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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654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117권

by Kay/케이 2024.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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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117

 

대보적경 제117권


서진(西晋) 삼장 축법호(竺法護) 한역
송성수 번역


47. 보계보살회(寶髻菩薩會) ①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나열기(羅閱祇)의 영취산(靈鷲山)에서 큰 비구 대중 4만 2천 명과 함께 계셨다. 보살도 8만 4천이 함께 있었으니, 저마다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로부터 여기에 와 모였다. 모두가 이미 통달하여 일생보처(一生補處)이고 집착함이 없음[無所著]과 걸리는 것이 없음[無罣礙]을 얻었으며 용맹복삼매(勇猛伏三昧)가 나타나는 것으로부터 상연화(上蓮花) 삼매와 금강도량(金剛道場) 삼매와 선견주(善堅住) 삼매와 순숙수(淳淑修) 삼매와 당영왕(幢英王) 삼매와 금강(金剛) 삼매와 정덕사(淨德事) 삼매를 얻었으며 분별하여 방편을 행하니 모두가 모든 부처님의 법에 가까이 가게 되었다. 보리수[佛樹] 아래 있으면서 항복 받은 것이 많고 모든 악마의 경계를 건너서 모든 부처님들의 국토를 세우게 되었으며 말할 바가 다함 없는 총지[無盡所說總持]를 이루었고 중생의 온갖 근원을 알게 되었으며 묘한 변재로써 모든 이의 마음을 기쁘게 하였다. 사자의 걸음걸이로 두려움이 없었으며 만일 대중의 모임에 들어가면 그들을 따르면서 때에 맞게 문자와 구절을 널리 펴셨다.
모든 행을 성취하여 곧 위엄 있는 모양으로 스스로 장식하였고 세간의 재물을 버리고 모든 외도(外道)를 배척하였으며 공훈이 널리 들어나 명성이 시방에 사무쳤고 모든 부처님께서 그 덕이 한량없음을 찬탄하셨으니, 모두가 보시․지계․인욕․정진․일심(一心)․지혜로부터 이루어졌다. 또 수없는 겁 동안 백천 나유타(那由他)로부터 도업(道業)을 닦고 다스렸고 온갖 중생의 질병을 보면 병에 따라 약을 주면서 모두 낫게 하였다. 깊고 묘하게 연기법[緣起法]을 밝힘에 있어서
아주 없다[斷滅] 함과 항상 있다[有常]는 견해를 버렸고 그 행이 깨끗하고 뜻함에 흠이 없었으며 마음의 성품[心性]이 선명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저마다 거두어 보살피면서 마땅한 곳을 얻게 하였으며 환히 알면서 가르쳐 주며 뜻이 자재하였고 세력이 굳고 강하면서 인자한 마음을 헐지 않았으며 믿음[信]과 지계[戒]와 들음[聞]과 베풂[施]과 스스로 뉘우침[慚]과 남에게 부끄러워함[愧]과 지혜(智慧)의 일곱 가지 재보를 두루 갖추어서 중생을 교화하려 하였고 착한 방편을 쓰면서 한적한 데에 살고 있었으며 수행의 힘을 써서 모든 서원을 잘 세우며 거룩한 덕은 한량없고 마음은 마치 허공과 같았다.
그들의 이름은 광관(光觀) 보살과 상명요(常明曜) 보살과 광세음(光世音) 보살과 대세지(大勢至) 보살과 사자의(師子意) 보살과 사자보(師子步) 보살과 사자뢰음(師子雷音) 보살과 존의(尊意) 보살과 금강의(金剛意) 보살과 금강보(金剛步) 보살과 금강당(金剛幢) 보살과 금강지(金剛志) 보살과 보부동적(步不動迹) 보살과 독보세(獨步世) 보살과 선명(善明) 보살과 연화목(蓮花目) 보살과 연화정(蓮花淨) 보살과 보정(寶淨) 보살과 구쇄(鉤鎖) 보살과 보당(寶幢) 보살과 보사(寶事) 보살과 보인수(寶印手) 보살과 덕요왕(德曜王) 보살과 정왕(淨王) 보살과 집리의왕(執離意王) 보살과 전광엄(電光嚴) 보살과 허공장(虛空藏) 보살과 유음(濡音) 보살과 우음(雨音) 보살과 불리음(不離音) 보살과 의정(意淨) 보살과 뇌음(雷音) 보살 및 해박(解縛) 보살 등이었다.
또 열여섯 명의 바른 선비[正士]에서는 부(溥)가 그 분들의 으뜸이었고 열여섯 명 거룩한 선비[聖士]에서는 중향(衆香)이 그 분들의 으뜸이었으며 서른두 명의 깨끗한 행의 선비[行士]에서는 자씨(慈氏)가 그 분들의 으뜸이었으니, 모두가 이 분들은 현겁(賢劫)의 모든 보살들이었다.
다시 항마(降魔) 천자와 정부정(淨復淨) 천자와 선묘(善妙) 천자와 현호(賢護) 천자와 획승(獲勝) 천자와 의승(意勝) 천자와 적화음(寂化音) 천자와 선사(善思) 천자 등의 2만 명은 모두가 대승(大乘)에 뜻을 둔 이들이었으며,
사천왕천(四天王天)과 제석(帝釋)과 인적범천(忍迹梵天)과 악마의 아들 도사(導師)와 유미(濡美) 천자며 아울러 그 밖의 모든 하늘․용신․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와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이[人非人]들이 있었으니,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백천의 대중들에게 에워싸여서 그들을 위하여 경을 설하고 계셨으니, 크고 청정한 사자의 평상에 앉으셔서 용맹하고 두려워함이 없이 사자후(師子吼)를 토하였다. 마치 해가 두루 비춤과 같고 달이 한창 밝은 것과 같았으며 마치 불이 어두움을 녹이는 것과 같았다. 그 자리는 번쩍거리고 거룩한 광명은 높고 높아 제석과 범왕보다 뛰어났으며 부처님 몸이 특히 두드러져서 마치 수미산(須彌山)이 큰 바다에 나타난 것과 같았고 말씀하신 경전은 상․중의 뜻과 말씀이 묘하고 착하지 않음이 없었으며 이치는 아름다우면서 구족하여 마지막[究竟]까지 청정하였고 항상 닦으신 범행(梵行)으로 은혜와 사랑을 널리 베푸시고 보살의 행(行)을 펴시고 보살의 법(法)을 강(講)하셨으니, 좇아 닦아야 할 것은 깨끗한 행[淨行]이라 이름하셨다.
그때 동방(東方)으로 9백 20만의 국토를 지나가서 선변(善變)이라는 세계가 있었고 그곳에 부처님이 계셨으니, 명호는 정주(淨住) 여래․지진(至眞)․등정각(等正覺)이라 하셨으며 현재도 설법하고 계셨다.
그때에 그 부처님 곁에는 라타린나주(羅陀隣那朱)진(晋)나라 말로 보계(寶髻)라 한다라는 한 보살이 있었는데 8천의 보살들과 함께 그 불국토에서 홀연히 사라져 이 사바세계[忍界]에 와서 범천(梵天)에 머물러 있으면서 하나의 보배 일산으로써 이 삼천대천의 사바세계를 덮고 여러 가지 빛깔의 하늘꽃을 두루 비오듯 내리며 범천에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하늘과 대중들에게 좋은 이익을 주게 하고자
부처님 석사자(釋師子)를 뵙고자 바라오며
괴로움에 불타는 세속 일들을 녹이기 위하여
견고한 서원으로 불도(佛道)에 뜻을 두나이다.

강의 모래만큼이나 수많은 보살은
정진의 힘으로 행(行)이 뛰어났으며

백천억의 악마 대중의 항복을 받아서
부처님께서는 도를 이루고 때와 근심[垢憂]을 여의었나이다.

저는 동방으로부터 왔사온데
그 세계 이름은 선변(善變)이라 하오며
그 정주 부처님[淨住佛]곁에 있다가
석사자께 머리 조아리려 하옵나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을 듣고자 하거나
시방의 모든 보살을 만나고자 하거나
저 세존께 귀의하여 예배하고자 하면
속히 영축산(靈鷲山)으로 오도록 하십시오.

모든 길잡이[導師]는 만나 뵙기 어렵고
경전의 법요(法要)도 매우 만나기 어려우며
사람 몸도 얻기 어렵고 그리고 한가로이
금계(禁戒)를 돈독히 믿는 정성 또한 어렵습니다.

만일 이제 덕(德)의 근본을 짓고
중생이 삿되고 어둔 데에 있음을 보고서
마음을 깨우쳐 멸도(滅度)케 하려면
속히 함께 가장 훌륭한 이[最勝者]께 나아갑시다.

만일 세 가지 악한 길[三惡道]을 벗어나고
천상과 인간에서 안온하게 살며
무위(無爲)를 체득하고 생사(生死)를 녹이려면
곧 견줄 수 없는 이[無等倫]께 나아가야 합니다.


용한 의사[醫王]가 되어 감로(甘露)를 베푸시고
세존은 마치 길잡이처럼 바른 길을 보이시며
저 법왕(法王)은 존귀한 보배를 가지시어
온갖 중생의 갈래[趣]를 항복 받으십니다.

이때 보계(寶髻)는 이 게송을 말하여 마친 뒤에 이 게송의 음성을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알렸다.
어진 이 사리불(舍利弗)이 이 게송을 듣고 나아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네, 세존이시여, 이 묘한 게송의 이치는 어디서 나오는 것이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동방으로 여기에서 9백 20만의 불국토를 지나가면 선변이라는 세계가 있고 정주(淨住) 여래․지진․등정각이라는 부처님이 계시는데 현재도 설법하고 계시느니라. 그 부처님의 곁에 보계라는 보살이 8천의 보살들과 함께 이 사바세계로 와서 나를 보고 머리 조아려 문안한 뒤에 경전을 물어 받으려고 하며 아울러 시방에서 모두 모인 보살들을 만나려고 일부러 범천에 머물러 있으면서 이런 게송으로 말한 것이니라. 그리하여 이 게송의 음성을 삼천대천세계에 널리 알리면서 헤아릴 수 없는
중생들로 하여금 많은 덕의 근본을 심게 하는 것이니, 함께 곧 이 곳으로 올 것이니라.”
이때 보계는 8천의 보살과 헤아릴 수 없는 모든 천자들에게 둘러싸여 백천의 음악을 울리고 여러 묘한 꽃을 비오듯 뿌리며 큰 광명을 놓고 삼천세계를 진동시키면서 부처님께로 와서 발아래 머리 조아리고 저마다 일곱 번을 돌고 부처님 앞에 똑바로 서 있었으니, 8천의 보살들도 역시 그와 같이 하였고 모든 천자들도 모두가 다 그 뒤를 따랐다.
보계 보살이 나와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정주 여래께서 공손히 문안함이 한량없었나이다. 뜻하신 바가 모두 잘 되시며 몸은 가벼우시며 힘쓰시기는 편안하시옵니까? 하늘 중의 하늘[天中天]을 무릅쓰고 이 비루한 몸이 여기 왔사오니, 원컨대 은혜와 사랑을 드리우사 모든 보살․대사(大士)들을 위하여 도의 가르침과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차례대로 말씀하여 주소서. 보살은 여기에 머물러서 마지막[究竟]을 얻어 이루고 깨끗함을 모두 갖추어 널리 온갖 덕(德)의 갑옷을 입으며 많은 선(善)과 평등한 행을 쌓아 그 몸을 깨끗이 닦으면서 모두가 온갖 중생들이 생각하는 것을 보고 그 모양과 행을 관찰하면서 따라 교화하게 하며 곧 지혜로써 음행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없애며 법을 강설하여 주셔서 묘한 행에 이르게 하옵소서. 만일 중생이 삿된 법에 머물러 있으면 곧 평등한 가르침을 펴 보이시고 모든 여래께서 돌보아 가려 주심에 중생 모두가 힘입게 하시오며 온갖 악마가 틈[便]을 얻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을 뵈옵되 거리낌이 없게 하여 주소서. 감히 좇아 닦으면 모두가 여래의 깨끗한 행을 이룰 수 있으리니, 이와 같은 이치에는 어떤 인연으로 이르게 되오리까?”
