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39권
대보적경 제39권
대당 삼장법사 현장 한역
송성수 번역
12. 보살장회 ⑤
4) 여래부사의성품 ③
그때에 부처님께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여래의 부사의한 두려움 없는 것을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혹 없고 의심 없이 한층 더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여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게 되는가?
사리자야, 여래․응공․정등각은 네 가지의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이 있느니라. 이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였으므로 여래․응공․정등각이 대중 가운데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대선존(大仙尊)의 자리에 처하여 바로 사자후를 하며 대범륜을 굴리지만 모든 세간의 사문․바라문이나 하늘이나 마왕이나 범천은 능히 법답게 굴리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네 가지의 두려움 없음[四無所畏]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위없는 지혜의 힘을 성취하였으므로 대중 가운데서 스스로 말하기를 ‘내가 바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자[正等覺者]이다’라고 하면, 이 가운데 모든 하늘이나 세간의 인간으로서 감히 여래 앞에 서서 말하기를 ‘당신은 이 법에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가 아니다’라고 하는 자를 보지 못하였느니라.
사리자야, 어찌하여 여래를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正等覺]라 하는가? 사리자야, 여래는 능히 일체 법에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아서 평등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흑은 범부의 법이거나 혹은 모든 성인의 법이거나 부처님의 법이거나 혹은 여러 배우는 이의 법이거나 혹은 배울 것이 없는 이의 법이거나 혹은 독각의 법이거나 혹은 보살의 법이거나 똑같이 평등하니라. 혹은 세간법이거나 출세간법이거나 혹은 죄가 있거나 죄가 없거나, 번뇌가 있거나 번뇌가 없거나, 함이 있거나[有爲] 함이 없거나[無爲]
이러한 일체의 법을 여래는 다 능히 평등하고 바르게 깨달았느니라. 그러므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라 이름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평등한 성질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모든 소견 자체가 저 공한 성질과 더불어 그 성품이 평등하나니 모든 형상 자체가 저 형상 없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삼계 자체가 저 바람[願] 없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나는 법[生法] 자체가 저 남이 없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모든 지음 있는 것[行] 자체가 저 지음 없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인연 따라 일어나는 법 자체가 저 일어나지 않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탐욕의 성품 자체가 탐욕 없는 것과 그 성질이 평등하며, 3세(世) 자체가 저 진여와 그 성질이 평등하며, 무명(無明)과 삶의 애착 자체가 밝음[明]과 해탈과 더불어 그 성질이 평등하며 생사에 유전하는 것 자체가 저 적정 열반과 그 성질이 평등하니라.
이렇게 사리자야, 여래는 능히 모든 법이 평등한 성질을 바르게 깨달았나니 그러므로 여래를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라 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나니, 또 대비(大悲)로 방편을 삼되 진여(眞如)처럼 평등하나니 진(眞)의 자성과 여(如)의 자성이 같지 아니한 성질이 아니며, 변하여 달라짐 없는 성질이며, 덮어 감춤 없는 성질이며, 떨거나 두려움 없는 성질이며, 물러나 굽힘이 없는 성질이며, 거스르고 다툼이 없는 성질이니라. 그러므로 대중에게 빛나게 드러나서 능히 기쁘고 즐겁게 하여 온몸이 화평하고 윤택하며 마음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어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느니라.
사리자야, 세간 중생들은 감히 여래의 두려움 없음에 대하여 거스르고 다투는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감히 다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진여의 자성이 평등한 곳에 법계의 자성도 두루 모든 세계 가운데 변만(遍滿)하지만
능히 그것을 거스르거나 방해함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자야, 이렇게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저 일체의 매우 깊고 미세하며 복잡하여 알기 어려운 법에 능히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았나니, 이렇게 여래가 대비심에 편안히 머물러서 온갖 말과 음성과 온갖 법문으로 그들 중생을 위하여 묘한 법을 열어 보이나니, 만일 능히 이것에 의지하여 멀리 여의는 행을 닦으면 재빨리 괴로움의 끝[苦際]을 다하리라.
만일 중생이 큰 스승이 아니면서 스스로 큰 스승이라고 일컫거나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가 아니면서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라 일컬으면 여래는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으로써 모두 그 빛을 없애고 그 중생의 오만함을 꺾어 부수고 멀리 달아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며 경계가 없고 끝이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만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의 경계와 끝을 찾고자 한다면 어떤 사람이 허공의 경계와 끝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의 이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을 말하는 것을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여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첫 번째 정등각의 두려움 없음[第一正等覺無畏]이라 하느니라. 여래는 이 두려움 없음을 성취함으로 말미암아 대중 가운데에서 바로 사자후를 하며 대범륜을 굴리지만 나아가 일체 세간은 능히 굴리지 못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위없는 지혜의 힘을 성취하였으므로 대중 가운데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이제 모든 번뇌의 흐름[流]이 이미 다하였노라’고 하면, 그 가운데 모든 하늘이나 세간의 인간으로서 능히 여래 앞에서 법답게 논리를 세워 말하기를 ‘당신은 이렇게 모든 번뇌가 아직 다하지 못하였다’라고 하는 자가 없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여래의 번뇌의 흐름이 다한 성품인가? 사리자야, 여래는 저 욕심의 번뇌[欲流:欲暴流] 속에서 마음이 잘 해탈하여 일체 탐하는 행위의 습기를 영원히 끊은 까닭이며, 여래는 저 유의 번뇌[有流:有暴流] 속에서 마음이 잘 해탈하여
일체 성내는 행위의 습기를 영원히 끊은 까닭이며, 여래는 저 무명의 번뇌[無明流:無明暴流] 속에서 마음이 잘 해탈하여 일체 어리석은 행위의 습기를 영원히 끊은 까닭이며, 여래는 저 견해의 번뇌[見流:見暴流] 속에서 마음이 잘 해탈하여 일체 번뇌의 습기를 영원히 끊은 까닭이니라. 이러한 인연으로 ‘여래는 모든 번뇌의 흐름이 이미 다하였다’고 말하느니라.
