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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7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5권

by Kay/케이 2024.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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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5

 

 

대지도론 제75권

57. 등주품을 풀이함②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처음의 마음[初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지요, 아니면 나중의 마음[後心]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인지요?
세존이시여, 이 처음의 마음은 나중의 마음에 이르지도 않으며, 나중의 마음은 처음의 마음에 있지도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처음과 나중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心心數法]은 함께하지 않거늘 어떻게 선근이 더욱 늘어나며 만일 선근이 더욱 늘어나지 않는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그대를 위하여 비유로 말하리니, 지혜로운 이는 비유를 들으면 곧 그 뜻을 쉽게 아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등불을 켜는 것 같으니, 그것은 처음의 불꽃이 심지를 태우는 것이더냐, 아니면 나중의 불꽃이 심지를 태우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처음의 불꽃이 심지를 태우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처음의 불꽃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나중의 불꽃이 심지를 태우고 있는 것도 아니며 그렇다고 나중의 불꽃을 여읜 것도 아닙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심지는 타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세존이시여, 심지는 실제로 타고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처음의 마음으로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않고 그렇다고 처음의 마음을 여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않으며, 나중의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중의 마음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도 않지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있느니라.
수보리야, 이 가운데서 보살마하살은
처음 뜻을 내어서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10지(地)를 구족하고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10지이기에 보살은 그것을 구족하고 나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은 간혜지(乾慧地)와 성지(性地)와 팔인지(八人地)와 견지(見地)와 박지(薄地)와 보살지(菩薩地)와 불지(佛地)를 구족하나니, 이 지를 완전히 갖추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 10지를 배우고 나서 처음의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처음의 마음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며, 나중의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중의 마음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로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느니라.”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이 인연의 법은 지극히 깊습니다. 이른바 처음의 마음도 아니고 처음의 마음을 여의는 것도 아니며, 나중의 마음도 아니고 나중의 마음을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도 아니로되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마음이 소멸하고 나면 이 마음이 다시 생기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음이 생기는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모양이더냐?”
“세존이시여, 그것이 바로 소멸하는 모양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음의 소멸하는 모양이 바로 소멸하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또한 이와 같이 머무르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또한 이와 같이 머무르되 여여(如如)하게 머무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이 마음이 여여하게 머무른다면 당연히 실제(實際)가 되어야 하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여(如)는 매우 깊은 것이더냐?”
“세존이시여, 매우 깊습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다만 여(如) 이것이 마음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여를 여읜 것이 마음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여는 여(如)를 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이 됩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이것은 바로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이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처소가 없이 행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모든 법의 여(如) 가운데에 머무르면 이와 같은 염(念)이 없고 염하는 곳도 없으며 염하는 이도 없기 때문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어느 곳에서 행하는 것이 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한다면 첫째가는 이치[第一義] 안에서 행하는 것이 되나니, 그 두 가지 행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보살이 첫째가는 이치로서 염이 없는[無念] 가운데서 행하면 행하는 모양[行相]이 되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보살마하살은 모양을 무너뜨리는 것이더냐?”
“아닙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무너뜨리지 않는 모양이라 하더냐?”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모든 법의 모양을 무너뜨려야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아직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대자대비(大慈大悲)와 18불공법(不共法)을 완전히 갖추지 못하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합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방편의 힘 때문에 모든 법에 대하여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모양을 무너뜨리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모든 법의 제 모양이 공함[自相空]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이 제 모양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중생들을 위하여 삼삼매(三三昧)에 들어가며, 삼삼매를 이용하여 중생을 성취시킵니다.”
다시 수보리가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삼삼매에 들어가서 중생들을 성취시키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이 삼삼매에 머물러 있으면서 중생들이 짓는 법[作法]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보면 보살은 방편의 힘으로써 지음이 없음[無作]을 얻도록 가르치느니라. 중생들이 나[我]라는 모양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보면 방편의 힘으로써 공[空]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며, 중생들이 온갖 모양[一切相] 가운데서 행하는 것을 보면 방편의 힘으로써 모양이 없음[無相]을 행하도록 가르쳐 주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삼삼매에 들어가며, 삼삼매로써 중생들을 성취시키느니라.”
【論】해석한다. 수보리는 부처님께 처음의 마음으로 위없는 도를 얻는지, 아니면 나중의 마음으로 얻는지를 물은 것이다.
【문】수보리는 무슨 인연 때문에 이런 어려운 질문을 하는 것인가?
【답】수보리는 위에서 모든 법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不增不減] 함을 듣고 의심을 내면서 ‘만일 모든 법이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도를 얻는 것인가’라고 하며, 또한 ‘여실(如實)한 바른 행[正行]으로 위없는 도를 얻는 이는 오직 부처님만이 그렇게 할 수 있다. 보살은 아직 무명(無明) 등의 번뇌를 끊지 못하거늘
어떻게 여실한 바른 행을 하겠는가’라고 한다.
또 수보리는 여기에서 스스로가 질문을 한 그 인연을 말하면서 “이른바 처음의 마음은 나중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고 나중의 마음은 처음의 마음에 있지도 않거늘 어떻게 선근을 더욱 불리어 위없는 도를 얻겠는가”라고 하고, 이와 같은 등의 인연 때문에 이런 질문을 하면서 “처음의 마음으로 얻는지요, 아니면 나중의 마음으로 얻는지요”라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깊은 인연의 법으로써 대답하시면서 “이른바 처음의 마음으로 얻지 못하고 그렇다고 처음의 마음을 여의지도 않는다”고 하신다. 왜냐하면 만일 처음의 마음으로만 얻고 나중의 마음으로는 얻지 못한다면 보살은 처음 발심할 때에 마땅히 부처님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일 처음의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마음이 있겠는가. 이 두 번째와 세 번째의 마음은 처음의 마음으로 근본인연을 삼기 때문이다.
‘또한 나중의 마음으로만 얻는 것도 아니고 나중의 마음을 여의지도 않는다’고 함은, 이 나중의 마음은 역시 처음의 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만일 처음의 마음이 없다 하면 나중의 마음도 없는 것이다. 처음의 마음으로 갖가지의 한량없는 공덕을 쌓은 뒤에 나중의 마음으로 완전하게 갖추는 것이요, 완전히 갖추기 때문에 번뇌의 습기(習氣)를 끊고 위없는 도를 얻게 된다.
수보리는 이 가운데서 자기 자신이 질문한 그 인연을 말하면서 “처음과 나중의 마음과 마음에 속한 법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한다. 함께하지 않는다 함은 곧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므로 화합할 수 없으며, 만일 화합이 없다면 선근이 쌓이지 않을 것이요, 선근이 쌓이지 않는다면 어떻게 위없는 도를 이루겠는가 함이다.
부처님께서는 현재의 나타난 일로써 비유를 들어 대답하시되 “등불의 심지는 처음의 불꽃으로만이 타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처음의 불꽃을 여의지도 않으며, 나중의 불꽃으로만이 타는 것이 아니요 그렇다고 나중의 불꽃을 여의지도 않으면서 등불의 심지는 타는 것이다”고 하신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그대는 눈으로 심지가 타고 있는 것을 보는데 처음의 것도 아니요 나중의 것도 아니면서 심지는 타고 있다. 나도 역시 불안(佛眼)으로써 보살이 위없는 도를 얻는 것을 보는데 그것은 처음의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처음의 마음을 여의지도 않으며, 나중의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나중의 마음을 여의지도 않으면서 위없는 도를 얻고 있다”고 하신다.

