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9권
대법거다라니경 제19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47. 신해품(信解品)
“그 때에 저 모든 보살들은 부처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민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장차 다른 이를 위하여 법을 해설하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부처님께 청해야 하오니, 만일 다른 이가 와서 가없는 법문[無邊法門]을 물으면 저희는 어떻게 그 중생들을 위하여 해설해야 하나이까?
또 중생들이 묻거나 묻지 않거나 간에 다시 어떻게 해설해야 하며, 다시 다른 이를 위하여 얼마쯤의 해설을 해야 하나이까? 저희는 이제 청하여 묻사오니,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저희를 위하여 해설하여 주소서.
세존이시여,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사자좌(師子座)에 올라가 법을 해설하려 할 적에 이 가운데 어떠한 방편을 써야 결정코 여래 업장(業藏)의 한량없는 변재(辯才)를 얻나이까? 일찍이 이 세 가지 언교(言敎)에 들지 못했다면 역시 어떤 사람도 그것에 대해 해설할 수 없고 또한 읽고 외우며 익히어 받아 지니지도 못하거늘, 어떻게 해야 저절로 현전하여 변설(辯說)을 두루 갖출 수 있겠나이까?’
그 때에 방광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세간에는 이와 같은 방편이 없으며 도리어 이 세 가지 언교 업장 다라니문의 수다라 가운데서 읽고 외우고 받아 지녀야 비로소 얻을 수 있을 뿐이니라. 혹은 때로 어떤 사람은 부처님ㆍ세존을 위해 그 위력(威力)과 법력(法力) 얻은 것을 더해 주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이와 같이 다라니 법문이 있는 이면 오히려 이 수다라를 해설함을 말미암기 때문에 성취하게 되는 것이지 멀리 여의는 것이 아니니라. 만일 다른 이로부터 들은 이가 들은 그대로 속히 이해하면서 잊어버리지 않으면, 모든 언어와 그 밖의 해설은 한 번 귀에 스쳐도 목숨이 다하기까지 끝내 잊어버리지 않거니와, 만일 일찍이 들은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이라면 그가 처음 해설을 듣는 것이라 역시 알지 못하리니, 반드시 자세히 해석해 주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사람이 이 세 가지 언교인 여래의 업장을 해설한 그대로 받아 지니면서 온갖 변재를 구족하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중생으로서 이 법문을 구족하게 받아 지니는 이면 저절로 한량없는 변재를 얻게 되리니, 너는 이제 이런 덕장(德藏)에 대해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또 어떤 사람이 친히 부처님의 해설을 들었거나 또는 가지(加持)의 힘이거나 또는 그 스스로 신근(信根)과 지혜의 힘[慧力]이 있거나 간에 몸소 법사에게 나아가 법을 묻고 구한다면, 마나바야, 이들은 모두가 삼승(三乘)의 선근을 후히 쌓은 줄 알아야 하느니라.
만일 취(趣)에 따라 낱낱의 승(乘)이 있는 이면, 그 때에 법사는 마땅히 이들을 위하여 부처님 법을 시설해야 하거늘 하물며 저 삼승을 갖춘 이에 대해서이겠느냐?
마나바야, 혹은 때로 백천만억의 다른 무리의 중생들이 한꺼번에 이 법사에게 구름처럼 모여 와서 저마다 갖가지 법문과 갖가지 뜻 글귀[義句]와 갖가지 문자를 묻는다 해도 법사는 그 때 저 한량없는 다른 중생들에게 의혹의 마음도 두려워하는 마음도 없이 걸림 없는 변재[無礙辯]로 질문에 따라 대답하며 법문을 해석하되 장애가 없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날 때부터 도적인 사람이 대담한 용기와 도적으로서의 지혜와 방편[賊智方便]이 있기 때문에 비록 백천의 사람들 속에 처한다 하더라도 도무지 두려움을 느낌이 없는 것과 같나니, 왜냐하면 오래오래 도적으로서의 지혜를 성취한 까닭이니라.
마나바야, 저 설법하는 법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설법하는 때에는 비록 한량없는 백천 나유타의 대중 가운데에 처한다 하더라도 깊은 이치를 해석하면서 질문에 따라 능히 대답하되 거리낌이 없어서 모두 기쁘게 하고 한 생각조차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않나니, 왜냐하면, 먼저 걸림 없는 변재를 성취한 까닭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아나바달다용왕(阿那婆達多龍王)이 뭇 흐르는 물에 비를 내려서 사대해(四大海)를 가득히 채우는 것처럼, 이처럼 마나바야, 저 설법하는 법사가 삼장(三藏)을 성취하여 온갖 것을 충족시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마나바야, 또 마치 아뇩달다용왕(阿耨達多龍王)이 큰 방편으로 강물을 능히 내어 온갖 중생들의 뜻과 원(願)에 수순하는 것처럼, 이처럼 마나바야, 저 설법하는 법사도 이미 세 가지 언교 업장을 성취한지라 온갖 방편으로 가르쳐 보여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의심을 끊어 없애고 통달하게 하여 그 원의 바다[願海]를 만족시키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그 때에 모든 보살들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이 세 가지 언교 방편 업장(言敎方便業藏)은 이 다라니문의 수다라 가운데서만 구족하게 있어야 하나이까? 다시 그 밖의 다른 수다라의 모든 법문 가운데도 역시 있게 되나이까? 저희들이 이제 세존께 여쭙는 것은 이 결정된 뜻을 분명히 알고 싶어서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다 함께 ‘여래ㆍ세존께서는 큰 방편이 있으신지라 오늘은 다시 다른 이치를 말씀하시면서 우리들로 하여금 의혹을 풀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아니실까?’라고 생각하였나이다. 왜냐하면 여래의 큰 지혜[大智] 경계는 깊고도 멀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저희들은 미리부터 놀라고 두려워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양팔로 큰 바다를 헤엄쳐 건너 저 언덕으로 올라가려는 것과 같사오니, 이 사람은 반드시 목숨을 잃게 되는 줄 알아야 하오리다. 왜냐하면 세간에서는 어떤 사람도 손의 힘만으로 큰 바다를 건너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도 역시 그러해서 마치 어리석은 사람이 여래를 능히 수순하고 우러러 믿지 못하면서 자기 마음으로 부처님 지혜를 측량하려고 하는 것과 같나이다.
