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115권
대보적경 제115권
대당 삼장 보리류지 한역
송성수 번역
45. 무진혜보살회(無盡慧菩薩會)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왕사성(王舍城) 기사굴산(耆闍崛山)에서 큰 비구 대중 1,250명과 함께 계셨다.
그때 다시 1만의 보살마하살이 함께 있었으니, 이른바 혜당(慧幢) 보살․법당(法幢) 보살․월당(月幢)보 살․일당(日幢) 보살․무변당(無邊幢) 보살들이었고, 다시 열여섯 명의 재가(在家)보살이 있었으니 발타바라(跋陀婆羅)가 으뜸이었으며, 다시 60명의 비유할 데 없는 마음[無比喩心]을 지닌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문수사리(文殊師利)가 으뜸이었고, 다시 현겁(賢劫) 중의 온갖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미륵(彌勒) 보살이 으뜸이었다. 또 6만의 보살마하살이 있었으니 무진혜(無盡慧) 보살이 으뜸이었다.
그때 무진혜 보살이 곧 자리에서 일어나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머리 조아려 예배 공경하고 뭇 보배꽃을 부처님께 받들어 뿌린 뒤에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말씀한 보리심(菩提心)이라 함은 무슨 이치 때문에 보리심이라 말씀하시나이까? 보살은 다시 몇 가지 법으로써 보리심을 성취하나이까? 어찌하여 이 보리심은 보리 가운데서 마음을 얻을 수 없고 마음 가운데서도 보리 또한 얻을 수 없으며 보리를 여의고서 마음을 얻을 수 없고 마음을 여의고서 보리 또한 얻을 수 없나이까? 보리란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말로는 설명할 수가 없으며 마음도 역시 빛깔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드러내 보일 수도 없으며 중생도 역시 그러하여
모두 얻을 수 없사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은 이와 같거늘 어떤 이치에 의거하여 수행하여야 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너는 이제 자세히 나의 설명을 들어라. 보리란 본래 이름도 말도 없느니라. 왜냐 하면 보리 가운데서는 이름과 말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마음과 중생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만일 이와 같이 알면 보리심이라 한다. 보리란 과거와 미래와 현재도 아니며 마음과 중생도 역시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아니니, 만일 이런 이치를 알면 이것을 보살이라 하느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역시 얻을 수 없고 온갖 법에서도 도무지 얻을 것이 없나니, 이것을 보리심을 얻었다고 하느니라. 마치 아라한이 아라한의 과위를 얻었으면서도 이 가운데서는 도무지 얻은 것이 없고 오직 세속에서 말하는 것에 따라 과위를 얻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이 온갖 법에서 모두 얻을 것이 없다. 보리심을 얻는 것도 역시 그와 같아서 처음 행하는 보살을 이끌어 거두기 위하여 보리심이라고 말하는 것이니라. 그러나 그 가운데서는 마음도 없고 마음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보리도 없고 보리라는 이름도 없으며, 중생도 없고 중생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성문(聲聞)도 없고 성문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독각(獨覺)도 없고 독각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보살도 없고 보살이라는 이름도 없으며, 여래도 없고 여래라는 이름도 없으며, 유위(有爲)도 없고 유위라는 이름도 없으며, 무위(無爲)도 없고 무위라는 이름도 없으며, 현재에 얻는 것도 없고 장래에 얻을 것도 없느니라.
선남자야, 나는 이제 말에 의거하여 이와 같이 알기 쉽게 자세히 설명하리라. 만일 어떤 모든 중생이 선근이 광대하여 모든 중생 가운데서 뛰어나기가 마치 수미산이 온갖 것을 뛰어넘는 것과 같으며, 이것이 첫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보시[施]바라밀의 인(因)이 되느니라. 마치 대지(大地)와 같아서 온갖 하는 일에 잘 머무르면 이것이 두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계율[戒]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뜻함이 용맹스럽고 번뇌를 편안히 받아들임이 마치
사자왕이 많은 짐승들을 위력으로 항복시키면서 몸에 두려워함이 없는 것같이 하면 이것이 세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인욕[忍]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세력이 씩씩하고 재빠르면서 번뇌를 잘 조복함이 마치 나라연역사(那羅延力士)가 다른 대중을 꺾어 다스리듯 하면 이것이 네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정진(精進)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공덕과 선근을 갖가지로 개발함이 마치 파리질다나무[波利質多樹]와 구비다라나무[俱鞞陀羅樹]의 꽃이 활짝 핀 듯 하면 이것이 다섯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선정[禪]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어리석음의 어두움을 제거함이 마치 해의 광명이 그지없듯 하면 이것이 여섯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반야(般若)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공덕과 즐겨하는 마음[意樂]으로 온갖 장엄이 모두 원만하게 함은 마치 큰 우두머리 상인[大商主]에게 재물이 풍족하여 교묘한 방편으로써 많은 어려움을 구제하듯 하면 이것이 일곱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방편(方便)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장애가 없어지고 하고자 하는 뜻[意樂]이 두루 갖추어짐이 마치 깨끗한 보름달같이 되면 이것이 여덟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역(力)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부처님 국토의 중생들이 모두 다 장엄하고 깨끗하고 착한 법이 두루 갖추어지며 할 일을 다 마침이 마치 가난한 사람이 다함 없는 보배창고를 얻어서 바라는 바가 원만하여짐 같이 하면 이것이 아홉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원(願)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복과 지혜가 그지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고 법에서 자재함이 마치 전륜왕이 이미 관정(灌頂)을 받은 것같이 하면 이것이 열 번째 내는 마음이어서 지(智)바라밀의 인이 되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이 열 가지 내는 마음을 닦아 익히어 성취하면 보살이라 하고 가장 뛰어난 중생이라 하며 장애 없는 중생이라 하고 하열하지 않은 중생이라 하느니라. 그러나 진실한 이치로서는 얻을 수 없는 까닭에 그 가운데서는 중생도 없고 마음도 없고 보리도 없느니라.
