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대법거다라니경(大法炬陀羅尼經) 20권
대법거다라니경 제20권
사나굴다 등 한역
송성수 번역
50. 부보살품(付菩薩品)
“아난아, 그 때에 방랑여래는 다시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저 차이가 있는 보시는 한량없는 과보를 얻는데, 마치 보살승(菩薩乘)이 한량없고 가없는 것과 같으니라. 여기서 모든 부처님의 장엄의 일이란 이른바 여래 앞에서 바른 법을 듣고 이와 같은 한량없는 선근을 얻어서 이 경을 해설할 때 온갖 중생에게 있는 의심이 모두 다 영원히 끊어지는 것이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모든 부처님ㆍ세존은 세간에 출현하신 것이니, 이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마땅히 모든 부처님이 행한 바를 배우고 익히며 들은 뒤에는 해설한 대로 수행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와 같이 증득하여 알 수 있는 것에 대해 다시는 의심을 내지 말고 부지런히 정진하되 일심으로 용맹정진하면서 쉬거나 게으름이 없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희들은 한 중생으로 하여금 허공 가운데서 질투를 내게 할 수 없으며 너희들도 역시 스스로 질투를 버려야 하나니, 이 허공이란 이름하여 공통된 법[共法]이라서 한 중생이나 하나의 법으로써 혼자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라. 모든 법은 마치 허공과 같나니, 뭇 사물[衆物]의 장엄도 마땅히 이와 같이 지녀야 하며, 지혜 있는 사람은 이 법 가운데서 스스로 영원히 온갖 의혹을 끊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끝내 어떠한 사람도 허공을 안 뒤에 다시 허공에 미혹되는 이는 없느니라.
교시가야, 이와 같은 법문은 첫째이고 최상이고 가장 수승하고 미묘하며 가장 깊나니, 만일 다시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의 능히 상속하는 인연[能相續緣]과 나아가 한 찰나까지도 마음으로 함께 기뻐하면, 너는 이것을 보고 매우 경사스럽게 여기며 생각하기를 ‘이는 바로 물러서지 않는 보살[不退菩薩]임을 알지니, 일찍이 한량없는 모든 부처님께 공양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법문의 해설을 능히 듣고서 놀라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고 물러서지도 않고 침몰하지도 않으니, 법 보시[法施]의 청정함이 마치 허공 같아서 허공의 수[虛空數]에 들어갔도다. 혹은 이와 같이 허공의 비유로 방편의 법문을 해설하면서 전체를 말하고[摠說] 개별을 말하는[別說] 것을 들은 뒤에도 두려워하거나 고달픔을 내지 않으면서 수순한 행을 짓고 있으면 곧 여여(如如)를 본 것이다’라고 해야 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가령 보살마하살들을 온갖 세간의 하늘과 사람과 아수라 내지 모든 용과 귀신들은 모두가 애경(愛敬)해야 하고 존중해야 하며 공양해야 하고 수호해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교시가야, 저 모든 보살마하살들은 생사(生死) 중에 있으면서 한량없는 그 밖의 잔악(殘惡)한 법에 시달리는데도 이와 같은 깊은 인욕[忍]을 구족히 행하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욕을 행할 때에는 가령 한량없는 백천만억 나유타 수의 하늘 악마의 대중들이 갖가지 명상과 갖가지 언설로 놀라게 하기도 하고 혹은 두렵게 하기도 하고 혹은 속이기도 하고 혹은 달래기도 하면서 이 보살로 하여금 본래의 마음에서 물러나게 하지만, 이 보살의 본심(本心)은 더욱 견고해지고 몸의 모습은 탄연(坦然)해서 한 개의 터럭조차 움직이지 않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나는 너희들을 위하여 비유의 방편으로 갖가지로 해설하는 것이니, 마땅히 일심으로 잘 생각하여 이와 같이 알아서 곧 이와 같이 배워야 하고, 마땅히 사유하여 바른 이치에 계합하면서 모든 부처님의 법을 원만하게 하여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와 같은 보살마하살들이 이 법을 행할 때에는 가령 그 몸이 수미산 꼭대기에서 대지(大地)로 떨어지고 다시 대지로부터 수미산으로 던져진다 하여도, 이 보살의 마음에는 끝내 생각의 집착[念著]이 없고 또한 게으르지 않으며 한 생각도 중생을 버리려는 마음이 없느니라.
교시가야, 이와 같은 보살이 마음으로 법을 생각할 적에는 설사 위의 범천 궁전(梵天宮殿)에서 그의 몸을 던져 큰 바다에 가라앉는다 해도 보살은 그 가운데서 잠시도 머물러 집착하는[住著] 생각을 일으키거나 게으른 마음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나라는 생각[我想]을 멀리 여의었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보살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법에 머무를 때 가령 대범천왕이나 하늘 제석이 그의 마음을 시험하고자 각기 그의 손을 붙잡고 일시에 대규지옥(大叫地獄)에 던져버린다 해도 이 보살은 바야흐로 저 고통 받는 중생들에게 ‘그대들은 이 가운데서 오직 이러한 나쁜 과보만이 있을 뿐인가?’라고 물은 뒤에는 단정히 앉아 바르게 관[正觀]하면서 대비(大悲)의 마음을 일으켜 곧 거기에 머물며 고통 받는 중생들을 구제하려는 행을 원하느니라. 이와 같거늘 그 누가 그 가운데서 두려움이 생기게 할 수 있겠느냐?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만일 어떤 사람이 이 심히 깊은 법 가운데서 구족히 이와 같은 인(忍)을 성취한다면, 성문을 행하는 사람[行聲聞人]이나 벽지불을 행하는 사람[行辟支佛人]에게 혹시 이와 같은 인(忍)이 발생할 수 있겠느냐?’
하늘 제석이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모든 보살마하살들이 이와 같은 인의 문[忍門]을 능히 얻는지라 온갖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뛰어나며, 마침내는 온갖 처음 발심한 대승(大乘)의 보살마하살 중에서 이들이 가장 뛰어난 이라고 말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알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지혜의 업[智業]이요, 마음의 업[心業]이니라.
