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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30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8권

by Kay/케이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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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8

 

 

대법거다라니경 제18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45. 여화품(如化品)

“아난아, 그 때에 하늘 제석이 다시 방광여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는 이 가운데서 도무지 의혹이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역시 먼저 저의 마음을 체달해야 하리이다. 하지만 오늘 여래께서 이 도리천궁에 오랫동안 머무시면서 저희들의 하찮은 공양이나마 가엾이 여겨 받으시기를 바라옵니다. 이런 이치 때문에 저는 여래께 여쭈옵니다.
세존이시여, 지금 모든 대중들을 거느리시고 저의 궁전에 왕림하셨으므로 저의 마음은 기뻐 어쩔 줄 모르고 있나이다. 왜냐하면 저는 나서부터 지금까지 모든 아수라와 하늘들이 즐거워하면서 함께 머무는 것을 보지도 듣지도 못하였기 때문이니, 이제 세존의 가지(加持)와 위신력을 입어 저와 모든 하늘들로 하여금 아수라와 함께 기뻐하면서 쾌락을 받게 하시옵니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네가 어찌 알지 못하겠느냐? 나는 지금 이 열네 보살마하살들의 전생의 서원을 만족시키고, 선근(善根)을 더욱 자라게 하며, 그 자비와 은혜를 이루게 하기 위함이니, 나는 이제 반드시 이 보살들을 거두어서 가르쳐 보이고 또한 이들이 도량(道場)에 앉아 훈수(熏修)하는 인(因)을 얻게 하려 하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열네 보살들은 그 아버지 선비(善臂)아수라왕을 따라 선법전(善法殿)에 있다가 방광여래 앞에서 의복을 단정히 하고 오른편 어깨를 벗어 메고 오른 무릎을 땅에 댄 채 합장하고서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스스로 설법을 들은 것에서 있는 힘을 다하여 찾고 사유하였지만 아해하지 못하고 있사오며, 다만 여래께 공경하고 존중하는 마음만을 낼 뿐이옵니다. 그래서 감히 이와 같은 이치에 대해 여쭙겠나이다.
세존께서는 이미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言敎方便業藏]은 증득하였사오나 저희들은 지금 전혀 받아 지니지 못하오니, 이 때문에 이제 이 이치를 알고자 하나이다. 원하옵건대 세 가지 법장의 문[法藏門]을 연설하여 주소서.’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에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도다. 마나바야, 너희들은 여래의 법장(法藏)을 듣고 싶으냐?’
모든 보살들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듣고 싶사옵니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곧 스스로 저 금빛의 오른손을 펴시어 허공을 가리키면서 모든 보살마하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이제 여래ㆍ세존의 손이 어디에 있는가를 보아라.’
모든 보살들이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오직 여래ㆍ세존의 손이 허공을 가리키고 있는 것만을 보나이다.’
부처님은 다시 말씀하셨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허공은 지을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볼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들을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이 허공을 지을 수 있고 볼 수 있으며 들을 수 있고 접촉할 수 있다면 곧 증득하여 알 수 있나니, 여래의 법장의 이치도 역시 그와 같음을 너는 잘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다만 이것은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하고 나서 모든 세간이 허깨비 같음을 보고서 모든 법을 임시로 설하여 방편을 나타내서 중생을 인도하는 것일 뿐이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 중생은 법에 집착하는 생각이 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여래는 그들을 위하여 법을 연설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여래 역시 연설하는 바가 없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반드시 이 세 가지 교장(敎藏)이 있다 하면 그것은 움직일 수도 없고 설명할 수도 없으며,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지라 성취할 수 없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이 허공에 더하거나 덜하는 모양[增滅相]이 있다고 한다면 옳지 못하느니라. 오직 저 여래만이 이 경계가 있을 뿐이니, 이른바 모든 법을 건립하는 것이니라. 이 가운데서 모든 세간을 마치 허깨비처럼 보면서 대자비(大慈悲)에 머무르며, 이런 법을 연설하여 모든 보살마하살들로 하여금 이와 같은 법을 얻게 하되 손감(損減)이 없게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온갖 중생에게는 마흔두 번의 날숨[出息]ㆍ들숨[入息]이 있나니, 마흔두 번의 날숨과 들숨의 구(句)를 위하여 그로 하여금 배우고 알게 하여 글자[字]의 근본을 설명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만일 어떤 보살마하살이 이와 같은 네 가지 여의족(如意足)을 구족히 얻는다 해도 그 보살 역시 모든 중생들에게 이와 같은 곳을 해설할 수 없느니라. 이른바 처음 아자문(阿字門)의 마흔두 구(句)는 이와 같은 차례로 세어서 팔 분(八分)에 이르며, 팔 분 가운데 있는 분단(分段)은 곧 모든 중생들에게 해설하는 팔 사유의 처소[思惟處]이니, 세간 가운데서 이 팔법(八法)을 연설하면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제이의 교장법문(敎藏法門)으로 너희는 이 법을 사유하면서 수행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가령 아자문은 속박하지도 않고[不縛] 해탈하지도 않아서[不解] 일체 모든 법에 있는 언어로 말할 수도 있고 볼 수도 있음을 반드시 알아야 하나니, 그것들 일체는 속박하지 않고 해탈하지도 않느니라.
어떤 것을 속박하지도 해탈하지도 않는다고 하는가? 마나바야, 이를테면 온갖 법의 성품[法性]은 본래 스스로 공(空)하거늘, 누가 그 가운데서 속박하게 하고 해탈하게 할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마치 저 판자 위의 문자 장구(文字章句) 내지 언설(言說)도 역시 머무르는 데가 없는 것과 같나니, 만일 방편으로 이 언설이 있지 않으면 한 중생도 그 한 구(句)를 아는 이가 없으리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총해(摠解)로 교장법문의 이치이니라.’
