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4088 불교 (대지도론/大智度論) 76권

by Kay/케이 2024. 4. 23.
728x90
반응형

 

 

통합대장경 대지도론(大智度論) 76

 

 

대지도론 제76권

60. 학공부증품(學空不證品)을 풀이함


용수 지음
후진 구자국 구마라집 한역
송성수 번역


【經】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고자 하면 어떻게 공삼매(空三昧)를 배우고 어떻게 공삼매에 들며, 어떻게 무상삼매(無相三昧)ㆍ무작삼매(無作三昧)를 배우고 어떻게 무상삼매ㆍ무작삼매에 들며, 어떻게 4념처(念處)를 배우고 어떻게 4념처를 닦으며, 나아가 어떻게 8성도분(聖道分)을 배우고 어떻게 8성도분을 닦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마땅히 물질의 공과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공과 12입(入)ㆍ18계(界)의 공을 관찰해야 하며, 나아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의 공을 관찰해야 하나니, 이런 관(觀)을 지을 때에 마음이 산란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만일 마음이 산란하지 않으면 이 법을 보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 법을 보지 않으면 증득하지 않을 것이니, 왜냐하면 이 보살마하살은 제 모양의 공함[自相空]을 잘 배웠으므로 남은 것도 있지 않고 일부분도 있지 않으며 증득하는 법[證法]과 증득하는 이[證者]도 모두가 볼 수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보살마하살은 공한 법[空法]에 대해 증득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세존이시여, 어떻게 보살마하살은 공한 법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증득한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공을 구족해 관하면서 먼저 원을 세우되 ‘나는 이제 공한 법에서 증득하지 않아야 한다. 나는 지금 배우는 때이지 증득할 때가 아니다’고 하면서 보살마하살은 오로지 마음을 가다듬어 반연[緣] 가운데에 매어 있지 않으면,
이 때문에 보살마하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가운데서 물러나지 않으며 또한 누진(漏盡)의 증득을 취하지도 않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와 같이 크고 좋은 묘한 법[大善妙法]을 성취하나니, 왜냐하면 이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바로 배우는 때요 증득할 때가 아니다’고 하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생각하기를 ‘나는 바로 단바라밀을 배우는 때요 증득할 때가 아니며, 시라바라밀과 찬제바라밀과 비리야바라밀과 선바라밀을 배우는 때요 4념처를 닦는 때요 나아가 8성도분을 닦는 때이지 증득할 때가 아니며, 공삼매와 무상삼매와 무작삼매를 닦는 때요 증득할 때가 아니며, 부처님의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4무애지(無礙智)와 18불공법(不共法)과 대자대비(大慈大悲)를 닦는 때요 증득할 때가 아니며, 나는 지금 일체종지를 배우는 때요 수다원의 과위를 증득하거나 나아가 아라한의 과위와 벽지불의 도를 증득할 때가 아니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 공관(空觀)을 배우면서 공한 가운데에 머무르고, 무상관(無相觀)ㆍ무작관(無作觀)을 배우면서 무상에 머무르고 무작 가운데에 머무르며, 4념처를 닦으면서 4념처를 증득하지 않고 나아가 8성도분을 닦으면서 8성도분을 증득하지 않느니라. 이 보살은 비록 37품(品)을 배우고 37품을 행한다 하더라도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를 증득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떤 장부(壯夫)가 있는데, 그는 용맹하고 건장하면서 병법(兵法)에 뛰어나며, 예순네 가지 기예[能]가 있고 무기를 단단히 붙잡고 안정되게 서서 꼼짝하지 않으며, 모든 기술에 교묘할 뿐더러 단정하면서 정결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사람들이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조금만 일을 해도
보수와 이익을 많이 얻고, 이러한 인연 때문에 대중들은 공경하고 존중하고 찬탄하였으며, 사람들은 그가 이렇게 공경받고 존중받는 것을 보면서 더욱더 기뻐하였느니라.
그가 조그마한 일이 있어서 노약자들을 거느리고 다른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험난하고 두려운 곳을 지날 때에 부모를 위로하고 처자를 달래면서 ‘두려워하지 마시오. 나는 이런 곳을 지나면서도 아무런 걱정도 없게 할 테니 말이오’라고 하면서, 그 험난한 길 가운데에는 많은 도둑들이 잠복하고 있다가 겁탈하고 해를 끼쳤는데도 그 사람은 지혜와 힘을 갖추었기 때문에 그 나쁜 길을 탈 없이 지나 본래 목적했던 곳에 도달할 수 있었으며 도둑의 해를 만나지 않은지라 기뻐하면서 안락하게 지냈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온갖 중생들에 대하여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마음이 두루 차 있느니라. 그때에 보살마하살은 4무량심(無量心)에 머무르면서 6바라밀을 구족하고 누진(漏盡)의 증득을 취하지 않으며 일체종지를 배우면서 공ㆍ무상ㆍ무각의 해탈문에 들어가느니라.
이때에 보살은 모든 모양을 따르지 않고 또한 무상삼매를 증득하지도 않으며 무상삼매를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날개 있는 새가 허공을 날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비록 공중에 있다 하더라도 공중에 머무르지도 않는 것처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공해탈문(空解脫門)을 배우고 무상(無相)ㆍ무작(無作) 해탈문을 배우면서도 증득하려 하지 않고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에 떨어지지 않으며, 아직 부처님의 10력과 대자대비와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의 법과 일체종지를 완전히 갖추지도 않고 또한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도 증득하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어느 건장한 사람이 활 쏘는 법을 배워 활을 잘 쏠 적에 공중을 쳐다보고 활을 쏘아 놓고 다시 뒤의 화살을 앞의 화살에다 쏘아 화살과 화살이 서로 받치면서
떨어지지 않게 하기를 마음대로 하다가 만일 떨어지게 하고 싶으면 뒤의 화살을 쏘지 않고 중지하면 그제야 땅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방편의 힘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위하여 모든 선근을 아직 구족하지 않고 실제(實際)에서 증득하려 하지 않나니, 만일 선근이 성취되면 이때에는 곧 실제에서 증득하려 하느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할 때에는 마땅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모양[法相]을 관찰해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이 하는 바는 매우 깊습니다. 왜냐하면 비록 이 모든 법상을 배우고 실제(實際)를 배우며 여(如)를 배우고 법성(法性)을 배우며 필경공(畢竟空)을 배우고 나아가 자상공(自相空) 및 3해탈문(解脫門)을 배운다 하더라도 끝내 중도에서 타락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이것이야말로 매우 희유한 일입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보살마하살은 온갖 중생들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이와 같은 원을 세우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이 보살마하살이 생각하기를 ‘나는 온갖 중생을 버리지 않아야 한다. 중생들은 아무것도 없는 법[無所有法] 안에 빠져 있으므로 나는 마땅히 제도해야 한다’고 한다면, 그때 곧 공해탈문과 무상해탈문과 무작해탈문에 들어가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방편의 힘을 성취한지라 아직 일체종지를 얻지 못하고 이 해탈문을 행하면서도 또한 중도에 실제를 취하여 증득하지도 않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이 모든 매우 깊은 법인 이른바 내공(內空)으로부터 무법유법공(無法有法空)까지와 4념처로부터 3해탈문까지를 관(觀)하고자 하면, 그때에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이 모든 중생은 오랜 밤 동안 나라는 모양, 내지는 아는 이[知者]ㆍ보는 이[見者]라는 모양을 행하면서 법을 얻는 것에 집착하고 있다. 중생들이 이 모든 모양을 끊게 하기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는 법을 설해 주어야겠다’고 해야 하느니라.