또한 교시가야, 가령 최후의 몸[最後身]을 받은 보살마하살이 보리수(菩堤樹) 아래 도량(道場)에 앉았을 때는 저절로 이와 같은 방편을 잘 말하면서 어려운 질문을 해석하고, 보리를 증득한 뒤에는 널리 세간을 위하여 대자(大慈)의 마음에 머물면서 불안(佛眼)으로 바라보는데, 갖가지 악행을 저지른 삿된 중생들이 캄캄한 큰 지옥 안에 떨어져서 온갖 고통 받아 바퀴 돌듯 하고 간탐과 질투 때문에 보시하는 마음을 멀리 여의며, 성내고 해하려는 마음[恚害] 때문에 모든 계행을 깨뜨리고, 어리석기 때문에 암흑 속에 깊숙이 들어가며 나쁜 벗에게 이끌리게 되고, 모든 착하지 않은 일에 얽매이면서 온갖 인연[衆緣]이 갖추어지기 때문에 삼도(三塗)24)에 빠지는 것을 보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보살마하살이 도량에 있을 적에 오히려 이와 같이 착하지 않음[不善]을 완전히 갖춘 나쁜 중생 가운데서 두려워함이 있겠느냐?’
하늘 제석이 말하였다.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최후의 몸을 받은 보살은 옛날에 이와 같이 번뇌와 생사를 두루 갖춘 때에도 오히려 두려워함이 없었거늘, 하물며 지금 보리수 아래 앉아 장차 정각(正覺)을 이루시려 하면서 두려워하겠나이까?’
‘교시가야, 보살은 그 때에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용맹스럽게 정진하면서 마치 자기의 몸처럼 다른 중생을 위하여 구호하고 난 뒤에는 저절로 큰 즐거움[大樂]을 성취하게 되었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이 삼십삼천이 다만 한 사람만을 위하여 조그마한 즐거움을 베푼 까닭에 지금의 이와 같이 뛰어나게 장엄된 처소를 얻은 것임을 관해야 하며, 당연히 이 낱낱의 과보를 관해야 하고 기쁨을 내면서 몸과 마음이 즐거워져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제 이와 같은 장엄에 머무르면서 역시 성문의 수승한 곳[勝處]과 벽지불의 수승한 곳과 보살의 수승한 곳과 여래의 수승한 곳을 사유(思惟)하되, 그 밖의 다른 관(觀)은 하지 말며 다만 가르친 대로 머무르라. 나는 이제 이 억수의 보살들을 위하여 이 세 가지 방편 업장(方便業藏)을 말하리니, 너희들은 잘 사유해야 하고 또 깊이 ‘내가 이제 어떻게 교묘한 방편의 지혜[巧便智]로 중생의 의심을 끊을까?’라고 생각해야 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이제 이 억수의 모든 보살들이 지닌 믿음[信]과 원(願)을 해설하겠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이제 이 모든 큰 보살마하살들이 일심으로 온갖 중생들을 위하여 의심을 끊고자 하는 것을 보아야 하느니라. 어떻게 생각하느냐? 지금 이 억수의 모든 보살들은 끝내 이 설한 것을 넓히고 보호할 수 있겠느냐?’
그때에 하늘 제석이 다시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는 이 모든 보살마하살들의 용맹스런 정진과 위신(威神)이며 덕력(德力)을 아시지만, 저희들은 이러한 지혜가 없사오니 오직 부처님ㆍ세존만이 스스로 아실뿐이옵니다.’
그때에 방광 부처님은 하늘 재석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그와 같다면 네가 스스로 이 억수의 보살에게 이와 같은 등의 일을 할 수 있는지 물어보라.’
그때에 하늘 제석은 거룩한 가르침을 받들어서 곧 모든 보살들에게 물었다.
‘대사(大士)여, 어진 이들은 마땅히 여래의 가르침을 구해야 합니다.’
모든 보살들이 하늘 제석에게 대답하였다.
‘교시가여, 당신은 이제 이것이 제칠의 방편교설(方便敎說)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은 앞서 이미 여래께 가르침을 구했고, 여래는 그때 역시 우리들을 위하여 이와 같은 지혜의 이치를 말씀하셨나이다. 비록 우리를 위해 말씀하셨지만 오히려 다하지 못했으므로 ’원하옵건대 여래께서는 인자한 은혜를 드리워서 저희들을 위하여 이 세 가지 언교 업장을 해설하여 주소서’라고 하였던 것이니, 모는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교시가여, 우리는 자신을 위하여 이와 같은 법을 구하지 않았으니, 지금 모든 보살을 위하여 맡은 바가 넓고도 많습니다. 왜냐하면 교시가여, 모든 보살들은 다만 한 사람만을 위해서라도 용맹 정진하고 큰 서원을 세워서 언제나 생사(生死)에 처하여 반드시 이 중생을 먼저 구제한 후 대각(大覺)을 이루거늘, 하물며 한량없는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아승기겁을 지나면서 번뇌에 훈습된 생사의 업보와 나쁜 법이 머무르는 곳을 모두 끊어 없애려 함이겠습니까?
교시가여, 저 미래 세상의 모든 보살들로서 인(忍)을 성취한 이면 오히려 조그마한 일과 조그마한 연(緣)으로는 의당함에 따라 성취할 수 없는 것이거늘 하물며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큰 지혜더미[大智聚]를 지향(志向)하여 구하는 것이겠습니까?
교시가여, 만일 중생들이 이미 한량없는 아승기 겁 동안에 언제나 나고 죽는 나쁜 법에 훈습되어서 허망한 마음으로 반연하고 삿된 생각으로 분별하여 모든 일을 지었기 때문에 끊어 없애야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무지(無知)의 어두운 곳[闇冥之處]을 깨뜨려 주어야 합니다.
교시가여, 우리들이 이미 한 곳에 머무르고 나면 이와 같이 무지가 생겨나는 곳에서는 아직도 너그럽지 못하고 번뇌를 끊어 없애지 못한 이와 아직도 해설하지 않은 곳과 사유(思惟)하지 못한 곳을 차례로 알기 어려우니, 우리는 다시 따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믿거나 믿지 않거나 간에 모두 다 알게 해야 하나니라. 어떠한 중생이 지금 여래를 믿는지, 그가 믿는 걸 알고 나서는 손감(損減)하지 않게 법을 해설하여 중생을 섭수(攝受)하니, 스스로 부처님 법을 이루기 때문입니다.’
51. 부천제석품(付天帝釋品)
아난아, 그때에 하늘 제석이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 무릇 가르쳐 깨우치신 것을 반드시 그 믿음을 관(觀)해야 하나이까?’
부처님은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너는 이 가운데서 무엇을 가르쳐 깨우치게 한 것이라 여기느냐? 여래는 다시 어떻게 다른 이들을 가르쳐야 하느냐?