사리자야, 이렇게 법을 설하는 것은 세속제(世俗諦)에 의지한 까닭이요, 승의제(勝義諦)를 위함이 아니니라. 승의제 가운데는 거룩한 지혜 앞에서 두루 알 수 있고 영원히 끊을 수 있으며 닦아 익힐 수 있고 증득할 수 있는 한 가지 법도 머묾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사리자야, 다했다[盡]고 말하는 것은 일찍이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자성이 마침내 다한 것이요, 상대하여 다스릴[對治] 이유가 없으므로 다함이라 이름하느니라. 여실히 자성이 다한 것이요 여실히 자성이 다했으므로 법이 다할 것이 없느니라. 법이 다할 것이 없으므로 함이 없는[無爲] 것이며 함이 없음으로써 남도 없고 소멸함도 없으며 또한 머묾도 없나니 그러므로 여래가 세상에 나오거나 또는 세상에 나오지 않거나, 항상 법성(法性)에 머물거나, 항상 법계(法界)에 머무는 것인즉 그 가운데 성스러운 지혜가 옮겨 가느니라. 비록 이렇게 옮겨 가더라도 거기에는 옮겨감[轉]도 없고 되돌아옴[還]도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 법문으로 말미암아 모든 번뇌의 흐름이 없으며 또한 번뇌의 흐름이 다하여 얻을 것이 없느니라. 이렇게 여래는 대비심에 머무르고는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번뇌의 흐름이 다하는 법을 설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나니 다시 대비로 방편을 삼되 진여처럼 평등하여 진(眞)의 자성과 여(如)의 자성이 같지 아니한 성질이 아니며,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성질이며, 덮어 감춤이 없는 성질이며, 떨거나 두려움이 없는 성질이며, 물러가 굽힘이 없는 성질이며, 거스르거나 다툼이 없는 성질이니라. 그러므로 대중 가운데 빛나게 드러나서 능히 기쁘고 즐겁게 하여 온 몸이 화평하고 윤택하며 마음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어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느니라.
사리자야, 세간 중생은
능히 여래의 두려움 없음에 위배되거나 다투는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가히 다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진여의 자성이 평등한 곳에 법계의 자성도 널리 퍼져 두루 모든 세계 가운데 변만(遍滿)하지만 능히 그것을 거스르거나 방해함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불가사의하며 한량없고 수가 없고 경계와 끝이 없는 묘한 법을 성취하였느니라. 여래의 대비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중생을 위하여 번뇌의 흐름이 다하는 법을 말하나니 그들에게 모든 번뇌의 흐름을 영원히 끊게 하고자 함이니라.
사리자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며 경계와 끝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나니, 만일 어떤 이가 여래의 두려움 없음의 경계와 끝을 찾고자 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의 경계와 끝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들은 여래가 이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을 말함을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매우 기뻐하여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이 두 번째 번뇌의 흐름이 다한 두려움 없음[第二流盡無畏]이다. 이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였으므로 여래가 대중 가운데서 바로 사자후를 하며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대선존의 자리에 처하여 대범륜을 굴리지만 나아가 일체 세간의 그 누구도 능히 굴리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위없는 지혜의 힘을 성취하였으므로 대중 가운데서 외쳐 말하기를 ‘내가 장애(障礙) 된다고 말한 법은 결정코 능히 장애가 되느니라’고 하면, 이 가운데 모든 하늘이나 세간으로서 능히 여래 앞에서 법답게 논리를 세워 말하기를 ‘당신이 이렇게 장애가 된다고 말한 법은 능히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하지 못하느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능히 장애되는 법이라고 하는가? 사리자야, 말하자면 한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느니라. 한 가지 법이라 함은 마음이 깨끗하지 못함이니라. 다시 두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제 부끄러움[慚] 없는 것과 남 부끄러움[愧] 없는 것이니라. 다시 세 가지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몸으로 하는 나쁜 짓․말로 하는 나쁜 짓․뜻으로 하는 나쁜 짓이니라.
다시 네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탐욕(貪欲)으로 인하여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성냄[瞋恚]으로 인하여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어리석음[愚癡]으로 인하여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두려움과 무서움으로 인하여 하지 못할 짓을 하는 것이니라.
다시 다섯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살생하는 것[殺生]․주지 않는 것을 가지는 것[不與取]․삿된 음행 하는 것[欲邪行]․거짓말하는 것[妄語]․술 마시는 것[飮酒]이니라.
다시 여섯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불보리(佛菩提)를 공경하지 않는 것․법을 공경하지 않는 것․승가[僧]를 공경하지 않는 것․율의(律儀)를 공경하지 않는 것․삼마지를 공경하지 않는 것․시설(施設)을 건립하는 일을 공경하지 않는 것이니라.
다시 일곱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남을 업신여김[慢]․저 잘난 체하는 것[勝慢]․저보다 나은 이을 시기하는 것[勝上慢]․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것[增上慢]․성현을 업신여기는 것[邪慢]․겉으로만 겸손한 체 하는 것[下慢]․자존심이 너무 강한 것[我慢]이니라.
다시 여덟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삿된 소견[邪見]․삿된 생각[邪思]․삿된 말[邪語]․삿된 짓[邪業]․삿된 생활[邪命]․삿된 정진[邪勤]․삿된 억념[邪念]․삿된 삼마지[邪三摩地]이니라.
다시 아홉 가지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어떤 것이 아홉 가지인가? 나의 몸에 대하여 과거․미래․현재에 각각 이익되지 않을 일을 했다 하여 미워하고 해칠 생각을 내는 것과, 나의 사랑하는 이에게 과거․미래․현재에 각각 이익되지 못할 일을 하였다 하여 미워하고 해칠 생각을 내는 것과, 내가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과거․미래․현재에 각각 이익될 일을 하였다 하며 미워하고 해칠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다시 열 가지의 법이 능히 장애가 되나니 열 가지 착하지 못한 길이니라.
이렇게 이 열 가지 법이 능히 장애가 된다고 대략 말하였다. 욕심을 머물러 쉬게 하여 고요하게 하고 이러한 장애 되는 법을 영원히 끊고자 여래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느니라.
