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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하나씩/적어보자 불교

[적어보자] #2429 불교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상권

by Kay/케이 2023. 5.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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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합대장경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상권

 

달마다라선경(達摩多羅禪經) 상권


동진(東晉) 천축(天竺)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 한역
홍승균 번역


무릇 3업(業)은 선(禪)과 지(智)로써 일어남을 그 종지[宗]로 삼는다. 비록 그것이 정밀[精]하고 거침에 따라 달리 나뉜다고 하지만 계적(階籍)은 방식이 있다. 그러므로 길을 가다가 갈림길이 나오더라도 그 발길이 어지러워지는 일이 없으며, 세속을 혁신함에 있어서 힘쓰는 공(功)을 기다리지 않고도 고요함이 쌓이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그를 경유하게 되면 깊숙한 경지에 나아가 은미(隱微)함에 이르게 되는데, 그것이 깊고 넓어서 궁구(窮究)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그 이치가 망령되거나 어두운 것이 아니므로 종지(宗旨)의 실마리를 찾을 수는 있다.
예를 들어 이를 간략하게 본다면, 선(禪)은 지(智)가 아니므로 적(寂)의 끝을 말할 수가 없고, 또 지는 선이 아니므로 조(照)의 깊이를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선(禪)과 지(智)의 종요(宗要)는 곧 조(照)와 적(寂)을 이르는 것이니, 이것은 곧 서로 보완관계를 이루는 것으로서 곧 조는 적을 떠나지 않고 적은 조를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감응하면 함께 노닐고 호응하면 같이 지향하는데, 그 공(功)이 쓰임에 있어서 현묘하여 서로 더불어서 저 만법(萬法)을 기르는 것으로서 실로 이것은 그 묘물(妙物)인 것이다.
그래서 군동(群動)을 운전하여 일(一)에 이르되 유(有)가 아니고, 저 대상(大像)은 아직 그것이 형상을 이루기 전에 확연하되 무(無)가 아닌 것이다. 그리하여 생각함이 없고 작위함이 없으나 작위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그 마음을 씻어서 마음의 혼란함을 진정하는 자는 이를 통하여 그 생각함을 연마하고, 깨달아서 그 미묘함에 들어간 자는 이를 통해서 그 신통함을 끝까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장차 그 문(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 근기가 섭회(攝會)에 있다. 그 이치가 현묘(玄妙)하고 그 헤아림이 광대하여 도(道)가 문장[文]에 숨어 버릴 경우, 이것은 곧 아난(阿難)이 곡진히 받는 저 음조(音詔)로서 적절한 사람을 만나지 않는다면 반드시 이를 영부(靈符:마음의 집)에 감추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어째서인가? 마음이란 원래 일정한 법도가 없고 그 변화가 다양하며, 그리고 수(數)란 정해진 형상이 없고 그 느낌을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천축(天竺)을 교화하여 행함에 있어서 장(匠)이 있음을 봉함(封緘)하여 유심(幽深)한 관문을 열 수가 없으므로 공연히 그 뜰만 엿볼 것이다. 그러므로 이를 따라서 본다면 이치는 행(行)하고 장(藏)함이 있고 도(道)는 헛되이 전수하는 것이 아니니, 그것이 참으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는 것이다.
여래니(如來泥)께서 말씀하셨다.
“오래지 않아 아난(阿難)이 그 공행(共行)을 제자인 말전지(末田地)에게 전할 것이며, 말전지는 이를 사나바사(舍那婆斯)에게 전할 것이다.
이들 세 응진(應眞:아라한)은 다들 지극한 원(願)을 타고 그윽한 가운데서 옛날에 계합(契合)하니, 그 공(功)이 말[言] 밖에 있다. 그리하여 저 경(經)이 변론하여 밝히지 않은 것은 반드시 어두운 길처럼 그 장(匠)이 없을 것이며 잔약(孱弱)하여 차별이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 뒤에 우바굴(優波崛)이 있어서 약하면서도 뛰어나고 현명하여 그 지혜가 세상의 모범을 잇고 그 재주가 벼슬을 받는 것보다도 높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치에 접촉해서 간략함을 따라서 8만의 법장(法藏)을 보존하여 간직함에 오직 요령이 있을 것이니, 5부(部)의 나뉨이 여기서부터 비로소 시작이 될 것이다.
따라서 이를 인하여 추론해 보면 형운(形運)을 따라 폐하고 흥하되 스스로 조짐을 보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신용(神用)으로 말하면 걸음이 그윽하여 자취가 없고 오묘한 움직임을 찾기가 어려워서 추솔(麤率)함을 집적거려서 이상(異常)만을 낳을 것이다. 그러니 어찌 가히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으며 살피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고 이로부터 사변(事變)에 감응하여 구전(舊典)을 생각하게 되는 자가 있을 것이니, 그런 자들이 저들 5부(部)의 학(學)에 모두 있을 것이다. 그리하여 모두 대법(大法)이 장차 무너질 것을 두려워하고 이치가 심오함을 개탄하면서 드디어 각각 선경(禪經)을 술찬(述讚)하여 성대한 사업을 융숭(隆崇)하게 할 것이다.
그런데 가르침에 있어서 무수한 방편을 사용해서 적연(寂然)함을 구할 것이지만 그것은 오직 고요하고 고요하기만 해서 그 원리는 역시 하나일 뿐인 것이다. 그리고 가지를 찾아서 그 뿌리를 구하는 자는 많겠지만 그 근본을 통섭(統攝)하여 지말(枝末)을 운용하는 자는 적을 것이다. 그래서 더러는 장차 가다가도 이르지 못하고 더러는 그 방법만을 지키어 변하지 못할 것이다.
이런 까닭으로 해서 경(經)을 만원(滿願)의 덕(德)이라고 일컬을 것이며, 모든 일[事]의 바람이라고 높일 것이다. 그런데 그 성지(聖旨)를 탐구하여 본다면 다만 장점만을 온전히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단점 또한 이를 구제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저들 5부의 업(業)이 서로 달라서 각각 그에 따른 사람들이 있겠지만 그러나 사람이란 영원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 도가 혹 융성하기도 하고 혹 쇠퇴하기도 할 것이며, 그것이 각각 흥하고 패하는 때를 따라 서로가 바뀌어 가며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어느 것이 크다거나 적다거나 하여 붙이는 명목이 고정된 것일 수가 있겠는가?
그리고 또 절(節)에 달하여 변(變)을 잘하면 출처(出處)하는 바가 경계가 없어서 그 이름을 감추어 버리고 자취를 지워버린다면 들리는 것도 없고 보이는 것도 없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와 같은 자는 다시 이름을 붙일 수가 없는 것인데, 그렇다면 저 부(部)로 나눈 것 또한 그 이름이 아닌 것으로서 이처럼 부로 나눈 것이고, 또한 그 밖에 따로 어떤 종문(宗門)을 벗어나서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임이 분명하다 하겠다.
매양 저 큰 가르침(불교)이 동쪽으로 전파됨에 있어서 선(禪)의 수가 더욱더 적다는 사실에 대하여 이를 개탄하여 왔다. 3업(業)이 통서(統緖)가 없어서 그 도가 거의 패하게 되었다.

그런데 예전에 구마기바(鳩摩耆婆:구마라집)가 마명(馬鳴)이 지은 것을 선양하여 드디어 이 업(業)이 있게 되었다. 비록 그 도가 아직 무르익지는 못하였지만 무릇 이것이 바로 저 산을 만들고자 지금 한 소쿠리의 흙을 담아다 부은 격이라 하겠으니, 그렇다면 장차 그 때가 올 것이라 이것이 기뻐 그 기취(奇趣)가 감격스럽다 하겠다.
그런데 이 사람은 제승(制勝)의 의론을 버리고 불언(不言)의 변(辯)을 따랐다. 그리하여 드디어 승나(僧那:사홍서원)의 지적(至寂)을 입을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기로 맹세하고 그 덕을 생각하여 이를 잊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저 유훈(遺訓)이 지금 여기에 남아 있는 것이다.
그 요지를 말한다면 아직 어떤 상(象)이 나타나기 전에 크게 이루기를 도모하는 것으로서 미언(微言)을 열어서 본체(本體)를 높인 것이다. 그리하여 색(色)에 미혹하여 덕에 어긋남을 깨달아서 6문(門)을 막아 환란(患亂)을 잠재웠으며, 성냄이 본성을 해친다는 것에 통달하여 나와 남을 동일시해서 이것을 마음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드디어 이족(異族)이 동기(同氣)로 그 형상을 바꾸고 자취를 만들었으며, 깊이 연기(緣起)에 들어가서 생사의 경계를 보았다. 그리하여 곧 9관(關)을 용진(龍津)에다 열어서 3인(忍)을 뛰어넘어 지위가 올라갔으며, 번뇌의 습기(習氣)가 무생(無生)에 엉기고 육체적인 고통들이 신화(神化)에서 그 종결을 보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아무것도 따라서 생기는 것이 없지만 그러나 무엇이든 생기지 않는 것도 없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모든 것들이 생기면서도 생기는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여기서 번역하는 것은 달마다라(達摩多羅)와 불대선(佛大先)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분들은 서역(西域)의 뛰어난 분들로서 바로 선훈(禪訓)의 종장(宗匠)들인 것이다.
그리하여 경요(經要)를 수집해서 대승을 발하기를 권면하였다. 그러나 홍교(弘敎)가 서로 같지가 않기 때문에 서로들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들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달마다라가 모든 편장(篇章)들을 모아서 이를 같은 도(道)로 만들어서 항하사와 같은 다양한 것들을 한 가지 빛깔로 열어 놓았다.
그런데 그가 본 관점은 곧 일어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고 소멸한다고 해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비록 가고 오는 것이 아무리 한정된 경계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일찍이 진여(眞如)를 벗어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색(色)이 진여를 떠난 적이 없고 진여가 색을 떠난 적이 없으니, 색이 곧 진여이며 진여가 곧 색인 것이다”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불대선께서 그 근원을 맑게 하여 흐름을 이끌어 놓았으므로 그것이 차츰 흘러서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에 두 가지 도로부터 감로의 문을 열어 놓았으니, 곧 4의(義)를 풀이하여 미망(迷妄)으로부터 돌아오도록 하였으며, 돌아올 길을 열어 주어서 이를 영회(領會)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음계(陰界)를 분별하여 이를 바른 관점으로 이끌어 주었으며, 연기(緣起)에 대하여 이를 시원스럽게 흩어버려서 스스로 우열을 가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근원을 추구하여 그 종말에 돌아옴으로써
종극(終極)의 오묘함을 찾도록 하였다. 그러나 종극이란 그것이 다하는 것이 아니니, 또한 다하게 되는 것도 아니어서 이것을 일러 무진(無盡)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래의 무진법문(無盡法門)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그 도(道)가 3승(乘)을 통괄하고 그 지혜가 10지(地)를 통달하지 않고서야 누가 능히 그 현근(玄根)을 법신(法身)에다 통개(洞開)할 수 있고, 그 종일(宗一)을 무상(無相)에다 귀숙(歸宿)시킬 수가 있겠으며, 그리하여 정(靜)이 비추어 주지 않는 곳이 없고 동(動)이 적(寂)을 떠나지 않도록 할 수가 있겠는가?

1. 수행방편도안나반나념퇴분(修行方便道安那般那念退分)

석가모니 세존께 예배를 올리니
타오르던 번뇌가 사라지는구나.
유전(流轉)하여 퇴주(退住)하는 자를
승진(升進)의 도로써 제도하네.

저 미묘한 법을 수행하여
퇴주의 허물에서 벗어나고
모든 악을 멸하여
모든 공덕들을 이루어 내리라.

부처님 세존께서는 법상(法相)을 잘 아시고 여실(如實)한 지혜를 얻어서 타오르는 번뇌의 불길을 멸하시고 뜨거운 불구덩이로부터 벗어나 바라밀의 배를 타고 한량이 없는 고해(苦海)를 건너셨다. 그리고 본원(本願)의 큰 자비의 힘을 행하셨으므로 중생들을 버리지 않으셨으며, 모든 수행하는 자들을 위해서 일찍이 없던 법을 설하시어 모든 제도 받지 못한 자들을 제도해서 그 안온(安隱)함을 얻도록 하셨다.
이를 일러서 두 가지의 감로문(甘露門)이라고 하는데, 각각 그 두 가지의 길을 가지고 있다. 첫째는 방편도(方便道)이고, 둘째는 승도(勝道)이다. 이것은 청정함을 구족해서 심심(甚深)하고 미묘하여 능히 모든 수행하는 자들로 하여금 3퇴(退)의 법으로부터 벗어나서 주박(住縛)을 멀리 여의고 승진(升進)을 증익하도록 하며, 결정(決定)을 성취해서 생사의 고통을 끝내고 구경 해탈하도록 하는 동시에 중생들의 오랜 어리석음[癡冥]을 제거하여 주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멸도하신 뒤에 존자 대가섭(大迦葉)과 존자 아난(阿難)과 존자 말전지(末田地)와 존자 사나바사(舍那婆斯)와 존자 우바굴(優波崛)과 존자 바수밀(婆須蜜)과 존자 승가라차(僧伽羅叉)와 존자 달마다라(達摩多羅) 내지 존자 불야밀다라(不若蜜多羅) 등 모든 법을 간직한 자들이 이와 같은 지혜의 등불을 차례로 전하여 주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지금 내가
그 들은 바를 따라서 이에 관한 뜻을 설하는 것이다.

내가 지금 들은 바대로
수행의 경지를 풀어 설하노니
방편과 승구경(勝究竟)이
수행에서 생기는 것과 같다.

선법(善法)을 수행하는 데에는
먼저 네 종류가 있음을 알아야 하니,
퇴감(退減)과 주(住)와 승진(昇進)과
모든 공덕(功德)을 결정하는 것이다.