교시가야, 너는 이것에 대하여 잘 알아야 한다. 가르쳐 깨우치게 한다고 함은 다만 문자(文字)만 있어도 가르쳐 깨우친다고 이름하니, 빛깔[色]로 볼 수 없을 경우 판자[板]의 방편을 인하면 그 사람은 언교(言敎)에 대해 알 수 있느니라.
교시가야, 이 가자문(迦字門)은 스물한 구(句)의 주(主)가 되며 또 스물한 구의 첫째가 되느니라. 너희들은 그 가운데서 이 뜻과 말을 분별하여 알아야 하고, 마땅히 생각하기를 ‘이 스물한 구는 어떻게 섭수해야 할까?’라고 해야 하며, 나중에 너희들이 다른 이를 위하여 해설할 때에는 안으로 스스로 인욕하며 어지러운 마음을 내지 말고 언제나 바르게 지녀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나는 이미 너희를 위하여 방편으로 저 가자문과 하늘의 언교[天言敎]는 서로 응하면서 끊어지지 않는다고 해석한 것이니, 너희는 마땅히 이를 해설하고 침묵하지 말아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가자문이며 어떤 것이 하늘의 언교이겠느냐?’
아난아, 그때에 하늘 제석은 저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 아뢰었느니라.
‘세존이시여, 이제 이 가 자 법문과 하늘의 언교는 서로 응하면서 끊어지지 않음을 모름지기 알아야 하리니, 이 가자문은 스물한 구의 주가 되고 스물한 구에 대하여 화합하고 상응하면서 끊어짐이 없나이다. 마치 나자문(那字門)의 언교의 경계가 가장 마지막에서 제 십사 구(句)와 한 곳에서 상응하는 것과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또 가 자는 비유하면 마치 사대천왕(四大天王)이 살고 있는 궁전과 도리천왕(忉利天王)이 살고 있는 궁전과 야마천(夜摩天)의 모든 하늘들이 살고 있는 궁전 가운데서 제석(帝釋)이 주가 되는 것과 같나이다. 이처럼 가자문은 앞의 스물한 구와 뒤의 열네 구가 앞뒤로 섞여서 서른네 구에 에워싸여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이것이 비유와 방편으로 해설하여 이 경계를 아는 것이오니, 이와 같은 방편으로 해석하고 나면 곧 하늘의 언교 가운데 들어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스스로 여타의 모든 중생을 위하여 이것을 열어 보인 것이지 여래께 보인 것은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모두는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지혜 경계이므로 여래께서 스스로 아시나이다.
세존이시여, 저 가 자 문구(迦字文句)의 궁전이 머무르는 곳을 저희들은 당연히 판자(板)의 방편을 관함으로써 알 수 있어야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삼십삼천은 수미산 꼭대기에 머무르고, 이 가운데서 도리천왕은 억백천 수효의 천녀(天女)들에게 에워싸여 있는 것과 같나이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 아자문(阿字門)은 가(迦) 자를 다하고 나아가 나(那) 자까지 다하니, 이 가운데의 한량없는 음성과 언어는 모두 논하여 설할 수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가자문이 권속에 에워싸여 있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비유하면 마치 아뇩달지(阿耨達池)가 모든 강물을 흘러나오게 하되 물의 주입이 끊이지 않게 해서 저 사해(四海)를 가득 채우는 것과 같나이다.
세존이시여, 이와 같은 연못과 바다에 어떤 사람이 항시 백천억 개의 털끝으로 물을 적셔 내면서 그 큰 바다와 연못을 바짝 마르게 하려 한다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나이까?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가령 다시 한량없는 큰 강물을 홀려 내보내도 그 연못과 바다는 오히려 줄어짐이 없거늘 하물며 털에 적신 물방울로써 마르게 할 수 있겠나이까?
세존이시여, 온갖 비유를 지나치게 인용할 수도 없고 또한 모든 비유가 비록 많다손 치더라도 끝내 견줄 수 없나이다. 만일 견줄 수 있다 한다면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이처럼 세존이시여, 저희들 모든 하늘은 비록 다시 비유를 많이 들면서 해설한다 하더라도 마치 털끝으로 물을 적시는 것과 같거늘 달리 무엇을 얻겠나이까?
세존이시여, 저는 이제 여래의 하문(下問)을 받자옵고 감히 속이거나 아첨하지 않으며 또만 게으르거나 잘난 체함도 없나이다. 저희들은 다만 어리석은 마음과 조그마한 지혜만으로 갑자기 해석할 뿐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물으실 적에 그 밖의 세간 사람 중에는 속이거나 아첨하기도 하고 게으르면서 잘난 체하는 이가 있지만, 저는 끝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하옵니다. 지금은 오직 조그마한 지혜로써 아는 바를 분수에 따라 말씀드릴 뿐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는 모든 구업(口業)의 음성과 언어로써 모든 법의 이치를 널리 밝히면서 해석하시지만, 온갖 세간의 범(梵)이나 악마나 하늘이나 사람이나 또는 모든 사문ㆍ바라문으로서는 측량할 수도 없고 알 수도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여래께서 선교방편(善巧方便)과 비유로 해석하신 것을 온갖 중생으로서는 그 이치의 조그마한 부분조차도 알 수 없나이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까지 세간의 어떤 사람도 여래의 방편의 뜻 문[方便義門]의 비유와 해석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을 듣지도 보지도 못하였나이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이제 여래 앞에서 이 이치를 친히 듣고서 받아 지니고 기억하면서 감히 망실(忘失)하지 않겠지만, 혹 어떤 중생은 여래께 들은 뒤에 부처님 보리의 일[佛菩提事]을 능히 알 수도 있나이다.
세존이시여, 일찍이 자주 이 이치를 말씀하셨지만, 이 가운데서 중생은 때로 듣고 나서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고 또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한 곳에 모여 세존께 물으려고만 하니, 어찌 이 세 가지 교장(敎藏)을 알 수 있겠나이까?
여래께서는 비록 그들을 위하여 두루 갖추어 연설한다 하시더라도 저 모든 비구들이 의지하여 행하지 못하면, 어떤 우바새나 또는 모든 하늘이나 사람이 아란야(阿蘭若)의 처소에 있으면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갖가지 방편과 비유로 해설하여 그들로 하여금 이 이치를 알게 하기도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큰 방편의 비유의 해석이란 이른바 세 가지 언교 방편의 업장(業藏)이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업장 가운데서 저희들은 일념(一念)의 수행도 없었거늘, 하물며 다시 능히 알아서 다른 이를 위하여 해석하겠나이까? 원하옵건대 세존이시여, 유독 이와 같이 간절히 우러르는 중생만을 위해서라도 이 이치를 연설하시어 의심을 끊게 하옵소서.’