그 때에 방광여래가 모든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다만 부지런히 구하기만 하면 어찌 얻지 못함이 있겠느냐? 네가 아까 물은 바는 진실로 시의(時宜)에 적합하나니, 너희는 이 가운데서 고달파하거나 게으르지 말고 두려움도 내지 말라.
마땅히 걸림 없는 지혜와 변재로써 이치를 분명히 하고 문자(文字)를 바르게 하며, 세 가지 업(業)을 잘 닦으면서 세간을 벗어나고, 청정하게 금계(禁戒)를 지니면서 일심으로 사유하며, 참된 지혜를 쌓으면서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무거운 짐을 버리지 않으면서 본래의 마음에서 물러나지 말고, 일체지(一切智)를 구하며, 모든 법문에 대해 의심의 그물을 끊어 없애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선교방편(善巧方便)을 두루 갖추어 자주자주 여래께 묻고, 또한 스스로 관찰하면서 마땅히 네 가지로 바른 법을 섭수하고, 모든 부처님의 처소에서 아직 듣지 못했던 것을 듣고 받으며, 만일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면 바른 법을 수호하고 지녀야 하느니라.
말세(末世)에 악이 많은 중생들이 이 경전을 비방하고 헐뜯으면, 너희들은 마땅히 법대로 애써 다스리면서 목숨이 다하도록 언제나 추구하고 청해야지 놓아 버리거나 게으름을 피우지 말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이 큰 일[大事]을 배우되 만약 여래의 처소나 혹은 제자의 처소에서 언제나 이와 같은 바른 법을 묻고 청해야 하며, 이미 스스로 배운 뒤에는 다시 다른 이를 성취시키고, 이로 인하여 차츰차츰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교화하여 이 법문에 들게 해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들이 법을 구할 적에 세간의 어느 한 중생에게도 이르지 않음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법계(法界)의 온갖 중생을 일체 다 궁극의 열반[究竟涅槃]에 들게 하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보살이 법을 구할 적에는 언제나 이런 서원을 세우되 ‘나는 오늘부터 무릇 태어날 적마다 다만 제가 아직 듣지 못한 한 게송[一偈]ㆍ한 구절[一句]ㆍ한마디의 말씀[一言]에 이르기까지 들을 수 있게 하옵시며, 이 가운데서 몸과 목숨을 아끼지 않고 머리와 눈과 뼈마디 등 온갖 몸을 모두 다 바쳐 올리겠거늘, 하물며 몸 밖의 있는 재물을 보배로 애착해서 버리지 않겠습니까? ’라고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법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법이 있는 곳에는 어디든지 즉시 모두 나아가 구하되, 때로는 전타라(旃陀羅)의 집에 나아가기도 하고, 때로는 저 나찰(羅刹)이 머무르는 곳, 나아가 새나 짐승이 살고 있는 곳에 이르기까지도 듣자마자 모두 나아가서 법을 청하며 묻고 구하느니라.
혹은 때로는 그들이 보살에게 요구하면서 ‘우리 집에서 천 년 동안을 머무른다면, 그런 뒤에 비로소 나는 그대를 위하여 법을 해설하리라’고 말하면, 보살은 들은 뒤에 곧 그 장소에서 천 년이 다 차도록 그가 요구하는 바에 따라 응하고 심부름을 하면서 반드시 법을 듣고 나서야 중하게 보답하고 돌아오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모든 보살마하살은 법을 구하기 위해 이와 같이 정진하면서 오히려 모든 전다라 내지 나찰과 아귀, 축생에게도 천 년을 채우면서 받들어 응하거늘, 하물며 바른 법에 머무르는 선근 중생과 지혜 있는 큰 법사에게서 바른 법을 듣고서 미혹을 끊으며 의심을 결단하지 못하겠느냐?
또한 마나바야,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이 법을 들은 뒤에는 마음으로 크게 기뻐하면서 설법한 이에게 가서 은혜를 갚으려 하는데, 그 때에는 재물로써 설법한 이의 은혜를 갚는 것이 아님을 알지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은혜가 중하기 때문이니라. 설령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정변각에게도 역시 갚을 수 있는 방편은 없나니, 왜냐하면 그것이 중하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중한 것이라 하느냐? 이른바 법보시[法施]이기 때문이니라. 대저 법보시라 하면 모든 보시 가운데서 가장 첫째로서 가장 수승하고 가장 미묘하며, 가장 위없음이 되고 위없음 중에서도 위이며[無上上], 헤아릴 수도 없고 한량도 없으며, 가장자리[邊際]도 없어서 저 재물의 보시[財施]와 비교할 수조차 없느니라. 왜냐하면, 취착(取著)이 없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대저 재물의 보시란 바로 생사(生死)의 유루(有漏)이자 유위(有爲)의 집착(執著)이라서 모양[相]을 취하는 번뇌의 보시이지만, 저 법보시는 한결같이 벗어나는 무루(無漏)이자 무위(無爲)로서 걸림이 없고 모양이 없는 지혜로운 보시이니라.