부처님께서 보계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족성자(族姓子)야, 여래에게 이러한 이치를 묻는구나. 자세히 듣고 자세히 들어서 잘 생각할지어다. 나는 장차 모든 보살들이 행해야 할 청정함을 해설하겠느니라.”
보계 보살과
모든 대중들은 가르침을 받아 듣고 있었다.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행할 청정함에는 네 가지 일과 법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일과 법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도무극(度無極)을 행하고, 둘째 항상 모든 부처님의 도품(道品)을 좇아 닦아야 하며, 셋째는 신통(神通)을 갖추고, 넷째는 중생을 교화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과 법이니라. 도무극을 수행하여 해야 할 바를 권하고 도와서 많은 덕(德)의 근본에 두루 들지 아니함이 없을 것이요, 도품의 법이라 함은 큰사랑에 노닐면서 분명히 알며 때에 맞추어 지혜가 들어가는 것을 신통을 갖춘다 함은 대중들의 생각과 행한 선악의 업을 분별하는 것이요, 중생을 교화한다 함은 크게 가엾이 여김이 견고하면서 뜻하는 성품이 귀착하는 곳을 밝게 아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보시[施] 도무극(度無極:波羅蜜多)으로 행할 깨끗함[淸淨]이라 하는가 하면 간탐을 익혔던 마음들을 모두 다 버리고 보시할 마음들을 모두 다 버리고 보시할 마음을 익히며 좋은 것을 탐내고 더러운 것을 버리는 일을 놓아버리고 무너뜨린 뒤에는 보시하려는 마음을 일으키고 권하면서 온갖 자신이 가진 물건을 베풀되 인색하지 않는 것이니라.
그가 보시를 할 때는 네 가지 일에 대하여 약간(若干)의 마음도 짓지 않아야 하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중생의 무리에 따라서 조금도 마음의 변화가 없어야 하고, 둘째는 온갖 경법(經法)에 있어서도 저마다 다르지 않아야 하며, 셋째는 권하여 도와줌이 있어도 차별이 없어야 하고, 넷째는 뜻하는 대로 보시하는 데 있어도 약간의 차별도 없어야 한다.
그 무엇을 말하여 모든 중생에 대하여 약간의 마음도 없어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나는 아무에게는 보시해야 하고 아무에게는 보시하지 않아야 한다. 아무에게 보시하면 복이 많을 것이나 아무에게 보시하면 복이 적을 것이다. 아무에게는 많이 보시하고 아무에게는 적게 보시하겠다. 아무에게는 좋은 것으로 보시하고 아무에게는 되는 대로 보시하리라. 아무에게는 항상 보시해야 되고 아무에게는 가끔 한 번만 보시하면 된다. 아무에게는 몸소 내가 주어야 하나 아무에게는 내가 수고하면서까지 줄 것은 없다. 아무에게는 모두 다 주어야 하고 아무에게는 대략만 주면 된다.
이 사람은 계율을 받들고 있으나
사람은 계율을 헐어뜨렸다. 이 사람은 복이 많은 사람이지만 이 사람은 복이 적은 사람이다. 이 사람은 여러 가지 복덕을 잘 이룬 사람이지만 저 사람은 이루지 못한 사람이다. 이 사람은 바른 도를 닦고 있지만 저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고 있다. 이 사람은 평등한 업을 받들어 행하는데 저 사람은 도리어 삿된 일에 떨어져 있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내지 않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족성자야, 보살이 보시를 할 때는 모두 마땅히 이러한 마음을 다 버리고 평등한 뜻을 닦으면서 여러 가지 생각을 품지 않고 항상 중생을 생각함에 평등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고 교화할 때에도 평등한 뜻으로 타이르고 사랑하며 가엾이 여기고 함께 기뻐하며 보살피기[慈悲喜護]를 잊지 말아야 하느니라. 이른바 평등이라 함은 마치 허공과 같아서 더하거나 덜함이 없는 것이니라. 이것이 중생에 따라 약간의 마음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보계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모든 경법(經法)에 있어서도 각각 다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가 하면 가령 설법을 한다 하여도 평등하게 펴는 것이니라. 또한 ‘법을 받들어 닦는 이라서 나는 경을 주어야겠지만 법을 따르지 못하는 이면 주지 않아야겠다. 만일 두루 온갖 법을 갖추게 된 이면 나는 그에게 주어야 되지만 법을 갖추지 못한 이면 나는 주지 않겠다’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되나니, 도의 가르침을 일으키려고 법보시[法施]를 행하는 이면 범부에게 보시하면서도 손해가 된다고 여기지 않고 성현에게 보시하면서도 이익이 된다고 여기지 않느니라.
또 모든 법은 본래 모두가 청정하고 평등하여 차이가 없다고 헤아리면서 이 때문에 보시하되 평등하게 해야 하나니, 이것을 모든 법에 있어서도 저마다 다르게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라.
그는 베풀어주는 공양 거리로 권하고 도와줄 것이 있어도 역시 약간의 마음도 없어야 하는 것이니, 만일 보시할 때에 ‘나는 당연히 복을 얻어서 제석이나 범왕이나 천상 사람들의 지위를 바래야 하며 인간의 임금이나 존귀한 이나 장자 등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또한 빛깔․소리․냄새․맛․닿임[細滑]의 법을 그리거나 구하지도 않고 넉넉한 재물과 값진 보배와 권속과 시종(侍從)도 바라지 않으며 다섯 세계[趣]에서 나고 죽고 하면서 두루 돌아다니는 것도 부러워하지 않고 성문승이나 연각승도 구하지 않겠다. 감히 보시하는 것으로써
제일이고 바르고 진실한 도를 구해야 된다’라고 하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아야 하느니라. 이것이 도와주는 데 있어서도 차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니, 모두를 놓아 버려야 하느니라.
뜻하는 성품[志性]이 도(道)에 있으면서 차별하는 마음이 없을 것이니, 만나게 되거나 이별하거나 간에 처음부터 더하거나 덜하는 마음이 없고 상대에게 보답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오직 모든 미치지 못한 이들을 제도하여 저 언덕에 건네 주려 할 뿐이며 그 마음은 질박(質朴)하면서 아첨함이 없고 독실한 믿음을 품고서 속 성품이 순숙(淳淑)하며 일찍이 뉘우치거나 변하는 일이 없고 몹시 좋아하는 것을 보시하고서도 그 마음은 기뻐하며 만일 어떤 이가 와서 구하면 잘 보시하면서 더욱 즐거워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족성자로서 뜻하는 성품으로 보시하는 데서도 역시 다르지 않게 한다는 것이니라. 이런 것들을 보살이 보시 도무극에서 약간의 마음도 없어야 한다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다시, 삿된 길을 버리고 보시 업을 행하는 데에 여덟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여덟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나를 보지 않는 것이요 사람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며 수명이 있다고 보지 않는 것이요 아주 없다[斷滅]고 보지 않는 것이며 항상 있다[有常]고 보지 않는 것이요 주는 이와 받는 이 주는 물건의 세 가지[三處]에 머무르지 않는 것이며 세 가지가 없다[無處]고도 보지 않는 것이니, 만일 보시하는 사람이면 이 여덟 가지 일을 청정하게 장엄해야 하느니라.
보살은 보시할 때에 네 가지의 머무르는 일[住業]을 버리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그릇된 법을 버리고 경전으로써 범부를 교화하고, 둘째는 성문의 뜻을 버리면서 크나큰 도[大道]에 뜻을 두며, 셋째는 연각의 법을 버리면서 평등을 수행하고, 넷째는 끊어야 하고 모든 의지하는 것과 집착하는 것을 멀리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머무르는 일이니라.
다시 네 가지 생각을 여의어야 하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생각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항상 있다는 생각[常想]이요, 둘째는 편안하다는 생각[安想]이며 셋째는 깨끗하다는 생각[淨想]이요, 넷째는 나라는 생각[我想]이니, 이것이 네 가지 생각이니라.
또 청정한 보시가 되는 네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몸이 청정하고, 둘째는 말이 청정하며, 셋째는 마음이 청정하고, 넷째는 성품이 청정한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라.
또 보시에 모든 걸림을 초월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희망을 버리고, 둘째는
품은 원한을 버리며, 셋째는 소승(小乘)을 여의는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니라.
또 마땅히 보시해야 하는 데에 모든 두려움을 여의게 하는 세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일이라 하는가, 첫째는 뽐내는 일이요 둘째는 깔보는 일이며, 셋째는 악마의 일[魔業]이니,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니라.
또 법으로써 진리를 보는 네 가지 보시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보시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안의 공함[內空]이요, 둘째는 바깥의 공함[外空]이며 셋째는 사람의 공함[人空]이요, 넷째는 도의 공함[道空]이니, 이것이 네 가지 보시이니라.
또 오로지 정진(精進)만을 생각하는 네 가지 보시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보시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중생을 배불리 먹이고, 둘째는 모든 부처님의 법을 두루 갖추며, 셋째는 상호(相好)의 엄숙한 용모를 다 성취하여 갖추고, 넷째는 불국토를 청정하게 다스리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라.
또 마음에서 항상 버리지 않는 네 가지 보시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보시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뜻에 항상 도(道)를 생각하고, 둘째는 항상 부처님을 뵙고자 하며, 셋째는 큰 사랑[大慈]을 닦고, 넷째는 중생의 진로(塵勞)의 더러움을 없애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보시이니라.
또 도량(道場)을 깨끗하게 장엄하는 세 가지 보시가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보시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나를 깨끗하게 하고, 둘째는 사람을 깨끗하게 하며, 셋째는 도량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세 가지 보시이니라.
