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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3127 불교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8권

by Kay/케이 2023.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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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대반열반경(大般涅槃經) 28

 

 

대반열반경 제28권

북량 천축삼장 담무참 한역

11. 사자후보살품 ②

그때 사자후보살마하살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앞서 말씀하신 암라 열매는 네 가지 사람에 비유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행은 세밀하나 마음이 바르고 진실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은 세밀하나 행이 바르고 진실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마음도 세밀하고 행도 정당하며, 어떤 사람은 마음이 세밀하지도 못하고 행이 바르고 진실하지도 못합니다. 이 처음의 두 가지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이 두 인연에 의지하여도 알 수 없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암라의 열매를 두 가지 사람에게 비유한 것은 진실로 알기 어렵다. 알기 어려우므로 나의 경에 말하기를 ‘함께 있어야 한다’고 하였다. 함께 있어도 모르겠다면 오래 있어야 하며, 오래 있어도 모르겠다면 지혜를 써야 하며, 지혜로도 모르겠다면 깊이 관찰하여야 한다. 관찰하는 까닭으로 계행을 가짐과 파함을 안다. 선남자야, 함께 있고 오래 있고 지혜를 쓰고 깊이 관찰하는 네 가지를 구족한 후에야, 계행을 가지는 것과 계행을 깨뜨림을 안다.
선남자야, 계행에 두 가지가 있고 가지는 것도 두 가지이다. 첫째는 끝까지의 계행이며[究竟] 둘째는 끝까지가 아닌 계행이다[不究竟]. 어떤 사람이 인연이 있어서 계율을 받아 가진다면 지혜 있는 사람이며 이 사람이 가지는 계행이 이양을 위한 것인지 끝까지 가지는지를 관찰해야 한다. 선남자야, 여래의 계율은 인연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끝까지의 계율[究竟戒]이라고 한다. 이런 뜻으로 보살은 비록 나쁜 중생들이 상하게 하더라도 성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여래는
필경까지 가지는 계행과 끝까지 가지는 계행을 성취하였다고 한다.
선남자야, 내가 예전에 한번은 사리불과 500제자들과 함께 마가다국의 첨파(瞻婆)성에 있었다. 그때 사냥꾼이 비둘기 한 마리를 따라왔는데, 그 비둘기가 무서워서 사리불의 그림자 속에 들어와서도 파초나무처럼 떨었으나, 나의 그림자 속에 와서는 몸과 마음이 편안하여 무서운 마음이 없어졌다.
그러므로 여래는 끝까지 가지는 계행이어서 그림자까지도 이런 힘이 있다. 선남자야, 끝까지가 아닌 계행으로는 성문이나 연각도 얻지 못하는데, 하물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는가?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이양을 위함이며 둘째는 정법(正法)을 위함이다. 이양을 위하여서 계율을 받아 가지는 것은 그 계행으로는 불성이나 여래를 보지 못할 줄을 알아야 한다. 비록 불성과 여래의 이름을 듣는다고 하더라도 들어서 본다고 하지 못하지만, 만일 정법을 위하여 계율을 받아 가지면 이 계는 불성과 여래를 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며 들어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려운 것이며, 둘째는 뿌리가 얕아서 흔들리기 쉬운 것이다. 만일 공하고 모양 없고[無相] 원이 없음[無願]을 닦아 익히면 이를 뿌리가 깊어 뽑기 어렵다 하고, 이 3삼매를 닦지 않으면 비록 25유(有)를 닦더라도 이는 뿌리가 얕아 흔들리기 쉽다고 한다.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 몸을 위하는 것이며 둘째는 중생을 위하는 것이다. 중생을 위하는 이는 불성과 여래를 본다.
계행을 가지는 사람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제 성품으로 가지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다. 만일 계를 받은 뒤에 한량없는 세월을 지내면서도 잃어버리지 않거나, 나쁜 나라에 나거나 나쁜 친구와 나쁜 때와 나쁜 세상을 만나거나
나쁜 법을 듣거나 나쁜 소견 가진 이와 함께 있을 때에 계를 받는 법이 없더라도 본래와 같이 계율을 가지고 범하지 않으면, 이것을 일러 제 성품으로 가진다고 한다.
만일 계사(戒師)를 만나서 네 번 아뢰어 갈마[白四羯磨]한 뒤에 계를 얻는 것은 비록 계를 얻은 뒤에라도 모름지기 화상이나 승가나 함께 공부하는 동무들의 가르침을 의지하여야 행동할 것을 알며, 법을 듣고 법을 말하는 데 모든 위의를 갖춘다. 이것은 다른 이의 가르침을 의지하는 것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제 성품으로 가지는 이는 불성과 여래를 눈으로 보는 것이며 또 들어서 보는 것이라고 한다.
계율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성문의 계이며 둘째는 보살의 계이다. 처음 마음을 낼 때부터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때까지를 보살의 계라고 하며, 백골을 관하거나 아라한과를 증득할 때까지를 성문의 계라고 한다. 성문의 계를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불성과 여래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고, 보살의 계를 받아 지니면 이 사람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며 불성과 여래와 열반을 볼 것임을 알아야 한다.”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무슨 인연으로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는 것입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선남자야, 마음으로 뉘우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어찌하여 뉘우치지 않는가? 낙을 받기 위해서이다. 어찌하여 낙을 받는가? 멀리 여의기 위해서이다. 어찌하여 멀리 여의는가? 편안하기 위해서이다. 어찌하여 편안한가? 선정을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선정에 드는가? 진실하게 알고 보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진실하게 알고 보는가? 생사의 모든 근심을 보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생사의 근심을 보려고 하는가? 마음이 탐착하지 않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마음이 탐착하지 않는가? 해탈을 얻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해탈을 얻으려고 하는가? 위없는 대열반을 얻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대반
열반을 얻으려고 하는가?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한 법을 얻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을 얻으려고 하는가?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는 법을 얻기 위해서이다. 무슨 까닭으로 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을 얻으려고 하는가? 불성을 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보살은 제 성품으로 끝까지 깨끗한 계율을 가지는 것이다.
선남자야, 계율을 지니는 비구는 비록 원을 세우고 후회하지 않으려는 마음을 구하지 않더라도 후회하지 않는 마음을 저절로 얻는다. 왜냐하면 법의 성품이 그러한 까닭이다. 비록 낙ㆍ멀리 여읨ㆍ편안함ㆍ진실하게 알고 보는 것ㆍ생사의 근심을 보는 것ㆍ마음이 탐착하지 않음ㆍ해탈ㆍ열반ㆍ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깨끗함ㆍ나지도 않고 없어지지도 않음ㆍ불성을 보고자 함을 구하지 않아도 저절로 얻는다. 왜냐하면 법의 성품이 그러한 까닭이다.”
사자후보살이 또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계행을 가짐으로 인하여 후회하지 않는 과를 얻고, 해탈로 인하여 열반의 과를 얻는다면 계행은 인이 없고 열반은 과가 없을 것입니다. 계행이 만일 인이 없다면 항상하다고 할 것이며, 열반이 인이 있으면 이는 무상함일 것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열반은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은 있는 것이니 본래 없던 것이 지금은 있다면 이는 무상한 것입니다. 마치 등불을 켜는 것과 같을 것이며, 열반이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나이고 즐겁고 깨끗하다고 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참으로 훌륭하다. 그대는 일찍이 한량없는 부처님께 선근을 심었으므로 여래에게 이러한 깊은 이치를 묻는구나. 선남자야, 본래의 생각을 잊지 않고 이렇게 묻는구나. 내가 생각하니 지나간 옛적 한량없는 겁 전에 바라나성에 부처님께서 나셨으니 이름이 선득(善得)이었다.
