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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29 불교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7권

by Kay/케이 2024. 1.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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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17

 

대법거다라니경 제17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42. 설무주품(說無住品)

“아난아, 그때에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방광여래 앞에서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여섯 가지의 일[六事]에 대해 자세히 아뢰려 하자, 그 때에 그 부처님은 모든 보살들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아시고 곧 다시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이 의념(意念)으로 들어간 경계는 넓고 크며 한량없나니, 너희는 이 가운데서 싫증을 내거나 게으르지 말라.
마나바야, 마치 저 대지(大地)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것은 그 변제(邊際)를 구하여도 끝내 얻을 수 없는 것과 같으니라.’
모든 보살들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구(句)를 어떠한 의리(義理)로 해설하시기에 여래께서는 저 대지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온갖 것은 그 변제가 없다고 말씀하시나이까?
세존께서 여기서 말씀하신 해설은 어떠한 법이 대지에 머무름을 말씀하신 것이옵니까? 또 세존께서 앞서 모든 법은 머무르는 곳[住處]이 없다고 말씀하셨는데, 저는 이 가운데서 여래의 미묘하고 비밀한 뜻[微密義]을 묻고 싶사옵니다. 여래께서는 이제 저 온갖 법 일체가 모두 머무른다고 하시고, 혹은 머무름이 없다고 하시기도 하시는데, 이 뜻은 어떠한 것이옵니까?’
아난아, 이때에 방광여래는 다시 모든 보살마하살들에게 말씀하셨느니라.
‘마나바야, 모든 중생들에게는 무릇 이와 같은 여덟 가지 머무르는 곳[八種住處]이 있나니, 온갖 중생들은 이 여러 가지 처소에 머무르면서 모든 행의 바퀴[諸行輪]를 굴리며 끝이 없느니라.
어떤 것이 여덟 가지인가? 첫째는 단(斷)과 상(常)이니, 이른바 아(我)에 집착하고 아(我) 등의 모든 사업을 버리지 않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첫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둘째는 권속(眷屬)이니, 이른바 부모ㆍ형제ㆍ자매와 처첩(妻妾), 아들딸이고, 이와 같이 나아가 종족(宗族)과 진척 등까지 이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두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셋째는 태어나는 처소[生處]이니, 이른바 삼계(三界) 오도(五道)에 나게 되는 것이니라. 바로 인간으로 나아간다면 스스로 세 가지 품류가 있나니, 상자(上者)는 왕공(王公)과 존귀한 이요, 중자(中者)는 호족(豪族)과 부자로서 뛰어 난 이며, 하자(下者)는 빈궁하고 하천한 이이니라. 그 밖에도 집안에 태어나는 인연은 나라는 생각[我想]이 구족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세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넷째는 자재(資材)이니, 이른바 노비(奴婢)와 일꾼과 코끼리ㆍ말ㆍ낙타ㆍ노새ㆍ소ㆍ양ㆍ돼지ㆍ개와 창고의 곡식과 비단과 명주며, 금ㆍ은ㆍ유리ㆍ마니(摩尼)ㆍ진주와 나아가 세간의 갖가지 보배에 이르기까지이니, 이와 같은 모두를 탐하고 사랑하고 보호하면서 집착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네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다섯째는 용모(容貌)이니, 이른바 몸이 단정하고 윤택하면서 빛이 나며, 기력이 웅장하면서 용맹하고, 위의가 완전히 갖추어진 이와 같은 것 등은 나[我]의 재물이 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다섯 번째로 세간의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여섯째는 종족의 무리[種類]이니, 이른바 네 가지 종족이니라. 곧 저 찰리(刹利)와 바라문(婆羅門)과 비사(毘舍)와 수타(首陀) 등이니, 다 함께 종족이 익히는 기류(氣類)와 풍속이 있어서 각기 재능[能]으로 삼아 나의 마음[我心]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섯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일곱째는 작업(作業)이니, 이른바 예(禮)를 익히고 인(仁)을 닦음, 농사에 힘을 쓰는 것, 공업의 교묘한 갖가지 기술, 장사꾼으로 가고 오는 것 등과 같은 세간의 작업으로서 오랫동안 익혀 정교하고 편리하면 아만(我慢)이 더욱 자라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일곱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여덟째는 존중함이니, 이른바 수호(守護)하는 것이니라. 곧 이것은 하늘ㆍ용ㆍ야차ㆍ건달바ㆍ가루라ㆍ긴나라ㆍ마후라가ㆍ나찰ㆍ비사사(毘舍闍)ㆍ구반다(鳩槃茶)ㆍ벽려다(薜荔多)와 산신(山神)ㆍ수신(樹神)과 지(地)ㆍ수(水)ㆍ화(火)ㆍ풍(風) 내지 온갖 귀신들을 모두 받들어 섬기면서 예배하고 방호하는 것이니, 이것 또한 세간의 범부들이 하는 일이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여덟 번째로 세간 중생들이 머무르는 곳이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이 이 여덟 가지는 온갖 세간의 모든 중생들이 두루 머무르는 곳임을 알아야 하느니 라.
마나바야, 무슨 인연으로 머무르는 곳[住處]이라 하는가? 그들 모두가 무명(無明)과 아만(我慢)과 결사(結使)에 의지하면서 머물러 집착하기[主著] 때문에 머무른다[住]고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저 모든 중생들은 오랜 세월 훈수(熏修)하여 이와 같은 무명과 아만과 결사를 더욱 자라게 하기 때문에 그가 이미 훈습해서 이런 일을 더욱 자라게 한 뒤에는 끝내 전도되어 망령된 마음을 여의지 않나니, 마음이 전도된 까닭에 또한 이 가운데서 사유하고 분별하면서 반드시 진실하다는 생각[實想]을 짓느니라. 어떤 것이 진실하다는 생각인가? 느끼고(受) 생각할[想] 적에 곧 진실하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라.
