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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30 불교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하권

by Kay/케이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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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하권

 

달마다라선경 하권


동진 천축 불타발타라 한역
홍승균 번역


9. 수행방편도부정관퇴분(修行方便道不淨觀退分)

내 능력이 가능한 대로
이미 안반념(安般念)을 설했으니
부정관(不淨觀)의 수행에 대해
차례로 분별하리라.

부정(不淨)의 방편관(方便觀)과
사유념(思惟念)의 물러나 줄어듦과
밝은 지혜를 아는 모양을
지금 내가 설하리라.

처음 방편을 수행할 때에
몸의 작은 부분에서 시작하라.
이 깨끗함의 뒤에 있는 가죽과 살을 열어
그 일어나는 모양을 관하라.

비록 잠시 가죽과 살을 허물었다 하더라도
방편을 힘쓰지 않으면
정상(淨想)이 다시 생기리니
이름하여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응하는 바를 일으키지 못하고
거듭 가죽과 살을 허문다 하더라도
정상(淨想)이 없어지지 않는다면
또한 이름하여 수행퇴라 한다.

수행에 애욕(愛欲)이 늘어나면
마땅히 무덤 사이를 찾아가서
저 부정상(不淨相)을 취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서 앉아라.

눈으로 본 온갖 시체들처럼
내 몸 또한 그런 것이니
일심(一心)으로 속을 관찰하면
저 무덤에서 본 모양과 같다.

저것이 나의 증거가 되니
이로 해서 진실을 얻게 된다.
이미 진실한 모양을 얻으면
다시는 삿된 생각[邪想]이 일지 않는다.

이와 같이 방편으로 수행을 해도
혜안(慧眼)이 오히려 청정해지지 않으면
이것이 전도(顚倒)와
무지(無智)와 어리석음[癡冥]의 취(聚)임을 알아야 하리라.

만약에 발가락을 인연해서
혼란하여 마음이 머물지 못하면
마땅히 위에다 마음을 묶어 두고
관찰을 하여 승진(升進)을 구해야 한다.

위의 괴색처(壞色處)에 대해서도
마음이 다시 어지럽게 달리면
마땅히 힘써 정진하고
방편으로 퇴과(退過)를 여의어

저 번뇌에 염착(染着)이 되어서
해탈에 이르지 못하게 하지 말라.
스스로 방편에 열심히 정진하면
신속히 열반에 이르게 되리라.

몸의 괴상(壞相)에서
마음을 묶어 흩어짐이 없게 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아 익혀서
번뇌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

수행에 의한 미묘한 생각은
세존께서 이를 설하신 바이다.
언제나 그 생각을 수호한다면
이것이 끝내 퇴하여 줄어들지 않으리라.

내신(內身)을 관찰함이 구족하면

그 생각이 이미 견고하리라.
다음에는 마땅히 외연(外緣)을 관해서
차츰 익혀서 증광(增廣)토록 하라.

외연에 대하여 이미 두루 충실하면
견고한 삼마제(三摩提)가 되리라.
오래지 않아
차례로 모든 번뇌가 멸진됨을 알아야 하리라.

만약 임금에게 기갑(器甲)이 없다면
그 안족(安足)함에 있어서 견고하지 않고
원수의 적을 막으려 한다 해도
반드시 그로부터 해를 입고 말리라.

자신의 몸을 수행함에 있어서
어리석어 결정하지 못하고
그 외연(外緣)을 보고자 한다면
반드시 수행에서 퇴전하리라.

내 이미 비구가
영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수행의 후퇴함을 설했노라.
그런데 그 외에도 퇴과(退過)가 있으니
지금 설하는 것을 잘 들어라.

수행의 후퇴는
어리석음[癡冥]에 빠져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성한 번뇌의 업행(業行)으로
막히고 가려진 것임을 알아야 한다.

어떤 사람은 색욕(色欲)으로 인해
번뇌를 일으켜서 후퇴하니
저 곱고 예쁜 자색으로 해서
어리석음과 애욕이 정념(正念)을 가리는 것이다.

무늬가 광택을 발하는
갖가지 좋은 의복들과
영락으로 장엄(莊嚴)된 도구들과
금은 등 갖가지 미묘한 보물
전에 속세에서 즐기던 이런 것들이
수행을 하면서도 생각이 나
이것으로 인해 욕상(欲想)이 동하면
반드시 물러나게 될 것임을 알아야 한다.

형상(形相)의 단엄(端嚴)함을 헤아려
곳곳에서 모습이 훌륭한
모든 몸의 지절(肢節)에 탐착하고
망상(妄想)으로 탐욕을 일으킨다.
신체의 여러 지절들이
가늘고 매끄러우며 부드러운 촉감 등
전에 경험한 이들을 생각하니
욕망의 불길이 다시 일어난다.

울기도 하고 웃으면서 말하고
노래하고 춤추며 눈을 흘기고
화려한 의복은 구슬들로 치장했고
비단 꽃무늬 꾸미개로 꾸미니
눈앞에 알랑거리는 고운 자태가
수행자의 마음을 뒤흔든다.
이와 같은 모습들을 떠올린다면
욕망이 일어서 퇴전시킨다.

어떤 사람이 그 정욕(情欲)이 깊어서
오로지 4종(種)에만 있지 않고
어리석어 번뇌를 증상하니
형체를 보게 되면 음란이 일어난다.
이것은 지극히 악한 욕망이니
급히 수행을 퇴전시킨다.

이런 모든 애욕들 때문에
미혹되고 산란하여 정념(正念)을 잃게 된다.
모양과 생각이 명료하면
끝내 퇴전하지 않는다.

자신의 몸 안을 자세히 관하고
다음에 바깥을 잘 관찰하라.
넓은 경계가 차서 가득한데
주위를 둘러 험한 기슭을 본다.
그 구경처(究竟處)를 알지 못하면
수행이 급히 퇴몰(退沒)한다.

몸에 대해 깊이 애착하면
두렵고 이상해서 나아가지 못한다.

수행에 의심과 두려움이 생기면
반드시 급하게 퇴감(退減)하리라.

의심과 공포를 여의고자 한다면
몸에 대해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을 닦아야 한다.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겼다고 해도
마음이 아직도 어지럽게 달리면
수행하는 자가
반드시 다시 퇴전하게 됨을 알아야 한다.

여러 수행들의
부정방편(不淨方便)의 퇴전을 이미 말했다.
그런데 승도(勝道)에 있어서도
퇴전함이 역시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10. 수행방편부정관주분(修行方便不淨觀住分)

내가 이미 부정퇴감분(不淨退減分)을
대략 분별했노라.
지금 저 주과상(住過相)에 대해
이를 마땅히 차례로 말하리라.

수행을 해도 번뇌의 업은
증장하여 안에 충만하고
지혜의 도법(度法)을 깨치지 못하면
어리석음[愚癡]에 얽혀 머물게 된다.

스스로 몸의 작은 부분에 대해
청정의 배후에 있는 가죽과 살을 허물었으나
승진(升進)의 법을 알지 못하면
번뇌가 증장하기 때문에 머물게 된다.

혹은 차츰차츰 승진하여
온몸의 괴상(壞相)을 본다고 해도
능히 외연(外緣)을 구하지 않으면
즐겨 내신(內身)을 관찰함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만약 밖의 경계에 대해
수행하여 마음이 승진을 즐기고
가고자 하면 당연히 따라가야 한다.
방편에 머물지 않도록 하라.

아직 구경처를 보지 못하고
중도에서 문득 중지하고 만다면
어리석음[癡冥]에 머물러 얽매이리니
마치 나무에 매인 코끼리와 같다.

골상(骨想)이 견고한 모습[堅相]이 있어서
그 몸이 조밀하여 틈이 없다.
다음에 중상(衆想)을 행하지 않고
또한 승진도 구하지 않으며

그리고 염리심(厭離心)이 없으면
또한 능히 결정하지 못한다.
수행하여 부정(不淨)의 기특한 도를
성취한다 해도

뛰어나다는 생각을 일으켜서
몸을 유연하게 하지 못한다.
몸을 유연하게 하지 못한다면
유각(流覺)이 생기지 않으리니
유각이 생기지 않는다면
이를 수행주(修行住)라 말한다.

11. 수행방편도부정관승진분(修行方便道不淨觀升進分)

부정관(不淨觀)의
방편도의 주과(住過)를 이미 설했다.
그런데 승도(勝道)에서
머무름[住]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부정관의 승진법(升進法)을
지금 차례로 말하리라.

먼저 총상(總相)을 생각하고
부정의 연(緣)에 생각을 묶어라.
다음으로 몸의 작은 부분에 머물러서
자상(自相)을 바르게 관찰하라.
자재와 외연의
두 가지로 한량없음을 설하노라.

수행자는 내신(內身)의
삼마제(三摩提)에 자재하여
바른 방편을 열심히 익히고
구경처에 두루 가득하면

외연의 한량없는 것의
경계에 널리 두루하리라.
그런데 저 정수(正受)에 대해
수(數)가 자재하지 못하고

스스로 내신을 관하여
이 또한 한량이 없다고 설하고

자신이 처한 곳에 대해서
갖가지로 색(色)들이 많다고 한다.
근련(筋連)과 육단(肉段)이
그 수가 각각 5백이고
제뢰(提賴)와 건대(揵大)
이들이 모두 여섯 가지가 있다.제뢰는 과일과 같고, 건대는 종기와 같은데 모두 뱃속에 있다.

36가지 종류의 물체와
320개의 뼈가 있으며
관절을 분해하면 9백이 된다.
9만[十千] 종류의 맥(脈)은
기운을 베풀어 여러 맛을
3만 6천 갈래 길로 통하게 한다.
몸에 있는 모든 모공(毛孔)들은
그 수가 99만 개이다.
몸 안에 침식하여 살아가는 벌레의
지게문은 8만[十千]이 있다.
안의 혈과 밖의 정기
이 둘은 함께 화합하여

먼저 가라라(迦羅邏)를 얻으니
신근(身根)과 명근(明根)이다.
이 몸에서 부정이 일어나는 것은
가라라로부터 나온다.

번뇌가 업을 일으키니
우혹(愚惑)이 낙착(樂着)을 낳고
두 가지의 무거운 번뇌인
갈애(渴愛)와 성냄[瞋恚]의 어리석은 마음[癡冥心] 때문에

이른바 처음에 생명을 받을 때는
전도된 두 생각을 일으켜
안으로는 애(愛)를 일으키고
밖으로는 성냄을 일으킨다.

남자는 이와 같은 생각이 있고
여자는 위의 것을 어긴다.

청정하지 못함을 가라라라 하니
가라라가 포(泡)를 일으키고
포를 따라 육단(肉段)이 생기고
차츰 자라서 지절(支節)을 이룬다.
태(胎)에서 나오면 영아(嬰兒)라 하니
차츰 변하여 동자(童子)가 된다.
이처럼 자꾸 증장하여
장성하면 중년(中年)이라고 한다.
해가 가면 얼굴이 마르고 여위어서
하루가 다르게 늙어서 쇠하고
의식이 멸하여 목숨이 끝이 나서
몸이 허물어지고 백골(白骨)이 나타난다.
퍼렇고 허물어지며 마디마디 떨어지고
부서지고 사라져서 모두 마멸한다.
이와 같이 열다섯 가지를

수행하여 자상(自相)을 관하라.

처음에는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쇠하고 늙어서 죽으니
이레가 지나면 점차 헐어 변해서
드디어 재처럼 다해서 없어진다.

일찍이 숙세(宿世)의 수행이
먼저 가라라로부터 시작한다.
출생해서 늙어가고 죽는 것을
차례로 자세히 관찰하라.

백골의 푸르고 붉은 모습과
지절(肢節)이 모두 떨어져 나가고
백골이 부서지고 마르며
썩어 문드러져 모두 마멸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부정념(不淨念)을 사유함에 있어서
인(因)에 따라 관찰하기도 하고
과(果)의 방편으로 배우기도 한다.
깊고 묘한 지혜를 성취하여
이 모양의 뜻을 요달해야 한다.

가라라에서부터
나아가 모든 부분과
4대(大)를 이루는
5정근(情根)을 관찰하면

한량없는 극미한 종(種)의
모든 것들이 이로부터 일어난다.
마땅히 다시 죽은 뒤의 모습을 차례차례
관찰해야 한다.

날이 갈수록 자꾸 변하면서
이레가 되는 날에 이르면
다시는 오고 가는 일도 없고
웃음도 말도 보는 것도 없다.
얼굴 모습이 모두 없어지니
위의의 자태를 버리고 떠난다.

죽은 시체가 점점 변하여
색깔이 날로 허물어간다.
푸르죽죽한 여러 부정한 것들이
이와 같이 차례로 나타난다.

부풀어 오르고 고름이 짓물러서
넘쳐흐르는 냄새가 지독하여
갖가지 벌레들이 우글거리니
보기만 해도 색욕(色欲)이 떨어진다.

본래 집착하던 것을 관찰하니
이미 허물어져 먹음이 다함없고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으니
전구(全具)의 욕망을 능히 멸한다.위에 말한 단정(端正)이 그 근본이 아니므로 또한 당연히 전구(全具)라고 말해야 한다.

말라서 썩어빠진 뼈를 보니
다시는 윤기 나는 모습이 없다.
시간이 갈수록 더욱 거칠어지니
곱고 부드러운 것에 대한 욕망을 여의게 된다.
흙먼지처럼 썩어서 부서지니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다.

이와 같은 모양을 성취하면
유형(有形)의 욕망을 멀리 여의게 된다.유형(有形)이 굳이 이 중생(衆生)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
5욕(欲)과 5괴(壞)를
병에 따라서 대처하라.
진실의 모양을 서로 대하여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색(色)이 변하거나 흩어져서
위의(威儀)와 모습이 소멸해 버리고
여위어 썩고 부서져 마멸하니
이를 이름하여 다섯 가지 괴(壞)라 한다.

이것은 곧 자신 중에 있다.
한량없는 모든 경계는
수행하여 바르게 생각하면
모두 자재함을 얻을 수 있으리라.


한량없는 두 가지를 이미 설했고,
자재(自在)와 경계,
수행하여 자재하지 않음도
또한 이미 분별해 설했노라.

이와 같은 부정념에서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지혜를
바르게 관찰하여 혜안(慧眼)을 여니
이것을 설하여 세 가지가 있다 한다.

