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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541 불교 (대보적경/大寶積經) 4권

by Kay/케이 2024. 1.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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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보적경(大寶積經) 4

 

대보적경 제4권


대당 삼장 보리류지 한역
송성수 번역


2. 무변장엄회(無邊莊嚴會) ①

1) 무상다라니품(無上陀羅尼品) ①

이와 같이 내가 들었다.
한때 부처님께서는 왕사성(王舍城) 가란타 대숲 절에서 큰 비구들과 한량없는 보살과 함께 계셨다. 이 모든 보살은 다 일생보처(一生補處)로서 다른 부처님 나라로부터 와서 모인 것이었다.
그때 세존께서는 대중에게 둘러싸여 공양과 공경을 받으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설법하셨는데, 대중 가운데에 한 보살이 있었으니 이름은 무변장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오른쪽 무릎을 꿇고 부처님께 합장하고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한 가지 의심이 있어서 묻고자 하오니 바라옵건대 부처님께서 불쌍히 여기시어 허락하옵소서.”
그때 부처님께서는 무변장엄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선남자여, 여래(如來)․응(應)․정등각(正等覺)에게 네가 묻고 싶은 대로 물어라. 너의 의심을 따라 해설하여 너를 기쁘게 하리라.”
그때에 무변장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끝없는 지혜를 구하기 위하여 정진의 갑주(甲冑)를 입은 모든 보살들의 큰 방편선교(方便善巧)의 경지를 구하는 자, 끝없는 지혜선교를 구하는 자, 결정적인 큰 지혜를 처음 열어 깨달은 자, 보리의 도에 이미 편히 머무르는 자 등 이러한 여러 보살을 위하여 제가 여래께 묻사오며, 또한 중생들을 이락(利樂)하게 하기 위한 마음 비교할 데 없으며,
모든 법 청청 지의(智義)의 매우 깊은 큰 지혜방편[大智方便]을 사유(思惟)하며, 간택하여
무량의(無量義)를 잘 결정하는 힘을 얻으며, 큰 사자좌(獅子座)를 구하여 일체 사자좌에 오르고자 하며, 처음 발심으로부터 용맹 정진하여 물러남이 없는 데 이르러서 말씨[言詞]가 교묘하고 정진을 쌓아 모으려고 갑주를 입은 자 등 이러한 모든 보살을 위하여 여래께 묻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떤 보살이 저 중생에게 생사를 뛰어넘어 열반의 저 언덕에 이르게 하고자 하거나 다시 걸림 없고 두려움 없는 경지를 구하여 두려움 없는 가운데 머물러서 방편으로 근기를 따라 법을 연설하되 교묘하게 분별하여 보태지도 줄이지도 않게 하며, 또 모든 법 본래의 자성을 여실히 드날리고자 합니다.
세존이시여, 다시 어떤 보살이 비교할 데 없는 마음․가장 거룩한 마음․위없는 마음에 들어가서 자재를 얻으므로 이들을 위하여 여래께 묻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중생이 자연지(自然智)와 무사지(無師智)를 구하여 무명(無明)의 껍질을 깨뜨리고 인간․천상을 뛰어넘어 가장 거룩함이 되며, 혹은 일체 세간을 이락(利樂)케 하기를 희망하여 큰 지혜, 두려움 없는 힘을 구하고자 함에 자연지를 제하고는 끝없는 지견(知見)의 선교(善巧)를 보이고자 하며, 한량없는 결정법(決定法)을 설하려 함에 지혜의 빛으로 세간․천상․인간을 비추고자 하나이다.
다시 모든 중생의 낙욕(樂欲)을 위하여 위없고 걸림 없는 지혜방편을 열어 보여 마침내 청정한 지견을 구하여 온갖 지혜선교의 경지를 구하려 하는 자가 있나이다. 제가 이제 그 모든 보살을 위하여 여래께 묻고자 하나이다.
세존이시여, 보살이 이 경지에 머물러서는 재빨리 여래지(如來地)를 원만히 성취하며, 또는 능히 생각할 수 없는 방편선교의 바라밀다를 증득하여 적은 노력으로 중생을 위하여 눈앞에서 능히 이러한 지혜를 얻어서 중생으로 하여금 악법을 내버리고 선법이 자라나게 하여
보리도와 부처의 성품을 보게 하며, 또한 능히 한량없는 중생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머물게 하여 다 물러나지 않게 하리다.
세존이시여, 저 보살들에게 능히 깨달음의 길을 열어서 불법가운데서 마음을 기쁘게 하려고 제가 이들을 위하여 여래께 묻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이 보살들이 이미 다 모였사오니 미묘한 법을 말씀하실 때가 바로 이 때입니다. 바라옵건대 여래께옵서 이러한 법문을 열어 보이시고 연설하시며 모든 보살에게 맡겨 주셔서, 그들이 생각할 수 없는 원과 일생보처가 가진 착한 뿌리를 성취하게 하옵소서.
세존이시여, 이러한 미묘한 다라니문을 여래께서 수시로 가르쳐주셔서 모든 보살로 하여금 능히 무량한 법문의 이취(理趣)를 지니어 선교로 결정하고 말씀으로 의리(義理)를 연설케 하시며, 다시 장차 보리를 증득할 것을 지원하여 끝없는 대신통업[大神通業]에 머무르며, 중생을 위하여 여래의 선교지(善巧智)를 거두어 잡아 지니게 하리니 오직 바라옵건대 이러한 법문을 열어 보이셔서 중생들이 보리도를 증득하게 하옵소서.
세존께서는 지나간 먼 세상에 이미 넓은 서원을 발하셔서 무수한 중생으로 하여금 불지와 자연지에 머물게 하셨으니, 이러한 다라니문을 연설하셔서 보살들이 착한 뿌리를 성취하게 하시며 또한 여래의 위신력으로 위없고 생각할 수 없는 원을 힘입게[加持]하여 주소서.
세존이시여, 여래 정등각께서는 이미 한량없는 방편선교를 증득하셔서 생각할 수 없는 경지를 얻으시고, 두려움 없는 경지에 머무르셔서 모든 중생이 뜻으로 좋아하는 성품의 차별을 잘 아시며 한량없는 겁 동안 깨달음의 지혜를 쌓으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대중이 여래를 우러러 뵈옵기 잠깐도 끊임없사오며 온갖 지혜의 지혜와 또한 법장(法藏)에 오래 게으르지 않고
마음에 싫증이 없이 여래의 결정의(決定義)를 듣고자 하나이다.
세존께서는 온갖 지혜의 경계에 조용히 머무르셔서 이미 모든 보살의 원과 발심․수행[發趣]을 아시고 선교방편이 성숙하셨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모든 법문․다라니문․원만한 구의(句義)와 온갖 법의 결정선교, 이러한 법문을 여래께서 말씀하셔서 아직 성숙되지 못한 모든 보살을 다 성숙하게 하시며, 이미 성숙한 이는 속히 신통과 온갖 지혜와 해탈지견(解脫知見)을 얻게 하소서.