그때에 모든 보살들이 다시 부처님께 아뢰었다.
‘어떤 것을 총해라 하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너희는 응당 받아 지니는 것으로 법의 이치[法義]에 들어가야 하며, 너희는 이 가운데서 의혹을 내지 말라. 이 해설 가운데는 의심의 그물이 없느니라. 어찌하여 의심이 없는가? 모든 법은 다 허깨비와 같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세간에 있는 모든 언어의 법을 여래ㆍ세존께서는 다 알고 보시느니라. 이 가운데서 중생에게 의심이 있으면, 여래가 말씀하신 이러한 등의 법으로 그들로 하여금 의혹 있는 마음을 끊게 하느니라. 어떻게 의혹을 끊는가? 방편과 비유를 들어 해석하기 때문에 이 가운데서 설한 바대로 머무르니, 그렇다면 도리어 아자문(阿字門)에 머물러서 서로 생기하는 법[相生法]을 얻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오직 육 일 동안 바른 생각[正念]으로 여래의 업[如來業]을 이루어야 할 뿐이며, 사유(思惟)할 때에 다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네가 만일 법상(法相)의 이치를 헤아릴 때 다만 이와 같은 바른 생각만이 현전해 여래를 염(念)해야 하기 때문이니, 그 때에는 해설한 바가 있거나 없거나 간에 이 법 가운데서는 의심이 없느니라.
이로 인하여 육 일 동안 여래를 염하고 나면 곧 아 자 법문(阿字法門)을 깨치게 되며, 육 개월 동안 음식을 생각하지 않으면 이 염(念) 때문에 여래의 앞에서 다시 한량없고 가없는 변재(辯才)를 얻느니라. 이와 같이 염한 뒤에 만일 가자 법문(迦字法門)의 이름을 얻는다면 곧 능히 얻어서 사유를 성취하게 되나니, 이것이 제구분(第九分)이니라.
하나의 마음[一心] 가운데서 어떻게 생길 수 있는가? 오직 여래만이 머무르는 곳[住處]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알 수 있으니, 또한 이처럼 설하는 곳을 여의지 않고도 일체 모든 법은 마치 허깨비와 같으니라.
너 마나바는 다른 생각[二想]을 내지 말고 의심도 하지 말며 또한 궁전이라는 생각[宮殿想]도 짓지 않아야 하느니라. 다만 육 개월 동안 가자문만을 염하고 이로 인해 다시 여래를 염해야 하니, 만일 삼매의 정(定)을 성취하게 되면 가령 여래가 눈앞에 나타나지 않아도 역시 곧 뵐 수 있으므로 의혹을 내지 말라. 여래는 아직 너희들을 위하여 마지막 의심을 끊는 말을 하지 않았나니, 이 때문에 너희의 의심이 아직 끊어지지 못한 것이니라.
또한 다시 여래가 비록 너희들을 위하여 해설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다할 수는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어떤 나무에 꽃이 필 때에 꽃이 나오고, 열매가 열릴 때에 열매가 나오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나무에 꽃이 필 때가 되지 않았는데도 꽃을 구하면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열매가 열릴 때가 아직 되지 않았는데도 열매를 구하면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도 역시 그러해서 해설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해설하지 않을 뿐이니라.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나무의 온 곳을 알 수 있으며, 나아가 꽃과 열매가 온 곳까지도 알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능히 말하고[能說] 말하여지는[所說] 온갖 것은 온 곳[來處]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혹시 어떤 사람이 그 나무를 파기 시작하여 뿌리와 줄기와 가지가 잎을 뽑아낸 뒤에 다시 칼과 도끼로써 베고 꺾고 하여 부스러지게 하고, 나아가 대추나 밤톨만큼의 것까지도 없게 하였다 하자.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나무가 이와 같이 갈라져서 이리저리 흩어진 뒤에도 본래의 꽃과 열매를 구한다면 얻을 수 있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이미 부서지고 흩어진 뒤인데다 나무의 모양까지도 볼 만한 것이 없거늘 어찌 꽃과 열매를 얻겠나이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법에는 모양이 있는 것이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말로써 설명할 수 있겠느냐?
또한 마나바야, 만일 법사로서 법좌(法座)에 오르면 그 때에는 먼저 아자문(阿字門)을 염(念)해야 하고, 또한 여래의 세 가지 언교 업장[言敎藏]을 염하면서 놓아 버리지 말아야 하며, 이와 같은 모든 행은 저 세 가지 문에서 염처(念處)를 상속해서 염한 뒤에 다시 염하면, 이런 일을 지을 때에는 다투는 이론[諍論]의 언설까지도 일어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하려 할 적에는 마땅히 저 육 일 동안의 할 일을 염하면서 여의지 말고 또한 잠시도 쉬는 일이 없어야 모든 법을 증득하여 알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저 가자문의 언어와 해설이 상속하면서 끊어지지 않고 그 가운데서 아(阿) 자를 처음으로 삼아 지혜와 서로 계합하여야 스물한 구(句)가 바야흐로 구족하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대저 언교(言敎)라 함은 바로 그 가운데의 스물한 구가 차례대로 어지럽지 않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이렇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드물게 출현하시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그 때에는 이와 같은 법행(法行)이 없기 때문이니, 비록 있다 하더라도 많은 사람들은 끝내 법행대로 할 수 없었느니라. 이때에 역시 한량없는 중생들이 처음부터 이 법을 사랑하고 그리워하는 마음을 일으킨다 하더라도, 그 일에 임하면 대부분 놀라고 두려워하는지라 끝내 얻게 되는 바가 없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나는 이와 같은 행으로 곧 모든 부처님 법을 성취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집착하는 것이 되느니라. 만일 이 집착이 부처님 법이라면, 옛날 겁초(劫初) 때의 사람은 안팎의 사물에 대하여 아(我)와 아소(我所)가 없었고 모들 법에 집착하지도 않아서 조작(造作)을 빌리지도 않아도 과보가 저절로 바라는 대로 곧 이르렀는데, 그 후에 점점 다투는 마음을 일으키다가 자연스럽게 뭇 맛[衆味]의 과보를 상실하였느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너희들은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끝내 부처님 보리[佛菩提]에 집착하지 않느니라. 너희는 이 가운데서 집착을 내지 말아야 하며, 만일 집착하면 즐거움을 받지 못하리니, 왜냐하면 대저 집착한다는 것은 모든 괴로움의 근본이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울단월(鬱單越)19)의 사람을 보아야 한다. 비록 세 가지 방향[三方]과 더불어 똑같이 사람의 몸[人身]을 받아도 과보는 최상이니, 그들이 사는 동안에 비록 보시 등이 없다 하더라도 목숨을 마친 뒤에는 모두가 욕계천의 궁전[欲界天宮]에 올라가 나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알아야 한다. 무위(無爲)의 일은, 마침내 오랜 동안 즐거움을 얻을 수 있거니와, 만일 그것이 유위(有爲)여서 아와 아소에 집착하게 되면 이런 사람은 하나의 불선법(不善法)도 받지 않음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불선법이란 이른바 모든 행[諸行]의 생사(生死)인 것이니, 이 때문에 여래는 언제나 경계하면서 ‘유위의 모든 법에 집착하지 말라’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유위의 법을 짓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면 바로 이것이 여래가 마지막까지 ‘보시 등의 다섯 바라밀(波羅蜜)을 수행하라’고 널리 연설한 것이니, 이 때문에 온갖 곳에서 모든 바라밀을 연설하면서 더불어 훈수(熏修)하느니라.