생각을 지음에 두 가지가 있으니
때로 다시 생각하지 않으며 머물고
개해(開解)와 사유(思惟)를 함께하되
혹 때로는 개해를 하지 않는다.해(解)는 곧 개(開)이다.

셋째는 성(性)은 번뇌[垢]가 없어
번뇌를 여읜 청정함에 머무름은
생각하지 않고 개해(開解)하지 않음이니
이 지혜로부터 수선(修禪)을 일으키고

몸에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을 일으킨다.
나머지 둘은 불가능하다.
마음 또한 적정(寂靜)하여 즐거우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혜(修慧)라 한다.

몸을 윤택하게 하여 유연하게 하는 것
이것이 적정의 모양이니
둘이 모두 유연하지 않으면
적정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저 둘이 적정하지 않고
하나는 곧 안온함에 머물면
이를 말하여 색유(色有) 가운데서
수선하여 일으킨 지혜라 한다.

부정관(不淨觀)의 한 가지 지혜는
10지(地)에 의지하여 일어난다.
근본과 그리고 이르지 못함과
욕(欲)과 중간(中間)을 또한 설하노라.

한 계(界)에 의지하여 머무르는 몸은
욕(欲)과 색(色)에 경계(境界)하여
화생(化生)은 목숨을 마치고 나면
즉시 멸하여 부정함이 없다.

몸이 청정하여 남은 더러움이 없으니
염환(厭患)을 능히 일으키지 않고
다만 저들의 생멸하고
바뀌는 무상한 모양을 관찰할 뿐이다.

그러나 포태(胞胎)하여 태어난 몸은
죽은 시체의 형체가 있으니
몸에 대하여 깨끗한 상(想)이 일어나면
부정관(不淨觀)을 대치한다.

구하지 않으면 탐욕을 그치어서
사유하여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익혀야 한다.
그리고 또 정대치(淨對治)가 있으니
싫어하고 미워하는 생각을 짓지 않는 것이다.

방편으로 청정한 해탈을 해서
지혜로운 자는 혜안을 연다.
이른바 부정(不淨)한 인연에서
백골의 유광(流光)이 나온다고 한다.

이로부터 차례로
푸른색의 미묘한 보배 나무를 일으킨다.
붉고 누르고 선명하게 흰
가지와 잎과 꽃이 또 그러하다.

훌륭한 옷에는 갖가지 미묘한 색깔의
구슬과 영락(瓔珞)이 있다.
이를 이름하여 곧
수행정해방편상(修行淨解方便相)이라 한다.

저들 부정한 몸
곳곳에서 장엄함이 드러나고
계급을 차례로 올라가니
삼매는 지혜의 등(燈)을 태우고

저 한 몸으로부터 나와서
전체에 높이 널리 두루해진다.
모든 나머지 몸에서 일어나는
장엄함 역시 이와 같다.

이는 곧 청정한 해탈이니

방편의 부정관(不淨觀)이다.
만일 이렇게 잠깐 사이에
이 뛰어난 관(觀)을 닦아 익히면
이는 곧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름이니
모든 보시를 받을 만하다.
세존께서 칭찬하고 찬탄하신 바이니
삼계의 좋은 복전(福田)이 되리라.

나머지 모든 모양을 설하면
공덕이 또한 그러하여라.
백골과 푸르게 어혈되었다는 상을
성취하면 마음이 번뇌를 떠난다.
이 같은 부정념으로 인하여
방편으로 모든 지위를 뛰어넘는다.


이른바 저 몸의 염지(念止)와
수념처(受念處)와 심념처(心念處)와 법념처(法念處)는
난래(煖來)와 정인(頂忍)과
세간의 제일법(第一法)과
견도(見道)와 수도(修道)와
나아가 누진(漏盡)의 지혜가 된다.
이런 방편으로 인해
모든 공덕의 지위를 뛰어넘는다.

처음의 신념관(身念觀)으로부터
나아가 구경처에 이르게 된다.
부처님께서는 부정념(不淨念)은
일체의 모든 종자라고 말씀하셨다.

세존께서는 저 탐욕은
이입(利入)이 깊어서 밑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정수(正受)는 대치(對治)의 약이니
마땅히 염리상(厭離想)을 닦는다면
모든 나머지의 번뇌는
당장 모두 다스릴 수 있다.
내가 이미 부정(不淨) 방편의
승진법을 설했노라.
나머지 승도(勝道)의 승진이 있음도
모양과 수행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12. 수행방편도부정결정분(修行方便道不淨決定分)

부정념의 승진분의
모양과 뜻을 내가 이미 설했노라.
이제는 마땅히 부정념의 결정분을
수행하는 것을 설하리라.

악계(惡戒)에 묶이지 않고
또한 업(業)의 번뇌도 없어서
마음은 해탈을 등지지 않고
기뻐서 마음이 항상 즐거우리라.

이와 같이 수순하여 살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멸한다.

유연하고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이 있으면
그 가운데서 삼매가 일어나리라.
정(定)으로부터 지혜가 생겨나
수행하여 싫어하고 미워하게 된다.

싫어하는 생각으로 이미 수행하면
즉시 유애(有愛)를 여읠 수 있게 된다.
사유하여 유애를 여의면
해탈의 진실한 지혜[實智]가 생기니

해탈의 지혜가 이미 생기면
계박(繫縛)에서 해탈한다.
이로부터 무위(無爲)를 얻으면
마침내 3유(有)를 여읜다.
이를 수행해서
결정분을 성취한다고 이름한다.


천왕(天王)에 다섯 위상(威相)이 있으니
상을 관하여 번뇌를 허물고
번뇌의 허물이 차츰 쇠해 엷어지고
이로 하여 멸(滅)을 구경(究竟)한다.

인왕(人王)에 다섯 모양이 있으니
수왕(獸王)의 모양도 역시 그러하다
모든 지위의 모양이 명료한 것을
이름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몸을 움직여 사방을 돌아보며
위엄을 돋우어 큰소리를 지르고
마음대로 혼자서 누비고 있음이
사자왕의 위엄 있는 모양이다.

이와 같은 열다섯 모양에서
수행하여 결정을 일으키고
능히 저 지위 가운데의
모든 번뇌를 멸하게 한다.

삼마제에 생각을 매어 두면
모든 번뇌의 결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오로(惡露)와 같은 부정의 생각은
염리(厭離)의 마음을 능히 일어나게 한다.

푸르게 어혈된 여러 모습들을
수행해서 잘 결정하라.
다시 나머지 세 가지 상(想)이 있으니
명상(明想)과 관상(觀想),
세 번째는 공상(空想)이라 한다.
적멸(寂滅)의 지혜를 닦고 익혀

색(色)과 자신을 깨끗이 하면
모든 번뇌를 일으키는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은
바르게 관찰함에 따라서 멸하게 된다.

이 같은 하나하나의 생각들은
각각 세 가지 상의 권속들로 하여
능히 탐욕 등과 결박과
사(使)와 뇌전(惱纏)을 제거한다.

이와 같은 모든 생각들을
분명히 살펴서 잘 관찰하면
이를 이름하여 수행하는 자가
부정상(不淨想)을 결정한다고 한다.

세월이 오래 흘러 썩은 백골에는
거칠고 여윈 모습이 나타나고
흙먼지처럼 부서져 버리니
모든 것들이 마멸해 버린다.

아래로부터 차례로 일어나는
방편을 가지고 소의(所依)를 허물고
청정한 지혜가 설하는 바가
수행의 결정상이다.

한량없는 깊고 묘한 종(種)이
모두가 널리 두루하고
저 결정(決定)의 진실이
금시조(金翅鳥)처럼 생겨난다.

다음에 청정한 지위를 일으키어
평탄(平坦)하고 지극하게 장엄한다.

저 용맹한 보배의 사자(師子)와
우왕(牛王)과 용상(龍象)
이런 모든 일찍이 없던 부류가
곳곳에서 결정상(決定相)을 이룬다.

처음에 부정을 인하여 생기고
또한 부정에 따라서 자라니
처음에 가라라(迦羅邏)로부터 일어나서
부정한 가운데에 머문다.

저 이레 동안의 머무는 것을 관찰하여
생각을 잠시도 멈추지 말고
수행하여 잘 명료해지면
이를 곧 결정이라 한다.

이 같은 모든 부분들의
모양과 뜻을 모두 능히 알고
저 진실을 분명히 본다면
생각생각에 나고 멸함이 있으며


모든 골상(骨想)을 익힘으로써
수행의 각의(覺意)가 생기리라.
능히 각지(覺支)의 생각을 일으킴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말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생각을 분별함에 세 종류가 있다.
처음으로 익혀 행하는 자도 있고
이미 조금 익혀 행한 자도 있으며
오랫동안 수습한 자도 있으니
이들은 모두 결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런데 저들 지혜의 힘에 따라서
그 취향(趣向)함에 차별이 있다.
초업(初業)이 처음으로 일어나고
적게 익히는 마음이 머물고 나서
오래 배우면 능히 인연을 일으키니
이를 말하여 세 가지 수행이라 한다.

초업을 이름하여 시종(始種)이라 하고
두 번째는 장양(長養)이라고 하며
마지막은 사리(捨離)라고 하니
이를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부정에 두 가지의 종류가 있으니
공(共)이거나 비공(非共)이다.
저 앞의 세 권속들과 같이
이것은 모두 부정(不淨)을 여읜다.

문(聞)ㆍ사(思)ㆍ수(修) 지혜의
세 가지 종류의 부정념(不淨念)은
이와 같은 모든 종류에서
수행을 하여 아주 명료하게
잘 분별해서 욕망을 여의는 것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13. 수행관계(修行觀界)

안반(安般)과 부정념의
물러나고 머무름과 승진(升進)과
결정의 진실한 모양을
이미 모두 분별해 설했다.
계방편(界方便)을 수행하는
넓고 개략적인 차별된 모양의
깊고 깊은 미묘한 뜻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먼저 안반과 부정념을
닦아 익히고
그런 뒤에 모든 계(界)를 관찰하면
안락하여 속히 구경에 이르게 된다.
스스로 방편으로 뛰어넘어
이것을 성취하기 어려워 고통스러우면

이마 위와 두 눈썹 사이에
생각을 묶어서 흩어지지 않게 하라.
적지(寂止)에서 윤택이 생기니
삼마제가 증장하며

의지하는 바가 이미 유연하니
삼매에 안착하여 움직이지 않게 된다.
흩어진 부정심을
지혜로운 자는 모두 조복시켜야 한다.

이미 마음을 조복시키고 나면
수행하는 곳에 편안히 머물러라.
이곳에서 밝은 상(想)을 일으키면
모든 몸이 나뉘어 나타난다.

처음 털 하나로부터 시작하되
그 모양을 집중하여 관찰하라.
털 하나에서 자상(自相)을 보고
그런 다음에 모든 털들을 보라.

다음의 36물(物)의
자상 역시 모두 그렇게 하라.
부처님께서는 36물

각각에 머물러 처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때로 저 모든 계(界)의
모이고 합친 것을 안으로 관찰하되
마치 저 눈 밝은 사람이
곳간을 열고 오곡을 보는 것과 같이 해야 한다.

가끔 다시 역(逆)과 순(順)과
초월(超越)과 차제(次第)로 관한다.

일계(一界)가 그 밑에 깔려 있고
나머지 종류는 모두 그 위에 있다.
차례로 서로 이어 연결이 되었으니
하나하나 그 모양들을 보라.
잡색(雜色)이나 잡색이 아니거나
전체를 두루 관찰하여

마음이 머물러 한 곳에 있으면
그 경계가 시방에 두루하여
곳곳마다 편안히 있게 되니
이를 의지하여 열심히 닦아 익혀라.

하나의 털을 백으로 나누어서
사유하여 바르게 생각하라.
그리고 다시 그 하나 중에서
다섯 가지 경계를 분별하라.

다음에 저 공계(空界) 위의
식상(識相)에서 분별하여 관찰하고

수행을 하여 번뇌가 없음을 보면
청정한 묘상(妙相)이 생기리라.
비유컨대 마치 물 위의 거품이
가림 없이 투명한 것과 같아

이곳에서 모든 경계를 관찰하면
각각 그 자상(自相)을 보리라.
물은 습(濕)하고 땅은 견고하고 강하며
바람은 움직이고 불은 뜨겁게 타오르며
허공은 아무런 장애가 없는 것을
분별하여 아는 것이 곧 식상(識相)이다.

청색ㆍ황색ㆍ적색ㆍ백색ㆍ녹색과
파리(頗梨)보배의 색깔 등
이와 같은 여러 색깔들에서
수행을 구족하여 관찰하라.

허공의 견고한 모양은
너무나 넓어서 두루 변만하고
저지하기 어려움이 금강과 같으니
금강의 지혜가 능히 허물어뜨린다.
저 위의 만다라(曼茶羅)에서
숙상(熟相)이 있어 나타나니

비유컨대 마치 치성한 불길이
저 견고함을 허무는 것과 같다.

혹 관찰함에 의심하고 괴이하다고 여겨
그 마음이 크게 두려워진다.
밝은 자는 능히 결정하나니
모든 공덕을 증익하리라.

허공계(虛空界)가 허물어지고 나면
승진의 모양을 능히 일으켜야 한다.
흘러내리듯 녹고 허물어지고
다시 흙먼지처럼 부서져 버리니
수행하여 진실을 보면
해탈의 모양이 생기리라.

허공계가 이미 허물어지면
위의 모든 경계 역시 그러하다.
이는 곧 괴상(壞相) 위에서
나머지 괴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만약 다시 나머지 한 종(種)도
위에서 모든 경계를 본다면
차례로 널리 두루 변만하리니
함께 허물어지는 것이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서른여섯[六六] 종(種)과
십팔(六三)과 여덟(四二),
이와 같은 62가지를 관찰하라.
세존께서 대략 계(界)를 설하셨다.


색(色)을 허무는 데 세 가지가 있으니
찰나와 세(世)와 극미(極微)이다.
무색(無色)은 두 가지뿐이니
무위(無爲)에는 괴상(壞相)이 없다.

계부정념(界不淨念)을 수행하면
능히 탐욕을 버리게 된다.
계방편관(界方便觀)에 따르는 것이
나의 교만을 다스리는 약이다.

계사무량(界四無量)을 관찰하면
성냄의 독을 없애게 된다.무상(無常)하여 잠시인 것을 찰나(刹那)라 한다.

