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112권
대보적경 제112권
실역(失譯)
송성수 번역
43. 보명보살회(普明菩薩會)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 대중 8천 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마하살도 만 6천 명이 있었으니, 그들 모두는 불퇴전[阿惟越致]보살로서 모든 불국토에서 모여왔으며 모두가 다 한 생이 지나면 최상의 바르고 참된 큰 도[無上正眞大道]를 이룰 이들이었다.
그때 세존께서 대가섭(大迦葉)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지혜에서 물러나거나 잃게 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법을 존중하지 않고 법사를 공경하지 않는 것이요, 받은 깊은 법을 숨기면서 다 말하지 않고, 법을 좋아하는 이에게 훼방을 부리는 것이며 모든 인연을 설명하면서 그의 마음을 무너뜨리는 것이요, 교만하여 자기만 높은 체하고 다른 사람은 낮춰보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지혜에서 물러나거나 잃게 되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 큰 지혜를 얻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언제나 법을 존중하고 법사를 공경하는 것이요, 들었던 법 그대로를 깨끗한 마음으로 널리 사람들에게 연설하면서 온갖 이름이나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이며 많이 듣는 것으로부터 지혜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부지런히 구하면서 게으르지 않음이 마치 머리를 태우는 불을 끄듯 하는 것이요 경을 들으면 외우고 지니면서 말씀대로 행하기를 좋아하며 말만을 따르지 않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큰 지혜를 얻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보리심을 잃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스승과 어른을 속인 뒤에 경법(經法)을 받으면서 공경하지 않는 것이요, 의심하거나 뉘우침이 없을 곳인데도 다른 이로 하여금 의심하고 뉘우치게 하는 것이며, 대승(大乘)을 구하는 이를 욕하고 비방하면서 그의
이름을 나쁘게 퍼뜨리는 것이요, 아첨과 바르지 못한 마음으로 사람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보리의 마음을 앓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태어날 때마다 보리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 도량(道場)이 저절로 앞에 나타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목숨을 잃게 될 인연이 있어도 거짓말을 하지 않거늘 하물며 실없이 웃는 것이겠느냐. 항상 정직한 마음으로 남들과 함께 일을 하면서 모든 아첨이나 바르지 못한 마음을 여의는 것이요, 모든 보살들에게 세존이라는 생각을 내면서 사방에 그의 이름을 칭송하는 것이며, 스스로 모든 소승의 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요, 교화할 중생을 모두 다 최상의 보리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태어날 때마다 보리심을 잃지 않고 나아가 도량이 저절로 앞에 나타나게 되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생긴 착한 법이 없어져 더욱 자라지 않게 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교만한 마음으로 순세파 외도[路伽耶:順世外道]의 경을 읽고 외우고 닦아 배우는 것이요, 이익을 탐내는 마음으로 모든 보시하는 이[檀越]에게 나아가는 것이며 보살을 미워하고 헐뜯는 것이요 아직 듣지 못했던 경은 거역하면서 믿지 않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생긴 착한 법이 사라져 더욱 자라지 않게 되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생긴 착한 법이 더욱 자라면서 없어지지 않게 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삿된 법을 버리고 바른 경전과 6바라밀과 보살의 법장(法藏)을 구하며 마음에 교만이 없고 모든 중생들에게 겸손하면서 자신을 낮추는 것이요, 법대로 보시를 얻으면서 분량을 알고 만족할 줄 알며, 모든 삿된 생활을 여의면서 성인의 성품[聖鐘]에 편히 머무르는 것이며, 다른 사람의 죄과를 들추어내지 않고 거짓이거나 진실이거나 간에 남의 단점을 구하지 않는 것이요, 만일 모든 법을 마음에서 통달하지 못했으면 이렇게 생각한다.
‘부처님 법은 한량없으므로 대중이 원하는 대로 베풀어 할 것이요 오직 부처님만이 아는 것이요 내가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니 부처님을 증명으로 삼아 거역하는 마음을 내지 않으리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생긴 착한 법이 더욱 자라면서 없어지지 않게 되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바르지 못한 마음이 있나니, 멀리 여의어야 하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바르지 못한 마음이라 하는가 하면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마음에 의혹과 뉘우침을 내는 것이요, 모든 중생에게 교만하면서 성을 내는 것이며, 다른 이의 이익에 질투하는 것이요, 보살을 꾸짖고 욕하면서 그 이름을 나쁘게 퍼뜨리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바르지 못한 마음이니, 멀리 여의어야 되느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정직한 마음의 모양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정직한 마음의 모양이라 하는가 하면 범한 여러 가지 죄는 끝내 감추어 두지 않고 다른 이 앞에서 들추어내며 마음에 번뇌가 없는 것이요, 설령 나라와 생명과 재물의 이익을 잃게 되는 이러한 급한 일이라 하여도 끝내 거짓말을 하지 않고, 그 밖의 온갖 나쁜 일도 말하지 않음이 없어야 하고 꾸짖고 욕하고 헐뜯고 때리고 속박하는 갖가지 상해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다만 스스로의 허물임을 책망할 뿐이요, 자신의 업보에 의한 것이므로 남에게 성을 내거나 원망하지도 않으면서 믿음으로 편히 머무르는 것이요, 만일 매우 깊고 믿기 어려운 부처님의 법을 듣게 되면 스스로 마음을 청정하게 하면서 모두 받아 지니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지닐 네 가지 정직한 마음의 모양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잘못된 모양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잘못된 모양이라 하는가 하면 경전을 읽고 외우면서 쓸모 없는 이론을 내어 그 법대로 행하지 않는 것이요, 스승과 어른에게 순종하지도 않고 공경하지도 않는 것이며,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남의 공양을 잃게 하고 스스로 본래의 서원을 어기면서 믿음 있는 보시[信施]를 받는 것이요, 착한 보살을 보고는 업신여기면서 공경하지 않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있는 네 가지 잘못된 모양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잘 따르는 모양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잘 따르는 모양이라 하는가 하면 아직 들어보지 못한 경을 들으면 곧 믿고 받아 말씀한 대로 수행하고 법(法)에 의지하면서 언설(言說)에 의지하지 않는 것이요, 스승의 가르침을 따라 그 뜻을 잘 알고 쉽게 말해주며 하는 일이 모두 착한 것이며 스승의 뜻을 잃지 않고
계율과 선정에서 물러나지 않으며 마음을 잘 다스려 공양을 받는 것이요 착한 보살을 보면 공경하고 좋아하며 착한 사람을 따라서 그 덕행(德行)을 본받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있는 네 가지 잘 따르는 모양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착오(錯誤)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착오라 하는가 하면 사람을 믿지 못하면서 그와 뜻을 같이 하니 그것이 바로 보살의 착오요, 받아들일 수 없는 중생에게 매우 깊은 법을 말하니 그것이 바로 보살의 착오며, 대승을 좋아하는 이에게 소승을 찬탄하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착오요, 보시를 행할 때에 다만 계율을 지닌 이에게 베풀고 착한 이만 공양할 뿐 나쁜 사람에게는 베풀지 않는 그것이 바로 보살의 착오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착오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바른 길[正道]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바른 길이라 하는가 하면 모든 중생들에게 그 마음이 평등한 것이요, 널리 중생을 교화하기를 평등하게 부처님의 지혜로써 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들에게 평등하게 설법하는 것이요, 널리 중생들로 하여금 똑같이 바른 행[正行]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지닐 네 가지 바른 길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선지식(善知識)이 아닌 사람과 네 가지 착한 벗이 아닌 사람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성문(聲聞)을 구하면서 다만 자기 이익만을 바라는 사람이요, 연각(緣覺)을 구하면서 적은 일만을 좋아하고 기뻐하는 사람이며, 외도의 경전 로가야비(路伽耶毘)를 읽으면서 화려한 말로 아름답게 꾸미는 것을 가까이 하는 사람이요, 다만 세간의 이익만을 더하고 법의 이익을 늘리지 않는 사람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있는 네 가지 선지식이 아니며 착한 벗도 아니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의 선지식이면서 네 가지의 착한 벗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와서 구하는 모든 이들이 바로 선지식이니 부처님 도(道)의 인연(因緣)이기 때문이요, 설법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식이니 지혜를 생기게 하기 때문이며, 다른 사람을 출가하게 하는 사람이 바로 선지식이니 착한 법을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요 모든 부처님․세존이 바로 선지식이나,
모든 불법을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의 네 가지 선지식이면서 네 가지 착한 벗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보살이 아니면서도 보살인 체하는 네 가지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이익을 탐내고 구하면서 법은 구하지 않는 것이요, 명예를 탐내고 구하면서 복덕은 구하지 않는 이며, 자신의 쾌락만을 탐내고 구하면서 중생을 구하지 않는 이요, 괴로움을 없애는 법으로써 무리들을 모으기만 하고 멀리 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이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아니면서도 보살인 체하는 네 가지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종류의 진실한 보살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종류라 하는가 하면 공을 믿고 이해하면서 역시 업보를 믿는 이요, 모든 법에 나가 없음을 알고 중생들에 대해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이며, 깊이 열반을 알고 중생들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이며, 깊이 열반을 좋아하면서 나고 죽음을 함께 하는 이요 짓고 행하는 보시는 모두 중생을 위할 뿐 그 과보를 구하지 않는 이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네 가지 진실한 보살의 복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큰 광[藏]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큰 광이라 하는가. 어떤 보살이 모든 부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요, 6바라밀과 그 이치를 듣고 이해하는 것이며, 장애 없는 마음으로 설법하는 이를 보는 것이요, 집착하지 않으면서 마음에 게으름이 없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있는 네 가지 큰 광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악마의 일[魔事]을 뛰어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가 법이라 하는가 하면 항상 보리의 마음을 버리거나 떠나지 않는 것이요, 모든 중생들에게 성을 내거나 방해함이 없는 것이며, 모든 지견(知見)을 깨닫는 것이요, 마음에 온갖 중생을 업신여기지 않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악마의 일을 뛰어넘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모든 선근을 포섭하는 네 가지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바르지 못한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아첨과 바르지 못한 마음을 여의는 것이요 모든 중생 가운데서 4섭법(攝法)을 행하면서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며 법을 구하기 위하여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는 것이요 모든 선근을 닦으면서 마음으로
싫증내거나 만족함이 없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모든 선근을 거두는 네 가지 법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에게는 네 가지 한량없는 복덕의 장엄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깨끗한 마음으로 법 보시[法施]를 행하는 것이요, 계율을 깨뜨리는 사람에 대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며, 모든 중생들 가운데서 보리심을 전파하고 찬탄하는 것이요, 모든 낮고 보잘것 없는 사람에게서 인욕을 닦아 익히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에게 있는 네 가지 한량없는 복덕의 장엄이니라.