그때 그 부처님께서 3억 년 동안에 이 『대열반경』을 연설하셨고, 나는 그대와 더불어 저 부처님 회상에 있었다. 내가 이런 일을 그 부처님께 물었지만 그때 여래께서는 중생을 위해서 삼매에 드시고 이 뜻을 대답하지 않으셨다.
훌륭하구나. 대사여, 능히 이러한 지난 생의 일을 기억하는구나. 자세히 들어라. 그대에게 말하겠다.
계행에도 인이 있으니 바른 법을 듣는 것이다. 바른 법을 듣는 것도 인이 있으니 선지식을 가까이 하는 것이다. 선지식을 가까이 함에도 인이 있으니 믿는 마음이 있는 것이다. 믿는 마음이 있는 것도 인이 있는데, 인에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법을 들음[聽法]이며 둘째는 뜻을 생각함[思性義]이다.
선남자야, 믿는 마음은 법문 듣는 것을 인하고 법문 듣는 것은 믿는 마음을 인하니 이 두 법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된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니건외도(尼乾外道)들이 틀[拒]을 세워 병(甁)을 드는 것이 인과가 되어 서로 여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마치 무명의 연(緣)으로 행이 있고 행의 연으로 무명이 있는 것과 같아서, 무명과 행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된다. 나아가 생(生)은 능히 법을 내지만 스스로 나지는 못하니, 스스로 나지 못하므로 생생(生生)을 말미암아 나는 것이며, 생생도 스스로 나지 못하고 생을 의지하여 난다. 그러므로 두 생은 인도 되고 인의 인도 되며, 과도 되고 과의 과도 된다. 선남자야, 믿는 마음과 법문을 듣는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과이고 인이 아닌 것은 대열반이다. 무슨 까닭으로 과라고 하는가? 으뜸가는 과[上果]인 까닭이며, 사문의 과이며 바라문의 과이며 생사를 끊었으며 번뇌를 깨뜨렸으므로 과라고 하며, 모든 번뇌의 꾸짖음이 되므로 열반을 과라고 이름하고, 번뇌를 허물의 허물[過過]이라고 한다. 선남자야, 열반은 인이 없으나 그 자체는 과이다.
왜냐하면 났다 없어졌다 함이 없는 까닭이며, 지음이 없는 까닭이며 함이 있음이 아닌 까닭이며 함이 없는 법인 까닭이며 항상 변하지 않는 까닭이며 처소가 없는
까닭이며 처음과 나중이 없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만일 열반이 인이 있다면 열반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반(槃)은 인(因)이라는 말이며, 열(涅)은 없다[無]는 말이다. 인이 없으므로 열반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부처님 말씀과 같이 열반이 인이 없다고 하시나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다. 만일 없다고 한다면 여섯 가지 뜻에 맞아야 할 것입니다. 첫째는 끝까지 없으므로 없다고 하니, 온갖 법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음과 같습니다. 둘째는 어떤 때에 없으므로 없다고 하니,
마치 세상 사람이 말하기를 못이나 내에 물이 없다거나, 해와 달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셋째는 적으므로 없다고 하니 세상 사람들이 음식에 간이 적은 것을 간이 안 됐다 하고, 설탕물에 설탕이 적은 것을 달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넷째는 받지 않았으므로 없다고 함이니, 전타라가 바라문 법을 받아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바라문이 없다는 것과 까닭으로.
다섯째는 나쁜 법을 받았으므로 없다고 함이니, 세상 사람들이 나쁜 법을 받은 자는 사문이나 바라문이라고 하지 않으며, 그러므로 사문이나 바라문이 없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여섯째는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없다고 하니, 마치 희지 않은 것을 검다고 하고, 밝음이 없는 것을 무명이라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세존이시여, 열반도 그와 같아서 어떤 때에 인이 없으므로 열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그대가 지금 말하는 여섯 가지 뜻은 어찌하여 끝까지 없는 것을 가져다가 열반에 비유하지 않고, 어떤 때에 없는 것을 취하였는가? 선남자야, 열반의 자체는 끝까지 인이 없음이, 마치 내가 없고 내 것이 없음과 같다. 선남자야, 세상 법과 열반은 마침내 상대가 되지 않으므로, 여섯 가지 일은 비유가 되지 않는다.
선남자야, 온갖 법은 모두 내가 없지만 이 열반은 진실로 내가 있다. 그런 뜻으로 열반은 인이 없지만 그 자체는 과라는 것이다. 인이며 과가 아닌 것을 불성이라고 한다. 인으로 생긴 것이 아니므로 인이며 과가 아니라고 하며, 사문의 과가 아니므로 과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다.
무슨 까닭으로 인이라고 하는가? 아는 인[了因]이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내는 인[生因]이며 둘째는 아는 인이다. 능히 법을 내는 것을 내는 인이라고 이름하고, 등불이 물건을 비치듯 함을 아는 인이라고 한다. 번뇌의 결박은 내는 인이라 하고, 중생ㆍ부모는 아는 인이라고 한다. 곡식의 씨는 내는 인이라 하고, 땅과 물과 거름은 아는 인이라고 한다. 또 내는 인이 있으니, 6바라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다.
또 아는 인이 있으니, 불성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말한다. 또 아는 인이 있으니 6바라밀 불성이며, 또 내는 인이 있으니 수릉엄삼매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다. 또 아는 인이 있으니 8정도(正道)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또 내는 인이 있으니 믿는 마음의 6바라밀이다.”
사자후보살이 세존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바 여래와 불성을 본다는 것은 뜻이 무엇입니까? 세존이시여, 여래의 몸은 형상이 없어 길지도 않고 짧지도 않고 희지도 않고 검지도 않으며, 있는 곳이 없어 삼계에 있지 않으며, 함이 있는 모양이 아니며 안식(眼識)으로 볼 것이 아닌데 어떻게 보겠습니까? 불성도 그러합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부처의 몸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항상하고 둘째는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모두 중생을 제도하기 위하여
방편으로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눈으로 보는 것이고, 항상한 것은 여래 세존의 해탈한 몸이다. 눈으로 본다고도 하고 들어서 본다고도 한다. 불성도 두 가지이니, 첫째는 볼 수 있는 것이며, 둘째는 볼 수 없는 것이다.
볼 수 있는 것은 10주 보살과 부처님 세존이시며, 볼 수 없는 것은 모든 중생이다. 눈으로 본다고 함은 10주 보살이나 부처님 여래께서 중생에게 있는 불성을 눈으로 보는 것이며, 들어서 본다는 것은 온갖 중생이나 9주 보살이 불성이 있음을 듣는 것이다.
여래의 몸이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색(色)이며 둘째는 색이 아니다[非色]. 색이라고 함은 여래의 해탈이며, 색이 아니라고 함은 여래가 모든 색 모양[色相]을 영원히 끊은 까닭이다. 불성도 두 가지이니, 첫째는 색이며 둘째는 색이 아니다. 색이라고 함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이며, 색이 아니라고 함은 범부나 나아가 10주 보살이다.
10주 보살이 보기를 분명히 하지 못하므로 색이 아니라고 한다. 선남자야, 불성에 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색이며 둘째는 색이 아니다. 색이라고 함은 부처님과 보살을 말함이며, 색이 아니라고 함은 모든 중생이다. 색인 것은 눈으로 본다 하고, 색이 아닌 것은 들어서 본다고 한다.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바깥도 아니며, 비록 안도 바깥도 아니나 잃어지거나 부서지는 것도 아니므로 중생들이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것은, 우유 속에 타락이 있는 것이나 금강역사1)와 같고, 부처님들의 불성은 청정한 제호와 같다고 하셨는데, 어찌하여 여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불성은 안도 아니고 밖도 아니라고 하십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나도 우유[乳] 속에 타락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지만 타락이 우유에서 생기는 것이므로 타락이 있다고 하는 것이다.”