따라서 만약 수행이 퇴감할 때에
주법(住法)이 생기지 않게 한다고 해도
역시 승진은 불가능한 것이니
마땅히 이것을 지금 대강 설하리라.

우선 평등한 마음을 일으킨 다음
자비로운 마음의 관(觀)을 익히고 행하여
잠깐 동안이라도 성냄[瞋恚]의 마음을 그치고
잠시 중지하여 행해지지 않도록 한다.

번뇌가 잠깐 멈추면
다음에 시라(尸羅:戒)를 깨끗이 하고
시라가 이미 깨끗해지면
삼매(三昧)가 그 가운데에서 일어나리라.

삼매를 이미 닦아서 일으켰으면
응하고 불응함을 관찰하고
응하고 불응함을 잘 안다면
응하여 짓는 바를 향해 닦아야 한다.

이미 응하여 짓는 바를 수행하되
마음을 매어 전념하라.
이미 그곳을 즐길 수 있으면
올바르게 관찰하여 풍상(風相)에 의지하라.

올바르게 관찰하여 풍상에 의지할 때에
아직도 마음이 어지러이 치달으면
마음을 그치게 하여 호흡에 드는 것을안반(安般)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견(見)이고, 둘째는 둔근(鈍根)에 접촉되는 불견(不見)이다.
말을 길들여서 매어둠과 같이 한다.

마음을 그치게 하여 쉬게 되었다면
바르게 사유하여
차가움과 따뜻함, 가벼움과 무거움
유연함과 거침, 껄끄러움과 매끄러움 등을 관찰한다.

수행하여 분명하게 깨달아 알아서
이를 따라서 잘 조적(調適)해야 한다.

그런데 접촉하여 깨닫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하나를 세면서 둘이라 하고
둘을 세면서 하나라고 하고
아홉에 이르러서도 혼란이 생긴다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만약에 이처럼 수행퇴를 하다가
처음부터 다시 세기 시작하여
열까지 세어서 만족하면
모든 허물의 행을 멀리 여의게 된다.

닦지 않거나 지나치게 닦는다면
다른 수행이 생길 수도 있으니
이같이 여러 잘못이 생기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수행함에 만약 수식(數息)을 함께하면
마음에 혹란(惑亂)이 생기기도 한다.
그 혹란이 증장한다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기식(氣息)이 통하여 흐르지 못해서
얼굴과 콧등에 충격이 오면
머리와 이마가 모두 괴롭고
속에서 회오리바람이 일기도 한다.
호흡이 흩어져 정도(正道)를 잃었는데
그래도 이를 고칠 줄을 모른다면
몸에서 심한 번열(煩熱)이 치솟아서
마음이 사뭇 혼란하여진다.

네 종류가 이미 착란을 일으키면

바람에 의지함이 어그러져 다투리라.

수행하여 수식을 하려고 해도
좋은 방편이 되지는 못한다.
이것을 대치(對治)하는 방법을 모르면
반드시 빠르게 퇴감하게 되리라.

들숨을 인연하여 수행하려 해도
도리어 날숨을 인연하게 된다.
날숨을 인연하여 수행하려 해도
도리어 들숨을 인연하게 된다.

두 가지에 마음이 깨끗해지면
이것이 마땅히 수행의 과보이리라.

고요하게 머물러 정의(定意)가 생기면
다시금 새로이 수식을 구해야 한다.
이와 같은 잘못들이 있음을
모두 수행퇴라 한다.

급하게 헐떡이며 수식관을 한다면
이는 곧 생각을 흩어지게 한다.
그리하여 흩어진 생각으로
수행하면 마음에 광증(狂症)을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마음이 광증을 일으켜
응하고 불응함을 알지 못하고
두 가지에 분별이 없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수행하여 수식[數]이 이뤄지면
호흡이 가는 대로 따라서[隨] 가게 된다.
가는 곳을 따라 곳곳에 머물고
저 머문 곳에서 잘 관찰해야 한다.

관찰이 이뤄지면 호흡을 되돌리고
되돌리고 나면, 청정(淸淨)이 일어나게 된다.

이 여섯 가지를 잘 알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호흡의 길고 짧음을 모두 분별하니
몸이 두루하여 모조리 깨달아 알고
몸을 관찰하는 수행이 차츰 쉬게 되면
일체에 응하여 깨닫게 된다.

이것을 잘 알지 못하면
이것을 곧 수행퇴라 한다.신념처(身念處)의 4승(勝)을 마친다.
기쁨을 알고 또한 즐거움을 알아서
방편의 뜻을 부지런히 행해야 한다.
마땅히 다시 심행(心行)을 제어하여
요동함에 이르지 않게 한다.수념처(受念處)의 4승을 마친다.

다음으로 분별하여 마음을 알아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또 기쁜 마음을 일으키면
되돌려 다시 섭수하여 정(定)에 들어가야 하니

이것은 부정(不定)의 마음이 아니고
이미 마음이 정에 들면 해탈하게 된다.심념처(心念處)의 4승을 마친다.

해탈을 잘 수행하는 자는
마음을 퇴몰(退沒)시키지 않으니
만약 퇴감(退減)의 분에 든다면
해탈하는 일이 있을 수 없으리라.

무상(無常)과 단(斷)과
이욕(離欲)과 멸진(滅盡)을 관찰하여
날숨과 들숨이 멸하면
이를 수행승(修行勝)이라 이름한다.이 4상(相)은 법념처(法念處)와 비슷하다.

이와 같은 열여섯 가지의 행이
자재로이 마음을 회전하면

각(覺)과 촉(觸)을 얻으리니
견(見)을 얻음도 역시 그러하리라.

만약 견(見)과 촉(觸)에 대하여
그 분제(分際)를 잘 알지 못한다면
이 과실을 반드시 알아서
지혜를 닦아 후퇴함이 없게 해야 한다.

수행하여 위로 증진하면
마땅히 아래에 인연하지 않으니

아래에 인연함도 이와 같아서
위로의 증진에 응하지 않는다.

만약 두 가지의 증진을 보면
마음이 굳게 머물러서 평등하게 관찰하게 된다.
여기 마음이 머물면 스스로 이루어
다시 수행하던 곳으로 돌아오리라.

2. 수행승도퇴분(修行勝道退分)

뛰어난 염(念)을 성취했더라도
게으르면 결국 침몰하리라.
이것이 곧 퇴상(退像)이니
구하는 바를 감내하지 못한다.

불염오(不染汚)와 무기(無記)의
모든 번뇌의 퇴전(退轉)을 일으켜
번뇌의 더러움과 열기(熱氣)가 생기니
이로부터 정견(正見)을 잃게 된다.

요동하거나 아니면 빗장을 잠가
들뜨고 휘날리고 거칠고 껄끄럽고 미끄러지는
이와 같은 다섯 가지 퇴감(退減)의 모습을
수행하여 마땅히 분별해야 하리라.

멀리 보아도 바라는 바가 끊어졌고
보이던 것도 이미 추락을 하여
돌아보면 깊고 험한 것들만 보이니
이런 것이 모두 퇴감의 모양이다.

긴 병에 외우는 것을 그치고 다투니
업(業)이 많아서 멀리 돌아다니는구나.
그때에 해탈의 종자가
바로 다섯 가지 퇴감의 인(因)이다.

신(信)ㆍ계(戒)ㆍ문(聞)ㆍ사(捨)ㆍ혜(慧)
이것에서 점점 쇠퇴하네.

몸이 무겁고 혼미하고 둔하고
잠에 빠지고 침몰하는
이 다섯 가지가 수행에서의 퇴전의 모양임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겁나고 두려워서 머뭇거리며
놀랍고 두려워 기쁘지가 않으며
욕망을 여의는 데 게으르면
수행으로 회향하지 못한다.

익히지 않거나 지나치게 익히는 것
이 두 가지는 모두 잘못된 것이다.
그때에는 해탈의 종자이던 것이
지금은 수행의 퇴전이다.

상(相)을 여읜 삼매의 즐거움과
이염(爾炎)이 모두 소진하면
거칠고 껄끄러운 4대(大)의 종자가
되돌아와 몸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하여 흔들려 정념(正念)을 잃으면
이로부터 마음이 혼란스러워
그 마음이 편안하고 고요하지 못하니
이것은 수행으로부터 생긴다.

모든 상서로운 모양들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으니
이와 같이 관상을 수행한다면
보고자 해도 매우 어려우리라.

모든 근(根)이 모두 내달려
욕망을 따라서 인연함을 향하니
삿된 마음이 널리 유산(流散)하여
모든 경계에 즐겨 달라붙는다.

형체가 사라지고 마음이 슬프며 참담하니
그 몸이 모조리 불타오른다.
이와 같이 불길이 타오르면
이것을 우퇴(憂退)라고 한다.

그 방편을 정근(精勤)하지 않으면

나중에 가서 회한이 생기리라.
응한 바를 따라 성취했음을 듣고
나아가려 해도 열악하여 할 수 없다.

기쁜 승처(勝處)로 나아가지 않고
승처를 보고도 이를 취하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지혜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스스로 계율을 벗어나는 것을 생각하여
의심하고 뉘우치고 모든 깨달음에 이르는 데
뜻이 없어 자미(滋味)가 없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모든 허물로 정의(定意)가 약하니
삼매가 점점 소멸하고
마음이 흩어져 번뇌에 덮이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마음의 거조(擧調)와 순사(順捨)
시(時)ㆍ비시(非時)를 관하지 않고
머물고 일어남과 인연을 깨닫지 못하고
지혜가 없으므로 수행이 퇴전한다.

여섯 때[六時]의 행(行)을 알지 못하고
6계(界)도 또한 잘 알지 못하여
6교(巧)의 방편에 또한 어리석으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탐욕과 성냄의 깨달음과
10상(想)의 선교방편과
여러 선지(禪地)로 향하는 것을 얻음과
법심(法心)이 미망을 이해함
이런 모든 것을 차례로 건너야 함을
모르기 때문에 수행이 퇴전한다.

처(處)와 비처(非處)와
업보(業報)와 정수(正受)를 관하지 않고
선정(禪定)의 모든 해탈과
정미(淨味)를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고

모든 근(根)이 이르는 곳의 길을
성(性)이 이를 분별하지 않고
마음이 뭇 잡스런 모양들을 따르면
이것이 모두 무지(無知)의 퇴전이다.

고락(苦樂)의 빠른 길에서
그 마음이 취향(趣向)하지 않고
이처럼 그 마음이 미혹하면
필시 퇴전의 곳으로 향하리라.

기(起)와 주(住)와 기연(起緣)과
입(入)과 출(出)과 방편
이 6법(法)을 이루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법을 알고 또한 의(義)를 알고
때를 알고 또한 양(量)을 알고
자신을 알고 무리들을 알고
그리고 복가라(福伽羅)를 아는 것 등
저 일곱 가지를 어리석어 깨닫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갖가지 악한 법을 일어나게 하고
낮고 천한 업(業)을 익혀 행하고
선하지 못한 벗을 가까이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응할 바를 잘못 설하고
사랑하는 것에만 즐겨 마음이 향한다면
오래지 않아서 수행이 퇴전하리란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머무는 장소와 사람과
침상과 침구 등 온갖 도구들
이들은 모두 즐길 것이 못되니
가까이하면 수행을 퇴전시킨다.

기쁘게 모든 잡스런 모양을 따라
닦는 바의 지혜를 감손(減損)시키면
인연이 있는 곳을 버려서

마음의 진실을 얻지 못한다.

수행할 때 본래의 모양을 버리고
마음이 흩어져 외연(外緣)을 따른다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려고 해도
끝내 마음이 즐겁지 않으리라.

그리하여 그 기르는 양분(養分)을 잃고
그 마음이 하나로 정해지지 못해서
몸이 다시는 윤택하지 않고
기쁨과 즐거움 또한 생기지 않으리라.

의지한 곳이 즐길 수가 없으니
몸과 마음이 다 같이 어지럽고
삼매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으니
그 마음이 영원히 머물지를 못한다.

이같이 머물지 못하는 마음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애(愛)와 견(見)과 만(慢)과 선(禪)을 증가시키는
인연에 마음이 맛들여 집착하여

이처럼 번뇌의 생각이 일어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그리하여 마치 몸을 가시로 찌르는 듯하고
혹은 심히 떨리는 듯하고

온몸이 모두 번뇌로 왕성해지니
뱀의 독이 전신에 퍼진 듯하리라.
이 같은 세 가지의 과악(過惡)이 있다면
반드시 그 수행이 퇴전하리라.

얻지 못할 것을 얻은 듯 수행하면
다른 일들로 마음이 한가롭지 못하리라.
저 3퇴(退)의 법을 익혀 가까이하면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업(業)과 번뇌와 과보
이것을 세 가지 장애라고 말한다.
그리고 또 해탈장(解脫障)이 있으니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방편상(方便想)의 악행(惡行)과
삼마제(三摩提)의 행지(行地)
이런 것을 관찰하지 못하면
이것이 수행을 퇴전케 한다.

방편상(方便想)의 여러 지위와
삼매행(三昧行)과 그 밖의 것을
들은 대로 따라서 이를 희망한다면
곧 취(趣)를 일으켜 퇴전한다.

생할 때 멸한다는 생각을 하고
멸할 때 생한다는 생각을 하면
두 생각이 모두 타당성을 잃어서
이것이 곧 수행을 퇴전케 한다.

만일 법에 머무는 가운데
생멸한다는 생각을 하니
이러한 전도(顚倒)를 일으키면
이것을 수행퇴(修行退)라 한다.

들[入] 때 나간다는 생각을 하고
나갈 때 든다는 생각을 하니
이 두 생각에 머물러 생각하면
이것을 전도(顚倒)라 말한다.

번뇌의 결박을 끊어버리고
바른 방편을 수행하면
그에 연유하여 힘을 얻으므로
비슷한 모양의 모든 상이 나온다.
비슷한 모양이 이미 생기면
수행하는 마음이 그를 따라 구르리라.
그리하여 곧장 번뇌가 일어나리니
이것을 수행퇴라 한다.