또 가섭아, 보살이라 함은 다만 이름만으로 보살이 되는 것이 아니요 착한 법을 능히 행하고 평등한 마음을 행하여야 보살이라 하는 것이니라. 간략하게 말하면 서른두 가지 법을 성취해야 보살이라 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서른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항상 중생을 위하여 깊이 안락함을 구하는 것이요, 모두를 일체지(一切智) 안에 머무르게 하는 것이며, 마음으로 다른 사람의 지혜를 증오하지 않는 것이요, 교만을 깨뜨리고 부처님의 도를 깊이 좋아하는 것이며, 사랑하고 공경하면서 거짓이 없고 끝까지 서로가 친하여 사이가 두터운 것이요, 원수나 착한 이에게 그 마음이 동등해 열반까지에 이르는 것이며, 말할 때는 항상 웃음을 머금고 먼저 문안하며 인사하는 것이요, 하던 일은 끝내 그 중도에 그만두지 않는 것이며, 널리 중생을 위하여 평등하게 대비(大悲)를 행하는 것이며, 마음이 고달파 함이 없으면서 많이 듣고 싫증냄이 없는 것이니라. 자기 자신의 허물을 구하면서 다른 이의 단점을 말하지 않는 것이요, 보리심으로 모든 위의(威儀)를 행하는 것이며, 행한 보시에서 그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이요, 태어난 곳에 의거하지 않고서 계율을 행하는 것이며 모든 중생 가운데서 걸림 없는 인욕을 행하는 것이요 모든 선근을 닦기 위하여 부지런히 정진을 행하는 것이며 생멸을 여의고 색욕이 없으면서[離生無色] 선정을 일으키는 것이요 방편의 지혜를 행하는 것이며 4섭법(攝法)에 따르는 것이요 착하거나 나쁜 중생 모두에게 마음이 인자하면서 두려워함이 없는 것이니라. 일심으로 법을 들으면서 마음은 집착하지 않는 것이요, 마음이 세간의 많은 일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며 소승을 탐내지 않는 것이요, 대승 가운데서 항상 큰 이익을 보는 것이며 나쁜 벗을 여의는 것이요,
착한 벗을 가까이 하는 것이며, 네 가지 청정한 행[梵行]을 성취하는 것이요, 다섯 가지 신통에 유희하는 것이며 항상 진실한 지혜에 의지하는 것이요, 모든 중생들의 삿된 행이거나 바른 행이거나 간에 다 같이 버리지 않는 것이며, 말은 항상 분명하여 진실한 법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요, 모든 일에서는 보리를 으뜸으로 삼는 것이니라. 이와 같아서, 가섭아, 만일 사람에게 이 서른 두 가지 법이 있으면 보살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보살의 복덕은 한량없고 그지없나니, 비유의 인연으로써 알아야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모든 대지(大地)를 대중들이 이용하지만 분별하는 마음도 없고 그 과보를 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처음 발심 중생들이 모두 이익을 받고 있는데도 마음이 분별함도 없고 그 과보를 구하지도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물은 모든 곡식과 약나무를 더욱 자라게 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자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자비로 모든 중생을 덮어주면서 모든 착한 법을 더욱 자라게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불은 모든 곡식과 과실을 성숙시키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착한 법을 성숙시키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온갖 바람은 모든 세계를 성립시키는 것처럼, 보살의 방편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부처님 법을 성립시키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달이 처음 생겨날 때에 광명과 형색이 날마다 차츰차츰 자라는 것처럼 보살의 청정한 마음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온갖 착한 법이 날마다 차츰차츰 자라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해가 처음 떠오르면 일시에 광명을 놓으면서 두루 온갖 중생을 밝게 비추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지혜의 광명을 놓으면서 일시에 온갖 중생을 두루 비추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사자는 짐승의 왕이어서 가는 데마다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깨끗하게
계율을 지니고 지혜가 진실한지라 머무르는 데마다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잘 길들인 코끼리는 큰 일을 능히 해내면서도 몸이 고달프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마음이 잘 조복되었기 때문에 중생들을 위하여 큰 이익을 지으면서도 마음에 고달픔이 없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모든 연꽃은 물 속에 있으면서도 더러운 물에 물들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세간에 살고 있으면서도 세간 법에 물들지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나무를 베었다 하더라도 뿌리가 있으면 도로 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방편의 힘 때문에 비록 번뇌[結使]를 끊었다 하더라도 선근의 사랑이 있는지라 삼계에 도로 태어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모든 지방에서 흐르는 물이 큰 바다에 들어가면 모두가 한 맛이 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갖가지 문으로 모든 선근을 쌓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므로 모두가 한 맛이 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수미산왕은 도리천(忉利天)의 모든 하늘과 사천왕(四天王)이 모두 의지하여 머무는 것처럼, 보살의 보리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일체지[薩婆若]가 의지하여 머무르는 곳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큰 나라의 왕이 신하의 힘 때문에 나라의 일을 잘 이룩하는 것처럼, 보살의 지혜도 역시 그러하여 방편의 힘 때문에 모든 불사(佛事)를 이룩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하늘이 청명할 때 깨끗하여 구름이 없으므로 비가 올 조짐은 없는 것처럼, 견문이 적은 보살에게 법 비를 내릴 조짐이 없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하늘에 구름이 끼었을 때에는 반드시 비가 내려서 중생을 충족시키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대비(大悲)의 구름으로부터 큰 법의 비를 일으켜서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전륜왕(轉輪王)이 출현하는 곳마다 7보(寶)가 있는 것처럼 가섭아, 그와 같아서 보살이 나올 때에는 서른 일곱 가지 품(品)이 세간에 나오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니주(摩尼珠)가 있는 곳마다 한량없는 금․은 등의 값진 보배가 있게 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출현 할 때마다 한량없는 백천의 성문과 벽지불의 보배가 있게 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도리천의 모든 하늘들은 똑같은 동산에 들어가서 쓰는 물건도 모두가 똑같은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진실하고 깨끗한 마음 때문에 중생들 가운데서 평등하게 교화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주술(呪術)과 약의 힘이 지닌 독은 사람을 해치지 않는 것처럼, 보살의 번뇌[結]의 독도 역시 그와 같아서 지혜의 힘 때문에 나쁜 길[惡道]에 떨어지지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모든 큰 성(城) 안에 버려져 있는 더러운 분뇨를 사탕수수 밭이나 포도 밭 안에 넣어 주면 이익이 되는 것처럼, 보살의 번뇌[結使]도 역시 그와 같아서 남아있는 번뇌는 모두가 이익이 되나니, 일체지[薩婆若]의 인연이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보살로서 이 『보적경(寶積經)』을 배우고자 하는 이는 마땅히 모든 법을 바르게 관[正觀]하기를 닦아 익혀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바르게 관한다 하는가 하면 이른바 진실하게 모든 법을 사유(思惟)하는 것이니라. 진실하고 바르게 관한다 함은 나와 사람과 중생과 수명을 관찰하지 않나니, 이것을 중도(中道)의 진실하고 바른 관[眞實正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진실한 관[眞實觀]이라 함은 물질[色]은 항상 있는 것[常]도 아니고 덧없는 것[無常]도 아니라고 관찰하며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도 역시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덧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나니, 이것을 중도의 진실하고 바른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진실한 관이라 함은 땅은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덧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며 물․불․바람도 역시 항상 있는 것도 아니고 덧없는 것도 아니라고 관찰하나니, 이것을 중도의 진실하고 바른 관이라 하느니라. 그 까닭은 항상 있다[常]는 것도 이는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요 덧없다[無常]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기 때문이니라. 항상 있고 덧없는 것 가운데는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밝음[明]도 없고 앎[知]도 없나니,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나[我] 이것도 한쪽의 치우친 소견이요, 나 없음[無我]의 이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어서, 나와 나 없음의