세존이시여, 만일 보살들이 부정지(不定智)에 머물렀다면 이 보살들이 이 법을 듣고는 온갖 지혜의 경계를 성취하게 하여 지이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 인연으로 감히 큰 물음을 여쭙나이다. 바라옵건대 큰 자비와 위력으로 모든 보살을 가피(加被)하시고 수호하셔서 이러한 법을 말씀하소서.
세존이시여, 이 뒤 말세에 쟁론(諍論)이 일어날 때에 자기 주장에 집착된 중생이 서로서로 해치고 3독이 부쩍 늘어 바른 법을 허물 때에, 모든 보살들은 그때에 큰 자비로 이 일을 견디어 참고 이 법을 유포하여 쟁론이 없게 하옵소서. 무쟁(無諍)의 법에 순응하므로 곧 능히 대자대비를 거두어 지니며 모든 착한 뿌리를 쌓아 모으리다.
세존이시여, 제가 이제 감히 이 뜻으로 말미암아 여래의 걸림 없는 법문의 결정의를 묻사옵니다. 세존이시여, 어떻게 하여 모든 보살의 한량없는 법문․법광명문(法光明門)과 온갖 법의 방편을 일으키게 하오리까?
다시 바라옵건대 여래께서는 ‘무너짐 없는 고요한 [不滅壞寂靜] 법문’을 말씀하시며, 겸하여 끝없는 비밀 법장을 연설하셔서 구족하게 성취하여 생각하는 힘이 끊임없게 하시며,
원수[魔怨]와 외도들을 항복 받아 굴복되는 일 없게 하소서. 바라옵건대 여래는 바른 법을 연설하셔서 중생들로 하여금 착한 뿌리를 쌓아 모으게 하시며,
또한 끝없는 방편을 쌓아 모으게 하시며, 온갖 지혜를 세상에 나타내시어 생각하는 대로 한량없는 법문을 엮어내어 모든 변재가 청정 구족하며 서로 잇달아 어지럽지 않은 최상의 구의(句義)를 얻어서 한량없는 법문과 다라니의 진실한 방편을 증득하게 하시며,
또 중생들이 기쁜 마음을 내게 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먼저 하고 뒤에 할 정진 방법을 말씀하시며, 과거․미래․현재의 모든 수행법을 보여 주시어 이러한 인행(因行)에 자재하므로 법에 머무름 없게 하시며, 보살들이 시방 여래의 전생 일[本事]을 잘 알고 신통과 두려움 없는 힘[無畏力]으로 모든 부처님세계에 가득하여 중생에게 청정한 법의 눈[法眼]을 맡겨 주시며, 또한 생각할 수 없는 법을 열어 보여 부처님의 지혜 방편선교를 성취하게 하옵소서.
제가 이런 뜻으로 말미암아 감히 청하오니 바라옵건대 세존께서는 여래지(如來地)의 광대 방편의 매우 깊은 법을 말씀하셔서 온갖 지혜가 되도록 모든 선교와 헤아릴 수 없는 법 이취를 거두어 지니어 저 보살의 원과 방편선교를 원만하게 하옵소서. 보살이 이 법을 듣고는 다 큰 법의 광명을 증득하여 보리의 수승한 선교와 넓은 서원을 성취하여 다 원만하게 하옵소서.”
그때에 부처님께서 무변장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착하구나. 무변장엄아, 네가 이제 모든 보살을 위하여 청정한 원력, 방편선교에 머무르며 또한 모든 중생을 불쌍히 여기는 까닭에 결정한 지혜로 여래에게 물으니, 너의 공덕은 한량이 없도다. 잘 듣고 사실대로 생각하라. 내가 이제 너를 위하여 법을 해설하여 모든 보살로 하여금 불지경(佛智境)의 한량없는 갖가지 공덕을 길러내게 하리라.”
무변장엄보살이 말하였다.

“그러하옵니다. 세존이시여, 저희들은 기꺼이 듣기를 원하나이다.”
이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보살이 끝없는 선교원(善巧願)을 구하기 위해서라면 마땅히 모든 부처님의 비밀어(秘密語)를 알고 받아 지니고 사실대로 관찰할지니라.
어떻게 관찰하는가? 무변장엄아, 여래의 지혜는 모든 교묘한 방편을 거두어 지녔으므로 법을 설함이 청정하지 않음이 없느니라. 모든 보살은 마땅히 이러한 법요(法要)를 닦을지니라. 모든 부처님의 말씀은 다 평등하여 대비심에 머물러서 중생을 널리 덮어 주며, 결정코 모든 중생들을 성숙하게 하느니라.
혹은 하승지(下乘志)에 해탈을 구하여 성문도에 진실․최상의 열반을 목적하는 이에게 넓은 서원을 원만히 채워 온갖 지혜를 이루게 하며, 내가 이제 무상 해탈에 머무르게 하여 나머지 소승법을 멀리 여의게 하고 모든 부처님 비밀어에 잘 들어가게 하며, 여래의 미묘한 언구(言句)를 말하여 광대 청정하여 모든 법을 거두어 가지며, 중생들의 그 근성을 따라서 해탈을 성취하 하느니라. 그러나 이 법은 평등하여 느는 것도 아니고 주는 것도 아니며 모자람도 없고 잃어버림도 없으며, 색(色)도 없고 등색(等色)도 없으며 끝없고 가없는 자성의 청정함은 모든 부처님이 연설하신 바이니라.
본래의 자성을 진실히 깨달아 알면 어떤 법이나 다 깨달아 알게 되리니, 왜냐하면 온갖 법은 다 여래가 이름을 붙여[仮名] 말했을 뿐이기 때문이니라.
만일 모든 법이 다 이 붙인 이름을 말미암았다면 이것을 곧 법으로써 시설하지 못할 것이며 또한 나타내어 보일 수 없을 것이다. 나타내어 보일 수 없으므로 여래가 말씀한 것이 다 진실한 제일의(第一義)니라. 법을 따라 다 같이 온갖 법에 들어가서 온갖 법의 분별에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음도 아니니라. 분별법과 분별없음으로써 진실하고 평등하게
온갖 법을 증득하여 차별이 없느니라.
법은 남[生]이 없나니 이렇게 나는 법이 없는 까닭이니라. 법이라 함은 실로 법이 없나니, 망령된 분별을 내어 널리 계탁(計度)하는 까닭이니라. 법은 일어남이 없나니 자재하지 못한 까닭이니라. 법은 관(觀)할 경계[待]가 없나니 원만도 버린 까닭이니라. 법은 작용이 없으니 가고 옴이 없는 까닭이니라. 법은 자성이 없으니 일체의 자성법(自性法)을 뛰어넘은 까닭이니라. 법은 본래 평등하여 차별이 없나니 희론(戱論)이 없는 까닭이니라.