사리자야, 나아가 모든 이치에 어긋나는 생각과 서로 응하여 일어난 모든 번뇌나 모든 법에 머무름으로 인하여 그 맛에 애착하고 관찰하는 것이나 뒤바뀐 생각으로 서로 응하여 어긋나고 등지는 것이나, 애견(愛見)에 집착하여 세간에 집착하거나, 세간법에 의지하는 일이 되는 몸․말․뜻의 업 등
그 일체의 모양이 모두 장애 되는 줄을 여래는 훤히 아느니라. 이미 훤히 알고는 여실하게 능히 장애 되는 법을 설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나니 다시 대비로 방편을 삼되 진여처럼 평등하여 진(眞)의 자성과 여(如)의 자성이 같지 아니한 성질이 아니며,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성질이며, 덮어 감춤이 없는 성질이며, 떨거나 두려움이 없는 성질이며, 물러가 굽힘이 없는 성질이며, 거스르거나 다툼이 없는 성질이니라. 그러므로 대중 가운데 빛나게 드러나서 능히 기쁘고 즐겁게 하여 온 몸이 화평하고 윤택하며 마음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어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느니라.
사리자야, 세간 중생은 능히 여래의 두려움 없음에 거스르거나 다투는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가히 다툴 수가 없는 까닭이니라.
진여의 자성이 평등한 곳에 법계의 자성도 널리 펴져 두루 모든 세계 가운데 변만하지만 능히 거스르거나 방해함이 없느니라. 이와 같이 한량없고 수 없으며 불가사의하고 더불어 견줄 데 없으며 가히 선설(宣說)할 수 없는 묘한 법을 성취하였느니라. 그러나 여래는 대비(大悲)에 넘치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장애법을 설하여 그들에게 욕심을 머물러 쉬게 하고 고요하게 하여 그 장애 되는 법을 영원히 끊게 하려는 까닭이니라.
사리자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며 경계와 끝이 없는 것이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만일 어떤 이가 여래의 두려움 없음의 경계와 끝을 찾고자 하면 어떤 사람이 허공의 끝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들은 여래가 이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이 허공과 같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더 나아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이 세 번째 장애법을 말하는 두려움 없음[第三說障法無畏]이니라.
여래는 이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므로 대중 가운데에서 바로 사자후를 하면서 대범륜을 굴리지만 나아가 일체 세간의 그 누구도 능히 굴리지 못한다고 하는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여래․응공․정등각은 위없는 지혜의 힘을 성취하였으므로 대중 가운데 이와 같이 외치며 말하기를 ‘내가 말한 성스러운 출리도(出離道) 닦기를 능히 바르게 하여 괴로움을 다하고 모든 중생이 이 길을 닦아 익힌다면 반드시 세간을 벗어나리라’고 하면, 이 가운데 모든 하늘이나 인간으로서 능히 여래 앞에 법답게 논리를 세워 말하기를 ‘당신이 말한 도는 능히 세간을 벗어나지 못합니다’라고 하지 못하리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성스러운 출리도인가? 사리자야, 이른바 하나의 바로 나가는 도가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청정하게 하느니라. 다시 두 가지 법이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마침내 벗어나게 하나니,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니라.
다시 세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하나니, 공(空)․무상(無相)․무원(無願) 해탈문이니라. 다시 네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몸[身]을 인연하여 생각하는 것․느낌[受]을 인연하여 생각하는 것․마음[心]을 인연하여 생각하는 것․법(法)을 인연하여 생각하는 것이니라.
다시 다섯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신근(信根)․정진근[勤根]․염근(念根)․삼마지근(三摩地根)․혜근(慧根)이니라. 다시 여섯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부처를 생각하는 것[念佛)․법을 생각하는 것[念法]․승가를 생각하는 것[念僧]․계법을 생각하는 것[念戒]․보시를 생각하는 것[念捨]․하늘을 생각하는 것[念天]이니라.
다시 일곱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바른 생각으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念等覺支]이며, 법을 잘 선택하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擇法等覺支]이며, 끊임없이 정진하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勤等覺支]이며, 법에 기쁨을 얻으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喜等覺支]이며, 편안한 쉼을 얻으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安息等覺支]이며, 삼마지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三摩地等覺支]이며, 모든 집착을 놓아 버림으로 깨달음에 들어가는 법[捨等覺支]이니라.
다시 여덟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성스러운 여덟 가지의 도[聖八支道]를 말함이니 바른 소견[正見]․바른 생각[正思惟]․바른 말[正語]․바른 행위[正業]․바른 생활[正命]․바른 정진[正勤]․바른 기억[正念]․바른 삼마지[正三摩地]가 그것이니라.
다시 아홉 가지의 기쁨의 근본 되는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이른바 기쁨[悅]․환희[喜]․조용히 쉼[安息]․즐거움[樂]․삼마지(三摩地)․여실지견(如實智見)․세속을 싫증냄[厭]․욕심을 여읨[離欲]․해탈(解脫)이니라.
다시 열 가지 법으로 능히
벗어나게 되나니 열 가지의 착한 업의 길[十善業道]이니라.
이와 같이 여래가 모든 중생을 위하여 여실히 성스러운 출리행(出離行)을 열어 보이느니라. 사리자야, 나아가 이러한 일체의 바르고 착한 보리분법(菩提分法)이 있나니, 혹은 온갖 계법[戒聚]과 서로 응하거나 혹은 삼마지[三摩地聚]․지혜[慧聚]․해탈[解脫聚]․해탈지견[解脫智見聚]과 서로 응하는 것이니라. 혹은 4성제(聖諦)와 서로 응하는 것, 이런 것을 능히 출리행(出離行)이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능히 벗어난다는 것은 바른 행[正行]을 말하는 것이며, 바른 행이란 것은 이 가운데 한 가지의 법이라도 늘거나 줄거나 오거나 가거나 취하거나 버림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른 행위나 바른 행위가 한 가지의 깨달음을 행하게 되나니 만일 능히 여실히 모든 법이 다 둘이 아닌 성질을 보고 알면 이것이 곧 거룩한 출리행이니라.