퇴과(退過)의 세찬 물결들이
수행하는 자를 떠돌아다니게 하니
나의 능력에 따라서
법해(法海)를 조금만 퇴전하게 하리라.

한량이 없는 그 밖의 퇴과(退過)는
그 깊이를 측량할 수가 없으니

지혜가 밝아 깊은 자들은
마땅히 스스로 널리 일컬어 설하리라.

3. 수행방편도안반념주분(修行方便道安般念住分)

내 힘으로 할 수 있는 만큼
퇴과(退過)를 설했노라.
이젠 주과(住過)를 설할 테니
수행하는 자는 잘 들으라.

만약에 숨을 들이쉬고 내쉴 때에
보는 것이 없고 깨달음도 없어서
방편의 구함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이는 곧 초문주(初門住)니라.

이미 저 문혜(聞慧)가 생기면
마땅히 사혜(思慧)의 염을 일으켜야 한다.
차례를 잘 이해하지 못하면
어리석어 주(住)에 속박될 것이다.

만약 세는[數] 것을 성취했다면
숨이 가는 대로 따라가야 한다.
따르는 법을 알지 못하면
이것을 수행주(修行住)라 한다.

부처님께서 비구에게 물었다.
누가 안반념(安般念)을 익혔는가?
어떤 비구가 대답하였다.
제가 그 염(念)을 닦아 익혔습니다.

네가 안반념을 닦아 익혔다면
너는 있지 않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고 다시 승묘(勝妙)가 있으니
마땅히 석가모니께서 설하신
방편도인 안반을 닦아야 한다.

4. 수행승도주분(修行勝道住分)

뛰어난 도는 바른 관찰로 닦아
상행(相行)의 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승진(升進)의 법을 잘 알지 못하면
이는 곧 주(住)에 속박되는 것이다.

소연(所緣)의 경계에 애착을 가지고
업에 나아가면 마음이 게을러진다.
이로부터 속박에 묶여
뛰어난 곳에 능히 이르지 못하리라.

혹은 움직일 수가 없음이 있으니
연함도 아니고 견고함도 아니다.
혹은 강하고 지극히 탄탄하니
또한 금강상(金剛像)과도 같다.

이와 같은 다섯 가지의 장애가 있으면
나아가지도 못하고 물러나지도 못한다.
이것은 곧 주에 속박된 모양이니
도에 승진함을 멀리 여의게 한다.

어지러운 빛이나 검은 암흑이
차마 자신을 나타내지 못하니
탁한 기름을 태우는 빛과 같아서
보는 눈을 역시 가린다.

광명이 나타나 발하지를 못하니
모든 기쁨과 즐거움을 배반해 버린다.
숨에 고요하게 머물러 즐거움이 분명하면
저들은 끝내 다시 생기지 않는다.

마치 견실한 물건이
유연한 모습을 나타냄과 같으니
이따금 수행하는 자들이
상(相)에 머무름 역시 그러하다.

상은 하고자 하는 바를 따르지 않으면서
하고자 함에 따라 생각[想]을 일으킨다.

비록 마음을 따르고자 하나
끝내 즐거워하는 바를 따르지 않는다.

상은 머무는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도
이를 강제로 지니고자 한다면
이와 같은 어그러진 생각은
곧 주(住)에 속박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을 이루었다면
강제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하리라.
저들 가고 머무는 모양에 맡겨 둔다면
가장 뛰어난 곳에 능히 이르리라.

떠오르는 것을 가라앉히려 하고
떠오르는 것을 낮추려 하고
가는 것을 오게 하려 하고
머물러 있는 것을 머물지 않게 하려 하고

멸할 때에 멸하지 않게 하려 한다면
하고자 하는 것에 여여하지 못하니
수행을 생멸에 맡긴다면
행하는 바가 항상 전진(轉進)하리라.

모든 법의 모양이 이미 이루어지며
끝내 자상(自相)을 버리지 않는다.
만약 자상을 버리지 않으면
자상이 곧 그 현현(顯現)하리라.

얇은 껍질로 부정(不淨)을 덮어 가리어
몸의 더러움을 감추려고 하듯이
겉모양과 온갖 도구들과
이락(利樂)을 가지고 몸의 고통을 가린다.

비슷한 모양이 차례로 생겨나서
빈틈없이 앞뒤로 이어졌다.
항상하지 않은 모양에 가려지고 숨겨져
몸의 변화를 보지 못하게 한다.

베풀어 짓고 수(受)를 사용함에
나라는 아상(我相)을 섭지(攝持)한다.
능히 본사(本事)를 억념하여서
감춰진 몸이 내가 아님을 관한다.

이들 모든 비슷한 모양들을
수행하여 분별하지 않으면
그들에게서 애락(愛樂)을 일으켜서
공덕의 상(相)을 일으킨다.

마음이 사물에 집착하여 망상이 생기면
승진하기를 다시 즐거워하지 않으니
뛰어난 법에 나아가지 못해
주과(住過)가 날로 증장하리라.

비아(非我)ㆍ상사상(相似相)
이들이 회전(廻轉)하지 않고
이와 같이 회전하지 않으면
수행자의 어리석음과 미혹함이 생긴다.

지혜가 없으니 번뇌에 머물러
그곳에 매달려 집착하니
집착하길 좋아하면 모든 허물이 생긴다.
이런 모양을 지금 설하리라.

이염(爾炎)이 차츰 손괴(損壞)하여
나뉘고 서로 혼란하고
파산(破散)하여 화합이 어려우면
이것이 곧 주에 속박된 모습이다.

몸으로 방편을 하지 않고
스스로 분리(分離)의 생각을 만들고
교란하거나 티끌처럼 부서지면
이것이 주(住)에 속박된 것이다.

상(常)을 지켜 이상(異想)이 없어지고
뭇 색(色)이 차례로 생기지 않는다.
갖가지 중묘(衆妙)의 생각들이
또한 차례로 일어나지 않는다.

흘러나가서 머물지 않으니
그 몸이 점차 소멸하리라.
모양이 미혹되어 다시 오가면
수행이 증장하지 못하리라.

고요하게 머묾이 이미 생기지 못하면
그 몸이 장양(長養)함이 없어서
마음이 열락(悅樂)을 일으키지 않으니

이를 말하여 청정하지 못한 사(捨)라 한다.

저 청정하지 못한 사(捨)는
그 소견이 깨끗하지 못하다.
또한 승진을 하지 못하고
그리고 다시 퇴전하지도 않는다.

사문(沙門)의 상(像)을 희롱하듯이
젊을 때에 열락이 생기는 것도
비유하면 옷을 빌려 입은 것과 같고
또한 꿈에 본 것과도 같다.

명(命)을 청정하지 않음이라 하고
첨곡(諂曲)과 여악(餘惡)
취락(聚落)의 지식(知識)의 곳에서
스스로 그 공덕을 나타낸다.

모든 과악(過惡)을 가리어 감추어서
죄를 범하여 드러내지 않고
그 밖의 모든 계박(繫縛)이
수행하는 자를 더럽히고 물들인다.

사상(事相)이 있는 것과 방불하니
곧 실재라는 생각을 일으키고
익지 않은 것을 익었다고 하고
멸하지 않은 것을 멸했다고 생각한다.

평등하여 만족하지 않은데
승진을 구하고자 하는 것은
이삭을 벤 싹을 쪼개는 것과 같으니
이것이 곧 주(住)에 계박된 것이다.

업(業)이 당초부터 방편이 없고
상현(相現)하여 굳게 수지(守持)하고
과진(過進)하여 마음이 자긍(自矜)하니
이러한 것이 주에 계박된 것이다.

그런데 혹 수행을 하는 자가
단견(斷見)과 상견(常見)을 일으키면
이런 소견이 마음을 산란케 해서
곧장 계박된다.

혹 수행을 하는 자가
몸과 몸을 자세[細微]하게 본다면
그것이 주에 계박되어서
염심(厭心)이 증장하지 않는다.

염심이 증진하지 못하면
탐욕을 여읠 수가 없으니
탐욕을 여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해탈을 얻겠는가?

해탈을 이루지 못한다면
끝내 번뇌를 다할 수 없고
모든 번뇌를 끊지 못하면
진실한 지혜가 없다.

저 신념처(身念處)에서
주상(住相)이 이미 분별되었으니
수(受)ㆍ심(心)ㆍ법(法)의 염처도
마땅히 이와 같이 자세히 설하리라.

수행하되 마음이 즐겁지 않고
그 기쁨 또한 생기지 않고
몸에 고요하게 머무는 즐거움이 없으면
그것이 곧 주상(住相)임을 알아야 한다.

수행하여 수호할 때의
신(信)ㆍ계(戒)ㆍ문(聞)ㆍ사(捨)ㆍ혜(慧)는
항상 적은 분량을 지키면
이것이 곧 주상(住相)이 된다.

주(住)에 매인 어떤 비구가
아난(阿難)이 있는 곳에 도달한다 해도
그가 머문 바 주상(住相)에 미혹하리니
이를 지금 대강 설하리라.

무상삼매(無相三昧)를 얻어서
6년을 주(住)에 결박되어
즐겨 설하는 바를 듣고 싶다면
언제나 아난을 따라다녀야 하리.

소업(所業)에 나아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퇴전(退轉)하지도 못하고
주의 경계에서 머물러만 있다면
해탈의 도리를 얻지 못한다.


오지도 않고 또 가지도 않고
이미 해탈하여 머무르고
머물러 다시 해탈하고
해탈하여 다시 속박된다.

혹시 어떤 수행을 하는 자가
퇴전하지 않는 곳에 머물렀으나
미세한 번뇌가 일어남을
능히 깨달아 알지 못하니
번뇌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뛰어난 곳에 이르지 못한다.

지위에 대하여 분별이 없으면
또한 그 퇴과(退過)도 없다.
지위의 모든 허물이 일지 않으니
이와 같이 그 주(住)에 머문다.
그러다 혹 주분(住分) 중에서
중묘(衆妙)의 모양을 잃어버린다.

중묘의 모양이 비록 멸해도
마음은 여전히 그 지위에 따른다.
마음이 그 지위에 따를 때
여분(餘分)의 낙상(樂相)이 생긴다.

이미 적은 낙이 있기 때문에
마음이 고요하게 머묾에 의지하여 머문다.
그 고요하게 머무는 마음을 인(因)으로 하는 것을
짓는 것이 이미 지어졌다고 말한다.

고요하게 머묾에 안주함이 구족하지 못하면
구족한 결과를 얻지 못한다.
무지(無智)가 마음과 눈을 가렸는데도
지혜롭다고 스스로 말하니

무지장(無智障)을 수행하여
응용할 바를 깨닫지 못한다.
응용할 바를 깨닫는 자는
능히 구경지(究竟地)에 머물리라.

저들 공지(共地)에 머무는 자는
여러 가지 번뇌에 오염된다.

만약 수행하는 자로 하여금
불공지(不共地)를 이루게 하여
이와 같이 과환(過患)을 알면
끝내 그는 계박되지 않으리라.

그러나 번뇌의 과실을 모르고
어리석어 실지(實智)가 없으면
선(禪)으로써 길안(吉安)을 깨달음이
마치 코끼리가 나무에 매인 것 같으리라.

수행하여 이염(爾炎)을 관하되
그 일어나는 곳을 알지 못하고
그 의지하여 나오는 곳을 따르면
스스로 알지를 못한다.

솟아오르지도 않고 가라앉지도 않으니
모양이 일어남을 보지 못하고
또한 멸하는 곳을 알지 못하면
과(過) 또한 과라 할 것이 없다.

설하는 바 모든 장애는
모두가 견고한 주상(住相)이다.
그로 해서 머문다고 하지 않으니
이것은 명지(明智)의 설이 아니다.

지어서 일어나는 모든 과환이
얼마간 인연의 계박이라 해도
능히 모든 대치(對治)를 사용한다면
중묘(衆妙)를 다시 드러내어 설하리라.

높일 자를 공경하지 않고
또한 교만함을 버리지 않고
스스로 허물을 덮어 가리고
밝은 자를 향해서 설하지 않는다.

나의 나이가 벌써 쇠하여 늙었으니
이미 사람들이 버리는 바가 되었다.
더러 이양(利養)을 잃기도 해서
나로 하여금 고뇌가 일게 한다.

마음이 언제나 두렵고 근심스러우니
깊은 생각을 하며 길이 탄식하노라.

내가 나중에 죽게 될 때에
장차 무슨 계책을 세울 것인가?

허물을 숨기면 마음이 근심스럽고
미혹되면 번뇌에 머물게 되니
스스로를 거슬러 죄를 저질러 몸을 더럽히면
큰 공덕의 바다를 잃는다.

현재의 법락(法樂)에 맛을 붙여서
음식을 탐하며 간사해 지혜가 없다.
후세의 과보를 내던져 버리고는
이 같은 과악(過惡)들을 일으킨다.

이러한 모든 주에 속박됨에
그 일어남도 각각 다르다.
수행을 함에 비겁하거나 용렬하지 않으면
능히 응하여 대치할 바를 다스릴 수 있게 된다.

그러나 비겁하거나 용렬하여 방편이 없이
승진할 길이 없다고 스스로 말한다면
빠져 나오기가 매우 어려우리니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코끼리와 같다.

이처럼 빠져나오기 매우 어려우니
게으른 마음에 속임을 당하게 된다.
긴긴 밤을 진창에 빠져 꼼짝을 못하고
열화가 치받아서 죽음으로 내달으리라.

업행과 번뇌와 과보
이것이 세 가지 장애가 되어 가린다.
지혜가 없고 일어날 기세가 없으면
영원히 머묾에 빠져버리게 되리라.