또 청정하게 줄 네 가지 보시가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보시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지혜로써 보시하고, 둘째는 중생의 마음을 즐겁게 하며, 셋째는 권하고 도울 일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넷째 경전을 관찰하여 환히 이해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보시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로서 닦아야 할 법 보시 도무극으로 청정한 행에 이르는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계율 도무극[戒度無極]을 행할 때에 청정한 데에 이르는 한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한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보살의 마음은 견줄 사람이 없어서 그 마음은 온갖 세간을 뛰어나 가장 높고 비교할 데가 없어서 모든 성문이나 연각의 뜻을 초월함을 알고 마음으로 온
갖 악마를 항복 받으며 중생에 들어가면 이르는 곳마다 이름[名]과 덕(德)이 한량없는 보배와 같고 모든 좇아 익힌 법은 널리 보호함이 있어서 마음에 잊는 일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한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으로 청정한 행이 되는 두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항상 인자하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품으면서 중생을 해침이 없고, 둘째는 마음으로 도(道)에 뜻을 두면서 성품과 행이 조화롭고 부드러운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세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세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몸의 청정함이니, 몸에 대한 세 가지 일을 청정하게 하면서 계율에 빠짐이 없고 마지막까지 다 갖추는 것이다. 둘째는 말의 청정함이니, 온갖 하는 말에 아첨함이 없는 것이다. 셋째는 뜻의 청정함이니, 모든 더러운 탐욕과 위해(危害)를 제거하는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네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그 계율이 청정하고, 둘째는 금계를 받들면서 헐지 않으며, 셋째는 이 계법(戒法)으로써 중생을 교화하고, 넷째는 계율을 지니는 사람을 보면 마치 부처님처럼 그를 공경하는 것이니, 이것이 네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다섯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다섯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자기 몸을 찬탄하지 않고, 둘째는 다른 사람을 헐뜯지 않으며, 셋째는 성문(聲聞)의 뜻을 버리고, 넷째는 연각(緣覺)의 뜻을 여의며, 다섯째는 탐착(貪箚)함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다섯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여섯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여섯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계율을 훼범하지 않고, 둘째는 항상 경법(經法)을 생각하면서 그 행을 따라 닦으며, 셋째는 항상 성인 대중을 생각하면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고, 넷째는 항상 보시를 생각하면서 티끌 세상의 욕심을 널리 버리며, 다섯째는 항상 금계(禁戒)를 생각하면서 다시는 온갖 다섯 세계[五趣]를 그리워하지 않고, 여섯째는 항상 모든 하늘을 생각하면서 많은 덕의 근본[德本]을 펴는 것이니, 이것이 여섯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일곱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일곱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독실히 믿으면서 모든 부처님 법을 좋아하고, 둘째는 항상 자신을 부끄러워하면서
대중의 무거운 책임을 맡으며, 셋째는 남에게 부끄러워하는 생각으로 도품(道品)의 법을 생각하면서 스스로 잘난 체하지 않고, 넷째는 어질고 온화하여 남이나 나를 괴롭히지 않으며, 다섯째는 해침이 없으면서 미래 세상에 받을 재앙이나 죄를 두려워하거나 다치지 않으며, 여섯째는 남을 번거롭게 하지 않으면서 근심하지 않으며, 일곱째는 고뇌하는 모든 중생을 보면 그들을 가엾이 여기는 것이니, 이것이 일곱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여덟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여덟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아첨함이 없고, 둘째는 바라는 마음이 없으며, 셋째는 이익을 탐내지 않고, 넷째는 간탐을 버리고 의뢰하는 것이 없으며, 다섯째는 자기가 지닌 물건에만 만족할 줄 알고, 여섯째는 성현의 선정을 수행하면서 담박(澹泊)함을 갖추며, 일곱째는 한적한 곳에 있으면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여덟째는 혼자 있기를 좋아하면서 대중의 모임을 멀리 여의고 도법(道法)을 좋아하며 삼계(三界)를 두려워하며 함[爲]이 없음도 취하지 않는 것이니, 이것이 여덟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아홉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아홉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계율에 나아간 바 없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제도가 되게 하고, 둘째는 점차로 선정을 익혀 그 근원을 닦고 다스리며, 셋째는 마음으로 하여금 마침내 고뇌의 더운 열을 품지 않게 하고, 넷째는 쓸쓸하고 고요함을 구하면서 마음의 생각을 그치며, 다섯째는 바른 위의와 예절을 익히어 행하고, 여섯째는 계율을 초월해서 자기의 몸을 생각하지 않으며, 일곱째는 속이거나 헷갈리게 하는 일이 없이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면서 대승(大乘)을 두루 갖추고, 여덟째는 마침내 계법(戒法)의 업을 성취하면서 이지러지지 않게 하며, 아홉째는 마음에 늘 품고 있으면서 덕의 근본을 권하고 돕는 것이니, 이것이 아홉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열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열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몸에 대한 세 가지 일을 청정하게 하고, 둘째는 입에 대한 네 가지 일을 청정하게 하며, 셋째는 뜻에 대한 세 가지 일을 청정하게 하고, 넷째는 생각에 아첨을 버리고 뜻하는 성품이 질직(質直)하면서 쉽게 부서지지 않으며, 다섯째는 심성(心性)이
두루 들어가면서 제도를 받지 않는 이가 없고, 여섯째는 온갖 깨닫는 바에 절도와 한계를 알고 가엾이 여김을 근본으로 삼으면서 모든 번뇌를 모두 벗어나며, 일곱째는 마음에 억셈이 없이 중생을 교화하면서 업(業)을 모두 조화시키고, 여덟째는 항상 자기 몸을 닦으면서 여러 사람들을 보면 진실로 공경하며, 아홉째는 복이 많은 이들에게 불법 행하는 일[法事]을 권해 보이며, 열째는 옷과 밥만을 받으면서 세간의 일을 여의게 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일이니라.
또 계율 도무극에 청정한 행이 되는 두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헐뜯고 욕하는 이가 있어도 차라리 몸과 목숨을 잃을지언정 끝내 계율을 범하지 않고 생각도 일으키지 않으며 재물에 대한 일도 그리워하지 않는다. 둘째는 돌아다니지도 않고 또한 탐하거나 구하지도 않나니, 모든 법과 계(戒)는 공하여 형상이 없기 때문이다.
또 두 가지 일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안의 청정함[內淨]이니, 모든 쇠한 감관[入]을 제거하는 것이요, 둘째는 바깥의 청정함[外淨]이니, 모든 경계를 버리는 것이니라. 이것이 두 가지 일이니라.
또 두 가지 일이 있느니라. 첫째는 그 도의 마음[道心]을 청정하게 하나니, 스스로 그러한 모양[自然相]을 이해하기 때문이요, 둘째는 계품(戒品)이 청정하나니, 모든 모양이 없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보살의 계율 도무극에서의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이 인욕[忍] 도무극에서 행할 청정함이라 하는가 하면 욕하고 꾸짖는 이가 있어도 잠자코 대꾸하지 않으면 곧 입이 청정하다 하고, 매로 때리는 이가 있어도 맞으면서 대항하지 않으면 곧 몸이 청정하다 하며, 성을 내는 이가 있어도 가엾이 여기면서 화내지 않으면 곧 마음이 청정하다 하고, 헐뜯거나 모욕하는 이가 있어도 원한을 품지 않으면 곧 성품이 청정하다 하느니라.
또 만일 남의 추악한 말을 들으면 그 중생을 보호하면서 분을 내지도 않고 설령 어떤 이가 칼과 몽둥이를 몸에다 대거나 기와와 돌로써 때리고 던진다 하여도 뒷날을 보호하면서 해치려는 마음을 품지 않느니라.
그리고 몸을 갈기갈기 찢기면서도 근심하지 않는 것은 도(道)를 따르려 하기 때문이요, 남이 와서 구걸하는 것을 보아도 성을 내지 않는 것은 네 가지 은혜를 갚으려 하기 때문이며, 인자한
마음을 내면서 괴롭히거나 성내지 않는 것은 불도를 가까이 하기 때문이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는 것은 서원을 모두 갖추려 하기 때문이며, 공훈(功勳)이 유포되어 명(命)을 받들지 아니함이 없는 것은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많기 때문이며, 어진 마음과 덕(德)스런 이름으로 보시하는 것은 도법(道法)의 행을 악마 하늘을 버리려 하기 때문이니라.
또 부처님 도를 생각하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부처님의 몸을 이루기 위해서요, 깨닫는 뜻[覺意]을 생각하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10력(力)을 두루 갖추기 위해서이며, 지혜를 생각하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세 가지 통달하여[三達] 걸림 없기 위해서요, 가엾이 여기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크게 인자함[大慈]을 이루기 위해서이며, 제도가 허망함을 생각하면서도 인욕을 하는 것은 크게 가엾이 여김[大哀]을 다하기 위해서이니라.
생각이 사자와 같이 두려울 것 없이 인욕을 하는 것은 두려워 할 것이 없기 때문이요, 꼭대기[頂]를 볼 수 없음을 생각하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중생 가운데 있으면서도 스스로 크게 여기지 않기 때문이며, 상호(相好)를 갖추기를 생각하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널리 온갖 세상을 구제하려고 하기 때문이요, 모든 불법을 갖추면서 인욕을 하는 것은 통혜(通慧)를 이루기 때문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인욕의 힘을 청정하게 하는 데에 두 가지 법이 있느니라. 첫째는 힘써 도업(道業)을 닦는 것이요, 둘째는 뜻과 힘[義力]을 한군데로 모으는 것이니라.
그가 말하는 대로 만일 인욕하면서 몸과 마음에 기울어짐이 없으면 이것이 뜻과 힘을 모으는 것이요, 온갖 법에 집착함이 없이 인욕을 행하면 이것은 도를 닦는다는 뜻이니라.
깨끗한 참음이 있는 이는 능히 중생을 참아서 사람이 없음을 분명하게 알며, 모든 법을 다 참고 견디어 모두 담박(澹泊)하여진다. 이것이 깨끗한 참음이다. 그 까닭은 그에게 또한 참을 수 있는 것과 또한 참을 수 없는 것조차 온갖 법에서 체득할 것이 없어야 비로소 참음이라 하고 참음도 또한 얻을 수 없다고 헤아리면서 온갖 집착함이 없는 이라야 비로소 참음이라 하기 때문이니라.
또 의뢰할 것도 없고 참음에 처소가 없으므로 모든 법을 받지 않는 것을 참음이라 하나니, 취할 것으로써 인욕을 삼지 않는 것이니라.
또 그 어떤 이가 나와 사람과 수명의 법을 헤아리지 않는 것을 참음이라 하며 몸과 목숨에 집착하지 않고 살피기를 마치 담장․벽․기와 및 돌과 같이 하여야 비로소 참음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에게는 두 가지 인욕이 있나니, 첫째는 몸둥이는 흩어진다는 일을 분명히 깨달아 아는 것이요, 둘째는 모든 법은 모두 다 본래부터 없다 함을 분명히 알아야 인욕이 성취되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로서 인욕 도무극에서 행하는 청정한 것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의 정진[進] 도무극에서 청정한 행이 되는가 하면 도의 마음[道心]을 버리지 않고 일으켜야 하는 업(業)에 일찍이 겁내는 일이 없으며 항상 좇아 힘써 닦으면서 잠을 자지 않고 덕의 근본을 여의지 않으면서 공덕을 쌓으며 도무극에서 물러나거나 돌아오지 않고 만일 행을 짓는 이가 방편으로 법을 구하면 그 사람을 위하여 경전을 강설(講說)할 수 있어야 하느니라.
또 바른 법을 보호하면서 제도하는 일이 많고 큰 지혜에 싫증내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며 불국토를 청정하게 장엄하면서 소승을 제도하고 본래의 서원과 마지막의 거룩한 지혜를 두루 갖추며 일찍이 보시와 계율과 널리 들음[博聞]을 어기거나 잃는 일이 없고 방편의 지혜[權慧]를 가까이하여 벌써 복가(福家)에 이르게 되므로 마땅히 어떤 뜻으로써도 힘써 중생을 구제하면서 교만이 없게 해야 하나니, 이것을 정진이라 하느니라.
그 무엇을 말하여 청정하다[淨]고 하는가 하면 만일 몸은 마치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다 함을 분명히 깨달아 알면 하는 말이 부드럽고, 앎[識]도 게으르지 않으며, 그 지혜는 궁극에 이르고, 마음은 깨끗하고 고요하여지며, 행한 일도 영원히 다할 수 없음을 환히 알며, 모든 사라짐[滅]을 분별하면서 지혜로써 소화하며, 그리하여 한 마음[一心]의 지혜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는 세 가지 일로 정진을 여의게 되느니라. 첫째는 인연(因緣)에 의뢰하면서 집착하고, 둘째는 뒤바뀐[顚倒] 일을 행하며, 셋째는 바라는 생각이 사라짐이니, 만일 삼계(三界)에 의뢰하거나 집착함이 없으면 이것이 정진이니라.
또 세 가지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세 가지인가 하면 눈[眼]이 집착한 것이 없고
빛깔[色]에 의지함이 없으며 알음[識]을 탐내지도 않는 것이니, 귀와 소리와 알음에서도 코와 냄새와 알음에서도, 혀와 맛과 알음에서도, 몸과 접촉과 알음에서도, 뜻과 법과 알음에서도 역시 그와 같아서 역시 집착함이 없고 또한 받는 것도 없으며 익히는 것도 없나니, 그러므로 정진이라 하느니라.
보시마다 아끼지 않음이 없고, 계율마다 범하지 않음이 없으며, 인욕마다 다투지 않음이 없고, 정진마다 게으르지 않음이 없으며, 선정마다 산란하지 않음이 없고, 지혜마다 어리석지 않음이 없으며, 덕의 근본을 짓지도 않고, 또한 착하지 않음도 없으며, 부처님의 도를 구하지도 않고, 성문이나 연각의 지위를 얻지도 않으며, 그는 행하는 것도 없고 또한 행하지 않음도 없으면 곧 두 가지 정진의 청정함을 이루게 되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정진의 청정함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안으로 머무르는 것도 없으면서 모든 인연을 일으키는 것이요, 둘째는 밖으로 보는 뭇 생각과 모든 알음[識]을 버리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정진이니라.