사리자야, 이와 같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불가사의하니, 대비로 방편을 삼되 진여처럼 평등하여 진(眞)의 자성과 여(如)의 자성이 같지 아니한 성질이 아니며, 변하여 달라짐이 없는 성질이며, 덮어 감춤이 없는 성질이며, 떨거나 두려움이 없는 성질이며, 물러가 굽힘이 없는 성질이며, 거스르거나 다툼이 없는 성질이니라. 그러므로 대중 가운데 빛나게 드러나서 능히 기쁘고 즐겁게 하여 온 몸이 화평하고 윤택하며 마음으로 깨끗한 믿음을 내어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느니라.
사리자야, 세간 중생은 감히 여래의 두려움 없음에 어긋나거나 다투는 자가 없느니라. 왜냐하면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가히 다툴 수 없기 때문이니라. 진여의 성질이 평등한 곳에 법계의 성질이 널리 퍼져 두루 모든 세계에 변만하지만 능히 거스르거나 방해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성스러운 출리행은 한량없고 수가 없으며 불가사의하고 더불어 비교할 데 없으며 선설할 수 없는 묘한 법을 성취하였느니라.
그러나 여래는 대비에 넘치는 마음으로 모든 중생을 위하여 성스러운 출리행을 열어 보이나니, 만일 어떤 중생이 여실히 알아 깨닫고 바른 도를 닦아 행하면
반드시 능히 벗어날 것이며 재빨리 모든 괴로움이 다하게 되리라.
사리자야, 여래의 두려움 없음은 경계가 없고 끝이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만일 어떤 이가 여래의 두려움 없음의 끝을 찾고자 한다면 어떤 사람이 허공의 끝을 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들은 이 여래의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에 대해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이 없이 더 나아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사리자야, 이것을 네 번째 성스러운 출리도로서 두려움 없음을 설한 것[第四說聖出離道無畏]이라 하느니라. 여래가 이러한 두려움 없음을 성취하므로 대중 가운데에서 바로 사자후를 하며 대범륜을 굴리지만 일체 세간의 사문․바라문이나 모든 하늘이나 마왕․범천은 능히 법답게 굴리지 못한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의 이와 같은 네 가지 두려움 없음은 경계가 없고 끝이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아서 중생들이 능히 그 경계와 끝을 다할 수 없느니라.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의 이러한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이 허공과 같다는 말을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한층 더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여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스스로 가장 올바르게
모든 법의 평등한 성질 깨달았기에
그러므로 여래는 두루 하게 보고
이를 바르고 평등하게 깨달은 이[正等覺]라 하노라.
혹 모든 범부의 법이거나
또는 배움 있는 이거나 없는 이의 법이거나
가장 거룩한 독각의 법이거나
부처님의 법은 모두 평등하여라.
일체 세간의 법이거나
세간을 벗어난 법이거나
착하고 착하지 않음이나 그 둘이 아닌 것이거나
열반의 길은 다 같이 평등하도다.
혹 공하거나 형상 없거나
혹 모든 바람의 즐거움[願樂] 여읜 것이며
생사가 없고 함이 없는 것에서
모두 평등한 자성을 보나니
평등한 자성을 깨닫고는
그에 맞도록 설법하여서
모든 중생을 해탈하게 해 주나니
이것이 대모니(大牟尼)의 두려움 없음이라.
이미 3유(有)의 세계를 해탈하고는
다시 인간․천상 가운데 존귀한 분
해탈을 나타내 보여주시니
두 번째의 두려움 없음 나타냄이네.
거룩한 이가 장애 되는 법을 깨우쳐 주었으나
해탈 얻지 못한 이를 친근하여
청정하지 못한 하열한 이는
제 부끄러움과 남 부끄러움을 갖추지 못하네.
일찍이 몸으로 하는 짓과
또는 말과 뜻으로 하는 짓을 보호하지 못하여
탐욕․성냄․어리석음․무서움․두려움이며
남의 목숨을 해치고 남의 재물 훔치며
삿된 음행․거짓말과
술을 마시며 3보를 공경하지 않으며
일곱 가지의 거만함과 여덟 가지의 삿된 짓이며
이것은 다 해탈하는 곳이 아니로다.
아홉 가지의 번뇌는 허물됨 많고
열 가지의 착하지 못한 업의 길이거나
이치답게 생각하지 아니하거나
어리석음 등으론 해탈할 수 없나니
뒤바뀐 생각으로 수행하거나
헛된 것 집착하여 방일하는 것 등
부처님은 이 같은 장애법을 아시고 설하였나니
이것이 세 번째 두려움 없음이라.
청정의 법문은 한량없으니
닦아 익히면 보리를 얻으리.
부처님은 스스로 통달하시고서
감로(甘露)에 나가는 법 말하였도다.
나아가 온갖 지닌 것
많은 묘하고 착한 법으로
청정한 보리를 돕는 것이
거룩한 이 칭찬하는 바라네.
만일 잘 닦아 익히고서도
해탈의 도 증득하지 못한다면
반드시 이런 이치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열 가지 힘 지닌 이의 참된 말이네.
만일 이치답게 생각하여서
많은 번뇌를 쉬어버리고
모든 법 평등함을 관찰하고서
성스러운 도행을 잘 닦아 익히며
옳은 법이니 그른 법이니 모든 법상(法相)에
모든 상(相)에 대해 집착하지 않으면
온갖 걱정과 두려움 해탈하리니
크게 청정한 이가 말한 바라네.
비고 탁 트여 청정한 허공 같으며
환술(幻術) 같고 꿈 같다고
갖가지 법을 잘 알면
생사의 바다를 벗어나리라.
만일 방일하여 업을 지으면
모든 존재의 세계를 윤회하리니
대비심으로 중생을 불쌍히 여겨
해탈을 증득케 하고자 함일세.
열 가지 힘을 지닌 모니존(牟尼尊)이
생사의 세계에서 교화하는 법
이것이 네 번째 두려움 없음이니
청정하기 허공과 같다네.
“이와 같아서 사리자야, 이것이 여래의 부사의한 두려움 없음이니라. 보살마하살이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더 나아가서는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그때에 부처님께서 다시 사리자에게 말씀하셨다.