오랜 세월 어리석음을 쌓아
업행과 모든 번뇌들
이 같은 것들에 얽매이고
미혹하고 어지러워 자재하지 못하다.

모든 과악들을 익혀 가까이하면
선한 공덕을 멀리 여의게 되어
그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니
마치 허공을 맴도는 화살과 같다.

뱀의 독이 성하여 가득하고
전갈과 악룡(惡龍)이 득실거리며
깊은 바다가 밑바닥이 없고
물도 없는 불구덩이인 이런 곳을

소경이 헤맨다고 한다면
눈이 안 보이니 보지를 못하리라.
수행하는 자가 머문 곳에 얽매임도
그 잘못됨이 역시 이와 같다.

주과(住過)가 한량없이 많으니
승진의 덕도 역시 그러하여
바다와 같이 그 끝과 바닥이 없으니
그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세간에 지혜의 장애가 없으니
진실의 지혜가 등불이 된다.
등불을 들고 방일하지 않으면
그 밝음이 꺼지는 일이 없으리라.

주분(住分)의 허물은
모든 간힐(奸黠) 없는 자를 속박함을 설하고
지혜를 결정하는 경계는
그 구경(究竟)이 비아분(非我分)이라.

갖가지 허물에 얽매인 것들이
그 얽매임이 한 모양이 아니니
마땅히 업의 뭇 연(緣)을 안다면
불성(佛性)을 능히 깨달으리라.

5. 수행방편도승진분(修行方便道升進分)

비구여, 안반념(安般念)의
공덕주(功德住)와 승진(升進)은
능히 지혜를 더하게 하니
내가 지금 차례대로 설하리라.

공덕에 이미 머물렀으면
더욱 나아가 공덕에 머물러야 한다.

그러므로 공덕에 머무르는 것과 올라가서
나아가는 것에 대한 수행을 설하리라.

수행은 코끝에
마음을 묶어 굳게 머물러 있게 하고
생각을 오로지 전념하여 분명하게 하며
올바르게 관하여 풍상(風相)에 의지한다.

들숨과 날숨에
마음을 매어 굳게 머물게 하여
생각을 이어 나가서 잊지 않는다면
이것이 공덕에 머무는 첫 단계이다.

이런 공덕에 머문 다음에
다시 방편을 일으켜
공덕을 더 얻으려고 할 때에
거기 머무르면 더욱 올라감이 있게 된다.

더욱 진전이 있을 때에는
또한 공덕에 머무르는 것이 생긴다.
이것에 머무르면 곧 더욱 진전이 있게 되고
이미 나아가면 다시 공덕에 머문다고 이름한다.

안반(安般)의 모양인
공덕과 모든 허물
호흡의 가벼움과 무거움, 차가움과 더움
부드러움과 거침, 껄끄러움과 매끄러움을 잘 알아야 한다.

들숨과 날숨을 섭수하여
이것을 모든 근(根)에 받아들여
그 소연(所緣)의 경계에서도
이것을 섭수하여 고요하게 머물게 된다.

수식법[數法]으로 밖으로 흩어지는 마음을
되돌려 섭수하는 뜻도 또한 그러하다.
바람을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을
아나(阿那)라고 한다.

마음이 소연을 따라 구르면
그치게 하여 다시는 구르지 않게 하고
마음이 소연을 따라 일어나면
이를 다시 제어하여 멸하게 한다.

수행하여 관(觀)이 증진하면
이를 제어하여 지(止)에 따르게 한다.
수행하여 만약 지가 증진하면
이를 일으켜 관(觀)에 따르게 한다.

견(見)이 증하면 촉(觸)으로 하고
촉이 증하면 견으로 한다.
득증(得證)과 지증(智證)
이 두 증이 함께 서로 섭지(攝持)한다.

수행하는 데 고요하지 않더라도
마음을 고요하게 머물러 섭수하면
몸에서 청량함이 일어나서
모든 열뇌(熱惱)를 멸하여 없앤다.

요동하여 고요하지 않은 마음을
붙잡아서 고요하게 머물게 한다.
방편에 힘써 회전하면
그 몸이 모두 충만하게 된다.

4대종(大種)을 장양(長養)함은
호흡으로부터 일어나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들 종류가 다시 증익하면
수행하는 사람은 4대에 집착한다.

들숨[阿那]의 힘은 능히
고요히 머물게 하며 선법(善法)을 일으키고
내가 소유한 큰 악도
없애 나가게 한다.

호흡이 짧아지면 차츰 멸하여
수행자는 마음이 안정된다.
그러므로 부처님 세존께서는
이를 말하여 아나(阿那)라 하셨다.

다시 반나(般那)의 모습
이것을 지금 대강 설명한다면

털구멍의 모든 구멍과
호흡의 길을 먼저 깨끗이 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을 반나라고 하니
바야흐로 들어오는 바람으로부터 일어난다.


날숨을 수행할 때에
모든 근(根)이 소연을 따르고
마음과 심법(心法)이 그에 따르는 것을
또한 반나라고 한다.

날숨이 사라지고 나면
드디어 근본지(根本地)에 들어간다.
정수(正受)를 그치면
이것이 사(捨)를 거쳐 숨을 내쉰다.

수행하여 날숨이 멸하면
다음으로 들숨[阿那]이 생긴다.
멸진하여 삼마제(三摩提)에 드니
제4선(禪)이 또한 그러하다.

날숨[般那]이 이미 멸하고 나면
다음으로 들숨이 생긴다.
들숨을 쉴 때 희망하는 것을
아세바사(阿世婆娑)라고 말한다.

내가 죽은 자를 살펴보니
분명 이와 같은 모습이 없다.
그런데 호흡이 다시 생긴 자는
살펴보니 이러한 모습이 있다.
독기 서린 진창의 화사(火蛇)의 모습과
그 경계가 비슷하다.

날숨으로 능히 마음을 섭수하여
소연을 따르지 않게 함이
마치 코끼리를 제어하는 갈고리와 같은 것을
파세바사(波世婆娑)라고 한다.날숨은 섭심(攝心)의 뜻이 있다.

전도된 생각을 제거하여 버리고
진실한 생각을 성취하여
자재(自在)와 향상함을 여의고
오직 공행(空行)의 모임[聚]만을 행하라.

본래 온 곳이 없고
가도 이를 곳이 없고
가고 오는 것이 없으니
잠시도 머물 수가 없다.

지혜로운 자가 이것을 분명히 본다면
모든 짓고 아는 것을 여읜다.
날숨은 만드는 것이 없다고
본다면 전도(顚倒)에 떨어지리라.

날숨은 이미 지나간 과거이니
그것은 볼 수가 없다.
목숨이 끊어지면 모든 호흡이 멈추듯
과거란 것 역시 그러하다.

안반의 모든 공덕들과
날숨과 들숨과
온갖 사물 그리고 문자의 뜻을
내가 이미 대강 설하여 마쳤노라.

이런 것들은 고설(故說)을 보탠 것이니
일찍이 서로 분리해 써서는 안 되리라.
만약 깨닫는 생각이 흩어지면
마땅히 안반념(安般念)을 익혀라.

이미 수식(數息)에 응하게 되면
곧 내부의 탐착을 제거한다.
만약 수식에 순응해 따른다면
곧 따르지 않는 것을 여의게 된다.

뜻이 흩어짐이 없는 경지에서
능히 흩어진 모든 생각을 포섭하라.
먼저 수를 하나로부터 시작하여
열에 이른다.

수행하여 이 수에 따르면
곧 공덕에 머묾을 얻으리라.
그리하여 공덕에 머묾을 얻고 나면
곧 더욱 나아가게 되기를 구한다.
일체 산란함을 없애는 것을 깨달음이라고
부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더욱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수문(數門)을 마친다.

수는 능히 일체를 멸한다.
깨닫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멸한다고 말씀하셨다.

일체가 사(死)하지 않음으로써
더욱 나아가기 때문이다.

안과 밖으로 들고 나는 호흡이
가는 대로 마음의 그림자가 따라
결정(決定)을 하여 잘 관찰해서
따르면 이것이 열반에 나아가는 것이다.

날숨과 들숨을 수행하여
그것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 이르러날숨과 들숨이 일어나는 곳은 다 같이 배꼽에 있다.
이와 같이 승진할 줄을 안다면
바깥의 탐착을 능히 여읜다.수문(隨門)을 마친다.

극풍(極風)의 처소에 편안히 머무르면상하 극처(極處)의 풍제(風際)이다.
삼마제(三摩提) 등이 일어난다.
삼매가 이미 일어나면
곧 공덕에 머묾을 얻는다.지문(止門)을 마친다.

수행하여 정(正)에 머물면
여러 풍(風)을 관찰하여
먼저 본처(本處)를 관하라.
이른바 풍을 따라 일어나는 것이다.

이곳은 나(那)라고 하는데
하나가 되는가, 둘이 되는가?
서늘함과 따뜻함을 모두 관찰하면
여덟 가지가 앞에 설한 것과 같다.

제대(諸大)를 모두 관찰하면
오직 일종(一種)만 있을 것인가?
볼 때엔 모든 것이 갖추어 있으니
하나로써 증상(增上)하여 설하리라.

수행하여 풍대(風大)를 관하면
조색(造色)이 그것으로부터 생긴다.
오직 마음과 심법(心法)과
조색에 따라 일어난다.
조색이 아니고서야
다시 종대(種大)가 있을 것인가?

모든 유(有)의 들숨과 날숨의
이 바람을 의종(依種)이라 한다.
그리고 보풍(報風)과 장양(長養)
이를 세 종류의 바람이라 한다.

혹은 말하기를 들숨이 앞에 있고
날숨이 뒤에 있다고 하고
혹은 말하기를 날숨이 앞에 있고
들숨이 뒤에 있다고 한다.
모두가 인연이 있기 때문에
그들이 이와 같은 말을 한다.

그 진실된 의미를
지혜로운 자는 곧 결정한다.

배꼽 있는 곳에서 일어나서
털구멍의 길을 깨끗이 다스린다.이것은 보풍(報風)이 털구멍을 열기 때문에 출(出)이라고 이름하는 것이요,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은 풍의 뜻에 연유하기 때문에
그들이 날숨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털구멍이 이미 열려 깨끗하면
들숨이 이미 앞에 있게 되니
마치 사람이 처음 태어날 때에
들숨에 들기 때문에 일어남과 같다.

호흡의 바람[息風]이 가장 먼저 나온다.
그래서 파나(波那)라고 말한다.이것이 진실의 뜻이다.
호흡의 바람의 모든 종대(種大)는
끊어버려도 고(苦)가 생기지 않는다.

저것이 수(受)가 아님을 알아야 하리라.
수라고 한다면 그러하지 않으니

저 수행하는 자들은
모든 단핍(斷逼)을 걱정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들숨과 날숨은
몸으로 다시 받지 않으면

만약 식명(識命)을 끊을 때에는

호흡이 곧 회전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중생의 수식이니
반드시 명근(命根)을 연유해 일어난다.

호흡이란 곧 신행(身行)이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이다.
또한 근본의(根本依)라 이름하니
중생이 말미암아 구르는 것이다.

그러나 이 호흡이 멸하여 없어지면
목숨이 의지할 만한 곳이 없다.
능히 그 명근(命根)을 간직하기 때문에
중생의 수식이라고 한다.

아나(阿那)와 반나(般那)의 염(念)은
바람을 인연하여 경계를 삼는다.
비록 말하여 바른 사유라고 해도
그러나 진실한 행은 아니다.

모든 수행하는 바의 관은
모두 바람을 인연하여 일어난다.
그러나 관함에 차별이 있으니
이것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아나와 반나의 염에는
분별하여 세 종류가 있다.
이른바 들음(聞慧)을 따라 일어나는 것과
사혜(思慧)와 수혜(修慧)이다.

이 안반념으로 해서
비구의 문혜(聞慧)가 생기니
모든 때에 받아들이는
명자(名字)를 경계라 한다.

들고 나는 호흡을 경계로 하여
정념(正念)하면 사혜(思慧)가 생긴다.
그것이 이름에 인연할 때
때로는 다시 뜻에 인연한다.

아나와 반나의 염이
일어나는 곳에서 선혜(禪慧)를 닦으면
모든 것을 버림은 관(觀)이라 하니
오직 모든 법의(法義)만을 인연한다.

마땅히 경계가 가까워
갖가지 다름이 있지 않고
서로 이어지는 인연도 또한 없으니
이를 등지(等智)의 행(行)이라 함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일러 안반념은
어리석음이 없는 지혜의 성품이라 한다.
또한 사성(捨性)이라 이름하는
이것은 곧 부처님께서 설하신 바이니

마땅히 이 지혜의 성품은
근(根)을 버림과 함께 생기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그런데 만약 이 성품을 버려
나머지가 더불어 일어나게 된다면

욕색(欲色) 두 가지의 번뇌를 갖게 되는데
몸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무색(無色)이 된다.

그 같은 최후의 선(禪)이 아니고
몸이 밀(密)하여 호흡이 없기 때문이다.

혹은 근본지(根本地)라 하는 것
또한 이들 권속(眷屬)이다.

오직 권속이라고 말을 하지만
이것은 근본지가 아니다.

저 성품을 버려
근본지에 있게 하고자 하면
아나와 반나의 염은
마땅히 8지(地)에 있어야 한다.

오직 권속이라는 말은
이와 같이 근을 버림을 말하는 것이다.
저 안반념을 알면
오직 5지(地)에 있게 된다.

이와 같은 정(定)은 5지에 있게 되고
이곳을 의지하여 회전하게 된다.
욕(欲)과 중간(中間)과 미지(未至)와
그리고 그 뒤의 두 권속이 된다.

가장 상정(上頂)인 4선(禪)에는
거기에 비록 근을 버림이 있더라도

그 몸을 버림은 있지 않으니
털구멍의 길로 청정하게 다스린다.

제4와 권속은
그 중에서 두 종류를 설하니
보생(報生)과 장양(長養)으로
오직 바람에 의지함에 있지 않다.