그때 보살은 공해탈문과 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행하면서 또한 실제의 증득을 취하지도 않으며,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은 이런 마음으로써 선근을 성취하려고 하기 때문에 중도에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며, 4선(禪)ㆍ4무량심(無量心)ㆍ4무색정(無色定)과 4념처 내지는 8성도분과 공ㆍ무상ㆍ무작과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ㆍ4무애지ㆍ대자대비와 18불공법을 잃지도 않느니라.
이때 보살마하살은 도를 돕는 온갖 법[助道法] 내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하면서 끝내 손감(損減)되지 않나니, 이 보살은 방편의 힘이 있기 때문에 항상 착한 법이 더욱 늘어나며, 모든 감관[根]이 통하고 예리해서 아라한과 벽지불의 감관보다 뛰어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중생은 오랜 밤 동안 항상하다는 생각[常想]과 즐겁다는 생각[樂想]과 나라는 생각[我想]과 깨끗하다는 생각[淨想]의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에 집착한다. 이런 중생들을 위하여 살바야(薩婆若)를 구하여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는 그들을 위하여 무상하다는 법[無常法]과 괴롭다는 법[苦法]과 깨끗하지 않다는 법[不淨法]과 나 없다는 법[無我法]을 설해 주리라’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이런 마음을 성취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부처님의 삼매(三昧)를 얻지 않고 아직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대자대비와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추지 않으며 또한 실제에서 증득하지도 않나니, 그때에 보살은
무작해탈문(無作解脫門)을 닦으면서 비록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했다 하더라도 실제에서 증득하지도 않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중생들은 오랜 밤 동안 얻는 것에 집착하나니, 이른바 나와 중생 내지는 아는 이ㆍ보는 이며, 이것은 물질이요 이것은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이며, 이것은 입(入)이요 이것은 계(界)이며, 이것은 바로 4선이요 4무량심이며 4무색정이요, 나는 이와 같이 행하고 있다는 등이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중생으로 하여금 이런 법을 얻는 일이 없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보살은 이런 마음을 성취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도 아직 부처님의 10력과 4무소외와 4무애지와 대자대비와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추지 않으며 실제에서 증득하지도 않나니, 그때에 보살은 공삼매(空三昧)를 구족하게 닦는 것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생각하기를 ‘중생은 오랜 밤 동안에 모든 모양[諸相]을 행하나니, 이른바 남자라는 모양[男相]과 여자라는 모양[女相]과 물질이라는 모양[色相]과 물질이 없다는 모양[無色相]과 나는 이와 같이 행하고 있다는 등이다. 나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중생으로 하여금 이런 모든 모양의 과실을 없게 하리라’고 하느니라.
이런 마음을 성취하여 방편의 힘으로써 반야바라밀을 행하면서 아직 부처님의 10력 내지는 18불공법을 완전히 갖추지 않으며 실제에서 증득하지도 않나니, 그때에 보살마하살은 무상삼매(無相三昧)를 구족하게 닦는 것이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배우고 내공 내지는 무법유법공을 배우며, 4념처 내지는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배우고 부처님의 10력ㆍ4무소외ㆍ4무애지ㆍ대자대비를 배우며, 18불공법을 배워서
이러한 지혜가 성취된다면 짓는 법[作法]에 집착하거나 삼계(三界)에 머무른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도를 돕는 온갖 법[助道法]을 배우고 도를 돕는 법을 행할 때에는 시험삼아 묻기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어떻게 이 법을 배우고 공을 관하면서도 실제를 증득하지 않으며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수다원의 과위 내지는 벽지불의 도에 떨어지지 않으며 모양[相]이 없고, 지음[作]이 없고, 일어나는[起] 것이 없고, 나는[生] 것이 없고, 존재하지 않음[無所有]을 관하면서도 또한 실제에서 증득하지 않으면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인가’라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시험 삼아 물을 때에 이 보살이 대답하기를 ‘보살마하살은 다만 공한 것을 관해야만 하고 모양이 없고, 지음이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고, 나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없는 것을 관해야만 하며, 이 보살마하살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일어나는 것이 없고, 나는 것이 없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배우지 않아야 하며, 이 도를 돕는 법[助道法]도 배우지 않아야 한다’고 하면, 수보리야, 이 보살은 모든 부처님께서 아직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주시지 않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사람은 아비발치(阿鞞跋致) 보살이 배울 바의 모양을 말하지도 못하고 보이지도 못하며 대답하지도 못하기 때문이니, 만일 이 보살마하살이 아비발치가 배울 바의 모양을 말할 수 있고 보일 수 있으며 대답할 수 있으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보살의 도를 익히고 배워 박지(薄地)에 들어간 것이니, 마치 다른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과 같다고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혹시 아직 아비발치를 얻지 못한 보살도 이와 같이 대답할 수가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있느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을 들었거나 듣지 않았거나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마치 아비발치 보살마하살과 같으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보살로서 부처님 도를 구하는 이는 많지만, 배울 것이 있는 이의 도[學道]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도[無學道] 안에 있는 아비발치 보살들과 같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적습니다.”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참으로 그러하느니라. 이런 보살은 매우 적나니, 왜냐하면 보살마하살 중에는 이렇게 수기를 얻어 아비발치의 지혜의 지위를 행하는 이가 적기 때문이니라. 만일 혜지(慧智)1)에서 수기를 얻은 사람이라면 이렇게 잘 대답할 수 있나니, 이런 사람은 선근이 명료하여 모든 하늘이나 세간 사람으로서는 파괴할 수 없느니라.”
【論】【문】공을 배우는 것과 공에 들어가는 것에는 어떤 차별이 있는가?
【답】처음에는 공을 배운다 하고 나중에는 공에 들어간다 한다. 원인[因]은 바로 공을 배우는 것이요 결과[果]는 바로 공에 들어가는 것이며, 방편(方便)은 공을 배운다 하고 얻는 것[得]은 공에 들어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두 가지의 길은 무상(無相)ㆍ무작(無作)과 37품(品)에서도 또한 같다. 3해탈문과 37품은 바로 성문이나 벽지불의 열반의 도(道)로되 부처님께서는 보살들에게 마땅히 이 도를 행해야 한다고 권하신다.
수보리는 생각하기를 ‘이것은 바로 열반의 도이거늘 어떻게 보살이 이 법을 행하면서도 열반의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할까’라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보살은 물질 등의 온갖 법은 공하다고 관하되 이 보살은 깊이 선정에 들어가 마음이 산란하지 않고 예리한 지혜의 힘을 얻기 때문에 이 공한 법을 보지 않으며 보지 않기 때문에 증득한 것도 없느니라.
성문이나 벽지불은 나라는 것을 끊고 애착을 버려 곧장 열반으로 나아가거니와 이 보살은 제 모양[自相]이 공한 것을 잘 배우면서 물질의 법 가운데서부터 작은 티끌로서 남은 것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남겨 두지 않고 물질이 없는 법[無色法]에서는 한 생각까지도 남겨 두지 않는 경지에 이르며, 곧장 필경공(畢竟空) 안으로 들어가서 이 공한 법으로써 증득할 수 있다고 하는 것까지도 보지 않는 데에 이르느니라”고 하신다.
부처님께서 비록 이렇게 대답하셔도
수보리는 부처님의 뜻을 통달하지 못한지라 다시 여쭈기를 “부처님의 말씀과 같다면 보살은 마땅히 공한 법으로써도 증득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지금은 공한 가운데에 들어가 있거늘 어떻게 증득하지 않겠는지요”라고 한다.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증득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신다. “완전히 갖춘다[具足]”고 하는 것이 곧 깊이 들어간 것이다. 비유하건대 마치 솔새풀을 쥘 때에 느슨하게 쥐면 손을 상하거니와 꼭 쥐면 손을 상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깊이 공에 들어갔기 때문에 공한 것도 공하며 열반도 또한 공하기 때문에 증득할 것이 없음을 안다.