이 가운데에는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밝음도 없고 알음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마음이 진실이라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요, 마음이 진실이 아니라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어서, 만일 심식(心識)이 없으면 역시 심수(心數)의 법도 없는 것이니,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그와 같이 착한 법과 착하지 않은 법, 세간의 법과 출세간법[出世法], 죄가 있는 법과 죄가 없는 법, 번뇌[漏] 있는 법과 번뇌가 없는 법, 함[爲]이 있는 법과 함이 없는 법, 나아가 때[垢]가 있는 법과 때가 없는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두 쪽의 치우친 소견을 여의면서 받을 수도 없고 말로 설명할 수도 없나니,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있다는 것도 한쪽으로 치우친 소견이어서 있고 없고 하는 중간에는 빛깔도 없고 알음도 없나니,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내가 말한 12인연(因緣)에 무명(無明)은 지어감[行]에 반연하고, 지어감은 의식[識]에 반연하며, 의식은 정신과 물질[名色]에 반연하고, 정신과 물질은 여섯 감관[六入]에 반연하며, 여섯 감관은 접촉[觸]에 반연하고, 접촉은 느낌[受]에 반연하며, 느낌은 욕망[愛]에 반연하고, 욕망은 취함[取]에 반연하며, 취함은 존재[有]에 반연하고, 존재는 태어남[生]에 반연하며, 태어남은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함[老死憂悲苦惱]에 반연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인연은 다만 큰 고통의 더미[大苦聚]만을 쌓고 이루게 되느니라. 만일 무명이 사라지면 지어감도 사라지고, 지어감이 사라지면 의식도 사라지며, 의식이 사라지면 사람과 물질도 사라지고, 정신과 물질이 사라지면 여섯 감관도 사라지며, 여섯 괌관이 사라지면 접촉도 사라지고, 접촉이 사라지면 느낌도 사라지며, 느낌이 사라지면 욕망도 사라지고, 욕망이 사라지면 취함도 사라지며, 취함이 사라지면 존재도 사라지고, 존재가 사라지면 태어남도 사라지며, 태어남이 사라지면 이와 같은 늙고 죽고 근심하고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큰 고통이 모두 사라지느니라. 명(明)과 무명(無明)은 둘이 아니고 구별도 없나니, 이와 같이 알면 이것을 중도로서의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그와 같아서, 지어감과 지어감이 아닌 것과, 의식과 의식되는 대상[所識]과, 정신과 물질로서 볼 수 있는 것과,
모든 여섯 감관과 여섯 가지 신통과 접촉과 접촉하는 대상[所解]과, 느낌과 느낌의 사라짐과, 욕망과 욕망의 사라짐과, 취함과 취함의 사라짐과, 존재와 존재의 사라짐과, 태어남과 태어나지 않음과, 늙어 죽음과 늙고 죽음의 사라짐 등의 이 모두는 둘이 아니고 구별도 없나니, 이와 같이 알면 이것을 중도로서 모든 법의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진실한 관이라 함은 공하기 때문에 모든 법으로 하여금 공하게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법의 성품이 저절로 공할 뿐이며, 모양이 없기 때문에 법으로 하여금 모양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법이 저절로 모양이 없을 뿐이며, 바람[願]이 없기 때문에 법으로 하여금 바람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법이 저절로 바람이 없을 뿐이며, 일어남이 없고 생김이 없고 나가 없고 취함이 없고 성품이 없기 때문에 법으로 하여금 일어남이 없고 취함이 없고 성품이 없게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법이 저절로 일어남도 없고 취함도 없고 성품도 없을 뿐이니, 이렇게 관찰하면 이것을 진실한 관이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사람이 없기 때문에 공하다 하는 것이 아니요 다만 공이 저절로 공할 뿐이니라. 과거도 공하고 미래도 공하며 현재도 공하나니, 마땅히 공에 의지해야 하고 사람에 의지하지 말 것이니라. 만일 공을 얻게 되어 곧 공에 의지한다면 이것은 부처님 법에서 물러나고 떨어지는 것이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차라리 나라는 소견[我見]을 일으켜서 수미산만큼 쌓을지언정 공하다는 소견[空見]으로써 뛰어난 체[增上慢]하지 말지니라. 그 까닭은 모든 소견은 공으로써 해탈하게 되는데 만일 공하다는 소견을 일으키면 없앨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의사가 약을 주어서 병을 움직이게 할 때에 이 약이 속에 있으면서 나오지 않으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렇게 병든 사람이 과연 나을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약이 나오지 않으면 그 병은 더욱 더할 것이옵다.”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온갖 모든 견해는 오직 공으로만 없앨 수 있을 뿐인데 만일 공하다는 소견을 일으킨다면 제거될 수가 없느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을 두려워하여 슬피 부르짖고 가슴을 치면서 ‘나는 허공을 버리겠다’라고 말한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허공이란 버리거나 여읠 수 있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만일 공한 법을 두려워한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미쳐 날뛰면서 정신을 잃은 이’라고 말할 것이니라. 그 까닭은 항상 허공 가운데 있으면서도 허공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니라. 비유하면 마치 그림 그리는 사람이 제 손으로 야차귀(夜叉鬼)의 형상을 그려놓고 그것을 본 뒤에 두려워 기절을 하면서 땅으로 넘어지는 것과 같나니, 온갖 범부들도 역시 그와 같아서 자기 자신이 빛깔․소리․냄새․맛․접촉을 지었기 때문에 나고 죽음에 오가면서 모든 고통을 받고 있으면서도 자기 자신이 깨닫지 못하느니라. 마치 요술쟁이가 요술로 사람을 만들어 놓고서 도리어 자신이 잔인하게 없애는 것처럼, 도를 수행하는 비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어떤 관(觀)한 법이 모두 공하고 모두 고요하여 견고함이 없기 때문에 이 관도 역시 공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비벼대면 곧 불이 일어나 도리어 그 나무를 태우는 것처럼, 가섭아, 그와 같아서 진실한 관 때문에 성스런 지혜가 생기고 성스런 지혜가 생긴 뒤에는 도리어 그 진실한 관을 태우느니라. 비유하면 마치 등불을 켜면 온갖 어두움이 모두 저절로 없어져서 그 어두움은 어디서 온 데도 없고 가도 가는 데가 없어서 동쪽에서 온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역시 남쪽․서쪽․북쪽과 네 사이 방향과 위와 아래에 가 닿지도 않으며 저것으로부터 오지 않았고 간다 하여도 역시 가 닿지도 않은 것과 같으니라. 그리고 이 등불은 ‘나는 어두움을 없애버렸다’라고 하는 생각도 없으며 다만 등불로 인하여 법에 저절로 어두움이 없어졌을 뿐이니, 밝음과 어두움은 다 같이 공하여서 짓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느니라. 그와 같아서 가섭아, 진실한 지혜가 생기면 무지(無智)는 이내 사라지는 것이니, 지혜와 무지의 이 두 가지 모양은 다 같이 공이어서 짓는 것도 없고 취하는 것도 없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천 년 동안 어두웠던 방이 아직 광명을 본 일이 없었는데, 만일 등불을 밝히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어두움은 ‘나는 오랫동안 여기에 있었으므로 떠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등불을 켜게 되면 이 어두움은 세력이 없어져서 떠나고 싶지 않아도 반드시 없어져 버립니다.”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백천만 겁 동안 오래도록 익힌 번뇌[結]와 업(業)도
