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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6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4권

by Kay/케이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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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4

 

 

 

대지도론 제74권

56. 전부전품을 풀이함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다시 수보리야, 이제 다시 아비발치(阿鞞跋致) 보살마하살의 행과 종류와 모습을 설해 주리니,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
부처님께서 이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여의지 않기 때문에 5중(衆)의 일을 말하지 않고 12입(入)의 일을 말하지 않으며 18계(界)의 일을 말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항상 5중의 공한 모양과 12입과 18계의 공한 모양을 염하면서 관찰하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관청에 관한 일[官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모든 법의 공한 모양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귀한 것과 천한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도둑에 관한 일[賊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한 까닭에 얻는 것과 잃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군사에 관한 일[軍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은 제 모양이 공한 까닭에 많은 것과 적은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싸움에 관한 일[鬪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여(如)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미워하는 것과 사랑하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부녀에 관한 일[婦女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공한 가운데에 머물러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마을에 관한 일[聚落事]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한 까닭에 합하는 것과 흩어지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성읍에 관한 일[城邑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실상(實相)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이기는 것과 지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나라에 관한 일[國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실제(實際)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소속(所屬)이 있는 것과 소속하지 않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나에 관한 일[我事]들을 말하기 좋아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법성(法性)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나라는 것과 나 없다[無我]는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등으로 갖가지 세간의 일을 말하지 않고 다만 반야바라밀을 말하기 좋아하면서 살바야의 마음을 멀리 여의지 않느니라.
만일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간탐하는 일을 하지 않고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파계(破戒)하는 일을 하지 않으며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성내거나 다투는 일을 하지 않고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게으른 일을 하지 않으며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산란한 일을 하지 않고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행할 때에는 어리석은 일을 하지 않으면, 이 보살은 비록 온갖 법공(法空)을 행한다 하더라도 법을 좋아하고 법을 사랑하느니라.
이 보살은 비록 법성(法性)을 행하면서 항상 파괴되지 않는 법[不壞法]을 찬탄한다 하더라도 모든 선지식, 즉 부처님과 보살과 성문과 벽지불 등이 능히 교화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즐거이 머무르게 하는 이를 좋아하느니라.
이 사람은 항상 모든 부처님을 뵙기를 원하면서 계신 곳을 듣거나 어느 부처님 국토 안에 현재 부처님이 계시면 그 원에 따라 가 나고자 하며 이와 같은 마음을 항상 밤낮으로 행하고 있나니, 부처님을 염하는[念佛] 마음이 그것이니라.
이와 같아서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초선(初禪)으로부터 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까지를 행하면서 방편의 힘으로써 욕계(欲界)의 마음을 일으켜 중생으로서 열 가지 착한 길[十善道]을 행할 수 있는 이나 현재 부처님이 계신 곳 안에 가 태어나나니, 이와 같은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를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내공(內空)ㆍ외공(外空) 내지는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에 머무르고 4념처(念處) 내지는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해탈문에 머무르면서 자기의 지위에 대하여 분명히 알면서 ‘나는 아비발치인가, 아비발치가 아닌가’라고 의심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서는 ‘옮아간다, 옮아가지 않는다’ 하는 작은 법까지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사람이 수다원의 과위를 얻어 수다원의 지위 안에 머무르면서 스스로가 분명히 알며 끝내 의심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는 것처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무르면서 끝내 의심하지도 않으며, 이 지위 안에 머무르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갖가지의 악마의 일이 일어나면 바로 그때에 깨달아 알고 또한 악마의 일을 따르지도 않으면서 악마의 일을 파괴하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사람이 5역죄(逆罪)를 지었을 때에 그 5역죄의 마음이 죽을 때까지 항상 따라다니면서 버리지 못하며 비록 다른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막아내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자기 자신이 그 지위에 머무르면서 마음이 항상 동요하지 않으니,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 등도 움직이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세간의 하늘ㆍ사람ㆍ아수라들보다 뛰어나서 바른 법의 지위[正法位] 가운데에 들어가 스스로 증득하는 지위[自證地] 안에 머물러서 모든 보살의 신통을 완전히 갖추어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한 부처님 세계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며 시방의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고 모든 부처님을 가까이하면서 법을 묻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은 이와 같이 머무르면서 갖가지 악마의 일이 일어나도 잘 알아차려 따라가지 않으며 악마의 일에 처하거나 실제(實際) 안에 처하거나 방편의 힘으로써 스스로가 증득한 지위 안에서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나니, 왜냐하면 실제 안에서는 의심하는 모양이 없기 때문이요, 이 실제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님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이 사람은 몸을 바꾸어서까지도 끝내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향하지 않나니, 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의 자상공 가운데서는 나는 것과 없어지는 것과 더러운 것과 깨끗한 것의 어떠한 법도 보지 않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몸을 바꾸기에 이르기까지 또한 ‘나는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인가, 얻지 못할 것인가’라고 의심하지도 않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모든 법의 자기 모양[自相]이 공한 것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스스로가 증득한 지위 안에 머물러서 다른 이의 말을 따르지도 않아 무너뜨릴 수 있는 이도 없나니, 왜냐하면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동요하지 않는[不動] 지혜를 성취하였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가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악마가 부처님의 몸으로 되어 와서 이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이제 이 세간에서 아라한의 도(道)를 취해야 한다. 그대에게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는 수기도 없고 그대는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도 얻지 못했으며 그대에게는 이런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도 없고 또한 이런 모양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얻을 수는 없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런 말을 듣고도 마음이 달라지지 않고 침몰하지도 않으며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이 보살은 스스로가 ‘나는 반드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았었다’고 알 것이니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은 이 법으로써 수기를 받고 나도 이런 법으로 수기를 얻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악마나 그의 심부름꾼이 부처님의 형상으로 되어 와서 보살에게 성문이나 벽지불의 수기를 주면, 수보리야, 이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것은 악마나 그의 심부름꾼이 부처님의 형상으로 되어 왔구나. 모든 부처님께서는 보살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멀리 여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도에 머무르도록 가르쳐 주셨을 리 없기 때문이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것을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악마가 부처님의 몸이 되어 보살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그대가 배우고 있는 경서(經書)는 부처님이 하신 말씀도 아니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말도 아니며 그것은 바로 악마가 한 말이다’고 하면,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것은 바로 악마와 그의 심부름꾼이 나로 하여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멀리 여의게 하려는 것이다’라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보살은 이미 과거의 부처님께 수기를 받고는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 머물러 있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보살이 지니는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 있는데, 이 보살에게도 그런 행과 종류와 모습이 있기 때문이니, 이것을 아비발치 보살의 모양이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모든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護持]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거늘 하물며 그 밖의 물건이겠느냐, 이 보살은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 위하여 생각하기를 ‘나는 한 분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 위한 것이 아니다. 나는 3세(世)와 시방(十方)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 위해서이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부처님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느냐 하면, 수보리야, 마치 부처님께서 ‘모든 법은 진공(眞空)이니라’고 말씀하시면 이때에 어떤 어리석은 사람은 파괴하고
받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것은 법(法)도 아니요 선(善)도 아니며 세존의 가르침도 아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러한 법을 수호하고 지니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으며, 보살은 또한 생각하기를 ‘미래 세상의 모든 부처님에 나도 역시 그 무리 안에 있을 것이요 그 안에 있으면서 수기하리니, 이 법은 나의 법이기도 하다’고 해야 하나니, 이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보살은 이런 이익을 보고 있기 때문에 이 법을 수호하고 지니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이것이 아비발치의 모양임을 아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설법을 들으면 의심하지 않고 후회하지 않으며 들은 뒤에는 받아 지니면서 끝내 잊어버리지 않나니, 왜냐하면 다라니(陀羅尼)를 얻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떠한 다라니를 얻으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듣고도 잊어버리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문지(聞持) 등의 다라니를 얻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듣고도 망실하지 않으며 의심하거나 후회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만 부처님의 설법만을 들으면 망실하지 않으며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는지요? 아니면 성문이나 벽지불의 말이나 하늘ㆍ용ㆍ귀신ㆍ아수라ㆍ긴나라 및 마후라가의 말도 망실하지 않으며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언설(言說)과 여러 가지 일에도 다라니를 얻은 보살은 모두 다 망실하지도 않으며 의심하거나 후회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은 행과 종류와 모습을 성취하기 때문에 그가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부처님께서는 다시 아비발치의 모양을 더 자세히 설명하시려고 수보리에게 ‘일심으로 자세히 들어라’고 말씀하신다.