등불은 보살의 도를 비유하고 심지는 무명 등의 번뇌를 비유하며, 불꽃은 초지(初地)와 상응한 지혜 내지는 금강삼매(金剛三昧)와 상응한 지혜와 같다. 무명 등 번뇌의 심지를 태우는 것도 역시 초심지(初心智)의 불꽃도 아니요 후심지(後心智)의 불꽃도 아니로되 무명 등 번뇌의 심지가 다 타고 나면 위없는 도를 이루게 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다시 위없는 도를 얻는 인연을 풀이하시되 “이른바 보살은 처음 발심해서부터 반야바라밀을 행하여 초지에서 10지(地)까지를 구족하니, 이 10지로 모두가 도우면서 위없는 도를 이룬다”고 하신다.
10지라 하면 간혜지(乾慧地) 등이다.
‘간혜지’에는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성문(聲聞)에서요, 둘째는 보살(菩薩)에서이다. 성문은 유독 열반만을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하고 계율을 지니어 마음을 청정히 하고 인내하며 도를 받나니, 혹은 관불삼매(觀佛三昧)나 부정관(不淨觀)을 익히거나 혹은 자비관(慈悲觀)ㆍ무상관(無常觀) 등을 행하기도 하면서 분별하여 모든 착한 법을 쌓고 착하지 않은 법을 버린다. 비록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선정의 물[禪定水]을 얻지 못하니 도를 얻을 수 없으므로 간혜지라 한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처음 발심해서부터 순인(順忍)을 얻기 전까지이다.
‘성지(性地)’라 함은, 성문은 난법(煖法)으로부터 세간제일법(世間第一法)에 이르기까지이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순인을 얻고 모든 법의 실상(實相)에 애착하면서도 삿된 소견[邪見]을 내지도 않으며 선정의 물을 얻는 지위다.
‘팔인지(八人地)’라 함은 고법인(苦法忍)으로부터 도비지인(道比智忍)까지이니, 이것은 바로 15심(心)이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바로 무생법인(無生法忍)이며 보살의 지위[菩薩位]에 들어간다.
‘견지(見地)’라 함은, 처음 성인의 과위를 얻는 자리이니, 이른바 수다원의 과위이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곧 아비발치(阿鞞跋致)의 지위이다.
‘박지(薄地)’라 함은 혹 수다원이기도 하고 혹 사다함이기도 하나니, 욕계(欲界)의 아홉 가지 번뇌를 부분적으로 끊었기 때문이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아비발치의 지위를 지나서부터 부처님을 이루기 전까지이며, 모든 번뇌를 끊고 남은 습기도 얇아진다.
‘이욕지(離欲地)’라 함은 욕계 등 탐욕의 모든 번뇌를 여읜 이이니, 이것을 바로 아나함이라 한다. 보살에게 있어서는 욕망을 여의는 인연 때문에 다섯 가지의 신통을 얻는다.
‘이작지(已作地)’라 함은 성문은 진지(盡智)와 무생지(無生智)를 얻어서 아라한이 되며, 보살에게 있어서는 불지(佛地)를 성취하는 것이다.
‘벽지불지(辟支佛地)’라 함은 전생에 벽지불의 도의 인연을 심었으므로 이 세상에서는 조그마한 인연을 얻어 출가하고 또한 깊은 인연법을 관찰하면서 도를 이루므로 벽지불이라 한다. ‘벽지가(辟支迦)’1)는 진나라 말로 ‘인연(因緣)’ 또는 ‘깨달음[覺]’이라 한다.
‘보살지(菩薩地)’라 함은 간혜지로부터 이욕지까지이니,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또 보살지라 함은, 환희지(歡喜地)로부터 법운지(法雲地)까지를 모두 보살지라고 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한 번 발심해서부터 금강삼매(金剛三昧)에 이르기까지를 보살지라 한다”고 한다.
‘불지(佛地)’라 함은 일체종지(一切種智) 등 모든 부처님의 법이다. 보살은 자기 지위 가운데서 구족(具足)함을 행할 뿐만 아니라 다른 지위 가운데서도 구족함을 관찰하니, 이 두 가지 일이 완전히 갖추어지기 때문에 ‘구족한다’고 한다.
【문】무엇 때문에 보살이 벽지불의 지위와 비슷한 지위라고 말하지 않는가?
【답】그 밖의 지위에서는 이름을 말하지 않았거니와 벽지불의 지위에서는 벽지불의 이름을 말하기 때문이다.
또 보살은 벽지불의 인연으로 제도할 수 있는 중생을 잘 분별해 안다. 이 때문에 보살은 지혜로써 벽지불이 하는 일을 행한다. 마치 『수능엄경(首楞嚴經)』 가운데서 “문수시리(文殊尸利)는 72억 번을 거듭 벽지불이 되었다”고 한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와 같아서 9지(地)를 원만하게 이루고서 부처님의 법을 닦고 쌓는다.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이 비록 아직 완전히 갖춰지지 못했더라도 부처님 도를 닦아 익히어 가까워져 있기 때문에 완전히 갖추었다[具足] 하며, 이 때문에 ‘10지가 구족되었기 때문에 위없는 도를 얻었다’고 한다.
이 모든 법은 모두가 인연(因緣)의 화합 때문이니, 처음의 것도 아니요 처음의 것을 여의지도 않으며, 나중의 것도 아니요 또한 나중의 것을 여의지도 않으면서 위없는 도를 얻는 것이다.
수보리는 이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찬탄하면서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이 인연의 법은 매우 깊습니다. 이른바 과거의 마음은 소멸하지도 않고 머무르지도 않으면서 더욱더 늘어나 위없는 도를 얻으니, 이 일은 매우 깊고 희유하여 믿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 마음은 머무르는 것인지요, 아니면 소멸하는 것인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되받아 물으시기를 “수보리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마음이 소멸하고 나면 다시 생기는 것이더냐”고 하신다. 모든 법은 비록 마침내 공하여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중생을 위하여 6정(情)으로 보는 나고 없어지는 법으로써 하기 때문에 마음이 이미 소멸하면서 다시 생기는 것이냐고 물으신 것이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마음이 소멸한 뒤라면 어떻게 다시 생기겠는가. 만일 마음이 소멸한 뒤에도 다시 생긴다면 곧 상견(常見) 가운데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마음이 생긴다면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모양이더냐’고 함은, 위에서는 과거의 마음을 묻고 나서 여기서는 ‘현재 마음의 모양은 소멸할 것인가’를 묻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모양[滅相]이다”라고 대답한다. 왜냐하면 나고 없어지고 하는 것은 바로 상대되는 법이어서 생기는 것이 있으면 반드시 소멸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니, 먼저는 없다가 지금은 있고, 이미 있었던 것은 도로 없게 되기 때문이다.
‘마음의 소멸하는 모양 이것이 바로 소멸하는 것이더냐’고 함은, ‘마음의 소멸하는 모양이 곧 소멸하는 것이냐, 다시 소멸하는 것이 있느냐’고 하신 것이니,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만일 마음의 소멸하는 모양이 곧 소멸이라면 하나의 마음에는 생기는 때와 소멸하는 때의 두 때[兩時]가 있기 때문이다.