어떻게 훈수하는가? 보시를 수행하고 나서는 곧 능히 법을 듣고, 법을 듣는 데에 이르면 곧 능히 물으며, 물어서 수승한 법을 보면 곧 구하여 배우느니라. 그들이 만일 모든 법은 수승함[勝]도 없고 아(我)도 없으며 집착[執]도 없고 남[生]도 없으며 나옴[出]도 없음을 안다면, 곧 온갖 유위의 법 가운데서 여실히 알 수 있느니라. 그 때에는 곧 모든 여래의 처소에서 진실한 신근(信根)을 얻게 되며 또한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느니라.
어떻게 부지런히 정진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는가? 이와 같은 큰 방편이 있기 때문에 속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의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서 ‘원컨대 저희들로 하여금 이 법 가운데서 언제나 수행하게 하여 마침내 스스로 증득하여 알게 하소서’라고 하며, 이와 같은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의 설법을 들을 적에도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어찌하여 놀라거나 두려워함이 없게 되는가? 온갖 것에 대하여 모두 버리는 생각[捨想]이 있기 때문이니라. 무엇을 버리는 생각이라 하는가? 이른바 모든 법 가운데서 바라는 것도 없고 또한 다투려는 마음도 없는 것이니라. 왜냐하면, 마치 모든 것은 허깨비[幻化]와 같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는 나타내 보이면서 이치를 해설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바라밀들은 곧 해탈의 인[解脫因]이니, 여래의 설법은 이로 인하여 다툼을 끊기[斷諍] 때문이니라. 다툼을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비록 생(生)을 끊는다 하더라도 끊어지지 않는 것이니라.’

46. 연생법품(緣生法品)

그 때에 모든 보살들이 다시 방광부처님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떤 것이 생(生)으로 하여금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이옵니까? 완전히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만일 그와 같다면 일체 모든 법의 여실한 해설[如實說] 가운데 의심할 만한 것이 없나니, 의심한 것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이 증득하여 아느니라. 그 때에는 생(生)이 끊어지지 않게 하면서도 또한 끊어지지 않는 것도 아니니, 이런 법행(法行)을 지니면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되느니라. 내가 지금 이와 같이 끊어지지 않는 것[不斷]에 대해 해설해도 모든 중생들은 오히려 능히 알지 못하거늘 법을 받아 지닐 수 있는 이가 있겠느냐?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큰 바다[大海]는 언제나 모든 큰 강물을 수용할 수 있고 억백천 수(數)의 온갖 흐름도 큰 바다에 돌아가지만, 저 큰 바다는 다 차는 때가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처럼 모든 중생들은 세 가지 탐욕ㆍ아첨ㆍ온갖 악[衆惡]들을 두루 갖추는지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는 한결같이 그들을 위하여 보리 등의 온갖 법문을 널리 연설하시어 처음부터 끊어짐이 없는데도 오히려 능히 받지 못하거늘, 하물며 때로 끊어져서 연설하지 않는 것이겠느냐?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큰 법의 비[法雨]를 내리시되 일찍이 끊어짐이 없나니, 왜냐하면 저 장차 오는 세상의 어리석고 미혹된 청맹과니의 눈 없는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길이 아닌 곳[非道]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해와 달의 광명으로 인하여 온갖 세간에서는 낮과 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처럼 온갖 법의 바퀴[法輪]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만일 모든 법사가 다른 이를 위하여 설법할 때 이 사람이 법을 구하면서 읽고 외우며 환히 알면, 다시 두루 해설하여 세간의 등불이 되어 저 아득히 잠 든 눈먼 중생들을 위하여 끊지 못한 생사의 그물 바퀴[網輪]를 해설하여 끊어지게 할 것이니라.
또한 질투하고 믿지 않은 탓에 언제나 세 가지 일[三事]에 가리고 얽매여서 악취(惡趣)와 장애에 떨어지는 중생들을 위하여 큰 법의 횃불[大法炬]을 켜리니, 이 광명으로 인하여 중생은 법을 볼 것이요, 만일 모든 중생으로서 악도(惡道)에 떨어져 있는 이들은 곧 속히 벗어날 수 있으며, 이미 험난한 악도를 여의고 나면 그들은 저마다 평탄한 바른 길[正路]을 구할 것이니라.