그리고 이 사대(四大) 가운데서 실답다는 모습[如實相]에 집착하지만 실제로는 진실한 곳을 알지 못하며, 다시 그 가운데서 대아라는 생각[大我想]을 짓고, 중생이라는 생각[衆生想]을 지으며, 또한 항상 있다는 생각(常想)을 짓나니, 항상 있다는 생각을 낸 뒤에는 곧 이 생각[想]에 머무르는데, 저 어리석음 때문에 광명이 없는 지극히 깊고 어두운 곳에 떨어지면서도 ‘우리들은 항상 나쁜 태[惡胎]에 빠져서 스스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스스로 깨닫지 못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지혜 있는 사람이면 나고 없어지는[生滅] 가운데서 이와 같은 생각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와 같은 지혜 있는 사람은 이미 나라는 생각[我想]을 소멸했기 때문이니, 그러므로 지혜로운 이는 언제나 부지런히 생각하기를 ‘이 가운데는 나고 없어짐도 없고 나고 없어지는 자도 없으니, 다만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이 이와 같은 전도된 일[顚倒事]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속박과 집착으로 미혹해서 끝내 깨달아 알지 못할 뿐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일체 모든 법은 본래의 성품이 공해서 고요하다[本性空寂]. 범부는 그 가운데서 망령되이 나[我]라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 나라는 생각 때문에 그는 처음의 전도된 법[顚倒法]을 두루 갖추느니라.
그리고 다시 이 느낌과 생각[受想]의 더미[聚] 가운데서 바르게 관찰하지 않고 잘 사유하지 않아서 이 몸이 덧없고 더럽다는 것을 모르는지라, 다시 그 가운데서 청정하다는 생각[淸淨想]을 내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그는 다시 두 번째의 전도됨을 두루 갖추느니라.
앞서 항상 있다거나 나라는 생각을 성취한 까닭에 곧 청정하다는 생각을 내고, 청정하다는 생각을 일으킨 뒤에는 다시 괴로움[苦] 가운데서 즐겁다는 생각[樂想]을 내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다시 세 번째의 전도됨을 두루 갖추느니라.
모든 고통의 근본 가운데서 즐겁다는 생각을 내기 때문이니, 무엇을 고통의 근본[苦本]이라 말하고 어떻게 즐겁다는 생각을 내는가? 마나바야, 이른바 이름과 색[名色]이 처음에 생기면 이것이 바로 고통의 근본이니라. 이름과 색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곧 부모ㆍ형제ㆍ자매와 종친ㆍ권속에게 에워싸이게 되느니라.
다시 처첩(妻妾)과 아들딸의 은혜와 사랑에 얽매이게 되고, 다시 벗들의 무리와 여러 아는 이들에게 이끌리게 되고, 다시 좋은 집과 큰 성씨, 형용(形容)과 모습 등에 헷갈리게 되며, 다시 여종ㆍ남종과 하인들이 좌우에서 공양하고 모시는 등의 번거로움을 당하게 되느니라.
다시 코끼리ㆍ말ㆍ낙타ㆍ노새ㆍ소ㆍ양ㆍ돼지ㆍ개와 곡식창고, 날것과 익은 요리와 금ㆍ은ㆍ마니 등의 갖가지 재보(財寶)에 얽매이게 되고 혹은 뒷날에 과보(果報)가 흩어지게 되니, 이와 같은 큰 고통 가운데서 나의 마음[我心]에 애착하면서 즐겁다는 생각을 내느니라.
그러나 그는 끝내 잠깐 동안에도 ‘나는 이 크고 험난한 곳 가운데 머무르면서 언제나 저 나고 늙고 병들고 죽는 것에 꺾이고 욕을 당하며 파괴와 멸망을 당하고, 나의 앞에 나타나서 다투어 둘러싸는 온갖 기구들은 모두 나의 도둑이라서 나를 겁탈하고 해치고 있다’는 생각을 내지 않느니라.
저 어리석은 사람들은 마땅히 생각해야 하기를 ‘여기 둘러싸여 있는 것은 호랑이ㆍ표범ㆍ승냥이ㆍ이리ㆍ야간(野干), 수리부엉이ㆍ올빼미ㆍ까마귀ㆍ까치 등의 이상한 새 및 모든 괴물들을 나의 권속으로 삼는 것보다 심한데, 나는 이제 이 크게 두려운 곳에 머물며 언제나 이와 같은 고통의 수레바퀴 속에 빠져 있으면서도 나의 어리석음 때문에 도리어 즐겁다는 생각을 내고 있구나’라고 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세간에 꿀이 발린 날카로운 칼을 어리석은 사람이 맛을 탐하여 혀로 핥다가 그 재앙을 받는 것처럼, 마나바야, 범부도 역시 그처럼 어리석기 때문에 저 크게 괴롭고 덧없는 법 가운데서 이 몸을 획득하고는 항상 즐겁다는 생각을 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저 네 가지 전도됨[顚倒] 가운데 머무르며, 전도됨에 머무른 뒤에는 진실하지 않은 것 가운데서 진실하다는 생각[實想]을 내면서 옛날에 베풀었던 인연으로 오늘날 과보를 얻어 뭇 고통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니라.
마나바야, 이것이 바로 중생이 세간에 머무르는 곳이며, 저 모든 중생들은 모두가 다 이 파괴 속에 머무르고 집착하면서 아홉 가지 분한[九種分]을 소멸시키느니라.
마나바야, 온갖 범부는 공통적으로 이와 같이 머무는 곳을 지니고 있지만, 이 머무는 곳은 진실로 머무는 곳[眞主處]이 아니니라. 이것은 모든 범부들이 다만 바르지 않은 사유와 삿된 생각[邪想]이 상속함으로써 전도되어 머무를 뿐이라서 이것은 진실로 머무는 곳이 아니니라.
마나바야, 네가 만일 다시 머무르지 않는 법[不住法]을 묻는다면, 내가 어떻게 해석하겠느냐?