하나의 진실한 관[實觀]으로써 이내 모두 소멸되는 것이니라. 그 등불이란 바로 성스런 지혜이며 그 어두움이란 바로 모든 번뇌와 업인 것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종자가 허공에서 나서 자라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던 것처럼, 보살이 증득함을 취하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부처님 법을 더욱 자라게 하는 데에 그런 경우는 끝내 없었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종자가 좋은 밭에 있으면 잘 나서 자라는 것처럼, 가섭아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모든 번뇌가 있어도 세간의 법을 여의어 부처님 법을 기르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고원 지대나 육지에서는 연꽃이 나지 않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함이 없는[無爲] 가운데서는 부처님 법은 생기지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낮고 축축한 진창 속에서 비로소 연꽃이 나는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나고 죽은 진창과 지옥에 떨어질[邪定聚] 중생들이 있는 데서 비로소 부처님 법이 생기게 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사방의 큰 바다에 생소(生蘇)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살의 유위(有爲)의 선근이 매우 많아서 한량없는 것이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하나의 털을 백 개로 쪼갠 뒤에 그 쪼갠 한 개의 털로 바닷물을 한 방울 적신 것과 같아서 온갖 성문(聲聞)의 유위의 선근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작은 겨자씨의 구멍에 나 있는 허공과 같아서 모든 성문의 유위의 지혜도 역시 그와 같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시방의 허공이 한량없고 그지없는 것처럼 보살의 유위의 지혜가 매우 많고 그 힘이 한량없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찰리 대왕(刹利大王)의 대부인(大夫人)이 가난하고 천한 이가 통(通)하여 아이를 배어 아들을 낳았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는 왕자라고 하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나의 성문 대중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같이 증득하여 법 성품으로써 났다 하더라도 여래의 진실한 불자(佛子)라 하지는 못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찰리
대왕과 심부름하는 이와 통하여 아이를 밴 뒤에 아들을 낳았다면 비록 하천한 성씨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왕자라고 할 수 있는 것처럼, 처음 발심한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아직 복덕과 지혜를 갖추지 못하였다 하더라도 나고 죽음에 오가면서 그의 힘에 따라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므로 이것은 여래의 진실한 불자라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전륜성왕에게 천 명의 아들이 있지만 아직 성왕으로서의 모습을 갖춘 이가 한 사람도 없다면 성왕은 그들에게 아들이라는 생각을 내지 않는 것처럼, 여래도 역시 그러하여 비록 백천만억의 성문 권속들이 둘러싸고 있다손 치더라도 보살이 없으면 여래는 그들에게 제자라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전륜성왕의 대부인이 아이를 밴 지 7일이 되어 이 아들이 전륜왕의 모습을 갖추게 되면 모든 하늘들이 존중하게 되고 그 밖의 모든 아들들이 갖춘 몸과 힘보다 뛰어나게 되나니, 그 까닭은 이 태 안의 왕자는 반드시 높은 자리를 이어받고 성왕의 종성을 잇게 되기 때문이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처음 발심한 보살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아직 모든 보살의 근본을 갖추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마치 태 안의 왕자를 모든 하늘 신과 왕들이 깊은 마음으로 존중하듯이 8해탈(解脫)을 얻은 큰 아라한들보다 뛰어나느니라. 그 까닭은 이러한 보살은 높은 자리를 이어받고 부처님의 성품을 끊지 않는 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한 유리주(琉璃珠)는 수정(水精)보다 수미산만큼 더 뛰어난 것처럼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처음 발심할 때에 모든 하늘과 세간 사람들 모두가 예배하고 공경해야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달이 처음 생길 때에는 많은 사람들의 사랑하고 공겸함이 둥근 달보다도 더한 것처럼, 가섭아, 나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보살을 사랑하고 공경함이 여래보다 더할 것이니라. 그 까닭은 모든 보살로 인하여 여래가 나오기 때문이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어리석은 사람은 달을 버리고서 별을 섬기고 예배하니 지혜 있는 이는 그렇지 않아서 끝내 보살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거늘 수행하는 이로서 성문을 예배하고 공경하겠느냐. 가섭아, 비유하면 모든 천상이나 인간의 세간에서는 거짓 구슬[僞珠]을 잘 다듬더라도 유리(琉璃)의 보배구슬이 되게 할 수는 없는 것처럼, 성문을 구하는 사람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든 계육을 지녀 선정을 성취하더라도 끝내 도량에 앉아 위없는 도는 이룰 수 없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유리주를 다듬어 백천의 한량없는 성문과 벽지불의 보배를 나오게 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다시 대가섭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은 언제나 중생들의 이익을 구해야 하고 또 온갖 복덕과 선근을 바르게 닦아 익히면서 평등한 마음으로 모든 중생에게 베풀어주며, 얻게 된 지혜 약[智藥]으로 시방에 두루 이르러 중생을 치료하여 모두 완전히 낫게 하여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완전히 낫게 하는 지혜 약이라 하는가. 부정관(不淨觀)으로 탐욕과 음행을 다스리고 자심관(慈心觀)으로 성냄을 다스리며 인연관(因緣觀)으로 어리석음을 다스리고 행공관(行空觀)으로 모든 허망한 소견을 다스리며 무상관(無相觀)으로 모든 기억과 분별과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무원관(無願觀)으로 온갖 삼계(三界)를 벗어나는 소원을 다스리느니라.
네 가지 뒤바뀜이 아닌 것으로 온갖 뒤바뀜[顚倒]을 다스리는 것이니, 모든 유위(有爲)는 모두 다 덧없다는 것으로, 덧없는 가운데 있으면서 항상하다고 헤아리는 뒤바뀜을 다스리고, 유위의 고통으로, 모든 고통
가운데 있으면서 즐겁다고 헤아리는 뒤바뀜을 다스리며, 나[我]가 없는 법으로, 나 없는 가운데 있으면서 나라고 헤아리는 뒤바뀜을 다스리고, 열반의 고요함으로, 청정하지 않은 것 가운데 있으면서 청정하다고 헤아리는 뒤바뀜을 다스리는 것이니라.
4념처(念處)로써 모든 의지하고 기대는 몸[身]과 느낌[受]과 마음[心]과 법(法)을 다스리는 것이니라. 수행하는 이가 몸을 관찰해서 몸의 모습을 따라[順身相觀]하여 나라는 소견[我見]에 떨어지지 않고 느낌의 모습을 따라[順受相觀]하여 나라는 소견에 떨어지지 않으며 마음의 모습을 따라 관[順心相觀]하여 나라는 소견으로 나라는 소견에 떨어지지 않고 법의 모습을 따라[順法相觀]하여 나라는 소견에 떨어지지 않는 것이니, 이 4념처로써 온갖 몸․느낌․마음․법을 싫어하면서 열반의 문을 여는 것이니라.
4정근(正勤)으로 이미 생긴 착하지 않는 법은 잘 끊고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하지 않은 법은 일어나지 않게 하며 아직 생기지 않은 착한 법은 모두 생기게 하고 이미 생긴 착한 법은 더욱더 자라게 하는 것이니, 요약하면 온갖 모든 착하지 않은 법은 끊어 없애면서 온갖 모든 착한 법을 성취하는 것이니라.
4여의족(如意足)으로 몸과 마음의 번뇌[麤重]를 다스리면서 몸의 온갖 것을 무너뜨리고 뜻대로 되는 자재한 신통을 얻게 하는 것이요, 5근(根)으로써는 믿음이 없고 게으르고 기억을 잃고 마음이 어지럽고 지혜가 없는 중생을 다스리는 것이며, 5력(力)으로 모든 번뇌의 힘을 막는 것이요, 7각분(覺分)으로 모든 법 안의 의심하고 뉘우치고 잘못되는 것을 다스리는 것이며 8정도(正道)로써는 삿된 도[邪道]에 떨어진 모든 중생들을 다스리는 것이니라. 가섭아, 이것이 보살이 병을 고치게 하는 지혜 약인 것이니, 보살은 항상 부지런히 닦아 익히면서 행해야 하느니라.
또 대가섭아, 염부제(閻浮提) 안의 모든 의사 가운데서는 기역(耆域)의왕이 맨 첫째가는데 가령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중생들이 모두가 기역과 같다 하여도 만일 어떤 사람이 마음 속에 있는 번뇌와 삿된 소견과 의심하고 뉘우치는 병에 쓰는 약을 묻는다면 오히려 대답할 수조차 없거늘 하물며 다스릴 수 있겠느냐. 보살은 그 가운데서 이렇게 생각해야 한다.
‘나는 끝내 세간의 약으로는 만족하지 못한다. 나는 마땅히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의 약을 구하고 익혀야 하며 또한
온갖 선근과 복덕을 닦아야 한다.’
이러한 보살이라야 지혜 약을 얻은 뒤에 시방에 두루 이르러서 마침내 온갖 중생을 치료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보살이 세간을 벗어나는 지혜 약이라 하는가 하면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기는 줄 알고, 모든 법에는 나도 없고 사람도 없음을 믿으며 또한 중생과 수명이 없다는 지견(知見)으로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으며 나와 내 것이 없다고 믿고 이해하여 통달하면서 공하여 얻을 바 없는 데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부지런히 더욱 정진하면서 마음의 모양을 구하는 것이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마음을 구한다.
‘어떤 것이 마음인가, 탐내는 것인가, 성을 내는 것인가, 어리석은 것인가, 지나갔거나 아직 오지 않았거나 지금 있는 것인가.’