“세존이시여, 모든 생기는 법은 제각기
시절(時節)이 있습니다.”
“선남자야, 우유 상태일 때에는 타락이 없고 생소(生酥)와 숙소(熟酥)와, 제호도 없다. 모든 중생도 우유라고 할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우유 속에 타락이 없다고 한 것이다. 만일에 있다면 어찌하여 두 가지 이름을 얻지 못하여, 두 가지 기능이 있는 사람을 은장이 대장장이[金鐵師]라고 말하는 것과 같지 않은가?
타락 상태일 때에는 우유와 생소와 숙소와 제호가 없으니, 중생도 타락이라 하면 우유도 아니고 생소나 숙소나 제호도 아니며, 나아가 제호일 때에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이다. 정인이라 함은 우유에서 타락이 생기는 것과 같고, 연인이라 함은 효모[酵]나 따뜻함 등이니 우유에서 생기므로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고 하는 것과 같다.”
사자후보살이 또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없다면 각(角) 가운데도 없을 터인데 어찌하여 각 가운데서는 나지 않습니까?”
“선남자야, 각에서도 타락이 난다. 왜냐하면 내가 말하기를 연인에 두 가지가 있다고 하였으니, 첫째는 효모이며 둘째는 따뜻함이다. 각의 성품이 따뜻하므로 역시 타락을 내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또 이렇게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각이 타락을 낸다면 타락을 구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우유만 구하고 각은 찾지 않습니까?”
“선남자야, 그러기에 내가 말하기를 정인과 연인이 있다고 하였다.”
사자후보살이 또 여쭈었다.
“만일 우유 속에 본래는 타락이 없었는데 지금 비로소 생긴다면, 우유 속에 본래 암마라나무가 없었는데, 어찌하여 암마라나무는 나지 않습니까? 두 가지가 모두 없었던 까닭입니다.”
“선남자야, 우유에서도 암마라나무가 난다. 만일 우유를 부어 주면 하룻밤 동안에 다섯 자쯤 자란다. 그런 뜻으로 내가 두 가지 인을 말하였다. 선남자야, 만일 온갖 법이 한 가지 인으로만 난다면,
우유 속에서 어찌하여 암마라나무는 나지 않느냐고 따질 수 있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4대가 온갖 색법(色法)의 인연이 되지만 색이 제각기 달라서 같지 않다. 그런 이치로 우유 속에서 암마라나무가 나지 않는다.”
“세존이시여,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정인과 연인의 두 가지 인이 있다고 하면 중생의 불성은 무슨 인이라고 하겠습니까?”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도 두 가지 인이니, 첫째는 정인이며 둘째는 연인이다. 정인은 모든 중생을 말하는 것이고 연인은 6바라밀을 말하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저는 지금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있음을 압니다. 왜냐하면 세상에서 타락을 구하려는 사람들이 우유만 찾고 물은 찾지 않는 것을 보니 이것으로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선남자야, 그대가 물은 것이 뜻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마치 사람들이 얼굴을 보려고 칼을 드는 것과 같다.”
“세존이시여, 그런 뜻으로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있습니다. 칼에 만일 얼굴 모양이 없으면 무슨 까닭으로 칼을 들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칼 가운데 얼굴 모양이 있다면, 어찌하여 뒤바뀌겠느냐? 칼을 세우면 얼굴이 길게 보이고 뉘면 얼굴이 넓게 보이는 것이다. 이것이 만일 자기의 얼굴이라면 어째서 길게 보이며, 만일 다른 이의 얼굴이라면 어찌하여 자기의 얼굴 그림자라고 하느냐? 만일 자기의 얼굴로 인하여 다른 이의 얼굴을 본다면 어찌하여 나귀나 말의 얼굴은 보이지 않느냐?”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얼굴이 길게 보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눈의 광명이 실제로 저기 이르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먼 데와 가까운 데를 일시에 다 보는 까닭이며 중간에
있는 물건을 보지 못하는 까닭이다. 선남자야,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본다면 모든 중생이 모두 불을 볼 때에 어찌하여 타지 않느냐? 사람이 멀리 있는 흰 물건을 볼 때에 따오기인지 깃발인지 사람인지 나무인지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광명이 이르러 간다면 어떻게 수정 속에 있는 물건이나, 물속에 있는 고기와 돌을 보게 되느냐?
만일 이르지 않고서 본다면 어찌하여 수정 속의 물건을 보면서, 담 바깥 물건은 보지 못하느냐? 그러므로 눈의 광명이 저기 이르므로 길게 본다는 말은 옳지 않은 것이다. 선남자야, 그대의 말과 같이 우유에 타락이 있다면 우유를 파는 사람이 어째서 우유 값만 받고 타락 값은 받지 않으며, 피마[騲馬]를 파는 사람이 말 값만 받고 망아지 값은 달라고 하지 않느냐?
선남자야, 세상 사람이 아들이 없는 까닭으로 아내를 맞았는데, 아내가 만일 아기를 배면 처녀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만일 이 여자에게 아기를 낳을 성품[兒性]이 있었기에 맞았다면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아기를 낳을 성품이 있다면 손자를 낳을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손자를 낳는다면 이는 곧 형제이다. 왜냐하면 한배에서 나온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여자에게 아기의 성품이 없다’고 한다.
만일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한꺼번에 다섯 가지 맛이 보이지 않는가? 만일 나무의 씨 속에 니구타의 다섯 길 되는 성질이 있다면 어찌하여 한꺼번에 움과 줄기와 가지와 잎과 꽃과 과실의 다른 모양을 보지 못하는가? 선남자야, 우유의 빛이 때를 따라 다르고, 맛도 다르고 결과도 다르며, 나아가 제호도 그러한데 어찌하여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고 하겠느냐?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내일 생소를 먹을 터인데 오늘 벌써 냄새를 걱정하는 것과 같다. 우유 속에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다는 것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마치 사람이 붓과 종이와 먹으로써 글자를 만드는데, 이
종이에는 본래 글자가 없었다. 본래는 없었으므로 연을 반연하여 글자를 이루는 것이니 만일 본래부터 있었다면 어찌하여 여러 가지 연을 반연하겠느냐? 마치 푸르고 누른 것이 화합하여 초록빛을 이루는 것 같아서 이 두 가지 빛에는 본래 초록빛 성품이 없는 것이다. 만일 본래 있었다면 어찌하여 화합하여서야 이루겠는가?
선남자야, 비유하면 중생들이 먹는 것을 인하여 목숨을 얻는데 음식 속에는 실제로 목숨이 없다. 만일 본래 있었다면 먹기 전에는 음식이 목숨일 것이다. 선남자야, 온갖 법들이 본래 성품이 없는 것이다. 그런 뜻으로 내가 이런 게송을 말하였다.

본래는 없으나 지금은 있으며
본래는 있으나 지금은 없으니
이 세상 오는 세상 지나간 세상에
있다는 모든 법 옳은 곳 없다네.

선남자야, 온갖 법이 인연으로 생기고 인연으로 없어진다.
