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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216 불교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11권

by Kay/케이 2023. 1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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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 11

 

대방광불화엄경 제11권

동진 천축삼장 불타발타라한역
이운허 번역

17. 공덕화취보살십행품(功德華聚菩薩十行品) ⓛ

그때 공덕림보살마하살은 부처님 신력을 받들어 보살의 잘 항복 받는[善伏]삼매에 들었다. 그리하여 시방으로 각각 만 부처 세계 티끌 수 세계를 지나 그 밖에 있는 만 부처 세계 티끌 수의 부처님을 보았는데, 그 여래의 명호는 모두 공덕림이라 하였다.
때에 그 부처님들께서 공덕림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장하다. 불자여, 그대는 그 선복 삼매에 들 수 있었구나. 시방의 만 부처 세계 티끌 수 같은 부처님이 그대에게 신력을 가하셨기 때문에 그대는 그 삼매에 들 수 있으며, 그것은 또 노사나부처님의 전생 원력과 그 신력과 그리고 모든 보살의 선근의 힘이 그대로 하여금 매우 깊은 법을 널리 연설하고 또 일체의 지혜를 기르며, 중생들 성품을 분별하고 일체의 장애를 떠나 장애 없는 경계에 들며, 일체 방편을 성취하고 일체종지를 성취하며, 모든 법을 깨닫고 모든 근성을 잘 알고 일체 법을 들어 지니게 하려는 것이니 이른바 보살의 열 가지 행이니라. 불자여, 그러므로 그대는 부처님 신력을 받들어 묘한 법을 두루 연설해야 하느니라.”
그리하여 그 부처님들은 곧 공덕림보살에게 장애가 없는 법과 편안히 머무르는 법, 스승이 없는 법, 우치가 없는 법, 난잡하지 않은 법, 청정한 법, 한량없는 법, 가장 뛰어난 법, 번뇌 없는 법, 물러나지 않는 법 등을 주었으니, 왜냐하면 그것은 그 삼매의 힘이기 때문이다.
그때 그 부처님들께서 각기 오른손을 내밀어 공덕림보살의 정수리를 어루만졌다. 그러자 공덕림보살은 곧 삼매에서 일어나 여러 보살들에게 말했다.
“불자들이여, 보살의 행업은 불가사의하여 광대하기 법계와 같고 마침내는 허공계와 같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보살마하살은 삼세 부처님의 행하는 법을 배우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행인가. 보살마하살은 열 가지 행이 있는데 그것은 삼세 부처님의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열 가지란 이른바 첫째는 기뻐하는 행이요, 둘째는 이롭게 하는 행이며, 셋째는 성냄과 원한이 없는 행이요, 넷째는 다함이 없는 행이며, 다섯째는 우치와 산란을 떠난 행이요, 여섯째는 잘 나타나는 행이며, 일곱째는 집착이 없는 행이요, 여덟째는 존중하는 행이며, 아홉째는 좋은 법의 행이요, 열째는 진실한 행이니, 이것이 그 열 가지 행(行)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기뻐하는 행인가. 이른바 그 보살이 큰 시주가 되어 소유한 모든 것을 다 보시할 때에, 평등한 마음으로 일체 중생들에게 보시하되 보시한 뒤에는 후회함이 없고 그 과보를 바라지 않으며, 이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다만 일체 중생을 구호하고 일체 중생을 포섭하며,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하고 부처님의 전생의 행을 배우며, 부처님의 전생의 행을 바로 기억하고 부처님의 청정한 전생의 행을 얻으며, 부처님의 전생의 행을 받들어 지니고 부처님의 전생의 행을 나타내며, 부처님의 전생의 행을 두루 연설하고 중생들로 하여금 괴로움을 떠나 즐거움을 얻게 하려는 것뿐이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기뻐하는 행입니다.
그 보살이 기뻐하는 행을 닦을 때는 일체 중생들이 기뻐하여 그를 사랑하며 공경하는 것입니다. 만일 어떤 나라에 빈궁한 곳이 있으면 그는 그곳에 태어나되 호사스럽고 큰 부자로서 재보가 다함없어, 잠깐 동안 무량무변한 중생들이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인자님, 우리는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습니다, 자비를 베풀어 생명을 건져 주십시오’라고 하면 그는 잠깐 동안에 그에게 필요한 것을 주어 다 만족하고 기쁘게 합니다.
그러나 그 보살은 그 요구 때문에 그것을 번거롭게 여겨 괴로워하지 않고 다만 위없는 자비심을 내어 보시하되 싫증이 없으며, 그들을 늘 오게 하여 그들이 오면 칭찬하고 더욱 기뻐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지금 좋은 이익을 얻었다. 이 중생들은 내 복밭이요, 내 착한 벗으로서 내가 청하거나 구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와서 가르쳐 내 마음을 일으켜 불도를 수행하게 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렇게 배우고 닦아 저들을 다 기쁘게 하리라.
나는 삼세에서 닦은 공덕으로 청정한 법신을 빨리 이루고 신력이 자재하여 중생들의 요구를 따라 모두
기쁘게 하리라. 그리고 그 공덕으로 한량없는 그들을 다 정각을 이루게 하여 제도해 해탈시키고 끝내는 남음 없는 열반을 얻게 하리라.
나는 먼저 일체 중생의 모든 소원을 만족시키고 그 다음에 나는 등정각을 이루어, 나라는 생각[我想]과 중생이라는 생각[衆生想], 내 것이라는 생각[我所想], 수명이라는 생각[壽命想], 여러 가지라는 생각[種種想], 복가라(福伽羅)라는 생각, 짓는 이라는 생각[作者想] 등을 버리고, 법계와 중생계는 공(空)이어서 차별이 없음을 알고, 탐욕을 여의는 법과 진실이 아닌 법, 소유가 없는 법, 견고하지 않은 법, 의지할 것 없는 법, 지을 것이 없는 법 등을 모두 버리자.’
보살이 이렇게 관찰할 때, 그는 보시하는 이도 보지 않고 그것을 받는 이도 보지 않으며, 그 재물도 보지 않고 복밭도 보지 않으며, 업도 보지 않고 과보도 보지 않으며, 큰 과보도 보지 않고 작은 과보도 보지 않습니다.
보살은 삼세를 관찰하고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엾어라. 중생들은 우치에 덮이고 번뇌에 얽매어 항상 생사의 고통바다를 흘러 다니면서 견고하지 않은 법에서 견고함을 얻지 못하고 있구나. 나는 모든 부처님이 배운 것을 다 배워 중생들을 이롭게 한 뒤에 등정각을 이루고, 일체 중생을 깨우쳐 모두 청정하게 하고 적멸한 이치를 따라 삼세의 법을 관찰하리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첫째 기뻐하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둘째인 이롭게 하는 행인가. 이른바 그 보살은 계율을 깨끗이 지녀, 빛깔[色]ㆍ소리[聲]ㆍ냄새[香]ㆍ맛[味]ㆍ촉감[觸]ㆍ법[法] 등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모든 중생을 위해서도 집착하지 않는 법을 연설하며, 인간과 천상의 훌륭하고 부귀한 집에 나기를 구하지도 않고 이익을 구하지도 않으며, 단정하기를 구하지도 않고 제왕이 되기를 구하지도 않습니다.