만일 마음이 지나갔다면 곧 그것은 다하여 없어졌고 만일 마음이 아직 오지 않았다면 아직 생기지도 않았고 아직 이르지도 않았으며 만일 마음이 지금 있는 것이라면 머무르는 것이 없나니, 이 마음은 안도 아니요 바깥도 아니요 또한 중간도 아니며 이 마음은 빛깔도 없고 형상도 없고 대상도 없고 인식하는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고 머무름도 없으며 처소도 없느니라. 이러한 마음은 시방 3세의 온갖 모든 부처님도 이미 보지 못하였고 지금도 보지 못하며 장차도 보지 못할 것이니라. 만일 모든 부처님께서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볼 수 없는 것이라면 어떻게 있다 할 수 있겠느냐. 다만 뒤바뀐 생각 때문에 마음으로 모든 법의 갖가지 차별을 내는 것이니, 이 마음은 마치 요술과 같아서 기억하고 생각하고 분별하는 까닭에 갖가지 업(業)을 일으키고 갖가지 몸을 받는 것이니라.
또 대가섭아, 마음이 가는 것은 마치 바람과 같나니 잡을 수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흐르는 물과 같나니 나고 없어지면서 머무르지 않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등불의 불꽃과 같나니 뭇 인연으로 존재하기 때문이요, 이 마음은 마치 번개와 같나니 생각생각마다 소멸하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번뇌[客塵]로 더럽혀지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원숭이와 같나니 여섯 가지 욕망[六欲]을 탐내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그림 그리는 이와 같나니 갖가지 업의 인연을 일으키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일정하지 않나니 갖가지 모든 번뇌를 따르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대왕(大王)과 같나니 온갖
법에서 뛰어난 주인이기 때문이며, 마음은 항상 혼자 가면서 둘이 없고 짝도 없나니 두 마음이 한때에 있을 수 없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원수와 같나니 모든 고뇌와 함께 하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미친 코끼리가 모든 흙으로 만든 집을 밟는 것과 같나니 모든 선근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마치 낚시를 무는 것과 같나니 괴로움 가운데서 즐겁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요, 이 마음은 마치 꿈과 같나니 나 없는 가운데서 나라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쉬파리와 같나니 깨끗하지 못한 것 가운데서 깨끗하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요, 마음은 마치 나쁜 도둑과 같나니 갖가지로 몸에 고통을 주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나쁜 귀신과 같나니 사람의 틈[便]을 엿보기 때문이요, 마음은 항상 높고 낮고 하나니 탐욕과 성냄에 무너지기 때문이며, 마음은 마치 도적과 같나니 온갖 선근을 빼앗아 가기 때문이니라. 마음은 항상 빛깔[色]을 탐내나니 마치 불나방이 불에 몸을 던지는 것과 같고, 마음은 항상 소리[聲]를 탐내나니 마치 군사들이 오랫동안 행군(行軍)하면서 좋은 북소리를 즐기는 것과 같으며, 마음은 항상 내음[香]을 탐내나니 마치 돼지가 깨끗하지 못한 곳에 누워 있으면서 좋아하는 것과 같고, 마음은 항상 맛[味]을 탐내나니 마치 어린 여인이 맛있는 음식에 집착한 것과 같으며, 마음은 항상 접촉[觸]을 탐내나니 마치 파리가 기름에 달라붙은 것과 같으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이 마음의 모양을 구한다 하여도 얻을 수 없느니라. 만일 얻을 수 없다면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요,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라면 곧 3세를 벗어난 것이며, 벗어난 것이라면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며, 있는 것도 아니요 없는 것도 아니라면 곧 그것은 일어나지도 않으며, 만일 일어나지도 않는 것이라면 곧 그것은 성품이 없느니라. 만일 성품이 없다면 곧 그것은 생김이 없고, 생김이 없다면 곧 그것은 소멸함도 없으며, 소멸함이 없다면 곧 여읠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다면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나는 것도 없으며, 만일 오는 것도 없고 가는 것도 없고 물러나는 것도 없고 나는 것도 없다면, 행하는 업이 없을 것이요, 행하는 업이 없다면 곧 그것은 함이 없는[無爲] 것이니라. 만일 함이 없다면 바로 온갖 모든 성스런 근본이니, 이 안에서는 계율을 지닐 것도 없고 계율을 깨뜨릴 것도 없으며, 만일 계율을 지닐 것도 없고
계율을 깨뜨릴 것도 없다면 이것은 곧 행(行)도 없고 행이 아닌 것도 없으며, 만일 행도 없고 행이 아닌 것도 없으면 그것은 곧 마음도 없고 심수의 법[心數法]도 없느니라. 만일 마음과 심수의 법이 없다면 곧 업도 없고 업보(業報)도 없으며, 업도 없고 업보도 없다면 괴로움과 즐거움도 없으며, 괴로움과 즐거움도 없다면 곧 그것은 성스런 성품[聖性]이니, 이 가운데서는 업도 없고 업을 일으키는 이도 없으며, 몸의 업[身業]도 없고 입의 업[口業]도 없고 뜻의 업[意業]도 없으며, 이 가운데는 상․중․하의 차별도 없느니라.
성스런 성품은 평등하여 마치 허공과 같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차별이 없고 온갖 법이 평등하여 한 맛[一味]이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멀리 여의어서 몸과 마음의 모양을 떠났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온갖 법을 여의어서 열반을 따르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깨끗하여 온갖 번뇌의 때[垢]를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나가 없어서 나와 내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높낮이가 없어서 평등으로부터 생겼기 때문이니라. 이 성품은 진실한 이치[眞諦]며 제일 가는 이치[第一義諦]이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다함이 없나니 마침내 생기지 않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항상 머무르나니 모든 법이 항상 있으면서 여(如)하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편안하고 즐겁나니 열반을 첫째로 삼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깨끗하나니 온갖 모양을 여의었기 때문이요, 이 성품은 나가 없나니 나를 구하여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성품은 진실하고 깨끗하나니 본래부터 마지막까지 깨끗하기 때문이니라.
또 대가섭아, 너희들은 스스로 안[內]을 관찰하여서 밖으로 내닫지 말 것이니라. 그러하느니라. 대가섭아, 장차 오는 세상의 비구들은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듯 할 것이니라. 어떻게 비구들이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듯 한다고 하느냐 하면,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흙덩이를 개에게 던지면 개는 곧 그 사람은 버리고서 흙덩이만 쫓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니라. 그와 같아서 가섭아, 어떤 사문이나 바라문이 좋은 빛깔과 소리와 냄새와 맛과 접촉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한적한 곳에서 벗이 없이 혼자 있고 대중이 시끄러운 곳도 여의고 몸으로 5욕(欲)을 여의면서도 마음은 버리지 못하고 있나니, 이 사람은
때때로 혹 좋은 빛깔․소리․냄새․맛․접촉을 생각하기도 하여 마음으로 탐착하고 좋아하면서 안[內]을 관찰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왜 빛깔․소리․냄새․맛․접촉을 여의어야 함을 알지 못한다. 모르기 때문에 때로 성이나 읍이나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있는 데로 오게 되면 도로 좋은 빛깔․소리․냄새․맛․접촉 때문에 5욕(欲)의 속박을 당하며,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세속의 계율[俗戒]을 지녔기 때문에 죽은 뒤에 천상에 태어났으나 또 천상에서도 5욕에 얽매이기 때문에 천상에서 죽으면 역시 네 가지 악한 세계인 지옥․아귀․축생․아수라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게 되나니, 이것을 비구가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듯 한다 하느니라.
또 대가섭아, 어떻게 하면 비구가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지 않는다고 하는가. 만일 어떤 비구가 남에게 욕설을 들으면서도 욕설로 답하지 않으며 때리고 해치고 성을 내고 헐뜯어도 역시 그에게 갚지 않으면서 다만 스스로 안에서 관찰하여 그의 마음을 다스리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욕설을 퍼붓는 이는 누구고 받는 이는 누구이며 때리고 해치고 헐뜯고 성내는 이는 또한 누구인가.’
이것을 비구가 마치 개가 흙덩이를 쫓아가듯 하지 않는다 하느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마치 잘 길들일 줄 아는 마부는 말이 사나운데도 잘 다스리는 것처럼 수행하는 이도 역시 그러하여 마음이 외부로 향하더라도 곧 거두어서 방일하지 않게 하느니라.
가섭아, 마치 목이 막히면 곧 죽게 되는 것처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온갖 견해 가운데서 오직 나라는 견해[我見]가 있기만 하면 즉시 지혜의 목숨이 끊어지게 되느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속박 당할 때마다 벗어나려 하는 것처럼, 가섭아, 그와 같이 마음이 집착하는 것을 마땅히 벗어나려 하여야 하느니라.
