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합대장경 금칠십론(金七十論) 중권
금칠십론 중권
진제 한역
외도가 말하였다.
“대(大)에 대한 설명을 이미 마쳤다. 그렇다면 아만[慢, ahaṁkāra]의 특징은 어떠한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아만은 자아의식의 집착으로, 我慢我所執
이로부터 두 가지가 생겨나는데, 從此生二種
첫째는 11근(根)이 생겨나며, 一十一根生
둘째는 5유(唯)와 5대(大)이다.1) 二五唯五大
‘아만은 자아의식의 집착이다.’
아만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 것인가?
말하자면 나의 소리, 나의 촉감, 나의 색, 나의 맛, 나의 향, 나의 복덕은 참으로 애호할 만한 것이라고 할 때, 이와 같은 자아의식의 집착[我所執]을 일컬어 아만이라고 한다. ‘이로부터 두 가지가 생겨난다’고 함은, 이러한 아만으로부터 두 가지의 변이가 생겨난다는 말이다.
무엇이 두 가지인가?
‘첫째는 11근이 생겨나며, 둘째는 5유와 5대이다. ‘ll근과 5유의 명칭에 대해서는 앞(제22송)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아만의 특징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아만에는 세 가지 종류의 속성[法]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중의 어떠한 속성에 따라 어떠한 법이 남아지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열한 가지의 살타(薩埵)적인 종류는 十一薩埵種
변이(變異)의 아만에서 생겨나고, 變異我慢生
대초(大初)의 아만은 어둠의 5유를 낳으며, 大初生闇唯
염치(炎熾)의 아만은 두 종류를 낳는다.2) 炎熾生二種
‘열한 가지의 살타적인 종류는 변이의 아만에서 생겨난다.’ 만약 각(覺,
buddhi:大의 다른 이름) 중에 기쁨[喜, sattva]이 증장하면 아만을 낳는데, 이러한 아만은 바로 기쁨의 종류이기 때문에 근심[憂]과 어둠[癡]을 능히 두루 억제한다. 성인께서는 이러한 아만을 전변(轉變, vaikṛta)3)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러한 전변의 아만은 능히 11근을 낳을 수 있다.
어떻게 이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는 것인가?
기쁨[樂]이 많기 때문이며, 가볍고 빛나며 청정하기 때문이며, 능히 자신의 대상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러한 11근을 살타적인 종류라고 한 것이다.
‘대초(大初)의 아만은 어둠의 5유를 낳는다.’ 만약 대(大) 중에 어둠[闇, tamas]이 증장하면 아만을 낳는데, 이러한 아만은 바로 어둠의 종류[癡種]이기 때문에 기쁨과 근심을 능히 두루 억제한다. 성인께서는 이러한 아만을 대초(5대의 본원이라는 뜻)라고 이름하였는데, 이러한 아만은 5유를 낳는다. 그래서 5유와 5대는 모두 어둠의 종류라고 한 것이다.
‘염치(炎熾)의 아만은 두 종류를 낳는다. ‘만약 대 중에 괴로움[苦, rajas]이 증장하면 아만을 낳는데, 이러한 아만은 바로 근심의 종류[憂種]이기 때문에 기쁨과 어둠을 능히 두루 억제한다. 성인께서는 이러한 아만을 일컬어 염치라고 하였는데, 이러한 아만은 두 종류를 모두 낳는다. 즉 이러한 아만은 능히 11근을 낳으며, 역시 또한 5유 등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이러하다. 즉 이러한 살타적인 종류인 변이의 아만은 능히 제 기관(11근)을 낳음에 있어 염치의 아만을 취하여 그 동반자로 삼는다.
어째서 그러한가?
염치는 운동의 능력[事, kriyāśakti)을 갖기 때문이며, 살타의 종류인 변이의 아만은 운동을 갖지 않기 때문이다. 즉 전변의 아만이 11근을 낳기 위해서는 반드시 염치의 아만을 취하여 동반자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대초의 아만이 5유와 5대 따위를 낳기 위해서도 반드시 염치의 아만을 취하여 동반자로 삼아야 한다.
어째서 그러한가?
암치(闇癡:대초)의 아만은 운동을 갖지 않으며, 염치는 운동을 갖기 때문이다.
이처럼 염치의 아만은 능히 11근을 낳으며, 역시 5유 등을 낳을 수 있다. 그래서 법치의 아만은 두 종류를 낳는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살타적인 증류의 아만이 11근을 낳는다는 사실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무엇을 일컬어 11근이라고 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이근(耳根)ㆍ피근(皮根)ㆍ안근ㆍ설근ㆍ비근, 耳皮眼舌鼻
이러한 다섯 가지를 지각기관이라고 하며, 此五名知根
설근(舌根)ㆍ수근(手根)ㆍ족근(足根)ㆍ인근(人根)과 舌手足人根
대유근(大遺根)의 다섯 가지는 행동기관[作根]이다.4) 大遺五作根
‘이근ㆍ피근ㆍ안근ㆍ설근 비근, 이러한 다섯 가지를 지각기관(知根)이라고 한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지각기관이라고 말한 것인가?
이러한 다섯 가지는 능히 소리와 색 등을 취하기 때문에 지각기관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설근ㆍ수근ㆍ족근ㆍ인근과 대유근의 다섯 가지는 행동기관이다. 어째서 이러한 것을 행동기관이라고 말한 것인가?
말을 하는 등의 온갖 현상은 이러한 다섯 가지에 의해 능히 조작되기 때문이니, 그래서 옛날의 성인은 그것을 일컬어 다섯 가지 행동기관이라 하였던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열 가지의 기관은 그 작용을 어떻게 행하는 것인가?”5)
“이근(耳根)은 성유(聲唯:소리의 미세한 원소)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공대(空大)와 동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소리만을 취하는 것이다. 피근(皮根:촉각기관)은 촉유(觸唯)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풍대(風大)와 동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촉만을 취하는 것이다. 안근(眼根)은 색유(色唯)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화대(火大)와 동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색만을 취하는 것이다. 설근(舌根)은 미유(味唯)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수대(水大)와 동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맛만을 취하는 것이다. 비근(鼻根)은 향유(香唯)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지대(地大)와 동류이기 때문에 오로지 향만을 취하는 것이다.
다섯 가지 행동기관에도 역시 다섯 가지의 작용이 있다. 즉 설근(舌根:발성기관)은 지각기관과 상응하여 능히 단어[名]와 문장[句]과 음소[味]를 설하는 것이다. 수근(手根:파지기관)은 지각기관과 상응하여 능히 무언가를 만들어내거나[工巧] 잡는 등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족근(足根:보행기관)은 지각기관과 상응하여 능히 평평하거나 높고 낮은 길을 가는 것이다. 인근(人根:생식기관)은 지각기관과 상응하여 능히 희락을 즐기며, 또한 어린애기를 낳는 것이다. 대유근(大遺根:배설기관)은 지각기관(이를테면 皮根)과 상응하여 능히 똥오줌을 버리는 것이다.“
이 같은 뜻으로 인해 이러한 것을 열 가지 기관[根]이라고 이름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심근(心根:마음, 사유기관)은 어떠한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심근이란 능히 분별하는 것으로, 能分別爲心
여기에는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하는데, 根說布兩種
세 가지 속성의 전변이 다르기 때문에, 三德轉異故
외적 차별이 곧 각기 다른 것이다.6) 外別故各異
‘심근이란 능히 분별하는 것으로, 두 종류가 있다고 주장한다’고 함은 마음에는 두 종류가 있으며, 분별이 바로 마음의 본질이라는 말이다.
어째서 그러한가?
이러한 마음이 만약 지각기관과 상응하면 바로 지각기관이라고 이름할 수 있으며, 만약 행동기관과 상응하면 바로 행동기관이라고 이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이러한 마음은 능히 지각기관의 작용[事, vṛtti]을 분별하며, 아울러 행동기관의 작용을 분별하기 때문이다. 비유컨대 어면 한 사람을 솜씨 좋은 장인[工巧]이라고 하기도 하고, 혹은 말솜씨 좋은 이[能說]라고 일컬을 수 있는 것처럼 마음도 역시 그러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마음을 어떻게 근(根)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열 가지 기관[根]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즉 열 가지 기관은 전변의 아만(살타의 속성이 두드러진 대로부터 생겨난 아만)으로부터 생겨난 것인데, 마음도 역시 그러하여 열 가지 기관과 함께 작용하며, 열 가지 기관이 지은 작용을 마음도 역시 동일하게 짓는다. 그렇기 때문에 마음은 근이라는 명칭을 획득할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모든 기관의 작용은 각기 다르다. 마음의 경우에도 다름[別]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능히 분별하는 것이 바로 마음의 작용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사람이 어떠한 곳에 재물과 먹을 것이 있다는 소리를 들었다면 바로 작심(作心)하여, ‘나는 그곳에 가서 마땅히 맛있는 음식과 이익을 얻으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처럼 분별은 마음 각각의 개별적 작용[別事]이다. 따라서 마음은 열 가지 기관과 동일한 것(살타에 의한 전변아만)에서 생겨났고[同生], 함께 작용하는 것[同事]이며, 나아가 각기 개별적으로 분별하는 것[別分別]이기 때문에 그것을 근이라고 이름할 수 있다. 그러므로 모든 근(根)은 오로지 열한 가지뿐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11근은 누가 능히 조작한 것인가? 어떻게 하여 이 같은 의문이 생겨난 것인가 하면, 성인들마다 주장하는 바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어떤 이는 말하기를, ‘그것은 자아[人我]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자재신에 의해 지어진 것이다’라고 하며, 또 어떤 이는 ‘유(有, sat)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등 각기 주장하는 바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로 말미암아 나에게 의문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이러한 기관[根]과 대상[塵] 중의 열한 가지는 결정적으로 지식을 갖는 것 [有智:푸루샤)으로부터 생겨났을 것이다.
어떻게 이와 같은 것을 아는가?