52. 법사홍호품(法師弘護品)
아난아, 그 때에 방광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하늘 제석에게 말씀하셨느니라.
‘교시가야, 내가 해설하는 이와 같은 방편과 비유를 너는 능히 알 수 있겠느냐?
교시가야, 이는 마땅히 먼저 이 열네 보살마하살을 위하여 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이들은 먼저 이 여러 하늘 가운데 태어나서 무슨 연유인지 이와 같은 서원을 세워서 게으름이 없다는 것을 나타내 보였기 때문이니라. 이런 인연으로 몸을 버리고 곧 아수라 궁전에 태어나서 이 이치를 위했지만 조금도 오히려 알지 못하거늘, 하물며 다시 이 세 가지 언교 업장을 청취해 받아들일 수 있겠느냐?
또한 교시가야, 지금의 이 한량없고 가없는 대중은 이 산꼭대기의 도리천궁에서 오랫동안 살고 있었으니, 혹시 여기에 머무른 중생들의 수효가 얼마인지 알 수 있느냐? 또한 이 중생들이 인간의 연수(年數)에 의지한다면 얼마 동안 머무르는지 알 수 있느냐? 이 하늘의 의복과 음식의 갖가지 것들은 어느 정도인지 아느냐?’
하늘 제석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이미 모두 아나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만일 어떤 사람이 묻길 ‘지금의 이 대중들이 조리하는 갖가지 음식은 얼마의 공을 들여야 하느냐?’라고 물으면 너는 어떻게 대답하겠느냐?’
하늘 제석이 말하였다.
‘세존이시여, 저는 대답할 것이 없나이다. 왜냐하면 세존이시여, 지금 저의 이곳 삼십삼천에서 무릇 필요한 옷이나 음식 등 갖가지 것들은 생각하는 대로 현전하지만 조작(造作)이 아니기 때문이옵니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교시가야, 모든 법 역시 그러해서 모두 마음속에 머무르며 염(念)하는 바에 따라 곧 성취되느니라.
교시가야, 마치 알에서 난[卵生] 모든 중생들은 다만 마음으로 생각하기만 하여도 곧 생을 받는 것[受生]처럼, 모든 법도 역시 그와 같아서 모두 마음으로 말미암아 법을 생각하면 곧 현전하느니라.
또 마치 온갖 습기에서 나는[濕生] 무리, 이른바 고기ㆍ자라ㆍ규룡[虬坻]ㆍ미의라(彌宜羅) 등은 모두 알을 까고 나는 것에 속하는데, 이것들은 혹은 일 유순(由旬)만을 가기도 하고 혹은 이 유순 혹은 삼ㆍ사 유순까지 이르기도 하며 혹은 다시 칠 유순까지 더 가기도 하는데, 그 땅에 도달한 뒤에는 제 알을 그곳에다 안전하게 두면서 잘못되지 않게 하기 때문에 잘 성숙시키는 것과 같으니라.
교시가야, 이 세 가지 언교 업장도 그러해서 억념(憶念)에 따를 때 그 업이 현전하여 차례로 어지럽지 않고 상속하여 끊이지 않으면서 그 구의 뜻[句義]과 화합하며 상응하느니라.
또한 내가 무엇 때문에 너희들을 위하여 해설하는지 반드시 알아야 하느니라. 아자문(阿字門)은 판자라는 비유로 설명하기 때문이요, 가자문(迦字門)은 문자(文字)로써 설명하기 때문이며, 나자군(那字門)은 평등한 문자 장구(文字章句)로써 설명하기 때문이니, 이와 같이 설명할 때에 마땅히 이것을 더불어 지니면서 다시는 어떤 법으로도 이지러지거나 줄어짐[缺減]이 없어야 하느니라.
그리고 모름지기 이 마흔두 구(句)는 판자 위에 있는 것임을 알이야 하며, 이와 같이 안 뒤에 저 모든 법사는 대중에 처하여 법좌(法座)에서 설법하려 할 적에 이 세 가지 법문 가운데서 처음에 아(阿) 자를 염(念)하여 현전해 상속시키면서 화합하게 하여야 하며, 이미 화합한 뒤에는 곧 마흔두 구를 널리 연설해야 하나니, 이와 같이 분별하면서 이백 구(句)를 얻고 다시 열 구를 얻느니라.
마치 처음의 오분(五分)의 권속이 화합하여 오음(五音)이 나오게 되는 것처럼, 저 법사는 이 오음으로 다섯 구(句)의 권속과 화합한 뒤에 족히 백 구의 음성이 원만하게 되나니, 즉각 능히 분별하면서 이와 같이 알기 때문이니라.
온갖 문자를 염(念)해서 현전하고자 하면 곧 현전하게 되고, 상속하여 지닌 뒤에는 저 음성을 두루 갖추어 문구(文句)를 나오게 하는 것처럼, 이와 같이 능히 해설하되 이 가운데서는 다시 다른 소리로 지을 만한 것이 없나니, 법사는 이 법에 의지하여 오음의 문구를 나오게 하느니라.
법사가 아 자의 글을 분별할 적에는 큰 변설(辯說)로 공의 업[空業]을 성취함으로써 천 수(數) 중생을 위하여 의혹을 끊어 없애며, 만일 어떤 사람이 물어도 서두르지 않고 찬찬하면서 정중하게 와서 묻는 이에게는 비유로 해석하면서 먼저 대궁전(大宮殿) 중의 백수의 이치 문[百數義門]으로 해설하나니라. 이와 같이 해석하여 온갖 대중으로 하여금 모두 기쁨을 내게 하는 것이 마치 부처님ㆍ세존께 모인 대중처럼 또한 모든(根)과 교묘한 방편의 지혜[方便智]를 갖추어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해설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너는 일심으로 이 법을 믿고 지녀야 하느니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의 음성과 언설과 방편과 비유로 해석한 이치가 어찌하여 육 년이 지나야 하는가? 이렇게 생각해야 하느니라;
‘말씀하신 법대로 선정(禪定)에 들어가 사유(思惟)하고 수행해야 하며, 이미 수행한 뒤에는 방일(放逸)하지 않고 일심의 정념9正念)으로 분별하여 사유하되, 이 뜻과 계합하는 데는 육 년이 되어야 비로소 구족하고 원만하게 되는 것이니, 마치 나자문(那字門)도 역시 육 년 동안 갖가지 생각을 닦음으로써 참되고 바르고 원만하여지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생각하고 나면 곧 온갖 언어와 음성[言音]의 차별된 일을 증득하여 알게 되느니라.