또만 법보시란 능히 헐뜯을 사람도 없고 또한 능히 칭찬할 이도 없나니, 만인 어떤 이라도 이 법보시를 꾸짖고 헐뜯는다면 이 사람은 곧 삼보(三寶)를 비방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가운데서 마땅히 깊이 생각하고 간절히 묻고 청해서 들은 뒤에는 닦고 배우며, 이미 스스로 배우고 나면 사람들을 위하여 널리 연설해야 하나니, 두루 널리 폄으로써 법이 오래도록 머무를 수 있고 또한 세간으로 하여금 선법(善法)이 더욱 자라게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장사꾼이 조그마한 재화(財貨)를 팔고 사고하면서 이익을 구하면, 이 사람의 재산은 세월이 갈수록 점차로 불어나 창고에 가득 차서 많은 사람들을 구제하는 것과 같으니, 만일 장사꾼이 팔지도 않고 이익이 불어나지도 않으면 나중에는 굶주림을 만나고 가루(家累)20)를 상실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저 설법하는 법사도 그와 같아서 언제나 널리 연설하면서 쉬거나 게으르지 말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언제나 널리 연설하면 법의 머무름[法住]이 더욱 길어지면서 인간과 천상을 이롭게 하여 선근을 성숙시켜 뭇 악[衆惡]을 없어지게 하지만, 만일 널리 법을 퍼뜨리지 않으면 쇠하고 없어지면서 악도(惡道)가 치성하고 인천(人天)이 줄어들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장사꾼의 리더[商導]가 장사꾼들을 많이 거느리고 무장을 한 채 모든 재화(財貨)를 갖고 험난한 곳을 지나다가 마침 중로(中路)에서 다른 장사꾼들을 만났는데, 그때 그 리더는 분명하게 약속하면서 강한 이와 약한 이가 서로 보호하고 첫머리와 끝에 가는 이들이 서로 호위하도록 부분마다 법답게 하였는지라 험난한 가운데서 비록 도적을 만난다 하더라도 재물에 손해가 없이 안온하게 통과할 수 있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저 설법하는 법사도 역시 그와 같아서 한량없는 백천의 대중에 처하면서 이와 같은 바른 법문을 두루 펼 때에 그 대중 가운데 여래ㆍ세존의 많은 제자들이 총명하고 영리한 지혜로 그 이치를 잘 이해하여 읽고 외우고 받아 지니니, 이들은 이러한 힘 때문에 장애가 없는 것이라서 설사 외도가 세간의 지혜와 변재와 총명으로 백천의 사악한 이론[邪論]과 갖가지 주술(呪術)과 갖가지 말씨와 갖가지 어려운 질문을 베푼다 하여도 펼지는 바 없이 저절로 없어지거늘 어떻게 온갖 훼방[妨]을 놓을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너희는 알아야 한다. 저 백천 수의 대중 가운데에 비록 사견(邪見)으로 세간의 지혜와 변재를 지닌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저 모든 비구들은 그의 말을 듣지도 말고 그런 일을 행하지도 말며 공양하지도 말고 친근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거기에는 모든 일을 더욱 자라게 하고 성취하게 하며 이롭게 하는 것이 없나니, 오직 선(善)만 감소시키고 파괴함이 있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48. 이악우품(離惡友品)
또한 마나바야, 마치 어떤 사람이 집에다가 인간에게는 없는 전륜왕의 음식과 같은 갖가지 훌륭하고 맛있는 음식을 마련하였을 적에 이와 같은 훌륭한 음식이 가장 뛰어난 맛을 내지만 이 음식에 겨자씨만큼 적은 독을 섞었다고 하자.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어떤 사람이 배가 고파서 아무 음식이라도 구하려는 참에 갑자기 독이 든 음식을 만난다면, 그것을 취하여 먹겠느냐?
모든 보살들이 말하였다.
‘먹지 않나이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너희가 말한 바와 같으니라. 만일 사람이 세간의 지혜와 변재와 총명으로 하고 있는 일을 칭찬하고 나아가 하나의 게송의 한 구절에 이르기까지라도 읽거나 외우면, 이 사람이야말로 승가의 대중[僧衆] 안에 있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그는 부처님의 제자가 아니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문둥병에 걸려 있으면 이 사람은 청정한 대중 가운데에 들어갈 수 없는 것과 같나니, 이를테면 찰리(刹利) 대중이나 바라문(婆羅門) 대중이나 장자(長者) 또는 거사(居士)의 온갖 대중 가운데는 끝내 잠시 동안도 서서 머무르지 못하거늘, 하물며 오랫동안 청정 대중의 처소에 앉아 있으라고 허락하겠느냐?
마나바야, 세간의 변재를 지닌 사악한 사람도 역시 그와 같아서 오히려 청정한 대중 앞에 잠깐도 서 있지 못하게 해야 하거늘, 하물며 오랫동안 앉아서 그 일을 같이할 수 있겠느냐?
또한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야간(野干)은 야비하고 천박하면서 누린내가 나고 몸에는 옴이 올라 파리한 데다 때가 되면 똥 찌끼나 먹고 살거늘, 어찌 사자들 가운데에 있게 할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세간의 변재 지닌 사악한 사람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사람은 몹시 악하고 선근이 없는지라 끝내 모든 부처님 세계 안에 있게 할 수 없으며, 가령 앞서 있었다 해도 역시 내쫓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중생으로 하여금 나쁜 소견을 배워 익히게 해서 오랜 세월 동안 한량없는 나쁜 업을 더욱 자라게 하나니, 모든 악취(惡趣)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차라리 원수나 전타라나 망나니 등과 함께 친한 벗이 될지언정 끝내 이 사악한 변재와 나쁜 소견을 지닌 이와는 잠시도 같이 머무르지 말 것이니라.
마나바야, 차라리 날카로운 칼로써 혀를 끊을지언정 나쁜 소견과 이론으로 부처님 법을 말하는 이와는 함께하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차라리 굶주림의 고통을 참으면서 천 년 동안을 먹지 않을지언정 나쁜 소견으로 인한 다른 이의 신시(信施)를 받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차라리 쇠 꼬치를 세워 넓은 침상으로 삼아서 천 년 동안을 누워 지낼지언정 사악한 변재와 나쁜 소견으로 헐뜯는 사람과는 잠시도 같이 앉거나 눕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차라리 불 있는 재로 땅을 덮어서 천 년을 밟고 있을지언정 사악한 변재와 나쁜 소견을 지닌 사람에게서 거닐 곳[經行處]을 받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천 년 동안의 불을 밟는 고통은 짧은 동안[少時]에 그치거니와, 만일 나쁜 소견을 배우면 영원히 악도에 떨어지기 때문이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범부의 어리석은 마음의 힘[心力]은 아주 미약한 탓에 삿된 무리를 가까이 해서 그 악을 쌓아 익히고, 악을 함께 하며 서로 부추겨서 부처님 법을 헐고 깨뜨리며, 이미 자기 자신이 지은 뒤에는 다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사견을 배우고 익히게 하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사람이 부처님을 헐뜯고 법(法)과 승가[僧]를 비방하면, 그 사람은 오랜 세월 동안 안락을 얻겠느냐?’