또 두 가지 청정함이 있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청정함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속으로는 고요하고 안정되며, 둘째는 바깥으로 놀아나지 않으면서 역시 방일(放逸)함도 없는 것이니, 이것이 두 가지 청정함이니라.
그 감관[根]이 모든 행할 바에 정진하면서도 행하는 것이 없으며 또한 가벼이 놀지도 않나니, 이것이 보살로서 정진 도무극에서의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말하여 보살의 선정[寂] 도무극에서의 청정한 행이라 하는가 하면 은근히 한 마음[一心]으로 모으는 일이며 마땅히 살펴야 할 바를 관찰하면서 바르게 받아들이는[正受] 것이니, 그가 만일 한 마음의 선정[禪]을 닦으려면 물질[色]에 집착하지도 않고 느낌[痛痒=受]․생각[思想=想]․지어감[生死=行]․의식[識]도 버리는 것이니라.
그가 만일 선정을 닦는 이면 눈․귀․코․혀․몸․뜻에 집착하지 않고, 그가 만일 선정을 닦는 이면 빛깔․소리․냄새․맛․접촉[細軟] 법을 탐내지 않으며, 그가 만일 선정을 닦는 이면 땅[地]․물[水]․불[火]․바람[風]․허공[空]에 집착하지 않고, 제석(帝釋)․해․달․범천의 높은 지위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욕계(欲界)․색계(色界)․무색계(無色界)에도 집착하지 않고, 금세(今世)와 후세(後世)에도 의지하지 않으며, 몸에 머무르지 않고, 처(處)한 데도 없으며,
언사에 의지하지 않고, 마음이 고달프지도 않으며, 모두 머무는 데가 없고 돌연함[卒暴]도 없으며, 맨 끝에도 머무르지 않고 생각하는 것도 없게 되느니라.
그가 만일 선정을 닦는 이면 몸이 있다고 헤아리지 않고 모든 소견도 일으키지 않으며, 나와 사람과 수명도 탐내지 않고 미묘하게 좋은 일과 나쁜 일도 보지 않으며, 아주 없다[斷滅]고 보지 않고 덧없다[無常]고도 보지 않으며, 나고 없어지고 있는 것, 없는 것도 보지 않느니라. 그가 만일 선정을 닦는 이면 뭇 번뇌의 근원을 영원히 다하지도 않고, 모든 부처님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고요히 사라지는 증과(證果)의 자취에 들지도 않고, 또한 행할 것이 없는데서 오래 머무르지도 않느니라.
만일 선정을 수행하는 이라면 한 마음[一心]이 공(空)임을 알면서도 공을 깨달음[證]으로 삼지도 않고, 모양이 없고[無相] 바람이 없음[無願]을 구하면서도 모양이 없고 바람이 없음을 깨달음으로 삼지도 않으며, 큰 덕(德)의 갑옷을 입고서 끝없는 사랑을 행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는 생각에 머무르며 모두를 두루 갖추되 공한 일을 받들어 행하느니라.
무엇을 구족하게 공한 일을 행한다 하는가 하면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를 생각하지 않고, 좋은 방편으로 교화할 것들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慈)․비(悲)․희(喜)․호(護)도 생각하지 않고, 거룩한 지혜[聖慧]에 드는 것도 바라지 않으며, 도의 마음[道心]으로 관찰할 것도 생각하지 않고, 뜻하는 성품으로 해야 할 것도 생각하지 않으며, 네 가지 은혜준 이에게 어짊과 사랑을 베풀면서 사람들을 평등하게 이익 되게 하며, 모두를 구제할 것도 생각하지 않느니라.
그 뜻이 조용하면서 둘 곳이 있는 것도 생각하지 않고, 사념처[意止:念處]와 4정근[意斷:正勤]과 4신족(神足)과 5근(根)과 5력(力)과 7각지[覺意:覺支]와 8정도[由行:正道]도 생각하지 않으며, 고요하고 조용하게 관찰할 법도 생각하지 않고, 조화와 안정을 이루는 부드러운 행동도 생각하지 않으며, 자신과 남에게 부끄러워 할 줄 알면서 부끄러워하지 않느니라.
항상 불도에 머무르면서 단절(斷絶)하는 일이 없고 법안(法眼)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번쩍거리는 횃불을 들며, 성인 대중의 계율을 좇으면서 언제나 깨끗하게 닦고 밝게 중생을 관찰하면서 부처의 몸을 성취하며, 덕(德)으로 장엄하면서 세간의 영웅이신 부처님을[世雄] 따르고, 구족한 음성을 들으면서 부처님의 삼매(三昧)를 받들며, 바르게 깨달은 신족(神足)의 변재를 얻고,
열 가지 힘[十力]을 받아서 두려울 바 없는[無所畏] 데에 머무르며, 미묘한 열여덟 가지 다른 사람과 공유하지 않는 모든 부처님의 법에 이르고, 성문이나 연각과 더불어 같게 되지 않느니라.
그칠 곳[止處]과 모든 욕심의 더러움을 뽑아내고, 신통을 여의지 않으면서 중생들을 인도하며, 4분별변(分別辯)으로 정진함이 명료하고, 이 세상에서 세간을 제도하는 법으로 중생들을 교화하며, 남들과는 뛰어나게 다르면서 질직(質直)하게 출가하고, 센 물결을 건너면서 넓은 강을 지나가며, 모든 가진 물건과 살던 곳을 끊고 저절로 고요하여져서 법을 가르침이 담박(澹泊)하며, 몸과 법을 살피면서 탐애하는 것이 없고, 불법에 뜻하면서 스스로 그러한 생각[自然想]을 환히 알며, 모든 서고 가고 잠잠하고 말하는 일들을 초월하면서, 말이 있을 때는 항상 부처님의 말을 펴고 이러한 지극한 정성으로 항상 그러함[常然]을 없애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을 구족하게 공을 행한다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비유하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인민들이 모두가 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하자. 저마다 익힌 것이 있지만 솜씨도 같지 않고 능력도 틀리므로, 어떤 이는 집은 잘 그리면서도 사람 몸은 잘 그리지 못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본떠 그려 놓고도 색칠을 잘 못하기도 하며, 어떤 이는 손발을 잘 그리고 또 귀와 눈을 잘 그리는 이도 있으며, 혹은 머리는 시원찮으면서도 몸은 예쁘게 그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그것도 그릴 수 없는 이도 있으며, 익힌 것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사람처럼 되기도 하고 사람처럼 되지 않기도 하는 등 아는 것도 서로가 다르고 용모도 같지가 않게 되느니라.
왕이 그 그림 그리는 이들을 모두다 불러서 모두가 다 때맞추어 오자 왕은 그들에게 삼계(三界)의 모든 형상을 그리게 하면서 말하기를 ‘저마다 그림을 그린 뒤에 나에게 가져와서 보이도록 하라’고 하고 모두 한군데다 모아놓고 저마다 그림을 그리게 하면 그 중 어느 한 사람이 가장 훌륭하게 그 형체를 그릴 것이니라. 족성자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모두가 자기 능력대로는 다 잘할 수 있다고 여기느냐?”
대답하였다.
“예, 잘할 수 있으리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빌어서 이 이치를 알게 하리라. 마치 그림을 그리는 어떤 이가 모든 형상을 그리면서
저마다 그 자체를 얻어 그 본 뜻을 잃지 않는 것처럼, 이 법을 배우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은근하게 정진하면서 범행(梵行)을 깨끗이 닦으면 부처님 법을 이루게 되며, 하나를 바르게 행함으로써 많은 일을 모두 갖추게 되나니, 이로 말미암아서 공의 행을 두루 갖추어 통달하지 않음이 없으면 곧 온갖 부처님 도를 성취하여 티끌 세상의 욕심과 뒤바뀐 많은 생각과 젠체하면서 뽐내는 것과 좋지 않은 방일(放逸) 등을 모두 없애게 되며, 비록 더러운 곳에 있더라도 그들과 함께 닮게 되지 않느니라. 이것을 ‘보살이 공의 행[空行]을 두루 갖추게 된다고 한다.’
이 말씀을 하실 때에 8천의 보살은 두루 공의 행을 갖추고 법인(法忍)을 체득하였다. 이것이 보살의 선정 도무극에서의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의 지혜[智] 도무극에서의 청정한 행이라 하는가 하면 청정한 행이 되는 것에 열두 가지 일이 있느니라. 어떤 것이 열두 가지 일인가 하면 과거 세상을 보는 지혜가 걸림이 없고 미래 세상을 보는 지혜가 걸림이 없으며 현재를 보는 지혜가 걸림이 없어서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모두 환히 깨달아 알므로 온갖 세간의 모든 재주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분명하게 알면서 세간을 제도하고 진리[眞諦]의 이치를 분별하여 설명하며, 그가 익힌 것을 알아서 그 처음과 끝[本末]을 펴고, 모든 중생의 근성(根性)으로 나아가 못난 사람과 잘난 사람과 그 중간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아는 지혜에도 걸림이 없느니라.
그 거룩함은 높고 뛰어나서 세간의 지혜를 초월하였으므로 중생의 뜻하는 성품과 행하는 것과 모습이 변하여 달라짐과, 알기도 어렵고 미치기도 어려운 깊숙한 이치를 모두 보면서 모든 소견을 없애고 뭇 삿되게 머무르는 모든 곳에서의 장애 되는 일을 여의며, 성스런 지혜[聖慧]에 들어가서 중생에게 두루 미치게 하고, 법의 지혜[法慧]에 들어가 거룩한 법장[聖藏]의 이치에 귀착하는 것을 밝게 알아 진실로 들어갈 바를 환히 아느니라.
그 광명이 비추는 곳은 착각이나 어지러움이 없고 장애도 없으며 시절(時節)을 관찰하고 즐기는 것이 한량없으며 보게 되는
모든 일은 모두 다 분명히 알면서 어기거나 잃는 것이 없고 진실[誠諦]을 깨달아 알아서 참으로 없애 다하지 않으며, 그가 관찰하는 모든 것은 다 어김이 없고 한결같이 행하면서도 행한 것이 없으며 중생들이 받들어 행하는 위의와 예절을 모두 다 보고 세간 대중들의 마음과 뜻이 나아가는 것도 보살은 모두 보느니라.
세간을 여의지 않으면서 모든 세간의 경계를 모두 뛰어나고 아직 부처님의 국토를 성취하지는 못하였으나 온갖 짓는 인연을 초월하면서 중생들을 교화하며, 모든 행(行)이 뛰어나면서 두루 많은 덕행을 마치고, 온갖 인연으로 짓는 마음의 작용를 널리 제도하여 중생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모두 보고, 세간의 법을 보살핌이 두루 미치게 하지 않음이 없고, 세속에서 행하는 것을 버리지 않고 진실로 중생의 생각[念]에 들어가느니라.
그 지혜를 헤아리건대 갑작스러움이 없고 위험한 일을 범하지 않으면서 모든 감관이 고요하며, 일찍이 고달퍼하거나 게으름이 없어서 산란하지도 않고 영원히 거룩한 지혜를 관찰해서 항상 덕(德)과 합치되며 보리수에 나아가 도량(道場)에 앉아서 뭇 악마를 항복 받고 외도(外道)를 버리느니라.
행에는 받는 것이 있으면서 성스럽게 빛나고 널리 사무치며, 또한 취할 것도 없으면서 큰 성인만이 미칠 수 있으며, 모든 부처님의 머무름을 얻어 중생을 즐겁게 하고, 선정과 지혜[定慧]를 모두 보면서 많은 이치에 두루 들어가며, 모든 법을 모두 같은 맛[同味]으로 삼아 권방편[權方便]의 지혜 도무극을 붙잡고 저 언덕에 건너감이 한량없으므로 이것을 지혜 도무극이라 하고, 온갖 인연으로 일어나는 많은 생각과 상서로움[瑞應]과 기이한 변화[怪變]와 마음의 작용으로 생각하는 것을 모두 환히 깨달아 알면서 건너갈 수 있게 하므로 이것을 곧 저 언덕으로 건너간다고 하느니라.