또 선남자야, 보살이 보시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믿음의 뿌리[信根]요, 둘째는 믿음의 힘[信力]이며, 셋째는
하고자 하는 뜻[意樂]이요, 넷째는 더욱 하고자 하는 뜻[增上意樂]이며, 다섯째는 중생을 이롭게 함이요, 여섯째는 크게 인자함[大慈]이며, 일곱째는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이요, 여덟째는 4섭법(攝法)을 행함이며, 아홉째는 부처님 법을 좋아함이요, 열째는 온갖 지혜[一切智]를 구함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계율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몸의 업[身業]이 깨끗하고, 둘째는 말의 업[語業]이 깨끗하며, 셋째는 뜻으로 짓는 업[意業]이 깨끗하고, 넷째는 원망하거나 해치려는 마음이 없으며, 다섯째는 나쁜 갈래[惡趣]를 깨끗이 제거하고, 여섯째는 여덟 가지 어려움을 멀리 여의며, 일곱째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의 지위를 초월하고, 여덟째는 부처님의 공덕에 편히 머무르며, 아홉째는 모든 희망을 만족시키고, 열째는 큰 소원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인욕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성을 내지 아니하고 둘째는 그의 몸을 헤아리지 않으며, 셋째는 그의 목숨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넷째는 믿고 이해하며, 다섯째는 중생을 성숙시키고, 여섯째는 인자한 힘을 내며, 일곱째는 법인(法忍)을 따르고, 여덟째는 법인이 매우 깊으며, 아홉째는 뛰어난 법인이 광대하고, 열째는 무명(無明)의 어두움을 깨뜨리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정진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모든 중생의 짓는 일을 따라서 짓고, 둘째는 몸과 입과 뜻의 업으로 항상 따라 기뻐하는[隨喜] 마음을 내며, 셋째는 게으름이 없고, 넷째는 힘써 나아가며, 다섯째는 4정근(正勤)을 닦고, 여섯째는 4념처(念處)를 닦으며, 일곱째는 번뇌의 원수를 깨뜨리고, 여덟째는 모든 법을 관찰하며, 아홉째는 온갖 중생을 성숙시키고, 열째는 온갖 지혜를 구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선정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착한 법에 편히 머무르고 둘째는 마음이 한 경계를 반연하며, 셋째는 반연하는 경계에 평등하게 이르고, 넷째는 바른 선정[正定]이요, 다섯째는
선에서 해탈함[禪解脫]이며, 여섯째는 선정의 뿌리[定根]요, 일곱째는 선정의 힘[定力]이며, 여덟째는 번뇌의 원수를 깨뜨리고, 아홉째는 선정의 무더기가 원만하며, 열째는 법을 보호하는 삼매(三昧)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모든 음(陰)을 잘 관찰하고, 둘째는 계(界)와 처(處)를 잘 관찰하며, 셋째는 바른 소견[正見]을 지니고, 넷째는 바른 기억[正念]을 지니며, 다섯째는 거룩한 진리[聖諦]를 분명히 알고, 여섯째는 모든 소견을 버리고 여의며, 일곱째는 지혜의 뿌리[慧根]요, 여덟째는 무생법인(無生法忍)이며, 아홉째는 지혜의 힘[慧力]이요, 열째는 장애 없는 지혜[無障碍智]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방편(方便)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모든 중생의 마음의 작용[心行]과 즐겨 행함[欲樂]에 들어가고, 둘째는 힘으로써 모든 중생을 가호(加護)하며, 셋째는 크게 사랑하고 크게 가엾이 여기며, 넷째는 중생을 성숙시키면서 싫증을 내거나 게으름이 없으며, 다섯째는 성문과 벽지불의 지위를 버리고 여의며, 여섯째는 지혜와 소견[智見]이 빼어나며, 일곱째는 모든 바라밀을 닦아 익히며, 여덟째는 사실대로 모든 법을 관찰하고, 아홉째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거두며, 열째는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地]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힘[力]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모든 중생이 마음으로 지어 가는[心行] 빽빽한 숲[稠林]을 알고, 둘째는 모든 중생이 번뇌로 지어 가는[煩惱行] 빽빽한 숲을 알며, 셋째는 모든 중생이 의욕과 뛰어난 견해로 지어 가는[意樂勝解行] 빽빽한 숲을 알고 ,넷째는 모든 중생이 감관으로 지어 가는[根行] 빽빽한 숲을 알며, 다섯째는 모든 중생이 갖가지 계로 지어 가는[界行] 빽빽한 숲을 알고, 여섯째는 온갖 중생이 수번뇌로 지어 가는[隨煩惱行] 빽빽한 숲을 알며, 일곱째는 온갖 중생이 죽음과 삶으로 지어 가는[死生行] 빽빽한 숲을 알고, 여덟째는 모든 중생이 3세의 업보로 지어 가는[三世業報行] 빽빽한 숲을 알며, 아홉째는