모들 보살들이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이와 같은 법의 이치를 중히 드러내느니라.
마나바야, 여래ㆍ세존은 그 자비가 있으면서 한 중생도 버리거나 여의는 일이 없고, 영원히 나쁜 마음을 끊어서 시새움이 없으며, 거짓말을 멀리 여의고 또한 잘못된 말[錯言]도 없느니라.
마나바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바로 참말을 하는 이요, 진실한 말을 하는 이이니, 무릇 중생이 어떤 법을 받고자 하면 곧 그를 위하여 방편으로 연설해서 저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그 무리[類]에 따라 이해할 수 있게 하며, 지혜로 알게 되었기 때문에 속히 열반에 드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만일 사악한 변재로 연설하는 것을 보면 부디 듣지도 말고 또한 예배하지도 말며 더불어 기뻐하지도 말아야 하나니, 반드시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설령 백천의 모든 부처님 경전을 읽지도 않고 외우지도 않으며 받지도 않고 지니지도 않으면서 천 년 동안 잠자코 머무른다 하여도 삿된 변론과는 같이 머무르면서 담론하거나 혹은 독송하거나 혹은 잠시 동안이라도 듣지 말지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지금부터 온갖 처소에서 부디 저 법이 아닌[非法] 중생들과 함께 벗이 되지 말 것이요, 같이 살지도 말며 또한 친근하지도 말라. 왜냐하면 만일 법이 아닌 나쁜 사람을 친근하여 그가 한 일들 따르면, 이 사람도 오랜 세월 동안 안온할 수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사람이 알고 나면 도리어 나쁜 법으로 다른 사람에게 달리 가르쳐서 과거와 미래와 현재에 언제나 삿된 법을 행하게 하기 때문이니, 삿된 법을 행하기 때문에 온갖 고통에 바퀴 돌듯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일찍이 세간의 법을 행하면서 세간을 벗어나는 수승한 상인의 법[上人法]을 알 수 있다는 것은 보지도 듣지도 못했거늘 어찌 하물며 삿된 일을 행하면서 증득하는 것이 있겠느냐?
또한 마나바야, 저 나쁜 중생은 능히 만물을 위하여 깨끗한 복전(福田)을 지어 과보를 얻지 못하나니, 여래ㆍ세존도 역시 그 나쁘고 삿된 사람이 다른 이의 공양을 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며, 또 그 밖의 다른 중생들이 그 나쁜 사람에게 옷과 밥과 여러 가지 살림을 보시하는 것도 허락하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그 어리석은 사람은 법답게 행하지 못하는지라 끝내 이 법다운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요, 해탈을 구하지 않는지라 끝내 이 해탈 가운데에 머무르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그들은 어리석고 눈이 멀었는지라 나의 법을 행하지 못하고 삿된 법 가운데 머무르는 것이니,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언제나 ‘만일 모든 중생들이 아직 바른 법[正法]에 들지도 못했고 또한 아직 성문의 법[聲聞法] 중에 들지도 못했는데, 만일 공양한다면 과보가 줄어든다’고 말씀하셨느니라.’
49. 변전찬시품(辯田讚施品)
그 때에 그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어떤 사람이 혹 수다원(須陀洹)에게 공양하기도 하고, 또는 짐승이나 주린 개를 먹여 기르면 그 품류에 따라 모두 공덕이 있나니, 그러므로 당연히 온갖 것에 다 보시해야 하지만 시주(施主)의 마음에 따라 얻는 과보는 차별되느니라.
마나바야, 계율 지닌 사람[持戒人]에게 보시하여 얻는 과보가 다르고, 파계한 사람[破戒人]에게 보시하여 얻는 과보가 다르며, 보시라는 이와 받는 이의 그 일도 모두가 다르고, 나아가 굶주린 개에게 보시하여 얻는 과보까지도 역시 다르니라.
마나바야, 이 때문에 모두는 부지런히 구하면서 청정한 계율[戒]과 인욕(忍辱)ㆍ정진(精進)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 내지 모든 힘[力]과 무외(無畏) 등에 머물러야 하고 온갖 공덕을 다 함께 마땅히 구해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세존은 모든 보살마하살 등이 의복과 음식을 받는 공양에 대하여 네 가지 일[四事]을 허락하였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이른바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자기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를 위해 재물 내지 음식과 모든 탕약(湯藥)을 받아 비축하고자 무릇 필요한 바를 법답게 구걸하여 공양을 받게 되면, 여래는 받도록 허락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허락한 첫 번째의 일[初事]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언제나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나쁜 법을 멀리 여의고 선근을 성숙시키면서 혹 필요한 것을 법답게 구걸하여 공양을 받게 될 적에 여래는 받도록 허락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에게 허락한 두 번째의 일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이 온갖 때에 모든 부처님ㆍ여래와 여래의 탑에 공양하기 위하여 혹 필요한 바를 법답게 구걸하여 공양 받게 될 적에 여래는 받도록 허락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에게 허락한 세 번째의 일이니라.
만일 보살마하살이 언제나 즐거이 경전을 읽고 외우고 찬탄하면서 중생에게 열어 보이기 위하여 혹 필요한 바를 법답게 구걸하여 다른 이의 공양을 얻을 때 여래는 받도록 허락한 것이니,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에게 허락한 네 번째의 일이니라.
마나바야,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 법 중에 능히 머무르면, 그의 행은 오랜 세월 동안에 더욱 자라면서 손감[損減]이 없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보리법(菩提法)을 해설하여 선근이 생기고 자라리니, 그 보살이 이와 같이 행한 뒤에는 누구의 공양을 받을 수 있는가? 이른바 장자와 거사와 바라문 또는 모든 국왕 내지 전륜성왕의 수승한 공양을 받을 수 있느니라. 어떠한 공양을 받는가? 이른바 방사와 침구와 의복과 음식과 병을 치료하는 탕약이요, 나아가 갖가지 재보와 뭇 살림살이로 필요한 바를 충분히 공양 받느니라. 이와 같이 보살은 이러한 위의(威儀)에 머물러서 공양을 받을 때에는 공덕이 줄어지지 않느니라.