무상(無常)함을 말하는 이의 마음은 한 생각 동안을 지나지 않는다. 마치 『아비담경(阿毘曇經)』에서 “생기는 법이 있고 생기지 않는 법이 있으며, 생기려고 하는 법이 있고 생기려고 하지 않는 법이 있으며, 소멸하는 법이 있고 소멸하지 않는 법이 있으며, 소멸하려고 하는 법이 있고
소멸하려고 하지 않는 법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생기는 법도 현재의 한 마음 속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생기는 것이요, 둘째는 소멸하려는 것이다. 생기는 것은 소멸하려는 모양이 아니요, 소멸하려는 모양은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은 그렇게 되지 않기 때문에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와 같이 머물러야 하느냐’고 했는데, “만일 소멸하는 모양이 곧 소멸하는 것이 아니라면 항상 머물러 있어야 하지 않느냐. 만일 항상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곧 소멸하지 않는 모양이다”고 하시면서 부처님께서는 이와 같이 되짚어 물으신다.
수보리는 이론에 궁해졌기 때문에 생각하기를 ‘내가 만일 소멸하는 모양이 곧 소멸하는 것이라 하면 하나의 마음이 두 개의 때[時]에 떨어지고, 만일 소멸하지 않는다 하면 실로 그것은 소멸하고 있는 모양이거늘 어떻게 소멸하지 않는다고 말하겠는가’라고 하고, 위의 두 가지 이론에는 허물이 있기 때문에 수보리는 자신이 증득한 지혜로써 대답하기를 “세존이시여, 그와 같이 머무르되 여여(如如)하게 머무릅니다”고 한다.
‘만일 이 마음이 여여하게 머무른다면 실제(實際)가 되어야 하지 않더냐’고 함은, 만일 마음의 모양이 똑같이 여(如)로 머무른다 하면 여는 곧 바로 실제이다. 만일 그렇다면 “마음은 곧 실제가 되는 것이더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수보리는 오랫동안 이 실제를 존중하면서 마음 이것은 거짓된 법이라고 여겼으며, 소승(小乘)은 지혜의 힘이 적어서 마음은 곧 실제가 된다고 관찰할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아닙니다”라고 한 것이다.
【문】만일 수보리가 이미 이 마음은 여여하다고 말한다면 무엇 때문에 실제가 되지 못하는가?
【답】여(如)는 온갖 법의 실상(實相)이라 하며, 마음의 실상 또한 여라 한다. 수보리는 마음에 ‘범부가 6정(情)으로 보는 것은 거짓이요 뒤바뀌었기 때문에 허물이 있거니와 여기서 마음의 모양은 여실(如實)하여 허물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여여하게 머무른다”고 말한다.
여기서의 실제(實際)는 곧 열반이다. 수보리는 오랫동안 열반을 귀히 여겼기 때문에 곧 마음을 열반으로 삼을 수는 없다고 하면서 이 때문에 “아닙니다”고 한다. 또 실제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마음이 곧 실제이다’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이 여(如)는 매우 깊더냐’고 함은, 수보리는 마음이 여여하게 머무른다고 말하지만 다시 ‘실제가 되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으므로 이 때문에 ‘여는 매우 깊더냐’고 묻는 것이요, 수보리는 “두루 알지 못하기 때문에 매우 깊습니다”고 대답한다.
“다만 여(如) 이것만이 마음이더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여 이것은 하나의 모양이요 두 모양[二相]이 아니기 때문이니, 마음으로 생각하고 분별한 인연으로 생기기 때문에 이런 두 모양이 있게 된다.
여(如)에서는 아는 바가 없거니와 마음에는 아는 바가 있으며, 또 여는 마침내 청정하기 때문에 아는 바가 없거니와 마음에는 깨달아 아는 바가 있나니, 그러므로 여를 여의면 마음도 또한 그와 같다. 왜냐하면 온갖 법에는 모두 여가 있거늘 어떻게 여를 여의고서 마음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여(如)는 여를 볼 수 있느냐”고 하시자, 대답하기를 “여 가운데에서는 ‘이것은 안다, 이것은 알 수 있다’라고 분별하는 것이 없습니다”고 하나니, 이런 보살은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에 머무르지 않으면서 진실로 깊은 보살의 도를 행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시기를 “만일 이와 같이 행하면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할 수 있더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스스로가 소승은 천박(淺薄)하다고 보고 대승의 법은 깊다고 보기 때문에 대답하기를 “이와 같이 행하면 이것이 바로 깊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고 한다.
그때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보살들은 이런 법을 들으면 뽐내면서 스스로가 ‘소승을 벗어나서 깊이 대승에 들어갔다’고 여기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들의 고만(高慢)한 마음을 깨뜨리기 위하여 수보리에게 물으시기를 “보살의 이와 같은 행은 어느 곳의 행이 되느냐”고 하신다.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이와 같은 행은 처소가 없는 행[無處所行]이 됩니다”고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여(如)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분별하는 바가 없기 때문이다.
보살은 ‘처소가 없는 행’이라는 말을 듣고 혹은 단멸[斷滅]에 떨어지기도 하나니,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시 수보리에 물으시되 “보살이 반야를 행하는 것은 어느 곳의 행이 되느냐”고 하시며,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첫째가는 이치[第一義] 안의 행입니다”고 한다. 첫째가는 이치의 모양에서는 두 가지의 모양이 없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기를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보살이 생각이 없이[無念] 첫째가는 이치를 행하면 이 행은 모양을 취하는 법이더냐”고 하시자,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 세존이시여”라고 한다. 왜냐하면 온갖 법은 필경 공하여 생각이 없으니, 이것이 곧 행하지 않는 모양이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물으시되 “이 보살이 모양을 무너뜨리면 모양 없는[無相] 것을 얻느냐”고 하시고,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아닙니다”고 하나니, 모양은 본래부터 없으나 다만 뒤바뀜[顚倒]을 제거하기 위하여 법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을 뿐이다.
부처님께서는 수보리에게 말씀하시되 “만일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는다면 어떻게 모양이 없는 행을 행하는 것이더냐”고 하시며, 수보리는 말씀드리기를 “세존이시여, 보살은 ‘나는 모양을 파괴해야 하기 때문에 반야를 행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고 한다.
이 보살은 아직 부처님의 10력(力) 등 모든 부처님 법을 완전히 갖추지는 못했으나 방편의 힘으로써 있다는 모양[有相]도 짓지 않고 없다는 모양[無相]도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만일 모양을 취하면 이 모양은 모두가 거짓이요 허망한 말이어서 모든 허물이 있고 만일 모양을 파괴하면 단멸[斷滅] 가운데에 떨어져서 역시 허물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있다는 모양도 취하지 않고 없다는 모양도 취하지 않는다. 모양을 취하면 곧 그것은 법이 있는 것이요 모양을 취하지 않으면 곧 그것은 법이 없는 것이니, 방편의 힘 때문에 이런 있다, 없다 하는 두 가지 치우침[二邊]을 여의고 중도(中道)를 행하는 것이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른바 온갖 법의 자성(自性)이 공한 줄 알기 때문에 있다 없다는 데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제 모양이 공하므로 온갖 법의 모양을 파괴하고 또한 스스로 그 모양도 파괴하는 것이니, 보살은 이 제 모양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삼삼매(三三昧)를 일으키어 중생을 이익되게 한다.
중생은 6도(道) 가운데서 갖가지의 원(願)을 지으면서 몸을 받는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지 않아서 복을 닦지 못하고 제멋대로 굴면서 마음대로 업(業)을 지어 지옥에 떨어지기도 하나니, 죽음에 임할 때에 찬바람이 불어 닥치면 불을 얻기를 바라면서 곧 지옥 등의 3악도(惡道)에 들어가며, 사람 몸이 된다 하여도 빈궁하고 하천한 곳에 태어난다.