하는 일[所作法]을 따라 수승한 원을 일으켜 성취되지 않음이 없나니 그 가운데 하는 자[作者]가 없으며 적은 법이라도 얻은 것이 없이 다 공(空)에 돌아가느니라. 그러므로 온갖 법이 꼭두각시 같고 꿈과 같아서 높고 낮음이 없나니 내가 마땅히 청정한 넓은 원으로 중생을 교화할 적에 실로 적은 법에라도 집착함이 없었느니라. 무변장엄아, 이것이 모든 보살의 평등한 법광명문이니 이 문으로 말미암아 저 훌륭한 원이 더욱 자라서 마치 해가 나니 광명이 두루 비추는 것과 같으니라. 선남자야, 이 법문을 능히 믿고 아는 자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법광명을 짓느니라.
무변장엄아, 만일 모든 보살이 안으로 바로 생각하고 밖으로 산란한 마음이 없이 조용히 머물러서 모든 장애를 끊은 자라면 보살의 보광삼매(普光三昧)를 따라서 생각하고, 매우 깊은 법을 믿어 아는 자는 마땅히 이 모든 법문을 관찰할지니라. 온갖 법을 여래가 다 알고 연기문(緣起門)으로써 열어 보여 연설하느니라. 이와 같은 연기는 허망하여 실답지 않은지라 본래의 자성이 다 공적하나니 이 연기성 또한 진실이 아니지마는 능히 중생으로 하여금 물들게도 하고 청정하게도 하나 시방에 구해도 다 얻지 못하느니라.
얻을 것이 없으므로 받아 지닐 것도 없으며, 받아 지닐 것이 없으므로 내가 설한 법도
오히려 놓아 버릴 것이니,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놓아 버린다 함 또한 있는 것이 아니며 또한 취할 것이 없으며 공용(功用)도 없고 본성이 청정하여 온갖 법이 분별이 없나니 분별의 진실성을 분명히 안 까닭이니라. 온갖 법이 머무를 것이 없으며 또한 보지 못하나니 다른 성질이 없는 까닭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이 머무름이 없고 의지할 것이 없건마는 다만 이름을 붙임으로써 있느니라. 저것이 다 공적하여 자성이 없으며 머무름이 없이 머물기 때문에 모든 법이 머무를 곳이 없느니라.
머무를 곳이 없는 까닭에, 다[盡]한 까닭에, 멸한 까닭에, 변역(變易)한 까닭에, 여래가 다만 다른 이름으로 선설할 뿐이니라. 이러한 그윽한 뜻을 응당 잘 알 것이요, 선과 불선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만일 선법에 집착하면 불선법에도 집착하리라. 이러한 불선법에 집착하므로 모든 번뇌를 내나니 부처가 다른 이름으로 말하여 고성제(古聖諦)라 하며, 선과 불선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애(愛)가 없어지나니 여래가 이 선법으로 끊을 것을 다른 이름으로 말하여 집성제(集成諦)라 하느니라.
제2성제를 능히 깨달아 아는 까닭에, 멸한 까닭에, 다한 까닭에, 억상(憶想)이 없는 까닭에, 생사를 여의어 버리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을 관찰한 까닭에, 생각함[想]과 느낌[受]을 즐기지 않고 분별이 없는 까닭에, 여래가 다른 이름으로 말하여 멸성제(滅性諦)라 하느니라.
제3멸성제를 깨달아 앎으로써 이 구할 것의 도에 사실대로 깨달아 들어가 온갖 법에 생각․분별․희론의 경계를 뛰어넘어서, 8지(支)의 성도(聖道)와 서로 응하여 바른 소견[正見)과 바른 선정[正定]을 닦아 익히므로 괴로움이 없어지고 도에 나아가는 성제(聖諦)를 깨달아 알게 되나니 부처는 다른 이름으로 제4제(第四諦)를 삼았느니라.
모든 부처님이 이 괴로움을 알고, 괴로움의 원인을 끊고 괴로움 없는 이치를 깨닫고는 도를 닦으며 괴로움․괴로움의 원인․
괴로움의 멸 및 괴로움 없는 데로 나아가는 도를 베풀어 놓으셨느니라. 그러나 괴로움은 본래 없는 것이지만 세속적으로 이름을 붙여 놓은 것이니라.
무명(無明) 등의 일체가 다 무지(無智)로 인연할 뿐이니라. 왜냐하면 무지에는 작은 반연도 가히 취할 것이 없으며, 증(證)할 것이 없으며, 광명 있을 것도 없으며, 깨달아 알 것도 없으며, 또한 얻을 것도 없느니라.
그 가운데 무엇이 있겠는가? 일체가 다 허망하고 무너지는 법이라 결심함이 없느니라. 그 가운데 만일 실물이 있다고 내세우면 저들이 곧 세속의 상법(常法)에 집착할 것이다. 만일 분별 없다는 데 집착하면 저희들은 곧 끊을 것에 집착하리라. 그러므로 괴로움에 분별을 내지 말고 지혜로써 무지의 자성이 곧 괴로움의 자성인 줄을 비추어 보아라. 무명과 서로 응하는 까닭이니라. 무명이 또한 물(物:경계)과 서로 응하지 않나니 서로 응하지 않으므로 저것도 또한 없는 것이니라. 저것이 서로 응하지 않으므로 무명이 분별도 아니며, 분별 아닌 것도 아니니, 만든 것도 아니며, 없어지는 것도 아니며, 또한 만드는 자도 없나니 시설해 만드는 자를 얻을 수 없는 까닭이니라.
무변장엄아, 이것이 모든 보살이 무명의 자성을 깨달아서 밝은 법을 따르는 문이니라. 이 문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체 무명의 어둠을 놓아 버리고 눈앞의 밝은 법에 수순한 줄을 알게 되므로 보리 부분법[菩提分法]을 잘 닦아 익혀 모든 진리를 깨달아 알게 되느니라.
이 보살들은 이 법문에 능히 청정함을 얻나니, 말하자면 불생(不生)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에 청정하며, 반연하지 않으므로 괴로움의 원인[集]에 청정하며,
괴로움이 다함으로 말미암아 없어짐의 이치에 청정하며, 닦아 익힘으로 말미암아 도에 청정하며, 믿음이 평등하므로 도가 곧 평등하나니 이와 같이 모든 법의 다른 이름을 알아두어라. 알고는 마땅히 끊고 깨닫고
닦을지니라. 만일 여래의 말을 능히 이해하면 그는 곧 널리 알 것이며 그는 곧 따라 끊을 것이며, 그는 곧 깨달을 것이며 그는 곧 닦아 익히리라. 그러므로 성자가 이렇게 알고는 온갖 법에 집착하지도 아니하고 놓아 버리지도 아니하며, 곧 4제 법문에 편안히 머무느니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이 분별이 없으며 또 자라남[增長]도 아니며 쌓아 모임[積集]도 아니니라. 성자는 사실대로 잘 앎으로써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며 희론을 행하지 않으며, 능히 사실대로 보고 훼방하지 않고 집착하지도 않으며, 도로 말미암아 끊을 것을 끊으므로 모든 선법에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희론이 없나니 하물며 불선법이랴.