또만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네 가지 행(行)에 수순하여 성취하고 나면 이 선근으로 네 가지 과보를 얻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첫째는 만일 그 보살이 염(念)하기를 전륜왕의 자리[轉輪王位]에 있으면서 열 가지 선행을 행하여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면 뜻대로 곧 전륜성왕의 한량없는 천 세(世)를 얻을 것이요, 둘째는 만일 그 보살이 뜻하기를 도리천왕(忉利天王)이 되어서 삼십삼천에게 설법하여 교화하고자 하면 뜻대로 즉각 한량없는 천세를 얻을 것이며, 셋째는 만일 그 보살이 뜻하기를 집을 버리고 출가하여 도를 닦아 사문과(沙門果)를 증득하고자 하면 뜻대로 곧 사문과를 증득하게 될 것이요, 넷째는 만일 그 보살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고자 이 선근을 빙자하여 전도됨을 끊어 없애면서 차례로 모든 선근 중에 머무르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 네 가지 법은 모든 보살마하살의 가장 으뜸가는 수행이 되며, 이 법에 능히 머물러서 공양을 받을 수 있는 이와 능히 보시하는 이[能施者]의 두 사람은 모두가 그 갑옷[大鎧甲]을 입었다고 하나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게으른 사람과 정진이 적은 이와 바른 기억[正念]을 잃은 이와 위의가 없는 이와 잠자기 좋아하는 이와 오랜 세월 게으름을 버리지 않으면서 용맹을 멀리 여의고 부끄러워하면서 다른 이에게 묻지 않는 이들은 이 공양을 받을 수 없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은 사람은 다른 이가 육 년 동안 똥 속에다 버려둔 한 개의 썩은 나뭇조각조차도 감당해 받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만일 모든 중생이 바른 법에 머무르지 않으면 삼계(三界)에서 한 물건조차도 소화하지 못하게 되기 때문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세존은 이와 같은 어리석고 사견(邪見)을 지닌 모든 중생들로서 위의에 머무르지 않고 부처님 계[佛戒]에 의지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법사(法事)를 널리 드날리거나 연설하지 않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모든 보살은 처음 법을 구하는 행[求法行]에 네 가지 일[事]이 있으면 곧 법을 구하려는 마음에서 물러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마나바야, 만일 어떤 보살이 이런저런 중개인[經紀]이 되어서 때로는 마을이나 성읍(城邑)에 가기도 하고 또는 왕도(王都)에 이르러 왕의 궁전에 들어가기도 해서 물건의 거래(去來)를 위하여 갖가지 업무를 다루게 되더라도 그 대중 가운데 한 비구도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지 못하고 또한 한 사람도 용맹스럽게 힘쓰지 못하고 또한 대부분 어리석어서 경전을 알지 못하면, 그때에 그 보살은 모든 무리들이 법 아닌 것[非法]을 많이 행함을 보자마자 물러나서 법을 구하려는 뜻과 행을 버리며 ‘내가 이제 어찌 이런 사람들과 같이 머무르면서 이 법을 배우고 익힌단 말이냐?’라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자세히 관해야 한다. 나쁜 세상[惡世]의 비구는 거짓으로 스님[僧]이라는 이름을 얻어서 다른 이로 하여금 다루고 보호하게 하므로 일을 아는 사람[知事人]들은 존경하고 흠앙하는 마음이 없는 것이니, 이런 인연 때문에 저 보살로 하여금 이와 같은 행 없는[無行] 중생들을 보면 선의 욕심[善欲]을 속히 버리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처음에 행한 보살마하살이 법을 구하는 마음에서 물러나는 첫 번째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어떤 보살이 보살의 모든 공덕의 행을 배우고자 짐짓 다른 데로 가서 바른 법을 청취해 받으려는데, 그곳에 이른 뒤에는 먼저 모든 보살의 행을 청하여 묻고는 용맹스럽게 정진하고 들은 바에 의지하여 행하려 하지만, 그 대중 가운데서 한 비구도 이와 같이 물음에 대해 법을 해설할 수 있는 이가 없고, 그 보살이 법에 대하여 품고 있는 의심을 결단해 줄 사람조차 없는 것을 보고는 곧 비방을 일으키면서 물러나 본래의 마음을 버리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처음에 행한 보살마하살이 법을 구하는 마음에서 물러나는 두 번째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만일 모든 보살이 세간의 유위(有爲)의 일인 이른바 옷과 음식 내지 탕약과 갖가지 도구들을 버리고 이와 같이 보살로서 행해야 할 것을 배우고자 생각해서 승가 대중[僧衆] 안에 이르렀다가 모든 비구들이 높고 큰 평상에 앉아 음식을 즐겨 탐하고, 모두가 부정한 재물을 많이 받아 비축하며, 언제나 잠자기를 좋아하고, 세상사를 기꺼이 논하면서 싫증냄이 없으며, 잘 사유(思惟)하지 않고, 생사의 흐름에 따르면서 마군의 일[魔事]을 더욱 자라게 하는 것을 보면, 그때에 그 보살은 이런 일을 보고 나서는 물러나며 본래의 마음을 버리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처음에 행하는 보살마하살이 법을 구하는 마음에서 물러나는 세 번째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모든 보살이 가상 으뜸가는 즐거움[最上樂]을 행하고자 하고, 아란야의 법[阿蘭若法]을 행하고자 하며, 공삼매의 행[空三昧行]을 행하고자 할 적에 그 자신이 아직 이와 같은 것을 이해할 수 있는 지혜[解慧]가 없으면, 어떻게 아란야의 법을 행하겠으며 다시 어떻게 공삼매문[空三昧門]을 염(念)하겠느냐?
그러므로 그 보살은 생각하기를 ‘나는 오늘 마땅히 출가한 사람[出家人]이든 집에 있는 사람[在家人]이든 속히 가서 이와 같은 행의 법을 묻고 구하고 청하겠으며, 혹시 어떤 사람이 이 일을 능히 알아서 나를 위해 해설한다면 곧 의지해 행해야겠다’고 하느니라.