그리하여 다만 깨끗한 계율을 굳게 지키면서 생각하기를 ‘나는 깨끗한 계율을 지녀 일체의 얽맴과 번뇌의 맹렬한 불과 근심ㆍ슬픔ㆍ고뇌 등을 떠나, 중생들을 저버리지 않고 모든 부처님들을 기쁘게 하며, 끝내는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리라’라고 합니다.
보살이 이렇게 깨끗한 계율을 지닐 때, 가령 하루 동안에 무량 무수한 아승기의 큰 마왕이 각각 무량 무수한 아승기의 천녀들을 데리고 오는데, 그녀들은 모두 몸이 단정하고 얼굴이 뛰어나게 묘하며, 요염한 자태는 사람들의 마음을 매혹시키며, 또 일체의
오락 도구를 가지고 와서 보살의 도심(道心)을 어지럽히려 합니다.
그때 그 보살은 생각하기를 ‘이 다섯 가지 쾌락은 도법을 방해하고 위없는 보리까지 장애하는 것입니다’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보살은 한 생각의 욕심까지도 내지 않고 그 마음이 깨끗한 부처님과 같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방편으로 중생을 교화하는 일만은 거기서 예외입니다. 보살은 마음에 보살의 일체 종지를 버리지 않고 바른 생각을 굳건히 하여 다섯 가지 욕심의 인연 때문에 한 가지의 나쁜 생각을 일으켜서도 중생들을 괴롭히지 않습니다. 그는 신명을 버리는 일이 있더라도 남을 해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남을 해치는 일이란 그에게는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보살은 부처님을 뵈온 뒤로는 일찍 한 번도 욕심을 일으킨 일이 없는데, 하물며 실제로 행했겠습니까. 그런 일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그때 보살은 생각합니다.
‘중생들은 오랜 동안 생사 가운데 있으면서 오욕을 생각하고 오욕을 행하며 오욕을 즐긴다. 그리하여 그 마음은 항상 오욕의 경계에 흘러 다니고 오욕에 빠져 있어 거기서 헤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렇게 공부해야 한다. 즉, 모든 마왕과 그 권속 천녀들과 중생들을 위없는 계율에 머물게 하고 청정한 계율에 머문 뒤에는 물러나지 않는 지위와 일체 종지와 등정각과 내지 무여열반을 얻게 하리라. 왜냐하면 이것은 우리의 할 일이요, 모든 부처님이 이렇게 공부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는 온갖 나쁜 행과 나[我]라고 헤아리는 무지를 버리고 모든 부처님의 평등하고 깊은 법을 관찰하며, 일체 지혜를 얻어 중생들에게 설법하여 뒤바뀐 생각을 끊어 없애고, 중생을 떠나 뒤바뀐 생각이 있지도 않고 뒤바뀐 생각을 떠나 중생이 있지도 않으며, 뒤바뀐 생각 속에도 중생은 없고 중생 속에도 뒤바뀐 생각은 없으며, 뒤바뀐 생각이 곧 중생도 아니요 중생이 곧 뒤바뀐 생각도 아니며, 뒤바뀐 생각은 안의 법도 아니요 뒤바뀐 생각은 또 밖의 법도 아니며, 중생은 안의 법도 아니며 중생은 또 밖의 법도 아닙니다.
모든 법은 다 허망하여 진실하지 않고 잠깐도 머무르지 않으며 견고하지도 못합니다. 그것은 마치 요술과 같아서 우치한 범부를 속이는 것이니, 모든 법은 꿈과 같고 번개와 같은 것임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만일 이렇게 알면 그는 생사를 통달하고 보리를 완전히 얻어, 제도하지 못한 이는 제도하고 해탈하지 못한 이는 해탈하게 하며, 조복하지 못한 이는 조복하게 하고 고요하지 못한 이는 고요하게 하며, 안온하지 못한 이는 안온하게 하고,
번뇌를 떠나지 못한 이는 번뇌를 떠나게 하며, 청정하지 못한 이는 청정하게 하고, 열반을 얻지 못한 이는 열반을 얻게 하며, 즐거움을 얻지 못한 이는 즐겁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생각합니다.
‘나는 세간의 온갖 일을 버려 여래를 다 기쁘게 하고 모든 불법을 원만히 성취하여 위없이 가장 뛰어난 법 안에 편히 머무르자. 그리하여 일체 중생을 평등하게 바로 관찰하고 모든 법을 분별해 잘 알아 온갖 악을 멀리 떠나고 허망을 아주 버리어, 모든 번뇌와 습성을 없애고 해탈하는 묘한 방편을 성취하고 무량무변한 변재를 모두 얻으며, 매우 깊고 공적한 지혜를 성취하리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둘째의 이롭게 하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셋째의 원한이 없는 행인가. 그 보살은 항상 인욕하는 행을 잘 닦아 스스로 겸허하고 남을 공경하며, 유순한 얼굴과 정다운 말로써 스스로도 해치지 않고 남도 해치지 않고 둘을 함께 해치지도 않으며, 스스로도 칭찬하지 않고 남도 칭찬하지 않고 둘을 함께 칭찬하지 않으며, 스스로도 옳다 하지 않고 남도 옳다 하지 않고 둘을 함께 옳다 하지도 않으며, 스스로 찬탄하지 않고 다만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중생들을 위해 설법하여 그들로 하여금 일체 악을 떠나게 하되, 탐욕과 분노와 우치ㆍ교만ㆍ산란ㆍ인색ㆍ질투ㆍ아첨ㆍ속임 등을 끊고 큰 인욕의 법에 편히 머물게 하리라.’
보살이 이런 청정한 인욕의 법을 성취하면, 가령 무량 무수한 중생이 있는데, 그 중생은 각각 무량 무수한 권속이 있으며, 그 낱낱 중생들은 각각 무량 무수한 머리를 변화해 가지고 그 머리에는 무량 아승기의 혀가 있으며, 그 혀는 무량 무수한 나쁜 소리를 다 내고 그 소리는 무량 무수한 욕설을 내어 보살을 헐뜯고 천대하며, 또 그 중생들이 각각 무량 아승기의 손에 무량 무수한 칼이나 막대기를 들고 그 보살을 때리며, 욕하고 해치기를 내지 무량 아승기겁 동안 쉬지 않는다 하더라도 보살은 그런 고초를 당할 때에도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만일 이런 고통을 당한다 하여 성내는 마음을 낸다면 그것은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며, 스스로 분명히 알지 못하고 스스로 고요하지 못하며, 스스로 선정을 닦지 못하고 스스로 진실하지 못하며, 스스로 그 몸을 사랑하는 것이니,
어떻게 저들을 기쁘게 하여 해탈을 얻게 하겠는가.’