또 이 지혜를 헤아릴 때에 두 가지 청정함이 있느니라. 첫째는 장애 없는 지혜[無礙慧]라는 생각에서의 청정한 행이요, 둘째는 엄숙하게 청정하므로 어떤 사람도 그 지혜의 모양에 당할 수 없는 것이니라.
또 두 가지 청정함이 있나니, 첫째는 청정하여서 뒤바뀜이 제거되고,
둘째는 청정하여서 모든 소견을 버리게 되는 것이니라.
또 그 보살이 행하는 지혜는 두루 들어가지 않음이 없고 거룩한 광명이 갖추어져 있으며 중생을 환히 알고 경전을 통달하여 아느니라. 그 보살은 이 지혜로써 있는 바가 없음[無所有]을 알면서 모두 번뇌의 세간에 들어가 친히 애욕을 다스리고, 태어난 곳에서는 모든 세계에 있으면서 지혜를 이룩하여 모든 국토에 노닐면서 모두 경계와 진실한 지혜를 환히 알되 저 언덕과 이 언덕을 건너지도 않고 그 중간에 처하지도 않느니라.
그 지혜는 두루 들어가서 시방을 보되 걸리는 바가 없고 가리움이 없는지라 끝없는 맨 끝에 이르게 되며, 진실한 지혜를 본지라 온갖 모든 법의 처음과 끝[本末]과 부분[部黨]과 알맞은 때[時節]를 환히 깨달아 알고, 이미 진실한 지혜로 이치가 돌아가는 바를 알고 분별하였기 때문에 응함[應]이나 응하지 않음이 없으며 합침도 없고 분별도 없으며 게으름도 없고 정진함도 없으며 함께 함도 아니고 외톨이도 아니며 모든 법을 헤아리는 데서도 역시 응하거나 합침이 없느니라.
또 족성자야, 보살이 만일 지혜의 일을 행하게 되면 지혜로써 집을 삼아 곧 복 집[福堂]을 이루게 되고 돈독한 믿음과 도법(道法)의 방으로 삼아 총지(總持)와 분별지변(分別智辯)에 머물러 온갖 것이 두루 갖추어지고 지혜에 관한 일이 온전하게 되느니라.
족성자야, 이것이 보살이 지혜 도무극을 받들면서 닦는 청정한 행이니라.”
이 말씀을 다 하시고 나자 그때 모임 안에 있던 2만 2천 사람이 모두 최고의 바르고 참된 도의 뜻[正直道意]을 내었고 8천의 보살이 생겨남이 없는 법인(無所從生法忍)을 체득하였으며 5천의 비구는 번뇌가 다하여 뜻이 풀리고 1만의 천자는 티끌을 멀리하고 때를 여의어[遠塵離垢] 모든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그때 모든 천자들은 소리 높여 찬탄하였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모든 도무극(度無極)의 청정한 행의 도(道)에 대한 법문을 들으면 곧 모든 부처님의 수기(授記)를 얻게 되겠거든 하물며 어떤 이가 듣고서 잘 받들어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면서 위의 가르침대로 수행함이오리까?”
부처님께서
보계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말하여 보살로서 부처님의 도품법[佛道品法]에서의 청정한 행이라 하는가 하면 스스로 그의 몸[身]을 관찰하여 본래부터 몸이 없는 줄을 아는 것이 뜻에 머무름[意止]이 되나니, 곧 두 가지 일로써 그 뜻을 세우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일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거칠고 더럽다[荒穢]고 살피는 것이요, 둘째는 청정한 행[淸淨行]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거칠고 더럽다고 하는가 하면 이 몸은 무상(無常)하고 깨끗하지 못한 것이 가득 차 있으며, 이 몸은 힘도 약하여 세력이 없고, 이 몸은 임시로 서 있는 것이 마치 다 기울어진 집과 같다는 것이며, 어떻게 청정한 행을 관찰한다 하는가 하면 ‘나는 이 깨끗하지 못한 몸으로써 부지런히 힘쓰면서 공임을 알아 여래의 몸과 법의 몸[法身]을 얻어야 하며, 법신은 높고 뛰어나며 덕을 갖춘 몸[德身]이라 한량이 없나니,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육신의 모습을 나타내 보여서 모두를 기쁘게 하리라’고 하는 것이니라.
이것이 족성자야, 몸의 두 가지 일을 관찰해서 그 뜻을 세우는 것이니라.
또 족성자야, 보살은 몸을 관찰하여 몸이 없음을 분명히 알고 나면 청정한 두 가지 법을 얻게 되느니라. 무엇을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보는 것이요, 둘째는 있다[有常]고 살피는 것이니라.
‘이 몸은 무상하여 오래 존립할 수 없고 늙음과 질병이 다가와 마침내 죽음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나니, 이미 이런 이치를 통달하고 나면 몸 때문에 삿된 행위를 짓지 않고 몸을 탐내지도 않으면서 굳고 긴요한 도를 닦으며 세 가지 굳은 법을 행하게 되나니, 첫째는 몸의 긴요함[身要]이요, 둘째는 목숨의 긴요함[緊要]이며, 셋째는 재물의 긴요함[財要]이니, 이 몸은 무상한 것인데도 모든 중생들은 귀하고 소중히 여기고 있다. 무엇이 이익 되겠느냐. 마땅히 마음 아파해야 하느니라.
무엇을 몸의 긴요함이라 하는가 하면 몸이 죄악을 범하지 않고 겸손하며 공손히 따르면서 지혜가 많은 이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것이요, 무엇을 목숨의 긴요함이라 하는가 하면 3보(寶)에게 귀의하면서 열 가지 덕[十德]과 육바라밀[度]과 네 가지 같음[等]을 받들어 닦는 것이다. 무엇을 재물의 긴요함이라 하는가 하면 자기 것을 덜어서 보시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주는 것이니라.
몸은 나의 소유[所有]가 아니요 입으로 말하는 것도 모두가 허물이 많아서 아첨하고 추악하며 바르지 못한 말을 하기에 이르나니, 이 때문에 이런 행을 모두 버리고 다시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 이미 몸은 없고 수명은 보전할 수 없음을 보았으니 설령 손해를 입는다 해도 악한
일을 범하지 말 것이요, 몸은 덧없고 흩어지는 법임을 깨달았으니 마땅하지 않은 일은 하지 말 것이며, 온갖 가진 물건을 보시하여 탐냄이 없고, 이미 몸이 없음을 알게 되면 그 얻게 되는 착한 덕과 공훈은 뚜렷이 드러나면서 헤아릴 수도 없고, 함도 없으리라.
무엇을 함이 있다[有常]라고 하는가 하면 설령 몸을 관찰하여 몸이 없다 함을 분명히 아는 이라 하여도 따로 마음으로 아는 지혜를 섭취하여 온갖 지혜[一切智]를 관찰하여 부처님의 가르침을 어기지 않고 법의 말씀[法言]을 잃지 않으며 성인 대중을 무너뜨리지 않으면서 중생을 교화하고 대중들을 거두어 주는 것이니, 이것을 함이 항상함[常]이라고 말하는 것은 다할 수 없기[不可盡] 때문이며 다함이 없고 하는 것은 무위(無爲)를 말하는 것이니라. 그것은 도(道)와 더불어 일치한 것이라 끝도 없고 시작도 없으며 현묘하여 영원히 존재하므로 이것을 무위라 하며 그 무위는 바로 영구할 뿐이니, 보살은 거기에 있으면서 모든 덕의 근본으로써 모든 신통과 지혜를 관찰하여 무위에 이르게 되므로 이것을 항상함이 있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항상 하다 함은 공하고 모양이 없고 바램이 없는 것으로써 보살의 도를 닦되 항상 공의 행을 받들고 모양이 없음을 관찰하며 바램이 없다고도 집착하지 않으면서 두루 온갖 정진의 행을 갖추는 것이니, 이것을 항상 함이 있다고 하느니라. 말한 바 항상 하다 함은 마치 허공과 같은 것을 말하므로 보살이 마음을 평등하게 지니기를 마치 허공과 같아서 다름도 없고 생각도 없나니, 이와 같이 행한 이를 보살이라 하며, 이것을 항상 함이 있는 최고의 바르고 참됨[無上正眞]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몸을 관찰하면서 본래부터 몸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 곧 뜻에 머무름[意止]이면 주라 하느니라. 온갖 사람의 몸은 모두 다 본래부터 공하기 때문에 몸이 공함을 알면 뜻에 집착할 것이 없게 되므로 중생의 몸을 관찰할 때에 바로 그 몸은 부처님 몸[佛身]인 것이니, 마땅히 관찰하기를 ‘만일 여래의 몸에 모든 번뇌[漏]가 없다면 나의 몸도 역시 그렇다’라고 하여야 하며 모든 법을 자세히 살피면서 도의 의치[道義]을 받들어 행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잃지 않으며 번뇌가 없는 몸이 되어서 중생을 관찰하고 모든 모양을 분별하되 번뇌가 없는 몸으로써 하느니라. 번뇌가 없어서 청정하면 본제(本際) 역시 청정하며 마치 그 덕의 근본이
모든 행을 일으켜 세우는 것처럼 덕의 근본을 권하고 돕는 것도 역시 모든 번뇌가 없나니, 번뇌가 없는 법에 이르게 되면 모든 번뇌에 머무를 수 있느니라.
무엇을 모든 번뇌[漏]라 하는가 하면 첫째는 욕망의 번뇌[欲漏]요, 둘째는 존재의 번뇌[有漏]며, 셋째는 견해의 번뇌[見漏]이니라. 그가 욕망의 번뇌를 끊고 설령 욕심 세계[欲界]에 태어나 중생을 교화하며 만일 있음의 번뇌를 끊으면 생사(生死)에 노닐면서 모든 받은 것을 대중들에게 가르쳐 주며, 또 견해의 번뇌함은 바로 무명(無明)의 어리석고 어두운 번뇌이니, 보살은 거기에서 정진하여 게으르지 않고 마지막까지 정진하여 그 근원을 뽑아버릴 것이니라.
그가 만일 몸을 관찰하면서 뜻에 머무름[意止]을 받들어 닦으면 지난 옛날의 모든 하지 않았어야 할 행을 초월하여 뭇 더러움[穢]을 여의고 담박(澹泊)을 따르게 되나니, 이렇게 몸을 관찰하면 곧 제도할 것도 없고 또한 생하는 것도 없으며 그러므로 할 것도 없느니라.