마나바야, 평탄한 바른 길이란 험난하고 나쁜 길을 멀리 여의면 곧 이 길이 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만일 이와 같은 설명 가운데서 믿고 행하지 않으면 해탈하기 어려우니라. 능히 믿고 행하는 이는 당연히 온갖 세간을 위하여 크게 이로운 문을 열리라. 그는 법을 얻은 뒤에는 모습을 굴려 가르쳐서 중생 중에 들은 이에겐 모두 등불이 되니, 또한 저마다 말하기를 ‘여래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진실한 법을 말씀하셨으며, 또한 전도되지 않는 말씀[不顚倒說]을 보이셨다’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이와 같이 부지런히 힘쓰고 게으르지 않으면서 바른 업[正業]을 성취하여야 하며, 바른 업이 성취되기에 티끌과 때[塵垢]를 멀리 여의어 염착(染著)이 없을 것이요, 염착이 없기 때문에 청정한 소견[見]을 얻으며, 소견이 청정하기 때문에 다시는 차고 더운 것[冷熱]이 없으리니, 온갖 세간에 있는 뭇 일들이 모두 바르고 착한 업[正善業]을 성취하게 되기 때문이니라.
여타의 중생들이 다시 이설(異說)을 말하여 갖가지 삿된 법[邪法]과 불선업의 행[不善業行]을 짓는다면, 그의 처소에서는 마땅히 여의는 마음[捨心]을 일으켜야 하고 스스로 사유하면서 다스리는 법[對治法]을 닦아야 하나니라. 만일 이와 같은 법을 닦아 배우고 나면 곧 저 예순두 가지 나쁜 사견 가운데서 진실한 지견(知見)을 얻고 참된 법[眞法]을 성취하여 일체의 여실한 장애를 없애게 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법사라면 언제나 이와 같은 억백천 수의 신근(信根) 중생들을 위하여 두루 법요(法要)를 연설해야 하며, 혹은 다만 한두 가지의 파계(破戒)와 사견으로 악을 거듭하는 중생을 위하여 한 번 손가락을 튀기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설법하여 주면 그가 받든 받지 않든 법사가 얻는 공덕은 앞의 복더미보다 뛰어나서 한량없고 가없느니라.
이 선근으로 인하여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태어날 때마다 언제나 용맹스럽게 정진하면서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게 되리니, 그 때에 비록 사람이나 사람이 아닌[非人] 자와 같은 많은 종류의 중생들이 바른 법을 듣고 나서 마음에 두려움을 낸다하더라도, 너희들은 디만 그들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할 뿐이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늘 중생들에겐 이러한 나쁜 욕심과 아첨과 속임수와 아만(我慢)이 있다는 걸 관찰해야 하나니, 무명(無明)의 어둠에 가려지고 얽매여 있기 때문이니라. 얽매이고 가려지기 때문에 이 법 가운데서 큰 두려움을 내며, 스스로 두렵기 때문에 법을 행할 수 없느니라. 가령 말하는 바가 있다 해도 역시 또 다른 이로 하여금 받아 행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간혹 스스로 번뇌의 장애를 알면 다시 서로 말하기를 ‘우리들에게 지금 이와 같은 여러 악(惡)이 있는지라, 비록 바른 법을 듣는다 하더라도 모든 소견을 끊지 못한다. 이와 같은 모든 소견을 우리는 반드시 끊어야 하는데, 어떻게 끊어야 하는가? 이제 스스로 알아서 모든 소견을 끊어야 한다. 만일 뭇 소견을 받아들이면서 끊지 못하면 곧 캄캄한 사견(邪見)의 우거진 숲에 들게 되며, 이 사견 때문에 언제나 생사(生死)에 얽매이고 갇히게 되거니와, 만일 이러한 근원이 되는 뭇 소견을 능히 끊으면 저절로 생사의 계박(繫縛)에서 해탈하게 되리라’고 하느니라.
마나바야, 부처님ㆍ세존이 다른 이를 위하여 말씀하실 적에 만일 사람이 청취해 받아들이면 끝내 두려움을 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여래ㆍ세존께는 끝내 두려움이 없고 모든 부처님 법에는 결감(缺減)이 없으며, 다른 이를 위하여 말씀하실 때는 그 듣는 이로 하여금 더욱 착한 업을 자라게 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법을 들을 적에 너희들은 집착하지 않고 다만 일심일 뿐 다른 생각을 내지 말아야 하느니라.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이런 일을 위하여 짐짓 세간에 출현하셨을 뿐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께는 오직 이 일만이 있을 뿐이니, 이른바 모는 세간을 이롭게 하고 세간의 눈[眼]을 청정하게 하기 위하여 온갖 길 아닌 길[非道]을 끊어 없애고 막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다만 한 음성만으로 말씀하셔도 그 중생으로 하여금 종류에 따라 저마다 이해하게 하나니, 이것은 바로 여래의 신력과 가지(加持) 때문에 그리 될 뿐이니라. 여래는 한 음성으로 모든 법의 이치를 말씀하시되 한 이치로써 한량없는 지혜[無量智]를 얻게 하고, 또 한 지혜[一智]로써 예순두 종류의 사견이 되는 근본을 깨뜨려 없애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모두가 온갖 티끌과 때[塵]를 멀리 여의게 하느니라.
만일 가장 나쁘고 지극히 두려운 곳에서 중생이 몸을 받아[受身] 갖가지 업(業)을 겪으면, 여래는 그 가운데서 설법하고 교화하여 구제하되 잠시도 쉬는 일이 없이 중생을 가르치고 경계하나니, 너희가 만일 이와 같은 나쁜 업을 짓지 않으면 끝내 이런 곳에 태어나지 않느니라. 여래ㆍ세존께서는 그 밖의 다른 일을 하심이 없이 오직 가르쳐 보이시면서 행업(行業)을 끊어 없앨 뿐이니라.