또 보살이 아직 공에 들어가지 못했을 때에는 생각하기를 “나는 두루 모든 법이 공하다고 빠짐없이 관해야 하며, 완전하게 알지도 못하면서 증득을 취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전심(專心)으로 생각을 가다듬어 선정에 들되 공한 인연 가운데에 매이지 않는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마음을 오로지 공한 인연 가운데에 매어 두기만 하면 마음이 여리어져서 공으로부터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문】위에서는 깊이 선정에 들어가 마음을 산란하지 않게 하라 하셨으면서 여기서는 어찌하여 오로지 마음을 한 군데에 쓰지 말라 하시는가?
【답】여기서 ‘오로지 마음을 한 군데에 쓰지 말라’고 하신 것은 처음에 들어갈 때에는 스스로가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위에서 ‘깊이 들어간다’고 한 것은 이미 깊어져서 공도 또한 공인 줄 알아서 마음이 딴 데 있지 않게 하기 때문에 산란하지 않다고 한 것이다.
또 이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아직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와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 등의 모든 부처님 법을 갖추지 못했거늘 어떻게 열반의 증득을 취하겠는가. 나는 지금 배우고 있는 때이니 모든 번뇌를 적게 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여 부처님 도에 들게 해야 하며, 만일 내가 불사(佛事)를 완전히 갖추게 된다면 그때에는 증득해야 한다’고 하나니, 이 때문에 보살은 비록 3해탈문에 들어갔다 하더라도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
여기에 대하여 비유를 드신 것이니, 곧 ‘장부(壯夫)’는 바로 보살을 비유하고 ‘부모와 친족’은 바로 제도해야 할 중생이며, ‘험한 길’은 바로 삼계에 있으면서 나고 죽는 것이요, ‘악한 도둑’은 바로 악마의 백성과 모든 번뇌를 비유한다.
‘무기[器伏]’는 바로
보살의 다섯 가지 신통 등 갖가지 방편의 힘이요, ‘본래 목적한 데에 도달하게 된다’는 것은 바로 보살로서 행할 바의 도(道)이며, ‘안정되게 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바로 보살이 마침내 공한 데에 머물러 4무량심(無量心)으로써 제도해야 할 중생을 운반하여 저 열반의 안락한 곳에 놓아 둔다는 비유이다.
때에 모임에 있는 이들이 의심하기를 ‘공한 가운데에는 아무것도 없거늘 어떻게 행할 수 있다 할까’라고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비유로써 말씀하시되 “마치 새가 허공을 날 때 의지하는 데가 없으면서도 멀리 날아가면서 떨어지지 않는 것과 같다”고 하셨다.
또 이 보살은 도법(道法)을 아직 완전히 갖추지도 못하고 아직 부처님 도에 이르지도 못했으면서 그 중간에 증득하려 하지 않는 것은 마치 새가 목적한 곳까지 가기 전에는 끝내 그 중간에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이 공한 법을 배워 자기 자신의 번뇌를 끊고 중생들을 제도하기 위해서이다.
또 분명히 알게 하기 위하여 활을 잘 쏘는 것에 비유하나니, 마치 사람이 활을 잘 쏘는 것과 같다. 활은 보살의 선정을 비유하고 화살은 바로 지혜이며, 허공은 바로 3해탈문이요 땅은 바로 열반을 비유한다.
이 보살은 지혜의 화살로써 3해탈문의 허공에다 쏘아 놓고 다시 방편의 힘으로써 뒤의 화살을 바로 앞에 쏜 화살에다 쏘면서 열반의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한다는 것이니, 아직 10력 등의 부처님 일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증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수보리는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말씀드리기를 “모든 보살이 하는 바는 매우 어렵고 실로 희유하오니, 이른바 공을 행하면서도 증득하려 하지 않습니다”고 하자, 부처님께서는 대답하시되 “이 보살의 본원(本願)은 모든 중생들이 괴로움을 여읠 수 있게 하는 것이니, 이런 본원의 대비심을 지녔기 때문에 비록 공을 수행한다 하더라도 증득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신다.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모든 중생들은 고통 가운데 처해 있고 뒤바뀜[顚倒]에 속박되어 있으며 아무것도 없는[無所有] 가운데에 빠져 있다’고 하며, 이때에 곧 공ㆍ무상ㆍ무작의 해탈문을 행한다면, 이 보살에게는 방편의 힘이 있어 3해탈문을 행하면서도
중생을 버리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또 보살은 매우 깊은 법인 이른바 18공(空)과 37품과 3해탈문을 관찰하고자 하면 먼저 생각하기를 ‘중생은 오랜 밤 동안에 나라는 모양[我相] 등에 집착하고 있다’고 해야 한다. 수행하는 이가 만일 곧장 매우 깊은 법을 관찰하면 혹은 성문의 도를 얻기도 하고 혹은 삿된 소견에 떨어지기도 하며,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없으므로 제 모양이 공한[自相空] 데에 깊이 들어갈 수 없다. 이 때문에 보살은 이런 법을 관찰하고자 하면 먼저 가엾이 여기는 마음[悲心]을 내야 하니, 즉 ‘중생들은 오랜 밤 동안 나라는 마음에 집착하여 모든 번뇌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오랜 밤 동안[長夜]’이란 아득히 멀고 오래된[久遠] 세월을 말한다. 한량없는 겁부터 이 나[我]라는 것은 결코 얻을 수 없고 공할 뿐인데 속고 뒤바뀌었기 때문에 모든 근심과 괴로움을 받고 있는 것이다. 보살은 이런 일을 보고 나서 원을 세우되 “나는 중생들을 위하여 부처님 도를 이루어 이 중생들의 나에 집착한 뒤바뀜을 끊어 주어야 한다”고 한다.
이러한 때에 곧 공 등의 3해탈문을 행하면서도 실제(實際)를 증득하지 않으며, 이런 선근이 성취된 보살은 실제의 증득을 취하지도 않고 또한 4선(禪) 등의 모든 공덕을 잃지도 않는다. 보살은 깊이 공한 데에 들기 때문에 모든 감관이 예리해서 2승(乘)보다 뛰어난 것이다.
네 가지 뒤바뀜[四顚倒]을 깨뜨리는 데에 대한 이치는 역시 위에서 말한 것과 같다.
또 보살은 생각하기를 ‘중생은 오랜 밤 동안 법을 얻는[得法] 데에 집착하고 있으니, 이른바 ≺나와 중생이다≻고 함에서 짓는 법[作法]에 집착하거나 ≺삼계(三界)에 머무른다는 것은 있을 수조차 없는 일이다≻고 함에 이르기까지이다’고 한다. 그 이치는 다 똑같이 공을 관찰하면서도 증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어떻게 이 보살은 아직 도를 얻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깊은 공을 행할 수 있음을 아는가?
【답】경에서 직접 그 인연을 말씀하신 것과 같이 이 보살은 시험삼아 묻기를 “어떻게 보살은 공을 배우면서도 증득하지 않아야 하는가”라고 해야 하며, 만일 보살이 대답하기를 “다만 공한 줄 생각하면서 일심으로 익히고 행해야만 하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법에서와 같이 배워 아는 데 그치지 말 것이니, 나아가 무생(無生)과 무소유(無所有)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같다”고 한다면,
그 보살은 아직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지 못한 이인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방편으로 배워 알기 위하여 공을 관찰하라’고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니, 만일 이 보살이 위에서의 대답과 다르다면 그는 바로 아비발치요, 이미 익히고 배워서 박지(薄地)에 들어가 있는 줄 알 것이다.
‘익히고 배웠다[習學]’고 함은 먼저 공을 배워서 알았다는 말이요, ‘박지’라 함은 아비발치의 지위 안에서는 모든 번뇌가 얇아졌다[薄]는 뜻이다.