이렇게 몸을 관찰하나니 설령 관찰하였다 하여도 몸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또한 살필 것도 없으며 탐내는 몸을 버리고 나를 헤아리지도 않나니, 이미 나가 없으므로 탐낼 것도 없고, 이미 탐낼 것이 없으므로 다툴 것도 없으며, 이미 다툴 것이 없으므로 재앙도 없고, 이미 재앙이 없으므로 법인(法忍)을 체득하며, 이미 법인을 체득하였으므로 돌아갈 데도 없고, 이미 돌아갈 데가 없으므로 갑작스러움[卒暴]도 없으며, 이미 갑작스러움도 없으므로 스스로 큰 체하는 데에 머무르지도 않고, 곧 법에 머무르게 되느니라. 이미 법에 머무른 이는 그릇된 법을 행하지 않고 법을 따라 행하는 이라 항상 법과 함께 하며, 도법을 닦는 이는 곧 법의 사랑[法慈]을 체득하게 되고, 이미 법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법의 소리[法音]를 듣게 되며, 이미 법의 소리를 행한지라 경계의 소리[界音]를 듣지 않게 되며, 이미 경계의 소리가 고요하기 때문에 곧 삼매(三昧)를 체득하게 되고, 이미 대경을 바르게 받아들이기 때문에[正受] 관찰함이 자세하게 되느니라. 이미 관찰함이 자세하게 되면 곧 생각하는 것도 없고, 이미 생각한 것이 없으면 곧 짓는 것이 없으며, 이미 지은 것이 없으면 짓지 않은 것도 없고, 이미 모든 지음에 지음이나 짓지 않음도 없으면 바르고 참된 법[正眞法]에 이르러 곧 모든 법에 평등하여지고, 이미 모든 법에 평등하기 때문에 곧 신통의
지혜 등 온갖 지혜를 체득하게 되느니라. 이것이 족성자 보살이 몸을 관찰하되 본래부터 몸이 없음을 분명히 알면서, 뜻으로 하여금 그 경계에 머무르게 하는[意止]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무엇을 보살의 느낌[痛痒:受]으로 뜻에 머무름[意止]이라 하는가. 느낌에는 본래부터 느낌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이렇게 그 뜻에 머무르게 되느니라. 모든 괴로운[苦] 느낌을 보되 모두가 중생은 모두 근심과 어려움에 있다고 보면서 그들을 위하여 눈물을 흘리게 되면 크게 가엾이 여기니 오직 생각하기를 많은 사람들이 고뇌에 있으나 만일 편안함을 얻으면 비로소 고통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서 곧 온갖 위험과 해로움을 끊어 없애준다. 이리하여 느낌을 관찰하면서 본래 느낌이 없다 함을 알면 뜻에 머무르면서 행하는 것에 벌써 느낌이 사라지고,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큰 덕의 갑옷을 입게 되면서 먼저 자신의 그릇된 법 행을 없애고 또한 이미 느낌이 사라졌다는 생각조차도 하지 않는다.
만일 느낌이 일어나면 널리 모두를 위하여 크게 가엾이 여기면서 그들에게 영원한 안락을 보여 많은 근심을 없애준다. 탐욕을 내는 사람을 위해서는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먼저 자기의 탐욕을 없애어 탐욕에 묶이지 않으면 설령 몸에 고통을 당한다 하여도 어려움으로 여기지 않게 되는 것이요, 성내는 사람을 위해서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자기의 성내는 번뇌를 끊으면 그는 곧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不苦不樂] 느낌을 보게 된다. 어리석은 사람을 위해서도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내면서 자기의 어리석음의 속박을 없애면 그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관찰하면서 집착하는 것이 없고 모든 번뇌를 녹여 무너뜨리면서 스스로 편안함을 누리게 되느니라.
만일 괴로운 느낌이 있더라도 근심하지 않고 모든 유위(有爲)를 버리면 곧 잘 좇아 닦아서 괴로움과 즐거움이 없게 되고 그로써 어리석음이 무너지게 되며, 설령 즐거운 느낌이 있더라도 쌓아 모으는 것이 없고 설령 많은 환난을 만난다 하여도 몸이 덧없다 함을 분명하게 알므로 괴로운 느낌을 관찰하면서 느낌에는 나가 없다고 살피게 되나니, 그는 즐거운 느낌을 관찰하여 안온함을 닦아 행하며, 그 괴로운 느낌은 곧 창병(瘡病)이 된다고 관찰하느니라. 이 때문에 즐겁지도 않고 괴롭지도 않다고 하느니라.
설사 모든 존재하는 것이 안락한 것이라고 본다 하여도 모두 무상(無常)한 데로 돌아가 그것에는 많은
고통이 있는 것이다. 괴로운 것에 대하여는 괴롭지도 않고 즐겁지도 않으며 역시 나도 없다고 헤아린다. 보살이 만일 모든 안락한 일을 보면 모든 것은 본래 안락한 것이 없다고 분명히 알면 이것이 느낌을 관찰하는 것이니라. 느낌은 뿌리가 없어서 생기자마자 이내 없어지는 줄 알고, 모든 법은 오래 머무를 수 없음을 깨달아 알며, 만물은 불꽃처럼 생겼다가 갑자기 없어진다고 자세히 살피고, 온갖 법이 생기는 것은 마치 그림자와 같아서 어디서 왔다가 이내 흩어져 없어지는 것이라고 보며, 모든 법은 본래 손바닥을 보는 것과 같다고 관찰하면서 ‘어디서부터 왔고 갈 때는 어디로 가는 것인가’라고 하면 곧 어디서부터 오는 것도 없고 가도 어디로 가는 곳이 없음을 환히 알게 되므로 모든 법을 관찰함으로써 걱정으로 여기지 않고, 온갖 것을 널리 보면서 독실하게 믿으면 쉬게 되느니라. 이로 인하여 도(道)를 이루게 되고 도를 이룸으로써 역시 얻는 것도 없으며 다시 물러나거나 되돌아오지도 않느니라. 무슨 까닭인가 하면 모든 사람들이 근본에서 일으킨 이 사라져 다함[滅盡]을 알면서도 자기 몸을 위해서는 사라짐[滅]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이것이 족성자․보살․대사(大士)가 좋은 권방편(權方便)으로 크게 가엾이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은 없다 함을 분명히 알아 뜻에 머무는 행이 되나니, 모든 소견을 없애고 여기에서 삼계(三界)의 모든 느낌을 만나지 않고 번뇌가 고요히 사라져 깨달음의 끝[證際]을 취하게 됨을 분명하게 아느니라.
그는 많은 느낌에 대하여 부처님이 찬탄하신 근본임을 관찰해서 모든 느낌은 고요하고 담박(澹泊)하여 본래 있는 것이 없음을 알면 역시 어려움을 만나는 일도 없고, 영원히 어려움을 만남이 없으면서 모든 법이 다 공하여 나를 여의게 되며, 다만 인연(因緣)에 의지하여 모였다고 보면서 모두 주인도 없고 또한 나도 없으며 모든 소견을 버려서 기르는 바가 없게 되느니라.
그가 이와 같이 관찰하면 곧 진실로 보는 것이어서 인연으로 모인 바도 얻을 수 없다. 이미 얻을 수 없으면 곧 ‘마치 인연이 공함과 같이, 이로부터 일어나는 모든 법도 역시 공하다고 관찰한다. 이미 공의 이치를 통달하였기 때문에 비로소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이 없다고 여겨 뜻에 머무르게[意止] 되나니,
이른바 고요하게 몸이 담박하여지기 때문에 모든 이치를 가려내는 도의 거룩한 지혜가 된다.
이것이 족성자보살이 몸의 느낌을 관찰하여 본래 느낌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 뜻에 머무는[意止]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마음[心]을 관찰하여 본래 마음이 없다 함을 분명히 알면 뜻에 머무는[意止] 행이 된다. 도의 마음[道心]에 서서 그로써 마음을 세우게 되며 자기 뜻의 지혜로써 그 마음의 근본을 구하여도 안의 마음을 보지 못하고 바깥의 마음도 보지 못하고 안팎에도 머무르지 않는다. 그 마음의 근본을 자세히 살펴도 5음(陰)을 보지 못하고 네 가지 요소[四大種]도 없으며 여러 감관[諸入]도 없으며 그 마음은 고요하여 평정하느니라.
그 지탱하는 곳은 어디서부터 일어나게 되는가를 구하면 곧 다시 마음은 연(緣)으로부터 일어난다고 생각하게 되며 다시 또 생각하기를 ‘그 마음이 달라지는 것인가, 인연이 달라지는 것인가’라고 한다. 또 스스로 다음과 같이 분명하게 안다. 설령 인연이 달라지면 그 마음이 달라진다고 하는 두 가지 마음이 있게 된다. 설령 인연이 바로 마음이며 마음 그것이 인연이라면 이 때문에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한다. 그러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마치 거짓이요 진실이 없는 모든 티끌 세계가 허공에 머무르는 것과 같고 날카로운 칼로 손가락을 다치게 하면 그 때에는 상처가 있지만 손가락의 상처가 나으면 아픔이나 괴로움이 없는 것도 이와 같다. 성자야, 마음도 역시 그와 같다. 이런 까닭에 마음은 마음을 보지 못하고 마음으로 보게 되는 것도 곧 보는 것이 없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마음이 머무르는 곳을 관찰하면 역시 죄를 일으킴도 없으며 아주 없다[斷滅]고도 보지 않으며 항상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고 또한 몸도 없으며 몸은 마치 담장이나 벽과 같다고 하여야 하느니라. 그리고 인연이 어지럽히지 못하고, 근심 걱정을 여의지도 못하며, 또한 이것이 있지도 않고, 또한 다른 것이 있지도 않나니, 이것이 마음이니라. 마음 지니기를 이와 같이 하면 마음이 움직여서 법이 되나니, 마음은 머무르는 데도 없고 또한 행하는 것도 없으며 마음은 볼 수도 없고 마음의 모양은 스스로 그러하므로[自然] 이렇게 깨달아 알고 보는 것이 이와 같다면 보는 바를 여의지 않으면서 그 마음은 고요하여지고 뿌리가 없음을 밝게 알게 되나니, 이것이 보살로서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없음을 아는 뜻에
머무름[意止]이 되느니라.
또 족성자야, 설사 마음을 일으키지 않는다 하여도 볼 수가 없고 생각도 없어서 응함[應]이나 응하지 않음도 없으며 또한 가벼이 여김도 없고 방일하지도 않으면 이것이 마음을 관찰하는[觀心] 것이요 본래 마음이 없음을 알면 뜻에 머무름[意止]이 되느니라.
또 마치 마음이 빛깔이 없는 것처럼 그 인연이 모임과 변재(辯才)도 역시 그와 같아서 덕의 근본[德本]도 빛깔이 없어서 마치 마음이 함[心無爲]이 없는 것처럼 덕도 역시 빛깔이 없고 권하는 것도 도의 마음도 역시 빛깔이 없으며 설사 도의 마음과 권하고 도와주는 것도 형색이 없으므로 도(道)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있는 바가 없느니라.
그러므로 말하기를 ‘마치 그 마음과 같이 하는 이는 행도 그와 같이 하고, 권하면서 돕는 도의 마음 같은 것을 헤아려 보아도 역시 그와 같으며 마치 그 도의 마음과 같이 사람의 마음이 본래 청정한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도의 마음도 본래 청정하고 온갖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다’라고 한다. 이런 마음과 같이 하면 깨달아 알면서 널리 들어가느니라. 이것이 보살로서 마음에 마음 없음을 관찰하면서 뜻에 머무는[意止] 것이 되느니라. 뭇 환난에 시달리면서 일찍이 멈추는 일이 없음은 마치 원숭이나 빨리 흐르는 강물과도 같다. 또한 등불의 빛이 빛나다가 홀연히 꺼져가는 것과 같아서 몸은 모습이 없어지면서 쉬이 물러나게 되거늘 모든 경계를 탐내고 아끼는 여섯 가지 마음의 근심으로써 집을 삼아 잠깐 동안에도 변하며 달라지면서 저마다 알맞은 바를 따르거니와 ‘마음은 처소가 없으면서 혼자 돌아다니고 견고하거나 긴요함도 없으며 또한 긴요하지 않은 것도 없다’라고 고요히 혼자 관찰하면 이것을 마음에 마음이 없음을 관찰하면서 뜻에 머무는[意止] 청정함이라 하느니라.
마음이 들어갈 지혜는 마음의 법계(法界)이니, 지혜의 마음이 머무르는 그 광명은 본래 깨끗하여 산뜻하고 더러움이 없으며 마음의 참된 이치를 안다. 현재 눈으로 보게 되는 마음과 법이 평등함을 깨달으면 지혜도 역시 마음과 같다. 마음은 3세(世)에 평등하며 이미 평등하여지면 곧 참되고 바름[眞正]을 알면서 마음과 지혜는 스스로 그러하여[自然] 보호하거나 지닐 수도 없고 관찰하여도 볼 수가 없나니, 이것을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라고 할 것이 없다고 하며 뜻에 머무름[意止]이라 하느니라.