마나바야, 머무르지 않는 법이란 곧 온갖 법에는 머물 곳이 없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저 가라라(迦羅邏)일 때에 있는 모든 대[諸大]는 머무르는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그 업(業)을 성취하면 머무는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저 이름과 색[名色]일 때에는 머무는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처음 태(胎)에 들어갈 때에는 좇아 온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저 가라라의 모든 대(大)에 있는 뼈마디와 이름과 색과 같은 온갖 것은 좇아오는 곳이 있어서 태(胎)를 받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마나바야, 세간에 있는 온갖 사대(四大)는 머무는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저 오수음(五受陰)으로 성취한 모든 근(根)은 머무는 곳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마나바야, 이렇게 나아가서 옛날에 있었던 온갖 보시와 그로 인해 받았던 화합의 업과(業果)까지도 모두 머무르는 것이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마나바야, 저 온갖 머무는 것은 곧 머무는 것이 아니니라. 다만 생각이 옮아오면서 차례로 상속하기 때문에 생김이 있을 뿐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물을 적에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가? 바로 ‘이것은 다만 이름만 성취된 것으로서 모든 물질이 쌓여 모였을 뿐 조작(造作)된 것이 아니며, 저 덧없고 파괴되는 일 가운데서 능히 관찰하여 바르게 사유하지[正思惟] 못했기 때문이다’라고 하느니라.
무엇 때문에 능히 관찰하지 못했는가? 전도됨에 의하여 모든 업(業)을 지었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바르게 생각할 수 없었는가? 모든 존재[有]는 모두가 인연으로 생기며[因緣生] 의지하거나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을 설명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니라. 만일 바르게 생각한다면 일체 모든 것은 바로 머무름 없이[無住] 머무르나니, 이와 같이 관하는 것을 바른 관[正觀]이라 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이 정견(正見)에 수순할 때에는 태어난 색신(色身)에 대하여 저절로 오는 곳과 가는 곳을 알 수 있고, 머무름에 대한 두 가지 집착하는 법[二著法] 가운데서 해탈할 때는 차례로 버리고 여의면서 마음이 어지럽지 않으며, 마음이 어지럽지 않은 뒤에는 다시 크게 기뻐하는 마음을 능히 갖추고, 기뻐하는 마음을 얻은 뒤에는 앞에서와 같이 차례대로 문자를 분별하고 문자의 지혜를 얻는지라 아자 궁전의 법문(阿字宮殿法門)예 든다고 하나니, 이와 같은 차례로 모두 깨닫고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가 들어갈 때에 번뇌가 없이 능히 성취한 이면 본래부터 나지 않았음을 관하고, 그러한 뒤에 이 궁전의 처소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마나바야,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기 때문에 그 궁전에 들어가며, 그 때에야 비로소 그 마음이 본래 헷갈려 빠져 있던 곳을 분명히 증득해 알게 되고, 이미 마음의 어지러운 곳을 증득해 알았기 때문에 그 때는 참다운 봄[眞見]의 순수하고 곧바름을 얻게 되며, 이미 순수하고 곧바름을 얻어서 심량(心量)을 보았기 때문에 광명을 얻고, 광명을 얻었기 때문에 모든 인연에서 머무른다는 생각[住想]이 없으며, 머무른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의 머무름이 없는[無住] 진실한 곳을 얻느니라.’

43. 설청공덕품(說聽功德品)

‘또 마나바야, 이 모든 법사(法師)는 저 온갖 법에 머무르지 않아야 하고, 온갖 법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생각 또한 짓지 않으면서 이와 같이 들어가야 하나니, 이와 같이 들어가면 곧 한량없는 이름[名字]과 이른바 모든 법을 깨닫고 알아야 되며, 그 이름과 법도 마땅히 자연히 더욱 자랄 수 있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법사는 몇 가지 법과 몇 가지 이름에 머물면서 당연히 모든 법의 차례 내지 문구(文句)의 갖가지 차례를 관찰하여야 하며, 오히려 더욱 이와 같은 법을 수호하고 지니는 생각[念]을 언제나 현전해 이 법 가운데 머무르면서 구의(句義)의 차례를 잃지도 않고 잊지도 않아야 하나니, 산란하지 않은 마음으로 구의 가운데에 머무름으로써 비록 그 가운데에 머무른다 하더라도 머무름이 없는 곳[無住處]에 머무르느니라.
마나바야, 비유하면 마치 베를 아주 잘 짜는 이[織師]는 올을 잘 다루므로 베를 짤 때 그 올을 잃더라도 이 사람은 다만 교묘한 방편으로 차례로 찾다가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고 올의 더미 가운데 백 개의 끝을 한꺼번에 얻는 것처럼, 이처럼 마나바야, 모든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혹 법문 장구(章句)의 차례를 잃기도 하지만, 법사는 그 때에 반드시 생각을 이 궁전의 문에 들게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만일 그 법사가 올라가서 이 궁전의 법문을 기억하면 잊었던 구(句)의 뜻이 명료해지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또 마치 잘 닦아 깨끗해진 밝은 거울에는 상(像)이 나타나는 바에 따라 하나나 둘 또는 다섯, 열 나아가 여러 개의 많은 것도 모두 다 분명하게 나타나 알게 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 궁전의 문도 역시 그와 같아서 법문 장구(章句)가 다만 하나의 모양이나 두 가지 모양이나 또는 세 가지ㆍ다섯 가지ㆍ열 가지 모양뿐만 아니라 백 가지 또는 천 가지 혹은 다시 억수(億數) 내지 한량없는 모든 모양과 이름도 얻을 수 있느니라. 왜냐하면 이 가운데서 널리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범부를 위하여 모든 법을 분별할 뿐이기 때문이니, 이 모두는 여실한 실상[如實相]이 편안히 머무르는 가운데서 모든 법의 나는 곳[生處]과 없어지는 곳[滅處]을 알게 하려 함이며, 이미 나고 없어지는 곳을 관하게 된 뒤에는 비로소 허공의 약간을 알 수 있지만 끝내 어떤 사람도 허공을 두루 알 수 있는 이는 없느니라.
모든 범부는 나라는 생각[我想] 때문에 법사와 법문 가운데서 약간의 생각을 내지만 이 생각으로는 이 이치를 알지 못하나니, 왜냐하면 이 아자문의 궁전의 처소는 이와 같은 한량없는 광명으로 밝게 비추어서 열어 드러내고 방편으로 널리 연설하기 때문이니라.