날숨과 들숨은
이 바람을 의지한다.
몸이 지극히 후밀(厚密)하기 때문에
의지함이 없음을 두 종류라 말한다.

부처님께서는 날숨과 들숨을
제4선을 바르게 받아들이는 바늘[刺]이라고 설하시고
또 인후(咽喉)가 있는 곳이라고
설하신 바가 있음을 분명히 알아라.
이것은 저것의 방편이기 때문에
또한 선(禪)의 뜻을 섭수한다.

날숨과 들숨
그곳에는 정(定)이 없다.
수행하여 날숨을 관하면
위로 제4선에 이른다.

바람의 경계를 지극히 하고 나서
그것을 바르게 억념(憶念)하라.
어째서 나의 이와 같은 마음이
구경(究竟)의 인연이 아니라 하는가?

혹은 다시 그 위에서
조금 나아가 거듭 관찰하라.
혹은 곧 그곳에서 머물러
나머지 방편을 짓지 말라.

이와 같이 관(觀)하여 수행하면
곧 의혹을 제거할 수 있다.

수행하여 풍제(風際)를 지극히 하고
이곳을 잘 관찰하라.
마땅히 이와 같은 마음을
곧 의관(疑觀)을 제거한다고 함을 알라.관문(觀門)을 마친다.

위를 관찰하고 난 뒤에
바람에 의지하여 다시 그치어 머문다.
응하는 바를 관찰하여
다시 나머지 닦을 바를 일으킨다.

만약 저 풍을 관찰하는 마음을
돌이켜 흔들림 없이 잘 결정하면
이것을 말하여 수행을 하는 자가
교묘한 방편을 회전한다고 한다.

마치 사람이 마을에 놀러 갔다가
하던 것을 마치고 나면 돌아가듯이
이와 같이 관(觀)을 수행하면
희락(喜樂)이 드디어 증장하리라.

숨을 들이쉰다는 생각을 버리고
날숨의 연(緣)에 편안히 처(處)하라.
그리고 다시 숨을 내쉰다는 생각을 버리고
들숨의 연에 편안히 처하라.

수(數)에 대하여 구경에 이르고 나서
호흡이 가면 또한 이를 따라가라.

이와 같은 모든 종류를
또한 회전이라 이름한다.

응하는 바의 상을 관찰하는데
모양 모양이 회전하고
갖가지 일을 관함도
차례로 회전함 역시 그러하다.

회전을 잘하는 자에게도
이 회전의 뜻을 설해야 한다.
마땅히 이 회전이
지혜를 수행하는 곳임을 알아야 한다.

저 방편이 일어나는 것에 따라
뛰어난 도가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문혜(聞慧)를 염하여 제도하면
차례로 사혜(思慧)가 생긴다.

그리하여 욕계의 행을 버린 다음
수혜(修慧)에 들어가는 것을
모두 회전이라 이름하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이다.

저들 이르지 못한 곳으로부터
차례로 초선(初禪)에 들어가
제3선에 이르게 되니
그 회전 역시 이와 같다.

그리고 제4선의 권속
만일 그곳에 저 바람이 있다면
이 또한 회전에 응하여
그 근본지에 들어간다.

그것에 따라 교묘한 방편을 일으켜
차례로 일어나는 연에 머문다.
들고 남과 우파(優波)
이 여섯이 모두 회전한다.

공방편지(共方便地)를 버리면
공지(共地)가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공방편지를 버리면
불공(不共)이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불공방편(不共方便)을 버리면
불공이 현재 눈앞에 나타난다.

상방편지(相方便地)를 인연해서
구경지(究竟地)로 전전(展轉)한다.
이것을 상회전(上廻轉)이라 하니
밝은 지혜로 일컬어 설하는 바이다.성인과 범부가 함께 가진 법을 이름하여 공지(共地)라 하며, 연(緣)을 따라 연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제상(諸相)을 회전한다고 하는 바, 모든 방편에 대해 여러 지(地)가 차례로 회전함 또한 이와 같다.

내가 지혜의 방편으로
이미 회전의 뜻으로 말하였으니
무구한 청정의 염(念)을
마땅히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수행하여
잠시 동안 억눌러 번뇌를 그치게 한다면
이것을 곧 청정이라 하니
부정(不淨)이 응하는 것이 아니다.

만약에 이미 수식(數息)을 성취하면
내부의 탐착을 능히 버린다.
이러한 뜻은 마땅히
지혜로운 자의 관이 청정하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순응해 따르는 것이 성취되면
능히 외부의 탐착을 버린다.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면
지혜로운 자의 염(念)이 청정해진다.

비구의 마음에 이미 머물면
혼란함에 어지럽혀지지 않는데
이처럼 움직이지 않고 관찰하여
수행하면 지혜가 청정하리라.

그런데 만약 이미 풍제(風際)에서
관찰하여 의혹을 여의고
다시는 호흡을 구하지 않으면
이것이 곧 청정함이다.

염지(念地)를 이미 모두 마치고
의지했던 모든 과악(過惡)들을
하지 않으면 청정한 것이다.
이것을 잠깐 사이에

아나와 반나의 염(念)의
방편도(方便道)를 섭수한 것이라고 한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升進)
이 뜻을 내가 이미 설했노라.

6. 수행승도승진분(修行勝道升進分)

공덕에 머묾과 승진
그리고 나머지 방편이란
수행의 일체지(一切地)인

공지(共地)와 불공지(不共地)를 섭수하는 것이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
그것은 뛰어난 도에 의지해 일어난다.
갖가지 상행(相行)의 뜻에 대해
지금 설할 테니 잘 들으라.

제체(梯揥)가 이미 일어나면심주처(心住處)의 이름이다.
마음의 애락을 수행하라.
이와 같은 애락의 마음이
선교방편의 공덕주(功德住)가 된다.
지혜로운 자는 방편을 잘하여
마음을 일으키고 열심히 수행한다.
이와 같이 그 공덕주는
곧 선교방편이다.

장차 미묘한 경계에 들어갈 때에
유주(流注)의 생각에 따르지 말라.
지혜로운 자는 마음을 섭수해 머물고
받아들여 지님과 같이

마땅히 머무는 바의 미묘한 공덕을
청정하게 하여 번뇌의 탁함을 없애고
구족하여 감소함이 없고
청정하여 안온함에 머물게 된다.

순일하여 두루 선명하게
정(定)에 집중하여 움직이지 않는다.
이것은 느낌에 연유하여 있으니
때가 지나면 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색상(色相)이 차례로 일어나면
갖가지로 여러 모양이 생기니
수행하여 바르게 사유하면
몸과 마음에 희락(喜樂)이 생긴다.

이 공덕주에서
구족하여 지관(止觀)을 섭수하면
이미 능히 몸의 즐거움을 일으키고
마음 또한 바르게 안온해진다.

자지(自地)와 타지(他地)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
이것을 지금 대강 설하노라.
수행을 널리 분별하여

수행의 삼마제와
선교방편으로 수순하여 집중하면
지혜로운 자는 혜안을 여니
이를 공덕이라 한다.

마음이 만족한 곳에 안립함을
공덕에 머묾이라 하고
성도(聖道)의 대치(對治)를 수행함을
공덕에 오르는 것이라 한다.

대치의 모든 성행(聖行)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은
경지에 따라 과악(過惡)의 마음이
일어나는 곳을 능히 모두 제거한다.

수행하여 부지런히 정진하면
공덕의 이익이 증광(增廣)한다.
신(信)ㆍ계(戒)ㆍ문(聞)ㆍ사(捨)ㆍ혜(慧)와
탐욕ㆍ성냄ㆍ어리석음의 근(根)이 없음과
욕(慾)과 정진(精進)과 참괴(摲傀)와
제(除)와 희(喜)와 방일(放逸)하지 않음과
열락(悅樂)과 염(念)과 정(定)과 사(捨)와
정지(正智)와 여타의 선법(善法)
이와 같은 모든 것들이
자지(自地)의 모든 번뇌를 여읜다.

그 공덕에 머물러 서면
곧 지위를 따라 대치한다.
이것이 정진의 힘에 연유하여
선을 도와서 마음을 장양(長養)한다.

어찌 저 지위의 가운데에
종수(種數)를 섭수하지 않으리오.
공덕에 머묾과 승진의
자지(自地)를 자세히 설했노라.

자지(自地)의 선근의 힘으로
타지(他地)에 공덕이 생긴다.

가장 뛰어난 의리를 수행함에 대해
이 모양을 지금 대강 설하리라.

자지가 이미 증상하면
나머지 뛰어난 청정한 법이 생긴다.
마땅히 이 공덕은
타지로서 승진하고

한량이 없는 방편을 행하며
모든 도탈의 법[度法]을 알아야 하며
갖가지의 대치의 모양으로 하여
타지의 공덕이 일어남을 알아야 한다.

이를 저 초념처(初念處)에서
3념(念)을 겸하여 수행한다고 한다.

난래(煖來)와 정(頂)과 인(忍)과
세간의 제일법(第一法)과

견도(見道)와 사유도(思惟道)와
무학도(無學道)를 또한 수행하라.
모든 선(禪)과 신통(神通)과
무량과 무색정(無色定)과

바른 법의 도품분(道品分)과
구경(究竟)의 누진(漏盡) 지혜와
배사(背捨)와 일체입(一切入)과
묘원(妙願)의 지혜와 청정(淸淨)과

신념(身念)의 선근력(善根力)이
이와 같은 제법(諸法)을 일으킨다.
미묘한 공덕의 모양은
모두 순서에 따라서 생기고

만약에 계심처(繫心處)에 머물면
이것이 곧 자지(自地)의 모양이다.
그 모양이 일어남이 몸에 있으니
또한 나타나고 또한 촉(觸)한다.

때로는 과(果)에 가깝다고 설하고
때로는 가깝지 않다고 설한다.
혹은 다시 과를 함께하기도 하고
혹은 공(空)으로서 함께하지 않기도 한다.

이른바 과에 가깝다고 하는 것은
이 모양의 주변에 머무는 것이다.
만약 저 과에 가깝지 않다면
이 모양이 먼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약에 드러나서 닿게 한다면
이것이 곧 과와 함께한 모습이 된다.
비록 드러나도 불촉(不觸)한다면
공상(空相)이어서 공덕이 없다.

비유하자면 마치 무과수(無果樹)가
꽃이 화려해도 열매가 없음과 같다.

마치 사람이 몹시 춥거나 목마를 때에
먼 곳에 불이나 물이 보인다고 해도
끝내 그곳에 닿을 수가 없으니
그저 보기만 하는 모양이 역시 그러한 것과 같다.

공하므로 공덕이 없으니
몸에 쾌락이 없다.
희열(喜悅)이 끝까지 증장하여
식락(息樂)과 적지(寂止)와
몸과 마음에 이와 같은 즐거움을 받는다.
이를 말하여 과(果)와 함께한 모습이라 한다.

공덕과 그리고 나머지 법의
자지(自地)와 타지(他地)와의
승진상(升進相)에 회전을 하니
4종(種)이 모두 역시 그러하다.

모든 승진의 모양들과
수용하고 묘한 갖가지 인(印)과
연화(蓮花)와 뭇 보배 나무와
화려한 모든 그릇과 의복들이란
광염(光炎)이 지극히 찬란하니
한량없는 장엄 도구들이다.

지혜로운 자는 뛰어난 도의
공덕에 머묾과 승진을 설한다.
일어나는 모든 묘상(妙相)들을
내 지금 이를 갖추어서 설하리라.

수행하는 자들은 잘 들으라.

이 위의 만다라(曼茶邏)에서
순일하게 온갖 상(相)을 일으키고
유광(流光)이 참연(參然)히 내려오고
청정하기가 마치 파리(頗梨) 보배와 같으니
그 빛이 4체(體)에 충만하다.
몸을 지극히 유연하게 하고
다시 몸으로부터 나와

점점 아래로 흘러내려서
그 선근의 힘을 따라
멀고 가까움에 일정한 모양이 없고

그것이 저 만다라(曼荼邏)를 이루어
형세가 다하면 본처(本處)로 돌아온다.

근본 종성(種性) 가운데에
그 모양이 세 단계로 일어나니

공덕주(功德住)의 다섯 모양과
공덕진(功德進)의 다섯 모양인데

불괴(不壞) 공덕이 둘이요
반괴(半壞) 공덕이 둘이요
진괴(盡壞) 공덕이 하나이다.

다시 계심처(繫心處)에 돌아와서
본래의 종성(種性)에 머물러

시방에 두루 유산(流散)해서10상(相)이 생긴다.
그 공덕이 10상(相)의 위에10상이 각각 10상을 낳는다.
다시 각각 1상(相)이 나타난다.
그리고 또 유산(流散)의 곁에서
모든 심묘상(深妙相)을 일으키고
저 심묘(深妙)한 경계에서
다시 심묘상을 일으킨다.

위아래로 여러 윤상(輪相)이
다시 이같이 나타나니

저 3계(階)의 처소에서
갖가지 모양들이 생긴다.
자상(自相)은 이미 각각 멸하여
오직 저 총상(摠相)에만 머문다.

모든 잡상(雜相)들은 이미 없어서
적정(寂靜)의 행(行)에 회전한다.
이들 세 가지 만다라는
경계가 나뉘어도 옮기지 않고

근본의 공덕주에 순응하니
자체(自體)가 앞의 말과 같다.

들숨의 삼마제가
하방(下方)에 두루 충만하고
날숨의 삼마제가
상방(上方)에 두루 충만하여

두 가지가 함께 시방에 가득하니
묘한 심심(甚深)을 바르게 받는다.
이와 같이 마음에 따르면
이를 일러 법자재(法自在)라 한다.

청정한 계심처(繫心處)를
법이 없으니 구하지 않는다.
이미 생긴 것을 장양하여
모든 공덕을 성취하니
하늘의 만다수(曼陀樹)처럼
만다지(曼陀池)에서 나서 자란다.