또 대가섭아, 출가(出家)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깨끗하지 않은 마음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로가야(路伽耶) 등 외도의 경서(經書)를 읽거나 외우는 것이요, 둘째는 좋은 옷과 발우 등을 많이 저축하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견고한 속박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견해의 속박[見縛]이요,
둘째는 이익의 속박[利養縛]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의 장애 되는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속인을 가까이 하고 사귀는 것이요, 둘째는 착한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는 두 가지 때[垢]가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때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번뇌를 참고 받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보시하는 이[檀越]를 탐내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서리와 우박이 있어서 모든 착한 뿌리를 무너뜨리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바른 법을 부수고 거역하는 것이요, 둘째는 계율을 깨뜨리고서 남의 믿음 있는 보시[信施]를 받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 두 가지 종기가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다른 이의 허물을 엿보는 것이요, 둘째는 스스로 그의 죄를 덮어두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불에 타는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때[垢]있는 마음으로 법의(法衣)를 받아 입는 것이요, 둘째는 계율을 지니는 착한 사람의 공양을 받는 것이니라.
또 출가한 사람에게는 두 가지 병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증상만(增上慢)을 품으면서 마음을 다스리지 않는 것이요, 둘째는 다른 사람이 대승의 마음을 내는 것을 무너뜨리는 것이니라.
또 대가섭아, 사문(沙門)에는 네 부류의 사문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부류의 사문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형상과 의복만의 사문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위의로 속이는 사문이라 하는가 하면 어느 한 사문이 몸의 가고 서고 앉고 눕는 네 가지의 위의가 있고 한 마음으로 조용하면서 의젓하여 모든 맛있는 음식을 끊고 네 가지 성스런 성품[四聖種]을 닦으며 대중의 모임을 멀리 여의고 집이나 시끄러운 데를 떠나 있으며 말이 부드러운 등의
이러한 법을 행하기는 하나 모두가 그것은 거짓이며 착하고 깨끗하지 않으면서 공한 법에서 얻는 것이 있고, 얻을 것이 없는 법에서 두려운 마음을 내는 것이 마치 깊은 데에 임한다는 생각과도 같으며, 공을 말하는 비구에게는 원수라는 생각을 내는 사람이니, 이것을 위의로 속이는 사문이라 하느니라.
무엇을 명성을 구하는 사문이라 하는가. 어느 한 사문이 나타나는 인연으로 계율을 지니면서 자기의 힘으로 읽고 외운다 함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려 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견문이 많다 함을 알게 하려 하며 자기의 힘으로 혼자 한적한 데에 있으면서 사람들에게 아련야(阿練若)에 있음을 알게 하려 한다. 욕심이 적어서 만족할 줄 알고 멀리 여의는 행[遠離行]을 행하나 다만 사람들이 알아주기를 원하여 싫증내어 여의는 것도 아니며 고요함을 위해서도 아니고 도를 얻기 위해서도 아니며 사문이나 바라문의 과위[果]를 위해서도 아니고 열반을 위해서도 아니다. 이것을 이름하기를 구하는 사문이라 하느니라.
다시 가섭아, 어떤 이를 진실로 수행하는 사문이라 하는가 하면 어느 한 사문은 몸과 목숨도 탐내지 않는데 하물며 이익이겠느냐. 모든 공하고 모양이 없고 구함이 없음을 듣고 마음으로 통달하여, 들은 대로 따라서 수행하면서 열반을 위하여 청정한 행[梵行]을 수행하지도 않거든 하물며 삼계(三界)이겠느냐. 오히려 공하고 나 없다는 견해조차도 일으키기를 좋아하지 않거늘 하물며 나라는 견해와 중생이며 사람이라는 견해이겠느냐. 의지하는 법[依止法]을 여의면서 온갖 번뇌에서 해탈하기를 구하고 온갖 모든 법은 본래 때[垢]가 없어서 마지막까지 깨끗하다고 보면서 스스로를 의지하고 또한 남을 의지하지 않느니라.
바른 법[法身]으로 오히려 부처님을 보지 않거늘 하물며 형색이겠느냐. 공하고 멀리 여읨으로 오히려 교법을 보지 않거늘 하물며 음성과 언설을 탐착하겠느냐. 함이 없는 법으로써도 오히려 승가(僧伽)를 보지 않거늘 하물며 화합한 대중이 있다고 보겠느냐. 그러면서 모든 법에 대하여 끊어 없애는 것도 없고 수행하는 것도 없으며 생사에 머무르지도 않고 열반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온갖 법은 본래부터 번뇌가 사라져 고요함[寂滅]을 알아서 속박이 있다고도 보지 않고 해탈하기를 구하지도 않는 이이니, 이것을 진실로
수행하는 사문이라 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너희들은 마땅히 진실로 수행하는 사문의 법을 익혀야 하며 이름만을 간직한 사문이 되지 말지니라. 가섭아, 비유하면 가난하고 천한 사람이 비유하며 귀한 이의 이름을 빌린다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런 이름으로 부릴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그와 같으니라. 가섭아, 이름만의 사문과 바라문에게는 사문과 바라문으로서의 진실한 공덕과 행이 없나니, 역시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의 이름을 부를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큰 물에 빠져서 떠내려가면서도 목이 말라죽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그러하느니라. 가섭아, 모든 사문들이 경전을 많이 독송하면서도 탐냄․성냄․어리석음의 목마름을 그치게 하지 못하고 법의 바다에 떠내려가면서도 번뇌에 목이 말라죽은 뒤에는 모든 악한 세계에 떨어지는 것이니라. 비유하면 약사(藥師)가 약 주머니를 가지고 가면서도 자기 몸의 병을 고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이들은 사람에게 있는 번뇌의 병도 역시 그와 같아서 비록 견문이 많이 있다 하더라도 번뇌를 그치지 못하면 스스로 이익이 있을 수 없느니라. 마치 어떤 사람이 왕의 귀한 약을 먹었으면서도 몸에 알맞지 못하면 해를 당하는 것처럼 이들은 사람에게 있는 번뇌의 병도 역시 그와 같아서 좋은 법 약을 얻고서도 선(善)을 닦지 못하여 스스로 지혜의 뿌리를 해치느니라. 가섭아, 마치 마니보주(摩尼寶珠)를 깨끗하지 못한 곳에 떨어뜨리면 다시는 쓰게 되지 못하는 것처럼 많이들은 이도 이익에 탐착하면 다시는 하늘과 사람들을 이익 되게 할 수 없느니라. 마치 죽은 사람이 금과 영락을 차고 있는 것처럼, 들은 것은 많으나 계율을 깨뜨린 비구가 법의를 입고 다른 이의 공양을 받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마치 장자의 아들이 손톱과 발톱을 잘 깎고 깨끗이 목욕한 뒤에 붉은 전단(旃壇)을 바르고 새옷을 입고 머리에 꽃다발을 쓰면 안팎이 모두 알맞는 것처럼, 가섭아, 들은 것이 많으면서 계율을 지닌 이가 법의를 입고 다른 이의 공양을 받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또 대가섭아, 계율을 잘 지닌 것 같으면서도 계율을 깨뜨리는 네 부류의 비구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부류의 비구라 하는가 하면 어느 한 비구가 구족하게 계율을 지니면서 크고 작은 모든 죄에 항상 두려워하는 마음을 내며, 듣게 된 계율의 법은 모두 잘 이행하면서 몸의 업이 깨끗하고 입의 업도 깨끗하고 뜻의 업도 깨끗하며, 바르고 깨끗한 생활[正命]을 하지만 이 비구는 나가 있다는 이론을 세우나니, 이것이 첫 번째로 계율을 잘 지닌 것 같으면서도 계율을 깨뜨리는 비구이니라.
또 가섭아, 어느 한 비구는 계율을 외우고 지니면서 행하지만 몸에 대한 소견[身見]이 없어지지 않았나니, 이것이 두 번째로 계율을 잘 지닌 것 같으면서도 계율을 깨뜨리는 비구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어느 한 비구가 구족하게 계율을 지니면서도 중생의 모양을 취하면서 인자한 마음을 행하고 온갖 법이 본래 생김이 없다 함을 듣고 마음으로 크게 놀라면서 두려워하나니, 이것이 세 번째로 계율을 잘 지닌 것 같으면서도 계율을 깨뜨리는 비구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어느 한 비구가 구족하게 수행하면서 열두 가지 두타(頭陀)로 얻을 것이 있다고 보나니, 이것이 네 번째로 계율을 잘 지닌 것 같으면서도 계율을 깨뜨리는 비구라 하느니라.
또 가섭아, 계율을 잘 지닌다 함은 나가 없고 내 것도 없으며 지음도 없고 짓지 않음도 없으며 지을 대상도 없고 짓는 사람도 없으며 행(行)도 없고 행이 아닌 것도 없으며 빛깔도 없고 이름도 없으며 모양도 없고 모양이 아닌 것도 없으며 사라짐도 없고 사라짐이 아닌 것도 없으며 취함도 없고 버림도 없으며 취할 만한 것도 없고 버릴 만한 것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중생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마음도 없고 마음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세간도 없고 세간이 아닌 것도 없으며 의지도 없고 의지가 아닌 것도 없으며 계율로써 스스로 높은 체하지도 않고 다른 이의 계율을 깎아 내리지도 않으며 또한 이 계율을 기억하거나 생각하여 분별하지도 않나니, 이것을 모든 성인으로서의 지닐 계행이라 하여 무루(無漏)에도 매이지 않고 삼계(三界)를 받지도 않으며, 모든 의지하는 법을 멀리 여의느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분명히 알게 하려고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깨끗하게 계율을 지니는 이는
때[垢]도 없고 또한 아무 것도 없으며
계율을 지니면 교만함이 없고
또한 의지하는 바도 없느니라.