법사가 이미 이와 같은 한량없는 광명의 법문을 얻고 나면, 그가 연설하는 법은 혹 일 겁을 지나기도 하고 감일겁(減一劫)하기도 하고, 나아가 그 수명이 다하기까지라도 이와 같이 성취하여 구족하게 이 법문을 연설하되 끝내 다하지는 못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이 가운데서 다섯 자(字)의 이치를 차례로 해설하리니, 마땅히 받아 지녀야 하느니라. 만일 이와 같은 방편과 언설에 대하여 증득하여 알게 된 이면 그는 세 가지 언교(言敎)를 차례로 연설할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어떻게 이 다섯 자 법문을 지니는가? 혹은 처음의 하나를 연설하여 다섯 자 법문을 지니기도 하고, 때로는 다 연설하기도 하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저 모든 보살들은 다시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나를 연설하나이까?’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마나바야, 이른바 하나라 함은 앞서 말한 처음[初]으로서 저 다섯 자의 법을 낱낱의 문구(文句)로 능히 상속하게 하느니라. 저 아(阿) 자는 처음이니 어지럽지 않은 마음이 상속하면서 차례로 화합하여 라(囉) 자 법문과 서로 모이며, 저 가(迦) 자문은 항(行)마다 관(觀)하고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고, 차(遮)자 법문은 갖가지 행 가운데서 마땅히 아느니라.
마나바야, 마치 사방에 각각 한 사람씩 있어서 이 네 사람이 수미산을 살펴보고 아울러 사해(四海)와 사주(四洲)를 살펴보려 할 적에 이와 같은 사주는 수미산을 둘러싸고 수미산으로부터 그 밖의 제오주(洲)가 없는지라, 마땅히 이 변제(邊際)의 경계임을 알고 생각하기를 ‘그 가운데는 중생이 머무르는 처소가 많이 있구나’라고 해야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이 설명은 통틀은 수[通數]로써 수미산을 오주(五洲)로 삼는 것임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그 사이는 다 바다[大海]라고 응당 그렇게 관하여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만일 머무르는 곳[住處]을 포섭하면 저 오주는 이와 같은 차례가 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은 다섯 자 법문도 역시 그러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그 아(阿) 자는 치우쳐 집착함이 없는 것이 마치 산왕(山王)의 둘레에 저 사주와 사해가 둘러싸고 있고 그 사이에 있는 해와 달의 광명과 모든 별 등 일체가 다 의지하는 것 없이 수미산을 빙빙 돌면서 중생을 위하여 작용하니,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중생들은 생각하기를 ‘이것이 낮이요, 이것이 밤이며, 이것이 바로 낮과 밤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마나바야, 지금의 세간에는 이와 같은 법이 있어서 해와 달과 별은 수미산을 바퀴 돌듯 돌면서 다니느니라. 해와 달 때문에 ‘이것이 낮이고 밤이며 반 달ㆍ한 달ㆍ반 년ㆍ일 년이다’라고 말하는 것이니, 이와 같은 차례가 있기 때문에 이와 같이 깨달아 아는 것이며, 깨달아 안 뒤에는 세간의 사상(事相)으로 편안히 두지만, 또한 참구해 회통하면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나 법행(法行)과는 합치하지 않으니, 만일 알지 못하겠으면 마땅히 법사께 청하여 그 옳고 그름의 여부를 물어야 하느니라. 묻지 않기 때문에 바른 법을 비방하면서 신근(信根)이 없게 되고, 믿지 않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세존께서 이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니라.
마나바야, 예로부터 한량없는 백천의 모든 중생들은 대중 가운데 있으면서 이와 같은 경법(經法)을 신수(信受)하지 못하였고, 이 법 속에서 한 글자, 한 글귀, 한 게송조차도 청해 묻지 못했느니라. 마음이 청정하지 않아 오직 의혹만 있을 뿐이라서 법사와 이와 같은 법을 헐뜯었으니, 이런 인연 때문에 악도(惡道)에 떨어진 것이니라. 나는 이제 너희들에게 저 어리석은 사람은 법을 헐뜯었기 때문에 지옥ㆍ축생ㆍ아귀에 떨어져서 뭇 고통을 갖추어 받으며 바퀴 돌듯 오가면서 끝이 없다는 것을 설명하느니라.
마나바야, 나는 이제 너희에게 말하노라. 이 대중 가운데에 만일 이와 같이 믿지 않는 이가 있다면 속히 저버려서 머물지 못하게 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부처님 법 안에서는 이와 같은 일은 없기 때문이니, 모든 여래의 법은 한량없이 관대(寬大)하며 불가사의 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여래가 세간에 한량없는 억 나유타 겁 동안 머무른다면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법의 이치를 연설하시리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모든 부처님ㆍ여래는 바른 법을 받아 지니는 이가 있는 것을 보시면 반드시 그로 하여금 전도되지 않게 하시기 때문이니라.
또한 마나바야, 나는 이제 모든 보살마하살 가운데 법을 이롭게 한 이를 간략하게 해설하리라. 이 법 가운데 온갖 세간은 다툼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모든 중생들은 오랜 세월 동안 부가라라는 생각[富伽羅想]을 기억하면서 사유하고 분별하여 점차 마음이 너그럽고 커져야 하는데도 항상하다는 생각[常想]과 항상 유(有)에 집착하는 생각[常著有想]을 짓다가 삼계 가운데서 마음에 전도됨이 생기기 때문이니라. 전도됨에 머무르기 때문에 이 모든 행이 무상하다[諸行無常]는 것을 관할 줄 모르고, 이 가운데서 나[我]라는 마음으로 전도되고 미혹되어서 사실대로 저 무상함을 관하지 못하고 항상 있다는 생각을 지어서 상견(常見)을 이루느니라.
이 소견에 머무른 다음에는 갖가지 번뇌와 온갖 결(結; 번뇌)을 훈수(熏修)하면서 질투를 더욱 자라게 하며, 질투가 왕성할 때에 곧 단견(斷見)을 내나니, 이와 같은 상견과 단견에 취착하기 때문에 모든 소견의 숲[見林]에 들어가서 훈수하다가 끝없이 넓은 아주 캄캄한 암흑 속으로 떨어지는 것이니라.