아난(阿難)이 말하기를
마땅히 5념처(念處)를 닦아야 한다고 했다.

세존께서 말씀하시기를
다시 제6념(念)이 있느니라.

털과 머리털, 손톱ㆍ발톱과 이와 뼈와
근육과 두껍고 얇은 피부와
지방과 골수와 뇌(腦)와 막(膜)과
비장과 콩팥, 심장과 폐와 간과
자궁(胞)ㆍ위(胃)ㆍ대장ㆍ소장과
똥ㆍ오줌ㆍ고름ㆍ콧물ㆍ침과
때 묻고 더러운 모든 피와 눈물과
누렇고 흰 가래침 등
서른여섯의 부정한 것들에서

3종계(種界)를 관찰하라.
이 가운데 습한 모양은 물이고
불은 뜨겁고 땅은 견고하고 강하다.
모든 형색이 있는 곳에
안팎으로 나부끼어 움직이는 모양이 있다.

들숨과 날숨, 그리고 언어의
통리(通利) 등은 회전한다.
모든 것을 다 말하면 다섯이니
이 모양을 이름하여 풍계(風界)라 한다.

눈ㆍ귀ㆍ코ㆍ혀ㆍ몸과
모공(毛孔)과 인후(咽喉)가 공하며
산골, 바위, 집 가운데
안팎이 아무런 장애가 없으니
이와 같은 모든 종류를
이름하여 공계(空界)라 한다.

저 모든 여섯 가지 근에서
생기는 모든 식(識)의 종류는
이와 같이 많아서 한량이 없으니
모두 이름하여 식계(識界)라 한다.

부처님께서는 6계(界)에
내[我]가 있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음계(陰界)의 모양을 관찰하지 않으면
나[我]와 내 것[我所]을 헤아리게 된다.
모든 안팎의 경계는
이곳에서 뜻이 회전한다.

이 뜻이 행하는 곳에 따라
3수(受)와 18종(種)과
6촉(觸)과 4처(處)는
세존께서 이를 설하셨다.

애욕과 교만의 모든 번뇌는
모두 이 가운데서 일어난다.
이 몸은 여러 미세함이 합해진 것이니
허망하고 비어서 주인이 없으며
나도 아니고 중생도 아닌데
미혹해서 진실이라 생각한다.

부처님께서 라후라(羅睺羅)에게
계(界)가 모두 무상하다고 관하면
이와 같은 여섯 가지 계는
6처(處)를 좇아 일어나니

여섯 교묘한 방편을 수습하여
여섯 때[時]에 각각 하나를 관하라고 설하셨다.
색처(色處)는 모두 구족하지만
무색(無色)은 단지 식계(識界)뿐이다.

저 종류가 의지하는 곳과

상행지(相行地)의 경계
대치(對治)와 소치(所治)와
여실한 분(分)과 수(數)를 알라.

몸 안에 있는 모든 계의 종류는
다시 스스로 고뇌를 일으킨다.
비유컨대 마치 독사를 길러
끝내 그것으로부터 해를 입는 것과 같다.

4대(大)가 물질을 만들어 내어
곧 만들어진 물질과 함께 머물고
화합하여 서로 섞이니
도리어 4대가 허물어진다.

부정의 방편의 관찰은
먼저 만들어진 물질에서 일어나며
안반(安般)의 방편념(方便念)은
마땅히 4대로부터 비롯된다.

만약 저 수행하는 자가
두 가지 방편을 증광하고
4대와 만들어진 물질을
화합하여 동등하게 관찰하면

비로소 근본처(根本處)에 들어가게 되리니
그것이 먼저 만들어진 물질을 허물고
들어간 다음에
인(因)하는 4대의 허물어짐을 관찰하면

정혜(定慧)가 점차 늘어나고
염처(念處)를 갖추어 성취하게 된다.
화합하여 전부 관찰하면
모두가 다 적멸(寂滅)이다.

저 36물(物)의
더럽고 냄새나는 것이 허물어져 마멸한다.
이 3상(想)과 10상(想)을
수행하여 염리(厭離)를 증장하라.

부처님께서는 이 근본이
능히 모든 악에 미친다고 말씀하셨다.

49종(種)의 법이
삼매 가운데서 일어난다.
수행하여 자세히 관찰하면
자신과 욕계(欲界)가
한량없는 부정(不淨)의 종류로서
악하고 더러움이 모두 가득 차 있다.

온갖 고통에 핍박받아서
성대한 불길이 몹시 심하다.
덧없는 변괴(變壞)의 모양을
보고 나니 염리가 생긴다.

색계의 서로 비슷한 종류의
미묘한 모양이 나타나니
깊이 즐겨서 출리(出離)를 구하여
번뇌를 싫어하는 생각을 증진하면

깨달음이 있고 또한 관이 있어
욕망을 여의고 즐거움이 생기니
적연하게 초선(初禪)에 들어가면
안팎이 모두 청정하다.

소의(所依)와 경계(境界)가
단련된 진금(眞金)의 모양 같으며
스스로 몸이 범세계(梵世界)에 처해서
그 속에서 지극히 기쁘고 즐겁다.

또한 5지상(支相)의
몸과 경계가 나타남을 본다.
제2선에서는 각관(覺觀)을 멸한다.
안이 청정하여 마음은 한 곳에 있게 되고

정(定)에 따라 즐거움이 생기니
4지(支)가 몸 안에 나타난다.
소의(所依)와 경계가
비유컨대 진짜 산호(珊瑚)와 같다.

제3선에서는 기쁨을 여의니
평정[行捨]과 염(念)과 혜제(慧除)와
몸에 즐거움을 받음과 삼매의
5지(支)의 모양이 명료하다.

의지하는 바의 푸른 유리(琉璃)보배는
청정하고 매우 미묘하며

소신(少身)을 연(緣)함이 한량없고
모든 근(根)이 차례로 일어난다.

제4선에서는 괴로움과 즐거움을 끊으니
근심과 기쁨이 이미 먼저 멸한다.
불고불락(不苦不樂)과 사(捨)와
염정(念淨)과 삼마제의

이와 같은 4지(支)의 모양은
몸과 경계를 나타낸다.
날숨과 들숨이 멸하여
의지함이 지극히 순백하다.

색(色)을 지나서 유대(有對)를 멸하면
이를 말하여 공처(空處)에 든다 한다.
공상(空相)을 지나면 식(識)이 정(定)하고
식(識)을 지나면 무소유(無所有)이다.

이 무소유를 지나면
비상비비상(非想非非想)이다.
모든 계상(界相)을 잘 알면
맛 들지 않고 매이지도 않으며

청정한 네 가지 범행(梵行)이
높고 넓어서 한량이 없다.
자비가 널리 두루 편만하니
희사(喜捨)가 또한 그러하다.

근본 네 가지 선(禪) 중에서
다섯 신통(神通)을 닦아 일으켜라.
삼매가 현재 눈앞에 있을 때
마음을 묶어서 자신을 관한다.

가볍고 연한 생각을 지어서
점차 들어 움직이지 않으면
경계가 눈앞에 있으니
땅을 여읨이 호마(胡麻)와 같다.
차츰 나아감이 보리[大麥]와 같으니
다음 차례는 높아져 4지(指)와 같다.

이 상(床)에서 저 상에 이르기까지
차츰 능히 뜻대로 할 수 있다.
날아다니고 변화를 부리는 것이
자재로워서 장애가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수행하는 자의
미묘한 신통력이라고 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외부의 음성을 자세히 취하면
진실한 그대로를 모두 듣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다른 사람이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관하면
일심(一心)으로 모두 다 알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스스로 이 삶의
태(胎)에서부터 중음(中陰)에까지 관하고
차츰 전신(前身)의 일을 보면
백천 겁에 이르기까지
모든 바뀌어 온 과정들을
여실하게 생각하여 알게 된다.

마음을 자신에게 묶어 두어서
선정이 앞에 나타나 있을 때에
중생 종류의
생사와 형색(形色)을 관찰하라.
그 업과 과보와
중음(中陰)과 5도(道)의 생(生)에 따라

수행하면 천안(天眼)이 깨끗하여
모든 것이 여실하게 보이리라.
근본의 여러 지위들 중에서
남은 공덕이 한량없다.
수행하여 마음이 자재로우면
모든 것이 다 구족되리니

이른바 여덟 가지 배사(背捨)와
승처(勝處)와 일체의 입(入)이다.
배사의 모양에 다섯이 있으니

부정상(不淨相)과 정상(淨相)과
색상(色相)과 번뇌, 그리고 식(識)으로
이 다섯 가지 모양을 대강 설하리라.

승처(勝處)는 먼저 자신부터이니
내색(內色)과 외소색(外少色)의
좋은 것이든 추한 것이든 하나이니
밖으로 많은 둘이 또한 그러하다.

안으로는 색상(色想)이 있지 않은데
밖으로 적고 많은 색을 보게 되니
두 가지는 모두 좋고 추함이다.
이것이 앞의 4승처(勝處)이다.

뒤의 네 가지는 안은 무색(無色)이요
밖은 푸르고 누렇고 붉고 희다.
모든 입(入)은 4대(大)와
4색(色)과 공(空)과 식(識)이다.
외부와 내신(內身)을 관하면
하나의 모양으로 차별이 없다.

모든 변(辯)의 미묘한 원지(願智)와
무쟁(無諍)삼마제와

역(逆)과 순(順) 그리고 초월의
한량없는 삼매의 문(門)을

밝은 지혜로 결정하여 관하고
다섯 가지의 충만함을 구족한다.

첫째는 몸으로, 둘째는 경계로 해서
정상(定相)이 널리 두루하다.
셋째는 억념(憶念)이 가득하여
즐겨 염사(厭捨)를 수행한다.
넷째는 여러 지(地)가 가득하니
10처(處)의 모양이 명료하다.
3승(乘)의 근(根)이 구족한 것을
다섯째 만(滿)이라 말한다.

계방편(界方便)을 성취하여
오래된 어리석음[癡冥]을 멸하면
마음이 깨끗해져서
허공과 같이 때가 없게 된다.

이와 같은 모든 공덕
모든 것을 다 구경(究竟)하리라.

14. 수행사무량삼매(修行四無量三昧)