그리고 그는 또 생각하기를 ‘나는 이 몸과 마음 때문에 한량없는 겁 동안 온갖 고뇌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거듭 자기를 격려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하고 또 마음을 잘 거두어 잡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위없는 법에 편히 머물러 중생들도 그 법을 얻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또 생각합니다.
‘이 몸은 공적한 것이어서 거기는 나[我]도 없고 내 것[我所]도 없으며, 진실한 성품도 없고 성품이 공(空)해 둘이 없으며, 괴로움도 즐거움도 다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모든 법이 공하기 때문이니, 나는 그것을 잘 알아 남에게 두루 설명해야 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이런 고초를 당하더라도 참고 견뎌야 할 것이니, 그것은 중생들을 가엾이 여기기 때문이요, 그들을 이롭게 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들을 안온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요, 그들을 포섭하려 하기 때문이며 그들을 버리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요, 또 그들로 하여금 물러나지 않고 끝내는 위없는 보리를 성취하게 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도 부처님의 행하신 법을 닦아야 한다.’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셋째의 원한 없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넷째의 다함없는 행인가. 그 보살은 부지런히 정진을 수행하나니 이른바 뛰어난 정진과 가장 뛰어난 정진, 제일의 정진, 큰 정진, 미묘한 정진, 위 되는 정진, 위없는 정진, 짝 없는 정진과 짝 없는 평등한 정진 등입니다.
그 보살은 탐욕에 흔들리지 않고 또 분노ㆍ우치ㆍ교만 해치려는 마음ㆍ인색ㆍ질투ㆍ혐오ㆍ원한ㆍ아첨ㆍ속임ㆍ부끄러움 없음 등에 의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모든 중생을 괴롭히려 하거나 심지어 한 중생이라도 그를 괴롭히기 위해 수행 정진하지 않는다. 다만 온갖 번뇌를 버리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모든 결박을 끊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일체의 습성을 버리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일체 중생을 분별하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중생들이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또 중생들의 번뇌의 습성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중생들의 갖가지 희망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중생들의 갖가지 경계를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중생들의 갖가지 근성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중생들의 마음의 활동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모든 법의 경계를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부처님의 진실한 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부처님의 평등한 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또 좋은 방편으로 삼세의 평등함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청정하고 평등한 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모든 불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한 방편으로 일체의 불법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부처님의 무량무변한 불가사의함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고 부처님의 큰 지혜와 좋은 방편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며, 중생들을 위해 일체 불법을 연설할 때 그 구절을 분별할 줄 알기 위해 수행 정진하는 것이다.’
보살이 이런 정진을 성취했을 때, 혹 어떤 사람은 그에게 말할 것입니다.
‘무량 무수한 아승기 세계에 중생이 있는데, 당신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중생을 위해 무량 무수한 아승기겁 동안 큰 무간 지옥의 고통을 갖추 받으면서도 그 중생들을 끝내 열반을 얻게 하겠습니까. 또 무량 무수한 아승기 부처님이 세상에 나오신다면 당신은 그 무량 무수한 아승기 중생들로 하여금 갖가지 즐거움을 받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과연 그 큰 지옥의 고통을 받겠습니까? 그리고 당신은 과연 그 큰 지옥의 고통을 갖추 받은 뒤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겠습니까?’
그러면 그는 대답할 것입니다.
‘나는 그 세계 낱낱 중생들을 위해 지옥 고통을 받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오시면 중생들로 하여금 즐거움을 받게 하며, 나도 고통을 받은 뒤에라야 위없는 도를 이루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말할 것입니다.
‘당신이 만일 저 무량무변한 아승기 수의 큰 바닷물을 한 털로 찍어내어 다 말리고, 또 무량무변한 아승기 세계를 부수어 티끌을 만들어 그 수를 다 알 수 있다면 이렇게 계속하면서 보리를 구하는 마음을 그만두지 마십시오.’
그러면 보살은 이 말을 듣고도 물러나거나 후회하지 않고 도리어 기뻐 뛰며, 부지런히 정진을 수행하면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좋은 이익을 얻었다. 나 때문에 저 무량무변한 아승기
세계 중생들이 모든 고통에서 아주 떠나게 되리라.’
보살은 또 생각합니다.
‘나는 일체 중생을 대신해 온갖 고통을 받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일체 고통을 떠나 모두 무여열반을 얻게 하고, 그 다음에야 나는 위없는 도를 얻으리라.’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넷째의 다함없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다섯째의 우치의 산란을 떠난 행인가. 그 보살은 가장 뛰어난 바른 생각을 성취하여 산란한 일이 없고, 견고하여 무너지지 않으며, 가장 뛰어나고 한량없이 청정하여 우치의 어둠을 떠나고 분별하는 바른 생각으로 세간과 출세간의 경론(經論)과 색의 법[色法]과 색 아닌 법[非色法]의 경론과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의 경론 등을 잘 받들어 지닙니다.
그리하여 그에게는 우치의 산란이 없어,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데 있어서 우치의 산란이 없고, 태 안에 있거나 태에서 나오거나 우치의 산란이 없으며, 보리심에 대해 우치의 산란이 없고 선지식을 친함에 있어서 우치의 산란이 없으며, 모든 불법을 배움에 있어서 우치의 산란이 없고 모든 악마의 일에 대해 우치의 산란이 없으며, 악마의 일을 멀리 떠남에 있어서 우치의 산란이 없습니다. 그는 한량없는 겁 동안에 이런 보살행을 닦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 보살은 이런 무량 무수한 견고한 바른 생각을 성취하고는 무량 무수한 아승기겁 동안, 모든 부처님과 보살과 선지식에게서 바른 법을 듣습니다. 즉, 그것은 이른바 매우 깊은 법과 미묘한 법과 장엄한 법, 갖가지 장엄한 법, 갖가지 이름의 뜻과 구절의 법, 보살을 장엄하는 법, 부처님을 장엄하는 위없는 법, 바로 희망하는 청정한 법, 일체 세간에 물들지 않는 법, 일체 세간을 분별하는 법, 넓은 법, 한량없는 법과 우치의 어둠을 떠나 세간을 분별하는 법, 함께하는 법[共法]과 함께하지 않는 법[不共法], 보살의 지혜 경계의 법과 일체 지혜의 자재한 법입니다.
그 보살은 이런 법을 듣고는 무량 무수한 아승기겁 동안에도 물러나거나 잊는 일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보살마하살은 본래 한량없는 겁 동안 수도할 때에 중생들의 삼매를 어지럽힌 일이 없고 바른 법을 끊어지지 않게 했으며, 선근과 지혜를 끊어지지 않게 했기 때문입니다.
또 그 보살은 어떤 소리로도 어지럽힐 수 없습니다. 이른바 높고 큰 소리,
괴롭히는 소리, 사람을 두렵게 하는 소리, 미묘한 소리, 정답지 않은 소리, 여섯 감관을 산란하게 하는 소리 등입니다.