모든 중생이 습기와 번뇌로 지어 가는[濕氣煩惱行] 빽빽한 숲을 알고, 열째는 피곤해함이 없는 마음으로써 중생을 성숙시키면서 모든 감관으로 지어 가는[諸根行] 빽빽한 숲을 아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소원[願]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온갖 법은 생김이 없음[無生]을 알고, 둘째는 온갖 법은 모양이 없음[無相]을 알며, 셋째는 온갖 법은 사라짐이 없음[無滅]을 알고, 넷째는 온갖 법은 아무 것도 없음[無所有]을 알며, 다섯째는 온갖 법에 대하여 집착이 없고, 여섯째는 온갖 법은 옴이 없음[無來]을 알며, 일곱째는 온갖 법은 감이 없음[無去]을 알고, 여덟째는 온갖 법에는 제 성품[自性]이 없음을 알며 아홉째는 온갖 법은 처음도 중간도 나중도 없어서 평등함을 알고, 열째는 온갖 법은 처음이나 중간이나 나중의 분별이 없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보살이 지혜[智]바라밀을 행하는 데에는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느니라. 첫째는 온갖 법을 분명히 알아서 잘 결정하여 가리고[決擇], 둘째는 희고 깨끗한 법[白法]을 잘 원만하게 하며, 셋째는 보살의 한량없는 양식[資糧]을 쌓아 익히고, 넷째는 광대한 복과 지혜의 양식을 성취하며, 다섯째는 크게 가엾이 여김[大悲]이 원만하고, 여섯째는 갖가지 차별된 세계에 들어가며, 일곱째는 중생의 모든 번뇌의 행에 들어가고, 여덟째는 뜻을 내어[作意] 여래의 경계에 들어가며, 아홉째는 10력(力)과 네 가지 두려움 없음[四無畏]과 다른 이와 공유하지 않는 열 여덟 가지 부처님 법[十八不共佛法]의 수승한 경계에 들어가고, 열재는 관정위(灌頂位)를 받아 온갖 지혜의 가장 뛰어난 모양을 성취하는 것이니, 이것이 열 가지 법이니라. 선남자야, 이것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열 가지 바라밀을 행하는 데 있어서 모두 열 가지 법을 으뜸으로 삼는 것이니라.
또 선남자야, 어떤 것이 바라밀의 이치냐 하면, 이른바 모든 성문이나 독각을 초월하여 행할 바를 밝혀 보이기 때문이요,
광대하고 원만한 여래의 지혜이기 때문이며,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에 집착하지 않기 때문이요, 나고 죽음의 허물을 사실대로 분명히 알기 때문이며, 아직 깨닫지 못한 이들을 모두 깨닫게 하기 때문이요, 여래의 그지없는 법의 창고[法藏]를 얻기 때문이니라. 장애 없는 해탈을 얻기 때문이요, 보시로써 모든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시키기 때문이며, 계율을 지님으로써 본래 세운 서원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요, 인욕으로써 단정하고 엄숙한 모양을 두루 갖추기 때문이며, 정진으로써 모든 부처님의 법을 마치기 때문이요, 선정으로써 네 가지 한량없는 마음[四無量心]을 나오게 하기 때문이며 반야로써 모든 번뇌를 없애기 때문이니라. 방편으로써 모든 부처님 법을 쌓아 모으기 때문이요, 소원으로써 부처님 법을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며, 힘으로써 중생들로 하여금 깨끗하게 믿게 하기 때문이요, 지혜로써 여래의 온갖 지혜를 두루 갖추기 때문이며,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기 때문이요,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地]를 얻기 때문이며, 부처님 세계를 청정하게 다스리기 때문이요, 중생을 성숙시키기 때문이며, 보리도량[菩提道場]에서 모든 여래의 지혜를 원만하게 하기 때문이요, 많은 악마를 항복 받기 때문이니라. 사신족(四神足)에 노닐기 때문이요, 생사와 열반에서 다 같이 머무름이 없기 때문이며, 모든 성문과 독각과 보살의 공덕을 뛰어넘기 때문이요, 모든 다른 이론[異論]을 꺾어 다스리기 때문이며, 10력(力)과 4무소외(無所畏)와 불공불법(不共佛法)을 성취하기 때문이요, 최고의 바르고 평등한 깨달음을 증득하기 때문이며, 열두 가지 법륜(法輪)을 굴리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온갖 것이 바로 바라밀의 이치이니라.