나쁜 소견이 이루어진 까닭에 이 생[此生]에서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을 믿는 마음이 없거늘, 무슨 연유로 공경하는 마음으로 법을 듣고 법사의 설법하는 처소를 알며, 나아가 법을 듣고 따라 기뻐하는 마음[隨喜心]을 일으킬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너는 알아야 하리니, 이 가운데는 평등하여 둘이 없느니라. 만일 모든 법사가 법을 강설(講說)하여 펼칠 때 어떤 사람이 이와 같은 법문을 들으면, 저 설법하는 법사와 듣고 받는 이 두 사람이 얻게 된 복은 똑같아서 차이가 없나니, 다만 그로 하여금 법대로 머무르게 해야 할 뿐이니라.
마나바야, 여래의 설법은 한량없는 종류가 있느니라.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래가 연설하는 법문의 구의(句義)가 모든 중생들의 근기에 맞추어 따르면서 연설하는 것임을 사유할 줄 모르나니, 이와 같은 법의 이치를 듣는 대로 믿고 받으면 길이 큰 이익을 얻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법에 대하여 끝내 숨기거나 감춤이 없는 것이 마치 중생 세계에서 감춤이 없는 것과 같나니, 여래는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법비[法雨]를 내리되 끊임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만일 한 구[一句]만이라도 해설해서 중생이 이해한 걸 알면 끝내 거듭 해설하지 않느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이 중생의 마음에 감추는 곳[藏處]이 없음을 이미 아는지라 항시 이와 같은 감추지 않는 법비를 내리느니라.
마나바야, 여래가 만일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언제나 법비를 내리지 않는다면, 그 때의 세간은 크게 조심하고 두려워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중생들은 법을 상실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여래는 만일 억백천 수(數)의 모든 대중 가운데서 어느 한 중생이 공덕문 중 한 법구의 뜻[一法句義]을 조금이라도 증득하여 알면, 여래는 그 한 중생을 위하여 세간에 머무르면서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겁을 지나면서도 널리 연설하느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이와 같이 능히 수지할 수 있는 법기(法器)의 중생은 세간에서 만나기 어렵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제 놀라거나 괴이한 마음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모든 여래께서 한 법구(法句)를 해설하셨는데도 중생들이 이해하지 못한다면, 가령 그 밖의 모든 법문의 해설을 들었다 해도 역시 이해하지 못하리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그는 오래도록 번뇌로 나고 죽고 헤매는 가운데 이와 같은 한량없고 가없는 온갖 착하지 않은 행을 지었기 때문이니, 모두 방일(放逸)한 근성 때문인 줄 알지니라.
마나바야, 너는 이 가운데서 변하여 물러서지 말라. 만일 모든 중생이 이 법의 해설을 듣고 능히 받아들여 행한다면, 이들이야말로 오랫동안 신근(信根)과 큰 지혜의 업력[大智業力]을 쌓은 것임을 알지니라.
마나바야, 그러므로 너희는 이제 저 과거의 선현(善賢)이라는 한 장부(丈夫)에 대해 배워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너희들은 아(阿)ㆍ가(伽)ㆍ나(那) 등의 세 글자 법문을 관해야 하나니, 이 세 글자 법문은 어떻게 관하는 것이냐?
어떤 인연 때문에 저 아자문은 열네 구(句)를 중간의 분제[中間分齊]로 삼는 것이냐? 마나바야, 이것은 세 가지 언교 방편(言敎方便)이 생기는 곳이어서 아자문으로 바야흐로 들게 되기 때문이니라.
어떤 인연 때문에 저 가자문은 스물한 자(字)로써 경계[境]를 삼는가? 세 가지 언교를 해설할 수 있기 때문이며, 나아가 저 나자문을 일곱 구(句) 가운데서 경계로 삼는 것까지도 업장(業藏)을 통달하여 남김없이 섭취(攝取)하기 때문이니라.
마나바야, 그 장(章)에 있는 마흔두 자의 뜻 구절 문[義句門]이란 곧 세간의 마음속의 들숨[入息]과 날숨[出息]의 일이라 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장부(丈夫)의 마흔두 번의 숨[息]은 낱낱의 숨으로부터 세는 것에 의거하여 취하는 것이니라.
지혜로운 이는 마땅히 ‘무엇 때문에 아(阿)라 하는가? 어찌하여 숨[息]이라 하는가?’를 분별하며 해석해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만일 모든 중생의 숨이 가고 올 때는 그 중생 등의 수명이 머물러 있게 되는 것이요, 갔다가 돌아오지 않으면 이름하여 숨이 소멸했다고 하는 것이니, 그때에는 곧 수명이 다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마나바야, 그것이 이미 소멸해 다했으면 다시 어떻게 관해야 하겠느냐? 숨이 소멸했기 때문에 이와 같은 모든 중생의 수명을 알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숨이 만일 사라졌을 적에는 어떻게 관해야 하며, 숨이 만일 존재할 적에는 또한 무엇을 관해야 하겠느냐?
마나바야, 저 아 자의 구[阿字句]는 마음이 근본이 되고 문자가 없는 것임을 관해야 하나니, 처음의 방편이기 때문에 마땅히 이와 같이 관해야 하느니라. 저 마음의 업[心業]이 화합하고 호흡의 기운[氣息]과 함께하면서 들고 나고 가고 오는 것임을 알아야 하나니, 처음 아(阿) 자로부터 시작해서 나아가 차(叉) 자까지 이르느니라.
마나바야, 어찌하여 차(叉) 자는 구를 다한 수[盡句數]가 되는가? 이 허공수(虛空數)는 수승한 것으로 들숨과 날숨이니, 만일 관함이 있는 이면 잘 관찰하여 더하거나 덜함이 없어야 하느니라.
그 가운데서 만일 차(叉) 자의 모양이 끊어지지도 어지럽지도 않음을 능히 알면 열 번째의 날숨ㆍ들숨 가운데에 이르기까지도 끊어지지 않아야 하나니, 만일 이와 같이 세어서 열 번째의 숨에 이르기까지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고 차례가 있어 어지럽지 않으면 그 때에는 곧 머물러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하느니라.