이 보살은 항상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여의지 않고
필경공을 즐거이 행하기 때문에 5중(衆)과 12입(入)과 18계(界)의 결정된 모양을 분별해서 말하기를 좋아하지 않으며 또 국왕에 관한 일 등을 말하기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 밖의 외도(外道)들은 다른 이의 공양을 받고도 바른 도[正道]가 없기 때문에 허망하게 염착(染著)하며, 마음이 게으르기 때문에 나라에 관한 일을 말하면서 과거 세상의 모든 왕의 세력과 누린 쾌락 등을 분별하거니와 아비발치 보살은 이런 일을 말하지 않는다.
온갖 세간은 항상 덧없는 불에 타고 있다고 보면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며 ‘나는 아직 부처님 도를 얻지 못했으므로 나는 다만 중생을 제도하는 법만 말해야 하고 그 밖의 일들은 말하지 않아야 한다. 온갖 법은 마침내 공하기 때문에 크고 작은 모양을 얻을 수 없다’고 하나니, 도둑에 관한 일 등도 역시 그와 같이 한다.
필경공이란 곧 여(如)요 법성(法性)이요 실제(實際)이므로 6바라밀만을 행할 뿐이요 6폐(蔽)1)는 말하지 않는다.
보살은 비록 온갖 법의 공한 가운데에 편안히 머무른다 하더라도 법을 좋아하고 법을 사랑하나니, 왜냐하면 이 보살은 이 온갖 법의 공한 데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차제법(次第法)과 선정과 지혜 등을 행한 연후에야 온갖 법이 공함[法空]을 얻는데, 이 공이란 입으로만 말하면서 마음으로 집착해서는 안 된다. 이 때문에 먼저 차제법을 행한다.
또 법의 성품 가운데서는 모든 법을 분별하지 않기 때문에 법성은 파괴되는 모양이 아니다. 이 보살은 법 성품에 집착하지 않으면서 중생을 가엾이 여기어 갖가지로 착하고 착하지 않는 법 등을 분별하여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한다. 비록 중생들을 위하여 이렇게 말한다 하더라도 또한 언제나 파괴되지 않는 법을 찬탄하면서 중생들을 인도하여 법성 가운데에 들게 하기 때문이다.
또 아비발치 보살에게는 더 이상은 친선(親善)한 이가 없으며 다만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로서 실상(實相)의 법을 찬탄하는 이만을 친선한 이로 삼는다. 이런 사람은 공덕과 지혜가 크기 때문에 마음대로 가게 되나니,
만일 모든 부처님의 세계에 이르고자 하면 마음대로 가 나게 된다.
이 보살은 비록 욕망을 여의고 모든 선정을 얻었다 하더라도 방편의 힘으로써 중생들을 위하여 욕계(欲界)에 태어난 이도 있고 현재 부처님이 계신 곳에 태어나는 이도 있다.
욕계에 태어나는 이는 일부러 중생들을 위하여 애욕과 교만한 기분을 유보하면서 이 선정의 과보로써 색계(色界)나 무색계(無色界)에 태어나지 않는다. 다만 선정으로써 그 마음을 부드럽게 만들 뿐이요 그 과보를 받지는 않는다.
또 이 보살은 내공 등의 모든 공 가운데에 편히 머무른다. ‘편히 머무른다’고 함은 깊이 들어가고 통달하여 마음에 집착한 바가 없는 것이니, 그 때문에 ‘나는 아비발치인가, 아비발치가 아닌가’라고 의심하지 않는다. 자기 마음속에서 지혜에 깊이 들기 때문에 이것을 자기 지위의 증득[自地證]이라 한다.
또 이 사람은 온갖 법에서 옮아가는 것과 옮아가지 않는 것을 보지 않나니, 이 때문에 의심을 내지 않는다. 의심은 모양을 취하면서 얻는 것이 있는[取相有所得] 것을 말하나니, 마치 사람이 밤에 나무 등걸을 보고는 거기에다 생각을 내면서 ‘사람의 형상도 저렇다’고 하며 의심을 내는 것과 같다.
만일 이런 두 가지 모양을 취하면 그 때문에 의심이라 하거니와 보살은 무상삼매(無相三昧)를 행하기 때문에 온갖 법 가운데서 모양을 취하지 않으며 따라서 의심을 낼 곳이 없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비유로 말씀하시되 “수다원은 끝없는 세상으로부터 아직 이 무루(無漏)의 지혜를 얻지 못했지만 3결(結)을 끊었기 때문에 곧 스스로 무루의 법을 얻을 줄 알며 네 가진 진리[四諦] 가운데서 마음이 안정되어 괴롭거나 즐겁거나 의심하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신다.
아비발치도 또한 그와 같아서 끝없는 세상으로부터 모든 법의 실상, 즉 아비발치의 지위를 얻지 못했지만 얻을 때에도 역시 의심을 내지 않는다. 모든 의심을 낸다는 것은 틀리는[違失] 일을 보는 것이니, 본래 들었던 바와 같지 않기 때문이다.
이 보살은 온갖 법에 있어서 필경 공하기 때문에 그것이 들었던 법대로가 아니라고 의심할 수도 없으며, 머무르는 곳이 없기 때문에 의심이 없다. 이것이 바로 궁극의 도[究竟道]이어서
논할 수도 없고 타파할 수도 없음을 스스로가 안다.
이 지위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또한 방편의 힘 때문에 갖가지 악마의 일을 파괴한다.
이 아비발치의 법은 항상 보살이 부처님이 되기까지 붙따른다. 이에 대해 부처님께서는 두 가지 비유로 말씀하셨나니, 첫째는 수다원(須陀洹)이요, 둘째는 5역(逆)이다. 이 두 가지 마음은 두텁고 중하기 때문에 물리칠 수가 없다.
수다원의 마음은 언제나 물리칠 수 없고 5역의 마음은 죄가 다 끝나야 비로소 제거된다. 마치 사람이 상복(喪服)을 입고 있으면 귀신이 항상 뒤따르는 것과 같나니, 아비발치의 마음은 이것보다 더하다.
아비발치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움직일 수가 없고 갖가지의 괴로운 일이 핍박하여도 움직일 수 없으며 갖가지 공양과 이양(利養)의 인연으로도 그 실상의 마음[實相心]과 자비로운 마음을 버리게 할 수 없다.