어떤 사람은 마음을 가다듬어 간탐(慳貪)을 잘 꺾어 조복하고 보시와 지계 등의 착한 행을 행하므로 이런 사람은 욕계(欲界)의 인간과 천상 안의 부귀하고 쾌락한 처소에 가 나며, 어떤 사람은 욕계를 여의고 5개(蓋)를 제거하며 신근(信根) 등의 5근(根)으로 인하여 다섯 갈래[五支] 등의 모든 선정을 얻으면 색계(色界)에 가서 나기도 하며, 어떤 사람은 모든 빛깔 있는 모양을 버리고 대상 있는 모양도 없애면서 여러 가지 모양을 생각하지 않기 때문에 무변허공처(無邊虛空處)의 무색정(無色定) 등에 들어간다.
이렇게 하는 일은 모두 삿된 원[邪願]이다. 왜냐하면 오래된 뒤에는 모두가 파괴되고 타락하기 때문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줄로 새를 매 놓을 적에 줄이 다하면 다시 돌아오는 것과 같다. 보살은 이 무작삼매(無作三昧)로써 중생들의 삿된 원을 끊게 한다.
또 이 몸은 모두 공하다. 다만 힘줄ㆍ뼈ㆍ5장(臟)과 혈관이 있을 뿐이요 가죽 속에는 부정(不淨)한 것이 가득 차 있으며 바람[風]은 마음의 동작을 따르고 있다.
또 이 마음은 나고 없어지면서 머무르지 않는다. 마치 허깨비[幻]와 같고 변화[化]와 같아서 일정하고 진실한 모양이 없다. 중생은 이 오고 가고 말을 하는 모든 모양을 보기 때문에 ‘사람[人]이 있고 나[我]가 있으며 내 것[我所]이 있다’고 여겨 뒤바뀐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니, 다만 생각과 분별 때문에 이런 착오가 있을 뿐이다. 보살은 공삼매(空三昧)로써 중생들의 나와 내 것이란 마음을 끊으면서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게 한다.
또 중생들은 모든 남자ㆍ여자와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과 아름답고 추한 것과 길고 짧은 것의 모양을 취한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갖가지의 번뇌를 내면서 모든 근심과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니, 보살은 이 무상삼매(無相三昧)로써 중생들의 모든 모양을 끊으면서 모양이 없는 데에 머무르게 한다.
【문】만일 중생을 교화하면서 공을 얻게 하면 족하거늘 왜 무상삼매와 무작삼매가 필요한가?
【답】중생들의 근기에는 예리한 것과 둔한 것이 있다. 근기가 예리한 이는 공을 들으면 곧 무상과 무작을 얻거니와 근기가 둔한 이는 공을 듣고 모든 법을 파괴하면서 곧 공한 모양을 취하게 되나니, 이 때문에 무상 등을 설명한다.
만일 사람이 비록 공하고 모양이 없는 줄 안다손 치더라도 이 지혜로 인하여 다시 몸을 지으려고 한다.
이 유위(有爲)의 법에는 이런 갖가지의 허물이 있나니, 이 때문에 몸을 짓지 않아야 한다.
마치 경에서 “보살의 몸을 여의면 그 밖의 몸은 손가락을 튀기는 잠깐 동안조차도 좋아하지 않거늘 하물며 오랫동안 머무르는 것이랴”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러므로 지음 없음[無作]을 설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삼삼매(三三昧)를 빠짐없이 설하여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다.

58. 몽중입삼매품(夢中入三昧品)을 풀이함

【經】그때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작(無作)의 삼삼매에 들면 반야바라밀에 이익이 있습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대답했다.
“만일 보살이 대낮에 삼삼매에 들어서 반야바라밀에 이익이 있다면 밤의 꿈속에서도 당연히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낮이나 밤의 꿈속은 평등하여 차이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리불이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대낮에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이익이 있다면 이 보살은 꿈속에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역시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물었다.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업(業)을 지을 때에 이 업은 쌓여서 완성되는 일이 있습니까? 부처님의 말씀대로라면 온갖 법은 마치 꿈과 같은 것이므로 쌓여서 완성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꿈속에서는 어떤 법도 쌓여서 완성되는 일이 없거니와 만일 깨어 있을 때에 기억하고 분별하는 것은 마땅히 쌓여서 완성되는 일이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만일 사람이 꿈속에서 중생을 죽이고는 깨어난 뒤에 기억하면서 모양을 취하여 ‘나는 중생을 죽였다. 그것이야말로 유쾌한 일이다’고 분별한다면, 사리불이여, 이런 일은 어떻겠습니까?”
사리불이 말했다.
“인연이 없으면 업(業)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업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사리불이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연이 없으면 업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도 생기지 않거니와 인연이 있어야 업도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보고[見]ㆍ듣고[聞]ㆍ깨닫고[覺]ㆍ아는[知] 법 가운데서 마음이 생기며, 보고 듣고 깨닫고 알지 못하는 법 가운데서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깨끗한[淨] 것도 있고 더러운[垢] 것도 있으니,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생각[思]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면 모든 업(業)과 모든 생각[思]은 자기 모양[自相]을 여읜 것이거늘 어떻게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생각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인연이 있으면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인연이 있으면 생각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수보리에게 말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보시(布施)와 지계(持戒)와 인욕(忍辱)과 정진(精進)과 선정(禪定)과 지혜(智慧)를 닦아 이 선근의 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迴向)하면 이것은 진실한 회향이 됩니까?”
수보리가 사리불에게 말했다.
“미륵보살(彌勒菩薩)이 지금 이 앞에 계십니다. 부처님께서 불퇴전(不退轉)의 수기를 주셨고 장차 부처님이 되실 분이니, 당연히 미륵보살께 물어야 하며 미륵보살께서는 당연히 대답하실 것입니다.”
사리불이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수보리께서 말씀하시기를 ‘미륵보살께서 지금 이 앞에 계시고 부처님께서 불퇴전의 수기를 주셨으며 장차 부처님이 되실 분이므로 미륵께서는 당연히 대답하실 것이다’고 하십니다.”
미륵보살이 사리불에게 말했다.
“미륵이란 이름으로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물질ㆍ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로 대답해야 합니까? 또는 물질의 공한 것으로 대답해야 합니까, 아니면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공한 것으로 대답해야 합니까?
이 물질로는 대답할 수가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로도 대답할 수 없으며, 물질의 공한 것으로도 대답할 수 없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공한 것으로도 대답할 수 없습니다.
나는 이 법을 대답할 수 있다고 보지 않고 대답할 수 있는 이가 있다고도 보지 않으며 나는 이 사람이 수기를 받았다고 보지도 않고 또한 수기를 줄 수 있는 어떤 법도
보지 않으며 수기를 받을 곳도 보지 않나니, 이 온갖 법은 모두가 둘이 없고[無二] 구별도 없습니다[無別].”
사리불이 미륵보살에게 말했다.
“그대의 말씀대로 그와 같은 법을 증득하셨습니까?”
미륵이 사리불에게 대답했다.
“내가 말한 바와 같은 법은 그와 같이 증득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사리불이 생각했다.
“미륵보살은 지혜가 매우 깊고 오랜 동안 단바라밀(檀波羅蜜)과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과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과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과 선바라밀(禪波羅蜜)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행하면서 얻을 바가 없음[無所得]을 썼기 때문에 이와 같이 말할 수 있구나.”