이미 머물러 있게 된 뒤면 곧 모든 법의 나고 없어지고 파괴되는 것을 관하라. 그 때에는 이미 들숨ㆍ날숨을 없앴기 때문에 곧 편안한 생각을 내고, 편안한 생각을 얻었기 때문에 다시 한량없는 몸과 마음의 기쁨을 얻으며, 이미 이러한 기쁨에 머무르면 다시 즐거운 생각[樂想]을 얻어 공덕과 방편을 여의지 않으면서 곧 저 아자궁전(阿字宮殿)에 들게 되나니, 궁전에 든 뒤에는 도리어 이와 같이 수순(隨順)의 법으로 마음대로 행할 바를 얻느니라.
마나바야, 이 법 가운데는 이미 생각[思想]이 없거늘 어떤 것을 식(識)이라 하겠느냐? 또한 어느 때에 마음이 한 곳에 머무르겠느냐? 이때에 즉해서 사유(思惟)하는 그 마음은 소멸함도 아니고 소멸함 아님도 아니니라. 왜냐하면, 마나바야, 그 사람이 그 때 심상(心想)이 만일 소멸하면, 누가 다시 저 허공에 들어갈 수 있겠느냐? 다만 그 마음으로 생각한 것이 이미 한 군데에 머무르면 모든 법문이 저절로 앞에 나타날 뿐이니, 온갖 글과 뜻이 숨거나 감추어짐이 없어 많이 연설하고자 하면 뜻대로 곧 연설할 수 있느니라.
마나바야, 또한 어느 때에 들숨ㆍ날숨이 머무르는 것이며, 어찌하여 중생들은 생각하기를 ‘이 사람은 살아 있다. 이 사람은 무너져 있다. 이 사람은 처음 태어났다. 이 사람은 마침내 죽었다’고 하는 것이냐?
마나바야, 날숨과 들숨이란 바로 바람의 기운[風氣]인데 어느 때에 그 바람이 머무르는지 알겠으며, 또한 어느 때에 그 바람이 소멸하는지 알겠느냐?
마나바야, 이른바 바람이란 바로 들숨ㆍ날숨 가운데에 포섭되어 있는데, 이것은 다만 나의 방편의 언설(言說)일 뿐이니라. 어떤 것을 방편의 언설이라 하는가? 마치 온갖 들숨과 날숨이 사라지면 곧 죽었다고 하는 것처럼, 이처럼 마나바야, 설법이 쉬고 소멸하면[息滅] 곧 정법(正法)이 소멸한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법이 구르지 않기[不轉] 때문에 법이 소멸하였다[法滅]고 말하는 것이니, 중생들은 오직 이 모든 법이 소멸한 것을 보기만 하고서 정법이 소멸하였다고 말하느니라. 그러나 이 정법은 실로 소멸함이 없느니라.
마나바야, 너희들은 기억하고 분별하여 정법이 소멸한 것이라 여기지 말아야 하며, 이 정법 가운데서 의혹을 내지 말고 마땅히 이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어떻게 생각하느냐? 최후의 몸[後身]을 받은 보살이 도량(道場)에 앉아 장차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려 할 때 이와 같은 보살은 스승의 가르침을 빌리는 것이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보살은 그 때에 어떤 사람의 가르침도 없이 저절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게 되나이다.’
마나바야, 마땅히 그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보살은 그 때에 스승의 가르침 없이 저절로 증득하여 아느니라. 왜냐하면 그 때에는 장차 온갖 세간을 위하여 저절로 스승[自然師]이 되려고 하거늘, 누가 다시 그의 스승이 될 만한 이가 있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들은 그와 같이 알아야 하느니라.
또 다시 제삼명(第三明)을 증득하여 마치고 나면 그 때는 비로소 아뇩다라삼먁삼보리(阿耨多羅三藐三菩提)라고 하게 되므로 온갖 중생의 대중 가운데서 가장 뛰어난 이요 최상의 존재이니라.
설법할 때에는 사문ㆍ바라문이든 또는 사람이나 하늘이나 악마나 범(梵)이든 모두가 와서 이 반야바라밀(般若波羅蜜)을 물어도 그보다 더 나은 이는 없으니, 모든 법문에 대하여 장애가 없고 설령 한 구(句)를 항하의 모래알만큼 많은 겁을 지나면서 해설한다 하여도 끝내 다함이 없느니라. 이런 이치 때문에 여래(如來)라고 부르느니라.
또한 마나바야, 그와 동등한 이가 없기 때문에 여래라 하나니, 온갖 세간에서는 만나거나 알기조차 어렵기 때문이니라. 어찌하여 이런 분을 여래라 하는가? 대개 여래란 이미 눈[眼根]으로는 알 수 없기 때문이니, 어떻게 볼 수 있겠느냐? 마나바야, 이야말로 모든 법은 허공의 처소[虛空處]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44. 제보살증상품(諸菩薩證相品)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가 모든 보살마하살들을 위하여 이 허공의 궁전문[空宮殿門]을 연설할 적에 저 나유타의 중생들은 모든 번뇌의 법[漏法] 가운데서 마음의 해탈을 얻었으며, 그때에 그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모두가 이 대궁전삼매(大宮殿三昧)에 들게 되었느니라.
아난아, 그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이 삼매력(三昧力)으로 저 불국토[佛土]를 다듬어서 산과 언덕이며 흙무더기ㆍ돌ㆍ모래ㆍ기와조각ㆍ자갈ㆍ가시나무ㆍ나쁜 풀 등 모든 구덩이가 없고 땅이 평평한 것이 마치 손바닥과 같게 하였느니라.
아난아,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하늘 제석[天帝釋]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憍尸迦)야, 너는 마땅히 이 억수의 보살마하살들을 살펴보라. 모두가 이 대궁전삼매에 들어가게 되어서 기뻐하는 마음을 내고 있으니, 이 보살들의 삼매의 힘 때문에 이 부처님 세계는 온갖 것이 성취되어 마치 삼십삼천의 궁전과 같게 되었느니라.’
아난아, 저 방광부처님께서 세간에 오랫동안 머무르셔도 부처님 세계의 장엄은 역시 그와 같으리라.
아난아, 그 때에 하늘 제석은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다.