위에서는 갖가지로 아비발치의 모습[相貌]을 설명하셨고 여기서 그의 행(行)에 관한 일을 말씀하신다. 이른바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새로 선근(善根)을 심고 한 부처님으로부터 모든 부처님의 모든 깊은 법요(法要)와 그리고 갖가지로 중생을 제도하는 문(門)을 물으며, 시방에서 갖가지로 악마의 일이 일어나도 따르지 않고 방편의 힘으로써 이 악마의 일을 마치 부처님 법같이 관찰하고 모든 악마의 몸을 마치 부처님과 다름없이 관찰한다. 왜냐하면 온갖 법과 실제(實際)는 똑같은 한 모양[一相]이어서 이른바 모양이 없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몸을 바꾸어도 역시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향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이 보살은 처음 아비발치를 얻을 때에 온갖 법의 실상은 공한 줄 알고 몸과 마음을 바꾼 뒤에도 이 두 지위[二地]를 향하지 않으며 마음에서 저절로 의심이 나지 않기 때문이니,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거나 얻지 못하거나 간에 이 보살을 세상마다 항복 받거나 파괴할 수 있는 자는 없다.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을 시험하기 위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되 “악마가 부처님의 몸이 되어 와서
이 보살을 시험하려 하면서 말하기를 ‘그대는 이 세상에서는 아라한을 취하여야 한다. 그대에게는 부처님 도를 얻을 아비발치의 모양이 없다.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는 것이 곧 온갖 법이 없다는 것인데 이 가운데서 어떻게 법인을 얻겠는가’라고 하느니라”고 하신다.
만일 보살이 이런 말을 듣고도 마음이 물러나거나 침몰하지 않으면 이 보살은 스스로가 반드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는 줄 알 것이니, 왜냐하면 ‘나에게도 무생법인이 있다’고 하면서 이 악마의 일을 들어도 마음에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 악마는 이 보살이 기뻐하는 것을 알고 성문과 벽지불의 수기를 주면서 “만일 이 세상에서 아라한이 되면 뒷세상에서는 벽지불이 될 것이다”고 한다. 보살이 변화로 된 부처님 몸의 말을 따르지 않는 것은 ‘그는 바로 악마요 악마의 심부름꾼이다’라고 알아차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은 부처님인데도 말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치 돈을 시험할 때에 튀겨 보아 소리가 나면 그것의 참과 거짓을 아는 것과 같다.
가령 부처님께서 성문이나 벽지불의 수기를 주신다고 한다면, 그런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방편을 쓰면서 온갖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다 부처님 도에 들게 하려 하시거늘 어떻게 보살을 끌어다가 성문의 수기를 주시겠는가.
또 악마가 다시 부처님 몸으로 변화하여 보살에게 말하기를 “그대가 행하고 있는 경서(經書)는 모두가 다 악마가 한 말이다”고 할 때에 이 보살은 그것이 악마의 일인 줄 알아차린다면 이 보살은 이미 수기를 받고서 아비발치의 성품 가운데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아야 한다.
또 아비발치 보살은 법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들으면 곧 마음에 스미면서 몸의 털이 곤두서며 부처님의 대비(大悲)를 생각하면서 환희의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혹은 이 깊은 법 가운데서 크게 기뻐하기도 하나니, 그가 바로 아비발치인 줄 알아야 한다.
비유하건대 마치 큰 군사들이 패하여 도망치다가 두려운 바람에 기절하여 땅에 엎어져 죽은 사람같이 될 때에 그의 친족이 그가 살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하여 작대기를 가지고 그를 때려서 그 맞은 자리에 흔적이 생기면 틀림없이 살 수 있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다.

보살도 그와 같아서 모두 육신(肉身)이지만 어떻게 틀림없이 성불할 수 있는가를 아느냐 하면, 만일 그가 부처님의 법을 들으면 몸속에서 조짐이 나타나면서 몸의 털이 곤두서고 얼굴빛이 달라지거니와 그 밖의 사람이 들으면 마음에 들어오지 않으므로 달라지는 모양도 없으니, 마치 죽은 사람과 다름이 없다.
이 보살은 깊이 법을 좋아하기 때문에 법을 위해서는 몸을 버린다. 만일 부처님이나 부처님의 제자가 큰 모임에서 갖가지의 인연으로 모든 법이 마침내 공하다는 것을 말씀하면 어느 한 미치광이는 음성과 이름의 모양을 취하고 마침내 그 공하다는 데에 집착하면서 그 허물을 드러낸다.
그는 말하기를 “만일 모든 법이 다 마침내 공하다면 부처님도 없고 법도 없으며 죄와 복의 업의 인연도 없고 수행과 정진을 통해 도를 얻는 과보도 없을 것이다”고 하면서, 이러한 등의 한량없는 허물을 드러낸다.
아비발치 보살은 이를 관찰하고 헤아리면서 설법하는 이의 유무(有無)의 집착심을 알고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설하고 있음을 알며, 미친 사람은 언어에 집착하여 모양을 취하면서 이 필경공을 파괴하고 있다는 것도 안다.
그때 아비발치는 목숨을 내놓고 거들면서 말하기를 “그것은 미친 사람의 말이다. 그는 삿된 소견에 빠져 있으면서 다른 많은 사람에게는 삿된 소견으로 부처님 법을 파괴하고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고 하면 그는 몹시 성을 내면서 혹은 자기 자신이 죽이기도 하고 혹은 그의 제자를 시켜 죽이기도 한다.
그때 보살은 죽는 일이 닥쳐와도 법을 돕기 위하여 두려움 때문에 모든 법의 성품을 파괴하는 일은 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에 대한 인연을 말씀하시되 “보살은 생각하기를 ‘미래 세상의 부처님 중에는 나도 그 무리 안에 들어 있을 것이므로 이 법은 바로 나의 법이다. 그것은 바로 나의 법이기 때문에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수호하는 것이다’라고 하느니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는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한량없는 세상 동안 번뇌와 삿된 소견 때문에 몸을 잃은 일이 수없다. 이제는 시방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의 법을 돕고 일으키기 위함이니, 이익이 있으면서 죽는 것이 이익 없이 사는 것보다는 낫다’고 한다.
이러한 등으로 법을 위하여는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다.
또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도를 이루지 못했다 해도 부처님으로부터 매우 깊은 법을 듣고 모두 다 받았었나니, 신근(信根)의 힘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잘 받았고 문지다라니(聞持陀羅尼)의 힘 때문에 잃지 않았으며 단의다라니(斷疑陀羅尼)의 힘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다만 부처님의 말씀만을 듣고서 믿고 지니면서 의심하지 않는지요, 아니면 그 밖의 말을 들어도 역시 그러한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온갖 말한 바 있는 것은 모두 다 지니느니라. 설령 2승(乘)이나 하늘ㆍ용 등이 말하였다 해도 도리(道理) 있는 것은 모두 잘 믿고 지니면서 의심하지 않거니와 도리가 없는 것이면 지녀서 의심이 없다 해도 믿지 않느니라”고 하신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삿된 법을 믿는 이는 착하지 않은[不善] 것이 바로 착한[善] 것이라는 것도 의심하지 않는다”고 한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모든 하늘ㆍ용이나 2승이 말한 것도 모두 그것은 부처님의 법이다”고 한다.
이 때문에 아비발치의 모양은 들으면 잘 지니면서 의심하는 것도 없고 후회하는 것도 없으며, 이 보살은 비록 아직은 부처님이 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법의 실상(實相) 가운데서 도무지 의심하는 것이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 행과 종류와 모습을 지닌 이가 바로 아비발치 보살이다.
【문】어떤 일을 얻어서 온 이를 아비발치라 하는가?