그 보살은 이런 무량 무수한 좋고 나쁜 소리를 듣더라도 바른 생각이 어지럽지 않고 삼매가 어지럽지 않으며, 경계가 어지럽지 않고 미묘한 법에 들어감이 어지럽지 않으며, 보살행이 어지럽지 않고 보리심을 닦음이 어지럽지 않으며, 부처를 생각하는 삼매가 어지럽지 않고 진실한 법을 관찰함이 어지럽지 않으며, 중생을 교화하는 지혜가 어지럽지 않고 중생을 청정히 함이 어지럽지 않으며, 중생을 편히 머무르게 하는 청정한 지혜가 어지럽지 않고 매우 깊은 이치를 관찰함이 어지럽지 않습니다.
악업을 짓지 않기 때문에 악업의 장애가 없고 번뇌를 일으키지 않기 때문에 번뇌의 장애가 없으며, 공경하지 않는 행동을 하지 않기 때문에 공경하지 않는 장애가 없고, 법을 비방하지 않기 때문에 법을 비방하는 장애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한량없는 갖가지 소리가 있는데 그 낱낱 소리는 시방의 무량무변한 아승기 세계에 가득하여, 무량무변한 아승기겁 동안 끊이지 않으면서 중생들의 모든 감관은 다 무너뜨려 미치게[狂] 할 수 있으나 그 보살의 매우 깊은 삼매는 어지럽히지 못합니다.
그 보살은 삼매에 들어 모든 음성의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모양을 생각해 분별하고, 나고 머물고 사라지는 성품을 잘 분별해 알며, 또 그 소리를 듣는 모든 사람을 잘 관찰합니다. 그는 좋거나 나쁜 소리를 들어도 그 마음에 미워하거나 사랑함이 없어 바른 생각이 어지럽지 않고 이 모든 소리의 모양을 취하여도 거기에 물들지 않으며, 그 소리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어서 진실한 성품이 아니며, 지은 이도 없으며, 또 본제(本際)도 없어서 법성과 평등하여 조금도 차별이 없음을 잘 압니다.
또 그 보살은 고요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성취하여 다시는 물러나지 않고 모든 선정에 편히 머물러 일체의 법을 깨닫고 지혜를 성취하여 모든 음성을 떠난 삼매를 얻으며, 아승기 삼매의 문으로 권속을 삼아 대비심을 길러 찰나찰나 사이에 한량없는 아승기 삼매를 얻어 끝내는 일체 종지를 얻습니다.
그 보살은 모든 감관을 깨뜨리는 그 큰 나쁜 음성을 듣고는 생각하기를, ‘나는 일체 중생을 청정한 바른 생각에 머물러 일체지에서 물러나지 않고 끝내는 무여열반을 성취하게 하리라’고 하나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다섯째의 우치와 산란을 떠나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을 보살마하살의 여섯째의 잘 나타나는 행이라 하는가. 그 보살은 고요한 몸과 입과 뜻의 행을 성취하였으므로 그것은 아무것도 없고 나타내 보이는 것도 다 없는 것입니다. 몸과 입과 뜻의 업에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고, 몸과 입과 뜻의 업에 결박도 없고 해탈도 없으므로 그 나타내 보이는 것도 의지하는 데가 없고 머무는 데가 없는 것입니다.
마음을 따라 머무르되 무량한 심성은 일체의 법성(法性)과 평등하고, 평등하여 성품과 모양이 없으므로 나타내 보이는 모양과 없는 모양은 매우 깊어 그 밑이 없습니다. 진여의 성품은 업보를 떠났으므로 좋은 방편으로 생(生)을 벗어나고 생을 떠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고요한 열반과 평등하여 없는 것을 있다고 말하나 말의 길이 끊어졌고 모든 세간을 떠나 의지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하여 보살이 일으킨 선근을 기르고 허망을 떠난 결박과 집착이 없는 법문에 들어가며, 진실한 법문에 들어가고 세간을 떠난 법문에 들어가며, 모든 세간법을 분별합니다.
그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모든 중생은 성품 없음으로 성품을 삼았고 모든 법은 함이 없음으로 성품을 삼았으며, 일체 부처 세계는 모양 없음으로 성품을 삼았고 끝내 삼세는 다 성품이 없어 말의 길이 끊어졌으므로 모든 법에 의지할 데가 없다.’
보살은 이런 매우 깊은 법을 알아 일체 세간이 다 적멸한 것임을 알고 부처님의 매우 깊은 법을 알며, 불법과 세간법이 평등하여 차별이 없어, 세간법이 불법에 들어가고 불법이 세간법에 들어가지만 불법과 세간법이 뒤섞이지 않고 세간법이 불법을 부수지 않으니, 진실한 법계는 부술 수 없음을 압니다.
그리하여 삼세가 평등한 바른 법에 편히 머무르면서도 보리심을 버리지 않고 중생 교화할 마음을 버리지 않고 대자대비한 마음을 더욱 길러 일체 중생을 다 구제하려 하는 것입니다.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중생을 성취 시키지 않으면 누가 성취시키며, 내가 중생을 조복하지 않으면 누가 조복하며, 내가 중생을 고요하게 하지 않으면 누가 고요하게 하고, 내가 중생을 기쁘게 하지 않으면 누가 기쁘게 하고, 내가 중생을 청정하게 하지 않으면 주가 청정하게 할 것인가.’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매우 이 깊은 법을 잘 알고
중생들을 본다. 그들은 큰 고통을 받으면서 위험한 길로 나아가고 온갖 번뇌에 얽매여 마치 중병환자가 항상 고통을 받는 것과 같으며, 은애(恩愛)에 얽매여 생사의 지옥에 있고 언제나 지옥ㆍ아귀ㆍ축생과 염라왕이 있는 곳을 떠나지 못해 한량없는 고통 무더기를 영원이 떠나지 못하며, 세 가지 장애를 떠나지 못하고 항상 우치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진실한 밝음을 보지 못하고 무궁한 생사를 받아 해탈의 길을 얻지 못하고 팔난에 돌아다니면서 우치에 병들며, 온갖 번뇌에 물들어 한량없는 깊은 번뇌 바다에 빠져 있으며, 삿된 견해에 미혹 되어 바른 도를 보지 못한다.’
보살은 또 이렇게 관찰합니다.
‘중생들이 아직 성숙하지 못했는데 그들을 버려두고 내가 정각을 취한다는 것은 차마 못할 일이다. 나는 먼저 저들을 교화하면서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아야 한다. 그리하여 성숙하지 못한 자는 성숙하게 하고 조복하지 못한 자는 조복하게 하며, 제도하지 못한 자는 모두 제도시키리라.’