공덕에 머묾과 승진과
갖가지의 묘상(妙相)들
이 뜻을 내가 이미 설했으니
이를 수행하여 잘 지켜 가져라.


7. 수행방편도안반념결정분(修行方便道安般念決定分)

승진의 법이 섭지[攝]하는
여러 공덕들을 이미 설했으니
수행의 결정분(決定分)에 대해

이제 이를 차례로 설하리라.

날숨의 염(念)을 잘하면
들숨 또한 그러하다.

출입을 자세히 사유하고
분별하여 갖춤에 명료하면
이것이 곧 결정분이니
세존께서 설하신 것이다.

일체의 선근(善根)은
각각 그 자상(自相)을 다하고
가장 뛰어난 무상(無上)의 지혜를
그 이름을 말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저 모든 수행하는 자들은
이 결정분에 안주해야 하며
날숨과 들숨 때에
무상(無常)한 모양을 바르게 관찰하라.

호흡법이 차례로 일어나고
전전(展轉)하여 다시 서로 인연이 되며
나아가 뭇 인연이 합하여
일어나는 때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화합의 법은
그 성질이 신속히 쇠하여 멸함을 알아야 한다.
법은 인연을 따라 일어나고
성(性)은 약하므로 무상하다.

모든 인연의 힘으로
이 법이 생기게 된다.
허망하여 견고함이 없으니
신속히 일어났다가 신속히 멸한다.

비상(非常)의 독(毒)에 해침을 받아
그 성(性)이 오래 머물지 못한다.
이 같은 관법을 수행한다면
이것이 곧 결정념이다.

저 운행하는 하늘에 비유컨대
호흡의 변화가 그보다 더욱 빠르다.
무상상(無常想)을 결정하고
수행하여 열반으로 나아간다.

날숨이 아직 멸하지 않으므로
들숨이 생기지 않고
들숨이 아직 멸하지 않으므로
날숨이 생기지 않는다.
이와 같이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수행의 결정분이다.

거칠고 껄끄럽고 날카로운 가시가 생기고
갖가지로 괴롭고 핍박하는 모양은
이른바 호흡이 들어오고 나가는
모든 때에 줄어들고 끊어진다.

호흡에서 능히 깨달아 알아라.
모든 괴로움의 모양이 구족함을 깨닫는다.
이와 같은 진리의 사유를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자상(自相)은 견고함이 없고
적멸하고 공하고 무아로서
인연의 힘으로 일어나는 것이며
인연 따라 일어나므로 멸하는 것이다.

아상(我相)이 있음을 여의면
항상 머물러서 변역(變易)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전도의 행(行)을
일체 모두 멀리 여의고
오직 진실하게 관한다면
이것을 이름하여 결정이라 한다.

내가 없음으로써 견고함이 없고
또한 자재함이 없는 것이다.
저 들고 나는 호흡에는
일찍이 각지상(覺知相)이 없다.
내가 없음을 자세히 아는 것을
결정이라 한다.

이 지혜의 모양이
성행(聖行)의 이름에 비슷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곧 방편인 것이니

저 진실의 행이 아니다.

비구여, 안반념(安般念)은
잡된 생각들로 깨달음이
이미 어지럽혀져 마음이 기쁘지 않으면
마땅히 수(數)를 따라 일으킨다.
혹은 들숨을 따라 수를 헤아리고
혹은 날숨을 따라 수를 헤아린다.
생각의 어지러움과 각관(覺觀)의 상(想)은
이로 인해 구경(究竟)하여 여읜다.

지혜로운 자는 들숨에 있어서
마음을 묶어 수식을 행할 때에
한 번 들어오는 것을 세어서 하나로 하고
나가는 숨을 섞어서 헤아리지 말며
전념하여 수를 흩어지지 않게 한다.
이같이 하여 열에 이르고

그 열에 날숨을 버리면
이로부터 결정을 얻는다.
이것이 곧 구족된
근본수(根本數)를 성취한 것이다.

다시 나머지 수법(數法)이 있으므로
방편을 일으켜 수행한다.

만일 근본수법을
결정할 수 없으면
숨을 촉급하게 하여 깨닫기 쉽게 하고
방편으로 마음을 생하게 한다.

마땅히 두 번의 나가는 숨을 버리고
하나의 들어오는 숨을 세어야 한다.
마음이 안정된 것이 흩어지지 않으면
둘의 수를 센다.

만약에 두 번의 방편에서
결정하지 못하면
열의 나가는 숨을 넘은 뒤에
들어오는 숨의 하나를 헤아린다.

바르게 생각하여 마음이 흩어지지 않으며
차례로 구족하게 되는 것을
수행자의
열 가지 수(數)의 성취라고 한다.

위와 같은 열 가지의 법은
곧 수의 구경이다.
더 이상은 다시 버려야 한다.
수를 더하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이와 같이 수를 수행하면
이것이 곧 수법(數法)을 이룬 것이다.
이룬 뒤에는 마땅히 이를 버리고
다시 나머지 방편에 나아가야 한다.

이처럼 수법을 수행하여
만약 다시 이를 성취하지 못하면
마땅히 다시 앞에서 설한 것처럼
처음의 수로 돌아가서 시작해야 한다.

방편을 써서 수법을 이루면
곧 결정분을 얻게 된다.
그리하여 수법을 성취하면
지혜로운 자의 마음이 수순하는

앞에서 설한 여섯 가지는
수행의 바른 방편을 설한 것과 같다.
이 같은 여섯 가지를 수행하면
신속히 염리상(厭離想)이 일어나
생사에 집착함을 좋아하지 않는다.
힘써 근심과 번뇌를 끊고

수행하여 마음속에
일체 유위법(有爲法)을 멀리 여의어라.
욕망을 여읨이
청정(淸淨)한 결정분(決定分)임을 알아야 한다.

혹은 긺이 앞에 있다고 말하고
혹은 짧음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그 결정의 뜻에 대하여
지금 이를 차례로 설하리라.

날숨이 일어날 때를 일러
짧음이 앞에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응하는 바가 아니라고 하고
형세가 차츰 증진하기 때문에

호흡이 감으로써 점점 멀어지고
나아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이
소진하는 이것이 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이른바 짧은 것은 그러하지 않다.

날숨이 차츰 증장하더라도
구경처에 이르지 못하면
이 가운데서 관찰하는 바를
이름하여 긴 가운데 짧음이라 한다.

한결같은 마음으로 방편을 정진하여
전념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증장하여 구경에 이르는 것을
이름하여 긴 가운데 긺이라 한다.

이미 관함에 바람이 회전하고
나머지 구상(求想)을 버린
다음에 결정을 얻으면
이것이 곧 짧은 가운데 긺이다.

들숨이 극도로 짧을 때에는
돌아와 일어난 곳에 이르는데
그 관찰하는 바를
이름하여 짧은 가운데 짧음이라 한다.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고
수행하여 매우 명료하면
이미 결정분을 얻게 된다.
다시 나머지 방편에 나아가

몸 가득 널리 출입하는
신행(身行)의 호흡을 깨달아 알라.
이와 같은 각(覺)을 수행하면
이것을 곧 결정분이라 한다.

비유컨대 마치 세차게 타는 불길의
그 광염(光炎)이 길고 먼 것과 같다.
섶이 다하면 불도 꺼지나니
불꽃이 다시 차츰 짧아진다.
그러나 다시 섶을 다 지핀다면
불꽃이 두루 널리 비추고
세력이 다하면 드디어 꺼지나니
저 네 종류의 바람도 역시 그러하여

혹은 길고 짧음의 내외에서
교호(交互)하여 이름을 짓는다고 한다.
혹은 둘을 함께 장단(長短)으로 말하니
이와 같이 갖가지로 설명한다.

마치 저 깊은 우물의 물을 길어 올릴 때
두레박이 내려갈수록 점점 멀어지다가
다시 이를 끌어올려
끝에 이르면 그것이 짧아지는 것과 같다.

마치 허공에 활을 쏨에 있어서
날아가는 화살이 거침없이
점점 높이 올라가지만
힘이 다하면 다시 내려오는 것과 같다.

수행하여 바르게 사유하고
풍상(風相)에 의지하여 관찰하면
처음에 멀어졌다 다시 가까워지니
장단의 뜻도 역시 그러하다.

마치 저 끌고 돌아가는 바퀴가
굽혔다 폈다 하며 서로 왕래할 때
멀리 갔을 때는 길다고 하고
가까이 돌아오면 짧다고 하는 것과 같다.
호흡의 바람이 번갈아 들고 나니
길고 짧음이 역시 그러하다.

비유컨대 저 진제(眞諦)를 관찰해 보면
먼저는 고(苦)인데 나중엔 집(集)인 것과 같다.
호흡의 관함 또한 이와 같아서
먼저는 길고 다음엔 짧다.

만약 초선의 호흡이 짧고
제2선의 호흡이 길다고 하더라도
정수(正受)의 뜻에 거스른다는
이러한 말은 그러하지 않다.

그와 같은 초선 중에서

호흡의 바람의 세력이 지극히 멀고
제2선의 호흡이 짧아서
정수가 차츰 차별된다.
몸에 가득 두루 각지(覺知)를 함은
곧 제3선에 의지한 것이다.
최후에 몸으로 하는 호흡은
털구멍을 떠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삼매가
공덕의 상을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수행하여 거기에 안주하면
깨닫는 생각이 흩어지지 않게 된다.

그런데 왜 초선을 하는 중에
긴 것만 말하고 짧음은 없는가?
모든 의지하는 것을 버리지 않으니
이러한 까닭에 호흡이 길다.

그것은 깨닫는 생각의 힘으로써
호흡을 하여 가고 길어진다.
두 번째는 모든 의지하는 바를 버리므로
세력이 약하기에 호흡이 짧다.

깊고 깊은 수다라(修多羅)에서
부처님께서는 산정(山頂)의 샘은
흐르는 세력이 멀리 미치지 않으니
여타의 곳으로부터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설하셨다.

그와 같은 산정의 비유처럼
두 번째의 의지하는 바도 역시 그러하여
단지 그곳을 좇아 일어나니
이것이 끝내 멀지 않다.

건장한 사나이는
무거운 짐을 지고도 산을 오르며
있는 힘을 다해 기운을 쓰니
그 호흡의 바람이 급하게 회전한다.
그러다가 편안한 곳에 이르면
그 호흡이 고르게 되니
이러한 비유는 저 호흡이
먼저는 짧고 나중은 길다는 말이다.

저 건장한 사나이가
짐을 지고 산을 올라가도
신력(身力)의 방편을 쓰면
그로 해서 호흡을 길게 한다.

그러나 만약 방편이 나빠서
자기 힘으로 짐을 지지 못하면
힘이 없는 방편이기에
호흡이 약하므로 멀리 가지 못한다.

비유컨대 남자가 활을 쏠 때
화살을 멀리 가게 함과 같아서
힘이 약해 방편이 없으면
세력이 약해서 가까이에 떨어지는 것과 같다.

이러한 비유는
장단의 뜻을 말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세미(細微)한 깨달음을 수행하여
모든 진리에 이와 같이
16분(分)을 명료히 하면
모두 이름하여 결정(決定)이라 한다.

방편 승진(升進)의 이와 같은
공덕에 머묾을 분별하여
안반념을 결정함도
역시 마땅히 이와 같이 설했노라.

그런데 저들 설하지 않은 것의
나머지 모든 공덕에 머묾을
마땅히 내가 설하리라.
그 결정분에 대한 것처럼

바람이 일어나는 바
근본의 청정함을 지극히 관찰하고
미묘한 모양을 수행하면
곧 이곳에서

저 구경처에
마니 보배의 삼매를 나타낸다.

이 공덕으로부터
방편과 근본이 생기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미묘한 방편의
근본 결정분을 이미 설했노라.
나머지 깊은 정수(正受)의 모양은
모두 앞에서 말한 것과 같다.

8. 수행방편승도결정분(修行方便勝道決定分)

이미 방편도를
섭수한 결정분을 설했으니
승도(勝道)의 결정상(決定相)에 대하여
이제 이를 내가 설하리라.

수행하여 잘 결정해서
계심처(繫心處)가 견고해지면이염(爾炎)을 이른다.
신수(身受)와 심법(心法)
이것에서 바르게 관찰한다.

여섯 가지 인(因)이 있어서
이것이 과(果)를 성취한다고 한다.
성(成)과 괴(壞)가 각각 세 종류이니성숙(成熟)의 숙도 역시 괴(壞)이다.
수행의 결정상이다.

이 같은 여섯 가지의 인(因)에서
방편으로 잘 관찰하면
능히 다음 차례에
모든 번뇌를 신속히 끊을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나머지 인이 있으니
갖가지 허물고 이루는 일이
이와 같이 많아서 한량이 없으니
내가 지금 이를 대강 설하리라.

어떤 것들이 수행이 되는가?
물의 종류의 허물어진 모양은
이레 동안이면 죽은 시체가
헐어 변한 모양으로 드러나게 된다.

저들 모든 죽은 시체들은
검고 푸르게 썩어서 문드러진다.
이미 썩어서 피고름이 흐르니
고약한 즙이 흘러서 퍼진다.
허물어져 흐르고 문드러지고
온갖 지독한 냄새가 풍긴다.

이것이 모두 물이 허물어진 것이니
내신(內身)이 모두 그러하다.
그런데 저 오랜 겁 동안의 성패(成敗)는
물의 큰 힘에 연유한다.

물결이 크게 끓어 솟구치면
대지가 모두 침수되어 무너진다.
저 3선(禪)의 경계로부터
물이 두루 휘돌아서 내려오고
마구 쏟아짐이 극히 표탕(漂蕩)하여
물건이란 물건은 모두 소진한다.