수행을 하는 자가 만약 널리 자심(慈心)을 닦고자 한다면 마땅히 먼저 그 마음을 소연(所緣)에 묶고 이를 점차 익혀 한량없는 과악(過惡)을 없애서 마음이 다투는 바 없고 또한 원한으로 맺음이 없으며 성냄이 없고 청정하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친(親)ㆍ중(中)ㆍ원(怨)의 3종(種) 9품(品)의 한량없는 무수한 중생들이 시방이 다하도록 그 3분(分)의 경계에 편안하게 머무름에 있어서 순일하게 행함을 즐기는 것을 이르는 것이다. 그런데 다만 국토(國土) 세계만 제외하고 저 중생들의 세계에서 이를 두루하여 전체가 인연이 된다면 성취하여 노닐 것이다.
그리고 수행하는 자가 자심(慈心)의 방편을 닦고자 한다면 먼저 이를 평등한 마음으로 사유하여 모든 중생들을 인연하여 그 마음을 견고하게 해서 성냄을 멸하여 없애고 자심을 일으켜야 할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총관자무량삼매(總觀慈無量三昧)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총관(總觀)으로도 오히려 성냄에 얽매인다고 한다면, 그런 자는 마땅히 그 상친(上親)에 대하여 별상(別相)의 자심을 닦고 다음으로 중친(中親)ㆍ하친(下親)ㆍ중인(中人) 및 원가(怨家)에 대하여 차례로 9품의 자심을 닦아 익혀 차츰 성냄의 마음을 여의고 애념(愛念)을 일으켜 갖가지 낙구(樂具)로 더불어 이를 함께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즐거움을 함께한 다음에 모든 중생들에 대하여 법의 요익(饒益)한 마음을 일으켜 광대자(廣大慈)ㆍ극원자(極遠慈)ㆍ무량자(無量慈)의 세 가지 자심을 닦아야 한다. 성냄을 없애 인애(仁愛)의 마음에 머물게 하고, 그 상응하는 공덕과 선근에 따라 모든 불법을 허여(許與)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말하자면 갖가지 법락(法樂)과 더불어 갖가지 자심을 닦게 하는 것이다. 먼저 출가의 즐거움을 주고, 다음으로 선정(禪定)과 정수(正受)의 즐거움을 주며, 다음으로 보리의 즐거움을 주고, 다음으로 적멸의 즐거움을 준다.
저 수행하는 자가 본래 일찍이 고친 것이거나 아직 고치지 않은 것과 갖가지 낙구(樂具), 자득(自得)과 타득(他得)의 청정한 선근, 나아가 위없는 적멸(寂滅) 구경의 무위(無爲)에 이르기까지 그 수행하는 자의 마음에 생각하는 바를 따라서 한량없는 법락(法樂) 등을 앞에 있는 중생에게 준다.
그리고 이처럼 즐거운 생각[樂想]이 일어난 다음 하나하나 관찰하여 이들이 서로 스스로 깨달아 곧 결정(決定)을 얻는다면, 마치 밝은 거울이 물체의 상(像)을 따라서 이를 나타내는 것과 같다. 자삼매(慈三昧)의 거울 또한 즐거운 일로 인해 갖가지 즐거운 모양을 모두 앞에 나타내어 보일 것이다.
혹시 그 수행이 성냄으로 하여 교란을 당할 경우 이와 같이 생각하라.
‘내가 본래 이와 같은 성냄으로 해서 많은 살해를 저지르게 되었다. 그리하여 여러 죄역(罪逆)을 일으켜서 악도(惡道)에 떨어지게 되었으며, 큰 지옥에서 다시 고통의 독을 받고, 혹은 벌ㆍ전갈ㆍ지네ㆍ독사ㆍ악룡(惡龍)ㆍ해귀(害鬼)ㆍ나찰(羅刹)이 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갖가지 독과 해(害)의 종류를 만들었으니, 지금 이를 제거하여 없애지 않는다면 또다시 그와 같은 고통들을 당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방편이 능히 저 성냄을 중지시킬 것이다. 그리고 또 이렇게 생각하라.
‘욕을 하는 자나 받는 자나
너와 나를 구별할 것 없이 다 같이 덧없는 것들이어서 잠시 잠깐도 머물러 있지를 못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둘이 모두 지나가 버리어서 그 악성(惡聲) 또한 이미 사라져 버렸거늘 나중에 일어난 두 사람이 까닭 없이 서로 다툰다. 그러나 지금 이들 두 사람 또한 순간순간 사라져 버려서 허망하여 아무런 실상이 없는데, 대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욕을 먹는단 말이며 왜 이처럼 거꾸로 되어있단 말인가? 이는 마치 허공과 더불어 서로 싸우면서 이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니, 이근(耳根)이 허망으로부터 전도(顚倒)되어서 번뇌의 업이 일어난 것이며, 저 사람의 설근(舌根) 또한 이와 같다. 모두가 인연을 따라서 생멸하는 것인데, 대체 누가 욕을 하고 누가 이를 듣는단 말인가.’
수행하여 이와 같이 사유할 때 성냄의 결박이 풀어져 능히 자심을 닦아서 번뇌의 때를 여의고 청정해질 수 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자심을 닦는 자가 4념처(念處)에서 능히 결정을 얻어서 닦아 익혀서 증광하며, 한량없는 법문의 뛰어나고 묘한 도과(道果)를 성취하면 다시는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세 가지의 방편 대자(大慈)이다. 만약 이미 욕망을 여의었으면 다시 정묘(淨妙)하게 욕망을 여읜 자심을 닦아야 한다. 깊은 마음의 요익함이 증광하고 한량없는 진실한 과보를 얻을 것이다. 이 공덕으로 인해 원하는 구경열반(究竟涅槃)을 구족할 것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모든 부처님께서는 자심은 두려움이 없으며, 자심은 모든 공덕의 어머니이며, 자심은 모든 공덕의 부싯돌이며, 자심은 능히 모든 흉폭한 악을 소멸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까닭으로 마땅히 수행하여 부지런히 방편을 닦아 욕망을 여읜 대자(大慈)를 닦아야 한다. 비심(悲心)이 한량없으니, 마치 자심의 경계가 원가(怨家)ㆍ친인(親人)ㆍ중인(中人)인 것처럼 비심 또한 이와 같이 차례로 익혀서 닦는 것이다.
곧 부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중생을 요익하게 하는 것을 자심(慈心)이라 하고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을 비심(悲心)이라 한다”고 하셨다.
만약 먼저 중생에게 요익의 마음을 일으켜 갖가지 낙구(樂具)를 가지고 이를 모두 그들에게 베풀어 준 다음에 중생들을 본다면 오직 그 즐거움을 받는 것만을 볼 것이다. 이것을 이름하여 자심이라 한다.
만약 먼저 중생들이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 그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할 마음을 일으킨 다음에 중생들이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는 것을 본다. 이들이 요익하지 않은 것을 제거하고 나서
갖가지 낙(樂)이 아닌 것과 낙을 받는 것을 이름하여 비심이라 한다. 정상(淨相)을 보는 것이 자심이고 허공상(虛空想)을 보는 것이 비심이며, 낙행(樂行)이 자심이고 고행(苦行)이 비심이니, 이것이 곧 그 차별이다.
수행을 하는 자가 여러 중생들이 흉포하여 성내고 다투어 해치고 죽이면서 서로 핍박을 하는데도 이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자가 없는 것을 보면, 비심이 일어나서 이를 도와주고 보호하여 줄 것이다. 또 중생들이 그들의 몸ㆍ목ㆍ귀ㆍ코 등이 잘려 그 지체(肢體)가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데도 이를 능히 구해주는 자가 없는 것을 본다면 수행하는 자는 그 비심(悲心)이 일어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비심에 머무를 때에 5취(趣)의 중생들이 그 고통이 치열하여 한량없는 핍박을 당하는 것을 보고는 깊이 비심이 일어나서 이를 구호하여 주고자 하는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비심을 수행하여 한량없는 선근(善根)이 생길 때에 한량없는 공덕의 모양이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만약 이와 같은 중생들이 이처럼 한량없는 고통을 받는 것을 보고도 비심을 일으키지 않는다고 한다면 이것은 곧 지극히 악독하여 전혀 선근이 없는 사람이다.
이와 같은 큰 비심[大悲]은 본래 모든 부처님께서 익혀서 닦은 것으로서 이를 말미암아서 모든 지혜의 바다를 그 궁극까지 관철하는 것이다. 만약 수행을 하는 자가 이를 능히 구족하게 익혀서 닦는다면 오래지 않아서 기필코 이 경지에 도달하게 되리란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희무량(喜無量)이란 자심의 경계에서 수행함으로써 여섯 사념(思念) 등의 모든 선한 공덕과 한량없는 불법과 자신이 성취한 지계(持戒)ㆍ선정(禪定)ㆍ지혜(智慧) 등 모든 공덕으로 중생을 요익하게 하여 자락(自樂)과 타락(他樂)을 다하여 모두 그들에게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중생들이 저 법락(法樂)을 얻는 것을 보면 마음에 환희를 느낀다. 마음이 환희를 느끼면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고, 근심과 걱정이 없어지면 한결같이 기뻐하게 되어 뛸 듯이 기뻐하면서 이렇게 생각한다.
‘즐겁구나, 영원히 모든 중생을 안락하게 하리라.’
그리고 모든 중생들이 기뻐할 때에 그 낙상(樂相)을 보고 미묘하여 밝고 깨끗해진다. 이와 같은 모양을 성취하는 것을 희무량삼매(喜無量三昧)라고 이름한다.
부처님께서는 희(喜) 등, 나아가 식처(識處)를 닦아 모은다고 말씀하셨다.
사무량(捨無量)이란 원수나 친한 이를 버려 동등하게 중품을 인연하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중생들에 대하여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심과 비심, 기쁨 등을 여의고 오직 중생행(衆生行)만을 지어서 경계에 가깝고 모양에 가까운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세존께서 사(捨)를 설함에 있어서 갖가지의 사(捨)가 각자 그 모양이 있으니, 사무량은 그것과 같지 않은 것이다. 평등하고 청정하여 고락상(苦樂相)을 여읜 것을 일러 사상(捨相)과 비슷한 상(相)이 나타났다고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사무량삼매(捨無量三昧)라고 한다.
세존께서는 사무량과 나아가 무소유처(無所有處)의 수행에 대하여 설하셨다. 이미 네 가지 무량한 모양들에 대하여 이를 대강 설하였으니, 여타의 갖가지 깊고 깊은 모양들에 대해서는 수행하는 자가 마땅히 이를 차례로 닦아서 익혀야 한다.

15. 수행관음(修行觀陰)

만약 수행을 하는 자가 오랫동안 공덕을 쌓아서 일찍이 선정을 익히면 열어 보임을 들어서 그 본연(本緣)을 일으키고, 곧 능히 사유하여 5음을 관찰해서 깊은 법을 요달할 것이다. 생사를 멸하여 없앰이 마치 저 대풍(大風)이 두꺼운 구름을 흩어서 날려버리는 것과 같으며, 또한 모든 마(魔)가 즐기는 법을 끊어서 5음의 뜻을 관찰할 것이다.
이제 이를 설하겠다. 수행을 하는 자가 안으로 스스로 사유하여 번뇌의 바다를 도탈하고자 이욕(離欲)을 일으키면 윤택함이 생겨서 자신이 쾌락해지고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를 멸하고 수순한 4대가 생길 것이다. 그리하여 여러 산란한 뜻을 섭수하여 능히 구경(究竟)에 이르러 지혜를 성취할 것이다.
만약 근본적으로 관하는 곳이 견고하고 밝고 맑으면 능히 삼매를 일으켜서 모든 흩어진 생각들을 여의고 번뇌를 멸하여 없앨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미묘한 모양들이 모두 나타날 것이니, 마치 청정하고 미묘한 유리와도 같고 깨끗한 물의 포말과도 같을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가 이와 같이 밝고 맑으며 티 없는 모양을 보면 선한 마음을 일으켜서 이를 지켜 지니어서 마음이 방일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이처럼 방일하지 않으면 숙상(熟相)이 일어날 것이다. 숙상이 일어나면 괴상(壞相)이 나타나고, 괴상이 나타나면 오직 법상(法想)만이 일어나서
모든 것이 적멸할 것이다.
이와 같이 법상을 수행하여 이를 구족하게 성취하면 증상된 염리(厭離)를 얻게 된다. 마음이 견고하고 정진하여서 움직이지 않으며, 심심삼매(甚深三昧)와 견고삼매(堅固三昧)와 부동삼매(不動三昧)를 얻게 된다. 수행하여 이들 삼매에 머물면 능히 다섯 가지의 밝고 깨끗한 삼매를 일으켜서 다섯 세계[道]를 두루 비출 것이니, 월광삼매(月光三昧)ㆍ일광삼매(日光三昧)ㆍ정유리삼매(淨琉璃三昧)ㆍ연금광삼매(鍊金光三昧)ㆍ무구파리삼매(無垢頗璃三昧)이다. 이 다섯 가지 밝고 깨끗한 삼매로 인하여 다시 광요삼매(光耀三昧)ㆍ변광요삼매(遍光耀三昧)ㆍ무량광요삼매(無量光耀三昧)가 생겨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다섯 가지의 괴상(壞相)으로 인하여 능히 모든 연(緣)을 허무니, 첫째는 천(穿)이고, 둘째는 박(剝)이며, 셋째는 열(裂)이고, 넷째는 괴(壞)이며, 다섯째는 멸(滅)이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괴상으로 해서 모든 법을 허문다. 다섯 가지의 삼매를 수행하여 경계를 멸하고 모두 청정해지면 차례로 다시 다섯 가지의 삼매의 모습이 생기니, 사자왕삼매(師子王三昧)ㆍ용왕삼매(龍王三昧)ㆍ금시조왕삼매(金翅鳥王三昧)ㆍ우왕삼매(牛王三昧)ㆍ상왕삼매(象王三昧)이다. 마음에 방일함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웅장한 모습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하여 이러한 수왕삼매(獸王三昧)에 머물면 각각 그 종류에 따라서 모두를 섭수하게 된다.
또 삼매의 힘으로 남녀의 10상(相)을 일으켜 종류에 따라 모든 중생을 섭수하고 여기에 모두 나타난다. 만약 능히 이런 모든 삼매의 모양을 분별하여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곧 이름하여 모든 법에 자재한 공덕이라고 한다.
또한 수행을 하는 자가 밝고 깨끗한 경계에서 음류(陰流)를 관찰한다면 그것이 한 곳으로부터 나와서 나뉘어져 둘로 갈라질 것이며, 이렇게 관찰하고 나면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 하나하나의 흐름 가운데서 다시 다섯 가지의 모양이 보이는데, 그 모양마다 각각 서로 달라서 경계가 벌려지고 이처럼 경계가 벌려진 다음에는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된다.