“어떻게 보살마하살이 여래의 부사의한 대비(大悲)를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나아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게 되는가? 사리자야, 모든 부처님 여래의 대비심은 항상 굴러 끊임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부처님 여래는 일체 중생을 버리지 않는 까닭이며, 언제든지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까닭에 대비가 항상 일어나 쉬지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 여래의 대비는 이처럼 한량없으며, 이처럼 불가사의하며, 이처럼 무엇으로 비교할 데 없으며, 이처럼 끝이 없으며, 이처럼 말할 수 없으며, 이처럼 매우 예리하며, 이처럼 오랫동안 모든 중생이 따르나니, 나아가 여래의 일체 말의 업[語業]으로도 이 대비심을 또한 선설하기 어려우리라. 왜냐하면 마치 여래가 보리를 증득한 것이 불가사의하듯이 여래가 모든 중생에게 대비심을 일으킨 것도 또한 불가사의하기 때문이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이 여래가 보리를 증득함인가? 사리자야, 마치 여래가 이러한 뿌리[根]도 없고 머묾[住]도 없는 경계에 들어가는 까닭에 보리를 증득하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자야, 어떤 것을 뿌리라 하며, 어떤 것을 머묾이라 하는가? 몸이 있다는 견해가 뿌리가 되고, 허망 분별이 머묾이 되나니 여래는 이 두 가지 법을 평등하게 알아 깨달았느니라.
이러므로 여래가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는 경계에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건만 일체 중생은 이러한 두 가지 법을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와 같은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는 법을 알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하느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그 자성이 적정(寂靜)하느니라. 어떤 것을 적정의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안을 적(寂)이라 하고, 밖을 정(靜)이라 하느니라. 왜냐하면 눈의 자성이 공(空)하여 나[我]와 나의 것[我所]을 여의었으며
이와 같이 귀․코․혀․몸․뜻의 자성이 공하여 나와 나의 것을 여의었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그것을 적(寂)이라 이름하느니라.
여실히 눈의 자성이 공한 줄을 알고는 빛깔 경계에 끌려가지 아니하며, 나아가 여실히 뜻의 자성이 공한 줄을 알고는 법에 끌려가지 아니하나니 만일 이렇게 알면 그것을 정(靜)이라고 하나니, 모든 중생들이 이 적과 정 두 가지 법을 능히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적정의 두 가지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내가 보리의 자성이 청정한 것을 증득하였나니, 어떤 것을 자성 청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보리의 자성은 물들어 더러움이 없으며 보리의 자성은 허공과 같으며, 보리의 자성은 곧 허공의 성품이라 보리의 자성은 허공과 같아서 보리와 허공이 똑같이 평등하여 마침내 청정하건만
어리석은 범부는 이러한 자성의 청정함을 깨닫지 못하고 객진(客塵) 번뇌에 물들어 더럽히게 되었나니, 중생들은 이 자성의 청정함을 능히 알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자성의 청정함을 알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들어갈[入] 것도 없고 나갈[出] 것도 없는 보리를 증득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들어가고 나가는 두 가지 법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이른바 들어간다 함은 모든 법에 집착하는 것이요, 나간다 함은 모든 법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니라. 여래는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평등한 법성을 밝게 보나니 마치 여래가 먼 것도 없고 피안도 없다고 밝게 보는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성은 먼 것과 피안을 여읜 것이기 때문이니, 능히 이런 법을 증득하였으므로
여래라고 하느니라. 중생들이 이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법성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내어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들어감도 없고 나감도 없는 법을 깨달아 알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가 형상 없고 경계 없는 이치를 증득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안식(眼識)을 얻을 수 없는 것을 형상 없는 것이라 하고 빛깔을 보지 않는 것을 경계 없는 것이라 하며, 나아가 의식(意識)을 얻을 수 없는 것을 형상 없는 것이라 하고 법을 보지 않는 것을 경계 없는 것이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은 여러 성인의 행하는 바이니라. 어떤 것을 행하는가? 삼계의 어리석은 범부는 성인들의 행하는 것을 능히 행하지 못하는 까닭에 형상 없고 경계 없는 것을 능히 깨닫지 못하나니,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형상 없고 경계 없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과거․미래․현재가 아니라 3세가 평등하고 세 가지 모양[三相]의 바퀴가 끊어졌느니라. 어떤 것을 세 가지 모양의 바퀴가 끊어졌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과거세에 마음을 돌아보아 굴림이 없고 미래세에 식(識)이 향하여 나아감이 없으며 현재세에 뜻이 활동함이 없나니, 이 마음[心]과 뜻[意]과 의식[識]이 편안히 머무는 곳이 없이 과거를 분별하지 아니하고 미래를 집착하지 아니하고 현재를 희론하지 아니하건만 중생들은 능히 3세(世)의 자성이 평등하고 3륜(輪)이 청정한 줄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3세의 3륜이 평등하고 청정함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가 함이 없고[無爲] 자성이 없는[無性] 이치를 증득하였느니라. 무엇 때문에
함이 없고 자성이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이 보리의 자성은 안식으로 알 것이 아니며 나아가 의식으로 알 것이 아니니라. 함이 없다는 것은 나는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으며 또한 머묾도 없나니 세 가지의 모습을 길이 여읜 까닭에 함이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함이 없는 자성을 알면 마땅히 함이 있는 것을 알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법의 자성이 곧 자성이 없는 것이니 자성이 없다는 것은 곧 자체가 둘이 없는 것이니라. 중생들이 이 자성 없고 함이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자성 없고 함이 없는 이치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나는 보리의 차별의 자취[跡]가 없는 것을 증득하였느니라. 무슨 까닭에 차별의 자취가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진여와 법성, 둘을 함께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性]이 별 다름이 없고 자성이 편안히 머무름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의 실제를 이름하여 자취라 하나니 자성이 흔들림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고 하느니라. 모든 법의 공한 성품[空性]을 자취라 하나니 자성이 얻을 것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이 형상이 없는 것을 자취라 하나니 자성을 가히 찾을 수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모든 법이 바람[願] 없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이 일어남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중생의 자성[性]이 없는 것을 자취가 없다 이름하나니 그 체성이 이름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이 허공과 같은 모습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을 가히 얻을 수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그 자성이 남이 없는[無生]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자성이 멸함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그 자성이 함이 없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자성이 가거나 머묾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보리의 모습이라 하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성품이 적정한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열반의 모습이라 하는 것을 자취라 이름하나니
그 성품이 남이 없는 것을 차별이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중생들이 능히 차별의 자취 없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차별의 자취 없는 이치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는 몸으로 증득하지 못하며 마음으로 증득하지 못하느니라. 왜냐하면 몸 자체는 아는 것도 없고 작용도 없는 것이 마치 풀․나무․담벽․자갈돌의 빛과 같으며 마음의 자성도 또한 그러하여 마치 환술이나 아지랑이와 물 속의 달 그림자와 같나니, 만일 능히 이렇게 몸과 마음을 깨달으면 이것을 보리라 하느니라.