교시가야, 이 세 가지 구의 문[三句門]을 만일 잘 지니고 나면, 어떠한 사람도 그의 경계를 알 수 없느니라.
교시가야, 모든 부처님ㆍ여래의 언설과 방편과 비유로 해석하는 이치의 문[義門]에 만일 허망한 것이 있다 하면 옳지 못하느니라.
교시가야, 비유하면 농사를 잘 짓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느 때 이들이 농사를 짓기 전에 모두 불러 놓고 말하기를 ‘여러분은 ≺우리들은 지금부터 씨를 뿌린 뒤에는 싹이 나지도 열매 맺지도 않기를 원한다고 해야 합니다≻라고 하면, 그때 저 농사꾼들은 더불어 서로 말하기를≺‘오호(嗚呼)라. 우리는 이제 당신의 종자가 싹도 나지 않고 열매도 맺지 않으면서도 게으름도 없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는 것’과 같으니라.
교시가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그 모든 종자를 제대로 잘 뿌렸는데도 싹이 나지 않을 수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열매가 맺지 않을 수도 있느냐?’
‘아니옵니다. 세존이시여.’
‘교시가야, 이 세 가지 법문도 역시 그러하여 허공에서 생긴 한량없는 이치의 문이라서 모든 법이 차례로 이름을 갖추고 있는 것이니, 가령 한량없는 시절 동안 숨겨지고 가려져서 나타나지 않는다 하여도 사라져 없어지는 일은 있을 수조차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온갖 중생이 선남자에게나 여래께 이 수다라 법문을 듣고 혹 외우기도 하고 해설하기도 하면서 차례로 수행하여 점차 서로 가르친다면, 이 중생들에게 이 지혜의 문[智門]에 대하여 다른 어려운 질문을 하더라도 항복시킬 수도 없고 침묵시킬 수도 없느니라. 왜냐하면 이 모든 지혜의 업이 한량없고 가없기 때문이니, 저 가르쳐 준 이는 일찍이 듣지 못한 한량없고 가없는 중생을 위하여 다 함께 분별하여 변재(辯才)를 성취하게 하며 또한 스스로도 성취하니라.
만일 사람이 와서 이 법의 이치를 묻는다면, 나는 그 물은 바의 이치를 널리 드러내고 분별해서 이와 같이 해설하고 이와 같이 대답하고, 그것에 대해 또한 생각하기를 ‘만일 어떤 사람이 나에게 와서 이런 이치를 물으면 당연히 상속하면서 그를 위하여 해설할 것이며, 만일 여래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질문을 하는 이면 나는 곧 그의 모든 의심에 대하여 분별하면서 해석하리라’고 하나니, 또한 장차 오는 세상의 온갖 중생들이 안락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니라.
만일 어떤 사람이 이 법문을 능히 염(念)하면서 혹은 때로 배우고 익히며 혹은 다시 수행하거나 하면, 그 사람은 오래지 않아서 성취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이 법에서는 비단 저 법의 그릇이 아닌[非器] 중생뿐만 아니라 부처님 법 가운데서 믿는 마음을 내지 않거나 비록 믿는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또한 가르침에 의지하여 행하지 못하는 이라면, 교시가야, 비단 세간에 설법하는 법사가 없어서 법이 즉각 소멸할 뿐만 아니라, 만약 법을 듣고 묻는 사람이 없으면 이때 법은 또한 오래가지 않음을 알아야 하느니라.
왜냐하면 세간에 묻는 이가 없으면 익히고 배우는 것이 없기 때문이고, 익히고 배우는 것이 없기 때문에 능히 알지 못하며, 이미 알지 못하거늘 어떻게 받들어 행하겠느냐? 능히 행하지 않기 때문에 세간은 모두 눈이 멀고 어두워서 인도할 줄 아는 이가 없으리니, 이와 같이 아는 이가 없거늘 누가 법을 짓게 되겠느냐?
만일 법이 없다면, 세간에는 부모에게 효도하고 봉양하는 일, 큰 사람을 공경하고 작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 어른과 어린이, 높은 이와 낮은 이, 명을 받들어 행하는 이를 위로하고 좋은 말로 칭찬하는 등의 일이 없으리니, 세간의 일이 모두 다해버렸거늘 그 누가 능히 짓겠느냐?
교시가야, 만일 사람이 세간의 법을 모른다면 어떻게 능히 분별하면서 세간의 일과 이치를 논설하겠느냐? 이미 믿고 이해하지 않으며 또한 능히 행하지도 못하기에 세간의 선[世善]조차도 오히려 없거늘, 어떻게 모든 부처님의 지혜를 배울 수 있겠느냐? 이 때문에 온갖 세간의 일은 잠시도 그치지 않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강설(講說)하려 할 적에는 모름지기 네 가지로 강설하는 처소[說處]를 장엄해야 하느니라.