그 색(色)은 취말(聚沫)과 같고, 수(受)는 수포(水泡)와 같고, 상(想)은 불꽃과 같다고 관하고, 행(行)은 파초(芭蕉)와 같고, 식(識)은 허깨비[幻]과 같다고 관한다. 이것이 다섯 가지의 허망하고 속이는 모양인 것이다. 수행하여 이와 같이 관찰하면 그 몸이 안온하여 유연하고 쾌락할 것이다.
다시 그 흐름이 일어나는 곳을 관하면 무구상(無垢相)이 나타나서 마치 물의 깨끗한 포말과 같으니, 이것이 점점 증장하여 그 몸에 가득 찬다. 그리하여 수행하는 마음이 방일하지 않고 전념(專念)하여 받아 지닐 것이다. 이처럼 받아 지니고 나면 깨끗한 모양이 증광하여 두루 온몸을 가리어 덮을 것이니, 그것이 마치 투명하고 청정한 포말과 같아서 모든 허물과 악(惡)을 여의고 다시 뛰어나고 묘한 지혜가 생겨서 드디어 이 모양을 허물 것이다.
이 모양이 이미 허물어지면 그 흐름이 아래로 흘러서 한량없이 멀리 흘러갈 것이니, 그것이 마치 저 청정한 파리(頗梨)와 같아서 경계를 매우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경계를 지극히 잘 알고 나면 그것을 따라 섭환(攝還)하여 만다라(曼茶羅)를 이룰 것이다.
그리고 다시 이상(異相)이 있어서 그 본처(本處)에 가득 찬 다음에 이것이 흘러서 저 한량없는 시방세계로 흘러갈 것이다. 그리하여 시방세계에 이른 다음에 각각 자상(自相)에 머물 것이다.
이때에 수행하여 저 한량없는 색종(色種)을 분명히 보는데, 마치 저 산과 물의 떠다니며 쌓여 모인 물거품과 같으며, 모든 수상(受相)이 큰 비의 빗방울과 같고, 갖가지 모든 상(想)이 마치 봄철의 아지랑이와 같고 행은 파초와 같아서 견실함이 없으며, 6식(識)의 종(種)을 관찰하면 마치 환화(幻化)와 같을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갖가지의 허망함은 다만 어리석은 사람을 속일 뿐인 것이니, 이것을 수행하여 음(陰)의 자상(自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이름한다.
이처럼 음의 자상을 관찰하고 나서 다시 그 지혜로써 스스로 자신을 비추어서 전념하여 관찰해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할 때 그 주위를 두루 둘러 치성한 상[熾然相]이 일어나며 몸은 그 안에 처하여 갖가지 꽃들과 깨끗하고 묘한 보물들이 두루 둘러싸고 있을 것이다. 또한 스스로 자신의 몸을 보면 온갖 보물들의 여러 공덕의 모양들이 미묘하고 장엄할 것이다.
수행하여 이와 같은 여러 모양들을 보고 나면 그 혜안이 널리 열려서 스스로 그 몸을 돌아보면서 두루 관찰할 것이다. 이처럼 관찰을 하고 나서 다시 밖으로 음상(陰相)을 관하여 성대한 불길이 치열하여 곧 염심(厭心)이 생겨서 용맹하게 정진하여
저 끝없는 생사의 고해(苦海)를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생길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5음의 치성한 상이 싫어지고 나면 이욕상(離欲相)ㆍ해탈상(解脫相)ㆍ열반상(涅槃相) 등 모든 공덕의 모양들이 차례로 일어나서 나타날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는 7처(處)의 관(觀)을 갖추어서 5음(陰)의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를 본다. 다시 갈애[愛]로 인하여 생기는 5음을 관하면 싫어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생겨서 이를 여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진제(眞諦) 중에서 방편으로써 종자의 지혜를 일으킨다. 7처(處)에서 세 가지 관(觀)의 이치를 잘 닦아 자상관(自相觀)을 이루어서 결정의 견고함을 이룰 것이며, 그런 다음에 번뇌 없는 식지(息止)의 수혜(修慧)를 얻을 것이다. 이 지혜가 일어나면 경계가 평정(平正)하고 순일해서 잡스러움이 없을 것이다.
또 뛰어나고 묘하며 번뇌 없는 사혜(思慧)를 얻고 결정(決定)하여 5음의 흥하고 쇠함과 생각마다 마멸(磨滅)함을 관하면 진실상(眞實相)을 볼 것이니, 비유컨대 마치 독이 든 밥을 먹은 자가 반드시 죽는 것과 같아서 수행하여 5음의 3상(相)이 서로 섞인 것을 보는 것도 역시 이와 같다.
한 생각이 생기면 한 생각이 괴로운 것이다. 곧 한 생각을 할 때에 또한 생기고 또한 머물고 또한 멸하는 것이니, 저 생각이 생길 때에 곧 저 괴로움과 더불어 생기는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한 생각 한 생각이 곧 허물어지는 것이다. 수행하여 5음의 이와 같은 생멸을 관하면 허위이며 무상한 과악(過惡)을 파괴할 것이다. 곧 무상행(無常行)ㆍ고행(苦行)ㆍ공적행(空寂行)ㆍ무아행(無我行)을 일으키는 것은 천루법(穿漏法)ㆍ부실법(不實法)ㆍ속후법(速朽法)ㆍ파괴법(破壞法)이다. 이와 같은 것이 그 무상(無常)의 뜻이다. 마치 수다라(修多羅)와 같아서 자세한 설명은 1백 구(句)에까지 이를 것이다.
수행을 다하고 이와 같은 여러 모양들을 행하여 모든 법의 진실을 알면 곧 해탈을 얻게 될 것이다. 성현 지위의 삼매의 상행(想行)으로써 이와 같은 비상(非常)의 모양을 관하면 곧 깊은 우염(憂厭)을 일으킬 것이다. 그리하여 유위(有爲)의 과환(過患)을 보고 3유(有)가 즐겁지 않을 것이다.
또 수행하는 자가 만약 생기면 멸하지 않는다고 보고, 만약 멸하면 생기지 않는다고 본다면 이와 같은 경우에는 성행(聖行)이 생기지 않는 것이다.
요컨대 그 일심(一心)이나 일상(一相)이 바르게 해탈을 지향한 다음이라야 지혜가 생기는 것이다. 이것이 성행을 결정한다. 성행이 이미 일어나면 일체법의 상(相)이 적멸하여 남는 것이 없다. 어리석음과 갈애와 번뇌 그리고 모든 죄구(罪垢)는 전(轉)하니, 그 고음(苦陰)이 모두 제거되어 멸한다. 이처럼 제거되어 멸하고 나면 그 마음이 조복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상태에서 5음을 보면 나도 없고 내 것도 없는 것이다. 제행(諸行)이 무상함을 통해서 고음(苦陰)을 관찰하며, 고음을 관찰하면 8고(苦)에 핍박이 있으며, 8고의 모양에서 8행(行)을 성취한다.
이른바 병(病)과 같고 종기와 같으며, 찌르는 것과 같고 죽이는 것과 같으며, 무상(無常)이고 고(苦)이며, 공(空)이고 무아(無我)이다. 이 중 네 가지는 성행(聖行)이고 네 가지는 성행이 아니다. 고음에서 결정하여 진실을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4제(諦), 16성행(聖行) 이것이 곧 난법(煖法)을 수행하는 처음 모양이며, 진제(眞諦)의 경지에서 진실의 지혜를 얻는 것이다.
고음(苦陰)을 관찰하면 마치 철환(鐵丸)을 녹이는 것과 같아서 역시 아무런 견고함이 없다. 그러므로 열반을 지향하여 생사를 등지는 것이니, 유(有)가 귀함이 없고 생(生)이 즐거움이 없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사냥꾼들에게 둘러싸인 짐승들이 그 두려움이 급박해서 용감하게 내달리어 그 포위망을 탈출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생사의 뜨거운 불길이 크게 고통스럽게 포위하여 핍박하는 것을 보고는 염지(厭智)의 힘을 통해서 아무런 장애 없이 이를 뛰어넘는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사혜(思慧)가 생길 때에 난법(煖法)의 종(種)이 일어나며, 식지(息止)의 수혜가 생길 때에 난종(煖種)이 증장하는데, 난종의 자지(自地)에 이르러서 난상(煖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그리고 식지의 수혜(修慧)가 생길 때에 정법(頂法)의 종이 일어나고, 난법이 생길 때에 정종(頂種)이 증장하며, 정종의 자지에 이르러서 정상(頂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난법이 생길 때에 인법(忍法)의 종이 일어나고, 정법이 생길 때에 인종(忍種)이 증장하며, 인종의 자지(自地)에 이르러서 인상(忍相)이 만족하는 것이다.
또 5음에서 기뻐하는 것을 난법이라고 한다. 난법으로 5음을 관하고, 3보(寶)에서 기뻐하는 것을 정법(頂法)이라고 한다. 정법으로 18계(界)를 관하고, 4제(諦)에서 기뻐하는 것을 인법(忍法)이라고 이름하며,
인법에서 12입(入)을 관한다. 세 가지를 관할 때 저 선근을 따라서 한 차례 증상(增上)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다하고 진제를 관하는데, 다만 인(忍)만이 진실에서 관하여 증상하며, 난법은 상(想)이 증상하며, 정법은 신(信)ㆍ관(觀)ㆍ희(喜)가 증상하며, 인법은 지혜가 증상한다.
또 수행에는 세 가지의 인연이 있으니 상하와 모든 방위의 세 가지 선근을 말하는데, 이 세 가지의 인연은 각각 한 차례 증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열(悅)을 가본(可本)에는 설(設)이라 하였다.
또 세 가지의 수행이 있다. 난(煖)은 염리에 의지하고 정(頂)은 관희(觀喜)에 의지하고 인(忍)은 평등사(平等捨)에 의지하는데, 역시 저 선근에 의하여 한 차례 증상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이니, 마땅히 한 가지를 수행하여 이를 다하면 세 법을 성취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 수행하는 자는 반드시 알아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저 다섯 사람의 원적(怨賊)이 칼을 뽑아들고 항상 따라다니면서 언제나 해치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전후의 5음(陰)이 서로 돌아가면서 삶아대고 핍박하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일 아비삼마야(阿鼻三磨耶)이는 곧 견도(見道)를 일컬는다.를 구하고자 한다면 마땅히 달마마나사가라(達磨摩那斯伽羅)를 지어서 언제나 진실한 이치를 관해서 성행(聖行)의 칼로써 음(陰)의 적(賊)을 끊어 제거하여야 한다. 용렬한 사나이처럼 몽둥이도 잡아보지 못한 채 그들로부터 피해를 입어서는 안 될 것이다. 모든 성현에 이르기까지 모두 마땅히 이와 같이 그 바른 관찰을 열심히 닦아야 할 것이다.”
법의 즐거움을 나타내려는 까닭이며, 후세를 위하여 큰 밝음을 지으려는 까닭이며, 모든 괴로움의 근본을 잘라버리려는 까닭이며, 중생들을 요익하려는 까닭이다. 하물며 범부가 공(空)하여 아무런 소득이 없으면서 스스로 방일(放逸)하여 열심히 닦아 익히지 않을 수 있겠는가?
5음(陰)을 관하는 것을 마친다.
달마마나사가라의 달마는 법이요, 세간의 제일법(第一法)을 이르는 말이며, 마나사가라는 일경심(一經心)을 이르는 말이니, 역자(譯者)가 그 뜻을 사유하여 말한 것이다.

16. 수행관입(修行觀入)