모든 정식(情識)의 종류들과
백곡(百穀)과 총림(叢林)들과
흙이나 흙에서 나는 것들이
모조리 물에 의해 허물어진다.

중생들이 물로 해서 허물어짐은
이것이 모두 숙업(宿業)에 의함이다.
이상과 같은 수재(水災)의 모양이
무구(無垢)3한 결정설(決定說)이다.

이와 같은 모든 종류들이
모두가 삼매지(三昧地)의
수행의 과(果)로부터 일어나는 것이다.
이 결정코 그러함을 마땅히 알라.

수행하여 마음을 잘 묶어서
삼마제에 안주하고
소연(所緣)에서 능히 밝게
그 종상(種相)을 보는 것이다.


이 땅이 익을 때에 익으리.그 뜻이 또한 괴(壞)를 말하는 것인데, 이 땅이 번뇌를 허물어뜨릴 때에 괴상(壞相)을 보는 것이다.
경계의 바다에 충만하리라.

수행하여 보는 바의 허물어짐은
수대(水大)의 결정상(決定相)이다.
저 화대(火大)의 소괴상(所壞相)을
지금 설할 테니 잘 들으라.

식류(識流)와 식류 아닌 것들이
또한 위에 설한 것과 같다.

불이 일어나 타기 시작하고부터
모든 것들이 다 소진한다.
나아가 겁 동안의 성패(成敗)는
세계가 모조리 재가 되어 멸하고

저 불기둥이 치솟는 곳에서
이글거리는 큰 불꽃이 일어난다.
또한 2선(禪)의 경계로부터
가득 차게 모두 불을 비처럼 내리고

성한 불길이 두루 널리 변만해서
세계가 모두 퀭하니 뚫린다.
저 삼매의 경지에서
바른 관찰의 사유가 일어나고

수행하여 이런 변화를 보는 것이
불이 무너지는 결정의 모양이다.
저 풍대(風大)의 소괴상(所壞相)을
지금 차례로 설하리라.
이와 같은 여러 종류가
모두가 다 풍대의 허물어진 모습이라.

대지와 수미산이
분산하여 분진(粉塵)처럼
모두 소진하고 마멸(磨滅)하니
이것이 모두 바람의 큰 힘이다.

위의 저곳은 제4선이요
아래는 지극한 풍륜(風輪)의 세계이다.
재풍(災風)이 저곳에서 일어나서
그곳이 모두 무너져 흩어진다.

모든 것이 바람에 의해 무너진 것이니
지혜로운 자는 진실로
이와 같이 바르게 사유하여
바람이 무너뜨린 결정상을 보리라.

저들이 어떻게 수행을 한다 하는가?
언제나 깊은 근심과 싫어함[憂厭]을 일으켜
앞에서 저 고법(苦法)을 보고는
이를 따라 생각하여 잊지 않는다.

여덟 곳의 괴로운 큰 지옥이
각각 16분(分)을 증장하고
그것들 뭇 괴로움의 종류들의
가없고 한량없는 지옥이 있다.
중생들이 그곳에 태어나고
행함을 따라 온갖 고통을 받는다.

나는 이 악도(惡道)에서
아직 못 여의고 끌려오기도 했다.
마치 여덟 곳의 큰 지옥과 같아
누가 이를 다 일컬어 말하리오.
그 속의 한량이 없는 고통
그 끝을 얻기 어렵다.

가령 사람의 머리가 백 개가 있어
머리마다 백 개의 혀가 있다고 해도
지옥의 고통을 말하고자 한다면
겁이 다해도 다 말하지 못하리라.

어리석음과 간힐(奸黠)의 지경(地經)을
오직 부처님만이 이를 잘 분별하신다.
나는 모조리 구경할 수 있지만
능히 헤아릴 수 있는 자가 없다.

고독(苦毒)의 바다를 윤회하면서
무량한 겁을 오고 가고 하였으니
전도(顚倒)되어 선행(善行)하지 않으면
이러한 큰 고통의 과보에 이르게 된다.

자기 숙명(宿命)을 스스로 본다면

이런 고통은 다들 일찍 겪었다.
수행하여 본래의 고통을 기억한다면
열반을 따름을 곧 얻으리라.

어두운 마음은
축생의 부정한 업을 증상시키니
어리석음의 불애(不愛)의 과보와
갖가지 괴로움의 과보의 몸을 받는다.

9만 9천 종류의
그 형태가 각각 서로 달라

공중을 다니는 것과 수륙(水陸)의 성질들이 있으며
기어 다니고 꿈틀거리는 무리들이
각각 그 업을 따라 삶을 받았으니
이러한 극적인 곳을 구른다.
일체의 저 축생들은
돌아가며[展轉] 서로 잔인하게 먹으니

내가 본래 어리석었으므로
일찍이 이런 괴로움을 모두 받는 것이다.
이것을 돌아보니 두려워져서
마음은 염환(厭患)을 수행하여

깊이 근심하고 싫어하면
곧 고결정(苦決定)에 대한 것이다.
이와 같이 수행하면
방편으로 염리(厭離)를 일으킨다.

다시 또 스스로
아귀의 무량한 고통을 기억해 보면
바늘구멍처럼 목구멍은 가는데
거대한 몸은 옥초산(沃焦山) 같다.
이와 같이 무수한 겁 동안을
주리고 목마르고 너무 괴로워
하늘에서 내리는 단비를 보고
마시려고 하니 불덩이로 변한다.

저 4대(大)의 바다는
깊고 넓어서 끝도 바닥도 없는 것 같으나
마시려면 없어지고 마니
주리고 목마름을 그칠 수가 없다.

발가벗은 몸에 장발을 늘어뜨린 모습이
타다 남은 다라수(多羅樹) 모양이니
이런 곳에서 한없이 오래 살면서
이 같은 갖가지 고통들을 받는다.

업풍(業風)이 사방으로 몰아치면서
몸을 휘날려 부러뜨려 버리니
마치 저 광풍이 일어나서
마른 나무를 부러뜨림 같아라.

내가 간탐(慳貪)의 행을 쌓아서
혜시(惠施)의 업을 익히지 않았으므로
아귀에 태어나서
이 같은 온갖 고통들을 받는 것이다.

삼매의 경지에서
수행하여 사유가 일어나니
갖가지로 구별해 관찰하여
곧 방일하지 않으면

비록 번뇌는 끊지 못해도
이 같은 고통들의 핍박과 초독(楚毒)을 보아
매우 근심스럽고 두려워
생사의 고통을 지극히 싫어하게 된다.

이미 싫어하면 능히 욕망을 여의니
손바닥의 보배를 보는 것 같다.
탐욕을 이미 여의면
신속히 저 해탈을 얻게 되리라.

비유컨대 마치 향기로운 음식
그 속에 고독(蠱毒)이 있음과 같으니
갖가지 종류의 생사의 맛의
각종 괴로움이 역시 그러하다.

마치 상자에 뱀을 담아
이것을 짊어지고 갈 때
만약 그것을 깨달아 벗어던지면
뱀에게 물리지 않음과 같다.

우리 몸이 또한 이것과 같아서
4대(大)가 곧 독사이니

지혜로운 자는 이를 떼어버려
그로부터 해를 입지 않으리라.

아둔한 자가 횃불을 잡는데
급히 잡다보면 자기 몸을 데이니
밝은 사람은 버릴 때를 알아서
불에 데는 일이 결코 없는 것과 같다.

죽고 사는 일에 즐겨 집착하는 자는
재염(災炎)이 항상 치열하리라.
그러나 만일 깨달아 버린다면
불에 데는 일은 있지 않으리라.

비유컨대 모든 두려운 곳들도
역시 저 불타는 집과 같으니
독사들이 우글거리는 곳보다도
생사의 두려움이 더 무서워라.

비유컨대 마치 신기루와 같고
그리고 빈 그릇과도 같다.
모든 법이 공하여 나가 없으니
진실된 성품 역시 그러하다.

이 같은 세 가지 악도(惡道)에서는
이처럼 고통이 한량이 없다.
하늘에 비록 희락(喜樂)이 있지만
이것 또한 커다란 고통이다.

비유컨대 타오르는 불길과 같이
탐애의 불길도 이와 같으니
오랫동안 천상에 있으면
항상 욕화(欲火)의 불길에 탄다.

도리천(忉利天)에 있을 때에
선법(善法)에 편히 처해 앉아서
천녀(天女)가 공손히 시중을 들어 공양하고
지극한 쾌락이 한량없었음을 기억한다.

사방의 동산에 늘어선 보배 나무에
꽃과 열매가 미묘하고 장엄하다.
뜻에 따라서 다섯 곳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일찍이 모조리 받았노라.

그때 백룡(白龍)과 코끼리를 타고
여러 욕지(浴池)들을 두루 노닐고
숲 속의 개울에서 마음껏 놀았는데
돌아보니 아직도 석양이로구나.

먹는 것은 모두 감로(甘露)의 맛이요
마시는 것들은 감만다(甘曼陀)로구나.
충실(充實)하여 의혹과 근심이 없으니
받는 즐거움이 저 큰 바다와 같아라.

또 내승당(內勝堂)에 거처하며
천녀가 아름다운 음악을 울리니
지극히 어여쁘고 아름다워
그 고운 자태가 눈이 부시어라.
6만 가지 목소리가 아름다우니
연하고 고운 소리를 항상 들어
눈과 귀가 조용할 때가 없으니
나의 마음을 취하여 어둡게 한다.

여러 하늘들이 노래를 부르니
소리가 악기들과 어우러진다.
벌렁 드러누워 음악을 들으니
자나 깨나 언제나 즐겁기만 하다.
모든 근에 감겨드는 5욕(欲)이
마치 불바퀴가 휘도는 것 같으며

수미산왕(須彌山王)의 정상에서
편히 처하면 유쾌하여 자재롭다.
101가지 각종의 여러 보배들이
사이사이 뒤섞이어 땅을 장엄하고
여러 하늘들과 함께 노닥거리며
지나온 세월이 매우 장구(長久)하다.

저 다섯 경계에 접촉하니
다섯 가지 정근(情根)을 발동(發動)해
모든 것이 모조리 기특(奇特)하니
모든 것들이 쾌락의 인(因)이다.

모든 하늘은 한 그릇의 식사를 해도
복에 따라서 차별이 있다.
이와 같은 이색(異色)을 볼 때에

마음에는 근심과 고뇌가 생긴다.

이와 같이 슬프고 참혹하니
오히려 지옥의 고통과 같다.

이와 같은 부정한 음식을 먹으며
머리를 숙이니 마음이 부끄럽다.
회책(悔責)하노니 본래의 숙업(宿業)이
나로 하여금 이런 고통을 주는 것이다.

여러 하늘들과 아수라가
스스로 지키며 저 이익을 탐하고
이로부터 다툼과 분노를 일으켜
죽음을 크게 두려워한다.

혹은 하늘에게 부림을 당하고
혹은 또 지극히 가난하니
내 비록 하늘에 태어났지만
악도(惡道)의 고통과 다름이 없다.

저 항상 즐거운 곳에
쇠하고 죽는 열 가지 모습이 있다.
이런 모양과 목숨이 다하는
이때가 가장 큰 고통이다.

바야흐로 마음껏 즐기려고 할 때
홀연히 그만 다섯 가지 쇠함이 오니
이 같은 모양을 보았을 때에
근심과 공포로 편안하지 못하다.

천안(天眼)이 마침내 곧 깜박거리고
목욕을 하고 나면 물이 몸에 묻으며
모든 것들이 미묘한 경계에서도
그 마음이 즐겁고 기쁘지가 않으며

천 가지 음악과
자연의 가릉빈가(加陵頻伽)새의 소리도
지금은 적적하여 소리가 없으면
마땅히 이레 만에 죽는다는 것을 알아야 하리라.

옥녀(玉女)들이 다들 버리고 떠났으니
그 밖의 천(天)이 함께 종사하고
보고 나면 열뇌(熱惱)가 생겨서
목숨이 끝나고 지옥에 들어가게 된다.

그런데 현성(賢聖)한 사람은
무상한 변화를 깨달아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한다.

범부(凡夫)는 타오를 때
겨드랑이 밑에서 땀이 배어나
의복이 마침내 때가 묻는 것을
보고 크게 두려워하니
이것이 정업(淨業)이 다함이다.
화관(華冠)으로 곱게 장엄했는데
지금은 홀연히 병들고 풀이 죽었으며
몸은 본래 윤택하여 빛이 났으나
하루아침에 시들어서 쭈그러져 버렸다.
언제나 사랑하여 즐겁던 자리가
지금은 나빠져서 즐겁지 않아라.
이 다섯 가지 나쁜 조짐이 나타나면
마땅히 죽을 때가 왔음을 알아야 하리라.

그런데 저 진리를 본 자만이
이와 같은 나쁜 모양이 없어라.
내 지금 비구들에게 설하리니
여기서 염환(厭患)이 증장하리라.범본(梵本)에는 이 게송 하나가 없다.

여러 하늘과 하늘의 곳이
쇠하고 변하여 오래 가지 못하노니
밝은 지혜로 수행하는 자는
이 같은 무상한 변화를 보아야 한다.

4보(寶)의 수미왕(須彌王)을
진금산(眞金山)이 둘러싸 있으나
수행하여 혜안이 청정해지면
이것이 모두 녹아 흐르게 됨을 보리라.

그리고 여러 대철위산(大鐵圍山)이
사천하(四天下)를 둘러싸고 있으나
녹아 허물어지는 비상(非常)의 모양을

수행하는 자는 명료하게 보리라.

수행을 하여 천상에서
이와 같이 관찰하고
다시 인도(人道)에서
생각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혹 때로 저 왕법(王法)을 범하여
손발을 더러 잘리기도 했으며
고문 받는 고통이 지극히 괴로운 것을
나는 이를 모두 경험했노라.

친척을 길이 이별하니
그립고 슬퍼서 눈물이 흐른다.
가령 한 곳에 집착을 한다면
4대해(大海)를 초과하리라.