보살이 이 행에 머물러 있을 때, 하늘ㆍ사람ㆍ마왕ㆍ제석천ㆍ범천ㆍ사문ㆍ바라문과 모든 건달바들이 이 보살을 보고는 다 기뻐하고 공경하며 우러를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중생이나 그를 공경 공양하고 존중 예배하며 내지 그를 보거나 말을 들으면 그 공덕은 헛되지 않아 끝내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여섯째의 잘 나타나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일곱째의 집착 없는 행인가. 그 보살은 집착 없는 마음으로 찰나찰나 사이에 아승기 세계를 관찰하고 아승기 부처 세계를 장엄하되 그 모든 부처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또 아승기 여래 계신 데 나아가 예배하고 공경하며, 아승기 꽃과 향, 바르는 향, 가루향과 온갖 보배 화만과 하늘 옷과 여러 가지 보배와 보배 일산ㆍ당기ㆍ번기 등 온갖 장엄거리를 한량없이 공양하지만 거기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아승기의 방편을 행하나 행함이 없고 아승기를 생각하나 생각함이 없는 법[無思法]에 머무르며, 찰나찰나 사이에 한량없는 부처님을 뵈옵지만 그 부처님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부처님의 상호에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부처님의 광명이나
부처님의 세계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부처님의 설법을 들어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시방세계와 여래 대중과 보살에 대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불법을 듣고 기뻐하지만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바른 마음은 더욱 넓어지고 뜻을 껴잡아 산란하지 않고 보살행을 행하면서도 불법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 보살마하살은 시방세계의 모든 부처님 계신 곳에서 무량무변한 아승기겁 동안 공경하고 예배하고 공양하더라도 만족하다는 마음이 없습니다. 부처님을 뵈옵고 법을 들어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여래와 보살 대중의 장엄을 보더라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또 더러운 세계를 보더라도 미워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보살마하살은 모든 법을 적멸하고 평등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모든 법에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으며, 어둠도 밝음도 없으며, 분별하거나 분별하지 않음도 없으며, 허망도 진실도 없으며, 안온도 위험도 없으며, 정도도 사도도 없는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이렇게 진실한 법의 성품을 관찰하고는 중생들 성품에 들어가 그들을 교화하고 조복하고 성숙시키면서도 그들 중생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모든 법을 받들어 지니면서도 그 법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보살심을 버리지 않고 부처님의 경지에 머물면서 그 부처님 경지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또 갖가지 말의 길에 들어가면서 그 말의 길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중생의 길에 들어가면서 그 중생의 길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온갖 삼매를 분별해 다 들어가면서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무량무변하고 말할 수 없는 부처 국토에 나아가 그것을 보면서도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으며, 혹 부처 국토를 떠나더라도 못 잊어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보살마하살은 그 부처 국토에 대해 탐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진실한 가르침을 잘 이해하고 그 최상의 길에 대해 장애가 없으며, 부처님의 바른 가르침에 편히 서서 보살의 행을 모두 갖추고 보살의 마음에 편히 머물러 보살이 고요한 해탈을 성취하면서도 그 보살행을 생각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으며, 보살의 깨끗한 길에 머물러 진실한 수기를 받습니다.
그리하여 그 수기를 받고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범부들은 어리석어 진리를 알지도 보지도 못하고 우둔하여 신심이 없으며, 마음은 진실하지 못하고 항상 법에 집착하여
생사에 흘러 다니면서 부처님을 보지 못한다. 그리고 선지식을 떠나고 바른 길을 떠나 사견(邪見)에 미혹하여 조어사(調御師)를 구하지 않고 십력왕(十力王)을 공경하지 않으며, 보살의 은혜를 알지 못하고 악지식을 친근히 한다.
그리하여 모든 법은 다 공이라는 말을 듣고는 매우 두려워하여 바로 생각하지 않고 바른 법을 비방하며, 바른 길을 버리고 삿된 길을 쫓다가 악마의 그물에 들어가 부처님을 멀리 떠나고 항상 모든 존재에 집착하여 갖가지 고통을 받는구나.’
그때 그 보살은 그 중생들이 온갖 고통 받는 것을 보고는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더욱 간절하여 갖가지 선근을 관찰합니다. 그러나 거기에 집착하는 마음은 없습니다.
그리하여 그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나는 시방세계의 낱낱 중생을 위해 무량무변 아승기겁 동안 세상에 머물면서 저들을 다 성숙시키자. 그러나 조금도 괴로워하지 않고 저들과 항상 같이 살면서 털끝만큼도 저들을 버리고 떠나려 하지 않으리라. 또한 중생을 위해 한 털 끝으로 시방세계를 모두 재면서 낱낱 털끝에서 무량무변 아승기겁을 살고 한 중생을 위하는 것처럼 일체 중생을 위해서도 또한 그렇게 하리라.’
이런 대비심으로 찰나찰나 계속해 끊이지 않으면서도 그들 중생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낱낱 털끝에서 과거와 미래가 다하도록 보살행을 갖추 닦으면서도, 그 몸에 집착하지 않고 그 법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그 생각에도 집착하지 않고 그 서원에도 집착하지 않으며, 그 삼매와 행과 고요함과 경계 등에도 집착하지 않고 중생을 교화해 성숙시킴에도 집착하지 않고 깊은 법계에 들어감에도 집착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그 보살은 이렇게 관찰하기 때문입니다.
‘일체 법계는 허깨비와 같고 모든 불법은 번개와 같으며, 보살의 행은 꿈과 같고 듣는 법은 메아리와 같으며, 일체 세계는 변화된 것과 같고 업보의 일으킴은 마누마(摩㝹摩)의 화신(化身)과 같다. 또 일체 중생은 다 화상(畵像)과 같음을 아나니 갖가지 다른 형상은 모두 마음에 의해 그려졌기 때문이요, 말해진 모든 법은 실제와 같나니 한 찰나 사이에 시방에 가득하기 때문이며, 닦는바 보살행은 광대하기 법계와 같지만 결국은 허공과 같다.’
그리하여 한 찰나 사이에 모든 부처님의 결정한 방편을 다 알고 마음은 빨리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아 그 마음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보살은 이와 같이
나 없음을 관찰하고 부처님이 일체 중생을 교화하시는 것을 보고는 불법에 대해 한량없는 기쁨을 얻고 큰 자비심을 일으켜 일체를 구호하면서도 조금도 고달파하는 생각이 없고 더욱 기뻐하여 서원을 세웁니다.
‘성숙하지 못한 이는 성숙하게 하고 조복하지 못한 이는 조복하게 하며, 세간을 멀리 떠나 있으면서도 일체 세간을 잘 수순하리라. 그리하여 시방 국토 중생들의 음성과 그들의 갖가지 업과 그들의 시설ㆍ화합ㆍ떠돌아다님과 그들의 온갖 행ㆍ그들의 경계ㆍ그들의 모든 지위며, 또 그들의 태어남 등을 들으면 나는 큰 서원의 힘을 타고 그리로 가서 마침내 큰 서원을 버리지 않고 그들을 교화하리라.’
