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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18 불교 (니건자문무아의경/尼乾子問無我義經)

by Kay/케이 2023. 5.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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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니건자문무아의경(尼乾子問無我義經)

 

니건자문무아의경(尼乾子問無我義經)


마명(馬鳴) 모음
일칭(日稱) 등 한역
조환기 번역


이때 니건자1) 등은 마음속으로 다른 견해[異見]를 품고, 의혹이 일어나서 대승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解大乘者]을 찾아가서 예를 갖추고 합장하여 공경을 표하고 무아(無我)의 의미를 물었다.
“마음속의 어둠을 없애버릴 수 있도록,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이, 저를 위하여 진리의 가르침을 열어주십시오.
만약 이 몸에 나[我]가 없다면 저 최상의 자아(自我)도 있을 수 없을 터인데 무슨 까닭에 이 몸에는 현실적으로 울고, 웃고, 즐거워하고, 분노하고, 아만(我慢)에 사로잡히고, 질투하고, 이간질[兩舌]하는 등의 일이 있습니까?
있는지 없는지에 대하여 분명히 알 수 없으니 인자(仁者)시여, 바라옵건대 저를 위해서 의심을 없애주소서.”
대승의 뜻을 이해하는 사람이 니건자에게 말하였다.
“그대가 먼저부터 집착한 최상의 자아[最上我]란 완전히 허망한 것이다. 무엇을 있다 하며, 무엇을 없다 하는가? 이 둘 가운데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다. 만약 자신의 머리카락ㆍ피부ㆍ살ㆍ근육ㆍ뼈ㆍ지방ㆍ골수ㆍ창자ㆍ위장ㆍ손발의 모든 몸의 부분을 최상의 자아로 여긴다면 안팎에서 찾아보라. 어디에서 보겠는가?”
이때 니건자가 지자(智者)에게 말하였다.
“나는 육안이기에 볼 수 없거니와, 천안(天眼)이 있는 이는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자가 말하였다.
“천안(天眼)으로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 그는 현색(顯色)2)도 아니요, 형색(形色)3)도 아니어서, 자성이 공하거늘 어찌 볼 수가 있겠는가?”
니건자가 말하였다.
“그것은 결코 없는 것입니까?”
지자가 말하였다.
“만약 없다고 한다면 어찌 현전에 인연따라 울음과 웃음 등의 모습이 생기는 것을 보겠는가? 혹 있다거나 혹 없다거나 하는 것은 둘 다 삿된 망상이고 바른 진리가 아니다.”
니건자가 말하였다.
“만약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주장을 모두 말할 수 없다면 어찌하여 이 몸이 현전에 머무는 것[所住]이 있습니까?”
지자가 답하였다.
“머무는 것의 모습[所住相]이란 조금도 있지 않다.”
니건자가 말하였다.
“만약 머물러 있는 곳이 없다면 허공과 같지 않겠습니까?”
지자가 말하였다.
“그대가 말한 것과 같이 허공과 같기 때문이다.”
니건자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울고 웃는 등의 모습을 어떻게 버릴 수 있겠나이까?”
지자가 말하였다.
“그 이치 가운데 두 종류가 있다. 첫째는 세속(世俗)이고, 둘째는 승의(勝義)이다. 세속(世俗)의 말에 의지하면 나와 남, 생명이 있는 것[命者]ㆍ사부(士夫)4)ㆍ보특가라(補特伽羅)5)ㆍ작자(作者)6)ㆍ수자(受者)7)ㆍ재물ㆍ보석ㆍ처자ㆍ친척ㆍ친구 등과 같은 차별이 있다.
승의(勝義)에 의지하면 곧 나와 남, 생명이 있는 것 내지 친구 등의 일[事]이 없고, 또한 조그마한 차별 등의 모습[相]도 없다.
만약 세속의 말에 의지하면 생멸(生滅)과 선악(善惡)의 과보가 있거니와, 만약 승의의 말에 의지하면 생멸과 선악의 과보가 없다.
그 진여법(眞如法)의 자성(自性)은 본래 청정하여 번뇌도 없고, 더러움에 물듦도 없고, 깨달음[覺了]도 없어 본래 적정(寂靜)하니 이를 이름하여 진여의 자성[眞如自性]이라고 한다.”
이 뜻을 거듭 밝히기 위해 게송으로 말하였다.