이와 같이 생각한 뒤에 출가든 재가든 일체의 사람에게 가서 의심된 바를 묻다가 능히 결단해 주는 이가 없으면,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이제 비구 대중 가운데로 가서 이 이치를 물어야겠다’고 하느니라.
이렇게 생각하고 나서 대중 가운데에 이르러서 모든 비구들에게 이 이치를 청하여 물어도 그 대중 가운데 어느 한 사람도 능히 가르쳐 보이는 이가 없고 또한 한 사람도 따라 기뻐하는 이가 없는 것을 보는데, 보살은 보고 나면 그 본래의 마음이 무너져 버리느니라.
그리고 저 행 없는 모는 비구들이 보살에게 이르길 ‘그대들은 지금으로부터 언제나 이런 높고 좋은 평상과 깔개며 갖가지 의복과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받아야 합니다. 부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다른 이의 청(請)을 기다리기 때문입니다’라고 하는 말을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 모든 사람들이 비록 보살에게 이러한 것들을 가르치더라도 또한 받아들이는 법을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다른 이의 옷과 음식을 받으면서 자기에게 손해되지 않을 것이며, 이런 물건을 받고 나서 ‘청정한가, 청정하지 않은가?’와 같은 일을 그들 모두 알지 못하느니라.
마나바야, 그 모든 어리석은 사람들은 잘못된 법을 두루 갖추고 사문(沙門)의 행을 파괴하면서 게으름을 피우며, 부정하고 더러운 곳에서 사문의 마른 풀[枯草]에 계의 거름[戒肥]을 멀리 여의어서 언제나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을 품고 있거늘, 어찌 이와 같은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알겠느냐?
이미 슬기로운 이해가 없거늘 어떻게 능히 행하겠으며, 이미 행을 이해함이 없거늘 어떻게 능히 해설하겠느냐? 가령 해설함이 있다 하여도 어떻게 하여 의심을 끊겠느냐? 그때에 그 보살이 이런 일을 보면 비방하는 마음을 일으켜 법을 구하는 좋은 마음에서 물러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보살마하살이 법을 구하는 마음에서 물러나는 네 번째의 일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지금 이 대중 가운데는 이와 같은 갖가지 나쁜 사람들이 없을 수 있겠느냐?’
모든 보살들이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와 같은 중생을 헤아려 보건대 칠 일 동안 더러운 곳에 던져진 나쁜 음식을 받는 것도 합당하지 않거늘, 하물며 다시 깨끗하고 묘한 음식을 받겠느냐? 이런 사람은 본래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은[受具] 비구로서의 체상(體相)이 없거늘 무슨 연유로 저 비구승(比丘僧)이라는 이름을 얻겠느냐?
또한 마나바야, 이 하늘의 묘한 음식은 본래 저 법에 어그러진 일을 하는 사람이나 깨끗한 계율을 깨뜨린 사람이나 모든 소견에 떨어진 사람 등의 법답지 못한 이들을 위하여 시설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바르게 기억해야 한다. 너희는 지금 이 수미산 꼭대기에 머무르면서 도리천왕의 묘한 음식을 먹었느니라. 이 음식이야말로 가장 수승하고 으뜸가고 미묘하면서 제일의 것이니라. 가령 인간 안의 전륜성왕조차도 오히려 얻지 못하거늘, 하물며 이와 같이 거짓으로 가사(袈裟)를 걸치고는 더럽고 부정하게 법에 어그러진 일을 하는 이들이 이런 하늘의 수타식(須陀食)21)을 받을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먼저 너희들에게 이와 같은 묘한 음식을 말하였거니와, 이런 음식을 먹은 뒤에는 당연히 시주(施主)로 하여금 큰 과보를 얻게 하여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나는 이미 곳곳에서 드러내어 널리 연설하기를 ‘파계(破戒)한 사람은 오히려 바르게 믿는 단월에게 손톱만큼의 물건조차 받을 수 없거늘 하물며 이 하늘의 묘한 음식을 소화할 수 있겠느냐?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 음식을 먹으면 온갖 나쁜 것이 없기 때문이니, 이른바 대변ㆍ소변이나 먼저 먹은 밥이 소화되지 않거나 딸꾹질을 하거나 목이 메거나 상기(上氣)가 일어나거나 하는 일이 없으며, 나아가 답답하고 어지러운 등의 뭇 병까지도 없느니라.
마나바야, 그가 칠 일 동안이나 버려진 더럽고 문드러진 모든 음식을 받는다 해도 오히려 청정하고 착한 행을 하는 사람이면 시주로 하여금 큰 과보를 얻게 할 수 있어야 하거늘, 하물며 이와 같은 하늘의 수타식을 받는 것이겠느냐? 이와 같은 음식은 세간에서는 없나니, 이 때문에 그런 사람 안의 거칠고 껄끄러운 접촉 따위로는 서로 비교할 수 없느니라.
마나바야, 저 파계하고 생각이 바르지 못한 사람이 이런 음식을 먹으면 이 사람은 반드시 크게 좋지 못한 과보[不善果]를 얻느니라.’
아난아, 그때에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런 말을 듣고 나서 곧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느니라.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이 대중 가운데 모든 비구승은 먼지ㆍ때ㆍ모래ㆍ자갈ㆍ기와조각ㆍ돌ㆍ쭉정이ㆍ피와 바짝 마른 나뭇가지나 잎의 꺾어진 것도 없고, 나아가 모자람과 번뇌와 뭇 병으로 인한 갖가지 약을 빌리지도 않으니, 이 비구들은 오직 견고하고 청정하게 계율을 지니고 있을 뿐이라서 선정에 잘 들고 모든 두려움을 여의었나이다.
세존이시여, 지금의 이 대중 가운데는 수다원(須陀洹)이 있고 사나함(斯陀含)이 있으며 아나함(阿那含)이 있고 아라한(阿羅漢)이 있으며, 벽지불(辟支佛)이 있고 마하연(摩訶衍; 대승)의 마음을 낸 이가 있으며, 모든 보살마하살이 있고 또한 인간 안의 사자[人中師子]로서 신통을 완전히 갖추고 도피안(度彼岸)을 얻으신 이도 있사옵니다.