수보리는 아비발치의 모양과 아비발치의 모양이 아닌 것을 듣고 나서 부처님께 여쭈기를 “세존이시여, 혹시 아직 아비발치를 얻지 못한 보살도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지요”라고 했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있느니라. 보살로서 6바라밀을 들었거나 듣지 못했거나 아비발치와 같이 대답하는 이가 있으니, 만일 들은 이면 다만 스승으로부터 들었을 뿐이요 아직 보살의 지위를 구족하지 못한 이요, 만일 듣지 않은 이면 스스로가 생각하고 바르게 기억하면서 비록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이라 하더라도 모든 법 모양을 구하면서 아비발치의 보살과 같이 대답하느니라”고 하신다.
수보리는 말하기를 “부처님 도를 구하는 사람들은 많이 있으면서도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지위[學地]든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위[無學地]든 아비발치 보살과 같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는 이는 적습니다”고 했다.
아직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지 못한 이를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지위’라 하고, 무생법인을 얻은 이를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지위’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말씀하시되 “적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보살이 적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은 이면 이렇게 대답할 수 있나니, 왜냐하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은 오직 부처님만이 두루 아실 수 있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이 사람이 법대로 대답할 수 있다 함을 알기 때문에 미리 수기를 주시는 것이며, 이 보살은 비록 선근은 적다 하더라도 분명하게 알고 있으므로 중생을 널리 이익되게 하며 파괴할 수 있는 이도 없다”고 하셨다.

61. 몽중부증품(夢中不證品)을 풀이함①

【經】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까지도 성문이나 벽지불의 지위를 탐내지 않고 또한 삼계(三界)를 탐내지도 않으면서
‘모든 법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메아리와 같고 아지랑이와 같으며 변화[化]와 같다’고 관찰하면서 또한 증득하지도 않는다면,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相]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부처님께서 수없는 백천만억의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와 하늘ㆍ용ㆍ귀신ㆍ긴나라 등을 위하여 설법하시는 것을 보며, 부처님으로부터 법을 듣자마자 곧 그 속의 뜻을 이해하면서 법대로 행하면,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부처님의 32상(相)과 80수형호(隨形好)의 큰 광명이 허공에 솟아나 있고 큰 비구승이 그 가운데에서 법을 설하며, 큰 신력(神力)을 나타내면서 변화로 사람을 만들어 그 사람이 다른 국토에 가서 불사(佛事)를 베풀고 짓는 것을 보면,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군인들이 나타나 마을을 부수고 성읍(城邑)을 부수며 잘못해 불이 난 것을 보게 되거나, 또는 범ㆍ이리ㆍ사자 등의 사나운 짐승들을 보게 되거나, 누가 와서 그의 머리를 끊으려 하는 것을 보게 되거나, 또는 부모가 돌아가시고 형제ㆍ자매와 여러 친한 벗과 아는 이들이 죽는 것을 보는 등 이러한 갖가지 근심되고 괴로운 일들을 보면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근심하거나 괴로워하지도 않다가 꿈에서 깨어난 뒤에 곧 생각하기를 ‘삼계(三界)는 허망하여 모두가 꿈과 같을 뿐이다.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도 또한 중생들을 위하여 삼계는 마치 꿈과 같다고 설해 주어야 하리라’고 하면,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어떻게 이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에 그 국토 안에 3악도(惡道)가 없는 줄 아느냐 하면,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만일 꿈속에서 지옥ㆍ축생ㆍ아귀를 보면 생각하기를 ‘내가 부지런히 정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을 때 나의 국토 안에는 온갖 3악도가 없게 하리라. 왜냐하면 이 꿈과 모든 법은 둘이 없고 구별도 없기 때문이다’고 하나니,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꿈속에서 지옥의 불이 중생들을 태우는 것을 보면 서원을 세우면서 ‘만일 내가 실로 아비발치라면 이 불이 당장 꺼져야 한다’고 하면 이 불이 곧 꺼져버리나니, 만일 지옥의 불이 꺼진다면 곧 그것이 아비발치의 모양이니라.
또 만일 보살이 대낮에 성곽(城郭)에 불이 난 것을 보고 생각하기를 ‘나는 꿈속에서 아비발치의 행(行)과 종류[類]와 모습[相貌]을 보았다. 나에게 지금 실로 이런 것이 있다면……’ 하면서, 스스로가 서원을 세우기를 ‘이 불은 당장 꺼져야 한다’고 하나니, 만일 불이 꺼지면 그 보살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얻어 아비발치의 지위에 머물러 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불이 꺼지지 않고 한 집을 태우고는 한 집을 놓아 두거나 한 마을을 태우고는 한 마을을 그대로 두거나 하면, 수보리야, 그 불에 탄 집은 법을 파괴한[破法] 업의 인연이 두껍게 쌓여서 그 때문에 한 집은 태우고 한 집은 그대로 두는 줄 알아야 하나니, 그 여러 중생들은 법을 파괴한 남은 재앙을 금세(今世)에 받기 때문에 불에 탄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인연 때문에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다시 그대를 위하여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을 말해 주겠느니라. 수보리야, 어떤 남자나 여자가 비인(非人)에게 홀려 있으면 그때에 보살은 생각하기를 ‘만일 내가 과거의 모든 부처님에게서 수기를 받아 나의 마음이 청정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청정한 바른 도(道)를 행하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心]을 멀리 여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생각을 멀리 여의었다면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이루어져야 하며, 나는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요 얻지 못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시방의 국토 안에 현재 계시는 모든 부처님께서는 모르시는 것이 없고 보지 못하시는 것도 없으며 이해하지 못하시는 것도 없고 증득하지 못하신 것도 없으시므로 모든 부처님께서는 저의 깊은 마음을 아시면서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라는 판정을 하시리라’고 하면, 이런 지성스런 맹세 때문에 이 남자와 여인은 비인(非人)에게 붙잡혀 비인에게 시달리다가도 이 비인은 당장 멀리 떠날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이 맹세를 하였는데도 만일 비인이 떠나가지 않는다면 그 보살마하살은 아직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얻지 못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러한 맹세를 할 때에 이 비인이 떠나간다면 이 보살마하살은 이미 과거의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행과 종류와 모습으로써 그것이 바로 아비발치 보살마하살의 아비발치 모양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6바라밀과 방편의 힘을 멀리 여의고 오래도록 4념처를 행하지 않고, 나아가 오래도록 공ㆍ
무상ㆍ무작의 삼매(三昧)를 행하지도 않으며 아직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았다면 이 보살은 악마의 홀림을 당하게 되는데, 보살은 그때 맹세하기를 ‘만일 내가 실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다면 이 비인은 당장 떠나가야 한다’고 하면, 이때 악마가 곧 방편을 지어 비인에게 떠나가도록 명하는 것이니, 악마는 위력이 있어서 이 여러 비인들보다는 뛰어나기 때문에 비인이 떠나는 것이니라.
이때 보살은 생각하기를 ‘내가 맹세한 힘 때문에 비인이 떠났다’고 하고, 그것이 악마의 힘인 줄 모르면서 증득한 것이라고 믿기 때문에 다른 보살들을 업신여기고 헐뜯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이미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수기를 받았거니와 그대들은 아직 못 받았다’고 하느니라. 그는 그런 헛된 맹세로써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을 내나니, 이런 일 때문에 살바야(薩婆若)를 멀리 여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멀리 여의느니라.