분별과 서로 응하므로 다시 법과 비법을 끊음에 머무르지 않느니라. 만일 널리 끊을 줄을 알면 곧 법의 얽매임[結]과 비법의 얽매임이 없느니라. 그가 능히 얽매임의 법이 허망한 줄을 알면 이 허망한 법이 비어서 있는 것이 없나니 이것이 그들이 들어갈 성제문(聖諦門)이니라. 이 문으로 말미암아 사랑하지도 않고 성내지도 않으며 괴로움과 즐거움을 놓아 버린 평등한 마음을 증득하므로 능히 모든 번뇌의 그물을 끊고 바른 도에 편히 머물러 저 언덕에 이르러서 법의 자성을 증득하여 나고 듦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마땅히 온갖 법을 관하라. 본성이 다 공하며 자성이 적정하여 지은 자가 없나니 모든 법이 실로 번뇌와 서로 응함도 아니며, 서로 응하지 않음도 아니니라. 저 자성이 없는 법 가운데 마땅히 집착하지 말며, 또한 성(性)과 성 아닌[非性] 것을 여의고 분별을 일으키지 말지니라.
이미 능히 인연이 청정한 줄을 알았거든 마땅히 일체 인연으로 난 법을 희론하지 말지니라. 저 인연의 성이 공하여 끝내 청정하기 때문이니라. 이와 같이 인연이 서로 응하는 것이 아니며 모든 법이 서로 인연함이 지은 것도 없으며 행함도 없으며 하는 것도 없느니라. 이렇게 생각하면 온갖 법이 서로 공한 까닭에
자성이 없으며 의지함도 없고 머무름도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이 가운데 잘 깨달아 들어가면 곧 능히 부서지지 않을 끝없는 광명의 청정 법문을 길러내어 거두어 잡아들이므로 마땅히 청정함을 얻으며, 희론이 없으므로 마땅히 광명을 얻으며, 번뇌의 부림을 초월하여 집착함이 없으므로 마땅히 벗어남을 얻으리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을 오직 이름과 모양[名相]으로 열어 보여 연설할 뿐이니라.
어떤 것이 ‘이름과 모양’이냐? 모양은 네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모든 색상이요, 이름은 일체의 물질이 아닌 온(蘊) 이니라. 이와 같은 이름과 모양은 일체가 다 허망하여 실답지 않건마는 뒤바뀐 생각으로 인하여 집착하여 혹은 ‘물질이 나[我]다, 물질이 나의 것이다’라고 모양을 분별하므로 이름 붙여 말함이 있느니라. 이와 같이 이름과 물질 둘이 다 실답지 않아서 모두가 허망하여 무너지는 법이라, 꼭두각시 같고 꿈과 같으며 물질 자체가 진실치 못한 것이 꿈에 본 것과 같으며, 느낌[受]․생각[想]․지어감[行]․의식[識]의 4온(蘊)도 진실하지 않으니 다만 세속 문자로써 내세울 뿐이니라.
이렇게 알 때에 괴로움이 있음을 보지 못하며, 실다운 이치로 말미암아 반연함이 없고, 반연이 없으므로 마음에 있는 바가 없고, 있는 바가 없으므로 무엇이 저 열반과 서로 응할 것이 있겠느냐? 이로 말미암아 능히 열반계에 생각[想]과 앎을 초월하는 멸함을 얻느니라.
무변장엄아, 3계는 상과 작의(作意)에서 생긴 것이다. 그러므로 3계가 허망하다 말하며, 상과 작의도 또한 진실함이 아니니라. 저 온갖 상은 곧 물질의 집착이며, 온갖 작의는 다 느낌․생각․지어감․의식과 서로 응하느니라. 모든 법의 본성은 또한 서로 응함이 없으며 또한 서로 응함 아님도 아니며, 상도 아니며 또한 작의도 아니니 상과 작의의 본성이 다 공이며, 온갖 언설(言說)도 모두 허망하여 다만 거짓 시설이니라. 자성으로 하여금 적정하게 하라.
무변장엄아, 모든 법의 본성을 붙인 이름으로 분별한 까닭에 이러한 말이 또한 다 평등하니라.
무변장엄아, 이 법 가운데 실제(實諦)를 증득할지니 모든 보살도 마땅히 깨달아 알지니라. 말하자면 ‘모든 여래는 온갖 번뇌의 부림을 다 놓아 버린 까닭에 그 연설하신 것을 끝내 헛되이 버려서는 아니 된다’고. 너희들은 잘 생각하여 집착함 없이 온갖 법에 분별을 내지 말고, 모든 희론을 여의고 온갖 법이 자성이 없는 줄을 깨달아서 중생을 가엽게 여기는 생각을 일으키며, 이러한 법문에 깨쳐 들어가서 일체를 위하여 열어 보여 연설할지니라.
어떤 법문인가? 말하자면 ‘무명 등 모든 유위법(有爲法)을 알고 지견(智見) 등 모든 무위법(無爲法)을 깨달으며, 두루 청정하게 일체 유위․무위․무희론지(無戱論智)에 깨쳐 들어가서 수(數) 아니면서 수에 들어가며, 수 아니면서 수에 머물러서 이와 같은 수 아닌 법에 수순하므로 무위․청정 법문을 증득하며, 총지[遍持] 광명지혜를 얻어서 모든 법을 거두어 잡아 지니어 잃어버리지 않게 하며, 능히 지혜의 방편선교로 널리 중생을 위하여 모든 법을 연설할지니라.
무변장엄아, 이 모든 보살들이 다라니문에 들어가는 것은 이 문으로 말미암아 광대한 차별지혜를 발생하여 또한 능히 모든 법의(法義)를 연설하는 선교지(善巧智)를 일으킬지니라.
무변장엄아, 이 가운데 어떤 것을 다라니문이라 하는가? 이 보살이 모든 법 가운데 능히 총지 방편선교를 얻나니, 무변장엄아, 이 가운데 보살이 변청정(邊淸淨) 선교지에 머물러서 변재를 행하여 의각혜(義覺慧)로 말미암아 모든 법 본연의 자성을 관찰하느니라. 그러나 온갖 법 자성이 머무른 바 없으며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으며,
건립함도 없고 끝없이 건립함을 말로 나타낼 수 없지마는 다만 세속의 말로 연설할 뿐이니라.