선남자야, 만일 중생들 속에 불성이 있다면, 모든 중생은 지금의 나와 같이 부처의 몸을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다. 중생의 불성은 깨지지 않고 부서지지 않고 끄달리지 않고 붙잡히지 않고 얽매이지 않고 속박되지 않아서 중생 가운데 허공이 있는 것과 같다. 모든 중생에게 다 허공이 있지만, 장애되지 않으므로 제각기 허공 있음을 보지 못하며,
만일 중생에게 허공이 없다면, 가고 오고 다니고 서고 앉고 누움이 없을 것이며, 나지도 못하고 자라지도 못할 것이다. 이런 뜻으로 나의 경 가운데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게 허공계가 있다’고 하였으니 허공계를 일러 허공이라고 한다. 중생의 불성도 이와 같아 10주 보살이라야 그것을 조금이나마 볼 수 있으니, 마치 금강주(金剛珠)2)와 같다.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은 부처님의 경계이며, 성문ㆍ연각으로는 알 바가 아니다. 모든 중생들은 불성을 보지 못하는 까닭에 항상 번뇌에 얽매여서 생사에 헤매는 것이며, 불성을 보기 때문에 모든 번뇌가 속박하지
못하여 생사에서 해탈하여 대열반을 얻는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모든 중생에게 불성의 성질이 있는 것이, 마치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우유에 타락의 성품이 없다면, 어찌하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정인이며 둘째는 연인이다. 연인이라고 함은 효모와 따뜻함이니, 허공은 성품이 없으므로 연인이 없다’라고 하셨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였다.
“선남자야, 만일 우유 속에 반드시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어찌하여 연인(緣因)을 필요로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성품이 있기 때문에 연인을 구합니다. 왜냐하면 분명하게 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연인은 곧 아는 인이니, 세존이시여, 마치 어둠 속에 먼저 물건이 있었기에 물건을 보려고 등불로 비치는 것과 같습니다. 만일 본래 없었으면 무엇을 등불로 비치겠습니까?
마치 진흙 속에 병(甁)이 있으므로 사람과 물과 물레와 노끈과 작대기 따위로 아는 인을 삼는 것이며, 니구타의 씨가 땅과 물과 거름을 추구하여 아는 인을 짓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유 속에 있는 효모와 따뜻함도 이와 같아서 아는 인을 짓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먼저부터 성품이 있어도 아는 인을 빌려서야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유 속에 먼저 타락의 성품이 있는 줄을 아는 것입니다.”
“선남자야, 만일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있다면, 이것이 곧 아는 인일 것이며, 만일 아는 인이라면 어찌하여 다시 알려고 하겠는가? 선남자야, 만일 이 아는 인의 성품이 아는 것이라면 항상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이며, 만일 스스로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다른 것을 알겠는가? 만일 말하기를 아는 인에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스스로 아는 것이며, 둘째는 다른 것을 아는 것이라 하면 그 뜻이 옳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는 인은 한 법인데 어떻게 둘이 있겠는가? 만일 둘이 있다면 우유도 마땅히 둘일 것이며, 만일 우유 속에 두 가지 모양이 없다면 어찌하여 아는 인에만
둘이 있다고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세상 사람들이 말하기를, ‘나까지 모두 여덟 사람이다’라고 하는 것과 같이 아는 인도 그와 같아서 스스로도 알고 다른 이도 아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아는 인이 만일 그렇다면 아는 인이 아니다. 왜냐하면 세는 이는 제 몸[自色]과 다른 몸을 셀 수 있으므로 여덟 사람이라고 말하고, 이 몸의 성품은 스스로 아는 상[了相]이 없으며, 아는 상이 없으므로 지혜의 성품을 의지하여야 저와 다른 것을 셀 수 있다. 그러므로 아는 인은 스스로도 알지 못하고, 다른 것도 알지 못한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의 불성 있는 이가 무슨 까닭으로 한량없는 공덕을 닦는가? 만일 닦는 것이 아는 인이라고 한다면, 이미 타락이 없어짐[壞]과 같다. 만일 인 가운데 반드시 과가 있다면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증장하지 않아야 할 것인데, 내가 보기에는 세상 사람들이 본래는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없다가 스승에게서 받고 나서 점점 증장한다.
만일 스승이 가르치는 것이 아는 인이라고 한다면 스승이 가르칠 때에는 받는 사람에게 계율과 선정과 지혜가 있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이것이 아는 인이라면 아는 것이 있지 않았을 것이니, 어떻게 계율과 선정과 지혜를 알아서 증장케 하겠는가?”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만일 아는 인이 없다면, 어떻게 우유가 있고 타락이 있다고 하겠습니까?”
“선남자야, 세상에서 물음에 대답하는 데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차츰차츰 대답하는 것[轉答]이니,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무슨 인연으로 금하는 계율을 받아 지니는가? 뉘우치지 않기 위함이고 나아가 대열반을 얻기 위함이다’라고 하는 따위이다. 둘째는 잠자코 대답하는 것[黙然答]이니 범지가 나에게 와서 묻기를 ‘나[我]라는 것이 항상합니까? 하기에, 내가 잠자코 있었던 것과 같은 것이다. 셋째는 의문하는[疑答] 대답이니,
이 경에서 말한 것처럼 ‘만일 아는 인이 둘이 있다면, 우유 속에는 어찌하여 두 가지가 있지 않은가?’ 하는 것 등이다. 선남자야, 나는 지금 차츰차츰 대답하는 것이다. 세상 사람이 우유가 있으면 타락이 있다고 하는 것은, 반드시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유가 있는 것을 타락이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불성도 그와 같아서 중생이 있으면 불성이 있는 것이니 마땅히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습니다. 과거는 이미 없어졌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는데 어떻게 있다고 하겠습니까? 만일 마땅히 있으리라 하여서 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렇지 않습니다. 마치 세상 사람이 현재에 아들이 없으면 아들이 없다고 말하는 것인데,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는 것을 어떻게 모든 중생이 다 불성이 있다고 말하겠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지나간 것을 있다고 함은, 비유하자면 귤을 심어서 싹이 나고 씨가 없어졌으나 싹도 달고 풋과일 맛도 달다가, 익고 나면 이내 시어지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이 신맛이 씨나 싹이나 풋과일 때에는 없었다가 익을 때의 색과 모양을 따라서 생기는 것이니, 이 신맛은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 있는 것이다. 본래는 없던 것이 지금에 있지만 근본을 인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본래의 씨가 비록 지나갔으나 있었다고 할 것이니, 이런 이치로 지나간 것을 있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찌하여 미래를 있다고 하는가?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참깨를 심을 때에 누가 묻기를 ‘무엇 하려고 심는가?’라고 하면, ‘기름이 있기에 심는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실로 기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참깨가 여문 뒤에 깨를 받아서 찌고 누르면 기름이 생길 것이므로, 이 사람의 말이 허망하지 않을 것이다. 이런 뜻으로 미래를 있다고 하는 것이다.
또 어찌하여 과거를 있다고 하는가? 선남자야,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외딴 데서 임금을 욕하였는데, 여러 해 뒤에 임금이 듣고 불러 묻기를 ‘어찌하여 나를 욕하였느냐?’라고 하였다. 그는 대답하기를 ‘대왕이여, 저는 욕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욕한 일은 이미 없어진 까닭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은 이렇게 말하였다.
‘욕을 한 너와 내가 모두 있는데 어찌하여
없어졌다고 하느냐?’
이리하여 목숨을 잃게 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이 둘이 실제로는 없지만 결과는 없지 않았으니, 이것을 말하여 지나간 것이 있다고 한다.