수보리야, 이 사람은 성문의 지위나 벽지불의 지위인 이 두 지위에 떨어질 줄 알지니, 이런 맹세의 인연 때문에 악마의 일[魔事]을 일으키며, 이 사람은 선지식(善知識)을 친근하거나 의지하지도 않고 아비발치의 모양을 묻지도 않으므로 악마에게 더욱더 견고하게 묶이느니라. 그것은 왜냐하면 이 보살은 오래도록 6바라밀을 행하지 않아서 방편의 힘이 없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이 바로 보살에게 일어나는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오래도록 6바라밀을 행하지 않고 나아가 아직 보살의 지위에 들지 않아서 악마의 홀림을 당하느냐 하면, 수보리야, 악마는 변화로 갖가지의 몸이 되어 보살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모든 부처님에게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이름은 아무개요, 당신의 아버지 이름은 아무개며, 당신 어머니의 이름은 아무개요, 당신의 형제ㆍ자매의 이름은 아무개들이며, 당신의 일곱 세상[七世] 동안의 이름은 이러이러했습니다. 당신은
아무 지방, 아무 나라, 아무 성(城), 아무 마을 안에서 태어났었습니다’고 하느니라.
만일 보살의 성품과 행동이 온화하고 부드러운 것을 보면 그 보살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전생에도 그렇게 온화하고 부드러웠습니다’고 하고, 만일 그의 성품과 행동이 급하고 사나운 것을 보면 말하기를 ‘당신은 전생에서도 역시 그러했습니다’고 하며, 만일 보살이 아란야(阿蘭若)의 행을 닦는 것을 보면 말하기를 ‘그대는 전생에서도 역시 아란야의 행을 닦았습니다’고 하느니라.
만일 그 보살이 걸식하면서 생활하거나 누더기를 입거나 정오를 지난 뒤에는 음료[漿]를 마시지 않거나 한 자리에서 먹고 거듭 먹지 않거나 한 발우에 얻은 밥만을 먹거나 죽은 시체들 사이에 있거나 훤히 드러난 한데[露地]에 앉아 있거나 나무 밑에 머무르거나 항상 앉기만 하고 눕지 않거나 가부좌하거나 세 벌의 옷만을 가지고 있거나 또 욕심이 적거나 만족할 줄 알거나 멀리 떨어져서 머무르거나 발에 흙을 묻히지 않거나 말이 적거나 하는 것 등을 보면 곧 보살에게 말하기를 ‘당신은 전생에도 이런 행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지금 이런 두타(頭陀)의 공덕이 있는 것으로 보아 당신은 전생에도 반드시 이런 두타의 공덕이 있었을 것입니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은 이런 전생의 일과 이름과 성씨 말하는 것을 듣고 또 이제 두타의 공덕을 찬탄한 것을 듣고는 이내 기뻐하면서 교만한 마음을 내나니, 이때에 악마는 그 보살에게 말하기를 ‘당신에게는 이러한 공덕과 이러한 모양이 있으므로 당신은 참으로 모든 부처님으로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으셨습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악마는 혹은 비구의 옷을 입기도 하고 혹은 거사(居士)의 형상이 되기도 하며 혹은 부모의 몸이 되어 보살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미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수기를 받으셨습니다. 왜냐하면 이런 아비발치 공덕의 모양을 그대는 모두 다 구족하고 있기 때문입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내가 말한 바의 진실한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 이 사람에게는 영영 없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악마에 홀려 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 이 사람에게는 영영 없는데도
이러한 이름들을 듣고 그 때문에 교만한 마음을 내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헐뜯고 있기 때문이니라.
수보리야, 이것을 바로 보살마하살이 악마에게 홀려 있다 하나니, 이것이 보살에게 일어나는 악마의 일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오래도록 6바라밀을 행하지 않아서 이름의 모양을 알지 못하며 물질의 모양을 알지 못하고 느낌ㆍ생각ㆍ지어감ㆍ분별의 모양을 알지 못하므로 악마가 와서 말하기를 ‘당신은 장차 오는 세상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적에는 이와 같은 명호가 있을 것입니다’고 하면서, 그가 본래 생각하고 있던 대로의 명호를 말하느니라.
이 지혜도 없고 방편이 없는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먼저도 성불할 때는 이런 명호가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이 사람은 내가 생각하고 있었던 그대로를 말하고 있으며 이 사람의 말은 내가 본래 생각했던 것과 꼭 합치하고 있으니, 나는 틀림없이 모든 부처님의 수기를 받았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내가 말한 아비발치의 행과 종류와 모습이 이 사람에게는 영영 없는데도 다만 헛된 이름 말하는 것만을 듣고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헐뜯고 있으니, 이런 일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멀리 여의는 것이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반야바라밀을 멀리 여의어 방편의 힘이 없으며 선지식을 멀리 여의고 나쁜 벗을 만나고 있기 때문에 성문이나 벽지불의 두 지위에 떨어져 오래오래 생사(生死) 가운데에 오가고 하다가 그런 뒤에야 도로 보살마하살에 의지하게 되거나 선지식을 만나 항상 따르면서 가까이한다면 그 때문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게 되느니라. 그러나 이 사람이 그 몸으로 곧 뉘우치지 않으면 당연히 아라한의 지위나 벽지불의 두 지위에 떨어질 것이니라.
수보리야, 비유하건대 마치 비구의 4중금(重禁)의 법에서 만일 한 가지 일이라도 범하면 사문(沙門)이 아니요 석가의 제자[釋子]도 아니며, 이 사람은 현재의 이 몸으로는 네 가지 사문의 과위[四沙門界]를 얻지 못하는 것처럼 수보리야,
이 헛된 이름을 듣고 집착하는 보살의 마음도 그와 같아서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헐뜯기 때문에 이 죄는 비구의 4중금보다 중한 줄 알아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이 중한 죄를 그대로 두면 그 죄는 5역(逆)보다도 더 중하느니라. 이 헛된 이름을 믿고 높은 체하는 마음을 내어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헐뜯는 것이니, 만일 이런 마음을 내면 그 죄는 매우 중한 것인 줄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이름 등의 미세한 악마의 일을 보살은 알아차려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이 텅 비고 조용한 산이나 진펄이나 들판의 먼 곳에 있으면 악마가 보살에게로 와서 멀리 떨어지는 법[遠離法]을 찬탄하면서 말하기를 ‘선남자여, 그대가 행한 바는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멀리 떨어지는 법입니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나는 이런 멀리 떨어지는 법, 즉 텅 비고 조용한 산과 진펄과 들판의 먼 데에만 있는 것을 찬탄하지 않았느니라.”
수보리가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텅 비고 조용한 산이나 진펄이나 들판의 먼 데 있는 것이 멀리 떨어지는 법이 아니면 달리 무슨 멀리 떨어지는 법이 있는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멀리 여의면서 텅 비고 조용한 산이나 진펄이나 들판의 먼 곳에 머무른다면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허락한 멀리 떨어지는 법이니라.
수보리야, 이와 같은 멀리 떨어지는 법은 보살마하살이 마땅히 수행해야 할 바이니, 밤낮으로 늘 이런 멀리 떨어지는 법을 행한 이를 바로 멀리 떨어지는 행을 하는 보살이라 하느니라.
수보리야, 악마가 말한 바의 멀리 떨어지는 법은 텅비고 조용한 산이나 진펄이나 들판의 먼 곳에 있되 이 보살의 마음은 산란해 있나니, 이른바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을 멀리 여의지 않고 부지런히 반야바라밀을 닦지도 않으므로 이 보살마하살은 일체종지(一切種智)를 완전히 갖출 수 없느니라.
이 보살은 악마가 말하는 멀리 떨어지는 법을 행해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면서 도리어 도성 곁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청정하고
성문이나 벽지불의 심란한 마음도 없으면서 그 밖의 여러 가지 악한 마음이 없이 선정과 해탈과 지혜와 신통을 두루 갖춘 다른 보살을 업신여기느니라.