어떤 것이 네 가지인가? 교시가야, 때로 설법할 법사는 반드시 먼저 이와 같은 방소(方所)를 선택해야 하나니, 그 처소는 넓디넓고 땅의 형상으로 평평하고 반듯하며 높낮이나 기와조각ㆍ돌ㆍ모래ㆍ자갈ㆍ가시나무와 독한 가시들이 없고, 또한 더러운 풀이나 모기ㆍ등에ㆍ뱀ㆍ전갈 등의 모든 독한 벌레도 없으며, 땅은 온화하여 아름답고 부드러우면서 깨끗하고 미묘하며, 동산과 연못과 꽃과 열매와 나무숲이 많이 있으면서 청정하고 시끄럽지 않으며, 여름에는 너무 덥지도 않고 겨울에는 심하게 춥지도 않으며, 사중(四衆)이 섞여 살기에 더불어 안온한 곳이면, 법사나 듣는 이들이 다 함께 즐거움을 누리느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바로 첫 번째 저 법사가 강설하는 처소를 장엄하는 것이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강설하려 할 적에는 그 땅의 방소에서 법을 수호하는 이나 법을 듣는 사람은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마땅히 법사를 위하여 높고 넓은 법좌(法座)를 장엄하게 시설하되 갖가지 훌륭한 깔개와 부드러운 방석 등 강설할 때 필요한 갖가지 것을 모두 자리 위에 많이 가져다 두어야 할 것이니,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보고 법을 존중하는 마음이 더하고 법사는 거기에 처하면서 안온하게 설법하느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바로 두 번째 저 법사가 강설하는 곳을 장엄하는 것이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하려 할 적에 그 법을 보호하는 사람과 법을 듣는 이는 법을 존중하기 때문에 마땅히 지극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용맹정진하며 법사를 수호해서 나쁜 중생들이 바른 법을 무너뜨리고 비빙하거나 장애가 되지 않게 하며, 나아가 남자ㆍ부인ㆍ동남ㆍ동녀로 하여금 왔다 갔다 하고 시끄럽게 떠들면서 법사를 방해하고 어지럽게 하지 말지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바로 세 번째 저 법사를 위하여 강설하는 처소를 장엄하는 것이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막 법을 연설할 적이면 그 법을 보호하는 사람과 법을 듣는 대중은 법을 공경하기 때문에 공손하게 법을 아는 다섯 사람이나 열 사람 또는 여러 사람을 선발하여 법사의 뒤에 머무르게 해서 대중을 관찰해 방해나 어지러움이 없게 하고 한결같이 법사의 의지(意旨)와 가르침[敎令]을 취하여 법답게 시행함으로서 그 대중들을 바로잡아 고치느니라.
혹시 어떤 사람이 떠들면서 대중을 어지럽게 하면 즉시 그가 말한 이유를 따져서 법답게 금지시키고, 만약 사람이 놀고 웃으면서 행동거지가 어긋나면 즉시 추궁하고 질책해서 끊게 해야 하니, 항시 대중으로 하여금 모든 감관을 고요하게 하고 몸과 입을 맑게 통제하면서 가르친 대로 머무르게 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그 모든 사람들이 대중을 관찰할 때에는 행동거지가 공손하면서 급하지 말 것이며, 존중하는 말로써 하고 거친 말을 내지 말아야 하며, 무릇 하는 말마다 다만 앞 사람이 서로 알아들을 만큼만 고요하게 하여야 하고, 큰 말이나 소리를 질러서 대중이 동요하게 해서는 안 되느니라. 왜냐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일을 인연하여 많은 중생들에게 법의 장애가 되지 않게 하려 함에서이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바로 네 번째 저 법사를 위하여 강설하는 처소를 장엄하는 것이니라.
만일 이 네 가지 일로 설법하는 방소를 장엄하면, 그 법사가 해설하는 경전에 여러 가지 어려움이 없어져서 필경에는 널리 퍼지게 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연설하려 할 적에는 먼저 그 대중이 어느 법의 이치를 어떻게 좋아하는가를 관하여 그 대중이 바라는 대로 때에 따라 충족시킴으로서 모든 중생으로 하여금 선근을 성취하게 하고, 또한 언사와 변재가 더욱 자라서 두루 온갖 곳에 걸림 없이 청정하게 하며, 모든 지혜 있는 이로 하여금 쉽게 이해하고 관할 수 있고 증(證)할 수 있게 하며, 때의 더러움[垢汚]이 없게 하고 개(蓋;번뇌)와 전(纏;속박)을 멀리 여의게 하고, 몸과 입의 모든 감관이 다 평안하고 고요하게 하며, 삼매의 사유[三昧思惟]가 서로 이어지면서 끊어지지 않게 하여야 하느니라.
만일 사람이 법사에게서 법을 듣고 알게 된 뒤에 온밤 내내 훈수(熏修)하여 세 가시 언교 업장을 버리거나 여의지 않으면 문자나 언설에 통달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할 때는 마땅히 이 이치의 문[義門]을 이루기를 서원하면서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의지(依止)를 지어야 하나니, 법사가 이미 이와 같은 이치를 깨달은 뒤에는 다시 ‘이제 나는 이와 같은 법문을 깨달았으니, 어떻게 하면 나로 하여금 좋은 구업(口業)을 얻어서 나오는 말마다 말씨가 맑고 흐림이 없고 파괴되지 않은 소리와 슬피 울 듯 하는 음향이 없으면서 항상 미묘하게 끊어지지 않는 변재를 얻게 할까?’라고 생각해야 하나니, 다만 이 경의 법문의 이치만을 개발(開發)해 드러내 보이기 위해서이니라. 만일 그 법시가 이와 같이 연설할 때에는 알지 못하는 이가 없고 이해하지 못할 이가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하려 할 적에 대중이 모이고 나면 법사는 먼저 세 가지 마음으로 그 대중 가운데 한량없는 갖가지 형상[相]과 어떠한 중생이 총명하고 예리한 지혜를 지녔는지를 관하니, 이와 같은 세 가지 마음으로 관하기 때문에 혹은 신통을 통해 그 대중 가운데 이와 같은 모습[相]을 갖춘 이를 찾아내는 것이니, 그 법사는 마땅히 먼저 그 대중을 위하여 보시 공덕 등의 일을 널리 연설해야 하느니라.
이와 같이 연설할 때에 중생으로서 읽고 외우고 받아 지니며 기뻐하면서 받들어 행하는 이가 많이 있나니, 그 법사는 이 이치의 문에서 공(空)ㆍ무상(無相)ㆍ무원(無願)을 상속(相續)하고 현발(顯發)해서 끊어지지 않게 하는데, 마치 모든 여래ㆍ응공ㆍ정변각께서 이 법을 해설할 때에 한량없는 백천의 문 가운데서 이와 같이 청정한 이치를 나타내 보이신 것과 같으니라.
법사는 그 때에 다시 이 이치를 해설하면서 끝내 여래의 법장(法藏)을 버리지 않나니, 아 자 법문(阿字法門)을 기억하고 지니어 최초의 언설(言說)이 상속하여 끊어지지 않으면서 다른 이를 위하여 시설하고, 가 자 법문(迦字法門)이 그 다음 상속하여 해설하며, 나 자 법문(那字法門)은 맨 마지막이 되느니라.