모든 법 본연의 자성은 모두 말로 표현할 수 없나니,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문자로 표시할 수도 없으며, 문자가 청정하여 공용(功用)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의 본성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니라. 온갖 법이 다 이와 같이 조작도 없고 일어남도 없고 모양도 없이 청정하므로 다만 허공과 같다는 모양으로 열어 보이고 연설하나니, 이것이 곧 모든 법의 문 없는 문이니 문이 청정하므로 끝내 물듦이 없으며 또 물듦을 따르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이 끝내 난 것도 아니요 일어남도 아니며 법 자성이 또한 생기(生起)함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지니라.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이 말씀하신 온갖 법의 자성이 성(性)이 없나니, 또한 이 제법무성(諸法無性)에 집착하지 말라. 이것이 모든 보살의 집착 없는 다라니문이니라. 모든 보살문의 청정이 되는 까닭이니라. 이와 같이 온갖 법을 연설할지니라. 형상이 있다는 것은 말한 바 형상이 곧 형상이 아니라, 지어짐도 아니요, 무너짐도 아니요, 사랑함도 아니요, 성냄도 아니니라. 그러므로 형상문(形相門)이라 함은 곧 문이 아니니라. 문이 청정하므로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형상 없는 청정법문에 들어가느니라. 이 형상문이 없는 것인 줄을 비추어 알기 위하여 유의(有義)로써 하지말고 이와 같이 지음[所作]이 없으므로 형상 없는 데 들어간다고 선설할지니라.
무변장엄아, 이와 같이 말한 형상 없는 문은 다라니의 청정을 위하므로 굴리느니라. 무변장엄아, 말한 바 문이라 함은 마치 허공과 같으니라. 온갖 법이 허공에 의지하여 나고 멸함이 있나니 저 나고 멸함이 성(性)이 평등하니라. 이렇게 관할 때에 생멸이 없으며 거두어 줄 것이 없나니 온갖 법을 마땅히 이렇게 알지니라.
온갖 법이 또한 거두어 줄 것이 아니며, 거두어 줌 아님도 아니며 등(等)도 아니며 등 아님도 아니며 아무 것도 얻을 것이 없느니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이 형상문을 깨달아서 무상문(無相門)의 청정을 얻기 위하므로 열어 보여 연설하느니라.
무변장엄아, 모양이 없다고[無相] 한 것은 말하자면 신(身)과 신의 시설[身施設]이 없으며 이름[名]도 없고 글귀[句]도 없고 또한 시현도 없느니라. 이 교의를 잘 알지니라. 저 형상이 없다 함은 허공과 같음이니 허공이란 것은 또한 허공과 허공을 보여 말할 것이 없느니라. 이것이 무명이 명(明)에 수순하는 지력취(智力聚)의 법문이니라. 보살이 능히 다라니 이취방편(理趣方便)을 증득하면 그 증득하여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쟁론(爭論)이 없게 되고 잊어버림[忘失]이 없으며 끊임없는 비밀한 말[無斷秘密語言] 다라니문에 따라 들어가게 되느니라. 마치 무열뇌(無熱惱)라고 이름하는 용이 큰비를 퍼부어 끊임없는 듯하니라. 무변장엄아, 내가말한 다라니라는 것은 어떤 구의(句義)인가?”
무변장엄보살은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다라니라 함은 곧 이것이 모든 법에 수순하는 비밀 방편의 붙인 이름[仮名]이며, 생각을 따라 총지하는 업(業)이며, 법을 설하는 어구(語句)이니 지혜의 전일(專一)한 힘으로 말미암아 이러한 다라니 수(數)에 들어가게 되며, 선각혜(善覺慧)로써 한량없고 끝없는 보리의 힘을 받아 지니게 되나이다.
세존이시여, 이 다라니문은 이것이 대허공(大虛空)이며, 이것이 대방광(大方廣)입니다. 이 뜻으로 능히 널리 연설하오며 평등을 말함으로 말미암아 능히 거두어 주므로 명자(名字)가 교법을 따라 교묘하게 열어 보여 널리 유포하나이다.
문자의 차별에 원만함을 얻으므로 변재에 통달하여 성취하게 되며 뜻을 잘 관찰하고 교묘하게 말함으로 말미암아 의변재(義辯才)에 원만을 얻으며 모든 법을 결정하여 잘 열어 보이므로 법(法) 변재에 원만함을 얻어서 중생을 불쌍히 여겨 큰 자비로써 거두어 잡아들이며, 거두어 잡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차제로 길들여 청정을 얻게 하고 모든 희론을 여의고 능히 평등한 법을 말하게 되나이다.”
세존이 이 다라니의 비밀 방편법문을 말씀하실 적에 한량없고 끝없는 선교의(善巧義)가 부처님 입에서 나왔다.
그때에 부처님께서 무변장엄보살에게 말씀하셨다.
“말하자면 문이란 것은 여래의 일체지지문(一切智智門)이라는 말이다. 이 가운데 말로 말미암아 온갖 법을 연설하느니라. 여래는 끝없는 청정과 최고[究竟] 청정의 자연지견(自然智見)에 머물러서 집착함이 없고 건립할 바 없는 데서 광대 심심(甚深)한 법을 흘러 내느니라. 무변장엄아, 여래가 일찍이 온갖 법이 다 불법이라고 말하였나니 모든 법에 능히 잘 깨달아 알면 불법이라 이름하리라.
모든 법의 본성이 불법과 같으니라. 그러므로 모든 법이 다 이 불법이라고 하느니라. 능히 법과 법 아닌 것을 깨달아 앎으로써 능히 온갖 법을 깨달아 앎이니라. 이것은 다라니문으로서 능히 온갖 법에 널리 들어가나니 말하자면 언어․연설․담론(談論)이다. 일체의 언어․연설․담론이 모두 문자(文字)로서 표시하여 연설하느니라.
이 가운데서 문자는 아자(阿字)를 머리로 하고 하자(何字)로 끝을 삼나니, 마치 태(胎)에 들어 태를 받고 태를 지니는 것이 어머니를 근본으로 삼는 것과 같으며,
또는 종자가 자라나게 됨을 아버지를 머리로 삼는 것과 같으며, 또는 5온(蘊)이 쌓여 모여 남[生]으로 머리를 삼고 다음에 나머지의 각기 다른 여섯 감관이 차례로 이룩되듯이 자모(子母)가 머리가 되어 일체 문자의 차별상(差別相)이 어울려서 이룩되듯이 자모가 머리가 되어 자라나나니, 말하자면 ‘아’자가 머리가 되고 ‘하’자가 끝이 되어 나머지 모든 글자가 그 중간에 있어서 자모에 따라 서로 응하고 어울려서 이룩되나니, 이것이 곧 능히 연설․언어․다라니문에 들어가게 됨이니라.
또 마땅히 일체 행법(行法)이 다 무너져 없어지듯이 저 문자 서학(書學)이 이룩되었다가 곧 없어지는 줄을 깨달아 알지니라. 이와 같이 일체의 유지(有支:有爲法)가 되었다가 곧 없어지는 줄을 깨달아 알지니라. 이와 같이 모든 법이 화합하므로 이것과 저것이 화합하지 않으면 무너져 없어지느니라. 이와 같이 두 가지가 서로 화합하여 일체 생명계(生命界)의 애결(愛結)을 건립하느니라. 또한 이 두 가지가 화합하므로 일체 유위(有爲)의 모든 법을 건립하느니라.