그리하여 잠깐도 더러운 생각을 일으키지 않나니 왜냐하면 아무 집착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도 이롭고 남도 이롭게 함이 청정하고 원만해지는 것이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일곱째의 집착 없는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여덟째의 존중한 행인가. 그 보살은 존중한 선근을 성취하고 무너지지 않는 선근, 일체 불법을 닦는 선근 등을 성취했습니다. 그러므로 그 보살이 수행할 때에는 언제나 부처님의 묘한 법을 마음으로 즐거워하고 한결같이 위없는 보리를 오로지 구하면서 잠깐도 보살의 큰 서원을 버리지 않고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도를 행하되 고통이 많다고 생각하여 고달파하는 마음을 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악마도 그를 부수지 못하고 모든 부처님이 모두 그를 보살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는 보살의 온갖 청정한 행을 항상 행하고 일체 보살의 한량없는 고행을 부지런히 닦으면서 게으르지 않아 대승의 큰 서원에서 물러나지 않습니다.
그 보살은 보살의 존중한 행에 편히 머물고는 찰나마다 아승기겁에서 나고 죽는 고난을 생각하면서 보살의 한량없는 큰 서원을 기릅니다. 그러므로 만일 어떤 중생이 그를 공경하고 공양하며, 내지 그를 보거나 그 소리를 듣더라도 그들은 물러나지 않는 자리에 머물러 반드시 위없는 보리를 이룰 것입니다.
그 보살은 중생을 관찰하여 그것이 있지 않는 것임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들을 버리지 않습니다. 마치 강물이 저 언덕으로 가지도 않고
이 언덕으로 오지도 않으며, 중류(中流)에서 끊어지지도 않으면서 중생들을 저 언덕 이 언덕으로 건네주는 것처럼, 보살마하살도 그와 같아서 생사에 나아가지도 않고 열반으로 나아가지도 않으며, 생사의 중류에 머물지도 않으면서 이 언덕 중생을 저 언덕의 두려움도 없고 괴로움도 없는 안온한 곳에 건네다 줍니다.
그러나 중생들의 수효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에 한 중생을 버리고 많은 중생에 집착하지도 않고 많은 중생을 버리고 한 중생에 집착하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늘리지도 않고 중생계를 줄이지도 않으며, 중생계에서 나지도 않고 중생계에서 없어지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다하게 하지도 않고 중생계를 자라게 하지도 않으며, 중생계를 비우지도 않고 중생계를 둘로 나누지도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중생계가 법계와 같음을 깊이 알므로 중생계와 법계가 둘이 아니며, 둘이 없는 법 가운데에는 늘어남도 없고 줄어듦도 없으며, 나는 것도 없고 멸하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법의 성품은 진실하여 옴도 없고 감도 없으며, 의지하거나 집착함도 없고 두 가지 모양을 짓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일체 법계가 두 모양이 없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이렇게 좋은 방편으로 심오한 법계를 알고는 모양이 없는 데에 머물러 청정하고 묘한 모양으로 그 몸을 장엄하고 모든 모양을 다 잘 분별해 마지막에는 결정코 저 언덕에 이르러 중생들의 수를 다 분별해 압니다.
보살은 모든 부처 세계에 그 몸을 두루 나타내지만 그 부처 세계에 집착하는 마음이 없고 부처님 법에 깊이 들어가지만 또한 물듦이 없으며, 이치를 분별하여 남을 위해 자세히 설명하고 모든 법에 대해 끝까지 욕심을 버렸으면서도 보살의 도를 끊지 않으며, 보살의 행을 버리지 않고 무궁한 공덕을 지어 청정한 법계에 들어갑니다.
비유하면 화주(火珠)가 불을 내되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처럼, 보살의 공덕 창고도 그 끝을 알 수 없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도 그 끝을 알 수 없는 것입니다.
보살마하살은 그 자리가 최종이 아니요 최종이 아닌 것도 아니며, 집착을 떠난 것도 아니요 떠나지 않은 것도 아니며, 의지하는 데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으며, 세간법도 아니요 부처님 법도 아니며, 범부도 아니요 결과를 얻은 것도 아닙니다.
보살이 이와 같이 존중한 마음을 성취하여 보살행을 닦을 때에는 성문이나 벽지불의 교법도 가르치지 않고 부처님 법도 가르치지 않고 세간법도 가르치지 않으며, 중생도 가르치지 않고
중생을 깨뜨리지도 않으며, 바른 도도 가르치지 않고 바른 도를 깨뜨리지도 않으며, 더러운 것도 가르치지 않고 깨끗한 것도 가르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은 모든 법에는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는 것임을 알고 또 모든 법에는 집착[受]이나 변함[轉]이나 물러남[退]이 없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적멸하고 매우 깊은 이 법을 행할 때에도 ‘나는 지금 이 법을 행하고 이미 이 법을 행했으며, 장차 이 법을 행하리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또 오음ㆍ십팔계ㆍ십이처와 안 세간ㆍ바깥 세간ㆍ안팎 세간과 모든 큰 서원과 모든 바라밀 등이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모든 법에는 성문승으로 향한다거나 연각승ㆍ보살승ㆍ불승 등으로 향한다는 것이 없고 또 범부 세계로 향한다는 것도 없으며, 또 더럽고 깨끗함, 생사와 열반계로 향한다는 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법에는 둘이라거나 둘이 아니라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비유하면 저 허공은 시방에서 찾아보아도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으나 그렇다고 허공은 없는 것이 아닌 것처럼 보살도 그와 같아서 모든 법을 관찰할 때, 그것은 다 차별이 없지만 그렇다고 끝내 정각을 이루지 않는 것이 아니어서 그것은 다 가장 진실해 바른 행과 어긋나지 않으므로, 보살행을 잘 나타내 보이기도 하고 한량없는 큰 서원을 버리지 않으며, 중생을 조복하고 큰 법륜을 굴리며, 인과를 깨뜨리지 않아 적멸하고 평등하게 보는 법에 어긋나지 않습니다.
그 보살은 다 삼세 여래 등과 평등하여 부처 성품을 끊지 않고 바른 법을 깨뜨리지 않으며, 바른 법을 일으키고 변재가 다함없으며, 모든 법에 대해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법당에 편히 머물러 깊은 법을 분별하여 두려움이 없는 자리에 머무르며, 부처님 법을 버리지 않으면서 세간법을 어기지 않고 세간에 두루 나타나 세간과 평등하면서도 집착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보살은 이렇게 존중한 지혜를 성취하고 보살행을 닦아 모든 중생을 세간 나쁜 갈래의 온갖 고난을 아주 떠나게 하며, 그들을 교화해 성취시켜 삼세 부처님 법 안에 편히 두되 굳건해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이렇게 교화한 뒤에 그는 생각합니다.