또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이 장차 처음의 환희지(歡喜地)에 머무르려 할 적에는 먼저 이런 조짐이 있게 되나니,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백천만억 나유타의 뭇 보배가 묻힌 창고[伏藏]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2의 이구지(離垢地)에 머무르려 할 적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삼천대천세계의 땅이 평평하기가 마치 손바닥과 같이 되고 한량없는 백천
나유타의 뭇 보배 연꽃이 청정하고 엄숙하게 장식된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3의 발광지(發光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자기 몸이 갑옷을 입고 무기를 잡고 용맹스럽고도 굳세게 원수를 꺾어 조복하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4의 염혜지(焰慧地)에 머무르려 할 적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면서 갖가지 이름 있는 꽃이 땅에 널리 깔린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5의 난승지(難勝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여인의 머리에 아제목다(阿提目多)꽃의 꽃다발과 바리사가(婆利師迦)꽃의 꽃다발과 첨복가(瞻蔔迦)꽃의 꽃다발을 이고 있고 몸에는 갖가지 뭇 보배의 꾸미개를 차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6의 현전지(現前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꽃이 핀 못에 8공덕수(功德水)의 맑은 물이 가득 차 있고 그 밑바닥에는 금모래가 깔려 있으며 보배의 계단으로 된 네 개의 길이 있으면서 또 그 못 속에는 우발라(優鉢羅)꽃과 파두마(波頭摩)꽃과 구물두(拘物頭)꽃이 피었고 다시 분타리(分陀利)꽃으로 장엄한 것이 보이며 다시 자기 자신이 그 안에서 재미있게 노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7의 원행지(遠行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자기 몸의 좌우 양 곁에 모두 지옥이 있는데 그것을 뛰어넘으면서 조금도 다친 데가 없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8의 부동지(不動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자기 몸의 양어깨가 큰 사자의 어깨처럼 되면서 온갖 모든 짐승들이 모두 다 두려워하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9의 선혜지(善慧地)에 머무르려 할 적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자기의 몸이 전륜왕이 되어서 바른 법으로 교화하고 한량없는 백천 나유타의 모든 왕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며 갖가지의 보배로 장엄된 산뜻한 일산이 보살 위를 덮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보살이 장차 제10의 법운지(法雲地)에 머무르려 할 때에는 먼저 이러한 조짐이 있게 되나니, 자기 몸이 황금빛으로 변하고 여래의 서른 두 가지의
대장부 모습[相]과 한 길이나 되는 원광(圓光)을 두루 갖추면서 높고 넓은 사자자리[師子座]에 앉으며 한량없는 백천억 나유타의 범천(梵天)들이 앞뒤로 에워싸고서 공경하고 공양하면서 설법을 듣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느니라.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삼매(三昧)의 힘으로 이렇게 10지(地)에서 먼저 나타나는 조짐이 있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야, 초지(初地) 보살은 보시[施]바라밀이 원만하게 되고, 2지(地) 보살은 계율[戒]바라밀이 원만하게 되며, 3지 보살은 인욕[忍]바라밀이 원만하게 되고, 4지 보살은 정진(精進)바라밀이 원만하게 되며, 5지 보살은 선정[禪]바라밀이 원만하게 되고, 6지 보살은 반야(般若)바라밀이 원만하게 되며, 7지 보살은 방편(方便)바라밀이 원만하게 되고, 8지 보살은 힘[力]바라밀이 원만하게 되며, 9지 보살은 소원[願]바라밀이 원만하게 되고, 10지 보살은 지혜[智]바라밀이 원만하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야, 첫 번째로 발심(發心)하면 보배가 나타나는[現寶] 삼매(三昧)를 얻고, 두 번째로 발심하면 잘 머무르는[善住] 삼매를 얻으며, 세 번째로 발심하면 동요하지 않는[不動] 삼매를 얻고, 네 번째로 발심하면 물러나지 않는[不退轉] 삼매를 얻으며, 다섯 번째로 발심하면 보배꽃[寶花]의 삼매를 얻고, 여섯 번째로 발심하면 햇빛 광명[日輪光明]의 삼매를 얻으며, 일곱 번째로 발심하면 온갖 이치를 성취하는[成就一切義] 삼매를 얻고, 여덟 번째로 발심하면 지혜 횃불[智炬]의 삼매를 얻으며, 아홉 번째로 발심하면 현재 부처님 법을 증득하는[現證佛法] 삼매를 얻고, 열 번째로 발심하면 수능엄(首楞嚴) 삼매를 얻게 되느니라.
또 선남자야, 보살은 초지(初地)에서 훌륭한 자비로 호지하는[殊勝加持] 다라니(陀羅尼)를 얻고, 제2지(地)에서는 보다 나은 이가 없는[無能勝] 다라니를 얻으며, 제3지에서는 잘 머무르는[善住] 다라니를 얻고, 제4지에서는
무너뜨릴 수 없는[不可壞] 다라니를 얻으며, 제5지에서는 때 없는[無垢] 다라니를 얻게 되느니라. 제6지에서는 지혜 바퀴 등불[智輪燈]의 다라니를 얻고, 제7지에서는 훌륭한 행[殊勝行]의 다라니를 얻으며, 제8지에서는 깨끗하게 분별하는[淸淨分別] 다라니를 얻고, 제9지에서는 그지없는 법문을 나타내 보이는[示現無邊法門] 다라니를 얻으며, 제10지에서는 그지없는 법을 간직한[無盡法藏] 다라니를 얻게 되느니라.”