또 어찌하여 미래를 있다고 하느냐?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옹기장이에게 가서 병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옹기장이는 있다고 대답하였다. 옹기장이에게 실상은 병이 없었지만 진흙이 있으므로 병이 있다고 한 것이니, 이 사람의 말은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
우유 속에 타락이 있다는 것이나,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는 것도 이와 같다. 불성을 보고자 한다면 마땅히 시절과 인연을 관찰할 것이니,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는 것이 허망하지 않은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겠습니까? 정인이 있는 까닭입니다. 무엇이 정인인가 하면, 불성입니다. 세존이시여, 만일 니구타 씨에 니구타나무가 없다면 어찌하여 니구타 씨라 하고, 거타라(佉陀羅)3) 씨라고 하지 않습니까?
세존이시여, 마치 구담(瞿曇)4)성씨를 아지야(阿坻耶)5) 성씨라 일컫지 못하고, 아지야도 구담이라고 일컬을 수 없는 것처럼, 니구타 씨도 그와 같아서 거타라 씨라 일컫지 못하고, 거타라 씨도 니구타 씨라고 일컬을 수 없습니다. 마치 세존이 구담 성씨를 버릴 수 없듯이 중생의 불성도 그와 같으니, 이런 뜻으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있는 것을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씨 속에 니구타가 있다고 말한다면, 그 뜻이 그렇지 않으니, 만일에 있다면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선남자야,
세간의 물건들은 인연이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무엇을 인연이라고 하는가? 멀어서 보이지 않는 것은 허공을 나는 새의 발자국이며, 가까워서 보이지 않는 것은 사람의 속눈썹이며, 잘못되어 보이지 않는 것은 눈이 먼 이며, 생각이 어지러워서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이 전일하지 못한 이와 같고, 작아서 보지 못하는 것은 가는 티끌이며, 가려서 보지 못하는 것은 구름에 덮인 별이며, 많아서 보지 못하는 것은 볏단 속의 삼씨와 같고, 비슷해서 보지 못하는 것은 콩더미에 있는 콩과 같다.
니구타나무는 이러한 여덟 가지와는 같지 않은데, 만일 있다면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가? 만일 작아서 보지 못한다고 말한다면 그 뜻이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나무의 모양이 큰[麤] 까닭이다. 만일 성품이 가늘다면 어떻게 자라겠는가?
만일 가려서 보이지 않는다면 항상 보이지 않아야 할 것이며, 본디는 큰 모양이 없었는데, 지금에 큰 것을 본다고 하면 이 큰 것이 본디는 보이는 성품이 없음을 알 것이며, 본디는 보이는 성품이 없었는데 지금에 볼 수 있다면 이 보는 것도 본디는 성품이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씨도 그와 같아서 본디는 나무가 없던 것이 지금에 있다고 한들 무슨 허물이 있겠는가?”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부처님의 말씀과 같이 두 가지 인이 있으니, 첫째는 정인(正因)이며 둘째는 아는 인[了因]이라고 할 것입니다. 니구타의 씨가 땅과 물과 거름으로 아는 인을 삼기 때문에 작던 것이 커진다고 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선남자야, 만일 본래 있었다면 어찌 아는 인을 요구하겠는가? 만일 본디 성품이 없다면 아는 인이 무엇을 알겠는가? 만일 니구타에 본래 큰 모양이 없지만 아는 인을 인하여 큰 모양을 내었다고 하면, 어찌하여 거타라나무는 내지 않는가? 둘이 다 없던 까닭이다.
선남자야, 만일 작아서 보지 못한다면 큰 것은 볼 수 있을 것이다. 마치 한 티끌은 보지 못하더라도 여러 티끌이 화합하면 볼 수 있을 것이니, 그와 같이 씨 가운데 큰 모양은
볼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속에 이미 싹과 줄기와 꽃과 과실이 있고, 낱낱 과실마다 한량없는 씨가 있고, 낱낱 씨 속에 한량없는 나무가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크다고 하는 것이다. 이러한 큰 것이 있으므로 볼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선남자야, 만일 니구타 씨에 니구타의 성품이 있어서 나무를 자라게 한다고 하면, 이 씨가 불에 타는 것을 볼 때에는 이러한 타는 성품도 본래 있었다고 할 것이며, 만일 본래 있다면 나무는 자라지 못할 것이다. 만일 온갖 법이 본래 나고 없어짐이 있다면 어찌하여 먼저 났다가 나중에 없어지고, 한꺼번에 나고 없어지지 않는가? 이런 뜻으로 성품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자후보살이 또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니구타 씨에 본래 나무의 성품이 없는데 나무를 내었다면 이 씨에서 어찌하여 기름은 나오지 않습니까? 둘 다 마찬가지로 없는 까닭입니다.”
“선남자야, 이 씨 속에서 기름도 낼 수 있는데 본래는 성품이 없었으나 인연으로 하여 있는 것이다.”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어찌하여 참깨 기름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선남자야, 참깨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불의 인연으로는 불을 내고, 물의 인연으로는 물을 내는 것이어서, 모두 인연을 따르지만 상대되는 것은 함께 있지는 못하는 것이다. 니구타의 씨와 참깨 기름도 그와 같아서 모두 인연을 따르지만 제각기 서로 내지는 못한다.
니구타 씨의 성품은 냉(冷)을 다스리고, 참깨 기름의 성품은 풍(風)을 다스린다. 선남자야, 비유하면 사탕수수[甘蔗]의 인연으로 석밀(石蜜)과 흑설탕이 생기는데, 비록 한 가지 인연이지만 색과 모양이 제각기 달라서 석밀은 열(熱)을 다스리고 흑설탕은 냉을 다스린다.”
사자후보살이 말씀드렸다.
“세존이시여, 만일 우유 속에 타락의 성품이 없고 참깨에 기름의 성품이 없고, 니구타 씨에 나무의 성품이 없고, 진흙에 병의 성품이 없고,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면,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신바 모든 중생에게 모두 불성이 있으므로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으리라고 한 것은, 이치가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람과 천신이 성품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품이 없기 때문에 사람이 천신도 되고 천신이 사람도 되는데, 이는 업의 인연으로 되는 것이며 성품으로 되는 것이 아닐 것이며, 보살마하살도 업의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일 것입니다.
만일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무슨 인연으로 일천제(一闡提)들은 선근을 끊어 버리고 지옥에 떨어지는 것입니까?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면 일천제들이 끊지 못하여야 할 것이며,
만일 끊을 수 있다면 어떻게 불성이 항상하다고 말하겠습니까? 만일 항상함이 아니라면 불성이라고 하지 못할 것이며, 만일 중생들에게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처음으로 보리심을 낸다고 하며, 어찌하여 비발치(毗跋致)ㆍ아비발치(阿毗跋致)라고 하겠습니까? 비발치라고 하면 이 사람에게는 불성이 없는 것을 알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보살마하살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로 나아가며, 대자대비로 나고 늙고 죽음과 번뇌의 걱정을 보았고, 대열반에는 나고 늙고 죽음과 번뇌의 걱정이 없음을 보았으며, 3보와 업과 과보를 믿고, 계율을 받아 지니는 따위의 법을 불성이라고 할 것이니, 만일 이런 법을 여의고 불성이 있다면 무슨 필요로 이런 법으로써 인연을 삼았겠습니까?