‘희유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오로지 이 보살마하살들의 큰 정진의 힘과 저 삼매의 위신력에 의해서 이 불국토의 온갖 것이 성취되어 이와 같이 장엄되었겠나이까? 세존의 도덕(道德)과 위신(威神)의 가지력(加持力)에 의해 이렇게 될 수 있었나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삼십삼천과 그 권속은 저마다 자기의 궁전에 처하면서 미묘하게 장엄하여 자재(自在)하게 쾌락을 누리고 있는데, 이때에는 다만 천왕의 위력만으로 이와 같게 할 수 있는 것이고 저 모든 하늘들도 전생에 지은 업의 인연으로 지금 이런 과보를 받느니라.’
아난아, 그때에 하늘 제석은 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알고 있나이다. 저는 이미 알고 있나이다.’
아난아, 그 때에 방광여래는 이 모든 보살들의 옛날 연연을 자세히 펼치고자 했기 때문에 다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내가 기억하건대 과거 한량없는 세상의 시절에 선행로(善行路)라 하는 하나의 대겁(大劫)이 있었으며, 그 겁에 부처님이 계셨는데 명호는 산상(山上) 여래ㆍ응공ㆍ정변각으로 세간에 출현하셨느니라. 그 부처님은 그 겁수(劫數)의 사분의 일을 지나신 뒤에 반열반(般涅槃)에 드셨느니라.
부처님이 멸도하신 뒤에 어느 한 보살이 그 세계에 출생하였는데 이름은 명상(明相)이었느니라. 모든 감관을 성취하여 몸이 점차 자라자, 그는 산상여래께서 열반에 드신 후 이 삼천대천세계의 온갖 머무르신 곳에 모두 다 사리보탑(舍利寶塔)을 일으켰다는 것을 듣고는 이 일을 위하여 몸소 염부제(閻浮提) 안을 두루 돌아다니면서 바다 끝까지 다 다녔으며, 염부제로부터 다음에는 제이주(第二洲)의 처소로 나아가려 하였으나 여러 가지 바다의 재난[海難]이 많아서 지나갈 수가 없자 곧 멈추면서 생각하였느니라.
≺나는 이제 나아가서 큰 이로움을 구하기 위하여 대천의 국토[大千國土]를 두루 살펴보려 하는데, 겨우 이 주(洲) 사이에서 재난으로 인해 오히려 건너가지 못하겠거늘 하물며 그 밖의 다른 천하의 한량없는 주저(洲渚)와 대철위(大鐵圍)에 있는 큰 재난을 어떻게 통과할 수 있겠느냐? 또한 세간 중생의 하찮은 신력(身力)으로 갑자기 이곳으로부터 저곳에 이를 수 있겠으며 또한 거기에서 올 수도 없으리라. 오늘 이렇다면 스스로 다른 주(洲)에 있는 여래의 보탑에는 어떻게 가서 공양할 수 있겠느냐?≻
다시 생각하였느니라.
≺나는 이제 오직 신통만으로 이 주 안의 게으른 중생을 옮겨다 다른 주에 안전하게 잘 두고는 모든 보탑(寶塔)을 뵈옵고, 어떤 공양이든 있는 데마다 두루 받들면서 모자람이 없게 하겠고, 또 이 삼천대천세계에 있는 모든 여래의 사리보탑을 나의 삼매와 신통의 힘으로 모두 유리(琉璃)의 뭇 보배로 장엄하며, 이 세계를 모두 다 평평하고 바르게 하여 모든 기와조각ㆍ돌ㆍ가시나무ㆍ독가시를 없게 하고, 나아가 겨자씨만큼의 모래나 자갈과 기와조각ㆍ돌에 이르기까지도 없게 하겠으며, 또한 터럭ㆍ머리칼ㆍ개천ㆍ구덩이ㆍ해자도 없게 하리라. 만일 모든 중생으로서 이 국토에 사는 이면 온갖 공덕과 과보의 즐거운 일로 장엄하여 모두 다 저 도리천궁(忉利天宮)과 같아지게 하리라.≻
또다시 원하기를 ≺모든 보탑 안에는 다섯 가지 하늘의 미묘한 음악의 소리가 있고 오락(娛樂)으로 공양하면서 끊어짐이 없게 하며, 이렇게 나아가서 삼천대천세계의 모든 사리보탑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공양거리에도 역시 언제나 다섯 가지 음악[五種音樂]이 끊어짐이 없게 하리라≻고 하였으며, 또한 원하기를 ≺이 세계의 온 불국토는 뭇 보배로 이루어지고 역시 언제나 하늘의 만다라꽃[曼陀羅花]이 비처럼 내리소서≻라고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때에 그 보살은 이와 같이 생각한 뒤에 그 주(洲) 사이에서 문득 화주삼매(火住三昧)에 들었으며, 삼매에 들자마자 그 세계의 모든 것을 마음에서 원한 바대로 모두 성취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 부처님 세계 안에 있던 모든 보살들은 모두가 저 부처님 세계와 나아가 백억의 해와 달과 백덕의 수미산과 백억의 사대해(四大海)와 백억의 사대주(四大洲)와 그 모든 주저(洲渚)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불가사의한 세간의 희유하고 특수한 일을 목격했고, 부처님 국토 안에 있는 모든 여래의 사리보탑도 밤낮으로 언제나 보았고, 또한 그 탑 안에 있는 사리의 특수하고 묘한 장엄도 모두 볼 수 있었느니라.
이 모든 중생들은 이런 일을 보고 나서는 한량없이 기뻐하여 어쩔 줄 모르면서 저마다 또한 생각하기를 ‘지금 이 경계를 누가 짓는 것일까?’라고 하였느니라.
교시가아, 그 때에 염부제 안에 한 비구가 있었는데 그는 아라한으로 여섯 가지 신통(神通)을 갖추었고 모든 번뇌가 이미 다했느니라.