이러한 11근은 능히 열한 가지의 대상을 취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성과 대(大)와 아만은 지식을 갖지 않는 것[無知]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것은 마땅히 이 같은 11근을 낳는 능력을 갖지 않았어야 한다. 만약 11근이 지식을 갖는 것으로부터 생겨나지 않았을 것 같으면 다음과 같은 노가야다론(路歌夜多論, Lokāyata)의 설과 같아야 하는 것이다.
능히 거위의 흰 색을 낳고,
앵무새의 녹색을 낳으며,
공작새가 여러 잡색을 낳는 것,
자아 역시 이것으로부터 생겨났으리.7)
즉 이러한 이유로 말미암아 나는 지금 ‘ll근은 무엇으로부터 생겨난 것인가?’라고 의심하게 된 것이다.
본론 중에서 자아는 작자(作者)가 아니며, 자재신도 역시 작자가 아니다. 그리고 유(有)라고 할 만한 별도의 존재[別法]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대가 말한 것은 11근을 낳지 않는다.
외도가 말하였다.
“만약 그렇다면 어떠한 존재가 능히 낳는 것인가?”
“세 가지 속성의 전변이 다르기 때문에 외적 차별이 곧 각기 다른 것이다. 즉 세 가지 속성이 아만 중에 존재하면서 자아의 뜻[我意]에 따랐기 때문에 전이하여 11근을 낳은 것이다.”8)
자아의 뜻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이러한 11근의 외계 대상[外塵]은 각기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만약 하나의 기관만을 남았다면 그것들을 두루 취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전이하여 11근을 낳았으며, 그것들은 각각의 온갖 대상을 취하는 것이다. 그래서 11근의 차별이 각기 다른 것이다.
그대는 또한 지식을 갖지 않는 것[無知:자성ㆍ대ㆍ아만)은 다(多:諸根의 차별)를 낳을 수 없다고 하였지만, 그것은 옳지 않다. 지식을 갖지 않는 것에도 다를 낳는 능력[多能]이 있음을 볼 수 있으니, 이에 대해서는 본 논 중(제57송)에서 마땅히 설명하게 될 것이다.
송아지를 키우기 위해
지식을 갖지 않은 소가 젖을 내듯이
자아[人我]를 해탈시키기 위해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이 근(根)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속성은 지식을 갖지 않은 것이지만 능히 11근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나는 지금 11근이 아만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이미 알았다. 그런데 이러한 11근의 배치[安置]는 각기 다른데, 그것은 누가 그렇게 한 것인가? 이를테면 눈[眼根]은 가장 위쪽에 있으면서 능히 멀리 있는 색을 보며, 귀[耳根]는 각기 한쪽의 가장자리에 있으면서 능히 멀리 있는 소리를 들으며, 코[鼻根]는 한 곳에 있으면서 능히 가까이 이른 향을 취하며, 혀[舌根]는 입 속에 있으면서 능히 그곳에 이른 맛을 취하며, 피부[皮根]는 신체 안에 있으면서 밖에 이른 촉(觸)을 모두 알며, 발성기관[舌根]은 입 속에 있으면서 능히 단어ㆍ문장ㆍ음소를 설하며, 손[手根]은 좌우에 있으면서 능히 물건을 잡으며, 발[足根]은 신체 아랫부분에 있으면서 능히 높고 낮은 곳을 가며, 그 밖의 생식과 배설의 두 근[人ㆍ大遣根]은 다른 이가 항시 보는 것을 피해 은밀한 곳에 있으면서 능히 애기를 낳고, 대소변을 버리고 희락하며, 마음[意根]은 일정한 곳에 있지 않으면서 능히 분별의 작용을 짓는 것이다. 그럴 때 이러한 온갖 기관을 배치한 것은 바로 누가 행한 바인가? 자아가 한 것인가, 자재신이 한 것인가? 아니면 별도의 원인이 있어 그것이 한 것인가?”
본 논 중에서 설하는 자아는 원인이 아니며, 자재신도 역시 원인이 아니다. 자성이 바로 올바른 원인이다. 즉 자성이 세 가지 속성과 아만을 낳으며, 아만은 자아의 뜻[我意]에 따라 전변하니, 이러한 세 가지 속성에 의해 온갖 기관이 배치된다. 그래서 게송에서 ‘세 가지 속성의 전변이 다르기 때문에 외적 차별이 곧 각기 다른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다.
나아가 멀고 가까운 것에 대한 근의 작용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으니, 첫째는 난(難)을 피하기 위한 것이며, 둘째는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난을 피하기 위한 것이란 멀리 있는 것을 보고 멀리 있는 것을 듣는 것(眼과 耳根)으로, 그렇게 함으로써 미리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몸을 보호하기 위한 것이란, 여덟 가지 대상이 근에 이를 때(직접 접촉할 때) 비로소 알 수 있는 것으로, 자기 몸을 대처[料理]하여 증익(增益)되게 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이러한 11근은 어떠한 작용[事]을 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오로지 색 등의 대상을 보는 것, 唯見色等塵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지각기관의 작용이며, 是五知根事
말하고 잡고 걷고 희락하고 배설하는 것, 言執步戱除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행동기관의 작용이다.9) 是五作根事
‘오로지 색 등의 대상을 보는 것, 이것이 바로 다섯 가지 지각기관[知根]의 작용이다.’ 안근은 오직 색을 보는 것이니, 이것이 바로 안근의 작용이다. 다시 말해 안근은 오로지 볼 뿐이며, 능히 분별하거나 붙잡을 수 없다. 그 밖의 근도 역시 그러하여 각기 자신의 대상[竟]에 대해 오로지 비출[照] 뿐으로, 이것이 바로 그것들의 작용이다. 즉 지각기관은 능히 대상을 비추는 것으로, 행동기관[作根]은 이러한 대상을 능히 파악하여 이용[執用]한다. 지각기관의 작용에 대해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행동기관의 작용에 대해 논설하리라, 언설은 바로 설근(舌根) 즉 발성기관이 추구하는 대상이며, 붙잡는 것은 바로 수근(手根) 즉 손이 추구하는 대상이며, 보행은 바로 족근(足根) 즉 발이 추구하는 대상이며, 희락하고 아이를 낳는 것은 인근(人根) 즉 생식기관이 추구하는 대상이며, 배설하여 버리는 것은 바로 대유근(大遺根) 즉 배설기관이 추구하는 대상이다.
행동기관의 작용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다음으로 마땅히 대와 아만과 마음이 추구하는 대상과 작용[事]에 대해 논설하리라.
이 세 가지는 자상(自相)을 작용으로 삼으니, 三自相爲事
열세 가지는 추구하는 경계대상이 동일하지 않다. 十三不共境
그러나 온갖 근은 공통된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諸根共同事
파나 등의 다섯 바람이 바로 그것이다.10) 波那等五風
[‘이 세 가지는 자상(自相)을 작용으로 삼는다.’ 즉 대의 자상은 결지(決智:이해 판단)이니, 이러한 것이 바로]11) 대의 작용이다. 아만의 자상은 자아를 분별하는 것[計我]이니,12) 이러한 자상이 바로 아만의 작용이다. 마음의 자상은 사유 분별(分別)이니,13) 이러한 것이 바로 마음의 작용이다.
‘열세 가지는 추구하는 경계 대상이 동일하지 않다’고 함은, 앞서 언급하였듯이 열 가지 기관[根]에는 각기 추구하는 대상이 있으며, 아울러 대와 아만과 마음의 자상도 각기 다르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그래서 작용이 동일하지 않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온갖 근14)은 공통된 작용을 하기도 하는데, 프라나 등의 다섯 바람[五風]이 바로 그것이다.’ 만약 온갖 근은 각각 공통되지 않은 작용을 한다고 말하였을 것 같으면, 이치상으로 반드시 마땅히 공통되는 작용을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인데, 여기서 공통되지 않은 작용이란 예컨대 각각의 사람들에게 각기 한 명의 부인이 있는 것과 같은 것이고, 공통된 작용이란 여러 사람들에게 한 명의 같은 하녀가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공통된 작용인가?
그것은 다섯 가지 종류의 바람[風]으로, 첫째는 파나(波那, prāṇa)이고, 둘째는 아파나(阿波那, apāna)이며, 셋째는 우다나(優陀那, udāna)이고, 넷째는 바나(婆那, vyāna)이며, 다섯째는 사마나(奢摩那, samāna)이니,15) 한 다섯 바람이 일체의 근에 공통된 하나의 작용이다.
여기서 파나의 바람이란 입과 코를 통로로 하는 것으로, 외적인 대상[風大]을 취하는 것이 바로 그것의 작용이다. 이를테면 ‘나는 숨을 멈춘다’거나 ‘나는 숨을 쉰다’고 말할 때, 바로 그것이 작용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파나는 어떠한 근이 능히 짓는 것인가?”
“이것은 열세 가지 근에 공통되는 하나의 작용이다. 이러한 바람은 비유하자면 새장 속의 새와 같은 것으로, 새가 동요하면 새장이 움직이듯이 온갖 근도 역시 그러하여 파나의 바람이 운동함으로써 열세 가지 근은 모두 움직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열세 가지 근은 그러한 작용에 있어 동일한 것이다.
아파나의 바람이란, 두려워할 만한 것을 보면 바로 그것에서 움츠리거나 피하는 것으로, 만약 이러한 바람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겁내고 나약하게 된다. 우다나의 바람이란 ‘나는 산에 오르기를 원한다,’ ‘나는 다른 이보다 뛰어나다,’ ‘나는 능히 이것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으로, 만약 이러한 바람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스스로 고조되어 ‘나는 뛰어나다,’ ‘나는 부자이다’라고 말하니, 이것이 우다나의 작용이다. 바나의 바람이란 몸에 두루 충만한 것이며, 역시 또한 지극하면 몸을 떠나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바람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타인을 떠나 안락을 얻지 못한다. 또한 만약 이러한 바람이 점차 조금씩 떠나게 되면 모든 마디마디[分分]가 죽은 것과 같게 되고, 완전히 떠나면 바로 죽게 된다. 사마나의 바람이란 심장에 머물면서 온갖 근을 능히 섭지(攝持)하는 것이니, 이것이 그것의작용이다. 만약 이러한 바람이 많아지면 사람들은 인색해져 재물을 구하고 그와 동반되는 것을 구하게 된다.