6입(入)이 각각 경계에서 지혜가 없는 중생을 속박하고, 탐욕의 마음 때문에 언제나 정상(淨想)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을 하는 자는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모든 근(根)의 경계에서 법이 아닌 것을 방제(防制)하고 마음의 소연(所緣)을 거두어들여 이를 계박해서 움직이지 않도록 해야 한다. 6입을 바르게 관찰하면, 비유컨대 이는 마치 빈 마을과 같아서 나와 나의 것을 여읠 것이다. 부정(不定)의 뜻이 곧 입처(入處)의 뜻이고 견하(牽下)의 뜻이 곧 입처의 뜻이니, 장차 중생을 데리고 악도(惡道)에 들 것이다. 또 내입(內入)의 모양이 마치 철장(鐵鏘)을 태우는 것과 같고, 매우 날카로운 검(劍)과 같고 예리한 칼과 같을 것이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만약 이 모양을 본다면 능히 이를 버리고 여의어라.”
또 밖에서 나쁜 도둑들이 들어와서 좋은 보물들을 겁탈하는 것을 본다고 할 때 이는 마치 수행하는 자가 정념(正念)을 버리고 모든 들어오는 문들을 개방해서 6경(境)이 마음대로 횡행하도록 하는 것과 같다. 6경의 악한 도둑들이 정계(淨戒)를 겁탈하여 모든 공(功)을 잃게 함은 마치 새들이 양쪽 날개가 없이 허공을 날려고 하는 것과 같고, 사람이 두 발이 없으면서도 먼 길을 가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수행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저 정계의 공덕을 허물기 때문에 지(止)와 관(觀)의 두 날갯죽지가 영원히 다시 생겨나지 않게 된다. 아무리 생사를 벗어나려고 하여도 이것이 끝내 불가능하니, 마치 깨진 병에 물을 담으면 잠시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과 같이 계율을 깨뜨린 비구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아서 삼매의 법수(法水)가 잠시 잠깐도 머물러 있지 않는 것이다.
마치 천신의 덕병(德甁)을 잘 보호해서 이를 깨뜨리지 않으면 언제나 원하는 대로 다함이 없이 진보(珍寶)가 쏟아져 나오는 것과 같이, 수행을 하는 일도 또한 이와 같아서 그 정계를 깨뜨리지 않으면 언제나 성스러운 공덕의 보배를 만들어 내지만, 조금이라도 그 덕병을 깨뜨리면 진보가 곧 소멸하여 버린다. 그러므로 만약 계병(戒甁)을 깨뜨리면 법보(法寶)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되니, 이는 비유컨대 마치 사람이 그 코를 잘라버리고 거울을 들여다보면 스스로 즐거울 수 없는 것처럼, 파계를 한 비구도 역시 이와 같아서 안으로 자신을 살펴보면 그 마음이 스스로 즐겁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백곡(百穀)과 약목(藥木)들이 땅을 의지하여 자라는 것처럼 모든 선한 공덕들도 모두 정계를 의지하여 생긴다. 마치 전단(栴檀)을 몸에 바르면 열뇌(熱惱)를 제거하듯이, 정계가 청량(淸凉)하여 능히 욕화(欲火)를 중지시킨다. 마치 여의보주(如意寶珠)가 닿는 곳마다 뜨거운데도 이를 식히듯이
정계 또한 이와 같아서 번뇌의 불길 속에서 그 뜨거움을 식히는 것이다.
계율을 범한 비구는 스스로 생각할 때 그 죄가 깊어서 몸이 다하고 그 목숨이 끝나면 마침내 악도(惡道)에 들게 되어 그 마음이 항상 근심스럽고 후회를 하면서 죽음의 공포에서 떨지만, 정계를 지킨 사람은 마음이 언제나 기뻐서 살아서는 근심 걱정이 없고 죽어서는 편안하고 즐거울 것이다.
정계가 사다리가 되어서 능히 깨달음의 경지[慧堂]에 오를 수 있으며, 정계가 장엄 도구가 되어 또한 잘 지키는 것이다. 계(界)가 사람을 이끌고 열반에 이르게 하며, 좋은 땅이 되어서 열 가지의 좋은 종자를 낳아서 기른다. 그리하여 교계사(敎誡師)가 때에 따라서 물을 대어주면 그 신근(信根)이 뿌리를 내려서 무루(無漏)의 음(陰)이 줄기가 되고, 4여의(如意)가 싹이 되고, 자심(慈心)이 나뭇가지가 되고, 욕심을 적게 하여 만족함을 아는 것이 그 가지와 잎이 되고, 7각의(覺意)가 꽃이 되고, 해탈의 지혜가 열매가 되고, 적멸의 법이 감로가 될 것이다.
계(戒)의 향기가 흘러나오면 모든 것이 두루 그 훈기를 쐬게 될 것이며, 성현(聖賢)의 조왕(鳥王)이 그 사이에서 머물 것이다. 그리고 비심(悲心)이 중음(重陰)이 되어서 청량한 그늘이 널리 덮을 것이며, 변재(辯才)를 가진 법사가 꿀벌왕[蜜蜂王]이 되어서 소리를 조화롭게 하며 서로 돌아보면서 일찍이 그 정미(精味)를 채취할 것이다. 그 나무가 곧고 길며 견고하고 정실(貞實)해서 허위와 첨곡(諂曲)과 부병(腐病)이 없으니, 이를 이름하여 공덕대수(功德大樹)라고 한다. 만약 모든 수행을 하는 자들이 열반을 추구하고 삼세의 고통을 멀리하여 해탈의 성(城)을 지향할 때에 점차로 모든 공덕을 일으켜 행하여 저 나무 아래에 쉬면서 법의 감로를 마시고 세 가지 갈애의 환란을 그치게 한다면, 그 몸이 안온하여져서 능히 열반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 계(戒)에는 많은 숫자가 있으니, 혹은 1ㆍ2ㆍ3ㆍ4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7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12의 계가 있기도 하고, 혹은 21의 계가 있기도 하다. 순간순간 잠시 잠깐의 사이로 말하면 한량없는 계의 종류들이 있는데, 도공(道共)ㆍ정공(定共)ㆍ구생계(俱生戒)ㆍ정어(正語)ㆍ정업(正業)ㆍ정명(正命) 및 심회전(心廻轉) 등이 있다. 이 모든 계를 보면 그 모양이 각각 서로 다르니, 혹은 순수하고 청정하여 때가 없기도 하고 혹은 가볍고 엷어서 밝고 깨끗하기도 하다.
이와 같이 무구(無垢)한 계상(戒相)의 경계가 나타나면 수행하여 의(依)ㆍ연(緣)ㆍ염(念)의 3처(處)에서 계상을 관찰해야 한다. 만약 도향(塗香)ㆍ유연(柔軟)ㆍ진구(塵垢)를 여의어 기쁘고 즐거우며 밝고 맑고 깨끗해지면 그것이 의지한 바의 모양이다. 그 땅처럼 넓고 평탄하여 묘화(妙華)와 보배의 그릇과 장엄한 장식구 등 여러 보배들이 매끄럽고 윤택할 것이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을 하는 경계 중의 모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저 검정소[犛牛:야아크]가 그 꼬리를 보호함에 있어서 털끝 하나라도 나무에 붙어버리면 그 나무를 떠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죽음에 이르도록 그 털을 끊지 않듯이, 비구가 계를 보호함이 또한 이와 같아서 아무리 하찮은 하나의 계라고 하더라도 이를 죽음으로써 지켜서 범하지 않으면 묘상(妙相)의 장엄한 몸이 모든 상호가 구족하여 마치 저 밝은 가을달이 허공에서 비추는 것과 같다.
삼매를 수행하여 이와 같은 청정한 모양을 보고 나면 그 뒤 목숨을 마칠 때까지 다시는 어떤 근심 걱정이나 후회가 없으며, 또한 그 열뇌(熱惱)가 없고 다시는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안열(安悅)과 환희가 용약(踊躍)하여 증장하고 적지(寂止)의 즐거움이 생기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소멸한다. 이와 같은 것들을 이름하여 억념(憶念)을 수행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또 세 가지 중에 다시 잡상(雜相)이 있어서 이것이 교란시켜서 장애를 일으켜 실념(失念)토록 하여 마음이 머물지 못하게 한다. 그러므로 선하지 않은 악업을 뉘우쳐서 죽더라도 범하지 않으니, 행여 꿈속에서라도 이를 범하는 일이 없이 계를 지키는 일을 증익해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계는 꽃다발[花鬘]이며 바르는 향[塗香]이며 몸을 장엄하는 온갖 장신구이다.”
향기로운 바람이 한쪽 방향에서 오면 이는 세계의 향기요, 여러 방향에서 오면 계덕(戒德)의 향기인 것이다. 혹은 몸에 수족과 눈과 귀와 코와 혀가 없어서 모든 지절(肢節)을 온전하게 갖추어 있지 못하기도 하고, 혹은 몸이 진애(塵埃)에 매몰되기도 하고, 혹은 자신을 관찰하여 모든 진구(塵垢)를 여의고 목욕을 한 다음 몸에 향을 바르고 그 위에 이름 있는 좋은 옷을 입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의(依)ㆍ연(緣)ㆍ억념(憶念)을 수행하여 시라(尸羅)의 갖가지 여러 상[雜相]을 관찰하는 것이라고 한다.
위의(威儀)ㆍ정공(定共)ㆍ도공(道共)의 세 가지 계를 모두 이미 이 가운데서 설하였으니, 이 세 가지의 계는 다시 거기에 한량없는 여러 가지 깊고 묘한 모양들이 있다. 지혜가 밝은 자는 마땅히 이를 널리 풀어서 설하여야 할 것이다.
수행하여 이미 정계(淨戒)를 본 다음
여러 들어가는 산을 깨뜨리고자 할 경우 마땅히 두 가지의 법을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른바 지(止)와 관(觀)이다. 먼저 악을 여읜 기쁨과 즐거움이 그 몸에 충만한 것을 관한다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가 멸하고 유순(柔順)한 4대가 생겨서 적지(寂止)의 즐거움을 일으켜 일심으로 흩어지지 않고 스스로 그 몸 안에서 마음을 들어가는 모양에다 묶어 두게 될 것이니, 마땅히 저 들어가는 모양이 일어나는 곳을 잘 수호하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관찰할 때에 희고 깨끗한 모양이 일어나면 비구가 이 모양을 보아 이를 잘 수호하기를 부처님께서 말씀한 바와 같이 하여야 할 것이다. 비유컨대 이는 마치 새끼를 품는 닭이 그 알을 잘 보호하여 반드시 이를 성취시키는 것과 같다. 비구의 수행 또한 이와 같이 오로지 정밀하게 수호하면 성취를 얻을 것이니, 열두 가지 수과상(修果相)의 나타남이 분명할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여 잘 수호할 때에 모든 방일함을 여의고 수과(修果)를 성취한다면 경계가 정묘(淨妙)해서 모든 번뇌의 염오를 여읠 것이다. 그리하여 그 밝음이 보주(寶珠)와 같고 또한 현수(懸水)와 같을 것이니, 경계가 광만(廣滿)한데 몸은 적은 부분에 처하여 두루 멀리 흐르다가 그런 뒤에 다시 돌아올 것이다. 다시 돌아온 뒤에는 일상(一相)이 나타났다가 이것이 다시 나뉘어서 두 부분이 되고, 이것이 또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만다라(曼茶羅)의 경계를 이루어서 평정(平正)에 편안하게 머물러 두루 여러 모양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이 마치 뭇 별들이 빛을 발산하면서 포열하는 것과 같다. 그런 다음에 허물어진다.
허물어진 다음에 각각 흘러나왔다가 다시 합쳐져서 하나가 되어 다시 두루 멀리 흘러나와 제방(諸方)을 충만하고, 제방을 충만한 다음에는 다시 돌아와서 안온하게 굳게 머무른다. 이처럼 굳게 머무른 다음에는 숙상(熟相)이 나타나고, 숙상이 나타난 뒤에는 갖가지 여러 모양들이 두루 널리 넓어져 미묘한 기복(器服) 등 모든 기이하고 특이한 모양들이 모두 그 경계에 나타난다. 안으로는 공취(空聚)에 들고 밖으로는 색(色)ㆍ성(聲)ㆍ향(香)ㆍ미(味)ㆍ촉(觸)과 3세의 세 가지 법인 선(善)ㆍ불선(不善)ㆍ무기(無記) 등 모든 것이 나타나서 그 진실을 보게 될 것이다.
또 외육입(外六入)은 도적과 같고 내육입(內六入)은 공취(空聚)와 같은데, 이들 내입과 외입을 차안(此岸)과 피안(彼岸)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이 12입(入)의 여러 승묘(勝妙)한 모양들의
넓음이 한량없으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수다라 중에서 이를 자세하게 설한 것이다.
또 수행을 하는 자는 이 경계에서 숙상(熟相)이 일어나며, 일어난 다음에는 다시 허물어지는데, 그 사이에 단리상(斷離相)이 있고, 그 단리상이 매우 먼 곳에 흘러 한 곳에 머물게 된다. 마치 보병(寶甁)에 물을 담는 것과 같아서 물을 담은 뒤에 다시 이를 열면 점점 그것이 적멸(寂滅)하는 것을 보게 되며, 그것이 적멸한 다음에는 다시 여러 나머지의 일체 공덕의 모양들이 생기게 된다. 제입(諸入)의 문 중에는 언제나 여러 모양이 흘러나오며, 그것이 각각에서 흘러나온 뒤에는 다시 한 곳에서 만다라를 이루는데, 만다라 위에서는 다시 자상(自相)이 일어나고, 자상이 일어나면 다시 그것이 익으며, 익고 나면 오래지 않아서 적멸하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수행을 다시 한결같고 순수하게 하기를 더하면 곧 거기서 청정하고 미묘한 선상(禪相)이 일어나며, 이처럼 선상이 일어나면 전과 마찬가지로 차례로 적멸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제입(諸入)의 가운데서 수행할 때에 다시 갖가지 묘상(妙相)이 있어서, 그 마음을 묶어 둔 곳에서 결정상(決定相)이 일어나는 것을 이름하여 계(髻) 가운데의 명주(明珠)라고 하는데, 삼매를 비유하는 것이다. 수행하여 스스로 몸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서 여러 보장(寶藏) 위에 보련화(寶蓮花)가 있음을 보며, 수행하여 스스로 그 몸이 연화(蓮花) 위에 있어 온갖 보물과 미묘한 꽃들이 장엄하고 꾸며서 둘러싸고 있음을 본다.
또 세존께서 수다라에서 여섯 중생을 비유하여 설한 것과 마찬가지로 수행을 하는 자가 여기서 구족하게 관찰한다면, 이른바 눈은 개가 되어서 오색촌(五色村)을 뛰어다니고, 귀는 새가 되어서 허공으로부터 소리가 들려오고, 코는 독사가 되어서 향기의 구멍을 찾고, 혀는 야간(夜干)이 되어서 죽은 시체의 다섯 가지 맛을 탐하고, 몸은 수수마라(輸收磨羅)가 되어서 언제나 촉해(觸海)에 들기를 즐기고, 마음은 원숭이가 되어서 언제나 3세의 법림(法林)에서 제멋대로 놀기를 즐거워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 여섯 가지의 중생들을 한 곳에다 묶어 두어서 각기 즐거운 곳을 자재로이 놀 수 없게 하듯이, 저 수행을 하는 것도 이와 같아서 삼매의 정념으로 6근을 묶어 두어서 그 인연하는 바를 따라 자유로이 방종할 수 없도록 한 다음에야, 청정한 지혜로써 법의 진실을 볼 것이다.
어리석은 범부는 6경 가운데 탐착하여 한량없는 악법(惡法)을 희망한다. 이와 같이 모든 중생들의 경계에 낙착(樂着)해서 스스로 장애를 일으켜 열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을 모두 제거하여 없애야 한다. 그러므로 수행하여 그 생사를 깨뜨리고 열반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자는 마땅히 모든 근(根)을 항복시켜 멀리 경계를 여의어야 할 것이다.


17. 수행관십이인연(修行觀十二因緣)

이미 모든 대치(對治)와 소치(所治)를 설하였으므로 우치(愚癡)의 대치에 대하여 이를 마땅히 분별하여야 한다. 모든 부처님들께서 연기(緣起)를 설하셨는데 그 어리석음[癡冥]을 멸하여 없애면 여실한 지혜가 생겨서 매우 깊고 미묘하여 수순한 공덕이 있을 것이니, 이를 지금 대강 설하여 모든 수행하는 공덕으로 하여금 이를 증익하도록 하겠다.
우치(愚癡)를 멸하여 없애고 연기를 관찰한다면 단(斷)과 상(常), 양편에 대한 모든 생각을 멀리 여의고, 인연이 화합해서 유위법(有爲法)이 생긴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또한 미혹하고 헤매는 외도에게 항복받아 제일(第一)의 공법(空法)에 수순하여 혜안(慧眼)이 밝고 맑아지면 무명이 모두 사라지게 될 것이다.
수행하여 연기를 보는 데에 네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연박(連縛)이라 이름하고, 둘째는 유주(流注)라 이름하며, 셋째는 분단(分段)이라 이름하고, 넷째는 찰나(刹那)라고 이름한다. 또한 연박에는 여섯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생(生)이고, 둘째는 분(分)이며, 셋째는 취(聚)이고, 넷째는 생문(生門)이며, 다섯째는 찰나(刹那)이고, 여섯째는 성괴(成壞)이다.
생(生)이란 것은 사음(死陰)을 따라서 다음에 중음(中陰)이 일어나는 것이니, 중음 다음에 생음(生陰)이 일어난다. 그런데 중음의 중생들은 무명과 혼란과 어리석음으로 눈멀게 되어 업을 짓는 것이다. 중음의 중생들은 남녀가 화합하는 것을 본다. 무명을 증익시키기 때문에 전도된 생각이 생기게 되며, 혹은 해상(害想)이 생기기도 하고, 혹은 애상(愛想)이 생기기도 한다. 여자와 함께하고자 하는 자는 해심(害心)이 생기는데, 그런 다음에야 그와 화합함을 스스로 보게 된다.
이때에 욕심(欲心)이 미혹하여 헤매는 것을 이름하여 갈애[愛]가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화합하는 부정(不淨)을 기유(己有)라고 하는데, 이를 이름하여 만(慢)이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인하여 증장함을 얻어서 몸으로 하여금 펴고 일어나도록 하면 이를 이름하여 먹는 것[食]이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4대(大)는 가라라(迦羅邏)와 함께 생겨 보신(報身)을 얻으니, 이를 이름하여 4대가 몸을 일으킨다고 한다.
결업(結業)과 방편으로 하여 2지(支)가 이미 경과하고 차례로 식종(識種)이 생기면 이를 이름하여 종자식(種子識)이라 한다. 처음에 가라라에 있을 때에 그 마음이 침몰하여 아는 바가 적어서 의식이 명리(明利)하지 못하는 것을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한다. 가라라를 얻어 이미 명리를 알기 때문에 이름하여 식(識)이라 하고, 이를 이름하여 생(生)의 연박(連縛)이라 한다.
분단(分段)이란 것은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차례로 포(皰)가 일어나고 육단(肉段)이 일어나며, 그 지절(肢節)이 두텁고 견고해져서 어린아이가 되고 동자가 되고 장성한 뒤 쇠퇴하여 늙어가는 일이 차례로 일어나게 되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분(分)의 연박이라 한다. 취(趣)라는 것은 두루 모든 취에 이르는 것으로 수행하여 이들 모든 취의 모양을 보게 되는 것을 이름하여 취(趣)의 연박이라 한다.
생문(生門)이란 4생(生)이 서로 연속하여 윤회를 하면서 끊어지지 않는 것인데, 이를 이름하여 생문의 연박이라 한다. 찰나(刹那)란 5음을 관찰하여 그것이 순간마다 서로 이어져서 그 생멸함이 끊어짐이 없음을 보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찰나의 연박이라 한다. 성괴(成壞)란 모든 경계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겁수(劫數)의 시종(始終)인데, 이를 수행을 통해 관찰을 해서 그 일어나고 허물어지는 것이 서로 이어짐을 보는 것을 이름하여 성괴의 연박이라고 한다.
그리고 유주(流注)란 수행하여 찰나가 흘러서 달찰나(怛刹那)에 이르고 나아가 라바마후로투(羅婆摩候路妬)에 이르는 것을 관찰하는 것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유주라고 한다. 가라라분의 유주는 7일이다. 그 포(皰)와 육단(肉段)이 견고하고 두터워지며, 나아가 노쇠해져서 늙어가게 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기분(起分)ㆍ주분(住分)ㆍ기연분(起緣分)ㆍ입분(入分)ㆍ출분(出分)ㆍ방편분(方便分)과 모든 정수(正受)는 선교방편[巧便]으로 유주하여 차례로 일어나고 다하는 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모든 취(趣)의 회전이
화륜(火輪)처럼 선회하는 것을 이름하여 유주라 한다. 이와 같은 모든 한량없는 유주는 곧 수행하면 그 연기의 유주를 보는 것이다.
분단(分段)이라는 것은 수행해서 분(分)으로부터 분에 이르기까지 관찰을 하기 때문에 분단이라고 말하는데, 능히 이와 같이 안다면 연기(緣起)에서 이를 성취한다.
이른바 무명(無明)이 증상하면 이는 마치 소경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으며, 대흑명(大黑冥)이 그 광명을 멀리 여읜 것과 같다. 그리하여 혹 앞을 보지 못하기도 하고 혹 뒤를 보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는 편맹(偏盲)이며, 만일 앞과 뒤를 모두 보지 못한다면 이는 이구맹(二俱盲)인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 두 가지의 소경을 여읜다면 저 어리석음[癡冥]을 버리고 밝고 깨끗한 혜안(慧眼)을 얻는데, 이와 같은 고(苦)ㆍ집(集)ㆍ멸(滅)ㆍ도(道)와 불(佛)ㆍ법(法)ㆍ승(僧)의 3보를 모를 경우 이를 이름하여 열 가지의 어리석음[癡]이라 한다. 이 같은 열 가지의 어리석음을 멸하면 이를 이름하여 열 가지의 지혜라 한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무명이 첫 인(因)이 되어서 세 가지의 업을 심는다.”
만약 수행하면서 무명에 대한 과환(過患)을 모른다면 곧 세 가지의 업을 심는 것이다. 업이 일어나고 나서 이를 따라서 식(識)이 생기는데, 모든 식이 마치 저 허깨비[幻]와 같아서 갖가지의 종류를 모두 나타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식으로부터 상속되어 명색(名色)이 일어나는데, 저 하나의 몸에서 두 가지의 모양이 있는 것이다. 비유컨대 마치 속이 비고 연약하며 습하고 문드러지는 물건과 같아서 그 안에 온갖 벌레들이 있어서 그 외부를 동요를 일으키는 것과 같으며, 또한 산누에와 같아서 그것이 처음에 고치의 막(膜)을 얽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 명색(名色)의 두 가지의 모양도 또한 이와 같다. 나아가 모든 근이 이루어지지 않음을 말하여 명색의 두 가지 모양이라고 한다.
모든 근이 이미 열린 것을 6입(入)이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근이 처음 열린 때에는 아직 아무것도 짓는 것이 없는데, 촉(觸)에서 어리석게 되어 그 적절하고 적절하지 않음을 알지 못함이 마치 빗방울이 몸에 떨어져서 물거품을 일으키는 것과 같다. 저 정진(情塵)에 그 촉을 일으키는 것이 역시 이와 같다. 그리하여 외부의 가시가 자극하면 그것을 따라서 촉감이 일어나는데, 이는 또한 등잔불이 기름과 심지로 이루어진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해서 이염촉상(爾炎觸相)을 관찰한다고 한다.
촉상(觸相)이 일어나고 나면 차례로 다시 수(受)가 생기는데, 비유컨대 마치 저 물의 거품에서 세 가지의 모양이 일어나는 것과 같다. 만약 모든 근을 분별한다면 여기에는 다섯 가지의 수(受)가 있다.