【답】아비담비바사(阿毘曇毘婆沙) 가운데서 말씀하기를 “3아승기겁(阿僧祇劫)을 지난 뒤에 32상(相)의 인연을 심었으면 그로부터 아비발치라 한다”고 한다.
비니(毘尼)와 아파타나(阿波陀那) 안에서 말씀하기를 “연등부처님[然燈佛]을 뵙고서 다섯 송이의 꽃을 부처님께 뿌리고 머리칼을 땅에다 폈을 때 부처님께서는 그를 위해 아비발치의 수기를 주셨으므로 허공에 날아올라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탄했으니, 이로부터 아비발치라 한다”고 한다.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만일 보살이 구족하게 6바라밀을 행하고 지혜와 방편의 힘을 얻어 이 필경공의 바라밀에 집착하지 않으며, 온갖 법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不生不滅]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으며[不增不減] 더럽지도 않고 깨끗하지도 않으며[不垢不淨]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不來不去] 동일하지도 않고 다르지도 않으며[不一不異] 항상하지도 않고 끊어지지도 않으며[不常不斷]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라고[非有非無] 관찰하나니, 이렇게 한량없이 상대되는 두 가지 법이 있다”고 한다.
이런 지혜로 인하여 온갖 나고 없어지는[生滅] 등의 무상한 모양[無常相]을 관찰하면서 깨뜨리는 것이다. 앞에서는 무상하다는 등으로 인하여 항상하다[常]는 등의 뒤바뀜을 파괴하였고 여기서는 또한 나는 것이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이 없다[無滅]는 것도 버리고 있나니, 무상관(無常觀) 등을 버리므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것에 대해서도 집착하지 않으며 또한 공하여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도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모양은 얻지도 못하고 집착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또한 이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을 믿고 쓰며 3세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참된 지혜 안에서 믿는 힘 때문에 통달하여 장애가 없나니, 이것은 바로 보살이 무생법인을 얻고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는 것이라 하며 아비발치라고도 한다.
이 보살이 처음 발심해서부터 아비발치라고는 하더라도 아비발치의 모양을 아직 두루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수기를 주지 않는다. 왜냐하면 외도의 성인이나 모든 하늘이나 작은 보살들은 생각하기를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을 보시고 어떤 일이 있기에 수기를 주실까’라고 하기 때문이다.
이 사람은 부처님 도의 인연 가운데에 아직 머무르지 못했거늘 어떻게 수기를 주시겠는가. 그러므로 부처님께서는 수기를 주지 않는 것이다.
이 보살에게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나고 죽는 육신[生死肉身]이다. 둘째는 법성생신(法性生身)이니, 무생법인의 법을 얻어 모든 번뇌를 끊고 이 몸을 버린 뒤에야 법성생신을 얻는다.
육신의 아비발치에도 두 가지가 있나니, 부처님 앞에서 수기를 얻는 이가 있고 부처님 앞에서 수기를 얻지 못한 이가 있다. 만일 부처님이 세상에 계시지 않을 때에는 무생법인을 얻어도 그는 부처님 앞에서 수기를 받지 않은 이다.
【문】만일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읽고 외우고 설하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무생법인의 이치를 수순하지만 그 사람은 아직 선정을 얻지 못하여 혹은 의심을 내기도 하고
혹은 집착하는 마음에 끌리게 되면, 이러한 사람은 그 어떤 보살에 비교가 되는가? 그가 바로 아비발치인가, 아닌가?
【답】이 사람은 아비발치라 하지 못한다. 아비발치의 보살은 매우 깊은 부처님의 법 안에서도 오히려 의심이 없거늘 하물며 무생법인의 첫 문[門]이겠는가.
이 아비발치를 아직 얻지 못한 이에게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가 믿음이 적고 의심이 많은 이요, 둘째는 의심이 적고 믿음이 많은 이다.
믿음이 적고 의심이 많은 이는 경전을 읽고 외우는 사람보다는 조금 나으며, 믿음이 많고 의심이 적은 이는 설령 선정을 얻고 즉시 유순인(柔順忍)을 얻어도 아직 법애(法愛)를 끊지 못했기 때문에 혹은 집착하는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도로 물러나기도 한다. 이 사람이 만일 항상 닦고 익히면 이 유순인을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에 법애를 끊고 무생법인을 얻어 보살의 지위에 들어간다.
아비발치의 모양[相]에 대한 이치를 간략하게 해설했다.

57. 등주품(燈炷品)을 풀이함①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큰 공덕을 성취한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으며 끝이 없는 공덕을 성취한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큰 공덕을 성취하였으며,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을 성취하였느니라. 왜냐하면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함께하지 않는 한량없고 끝이 없는 지혜를 얻기 때문이니, 아비발치 보살은 이 지혜 가운데 머무르면서 4무애지(無礙智)를 일으키며, 이 4무애지를 얻었기 때문에 세간의 온갖 하늘이나 사람으로서는 다 없어지게 하지 못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이라도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행(行)과 종류[類]와 모습[相貌]을 찬탄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다시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깊고 오묘한 곳[深奧處]이기에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은 이 가운데 머무르면서 6바라밀을 행할 때에 4념처를 두루 갖추고, 나아가 일체지를 두루 갖추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를 칭찬하셨다.
“참으로 훌륭하구나. 수보리야, 그대는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이 깊고 오묘한 곳을 묻는구나.
수보리야, 깊고 오묘한 곳이란 공이 바로 그 뜻이며 모양[相]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일어나는 것[起]이 없고, 생기는 것[生]이 없고, 물드는 것[染]이 없고, 여의고[離], 고요히 사라지고[寂滅],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와 열반(涅槃)이니, 수보리야, 이와 같은 등의 법이 바로 깊고 오묘한 뜻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다만 공 내지 열반만이 깊고 오묘하며 온갖 법은 깊고 오묘한 것이 아닌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법도 또한 깊고 오묘한 뜻이니라. 수보리야, 물질[色]도 깊고 오묘하며 느낌[受]ㆍ생각[想]ㆍ지어감[行]ㆍ분별[識]도 깊고 오묘하며, 눈[眼]으로부터 뜻[意]까지도 깊고 오묘하며 빛깔[色]로부터 법(法)까지와 눈의 경계[眼界]에서 의식의 경계[意識界]까지와 단바라밀에서 반야바라밀까지와 4념처에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까지도 또한 깊고 오묘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물질은 깊고 오묘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도 또한 깊고 오묘한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물질의 여(如)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물질이 깊고 오묘하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여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가 깊고 오묘하기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도 깊고 오묘하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물질의 여가 깊고 오묘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가 깊고 오묘한 것인지요?”
“수보리야,
이 물질의 여는 물질이 아니고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아가 분별의 여는 분별이 아니고 분별을 여읜 것도 아니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여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아니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여읜 것도 아니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미묘한 방편의 힘 때문에 아비발치 보살로 하여금 물질을 여의고는 열반에 처(處)하게 하고 또한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을 여의고는 열반에 처하게 하며 또한 온갖 법의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과 다툼이 있는[有諍] 것과 다툼이 없는[無諍] 것과 유루(有漏)와 무루(無漏)의 법을 여의고는 열반에 처하게 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부처님께서는 미묘한 방편의 힘으로써 아비발치 보살로 하여금 물질을 여의고는 열반에 처하게 하며, 나아가 유루와 무루의 법을 여의고는 열반에 처하게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심히 깊은 법과 반야바라밀이 상응한다고 관찰하고 헤아리며 생각하기를 ‘나는 이와 같이 행하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가르친 것과 같이 해야 하며, 나는 이와 같이 배우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 보살마하살이 말씀하신 대로 행하고 말씀하신 대로 배우면서 반야바라밀 가운데서와 같이 관찰하고 두루 갖추어 부지런히 정진하면 한 생각[一念]이 생길 때마다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복덕을 얻을 것이니, 이 보살마하살은 한량없는 겁을 뛰어넘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리라. 그러니 하물며 항상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상응한 생각을 함이겠느냐.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음욕심이 많은 사람이 단정하고 정결한 여인과 함께 만나기를 약속했다가 이 여인에게 거리낀 일이 있어
제때에 오지 못했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의 생각이 어느 곳에 있겠느냐?”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생각마다 여자나 그 여인에게 있으면서 늘 생각하기를 ‘언제 와서 그와 함께 앉고 눕고 하면서 즐기게 될까’라고 할 것입니다.”