이상의 다섯 가지 바람의 작용은 열세 가지 근이 모두 함께 짓는 것이다. 열세 가지 근에 공통되지 않거나 공통되는 작용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동시에 함께 일어나는 작용과 점진적으로 일어나는 작용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각(覺)과 아만과 마음, 그리고 기관의 작용은 覺慢心及根
어떤 경우에는 동시에, 혹은 순서대로 일어나는데, 或俱次第起
이미 보여졌거나 아직 보여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 已見未見境
세 가지의 작용이 일어나는 경우, 먼저 감관에 근거한다.16)
三起先依根
‘각(覺, 즉 대)과 아만과 마음, 그리고 기관[根]의 작용은 어떤 경우에는 동시에, 혹은 순서대로 일어난다.’ 이를테면 색을 볼 때, 대와 아만과 마음과 안근의 작용이 동시에 함께 일어나 하나의 대상을 취한다. 안근과 마찬가지로 그 밖의 다른 근도 역시 그러하여 일시에 네 가지의 작용이 함께 일어나며, 다 같이함께 하나의 대상을 취한다.
그리고 순서대로 생겨난다고 함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길을 가다가 문득 높다란 사물을 보고 의심을 일으켜, ‘저것이 사람일까?’ ‘나무 그루터기일까?’라고 생각하다가, 만약 거기에 새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거나, 혹은 집 넝쿨이 얽혀져 있는 것을 보거나, 혹은 사슴이 가까이 있는 것을 보게 되면, ‘저것은 사람이 아니라 나무 그루터기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약 펄럭이는 옷을 보거나, 혹은 구부렸다 폈다 하는 것을 보게 되면, ‘저것은 바로 사람이다’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즉 이와 같은 때에는 ‘각’과 아만과 마음과 기관의 작용이 순서대로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눈으로 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귀 등의 온갖 기관의 작용이 순서대로 일어난다는 것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미 보여졌거나 아직 보여지지 않은 대상에 대해 세 가지의 작용이 일어나는 경우, 먼저 감관[根]에 근거한다’고 함에 있어 이미 보여진 대상(과거)에 대한 세 가지(각ㆍ아만ㆍ마음)의 작용은 감관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아직 보여지지 않은 대상(미래)에 대한 세 가지의 작용도 역시 감관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일어난다고 설해 보아야 할 것인데, 이 점에 대해서는 게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최후의 유가(由伽) 시(時)에
마땅히 이와 같은 자가 있을 것이니,
사견(邪見)과 사행(邪行)에 의해
불(佛)ㆍ법(法)ㆍ승(僧)을 비방하네.
먼저 부모를, 그리고 권속과
친구를 삿되게 교화하며,
네 가지의 악한 길[惡道]을 열어
장차 다른 이를 여기에 들게 하리라.17)
그리고 미래의 사실과 마찬가지로 과거의 사실도 역시 그러하여 이근(耳根)에 근거하여 순서대로 세 가지의 법의 작용을 일으키게 된다. 이처럼 세 가지의 법은 먼저 외적 감관(外根:5지근)에 근거하여야만 일어날 수 있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열세 가지 작구(作具)는 바로 지식을 갖지 않는 것[無知]이다. 만약 자아[人]나 자재(自在)에 의존하지 않는다면, 그것들 각각은 어떻게 자신의 대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열세 가지는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十三不由他
스스로의 작용과 활동을 능히 지으니[作事], 能作自用事
이러한 활동의 원인은 자아를 위한 것일 뿐 我意是因緣
이를 짓게 하는 별도의 원인은 존재하지 않는다.18) 無有別敎作
‘열세 가지는 다른 것에 의하지 않고, 스스로의 작용과 활동을 능히 짓는다. ‘본 논 중에서 자재신이나 자아는 작자(作者)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해 앞에서(제27송 장행) 이미 논설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열세 가지의 작구는 자신의 대상을 갖듯이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능히 자신의 작용을 짓는 것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범행(梵行)의 바라문이, 어떤 곳에 베다를 잘 가르치는 스승이 있어 제자가 뜻하는 바대로 수학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 ‘나는 지금 결정코 그에게 가서 배우리라’고 생각하였을 경우, 이는 바로 대(大)가 이 같은 생각[覺知]을 짓는 것이고, 또한 아만은 이러한 대의 뜻을 획득하고 나서 ‘나는 일체의 바라문이 갖는 수행의 도구[校具, 이를테면 지팡이나 물그릇 등]를 모두 가지고서 그에게로 가 마음이 산란되지 않게 하리라’고 하는 것과 같은 헤아림[計]을 짓는다. 그리고 마음은 바로 그러한 아만의 뜻을 획득하고 나서 ‘나는 먼저 마땅히 어떠한 베다를 배울 것인가? 사마베다[娑摩皮陀, Sāma-Veda]를 배울 것인가, 야주르[夜集, Yajur] 베다나 리그[力, Rg] 베다를 배울 것인가?’라고 하는 것과 같은 분별을 짓는다. 나아가 외적 감관[外根]은 마음의 이러한 분별을 알고 나서, 눈은 능히 길을 살피고, 귀는 다른 이의 말을 듣고, 손은 물주전자를 들고, 발은 능히 길을 걷는 등 각각의 작용과 활동을 짓게 되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도적의 두목이 호령하여 말하기를, “나가고 들어오고, 진적하고 멈추는 것은 반드시 나의 말을 듣고 행하라”고 하면 도적의 무리들은 모두 그의 명령에 따르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온갖 근(根, 즉 작구)도 역시 이와 같다. 여기서 각은 도적의 두목에 비유되며, 그 밖의 근은 도적에 비유된다. 즉 이미 각의 뜻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기 자신의 작용과 활동을 짓게 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열세 가지 작구는 각각 앞의 대상을 포착한다. 그렇다면 이는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타자를 위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이러한 활동의 원인은 자아를 위한 것[我意ㆍ我用, puruṣārtha]일 뿐 이를 짓게 하는 별도의 원인(조작자)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뜻에 대해서는 앞(제21송)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이를테면 자아의 독존(kaivalya, 我事)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세 가지 속성이 온갖 근을 낳은 것으로, 자아를 드러내어 이해[顯了]시키기 위해 온갖 대상을 포착하는 것이다.19)
“그대는 이러한 온갖 근이 무지하다고 논설하였는데, 어떻게 지적인 작자(作者)가 될 수 있는 것인가?”
“이러한 온갖 근은 별도의 자재신이 거기에 와 작용하게 함으로써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오로지 자아가 자성과 화합하여 이와 같은 생각, 즉 ‘그대는 마땅히 전변하고 현현하여 나로 하여금 독존하게 하라’는 생각을 일으켜 지었으니, 바로 이러한 자아의 뜻에 의해 세 가지 속성은 능히 온갖 근을 낳게 되었다. 즉 온갖 근의 각각의 개별적인 작용이 이루어지는 것은 자아의 뜻에 따랐기 때문으로, 자아의 뜻을 떠나 별도의 다른 13근의 작용을 짓게 하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스물네 가지 원리 중의 몇 가지를 작용의 도구, 즉 작구(作具,
karaṇa)라고 할 수 있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작구의 수는 열세 가지로서, 능히 끌어당기고, 作具數十三
집지(執持)하며, 비추는 것을 작용으로 하며, 能作牽執照
작용되는 대상에는 열 종류가 있으니, 其事有十種
끌어당겨지고, 집지되며, 비추어 이해되는 것이다.20) 應引持照了
‘작구(作異)의 수는 열세 가지이다’라고 함은 본 논 곳곳에서 설한 바로서, 작구에는 결정코 열세 가지만이 있을 뿐이니, 다섯 가지 지각기관[知根]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作根]과 각(覺)과 아만과 마음 등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열세 가지는 어떠한 작용을 하는 것인가?
‘능히 끌어당기고, 집지하고, 비추는 것을 작용으로 하며, 작용되는 대상에는 열 종류가 있다’고 함은, 소리 등의 다섯 가지 대상을 듣는 일 따위와 말하는 등의 다섯 가지 일을 말하니, 이러한 열 가지의 일이 바로 작구의 작용이다. 즉 이러한 작용에는 세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끌어당기는 것이고, 둘째는 비추는 것이며, 셋째는 집지(執持)하는 것이다. 이 중에서 세 가지(각ㆍ아만ㆍ마음의 내적 작구)는 대상을 끌어당기는 작용을 갖고 있으며, 다섯 가지 지각기관은 비추는 작용을 갖고 있으며, 다섯 가지 행동기관은 집지하는 작용을 갖고 있다.21) 바로 이러한 세 가지 작용으로 인해 열세 가지 근(根)을 설정한 것이며, 그래서 ‘작용되는 대상은 끌어당겨지고, 집지되며, 비추어져 이해되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몇 가지의 근(根)이 3세의 대상[塵]을 취하며, 몇 가지의 근이 현재의 대상을 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내적인 작구에는 세 가지가 있으며, 內作具有三
열 가지는 외적 작구로, 세 가지 내적 작구의 대상이 되는데,
十外具三塵
외적인 작구는 현재의 대상만을 취하지만, 外具取現塵
내적인 작구는 3세의 대상을 취한다.22) 內取三世塵
‘내적인 작구에는 세 가지가 있다. ‘각(覺)과 아만과 마음 세 가지를 내적인 작구라고 하는데, 외계의 대상을 취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내적인 것, 즉 내(內)라고 이름하였으며, 능히 자아의 뜻을 성취하는 방편이기 때문에 도구, 즉 구(具)라고 이름한 것이다.