사리자야, 다만 세속의 언설로써 임시로 보리라고 이름지었을 뿐 보리의 실다운 성품[實性]은 말할 수 없으며, 몸으로 얻을 수 없으며, 마음으로 얻을 수 없으며, 법으로 얻을 수 없으며, 법 아닌 것으로 얻을 수 없으며, 진실로써 얻을 수 없으며, 진실 아닌 것으로 얻을 수도 없으며, 진리[諦]로써 얻을 수 없으며, 거짓[妄]으로써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보리의 자성은 말을 여의었기 때문이며, 또한 일체 법의 형상을 여읜 까닭이니라. 또 보리의 형상은 말로 통달할 수 없나니 마치 허공이 형상 없는 것이므로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사리자야, 여실히 모든 법이 다 말이 없다고 관찰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 가운데에는 말이 없으며 말 가운데 또한 모든 법이 없기 때문이니, 중생들이 이러한 모든 법의 이치[理趣]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는 결정코 모든 법의 이치를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진실한 뜻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는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느니라. 어떤 것을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눈의 자성을 훤히 알므로 취할 것이 없고 빛깔의 경계를 보지 않으므로 가릴 것이 없다고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가 이 보리의 취할 것도 없고 가릴 것도 없는 것을 증득하였으므로 눈에 취하지 아니하고 빛깔에 가리우지 아니하며 식(識)에 머물지 않느니라. 나아가 뜻에 취하지 아니하고 법에 가리우지 아니하며 식에 머물지 않느니라. 비록 식에 머물지 아니하나 능히 일체 중생의 마음의 머무는 것을 훤히 아느니라.
어떻게 훤히 아는가? 중생의 마음은 네 가지의 법에 머무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일체 중생의 마음이 의식[識]에 머물고 마음이 느낌[受]에 머물며, 마음이 생각[想]에 머물고 마음이 지어감[行]에 머무르느니라. 여래는 이와 같이 여실히 머무름과 머물지 않음을 훤히 알거늘 중생들은 능히 머무름 없는 진실의 바닥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결정코 열어 보여 그들에게 머무름 없는 진실한 궁극의 법[實際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라는 것은 공(空)의 다른 이름이니라. 공조차 빈 것이기 때문에[空空] 보리도 또한 비었으며, 보리가 비었으므로 모든 법도 또한 비었느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그 공성(空性)과 같이 모든 법을 깨닫나니 공으로 말미암아 법의 공성을 깨달은 것이 아니다. 하나의 묘한 이치를 사무친 지혜로 말미암아 법의 성품이 공함을 깨달은 것이니
공과 보리가 성품이 둘이 없으며 둘이 없으므로 ‘이것은 보리다, 이것은 공성이다’라고 말할 수 없나니 만일 둘이 있다면 ‘이것은 보리다, 이것은 공성이다’라고 말하겠지만, 법이 둘이 없으며 두 가지 모양이 없이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고 지어감[行]도 없으며 마침내 지어감도 아니며 또한 현재에 지어감[現行]도 아니니라.
공이란 것은 집착을 멀리 여의었고 승의제(勝義諦) 가운데는 아무 법도 얻을 것이 없나니 자성이 비었으므로 공이라고 이름함이니, 마치 텅 비인 공간[太虛]을 허공이라고 말하지만
텅 비인 공간의 자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공한 법을 공이라고 이름하지만 그 공성은 말할 수 없느니라. 이렇게 깨달으면 모든 법이 실로 이름이 없건만 거짓 이름과 말을 세웠을 뿐이니라. 그러나 모든 법의 이름은 어떤 방위와 처소가 없나니 이름으로 모든 법을 나타내지만 이 법이 방위도 없고 처소도 없는 것이 또한 그러하니라.
여래는 모든 법에 본래부터 난 것도 없고 일어남도 없는 것을 훤히 아나니 이렇게 알고는 해탈을 증득하지만 그 실다운 성품은 얽음도 없고 벗어남도 없거늘 어리석은 범부들은 능히 이 보리의 성품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보리의 실다운 성품을 깨치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의 성품은 태허(太虛)와 같나니, 그러나 태허의 성품은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할 것이 없듯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여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할 수 없나니 마치 모든 법의 성품이 어떤 실체가 없으므로 그것이 무엇과 같다거나 같지 않다거나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와 같이 사리자야, 여래는 모든 법이 그 성품이 평등하여 평등하지 않음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으며, 여실히 어떤 법이 평등하다거나 평등하지 않다거나 할 것이 없는 이치를 깨달았느니라. 이와 같이 여래는 여실한 지혜의 양(量)으로 모든 법의 양을 다하였느니라.
어떤 것을 여실한 지혜라 하는가? 모든 법이 근본 없는 데서 생겨났으며 나고는 이미 여의어 흩어지나니, 주재자[主] 없이 났다가 주재자 없이 흩어져서 나거나 흩어짐이 여러 인연 따라 옮겨가며 이 가운데 한가지 법도 혹 옮겨가거나 혹 돌아오거나 따라 옮겨가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길[徑]을 끊기 위하여 미묘한 법을 설한다고 말하나니, 모든 중생들이 능히 모든 길 끊는 법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는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모든 길을 끊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곧 이것이 진여의 법구[如句]니라. 어떤 것을 진여구(眞如句)의 모습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보리의 모습과 같이 모든 물질의 모습[色相]도 또한 그러하여 저 진여와 같이 물러감이 있거나 두루 이르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느낌․생각․지어감․의식도 또한 그러하여 저 진여와 같이 두루 이르지 않음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보리의 모습이 저 진여와 같듯이 4대의 성품도 또한 이와 같아서 진여와 같이 물러감이 있거나 두루 이르지 아니함이 없느니라. 보리의 성품이 저 진여와 같듯이 눈의 경계․빛깔의 경계 및 안식(眼識)의 경계와 나아가 뜻의 경계․법의 경계 및 의식(意識)의 경계도 또한 그러하니라. 보리의 모습이 다만 임시로 시설한 것과 같아서 일체의 법인 온(蘊:5온)․계(界:18계)․처(處:12처) 등도 다만 거짓 명목일 뿐 또한 그러하나니, 이러한 모습을 아는 것을 진여의 법구라 하느니라.