“수보리야, 이 사람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에 얼마의 생각을 내고 있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은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에 심히 많은 생각을 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생각하는 것은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말한 대로 하되 이 도(道)를 행할 때의 한 생각 동안에 겁수(劫數)를 초월하는 것은 마치 저 사람이 하루 낮과 하룻밤 동안에 마음속으로 여인을 생각하는 그 수(數)와 같으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뭇 죄를 멀리 여의나니,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여의는 죄를 말하는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하루 동안에 얻게 되는 선근 공덕이 가령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찬다 하여도 그 공덕은 오히려 더 줄지 않아서 그 밖의 남은 공덕에 견주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며 천 분ㆍ천억만 분의 1, 내지는 산수(算數)와 비유(譬喩)로도 미칠 수 없느니라.”
【論】해석한다. 수보리는 아비발치의 모양을 들을 때에 아비발치의 공덕을 빠짐없이 듣고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아비발치의 공덕을 찬탄하기 위하여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아비발치는 큰 공덕을 성취하였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을 성취하였습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찬탄한 바를 옳다 하시면서 다시 그 큰 공덕 등의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른바 아비발치 보살은 한량없고 끝이 없는 지혜를 얻었으므로 성문이나 벽지불과는 공통하지 않는다. 수행하는 이는 반드시 먼저 알고 그런 뒤에야 행할 것이요 행한 뒤에는 그 공덕을 받는 것이니,
이 때문에 공덕의 인연을 말하는 것은 지혜가 한량없고 끝이 없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지혜라 함은 이른바 반야바라밀이니, 보살은 이 반야바라밀 안에 머무르면서 4무애지(無礙智)를 낸다. 온갖 법의 진실한 뜻[義] 가운데서 지혜가 막힘도 없고 거리낌도 없다면 벌써 의무애(義無礙)인 줄 알 수 있으며, 이미 갖가지로 모든 법의 이름을 분별하면서 그를 위하여 그 이치를 말하기 때문에 이것을 바로 법무애(法無礙)라 한다.
이런 이름은 반드시 언어(言語)로 말미암고 언어로 말미암아 이 갖가지의 이름을 내므로 이것을 바로 사무애(辭無礙)라 하며, 이 법무애와 사무애를 얻었기 때문에 모든 법의 진실한 이치를 말하기 좋아하므로 이것을 바로 요설무애(樂說無礙)라 한다.
보살은 이 4무애지 안에 편히 머무르면서 온갖 중생이 듣고 따져도 다할 수 없음은 마치 큰 바닷물이 기울거나 다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보리는 부처님께서 위의 두 품[二品] 가운데서 아비발치의 두루 갖춘 모양을 말씀하신 것을 들었고 이 품(品)에 들어와서는 부처님께서 바야흐로 4무애지의 문을 여시어 다시 아비발치의 모양을 말씀하려 하셨으므로 이 때문에 수보리는 부처님을 찬탄하면서 “세존은 지혜가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아비발치의 공덕 또한 한량없고 끝이 없습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즐거이 설한다 하여도 또한 다할 수가 없으며 아비발치의 모습도 또한 다할 수 없다”고 하신다.
그러자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깊고 오묘한 곳[深奧處]이기에 아비발치 보살은 이 깊고 오묘한 곳에 머무르면서 6바라밀과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두루 갖추는 것입니까”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를 찬탄하시면서 “그대는 아비발치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깊고 오묘한 이치를 묻는구나”고 하시고, 부처님께서는 이어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공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를 바로 깊고 오묘한 곳이라 하느니라”고 하신다.
【문】모든 존재하는 법[有法]은 갖가지로 자세히 분별하여도 사람들로서는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것이 있다.
공하여 아무것도 없거늘 무엇 때문에 깊다고 하는가?
【답】곧장 입으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공한 것이다. 모든 존재하는 모양을 분별하여 이해할 때에 안으로는 나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고 밖으로는 실체로서의 정해진 법을 보지 못한 것이니, 이런 공을 얻은 뒤에는 온갖 법의 모양을 관찰하여도 그것은 거짓이요 모든 허물이 있다. 만일 모양이 소멸해버리면 다시는 삼계(三界)에 나는 것을 원하지 않을 것이나 이 공은 바로 도를 얻는 공[得道空]이라 다만 입만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 이 때문에 깊다고 한다.
또 공도 또한 다시 공한 것이다. 만일 이 공에 집착한다면 과실이 있으므로 이것은 깊다고 하지 못한다. 공은 삿된 소견이 있는 것을 깨뜨림으로써 나오는 것이라 깊다고 하고 공한 가운데서도 공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또한 깊은 것이다.
또 5중(衆)의 나고 없어짐[生滅]을 관찰하여 항상하다는 뒤바뀜[常顚倒]을 파괴하고 필경공(畢竟空)을 관찰하여 나고 없어짐을 파괴한다. 왜냐하면 공 가운데에는 무상한 것도 없으며 나고 없어지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나고 없어지는 것이 없는 데에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삿된 소견을 지닌 사람이 말하기를 “세간은 항상 존재하기 때문에 나고 없어지는 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요, 둘째는 “나고 없어지는 것을 파괴하기 때문에 나고 없어지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나고 없어지는 것을 파괴하고 또한 이 나지도 않고[不生] 없어지지도 않는[不滅] 데에 집착하지도 않기 때문에 깊다고 하며 모든 번뇌는 제거하기 어렵기 때문에, 욕심을 여의고 고요히 사라지기[寂滅] 때문에 깊다’고 말한다.
잘못 알기는 쉽고 진실은 어렵기 때문에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가 깊은 것이요, 열반은 모든 범천(梵天) 등과 96종의 외도(外道)로서는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니기 때문에 깊은 것이다.
또 열반 가운데에 온갖 도를 얻은 사람이 들어가면 영영 다시는 나오지 못하기 때문에 깊은 것이다.
【문】이 가운데서 ‘공 등의 법은 깊다’고 하는데, 이것은 어떠한 공인가?
【답】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3삼매(三昧)인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마음에 속한 법을 정(定)이라 하며, 정이기 때문에 모든 법이 공함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밖으로 반연할 바[所緣] 물질 등의 법은 모두가 공하며 바깥의 공을 반연하기 때문에 공삼매(空三昧)라고 한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공삼매를 쓰지 않기 때문에 공하며 또한 반연할 바깥 물질 등 모든 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공하나니, 왜냐하면 바깥 법은 진실로 공하지 않기 때문이다”고 하신다.