‘열 가지는 외적 작구[外具]로, 세 가지 내적 작구의 대상이 된다. ‘열 가지 외적인 작구란 다섯 가지 지각기관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으로, 능히 외계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외적인 작구라고 이름한 것이다.
‘세 가지 내적 작구의 대상이 된다’고 함은, 이러한 각과 아만과 마음은 열 가지 외적 작구를 대상으로 삼는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주인이 하인에게 일을 시키듯이 세 가지의 내적 작구가 열 가지의 외적 작구를 능히 부릴 수 있는 것도 역시 또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작구는 현재의 대상만을 취한다’고 함은, 이러한 열 가지 근은 현재의 대상만을 경계로 삼는다는 말이다.
어떻게 그러한 사실을 아는가?
이근(耳根)은 다만 현재의 소리만을 취하고 과거와 미래 2세(世)의 소리는 듣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근과 마찬가지로 나아가 비근(鼻根)도 역시 그러하다. 설근(舌根:발성기관)은 현재의 단어ㆍ문장ㆍ음소의 말은 설할 수 있어도 미래ㆍ과거의 그것은 능히 설할 수 없다. 그리고 설근과 마찬가지로 다른 네 가지행동기관도 역시 이와 같다.
‘내적인 작구는 3세의 대상을 취한다’고 함은, 각과 아만과 마음 세 가지는 능히 11의 대상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즉 각은 현재의 항아리나 물동이를 취할 수 있으며, 역시 과거의 사실도 취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옛날의 정생왕(頂生王) 등에 대한 지각을 취할 수 있는 것과 같다. 또한 미래의 사실도 취할 수 있으니, 이를테면 ‘최후의 유가 시에 모든 이는 마땅히 파멸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아만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3세의 대상을 헤아려 나의 것[我所]이라고 여기며, 마음도 역시 이와 같이 11의 대상을 분별하니, 미래를 추구하고 과거를 기억한다. 그래서 ‘내적인 작구는 3세의 대상을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몇 가지의 근이 차별의 대상을 취하며, 몇 가지의 근이 무차별의 대상을 취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열세 가지 가운데 지각기관은 十三中知根
차별의 대상과 무차별의 대상을 취하며, 取異無異塵
발성기관은 오로지 음성만을 대상으로 삼으며, 舌唯聲爲塵
나머지 네 기관은 다섯 가지를 모두 대상으로 한다.23) 餘四悉五塵
‘열세 가지 가운데 지각기관은 차별의 대상과 무차별의 대상을 취한다’고 함은, 이러한 열세 가지의 작구 가운데 다섯 가지의 지각기관은 능히 차별이 있는 대상과 차별이 없는 대상을 취할 수 있다는 말이다. 여기서 차별이 있는 것이란, 세 가지의 속성을 갖춘 것을 말하고, 차별이 없는 것이란 오로지 하나의 속성만을 갖춘 것을 말한다. 이를테면 천상(天上)에는 성(聲)ㆍ촉(觸)ㆍ색(色)ㆍ미(味)ㆍ향(香)의 다섯 가지 대상이 있는데, 이러한 대상은 다 같이 즐거움[樂, sattva]을 본질로 하기 때문에 어떠한 차별도 없다고 하는 것과 같다. 즉 이 같은 천상의 다섯 대상에는 근심[憂, rajas)과 어둠[癡, tamas)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세계의 다섯 대상에는 차별이 있는데, 즐거움과 근심과 어둠이서로 상응하여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곧 여러 하늘의 지각기관은 무차별의 대상을 취하며, 인간의 지각기관은 말하자면 즐거움과 괴로움과 어둠 등으로 이루어진 대상인 유차별의 대상을 취한다. 그렇기 때문에 ‘지각기관은 차별의 대상과 무차별의 대상을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발성기관[舌]은 오로지 응성만을 대상으로 삼는다. ‘즉 하늘의 발성기관이나 인간의 발성기관은 오로지 음성만을 대상으로 삼아 능히 단어ㆍ문장ㆍ음소를 설하는 것이다.
‘나머지 네 기관은 다섯 가지를 모두 대상으로 한다.’ 즉 손[手根]의 본질은 다섯 가지 미세원소[五塵:성ㆍ촉ㆍ색ㆍ미ㆍ향]를 갖춘 것으로, 능히 다섯 가지 미세원소로 이루어진 대상을 포착하니, 이를테면 손이 병을 잡는 것과 같다. 그리고 손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여타의 기관도 역시 그러하다.24) 이렇듯 네 가지기관은 다섯 가지의 미세원소로 안립(安立)되어 다섯 가지 모두를 대상으로 취하는 것이다.
나아가 또한 근에는 개별적인 특징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겠다.
각(覺)은 내적인 작구와 더불어 覺與內具共
능히 일체의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能取一切塵
세 가지 작구는 문(門)을 갖는 것이며, 故具三有門
나머지 온갖 기관은 모두 문이다.25) 諸根悉是門
‘각(覺)은 내적인 작구와 더불어 능히 일체의 대상을 취한다.’ 즉 각은 아만ㆍ마음과 항상 상응하기 때문에 ‘각은 내적인 작구와 더불어’라고 말한 것이며, 능히 11 간의 대상과 3세의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능히 일체의 대상을 취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 가지 작구는 문을 갖는 것[有門, dvarin]이다’라고 함은, 이러한 각등의 세 가지 작구는 능히 모든 문의 주인[門主]이라는 뜻으로, 만약 각등의 세 가지 작구가 상응하여 안근에 머물게 되면 이러한 안근은 능히 색을 드러내어 비출 수 있지만, 다른 근은 그렇게 할 수 없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작구가 하나의 기관[根]에 모여 능히 3세 간의 대상과 3세의 대상을 취하기 때문에 이러한 세 가지는 열 가지 작구를 문으로 삼는다고 말한 것이다.
‘나머지 기관은 모두 문(門, dvara)이다.’ 즉 다섯 가지 지각기관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의 개폐(開閉:작용과 중지)는 세 가지 작구에 따르기 때문으로, 만약 세 가지가 안근에 머물게 되면 안근의 문은 바로 열려 앞에 놓인 대상을 취할 수 있지만, 그 밖의 문은 닫겨져 대상을 능히 알지 못한다. 즉 열 가지의 작구는 다른 것(각ㆍ아만ㆍ마음의 세 작구)에 따르는 것이기 때문에 단지 문으로서만 역할할 뿐으로, 참된 작구[實具]가 아닌 것이다. 이렇듯 열 가지의 기관은 세 가지 작구와 상응하여야 능히 일체의 3세간의 대상을 취할 수 있는 것이다.
나아가 또한 근에는 개별적인 특징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리라.
모든 작구는 마치 등불과 같은 것으로, 諸具猶如燈
속성에 따라 서로간에 차이가 있지만, 隨德更互異
그것들은 3세간의 대상을 비추어 照三世間塵
자아를 위해 각(覺)에 환부(還付)한다.26) 爲我還付覺
‘모든 작구는 마치 등불과 같다.’ 즉 다섯 가지 지각기관과 다섯 가지 행동기관과 각과 아만 그리고 마음은 마치 등불이 한 곳에 머물면서 평등하게 여러 사물을 비추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모든 작구는 능히 3세 간의 대상을 비추기 때문에 ‘마치 등불과 같다’고 말한 것이다.
‘속성에 따라 서로간에 차이가 난다’고 함은, 서로 유사하지 않다는 말이다. 즉 이근(耳根)은 소리를 취하고 색을 취하지 않으며, 안근(眼根)은 색을 취하고 소리를 취하지 않는다. 나아가 비근(鼻根)은 단지 향만을 취할 뿐 맛을 취하지 않는다. 이렇듯 다섯 가지 지각기관의 근은 결정적으로 대상을 달리하기 때문에 ‘서로간에 차이가 난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행동기관도 역시 이와 같아서 발성기관[舌根]은 다만 말을 할 뿐 능히 다른 일을 조작할 수 없다. 나아가 각은 단지 결지(決知)의 작용만을 조작하고, 아만은 오로지 집착의 작용만을 조작할 뿐이며, 마음은 오로지 분별의 작용만을 조작할 뿐이다. 그래서 ‘서로간에 차이가 난다’고 말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차이는 어째서 그러한가?
세 가지 속성에 따라 생겨난 아만이 동일하지 않기 때문으로(제25송), 그래서 아만이 5유와 온갖 기관(11근)을 낳았지만 그것들은 모두 동일하지 않은 것이다.
‘그것들은 3세 간의 대상을 비추어 자아를 위해 각에 환부한다 함은, 이러한 열두 가지의 근은 세간의 대상을 비추어 그 모두를 각에게로 돌려 제출[還付]한다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국토의 모든 관리나 백성은 나라의 재물을 취하여 모두 국왕에게로 돌리듯이 모든 대상은 열두 가지의 근에 의해 장차 각에게로 돌려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각은 자아로 하여금 그것들을 보게 하니, 그래서 ’자아를 위해 각에 환부한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째서 온갖 근은 스스로 대상을 비추어 자아로 하여금 보게 할 수 없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모든 것에 대한 자아의 향수(bhoga,用事)는 我一切用事
각에 의해 능히 성취되기 때문이며, 以覺能成就
또한 그것(각)은 그 후 자성과 자아의 復令後時見
미세한 차이를 보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27) 自性我細異
‘모든 것에 대한 자아의 향수는 각에 의해 능히 성취되기 때문이다.’ 모든 것에 대한 자아의 향수는 일체의 곳에서 동일하지 않으니, 어떤 경우에는 인간의 세계[人道]에서, 혹 어떤 경우에는 하늘의 세계[天道]에서, 혹 어떤 경우에는 축생의 세계[獸進] 중에서 열 가지 대상을 향수하고, 나아가 여덟 가지 자재함(제23송 참조)을 향수한다. 즉 지각기관과 행동기관의 열 가지 외적인 작구는 이러한 대상을 비추어 마음에 부촉하고, 마음은 아만에 부촉하며, 아만은 각에 부촉하니, 각은 이를 수습(收拾)하여 자아[人]에 부촉함으로써 자아로 하여금 그것을 향수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순서에 따라 각은 능히 자아로 하여금 뜻대로 향수하게 하여 자재의 즐거움을 얻게 하는데, 이 때는 아직 지혜[眞實智]가 생겨나지 않았을 때이다.