계율을 지니면 어리석음이 없고
또한 모든 속박도 없으며
계율을 지니면 더러움[塵汚]도 없고
또한 어기거나 잃는 일도 없느니라.
계율을 지니면 부드럽고 착하여
끝내 번뇌가 고요히 사라지며
온갖 것에 대하여 기억하고 생각하는
분별을 멀리 여의느니라.
모든 동요하는 생각에서 벗어남이
부처님 계율을 청정하게 지니는 것이니
몸과 목숨을 아끼지도 않고
모든 존재[有]의 생명도 이용하지 않느니라.
바른 행을 닦아 익히어
바른 도(道) 안에 편안히 머무름이
이것을 부처님의 법에서 진실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닌다 하느니라.
계율을 지니면 세간에 물들지 않고
또한 세간의 법에 의지하지도 않으며
지혜의 광명을 얻으면
어두움도 없고 있을 만한 것도 없느니라.
나도 없고 그[彼]라는 생각도 없으면서
이미 모든 모양을 알고 또 보면
이것을 부처님의 법에서 진실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닌다 하느니라.
이 언덕도 없고 저 언덕도 없으며
또한 그 중간도 없으며
이것과 저것이 없는 가운데서는
또한 집착할 것도 없느니라.
묶임도 없고 또한 모든 번뇌[漏]도 없으며
또한 모든 속임수도 없나니
이것을 부처님의 법에서 진실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닌다 하느니라.
마음이 이름[名]과 물질[色]에 집착하지 않고
나와 내 것[我所]이라 하지도 않으면
이것을 진실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닌 데에 머무른다 하느니라.
비록 모든 계율을 잘 지닐지라도
자만하지 않으며
또한 으뜸가는 계율을 만나서
성스런 도[聖道]를 구한다고 여기지도 않나니
이것을 진실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는 모양이라 하느니라.
계율이 최고라고 여기지 않고
삼매(三昧)를 귀하게 여기지도 않나니
이 두 가지 일을 초월한 뒤에
지혜를 닦고 익히느니라.
공하고 고요하여 아무 것도 없음이
모든 성현(聖賢)의 성품이니
이것이 청정하게 계율을 지님이요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것이니라.
마음은 몸에 대한 소견[身見]에서 벗어나고
나와 내 것을 없애며
모든 부처님께서 행하신
공하고 고요한 법을 믿고 이해하느니라.
이와 같이 성스런 계율을 지니면
곧 견줄 데 없게 되어서
계율에 의지하여 삼매를 얻고
삼매로 지혜를 닦게 되느니라.
닦은 지혜에 의하여
청정한 지혜를 얻기에 이르며
이미 청정한 지혜를 얻은 이는
청정한 계율을 두루 갖추게 되느니라.
이 말씀을 하실 때에 5백 명의 비구는 모든 법을 받지 않고도 마음에 해탈을 얻었으며 3만 2천 명은 티끌을 멀리 하고 때를 여의어[遠塵離垢] 법안(法眼)이 깨끗하게 되었거니와
5백의 비구들은 이 깊은 법을 듣고도 마음에 믿고 이해하지 못하고 통달할 수 없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갔다.
그때 대가섭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5백의 비구는 모두가 선정은 얻었사오나 깊은 법을 믿고 이해할 수 없어서 그만 자리에서 일어나 떠나가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가섭아, 이 모든 비구는 모두가 증상만(增上慢)으로 이 청정하고 번뇌가 없는 계율의 모양을 듣고서도 믿고 이해하지 못하여 통달할 수 없었다. 부처가 말하는 이 게송의 이치는 매우 깊으니라. 그 까닭은 모든 부처님의 보리는 지극히 깊기 때문이니, 만일 두터이 선근을 심지 못하고 악한 벗이 지켜주는 사람이면 믿고 이해하는 힘이 적을 뿐더러 믿어 받아들이기도 어렵느니라.
또 대가섭아, 이 5백의 비구는 과거의 가섭 부처님[迦葉佛] 때에 외도(外道)의 제자가 되어 가섭 부처님께로 가서 장단점[長短]을 구하려 하다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조그마한 믿는 마음[信心]을 내면서 생각하기를 ‘이 부처님은 희유하구나. 미묘한 말씀을 잘도 말씀하시니’라고 하였으므로 이 착한 마음 때문에 목숨을 마친 뒤에는 도리천(忉利天)에 태어났고 도리천에서 죽은 뒤에는 염부제에 와 나서 불법에 출가하게 되었으나 이 모든 비구들은 모든 견해에 깊이 집착하고 있기 때문에 깊은 법을 듣고서도 믿고 이해하지도 못하고 따르면서 통달할 수도 없느니라. 그러나 이 모든 비구들은 비록 통달하지는 못하였다 하더라도 깊은 법을 들은 인연의 힘 때문에 큰 이익을 얻어서 나쁜 길에는 나지 않고 장차 현재의 몸으로 열반에 들게 될 것이니라.”
그때 부처님께서 수보리(須菩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가서 이 비구들을 데리고 오너라.”
수보리가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사람들은 부처님의 말씀조차도 오히려 믿지 못하거늘 하물며 제 말이겠습니까?”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변화로 두 사람의 비구를 만들어서 그 5백의 비구들이 가고 있는 길 중간을 따라가게 하셨으므로 그 모든 비구들은 그들을 보고는 변화한 비구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를 가십니까?”
대답하였다.
“우리들은 혼자 가 있으면서 선정의
즐거움을 닦고자 합니다. 왜냐 하면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을 믿고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장로여, 우리들도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역시 믿고 이해하지 못하였으므로 혼자 가 있으면서 선정의 행을 닦으려 합니다.”
이때에 그 변화로 된 비구는 여러 비구들에게 말하였다.
“우리들은 마땅히 스스로 뽐내거나 거역하거나 다투려는 마음을 버려야 하며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이치를 믿고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왜냐 하면 뽐냄도 없고 다툼도 없는 것이 사문의 법이기 때문입니다. 말씀하신 열반을 사라짐[滅]이라 하는데 무엇이 사라진다는 것입니까? 이 몸 안에 나가 있어서 사라진다는 것입니까, 사람이 있고 짓는 것이 있고 받는 것이 있고 목숨이 있어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까?”
비구들이 말하였다.
“이 몸 안에는 나도 없고 사람도 없고 짓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없으며 목숨이 있어서 사라져야 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다만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사라지기 때문에 열반이라 합니다.”
변화한 비구가 말하였다.
“당신들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바로 일정한 모양이어서 사라져 다할 수 있는 것입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안에 있지도 않고 밖에 있지도 않으며 그 중간에도 있지 않나니, 모든 기억과 생각을 여의면 나지 않습니다.”
변화한 비구가 말하였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기억하거나 생각하지 마십시오. 만일 당신들이 법을 기억하거나 생각하거나 분별을 일으키지 않는다면 곧 모든 법에서 물들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게 됩니다. 물들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으면 이것을 고요히 사라진다[寂滅]고 합니다. 온갖 계율[戒品]도 역시 왕래하지도 않고 사라져 다하지도 않으며 선정[定品]․지혜[慧品]․해탈[解脫品] 및 해탈지견[解脫知見品]도 역시 왕래하지도 않고 사라져 다하지도 않나니, 이런 법 때문에 열반이라 하는 것입니다.
이 법은 모두가 공하여 멀리 여읜지라 역시 취할 수도 없나니, 당신들은 이 열반이란 생각을 버리고 여의면서 생각을 따르지도 말고 생각이 아닌 것도 따르지 말며 생각으로써 생각을 버리지도 말고 생각으로써 생각을 관찰하지도 마십시오. 만일 생각으로써 생각을 버린다면 곧 생각에 속박되는 것이니, 당신들은
온갖 느낌[受]과 생각[想]의 사라지는 선정[滅定]을 분별하지 않아야 합니다. 모든 법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어떤 비구가 모든 느낌과 생각을 없애고 멸정(滅定)을 얻게 된다면 그것은 만족한 것이요, 그 외에는 없습니다.”
변화한 비구가 이런 말을 할 때에 5백의 비구는 모든 법을 받지 않고 마음에 해탈을 얻었으므로 부처님께로 돌아와서 머리 조아려 발에 예배하고 한쪽으로 가 섰다.
그때 수보리가 그 비구들에게 물었다.