이 반야바라밀을 여의어 방편이 없는 보살마하살은 비록 아주 광활한 백 유순(由旬) 밖의 날짐승ㆍ길짐승이나 귀신ㆍ나찰이 살고 있는 데서 1년 아니 백천만억 년 동안 지낸다 하더라도, 이 보살의 멀리 떨어지는 법을 알지 못한다. 이른바 모든 보살은 이런 멀리 떨어지는 법으로써 마음 깊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일으켜 잡되지 않는 행[不雜行]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느니라. 이런 보살은 심란한 행으로써 의지하고 받으면서 이 멀리 떨어지는 법에 집착하고 있으므로, 이런 사람의 소행은 부처님이 허락하지 않는 바이니라.
수보리야, 내가 말한 진실로 멀리 떨어지는 법은 이 보살이 이런 가운데에 있지도 않고 또한 이런 멀리 떨어지는 모양조차도 보지 않나니, 왜냐하면 다만 이 공만을 행하면서 멀리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그때 악마가 허공에서 찬탄하기를 ‘참으로 훌륭하구나, 선남자여. 이것이 바로 부처님이 말씀하시는 진실로 멀리 떨어지는 법이니, 그대는 이런 멀리 떨어지는 법을 행하고 있으므로 신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다’고 하느니라.
이 보살마하살은 이 멀리 떨어지는 법에 염착(念著)하면서 부처님 도를 구하는 그 밖의 여러 청정한 비구를 업신여기며 심란해 하고 있느니라. 심란한 것을 심란하지 않다 하고 심란하지 않은 것을 심란하다 하며, 공경해야 할 데에 공경하지 않고 공경하지 않을 데에 공경하면서 이 보살은 말하기를 ‘비인(非人)이 나를 염려해서 나를 칭찬하고 있구나. 내가 행하고 있는 것이 참으로 멀리 떨어지는 법이다. 도시 곁에 머무른 이면 그 누가 그를 찬탄해 주겠는가’라고 하면서, 다른 보살마하살을 업신여기느니라.
수보리야, 이런 보살을 전다라(旃陀羅)라 하며 모든 보살을 오염(汚染)시키는 줄 알아야 하나니,
이런 사람이야말로 형상만이 비슷한 보살이요 사실은 천상과 인간 안의 큰 도둑이며 사문의 옷을 입은 도둑이니라. 부처님 도를 구하는 모든 이들은 이러한 사람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하고 공양하거나 공경하지도 말아야 하나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이런 사람은 증상만(增上慢)에 떨어져 있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보살마하살이 일체지(一切智)를 버리지 않고자 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며, 일심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자 하고 온갖 중생들을 이익되게 하고자 하면 이런 사람을 가까이하면서 공경하거나 공양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보살마하살의 법은 항상 자기의 이익을 힘써 구하면서 세간에 대하여 싫증을 내고 마음으로 항상 삼계(三界)를 멀리 여의어야 하며, 이런 사람들에게 자(慈)ㆍ비(悲)ㆍ희(喜)ㆍ사(捨)의 마음을 내면서 ‘나는 보살의 도를 행하면서 이러한 허물을 내지 않아야 한다. 만일 일어나게 되면 빨리 없애버려야 한다’고 해야 하느니라.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은 이러한 일을 잘 깨달아야 하며 이런 일 가운데서 스스로 잘 벗어나야 하느니라.
다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깊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하면 선지식(善知識)을 가까이하면서 공경하고 공양해야 하느니라.”
수보리가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떤 이가 바로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인지요?”
부처님께서 수보리에게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며 모든 보살마하살도 역시 보살의 선지식이니라. 수보리야, 아라한도 역시 보살의 선지식이니, 이들이 바로 보살마하살의 선지식이니라.
다시 수보리야, 6바라밀이 보살의 선지식이요, 4념처 내지는 18불공법도 또한 보살의 선지식이니라. 수보리야, 여(知)ㆍ실제(實際)ㆍ법성(法性)도
또한 보살의 선지식이니라.
수보리야, 6바라밀은 바로 세존이요 6바라밀은 바로 도(道)이며, 6바라밀은 바로 큰 광명이요 6바라밀은 바로 횃불이며, 6바라밀은 바로 지(智)요 6바라밀은 바로 혜(慧)이며, 6바라밀은 바로 구제자요 6바라밀은 바로 귀의할 데이며, 6바라밀은 바로 섬[洲]이요 6바라밀은 바로 궁극의 도[究竟道]이며, 6바라밀은 바로 아버지요 6바라밀은 바로 어머니이니, 4념처에서 일체종지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그러하느니라.
6바라밀과 37도법(道法)은 또한 과거 모든 부처님의 부모요 6바라밀과 37도법 또한 미래와 현재의 시방 모든 부처님의 부모이니, 왜냐하면 수보리야, 6바라밀과 37도법 가운데서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시방 모든 부처님이 나오시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수보리야, 보살마하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며 중생들을 성취시키고자 하면 6바라밀과 37도법을 배워야 하느니라. 그리고 네 가지의 거두어 주는 법[四攝法]으로 중생들을 거두어 주어야 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냐 하면, 보시하고[布施], 사랑스런 말을 하고[愛語], 이익되게 하고[利益], 일을 같이하는[同事] 것이니라.
수보리야, 이런 이익 때문에 나는 말하기를 ‘6바라밀과 37도법은 바로 모든 보살마하살의 세존이요 도이며, 큰 광명이요 횃불이며, 지(智)요 혜(慧)이며, 구제자요 귀의할 곳이며, 섬이요 궁극의 도이며, 아버지요 어머니이다’고 하느니라.
수보리야, 그러므로 보살마하살은 다른 사람의 가르침에 따라 머무르지 않고자 하고 온갖 중생들의 의심을 끊고자 하며 부처님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들을 성취시키고자 하면 이 반야바라밀을 배워야 하나니, 그것은 왜냐하면
이 반야바라밀 가운데서는 모든 법을 널리 설하였고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배워야 할 곳이기 때문이니라.”
【論】【문】「아비발치품(阿鞞跋致品)」에서 이미 널리 아비발치의 모양을 해설했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다시 해설하는가?
【답】말한 바의 반야바라밀의 뜻은 모두가 아비발치의 모양인데 다만 아비발치품 가운데서 그 일을 많이 해설했을 뿐이다. 그 밖의 품(品) 가운데서도 곳곳에서 아비발치의 모양을 해설한 것이 있기는 하나 차례대로 해설하지 않았을 뿐이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뒤에 오는 중생들을 위하여 다른 말로써 아비발치의 모양을 말씀하신 것이다”고 한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두 가지 아비발치가 있나니, 첫째는 이미 수기를 얻은 이요, 둘째는 아직 수기를 얻지 못한 이다. 수기를 얻은 이에게도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눈앞에 보이는 데서 수기를 얻은 이요, 둘째는 보이지 않는 데서 수기를 얻은 이다. 보이는 데서 수기를 얻지 않은 이에게도 두 가지가 있나니, 첫째는 수기의 인연을 완전히 갖춘 이요, 둘째는 수기의 인연을 완전히 갖추지 못한 이다”고 한다.
수기의 인연을 완전히 갖추었다 함은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고 6바라밀을 완전히 갖춘 이요, 수기의 인연을 완전히 갖추지 못했다 함은 다만 모든 법의 실상만을 알고 반야바라밀의 갈래를 얻었을 뿐이며 그 밖의 바라밀은 아직 완전히 갖추지 못한 이다.
이런 보살은 아비발치 보살과 같이 대답할 수 있는 이며, 이들은 바로 전품(前品)의 끝에서 말한 아비발치이니, 이 때문에 차례대로 말한 것이다.
꿈속에서도 두 지위[二地]를 탐내지 않는다면 비록 아직 아비발치의 법을 구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그를 아비발치라 하나니, 이와 같은 등의 아비발치 모양을 말씀하기 위하여 이 품(品)에서 차례대로 말씀하신 것이다.