‘또한 그것(각)은 그 후 자성과 자아의 미세한 차이를 보게 하는 것이다’라고 함에 있어, 그 후란 지혜가 생겨날 때를 말하는데, 이 때는 자아와 자성 사이에 차별이 있다. 그리고 이러한 차별은 아직 성스러운 행을 닦지 않은 사람에게는 능히 보여지지 않기 때문에 ‘미세하다’고 말한 것으로, 열세 가지 근 가운데 오로지 각만이 이러한 차별의 문을 자아로 하여금 보게 하는 것이다.
이 때 본다고 함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를테면 자아는 자성과 다르고, 세 가지 속성과 다르고, 각과 다르고, 아만과 다르고, 11근과 다르고, 5유와 다르고, 5대와 다르고, 신체와 다르다는 것을 보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등등의 다름을 각이 자아로 하여금 알게 하기 때문에 자아는 해탈을 획득할 수 있는 것이니, 앞(제2송 장행)에서 말한 바와 같다.
만약 스물다섯 가지 진리를 안다면,
어떠한 처소에 머물든, 어떠한 도를 닦든,
변발하든, 상투를 틀든, 삭발을 하든
평등히 해탈을 얻게 되리라.
그렇기 때문에 오로지 각 하나만이 바로 자아의 참된 작구인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미 앞의 게송(제34송)에서 온갖 근은 능히 차별이 있는 대상과 어떠한 차별도 없는 대상을 취한다고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어떠한 것이 차별의 대상이고, 무차별의 대상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5유는 무차별의 대상으로. 五唯無差別
이로부터 5대가 생겨나는데, 從此生五大
5대로 이루어진 대상에는 차별이 있으니, 大塵有差別
고요함과 두려움과 어리석음이 바로 그것이다.28) 謂寂靜畏癡
‘5유는 무차별의 대상이다.’
그대는 무엇을 차별이라 하고, 무차별이라고 한 것인가?
지금 마땅히 대답하리라. 아만으로부터 5유가 생겨나는데, 이는 미세적정(寂靜)하여 기쁨[喜樂, sattva]을 특징으로 삼는 것이다.29) 이것은 바로 온갖 하늘의 대상으로서 어떠한 차별도 없으니, 하늘은 근심[憂]과 어리석음[癡]이 없기 때문이다.
‘이로부터 5대가 생겨나는데, 5대로 이루어진 대상[大塵]에는 차별이 있다.’ 즉 성유(聲唯)로부터 공대(空大)가 낳아지며, 나아가 향유(香唯)로부터 지대(地大)가 낳아지는데, 이러한 5대에는 차별이 있다.
이러한 차별은 어떠한 특징을 갖는 것인가?
첫째는 고요함[寂靜]이며, 둘째는 두려움[令怖]이며, 셋째는 어리석음[闇癡]이니, 이러한 5대는 바로 인간의 대상이다.
그렇다면 공대(空大)의 세 가지 특징은 어떠한가?
예컨대 큰 부자가 안의 밀실로 들어가 다섯 욕락을 즐기고 나서 혹 높은 누각에 올라가 멀리 공대를 바라볼 경우, 확 트인 허공으로 인해 즐거움을 향수할 것이기 때문에 공대는 고요함이다. 혹은 높은 누각에 있으면서 허공 중의 차가운 기운과 접촉할 경우, 공대는 바로 괴로움을 낳기도 한다. 혹은 다시 어떤 사람이 광야를 헤매면서 오로지 허공만을 보고 사람이 사는 마을을 발견하지 못해 쉴 만한 곳을 구하지 못하였을 경우, 공대는 이리저리 헤매이게 하는 어리석음을 낳는다. 그리고 여타의 다른 대도 역시 또한 이와 같다.
이처럼 온갖 하늘은 5유를 대상으로 삼아 한결같이 고요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떠한 차별도 없는 대상이지만, 인간은 5대를 취하여 대상으로 삼으며, 대는 세 가지 속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차별의 대상인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 같은 차별에 대해 이미 개별적으로 논설하였다. 그렇다면 대상의 차별은 단지 이것뿐인가, 아니면 또 다른 차별이 있는 것인가?”
또 다른 차별이 있으니, 게송으로 말하는 바와 같다.
미세한 것과 부모에 의해 생겨난 것과 微細父母生
대(大)의 변이 등 세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大異三差別
세 가지 중에서 미세한 것은 영원하지만, 三中細常住
그 밖의 것은 각기 사라짐이 있다.30) 餘別有退生
‘미세한 것과 부모에 의해 생겨난 것과 대(大)의 변이 등 세 가지의 차별이 있다. ‘즉 일체의 삼세간의 태초에는 단지 미세신(微細身, sūkṣma śarīra)을 낳는 5유(唯)만이 존재하였다. 5유로부터 낳아진 이러한 미세신이 자궁 속에 들어가면 적(赤:어머니의 정혈)과 백(白:아버지의 정액)이 화합하여 세신(細身)을 증익한다. 그리고 이러한 세신의 어머니가 적고 마신 여섯 가지의 맛이 그것에 침투 자양되어 거친 몸[麤身, bahiḥ śarīra]으로 증익한다. 이는 바로 모자(母子)가 먹고 마시는 두 갈래의 길이 상응하기 때문에 거친 몸의 자조와 증익[資益]을 획득하게 된 것으로, 마치 나무의 뿌리에 수분을 받아들이는 길이 있기 때문에 수분이 나무에 침투하여 그것을 성장시키는 것과 같다. 이와 마찬가지로 음식의 맛이 그 행로를 따라 거친 몸에 침투하여 그것을 증익시키는 것도 역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세신에 형태와 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거친 몸도 역시 그러한데, 세신을 일컬어 내적인 몸[內]이라 하고, 거친 몸을 일컬어 외적인 몸[外]이라고 한다. 즉 이러한 세신 중에는 이미 손ㆍ발ㆍ머리ㆍ얼굴ㆍ배의 형태와 양을 지닌 사람의 형상이 갖추어져 있으니, 네 가지 베다 중에서 어떤 선인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거친 몸에는 여섯 가지 의지처가 있으니, 피와 살과 근육의 세 가지는 어머니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정액[白]과 털과 뼈의 세 가지는 아버지로부터 생겨난 것이다.”
이러한 여섯 가지 의지처를 지닌 몸은 외적인 거친 몸이 됨으로써 내적인 세신을 증익하며, 이러한 내적인 세신은 거친 몸에 의해 자조되고 증익된다. 그리고 장차 자궁을 나오려고 할 때나 이미 나와서는 외적인 5대로서 그 주처(住處)로 삼는다. 비유하자면 왕자가 다른 이를 위한 집으로써 여러 형태의 전당을 세우고, 이곳에서 마땅히 머물게 하고, 이곳에서 마땅히 음식을 먹게 하며, 이곳에서 마땅히 잠을 자도록 하는 것과 같다. 자성도 역시 이와 같아서 세신과 거친 몸을 위한 의지처를 지으려고 능히 5대를 남으니, 첫 번째로 공대를 낳아 걸림이 없는 의지처[無礙處]로 삼으며,31) 두 번째로 지대를 낳아 믿고 발디딜 만한 의지처[時著處]로 삼으며, 세 번째로 수대를 낳아 깨끗한 의지처[淸淨處]로 삼으며, 네 번째로 화대를 낳아 음식을 녹이는 의지처[鎖食處]로 삼으며, 다섯번째로 풍대를 낳아 능히 움직여 흩어지게[動散] 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대상에는 세 가지의 차별이 있으니, 첫째는 미세한 것이며, 둘째는 부모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셋째는 함께 화합한 것[共和合]이다.32) 이는 이를테면 고요함[寂靜, sattva)과 두려워할 만한 것[可畏, rajas)과 어리석음[闇癡, tamas]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러한 세 가지를 대상의 또 다른차별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세 가지 가운데 몇 가지가 영원한 것이고, 몇 가지가 무상한 것인가?
“‘세 가지 중에서 미세한 것은 영원하지만, 그 밖의 것은 각기 사라짐이 있다.’ 이 세 가지 중에서 5유에 의해 나타난 미세한 것의 차별은 능히 최초의 신체를 낳기 때문에 이것은 바로 영원한 것이다. 즉 거친 몸이 퇴몰(退沒)할 때, 세신이 만약 비법(非法)과 상응하면 네 가지의 생을 받게 되니, 첫째가 네 발달린 것[四足]이며, 둘째가 날아다니는 것[有翅]이며, 셋째가 배로 기어다니는 것[胸行]이며, 넷째가 몸이 옆으로 되어 있는 것[傍形]이다.33) 그러나 만약 법과 상응하면 역시 네 가지의 생을 받게 되니, 첫째가 범(梵, brahma)이며, 둘째가 하늘[天]이며, 셋째가 세간의 주인[世主, prājāptya)이며, 넷째가 인간[人道)이다.34) 이처럼 세신은 윤회의 주체로서 결정코 영원한 것이다. 혹은 만약 지염(智厭)35)이 아직 생겨나지 않았을 경우 여덟 처소를 윤전하지만, 만약 지염이 일어나 바로 이 몸(거친 몸)을 떠나는 경우 해탈하기 때문에 미세한 것의 차별은 영원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그 밖의 거친 몸의 차별은 물러남이 있어 영원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즉 죽음에 임하여 세신은 거친 몸을 버리니, 이 같은 거친 몸은 부모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어떤 경우 새에게 쪼아 먹히고, 혹은 썩어 문드러지며, 혹은 불에 태워지기도 한다. 이처럼 어리석은 자의 세신은 생사를 윤전(輪轉)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그대는 부모에 의해 생겨난 몸은 퇴몰한다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그 후 어떠한 몸이 능히 생사를 윤전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이전에 생겨난 몸은 집착함이 없다. 前生身無着
즉 대(大)와 아만과 5유가 윤전하고, 人慢及五唯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일은 없지만 輪轉無執塵
유(有)가 미세한 상[細相]을 훈습한다.36) 有薰習細相
‘세간이 생겨나기 이전에 생겨난 몸은 집착함이 없다.’ 그 옛날 자성이 회전하여 세간을 낳을 때, 세신(細身)이 최초로 생겨났다. 즉 자성으로부터 각(覺)이 낳아지고, 각으로부터 아만이 낳아지며, 아만으로부터 5유가 낳아졌으니, 이러한 일곱 가지를 세신이라고 이름한다.37)
그렇다면 이러한 세신의 특징은 어떠한가?
