답】그대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남자나 여인의 모습을 보고 그런 뒤에 남자 또는 여인이란 이름을 붙이는 것이니, 모양은 근본[本]이 되고 이름은 말단[末]이 된다.
또 어떤 사람은 눈으로 물질을 볼 적에 치우치게 좋아하는 모양을 취하면서 집착하는 마음을 내지만 그 밖의 사람에게는 그렇지 않다면, 그 물들고 집착하는 마음을 낼 수 있는 그것을 곧 모양[相]이라 하기도 한다.
또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이름과 모양을 분별하여 말씀하시기를 “이름이란 임시로 붙인 것이며, 이름으로써 모든 법을 취하게 된다”고 하셨으니, 경에서 자세히 말씀하신 것과 같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다만 이름과 모양만이 있다면 보살은 어떻게 스스로도 이롭게 하고 다른 이도 이롭게 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모든 법의 근본이 결정코 있다고 한다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왜냐 하면, 만일 모든 법의 성품이 일정하고 실제로 있다면 곧 그것은 생하는 것이 없기[無生] 때문이다. 왜냐 하면, 성품은 전부터 일정하게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니, 만일 이 법이 인연의 화합으로부터 생긴다면 곧 그것은 일정한 성품이 없다. 만일 성품이 일정하게 있다면 인(因)과 연(緣)이 화합할 필요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곧 생기는 것이 없다. 생기는 것이 없기 때문에 소멸하는 것도 없고 소멸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죄와 복도 없다.
무상한 줄 알기 때문에 죄를 버리고 복을 닦거니와 만일 항상 있다[常] 한다면 속박도 없고 벗어남도 없으며 세간도 없고 열반 등도 없게 된다. 이 때문에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법이 일정하게 존재하고 단지 이름과 모양뿐만이 아니라면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스스로를 이롭게 하지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며, 선(禪)바라밀 등을 행하면서 자기도 이롭게 못하고 남도 이롭게 하지 못하리니, 모양[相]이 없기 때문이다. 이 보살이 자신이 착한 법을 두루 갖추고 또한 착한 법으로써 중생들을 이롭게 하는 것은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이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만일 모든 법이 털끝만큼이라도 실제로 존재한다고 한다면,
보살은 도량(道場)에 앉을 때에 ‘온갖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으며 있지 않다’고 관찰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수도 없을 것이요, 또한 이 법으로써 중생을 이롭게 할 수도 없을 것이다”고 하셨다.
왜냐 하면, 이 보살은 도량에 앉았을 때에 온갖 법의 으뜸가는 진실[第一眞實]을 관찰하되 만일 조금이라도 착오가 있으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얻지 못하고, 또한 중생들을 위하여 공하여 모양이 없는 법을 설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왜냐하면, 법이 만일 일정하게 존재한다면 부처님이 어찌하여 중생들을 속이면서 “온갖 법은 누(漏)도 없고 모양[相]도 없으며 기억[憶念]도 없다”고 하셨겠는가.
【문】4제(諦) 가운데 세 가지 진리는 모두가 모양이 있다. 괴로움의 진리[苦諦]에는 곧 괴로움의 모양이 있고, 쌓임의 진리[集諦]에는 곧 쌓임의 모양이 있으며, 도의 진리[道諦]에는 도의 모양이 있다. 오직 멸의 진리만이 모양이 없다. 또한 ‘이것은 모양이 없는 열반이다’라고 기억하는 일이 있거늘, 그대는 무엇 때문에 온갖 무루(無漏)의 법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고 하는가?
【답】마하연(摩訶衍)의 법은 성문의 법과 다르다. 마하연의 법 가운데서는 ‘온갖 무루의 법은 모양도 없고ㆍ기억도 없다’고 한다.
또 모양이 있고 기억이 있는 것은 모두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 만일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다면 곧 그것은 모든 번뇌의 누이거를 어떻게 그것이 무루이겠는가.