음(陰)ㆍ입(入)ㆍ계(界) 등 모두 갖가지 행[諸行]으로 생(生)을 받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온갖 세간에 있는 갖가지 행과 몸을 받는 것을 나는 모두 가르쳐 보여서 행하지 않게 하나니, 이런 갖가지 일을 위하여 나는 언제나 이르길 ‘하늘도 없고 사람도 없고, 나아가 수명(壽命)과 자재(資材)도 없으며 세간의 온갖 것도 모두 없다’고 널리 연설하느니라.
만일 짓는 것[作者]이 있으면 곧 생을 받는 것이 있나니, 어떤 것이 짓는 것인가? 짓는 모든 행이 바로 생을 받는 것이니라. 만일 다음 생[後生]을 받으면 이 가운데서 어떤 중생도 생(生)을 받지 않는 이가 없는 줄 알아야 하나니, 너희들은 모든 행을 짓는 이가 바로 생을 받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마치 큰 용왕이 널리 큰 구름을 일으켜 온갖 것을 두루 덮고는 큰 비를 쏟아 대지(大地)를 흠뻑 적시고, 더불어 모든 수목과 우거진 숲을 울창하게 하면서 더욱 자라게 하고, 백 가지 곡식과 과실(果實)도 모두 성취할 수 있게 하며, 이 모든 중생들도 이를 밑천으로 살아가고 나아가 모든 축생에 이르기까지도 역시 똑같이 더욱 자라게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암소들이 기름진 풀을 먹고 깨끗한 물을 마시면서 언제나 배부르면 그런 뒤에는 우유를 얻게 되니, 우유로부터 타락[酪]이 나오고 타락에서는 소(酥)가 나오며 생소(生酥)에서는 숙소(熟酥)가 나오고 숙소에서는 제호(醍醐)가 나오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너는 온갖 인연으로 생기는 법[緣生法] 가운데서 두려움을 내지 말아야 하고, 또한 어찌해야 모든 중생이 있고 모든 중생이 없다고 설명할 수 있냐고 말하지도 말아야 하며, 오직 인연(因緣)의 모든 행을 잘 관해야 할 뿐이니라.
마나바야, 마치 사람이 잠을 잘 적에 꿈속에서 보는 것을 짓기도 하고 짓지 않기도 하지만 그 모두는 깨어 있을 적에 일찍이 겪었던 일인 것과 같으니라.
또 마치 종자(種子)에는 정해진 모양이 없어서 그 형질(形質)을 논한다면 파괴된다고 말할 수도 없지만 또한 파괴되지 않는 것도 아닌 것과 같으니라. 왜냐하면 만일 반드시 파괴되는 것이라 하면 곧 싹이 나지 않을 것이요, 만일 결정코 파괴되지 않는 것이라 해도 싹은 역시 나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니, 온갖 유위(有爲)의 인연으로 생기는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망령되이 사유하고 분별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니라. 이 가운데서는 실로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없고 또한 보는 이도 없느니라.
이처럼 마나바야, 여래는 반드시 중생이 있다고 말하지도 않고 또한 없다고도 말하지 않으니, 여래는 오직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從因緣生] 인연으로부터 없어진다[從因緣滅]고 말할 뿐이니라.
어떻게 하여 모든 법은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없어진다 하는가? 이른바 그것으로 인하여 이것이 있게 되고 그것이 생긴 뒤에는 이것이 생기는 것이며, 그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은 없고 그것이 소멸한 뒤에는 이것도 소멸하느니라.
만일 온갖 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긴다면 어찌하여 반드시 부가라(富伽羅)가 있다고 말하느냐?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는 반드시 중생이 있다고 말하지 않으며, 모든 하늘과 사람과 그 밖의 모든 취(趣)도 역시 소멸한다고 말하지 않으며, 오직 놓아 버리지 못한 집착과 전도될 분별[顚倒分別]만을 말할 뿐이니라. 이를테면 중생이 있다면 곧 광명이 없는 극히 어두운 곳에 떨어지는지라 오직 그들로 하여금 버리게 함으로서 바른 길을 보일 뿐이며, 다시는 이 부가라를 애착하고 좋아하지 않게 하느니라.
마나바야, 저 진실한 법은 파괴할 수 없나니,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조그마한 풀에 이르기까지도 오히려 파괴하려 하지 않거늘 하물며 부가라를 소멸시키려 하시겠느냐? 만일 소멸하고 파괴시킨다면 옳지 못한 일이니라.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항상 말씀하시되 ‘어느 한 법도 성취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하시느니라. 그러나 또한 인연으로 생기는 법은 없지도 않으며 또한 집착하고 전도함도 없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어느 한 법도 인연을 여의지 않나니, 인연이 있기에 부가라의 모양이 있고 사물(事物)이 있다고 설명하며 세간의 선법과 악법을 드러내 보이면서 권하여 알게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사물이란 생각[物想]은 바로 판자라는 생각[板想] 등이니, 판자라는 생각 등 때문에 모든 사물이란 생각을 아는 것이니라. 어느 것이 사물이고 어느 것이 판자인가? 이른바 사물이란 허망한 분별로써 사물이란 생각 안에 머물러 미래의 온갖 행을 조작하는 것이니라.