내가 본래 온 곳을 생각해 보니
사람 속에서 생을 받았는데
그 백골들을 모두 쌓아보면
수미산처럼 높고 넓으리라.
3악도를 흘러 돌면서
그 초독(楚毒)을 초월할 수 없으니

사람과 하늘이 받는 고통
또한 한량이 없이 많다.
이것을 자세히 분별해 말하려면
겁이 다해도 다하지를 못하지만

저 삼매의 경계에서
태어난 과보를
잘 관찰하여 명료(明了)하면
수행을 하여 깊이 근심을 가라앉히리라.

내가 비록 가업(家業)은 버렸으나
능히 도과(道果)를 이루지 못하면
스스로는 집을 나왔다고 하지만
생사의 지옥은 아직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내가 비록 은애(恩愛)를 버리고
소생(所生)을 버렸다고 이름해도
치애업(癡愛業)의 부모를
여의어 면할 수는 없다.

사람의 자식만 되었을 뿐이지
불법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니다.
겉으로는 성인(聖人)의 법의(法衣)를 입었으나
안으로 어리석음과 미혹함을 여의지 못했다.

저 5욕(欲)의 이익을 버리고
출가(出家)의 업에 의지한다 하더라도
저 불법 가운데서
적은 공덕도 얻지 못했으며

비록 안의 탐착은 버렸다고 해도
저 출요(出要)는 얻지 못한 것이다.
4념(念)을 아직 이루지 못했으니
어디로부터 심락(心樂)을 얻을까?

머리를 깎고 형호(形好)를 헐었으나
교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욕미(欲味)의 기쁨만 그냥 잃었을 뿐
선열(禪悅)의 즐거움은 얻지 못했으니

5무간업(無間業)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비유컨대 마치 배나 다리도 없이
깊은 물을 건너려는 것과 같아

결정취(決定聚)에 들지 못하고
다시 하늘에 태어나는 업도 없다.
무명(無明)이 심안(心眼)을 가리었으니
영원히 생사의 심연(深淵)에 빠진다.

마땅히 업의 힘쓸 바에 정진을 해야
과(果)를 짓지 못하는 일이 없으리라.
짓는 자는 끝내 잃지 않으리니
수행을 하여 잘 생각해야 하리라.

언제나 사람들의 신시(信施)를 받아서
저 몸속으로 침투하리라.
나에게 공덕이 있다고 말을 하지만
스스로 돌아보건대 비어서 실(實)이 없구나.

이 기른 이양(利養)의 마음으로 해서
나의 선한 공덕을 가려버린다.

뼈를 깎는 고통을 깊이 생각하면
당장에 곧 염리(厭離)가 일어난다.

모든 악취(惡趣)를 벗어나지 못하고
전도(顚倒)된 소견에 속박되어
평등의 길인 석가모니의
1승(乘)의 도를 향하지 못한다.

얻기 어려운 세계에 태어나니
모든 근(根)이 다 구족한다.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신 때를 만나
또 그 바른 법을 얻어 들을 수 있으나
괴로움의 그릇[苦器]을 버리지 못했으며
탐욕의 바다를 건너지 못했다.
칼을 뽑아서 다섯 악적(惡賊)을
또한 꺾어 멸하지 못했다.

이와 같이 바르게 볼 때에
그 수행이 해탈을 향하게 되며
이러한 우염상(憂厭相)을 지으면
곧 저 결정(決定)을 일으킨다.

몸은 부정(不淨)의 그릇이니
36물(物)이 가득하다.
비유컨대 마치 저 대지가
온갖 것들을 생육(生育)함과 같다.

몸은 숨겨지고 가려진 덩어리이며
또한 언제나 조욕(澡浴)과
취말(聚沫)과 촬마법(撮摩法)을 빌리니
오래지 않아 반드시 멸한다.

비유컨대 독사의 상자와 같이
4대(大)의 상자 역시 그러하다.
8만 가지 생물이 사는 집이라
언제나 서로 다투며 잡아먹는다.

이 몸이 곧 재앙의 집이니
404가지의 질병과 번민과
갖가지 고통과 부정(不淨)
온갖 것이 안에 가득하다.

비유컨대 마치 낡은 빈 집 같고
또한 무덤들의 언덕 같아서
굽지 않은 토기처럼 견고하지 못하니
몸도 말하자면 역시 이와 같다.

한량없는 뭇 악의 모임[惡聚]은
허망하여 진실이 아닌데
전도되어 탐착을 일으키니
긴긴 밤을 초독(楚毒)으로 지새운다.

그리고 또 임신을 하게 되면
출산의 고통을 수없이 받으니
진실의 법을 보지를 못하면
생사의 바퀴만이 항상 돌아간다.

처음에는 가라라(迦羅邏)를 받고
다음에는 포육단(泡肉段)이 생기고
점점 자라서 지절(肢節)을 이루니
다섯 가지 임신의 고통이다.

날이 없는 지옥[無日獄]에 유폐되어서
생숙장(生熟藏)이 핍박을 받는다.
행측(行廁)에서 길러져 자라고
부정고(不淨苦)에 취하여 혼미해서

태(胎)에서 나와 삶의 고통을 받아
늙고 병이 들어 죽음으로 굴러간다.
모든 음(陰)이 일어나고
3상(相)에 박절(迫切)된다.

색(色)은 거품[聚沫]과 같고
수(受)는 물 위의 거품 같고
상(想)은 봄철의 아지랑이와 같으며
뭇 행(行)은 마치 파초(芭蕉)와 같고
식(識)의 종자는 마치 허깨비와 같음을 보니
허망하여 진실함이 없다.

핍박이 바로 고상(苦相)이고
인연이 바로 집상(集相)이며
적정(寂靜)이 멸진상(滅盡相)이고

출요(出要)가 곧 도상(道相)이다.

이 4성제(聖諦)를
수행하여 차차 관찰하고
16행(行)을 사유하면
생사의 고통에서 해탈하리라.

간략하게 모든 법의
자상(自相)과 공상(共相)에 대해 설했으니,
결정의(決定義)를 분명하게 알고
수행하여 바르게 관찰하라.

수행하여 지혜의 등불을 태워서
네 가지 진리를 바르게 관찰하면
능히 악취분(惡趣分)을 끊어
모든 수태(受胎)의 고통을 여의고
다시 즐거움을 몸에 받아서
세상의 고뇌에 얽매이지 않는다.

이양(利養)의 행을 없애 버리고
홀로 지내면서 멀리 여읨[遠離]을 닦는다.

이미 능히 염리(厭離)를 닦으면
하늘에 태어나는 즐거움에 맛들이지 않게 된다.
그런데 더구나 인간에 탐착하여
온갖 고통들을 차마 받을 것인가?

종(種)이 독사와 같음을 관하고
5음(陰)을 다섯 원적(怨賊)으로 하고
탐욕의 환란이
긴긴 밤에 은밀히 침해함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6근(根)이 마치 공취(空聚)와 같으니
진적(塵賊)이 다투어 와서 모인 것이다.
이런 것이 안팎으로 들어오지만
진실관(眞實觀)을 수행하면

견애(見愛)는 대하(大河)와 같고
열반이 마치 피안과 같다.
수행하여 혜안(慧眼)이 청정해지면
법이 공하여 무아(無我)임을 관하게 된다.

이와 같이 진실을 알면
3유(有)에 처함이 즐겁지 않다.

모든 법을 분명히 보는 자에게
3성(成)의 상(相)을 대략 설했노라.
앞에서 3괴(壞)를 설하였지만
방편과 부지런히 닦아 익힘의
상행(相行)의 뜻을
이제 차례로 다시 설하리라.

하나의 색(色)을 갖가지로 관찰하면
하나하나가 네 종류의 인(因)이다.
결정코 인과를 알고
신념처(身念處)를 구경(究竟)하라.

받음과 마음이 서로 응해서
볼 때는 오직 그 자체이다.
인연의 과보가 한량이 없으니
그 모양은 같은 종류의 성품이다.
수행하여 사유가 일어남은
모두가 소의(所依)에 의해 나타난다.

마음은 마치 훈련되지 않은 말과 같아서
허깨비와 같고 원숭이와 같다.
한량없는 인연의 모양이
모두 소의에 나타난다.

두 음(陰)은 공하여 무아이다.
다음에 상(想)과 색(色)을 합하여 관해야 한다.
상(想)과 수(受)와 식(識)과 합하고
행의 둘도 역시 그러하다.

차례로 상과 색과 수와 그리고
상과 색과 식도 역시 그러하다.
상과 수와 식을 분별하니
행의 셋도 상(想)의 설함과 같다.

사(四)와 오(五)가 점차 화합하여
사유해서 자상(自相)을 허물고
통틀어 5성음(盛陰)을 인연하니
칠처삼종관(七處三種觀)과

열락(悅樂)의 넓은 경계가
다시 멸하여 생멸을 관한다.

일념(一念)으로 진실을 보아서
법념처(法念處)를 구족하라.

음종(陰種)의 모양을 바르게 관찰하면
변화[化]와 꿈과 물에 비친 달과 같다.
정혜(定慧)가 굴러서 증광(增廣)하면
거기서 난법(煖法)이 생긴다.

그 마음이 지극히 적정하여
5음의 모양을 통틀어 본다.
즉 자신의 욕망의 불길을 끄고
삼계(三界)의 불길이 치솟음을 보아

모든 모양의 3삼매(三昧)에서
바르게 해탈의 문으로 향하라.
처음에 4성제의
진실의 16행(行)을 관하여

난법을 성취하고 나서
진실한 관(觀)을 증진하여
부처님의 몸의 상호(相好)와
여러 공덕이 한량없음을 보라.
제일의 적멸법(寂滅法)은
청정하여 번뇌를 여의고

성중(聖衆)의 공덕의 바다는
깊고 깊어 바닥이 없다.
갖가지 미묘한 모양과
몸과 경계를 드러내니

보고 나면 마음이 즐겁다.
정법(頂法)에서 상(相)을 구족하고

증진하여 법인(法忍)이 생긴다.
5취(趣)에 경계를 나타내고

악도(惡道)의 불길이 멸하여
청량한 곳에 놀면서 쉰다.
중간에 머물며 생사를 겪어도
최상은 오직 일심(一心)이다.

먼저 한량없는 고통을 보고
다음에 괴로움의 종자[苦種]가 생김을 본다.
괴로움의 종자가 바뀌어 더욱 광대하여
차츰 고집(苦集)의 멸(滅)을 본다.
멸하고 난 다음에
8성(聖)의 평등의 길을 관한다.

변하고 멸함은 무상(無常)의 모양이요
거칢[麤澁]과 핍박은 고통이다.
공적(空寂)하여 중생이 없고
자재하지 않는 것이 무아이다.

괴로움의 종자는 이 인(因)이 자라나
뭇 연과 합하여 집(集)이 된다.
종(種)이 생기므로 기(起)라 말하고
과(果)를 일으킴을 연(緣)이라 한다.

고와 집이 다하므로 멸하니
멸하여 고요함을 적지(寂止)라 설한다.

청정은 3유(有)를 여의니
각(覺)을 설해 묘출(妙出)이라 한다.

지름길이 곧 도상(道相)이며
평직(平直)을 정의(正義)라 설한다.
나아감[進向]을 일러 취(趣)라 하고
타고 나가기[乘出] 때문에 승(乘)이라 설한다.

4제(諦) 16행(行)을
구족하면 진실한 기쁨이다.
인법(忍法)은 점차
세간의 제일법(第一法)을 만들고

성행(聖行)의 정수지(正受地)에
이 세 결정(決定)을 얻어
견도(見道)와 사유도(思惟道)는
차례로 점차 구경(究竟)에 이른다.

모든 미묘한 모양은
각각 지대(地大)를 따라 일어나고
진실의 지혜를 성취하여
모든 공덕을 구족한다.

앞에서 말한
수행의 결정분(決定分)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밝은 지혜를 가진 자들은
마땅히 바른 방편을 지어야 한다.
믿고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않고

항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모든 범행(梵行)을 닦는 자들을
항상 사랑하여 공경해야 한다.
스스로를 지켜서 청정한 계율을 닦아
위의(威儀)로써 진리에 편안히 있게 한다.

설령 이양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욕망을 줄여 만족할 줄 알면
만족이 쉬워서 기르기도 쉬우니
몸에 알맞은 식사를 헤아릴 줄을 안다.
또한 수레에 기름을 치는 것과 같아서
그 맛을 탐하지 않는다.

모든 존재하는 생은
모조리 근심[過患]임을 깨달아
사유하여 잘 관찰하라.
3유(有)는 타는 불길과 같다.

마치 저 중병 든 사람이
의원의 치료를 믿고 받아들임 같으니
선지식이 말하는 것을 듣고
관찰하여 자세히 사유하고

언제나 청정한 마음으로
몸을 단속하여 방일하지 말라.
조용히 침묵하여 말을 적게 하고
연좌(宴座)하여 실의(實義)를 생각해라.

들판 언덕배기 수풀 사이에서
한가히 지내면서 멀리 여읨[遠離]을 닦아라.
아무 일이 없이 산과 바위를 즐기며
동굴 속의 노지(露地)에 앉아
나무 그늘에서 풀잎을 깔고는
이와 같이 청정하게 머물러라.
수행하여 안으로 사유하고
열심히 익혀 쉬거나 게으름 없이

오로지 정밀히 자신의 이익을 구하고
물러나 머무는[退住] 허물을 멀리 여의어라.
반드시 승진(升進)을 한다면
결정코 공덕분(功德分)을 얻으리라.
부지런히 방편을 수행하면
모든 선근(善根)을 구족하리라.

내가 적은 지혜의 힘을 가지고
여러 법성(法性)을 대강 설했노라.
그 구경(究竟)의 뜻으로 말하면
10력(力) 지혜의 경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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