이 보살은 대낮에도 항상 공을 수행하기 때문에 밤의 꿈속에서도 삼계(三界)를 탐내지 않으며, 이 사람은 항상 자비로운 마음으로 중생을 대하면서 부처님 법을 몹시 좋아하기 때문에 2승(乘)을 탐내지 않나니,
그는 꿈을 꾸거나 깨어 있거나 온갖 법은 마치 꿈과 같고 허깨비와 같다고 관찰한다.
이런 보살은 비록 아직 눈앞에 보이는 데서 수기를 받지 못하고 그 밖의 법도 아직 구족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역시 아비발치의 모양이라 한다. 왜냐하면 보살은 두 곳에서 물러나기 때문이니, 첫째는 세간의 쾌락에 집착하는 까닭에 물러나고, 둘째는 2승을 취하는 까닭에 물러난다. 그러나 이 보살은 견고한 마음으로 공과 자비심에 깊이 들어갔기 때문에 꿈속에서조차도 삼계와 2승을 탐내지 않는다. 그러니 하물며 깨어 있을 때이겠는가.
또 만일 보살이 꿈에 부처님께서 사람과 하늘대중 가운데서 모든 법의 실상에 관한 뜻을 설법하는 것을 보면 보살은 이 뜻을 알아서 마음과 법이 합치된다.
또 모든 부처님의 비밀한 법을 보살은 꿈속에서 보게 된다. 이른바 부처님 몸이 한량없어서 수미산(須彌山)보다 더하고 빛깔은 마치 염부단금(閻浮檀金)과 같으며 32상(相)과 80종의 수형호(隨形好)로 스스로 장엄하고 한량없는 광명을 놓으면서 범음성(梵音聲)으로 법을 설하며, 그리고 털구멍에서 한량없이 변화된 부처님의 몸이 나와 시방으로 가서 갖가지 방편의 힘으로 불사(佛事)를 짓고 베풀면서 중생을 제도하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때 이 보살은 부처님의 신통력을 보기 때문에 깊은 마음이 청정해져 부처님 법을 묻고 모든 법의 실상을 얻게 되나니, 이것을 바로 아비발치라 한다.
이 보살은 항상 필경공(畢竟空)을 행하기 때문에 나와 내 것 등의 모든 번뇌를 얇게 하면서 자기의 몸까지도 아끼지 않는데 하물며 그 밖의 친척이겠는가.
이런 인연 때문에 꿈속에서 자기의 몸이나 또는 부모 등이 죽거나 죽는 인연을 보거나 마을이 파괴되는 것 등을 보면서도 근심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으며, 꿈을 깬 뒤에는 생각하기를 ‘마치 꿈속에서 죽지 않는 데도 죽는다고 보고 두렵지 않은데도 두렵다고 보는 것처럼 온갖 삼계(三界)도 모두가 그렇거늘 어찌 꿈속에서 뿐이랴.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는
마땅히 중생들을 위하여 모든 법은 마침내 공하여 모두가 꿈과 같다고 말해 주리라’고 한다.
또 어떤 보살은 국토를 청정하게 하는 인연을 심을 때에 서원을 세우되 ‘나는 그러한 때에 청정한 국토의 행을 쌓고 모아 이런 마음으로 닦아 익히기 때문에 꿈속에서 3악도(惡道)의 중생을 보면 즉시 이런 마음을 얻어 내가 부처님이 되었을 때에 나의 국토에서는 3악도라는 이름조차 없게 하리라’고 한다.
또 이 보살은 항상 자비의 마음을 닦기 때문에 꿈속에서 지옥의 불이 중생을 태우는 것을 보고 서원하는 말을 하면 불이 이내 꺼져버린다. 꿈을 깬 뒤에는 이런 모양을 취하고 있다가 만일 실제로 불이 성곽(城郭)을 태우는 것을 보면 생각하기를 ‘나는 꿈속에서도 불이 꺼졌다. 이 불도 당장 꺼져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부처님께서는 꿈을 꿀 때나 깨어 있을 때나 똑같아서 다름이 없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고 한다.
이 보살은 한량없는 겁 동안 복덕을 닦고 쌓아 모든 법의 실상을 얻었기 때문에 귀신과 용왕 등이 도와주어서 이 불이 꺼지게 한 것이다. 그 가운데에 꺼지지 않은 것이 있어 ‘한 집을 태우고는 한 집은 그대로 둔다’고 함은 그 중생의 죄가 중하기 때문에 보살의 복덕과 지혜의 힘으로도 끌 수 없기 때문이다.
‘중한 죄’라 함은 이른바 법을 파괴한 업[破法業]이다. 법이란 반야바라밀이요 그 밖의 법이 지닌 이익은 반야바라밀에는 미칠 수가 없나니, 이 때문에 파괴한 이의 죄는 중한 것이며 보살의 서원하는 힘 때문에 차례대로 다 타지 않거니와 오직 죄가 중한 이만은 구제하지도 못하고 방지하지도 못한다. 이것이 바로 아비발치의 모양이다.
비인(非人)에게 홀렸을 때도 불에 주문으로 서원[呪願]하는 것과 같다. 어떤 보살은 아직 무생법인을 얻지 못했어도 이 아비발치의 주문으로 서원하는 것을 들으면 귀신이 떠나 버린다. 그것은 주문으로 서원을 할 때 이 보살에게는 아직 자기의 힘이 없었으므로 악마가 그 귀신을 보낸 것인데 그는 자기의 힘이라고 믿고 뽐낸다. 이와 같은 허물들이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나타내 보이시면서 깨닫고 알게 하신다.
또 보살이 아직 바른 지위[正位]에 들지 못하면 악마는 갖가지의 형상으로 그의 생각에 따라 나타나 말하기를 “그대는 이미 수기를 얻었으므로 그대에게는 이런 모양이 있으나
다만 육안(肉眼)이기 때문에 알지 못할 뿐이다”고 한다. 이런 인연 때문에 증상만(增上慢)을 내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긴다.
또 보살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얻지 못하면 물질 등 5중(衆)이 화합한 데서 이름이라는 모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므로 악마가 와서 그에게 수기를 주되 “그대는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며 그 명호는 아무개라 하리라”고 하며, 이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본래 이러한 명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지금 말씀하신 바는 내가 원했던 것과 똑같으므로 반드시 이것은 모든 부처님의 수기이다’고 한다. 이 때문에 마음에 교만이 생기면서 그 밖의 큰 보살들을 업신여기니, 이런 인연 때문에 위없는 도[無上道]를 멀리 여의고 죄를 다 받은 뒤에는 2승에 떨어진다.
만일 곧 그 몸으로 뉘우치면서 오래오래 죄를 다 갚고 마치면 도로 반야바라밀에 의지하여 부처님이 될 수 있다. 그것은 왜냐하면 만일 몸을 바꾼 뒤에야 뉘우치면 죄가 중하여 소멸시킬 수도 없고 부처님이 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이 마음은 이런 헛된 이름에 집착하여 중한 죄를 얻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4중금(重禁)의 비유로 말씀하신다. 이 중금을 파괴하면 현재의 몸으로는 네 가지 도과(道果)를 얻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4중금 가운데 “나는 바로 아라한이다”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 있는데 여기서는 이 수기하는 이름에 집착하면서 스스로가 말하기를 “나는 장차 부처님이 될 것이다”고 했기 때문에 4중금보다 더 중한 것이다.
‘5역죄(逆罪)보다 더하다’고 함은 지옥품(地獄品)에서 반야바라밀을 파괴하는 죄에 대해 설명한 것과 같다.
‘미세한 악마의 일’이라 한 데서 미세(微細)하다는 것은 그의 뜻을 거스르지 않는다[不逆]는 말이니, 그가 본래 생각했던 대로 그 마음을 도와주어 이루게 했다는 것이다.
이 보살은 아직 아비발치의 법을 얻지 못했기에 악마가 거짓말을 한 뒤에 이런 미세한 악마의 일을 얻은 것이니, 근기가 예리한 보살은 마땅히 알아차려서 멀리 제거해야 한다.