또 사리자야, 여래는 일체를 여실히 깨닫고 뒤바뀌게 깨닫지 아니하나니 처음[前際]과 같이 중간[中際]이나 나중[後際]도 또한 그러하니라. 왜냐하면 전제가 난 것이 없으므로 후제는 나감[趣]이 없고 중제는 멀리 여의었나니 이러한 일체를 진여의 법구라 하느니라.
이 한 법구와 같이 일체가 또한 그러하며 이 일체와 같이 한 구도 또한 그러하여 진여의 성품[如性] 가운데 하나의 성품과 많다는 성품을 얻을 수 없느니라. 중생들이 이 진여구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진여의 법구를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행(行)에 들어가며 또한 행함 없는 데 들어가는 것을 말하나니, 어떤 것을 행 및 행함 없는 것이라 하는가? 사리자야, 착한 법을 불러일으키는 것을 행이라 하고 일체의 법을
가히 얻지 못하는 것을 행함 없다 하느니라. 머무르지 않는 마음에 머무름을 행이라 하고 형상 없는 삼마지 해탈문을 행함 없다 하느니라.
사리자야, 이른바 행이라 함은 헤아리고 계교하는 방법으로 마음을 관찰하는 것이요, 행함 없다 함은 헤아림 등을 넘어선 것[過]이니라. 어찌하여 헤아림을 넘어선다고 하는가? 어디서나 모든 인식 작용의 업(業)이 없는 까닭이니라.
사리자야, 행이라 함은 이곳에서 함 있는 법을 관찰하는 것이요, 행함 없다 함은 이곳에서 함이 없는 법을 증득함이니라. 어리석은 범부는 능히 행과 행 아닌 데 들어가는 이치를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행과 행 아닌 데 들어가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흐름도 없고 취착함도 없나니 어떤 것을 흐름도 없고 취착함도 없다고 하는가? 사리자야, 네 가지 흐름[四流]의 성품을 여의므로 흐름이 없다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욕심에 대한 흐름[欲流]의 성품을 여의며, 존재[有]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의며, 무명(無明)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의며, 견해[見]에 대한 흐름의 성품을 여읨이니라.
사리자야, 네 가지의 취착하는 성품을 여의므로 취착함이 없다고 하나니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욕심[欲]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존재[有]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견해[見]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의며, 계(戒)에 대한 취착의 성품을 여읨이니라.
사리자야, 이러한 네 가지의 취착은 다 무명으로 말미암아 캄캄한 애욕의 물웅덩이에 빨려 들어가서 나를 집착함으로 말미암아 온․처․계를 받게 되었나니, 여래는 그 가운데 여실히 아취(我取)의 근본을 알고 스스로 청정을 증득하고 또한 중생에게 청정을 증득하게 하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가 이미 이러한 청정을 증득하였으므로 모든 법에 분별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사리자야, 이 분별로 말미암아 이치답지 못한 생각을 일으키기 때문이니라. 이곳에 다만 이치가 같이 서로 응하는 까닭에
무명을 일으키지 아니하며 무명을 일으키지 아니하므로 능히 12유지(有支)를 끌어 일으키지 않느니라.
만일 12유지를 일으키지 아니하면 곧 남[生]이 없고 만일 남이 없다면 이것은 결정됨이요, 만일 결정되었다면 이것은 곧 분명한 이치[了義]요, 만일 분명한 이치라면 이것은 곧 승의제[勝義]요, 만일 승의제라면 곧 사람 없는 뜻이요, 사람 없는 뜻은 곧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는 것은 곧 연기(緣起)의 뜻이요, 연기의 뜻은 곧 이것이 법의 뜻이요, 법의 뜻은 곧 여래의 뜻이니라.
사리자야, 만일 능히 이렇게 연기를 관하는 이는 곧 이것은 법을 관하는 것이요, 만일 법을 관한 이는 곧 여래를 관하는 것이니 이렇게 관하는 것은 진여를 여의어서 그 밖에 관할 것이 없느니라.
이 가운데에는 무엇이 있느냐? 말하자면 상(相)과 연(緣)이니라. 이 두 가지 법에 만일 능히 상도 없고 연도 없는 것을 관하면 곧 진실하게 여래를 관하는 것이니라. 이러한 모든 법 평등한 이치를 깨달으므로 평등하나니, 어리석은 범부들이 능히 이 흐름이 없고 취착할 것 없는 성품을 깨닫지 못하므로 여래가 그들에게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흐름이 없고 취착할 것이 없는 성품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보리란 것은 그 성품이 청정하여 때[垢]가 없고 집착이 없느니라. 어떤 것을 청정하며 때가 없고 또한 집착이 없다 하는가? 사리자야, 공한 까닭에 청정하고 형상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바라는 것이 없는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남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지음이 없으므로 때가 없고 취함이 없으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제 성품인 까닭에 청정하고 두루 깨끗한 까닭에 때가 없으며 빛나고 순수하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희론이 없으므로 청정하고 희론을 여읜 까닭에 때가 없고 희론이 적정하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진여인 까닭에 청정하고 법계인 까닭에 때가 없고 실제(實際)인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비고 고요한 까닭에 청정하고 걸림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공적한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안으로 두루 안 까닭에 청정하고 밖으론 지어감이 없는 까닭에 때가 없고 안팎이 얻을 수 없으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온(蘊:5온)을 두루 안 까닭에 청정하고 계(界:18계)의 자체인 까닭에 때가 없고 처(處:12처)를 덜어 없앤 까닭에 집착이 없느니라.