그때에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는 이 법으로써 아라한을 얻었다 하는 그 법을 보더냐?”
사리불이 말씀드렸다.
“보지 못합니다.”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법으로 수기를 얻을 것이다. 이 법으로 이미 수기를 받았다. 이 법으로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것이다’라고 생각하지 않느니라.
그와 같아서 사리불아,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나는 얻을 것인가 얻지 못할 것인가’라고 의심하지도 않으면서 스스로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진실로 얻는다는 것을 아느니라.”
【論】【문】사리불은 무엇 때문에 꿈으로써 보살의 삼삼매를 따지는 것인가?
【답】꿈은 거짓이어서 마치 미치광이가 헛것을 보는 것과 같기 때문이며, 이 삼삼매는 바로 진실한 법이다.
또 다른 곳에서는 말하기를 “꿈속에서도 착한 것[善]과 착하지 않은 것[不善]과 무기(無記)의 세 가지가 있다. 만일 보살이 착한 마음으로 삼삼매를 행하면 마땅히 복덕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미치고 어리석은 법이라 그 가운데서는 진실한 법을 행하면서 과보를 얻지 못해야 한다. 만일 진실한 법이 있다면 꿈이라 하지 못한다”고 한다. 이 때문에 묻기를 “만일 보살이 꿈속에서 삼삼매를 행하면
반야바라밀의 복덕이 더욱 불어나고 선근을 쌓으면서 부처님 도에 가까워지는 것이냐”고 한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만일 이익이 있다 한다면 꿈은 거짓이요 반야는 진실한 법이거늘 어떻게 이익을 얻겠는가. 만일 이익이 없다 한다면 꿈속에서도 착한 일이 있거늘 어떻게 이익이 없겠는가” 하여 이익이 있다거나 이익이 없다고 대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수보리는 이 두 치우친 소견에 대한 질문을 여의며 그 때문에 모든 법의 실상으로써 대답하기를 “오히려 낮에 한 일조차도 파괴되거늘 하물며 꿈속이겠는가”라고 하고, 말하기를 “사리불이여, 보살이 만일 대낮에 반야를 행하여 이익이 있다면 밤에도 이익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대낮에도 이익이 없기 때문이거늘 하물며 꿈속이겠습니까. 왜냐하면 반야바라밀에는 낮과 밤이 있다고 분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고 한다.
사리불은 수보리가 하는 말을 듣고 이미 반야에는 더하는 것도 없고 덜하는 것도 없음을 알았으므로 다시는 더 따지지 말아야 할 것인데 여기서는 다시 그 밖의 일로 인하여 꿈속의 것을 묻기를 “수보리여, 만일 꿈속에서 업을 지으면 이 업이 쌓여서 완성됨이 있습니까. 쌓여서 완성된다는 것은 업이 진실로 쌓이면서 과보를 이룬다는 것입니까. 이 업이 만일 진실로 있다면 부처님께서는 항상 말씀하시되 ‘온갖 법은 공하여 마치 꿈과 같다’고 하셨으므로 쌓여서 완성되지 않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꿈속의 마음은 미약하기 때문에 쌓여서 완성될 수 없습니다. 대낮의 미약한 마음조차도 오히려 쌓여서 완성될 수 없거늘 하물며 꿈속의 일이겠습니까. 만일 꿈을 깬 뒤에 꿈속에서 냈던 착하고 착하지 않은 마음을 분별한다면 그것은 바로 쌓여서 완성되어야 합니다”고 한다.
수보리는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마치 사람이 꿈속에서 사람을 죽인 것과 같아서 깬 뒤에 ‘내가 죽였다. 이 일이야말로 유쾌했었다’고 하면서 분별한다면, 사리불이여, 이 업은 어떻게 쌓여서 완성되는 것입니까”라고 하자, 사리불은 수보리에게 말하기를 “온갖 업은 낮이거나 밤이거나 모두가 인연(因緣)으로부터 생기니, 인연이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고 한다.
수보리는 그의 말이 옳다고 하면서 “그렇습니다. 업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생기지 않으며, 생각[思]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고 한다. 업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며, 생각은 의업(意業)만을 말한다. 생각이야말로 진실한 업이고, 신업ㆍ구업은 생각 때문에 업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업은 네 가지의 법으로 인한 것이니,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다. 이 네 가지로 인하여 곧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은 인연에 따라 생기되, 혹은 깨끗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기[不淨]도 하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죄업(罪業)이요, 깨끗한 것은 복업(福業)이다.
그러므로 만일 꿈속에서 보는 바가 모두 앞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으로 인한다면 꿈속에서 지은 선과 악은 수면에 덮여서 마음이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에 세력이 없고 과보를 쌓아 이룰 수가 없거니와 만일 이 업이 꿈을 깬 뒤에는 선과 악의 마음이 화합하기 때문에 과보를 돕고 이루게 할 수 있다.
수보리는 속으로 생각하기를 ‘꿈속의 업은 실로 쌓여서 완성된다. 왜냐하면 인연으로 생긴 것이 있기 때문이니, 대낮의 마음이나 꿈속의 마음에는 차이가 없다. 그것은 왜냐하면 모두가 네 가지로 인하여 생기기 때문이다’고 한다.
사리불은 공으로써 수보리를 힐난하기를 “부처님이 말씀하신 대로 모든 업은 자기 모양[自相]을 여의거늘 당신은 어찌하여 반드시 모든 업은 인연이 있으면 생기고 인연이 없으면 생기지 않는다고 말씀합니까”라고 한다.
수보리는 대답하기를 “모든 법은 비록 공하여 멀리 여의는 모양[遠離相]이라 하더라도 범부는 모양을 취해서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며 만일 모양을 취하지 않아서 인연이 없으면 생기지 않습니다. 이 때문에 온갖 업은 모두가 모양을 취하는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니, 그 때문에 대낮과 꿈속이 있다 해도 차이가 없습니다”고 한다.
사리불은 다시 “만일 꿈속에서 6바라밀을 행하여 위없는 도에 회향하면 이것은 진실한 회향입니까”라고 묻고는 다시 “만일 꿈속과 대낮에 차이가 없다면 이 꿈속의 회향도 마땅히 진실이어야 할 것이 아닌가. 또 대낮이라 해도 마음에 집착하면서 모양을 취한다면 회향이라고 하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잠을 자면서 마음이 가려 있는 것이랴”고 따져 묻는다.

수보리는 이 두 가지의 힐난이 깊은 이치라 대답하기 어렵기 때문에 사리불에게 말하기를 “마땅히 미륵께 물어야 합니다”고 한다.
【문】미륵은 무엇 때문에 공만을 말하면서 대답하지 않는가?
【답】이 두 큰 제자는 보살을 이익되게 하기 위하여 깨어 있을 때와 꿈꿀 때가 같은 것인가 다른 것인가를 분별하면서 “부처님께서는 항상 ‘온갖 법은 마치 꿈과 같다’고 말씀하셨으므로 만일 낮에 도(道)를 행한다면 꿈속에서도 역시 도를 행해야 한다”고 한다. 미륵은 두 사람이 저마다 집착한 바가 있어 통달할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에 대답을 하지 않는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륵이 이 공으로써 대답하므로, 사리불은 미륵에게 묻기를 ‘말씀하고 계신 공은 그것으로 증득하신 것입니까’라고 한 것이다. 사리불의 뜻은 만일 이 법으로 증득했다 하면 곧 따지려 하면서 ‘어떻게 증득한 것입니까’라고 할 것이요, 만일 증득하지 못했다면 ‘당신 자신도 얻지 못하고 알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말할 수 있습니까’라고 할 것이므로, 미륵의 뜻은 ‘당신은 열반으로써 증득을 삼거니와 나는 열반도 공하여 얻을 것이 없기 때문에 증득하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미륵은 아직 부처님 법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증득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보살의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는 법이므로 증득할 수 없음을 알아야 한다”고 한다.