그 본래 깨끗함을 헤아리면 곧 스스로 그러하기[自然] 때문에 마음 역시 본래 깨끗하여 중생의 마음을 환히 알며 마음이 깨끗하기 때문에 사람들을 교화하면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고 자기의 마음이 스스로 그러함을 잘 알므로 모든 중생도 역시 또 스스로 그러한 줄 아나니, 만일 마음이 이와 같다고 분별할 수 있으면 그 마음의 모양을 보면서 그들에게 설법하며 마치 마음의 모양이 스스로 그러한 것처럼 중생의 마음의 모양이 스스로 그러한 것도 그와 같으니라.
만일 이 모양을 통달한 이면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되 자기 마음이 공하기 때문에 중생의 마음도 역시 공하며 이미 이 공함을 알고 나서 그들에게 설법하므로 자기 마음을 평등하게 부린다. 만일 마음을 평등하게 부리면서 설법하게 되면 자기 몸도 곧 평등하여지며 이미 자기의 마음이 평등하기 때문에 중생에 대해 평등하고 이미 중생에 대해 평등하면 모든 법에 평등하며 이미 모든 법에 평등하면 모든 부처님에 대해 평등하여지느니라. 이러한 진리를 깨달으면 그 마음으로 하여금 탐욕을 여의게 하지도 않고 탐욕에 처하지도 않는다. 마음이 이미 머무르게 된 이는 곧 법계(法界)에 들어가 스스로 그러함[自然]에 나아가면서 마음은 머무르는 곳이 없고 법에서도 동요함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이 마음을 관찰하여 마음이 없다고 하는 뜻에 머무르는[意止] 청정함이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살이 법(法)을 관찰하면서 본래부터 법이 없는 줄 알면 뜻에 머무는[意止] 행이 되느니라. 곧 스스로가 생각하기를 ‘법이 생기면 곧 생기고 법이 사라지면 곧 사라진다. 처음과 끝을 헤아려 보건대 역시 나의 몸도 없고 사람도 수명도 없으며 사람과 사람 아닌 이[非人]가 나고 늙고 병들고 죽거나 죽은 뒤에 나아가는 데도 없다. 이 모든 법에서는 모든 법이 합하고 모인지라 그 합하고 모임으로 인하여 습관이 되거니와 만일 인연의 합함이 없으면 이런 것도 없다. 그 습관을 좋아함에서 인(因)이 이루어지고 연(緣)이 모여 선(善)의 근본과 악(惡)의 근본을 일으키지만 무상(無常)한 데로 돌아가고 나면 인연의 모임도 없게 되는지라 습관도 없는 것으로부터 모든 법을 일으키지 않는다’라고 하느니라.
그가 이렇게 관찰하여 모든 법을 환히 깨달으면 귀착하는데도 역시 아무것도 없어서 공하여
모양도 없고 소원도 없으며 짓는 공덕과 공덕이 없는 것 등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마치 허깨비와 같아서 덧없다고 보게 되나니 마땅히 정진을 받들어 행하면서 설령 인연이 일어났다 하여도 열 가지 높은 행으로서 극히 으뜸가고 더 숭상할 수 없는 것이 있으므로 인연을 제거하고 큰 법[大法]에 뜻을 두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을 열 가지라 하는가 하면 몸이 깨끗하여 더러움이 없고 모든 상호(相好)와 종호(種好)로 정수리를 볼 수 없어서 온갖 모든 침해를 벗어나며 뜻하는 성품이 청정하여 열 가지 일을 두루 갖추고 그 마음이 청정해져서 바른 행을 완전히 갖추며 60억의 음성을 내어 중생을 즐겁게 하여주며 그 마음이 청정한 이는 항상 인자한 생각을 품고 온갖 것을 가엾이 여기어 해를 끼침이 없으면서 그 뜻은 언제나 안정하여 일찍이 산란함이 없느니라. 변재가 청정하여 강설(講說)할 때에는 법의 이치에 알맞으면서 변재가 다함이 없으며 큰사랑[大慈]이 청정하여 중생을 깨우쳐주고 교화하여 모두가 열반의 경계를 즐기게 하며 크게 가엾이 여기고 청정하여 수없는 겁 동안 나고 죽음을 싫어하지 않으며 열 가지 힘을 청정하게 하여 중생의 근원과 생각하는 바가 각각 같지 않음을 환히 깨달아 아느니라. 청정하고 두려움이 없으면서 헤아릴 수 없는 법과 중생의 쌓인 무더기[積聚]를 분별하고 어거하며 모든 부처님만이 지니는[不共] 법을 갖추고자 하면서 과거․미래․현재의 지혜가 3세(世)에 걸림이 없으며 모든 부처님의 법이 청정하여 작용이 자재하면서 거룩한 지혜에 돌아가게 하기 때문이니, 이것이 열 가지니라.
그는 이미 이 높고 묘하고 극히 으뜸가서 더 능가할 것이 없는 큰 법의 열 가지 행에 이르게 되면 헤아리고 생각해서 싫어하거나 게으르지 않으며 공훈을 쌓으면서 덕이 없는 행에 떨어지지 않고 은근하게 정진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말하여 모든 법이 근원에서 오는 처소가 없게 되며 머무르는 모든 묵은 번뇌[塵勞]에서 건너간다고 하는가 하면 만물이 모두 무상한 것인 줄 이미 깨달았기 때문에 무상삼매(無常三昧)를 이루게 되고 이 선정을 얻은 이는 견고하고 긴요한 생각[緊要想]이 없으면서 삼매에서 산란하지 않으며 그 본래의 서원[本願]에 따라 향하여 태어날 곳을 보이며
그로부터 와서 들어가는 바가 있어서 다시 태어나게 되어 공덕의 행을 널리 펴면서 중생을 교화하나니, 이것이 족성자 보살․대사(大士)가 좋은 방편으로 경전을 두루 설하여 모든 법을 관찰해서 본래 법이 없는 줄 통달하여 뜻에 머무는[意止] 행이니라.
그가 도(道)에 이르고 경전을 좇아 닦으면서 만일 도품(道品)의 법을 깨달아 알면 많은 선(善)을 짓지도 않고 항상 있다고 보지도 않으며 또한 집착하는 것도 없고 악한 법을 제거하지도 않으며 도의 마음[道心]으로 보는 것과 있는 대상에 끊어짐도 없고 또한 항상 있다고 헤아리지도 않고 아주 없음[斷滅]에도 떨어지지 않느니라. 만일 어떤 보살이 항상 있다거나 아주 없다고 보는 일을 버리고 마음을 평등하게 가지면서 머무르지 않으면 중간(中間)에 처하게 되나니, 무엇을 중간이라 하는가 하면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생각하거나 행하지 않아야 하고 이것을 모두 없애버리면 이것을 중간이라 하며 명령함도 없고 가르쳐 줄 만한 것도 없으며 언어도 없고 설명도 없는 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요약하면 무명․지어감[行]․인식[識]․이름과 물질[名色]․여섯 감관[六入]․접촉[觸]․느낌[痛]․욕망[愛]․집착[取]․존재[有]․태어나고[生] 늙고 죽고[老死] 근심하는 괴로움이 모일 만한 것도 없고 모두 이미 없애고 다하면 이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그가 가르치는 바에 지혜도 없고 또한 일정한 곳도 없으면 이것을 중간이라고 한다.
그 중간이란 역사(驛舍)도 없고 또한 파견한 이나 이와 같이 묵을 곳[宿處]도 없으며 그 있는 바를 헤아려 보아도 명령함이 없고 가르쳐 주는 이도 없으며 이 본말(本末)을 헤아려 보아도 결단하여 마칠 수도 없고 아직 처한 데도 없으며 붙잡을 수도 없고 집착하는 것도 없으며 고요하고 쓸쓸하며 담박(澹泊)하여 홀연히 벌써 사라져 버리나니, 이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비유하면 족성자야, 메아리가 나오는 곳은 일정한 처소가 없으되 그는 가까운 곳으로 나아가 소리를 대치해 내는 것처럼 진리를 보면 진실과 거짓에 떨어지게 된다. 이것이 중간이 되어 언어도 없고 설명도 없나니, 그것은 곧 볼 수도 없고 처소도 없느니라.
그와 같아서 족성자야, 인(因)이 되어
인식과 물질[識色]을 일으키는 일과 그러한 인(因)이 합하여 이루어지도록 시키는 것은 두 연(緣)이 상대함에 따른다. 그 중간에는 가르치는 것도 없고 설명도 없나니 이것을 중간이라 하며, 인과 연[因緣]이 합하여 이루어지면 이치가 소용이 없고 그 이치란 것을 얻을 수 없으며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에 거듭 오지 않고 그것이 거듭 오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또 나라는 것을 헤아려 보면 곧 나[我]가 없고 사라져서 고요하며 이것에서는 나와 나가 아님이 저절로 청정하게 환히 아나니, 이것이 중간에 처하는 것이다. 사람과 수명을 헤아려 보면 사람과 수명은 보이는 것이 없고 청정하여 자연이므로 이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또 생각과 생각이 없는데서 생각하는 즐거움이 없는 것을 중간이라 하고 뒤바뀐 일에 있는 바가 없는 것을 중간이라 하느니라. 허망함과 어리석음과 지극한 정성의 가르침을 모두 얻을 수 없는 것을 중간이라 하며 이 언덕[比岸]과 저 끝[彼際]으로 자기 몸을 소화하여 집착함이 없게 하고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서 모든 것을 익히지 않는 것을 중간이라 하며 생사를 제거하고 열반도 버리면서 모든 언어와 가르침이 없는 것을 중간에 처한다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그 법(法)을 관찰하되 법은 본래 없는 줄 환히 알면서 뜻에 머무르는[意止] 사람은 법계(法界)를 무너뜨리지 않고 그 뜻이 스스로 그러하여[自然] 그 뜻으로 하여금 대경에 머무르게 할 수 있나니, 그는 법계에 인도하여 모든 법을 깨달아 알므로 그 법의 경계와 사람의 경계를 헤아릴 때에는 그 법의 경계에 있어서도 역시 무너뜨리는 것이 없고 사람의 경계도 헐어뜨리지 않아서 사람의 경계와 법의 경계 이 두 가지 일에 똑같아서 마치 허공의 경계[空界]와 같으니라.
그는 한 경계로써 모든 법을 널리 보되 혜안(慧眼)으로써 보고 법의 경계로써는 부처님께서 행하신 것을 관찰하거니와 만일 어떤 사람이 법을 선택하지 않으면 그는 곧 보는 것이 없나니, 이 때문에 모든 법은 약간이라도 본래 법이 없다고 보면 약간의 것도 보지 못하느니라. 만일 법을 관찰하여 본래 없는 것을 본다면
육안(肉眼)으로도 보지 못하고 천안(天眼)으로도 보지 못하며 혜안(慧眼)으로도 보지 못하느니라. 그 까닭은 눈을 부린다고 헤아린 이가 생각[想]을 느끼지 않기 때문이니라. 육안으로 보지 않으면 그 눈은 생사(生死)의 행에 떨어지지 않고 만일 천안으로써 보는 바가 없다면 그 눈을 이용하여 방일을 하지 않으며 만일 혜안으로써 보는 바가 없다면 그는 법을 관찰해서 법은 본래 없는 줄 알며 모든 법을 널리 보면서도 처소가 없고 법에 머무르는 것이 없으며 이미 모든 법을 보면서 머무르는 것이 없다면 법의 뜻[意]을 행하면서 곧 옛날에 서원한 바에 어긋나거나 상실하지 않으리니, 이것이 보살로서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따라서 스스로 뜻을 세워 감히 깊고 묘한 법을 관찰할 수 있으며 도의 마음으로 모든 신통과 지혜[通慧]를 버리지 않는다고 하느니라. 이것이 족성자 보살․대사로서 본래 법이 없다고 관찰하여 뜻에 머무는[意止] 청정한 행이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이것이 네 가지 의지[四意止: 四念處]의 행이니, 네 가지 정진하는 것이니라. 무엇을 네 가지 정진이라 하는가 하면 몸[身]을 몸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실은 깨끗하지 않은[不淨] 것인데도 깨끗하다고 헤아리는 뒤바뀐 생각을 버리는 것이요 느낌[痛]을 느낌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괴로운 것[苦]인데도 즐겁다고 여기는 뒤바뀐 생각을 버리는 것이며 마음[心]을 마음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항상 없는 것[無常]인데도 항상 있다고 헤아리는 뒤바뀐 생각을 없애는 것이요 법(法)은 법이라 할 것이 없다고 관찰하면서 나 없는 것[無我]인데도 나라고 여기는 생각을 버리는 것이니라.