삼매(三昧)의 힘 때문에 공하다면 이것은 허망하고 진실하지 않은 것이요, 만일 바깥의 공을 반연하기 때문에 삼매가 생긴다면 이것도 또한 옳지 못하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물질 등의 법이 실로 공한 모양이라면 공삼매를 낼 수 없으며, 만일 공삼매를 낸다면 이것은 공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서는 “이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말한다”고 하나니, 이른바 모든 법은 인(因)과 연(緣)이 화합하여 생긴다. 이 화합으로 된 법은 일정한 법이 없기 때문에 공한 것이니, 왜냐하면 인과 연으로 생긴 법은 자성(自性)이 없으며, 자성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곧 마침내 공하기 때문이다.
이 필경공은 본래부터 공이어서 부처님이 만든 것도 아니요, 또한 그 밖의 사람이 만든 것도 아니다. 모든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을 제도해야 하기 때문에 마침내 공한 모양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공한 모양은 바로 온갖 모든 법의 실체(實體)이어서 안과 밖을 인(因)해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 공한 모양은 갖가지의 이름을 갖나니, 즉 모양 없음과 지음 없음, 고요히 사라짐[寂滅]ㆍ여읨ㆍ열반 등이 그것이다.
수보리는 모든 보살들이 근기가 예리한데도 열반에 깊이 집착하고 있는 것을 알고 이 보살들을 위하여 짐짓 묻기를 “세존이시여, 다만 열반만이 심히 깊고 모든 법은 심히 깊지 않은 것인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물질 등의 온갖 법을 바르게 관찰하면 열반을 얻으며 물질 등의 모든 법은 열반으로 인하기에 매우 깊다”고 하시며, 이 때문에 경 가운데서 말씀하시되 “물질 등의 여(如) 때문에 매우 깊으며 물질 등의 여가 곧 바른 관[正觀]이다”고 하신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찌하여 물질 등의 여 때문에 물질 등의 법이 매우 깊은 것인지요”라고 하며,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스스로 깊은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이른바 여(如) 그것은 물질이 아니요 물질을 여읜 것도 아니다”고 하신다. 비유하건대 마치 진흙으로 병을 만들지만 진흙 그것이 곧 병은 아니요, 진흙을 여의고 병이 있는 것도 아니며,
또한 병이 없다고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수보리는 이런 인연으로 법이 매우 깊은 것은 마치 큰 바다에 밑이 없는 것과 같은 줄을 알기 때문에 찬탄하면서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는 미묘한 방편의 힘으로써 보살로 하여금 물질 등의 모든 법을 여의고 열반에 처(處)하게 하되 그렇다고 열반에 집착하지도 않고 또한 세간에 머무르지도 않게 하나니, 이것이 바로 미묘한 방편입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가 말한 바를 옳다고 하시고 보살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행하는 과보와 복덕을 찬탄하시면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이와 같이 매우 깊은 법이 반야와 상응함을 관찰하고 헤아리면서 그 한 생각이 생길 때에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의 복덕을 얻느니라”고 하신다.
【문】2승의 무루(無漏) 법에서조차도 오히려 과보와 복덕이 없거늘 하물며 대승의 필경공(畢竟空)의 관법(觀法)으로써 무량한 복덕을 얻겠는가? 복덕은 큰 자비로부터 중생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요, 죄도 또한 중생을 괴롭히고 해치기 때문에 얻는 것이다.
【답】2승의 무루심 가운데서는 번뇌가 다하였기 때문에 과보와 복덕이 없거니와 보살은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히 복덕과 과보가 있어야 한다.
또 2승은 실제(實際)를 증득하기 때문에 모든 공덕을 다 태워 없앴거니와 보살은 증득하지 않고 다시 태어남이 있기 때문에 곧 복덕이 있다.
또 사람들은 진실한 일에 대해 잘못 알기 때문에 복덕이 적고 진실한 일을 바르게 행하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많다. 마치 축생에게 보시하면 백 배의 복을 얻고, 악인에게 보시하면 천 배의 복을 얻으며, 착한 사람에게 보시하면 10만 배의 복을 얻고, 욕심 여읜 사람[離欲人]에게 보시하면 10억만 배의 복을 얻으며, 수다원 등의 모든 성인에게 보시하면 한량없는 복을 얻는 것과 같다.
범부가 비록 욕심을 여의고 자비로운 마음을 행한다 하더라도 진실한 법 모양[法相]을 얻지 못하기 때문에 한량없는 복전(福田)은 될 수 없거니와 수다원은 아직 욕심을 여의지 못했다 하더라도 모든 법의 진실한 모양을 분별하기 때문에 복전으로서 한량이 없다. 모든 법의 실상을 얻는 데에는 깊고 얕음이 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실상에 깊이 들기에 한 생각[一念] 동안에도 복덕이 한량없고 끝이 없다.
이 가운데서는 생각생각마다 복덕이 많기 때문에 비유로 말씀하시는 것이며, 중생의 마음은 비록 생각생각마다 나고 없어지기는 하나 다만 상속(相續)하면서 생기기 때문에 따라 소멸하는 것을 깨닫지 못할 뿐이다.
음욕이 있는 사람은 마음으로 욕심나는 데에 깊이 집착하는데도 그 욕정(欲情)을 이루지 못하기 때문에 마음으로 생각하고 모양을 취하면서 상대방이 오지 못한 인연을 갖가지로 분별하는 것이니, 이른바 ‘저 여인이 마음에 스스로 뉘우치면서 오지 않은 것일까. 다른 사람이 못 가게 막아서 오지 않은 것일까’라고 한다. 이와 같은 등으로 거친 생각[覺]과 세밀한 생각[觀]을 많이 내지만 이 마음은 알아차리기 쉽기 때문에 비유를 드신 것이다.
이와 같이 한 번 생각하는 그 인연으로 1겁(劫)을 뛰어넘으니, 마치 사람이 연(軟)한 약을 먹으면 1년이 되어서야 병이 낫지만 큰 힘이 있는 약을 먹으면 하루 만에 병이 낫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다섯 가지 바라밀을 행하여 오래된 뒤에야 부처님이 되는 이도 있고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빨리 부처님이 되는 이도 있다.
또 하루 동안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공덕은, 가령 형상이 있어서 취한다 할 때에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차게 한다 해도 하루 동안의 바른 공덕의 체성[體]은 오히려 줄어지지 않으므로 이런 복덕에 견준다 하면 백 분의 1에도 미치지 못하고, 나아가 산수와 비유로도 미칠 수 없다는 것이다.