그때 사리불은 생각하기를 ‘미륵보살은 그 지혜가 매우 깊어서 이와 같이 잘 아는 것이요, 열반의 모양을 잘 알면서 증득을 취하지 않는 것이다’고 하나니, 이것을 바로 매우 깊다고 한다.
이 가운데서 사리불은 스스로가 그 인연을 말하되 “오랫동안 6바라밀을 행하였기 때문에 그 지혜가 매우 깊다”고 하며, “미륵은 다음에 부처님이 되실 분이므로 마땅히 대답하셔야 한다”고 했는데도 미륵은 지금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도리어 사리불에게 물으시되 “그대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대는 이 법으로 아라한이 됨을 보느냐”고 하신다. 사리불은 말하기를 “보지 못합니다”고 한다.
왜냐하면 이 법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거늘 어떻게 볼 수 있겠는가. 만일 본다 하면 그것은 모양이 있는 것이라 육안(肉眼)과 천안(天眼)은
분별하면서 모양을 취하기 때문에 보지 못해야 하고 혜안(慧眼)은 분별하는 모양이 없기 때문에 역시 보지 못하는 것이니, 이 때문에 “보지 못합니다”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무생인(無生忍)을 얻을 때에 ‘이 법을 보았다. 수기를 얻었다. 장차 위없는 도를 얻을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으며, 비록 이런 소견을 짓지 않더라도 또 ‘나는 위없는 도를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의심하지도 않느니라. 마치 그대가 법을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나는 아라한이 될 것인가, 아라한이 되지 못할 것인가’라고 의심하지도 않는 것과 같으니라”고 하신다.
【經】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단바라밀(檀波羅蜜)을 행할 때에 만일 중생이 배고프고 추위에 떨면서 옷이 해진 것을 보면 보살은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단바라밀을 행하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없게 해서 의복과 음식과 살림살이가 마치 사천왕천(四天王天)과 삼십삼천(三十三天)과 야마천(夜摩天)과 도솔타천(兜率陀天)과 화락천(化樂天)과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과 같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단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시라바라밀(尸羅波羅蜜)을 행할 때에 중생이 살생(殺生)을 하고 나아가 삿된 소견[邪見]을 지니어 수명이 짧고 병이 많고 얼굴빛이 좋지 않으며 위덕(威德)이 없고 가난하여 재물이 없으며 하천한 집에 태어나 꿈이 흉악하고 누추한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시라바라밀을 행하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들에게는 이러한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시라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찬제바라밀(羼提波羅蜜)을 행할 때에 모든 중생들이 서로가 성을 내어 꾸짖고 욕하며 칼이나 몽둥이ㆍ기와조각ㆍ돌로 서로 잔인하게 해치면서 목숨을 빼앗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찬제바라밀을 행하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여 서로가 아버지와 어머니처럼 보고 형과 아우처럼 보며 손위와 손아래의 누이처럼 보고 선지식(善知識)처럼 보면서 모두가 자비를 행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찬제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비리야바라밀(毘梨耶波羅蜜)을 행할 때에 중생들이 게으름을 피우면서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고 성문승(聲聞乘)ㆍ벽지불승(辟支佛乘)ㆍ불승(佛乘)의 3승을 버리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비리야바라밀을 행하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리라. 온갖 중생들은 부지런히 닦고 정진하며 3승의 도에서 저마다 제도되고 해탈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비리야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선바라밀(禪波羅蜜)을 행할 때에 중생들이 음욕(婬欲)ㆍ진에(瞋恚)ㆍ수면(睡眠)ㆍ도회(掉悔)ㆍ의(疑)의 5개(蓋)에 덮여서 초선(初禪) 내지는 제4선(禪)을 잃고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와 허공처(虛空處)ㆍ식처(識處)ㆍ무소유처(無所有處)ㆍ비유상비무상처(非有想非無想處)를 잃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선바라밀을 행하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선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행할 때에 중생들이 어리석어서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바른 소견[正見]을 잃고 혹 업도 없고 업의 인연도 없다고 말하며, 혹은 신(神)2)이 항상하다고 말하며 혹은 아주 없다[斷滅]고 말하며 혹은 아무것도 없다[無所有]고 말하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이와 같은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반야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一切種智)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들이 3취, 곧 첫째는 필정취(必正聚)요 둘째는 필사취(必邪聚)요 셋째는 부정취(不定聚)에 머무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 사취(邪聚)는 없고 나아가 그 이름까지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지(一切智)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지옥(地獄) 안의 중생과 축생(畜生)ㆍ아귀(餓鬼) 안의 중생들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에서는 3악도(惡道)라는 이름까지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대지(大地)에 등걸ㆍ가시나무ㆍ산ㆍ언덕ㆍ도랑이나 쓰레기가 있는 더러운 곳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에는 나의 국토에는 이와 같은 나쁜 땅이 없고 마치 손바닥처럼 편편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이 대지(大地)가 순전히 흙일 뿐이요, 금은 등의 진기한 보배가 없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에는 금모래[金沙]가 땅에 깔리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들이 그리워하면서 애착하는[戀著]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으로 하여금 그리워하면서 애착하는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찰제리(刹帝利)와 바라문(婆羅門)과 비사(鞞舍)와 수다라(首陀羅)3) 이 네 성씨[四姓]의 중생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는 네 성씨라는 이름조차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하(下)ㆍ중(中)ㆍ상(上)의 구별이 있어서 하ㆍ중ㆍ상의 집에 태어나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이와 같은 우열(優劣)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갖가지로 이상한 모습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갖가지 이상한 모습이 없고 온갖 중생들이 모두 다 단정하고 정결하면서 아름다운 모습을 성취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들에게 주인[主]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부처님의 법왕(法王)을 제외하고는 주인이라는 이름조차도 없게 하고 나아가 그런 형상까지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6도(道)의 다름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이것은 지옥이다, 이것은 축생이다, 이것은 아귀이다, 이것은 귀신이다, 이것은 하늘이다, 이것은 사람이다’라고 하는 6도의 이름조차도 없게 하고, 온갖 중생이 모두가 동일한 업(業)으로 4념처(念處) 내지는 8성도분(聖道分)을 닦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난생(卵生)과 태생(胎生)과 습생(濕生)과 화생(化生)의 네 가지 태생[四生]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세 가지로 태어남[生]이 없이 똑같이 화생 한 가지로 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다섯 가지 신통[五神通]이 없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다섯 가지 신통을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대소변(大小便)을 누는 걱정거리가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들은 모두가 법을 누리는 기쁨으로써 밥을 삼아 대변이나 소변 누는 걱정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광명이 없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의 중생에게는 모두가 광명이 있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일월(日月)과 햇수가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에게는 일월과 햇수라는 이름조차도 못 듣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들의 수명이 짧은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들은 한량없는 겁(切) 동안의 수명을 살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상호(相好)가 없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32상(相)을 성취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들이 모든 선근(善根)을 여의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으로 하여금 모든 선근을 성취하고 이 복덕으로써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3독(毒)과 4병(病)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에게는 냉병(冷病)ㆍ열병(熱病)ㆍ풍병(風病) 및 이 세 가지의 합병증(合倂症)인 4종의 병과 그리고 3독의 병이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4)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3승(乘)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에게는 2승이란 이름조차 없게 하고 오직 하나뿐인 대승(大乘)만 있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중생에게 증상만(增上慢)이 있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되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내 국토 안의 중생에게는 증상만이란 이름조차도 없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서원하기를 ‘나의 광명과 수명에 한량이 있고 비구승의 수(數)에 한량이 있다면, 나는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나의 광명과 수명이 한량없고 비구승의 수도 한량이 없기를 원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서원하기를 ‘만일 나의 국토에 한량이 있다면 나는 그러한 때마다 6바라밀을 수행하면서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며,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 나의 하나의 국토로 하여금
마치 항하의 모래 수처럼 많은 모든 부처님의 세계와 같아지기를 원해야 한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나고 죽는[生死] 길이 길고 중생의 성품이 많다는 생각이 들리라. 그러나 그때에는 ‘나고 죽는 끝[邊]은 마치 허공과 같고 중생 성품의 끝도 역시 허공과 같다. 이 가운데서는 실로 나고 죽는 것도 없고 오가는 것도 없고 또한 해탈하는 이도 없다’고 바르게 생각해야 하나니,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행하여 6바라밀을 완전하게 갖추면 일체종지에 가까워지느니라.”