또 이 세 가지 진리는 모두가 사라짐의 진리[滅諦]를 따른다. 괴로움을 보면 곧 버리고 쌓임을 보면 곧 끊으므로 진실하거나 일정하다고 말하지 못하며, 도(道)를 보면 사라짐[滅]에 나아가기 위하여 또한 이 도에 머무르지 않고 이 머무르는 일을 없애고 다한다. 이렇게 없애고 다하는 법[滅盡法]은 모양도 없고 반연[緣]도 없거늘 어떻게 기억이 있겠는가. 기억한다는 것은 모두가 이 모양을 반여하면서 법에 집착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무루의 법은 모두가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무루의 법이 으뜸가는 진실한 것이어서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온갖 법의 성품도 또한 모양이 없고 기억도 없어야 한다. 다만 범부는 뒤바뀜 때문에
모양이 있고 기억이 있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 여쭈기를 “만일 온갖 법이 모양도 없고 기억도 없다면 어떻게 ‘이것은 성문의 법이다, 이것은 벽지불의 법이다, 이것은 보살의 법이다, 이것은 부처님의 법이다’라고 등급을 두어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에게 반문하시면서 “3승(乘)의 법과 모양이 없는 법은 차이가 있느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모든 번뇌가 멸하는 것이 곧 끊어진 것이요, 끊어진 것이 곧 무위(無爲)의 법이며 또한 사라짐의 진리와 도의 진리가 곧 무루요 모양이 없는 줄 아나니, 이 때문에 ‘3승은 모양이 없는 법과 다르지 않다’고 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또 묻기를 “수다원 내지는 부처님의 법은 곧 모양이 없는 법이더냐”고 하셨고, 대답하기를 “그런 인연 때문에 온갖 법은 모두가 모양이 없는 줄 알아야 합니다”고 하자, “만일 모양이 없다면 너는 어찌하여 따지면서 ‘모든 도(道)가 있다’고 말하느냐? 정작 모양이 없기 때문에 3승의 모든 도가 있는 것이다”고 하셨다.
부처님은 말씀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모양이 없는 법을 배우면 모든 착한 법, 즉 6바라밀 내지는 18불공법이 더욱 늘어나리라”고 하셨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오직 3해탈문에만 머무르며 그 밖의 다른 법은 긴요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왜냐하면, 3해탈문은 바로 진실한 법이기 때문이니, 그 밖의 4념처의 법도 비록 진실하지만 모두가 방편의 말씀이다. 3해탈문은 열반에 가깝고 또한 온갖 진실하고 착한 법을 포섭할 수 있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보살은 마땅히 배워야 한다”고 한 것이다.
【문】만일 보살이 이 3해탈문을 배우는 것이 곧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 등을 배우는 것이라면, 이 3해탈문은 모두가 공하고 모양이 없고 분별이 없으나, 이 5중의 법들은 모두가 모양도 있고 분별도 있는 법이거늘 어떻게 3해탈문을 배우는 까닭에 그 밖의 다른 법도 배운다 하시는가?
【답】보살은 이 3해탈문을 배우면 곧 삼계(三界)를 벗어나고 3루(漏)를 다하기 때문에 모든 법 가운데서
진실한 지혜를 얻어 통달하지 않는 것이 없다. 앞에서 말한 5중 안의 것은 모두가 허망하고 삿된 행이었지만 지금은 이 3해탈문을 얻었기 때문에 바르게 통달하게 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은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시기를 “보살은 이 3해탈문의 모양이 없는 법을 행할 때에 물질이 나는[生] 이치와 없어지는[滅] 이치를 알며 물질의 여(如)를 아나니, 나아가 인식에 이르기까지 또한 그러하느니라”고 하셨다. 경에서 자세하게 말씀한 것과 같다.
수보리는 또 여쭈기를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아서 보살은 물질 등의 모양을 알고 물질 등이 생기는 것을 알며, 물질 등의 없어지는 것을 알고 물질 등의 여를 압니다. 만일 이와 같이 분별한다면 물질의 성품이 법성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만일 어떤 법이 있어서 법성을 벗어난다면 물질의 성품은 마땅히 법성을 파괴해야 한다. 온갖 법의 실상(實相)을 법성이라 하고, 이 때문에 온갖 법은 법성 가운데에 들어가나니, 물질의 성품의 실상이 곧 법성이어서 동일한 성품이거늘 어떻게 물질의 성품이 법성을 파괴하겠느냐”고 하셨다.