수가 일어나고 나면 다음에는 갈애(渴愛)가 생기는데, 비유컨대 이는 마치 혓바닥으로 저 꿀을 발라놓은 칼날을 핥는 것과 같다. 갈애의 모든 번뇌를 증상하는 것을 이름하여 취(取)라 하며, 취가 생긴 다음에는 유(有)가 생기는데 여기에는 세 가지의 업(業)이 있다. 업은 미래의 과를 일으키므로 이를 이름하여 유(有)라 한다. 이미 생(生)을 심었는데 아직 받지 않은 것을 미래의 생이라고 하며, 이미 생(生)하고 나면 이것이 익게 되는데 이것을 일러 노사(老死)라고 하며 2지(支)라 한다. 미래의 생을 설할 때에 생상(生相)이 증상한다.
부처님께서 식분(識分)을 설하셨으니, 미래식(未來識)이 생길 때를 이름하여 생(生)이라고 하며, 명색(名色)ㆍ6입(入)ㆍ촉(觸)ㆍ수(受)를 이름하여 노사(老死)라 하고, 전세(前世)의 애(愛)ㆍ취(取)ㆍ유(有)는 능히 지금의 유를 모으기 때문에 이 생에서 과거가 되며, 애(愛)와 취(取)는 곧 번뇌의 분(分)이므로 이를 설하여 무명이라고 하였다. 유는 곧 행(行)인 것이다. 현재의 3지(支)가 내생(來生)과 과거의 2지(支)를 심는 생사의 바퀴를 굴리는 것이다. 저 중생들의 바퀴가 회전하는 것은 무명으로 덮여 있기 때문이다. 여덟은 현재, 둘은 과거, 둘은 미래의 세계로 차별되므로 이와 같이 분별을 하는 것이니, 이와 같이 회전할 때에 모든 것이 다 열둘이라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또 그 외에 여분(餘分)의 인연이 있는데 지금 이를 설하겠다. 처음에 가라라로부터 시작해서 포와 육단이 생기고 그 지절이 단단하고 두터워진 다음 어린아이가 되고 소년이 되고 장년이 되고 쇠분(衰分)에 접어들어서 늙어 죽게 되는 이들 열 가지의 부분에서 그 연기를 관찰을 하는 것이다.
또 기(起)ㆍ주(住)ㆍ기연(起緣)ㆍ입(入)ㆍ출(出)ㆍ방편분(方便分), 나아가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연기를 본다. 또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니, 저 안색(眼色)이 안식(眼識)을 일으킴을 말한다. 3사(事)가 화합하여 촉이 있으니 수(受)ㆍ상(想)ㆍ사(思)를 일으키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수행하여 다른 종류의 연기를 관찰한다고 한다.
또 수행하여 방편으로 제입(諸入)의 연기를 관하여 저 밝고 맑은 경계로써 스스로 향하여 제입문(諸入門)을 보는데, 이와 같이 보고 나면 각자 자상(自相)을 관하는 곳에서 모든 들고 나는 한량없는 적취(積聚)를 깨뜨리고 숙상(熟相)이 나타난다.
그리하여 시방에 유주하면 지극한 지혜의 경계는 관찰함에 도달한다. 밝은 지혜로 승진하는 자는 수행하여 선교방편에 머문다. 이때에 문(聞)ㆍ사(思)ㆍ수(修)의 지혜와 숙상과 괴상(壞相)이 차례로 일어나는데, 나머지 모든 승진의 이치는 앞의 입처(入處)에서 설한 것과 같다.
또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난다는 것은 수행을 하는 자가 먼저 내신(內身)을 허물면 다음에 외색(外色)을 봄을 이르는 것이니, 이는 마치 저 거울에다 비추어 보면 그 물상(物像)으로 인하여 상이 나타나는 것과 같다. 이와 같이 소의상(所依相)이 일어나면 또한 그 외상(外相)이 일어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부정(不淨)에서 연기를 관한다. 먼저 방편처(方便處)에서 그 생각을 묶어 둠이 견고해진 다음에 그 지절(肢節)에서 분해하여 연기를 보는 것이다. 명상(明相)이 일어나면 무명상(無明相)이 허물어지며 각골(脚骨)에 의하여 박골(腨骨)ㆍ비골(髀骨)ㆍ과골(跨骨)ㆍ견골(肩骨)ㆍ경골(頸骨)ㆍ두골(頭骨)이 있어서 시방세계에 충만하니, 유루업상(有漏業相)이 그 밑에서 두루 나타나 여러 가지 부정상(不淨相)이 계급에 따라서 차례로 일어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네 가지 인(因)이 모든 고통을 일으킴을 관하니, 전전인(展轉因)과 인근인(隣近因)과 주보인(周普因)과 불공인(不共因)이다.
또 수행하여 과(果)는 생(生)의 인에 따르고, 생은 유(有)의 인에 따르고, 유는 취(取)의 인에 따르는 것을 관하니, 이와 같이 나아가 행(行)은 무명(無明)의 인에 따른다. 행(行)이 곧 과(果)이며, 또한 곧 인(因)이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인을 따라서 그 과를 미루어 가면 다시 노사(老死)에 이르게 되는 것 역시 이와 같다.
만약 무명에서 인을 구한다고 한다면 필시 크게 두려워져서 단견(斷見)을 일으키게 될 것이니, 지혜가 없어 어둡고 여명(餘明)이 매우 희미하여 마치 반딧불과 같다. 그런데도 오히려 인을 다시 구하여 자신의 견(見)을 그치지 않는다면 오직 대흑암(大黑闇)과 함께할 뿐일 것이다.
세존께서 말씀하셨다.
“정사유(正思惟)하지 않음을 연유로 중생이 만약 이와 함께한다면 곧 생사를 굴러다니게 될 것이니, 저 무명이 얽어 묶고 있기 때문에 바퀴가 있어서 항상 굴러다닐 것이다. 그리하여 무명이 근본이 되고 그 나머지 지(支)들이 짓는 바에 의하여 각각의 유상(有相)이 나타날 것이니,
모든 유지(有支)가 무명을 굴림[轉]이 가장 자재하고, 자재력(自在力)의 구르는 것은 마치 주인에게 소속된 종과 같을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없기 때문에 이것을 짓지 않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구르지 않는 것이니 그 밖의 여지(餘支)도 모두 이 말과 같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이다. 죽음에는 네 가지가 있으니, 점점사(漸漸死)와 돈사(頓死)와 행진사(行盡死)와 찰나사(刹那死)이다.”
또 세 가지의 무상(無常)을 설하였는데, 첫째는 찰나(刹那) 무상이고, 둘째는 분단(分段) 무상이고, 셋째는 종류(種類) 무상이다. 수행하여 이 무상을 요해한다면 네 가지 마(魔)를 멀리 여의고 무명을 깨뜨려 버릴 것이다. 밝은 상(相)이 나타나서 마치 밝고 맑은 등불처럼 모든 어둠을 몰아내는 것과 같다. 나아가 노사(老死)가 멸하여 밝은 상이 일어나는 것도 이와 같다. 그리하여 무명의 모든 적취(積聚)를 파괴하고 나면 일상(一相)의 정묘(淨妙)한 경계를 성취해서 수행하는 자의 신체가 유연하고 광택이 날 것이다. 이처럼 광택이 나게 되면 몸이 매우 밝고 맑아져서 마치 거울의 영상과 같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상(相)이 나타나서 그 밝고 맑음을 보고 나면 몸 안에 있는 온갖 물건들의 각각의 자상(自相)이 남김없이 드러나는데, 이와 같은 성취를 관하는 것을 이름하여 계(界)에서 득도(得度)하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다섯 가지의 어리석음과 다섯 가지의 대치상(對治相)이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계(界)이고, 둘째는 입(入)이며, 셋째는 음(陰)이고, 넷째는 비천(卑賤)이며, 다섯째는 구오(垢汚)인데,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의 어리석음이라 한다. 혹은 계(界)를 관하여 득도하기도 하고, 혹은 다시 음(陰)을 관하며 입(入)을 관하고 저 증가되는 공덕을 관하고 제일의(第一義)를 관하여 이로써 득도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다섯 가지의 대치라고 한다.
또 수행을 하는 자가 쾌정유리삼매(快淨琉璃三昧)에 들어서 밝고 맑은 경계에서 연기지(緣起支)를 관한다. 이처럼 연기지를 관할 때에 곧 이견상(易見想)이 생기는데 그 설이 다음과 같다.
아난이 부처님께 여쭈었다.
“연기(緣起)는 보기가 쉽습니다.”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12연기는 깊고 깊어서 그 밑이 없어 이를 보기도 어렵고 알기도 어렵다. 그런데 지금 네가 나의 저 3아승기겁의 깊고 미묘하여 얻기 어려운 과보를 허물어서 깨뜨리려고 하니,
어찌하여 기뻐서 이와 같은 말을 하느냐? 이 심묘관(深妙觀)에 대하여 내가 지금 너를 제도하리니, 너는 마땅히 나를 따라서 부처님의 경계를 보도록 하라. 부처님의 경계의 바다는 외도(外道)가 이리저리 흘러서 지혜가 없이 어둡고 음침해 양쪽이 어리석어 이염(爾炎)의 경계를 여의어서 능히 들어갈 수 없으니, 성문(聲聞)과 벽지불(辟支佛)이 비록 조금 들어갈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밑바닥까지 이를 수는 없는 것이다.”
이때에 세존께서 말씀을 하시고 나서 즉시 저 깊고 미묘한 이염(爾炎)에 들어가 삼매의 자재한 정수(正受)에 머무르셨다. 그 정수의 경계에 세 사자왕(師子王)이 있는데,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7보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큰 광명을 방출하여 성문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성문에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發心)으로부터 그 최후의 몸에 이르기까지 심은 모든 선근(善根)과 모든 연기(緣起)가 빠짐없이 모두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세 사자왕이 일어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7보의 연꽃 위에는 각각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큰 광명을 방출하여 벽지불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벽지불에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으로부터 나아가 구경(究竟)에 이르기까지 심은 선근과 모든 연기가 빠짐없이 모두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한량없는 수의 사자왕이 일어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널리 광명을 방출하여 보살의 경계를 끝까지 하였다. 그리고 나서 여러 보살들에게 머물렀는데, 처음의 발심으로부터 금강좌(金剛座)에 이르기까지 닦은 선근과 모든 공덕과 업(業)과 과(果)와 모든 연기가 다 나타났다.
이로부터 다시 한량없는 사자왕이 나타났으며,
그 사자왕의 위에는 각각 7보로 된 연못이 있고, 7보로 된 연못 가운데는 각각 7보로 된 연꽃이 피어 있으며, 하나하나의 연꽃 위에는 모두 부처님이 앉아 계셨는데, 부처님이 큰 광명을 방출하여 널리 불법을 비추어서 깊고 깊은 연기가 모두 나타났다.
이때 부처님께서 그 신력(神力)으로 아난에게 부처님의 경계를 보이시고 나서 아난에게 말씀하셨다.
“이염 중에도 또 다시 한량없고 끝없는 여러 부처님의 경계가 있는데, 부처님의 지혜가 행하는 바가 이와 같이 매우 깊고 미묘한 경계인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기뻐서 보기가 쉽다고 말하는가? 이것은 너의 지혜가 얕아서 아직 미치지 못하였기 때문에 보기가 쉽다고 말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염 경계에는 한량없는 모든 법들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는 허물어져서 모든 것이 공(空)하여져 청정하게 적멸(寂滅)한다.
적멸하고 나면 다시 뛰어나고 묘한 이염을 관하되 저 부처님의 법신(法身)을 일으켜서 그것이 점점 광대하여져서 시방세계에 두루 가득 찬다. 그리하여 한량없는 법보(法寶)ㆍ법신(法身)에 충만하고 법신의 광명이 변제(邊際)가 없으니, 이것이 불공(不共) 지혜가 행하는 경계인데 모든 불법의 깊고 깊은 연기가 모두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에 허물어져서 모든 것이 공하여 청정하게 적멸해서 아무런 처소도 없게 되는데, 마치 허공이 아무 데도 의지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보물을 손에 넣는 것을 이름하여 보물을 얻었다고 하는 것과 같이, 그 과보를 닦는 것도 이와 같아서 이를 이름하여 결정상(決定相)이라고 한다.
아난이여, 여래의 경계란 참으로 불가사의한 것이니, 지금 내가 너를 위하여 조금만 보여 주었을 뿐이다.”
그러자 아난은 부처님의 경계를 보고는 뛸 듯이 기뻐하면서 부처님께 여쭈었다.
“깊고 깊습니다. 세존이시여, 세존의 이염의 경계는 실로 그 밑바닥을 얻기가 어렵습니다. 제가 만일 부처님의 경계가 이와 같이 깊고 묘한 것이라는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차라리 저의 몸을 참깨[胡麻]처럼 부수어서 마땅히 먼저 불법의 피안(彼岸)을 구경(究竟)하여야 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모든 것을 이름하여 수행을 해서 연기의 분단(分段)을 관찰한다고 하는 것이다.
찰나라고 하는 것은 3세(世)가 한 찰나요, 한 찰나가 3세인 것이다.
법이 아직 일어나지 않은 것을 미래라 하고, 일어난 때를 현재라고 하며, 일어난 뒤에는 과거라고 한다. 한 찰나가 일어나면 곧 한 찰나가 고(苦)가 되니, 무상(無常)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중행(衆行)은 찰나가 잠시도 머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역시 그 무엇으로부터 오는 것도 없고 어디를 따라서 가는 것도 없으며, 또한 그 이르는 곳도 없고 비록 옮겨 간다고 해도 역시 아무 데도 가는 곳이 없고 가도 역시 모이고 쌓이는 것도 없다.
한 찰나가 일어나면 한 찰나가 멸한다. 찰나는 일념(一念)과 같고 일념은 찰나와 같다. 앞의 찰나가 모이면 이미 멸하고, 멸할 때에 그 뒤가 더불어 일어나는데, 수순하여 네 연(緣)이 구족하여 뒤의 찰나가 일어나는 것이다. 경계를 수행하면 한 찰나 사이에 한량없는 미진(微塵)이 있고, 한량없는 미진은 하나하나의 찰나마다 차례로 서로 이어져서 마치 구슬이 이어져 있는 것과 같다.
비유컨대 활을 잘 쏘는 네 명의 사람이 함께 화살을 쏘았다고 할 때, 어떤 걸음이 빠른 자가 그 화살이 미처 땅에 떨어지기도 전에 이를 쫓아가서 아직 공중에 있는 그 화살을 낚아채어서 이를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지신(地神)으로 말하면 그 빠르기가 이 사람보다도 더하고, 허공(虛空)의 신은 이 지신보다도 더 빠르며, 일월천(日月天)은 이 허공천보다도 더 빠르다. 이와 같이 건행천(健行天)은 그 빠르기가 저 일월보다도 배나 더한 것이다. 제행(諸行)의 무상함은 그 빠르기가 이들보다도 더해서 이를 도무지 비유할 수가 없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한다.
수행하여 가라라의 이레 동안의 주분(住分)에 한량없는 찰나가 있음을 관하는 것과 같이 여타의 모든 부분도 역시 이와 같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와 같이 관찰을 하고 나면 모든 어리석음을 여의고 밝은 지혜가 증익될 것이니, 이와 같이 한량없음을 이름하여 수행하여 연기의 찰나를 관한다고 하는 것이다.
또 수행하여 처음에 정수(正受)에 들어가는 것을 연박(連縛)이라 하고, 경계가 증장하는 것을 유주방편(流注方便)이라 하고, 경계에 편안히 머무르는 것을 분단(分段)이라 하며, 경계가 점점 멸하는 것을 찰나라 한다.
또 이미 네 가지의 차별상에서 연기를 관하는 것을 설하였다. 부처님께서 모든 연기(緣起)를 설하셨으니,
지금 마땅히 2지(支)는 종(種), 2지는 숙(熟), 2지는 기(起), 2지는 견소종(牽所種), 2지는 생장(生長), 2지는 성취(成就), 2지는 수(受), 2지는 작인(作人), 2지는 전(田), 2지는 기자(寄者), 2지는 소기(所寄), 2지는 수기자(受寄者)임을 설하겠다. 이를 이름하여 유지(有支)라 한다.
그런데 수행하여 연기를 관하면 5음(陰)이기도 하고 4음(陰)이기도 한데, 5음은 욕계(欲界)와 색계(色界)이고 4음은 무색계(無色界)이다. 무상(無常)과 공(空) 등의 제행(諸行)은 이 음에서 진실을 결정하고, 이처럼 진실을 이미 결정하면 그 결정상(決定相)이 현재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 일이 있기 때문에 이 일이 있고, 이 일이 일어나기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나며, 이 일이 없기 때문에 이 일이 없고, 이것이 멸하기 때문에 이것이 짓지 않는다. 비유컨대 부시와 부싯돌과 같아서 어떤 사람이 이것으로 방편을 쓰면 연기가 일어나고 그리하여 섶에 불이 붙어서 타는 것이다. 또한 나무가 있으면 그늘이 있고, 태양이 있으면 빛이 있고, 등불이 있으면 불꽃이 있는 것과 같아서 모든 것이 그 연을 따라서 일어나는 것이다.
무명(無明)은 내가 능히 행(行)을 일으킨다고 말하지 않으며, 행 또한 내가 무명으로부터 생기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모든 유지(有支)가 모두 이와 같이 곧 공법(空法)이고 적멸법(寂滅法)이며 무소유법(無所有法)으로서 짓는 자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만 무명과 제행(諸行)이 화합하여 유루법(有漏法)이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수(受)가 축(軸)이 되어서 유지의 바퀴를 굴려서 여러 결박(結縛)을 낳는데, 모든 결박 가운데서 애지(愛支)가 증상하고, 모든 결박 가운데서 취지(取支)가 증상하고, 모든 사(使) 가운데서 식지(識支)가 증상하고, 모든 전(纏) 가운데서 무명이 증상한다. 생(生)으로 향하면 결(結)이 증상하고, 생을 받으면 박(縛)이 증상하고, 모든 식이 표류하면 이사(利使)가 증상하고, 경계에서는 어리석음과 번뇌가 증상한다.
이와 같이 번뇌의 업의 박(縛)이 굴러서 과(果)를 낳는데, 바퀴가 있어 항상 굴러서 지혜가 없는 중생을 표류시킨다. 뜻을 따라 증상하기 때문에 차별이 있다고 말하고, 모든 분(分)에 결(結)ㆍ박(縛)ㆍ사(使)ㆍ전(纏)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수행하여 여섯 종류에서 12연기를 관한다.
12지(支)에서 이를 뜻에 수순하여 설하면 이른바 안반념(安般念)은 업지(業支)와 유지(有支)를 관하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으로 하는 것이 곧 신행(身行)이며, 각관(覺觀)이 곧 구행(口行)이며, 상사(想思)가 곧 의행(意行)이다. 그러므로 안반념이 곧 저 대치(對治)인 것이다.
그리고 계방편관(界方便觀)은 식지(識支)와 생지(生支)를 관하는 것이다. 식(識)이 증상하기 때문에 태(胎)에 처하는데, 식이 모든 계에서 증상하는 것을 7식계(識界)라 한다. 그러므로 계방편관은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음방편관(陰方便觀)은 명색지(名色支)와 노사지(老死支)를 관하므로 음방편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모든 날숨과 들숨을 깨뜨리는 방편관은 6입지(入支)와 촉지(觸支)를 관하므로 입방편관(入方便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연기방편관(緣起方便觀)은 무명지(無明支)와 애지(愛支)를 관하므로 연기방편관이 곧 저 대치인 것이다. 왜냐하면 수(受)와 무명은 곧 모든 번뇌의 근본이기 때문에 지혜가 곧 저 대치인 것이며, 애(愛)와 취(取)의 2지는 청정에 염착(染着)하였기 때문에 부정(不淨)이 곧 대치인 것이다.
또 수행하여 12인연을 관함에 있어서 혹은 인(因)을 따라 도탈하기도 하고 혹은 과(果)를 따라 도탈하기도 하며, 혹은 무명과 행(行) 나아가 노사를 따르기도 하고, 혹은 식(識) 나아가 노사를 관하기도 한다. 혹은 3사(事)가 화합하여 촉(觸)이 생기는데, 촉은 수(受)를 생하고, 수는 애(愛)를 생하고 애는 취(取)를 생하고 나아가 노사에 이른다. 혹은 애와 취와 유로부터 노사를 생하고, 혹은 노사로부터 나아가 무명에 이르고, 혹은 노사 나아가 식에 이름을 관하는데, 『불성유경(佛城喩經)』에 설한 것과 같다.
또 수행하여 4념처(念處)에서 12지를 관하여 증상하니, 신념처(身念處)에서 6입지(入支)를 관하고, 수념처(受念處)에서 수지(受支)를 관하며, 심념처(心念處)에서 식지(識支)와 명색지(名色支)를 관하며, 법념처(法念處)에서 나머지의 지(支)를 통틀어서 본다. 이와 같은 뜻을 설하여 마쳤으니, 다음과 같이 게송으로 이를 찬탄한다.