이곳에는 다시 언제나 공삼매(空三昧)를 행하는 이가 있고 무상삼매(無相三昧)를 행하는 이와 무원삼매(無願三昧)를 행하는 이도 있사옵니다.
또 언제나 가장 수승하고 으뜸가는 가운데서도 가장 으뜸가는 단(檀)바라밀과 가장 수승한 시(尸)바라밀과 가장 수승한 찬제(羼提)바라밀과 가장 수승한 비리야(毘梨耶)바라밀과 가장 수승한 선(禪)바라밀과 가장 수승한 반야(般若)바라밀을 행하는 이가 있으며, 마침내는 언제나 위력[力]과 무외(無畏) 등을 행하는 이도 있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이 청정한 모든 비구들이라 하늘 제석의 이와 같은 묘한 음식을 받은 것이오니, 저는 이 대중들이 온갖 처소에서 갖가지 공양을 받아도 소화하지 못하는 바가 없음을 아나이다. 왜냐하면 모든 세간에서 만일 이상한 음식을 먹으면 곧 병고(病苦)가 생기지만 이 분들은 그것을 먹어도 오히려 병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이 미묘하고 청정한 음식 속에서는 대소변까지도 본 적도 없거늘, 이런 음식을 먹는 이가 어떻게 다시 병고가 생기겠나이까? 병고가 생긴다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나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장하고 장하도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오늘에야 비로소 이 제석천왕으로 하여금 마음에 기쁨이 생기게 하였구나.
마나바야, 지금 이 대중 가운데 어떤 중생은 마땅히 ‘부처님의 위력으로 이 대중을 수미산 꼭대기에 오르게 하셨다’고 하는 의심이 일어나야 하느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이제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이 도리천의 모든 하늘 대중들을 위하여 의심의 그물을 없애고자 이와 같이 바른 법을 연설하되. 온갖 비유로써 모두 깨달아 알게 하느니라.’
아난아, 방광여래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자 그때 저 하늘 제석은 곧 부처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만일 사람이 모든 부처님의 제자에게 보시하거나 혹은 번뇌가 다한 모든 아라한이나 모든 벽지불과 혹은 모든 보살마하살들이나 모든 부처님ㆍ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이와 같이 보시하면 차별이 없을 수 있나이까?
세존이시여, 이제 하나의 법의 모양[一法相]을 말씀하셨고 일체가 하나의 해탈[一解脫]이라는 이치를 말씀하셨으니, 이 가운데서 보시에 어떻게 차이가 있겠나이까? 이와 같은 이치를 원하옵건대 자세히 해설하시어 이 중생으로 하여금 의혹된 생각이 없게 하옵소서.’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이제 이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설법하신 것에 대해 의혹을 내지 말라.
교시가야, 그러나 나는 너희를 위하여 갖가지 비유로 이 이치를 나타내 보여서 모든 지혜 있는 이로 하여금 결정코 이해할 수 있게 하리라.
교시가야, 만일 사람이 보시를 행하려고 할 적에는 마땅히 생각하기를 ‘지금 나는 이와 같은 보시를 수행하기 때문에 당연히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를 얻어야 하며, 또한 받는 이로 하여금 한량없는 공덕과 지혜를 얻게 하리라’고 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제 알아야 한다. 여래가 일찍이 ‘한 번 보시한 뒤에는 한량없음에 회향(廻向)한다’고 하였나니, 이와 같이 원한 이는 짐승인 주린 개에 이르기까지 보시한 것조차도 오히려 모두 한량없는 과보를 얻게 되거늘, 하물며 이 수다원ㆍ사다함ㆍ아나함ㆍ아라한ㆍ벽지불과 이 모든 보살마하살 등에게 보시한 이겠으며, 하물며 다시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보시한 이겠느냐?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의혹을 내지 말라. 비록 조그마한 물건을 여래께 보시한다 하더라도 한량없는 복을 얻으니, 한량없음에 회향하기 때문이니라. 이처럼 모든 부처님의 제자에게 보시하여도 역시 한량없는 복을 얻게 되므로 너는 의심을 하지 말라.
교시가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의 제자들은 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와 같아서 측량하기 어려우니라. 너희들은 이제 다시는 이와 같이 여래에게 ‘모든 성문과 모든 벽지불과 모든 보살마하살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 보시를 행하면 한량없는 과보를 얻습니까?’라고 묻지 말라.
교시가야, 나는 이 가운데서 너희로 하여금 의심을 끊게 하리니, 자세히 듣고 자세히 받아서 잘 생각하라. 나는 너희를 위하여 해설하겠느니라.’
그때에 하늘 제석이 곧 부처님께 아뢰었다.
‘거룩하시옵니다. 세존이시여, 원하옵건대 저희들을 위하여 해석하여 주소서.’
그때에 하늘 제석은 일심으로 청취해 받아들였으며, 그때 도리천의 모든 하늘들로 이 회중[會]에 있던 이들은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나 합장하고 저 부처님 앞에 공경하면서 서 있었느니라.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이제 이 삼십삼천을 자세히 살펴보라. 옛날에 지었던 업과 받았던 처소며 그가 지었던 선근의 인연을 모두 다 알겠느냐?
교시가야, 지금의 이 삼십삼천의 천자(天子) 중에서 혹시 자기 자신이 지었던 선(善)에 대해 이는 이도 있느냐?’
하늘 제석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이 모든 하늘들이 과거에 지었던 선업(善業)의 인연을 모두 알지만, 모든 천자들은 자신이 옛날에 지었던 것을 알지 못하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이제 이 하늘 대중 가운데서 어느 천자의 선근이 가장 적은가를 자세히 살펴보라.’
그때에 하늘 제석은 부처님의 명을 받은 뒤에 일심으로 관찰하다가 모든 하늘 대중 가운데서 한 천자의 선근이 가장 적은 것을 보았느니라.