‘저 중생들은 은혜와 의리를 알지 못하고 서로 살해하며, 삿된 소견이 더옥 성해 바른 길에 미혹하고 번뇌가 가득하고 우치의 어둠에 덮여 있다. 그러나 또 설사 모든 것을 밝게 알고 지혜를 원만히 갖춘 선지식이 이 세간에 가득하더라도 나는 그들을 위해서 보살행을 닦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나는 선하거나 악한 사람에 대해 이양이나
명예나 내지 한 오라기 실이나 다정한 말을 구하지 않기 때문이며, 또 나는 한량없는 겁 동안 보살행을 닦으면서도 조금도 내 몸 편하기를 구하지 않았고 다만 일체 중생을 조복하고 그들을 청정하게 하며, 그들을 구제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 왜냐하면 모든 불법은 다 으레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양을 구하지 않고 남의 악을 헤아리지 않으며, 항상 평등한 마음으로 보살도를 행하고 밉고 친한 사람을 평등하게 보아 차별이 없으며, 중생들로 하여금 끝내 저 언덕에 이르러 위없는 보리를 원만히 성취하게 하려 하나니, 이것이 보살마하살의 여덟째의 존중한 행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아홉째의 선법의 행인가. 그것은 그 보살은 모든 하늘ㆍ사람ㆍ사문ㆍ바라문ㆍ건달바 등 일체 중생을 위해 청량한 법못[法地]이 되고 바른 법을 수호합니다.
부처 종자가 끊어지지 않게 하는 것은 청정한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요, 설법에 장애가 없는 것은 이치의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며, 이치의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법의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요, 법의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바른 말의 다라니를 얻기 때문이요, 말의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장애 없는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요, 의미의 설명이 다함없는 것은 부처님이 감로로 관정(灌頂)하는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며, 중생들을 기쁘게 하는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스스로 깨닫는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요, 같은 말하는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같은 말하는 변재의 다라니에 들어갔기 때문이며, 갖가지 이치의 이름과 맛과 글귀 무더기의 설명이 다함없는 것은 바른 말의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이요, 한량없는 변재가 다함없는 것은 한량없는 찬탄하는 다라니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삼천대천세계에서 부처님처럼 몸을 변하고 묘한 음성을 두루 갖추어, 모든 법에서 아무 장애 없이 불사를 지으며, 교화할 수 있는 중생이 있으면 그들이 이해하는 음성을 따르고 그들의 근기를 따라 길고 넓은 혀와 청정한 음성으로 때를 따라 설법합니다. 대비심을 어기지 않고 중생을 교화할 때에는 낱낱 말에 한량없는 음성을 내어 그들을 모두 기뻐하게 합니다.
가령 어떤 중생이 한량없고 헤아릴 수 없는 아승기의 말을 다 알고 또 한량없는 업과 그 과보를 안다 하자,
그런 무량 무수한 아승기 중생들이 무량무변한 아승기 세계에 가득하여 보살이 권속이 되면, 보살은 그 모임 가운데 앉아 한 법을 말하여 이러한 등의 중생으로 하여금 다 깨달아 듣게 하는 것처럼 그런 무량무변한 아승기 대중이 보살의 권속이 되는 것도 그와 같습니다.
그때 보살은 또 이렇게 생각합니다.
‘가령 한 털끝만 한 곳에 잠깐 동안에 무량무변한 아승기 대중이 모여 오는데 그와 같이 찰나찰나로 계속한다면 과거ㆍ미래의 모든 겁은 끝이 있어도 모여 오는 대중은 끝이 없다고 하자, 그런 대중이 제각기 다른 말로 각기 다른 질문을 하더라도 나는 그런 질문을 받고도 두려움 없이 생각하기를,〈비록 일체 중생이 다 와서 질문하더라도 나는 한 말로 그 의심 그물을 풀어 그들을 모두 기쁘게 할 것이다〉 하리라.’
보살의 법언(法言)은 허망하지 않아 그 낱낱 말에 무변 무량한 지혜의 장엄이 있어 끝없는 온갖 공덕장을 성취하고 그 지혜의 광명은 일체의 법을 모두 갖추어 일체 종지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그 보살은 선법의 행에 편히 머무른 뒤에는 스스로도 청정하고 또 일체 중생을 이롭게 합니다. 이와 같이 삼천대천세계와 내지 무량무변하여 셀 수 없는 세계 가운데서 스스로 그 몸을 변화하여 순금색으로 만들고 묘한 음성을 모두 갖추어 모든 법에서 장애 없이 불사를 지으며, 무량무변한 청정한 법문으로 중생을 교화해 제도합니다.
불자들이여, 그 보살마하살에게는 열 가지 몸이 있습니다. 즉, 무량무변한 법계에 들어가는 몸이니 일체 세간을 없애기 때문이요, 미래의 몸이니 모든 갈래[趣]에 나기 때문이며, 나지[生] 않는 몸이니 나지 않는 평등한 법을 매우 좋아하기 때문이요, 멸하지 않는 몸이니 모든 법은 말이 끊어졌기 때문이며, 진실하지 않는 몸이니 여여(如如)히 진실하기 때문이요, 우치와 허망을 떠난 몸이니 알맞게 나타나기 때문이요, 오감[來去]이 없는 몸이니 여기서 죽어 저기서 나는 것을 여의었기 때문이요, 무너지지 않는 몸이니 법계의 성품은 무너짐이 없기 때문이며, 한 모양의 몸[一相身]이니 삼세의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이요 모양이 없는 몸[無相身]이니 모든 법의 모양을 잘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보살마하살은 이런
열 가지 몸을 성취한 뒤에는 모든 중생의 집[舍]이 되나니 선근을 기르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의 구호자가 되나니 조그만 두려움도 없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귀의처가 되나니 매우 안온히 살게 하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의 길잡이가 되나니 최상의 도의 문을 열어 주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스승 방편[師方便]이 되나니 진실한 법에 들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등불이 되나니 업보를 보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밝음[明]이 되나니 깊고 깊은 법을 얻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횃불이 되나니 우치를 떠나고 참된 법을 이해하게 하기 때문이며, 일체 중생의 빛이 되나니 밝은 지위[明地]를 얻게 하기 때문이요, 일체 중생의 나아가는 갈래의 등불이 되나니 여래의 자재한 힘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아홉째의 선법의 행이라 하나니, 보살마하살은 선법의 행에 편안히 머물고는 일체 중생을 위하여 청량한 법못[法地]을 만드니 부처님의 깊고 깊은 모든 법의 근원을 얻기 때문입니다.
불자들이여, 어떤 것이 보살마하살의 열째의 진실한 행인가. 그 보살은 가장 진실하고 참된 말을 성취하여 말한 대로 행하고 행하는 대로 말하는 것입니다.
그 보살은 삼세 부처님의 진실한 말을 배우고 삼세 부처님의 성품에 들어가며, 삼세 부처님과 선근이 같습니다. 그 보살은 그런 선근을 성취하여 삼세 부처님의 둘이 없는 말을 배우고 여래의 일체 지혜를 따라 행합니다.