【論】【문】어떠한 차례가 있어 보살은 중생이 굶주림과 추위에 떠는 것을 본다는 등에서부터 말씀하시는가?
【답】보살은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지나 무생법인(無生法忍)의 수기를 얻으면 다시는 그 밖의 일이 없고 오직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면서 중생을 성취시키는 일을 행할 뿐이다. 여기서는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는 인연을 말씀하고 있나니, 청정하지 않는 세계의 모양을 보고 “원컨대, 저의 국토에는 이러한 일이 없게 하소서”라고 한다. 이 때문에 차례대로 그런 일들을 말씀하신다.
보살은 단바라밀을 행할 때에 만일 배고프고 목마르고 옷이 해진 중생을 보면 곧 이런 생각을 내면서 “나는 복덕과 지혜를 아직 성취하지 못했으므로 중생들이 구하는 것을 다 대줄 수는 없다. 만일 내가 자비심만을 행하고 있다면 그 중생들에게 아무 이익이 없다. 나는 그러한 때에 세 가지의 복덕을 깊이 행하여 그 세 가지의 복덕 안에 머무르면서 가난한 중생으로 하여금 모두가 만족할 수 있게 해야 하리니, 그것은 전륜성왕(轉輪聖王)이 되는 것이요, 천상의 왕[天王]이 되는 것이며 신통을 지닌 성인(聖人)이 되어서 곧 그 많은 중생들을 인도하여 그들의 간탐을 깨뜨리고 보시에 머무르게 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중생들의 보시 내지는
보살이 보시하는 인연 때문에 뒤에 성불할 때는 그 국토 안에는 빈궁한 이가 없고 마음대로 얻게 되는 것이 마치 욕계(欲界)의 제6천(天)에서 모든 물건을 얻는 것과 같다.
보살도 또한 그러하여서 그러한 때마다 단바라밀의 공덕을 쌓아 모으기 때문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다. 왜냐하면 온갖 유위(有爲)의 법은 인연(因緣)에 속한지라 선(善)을 행한 인연이 완전히 갖추어졌으므로 모두 뜻에 따라 과보를 얻게 되기 때문이다.
또 중생은 시라바라밀을 깨뜨리는 인연 때문에 목숨이 짧고 질병이 많으면서 위덕(威德) 등이 없는 것이니, 보살은 원을 세우되 “나 자신이 계율을 완전히 갖추면서 또한 중생들에게도 계율을 지니게 하리라”고 한다.
그 밖의 나머지 소원들도 그와 같으므로 그 뜻에 따라 분별하면 된다.
맨 나중의 소원에 대한 뜻은 명료하지 못하므로 이제 간략하게 설명하겠다. 보살은 위에서와 같은 원을 하고 나면 피로하고 싫증도 난다. 즉 “부처님 도는 한량없고 수없는 아승기겁 동안 모든 공덕을 행한 연후에야 얻을 수 있다. 1겁 동안의 햇수조차도 셀 수 없으므로 부처님께서는 비유로써 사람들에게 보이고 계시거늘 하물며 한량없고 끝이 없는 아승기겁에 이런 나고 죽음을 겪으면서 모든 고뇌를 받는 중생도 또한 한량없고 끝이 없어서 비유와 산수(算數)로도 미칠 바가 아니다. 다만 삼천대천세계 안의 작은 티끌같이 많은 중생들조차도 오히려 제도하기 어렵거늘 하물며 시방의 한량없는 세계 안의 작은 티끌같이 많은 중생들을 제도함이겠느냐”고 한다. 이런 일 때문에 혹은 마음이 물러나고 침몰하기도 하나니, 이것을 바로 삿된 생각[邪憶念]이라 한다.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이 보살에게 바른 생각을 가르치기를 “나고 죽는 것이 비록 길다 하더라도 이 일은 모두가 공하여 마치 허공과 같고 마치 꿈속에서 보는 일과 같아서 실은 길고 먼 것도 아니니, 싫증을 내지 말아야 한다. 또 미래의 세상도 또한 이 한 생각[一念]의 반연할 바[所緣]라 또한 길고 먼 것이 아니니라”고 하신다.
또 보살은
한량없는 복덕과 지혜의 힘 때문에 한량없는 겁을 초월할 수 있나니, 이와 같은 갖가지의 인연 때문에 싫증을 내지 말아야 한다.
이 가운데서 부처님께서는 그 큰 인연을 말씀하시되 이른바 “나고 죽는 것은 마치 허공과 같고 중생도 또한 그와 같다. 중생이 비록 많다 하더라도 정해진 실체로서의 중생이란 없으며, 마치 중생이 한량없고 끝이 없는 것처럼 부처님의 지혜 또한 한량없고 끝이 없으며 제도하는 것도 또한 어렵지 않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피로해하거나 싫증을 내지 말아야 한다”고 하신다.

59. 항가제바품(恒伽提婆品)을 풀이함

【經】그때 이름이 항가제바(恒伽提婆)5)라는 한 여인이 대중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 이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나 가사를 오른쪽 어깨에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땅에 대어 합장하고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6바라밀을 행하여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겠으며, 반야바라밀에서 말씀하신 대로 모두 행하겠습니다.”
이때 여인은 금꽃ㆍ은꽃과 그리고 물과 물에서 나는 꽃과 갖가지로 장엄한 공양거리와 금실로 짠 천[疊兩張]을 부처님께 뿌렸다. 그러자 그것은 부처님의 정수리 위의 허공 가운데서 네 기둥으로 된 보대(寶臺)로 변했으니, 단정하고 아주 아름다웠다. 이 여인은 이 공덕을 가져다 온갖 중생들과 함께 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했다.
그때 세존은 이 여인의 깊은 마음의 인연을 아시고 곧 빙그레 웃으셨다. 모든 부처님의 법에서와 같이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옥색 등의 갖가지 빛이 입으로부터 나와서 시방의 한량없고 끝이 없는 부처님 나라를 두루 비춘 뒤에 다시 돌아와 부처님을 세 바퀴 돌고는 정수리로 들어갔다.