세속제(世俗諦)와 승의제(勝義諦)
이 둘을 이제 마땅히 말하리니
세속제는 곧 세상의 법이고,
승의제는 잘못이 없는 최상법이니

유정은 세속에 의지하여
번뇌를 더욱 일으키고,
윤회에 오래도록 빠져있어서
승의법을 알지 못하네.

세속법에 의지하는 까닭에
나와 남을 가르는 변계소집(遍計所執)을 일으켜
분별과 의혹을 낳아서
모든 고뇌를 받네.

저 어리석은 범부들은
긴긴 세월 핍박받아
번뇌를 벗어나는 출리(出離)의 인(因)을 닦지 못하였으니
어찌 해탈의 이치를 알겠는가?

어리석은 사람들은 항상 세간의
생멸법(生滅法)에만 의지하여
오취(五趣)8)의 흐름 속에서
상속이 끊이지 않네.

승의법에 통달하지 못한 까닭에
괴로움을 없애는 요체를 알지 못하고
전전(展轉)하여서 윤회를 받네.
누에가 스스로를 묶어두듯이.

또는 해와 달이
하늘을 돌며 쉼이 없는 것처럼
중생들이 삼유(三有)9) 가운데
왕래함도 이와 같네.

모든 행은 다 무상하여
찰나에 변해가니
세속법을 멀리 여의고
마땅히 승의제를 구해야 하리.

모든 천상에 사는 신이나
건달바 등에 이르기까지
저 무상한 이치를 벗어날 수 없으니
이는 모두 세속의 과보일 뿐.

야차와 귀신 등이
밝은 세계를 성취하여 얻었어도
악취를 면할 수 없으니
이는 모두 세속의 과보일 뿐.

제석천과 전륜왕이
복을 얻는 과보가 남과 같지 않더라도
짐승으로 태어남을 면할 수 없으니
이는 모두 세속의 과보일 뿐.

사람과 천상이 받는 오욕(五欲)의 즐거움도
결정코 마땅히 버려야 하니
저 보리심(菩提心)에서
지혜로써 항상 관찰하여

자성에 집착할 바가 없으니
일체가 다 공하여
희론(戱論)10)을 초월하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단단한 것도 유연한 것도 아니요
뜨거운 것도 차가운 것도 아니요
접촉도 집수(執受)11)도 아니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긴 것도 짧은 것도 아니요
둥글지도 모나지도 않고
미세하지도 거칠지도 않으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흰 것도 붉은 것도 아니요
검은 것도 누런 것도 아니요
형색(形色)도 현색(顯色)도 아니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색도 빛도 아니요
세간에 움직이나 속박되지 않고
허공처럼 머물지 않으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사유와 관찰을 떠나
외도들의 경계(境界)가 아니고
지혜와 연관되어 있으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서로 비슷한 것도 상반된 것도 아니고
비할 바 없고 항상 적정하며
진여의 자성은 본래 변하지 않으니
이것이 보리심의 모습이라.

마치 물거품 같고
환상으로 만든 것과 같고, 아지랑이 같고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모든 것은 견고하지 않아

이 몸은 마치 굽지 않은 질그릇 같고,
허깨비로 가득 차 있어
탐ㆍ진ㆍ치의 삼독(三毒)과 상응하여
필경에는 공(空)하여 있지 않네.

마치 달이 구름에 가리어지면
순식간에 나타나지 않듯이.
깊고 깊은 반야로써
유위(有爲)에 통달하니 환(幻)과 같고

중생과 기세간(器世間)12)
모든 것이 다 꿈과 같네.
자기 마음의 분별로 말미암으니
저 마음도 또한 꿈과 같도다.

만약 사람이 바른 이치에 의지하여
지혜로써 수행하면
모든 장애와 더러움을 버리고
속히 위없는 도를 얻으리라.

이 가장 뛰어난 지혜는
모든 부처님께서 칭찬하신 바이네.
지혜로운 사람은 잘 헤아려서
열심히 위없는 법을 구하여

유위의 잘못을 벗어나
진제(眞諦)의 항상하고 수승한 덕목을 증득하리니
이러한 해탈로 말미암아
일체에 대해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리.

이때 저 외도의 무리들이
듣고 환희심을 내어
잘 관찰하고 의심을 제거하여
대승의 지혜를 깨달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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