그 보살은 중생들의 옳고 그름을 아는 지혜와 중생들의 과거ㆍ미래ㆍ현재의 일체 업보를 아는 지혜와 중생들 감관의 원만하고 원만하지 않음을 아는 지혜와 그들의 갖가지 종성(種性)을 아는 지혜와 그들의 갖가지 욕망을 아는 지혜와 그들이 갈 온갖 곳을 아는 지혜와 또 모든 선정 해탈, 삼매 등의 깨끗하고 더러움이 일어나는 때[時]와 때 아님[非時]의 바뀜을 아는 지혜와 과거 모든 세계의 이뤄지고 무너짐을 아는 지혜와 장애가 없는 천안(天眼)의 지혜와 번뇌가 다한 지혜 등을 다 성취하고도 일체의 보살행을 버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을 조복해 청정하게 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보살은 다시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보니 저 중생들은 한량없는 고통을 받고 있다. 만일 내가 저들을 구제하지 못하고 정각을 이룬다면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나는 먼저 내 큰 서원을 다 이룬 뒤에 부처가 되리라. 그리하여 그들로 하여금 보리를 구하여 끝내 무여열반(無餘涅槃)을 얻게 하리라. 왜냐하면 중생들이 청해서 내가 보리심을 내어 보살행을 행하는 것이 아니요, 내가 스스로 모든 중생들을 위해 발심하여 그들로 하여금 끝내는 일체종지를 얻게 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중생들에게 집착하지 않기 때문에 일체에서 뛰어났고 중생들을 잘 다스리기 때문에 일체에서 최상이 되었으며, 중생의 무궁함을 알기 때문에 일체의 어둠을 떠났고 본래의 서원을 성취하였기 때문에 얻어야 할 것을 얻었으며, 보살의 공덕으로 장엄하였기 때문에 잘 변화하고 삼세 부처님께서 잘 돌보아 주시기 때문에 그들을 잘 포섭하는 것입니다.’
그 보살마하살은 본래의 서원을 버리지 않기 때문에 최상의 지혜의 장엄에 들어가 중생들의 근기를 따라 교화해 제도하고 본래의 서원을 따라 모두 만족하게 한 뒤에는 모든 법에서 자재한 지혜를 얻어 중생들을 다 청정하게 합니다. 또 찰나찰나 사이에 시방세계에 두루 노닐고 찰나찰나 사이에 한량없는 국토에 나아가며, 찰나찰나 사이에 무량 무수한 부처님과 그 장엄한 세계를 보고 여래의 자재한 신력을 나타내어 끝까지 법계와 허공계와 평등합니다.
그 몸은 한량없어 대상을 따라 다 나타내지만 한량없고 걸림없어 의지하는 데가 없고 그 몸 가운데에는 부처님 국토와 일체 중생과 일체 모든 법이 차례로 다 나타나나니, 삼세의 모든 부처님이 모두 다 나타납니다.
그 보살은 또 중생들의 갖가지 생각과 갖가지 욕망과 청정한 업보를 다 알고 그 대상을 따라 그 몸을 나타내어서는 그것을 다스리며, 모든 법은 꼭두각시와 같고 허깨비와 같으며 번개와 같고 중생은 꿈과 같음을 압니다.
그 보살은 또 모든 이치와 모든 맛이 무궁무진하고 청정한 바른 생각으로 결정하여 모든 법을 분명히 알며, 일체의 삼매와 위없는 지혜에 들어가 둘이 아닌 자리를 고요히 관찰할 때 모든 중생은 다 두 가지 법을 의지해 있었습니다.
보살마하살은 대비심에 머물러 이러한 깊고 묘한 온갖 법을 닦아 익혀 끝까지 고요해 부처님의 십력(十力)을 얻고 인다라 그물 같은 법계에 들어가
여래의 걸림없는 해탈을 자재하게 성취합니다. 그리하여 인간의 대장부는 큰 사자후로 두려움이 없고 법륜을 굴리는 왕이 되어 걸림없는 청정한 법륜을 굴리며, 지혜의 해탈을 성취해 모든 세간의 경계를 알고, 생사의 소용돌이를 끊고 삼세 부처님의 바른 법을 보호해 지니며, 모든 부처님의 큰 바다 같은 방편을 끝까지 행합니다.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열째의 진실한 행이라 하나니, 그 보살은 진실한 행에 편히 머물고는 일체의 하늘과 사람과 팔부(八部)의 한량없는 중생을 모두 청정하고 기뻐하게 합니다.”

무회(無悔) : 뒷글자는 황(荒)과 내(內)의 반절이다.
명예(名譽) : 뒷글자는 양(羊)과 여(茹)의 반절이다.
빈구(貧寠) : 뒷글자는 군(郡)와 우(羽)의 반절이다.
자섬(資贍) : 앞글자는 즉(卽)와 이(夷)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시(時)와 염(豔)의 반절이다.
구색(求%{宀+索}) : 뒷글자는 산(山)과 책(責)의 반절이고, 또한 색(索)으로 쓰기도 한다.
소전(所纏) : 뒷글자는 직(直)과 련(連)의 반절이다.
안모(顏貌) : 뒷글자는 막(莫)과 교(教)의 반절로서, 정자는 모(皃)로 쓴다.
주묘(姝妙) : 앞글자는 창(昌)과 주(朱)의 반절이다.
자용(姿容) : 앞글자는 음이 자(資)이다.
요염(妖豔) : 앞글자는 어(於)와 교(喬)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음이 염(焰)이다.
경혹(傾惑) : 앞글자는 거(去)와 영(營)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호(胡)와 국(國)의 반절이다.
재지(齎持) : 앞글자는 조(祖)와 계(雞)의 반절이고, 속자는 재(賷)로 쓴다.
겸비(謙卑) : 앞글자는 고(苦)와 겸(兼)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부(府)와 이(移)의 반절이다.
비예(鄙穢) : 앞글자는 방(方)과 미(美)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어(於)와 폐(廢)의 반절이다.
추격(棰擊) : 앞글자는 지(之)와 루(累)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고(古)와 력(歷)의 반절이다.
최욕(摧辱) : 뒷글자는 이(而)와 촉(蜀)의 반절이다.
조차(遭此) : 앞글자는 작(作)과 조(曹)의 반절이다.
초독(楚毒) : 앞글자는 창(創)과 거(擧)의 반절이다.
권려(勸勵) : 앞글자는 거(去)와 원(願)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력(力)과 제(制)의 반절이다.
민상(愍傷) : 앞글자는 미(眉)와 운(殞)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식(式)과 양(羊)의 반절이다.
간질(慳嫉) : 앞글자는 고(苦)와 한(閑)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진(秦)과 실(悉)의 반절이다.
혐한(嫌恨) : 앞글자는 호(戶)와 겸(兼)의 반절이고, 뒷글자는 호(胡)와 간(艮)의 반절이다.
마누(摩㝹) : 뒷글자는 노(奴)와 후(侯)의 반절이다.
순명(侚名) : 앞글자는 사(辭)와 윤(閏)의 반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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