이와 같이 관찰하므로 차츰 능히 무작(無作)법문을 깨끗이 하며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생멸(生滅)을 연설하는 다라니문에 들어가서 모든 보살로 하여금 방편선교에 빨리 원만함을 얻게 하나니, 마치 자모에 ‘아’자가 머리가 되고 ‘하’자가 끝이 됨과 같으니라. 이렇게 모든 글자가 만들고는 마땅히 언어․연설․담론으로써 일체 비밀 언사(言詞)에 잘 들어가며 또는 무장애법을 깨달아 알아서 열어 보여 연설하느니라.
무변장엄아, 마치 자모가 ‘아’자로 머리를 삼아서 나머지 일체 문자를 분별하여 만들고는 뜻을 지어 서로 이어서 써들어갈 적에, ‘하’자 뒤에는 다시 문자로 내세울 것이 없는 것과 같으니라. 이 두 가지 작용으로 말미암아 능히 일체 의사를 표현하게 되느니라.
저 두 가지의 분별이 진실 됨이 없느니라. 저 진실에는 적은 문자도 없으며 본연의 자성이 또한 분별과 분별 아님이 없으며 그 가운데 또한 조금이라도 지을 것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은 지혜로써 알게 되나니 이 지혜가 다 문자로 좇아 건립되므로 생기나니, 이 문자가 성취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저 지혜도 형상 얻을 것이 없느니라. 왜냐하면 저 진실에는 형상이 없나니 이러한 형상 없는 데 들어감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지을 사업을 놓아 버리며, 지을 바가 없으므로 일체 유위의 일을 놓아 버리느니라.
무변장엄아, 이것이 다라니의 청정선교 총지법문이니라. 만일 모든 보살이 이 법을 배울 때에 일체 어리석음 없는 사업을 일으켜 중생을 위하여 바른 법을 연설하여 모자람 없게 하며, 모든 생각의 덮임과 집착심에 머무르지 않고 또는 능히 생각과 작의(作意)를 여의고 능히 모든 법 깨달음의 지혜에 들어가서 끝없는 지혜 이취선교(理趣善巧)를 증득하느니라.
무변장엄아, 모든 보살이 널리 이름[名]을 취하고는 온갖 법이 오직 온갖 쌓아 모은 언설[言說]에 의하여 일어난 바 이름이 있을 뿐, 진실이 없는 줄을 깨달을지니라. 이렇게 아는 자는 마땅히 다라니문 이취선교에 들어가게 되느니라.
어떤 것이 다라니문 이취선교에 들어감이냐? 온갖 이름이 머무르는 곳이 없어서 모든 법의 안이나 바깥이나 중간에 머무르지 않아 일체처에 도무지 얻지 못함인 줄 아는 것이니라. 다만 쌓아 모은 온갖 언설에 의하여 거짓 시설함이니 저 시설한 이름에 사실대로 여실구(如實句)를 깨달을지니라. 이 여실구로써 마땅히 온갖 법이 이름도 없고 말도 없는 줄을 깨달아 알라. 이것이 모든 부처님의
두려움 없는 힘의 경지니라.
저 온갖 법에 마땅히 이 문으로써 열어 보여 연설할지니라. 여래가 말한 바 온갖 법은 일성(一性)도 아니며 이성(異性)도 아니니 모든 법이 일성․이성이 없는 까닭이니라. 이 온갖 법이 난 것도 아니요 있는 것도 아니니, 이렇게 모든 법이 또한 공(空)이라고 베풀어 보이느니라.
법이 만일 공일진대 그것이 곧 무상(無相)이요, 만일 무상일진대 곧 원하여 구함이 없고[無願求] 만일 법이 공․무상․무원일진대 곧 알지 못할 것․변계[遍知]하지 못할 것이니 마땅히 있느니 없느니 말하지 말지니라. ‘있다, 없다’ 말하는 것은 다만 말뿐이니라. 그 가운데 집착을 내지 말지니라. 왜냐하면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온갖 법에 집착하지 않는 이것이 가장 깊은 이치[眞勝義]라’ 하느니라. 만일 집착이 있는 자는 이 집착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에 집착을 내나니 이와 같은 집착이 일체가 다 공이라, 이것은 실패[敗壞]의 법이니 오직 허망한 희론의 분별이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마땅히 모든 법을 연설할 적에 모든 법을 보여 말할 것이 없는 줄을 관할지니라. 어찌 이 가운데 능히 설하는 자가 있어서 남을 위하여 말하겠느냐?
무변장엄아, 이 청정법은 모든 여래에게서 연출된 것이니 능히 깨달아 아는 자는 매우 기특하니라.
무변장엄아, 너희들이 이제 내 앞에서 이러한 법을 들어 능히 깨달아 알고 청정한 믿음에 머물러서 능히 잘 이해하는 자가 많다 하더라도 후세에 중생이 이 법 가운데서 능히 잘 깨달아 알기는 드물리라. 오직 오늘 나의 처소에서 큰 서원을 세우기를 ‘바라옵건대 오는 세상에 모든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기 위하여 여래의 교법을 받아 지니리다’라고 하였거나, 혹은 지난 옛적에 여래의 처소에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고 깊이 믿음을 내어 법을 좋아하고 원을 발하여 저 깊은 법의
이취선교에 들기를 원한 자는 제외하노라. 이런 보살은 항상 능히 다라니법을 얻게 되느니라.
무변장엄아, 옛적에 여래를 공양하고 다시 한량없는 부처님을 만나서 받들어 섬기고 공양하여 저 깊은 법의 인연 이취에 깊이 믿어 이해하는 자와, 법을 잘 구하여 깊은 이취를 이해하는 자는 나아가는 행이 깊고 넓어서 대승을 구하는 자지만, 성문승(聲聞乘)의 사람은 3계를 여의려고 깊은 법에 부지런히 수행하는 자이니 이러한 사람들은 일찍이 이런 깊은 법을 듣지 못하였느니라.
무변장엄아, 여래가 이러한 중생을 이익 되게 하고 안락하게 하려고 깊고 넓으며 한량없고 보기 어렵고 알기 어려운 불종지(佛種智)를 증득하게 하기 위하여 다시 매우 깊은 법을 연설하나니, 이것은 어리석은 사람은 들음이 없이 집착하며 법을 구하지 않는 자를 위해서이니라. 이치와 같이 수행하여 착한 뿌리가 갖추어져 작은 허물에도 크게 두려워하여 모든 공포에서 벗어나기를 구하는 이런 사람들의 의지할 곳이니라.