마나바야, 어떠한 이치 때문에 또한 사물이라 하느냐? 이와 같은 생각[想]으로 여러 가지 일을 짓기 때문에 사물이라 하는 것이니, 그것의 전제(前際)와 후제(後際)는 알 수 없어서 마치 풍륜(風輪)과 같으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풍륜을 타고 있다는 생각을 내면 판자라는 생각 안에 머무르게 되리니,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저 풍륜은 일념(一念) 동안까지도 머무름이 없는 것처럼 모든 중생들이 그 업풍(業風)을 타는 것도 역시 그와 같으니라. 저 모든 중생들은 업행(業行)을 지은 뒤에 다시 모든 행을 지으면서 이와 같이 성취하며, 그가 성취하고 나서는 일찍이 저 일념의 각심(覺心)을 낸 적도 없느니라. 우리가 옛날에 지었던 착하지 않은 바를 생각으로 분별하여 비어있는 일[空事]에 윤회하면서 생사를 헤매며 잠시라도 머문 적이 없는데도 그 변두리조차 깨닫지 못하고 보지 못하며 넓고 좁은 것도 알지 못하며 작고 큰 것도 알지 못하느니라.
언제나 이와 같은 업행의 풍륜에 처해 있음을 보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한 채 오가면서 빙빙 돌며 스스로 벗어날 수 없는 것이 마치 날 적부터 소경인 사람이 일찍이 빛깔[色]을 보지 못한 것과 같거늘, 만일 다른 이가 와서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해야 하겠느냐? 또 마치 어리석게 길을 인도하면 앞길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과 같나니, 설령 어떤 사람이 와서 길의 모양을 묻는다 해도 그가 이미 모르고 있거늘 다시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가령 말[言]이 있다 해도 정녕코 이취(理趣)는 없으리라.
마나바야, 모든 중생들이 모든 행의 바퀴[行輪]를 타고 빙빙 돌면서 머무르지도 않고 깨닫지도 알지도 못하는 것이 역시 그와 같으니라. 그러면서 그 중생은 이 풍륜을 타고 오갈 적에는 초제(初際)ㆍ중제(中際)ㆍ후제(後際)까지도 없고 그 가[邊]도 얻지 못해서 전혀 깨달아 알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며 기억하지도 못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그 때에 소경은 생각하기를 ‘이제 나는 마땅히 이 풍륜에 머물러 있어야겠다. 내 생각[思想]으로는 이 풍륜 가운데에 머무를 수[停住] 있으리라’고 생각한 뒤에는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각 생각마다 더욱 자라면서 끊어짐이 없었느니라.
그 소경은 나중에 잠시 머무르게 됐는데, 곧 이 풍륜으로부터 내려가려 하다가 다시 내려가지 않으면서 생각하기를 ‘내가 이제 만일 이 길을 보게 된다면 곧 아래에 처할 수 있어서 즉시 머물게 될 것이요, 이미 머무르게 되면 나는 마땅히 스스로 잠시 동안 쉬고 멈추어 있어야겠다’고 하였느니라.
그 소경은 나중에 다시 생각하기를 ‘나는 오늘 보거나 보지 못하거나 간에 여기서 다만 잠시 동안 머무르기만 하리라’고 생각한 뒤에 곧 잠시 동안 머물렀는데, 머무른 뒤에 사유하길 ‘지금 나는 머무르게 되었으므로 곧 즐겁다는 생각[樂想]이 생기면서 피로함도 역시 제거되는구나. 그러나 아직도 내려갈 길을 보지 못하였거늘 어떻게 이 풍륜으로부터 내려가겠느냐? 내가 만일 보게 된다면 곧 풍륜이 왕래하는 처소를 알리라’고 하였느니라.
마나바야, 그 소경이 이렇게 생각할 때에 그곳에서 눈을 잘 치료하는 용한 의사를 만나게 되었는데, 비록 만났다 하더라도 눈으로 보지 못하였느니라. 이때에 어진 의사[良醫]는 그 소경을 가엾이 여겨서 눈을 치료해 주기 위하여 그에게로 가서 물었느니라.
‘당신은 눈이 이러한데 빛깔을 볼 수 있습니까?’
소경이 대답하였느니라.
‘나의 눈이 이와 같거늘 어떻게 빛깔을 볼 수 있겠습니까? 내가 만일 보게 된다면 곧 바른 길을 알 것입니다.’
어진 의사는 말하였느니라.
‘우선 당신의 눈을 열어서 시험 삼아 살펴봅시다. 치료할 만하겠으면 그대를 위하여 치료하여 주겠습니다.’
소경은 듣자마자 곧 크게 눈을 벌려서 그 어진 의사에게 보였으며, 그 때 어진 의사는 이 사람의 눈 속의 병을 자세히 관찰하여 병의 근본 원인을 알고는 필요한 바에 따라 치료하였는데, 혹은 끼워 넣기도 하고 혹은 침을 놓기도 하며 혹은 긁어내기도 하고 혹은 약을 바르기도 하는 등 이와 같은 일을 하면서 눈을 치료한 뒤에 소경에게 말하였느니라.
‘나는 지금 당신을 위하여 좋은 처방으로 치료하였는지라 당신의 눈병은 나아서 여러 가지 빛깔을 보게 될 겁니다. 만일 보게 된다면 어찌 경사스럽지 않겠습니까?’
그때에 그 소경은 어진 의사에게 말하였느니라.
‘저는 태어날 적부터 눈이 멀었는지라 고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당신의 가르침대로 된다면야 그 경사스런 일을 어찌 말로 다 하겠습니까?’
어진 의사는 다시 말하였느니라.
‘이 일은 진실로 어렵기는 하나 나의 힘으로 능히 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나를 믿는 마음만을 내시오. 이것은 우리 집안의 가업(家業)이므로 당신은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당신이 증험하여 보고 싶으면 내가 이런 병을 고쳤을 적에 효험이 어떠했는가를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보십시오.’
소경이 다시 말하였느니라.
‘큰 스승[大師]께서는 이 가운데서 어떠한 일을 하시려 하십니까?’
의사는 그에게 말하였느니라.
‘당신은 많이 근심할 것 없습니다. 나는 이 가운데서 지나치게 하는 일도 없으며, 당신이 잠시 동안 기다리기만 하면 약을 지을 것입니다. 일이란 자상하게 살펴야지 서둘러서는 안 됩니다. 만일 서둘러서 하면 일을 이루기 어렵기도 합니다.’