또 보살이 멀리 떨어진 곳에 있으면 악마가 와서 찬탄하기를 “그대는 친족과 동학(同學)을 멀리 여의고 혼자 깊은 산 숲 속에서 부처님 도를 위하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진실한 보살도(菩薩道)의 행이다”고 한다.
이 보살이 이 때문에
교만한 마음을 내어 그 밖의 대중 안에 머물러 있는 보살들을 업신여기니, 이런 일 때문에 부처님 도는 멀리 여의고 2승에 떨어지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갖가지 인연으로 이런 보살에 대해 “그는 바로 도둑이요 그는 바로 전다라 등이다”고 꾸짖으셨다. 경의 말씀과 같나니, 이들을 가까이하지 말아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멀리 떨어지는 법은 마음이 2승과 삼계를 여의는 것이니, 이것을 바로 진실로 멀리 떨어지는 법이라 한다. 마치 경에서 자세히 설명한 바와 같다. 이와 같은 갖가지 미세한 악마의 일을 알아차려서 멀리 여의어야 한다.
또 보살은 깊은 마음으로 위없는 도[無上道]를 얻으려 하나니, 깊은 마음[深心]이란 일심(一心)을 말한다. 존중하는 마음으로 깊이 부처님 도를 사랑하며 온갖 세간의 쾌락에서 벗어나 선지식을 친근해야 한다. 그것은 왜냐하면 두 가지의 인연이 있어 위없는 도를 얻기 때문이니, 첫째는 안[內]이요, 둘째는 바깥[外]이다.
안이란 바른 기억[正憶念]을 말하나니 모든 법을 생각하고 헤아리는 것이요, 밖이란 모든 선지식(善知識)을 말하나니 부처님께서는 그 밖의 다른 곳에서 갖가지로 선지식의 모양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수보리는 부처님께 “세존이시여, 어떤 분이 보살의 선지식인지요”라고 물었고, 부처님께서는 “모든 부처님과 큰 보살과 그리고 성문이 바로 보살의 선지식이며, 6바라밀 내지는 일체종지와 여(知)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 등의 모든 법도 역시 선지식이니라”고 대답하셨다.
법(法)은 그 일을 성취하게 하기 때문에 6바라밀 등의 모든 법을 말하여 선지식이라 한다. 세 종류의 성인2)은 이 6바라밀의 법으로써 보살이 받들어 행해 부처님이 될 수 있게 한다. 이 때문에 법(法)과 사람을 통틀어 선지식이라 한다.
【문】부처님과 보살과 6바라밀은 보살을 이룰 수 있게 하기 때문에 마땅히 선지식이라 할 수 있지만 소승의 도[小乘道]는 다르거늘 어떻게 선지식이 될 수 있는가?

【답】소승의 사람 중에도 전생에 부처님 도를 구했기 때문에 예리한 근기가 있다. 그가 비록 소승이라 하더라도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있으므로 대승을 이루어야 할 이를 보면 그에게 대승의 법을 설해 주나니, 부처님 은혜를 보답할 줄 알기 때문에 부처님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한다.
사리불(舍利弗) 같은 이는 60겁 동안 부처님 도를 구하다가 비록 물러나서 아라한이 되기는 했으나 역시 예리한 근기와 지혜로 모든 보살들을 위하여 대승을 설해 주고 있고, 수보리(須菩提)는 무쟁삼매(無諍三昧)를 행하면서 항상 자비심으로 중생들을 대하기 때문에 역시 보살들에게 대승의 법으로 교화하고 있다.
마하가섭(摩訶迦葉) 같은 이는 신통의 힘으로 그 몸을 유지하다가 미륵(彌勒)이 세간에 출현하시면 구족산(九足山)3)에서 나와 대중들을 위하여 도를 얻는 인연을 지어 주는 이다. 이와 같은 이들은 아주 많다.
【문】6바라밀은 온갖 법을 다 포섭하거늘 이제 무엇 때문에 따로 37품(品)을 말하고, 여(如)ㆍ법성(法性)ㆍ실제(實際)까지 말씀하시는가?
【답】6바라밀은 간략하게 설명한 것이요 4념처 등은 자세하게 설명한 것이다. 6바라밀을 해설하건대 6바라밀은 바로 보살이 처음 도(道)에 들어가는 작으면서도 먼 인연이요, 37품은 바로 가까운 인연이다.
6바라밀 가운데서도 선바라밀(禪波羅蜜)과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이 가장 큰 것이니, 비유하건대 마치 비록 별들이 있다 하더라도 해와 달이 가장 뛰어난 것과 같다.
이 두 가지 바라밀 가운데서도 4념처(念處)와 부처님의 10력(力)의 법이 가장 미묘하여 현재의 세상을 크게 이익되게 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도를 얻게 하기 때문이며, 지계(持戒)와 보시(布施) 등은 이것보다는 못하므로 따로 설명한다.
여(如) 등 무위(無爲)의 법은 진실이요 거짓이 아니기 때문에 보살의 일을 이룰 수 있으며, 4념처 등의 법은 이와 같은 여(如) 등의 법을 얻어 보살로 하여금 거짓된 법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선지식이라 한다.
또 이 6바라밀 등의 법은 부처님과 같아서 다름이 없으며 부처님께서는 현재도 역시 이 법으로써 사람들을 제도하나니,
이 때문에 ‘세존’이라 한다. 마치 세존의 말씀은 무너뜨릴 수 없는 것처럼 6바라밀 등에서 말하는 것도 역시 무너뜨릴 수 없나니, 이 때문에 “6바라밀이 세존이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도(道)이다’ 함은 이 도의 지름길[道徑]을 가서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 안에 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6바라밀에서 말한 바를 사람들이 헤아리고 생각하고 분별하면서 언제나 수행하여 큰 지혜를 얻게 하고 모든 세간의 무명(無明)을 떨쳐버리게 한다. 이 때문에 “6바라밀은 바로 큰 광명[大明]이요 큰 횃불[大炬]이며 지(智)요 혜(慧)이며 구제자(救濟者)며 귀의할 데[歸依處]요 섬[洲]이며, 이것은 궁극의 도[究竟道]이다”고 말하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과 같이 반야바라밀은 어머니요 다섯 가지 바라밀은 아버지이므로 한데 합쳐서 말하다 보니 “6바라밀은 바로 부모이다”고 한 것이다. 마치 6바라밀에서와 같이 4념처 등을 말한 것도 역시 이와 같다.
이 가운데서 “6바라밀 등의 법은 역시 시방 3세에 계시는 부처님의 부모이다”고 그 인연을 설하신 것이다.
이 6바라밀 등의 법은 바로 자기를 이익되게[自利] 하는 법이므로 수행하는 이는 6바라밀로 중생을 교화하고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려면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四攝法]으로 중생을 거두어 주어야 한다. 이 네 가지 거두어 주는 법의 뜻은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자기도 이롭게 하고 남도 이롭게 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6바라밀과 37품(品) 등의 모든 법은 “바로 세존이요 도(道)이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 때문에 보살이 만일 다른 이의 가르침에 따르지 않고자 하면, 다른 이가 가르친 이름에도 따르지 않고 자기 자신이 모든 법의 실상(實相)을 알아서 부처님 몸으로까지 변화되어 와서 말한다 해도 법상(法相)과 다르면 믿지도 않고 따르지도 않는다.
스스로가 보살의 도를 얻으면 점차로 모든 부처님 법을 두루 갖추게 되어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하고 중생을 성취시키면서 부처님의 도를 얻어 온갖 중생들의 의심을 끊어 줄 수 있으므로 만일 이것을 얻고자 하면 반야를 배워야만 한다. 이 반야바라밀에는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크고 작은 일마다 말하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728x90
반응형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