【經】“다시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불보(佛寶)ㆍ법보(法寶)ㆍ비구승보(比丘僧寶)의 3보에 보시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보살마하살은 이 인연 때문에 복을 얻는 것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아서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일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것은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 가운데서 설한 그대로 하루 동안 수행하여 얻는 복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은 바로 모든 보살마하살의 도(道)이니, 이 도에 올라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수다원과 사다함과 아나함과 아라한과 벽지불 및 모든 부처님께 공양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보살마하살이 이런 인연 때문에 많은 복을 얻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 하루 동안 수행하여 얻는 복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이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온갖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뛰어나서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 점차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정진(精進)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행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이런 인연 때문에 얻는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것은 보살마하살이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를 행하면서 하루 동안 보시와 지혜와 인욕과 정진과 선정과 지혜를 수행하여 얻는 복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은 바로 보살마하살의 어머니이니, 이 반야바라밀은 모든 보살마하살을 능히 낳으며, 모든 보살마하살은 이 반야바라밀 안에 머무르면서 온갖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법 보시[法施]를 행한다 하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은 얻는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 수행하면서 하루 동안만이라도 법을 보시하여 복을 얻는 이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 곧 일체종지를 멀리 여의지 않고 일체종지를 멀리 여의지 않으면 곧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4념처(念處)로부터 8성도분까지와 내공으로부터 일체종지까지를 수행하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선남자ㆍ선여인의 얻는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 하루 동안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수행하여 많은 복을 얻는 이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는데도 살바야에서 물러나는 이는 있다면, 이런 일은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면 살바야에서 물러나는 일이 있을 수 있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언제나 반야바라밀의 행을 멀리 여의지 않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재물의 보시[財施]와 법의 보시[法施]와 그리고 선정의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얻는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매우 많습니다, 세존이시여. 참으로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 하루 동안 만이라도 재물의 보시와 법의 보시와 선정의 복덕을 수행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함으로써 많은 복을 얻는 이보다는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바로 제일가는 회향은 반야바라밀의 회향이기 때문이니, 만일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고 회향하면 그것은 회향이라 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마땅히 방편으로 반야바라밀을 배워서 회향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선남자ㆍ선여인이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읜 채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과거ㆍ미래ㆍ현재의 모든 부처님과 제자들의 선근(善根)을 모두 모아 따라 기뻐하면서[隨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한다면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사람이 얻는 복이 많겠느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매우 많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선남자ㆍ선여인은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설한 그대로 하루 동안 만이라도 따라 기뻐하면서 수행한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여 많은 복을 얻는 이보다는 못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한다면 반야바라밀 가운데에서 배우고 방편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여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과 같아서 인연(因緣)으로 생기는 법은 허망한 생각으로부터 생기며 진실이 아니거늘 어찌하여 선남자ㆍ선여인이 큰 복덕을 얻는지요?
세존이시여, 이 인연으로 생기는 법으로써는 바른 소견[正見]을 얻어 법위(法位)에 들어가지 못해야 하고 수다원의 과위를 얻지 못해야 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과위도 얻지 못해야 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인연으로 생기는 법으로써는 바른 소견을 얻어 법위에 들어가지 못해야 하며, 나아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보살마하살은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또한 공하고 견고함이 없으며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은 줄 아느니라.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내공(內空)을 잘 배우고 나아가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을 잘 배우기 때문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 18공(空)에 머무르면서 지어진 법이 공함을 갖가지로 관찰하며 곧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나니,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점점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지 않으면 점점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복덕을 얻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수없고[無數] 한량없고[無量] 끝이 없다[無邊]는 것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지요?”
“수보리야, ‘수없다’ 함은 유위의 성품[有爲性]이든 무위의 성품[無爲性]이든 수(數) 가운데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한량없다’ 함은 양(量)으로 과거ㆍ미래ㆍ현재를 얻을 수 없다는 것이며, ‘끝이 없다’ 함은 모든 법의 끝을 얻을 수 없다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혹 물질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이 있기도 하고 혹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이 있는 것인지요?”

“수보리야, 인연(因緣)이 있으면 물질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떠한 인연 때문에 물질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은 공하기 때문에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도 공하기 때문에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다만 물질만이 공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만이 공하면서 온갖 법은 공한 것이 아닌지요?”
“수보리야, 내가 온갖 법은 공하다고 말하지 않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온갖 법은 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이 공하다면 그것은 곧 다할 수도 없고[不可盡] 수(數)도 없고 한량이 없고 끝이 없을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공한 가운데서는 수도 얻을 수 없고 양도 얻을 수 없으며 끝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세존이시여, 이 다할 수 없고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이치는 차이가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이 법의 이치에서는 차이가 없느니라.
수보리야, 이 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건마는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 때문에 분별하여 설하면서 이른바 다할 수 없고,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고, 집착이 없고[無著], 공(空)하고, 모양이 없고[無相], 지음이 없고[無作], 일어나는 것이 없고[無起], 나는 것이 없고[無生], 없어지는 것이 없고[無滅], 물드는 것이 없고[無染], 열반[涅槃]이라 하나니, 부처님께서는 갖가지의 인연을 방편으로써 설하는 것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희유한 일입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데도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설하십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부처님께서 하신 말씀의 뜻을 이해하기로는 온갖 법도 역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온갖 법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느니라. 온갖 법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모양[不可說相]이 곧 공이며, 이 공은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는 더하는 것[增]이 있고 덜 하는 것[減]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니니라.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말로는 할 수 없는 이치에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다면 단바라밀에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나아가 반야바라밀에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며, 4념처 내지는 8성도분에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하고,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ㆍ5신통(神通)ㆍ8배사(背捨)ㆍ8승처(勝處)ㆍ9차제정(次第定)과 부처님의 10력(力)ㆍ4무소외(無所畏)ㆍ4무애지(無礙智)ㆍ18불공법(不共法)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이 없고 덜하는 것이 없어야 합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에게 6바라밀이 더하지도 않고 나아가 18불공법이 더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지만,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익히고 행하여 방편의 힘이 있기 때문에 ‘나는 반야바라밀을 더하며, 나아가 단바라밀을 더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면서 다시 생각하기를 ‘다만 이름 때문에 단바라밀이라 부른다’고 해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이런 마음과 그리고 선근(善根)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과 같이 회향(迴向)하며, 나아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도 이런 마음과 그리고 선근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모양과 같이 회향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인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온갖 법의 여한 모양[如相]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온갖 법의 여한 모양이기에
그것을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라 하는 것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물질의 여한 모양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여한 모양 내지는 열반의 여한 모양이 바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이 여한 모양도 역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고 항상 이 여한 법을 관찰하면서 더하는 것이 있다거나 덜하는 것이 있다고 보지 않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수보리야,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으며, 단바라밀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으며, 나아가 18불공법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법[不增不減法]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해야 하느니라.”
【論】해석한다. 반야바라밀을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3보(寶)를 공양하여도 하루 동안 반야를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 또 어떤 사람이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살면서 수다원 등을 공양하여도 역시 하루 동안 반야를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면서 “보살은 반야를 행하여 두 지위를 지나 보살의 지위에 들어가서 위없는 도[無上道]를 이룬다”고 하신다.
또 반야를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보시 등의 여섯 가지 법을 행하여도 하루 동안 말씀하신 그대로 반야 가운데 머무르면서 보시 등의 여섯 가지 법을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
이 가운데서 그 수승한 인연을 말씀하시되 “반야는 바로 모든 부처님의 어머니이니, 이 반야 안에 머무르면 모든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게 된다”고 하시며, 다시 “만일 반야를 멀리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법 보시[法施]를 행한다 해도 하루 동안 반야 가운데 머무르면서 법 보시를 행하는 이보다 못하다. 또 반야를 멀리 여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로써 4념처를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수행한다 해도
하루 동안 말씀하신 그대로 반야 가운데 머무르면서 4념처 내지는 일체종지를 닦는 이보다는 못하다”고 하신 것이다.
이 가운데서는 그 뛰어난 인연을 말씀하셨으니, 이른바 반야를 여의지 않는데도 살바야에서 물러난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다는 것이다.
또 보살이 반야를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재물의 보시[法施]와 선정으로 생긴 복덕을 위없는 도에 회향한다 해도 하루 동안 반야에 상응한 재물의 보시ㆍ법의 보시ㆍ선정으로 생긴 복덕을 위없는 도에 회향하는 이보다는 못하다.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는 여러 가지 섞인 독이 없어 바르게 회향하기 때문이다.
또 어떤 보살이 반야를 여의고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겁 동안 살면서 시방 3세의 모든 부처님의 공덕을 따라 기뻐하면서 위없는 도에 회향한다 해도 하루 동안 반야와 상응하며 따라 기뻐하면서 회향하는 이보다는 못하다.