그때에 그 어진 의사는 이와 같이 가르치고 나서 이 소경과 더불어 약을 지었으며, 약이 다 짓고 나서 눈 속에 넣자 눈이 조금씩 청정해졌고, 이미 청정해지자 마침내 의사를 떠나 속히 돌아왔다. 그때에 그 소경은 약으로 치료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눈 속의 태막(胎膜)이 모두 다 녹아 없어졌고, 태막이 제거되었기 때문에 눈이 맑고 밝아져서 단번에 날 적부터 보지 못했던 일들을 보게 되었고, 또한 뭇 소경들이 저 풍륜을 타고 오가며 헤매면서 스스로 멈추지 못하는 것도 보았느니라. 그래서 한숨을 지으며 탄식하길 ‘아, 슬프도다. 이 뭇 소경들 역시 이 풍륜 안에 오랫동안 있으면서 빙빙 돌고 왕래하기를 멈추어 쉰 적이 없는데도 처음부터 그들에게 이를 말해 주는 이가 없고 또한 가르침을 내려 소경을 치료하는 이도 없구나’고 하고, 생각하기를 ‘이들과 내가 무엇이 다르겠느냐? 나는 이미 용한 의왕(醫王)을 만나 날 적부터 멀었던 눈을 뜨고 드디어 오늘이 있게 되었지만, 어떻게 혼자만이 이런 복을 받는단 말이냐? 나는 당연히 여기서 돌아가 의왕께 청하여 이 많은 소경으로 하여금 남김없이 치료를 받게 하여야겠다’고 하였느니라.
그 사람은 그 때에 다시 ‘우선 여러 소경들에게 이런 큰일을 말해 주어서 먼저 체험한 것을 알게 하고, 그러한 뒤에 인도하여서 큰 의왕에게 청해야겠다’라고 생각한 뒤에 곧 그 소경들에게 말하였느니라.
‘모두들 잠시 멈추십시오. 지금 당신들에게 알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그때에 소경들이 그 사람에게 대답하였느니라.
‘우리는 멈출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다시 물었느니라.
‘당신들이 이제 멈추고자 하는 곳은 어디입니까?’
여러 소경들이 다시 말하였느니라.
‘우리는 지금 멈출 수가 없거늘 당신은 지금 어찌하여 유독 멈출 수 있다는 것이요?’
그 사람은 다시 여러 소경들에게 말하였느니라.
‘당신들이 나중에 볼 적에는 저절로 알게 될 것입니다. 누구에게는 머무르는 곳이 있고 누구에게는 머무르는 바가 없겠습니까?’
여러 소경들이 다시 말하였느니라.
‘당신은 지금 혼자만이 안다 하는데, 어찌 우리 여러 사람들의 의견보다 뛰어날 수 있겠소?’
그 사람은 다시 말하였느니라.
‘나도 옛날에는 역시 당신들과 같이 보지 못하였으므로 그 풍륜을 타고 오가면서 헤맨 것이 끝이 없었습니다. 세간 사람들은 거의가 이 병에 걸려서 머무름이 없는 바퀴[無住輪]를 타고 오랜 세월 동안 수고로이 고생하고 있는데, 나는 다행히 의왕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께서 나를 가엾이 여기셔서 나의 눈병을 없애 주셨습니다. 이런 인연 때문에 나는 이와 같이 보며, 이와 같이 알며, 이와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오늘날 이 풍륜에 빠져서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믿지도 못하고 있는데, 당신들 중에 한 사람이라도 서로 더불어 깨달으면 잠시 동안만이라도 멈추십시오. 나는 당신들을 위하여 저 의왕께 청하겠으며 의왕은 뜻을 받아 주시리니, 당신들은 스스로 알고 믿으면서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행하면 반드시 크게 이롭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그 때에 여러 소경들 중에 지혜 있는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자마자 곧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이 사람의 가르침을 받아야겠다. 잠시 동안 멈추어 있다한들 또한 손해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만일 반드시 가르침대로 되면 어찌 경사스럽지 않겠느냐. 가령 말대로 되지 않는다 해도 역시 근심할 것은 없다. 우선 우리가 잠시 동안 머물러도 얻는 것이 많나니, 착한 사람과 서로 사귀어 놀 수도 있고 또한 저절로 의혹도 제거되니 말이다. 이런 인연 때문에 이제 우리는 머무르기를 결정하였으니 다시는 의심하지 않으리라’고 하였느니라.
그때에 이 지혜 있는 소경은 이렇게 생각한 뒤에 여러 소경들과 함께 차근차근히 나아가다 멈추고는 그 대중에게 말하였느니라.
‘우리는 오랫동안 피곤하였는데 갑자기 좋은 말을 듣게 되었으니, 스스로 잠시 동안 머물면서 지금 가지는 않겠습니다.’
이렇게 말하고 나서 드디어 저 소경이었던 지혜로운 이에게 대답하였느니라.
‘어진 이께서 만일 때를 아신다면 지어야 할 바에 따라 우리들을 위하여 지어 주십시오.’
그때에 먼저의 지혜로운 소경은 본래는 비록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이미 눈을 뜨게 되어서 광명을 이루었기 때문에 뜻대로 가면서도 다시는 장애가 없었느니라. 그가 곧 생각하기를 ‘이제 이미 저 한량없는 소경들의 허락을 받았구나’라고 하며, 또한 말하기를 ‘나는 반드시 당신들에게 눈을 떠서 광명을 얻게 하리니, 이제 먼저 큰 스승의 발아래 나아가서 먼저의 덕(德)에 후하게 감사하고 이어서 이 일을 아뢰어야겠습니다’라고 하고 출발하였는데, 저 큰 의왕은 벌써 그 앞길에 와 있었느니라. 지혜로운 이는 이미 멀리서 보고 몹시 기뻐하여 어쩔 줄 몰랐으며, 곧 생각하기를 ‘이 큰 의왕께서는 먼저 나의 눈에 은혜를 베풀어 광명으로 인도하고 나의 아픈 괴로움을 없애 한량없는 쾌락을 줌으로서 나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고 나의 고달픔을 풀어 주셨다. 나는 이제 빨리 그곳으로 가서 그 발에 머리 조아려 예배하고 몸이 고달프도록 공양하면서 미묘한 말로 찬탄하고 희유한 마음과 존중과 공경을 일으켜서 모든 필요한 바에 따라 다 받들어 올려야겠구나’라고 하였느니라.