그때 모임 가운데에 무애광명사자당(無礙光明師子幢)이라는 한 천자(天子)가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오른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대고 합장하고 부처님을 향하여 부처님께 아뢰었다.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희유하나이다. 선서(善逝)이시여, 이와 같은 법문은 매우 깊고 광대하여서 모든 불법을 모두 포함하고 있나이다.”
이에 부처님께서 무애광명사자당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너의 말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만일 어떤 보살이라도 이 법문을 잠시 동안만 들으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게 되느니라. 왜냐 하면 그 선남자와 선여인은 일찍이 모든 선근을 심고 그 선근이 성숙된 까닭에 이러한 경전을 듣게 되는 것이요, 이 경전에서 인가(印可)를 받기 때문이니라. 선남자야, 만일 어떤 남자나 여인이 이 경전을 들으면 심었던 선근이 모두 다 깨끗하여져서 당연히 부처님을 뵙고 법을 들으며 뭇 승가[僧]에게 공양하고 중생을 성숙시키기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해인다라니(海印陀羅尼)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출현함이 그지없는[出現無盡] 다리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중생의 욕락과 마음의 작용에 들어가는[入衆生欲樂心行]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청정한 햇빛 당기[淸淨日光幢]의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느니라. 또 때 없는 달빛 당기[無垢月光幢]의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온갖 번뇌를 쉬는[息一切結]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끝없이 견고함이 마치 금강산과 같은 번뇌를 꺾어 없애는[摧滅無邊堅如金剛山煩惱]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평등한 법 성품과 언설에 들어가는[入平等法性言說]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진실한 언어와 음성에 들어가는[入眞實語言音聲]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마치 허공과 같이 끝없이 깨끗한 도장과 도장 찍을 대상이 나타나는[如虛空顯現無邊淸淨印所印]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며, 끝없는 부처님 몸을 성취하고 나타나는[成就顯現無邊佛身] 다라니를 버리거나 여의지 않게 되느니라.
선남자야, 만일 보살이 이와 같은 다라니를 성취하면 시방의 온갖 국토에서 변화로 부처님 몸을 나타내어 중생을 교화할 수 있다. 그러나 법의 성품에서는 오거나 감이 없으며 또한 다시 중생을 교화함도 없다. 설한 바의 법에서 문자(文字)에 집착하지 않고 평등하여 동요함이 없느니라. 비록 몸으로 나고 죽음을 나타내더라도 일어나거나 사라짐이 없으며, 또한 조그마한 법도 가고 옴이 있는 것이 없으니 모든 행(行)이 본래 고요하여 불법에 편히 머무름을 분명하게 아느니라. 왜냐 하면 저 온갖 모든 법에는 분별이 없기 때문이니라.”
이 법을 말씀할 때에 대중 가운데 3만의 보살은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얻었고 한량없는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서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位]를 얻었으며, 한량없는 중생이 보리의 마음을 내었고 한량없는 비구들의 법안(法眼)이 깨끗해졌다.
부처님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무진혜(無盡慧) 보살과 모든 비구며 세간의 하늘․사람․아수라․건달바 등이 모두 크게 기뻐하면서 믿어 받들어 행하였다.
46. 문수설반야회(文殊說般若會) ①
이렇게 내가 들었다.
어느 때 부처님께서 사위국(舍衛國)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에서
큰 비구승 천 인과 함께 계셨다. 보살마하살 십천(十千) 인도 큰 장엄으로 스스로 장엄하고 모두 다 이미 물러나지 않는 지위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의 이름은 미륵(彌勒) 보살과 문수사리(文殊師利) 보살과 무애변(無礙辯) 보살과 불사담(不捨擔) 보살이었으니, 이와 같은 큰 보살들과 함께 있었다.
문수사리 동진(文殊師利童眞) 보살마하살이 동트는 무렵에 그가 있던 곳에서부터 부처님 계신 데로 나와서 밖에 서 있었다.
그때 존자 사리불(舍利弗)과 부루나미다라니자(富樓那彌多羅尼子)와 대목건련(大目犍連)과 마하가섭(摩訶迦葉)과 마하가전연(摩訶迦旃延)과 마하구치라(摩訶拘絺羅)의 이러한 큰 성문들이 저마다 있던 데서부터 다 함께 부처님 계신 데로 나와서 밖에 서 있었다. 부처님께서는 대중들이 모두 다 모여있는 것을 아시고 그때 여래께서는 계시는 곳으로부터 나오셔서 자리를 펴고 앉으신 뒤에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무엇 때문에 이른 새벽에 문 밖에 서 있는 것이냐?”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문수사리 동진 보살이 먼저 이미 이 곳으로 와서 문 밖에 서있었사오며 저는 사실 그 뒤에 늦게 나왔나이다.”
그때 세존께서 문수사리에게 물으셨다.
“네가 실로 이곳에 먼저 와 있으면서 여래를 보려고 하였느냐?”