그 천자는 과거 세상에 인간으로 태어났었는데, 그 때의 부처님ㆍ여래에게 수다원(須陀洹)을 행한 제자가 있었다. 차례로 걸식하다가 드디어 그의 집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사람은 단정히 앉아서 밥을 먹다가 그를 보자마자 곧 자리에서 일어나 이 수다원을 행한 사람에게 자리를 내어 주고는 손을 씻은 후 밥을 한 웅큼 보시하였다. 그때에 걸식한 비구는 곧 그 사람에게서 밥을 받아먹은 뒤에 하루를 지냈다. 그리고 이 천자는 옛날에 오직 이와 같은 선근만이 있어서 자리에서 공경히 일어나 한 웅큼만을 받들어 보시했는데, 이런 선근 때문에 목숨을 마친 뒤에는 이 하늘 가운데에 나서 지금의 과보를 받고 있었다.
그 때에 하늘 제석은 그 천자에게 이외 같은 선근이 있었음을 보고 나서 그 천자에게 말하였다.
‘선남자야, 너는 이제 이리 와서 세존께 자신이 옛날에 닦았던 착한 업을 자세히 아뢰어라.’
그때에 그 천자는 제석의 명을 받아 곧 대중에서 일어나 제석천왕의 발아래로 갔느니라.
아난아, 그때에 하늘 제석은 다시 그 천자에게 말하였느니라.
‘선남자야, 너는 이제 여래께 너 자신이 옛날에 지었던 업연(業緣)을 아뢰어서 그 밖의 다른 천자들로 하여금 마음으로 기뻐하면서 여래께 존중하는 뜻을 일으키고 애경(愛敬)하는 마음을 내게 하여라.’
아난아, 그때에 그 천자는 제석의 가르침을 받고 곧 부처님 앞에서 모든 천자들을 위하여 자신이 옛날에 지었던 선근을 말하였고, 모든 천자들은 그 천자가 스스로 옛날에 지었던 선근을 말한 것을 듣고는 저마다 서로 말하면서 크게 기뻐하였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금 이 천자가 있는 궁전의 모든 장엄구(莊嚴具)와 음식, 그 밖의 온갖 의복 등 무릇 수용하는 부분들 중에 한 켤레 가죽신 끝에 붙은 아주 작은 것까지도 취하고는 임시로 큰 모임을 베풀어서 이 염부제(閻浮提)의 온갖 중생을 한 군데에 모이게 한 뒤에 맨 하치의 이 가죽신의 값어치의 많고 적음을 헤아리게 한다면 그 귀천(貴賤)을 알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우선 염부제의 모든 중생은 차치하고 설사 다시 사천하(四天下)의 중생으로 지혜가 있고 아주 교묘한 방편을 갖춘 이라 하여도 역시 이 맨 하치인 가죽신의 값어치의 많고 적음을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그 밖의 모든 물건을 알 수 있겠느냐?
왜냐하면 만일 겨자씨만큼의 염부단금(閻浮檀金)22)을 값어치로 헤아린다면 그 염부제의 모든 사람들과 온갖 재보(財寶), 두 발 달린 유정과 네 발 달린 유정과 여러 발 달린 유정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값어치는 그의 소소한 부분[小分]에도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니라. 내가 또한 방편으로 이런 값어치를 말하기는 하나 실로 값어치는 없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제 다만 한 끼 밥의 보시만을 살펴보라. 이와 같은 중생조차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과보를 얻거늘 하물며 많이 보시한 것이겠느냐?
교시가야, 그의 이와 같은 보시는 더욱 한량없는 과보를 얻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제석이 다시 말하였다.
‘저는 아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천자에게 있는 한량없는 과보의 장엄을 가령 이 삼천대천세계 안에 가득 찬 모든 사람들도 역시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사천하이리까?’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와 같이 삼십삼천에 있는 뭇 장엄구를 야마천(夜摩天) 안의 가장 아래 천자[最小天子]에게 있는 온갖 장엄구와 비교한다면, 이것과 저것의 낫고 못한 일을 다시 어떻다 하겠느냐?’
제석이 다시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인간 안의 몸의 장엄구와 사천왕 몸의 모든 장엄구 내지 지금 이 삼십삼천 몸의 장엄구까지 이와 같은 몸의 장엄구를 모두 모아서 수야마(須夜摩)의 맨 아래 천자에게 준다 해도, 그러나 그 천자는 앞의 뭇 장엄구에 대하여 본래부터 욕심이 없거늘 어찌 취한다거나 받는다고 하겠나이까?
또다시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전륜성왕이 사해(四海)를 돌아다닐 적에 갑자기 어떤 사람이 거친 음식[鹿]食을 받들어 올리면 왕은 본래부터 받지 않거늘 어찌 먹는다는 것을 논하오리까?
세존이시여, 저 수야마의 맨 아래 천자도 역시 그와 같아서 이 도리천 내지 인간의 온갖 과보로서의 모든 장엄구를 보면서도 본래부터 욕심이 없거늘, 하물며 탐내고 취하면서 다시 수용(受用)하겠나이까? 왜냐하면 그에게 수승하고 미묘한 오욕(五欲)의 과보로서 정미(精微)함은 저절로 있는 것이지 뜻으로 원한 것[情願]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다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치 도솔천(兜率天)이 살고 있는 궁전의 장엄구처럼 야마천ㆍ삼십삼천ㆍ사천왕전과 그 밖의 온갖 하늘과 사람이 살고 있는 궁전에서 수용하는 뭇 장엄구는 다시 저 도솔천의 것과 동일할 수 있느냐?’
하늘 제석이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그와 같아서 차례로 위로 올라갈수록 더 수승하나니, 범천[梵]이 사는 모든 하늘은 여섯의 욕계천[六欲天]보다 뛰어나고, 나아가 마혜수라(摩醯首羅)23)는 그 밖의 여러 하늘보다 뛰어나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보시의 과보의 차별은 한량없나니, 나는 이제 너를 위하여 다르게 해설할 따름이니라.’”
'매일 하나씩 > 적어보자 불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적어보자] #3533 불교 (대법고경/大法鼓經) 상권 (2) | 2024.01.03 |
---|---|
[적어보자] #3532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20권 (2) | 2024.01.03 |
[적어보자] #3530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8권 (2) | 2024.01.02 |
[적어보자] #3529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7권 (4) | 2024.01.02 |
[적어보자] #3528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6권 (2) | 2024.01.0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