방편 치지(治地)의 행으로
드디어 구경처(究竟處)에 이르고
위없는 법을 베푸는 주인
이를 설해 전하여 지금에 이르렀노라.

내가 그 뛰어난 들음에 따라
깊고 묘한 뜻을 엮어서 설하였노라.
구절들을 장엄하여 모아서
법이 오래오래 머물게 하고자 하노라.

부처님의 법이 깊어 바닥이 없으니
수행을 해도 그 끝이 없어라.
나의 적은 지혜의 힘을 가지고
한량없는 법을 선양하노라.

이것이 깊어서 헤아릴 수가 없으니
마치 모기가 바닷물을 마심과 같아라.
오직 저 이미 도탈을 한 자만이
그런 다음에야 구경에 이르러라.

62계(界)의 6종(種)이란 6정(情)ㆍ6진(塵)ㆍ6식(識)ㆍ6계(界)ㆍ6각(覺)이다.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을 일러 세 부정각(不淨覺)이라 하는데, 이것이 도리어 세 정각(淨覺)이다. 고(苦)ㆍ낙(樂)ㆍ불고불락(不苦不樂)ㆍ우(憂)ㆍ희(喜)ㆍ사(捨)가 여섯이다.
셋은 욕계(欲界)ㆍ색계(色界)ㆍ무색계(無色界)이며, 또 색계ㆍ무색계ㆍ멸계(滅界)이다. 셋은 세법(世法)ㆍ연중상법(軟中上法)ㆍ선불선무기법(善不善無記法)이다. 학(學)ㆍ무학(無學)ㆍ비학(非學)ㆍ비무학(非無學)은 넷이다. 둘은 식(食)과 비식(非食), 누(漏)와 무루(無漏)이며, 의욕(依欲)과 의출요(依出要), 유위(有爲)와 무위(無爲)이다.
서른여섯의 부정(不淨)을 차례로 말하면, 털과 머리털, 손톱과 발톱, 이빨, 얇은 살갗과 두꺼운 살갗, 힘줄과 살, 뼈와 골수, 비장, 신장, 심장, 간과 폐, 소장과 대장, 위(胃)와 포(胞), 오줌과 똥, 때와 오물, 눈물과 콧물, 침과 고름, 피, 누렇고 흰 가래와 피멍, 지방(脂肪)과 뇌(腦)와 막(膜)이다.
찰나의 수에 대하여 말하면, 120찰나를 1달찰나(怛刹那)라 하고, 60달찰나를 1라바(羅婆)라 하며, 30라바를 1마후로투(摩睺路妬)라 하고, 30마후로투를 1일(日) 1야(夜)라 한다. 그리고 한 해 중에 오직 2시(時) 2일(日)과 30마후로투의 밤과 낮이 같다.
8월 달을 이름하여 갈제(羯提)라 하고, 후반월(後半月)을 이름하여 백분(百分)이라 하는데, 갈제월(羯提月)의 백분(白分)의 8일과 폐사거월(陛舍佉月)의 백분의 8일이다. 2월을 이름하여 폐사거라 하고,
후반월을 이름하여 백분이라 한다. 이것이 곧 2시 2일인데 그 밤과 낮이 각각 15마후로투이다. 이로부터 그 이후로는 저 라바가 흘러서 혹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도 하고, 혹은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흐른다고 하는데 그 밤과 낮이 같아서 각각 30마후로투이다.
갈제월(羯提月)의 백분(百分)의 8일과 폐사거월(陛舍佉月)의 백분의 8일인데, 갈제월이란 7월 16일에서 8월 15일까지를 말한다. 이 8월을 이름하여 후반월(後半月)이라 하고 이름하여 백분이라 하며, 폐사거월이란 1월 16일에서 2월 15일까지를 말하는데, 이 2월을 이름하여 후반월이라 하고 이름하여 백분이라 한다. 이것이 곧 2시(時) 2일(日)로서 그 밤과 낮이 각각 30마후로투인 것이다. 이로부터 그 이후로 라바가 흐른다고 하였는데, 혹은 낮이 짧아지고 밤이 길어지기도 하고, 혹은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이름하여 흐른다≺流≻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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