문수사리가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그러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실로 이곳으로 와서 여래를 뵙고자 하였나이다. 왜냐 하면 저는 바르게 관찰하여 중생들을 이익 되게 하려 한 까닭이옵니다. 저는 여래의 여여한 모습[如如相]과 다르지 않은 모습과 움직이지 않는 모습과 짓지 않는 모습과 생김이 없는 모습과 사라짐이 없는 모습과 있지 않은 모습과 없지 않은 모습과 한 곳에 있지도 않고 한 곳을 여의지도 않으며 3세(世)도 아니고 3세가 아닌 것도 아니면서 두 모습도 아니며 둘이 아닌 모습도 아니며 더러운 모습도 아니며 깨끗한 모습도 아님을 관찰하겠사오며
이러한 것들로 바르게 여래를 관찰하여 중생을 이익 되게 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이와 같이 여래를 본다면 마음에 취하는 것도 없고 또한 취하지 않는 것도 없으며 쌓아 모은 것도 아니고 쌓아 모으지 않는 것도 아니니라.”
그때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만약 그렇게 할 수 있다면 당신이 말씀한 것과 같아서 여래를 뵙는 것이 매우 희유합니다.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여래를 뵈오면서도 마음에 중생의 모양을 취하지도 않고 모든 중생을 교화하여 열반에 향하게 하면서도 역시 열반에 향하게 하는 모양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큰 장엄을 일으키면서도 마음에는 장엄한 모양을 보지도 않으십니다.”
그때 문수사리 동진 보살마하살이 사리불에게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말씀과 같습니다. 비록 온갖 중생을 위하여 큰 장엄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마음은 항상 중생의 모양이 있음을 보지도 않으며 온갖 중생을 위하여 큰 장엄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중생의 세계 또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가령 한 부처님이 세간에 머무시면서 1겁 또는 1겁을 더 지나도록 이러한 한 부처님 세계에서 다시 한량없고 그지없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모든 부처님이 계시고 각각의 부처님께서 1겁 또는 1겁을 더 지나도록 밤낮으로 설법하면서 마음에 잠시도 쉬지 않고 각각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같이 많은 중생을 제도하여 모두 열반에 들게 한다 하여도 중생세계는 역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나아가 시방의 모든 부처님의 세계도 역시 그와 같아서 각각의 모든 부처님께서 설법하고 교화하여 각각 한량없는 항하의 모래만큼 많은 중생들을 제도하여 모두를 열반에 들게 한다 하여도 중생세계는 역시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습니다. 왜냐 하면 중생이란 일정한 모양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중생 세계는 더하거나 덜하지 않습니다.”
사리불이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만일 중생의 세계가 더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는다면 무엇 때문에 보살은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고 항상 설법을 하는 것입니까?”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만일 모든 중생이 모두 공한 모양이라면 역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구하는 보살도 없을 것이오며 그들을 위하여 설법할 중생도 없을 것이옵니다. 왜냐 하면 저의 설법 중에는 한 법도 얻을 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그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중생이 없다면 어찌하여 중생과 중생 세계가 있다고 말하는 것이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중생 세계의 모양은 마치 모든 부처님 세계와 같나이다.”
또 물으셨다.
“중생의 세계란 한량[量]이 있는 것이냐?”
대답하였다.
“중생 세계의 분량은 마치 부처님 세계의 분량과 같나이다.”
“중생 세계의 분량에는 처소가 있는 것이냐?
“중생 세계의 분량은 불가사의하나이다.”
“중생 세계의 모양은 머무름이 있는 것이냐?”
“중생이 머무름이 없음은 마치 허공에 머무름과 같나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 어떻게 반야바라밀에 머물러야 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머무르지 않는 법[不住法]으로 반야바라밀에 머무르게 되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사리에게 물으셨다.
“어떻게 머무르지 않는 법을 반야바라밀에 머무른다 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머무름이 없는 모양[無住相]으로써 곧 반야바라밀에 머무르나이다.”
부처님께서 다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를 때 이 모든 선근(善根)은 어떻게 더욱 자라고 어떻게 줄어 없어지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일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에 머무를 수 있으면 모든 선근에는 더함이 없고 줄어짐도 없으며 또한 온갖 법에서도 더함이 없고 줄어짐도 없으며 이
반야바라밀의 성품[性]과 모양[相] 역시 더함이 없고 줄어짐도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곧 범부의 법을 버리지도 않고 성현의 법을 취하지도 않나이다. 왜냐 하면 반야바라밀은 취할 수 있거나 버릴 수 있는 어떠한 법도 보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역시 좋아할 만한 열반이나 싫증낼만한 생사도 보지 못하옵니다. 왜냐 하면 생사조차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싫증을 내며 여의겠나이까? 열반조차도 보지 못하거늘 하물며 즐거워하며 집착하겠나이까?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버릴 만한 때나 괴로움[垢惱]을 보지 못하고 또한 취할 만한 공덕도 보지 못하며 온갖 법에서 마음은 더하거나 줄어짐이 없나이다. 왜냐 하면 법계(法界)에는 더함과 줄어짐이 있음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와 같이 할 수 있다면 이것을 반야바라밀을 닦는다고 합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에서 생김이 있고 멸함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모든 법에서 더함이 있고 줄어짐이 있음을 보지 않는 것이 바로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마음에 희망하여 취함이 없고 법의 모양에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아름답거나 추(醜)하다고 보지 않고 높거나 낮음을 생하지도 않으며 취하거나 버림도 짓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법에는 아름답거나 추함이 없나니 모든 모양을 여의기 때문이요, 법에는 높거나 낮음이 없나니 평등한 법 성품이기 때문이며, 법에는 취하거나 버림이 없나니 실제(實際)에 머무르기 때문이옵니다.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이 모든 부처님 법이 훌륭하지 않을 수도 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저는 모든 법에서 훌륭하고 여여한 모양[勝如相]을 보지 못하였사오나 여래는 스스로 온갖 법의 공함을 깨달으셨나니, 이것을 증득하여 알 수 있나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그러하느니라. 여래는 바르게 깨달았고 스스로 공한 법을 증득하였느니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공한 법 중에는 수승하고 여여함[勝如]이 있어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문수사리야, 너의 말과 같아서 그것이 진실한 법이겠느냐?”