세존이시여, 마치 우유는 인연을 의지하지 않고도 반드시 타락을 이루겠지만 생소(生酥)는 그렇지 않아 모름지기 인연을 의지하여야 합니다. 사람의 공력과 물병과 혼합시키는 것과 노끈입니다. 중생도 그러하여 불성이 있다면 인연을 여의고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을 것이며, 만일 반드시 있다면 수행하는 사람이 어찌하여 3악도의 고통과 나고 늙고 병들고 죽음을 보고 퇴전하는
마음을 내는 것입니까? 그리고 6바라밀을 닦지 않고도 마땅히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니, 마치 우유가 인연이 아니고도 타락을 이루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러나 6바라밀을 인하지 않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루는 것이 아니니, 이런 뜻으로 중생들에게 불성이 없다는 것을 알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먼저 말씀하시기를 승보가 항상하다고 하셨는데, 만일 항상하다면 무상이 아닐 것이며, 무상이 아니라면 어떻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습니까? 승보가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온갖 중생에게 불성이 있다고 말씀하십니까? 세존이시여, 만일 중생들이 본래부터 보리심이 없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도 없었다가 뒤에 있다고 하면 중생들의 불성도 그와 같아서, 본래는 없다가 뒤에 있을 것이니, 이런 이치로 온갖 중생이 마땅히 불성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장하고 장하다. 선남자야, 그대는 오래전부터 불성의 이치를 알았지만 중생들을 위하여서 짐짓 이렇게 묻는 것일 것이다. 모든 중생이 진실로 불성이 있지만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처음 보리심을 내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데, 선남자야, 마음은 불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마음은 무상한 것이고 불성은 항상하기 때문이다. 그대의 말이 어찌하여 마음이 퇴전하는가? 하지만, 실제로는 퇴전하는 마음이 없다.
마음이 퇴전한다면 마침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 못하며, 더디게 얻게 되므로 퇴전한다고 이름하는 것이다. 이 보리심은 실제로 불성이 아니다. 왜냐하면 일천제들이 선근을 끊고 지옥에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일 보리심이 불성이라고 하면 일천제들을 일천제라고 이름할 수 없으며, 보리심도 무상하다고
이름할 수 없다. 그러므로 보리심이 반드시 불성이 아닌 것을 알아야 한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인연을 의지할 필요가 없는 것이, 마치 우유가 타락이 되는 것과 같다고 함은 이치가 옳지 않다. 왜냐하면 만일 다섯 가지 인연이 생소를 이룬다고 하면 불성도 그와 같은 줄을 알기 때문이다. 마치 여러 가지 돌에 금도 있고 은도 있고 구리[銅]도 있고 철도 있는데 모두 4대로 되었으며, 이름도 같고 실상도 같으나 내는 것은 각각 같지 않으며, 반드시 중생의 복덕과 용광로와 사람의 공력 따위의 여러 가지 인연을 의지한 뒤에야 나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본래 금의 성품이 없음을 알아야 한다. 중생의 불성도 부처라고 하지 않고, 여러 가지 공덕과 인연이 화합하여 불성을 본 뒤에야 부처를 얻게 된다.
그대가 말하기를 ‘중생에게 다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보지 못하는가?’라고 함은 이치가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인연이 화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내가 두 가지 인을 말하였으니, 정인(正因)과 연인(緣因)이다. 정인은 불성이며 연인은 보리심을 내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 것이, 마치 돌에서 금이 나는 것과 같다.
선남자야, 그대가 말하기를 승보가 항상하다면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을 것이라고 하는데 선남자야, 승가라고 함은 화합(和合)이라는 말이며, 화합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세간의 화합이며 둘째는 제일의의 화합이다. 세간의 화합은 성문승이라 하고, 제일의의 화합은 보살승이라고 하는데,
세간승은 무상하고 불성은 항상하며 불성이 항상한 것처럼 제일의의 승도 그러하다. 또 승가가 있으니 법 화합을 말하는 것이다. 법 화합은 12부경을 말하는 것이니, 12부경이 항상한 것이므로 내가 말하기를 법승도
항상하다고 한다.
선남자야, 승가는 화합이라고 이름하고 화합은 12인연이라고 하니, 12인연 가운데도 불성이 있다. 12인연은 항상한 것이며 불성도 그러하므로 내가 말하기를 승가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 또 승가란 것은 부처님의 화합이니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승가에게 불성이 있다고 한다.
선남자야, 그대의 말이 ‘중생에게 만일 불성이 있다면 어찌하여 퇴전[退]하는 이가 있고 퇴전하지 않는 이가 있는가?’ 하는데, 자세히 들어라. 내가 그대를 위하여 분별하여 해설하겠다. 선남자야, 보살마하살은 열세 가지 법이 있으면 퇴전한다. 무엇이 열세 가지인가? 첫 번째는 마음에 믿지 않음이며, 두 번째는 마음을 짓지 않음이고, 세 번째는 의심하는 마음이며, 네 번째는 몸과 재물을 아낌이다.
다섯 번째는 열반에 대하여 두려움을 내어서 어떻게 중생으로 하여금 영원히 멸하게 하겠는가? 함이며, 여섯 번째는 마음에 견디지 못함이고, 일곱 번째는 마음이 조복되지 못함이며, 여덟 번째는 근심하고 괴로워함이고, 아홉 번째는 즐거워하지 않음이며, 열 번째는 방일함이며, 열한 번째는 제 몸을 가벼이 여김이고, 열두 번째는 스스로 번뇌를 보고 깨뜨릴 수 없다고 함이다. 열세 번째는 보리에 나아가는 법을 좋아하지 않는 것이다. 선남자야, 이것을 열세 가지 법이라고 하는데, 보살로 하여금 보리에서 퇴전하게 한다.
또 여섯 가지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파괴하는데, 무엇이 여섯인가? 첫째는 법에 인색함이며, 둘째는 모든 중생에게 선하지 않은 마음을 일으킴이고, 셋째는 나쁜 동무를 친근히 함이며, 넷째는 부지런히 정진하지 않음이고, 다섯째는 스스로 교만함이며, 여섯째는 세상 사업을 경영함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법이 보리심을 파괴한다.
선남자야, 어떤 사람이 ‘여러 부처님 세존께서는 인간 천상의 스승이며, 중생 중에 가장 높아서 비길 이 없으며, 성문이나 벽지불보다 훌륭하며, 법에 대한
눈이 밝아서 걸림 없이 법을 보며, 큰 고통 바다에서 중생들을 제도한다’는 말을 듣고 나서 곧 서원을 내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다면 나도 마땅히 얻을 것이다’라고 하며,
이런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마음을 내기도 하고 혹은 다른 이의 가르침을 듣고 보리심을 내기도 하였다. 혹은 보살이 아승기겁 동안에 고행을 닦은 뒤에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는 생각하기를 ‘나는 이런 고행을 감당할 수 없으니 어떻게 얻을 것인가?’ 하고 퇴전하는 마음을 낸다.
선남자야, 또 다섯 가지 법이 있어서 보리심을 퇴전하게 한다. 무엇이 다섯인가? 첫째는 외도에 출가하기를 좋아함이며, 둘째는 대자대비의 마음을 닦지 않음이고, 셋째는 법사의 허물 보기를 좋아함이며, 넷째는 항상 생사에 있기를 좋아함이고,
다섯째는 12부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기를 좋아하지 않음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 법으로 보리심을 퇴전하게 한다고 한다. 또 두 가지 법으로 보리심을 퇴전하게 하니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5욕락을 탐함이며, 둘째는 3보를 공경하거나 존중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인연으로 보리심이 퇴전한다.
어떤 것을 퇴전하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가? 어떤 사람이 ‘부처님께서는 나고 늙고 병들고 죽고 하는 속에서 중생을 제도하며, 스승에게 묻지 않고도 자연히 닦고 익혀져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 ‘만일 보리의 도를 얻을 수 있다면 나도 닦아서 반드시 얻으리라’하였다. 이 인연으로 보리심을 내고 짓는 공덕이 많거나 적거나 모두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회향하면서 서원을 세우기를 ‘제가 항상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를 친근히 하며, 항상 깊은 법을 듣고 다섯 가지 근[五情]이 구족하며, 설사 괴롭고 어려움을 만나더라도 이 마음을 잃지 말기를 원합니다.