그때에 모든 중생들은 저마다 생각하기를 ‘우리들은 이제 마땅히 이 비구에게 이와 같은 경계를 누가 지었는지 물어야겠다’고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 때에 염부제의 온갖 대중들은 모두 함께 그 비구에게 가서 아뢰기를 ‘존자 대덕이여, 지금 어떠한 인연으로 이와 같이 전에 없던 상서(祥瑞)가 홀연히 보입니까? 이 염부제의 장엄과 청정함이 이와 같은데, 원컨대 저희들을 위하여 이 일을 해설하여 주십시오. 이와 같이 기묘한 것을 어떤 분이 지으신 것입니까?’라고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때에 그 비구는 여러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여러분. 알아야 합니다. 이 염부제에 명상(明相)이라는 한 보살이 이와 같은 큰 정진의 힘을 일으키면서 ≺어떻게 하면 온갖 중생으로 하여금 안락을 누릴 수 있게 할까?≻라고 생각한 뒤에 곧 주(洲) 사이에서 삼매에 들어가 큰 신통에 머물러 있습니다. 이 신통의 인연으로 이러한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라고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때에 모든 중생들은 비구에게서 이런 말을 듣고 난 뒤에 곧 그 보살에게 나아가 이른 뒤에 보살을 공경하면서 발에 예배하고 오른편으로 일곱 바퀴를 돌아 크게 존중하고는 다시 머리 조아려 예배한 뒤에 보살 앞에 서 있었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그때에 그 보살마하살은 몸을 단정히 하고 생각을 바르게 하여 삼매에서 일어나 대중에게 말하였느니라.
‘어진 이들이여, 그대들은 이제 어서 와서 나와 함께 이 삼천대천세계를 돌아다니며 여래의 사리보탑을 두루 살펴보십시다.’
교시가야, 그때에 그 보살마하살은 모든 대중을 거느리고 이 주(洲)로부터 저 주에 이르면서 여래의 탑을 뵈옵고 예배 공경하며 공양하였느니라.
그때에 그 모든 주에 있던 중생들은 존중하는 마음으로 보살을 따라다녔으며, 그 보살이 거느린 대중들은 보살이 필요한 바에 따라 모두 충족케 하면서 끝내 모자라는 바가 없게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삼십삼천 가운데서 모든 하늘들이 너를 따르면서 필요한 것을 모두 충족시켜 주는 것처럼 역시 그와 같았느니라.
그 모든 중생들이 그러할 때에는 농사를 짓거나 장사하여 이익을 구하거나 온갖 나쁜 일을 하면서 깨끗하지 못한 생활을 하는 이들이 없었으며, 그 때의 중생들은 보살로 인하여 모두가 구족하게 뜻대로 쾌락을 누렸느니라.
교시가야, 그 때에 명상(明相)보살마하살은 삼천세계를 두루 돌아다니며 여래의 탑을 뵈면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다 은근한 존경심을 일으켜 보탑에 공양하게 하였고 자신도 역시 갖가지 공양을 일으켰으며, 그로 인하여 곧 그 삼천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교화하여 모두가 다 위없는 보리[無上菩提]에 나아가게 하고 나아가 수명이 다하기까지 보살행(菩薩行)을 닦게 하였느니라.
교시가야, 그 보살마하살에게는 이와 같은 대원(大願)과 위력이 있었느니라.
교시가야, 이 불국토에서 천억의 세계를 지나가면 명호가 사라왕(娑羅王)이라는 부처님ㆍ세존이 있어서 대중에게 설법하고 계시는데, 명상 보살마하살은 지금 그곳에 있느니라. 그러나 이 보살도 역시 장차 오는 세상에 사십 아승기(阿僧祇)겁을 지나면 정각(正覺)을 이루게 되리니, 명호는 무량수(無量壽)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이라 하시리라.
그때에 그 보살이 보리를 얻은 뒤에 그 이름을 듣게 된 중생들이라면 모두 다 뜻대로 반열반을 얻을 것이요, 저마다 그가 살고 있는 세계에서 본래의 서원을 성취하면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증득할 것이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이 모든 보살들에게는 스스로 삼매의 힘[三昧力]과 두려움 없음[無畏] 등이 있는 것이지 여래가 위신(威神)과 덕력(德力)을 수여하는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만일 어떤 보살이 모든 부처님의 행(行)을 배우고자 하고 부처님의 경계에 들고자 해서 혹시 여래의 현전을 만날 때면, 그 보살은 이내 그 부처님ㆍ여래께 물어야 하며, 그 여래는 보살을 위하고 인도하기 위하여 법답게 연설하고 가르쳐서 수행하게 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모든 보살들은 또한 어떠한 일을 짓기에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법 가운데서 배우고 행하지 않는 것이냐?
교시가야, 모든 보살들은 반드시 부지런히 배워야 하느니라. 만일 배워서 마음이 자재하면 온갖 부처님 법 가운데서 허깨비[幻化]를 배우지 않으니, 어떻게 그런 것을 얻어서 세간을 위하겠느냐? 그러므로 반드시 스스로 잘 배우고 나서 그런 뒤에 남을 위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온갖 세간의 외도(外道)와 신선(神仙)들조차도 다만 조그마한 계행(戒行)만을 지니는데도 고통을 맑게 하고 마음을 거두어 오히려 다섯 가지 신통을 갖추어서 지어야 할 바에 따라 뜻대로 이룰 수 있거늘, 하물며 보살이 여러 겁 동안 육바라밀(六波羅蜜)을 구족하게 행하고 네 가지 신족(神足)이 원만한데도 이와 같은 조그마한 변화를 지을 수 없겠느냐?
교시가야, 너는 이것에 대하여 놀라거나 괴이하게 여길 만한 것이 있느냐? 우선 이런 일에는 신통이 없느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법은 다 허깨비와 같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러한 것에 대하여 다시는 의심을 내지 말라. 왜냐하면, 교시가야, 여래의 제자는 모든 세간을 마치 허깨비와 같다고 보면서 의심의 그물이 없기 때문이니라. 그 까닭이 무엇인가? 그가 여래를 믿어서 스스로 법을 보기 때문이니, 이 때문에 스스로 믿는 것이지 남을 믿는 것은 아니니라. 왜냐하면 세간 사람이 이미 스스로 보고 나면 끝내 다시는 다른 이의 말을 취하지 않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마치 어떤 사람이 벌거숭이가 되어 길을 가고 있을 적에 어느 한 사람이 여러 사람들에게 ‘이 사람은 희유하게도 비단옷으로 몸을 가리고 있구나’라고 했다고 하자.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가 비록 그런 말을 하더라도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그 말을 믿겠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왜냐하면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그러하느니라. 정녕 그러하느니라. 교시가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모든 제자들은 자신이 법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이의 말을 취하지 않나니, 그 이치도 역시 그러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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