이어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아뇩다라(阿耨多羅)를 바로 불법이라 하느니라.”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아서 아뇩다라를 바로 불법이라 하나이다. 왜냐 하면 얻을 만한 법이 없음을 아뇩다라라 하기 때문이옵니다. 이와 같이 반야바라밀을 닦으면 법의 그릇[法器]이라 하지 않고 범부를 교화하는 법도 아니며 또한 부처님 법도 아니고 더욱 자라는 법도 아니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또 세존이시여, 반아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분별하고 생각할 만한 어떠한 법도 보지 못하나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부처님의 법에 대하여 생각하지 않느냐[不思惟]?”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제가 생각한 대로라면 부처님 법을 보지 못하고 또한 이것이 범부의 법이요 이것이 성문의 법이며 이것이 벽지불의 법이라고 분별할 수도 없나니, 이와 같은 것을 위없는 부처님 법이라 하나이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범부의 모양을 보지 않고 부처님 법의 모양도 보지 않으며 모든 법의 결정됨[決定]이 있는 모양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욕심 세계[欲界]를 보지 않고 모습의 세계[色界]도 보지 않으며 모습 없는 세계[無色界]도 보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어떠한 법도 이것이 다하여 없어지는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이오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은혜를 베푸는 이를 보지 않고 은혜를 갚는 이도 보지 않으며 두 모양을 생각하는 마음에도 분별이 없사오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반야바라밀을 보지 않사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이것이 부처님의 법이라 취해야 한다고도 보지 않고 이것이 범부의 법이라 버려야 한다고도 보지 않사오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또 반야바라밀을 닦을
때에는 범부의 법이라 소멸해야 된다고도 보지 않고 또한 부처님의 법이라 마음으로 증득하여 안다고도 보지 않사오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구나. 너는 그와 같이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잘 설명하였도다. 이것이 모든 보살마하살이 배울 법인(法印)이고, 또 성문과 연각 가운데 배울 것이 있는 이[有學]와 배울 것이 없는 이[無學人]도 역시 이 법인을 여의지 않으면서 도의 과위[道果]를 닦아야 하느니라.”
부처님께서 이어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이 법을 얻어듣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 천의 부처님 처소에서 모든 선근을 심은 것이 아니요 나아가 백천만억의 부처님 처소에서 오래도록 덕의 근본을 심었던 것이다. 그래야만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수 있느니라.”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다시 반야바라밀의 이치를 말씀하겠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말하여 보라.”
“세존이시여,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이 법에는 머물러야 하고 이 법에는 머무르지 않아야 한다’ 함을 보지 않으며 또한 취하고 버려야 할 모양의 경계도 보지 않나이다. 왜냐 하면 마치 모든 여래처럼 온갖 법이나 경계의 모양을 보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또 모든 부처님의 경계도 보지 않거든 하물며 성문이나 연각과 범부의 경계이겠나이까?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리는 모양[思議相]도 취하지 않고 또한 생각으로 미루어 헤아릴 수 없는 모양[不思議相]도 취하지 않으며 모든 법의 약간 있는 모양도 보지 않고 스스로 공한 법의 불가사의함을 증득하나이다. 이러한 보살마하살은 모두 이미 한량없는 백천만억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고 모든 선근을 심었었기에 비로소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에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을 수 있나이다. 또 반야바라밀을 수행할
때에는 속박도 보지 않고 해탈도 보지 않으며 그러면서 범부로부터 3승(乘)에 이르기까지의 차별된 모양도 보지 않나니, 이것이 반야바라밀을 닦는 것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얼마의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저와 모든 부처님께서는 마치 허깨비와 같은 모양이므로 공양과 주고받는 이를 보지 못하였나이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지금 불승(佛乘)에 머무르지 않을 수 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너의 생각과 같아서는 하나의 법도 보지 않거늘 어떻게 불승에 머무를 수 있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너는 불승을 얻지 않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불승이라 함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어서 얻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한 볼 수 없는 것이어늘 제가 어떻게 얻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문수사리야, 너는 장애 없는 지혜[無礙智]를 얻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제가 곧 장애 없는 것이어늘 어떻게 장애 없는 것으로써 장애 없는 것을 얻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도량(道場)에 앉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온갖 모든 여래께서 도량에 앉으시지 않으셨거늘 제가 이제 어떻게 혼자 도량에 앉겠나이까? 왜냐 하면 현재 모든 법을 보건대 실제(實際)에 머물렀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떤 것을 실제라 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몸에 대한 소견[身見] 등이 바로 실제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몸에 대한 소견이 바로 실제이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몸에서 여여한 모습을 보아서 진실도 아니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또한 몸이면서 몸도 아니오니, 이것을 실제라 하나이다.”