또 여러 부처님과 부처님의 제자들이 나에게 항상 환희하는 마음을 내고, 다섯 가지 선근을 갖추기를 원합니다. 만일 중생들이 나의 몸을 찍으며 나의 수족과 머리와 눈과 사지를 베더라도 이런 사람에게 사랑하는 마음을 내어 스스로 기뻐할 것이며, 이런 사람들은 나의 보리 인연을 증장하게 하는 인연이 됩니다. 만일 이런 일이 없으면 내가 무슨 인연으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성취할 수 있을 것입니까?’라고 한다.
또 원을 세우기를 ‘나는 근(根)이 없거나 근이 둘이거나 여인의 몸을 받지 말며 남에게 얽매이지 말며 악한 주인을 만나지 말며 악한 임금에게 소속되지 말며 나쁜 나라에 나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만일 좋은 몸을 얻으면 문벌이 훌륭하고 재물이 많더라도 교만을 내지 않게 하며, 내가 항상 12부경을 듣고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고 쓰고 해설하며, 만일 중생을 위하여 연설하면 듣는 이가 공경하고 믿고 의심이 없으며, 나에게 나쁜 마음을 내지 않게 되길 원합니다.
차라리 조금 듣고 뜻을 많이 이해할지언정 많이 듣고 뜻을 알지 못함을 원치 않으며, 마음의 스승이 되기를 원하고 마음을 스승삼지 않으며,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업이 악한 일과 어울리지 않으며, 모든 중생에게 안락함을 베풀고, 몸의 계행과 마음의 지혜가 산과 같아서 움직이지 않으며, 위없는 바른 법을 받아 지니기 위해서는 몸과 목숨과 재물을 아끼지 않으며 부정한 물건은 복업으로 여기지 않으며, 정당한 생업[正命]으로 살아가고 삿된 마음이 없어지길 원합니다.
은혜를 받은 때에는 작은 은혜라도 크게 갚기를 생각하며, 세상에 있는 사업과 기술을 잘 알고, 중생들의 각 지방 말을 잘 알아서 12부경을 읽고 외우고 쓰면서 게으른 마음을 내지 않으며, 만일 중생들이 듣기를 좋아하지 않으면 방편으로 인도하여 듣기를 좋아하게 하며,
말이 항상 부드러워서 나쁜 말을 하지 않으며,
화합하지 못하는 대중은 화합하게 하고, 근심하고 두려워하는 이가 있으면 근심과 두려움을 떠나게 하며, 흉년 드는 세상에는 풍족하게 하고, 병이 도는 세상에선 용한 의원이 되어 병에 쓰는 약이나 재물을 마음대로 하여 앓는 이로 하여금 쾌차하게 하며, 도병겁(刀兵劫)이 생길 때에는 큰 세력이 있어서 상하고 해치려는 것을 끊어 버리고 남는 일이 없게 하며, 중생들의 가지가지 공포를 덜어 줄 것이니, 이른바 죽는 공포ㆍ가두고 얽어매고 때리는 일ㆍ수재ㆍ화재ㆍ법률을 범하고 난리가 생기는 일ㆍ빈궁하고 파계하는 일ㆍ나쁜 소문ㆍ나쁜 갈래ㆍ이런 따위의 공포를 모두 끊을 것입니다.
부모와 스승과 어른에게는 항상 공경하는 마음을 내고 원수들에게는 자비한 마음을 가지며, 항상 여섯 가지 생각함[六念]과 공삼매문(空三昧門)과 12인연과 생멸하는 관[生滅等觀]과 숨을 내쉬고[出息] 들이쉬는 것[入息]과 하늘의 행과 범행과 성행(聖行)과 금강삼매와 수릉엄정을 닦으며, 3보가 없는 데서는 스스로 고요한 마음을 얻게 하며,
설사 몸과 마음으로 큰 고통을 받을 때라도 위없는 보리심을 잃지 말게 하며, 성문이나 벽지불의 마음으로 만족한 줄을 알지 못하게 하며, 3보가 없는 곳에서는 삿된 소견을 파할지언정 그의 도를 익히지 않으며, 법에 자재함을 얻고 마음에 자재함을 얻으며, 함이 있는 법에는 분명하게 허물을 보고 나로 하여금 2승의 도과를 무서워하기를 목숨을 아끼는 이가 몸 버리기를 무서워하듯 하며,
중생을 위하여 세 가지 나쁜 갈래에 있기를 좋아하기를 중생들이 도리천에 나기를 좋아하듯 하며, 낱낱 사람들을 위하여 한량없는 겁 동안에 지옥의 고통을 받으면서도 마음에 뉘우치지 않게 하며, 다른 이가 이익 얻음을 보고도 질투하는 마음을 내지 않고 항상 기뻐하기를 자기가 낙을 얻은 듯이 하게 되길 원합니다.
3보를 만나거든 의복ㆍ음식ㆍ와구ㆍ가옥ㆍ의약 등과 꽃ㆍ향ㆍ풍악과
깃발ㆍ일산ㆍ7보로 공양할 것이며, 부처님의 계율을 받거든 견고하게 보호하고 범할 생각을 내지 말며, 보살들이 행하기 어려운 고행을 한다는 말을 듣거든 환희로운 마음으로 후회하지 말며, 지나간 세상의 숙명(宿命)을 알고 탐욕과 성내는 일과 어리석은 업을 짓지 말며, 과보를 받기 위하여 인연을 모으지 말고, 현재의 낙에 탐착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선남자야, 만일 이러한 서원을 내는 이가 있으면 보살이라고 할 것이니, 보리심을 퇴전하여 잃지 않을 것이며, 시주라고도 할 것이니, 여래를 뵙고 불성을 분명히 알 것이며 중생들을 조복하여 생사에서 해탈하게 하며 위없는 바른 법을 보호하여 가지고 6바라밀을 구족할 것이다. 선남자야, 이런 뜻으로 퇴전하지 않는 마음을 불성이라고 하지 않는다.
선남자야, 그대는 퇴전하는 마음이 있다고 해서 모든 중생에게 불성이 없다고 말하지 말라. 비유하여 말하면 어떤 두 사람이 이런 말을 들었다.
‘다른 지방에 7보로 된 산이 있고 산에 맑은 샘이 있는데, 물맛이 매우 좋고, 그 산에 가는 사람은 빈궁을 영원히 면하며 그 물을 먹으면 만 년을 살 수 있지만 길이 멀고 험해서 가기가 어렵다.’
그리하여 그 두 사람이 함께 길을 떠나는데, 한 사람은 가지가지 행구를 준비하였고, 다른 한 사람은 빈손으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함께 앞으로 향하여 가다가 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보물을 많이 가지고 오는데 7보가 구족하였다. 두 사람은 앞으로 가서 물었다.
‘여보시오. 그 지방에 참으로 7보산이 있습니까?’
그 사람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진짜로 있고 거짓말이 아니오. 나는 보물을 많이 얻어 가졌고 그 물도 먹었소만, 길이 험하고 도적이 많고 자갈밭과 가시밭뿐이라오. 물도 풀도 없어서 가는 사람은 천 명 만 명이지만 도착한 사람은 대단히 적소.’