마치 범천의 형상이 온갖 대상을 수용하는 것과 같으니, 훗날 이러한 세신이 바로 해탈을 획득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착함이 없다’고 함은 성인이 전하는바와 같다. 즉 이러한 세신으로서 만약 짐승[獸]이나 인간, 하늘의 세계에 있을지라도 산이나 바위, 벽 등이 장애할 수 없으니, 미세하기 때문이다. 또한 변이하지 않으며, 나아가 지혜가 아직 일어나지 않았으면 항상 거친 몸과 서로 분리되지 않으니, 이것을 일컬어 영원한 것[常]이라고 한다.
‘대(大)와 아만과 5유’란, 이러한 세신은 몇 가지 원리[物]에 의해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면, 일곱 가지 미세한 원리에서부터 열여섯 가지 거친 원리(11근과 5대)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말이다.
이러한 세신에 어떠한 작용이 있는 것인가?
‘윤전하고,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일은 없다. ‘즉 이러한 세신은 11근과 상응하여, 혹은 네 가지 생(生) 가운데 있으면서 3세간을 윤전하는 것이다. ‘대상에 대해 집착하는 일은 없다’고 함은, 만약 11근과 상응하지 않거나, 만약 부모에 의해 생겨난 거친 몸을 떠나게 되면 능히 대상에 대해 집착할 만한 힘이 없다는 말이다.
‘유(有)가 미세한 상을 훈습한다’고 함은, 이러한 세신은 세 종류의 유에 의해 영향 받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세 종류의 유에 대해서는 뒤(제43송)에서 마땅히 논설하리라. 즉 세 종류의 유란, 첫째 본유적인 선에 의해 이루어진 유[善成有]이며, 둘째 자연적으로 획득된 유[性得有]이며, 셋째 변이에 의해 생겨난 유[變異有]이니, 이러한 세 종류의 유가 세신에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미세한 상’이라고 함은, 성인이 아니면 보이지 않기 때문으로, 이러한 세신이 능히 생사를 윤전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열세 가지 근이 생사를 윤전하기에 충분한데, 어찌 미세신을 가설하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바탕[壁] 없는 그림이 있을 수 없으며, 如盡不離壁
나무기둥 등을 떠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듯이, 離机等無影
만약 5유의 몸을 배제할 경우, 若離五唯身
열세 가지 근은 의지하고 머물 곳이 없는 것이다.38) 十三無依住
‘이를테면 바탕 없는 그림이 있을 수 없으며, 나무기둥 등을 떠나 그림자가 존재하지 않듯이’라고 함은, 이 세간에서 근거하는 것[能依]과 근거가 되는 것[所依]의 두 존재가 상응하여 서로 분리될 수 없음은, 예컨대 그림의 색은 바탕에 의지하고 바탕을 떠나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로 미루어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신을 떠나 열세 가지 근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나무기둥을 떠난 그림자는 그 근거가 없어 존재할 수 없는 것과 같으니 ,불을 떠나서는 빛도 없으며, 물을 떠나서는 치가움도 없으며, 바람을 떠나서는 촉감도 없으며, 허공을 떠나서는 위의처(威儀處)도 없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신을 떠날 경우, 이러한 거친 상[麤相:13작구]은 의지하고 머무를 곳이 없어 존재할 수 없기 때문에 ‘만약 5유의 몸을 배제할 경우, 열세 가지의 근은 의지하고 머물 곳이 없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세신과 열세 가지 근이 생사를 윤전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자아의 목적을 원인으로 삼고, 我意用爲因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하였기 때문으로, 出因依因故
자성의 보편적인 능력에 따라 隨自性遍能
마치 배우처럼 여러 가지 다른 상으로 윤전하는 것이다.39)
如依轉異相
‘자아의 목적[意用, artha]을 원인으로 삼는다’고 함은, 자아의 목적은 마땅히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자성은 변이하는 것이다. 자아의 목적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로는 소리 등의 대상을 수용하는 것이 첫 번째 목적이며, 둘째로는 세 가지 속성과 자아[人]의 중간을 관찰하는 것이 최후의 목적이다. 즉 범천의 세계 등에서 자아[人我]와 소리 등의 대상을 마땅히 상응하게 하고, 또한 후에 마땅히 해탈하도록 하기 위해 자성은 변이하여 세신을 조작[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세신은 어떠한 이유에서 윤전하는가?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依因:결과)에 의하였기 때문이다. ‘여기서 원인이란 법 등의 여덟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40) 이에 대해서는 뒤(제44송)에서 마땅히 설명할 것인데, 게송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선법에 의해 위로 향하고,
비법에 의해 아래로 향하며,
지혜와 염리[智厭]에 의해 해탈하고,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 계박된다.
이러한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은 다시 무엇에 의해 성립하는가?
‘자성의 보편적인 능력[遍能]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국왕은 자신의 왕국 안에서 무엇이든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다. 자성도 이와 마찬가지로 하늘과 인간과 축생 등의 생을 조작할 수 있기 때문에 ‘마치 배우처럼 여러 가지 다른 상으로 윤전한다’고 말한 것이다. 비유하자면 배우가 어떤 때에는 하늘의 형상으로 나타나고, 또 어떤 때에는 왕의 형상으로 나타나며, 또 어떤 때에는 용이나 귀신 등의 형상으로 나타나는 등 여러 가지 동일하지 않은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처럼 세신도 역시 그러하다. 즉 열세 가지 근과 상응하여 혹 어떤 때에는 코끼리나 말 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윤전함으로써 코끼리나 말 등의 몸이 되며, 혹 어떤 때에는 사람이나 하늘 등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 윤전함으로써 사람이나 하늘 등의 몸이 되기 때문에 ‘세신은 자성의 보편적인 능력에 따라 마치 배우처럼 여러 가지 다른 상으로 윤전한다’고 말한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세신이 세 종류의 유(有, bhāva)에 의해 영향[薰]을 받음으로써 열세 가지의 근(根)이 생사를 윤전한다고 앞(제40송)에서 이미 논설하였다. 무엇을 세 종류의 유라고 하는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본유적인 선에 의한 것과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因善自惟成
변이에 의해 획득된 것의 세 종류의 유(布)가 바로 그것으로,
變異得三有
내적인 작구에 의지하는 것임을 이미 관찰하였다. 已見依內具
그리고 가라(迦羅) 등은 세신에 의존하는 것이다.41) 依細迦羅等
‘본유적인 선에 의해 의한 것과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변이에 의해 획득된 것의 세 종류의 유(有)가 있다’고 함은, 바로 여러 사물들의 명칭이다. 즉 모든 사물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선에 의해 성취된 것이며, 둘째는 자연적으로 성취된 것이며, 셋째는 변이에 의해 획득된 것이다.
여기서 선에 의해 성취된 것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가비라(迦毘羅)선인과 같은 이로서 그는 태어나면서부터 네 가지 공덕을 갖추고 있었으니, 첫째가 법이며, 둘째가 지혜이며, 셋째가 이욕이며, 넷째가 자재이다. 즉 이러한 네 종류의 공덕은 선에 의해 성취될 수 있으며, 따라서 이러한 네 가지의 공덕은 선에 의해 성취된 존재[有]인 것이다.
무엇을 자연적으로 성취된 것이라고 하는가?
이를테면 베다의 전승에서 설하는 바와 같다. 즉 옛날 브라만의 왕[梵王]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의 이름은 사나가(娑那歌, Sanaka)였으며, 둘째 아들의 이름은 사난다나(娑難陀那, Sanandana)였으며, 셋째 아들의 이름은 사나다나(娑那多那, Sanātana)였으며, 넷째 아들의 이름은 사난구마라(娑難鳩摩羅, Sanatkumāra)였다. 이 네 아들은 이미 여러 가지 일(전생의 선업)을 구족하여 그 결과로서 몸을 지니게 되었는데, 열여섯 살 때 이른바 법ㆍ지혜ㆍ이욕ㆍ자재의 네 가지 존재[有]가 자연적으로 성취되었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보물창고[物藏]를 찾아내는 것처럼 자연적으로 이 네 가지 보물(4공덕)을 획득한 것으로, 어떤 구체적인 원인에 의해 획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한 것이다.
‘변이에 의해 획득된 유라는 것에서, 변이란 스승의 몸을 말한다. 즉 스승의 몸으로 말미암아 제자는 공경하고, 친근히 하며, 청문(聽聞)하여 지혜를 획득한다. 나아가 지혜에 의해 이욕을 획득하며, 이욕에 의해 선법을 획득하며, 선법에 의해 여덟 가지 자재를 획득한다. 이렇듯 제자의 네 가지 공덕은 스승의 몸으로부터 획득되었기 때문에 변이에 의해 획득된 것이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네 가지 공덕과 그 반대인 악덕 등 무릇 여덟 가지가 대(大) 등의 내적인 작구에 훈습됨으로써 능히 생사를 윤전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여덟 가지의 법은 어떠한 처소에 의지하며 머무는 것인가?”