그와 같이 생각한 뒤에 곧 그곳으로 가서 먼저 생각한 대로 덕을 입은 은혜에 대해 사례하고 정성껏 공양하였으며, 또한 그 소경들을 위하여 청하고자 다시 희유하고 청정하게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또 은근하고 가엾이 여기는 깊은 생각을 일으켜서 큰 의왕께 아뢰었느니라.
‘저는 먼저 은혜를 입어서 밝은 눈으로 보게 되었고, 또한 저로 하여금 모든 방편지(方便智)를 얻게 하셨습니다. 오늘 한량없고 수없는 눈먼 중생들이 머무르지 않는 바퀴[不住輪]를 타고 끝없는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원컨대 큰 의왕이여, 그 먼 눈을 뜰 수 있도록 안약을 베푸시어 그들로 하여금 기뻐하게 하는 것이 저와 다름이 없게 하소서.’
그 때에 의왕은 모든 소경들을 가엾이 여긴 까닭에 곧 이 사람과 함께 몸소 그 곳으로 갔으며, 그곳에 이르자마자 즉각 그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 여러 소경은 태어날 적부터 눈이 먼 것인데, 지금 진실로 사물을 보기를 원합니까?’
그때에 여러 소경들이 의왕께 아뢰었느니라.
‘큰 스승이여, 우리들은 예로부터 일찍이 사물을 본 일이 없었습니다. 지금 볼 수 있다 하니, 다시 논하여 무엇하겠습니까?’
의왕이 다시 물었느니라.
‘그대들은 예로부터 어떤 것을 아직 보지 못했으며 지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또한 어떤 것입니까?’
그들은 다시 아뢰었느니라.
‘큰 스승이여, 우리는 예로부터 다니던 곳에 대해서만 길이라고 여겼을 뿐입니다. 그러나 실로 이 길의 짧고 긴 것과 가깝고 먼 것을 보지 못하였으며, 나아가 처음과 중간과 마지막 모양까지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의왕은 다시 그 여러 소경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이 길이라는 것이 바른 길[正路]은 아니었으니, 그대들이 예로부터 다니던 길은 잘못된 길[非道]이었습니다.’
여러 소경들이 다시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저희는 그 가운데서 이미 길이라는 생각을 내었습니다.’
의왕은 다시 말하길 ‘그대들은 그런 생각을 내지 않아야 합니다’라고 하며, 곧 저 소경이었던 지혜 있는 이를 가리키면서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은 이 사람을 압니까? 옛날에는 역시 그대들과 같았으나 나중에 비로소 그르다[非]는 것을 알고 오래 전에 이미 버렸습니다.’
또한 의왕은 여러 소경들에게 말하였느니라.
‘그대들이 오늘 만약 이 사람이 옛날에는 그대들과 같았다고 믿는다면, 나는 즉시 그대들을 다스려 차례로 치료하는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자 여러 소경들이 의왕에게 아뢰었느니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스승이여. 스승께서 스스로 때를 알아 하시는데 감히 명(命)을 좇지 않겠습니까?’
그때에 그 의왕은 곧 이와 같이 먼저 눈을 치료하는 약을 지어서 모든 소경들을 치료하였는데, 모두가 동시에 이렇게 눈이 맑아졌느니라. 그들은 눈이 열렸기 때문에 모두가 크게 외치면서 말하였느니라.
‘아, 우리들은 지금이야말로 큰 즐거움을 얻었도다. 그런데 우리는 옛날 큰 암흑의 바퀴[大闇輪]에 처해서 길 아닌 데를 미친 듯 달렸구나.’
마나바야, 너희들은 알아야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눈을 치료한 그 의왕이란 분은 바로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요, 본래 소경으로서 의왕이 먼저 치료해 주어 맑은 눈을 얻게 된 이는 바로 저 선남자(善男子)로서 법사(法師)이며, 그 밖의 뭇 소경들로서 맑은 눈을 얻은 이들은 바로 이 경의 법문을 받아 지니는 모든 중생들이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널리 너희들을 위하여 비유로써 이와 같은 이치를 열어 보이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는 이 가운데서 마땅히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을 배워야 하며, 만일 사람으로서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을 배우고자 하면 반드시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너희들을 위하여 자세히 이런 비유를 인용하면서 이치를 해석할 뿐이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이 만일 여래ㆍ세존을 배운다면 마땅히 이 모든 법 모양의 문[法相門]을 배워야 하며, 또한 먼저 사유하기를 ‘나는 이제 어떻게 모든 방편을 지어서 저 캄캄한 눈먼 중생들을 위하여 큰 광명을 지어 그들의 눈을 뜨게 할까?’라고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제일의 대자대비의 행[大慈大悲行]을 해석한 것이니, 너희는 만일 저 캄캄한 눈먼 중생들을 보면 다시 이와 같은 치료의 법을 지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치료하고 나면 그는 스스로 법을 보면서 다른 이의 행을 따르지 않고, 어떤 곳도 가지 않으리라. 이른바 풍륜(風輪)인데, 마나바야, 이는 범부인 중생들이 아직 바른 법[正法]을 얻기 전의 머무름이 없는 곳[無住處]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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