이 사실을 듣고 한 사람은 후회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길이 그렇게 멀고 고생이 한두 가지가 아닌데, 가는 사람은 많으나 도착한 사람은 몇 사람 안 된다고 하니, 난들 어떻게 갈 수 있겠는가? 지금 나의 살림은 그런 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 거기를 가다가는 혹시 죽을지도 모른다. 몸을 보전하지 못하면 장수가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다른 이도 도착한 사람이 있으니 나도 갈 수 있을 것이다. 만일 가기만 하면 소원이 만족하여 보물도 많이 얻고 장수하는 물도 마실 것이다. 만일 이르지 못하면 죽기로 작정하리라.’
그때 두 사람이 한 사람은 후회하여 돌아서고, 한 사람은 앞으로 가서 그 산에 당도하였다. 그래서 보물을 많이 얻었고 물도 마음껏 먹었으며, 많은 보배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를 봉양하고 친척들까지 보태주었다. 후회하면서 먼저 돌아왔던 사람이 이 일을 보고는 마음에 열이 나서 ‘저 사람이 갔다 왔는데 난들 어찌 그냥 있을 것인가?’ 하고 곧 행장을 차려서 길을 떠났다.
7보산은 대열반에 비유하고, 맛있는 물은 불성에 비유하며, 두 사람은 초발심한 두 보살에 비유하고, 험악한 길은 생사에 비유하며, 길에서 만난 사람은 부처님 세존에 비유하고, 도적이 있는 것은 네 마군에 비유하고, 자갈밭 가시밭은 번뇌에 비유하고, 물도 풀도 없다는 것은 보리의 도를 익히지 않는 데 비유하고, 한 사람이 돌아선 것은 퇴전한 보살에 비유하고, 곧장 간 사람은 퇴전하지 않는 보살에 비유한 것이다.
선남자야, 중생의 불성이 항상 있어 변하지 않는 것이 저 험한 길과 같은데, 어떤 사람이 후회하고 돌아왔다고 하여서 도가 무상하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불성 또한 그러하다. 선남자야, 보리의 길에는 끝내 퇴전하는 이가 없다. 선남자야, 그때 후회하고 돌아왔던 사람도 저번에 같이 가던 사람이 보배를 얻어 가지고 와서 형제가 자재하게 부모를 봉양하고 친척들을 도와주면서 안락하게 사는 것을
보고는 마음에
열이 나서 즉시 행장을 차려 가지고 다시 떠나서 몸도 돌아보지 않고 모든 곤란을 참아가면서 마침내 7보산에 이르렀으니 퇴전하였던 보살도 그와 같다. 선남자야, 모든 중생이 반드시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룰 것이니, 이런 뜻으로 나의 경에 말하기를 온갖 중생이나 나아가 5역죄나 4중금을 범한 이와 일천제들도 모두 불성이 있다고 하였다.”
사자후보살이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여 보살이 퇴전하는 이와 퇴전하지 않는 이가 있습니까?”
“선남자야, 만일 보살이 여래의 32상을 얻는 업의 인연을 닦아 익히는 이는 퇴전하지 않는다고 하며, 보살마하살이라고 이름하며, 불퇴전이라고 이름하며, 모든 중생들을 불쌍히 여긴다고 이름하며, 모든 성문ㆍ연각보다 훌륭하다고 이름하며, 아비발치라고 이름한다. 선남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계행을 가지고 흔들리지 않으며 보시하는 마음을 옮기지 않으며, 진실한 말에 머물기를 수미산같이 하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발바닥이 상자 바닥처럼 평평한 모양[奩底相]을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부모에게나 화상(和上)에게나 어른에게나 나아가 축생에게까지 법다운 재물로 공양하거나 공급하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발바닥에 천 개의 바퀴살 무늬[千輻輪相]가 있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생명을 죽이지 않고 훔치지 않고 부모와 스승에게 항상 환희한 마음을 내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세 가지 잘 생긴 몸매[相好]를 얻는다. 첫째는 손가락이 가늘고 길며, 둘째는 발꿈치가 길며, 셋째는 몸이 방정하고 곧으니, 이 세 가지 모양은 같은 업의 인연이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4섭법[攝法]으로 중생을 이끌어 들이면, 이러한 업의 인연으로 손가락 발가락 사이에 흰 거위와 같은 비단결 같은 막이 있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부모나 스승이 병들었을 때에 손수 씻고 붙들고 안마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손과 발이 보드랍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계율을 가지고 법을 듣고 보시하기를 만족함이 없이 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관절이나 복사뼈가 통통하고 원만하며, 몸의 털이 위로 쏠리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마음을 오로지 하여 법을 듣고 바른 교법을 연설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장딴지가 사슴의 다리 같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에게 해치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음식에는 만족함을 알며, 보시하기를 항상 좋아하고 병든 이를 보살피고 약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원만하기가 니구타나무와 같고, 손이 무릎을 지나고, 정수리에 육계가 있으며, 정상(頂相)을 볼 수 없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두려워하는 이를 보면 구호하여 주고, 헐벗은 이를 보고 옷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남근이 몸 안에 숨어 있는 모양[陰藏相]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지혜 있는 이를 친근히 하고 어리석은 이를 멀리하며, 묻는 일에 대답하기 좋아하고 다니는 길을 깨끗이 쓸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살결이 보드랍고 몸의 털이 오른쪽으로 쏠리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의복ㆍ음식ㆍ와구ㆍ의약ㆍ향ㆍ꽃ㆍ등불 따위로 남에게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몸이 금빛 같고 늘 광명이 빛나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때에, 보배로운 것들을 아낌없이 버리되 복밭인가 아닌가를 보지 않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일곱 군데가 원만한 모양[七處滿相]을 얻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보시할 때에 마음에 의심을 내지 않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부드러운 음성을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법답게 재물을 구하여 보시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뼈마디가 원만하고 사자의 웃통 같고 팔과 팔꿈치가 원만하고 가늘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간하는 말과 욕설하는 말과 성내는 마음을 멀리 여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40개의 이가 희고 깨끗하고 가지런하고 조밀하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모든 중생에게 대자비를 닦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두 송곳니가 희고 크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항상 원하기를 와서 달라는 이에게 달라는 대로 주리라 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사자와 같은 뺨을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중생들이 달라는 대로 음식을 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맛 가운데 좋은 맛을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스스로 열 가지 선한 일을 행하고 남에게까지 교화하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넓고 긴 혀를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다른 이의 단점을 들추어내지 않고 정법을 비방하지 않으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범(梵)음성을 얻는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원수나 미운 이를 보고 기쁜 마음을 내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속눈썹이 검붉게 된다. 만일 보살마하살이 다른 이의 덕을 숨기지 않고 잘한 일을 드날리면 이런 업의 인연으로 양미간의 백호상을 얻는다. 선남자야, 만일 보살마하살이 이렇게 32상을 얻을 업의 인연을 닦으면 보리심이 퇴전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선남자야, 온갖 중생들을 헤아릴 수 없으며 부처님의 경계와 업의 과보와 불성 또한 헤아릴 수 없다. 왜냐하면 이 네 가지 법은 모두
항상한 것이며, 항상하여 헤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온갖 중생은 번뇌가 덮였으므로 항상하다고 이름하며, 항상한 번뇌를 끊으므로 무상하다고 한다.
만일 온갖 중생이 항상하다면, 어찌하여 8성도를 닦아서 모든 괴로움을 끊겠는가? 모든 괴로움이 만일 끊어지면 무상하다 하고 받는 낙은 항상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기를 ‘모든 중생들이 번뇌가 덮여서 불성을 보지 못하고 보지 못하기 때문에 열반을 보지 못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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