사리불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이런 이치를 진실로 환히 알아서 결정되면 이것을 보살마하살이라 하리이다. 왜냐 하면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의 모양을 듣고도 마음에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며 침몰하지도 않고 후회하지도 않기 때문이옵니다.”
미륵 보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을 얻어듣고 법의 모양을 두루 갖추면 이것은 곧 부처님 자리에 근접한 것이리이다. 왜냐 하면 여래는 현재 이 법 모양을 깨달으셨기 때문이옵니다.”
문수사리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도 놀라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고 침몰하지 않고 뉘우치지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곧 부처님을 뵈었는 줄 알 것이옵니다.”
그때에 다시 무상(無相) 우바이가 있다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범부의 법과 성문의 법과 벽지불의 법과 부처님의 법의 이 모든 법은 모두 모양이 없사오니, 이 때문에 반야바라밀을 듣고서도 모두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나이다. 왜냐 하면 온갖 모든 법은 본래 모양이 없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께서 사리불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나 선여인이 만일 이와 같은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마음에 결정함을 얻고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고 뉘우치지도 않으면 이 사람이야말로 곧 물러나지 않는 지위[不退轉地]에 머물러있는 줄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라도 매우 깊은 반야바라밀을 듣고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믿고 좋아하고 듣고 받아들이며 기뻐하면서 싫어하지 않으면 이는 곧 단(檀)바라밀과 시(尸)바라밀과 찬제(羼提)바라밀과 비리야(毘梨耶)바라밀과 선(禪)바라밀과 반야(般若)바라밀을 두루 갖춘 것이요, 또한 다른 이를 위하여 드러내 보이고 분별하면서 말씀한대로 수행할 수 있느니라.”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떠한 이치를 관찰하였기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무르게 되었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저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은 것도 없고 저는 불승(佛乘)에 머무르지도 않았거늘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겠나이까? 제가 말한 것과 같은 것이
곧 보리의 모양이옵니다.”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찬탄하였다.
“장하고 장하구나. 너는 매우 깊은 법 중에서 이런 이치를 교묘히 설명하였도다. 너는 이미 먼저의 부처님께 오래도록 선근을 심었고 모양이 없는 법으로써 깨끗이 범행(梵行)을 닦았느니라.”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만일 모양이 있음을 보았다면 모양이 없음을 말하겠사온데 저는 지금 모양이 있음을 보지 못하며 또한 모양이 없음도 보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모양이 없는 법으로써 깨끗이 범행을 닦았다’고 말씀하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문수사리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성문(聲聞)의 계율을 보았느냐?”
대답하였다.
“보았나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너는 어떻게 보았느냐?”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저는 범부의 소견을 짓지도 않았고 성인의 소견도 짓지 않았으며 배울 것이 있는 이의 소견도 짓지 않았고 배울 것이 없는 이의 소견도 짓지 않았으며, 큰 소견도 짓지 않았고 작은 소견도 짓지 않았으며, 조복하는 소견도 짓지 않았고 조복하지 않는 소견도 짓지 않았으며 본 것도 아니고 보지 않은 것도 아니옵니다.”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당신은 이제 그와 같이 성문승(聲聞乘)을 관찰하셨군요. 만일 불승(佛乘)을 관찰한다면 다시 어떻게 하겠습니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보살의 법을 보지 못하고 보리를 수행하는 이와 보리를 증득한 이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사리불이 문수사리에게 말하였다.
“어떤 이를 부처님이라 하고 어떻게 부처님을 관찰하나이까?”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어떤 것이 나[我]입니까?”
사리불이 말하였다.
“나라 함은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며 이름의 모양은 공한 것입니다.”
문수사리가 말하였다.
“그렇습니다, 그렇습니다. 마치 나[我]가 이름이 있을 뿐인 것처럼 부처님도 역시 다만 이름이 있을 뿐이니, 이름의 모양이 공하니 곧 그것이 보리입니다. 이름으로써는 보리를 구하지 못하나니, 보리의 모양은 말도 없고 설명도 없습니다. 왜냐 하면 말[言說]과 보리는 둘 다 공하기 때문입니다. 또 사리불이여, 당신은 ‘어떤 이를 부처님이라 하고 어떻게 부처님을 관찰하느냐’라고 묻는데,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으며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으며 이름도 아니고
모양도 아닌 것을 부처님이라 합니다. 그리고 마치 자기 몸의 참 모습[實相]을 관찰하는 것처럼 부처님을 관찰하는 것도 역시 그러합니다. 오직 지혜 있는 이라야 비로소 알 수 있을 뿐이니, 이것을 부처님을 관찰한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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