부처님은 또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법성을 벗어나 다시 어떤 법이 있다고도 보지 않으며, 얻지 않기 때문에 말하지도 않느니라”고 하셨다. 모든 부처님과 성현은 가장 믿을 만한 분들이니,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법성을 배워야 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만일 보살이 법성을 배운다면 이것은 곧 배울 것이 없는 것[無所得]이 됩니다”라고 하였으니, 왜냐하면 법성은 없는 성품[無性]이기 때문이다. 이에 부처님은 대답하시기를 “법성이 없는 성품이라 함은 만일 보살이 법성을 배우면 온갖 법을 배운 것이 되느니라”고 하셨다. 만일 법성에 따로 성품이 있거나 없는 성품 그것이 성품이라면, 다만 법성만을 배우고 온갖 법은 배우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하지만 법성은 실로 따로 성품이 없고 또한 없는 성품도 없기 때문에 온갖 법을 두루 배워야 한다. 다만 모든 법의 실상은 이것이 곧 법성일 뿐이니, 이 때문에 실상을 얻으면 온갖 법을 바르고 두루하게 배우는 것이다.
그때에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마하살은
어떤 것으로써 6바라밀 내지는 다라니문을 배우는지요? 왜냐 하면, 모든 법의 실상이 곧 법성이기 때문이니, 만일 온갖 법이 곧 법성이라면 보살은 다시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또 법성 가운데는 이 6바라밀 내지는 다라니에 대한 분별이 없거늘 이제 보살이 분별하여서 이런 법을 행한다 하면 뒤바뀐 가운데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부처님은 수보리의 뜻을 인정하시면서 대답하시기를 “만일 보살이 법성에서 벗어난 어떤 법이 있다고 본다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 하면, 법성을 벗어나 어떤 법이 있다면 그것은 항상 있다[常]고 하는 뒤바뀜이 되니, 무명(無明)은 굴려서 진실하게 만들 수 없거늘 어떻게 온갖 법 가운데서 무명을 끊고서 부처가 될 수 있겠느냐.
보살은 온갖 법이 곧 필경 공이요 항상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어서 희론도 없고 이름도 없는 것인 줄 알면서도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어 방편의 힘으로 일부러 이름과 모양을 붙여서 ‘이것은 물질이다,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의욕ㆍ인식이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라고 말하느니라”고 하셨다.
마치 경에서 말씀하신 환(幻)에 대한 비유와 같다. 곧, 환술사는 곧 보살을 말하고 환술의 법은 곧 6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말하는데, 비록 이 모든 법을 행한다 하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 마치 환술사가 비록 환술로 갖가지 물건들을 만든다 하더라도 그것이 진실이 없음을 알면서 집착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지혜로운 이[智者]’란 곧 부처님과 큰 보살이다. ‘지혜가 없는 이[無智者]’란 곧 범부와 새로 뜻을 낸 이를 말하니, 그들은 크게 기뻐하면서 전에 없던 일이라고 찬탄하는 것이다.
보살은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비록 법성을 벗어나서 다시는 어떤 법이 있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어느 일정한 중생이 있다고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기의 몸과 중생들을 크게 이롭게 하나니, 마치 경에서 말씀하시기를 “이 보살은 스스로 보시 등을 행하고 또한 다른 사람들에게도 가르치며, 보시하는 법을 찬탄하고 보시하는 이를 기뻐하면서 칭찬하나니,
이에 18불공법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고 하신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친히 그 인연을 말씀하셨다.
“만일 법성이 먼저는 없다가 나중에 있다면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수 없고, 또한 방편의 힘으로써 설할 수도 없으리라.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법성이 먼저는 없다가 나중에 있어서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면 곧 범부와 공통하는 법이라 차이가 없을 것이요, 만일 법성이 먼저는 있다가 나중에 없다면 중생과 모든 법은 아주 없다[斷滅]는 데로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모든 법성은 먼저도 공하고 중간과 나중도 또한 그와 같으니라. 지혜의 힘으로써 공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중생과 모든 법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을 때에야 비로소 공해지는 것도 아니니, 본래부터 언제나 공한 것이니라.
보살은 중생을 가르치길 ‘어찌하여 그 진실한 성품을 관찰하지 않고, 뒤바뀜에 집착하느냐. 만일 모든 법이 필경 공한 성품인 줄 관찰하게 되면, 본래부터 언제나 공이어서 지금에야 잃은 것이 아닌 줄 알 것이다’라고 하니,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이면 중생을 도와주고 이롭게 할 수 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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