“당신들은 어디까지 갔다가 지금 어디로부터 오십니까?”
여러 비구들이 말하였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법은 어디서 오는 것도 없고 가도 닿는 데가 없습니다.”
또 물었다.
“누가 당신들의 스승입니까?”
대답하였다.
“우리의 스승은 전부터 생겨나지도 않았고 또한 없어지지도 않았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무엇으로부터 법을 들었습니까?”
대답하였다.
“5음(陰)과 12입(入)과 18계(界)가 있지 않으니, 이로부터 법을 들었습니다.”
또 물었다.
“어떻게 법을 들었습니까?”
대답하였다.
“속박되기 위해서도 아니요, 해탈을 위해서도 아닙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어떤 법을 익히고 행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얻기 위해서가 아니요 끊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또 물었다.
“누가 당신들을 조복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몸에는 일정한 모양이 없고 마음에는 행할 것이 없으니, 이것이 우리를 조복하였습니다.
또 물었다.
“무슨 행으로 마음에 해탈을 얻었습니까?”
대답하였다.
“무명(無明)을 끊지도 않았으며 명(明)이 생기지도 않았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에게는 누가 제자입니까?”
대답하였다.
“얻은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는 사람이면 바로 그가 제자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얼마나 얻었기에 장차 열반에 드는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마치 여래의 교화를 받아 열반에 든 이들과 같이 우리들도 들 것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이미 자기의 이익을 얻었습니까?”
대답하였다.
“자기의 이익은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할 일을 다 마쳤습니까?”
대답하였다.
“할 일은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깨끗한 행[梵行]을 닦았습니까?”
대답하였다.
“삼계(三界)에서는 행하지도 않고 또한 행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것이 우리들의 깨끗한 행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번뇌가 다하였습니까?”
대답하였다.
“모든 법은 마침내 다하는 모양이 없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악마를 무너뜨렸습니까?”
대답하였다.
“5음(陰)의 마[陰魔]는 얻을 수 없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여래를 받드십니까?”
대답하였다.
“몸과 마음으로 하지 않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복 밭[福田]에 머무십니까?”
대답하였다.
“머무름이 없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생사(生死)의 반복을 끊었습니까?”
대답하였다.
“항상 있는 것[常]도 없고 아주 없어지는 것[斷]도 없습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법을 따라서 행[隨法行]하십니까?”
대답하였다.
“걸림이 없이 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물었다.
“당신들은 마지막에 어디에 태어날 것입니까?”
대답하였다.
“여래께서 교화한 사람이 이르는 데를 따를 것입니다.”
수보리가 여러 비구들에게 물을 때에 5백의 비구는 모든 법을 받지 않고 마음에 해탈을 얻었으며 3만 2천 명은 티끌을 멀리 하고 때를 여의어 법안이 깨끗하게 되었다.
그 때의 모임 가운데에 보명(普明) 보살이 있다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 『보적경(寶積經)』을 배우고자 하면 어떻게 머물러야 하고 어떻게 배워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보살은 이 경에서 말한 모두가 일정한 모양이 없어서 취할 수도 없고 또한 집착할 수도 없다 함을 배우면서 이를 따라 행하면 크게 이익이 있으리라. 보명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날기와로 만든 배를 타고 항하(恒河)를 건너려 하면 어떤 정진(精進)을 써야 이 배를 타고 건너겠느냐?”
대답하였다.
“세존이시여, 큰 정진의 힘을 써야 건널 수 있으리이다. 왜냐 하면 중간에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보명에게 말씀하셨다.
“보살도 역시 그러하여 불법을 닦고자 하면 부지런히 정진하기를 이보다 갑절 더하여야 하느니라. 왜냐 하면 이 몸은 덧없어서 결정됨이 없고 부서져 파괴되는 모양이며 오래 머무르지 못하고 끝내 닳아 없어지게 되며 아직 법의 이익을 얻기도 전에 중도에 파괴될 수 있기 때문이니라. 나는 넓게 흐르는 물에 있으면서 중생을 건네 주어 네 줄기 흐름을 끊게 하기 위하여 마땅히 법 배[法船]를 익히어 이 법 배를 타고
생사 사이를 오가면서 중생을 건네 주고 벗어나게 하리라.
어떻게 보살은 법 배를 익히는가 하면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을 배의 인연(因緣)으로 삼고, 한량없는 복을 익힘으로써 굳고 두껍고 청정한 계율의 널빤지[板]로 삼으며, 보시를 행하고 과위(果位)에 이르름으로써 장엄(莊嚴)을 삼고, 청정한 마음의 부처님 도로써 모든 재목(材木)을 삼으며, 온갖 복덕으로써 구족(具足)함을 삼고, 견고한 속박과 인욕과 부드러운 생각으로써 못[釘]을 삼으며, 깨달음에 이르는 온갖 방법[菩提分]으로 굳세게 정진하면서 가장 으뜸가고 묘하고 착한 법 숲[法林] 안에서 나와 불가사의하고 한량없는 선정과 복덕이 이루어져서 고요히 잘 조복된 마음으로써 스승[師匠]을 삼느니라.
그리고 마지막까지 파괴되지 않는 대비(大悲)로 포섭할 바 4섭법(攝法)으로써 널리 건너서 멀리 이르게 하고 지혜의 힘으로써 모든 원수를 막으며 좋은 방편의 힘을 갖가지로 쌓고 모은다. 네 가지 큰 깨끗한 행[梵行]으로써 단정하고 엄숙한 것을 삼으며 바른 4념처(念處)로 금으로 지은 망루(望樓)를 삼고 4정근(正勤)의 행과 4여의족(如意足)으로써 빠르게 부는 바람을 삼아 5근(根)으로 모든 굽고 악한 일을 잘 살펴 여의고 5력(力)으로 강하게 띄워 7각(覺)으로 깨달아 악마를 깨뜨리며 여덟 가지 진실하고 바른 도[眞正道]에 들어가 뜻대로 언덕에 이르면서 외도의 구제를 여의느니라.
지(止)로써는 다루기[調御]를 삼고 관(觀)으로써는 이익을 삼아 두 치우침[二邊]에 집착하지 않고 인연 있는 법으로써 안온(安穩)함을 삼으며 대승의 넓고 넓은 그지없는 변재(辯才)로써 널리 이름[名聞]을 퍼뜨려 시방의 온갖 중생을 잘 제도하면서 스스로 부르짖기를 ‘법 배로 올라오라. 안온한 길을 좇아 열반에 이르면 몸에 대한 견해의 언덕[身見岸]을 건너 부처님 도의 언덕[佛道岸]에 이르러 온갖 소견을 여의게 되느니라’고 하느니라.
이와 같아서 보명아, 보살마하살은 마땅히 이러한 법 배를 닦아 익히어 이 법 배로써 한량없는 백천만억 아승기 겁 동안 생사(生死) 안에 있으면서 긴 흐름에 떠내려가고 빠져 죽는 중생들을 제도하고 해탈시켜야 하느니라.
또 이어서 보명에게 말씀하셨다.
“다시 법과
행이 있어서 보살로 하여금 빨리 성불하게 하느니라. 이를테면 모든 행한 것이 진실하고 거짓되지 않으며 착한 법을 두터이 익히고 깊은 마음으로 청정하며 정진을 버리지 않고 즐거이 명(明)에 가까이 하려는 것이니, 온갖 모든 선근을 닦아 익히기 때문이요, 항상 바르게 기억하면서 착한 법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많이 들어도 싫증냄이 없으면서 지혜를 두루 갖추었기 때문이요, 교만을 깨뜨리고 지혜를 더욱 늘리기 때문이니라.
쓸모 없는 이론을 없애면서 복덕을 갖추기 때문이요, 혼자 있으면서 몸과 마음의 여읨을 좋아하기 때문이며, 시끄러운 곳에 있지 않으면서 나쁜 사람들을 여의기 때문이요, 깊이 법을 구하면서 제일가는 이치[第一義]에 의지하기 때문이며, 지혜를 구하면서 참 모습[實相]을 통달하기 때문이요, 참된 이치[眞諦]를 구하면서 무너지지 않는 법을 얻기 때문이며, 공한 법을 구하면서 하는 것이 바르기 때문이요, 멀리 여읨[遠離]을 구하면서 고요히 사라짐[寂滅]을 얻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아서 보명아, 이것이 보살이 빠르게 부처님 도를 이루는 것이니라.”
이 경을 말씀하실 때에 보명 보살과 대가섭 등이며 모든 하늘과 아수라와 그리고 세간의 사람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정수리에 이고 받들어 행하였다.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3651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4권 (2) | 2024.01.27 |
---|---|
[적어보자] #3650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3권 (2) | 2024.01.26 |
[적어보자] #3648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1권 (2) | 2024.01.26 |
[적어보자] #3647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0권 (2) | 2024.01.26 |
[적어보자] #3646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09권 (2) | 2024.01.2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