“‘내적인 작구에 의지하는 것임을 이미 관찰하였다. 그리고 가라 등은 세신에 의존하는 것이다.’ 내적인 작구란 대 등을 말하는데, 이러한 대에 여덟 가지의 법이 존재한다. 즉 대에 의지하여 네 가지 공덕이 머문다고 하는 것은 이미 앞(제23송)에서 논설한 바와 같다.”
결지(決智)를 일컬어 대라고 하는데,
법과 지혜와 이욕과 자재,
이것은 살타의 특징이며,
이와 반대되는 것은 바로 다마의 특징이다.
이러한 여덟 가지 법은 내적인 작구에 의지하여 성취될 수 있는 것으로, 이 여덟 가지의 법은 천안(天眼)을 획득한 성인에 의해 관찰되는 바이기 때문에 ‘이미 관찰하였다’고 설한 것이다.
그리고 ‘가라 등은 세신에 의지하는 것이다’라고 함은, 여덟 가지의 존재는 세신에 의지한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으로, 첫째는 가라라(迦羅囉, kalala)이며, 둘째는 아부다(阿浮陀, arbuda)이며, 셋째는 폐시(閉尸, peśi)이며, 넷째는 가나(伽那, ghana)이며, 다섯째는 어린 아이[嬰孩]이며, 여섯째는 동자(童子)이며, 일곱째는 소년과 장년이며, 여덟째는 늙은이이다.42) 그리고 이러한 여덟 가지 존재는 네 가지 먹을 것의 맛[食味]에 의해 성장할 수 있다. 첫째 어머니의 여섯 가지 맛에 의해 앞의 네 가지 몸이 성장한다. 둘째 젖의 맛에 의해 어린 아이의 몸이 성장한다. 셋째 젖이나 씹어먹는 것에 의해 동자의 몸이 성장한다. 넷째 음식의 맛에 의해 뒤의 두 몸이 성장한다. 곧 이 같은 여덟 가지 종류의 몸은 세신에 의지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이상의 열여섯 가지 존재(대의 여덟 가지 공덕과 여덟 가지 몸)는 내적인 작구와 미세신에 훈습되어 생사를 윤전하는 것이다.
외도가 말하였다.
“앞(제42송)에서 이미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에 적하였기 때문으로, 자성의 보편적인 능력에 따라 마치 배우처럼 여러 가지 다른 상으로 윤전한다’고 논설하였다. 무엇을 원인에 의한 것이라고 하고, 무엇을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한 것이라고 일컫는가?
답하여 말하였다.
선법에 의해 위로 향하고, 因善法向上
비법에 의해 아래로 향하며, 因非法向下
지혜와 염리(厭誰)에 의해 해탈하고, 因智厭解脫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 계박된다.43) 飜此則繫縛
세간에서 만약 사람들이 능히 야마(夜摩)와 니야마(尼夜摩) 등의 법을 지으면,44) 이러한 법에 의해 생을 받을 즈음에 미세신이 위로 향하여 여덟 처소에서 태어나게 되니, 첫째가 범(梵, Brāhma)이며, 둘째가 세주(世主, Prājāptya)이며, 셋째가 하늘[天, aindra]이며, 넷째가 건달바(乾闥婆, gāndharva)이며, 다섯째가 야차(夜叉, yākṣa)이며, 여섯째가 나찰(羅刹, rākṣasa)이며, 일곱째가 염마라(閻摩羅, yamarāja)이며, 여덟째가 귀신(鬼神, paiśāca)이다. 즉 이러한 여덟 곳에는 법에 의해 태어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야마와 니야마의 열 가지 법과 반대되는 비법을 지으면, 생을 받을 즈음에 아래로 향하여 다섯 처소에 태어나게 되니, 첫째가 네 발 달린 것[四足:축생]이며, 둘째가 날아다니는 것[飛行]이며, 셋째가 배로 기어다니는 것[胞行]이며, 넷째가 몸이 옆으로 되어 있는 것[傍形]이며, 다섯째가 가지 못하는 것[不行]이다. 즉 이러한 다섯 처소는 비법을 행한 자가 태어나는 곳이다.
‘지혜와 염리(厭離)에 의해 해탈한다. ‘즉 세신에 의해 지혜를 획득하고, 지혜에 의해 염리를 획득하며, 염리에 의해 세신을 버릴 때, 참된 자아[眞我]가 독존하기 때문에 해탈한다고 일컬은 것이다.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 계박된다.’ 지혜에 반대되는 것을 무지(無智)라고 하니, 이를테면 사람들이 ‘나는 참으로 영리하다’ ‘나는 참으로 애호할만하다’라고 주장하여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나는 참으로 애호할 만하다’라고 하는 것은 아만에 의해 자아를 헤아린 것으로, 이를 일컬어 무지라고 한다. 이러한 무지는 자신을 계박하며, 인간세계나 하늘, 혹은 축생 중에 머물며 존재하게 한다. 그리고 계박에는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자성에 의한 계박[自性縛]이고, 둘째가 변이에 의한 계박[變異縛]이며, 셋째는 보시에 의한 계박[布施縛]인데, 이 세 가지에 대해서는 뒤(제45송과 제62송)에서 마땅히 다시 논설하리라.
이 같은 연유로 말미암아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한다’고 말한 것이다. 곧 선법을 일컬어 원인이라 하고, 위로 향하는 것을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비법을 일컬어 원인이라 하고, 아래로 향하는 것을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지혜와 염리를 일컬어 원인이라 하고, 해탈하는 것을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지혜와 이염이 없는 것을 원인이라 하고, 계박되는 것을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 네 가지 원인과 네 가지 원인에 근거한 것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나아가 다시 네 가지 원인과 네 가지 원인에 근거한 것이 있으니, 지금 마땅히 논설하리라.
이욕(離欲)으로 인해 본성에 귀몰하고 離欲故沒性
우욕(憂欲)으로 인해 생사 윤회하며, 憂欲故生死
자재로 말미암아 장애가 없고, 由自在無礙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 장애가 있다.45) 翻此故有礙
‘이욕으로 인해 본성에 귀몰한다.’ 어떤 한 바라문이 집을 떠나 도를 배움에 능히 11근을 제압하고, 그것의 열한 가지 대상[塵]을 멀리 떠나며, 야마와 니야마 등의 열 가지 법을 지켜 수지하면 염리(厭離)를 획득한다. 그러나 싫어함[厭]이 있어 이욕, 즉 욕망을 떠났더라도 25제에 대한 참다운 지혜가 없기 때문에 해탈하지는 못한다. 이러한 사람이 죽을 때에는 다만 자성과 각과 아만과 5유의 여덟 가지 본성[性]으로 귀몰할 뿐이다. 그리고 여덟 가지 본성 중에 존재하면서 아직 해탈을 획득하지 못하였음에도 해탈하였다고 분별함으로써 후에 윤전할 때면 3세간에서 다시 거친 몸을 받게 된다. 그래서 ‘이욕으로 인해 본성에 귀몰한다’고 말한 것이니, 이를 자성에 의한 속박[自性縛]이라고 한다.
’우욕(憂欲:운동의 라자스)으로 인해 생사 윤회한다’고 함에 있어, 우욕이란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나는 지금 큰 보시를 행하였고, 하늘에 큰 제사를 지냈으며, 불사의 수마(須摩)를 마쳤기 때문에 다음 세간에서 나는 마땅히 즐거움을 누리게 되리라’고 분별하는 것과 같은 것이니, 이러한 우욕에 의해 끊임없이 태어나고 죽는 생을 누리게 된다. 이를테면 브라만의 세계[梵處] 나아가 내지는 축생[獸]의 생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러한 생으로서 이를 보시에 의한 속박[布施縛]이라고 한다.
‘자재로 말미암아 장애가 없다’고 함에 있어, 자재란 기쁨[喜樂:살타]의 한 종류로서, 여덟 가지 형태가 있으니, 미세하게 되고 빛같이 가벼워지는 것 등이 바로 그것이다.46) 이러한 자재로 말미암아 범왕 등의 처소에는 여덟 가지의 무애(無礙)가 존재하는 것이다. 즉 이러한 여덟 가지의 자재는 각(覺)의 기쁨과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으로, 그래서 이를 변이에 의한 속박[變異縛]이라고 한다.
‘이와 반대되는 것에 의해 장애가 있다.’ 자재와 반대되는 것은 바로 자재하지 않은 것으로, 자재하지 않음으로 말미암아 일체의 모든 처소에는 장애가 있는 것이다. 이러한 장애도 역시 변이에 의한 계박이니, 이는 바로 어둠의 법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본 게송에서도 네 증류의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결과)을 설하고 있는데, 이욕을 일컬어 원인이라 하였고, 본성에 귀몰하는 것을 일컬어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우욕을 일컬어 원인이라 하였고, 생사 윤회하는 것을 일컬어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또한 자재를 일컬어 원인이라 하였고, 장애가 없는 것을 일컬어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으며, 자재하지 않음을 일컬어 원인이라 하였고, 장애가 있는 것을 일컬어 원인에 근거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상과 같은 것이 바로 여덟 가지 원인과 여덟 가지 원인에 근거한 것이다.
이상 3세간을 낳는 열여섯 가지의 법에 대해 이미 다 논설하였다.
외도가 말하였다.