무변장엄아, 여래가 이제 너희들 천상․인간 세간을 위하여 항상 법을 연설하되 싫증을 내지 않음은 여래가 지나간 옛날 보살도를 행할 적에 무량 억 겁에 부지런히 이 깊은 법을 닦아 배우고, 이미 닦아 배우고는 방편으로 그 공덕을 돌이키되 ‘어떻게 하면 중생을 위하여 최상 미묘한 법의 바퀴를 굴리며 중생을 위하여 위없는 큰 지혜를 시현하여 온갖 지혜의 종성(種性)이 끊이지 않게 할까?’라고 하였느니라.
무변장엄아, 이것은 여래의 지나간 날의 원력으로 말미암아 온갖 지혜의 종성이 끊어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는 위력으로 이 다라니구를 가지(加持)하여 매우 깊은 법을 연설하고 널리 유포하여 중생으로 하여금
불법 가운데 능히 깨쳐 들어가서 온갖 지혜의 종성이 끊이지 않게 하기 위해 이 모든 교법을 천명하여 널리 펴느니라.
무변장엄아, 너희들이 이제 여래를 따라 배우고자 하거든 법 구하는 중생에게 열어 보여 연설하되 싫증을 내지 말지니라.
무변장엄아, 모든 보살이 들은 바 법이 있거든 대중 가운데 널리 온갖 법행(法行)을 열어 연설하라. 이것으로 말미암아 장차 불지(佛智)에 가까워지며 능히 빨리 다라니문을 증득하리라. 다라니를 증득함으로써 적은 공력으로 능히 광명을 드날리는 청정 법문을 받아 지니게 되리라.
무변장엄아, 온갖 법이 본성이 청정하니 만일 법의 본성으로는 저와 서로 응하는 것도 아니요 서로 응하지 않음도 아니며 화합으로 머무름도 아니요 화합 아님도 아니니라. 모든 법 가운데 법 있다고 할 것이 없나니 만일 있다는 것이 없으면 무엇으로 보여 말하겠는가? 오직 인(因)의 다함은 제하느니라. 인이 다함도 여의고 여의므로 곧 멸하느니라. 내가 중생이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하므로 온갖 법의 본연의 자성을 말하거니와 그곳에 인(因)이 없으므로 곧 인이 다함도 없느니라. 인이 다함도 없으므로 여읨도 없고 멸도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네가 여래의 말한 바 법이 이렇게 청정하다 관하라. 만일 법으로써 여래를 보는 자는 여래에게 청정치 못함을 볼 것이다. 왜냐하면 여래는 법도 아니요, 법 아님도 아니기 때문이다. 여래는 오히려 작은 법에도 머무르지 않거든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만일 비법에 머무른다면 그런 이치가 없느니라. 여래는 모든 표시하는 법을 뛰어 넘어서 베풀어 말할 수 없느니라. 일체의 언어가 다 청정한 까닭이니 그러므로 여래의 법은 가장 깊고 넓고 한량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이와 같이 여래는 물질[色]로 표시할 것이 아니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으로 표시할 것이 아니며
여래는 또한 물질이 다[盡]하므로 해탈함이 아니며,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이 다했다고 해탈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여래는 모든 표시가 끊어져서 물질 따위 법과 서로 응함도 아니며, 서로 응하지 않음도 아니요, 온갖 함이 있고 함이 없는 법에 다 해탈하여 분별을 일으키지 아니하고 희론이 없느니라.
여래는 색취온(色取蘊)과 서로 응하지 않으며, 또한 느낌․생각․지어감․의식의 모든 취온과 서로 응하지 아니하고 길이 일체 취온의 근본을 끊었으며, 또한 모든 법의 근본을 여의어서 희론이 없으며, 들어감도 아니요 나감도 아니며, 번뇌의 폭포수[瀑流]를 뛰어 건너서 위없는 부처님 지혜의 경계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머무르지 않음도 아니니라. 마땅히 ‘여래는 어떤 법에도 머무르지 않으며 취함도 아니요, 버림도 아니다’라고 말하라.
이 말과 같이 여래의 설법도 그러하니라. 여래가 모든 법과 서로 응하지 않으므로 여래의 법도 서로 응하지 않으며, 여래의 법과 같이 모든 법도 그러하니라. 여실한 이치에 의지하여 모든 법이 다 이러하므로 세존이 말하기를 ‘온갖 법이 다 이것이 진여(眞如)’라고 하느니라. 온갖 법과 불진여(佛眞如)가 둘이 없고 다름이 없으며, 같은 것도 아니요 다름도 아니니라. 여래는 분별 없는 법에 머무르나니[安住] 부질없는 생각[遍計]이 아닌 까닭이니라.
무변장엄아, 여래의 설법은 끝내 온갖 법을 뛰어난 것이 아니니라. 왜냐하면 어떤 법도 뛰어난 것이 없는 까닭이니라.
무변장엄아, 여래가 어느 때에 무상정등보리를 증득하였느니라. 그러나 그때에 법에 얻을 것이 없었나니 온갖 법과 그 법에 따르는 인연은 얻지 못할 것이므로 분별을 일으키지 않으며 법과 법 아닌 것과 작의(作意)라는 생각조차 일으키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 본성이 본래로 청정한 법성에 머무르지 않으며 또한 법이 있다고 주장하지도 않나니, 이와 같이 깨달아 알고 법을 간택할 때에 또한 깨달아 안다는 것과
간택한다는 생각이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이에 연설한 제일의구(第一義句)는 곧 이것이 여래의 법구(法句) 아닌 법구이니 법구가 청정한 까닭이니라. 이 뜻으로써 모든 보살이 일체의 법구 청정의 지혜를 얻으려면 이것으로 말미암아 능히 끝없는 이취다라니문에 들어가되 또한 어떤 법도 증득할 것이 없으며 오는 것도 아니요, 가는 것도 아니니라.
무변장엄아, 법구라고 말하지만 법구를 얻을 수 없나니 법구 아닌 법구인까닭이니라. 일체 법구를 마땅히 이렇게 알지니라. 이러한 모든 법구는 바로 여의어 버릴 법구이니라. 만일 여의어 버릴 법구일진대 이것은 허망의 법구이며, 만일 허망의 법구일진대 곧 여의어 버릴 법구이니라. 저 일체의 법구가 멸해 없어진[滅盡]구요, 만일 멸해 없어진 법구일진대 곧 진여(眞如)의 법구이며, 만일 진여의 법구일진대 곧 마지막[究竟] 법구이며, 만일 마지막 법구일진대 곧 열반구며, 만일 열반구일진대 곧 세속이 아니니 법구라고 내세울 수도 없으며 또한 보여 말할 수 없느니라.
무변장엄아, 한 법구라고 말한 것은 일체 선법․불선법에 평등하게 들어가느니라. 그 한 법구란, 말하자면 여읨[離]의 법구이니라. 저 여읨 가운데 어떤 법구도 있을 수 없나니 이것은 일체 법구가 마치 여읨의 법구나 또는 법구 가아니라는 것과 같나니 법구가 청정한 까닭이니라. 만일 법구가 청정하면 곧 열반이 청정하고 열반이 청정하면 곧 법구가 청정하리니, 이러한 법구는 다 말할 수 없느니라. 만일 말로써 법구를 드러내어 보인다면 그 말을 시방세계에 구하여도 얻지 못하리라. 누가 누구를 위하여 말하였는가? 그러므로 모든 언설이 다 공한 것이니라. 그것이 만일 공일진대 곧 뜻이 없는 것이니 그 가운데 희론과 분별을 내지 않을 것이니라.