이와 같이 염(念)한 뒤에는 마치 여래의 변재처럼 마땅히 스스로 현전해야 하고, 이 언설에서는 다시 교묘한 방편이 견고해져야 하며, 이미 견고해진 뒤에는 저절로 이와 같은 지혜[智聚]가 성취되는 것이 마치 수미산과 같아서 무너질 수 없으니, 모든 외도들이 동요시킬 수도 없고 온갖 논사(論師)들도 쓰러뜨릴 수 없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마땅히 용맹스럽게 그 정진을 일으켜 모든 근(根)이 명료하여지고 뭇 일이 두루 갖추어진 뒤에 저 세간의 네 무리[四輩]25)를 위하여 이와 같은 모든 음(陰) 등의 법을 널리 펴야 하나니, 좋은 방편으로 그 여러 가지 모양들을 알기 때문이니라. 이미 깨달아 안 뒤에는 언제나 기억하여 앞에 나타내면서 한량없는 변재로 분별하여 해석하느니라.
오음(五陰) 등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그 모든 음의 더미는 무슨 이치로 음이라 하는가? 다시 어떠한 모양으로 음의 더미를 잘 통달하는가? 이와 같이 모든 음의 더미를 교묘히 해설한 뒤에는 곧 차례로 모든 법의 모양 없는 이치의 문[無相義門]을 널리 연설하면서 진실(眞實)에 들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나는 일찍이 이 사대(四大)의 모양이 이치의 처소[義處]를 총체적으로 섭수한다는 것을 해설하였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그 때에 법사는 응당 이렇게 말해야 하느니라.
‘이 가운데에 만일 모든 색의 더미[色聚]가 있다면, 거기에는 다시 어떠한 인(忍)이 있어서 머무를 수 있는가? 거기에 이와 같은 인이 있어 머무른다고 하면, 앞서 이미 이와 같은 경전이 있어서 마땅히 현전시켜야 하며, 또한 다시 어떤 사람은 항상 상속하면서 다른 이를 위하여 이런 이치의 문을 해설해야 하리라.
어떻게 상속하면서 이와 같은 법을 해설하는가? 저 중생들 같으면 기뻐하는 마음으로 좋아하면서 듣고 싶어 하고, 저 중생들 같으면 한마음으로 법에 있으면서 다시는 산란한 생각이 없으며, 저 중생들 같으면 법을 받을 만한 그릇이 있고, 저 중생들 같으면 성숙할 수 있는 이이며, 저 중생들 같으면 법을 들은 뒤에는 참괴(慚愧)하는 곳이 있고, 저 중생들 같으면 이미 이와 같은 경전을 듣고 받으니, 그 차례와 같이, 수다라와 같이, 그 위력과 같이, 생각과 같이 분별하면서 이와 같이 받아 지니느니라. 그러나 그 대중 안에는 어느 한 사람도 물러서는 마음을 내면서 법을 듣지 않는 이가 없으리라.’
교시가야, 그 모든 법사는 이와 같이 법사(法事)를 성취해야 하나니, 모든 부처님ㆍ여래께서도 더불어 이와 같이 해설하시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저 모든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모름지기 기특한 일을 드러내고 일으켜야 하느니라. 가령 어떤 사람이 이 마을로부터 혹은 또 다른 마을이나 성읍(城邑) 내지 다른 지방에 이르고, 이른 뒤에는 곧 이와 같은 법의 이치를 물으면서 법사에게 말하기를 ‘내가 지금 물은 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라고 한다 해도, 그 법사는 이 이치에 대하여 먼저 늘 사유(思惟)하여 순숙(純熟)해진 후에야 비로소 질문에 따라 방편으로 모두 해석할 수 있나니, 이미 두려움도 없고 또한 망설임도 없는지라 그의 묻는 바대로 모두 만족되게 하느니라.
이와 같이 법사가 설법할 적에는 다른 이에게 산란한 일을 해설하지 말아야 하나니, 이런 인연으로 큰 이익을 얻어서 그 어떤 중생이라도 그에게 듣는 이면 모두가 기쁨을 내며 언제나 와서 법을 듣게 되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으로 때로 그 법사는 마땅히 널리 해설하면서 큰 이로움을 성취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모든 법사들로서 이와 같은 법을 능히 통달한 이면 설법할 때에 비록 모든 부처님의 보리[佛菩提]는 해설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다만 이 법의 이치만은 분명히 할 수 있어서 교묘히 방편을 알아 관대하고 통달하게 되며, 또한 때로 다른 청취해 받아들이는 이를 위하여 해설할 수도 있느니라. 이와 같이 법사가 잘 통달한 뒤에 만일 어떤 사람이 때가 아닐 적에도 와서 듣고 말할 때가 아닌데도 와서 묻거나 하면 곧 열어 보여야 하느니라.
만일 비구ㆍ비구니ㆍ우바새ㆍ우바이의 사부(四部) 대중들이나 혹은 그 밖의 다른 중생이 때가 아닐 때나 어긋나게 물을 때에 그를 위하여 해설해주지 않으면 그들은 이로부터 다시는 와서 듣지 않을 것이며, 듣지 않기 때문에 다른 이를 위하여 법요(法要)를 널리 펴서 중생에게 열어 보일 수가 없느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으로 이 법문을 두루 드러낼 수 없게 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모든 법사가 이 법 가운데서 마음이 바르게 머무르지 못하고 망령되이 사유(思惟)를 일으키면, 망령된 사유 때문에 드디어 사견(邪見)을 이루게 되나니, 이와 같은 법사는 삿된 분별 때문에 저 수다라의 이치에 계합될 수 없어서 곧 무지(無知)와 무명(無明)의 한가운데에 머무느니라.
그리고 그 법사는 사견에 머무르기 때문에 예로부터 있었던 모든 하늘과 신(神)들이 일시에 버리면서 다시는 수호하지 않나니, 모든 하늘과 신이 수호하지 않기 때문에 위덕과 세력과 광명이 없으며, 위력이 없기 때문에 온갖 행한 바는 계율에 의지하지 않고 모든 그 밖의 선근도 다 줄어지고 손상되느니라.
이와 같은 법사는 먼저 항상 다른 이들을 위하여 법의 이치와 수다라 등을 해설하지만, 그것을 듣는 대중조차도 오히려 모두가 비방하고 버리면서 받지 않거늘, 하물며 계율에 대하여 다시는 의지해 행하지 않는데도 다시 와서 그의 설법을 듣는 이가 있겠느냐?
교시가야, 만일 세간 사람으로서 믿음과 행[信行]이 없는 이면 그 집안의 모든 처자 권속조자도 오히려 모두가 순종하지 않거늘, 하물며 그에게 대중이 다시 와서 듣겠느냐?