네 가지 뒤바뀜[顚倒]에서 평등함을 닦으면 집착할 것이 없게 되나니, 보살이 만일 평등함을 잘 수행하면 온갖 모든 행이 청정하게 되느니라. 보살이 이 평등하고 청정하고 미묘한 행을 받들면 곧 법인(法忍)을 체득하게 되며 사의단(四意斷)이라고 하는 것에서도 역시 법인을 체득하게 되느니라.
무엇을 의단(意斷)의 청정함이라 하는가 하면 수행하는 이가 도법(道法)을 강설하여 이 인연으로써 선의 근본[善本]되는 법행은 자연히 따르고 악의 근본[惡本]은 좇지도 않고 잘못을 일으키지도 않는 것이니라. 모든 선의 근본이 아닌 것이 아직 싹트지 않았으면 일어나지 않도록 정진하여 받들고,
모든 악이 일어났거나 그릇된 법의 일이면 곧 그것이 없어지게 하기 위하여 정진을 닦으며, 모든 착한 법의 일이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권하여 일으켜 내며 일어난 착한 법으로써 더욱더 정진하여 그것을 두루 갖추게 함과 동시에 잊거나 잃어버림이 없게 하도록 정진하는 것이니라.
또 보살이 본시 행한 청정한 업은 스스로 다스려서 잘 보살피고 착한 법은 잃지 않고 자재로이 머무를 수 있게 하며 점차로 더욱 기르면서 착한 법을 드날리고 착한 법으로서 이미 일어나 있는 것이면 다시는 잊거나 잃지 않느니라.
그 족성자가 이와 같이 청정함을 행하면 이것이 4의단(意斷)이다. 그것이 보살의 행이니, 마음에 자재함을 얻어서 정진에 어지럽지 않고 그 깨끗함과 더러움이 함께 합하지 않으며 청정하여 때[垢]가 없으면서 부처님의 지혜에 어긋나지 않고 도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대비(大悲)를 행하며 마음과 마음이 서로 대하여 그 생각하는 바를 보고 정진을 잃지 않으면서 평등함을 행하므로 의단(意斷)을 얻는다고 하느니라.
그 까닭은 무엇인가 하면 평등하고 찬찬함을 좇으면서 삿된 일을 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니, 찬찬함[安祥]으로 인하여 삿된 일을 좇지 않으면 곧 의단(意斷)의 평등한 삼매를 체득하게 되고 이미 삼매를 얻은지라 평등한 4의단이라고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 4의단을 잘 수행하면 곧 4신족(神足)을 받들어 행하여 두루 갖추게 되느니라. 탐욕을 끊어 없애고 정진을 받들어 행하면서 도의 마음[道心]으로 하여금 고요해져 더러움이 없게 되며 생각하는 것이 얇고 적어지고 벌써 그릇된 법을 버려서 가볍고 편안하게 되며 대비(大悲)를 이루게 되어 정진이 가쁜 하고 권방편(權方便)을 얻으면서 벌써 타이름[誡]이 가쁜 해지나니, 이로 인하여 4신족을 성취하여 도의 집[道堂]에 올라 네 가지 자재함[自在]을 얻느니라.
무엇을 네 가지 자재함이라 하는가 하면 수명(壽命)에서 자재하게 되어 이미 목숨이 길어져서 오래 살면서 자기 마음대로 한없이 누리고 명이 짧은 이들 가운데서도 한량없는 수명을 갖추어 중생을 교화하게 되며 오래 사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면서 설법을 듣고 살피느니라. 또 어떤 이가 싫증내고 게으름을 피우다가 수명을 짧게 하면
간절히 법을 우러르면서 은근히 이치를 구하기도 하는 등, 천상과 인간에 태어날 때마다 각각 그 수명에서 자유자재하나니, 이것이 첫 번째 체득하는 자유자재함이니라.
또 족성자야, 몸과 입에서 자재하게 되느니라. 그 사람의 몸과 입은 자기의 마음을 따르고 몸에 의뢰하지 않으면서 뜻에 따라 모습이 나타나게 되므로 그의 용모를 따르면서 색상(色像)을 보이고 그 중생의 예의와 예절과 몸이 아름다운지 못생겼는지 큰지 작은지 착한지 악한지에 따라 어떠한 율의(律儀)로써 교화하는가 생각하여 바르게 정한다. 보살은 곧 그 형모를 변화시켜서 앉고 일어나고 오고 가거나 뜻을 일으키는 그 순간에 기어다니고 숨을 헐떡거리는 사람 또는 동물에게 몸의 형상과 얼굴빛을 모두 한 가지로 하여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느니라. 이것이 두 번째 체득하는 자유자재함이니라.
또 다시 법(法)에서 자재하게 되느니라. 삼계(三界)에 있으면서 세간을 건지는 바른 성전[正典]을 가지고 세속의 법을 행하지 않으면서 세속의 습관을 따라 널리 변화를 나타내며 또한 세간을 건지는 지혜를 버리지도 않고 또한 잃는 것도 없으며 장애 없는 지혜와 깊고 오묘한 도에 이르고 12연기(緣起)의 인연의 법으로 미혹을 보게 되느니라. 만일 천상에 태어나거나 인간과 함께 하면 그 언어를 따르면서 수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 계율과 가르침을 따르고 그들이 좋아하는 바에 따라 상․중․하의 소원으로 저마다 그 처소를 얻게 하는 등 얻는 것이 자유자재하여 높고 뛰어남이 그와 같나니, 이것이 세 번째 체득하는 자유자재함이니라.
또 어떤 보살은 그 마음을 먹은 대로 자유롭게 되는 것이니라. 그 자유자재하다 함은,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큰 바다를 거두어들여 하나의 바다로 만들 수도 있고 또 가고 옴이 없으면서도 변화를 나타내며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수미산을 하나의 산으로 만들기도 하고 사천왕과 도리천(忉利天)의 하늘들로 하여금 그것이 합치고 흩어지고 가고 오고 나아가는 바를 알지 못하게 하고
그로 인하여 삼천세계가 변화를 나타내게 하며 그러면서 모든 인민들이 모두 나무와 꽃과 열매의 수효를 알 수 있게 하고 허공 속에 물과 불이 가득 차게도 하느니라. 혹은 뭇 보배를 변화하되 변화시키는 대로 만들어지게 하고 만들어진 뒤에는 순식간에 생각대로 되지 않음이 없어서 홀연히 본래대로 되기도 하나니, 이것이 네 번째 체득하는 자유자재함이니라.
또 족성자야, 보살은 이 4신족을 행하여 스스로 닦아 세웠기 때문에 시방의 부처님과 함께 말을 하고 앉고 일어나고 거닐면서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며 모든 제석․범왕․사천왕과 하늘․용․귀신․건달바․아수라․가루라․긴나라․마후라가 및 사람과 사람이 아닌 이 등 모든 중생들과 함께 서로 따르면서 말을 하고 앉고 일어나고 다니고 걷느니라. 왜냐 하면 보살의 신족은 미묘하고 높고 뛰어나서 특이함이 있기 때문이니, 옛날에 수행한 착한 법의 이치가 이지러짐이 없었기에 이런 일을 얻게 된 것이니라.
무엇을 신족으로서 옛날에 수행한 착한 법의 이치라 하는가 하면 그의 몸을 가쁜 하게 하면서 어른을 공경하고 복 많은 이[衆祐]를 받들어 섬기면서 총총히 달리며 심부름하면서도 괴롭다고 여기지 않으며 겸손하고 뜻을 낮추면서 젠체하지 않고 입으로는 좋은 말만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하였으며 공경하고 사랑하지 않음이 없어서 스스로 머리 조아리고 예절을 두루 갖추었으며 말과 행이 상응하여 그의 마음이 가볍고 편안하고 오만하거나 방자하지 않아서 해치려는 뜻이 없었느니라.
그는 겸양과 공경을 닦아서 스스로 제 마음을 조복하고 어른의 말을 들어 받아 가르침에 순종해서 예배하였으며 마음을 부드럽게 가지면서 그의 뜻을 다스리고 정진과 수행을 버리거나 여의는 일이 없었으며 그 사람은 계율과 예절을 두루 갖추고 몸으로 짓는 일이 다른 이들보다 뛰어났으며 마음은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고 또한 방일하지도 않았느니라. 그는 탐욕으로부터 허물이 생기고 성을 내며 어리석은 몸이 생기는 것이라,
이것을 제거하여 탐욕과 질투가 없어져서 재물과 음식에 대한 온갖 탐냄을 스스로 제거하였고 뜻하는 성품을 일으키지 않아 곧 병이 낫게 되어 뭇 일들을 법도대로 하였으며 짊어진 무거운 짐은 열약(劣弱)으로 인하여 이런 우환에 이르는 것이라 뭇 일을 덮어 가리면서 그 짐을 버렸느니라. 다섯 가지 일[事]로 받은 것은 은혜로써 베풀고 교량과 길에 의지하여 건너갔으며 큰배로써는 네 가지 큰 강[瀆]을 건너 온갖 중생들을 넓은 물살에서 온전히 건너게 해주었으며 교화를 할 때는 빼어나게 다름이 있었으니, 산란한 이는 바르게 하고 멋대로 구는 이는 안정시켰으며 나쁜 버릇이 있는 이는 옳게 고쳐 주고 헐뜯는 이는 웃게 하였느니라.
돌아 흐르는 물결에 거리끼지 않고 모든 의심을 결단하였으며 말하는 것은 특이하고 모든 동요에 흔들리지 않았으며 생각의 모든 경계를 구하고 깨치지 않았으면 깨닫게 하였으며 사랑하고 소중한 것을 매양 보시하면서도 뒤에 뉘우치지 않고 중생을 구제하여 도의 뜻[道義]을 도왔으며 만일 다른 이가 덕의 근본을 쌓는 것을 보면 그를 대신하여 기뻐하고 자신을 찬탄하거나 몸의 안락을 도모한 일이 없었으며 다른 사람의 안락을 보면 기뻐하며 찬양하였느니라.
쉬이 기르면서 만족할 줄 알고 다른 이익을 바라지 않았으며 출가(出家)하기를 좋아하여 남에게도 출가하여 배우기를 권하였고 큰 자비를 닦아서 늘 도의 마음을 품었으며 원수나 친한 벗을 평등히 여겨서 좋아하기를 마치 허공과 같이하고 피로한 이를 보면 탈 것을 마련하여 주었고 두려움이 없음[無畏]으로써 중생에게 베풀었으며 학문하는 이를 보면 공경하기를 마치 부처님같이 하고 배우지 못한 이에게는 깔보는 마음이 없었느니라.
가난한 이에게는 재물로써 보시하고 병든 이에게는 의약으로 구제해서 목숨을 살렸으며 구호 받은 이에게는 은혜를 갚기 위하여 효순(孝順)하고 계(戒)를 수행하는 이에게는 스스로 잘 닦고 삼가도록 공양하고 섬기면서 그 뜻을 잃지 않게 하였으며 조심성이 없는 이에게는 세간 사는 법으로 권해서 구제하고 돌아다닐 적에는 모든 악(惡)을 범하지 않았으며 세간 일에 대하여 집착이 없이 모든 덕(德)을 받들어 행한 것이니라.
이것이 족성자야,
미묘하고 높고 뛰어난 모든 신족을 닦을 적에 이와 같이 지니고 행하여서 신족을 상실하지 않았고 항상 그와 함께 하면서 불도를 이루기에 이른다. 이것이 보살로서 신족에서의 청정한 행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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