이와 같이 모든 구의(句義)라는 것은 모두가 다 분별없는 법구이며 희론 없는 법구이니라.
그러므로 관행(觀行)을 닦는 자가 모든 법구를 찾아 관찰할 적에 마땅히 이것이 다 없어진 것[離滅]이요, 열반인 줄을 알지니라.
이러한 모든 법구가 열반과 다르지 않으며 또한 가히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니라. 그러나 다름 아님도 아니니 언설의 법구는 다 허망한 까닭에 청정구라고 하느니라. 말 잘하는 방편[善巧]으로 모든 법구를 표시하건만 실로 표시가 아니니라. 혹은 표시도 아니며 표시 아닌 것도 곧 중도(中道)에 머무름이니라.
만일 중도에 머무르면 곧 분별이 없나니 이 가운데 분별이 끊어지므로 이 법성에 평등하게 따라 들어갈 때에 작은 악행이라도 행할 것이 없나니 얻을 바가 없는 까닭이니라. 이렇게 행하지 않으면 또한 경계 따라 행하지 않으며 어디에도 치우친 행[等近行]을 하지 않느니라. 만일 이렇게 행하면 모든 부처님이 ‘보살승(菩薩乘)’이 된다고 말씀하시느니라. 어떤 법도 행할 것이 없을 적에 그는 보살지(菩薩地)를 닦아서 위없는 청정한 다라니에 머무르는 까닭이니라.
무변장엄아, 나는 이제 다라니 법구를 말하리니 이 법구로 말미암아 모든 보살로 하여금 다리를 얻어서 끝없는 법장을 열어 보여 이런 것이 다툼 없는 경지[無諍地]에 머무른다고 말하나니, 능히 모든 이론(異論)을 꺾어 깨뜨리는 것이 가장 적정한 까닭이며, 널리 설법하는 까닭이니라. 어떤 것이 저 법문 다라니구이냐?”

다지타아예 미아예 우계 오가 바뎨 아 로계 로가 바뎨바라 볘
哆姪他若曳微若曳鄔計烏迦上筏底▼(口+路)計▼(口+路)迦上筏底鉢囉二合上
바라 바 바뎨 나리샤니 이나리샤담바뎨 가테 가타바뎨 수달니
鉢囉二合上婆上筏底娜唎設儜儞那唎設曇筏底遏替十一遏他筏底十二戌闥儜
비수달니 바리수달니 아리 야 아리 야바뎨 오다라니 산
十三鞞戌闥儜十四鉢唎戌闥儜十五吃利二合十六吃利二合耶筏底十七嗢哆囉尼十八

다라니 마하비샤예 마하비샤야바뎨 아노산디 아바라 뎨산
哆囉尼十九摩訶毘社曳二十麽訶毘社耶筏底二十一阿怒珊地二十二阿鉢囉上二合底珊
디 유가 마캄니다 싣디 싣다가뎨 싣다 가타 바뎨
地上二十三庾伽上磨▼(阝+欠)㮈陀上二十四悉地二十五悉駄遏挮二合二十六悉陀上遏他上筏底二十
마뎨 바라비 오다리 오다라바뎨 미마리 미마라노산디
麽底二十八鉢囉鞞二十九嗢哆唎三十嗢哆囉筏底三十一弭麽唎三十二彌磨囉怒散地
살례 살라바뎨 살라 노가뎨 사명 사마남바 미가뎨
十三薩黎三十四薩囉筏底三十五薩囉怒伽底三十六娑冥上三十七娑麽▼(口+藍)婆上弭伽底三十
가뎨 아미가뎨 아바라 뎨니바뎨 미사세 미사세바뎨
羯底三十九阿彌伽底四十阿鉢囉上二合底儞筏底四十一彌勢曬四十二彌勢曬筏底四十
아 마혜니 니마혜니 바라 마혜니 오 하오다라니 마라
阿上磨醯儞四十四儞磨醯儞四十五鉢囉二合磨醯儞四十六荷鄔哆囉嚀四十七磨囉
바나예 아 사세 아노파사세 아노가미 아바라 뎨가미
鉢娜曳四十八阿上勢鎩去四十九阿怒跛勢鎩五十阿怒伽迷五十一阿鉢囉二合底伽迷五十二
아가뎨 아나가뎨 가뎨미수다니 바리수뎨 강 갈차 체나니
阿伽帝五十三阿娜伽底五十四伽底弭戌駄儞五十五鉢唎戌第五十六薑去竭差二合掣娜儞
야뎨 마뎨바라 피뎨 마뎨비수다니 삼만다 노가뎨 삼만다
夜帝五十七麽底鉢囉二合避帝五十八麽底毘戌駄儞五十九三縵多怒竭帝六十三縵多
바리바례 삼만다비수다 니아노파아라 혜 아니아라 혜뎨
鉢唎縛黎六十一三縵多毘戌駄六十二儞阿怒跛仡囉二合六十三阿儞仡囉二合呬帝
혜나 라뎨 아라타 비수디바라몌 혜도니디산녜바라 피뎨
十四呬那囉梯六十五阿囉他二合毘戌地鉢囉冥六十六奚都儞地珊寧鉢囉二合避底
발라피다바뎨 비니샤자 예 피니샤자 야 노가뎨 아난다
十七鉢囉避
多筏底六十八毘儞設者二合六十九避儞設者二合怒羯帝七十阿難多
라뎨 아난다피아라 혜 마샤비수디 아노갈라혜 발라 갈
囉挮七十一阿難多苾仡囉二合七十二麽社毘戌地七十三阿怒竭囉奚七十四鉢囉二合
라하비수다니 아디야 다마 비갈뎨 마혜라비수타니 피디
囉荷毘戌駄儞七十五阿地耶二合引多麽二合毘竭帝七十六麽呬囉毘戌駄儞七十七苾地
야 노갈뎨 피디야 노산디 바리수다니
二合引怒竭底七十八苾地耶二合引怒散地七十九鉢唎戌駄儞八十

“무변장엄아, 이것은 다라니 표석(標釋)의 법구라, 모든 보살이 이 법구로 말미암아 능히 한량없는 부처님의 법장을 기억하며, 또한 능히 모든 중생을 위하여 다툼 없는 경지에 머무르는 법을 열어 보이고 연설하며, 다시 능히 일체 의구(義句)의 이취선교에 따라 들어가서 능히 한량없는 광대한 차별지혜의 깨달음[智覺]을 사무쳐 알고 그 원하는 바를 알아 다 원만하게 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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