“이러한 열여섯 가지의 원인과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한 생(生)은 무엇을 그 본질로 삼는 것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생(生)은 원인인 각(覺)을 본질로 하는 것으로, 生因覺爲體
의혹[疑]과 무능과 기쁨[喜]과 성취[成]이니, 疑無能喜成
속성을 사량(思量)함에 불평등하면 思量德不平
각은 쉰 가지의 구분을 낳게 된다.47) 覺生五十分
‘생(生)은 원인인 각(覺)을 본질로 한다’고 함에 있어서, 생(生)이란 열여섯 가지, 혹은 여덟 종류의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해 생겨난 것을 말한다. 그리고 만약 열여섯 가지에 의해 생한 것일 경우, 여덟 가지의 원인과 여덟 가지의 원인에 근거한 것에 의해 생겨난 것으로, 그것들은 다 같이 각을 본질로 삼는다. 그러나 만약 여덟 가지에 의해 생한 것일 경우, 여덟 종류의 원인에 근거한 것을 일컬어 생(生)이라 한 것으로, 여덟 가지의 원인을 그 본질로 삼는다. 그렇기 때문에 열여섯 가지에 의해 ‘생(生)은 원인인 각을 본질로 삼는다’고 말한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이미 앞의 게송(제23송)에서 말한 바와 같다.
결지(決潛)를 일컬어 대(大)라고 하는데,
법과 지혜와 이욕과 자재,
이것은 살타의 특징이며,
이와 반대되는 것은 다마(多摩)의 특징이다.
‘의혹과 무능과 기쁨과 성취’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열여섯 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 분류한 것으로, 첫째가 의혹이고, 둘째가 무능이며, 셋째가 환희이고, 넷째가 성취이다.
이를테면 어떤 한 바라문이 그의 네 제자와 함께 큰 나라로부터 그들의 본거지로 돌아오는 도중에 해가 아직 뜨지 않았을 때, 그의 한 제자가 스승에게 말하기를 “대사(大師)이시여, 저는 길을 가는 도중에 어떤 물건이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것이 나무둥치인지, 도적[凶刃]인지 알지 못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 제자에게는 나무둥치에 대한 의혹이 생겨났던 것이다.
그러자 스승은 다른 제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가서 그것이 사람인지 나무둥치인지를 살펴보아라”라고 하였다. 그 제자는 스승의 말에 따라 그렇게 하였으나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 두려워하여 감히 그것에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채 스승에게 말하기를, “대사이시여, 저는 그것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 두 번째 제자에게는 무능함이 있었던 것이다.
다음으로 스승은 세 번째 제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참으로 보는 것을 즐겨하니, 그것은 결정코 무슨 물건인가?”라고 하였다. 그 제자가 보고 나서 스승에게 말하기를, “대사이시여, 그것을 보는 것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렇듯 해가 이미 떠올랐으니, 우리 대종(大宗)의 도반들은 서로를 쫓아가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 세 번째의 제자는 비록 그것이 사람인지 나무둥치인지를 아직 분별하지는 못하였지만, 이미 마음에 기쁨이 생겨났던 것이다.
다음으로 스승은 네 번째 제자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마땅히 가서 보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 제자는 안근이 청정하였기 때문에 등나무가 서로 얽혀 꼬여 있고, 그 위에 새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거기까지 가서 그것을 만져보고 돌아와 스승에게 고하기를, “대사이시여, 그 물건은 바로 나무둥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즉 이 네 번째 제자는 바로 분별의 지혜를 능히 성취하였던 것이다.
이 같은 이유에서 열여섯 가지에 의해 생겨난 것을 네 가지로 나누어 분류하게 된 것이다.
‘속성을 사량함에 불평등하다’고 함에 있어, 속성이란 희락(喜樂)과 우고(憂苦)와 암치(闇癡) 세 가지를 말한다. 즉 이러한 세 가지는 서로 모순되는 것이니, 만약 희락이 증장하면 능히 우고와 암치를 제압한다. 비유하자면 태양의 빛이 능히 별빛이나 불빛 등을 제압하는 것과 같다. 우고와 암치가 증장할 경우에도 역시 그와 같다. 따라서 만약 세 가지 속성을 사량함에 있어 그것이 평형되지 않으면, 각은 쉰 가지의 구분을 낳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쉰 가지의 구분이란 무엇을 말하는가?
지금 마땅히 논설하리라.
의혹에는 다섯 가지의 구분이 있고, 疑倒有五分
무능에는 스물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으니, 無能二十八
11근을 갖추었거나 갖추지 않았기 때문이며, 由具不具故
기쁨에는 아홉 가지, 성취에는 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48)
喜九成八分
‘의혹(viparyaya)에는 다섯 가지의 구분이 있다’고 함에 있어, 의혹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논설하였으나, 여기서는 마땅히 다섯 가지의 구분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의혹의 첫 번째는 암(闇, tamas)이며, 두 번째는 치(癡, moha)이며, 세 번째는 대치(大癡, mahamoha)이며, 네 번째는 중암(重闇, tāmiśra)이며, 다섯 번째는 맹암(盲闇, andhatāmiśra)이다.49)
다음으로 무능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나, 이보다 먼저 이러한 다섯 가지 의혹의 구분에 대해 보다 분명히 밝혀야 할 것이다.
암(闇)에는 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고, 說闇有八分
치(癡)에도 여덟 가지, 대치(大癡)에는 열 가지, 癡八大癡十
중암에는 열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으며, 重闇有十八
맹암도 역시 그러하다고 설한다.50) 盲闇亦如是
‘암(闇)에는 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 ‘만약 사람이 지혜와 이욕에 근거하지 않았을 경우, 죽어서 자성과 각과 아만과 5유의 여덟 가지 원리로 귀몰하게 되는데, 이러한 사람은 아직 해탈을 획득하지 않았으면서도 이미 획득하였다고 생각한다. 왜냐 하면 이러한 여덟 가지의 계박을 보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그래서 여덟 종류의 원리를 보지 못하였다고 설하고, 그것을 일컬어 암이라고 한 것이다. 암은 곧 무명(無明)의 다른 이름이다.
‘치(癡)에도 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 ‘자재에는 여덟 종류가 있다고 앞(제23송 장행)에서 논설하였는데, 온갖 하늘 따위는 이에 대한 집착의 속박을 낳아 해탈을 획득하지 못한다. 곧 자제에 집착해 생사를 윤전하게 되는 것으로, 그래서 치에는 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고 말한 것이다. 그리고 앞(암)의 여덟 가지 구분을 자성에 의한 속박[自性縛]이라 이름하고, 뒤의 여덟 가지 구분을 변이에 의한 속박[變異縛]이라고 이름한다.
‘대치에는 열 가지의 구분이 있다.’ 즉 희락을 특징으로 하는 5유는 바로 온갖 하늘의 대상이다. 그리고 이러한 다섯 가지 대상은 5대와 상응하여 세 가지 속성을 특징으로 하는데, 이러한 열 가지 대상에 대해 범(梵)이나 인간ㆍ축생 등은 집착의 속박을 낳으며, 이것을 떠나 별도의 뛰어난 대상이 없다고 말한다. 이러한 집착에 의해 불평등의 지혜와 해탈법을 모두 대상으로서 집착하며, 참된 해탈을 구하지 않기 때문에 대치(大癡)라고 이름한 것이다.
‘중암에는 열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 즉 여덟 가지 종류의 자재와 열 가지의 대상(5유와 5대)에서 이미 퇴실(過失)하였을 경우, 이 때 가난한 이는 헤아려 말하기를, “나는 지금 빈궁하니, 자재와 여러 대상을 모두 다 상실해 버렸다”고 한다. 이렇게 분별하고서 열여덟 가지의 괴로움을 일으키니, 이러한 괴로움을 중암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맹암도 역시 열여덟 가지의 구분이 있다’에서, 열여덟 가지란 앞에서 말한 바와 마찬가지로 자재의 여덟 가지와 대상의 열 종류를 말한다. 즉 어떤 사람이 이러한 열여덟 가지를 갖추고 있다가 죽을 때에 이르러 생각하기를, ‘나는 지금 여덟 가지의 자재와 열 가지 대상을 버려야 하며, 옥졸이 나를 묶어 염라왕[閻王]의 처소로 데려갈 것이다’라고 한다. 즉 이러한 생각으로 인해 괴로움이 생겨나 상캬[僧佉]의 진리를 들을 수조차 없게 되기 때문에 맹암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의혹에는 이처럼 암등 다섯 가지로 분류되는 예순두 종류가 있는 것이다.
이제 무능의 구분에 대해 논설하리라.
11근이 손괴되었거나 十一根損壞
지혜의 장해(障害)를 무능이라고 하는데, 智害名無能
지혜의 장해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으니, 智害有十七
이와 반대되는 것이 기쁨과 성취이기 때문이다.51) 翻喜成就故
‘11근이 손괴되었다’고 함은, 이를테면 귀가 먹고, 앞을 못보고, 콧병이 나고, 손상되고, 피부가 헐고, 미처 광란하고, 말을 하지 못하고, 손이 어그러지고, 절름발이가 되고, 아기를 낳지 못하거나[石女] 남근이 없고[黃門], 배설기관이 막혀 위로 토해내는 것[秘上]을 말한다.52)
이러한 11근의 손괴를 어째서 무능이라고 말한 것인가?
귀가 먹어 청문할 수 없기 때문이며, 나아가 해탈을 획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유하자면 어떤 병에 걸린 귀머거리와도 같다. 즉 귀머거리에게 어떤 병이 더해져 친구에게 말하기를, “나는 참으로 고달프고 괴로우니, 마땅히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친구는 말하기를, “마땅히 상캬의 지혜를 향수한다면, 괴로움의 다함과 괴로움의 끝에 이르러 마침내 해탈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말하기를, “나는 지금 상캬의 지혜를 수지할 수 없다. 왜냐 하면 스승의 말씀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니, 말씀을 듣지 못하는데 지혜가 어디서 생겨날 것인가?”라고 하였던 것이다. 귀머거리와 마찬가지로 앞 못보는 맹인도 역시 그러하니, 기관이 허물어졌기 때문에 지혜를 배울만한 능력이 없으며, 나아가 해탈을 획득할 수도 없는 것이다.
‘지혜의 장해를 무능이라고 하는데, 지혜의 장해에는 열일곱 가지가 있다’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뒤에서 마땅히 논설할 것이다.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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