또 사리자야, 과거는 다한 지혜[盡智]이므로 청정하고 미래는 생사 없는 지혜[無生智]이므로 때가 없고 현재는 법계에 항상 머무는 지혜[法界住智]이므로 집착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이렇게 청정하고 때가 없고 집착이 없는 성품이 동일하게 하나의 법구로 들어가나니, 하나의 법구는 적정구(寂靜句)이며 모두가 적정하면 곧 지극히 적정[極寂靜]하며 지극히 적정하면 곧 두루 적정[遍寂靜]하며 두루 적정하면 대모니(大牟尼)라 이름하느니라.
사리자야, 마치 태허(太虛)와 같이 보리도 또한 그러하니라. 보리의 성품과 같이 모든 법도 또한 그러하며, 모든 법의 성품과 같이 진실(眞實)도 또한 그러하며, 진실의 성품과 같이 국토도 또한 그러하며, 국토의 성품과 같이 열반도 또한 그러하니라. 그러므로 열반을 모든 법 평등이라 하며 또한 구경(究竟)이라 이름하나니, 경계와 끝의 모양이 없는 까닭에 상대하여 다스릴 것이 없으며 상대하여 다스리는 모습을 여윈 까닭에 이러한 모든 법이 본래 청정하여 때가 없고 집착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여래가 이 형색(形色) 있거나 형색 없는 일체 법에 여실히 깨달아 중생의 성품을 관찰하고는 청정하고 때 없고 집착 없는 경계에 유희(遊戱)하면서 대비심을 일으켜 ‘내가 이제 마땅히 열어 보여 그들에게 이러한 청정하고 때 없고 집착 없는 법을 깨닫게 하리라’라고 한 것이니라.
다시 사리자야, 이러한 여래의 불가사의한 대비(大悲)는 일부러 작용함 없이 마음대로 운용하여 항상 움직이며 두루
시방 세계에 충만하지만 조금도 장애 됨이 없느니라.
사리자야, 여래의 대비는 불가사의하며 경계가 없고 끝이 없기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만일 여래의 대비의 경계와 끝을 찾고자 한다면 어떤 사람이 허공의 끝을 찾는 것과 다르지 않느니라.
사리자야, 보살마하살들은 여래의 부사의한 대비가 허공과 같다는 말을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나아가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그때에 세존께서 거듭 이 뜻을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한 보리는
뿌리도 없고 머묾도 없나니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바대로
중생들 위하여 말하였나니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보리는
적정하고도 가장 적정하나니
눈[眼] 등이 안으로 공하고
빛깔 등이 밖으로 공한 성품임을 관하셨네.
중생은 이것을 깨닫지 못하나니
적정하고도 가장 적정하다는 것을
여래는 법구의 뜻을 알고는
그들에게 대비심 일으키셨네.
보리의 성품은 빛나고 순수하여
청정하기 허공과 같건만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에게 대비심 일으키셨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보리는
가고 오고 취하고 버릴 것이 없건만
중생들은 이것을 알지 못하나니
그들에게 대비심 일으키셨네.
모든 부처님께서 증득하신 보리는
형상도 없고 경계도 없나니
성자들의 다니는 길이요
어리석은 범부 밟을 것 아니네.
범부는 이것을 알지 못하리니
비록 안다 하여도 명료히 통달하지 못하네.
여래는 그러한 무리에게
불쌍한 마음 일으키셨네.
함이 없는 제 성품은
남[生]도 없고 또한 멸함[滅]도 없고
그곳에 또한 머묾[住]도 없나니
세 가지 바퀴를 길이 벗어났네.
함이 있는 모든 법의 성품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리니
그들에게 대비심 일으켜
이러한 참된 이치 열어 보이네.
보리는 몸으로 얻는 것도 아니요
또한 마음으로 얻는 것도 아니라
몸의 자성은 아는 것 없고
마음은 마치 요술쟁이 같나니
몸과 마음 자체의 성품을
어리석은 범부는 깨닫지 못하네.
그들에게 대비심 일으켜
이러한 묘한 이치 열어 보이네.
모든 부처님께서 넓고도 거룩한
수승한 보리를 스스로 증득하고는
조용히 보리수 아래에 앉아
중생의 성품을 관찰하나니
나고 죽음의 수레바퀴를 타고
온갖 갈래 길[趣]에 돌고 도나니
여래는 저것을 보고는
맹렬히 대비심 일으키셨네.
교만으로 깨끗한 마음 허물어지고
삿된 견해의 그물에 얽히고 싸여
괴로운 인생을 즐겁다 여기고
항상됨 없는 것을 항상하다 여기네.
깨끗하다, 나가 있다, 중생이 있다고 헤아리고
명자(命者)가 있다는 소견에 무너져버리네.
여래는 그것을 관찰하고는
맹렬히 대비심 일으키셨네.
모든 중생의 본래의 성품
어리석은 가죽에 덮어 가리워
슬기로운 광명을 막아버림이
두터운 구름이 해를 가리듯
여래는 그들을 관찰하고는
맹렬히 대비를 일으켜서
때 없는 지혜의 광명으로써
마땅히 그를 위해 비추어 주시네.
여러 나쁜 갈래 길에 빠져 들어가
언제나 헤매며 바른 길 잃고는
혹은 지옥 속에 떨어지거나
축생이나 아귀의 세계에 떨어지나니
과거의 부처님은 이미 아시고서
앞으로 바른 길을 열어 주셨고
현재의 부처님도 그것을 보고
맹렬히 대비심 일으키셨네.
부처는 일체의 법에
진여(眞如)와 실다운 성품[實性]이
청정하기 허공 같은 줄 알고
참된 해탈을 증득했다네.
이렇게 깨끗하고 미묘한 법을
중생들은 알지 못하리니
여래는 그들을 관찰하고는
맹렬한 대비심 일으키셨네.
“이와 같이 사리자야, 이것을 여래의 부사의한 대비라 하나니 보살마하살들이 이 불가사의한 대비를 듣고는 믿어 지니고 잘 받들어서 깨끗한 마음으로 의심함 없이 한층 더 펄쩍펄쩍 뛰며 매우 기뻐하여 드물고 특별하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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