또한 교시가야, 이와 같은 법사는 신분(信分)이 없나니, 이른바 여래가 언제나 말한 계율에 의지하여 가르침대로 행하지 않는 이이니라.
교시가야, 이 모든 법사는 신분이 없기 때문에 선근으로서 말할 수 있는 이가 아니며 오직 악만이 더욱 자라서 반드시 과보를 받을 뿐이니, 이와 같은 과보를 만일 모든 여래께서 사실대로 말하게 되면 그 사람은 듣자마자 곧 입 안에서 뜨거운 피를 마구 토할 것이요, 이런 질환으로 인하여 바로 목숨을 마칠 것이니라.
또한 교시가야, 여래ㆍ응공ㆍ정변각은 저 온갖 세간의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모든 법을 깨달아 알게 하지만, 저 어리석은 사람은 이 법 가운데서 질투심을 일으키면서도 끝내 다음과 같은 생각은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만일 법에 인색해서 숨기며 해설하지 않으면, 인색하기 때문에 법은 점차로 어려워지고 혹은 사라질 수도 있다. 내가 만일 법을 듣는 사람에게 해설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설한 대로 듣고 들은 대로 받을 수 있겠느냐? 이미 듣고 받은 이가 없거늘 어떻게 받들어 행하겠으며, 만일 그렇게 된다면 곧 다른 한량없는 중생으로 하여금 이 법을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거늘 어떻게 법에 대하여 희유하다는 마음을 내게 하겠느냐? 이런 인연 때문에 나는 이제 이 법 가운데서 모든 중생들에게 인색한 일을 짓지 않아야 한다.’
교시가야, 이와 같은 사람은 끝내 증인(證人)으로는 세울 수 없느니라.
교시가야, 너는 마땅히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값을 칠 수도 없는 참된 법보(法寶) 가운데서 스스로 값어치를 매기려고 하는 것임을 관해야 하느니라.
교시가야, 또한 알아야 하느니라. 이와 같은 어리석은 사람은 여래의 세 가지 업장(業藏)의 모양 없는 법[無相法] 가운데서 모든 모양을 건립하려고 하는 이이니라.
교시가야, 이것이 또한 법사로서 신분(信分)이 없는 것이니, 여래는 이와 같은 방편으로 이해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어떤 법사가 이와 같은 수다라 가운데서 교묘히 이치를 잘 취하여 정념(正念)에 머물며, 모든 방편으로 법문을 열어 드날리고 모든 세간을 위하여 큰 이로움을 일으키면, 너는 그 때에 잘 관찰하면서 ‘어느 곳에 좋은 동산 숲이 있으니 그 숲의 여러 가지 수목과 갖가지 꽃과 열매의 모양과 이름에 대해서는 모두 저 중생들로 하여금 다스리고 장엄하게 하여야겠다. 나아가 저 한 웅큼의 쇠똥[牛糞]을 나무숲이 있는 땅에 바르고, 그렇게 장엄하고 나서는 법사를 청하여 연설하게 해야겠구나’라고 해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법사가 설법할 적에 숲에는 곧 숲을 보호하는 천신(天神)ㆍ지신(地神)ㆍ수신(樹神)과 상계(上界)에 있는 모든 하늘, 온갖 건달바ㆍ긴나라ㆍ가루라ㆍ마후라가와 모든 용과 야차와 같은 무리들이 서로서로 알리고 기뻐하며 찬탄하길 ‘저 장엄하는 사람은 숲 아래에다 쇠똥을 바르면서 기억하고 지니면서 잠시도 잊는 일이 없고, 저 숲을 공경하며 도는 것이 마치 탑묘(塔廟)를 받들 듯 하는구나’라고 하느니라.
교시가야, 그 법사는 널리 세간을 위하여 법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때문에 만약 이곳을 떠나 다른 지방으로 가려고 하면, 그 때에는 저 땅에서 숲을 수호하는 모든 하늘과 모든 신들은 오히려 언제나 이와 같은 땅의 숲에 공양하느니라.
또한 교시가야, 만일 법사로서 이와 같이 행한 이라면, 이 사람은 한량없는 복의 더미[福聚]를 얻으면서 무릇 말하는 바를 사람들이 다 전수하느니라. 왜냐하면 그 법사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면서 법문에 수순함이 어기거나 틀림이 없어서 끝내 법의 이치 문[法義門]이 끊어지지 않기 때문이니라.
교시가야, 이런 인연 때문에 법사가 된 이는 이 법 가운데서 스스로 부지런히 힘쓰고 그런 뒤에야 사람들을 가르쳐야 하느니라. 만일 자기 자신이 힘쓰지 않는다면 사람 중에 그 누가 믿겠느냐?
교시가야, 이런 이치 때문에 저 설법하는 법사는 반드시 이와 같은 법문에 잘 들어가야 하나니, 깊은 지혜의 방편으로 법장(法藏)을 열어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요, 방일하지 않고 큰 힘을 능히 얻어야 하기 때문이며, 방편의 교묘한 지혜로 반드시 과보를 받지 앉아야 하기 때문이요, 자비를 일으켜 거두어 주면서 마음의 업과(業果)를 이루어야 하기 때문이며, 모든 중생을 위하여 시절(時節)을 알게 해야 하기 때문이요, 장차 교묘한 지혜[巧智]로 동요하지 않는 진실한 처소[不動眞處]에 이르러야 하기 때문이니라.
그때에 법사는 이와 같은 것을 얻은 뒤에는 모름지기 중생 선근의 방편과 지행(智行)의 차별을 알고 그런 뒤에야 비로소 설법해야 하느니라.
법사가 만일 이런 방편에 머물러서 법장(法藏)을 해설할 적에는 곧 한량없고 비길 데 없는 큰 공덕을 얻으며 다시 이와 같이 한량없고 가없는 큰 지혜도 얻나니, 장차 바른 지혜[正智聚]를 크게 베푸는 가운데 그 법사는 한량없이 정진하는 저 언덕[彼岸]에 이르게 되어서 모든 중생들로 하여금 또한 자비로 두루 거두어 주는 방편지(方便智) 가운데에 머무르게 하느니라.’”
그 때에 세존께서 이 경을 말씀하여 마치시니, 그때 수바다천(須波多天)과 존자 아난 및 모든 하늘ㆍ세간 사람ㆍ아수라 등의 온갖 대중들이 부처님의 말씀을 듣고 정수리에 받들며 봉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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