그때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거짓이요 진실하지 않아서 마치 허깨비와 같은지라 바른 소견을 내어 바른 지위[正位]에 들 수 없다고 하셨거늘 어떻게 보살이 하루 동안 닦은 복덕이 뛰어나다 하시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다 하시면서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유위의 법은 모두 거짓이므로 그 거짓된 법으로써 바른 지위에 들 수 없고 성인의 도를 얻을 수 없다”고 하신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짓게 되는 복덕이 모두가 거짓이요 공이어서 견고함이 없는 줄 알면서 마음으로 이 복덕에 집착하지 않는지라 이런 복덕은 청정하기 때문에 그 밖의 복덕보다 뛰어나다. 마치 금강(金剛)이 비록 작다 하더라도 큰 산을 꺾어 부술 수 있는 것과 같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보살이 18공(空)을 잘 배우므로 비록 공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모든 공덕을 능히 행한다”고 하신다.
비록 열반의 위없는 도를 안다 하더라도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복덕을 닦고 쌓으며, 비록 온갖 법 모양을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함을 안다 하더라도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의 방편으로 법을 설하며, 법 성품[法性] 안에서는 분별이 없어
한 모양[一相]이고 모양이 없다 함을 안다 하더라도 중생들을 위하여 ‘이것은 착하다, 이것은 착하지 않다, 이것은 행할 수 있다, 이것은 행할 수 없다, 이것은 취한다, 이것은 버린다, 이것은 이익된다, 이것은 손실이다’라고 분별한다.
만일 보살이 비록 필경공(畢竟空)을 관찰한다 하더라도 모든 복덕을 일으키면 그것을 바로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는 행이라 하나니, 만일 보살이 항상 반야바라밀을 여의지 않으면 점차로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 공덕을 얻는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이 처음 반야를 배울 때에는 번뇌의 힘이 강하고 반야의 힘이 약하지만 점차로 반야의 힘을 얻으면 모든 번뇌가 끊어지고 모든 쓸모없는 이론이 없어지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복덕을 얻는 것도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다.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다’는 뜻을 부처님께서 직접 분별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이른바 ‘수없다’ 함은 유위의 성품이나 무위의 성품 안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요, 3세의 양(量)은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고 하는 것이며, 시방의 끝[邊]도 역시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여쭈기를 “5중(衆)에는 혹 어떤 인연이 있어서 역시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는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5중은 공하기 때문에 역시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느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다만 5중만이 공할 뿐이요 온갖 법은 공한 것이 아닌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온갖 법은 공하느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이 공한 법은 곧 다할 수 없습니다. 다할 수 없기 때문에 곧 수(數)가 없고 수가 없으면 곧 한량없으며 한량없으면 곧 끝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공한 가운데서는 다한다[盡]는 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다함이 없다[無盡] 하고, 수를 얻을 수 없기 때문에 수없다[無數] 하며, 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한량없다[無量] 하고, 끝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無邊] 하는 것입니다. 이 네 가지는 이름은 비록 다르다 하더라도 뜻[義]은 하나이니, 이른바 필경공(畢竟空)입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하느니라”고 그의 말을 인가하시면서 다시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수보리야, 이 공한 법의 모양은 말로는 설명할 수 없나니,
만일 말로도 설명할 수 없으면 공이라 하지 못한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큰 자비의 마음으로써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에 방편으로 그들에게 억지로 이름과 언어(言語)를 지어 말씀하시면서 중생들로 하여금 이해할 수 있게 하나니, 공이 바로 그것이다.
혹은 다할 수 없고 수없고 한량없고 끝이 없다는 등으로 말씀하기도 한다.
이 실상(實相)은 나지도 않고[不生] 짓지도 않기[不作] 때문에 다하지 않는다[不盡]고 말씀하기도 한다. 모든 성인들은 모든 법의 실상을 얻어 무여열반(無餘涅槃)에 들 때에 6도(道)의 무리에 떨어지지 않는다.
이 실상의 법도 또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 등의 모든 법의 무리 안에 떨어지지 않으니, 그 때문에 수량이 없다는 이름으로 말씀하며, 지혜로써 아름답고 추한[好醜] 것과 많고 적은[多少] 것과 크고 작은[大小] 것과 옳고 그른[是非] 것 등을 헤아리되 모든 법의 실상 가운데서는 모든 모양이 사라졌기 때문에 한량없다 하신다.
모든 법의 실상은 양으로 헤아릴 수 없기 때문에 끝이 없다 하고 이 실상의 법은 조용히 사라졌기 때문에 집착이 없다[無著] 하며, 이 실상의 법에서는 나[我]와 내 것[我所]의 정해진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공하다 하고, 공하기 때문에 모양[相]이 없으며, 모양이 없다면 곧 짓는 것도 없고[無作] 일어나는 것도 없다[無起] 한다.
이 법은 항상 머무르면서 파괴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것도 없고 없어지는 것도 없으며, 이 법은 삼계(三界)에서 물드는 것을 끊기 때문에 물드는 것이 없다[無染] 하며, 다시는 번뇌의 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열반이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한량없는 이름과 갖가지의 인연으로 이 모든 법의 실상을 말씀하신다.
그때 수보리는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희유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의 실상은 비록 말로는 설명할 수 없다 하더라도 부처님께서는 방편의 힘으로써 말씀하십니다. 제가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뜻을 이해하기로는 비단 실상만을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온갖 법도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다 하면서도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모든 법은 마침내 공으로 돌아가나니, 공으로 돌아가기 때문에 말로는 설명할 수 없으며,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가 바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는[無增無減] 것이니라”고 하시자, 수보리는 묻기를 “만일 온갖 법에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다면 6바라밀 등의 모든 착한 법에서도
역시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으리니, 만일 6바라밀 등의 착한 법이 더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도를 얻겠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그 말을 옳다 하시면서 다시 그를 위해 인연을 말씀하시되 “법에는 비록 더하거나 덜하는 것이 없다 하더라도 위없는 도를 얻을 수 있나니, 이른바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을 익히고 행하기 때문에 비록 단바라밀 등 도를 돕는 모든 법[助道法]을 행한다 하더라도 나와 내 것에 대한 교만을 끊기 때문에 나는 이 6바라밀 등의 법을 더욱 자라게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며, 안팎의 모든 법의 모양을 취하지 않고 행하는 것이니, 즉 모든 착한 법을 위없는 도의 모양과 같이 회향하는 것이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여쭈기를 “어떤 것이 위없는 도[無上道]인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모든 법의 여(如)가 곧 위없는 도이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묻기를 “어떤 것이 온갖 법[一切法]인지요”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물질 등의 법 내지는 열반이 바로 모든 법의 여(如)요 고요히 사라진 모양[寂滅相]이니, 이것이 바로 위없는 도이니라”고 하신다.
‘고요히 사라진다’ 함은 더하지도 않고[不增] 덜하지도 않으며[不減], 높지도 않고[不高] 낮지도 않으며[不下], 모든 번뇌와 쓸모없는 이론이 사라지고 동요하지도 않고[不動] 파괴되지도 않아서[不壞] 장애되는 바가 없는 것이다.
보살은 반야바라밀의 방편의 힘으로써 또한 보시 등으로 하여금 적멸상과 같게[如] 하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 인연으로 위없는 도의 모양을 설명한다.
만일 보살이 항상 위없는 도의 적멸상을 염(念)하면서 온갖 법이 모두 적멸상과 똑같이 되게 하며 또한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이치인 이른바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 모양을 관찰하면 보살은 이와 같은 위없는 도를 신속히 얻게 되나니, 그것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은 것조차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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