그때 아난이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쪽 무릎을 꿇어 합장하고 부처님께 여쭈었다.
“부처님께서는 무슨 인연 때문에 빙그레 웃으셨는지요? 모든 부처님께서는 인연이 없으면 웃지 않으시는 법입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항가제바 누이는 미래 세상에 부처님이 되리니, 겁의 이름은 성수(星宿)요, 부처님의 명호는 금화(金華)라 할 것이니라.
아난아, 이 여인은 여자 몸을 마치고 남자의 형상을 받아 장차 아촉불(阿閦佛)의 아비라제(阿毘羅提) 국토에 태어나서 그곳에서 범행(梵行)을 닦을 것이니라.
아난아, 이 보살은 그 국토에서도 이름을 금화(金華)라 할 것이며 이 금화 보살은 그곳에서 목숨을 마치면 다시 다른 지방의 부처님 국토에 이르러서 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나라에 다니면서 모든 부처님을 떠나지 않으리니, 마치 전륜성왕(轉輪聖王)이 한 누각[觀]으로부터 다른 한 누각에 이르면서 나서부터 죽기까지 발이 땅을 밟지 않는 것과 같으리라.
아난아, 이 금화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이르기까지 한 번도 부처님을 뵙지 않는 일이 없으리라.”
때에 아난이 생각하기를 ‘이 금화보살마하살이 뒤에 부처님이 되었을 때에 모든 보살마하살이 모이는 것은 마치 부처님의 모임과 같다고 알겠구나’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아난의 생각을 아시고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금화부처님 때 보살마하살의 모임은 부처님의 모임과 같을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아, 이 금화부처님의 비구승은 한량없고 끝이 없어 도저히 수로는 셀 수 없는 백천만억 나유타나 되리라.
아난아, 이 금화보살이 부처님이 되었을 때 그 국토에는 위에서 말한 뭇 악(惡)이 없을 것이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여인은 어느 곳에서부터 덕의 근본을 심고 선근을 심었는지요?”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 여인은 연등부처님[燃燈佛]에게서부터 선근을 심었고 처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내었으며, 이 공덕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였느니라.
또한 금꽃을 연등부처님 위에 뿌리고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였느니라.
아난아, 나도 그때에 다섯 송이의 꽃을 연등부처님 위에 뿌리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였느니라. 연등부처님께서는 나의 선근이 성취된 것을 아시고 나에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셨으니, 이 여인은 나에게 수기주시는 것을 듣고 발심하면서 말하기를 ‘저도 장차 오는 세상에 이 보살과 같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을 수 있으리라’고 하였느니라.
아난아, 그러므로 이 여인은 연등부처님의 처소에서 처음 발심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아난이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이 여인은 오래전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익히고 행해 온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이 여인은 오래전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익히고 행하였느니라.”
【論】【문】이러한 많은 대중들이 국토를 청정케 하는 행에 대한 말씀을 들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 여인 한 사람만이 국토를 청정케 하겠다는 원을 세우는가?
【답】국토를 청정케 하겠다는 원을 세운 이들이 많았지만 다만 말을 하지 않았을 뿐이며, 여인은 성품이 가볍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여러 세상 동안의 습기(習氣) 때문에 말을 꺼낸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여인은 도를 얻을 분한이 있었거니와 다른 사람들에게는 분한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부처님 법은 그렇지 않아서 중생의 업의 인연을 따르니, 마치 좋은 약은 모든 병을 다 치료하면서 귀한 이나 천한 이를 가리지 않는 것과 같다.
비록 또 여인은 지혜가 얇다 하더라도 전생에 지은 업의 인연으로 수기를 받아야 했었으며, 마음이 나서 말을 하고 싶어 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들으신 것이다.
또 부처님께서 잠자코 계시다가 수기를 주셨다면 사람들은 의심하기를 ‘무슨 인연이 있었기에 이 여인 혼자에게만 수기를 주실까’라고 할 것이므로, 이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그의 하는 말을 빌미삼아 수기를 주신 것이다.
【문】무엇 때문에 이름을 항가제바(恒伽提婆)라 하였는가?
【답】온갖 것에는 이름이 있어서
식별(識別)하는 것인데 그 뜻을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어떤 이는 말하기를 “이 여인의 부모가 항가신(恒伽神)에게 공양하고 이 딸을 얻었기 때문에 항가제바라 한다”고 한다. 항가(恒伽)는 바로 강물의 이름이요, 제바(提婆)는 하늘[天]이라는 뜻이다.6)
이 여인은 복덕의 인연으로 부잣집에 태어나 부처님 법을 듣고 믿으면서 좋아했기 때문에 금은의 보배 꽃과 금실로 짠 위아래의 옷이며 아울러 자기 몸을 장엄한 영락 등의 공양거리를 부처님께 올린 것이요, 부처님께서는 수기로써 보답하신 것이며 이 여인이 전생에 했던 일을 관찰하시면서 빙그레 웃으신[微笑] 것이다. 이 빙그레 웃는 뜻에 대해서는 앞에서의 설명과 같다. 이 가운데서는 조그마한 인연이면서도 큰일을 일으키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셨다.
【문】이 여인의 복덕은 마땅히 오래전에 여인의 몸을 바꿨어야 했거늘 무엇 때문에 아촉불의 나라에 가서야 비로소 여인의 몸을 바꾸는 것인가?
【답】세간의 5욕(欲)은 끊기 어려운 것이다. 이 여인은 집착과 갈망의 마음이 많았기 때문에 비록 여러 세상에서 모든 복덕을 행했다 하더라도 남자의 몸을 얻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수기를 얻고 모든 번뇌가 얇아진지라 그 때문에 아촉불의 나라에서 비로소 남자의 몸을 얻게 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이 여인은 전생에 사람들이 여인을 업신여긴 것을 많이 보았기 때문에 여인의 몸으로 수기받기를 원한 것이다”고 한다. 이와 같은 등의 인연으로 여자의 몸을 바꾸지 않고 수기를 받은 것이다.
또 경에서는 여인의 다섯 가지 장애[女人五礙]를 말씀하셨지만 수기를 받지 못한다고는 말씀하지 않았으므로 더 따지지는 말아야 한다.
아난은 이 여인이 한량없는 겁 동안에 한 부처님의 나라로부터 다른 한 부처님의 나라에 이르면서 공덕을 널리 쌓아 장차 오는 세상에 부처님의 세상을 청정하게 할 수 있고 그 안에 있는 보살들은 모두가 32상(相)ㆍ80수형호(隨形好)와 한량없는 광명이 있다 함을 들으면서 이 때문에 아난은 찬탄하기를 “희유한 일이다. 이와 같이 부처님 국토를 청정하게 한다면 부처님의 모임과 같이 되겠구나”고 한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그의 말을 옳다 하시자 아난 등은 의심하기를 ‘이 여인이야말로 희유하구나.
조그마한 법을 들었는데도 큰 과보를 얻으니 말이다’고 하고, 이 때문에 아난은 묻기를 “이 여인은 어느 곳으로부터 모든 덕의 근본을 심었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정광불(錠光佛)7)께서 나에게 수기를 주실 때에 이 여인은 금꽃을 가지고 부처님께 뿌리며 원을 세우되 ‘이 사람이 뒤에 부처님이 되셨을 때에 저에게도 수기를 주게 하옵소서’라고 하였나니, 그곳에서 선근을 심었고 이제 과보를 얻었느니라”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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